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특별기고] 양소당(養素堂) 표지판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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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양소당(養素堂) 표지판을 보고

안동 김씨 대종택 방문 후기
“억울한 형님, 답답한 후손들”

  • 특집부
  • 등록 2023.05.09 11:11
  • 조회수 7,126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안내문을 써서 종가 사랑채 앞에다 표지판을 세웠을까?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 주체는 경상북도일 것이고 안동시에 있는 문화재이니 안동시도 그 당사자일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인 종손과 동성마을에 사는 일족들도 읽어보지 않아서 몰랐다는 정도로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갑작스럽게 이런 민망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안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종가 중의 한 곳인 안동 김씨 대종택인 양소당(養素堂)’의 안내 표지판에 단순한 오자(誤字) 수준이 아닌 몇 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서다.


물론 글을 쓸 때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잘못이 있을 수는 있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 속언까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금석문에 버금가는 지정문화재 안내판은 그 경우가 다르다. 권위에 따른 파급효과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담긴 내용은 물론 글자 한 자까지도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더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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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金氏宗宅 안내판

 

먼저 현재 종택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영문 생략).


安東金氏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5호)


김씨 종택은 조선 전기 때 문신이었던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의 종갓집이다. 이 집이 위치한 소산리는 김영수의 할아버지인 김삼근(金三近, 1390-1465)15세기경에 입향한 이래 안동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김영수의 아들은 평양부 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고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이후 김영수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안동 김씨 종택은 자형의 기와집으로 남서향이다. 대문은 없으며 사랑채와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왼쪽의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왼쪽에 방을 두었고, 오른쪽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사랑채와 대청 사이에는 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필자 또한 안동의 문화재라는 책을 몇 차례 간행한 터라 안내판의 잘못된 내용을 본 뒤 돌아와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1996년 간(), 미흡한 내용이었지만 현행 안내판의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욱 안도한 것은, 문화재 안내란에 김삼근(金三近)-김계권(金係權)과 그 아랫대인 학조(學祖, 出家), 영전(永銓, 司憲府 監察), 영균(永勻, 進士), 영추(永錘, 水原府使), 영수(永銖, 司憲府 掌令) 오형제, 그리고 영()과 번(), () 삼형제까지 간략하나마 계보(系譜)를 표로 만들어 소개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계권의 동생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도 빠뜨리지 않았다. 보백당은 안동 김씨 가문의 최초 문과 급제자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필자 역시 "이 건물은 성종 때의 명신 양소당 김영수 공의 종가댁이다.”라고 소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 대종중 사무총장의 자문을 받은 뒤 그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졌다. 안내판을 포함한 그간의 소개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양소당 김영수라고 썼기 때문이다. ‘양소당(養素堂)’은 김영수의 12대손으로 삼당 김영과 창균 김기보로 이어지는 소산 안동 김씨 대종가의 종통을 이은 인물인 동야(東埜) 김양진(金養根, 1734-1799)이 특별히 종갓집의 당호(堂號)로 그렇게 지은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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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당 사랑채에서 종손과 담소하는 장면

 

가장 큰 잘못 만을 우선 잡아서 안내판의 첫 문장을 다시 쓴다면, "이 집은 안동 김씨 대종택으로, 시조의 11세인 장령공 김영수가 처음으로 지었다. 그의 12세손 동야 김양근에 이르러서 당호(堂號)양소당(養素堂)’이라 명명하였다.” 정도가 될 것이다. 시급히 수정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다소 장황하게 예전에 펴냈던 책 내용까지 들춰낸 것은, 안내판에서 안동 김씨 종가를 소개하면서 김영수의 삼형제 가운데 둘째인 김번(金璠) 만을 들어서 최대의 문벌로 성장했던 그의 후대를 이 종가가 잇고 있다고 표현해 계보상의 중대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는 환부역조(換父易祖)’. 의당 장남인 삼당공(三塘公) 김영(金瑛, 14751528)을 소개한 뒤 특히 현달(顯達)했던 둘째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직계 후손들로 이어갔어야 했다. 이쯤에서 정리한다면, 안동 김씨 종가는 삼당공이지 서윤공의 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백(淸白)으로 전가(傳家)안동 김씨 가문에서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김번은 중종8(1513)35세로 문과에 급제해 전적, 경기도사, 이조정랑, 평양서윤, 시강원 문학 등 직을 지낸 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직에서는 탁월한 경륜(經綸), 외직에서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전범(典範)을 보이는 등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 후손들 가운데 문과 급제자 162, 생원 168, 진사 236, 16분의 정승, 55분의 판서, 8분의 대제학, 3분의 왕비를 배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가는 특별한 경우(養子)가 아니라면 맏집으로 내려오는 것이 상례다. 그렇다면 김영(金瑛)이란 분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이처럼 종가 안내문에서 완전히 빠졌고, 그 후손들 또한 전혀 소개되지 않았을까?


