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서울시 혜화동 예술청(서울문화재단)에서 소리꾼 김준수를 만났다. 내년이면 10년차를 앞둔 국립창극단 소속 단원이지만, 최근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은 물론, ‘곤 투모로우’(2021)에 이어 두 번째 뮤지컬 ‘서편제’의 ‘동호’ 역으로 관객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뮤지컬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를 기반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대부분의 노래(넘버)들이 대중음악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동안 ‘동호’ 역할에 소리꾼이 참여한 적은 없었으나, 올해 마지막 공연(영화 ‘서편제’와의 라이센스 계약에 의해)에서 김준수는 유일한 소리꾼 배우로서 ‘동호’역을 맡았다. 인물의 감성과 특징을 충분히 살려, 극의 공감을 극대화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참석한 기자들과 눈을 맞추며, 소신을 담은 생각들을 자신 있게 전했다.
‘동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장단(추임새) 밖에 없더라구요.
극의 말미에 ‘송화’와 ‘동호’가 ‘심청가’를 함께 하는 부분은 이 극의 백미로 떠오른다. ‘소리꾼 페어(이자람-김준수 출연) 강추’, ‘고수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티켓 값의 98%는 남매의 ‘심청가’가 다했다.’ 등의 관객 평이 나올 정도로, 소리꾼 김준수의 역할은 컸다. 고법과 추임새만으로 누이 ‘송화’의 소리를 받쳐주며, 몇 십 년 동안 참아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풀고, 재회의 감격을 공유했고, 관객도 공감했다. 김준수만이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장면이다. 이 장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소리꾼의 이야기잖아요. 소리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추임새가 나올 법도 한데... 사실 판소리에서는 고수가 소리꾼과 함께 하면서, 좋을 때는 ‘얼씨구’, ‘잘 한다’고도 하고, 슬플 때도 ‘어이’, ‘그렇지’, 이렇게 공감하는 추임새가 분명히 있어요. 처음에는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장면에서 동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이 제게는 장단(추임새) 밖에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누나와 이별 했지만, 다시 누나를 찾아다녔던 ‘동호’의 애절함,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었을 것이고, 오늘 누이의 소리를 들으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한... 그런 ‘동호’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공감하고 싶었어요.”
"이 친구, 소리 하는 것 보고 싶다.”
김준수는 ‘동호’의 오디션 장면에서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한다. 처음에는 제작진의 제안으로 ‘적벽가’만 불렀지만, 이후 그의 고민은 다양한 애드립으로 반영됐다.
"적벽가 말고도 좋은 우리 소리 너무 많은데, 그 짧은 시간에 핵심 부분만 생각해내서 과감하게 보여주면 어떨까 해서, ‘춘향가 중, 어사출도 대목’을 연출님께 말하지 않고, 무대에서 과감하게 했어요.”
그의 애드리브는 통했고, 관객들은 화답했다.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엄청 박수를 쳐주시더라고요. 그 떨림이, 소리꾼 할 때도 들어보지 못했던 울림이 있었어요. ‘와, 이 친구 소리하는 것 한 번 보고 싶다, 이 친구 어떻게 하는지, 진짜 소리판에서 길게 하는 것 들어보고 싶다.’는 후기들을 보면서 너무 뿌듯했고,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원동력을 얻었어요. 공연 끝날 때까지 우리 판소리 5바탕을 모두 해보고 싶어요.”
소리꾼 김준수, ‘동호’ 안에 자신을 투영하다
‘동호’라는 인물은 소리꾼 김준수와 많이 닮아 있는 듯하다. 그 자신도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도 너무나 소리를 아끼지만,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없는 현실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하는 젊은 예인이다.
"어렸을 때 저도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20년 넘게 해오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거스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는 한복을 입어야 했고, 소리꾼으로서의 가치관을 가져야 했고, 제 안에서도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창작 판소리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들이 있는데, 나는 왜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음악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제게 많이 던졌어요. 그 격차를 줄이는 소리꾼이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고, 작년에 부담됐지만,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에 어렵게 도전했고요."
‘동호’라는 인물도, ‘소리가 싫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소리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강요받는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 너무 와 닿았고, 공감되더라고요. 그래서 무대에서 눈물도 흘렸고, 연기라기보다는 제 안에서 오는 허전함도 있었고, 오히려 무대에서는 원 없이 그런 감정들을 폭발시킨 것 같아요.”
