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토)

[기자의 객석] 뮤지컬‘서편제’, ‘한(恨)’의 현대적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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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객석] 뮤지컬‘서편제’, ‘한(恨)’의 현대적 재해석

‘동호’의 ‘누이(소리)’를 찾는 여정
누구나 애타게 찾는 자신만의 ‘소리’가 있다
소리꾼 배우들의 열연과 폭넓은 음악적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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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단색 톤의 하늘거리는 한지로 수놓아져 있다. 떠도는 유랑생활과 소리를 찾아 나서는 인물들의 불안한 관계를 반영하는 듯하다. 뮤지컬서편제의 무대이다.


영화의 미장센(배경, 시각적 요소) 대신, 최소화한 세트와 영상으로 시공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고, 세트의 한지 재질감은 서편제전체를 관통하는 전통의 정서(, 그리움)를 일관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동할 수 없는 무대의 한계는 조명과 어우러진 영상은 물론, 배우의 집중도 있는 열연과 서사와 인물을 반영하는 곡들로 채워져,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초반에 등장하는 노년의 송화’, 이자람 배우의 첫 대사는 굵직하고 나지막하다. 소리꾼으로서의 지조를 오롯이 보여주는 강인함 그 자체이다. 그녀의 묵직한 한마디에 관객은 처음부터 편안하게 송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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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뮤지컬 '서편제' 에서 송화 역을 맡은 소리꾼 이자람이 소리의 여정을 찾아가는 장면. (사진= PAGE1). 2022.10.18.

 

뮤지컬서편제’, ‘소리의 가치를 찾아가다


초반부터 극을 이끌고 있는 가치가 있다. 바로 소리’. 극은 일관되게 동호의 누이 송화로 상징되는 소리를 찾는 여정이다. 그가 애타게 찾던 소리의 의미는 시기마다 다르다, 유년기에는 햇덩이로 표현되는 아버지의 억압, 가출 후 젊은 시절의 소리는 자유롭게 발산하는 젊음과 열정’, 중년의 소리는 자신 삶의 태초부터 풀지 못했던 그리움이자 한이었다. ‘소리는 또한 유봉, 송화, 동호에게 각기 다른 의미이면서, 살아가는 중심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인물 간 갈등이 시작되고, 이별하고 그리워하는 극의 중심 소재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극이 보여주는 소리의 의미는 어린 시절 늘 소망하고 갈망했던, 어쩌면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삶을 아우르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자 지향점이다. 누구는 그것을 꿈이라고, 그리움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있었기에 우리는 고민하고, 때로는 고뇌하며, 노력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역시, 그들의 소리와 같은 가치가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


갈등을 풀어가는 또 하나의 중심 서사는 바로 시간이다. 작품이 삶의 일대기를 다루고, 액자구성을 취한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1막 마지막 곡 ‘시간이 가면’(넘버 22)에서는 각기 다른 가치로 시간을 말하고 있고, ‘혼자 있는 자유’(넘버 03) 곡의 시간은 절로 가고, 넌 자랄 거야···.라는 가사에서도 동호는 엄마와 교감하며, 그리움의 실체와 소리를 찾아간다. 그 가운데 관객은 인물이 추구한 궁극의 소리를 찾는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기차에 함께 탄다.


소소한 극적 장치


특히, 작품의 감동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과거-현재의 송화, 동호와 함께하는 노래하는 장면들을 활용한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과거의 인물들에게 투영시키며,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 또 하나, 무대에서 그림자로 투영되는 자신의 아련한 모습은 관객에게 어린 시절의 인물을 떠올리고, 인물의 애틋한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인물과 배우 사이


송화, ‘소리그 자체

동호가 찾던 소리의 가치를 가진 실체이며, 유봉이 추구하던 완벽한 소리의 대상이며, 자기 자신 자체가 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실체이기도 하다. 사사로운 개인의 욕망 따위는 과감히 버리고,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인물. 늘 그 자리에 있었기에, 모두가 추구했던 가치를 품은 대상, 극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이자람이라는 소리꾼은 송화라는 인물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하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능수능란한 창법, 때로는 강렬한 창법으로 을 표출하는 절규(1막끝), 마지막 장면 남매의 심청가'(넘버 37, 심봉사 눈 뜨는 대목)에서는 노년의 송화의 한() 서린 감성은 물론, 그녀의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르익은 소리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배우의 완성도 높은 노래와 연기는 보는 이를 편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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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뮤지컬 '서편제'에서 소리꾼 김준수 (사진= PAGE1). 2022.10.18.

