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6 (목)
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4>
그날 이후 말 수를 줄이고 자신이 할 일만 하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상언할 글을 정리하고 전적을 뒤지며 집무실 귀퉁이에서 앉지도 않고 서성거렸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 살아온 궤적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자리를 탐하고 이권을 추구하고 불만을 표하고 한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그러지를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탓하고 원망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 모른다. 늘 현안으로 되어 있는 문건을 읽고 쓰고 퇴고하고 다시 쓰고 다시 읽고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앞에서도 얘기하였지만 시를 쓰거나 어떤 작품을 쓰고 논문을 쓴 것이 아니고 제도의 개혁이나 새로운 시책 방법 들을 건의하고 상언하고 한 것이었다. 몇 편의 시문詩文 외에는. 주로 예악에 관한 것이고 악률 악기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악기 제작에 관한 것이고 직접 악기 제작을 한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술을 한 잔 하는 것인데 그럴 때도 하던 일을 생각하고 풀리지 않는 꼬투리를 풀고 있었다.
다래와 같이 잔을 나누며 소리를 듣고 또 같이 소리를 하고 대금을 불고 할 때도 그랬다. 문득 생각나는 요체가 있으면 그것을 매듭을 짓고 갑자기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 번득이는 찰라의 상想이 스치면 그것에 대하여 골돌히 생각을 하거나 쪽지에 적고 또 손에도 적고 어떨 때는 소매 끝에다 표시를 해 두기도 하여 너덜거렸다. 지필묵紙筆墨을 내오랄 때도 있었다.
"해해 참 선생님도. 술집에 무슨 그런 것이 있습니까요?”
"그러면 치부책은 뭘로 적나?”
"칼로 그어 놓지요.”
"그럼 칼이라도 가지고 와 봐.”
"괜히 그러다 사람 잡지 마시고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기억했다 말씀드릴께요. 제 머리는 인정하시지요? 그런데 여자를 앞에 놓고 뭐 하시는 기라요? 제가 그냥 치마 저고리로만 보이셔요?”
"허허 그랬던가?”
술을 마시면서도 여자 앞에서도 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좌우간 다래는 그런 일이 있은 후 늘 먹을 갈아 놓고 있었다.
집안 일 돌아가는 것도 몰랐다.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 집이었다. 밥상 머리에서 그렇게 해라, 그러면 안 된다 하는 것으로 자녀 교육을 하였고 그보다 앞서 스스로 솔선하고, 으음 기침을 하는 것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였다. 위로 딸이 둘이고 맏아들(孟愚) 둘째 아들(仲愚) 셋째 딸 셋째 아들(季愚) 넷째 딸 7남매가 작은 집에서 복대기를 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아버지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첫딸은 알성급제를 하고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는 사위를 보았지만 남편은 하늘이다,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는 것이다, 두 마디밖에 한 것이 없다.
아들들에게는 늘 욕심을 부리지 말고 분수를 지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본을 보인다고 생각하고 늘 삼가고 면려勉勵하였다. 옷과 신을 기워서 착용하고 그런 것에 오히려 자부심을 가졌다. 지켜지지 않는 것이 술이었지만 자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늘 과음을 하고 주사를 늘어놓는 계우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번은 양껏 먹게 하고 술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이겼다. 그 때부터 주도酒道가 통하였다.
"대개 술이 화가 됨은 심히 크다. 어찌 곡식을 없애고 재물을 허비할 뿐이랴.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렵히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잃어서 혹은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며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어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고 세종 임금의 계주교서戒酒敎書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유언처럼 말하였다.
"불초不肖란 말이 있다. 부모의 덕망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여라.”
삼남 아이들은 모두 숙연하였다.
"물론 꽁생원 아버지보다야 더 나아야지요.”
계우가 말하였지만 형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뒷날 맹우는 임강현령臨江縣令(정5품) 중우는 벽동군수碧潼郡守(정4품) 그리고 계우는 집현전集賢殿 한림翰林(정9품)을 거쳐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교형絞刑,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종1품)이 되었는데 글쎄 아버지 박연은 아들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일밖에는 몰랐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고 시대를 위한 일이었던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악성樂聖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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