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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21회 섬진강국제실험예술제 ‘글로컬 아트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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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21회 섬진강국제실험예술제 ‘글로컬 아트 웨이브',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12개국 해외 아티스트와 국내 50여 팀 참가

  • 특집부
  • 등록 2023.10.15 11:38
  • 조회수 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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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발/ 예술연구소 '육감도'

 

곡성의 들판을 살찌우는 실험예술제의 힘

 

2002년부터 시작된 '한국실험예술제'가 제주도를 거쳐 '섬진강 국제실험예술제'로 펼쳐진 지 3회째가 되었다.

'실험예술제'는 세계미술사에 기록될만한 업적을 가진 국제적 명성의 예술제이고 일반적 시각으로 볼 때는 파격적이거나 생경한 부분도 있어 3만 명이 안 되는 작은 군에서 잘 품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예술제를 품은 혜안의 결과물들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여물어져 가는 듯하며, 더 나은 미래의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 기운의 꿈틀거림이 서서히 파동, 물결을 만들고 있음이 느껴져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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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실험예술의 쓸모에 대하여

 

실험예술, 전위예술은 "모든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전적인 자유”이고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서의 창조의 의지”이다. 이때 "전위의 ‘정신’은 순수한 정신상태로 머무르며 ‘창조된 것’”, 완결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그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

 

즉 전위는 ‘가능성’, 가능태로서 어떤 결과물로도 나올 수 있는 물렁물렁하고 유동적인 것이다. 창작의 마무리, 완결은 또 하나의 관습, 틀, 전통 등의 제약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실험예술, 전위예술은 언제나 ‘모색 중’, ‘실험 중’인 것이다.

 

모든 틀을 거부하고 순수한 정신상태로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것이 실험예술이다. 그래서 실험예술제는 무경계, 혼용과 융합성, 즉흥성, 우연성, 일시성, 현장성의 특성을 갖는다.

실험예술제의 실험예술은 첫해, 출발부터 행위미술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기존 전통적 미술작품이 아니고 실연 후 사진과 영상만 남는 탈물질의 예술제였다. 물질에서 벗어난 탈물질, 그 무소유의 자유로움은 정신의 고양과 몸의 감각을 더욱 일깨우게 된다. 이로써 행위자나 관람자는 인간 본능이 갈구하는 몸과 마음의 자유, 해방감, 감각의 절정(쾌감)을 맛보게 된다.

 

또한, 행위미술은 개념미술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므로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이 예술을 통한 사유는 ‘세상을 보는 눈’을 확장시켜 준다. 예술작품은 우리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하는 ‘새로운 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다른 말로 ‘철학’이다. 즉 이 실험예술과 함께 하는 것은 철학적 인간의 삶으로 인도하게 한다는 것이다.

 

행위미술의 실연이나 타 장르의 공연이든 한번 하고 사라지는 이 시간예술의 ‘탈 물질’은 무소유와 무위자연사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실험예술제가 자연에서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생명 존중, 환경 보존’ 의지가 드러나고 ‘생명’과 ‘평화’를 말하게 된다. 그래서 올해 주제인 ‘물결’은 ‘예술 물결’인 동시에 ‘생명 평화의 물결’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담은 예술 물결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이들을 초라하게 만들어 그들을 변화시키는 자극제가 되는 것이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은 관습, 규범, 틀을 벗어나는 것이며, 그 벗어남은 항시 ‘새로움’을 낳는다. 그 새로움은 무한한 열림을 의미한다. 실험예술의 운명은 언제나 새로움이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창의적인 발상은 좀 더 나은 미래로 나가는 지름길을 연다. 그리하여 그 예술이 우리의 정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 영향을 미쳐 항시 지금보다는 보다 나은 삶으로의 이행을 북돋는 비료 같은 것이 된다.

 

이렇듯 실험예술은 우리 미래의 더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매우 쓸모있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루이 아라공은 벌써 100년 전에 전위예술(실험예술)의 ‘쓸모’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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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인 성격을 보존해야 하며 –중략- 예술은 항상 주어진 것의 청산이다. 그것은 움직임이요, 미래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생활의 변화, 정신과 과학의 발견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다.”

 

넘나들고 스며들며 ‘대동세상’ 꿈꾸는 이타적 예술제

 

실험예술제는 무경계, 혼용, 융합 예술제이다. 예술 장르 간 경계가 없다. 무용가, 시인, 행위미술가가 하나의 작품을 발표하고, 즉흥 음악이 펼쳐지는 가운데, 무용수가 춤을 추고, 행위미술가가 행위를 한다. 구음과 악기 연주가 만나고, 전통 악기와 전자 악기가 만나고, 동서양의 예술이 한 무대에 있다.

 

이번 실험예술제에는 헤어아티스트(미용사)의 공연과 행위미술가의 실연이 한 공간에서 이뤄졌다. 코믹한 저글링 공연의 다음 공연은 실험음악가와 보이스 퍼포먼서(소리 행위미술가)가 함께 하는 공연이 이어졌다. 플라멩코 기타와 우리의 민요 소리가 함께하는 무대도 있었다.