 

동호, 소리와 소리꾼 김준수를 알리다.

이자람에 이어 소리꾼 배우로서 참여했다. 국립창극단 10년차 단원답게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국악과 대중음악의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동호의 오디션 장면에서, 짧은 판소리 대목에도(‘춘향가 중 어사출도대목) 숨길 수 없는 소리꾼 본능과 탄탄한 실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들의 박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남매의 사랑가에서, 풀이 죽은 동호가 누이의 설득에 못 이겨 무심한 듯, 절묘하게 맞추는 북장단은 극의 소소한 재미를 주며, 소리꾼 김준수를 한 번 더 각인시켰을 장면이다. 마지막 남매의 심청가에서 고수로서 누이의 소리를 마주하며 받쳐주는 장단과 추임새는 극의 몰입도를 더하는 것은 물론, 판소리에서 고수라는 역할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대중에게 일깨워주기도 했다.

 

유봉, 광기어린 열정은 어긋난 부정으로

그의 소리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을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외로움을 알면서도, 그것마저 외면하고 완벽한 소리만을 추구하는 자유를 택했다. 동호 엄마가 동호에게 부르는 노래 혼자 있는 자유’(넘버 03) , ‘혼자 있는 자유는, 혼자 있는 외로움이라는 가사는 오히려 유봉에게 어울릴 지도 모른다.

극을 보는 내내 소리에 집착하는 가부장적 인물로만 해석되는 유봉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딸의 눈을 멀게까지 하면서, 이루지 못한 소리를 완성하고 싶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보았다. 그가 지탄받는 이유는 가족’, ‘사람이라는 가치 위에, ‘소리라는 무형의 목표를 놓았기 때문이다. 남경주는 상대 배우를 향해 때로는 광기어린 눈빛으로, 혹은 무심한 냉대로 한 치의 교감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이중의 연기를 한 것 같다.


최고의 노래, 장면, 사람들


인상적인 노래

많은 곡 중, ‘살다보면’(넘버 06)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곡으로 꼽지만, 기자는 소리~ 내가 기억하는 소리···.이라는 가사가 있는 거대한 햇덩이’(넘버 02,04,31)라는 곡이 인상적이었다. 이 곡은 동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억압, 엄마의 고된 삶에 대한 안타까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떨쳐낼 수 없는 소리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했던 곡이다. 때문에, 극 안에서 3개의 버전으로 불려졌다.


인상적인 장면


긴장의 최고조로 강렬한 극의 정점, 1막 마지막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1막 마지막 순간이다.(‘시간이 가면’, 넘버 22) 송화는 자신의 한을 극대화하며 절규하고, 유봉 역시 딸에 대한 깊은 자책감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완성을 위해, 광기어린 야망을 보여준다. 부녀가 공존하는 공간(무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지만, 두 인물의 내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로 치닫으며, 긴장의 최고조를 보여주며 강렬하게 1막을 내렸다.


뜻밖의 재연과 감동, 2막 마지막

극의 초반, 노년의 송화와 동호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구성을 취한다. 또 하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둘의 만남의 장면이 재연되며, 인물의 감격과 극적 감동을 더한다. 마치 시()수미쌍관(수미상관, 시의 첫 연을 끝에 반복하는 문학적 기법)’을 연상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만남의 재연은 초반에서 주었던 긴장·궁금증과는 다른, 마치, 수학문제의 해답으로 가는 과정의 귀결과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관객들의 시간적 감정선을 극의 초반으로 끌어 올림과 동시에, 구성의 인과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하고, 마지막 감동의 깊이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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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뮤지컬 '서편제'의 한 장면. (사진= PAGE1). 2022.10.18.

인상적인 사람들


앙상블 배우

장면마다 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앙상블배우들의 활약 덕분이다. 주연배우는 하나의 감정선을 가지고 끝까지 가지만, 이들은 무대마다 매번 다른 감정의 옷을 입고, 강렬한 군무와 수려한 가창력으로 찰떡 같이 소화해냈다. 주연배우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극의 틈새를 완벽하게 매워줬으며, 덕분에 관객은 장면과 인물들의 감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동호 엄마

동호의 방황과 혼란에 늘 함께 있던 존재가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 그의 삶에서 풀지 못한 숙제이자, 괴로움, 그리움의 원천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동호와 함께 하며, 동호의 괴로움, 그리움을 교감한다. 시작 인물로서 동호-유봉의 갈등, 극의 중요 순간에 매번 등장하며, 각 인물의 내면과 갈등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채태인 배우의 극에 녹아드는 연기와 감성, 뛰어난 가창력은 주연배우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했다.


