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국악신문] (69)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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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69)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1

이만유 문경사랑 69

  • 특집부
  • 등록 2023.05.06 07:30
  • 조회수 5,046

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옛길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나 고개 위에 서낭당이 있고 장승이 서 있다. 문경에도 신현리 돌고개와 문경새재 옛길을 비롯해 마을마다 토지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요즈음 장승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문경시 공평동 장성백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 입구와 영순면 금림리, 산양면 진정리 등 일부에서만 볼 수 있다.

 

서낭당은 대개 마을 입구에 있어 마을에 들어오는 액()이나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곳이며. 동제(洞祭) 혹은 마을굿, 당제, 당신제 등의 이름으로 마을마다 미리 정해져 있는 날에 주기적으로 제사나 굿을 여는데 그 주된 기원 역시 제액초복(除厄招福, 액을 막고 복을 부름)을 비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서낭당은 신성한 곳이며, 서낭당 앞에서는 부정한 행동이나 말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특히 서낭당의 신목(神木)에 해를 가하거나 쌓인 돌이나 돌탑을 훼손시키면 재앙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며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하고, 침을 세 번 뱉는 행위를 하면 재수가 좋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으며 돌탑이 완성되면 돌을 정성스럽게 쌓은 사람들의 소원도 다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목이 오래되어 수명을 다해 고사했는데도 베어내지 못하는 것은 나무를 베는 사람이 큰 병이 들거나 급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서낭나무와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累石壇)이 함께 있는 것, 둘째는 누석단만 있는 것, 셋째는 서낭나무만 있는 것, 넷째는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것, 다섯째는 입석만 있는 것이다. 또 서낭나무에는 때 묻은 저고리, 동정, 백지(창호지), 모발, 기혈(器血-그릇에 담은 피), 엽전이나 재물, 베 조각, 5색 비단 조각, 짚신, 짚으로 만든 방망이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각각의 물건들에는 기원의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환자가 입던 저고리 동정을 거는 것은 서낭신이 병을 거두어 가라는 뜻이었고, 백지를 거는 것은 행운과 초복의 기원이며, 베 조각은 아이의 장수를 비는 것이며, 엽전이나 재물을 바치는 것은 재리(財利)를 많이 획득하기 위해서며, 치마를 걸어 놓는 것은 분가할 때 나쁜 귀신이 못 따라오게 하기 위함이며, 오색 천을 다는 것은 서낭신께 드리는 예단이다.

 

돌고개 성황당과 신목.jpg
돌고개 성황당과 신목. (사진=이만유)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의 본딧말이라고 하나 일부 학자들은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지만 엄격히 구분하자면 성황당은 동네 뒷산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있고 한 칸짜리 당집으로 지어져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것이며, 서낭당은 동네 어귀에 돌무더기, 나무 등으로 모시고 오색천이나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을 감고 있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성황은 마을을 보호하고 지키는 군주(君主)의 위치이고 서낭은 마을 어귀에서 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병사의 위치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 서낭당, 성황당(城隍堂), 할미당(전라남도), 천왕당(경상북도), 국사당(國師堂-평안도) 등으로 불린다.

 

장승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웠는데 조선 태종 14년에 10리마다 소후(小堠)30리마다 대후 (大堠)를 설치하여 1(一息)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하였으며, 나무를 심거나 돌무더기를 쌓도록 하였고 장승도 그 일종으로 나그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한편 나쁜 귀신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했다.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치켜 올라간 눈, 큼지막한 주먹코,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해학적이면서도 무서운 느낌을 준다. 이런 무서운 얼굴에는 악귀나 병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소박한 뜻이 담겨 있다. 장승은 주로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는데 대다수가 남자 장승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장승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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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면 금림리 장승 (사진=이만유)

 

서낭당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서낭 신앙이 전래한 것은 고려 문종 때로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神號)를 가봉(加封)하였던 일도 있었고,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서낭당이 생긴 유래는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가장 크며, 서낭 신앙에는 내세관이 없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일설에는 서낭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분명치 않으며 옛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부인과 얽힌 서낭당 유래 전설이 남아 있다.

 

강태공은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나라 시조가 되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을 때 매일 같이 낚시만 하고 다니는 강태공이 집안일은 돌보지 않아 살기가 힘든 아내가 항시 불평이 가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의 부인이 멍석에 널어놓은 피가 소낙비로 다 떠내려가는데도 강태공은 이를 덮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아내가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 강태공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고사한 동신목.jpg
고사한 동신목 (사진=이만유)

 

강태공이 천하를 주유하는 중에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문왕을 만났고 언행이 남다른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재상이 된 강태공이 금의환향 돌아오는 길에 들에서 피를 뜯던 한 여인이 강태공을 찾아와 나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강태공을 버리고 떠난 아내였다. 강태공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 오게 한 후 물을 땅에 부어 버리면서 하는 말이 "어디를 가지 말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이 바가지에 물이 가득하도록 담으면 너와 같이 살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의 원을 들어줄 수 없다하니, 여인이 "여보 우린 그때 가난해서 피죽으로 연명하고 살았는데 당신과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이 다 떠내려가는데도 그냥 책만 읽고 있었던 당신도 잘한 것이 없으니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였으나 강태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아내는 어떻게 하든 바가지에 물을 채워 함께 살아 보려고 흐르는 눈물과 침을 바가지에 담기 시작했고,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했으나, 끝내 강태공이 원하는 만큼은 채워지지 않았고 무심한 듯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리고 여인은 그만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강태공은 죽은 옛 아내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고, 죽은 여인의 시신을 치워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자 지나는 길손들이 하나둘 돌을 던져 그의 시신을 덮어 주게 되었고, 그렇게 쌓인 돌무더기가 서낭당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한을 품고 죽은 강태공의 아내가 침과 눈물로도 못다 채운 바가지에 침을 뱉어 주어 죽어서라도 그 한을 풀도록 하겠다며 지금도 서낭당을 지나는 길손들은 서낭당에 돌 셋을 던져 탑을 쌓아 주고 침을 세 번 뱉고 가는 풍습을 남기게 된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