2024.05.14 (화)

서예전 '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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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 '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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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술을 많이 접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먼저이겠지만 ‘후원'의 이름으로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옛날 로마의 재상 마에케나스(Maecenas)의 문화예술에 대한 두터운 보호와 지원의 유래에서 오늘날 기업과 문화를 이어주는 ‘메세나(Mecenat)' 활동이 이어진 것처럼, 현대에는 문화예술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후원의 관계가 일차적인 상호관계로서뿐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의 토양을 일구고 미래를 건축해 나가는 데에 있어 근간을 이룰 만든 중요한 요소로 발전했다고 할 것이다.

 

열암 송정희 선생은 오늘날 열암체라는 서체의 일가를 이루기까지 고금의 모든 서체를 익히신 서예가로 정평이 높다. 서체 또한 묵향과 같이 짙고 깊어 고매한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오늘날 대표적인 서예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연암 송정희 선생을 만나보았다.

 

기자가 열암 선생께 저희 국악신문 명사를 찾아서라는 지면에 소개하고 초대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선생을 '내가 무슨 명사여' 그러나 부득불 찾아 뵙겠다는 기자의 고집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2월 4일 오후 3시로 약속시간 잡고 버스로 광화문 구세군 앞에서 내렸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이날은 푸근했다. 구세군 건물 옆길을 따라 골목길을 쭉 올라가니 선생이 계신 축구회관이 보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여니 묵향과 녹차향이 가득하다. 또한 사무실 곳곳에 선생의 작품과 괴암 괴석이 눈에 드려온다. 찻잔 위로 퍼져 가는 국악방송에서 마침 시조창이 은은하다. 반갑게 열암 선생이 따라 주는 녹차 한 모금하니, 입 안에 푸른 향이 고인다.  

 

기자와 열암 선생과 만남은 10년쯤 되어 보인다.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이춘희 선생님의 소개로 인사를 드렸다. 그때 주셨던 명함을 내보이자 선생은 깜짝 놀라시며 새로 주신다. 선생께 신문을 드리고 이 지면에 초대합니다. 라고 설명하니 그냥 세상사는 애기, 국악계 소식이나 얘기하자고 한다.

 

열암 선생은 자신이 또한 종이와 먹으로 스스로의 예술 탑을 쌓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주변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예술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온 판소리와 경·서도민요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남달라 오래전부터 주변 예술인들과 교류해 오면서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자가 처음 열암 선생을 뵙때도 이춘희 선생과 임이조 선생이 주최하는 청소년국악경연대회 후원 때문이었다. 그때 후원해 오던 대회는 지금까지 올곧은 청소년국악경연대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열암 선생은 6살 때 서예에 입문했으며 88년부터 3년간 연속 전국서예대전 특선입상과 한국작가협회 최우수작가상 등을 수상했으며, 93년 대전엑스포 제호와 충무군 이 순신 장군대첩비 등을 제작했다. 또한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동남아서예협회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97년에 한국청소년 건전문화육성 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와 한국전통문예진흥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03년 12월 열암 선생은 국립극장 남산이전 30주년을 맞아 국립극장 발전기금 모금에 동참한다. 선생이 45년간 연마한 서화작품을 기증하면서 "한편 기쁘고 한편 부끄럼이 앞선다. 나는 아시(兒時)부터 붓을 잡고 천금(千今) 40여년(餘年)을 이 서(書)의 길을 걸으면서 늘 느껴오던 것은 이 길이야말로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험한 외길로 가시밭길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길을 숙명(宿命)처럼 생각하고 내 목숨같이 사랑해 왔다”는 감회를 밝혔다.

이 무렵 국립극장에서는 2003년 12월 2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경사를 기념하고,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나의 길 우리소리' 라는 특별공연을 달오름극장에 올리기로 기획했다. 평소 판소리를 비롯해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열암 선생이 국립극장 발전을 위하고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당신의 분신(分身)과 같은 귀한 서예 작품을 기꺼이 기증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선생은 이에 앞서 1999년 11월 29일 죖고려대 100년 기념사업' 출범식에 서예작품 5000여점을 고려대 발전에 써달라며 기증하여 화제였다. 시가로 자그마치 200억원 상당에 이르는 서예 작품들이었다.  

구한말 고려대 전신인 보성 전문학교 설립에 앞장선 송병헌 선생의 손자인 열암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 평소 고려대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기증 배경을 설명했다.


열암 선생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소리를 좋아한 관계로 사람 방에는 소리 좀 한다는 분들은 항상 계셨다. 그래서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소리를 찾아다녔다.  이것이 소리에 대한 선생에 연(緣) 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고 한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런 한 정신 기조를 가진 선생은 97년에 (재)한국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을 설립하고 국악을 전공하는 장학사업과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근 10년을 이어온 사업은 국악을 전공하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다. 또한 장학사업 뿐만이 아니다.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서화(書畵)를 무대배경이나  프로그램에도 흔쾌히 내주시기도 하고 장래성 있는 국악인을 초대하여 격려하는 연희도 열어준다.

 

 요즘 선생은 "판소리보다는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즐겨듣고 공부한다고 한다. 한동안 판소리에 빠져 조상현 명창에게 소리도 배웠다는 열암 선생께 앞으로 계획을 질문하자. 여러 국악계 지인들과 약속한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작지만 죖악·가·무'를 제대로 가르치는 국악대학 설립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국악대학 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학은 큰 가르침의 전당인데 과연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열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한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애호가이다. 오전에 서재에 출근하면 바로 국악방송을 틀어놓고 청취한다. 오후 퇴근해야만 이 방송을 끈다.

그 열린 마음과 서예 예술을 통한 사회 환원활동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열암 송정희

˚ 캐나다 몬트리올 주립대학 박사과정 수료
˚ 모스크바 대학 연수(모스크바)
˚ 워싱턴 주립대학 연수(미국)
˚ 옥스퍼드 대학 연수(영국)
˚ 러시아 우라지보스톡 극동국립기술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취득
˚ 고려대학교 정책, ICP, 언론 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
˚ (재) 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 현 이사장
˚ 열암문화재단 설립자
˚ 한국전통문예진흥회 현 이사장
˚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심사위원)
˚ 대한민국 서예대전 특선 연 2회,
한국문인화대전 특선 1회
˚ 한국작가협회 최우수 작가상수상
˚ 서울시 초대작가
˚ 동남아 서예협회 심사위원장
˚ 대한민국 서화대전 심사위원장
˚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
° 한·일 서예협회 운영위원장
° 서울대 강사
°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국민재단 자문위원
° 한국인권위원회 자문위원
° 사랑실은 교통봉사대 특별자문위원
° 자유중국 장통충 기념관 초대전
° 일본 오사카 민단 초대전
° 우라지보스톡 러시아
제1회 고려인 문화의 날 행사
° 극동 국립기술대학교 부시킨극장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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