또 그는 고향, 한반도의 끝자락 전남 강진에서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고도 했다.
"노래 ‘흔적’ 대목에서, 과거 누이와의 좋았던 기억.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데요, 저도 고향 강진(전남) 근처 월출산이 항상 연습하던 곳이었어요. 엄마랑 손잡고 산에 오르고, 부채 들고 돌 두드리면서 명창의 꿈 안고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 지나가는 사람들이 쉼터처럼 듣고 가고, 어떤 분은 5천 원짜리 주시면서 ‘맛있는 것 사 먹어라.’ 하셨던 기억들. 하교 후 마을회관에 들러서 어르신들 앞에서 소리도 했고요. 지금도 고향 가면 어르신들께 가끔 소리 들려드리고, 제가 공연하면 늘 오세요. ‘너무 잘 논다.’ ‘아이고, 내 새끼....’ 말씀해주시고. 어렸을 때부터 그 분들의 정을 느껴왔고, 그 분들은 제 오랜 관객들이었죠. 사실은.”
그렇게 ‘동호’가 되어 간 김준수는 ‘진짜 동호를 만난 것 같다.’, ‘어디 갔다 이제 소리꾼이 왔을까?’라는 후기를 보면서, 큰 힘을 얻는다고도 했다.
내 뿌리는 국악, 대중화 매개체 될 것
소리를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 그는 대중과 멀어져 있는 우리 소리를 피부로 느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소리 한 번 해보라고 해서, ‘흥보가 중 놀부에게 쫓겨나는 대목’을 불렀는데, 친구들이 전혀 공감을 못 하는 거예요. 나 혼자 감정에 빠져드는데, 친구들은 "왜 저래?” "저런 음악을 왜 해?” "뭐가 좋아서?” 라고 말했는데,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소리에서 느끼는 좋은 감정들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어떻게 하면 친구들이 공감하고,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다양한 활동을 했고, 대중과 소통하는 지점은 가리지 않고 도전했죠. 뮤지컬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전했어요.”
‘뮤지컬’, ‘방송’ 등에 출연하면서, 주변 국악인들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뭔가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난 아닌데, 소리꾼으로서 자부심 큰데.’ 그래서 가볍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노력한 것 같아요.”
그의 노력은 뜻밖의 상황에서 결실을 맺기도 했다. "작품 ‘귀토’(2022)를 하던 어느 날, 창극단 선생님께서 ‘너 때문에 어떤 아이가 소리를 배우고 싶어서 왔어. 너로 인해서 소리 배우고 싶은 아이가 생겨서 고맙다. 더 열심히 해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마음속으로 ‘더 열심히 해서, 우리 국악 소개하고, 그런 국악인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뿐만 아니라, TV방송에 방영된 그의 무대를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접한 외국인들은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내 생애 최고의 무대(‘This is one of the best performance I've ever seen.’)’, ‘국보급 인물(‘World-class performance he truly is a Korean national living asset.’)’ 등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는다. 10년차를 앞 둔 창극 배우답게, ‘연극’, ‘드라마’ 등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뿌리가 단단한 소리꾼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소리를 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소리는 제 안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뿌리이고 중심이에요. 10년, 20년이 됐든, ‘소리꾼 김준수’로 남고 싶습니다. ”
그는 소리꾼으로서의 본분을 지켜가기 위해 내년에 ‘춘향가’ 완창을 열심히 준비 중이고, 목포에 계신 스승(박방금 명창,전남 무형문화재 제 29-4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2008) )과 함께 하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중이라고 했다.
인터뷰 후, 자리를 나서는 기자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그에게 기자는 해묵은 질문을 하나 건넸다.
무대에 서는 배우의 시선에서, 국악 대중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판소리의 경우, 사설 같은 이야기들이 관객들에게 아직은 어렵거나 귀에 안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고요. 이런 부분들을 조금 더 쉽게 풀어서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또 관객들이 대중음악 멜로디에서 느끼는 익숙함이나 편안함을, 우리 판소리도, 귀에 속속 들어오게, 창작 판소리 등을 통해서 음악적으로 익숙하게 다가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중문화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악인으로서, 그의 생각은 국악 대중화를 고민하는 이라면, 한번 쯤은 의미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년에도 그는 몇 가지의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작품 제안도 받고 있다고 했다. 대중을 국악 속으로, 국악을 대중 속으로 어떻게 끌어들일지, 이후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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