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2023 프로젝트 컨템퍼러리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 공연을 개최했다.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은 전통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활동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된 동시대 전통공연예술을 선보이는 공연이다. 그 첫 무대로 10월 20일(금) 저녁 7시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현신, 초망자 박강이굿’이 열렸다.
창작탈춤패 지기금지는 전통탈춤의 미학양식을 기초로 오늘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과 시대상을 반영한 창작 탈춤 공연을 제작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탈춤의 세계화를 꿈꾸는 창작탈춤 마당극 전문단체다. ‘현신, 초망자 박강이 굿’은 부산 기장 오구굿 중 초망자굿을 바탕으로 한 창작 탈춤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강주룡, 이화림과 제주 해녀 김옥련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 여성 운동가들의 삶을 시와 노래, 춤, 그리고 그림으로써 환생시켜냈다. 무가, 무악, 무구, 탈 등을 활용해 신내림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예정이라 하여 무대에서 보는 굿판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관람하였다.
무대의 우측에 악기 여러 대가 놓여있었고, 곧 7명의 악사가 나와 자리했다. 해금의 거칠고 덤덤한 경기제 선율과 함께, 부산의 섬을 배경으로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동래여중, 일본 조선학교, 일본여중 학생들로, 춤추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였다. 동래여중 학생이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각자 춤을 선보인 후 박차정 선생의 동상 앞에서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며 함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강점기 시대를 이야기하고, 마음 아파하며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내용의 흐름은 어떻게 보면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었겠으나, 무언가 어색함이 묻어났다. 학생들이 모이게 된 경로와 소개, 춤을 추는 장면은 억지로 넣은 듯 자연스럽지 못해 아쉬웠다.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대중음악과 배경 사진도 흐름이 끊겨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무엇보다 이 세 명의 학생이 등장한 배경은 이후 나오는 굿판 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 무대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했더라면 더욱 깔끔한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그램상 셋째 마당부터 각각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굿판 무대가 시작되었다. 첫째거리는 강주룡굿이었다. 오래된 테이프에서 나오는 듯한 지직거리는 해금 소리가 무대를 감싸며, 흑백의 바다 영상이 깔렸다. 바다는 파도와 소용돌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강주룡 선생을 연기한 무용수가 빨간 천을 들고 등장했고, 강주룡 선생에 대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2,300명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을밀대 지붕 위에 올랐다는 강주룡 선생. 해금의 러프한 선율과 타악 연주 위에 무용수는 감성적인 현대무용을 선보였다.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태평소가 등장하면서부터 무용수는 빨간 천을 활용하여 더욱 힘 있는 몸짓으로 간절한 염원을 드러냈다. 강주룡 선생의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둘째거리는 제주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해녀, 김옥련 선생을 위한 김옥련굿이었다. 제주도에는 목숨을 걸고 억척같이 물질하는 해녀들이 있었다. 1932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해녀 항일투쟁이 그것이다. 수천 명의 제주 해녀들은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맞서 3개월간 항쟁하였고, ‘제주 잠녀 항일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 김옥련이라는 해녀가 있었다. 김옥련 해녀를 표현한 무용수는 제주의 해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부르던 민요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등장하였다. 악사들이 이어도사나 음악에 맞추어 추임새를 넣었고, 해금의 간드러지는 선율이 매력적으로 연주되었다.
그 후 제주 민요 ‘너영나영’에 이어 무용수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해녀를 형상화하는 춤을 추고, 비 내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극단적이며 처절한 몸짓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감성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이때 특히 굿 반주 음악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조금의 오싹함을 자아내는 종소리와 쓰러지고도 계속 다시 일어나는 무용수의 모습이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김옥련 해녀는, 일어나고 쓰러지고를 반복하다 우뚝 일어나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당당히 퇴장했다.
셋째거리는 부녀자의 몸으로 투쟁의 일선행을 결행한 이화림 선생을 기리는 이화림굿이었다. 가족을 두고 어디 가냐며, 후회하지 않겠냐는 한 악사의 물음으로 시작한 이 무대는, ‘후퇴할 이유도 없고,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이화림 선생의 말로 열렸다. 강인한 눈빛을 가진 백호를 배경으로 반복적인 징 사운드와 함께 힘 있고 고상한 무용수의 춤이 시작됐다. 그의 춤은 마치 호랑이 같았고, 그 춤 위에는 실로 호랑이 같은 목소리의 중후한 남성 악사의 구음이 얹어졌다. 이 구음은 특히 평소에 무대에서 많이 듣지 못하던 느낌의 결이라 흥미로웠다. 시나위나 무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던 덤덤한 구음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우는 듯 질러내고 소리치는 날것의 구음이었다. 조금의 물러섬도 없는, 뚝심 있고 강한 구음과 춤. 그들은 멋 부리지 않았고,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용맹하고 강인한 호랑이였다.
넷째거리 ‘박차정굿’은 광복군을 상징하는 행진곡과 함께 시작되었다. 네 명의 탈꾼이 천천히 한 사람을 들고 등장해 무대에 내려놓고, 피 묻은 흰 적삼을 둔 채 퇴장했다. 기묘했다. 무대에 덩그러니 놓인 사람은 죽은 자였다. 그를 위한 망자굿(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는 굿)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죽은 자는 관절을 꺾어가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기괴하면서도 숨을 멈추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난 자는 박차정 선생의 탈을 쓰고 있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무대를 보며 든 생각은, ‘무서울 정도로 민속적이다’는 것이었다. 적삼을 천천히 들어 입고 진짜 망자가 되살아나듯 춤을 추는 장면과 날것의 굿판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조금의 두려움까지 들 정도로 강렬했고, ‘피가 말라붙은 적삼’을 선택하며 뜨겁게 최전선에서 싸운 박차정 선생을 나타낸 강한 표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용수의 과잉된 감정 연기와 내레이션, 그리고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신파 영화 스타일의 배경과 오케스트라 음악이 뜬금없게 느껴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영화적 효과로 감성을 자극하려고 한 것 같았으나, 오히려 민속적인 색채감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바뀌어 분위기가 붕 떠버린 느낌을 받았다.
네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위한 굿거리가 끝나고, 신받이꾼 다섯 명이 대나무를 들고 나와 신을 받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섯 신받이꾼의 몸짓은 간절하고 절도 있으며 또 한국적이어서, 그 아름다운 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후 김복동 할머니의 탈을 쓴 배우가 나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리플렛을 통해 이 전 춤이 신받이꾼들에게 점차 격렬한 집단 빙의가 일어나고, 여성 독립투사들을 청혼하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무대만으로는 내용을 알기 어려워 갑작스러운 전개로 이어진 장면에 아쉬움이 남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한 악사와 말을 주고받으며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했다. 그의 몰입도 있는 연기에 관객들 모두 가슴 아파하고 참담한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무대는 할머니의 노래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 공연은, 말 그대로 ‘예술’로 말하는 ‘역사’였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를 예술이 굿과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었고, 관객들은 그를 통해 어떠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의 힘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의 전개와 감정을 자극적으로 강요하는 듯한 표현, 과잉된 무대 배경 연출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여성 독립운동가들, 더 나아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전통적인 색채로 기억하며, 기릴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공연은 훌륭했다. 예술가들의 더 많은 다양한 시도와 단단한 연출을 통해, 전통으로 역사를 표현할 힘이 펼쳐지기를, 그래서 전통과 예술의 힘이 이 나라에 오래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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