소리꾼 배우들이 주는 감동

판소리라는 전통 소재를 바탕으로, 현대적 소재와 음악을 가미한 작품이다. 때문에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이 공존하고 있어, 이 두 장르의 음악을 모두 소화하는 것은 극의 몰입에 매우 중요하다. 소리꾼 이자람, 김준수 배우는 이 점에서 극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극에 삽입되는 판소리, 혹은 국악적 요소가 가미된 가창에서 소리꾼 배우들은 곡들이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다가가도록 돕는다. 특히 남매의 심청가장면이 최고의 장면으로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배우들은 송화와 동호의 감격을 판소리 심청가의 소리꾼과 고수로서 오로지 판소리만으로 교류하며 감정선을 극대화했다. 소리꾼 이자람 배우는 탄탄한 실력으로 판소리 심청가의 감동뿐만 아니라, 노년의 송화가 가지는 한, 동생을 마주한 감격을 소리에 녹여냈으며, 소리꾼 김준수 배우는 고수의 절제된 장단과 추임새만으로, 평생을 찾던 누이와 재회의 감격을 부족함 없이 표현해냈다. 소리꾼 배우 동호가 아니라면, 완성될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인물의 관계에서 보는 삶의 다른 색채


남매인 듯 연인인 듯, 동호-송화

작품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모자(母子)와 연인을 넘나든다. 아마도 어떤 관객은 마음속으로 연인의 관계로 이미 발전시켰을 수도, 어떤 관객은 연인의 애틋함까지 가질 정도의 끈끈한 가족애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동호는 송화에게서 어머니의 모성을 느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보호자가 되려하기도 한다. 중년이 되어, 마지막 심청가의 장면에서, 그녀의 동생이자 연인, 아들까지 된 듯 행복과 감격을 느낀다. 송화에게 동호는 소리가 전부인 자신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정을 느끼고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게 한 인물이다.


가족이기에, 유봉-송화

유봉은 가족이기에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리를 송화에게 완성시키려 하고, 송화는 가족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지키려 했다. 유봉은 가족이라는 가치 위에 소리라는 가치를 올려놓았고, 송화는 아버지의 딸이자 소리꾼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아버지 유봉의 소리는 광기에 가깝다면, 송화의 소리는 역사 속 한국 여성으로 상징되던, ‘이고, ‘가족이고 지켜야 할 것’, ‘결코 흔들리지 않은 강인함이다. 어쩌면, 송화는 아버지보다 강했고, 아버지(유봉)가 오히려 송화에게 의지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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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뮤지컬 '서편제'에서 동호 역을 맡은 소리꾼 김준수, (사진= PAGE1). 2022.10.18.

 

애증의 관계, 유봉-동호

유봉은 사랑했던 여인이 가졌던 소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동호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소리를 가르치려 하지만, 동호의 강한 반감을 보듬지 못하고 멀어지기만 한다.


동호에게 있어 유봉은 유년, 청년시절 원망의 대상이지만,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의 음악과 소리는 유봉에게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유봉과의 인연은 애증의 관계로 끝났을지언정, 그의 음악의 시작은 유봉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감동을 보답하듯,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배우들은 정중한 인사 후에, 객석을 향해 환한 미소로 화답하거나, 감격에 찬 듯 진지한 표정으로 객석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모든 얼굴에는 한결같이 감동과 감사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2시간 30분의 긴 공연에서 지치지 않고 관객의 환호에 답하기 위한 커튼콜에 달려오는 이자람 배우의 날아갈 듯한 발걸음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 이 무대를 진짜 즐겼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배우를 어떻게 관객이 믿지 않을 수 있는가.


뮤지컬서편제는 영화 서편제와의 저작권 사용기간 만료로 인해, 올해 공연이 마지막, 다섯 번째 시즌이다. ‘판소리라는 소재로 대중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을 모으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지 못한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공연장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서울 공연은 이번 주 1023()까지이며, 이후 충북 청주(1125-27), 부산(1223-25)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