삼당공 김영은 김영수의 장자(長子)로서 학덕은 물론 관료로서의 업적까지 두루 갖춘 분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후손들은 반가(班家)의 전통을 수립해 안동 소산(素山) 본향(本鄕)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21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뒤 병인년 별시(연산군12, 1506) 32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4살 적은 서윤공보다 7년 전에 이룬 대과 급제였다. 그 뒤 수찬, 정언, 교리, 김제군수, 장령, 동부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두루 지냈다. 삼당이 급제한 문과는 연산군 당시에 치러진 마지막 대과였는데, 동방(同榜)으로는 김안로(金安老, 壯元)가 있다.

 

양소당 현판

 

삼당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당한 분들의 억울한 죄를 회복시켜 줄 것을 상소하는 등 바른 일에 앞장섰던 강직한 선비요 관료로 살다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삼당공과 그 아우인 서윤공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삼당공은 청풍계(淸楓溪), 서윤공은 장의동(莊義洞)으로 나누어 살다가 후일 삼당공은 직계 자손에게 이 터를 물려준 뒤 이곳을 떠나 안동 본향으로 귀거래(歸去來)했다.


삼당공의 후손 가운데 저명한 이로는, 손자에 창균(蒼筠) 김기보(金基報, 15311588)가 있는데, 그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로 학문과 행검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인물로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이 있는데 30세에 문과에 급제해 형조참의를 지내는 등 조야(朝野)에 널리 드러났다. 이렇기 때문에 결코 본향을 지킨 맏집이 종가 안내에서 누락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삼당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소산(素山)을 중심으로 한 안동에는 서윤공 직계 후손들이 단 한 집도 세거(世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억울한 형님에다 답답한 후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지적할 부분은, 앞의 사안에 비하면 다소간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알만한 이들조차 잘못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까 해서다. 안내판의 내용 중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부분이다. ‘고손고손(高孫)’이라고 쓴 것일 터. 서윤공 김번의 고손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고손현손(玄孫)’이라고 쓰는 것이 바른 표기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조(高祖)와 상대적인 고손(高孫)으로 쓸 수 있으니 잘못이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사랑방에서 들은 것만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당한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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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당 사랑 마루


예를 들어 보이겠다. 명재유고번역본의 주()에 보면, ‘문숙공(文肅公)’을 설명하면서, "시조 윤신달의 고손(高孫)인 윤관(尹瓘)으로, 문숙은 그의 시호이다.”라 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번역본 주석에서도 또한 "서영보(徐榮輔)가 서종태(徐宗泰)의 고손(高孫)이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라 했다. 권위 있는 서책에조차 고손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아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7 문자부(文字部)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릇 고조(高祖)라는 것은 고대(高大, 높고 큼)에서, 현손(玄孫)은 현원(玄遠, 아득하고 멈)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高祖)는 있어도 고손(高孫)은 없고, 현손(玄孫)은 있지만 현조(玄祖)는 없다. 그래서 지금 현조(玄祖)니 고손(高孫)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凡稱高祖者取其高大之義玄孫者取其玄遠之義故語曰有高祖 而無高孫이요 有玄孫 而無玄祖今謂玄祖高孫者誤矣)”


첨언한다면,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란 부분에서 음서(蔭敍)를 주석으로 처리해 안내문 하단에 작은 글씨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의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라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오늘날의 별정직 공무원과 같은 것이나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영천군수는 영천군수(榮川郡守)인지 영천군수(永川郡守)인지 분명하지 않다. 장령공 김영수는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한자로 병기(倂記)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