 

장르의 구분, 경계 없는 공연이 이뤄졌다. 각각의 공연 서너 개가 무대와 무대 주변에서 동시에 진행되기도 하였고, 그날그날의 마지막 공연은 참여 예술가들이 대거 자진 참여하여 함께 하는 대동 공연 형식이 되었다. 공연 중간중간에도 리듬이나 흥에 받쳐 공연 무대에 올라 신명 나게 동화되었다. 이렇게 장르 간의 경계가 없이 서로 조화롭게 넘나들었으며 스며들었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의 조화로운 호흡이었다. 이런 융합, 혼용의 자유로운 형식은 ‘열린 마음’에서 가능한 이 예술제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늘 그래왔지만, 이번 실험예술제에도 관객석이 고정된 무대보다 마당형, 또는 마당조차 없는 현장 그 자체에서 공연하였다. 서울에서는 도로의 건널목에서부터 락카페, 카페, 극장, 전시장 등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예술을 펼쳤다.

 

이번에도 백일홍이 심어진 공원(동화정원)에서, 소가 염소가 있는 축사에서, 곡성 기차마을 전통시장에서 공연이 이뤄졌다. ‘폐농기구 조형 작품 만들기’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이뤄졌다.


이렇듯 협업 공연이든, 각기 공연이든 서로가 함께 어울려 실험예술제라는 커다란 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고, 그 예술이 펼쳐지는 것이 주민과 격리된 실내 무대가 아닌 공원, 축사, 시장, 마을 등 주민들 바로 곁에서 그들의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예술제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하는 홍익인간의 이타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존재의 본성을 회복하고, 만물일체 되어, 차별 없고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모두 어울려 노니는 이상사회, 즉 대동세계를 현실화 시키고자 하는 지향점을 향해 가고자 하고 있다.

 

‘공공예술’,‘사회예술’로의 모색

 

"사회예술은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이며, 과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나아가 사회예술은 사회적 실천과 예술적 실천을 통합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융합하는 예술이다.” 이러한 사회예술의 테두리 안에는 건축물에 설치된 회화 조각의 공공미술, 시장 안에 작가들이 거주하며 작품을 만들고 시장 활성화를 시도하는 프로그램, 예술을 활용한 사회운동, 벽화 사업, 9.11 기념관 같은 추모 설치작품들도 포함된다.

 

또한, 축제나 예술행사도 넓은 의미의 사회예술이라 할 수 있다. 상품 가치와 사용가치의 경제적 교환만이 숭상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가치가 없는 예술작품은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정신과 감성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가치의 교환, 즉 감성의 교환가치를 주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지역 예술인의 참가, 지역민의 삶의 현장에서 펼치는 프로그램이 들어있는 이번 실험예술제도 지역사회와 연계하고, 함께하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회예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폐농기구를 활용한 조형작품 만들기 프로그램에서는 사회예술적 성격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지역사회에 밀착되며 지역사회의 공공 이익에 더 도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험예술이라는 큰 밭에 ‘공공예술’, ‘사회예술’ 성격을 더 강조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개인적으로 사회예술 하면 먼저 ‘소 퍼포먼스’의 사진이 떠오른다. 1998년 정주영이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북하는 장관은 커다란 사회적 사건임과 동시에 ‘사회적 퍼포먼스’이고 기억할만한 ‘사회예술’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기록할만한 예술사적 사회예술은 요셉 보이스의 <7천 그루의 참나무>라는 작품(프로젝트)이다. 카셀시에 나무 7천 그루를 심는 사회 운동적 성격의 개념미술이고, 환경예술, 행위미술이며 ‘사회 조각’이라 칭할 수 있다. 첫 나무 외의 나무는 기부한 시민들이 공동참여자로 이식을 진행했다. 이때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 옆에 일정 크기의 현무암 바위를 세우도록 했는데, 지금 이 장소들은 관광자원이 되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엄청난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예술가와 사회가 더불어 만들어나가는 사회, 개인의 이익을 떠나 공동의 선(이익)을 위해 서로 어깨를 두르며(소통) 아름다운 세상으로 함께 걸어 나가는 모범적인 사례로 보인다. 이런 것이 진정한 ‘공공예술’이고 ‘사회예술’이다.

 

사회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죽곡면 상한마을에서 실시한 [폐농기구 활용 조형작품 만들기] 워크숍은 참신한 기획이었다. 삽, 괭이, 낫, 호미 등 쓰임을 다한 온갖 농기구들을 이용하여 작가 3인이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낸 조각, 설치작품은 미적 요소와 의미요소가 풍성히 담긴 아주 우수한 공공미술, 사회예술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보관과 지속성, 관광자원화 등도 고려해보아야 하고, 탈물질과 무소유의 철학을 가진 실험예술제가 이런 물질(설치조각)작품을 어느 만큼 수용하며 나아갈지도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한편, 무소유와 자유로운 해방감, 정신의 고양을 중시하는 실험예술제, 즉 무형의 가치가 더 크고 위대함을 보여주는 이 실험예술제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해 가져가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일상에 지쳐있는 지역민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어 삶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이 예술제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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