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오랑캐에 정절을 잃은 여인을 멸시하던 조선시대에 등장한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여자 영웅 박씨.
누가 썼는지 작가를 알 수 없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 영웅 소설 '박씨전'의 탄생 비화가 그럴듯한 상상력으로 완성돼 무대 위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지난 7일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박씨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소설 속 배경인 병자호란이라는 암흑기를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겪은 세 명의 여인을 무대 위에 주인공으로 삼았다.
극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세 여인 가은비, 매화, 계화가 "비참한 조선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노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강요받는 처지다. 사대부 가문의 며느리였던 가은비와 매화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면 집에서 쫓겨났다. 가은비의 몸종이었던 계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거처하는 동굴에 화를 피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인 '피화당'(避禍堂)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뮤지컬의 제목이기도 한 피화당은 '박씨전'에서 박씨가 추한 외모 때문에 자신을 박해하는 남편을 피해 머문 초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굴은 세 사람이 처한 현실만큼이나 어둡다. 가은비는 촛불에 의지해 사랑 이야기를 쓰고, 매화가 남장을 하고 저잣거리에 나가 이야기를 판다. 계화는 허드렛일을 도맡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비 후량이 이들을 찾아와 "사대부를 비웃는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청과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느니 백성과 나라를 지키자며 항복 문서를 작성한 최명길의 양자다. 명분만 내세우는 사대부들에게 비판받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름 없는 작가 선생'에게 글을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뮤지컬 안에서 작자 미상의 '박씨전'이 탄생한다. '박씨전'의 이야기는 극중극으로 펼쳐진다. 박씨가 신묘한 힘으로 청의 장수를 쓰러트리고,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얼굴로 자신을 구박하던 남편 앞에 당당하게 서는 모습은 가은비, 매화, 계화의 모습과 겹치면서 묘한 희열을 준다.
'여기, 피화당'은 '박씨전'을 단순히 각색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탄생 배경과 그 의미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되짚는다는 점에서 색다른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고전을 재탄생시키며 창작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이야기지만, 음악에 전반적으로 깔린 생기있는 리듬 덕에 극의 분위기는 너무 가라앉지 않는다. 진지한 인물들 사이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후량의 몸종 강아지와 희망을 품고 있는 계화 캐릭터도 비극적인 이야기 중간중간에 웃음을 더해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낸다.
다만 100분가량의 짧은 공연 시간 탓인지 가은비, 매화, 계화의 개별 서사는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정도여서 개별 캐릭터에 대한 감정 이입은 약한 편이다. 세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계기나 각자의 서사가 강화된다면 이들의 연대 역시 좀 더 의미를 갖게 될 듯하다.
한국문화예술의원회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으로 4월 14일까지 공연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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