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단독] 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1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독] 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1부)


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공모전은 북방지역 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해온 것을 격려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 씨는 수기에서 70여년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오사카에 묻히신 외할아버지 묘를 찾게 돼 70년만에 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박 씨는 "사할린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린 밀양 박씨 가문의 영광이지만, 동시에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힌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민족방송은 올해 코로나19로 별도 시상식을 거행하지 않고 수상자에게 바로 전달하기로 했다. 수상작은 KBS라디오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연재한다.


 

이산(Diaspora)과 나의 외할머니(1부)

 

AKR20211029158900371_01_i_P4.jpg
[국악신문] 박영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

  

나는 작년에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에 걸려서 죽음의 고개에서 헤매다가 살아났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이셨다. 꿈에서 만난 어머니에게 "지금 너무 아퍼요.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매일 기도를 했다. 20여일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다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나는 살아 생전에 못 다한 고조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이어지는 긴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다. 4대에 걸쳐서 가라후또(사할린)에 살게 된 조선인의 이야기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에 인한 이산과 다시 일본 땅으로 끌려가는 이중징용을 당하게 되는 슬픈 가족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어머니 현민제(현남열,1928년생)는 제주도가 고향이다태평양전쟁 막바지 1944년 우리 어머니는 16세가 될 무렵에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 오신 아버지를 찾기 위해 홀로 제주 본가 할머니 곁을 떠나 사할린으로 건너오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은 어린 아들과 남편은 강제징병으로 끌려가고 어린 딸들과 주부들까지 정신대로 일본이나 남영군도나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이 되어 가는 시대라서 할머니는 어린 손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있는 사할린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외조부님이 되시는 우리 어머니의 부모님은 두 딸을 본가에 맡기시고. 두 분은 1940년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아들 하나만 데리고 계약기간 2년만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기다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할린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우리 외조모는 일제에 의해 가족이 헤어지는 첫 번째 이별을 당한 것이다.

 

2.jpg
[국악신문] 박영자씨의 부모(사할린 2세 ), 모친 현민제(1928년생, 제주도 출신). 부친  박정환(1919년생 전남 하의도 출신)

  

제주도 친할머니 집에 남겨져 함께 살던 언니가 시집가서 어린 두 아들들을 돌보고 있게 되자, 할머니는 손녀에게 "얘야, 가라후토 아버지를 찾아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몰린 일제가 조선 어린 여자들을 정신대로 끌고 가는지라 할머니가 겁이 나서 손녀딸을 부모가 있는 사할린에 보내려고 한 것이다. 꽃같은 16세를 맞이한 소녀는 늘씬하고 고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 볼 때마다 더욱 불안해진 할머니는 너 혼자라도 가야 한다고 떠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미수가루를 뱃속에 차고 홀로 배를 타야만 했다. 아니면 정신대로 끌려갈 판이다. 배 밑바닥에서 간신히 20여 일 지내고 나서야 일본땅을 통해 사할린에 도착을 해서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에수토루) 구역의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바로 며칠전 일본으로 이중징용을 당해 17살 어린 아들까지 데리고 가라는 일제에 의해 이미 일본 고베의 한 탄광으로 강제동원 되어 떠나버린 뒤였다. 그리운 아버지는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낯설은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을 뒤로 하고 2년만 있다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난 후였다. 당시 일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 탄광으로 강제로 끌려가야만 하는 세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이 되셨다. 남겨진 두 딸과 함께 평생 동안 힘들고 외로운 여생을 사셨다.

 

고향에서 끌려갈 때는 2년만 일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다가 이중징용으로 다시 일본으로 내몰린 것이다. 1년 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부자는 일본으로, 모녀는 사할린으로....... 갈라지고 찢어져야만 했다.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서 한 개인이 당해야만 하는 이산의 이산을 겪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두 번째로 당하는 가족의 이별인 것이다.

 

사할린에 도착한 어머니는 가족을 만난 기쁨보다는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날 수 없다는 슬픔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까지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다고 외할머니가 통곡하시는 모습이 늘 생생하다고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땅에서 돌아온 사람들만 만나면  "하늘 같은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샛별같은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 이런 사람을 아십니까"라고 찾고 찾으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더 슬펐다고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젊은 나이에 평생 수절하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그리워 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딸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민제야 너는 반드시 나 대신에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손을 꽉 잡으셨다. 죽는 순간까지도 너무나 억울해서 눈도 못 감고 떠나가신 어머니의 두 눈을 감겨드리며 "하고 굳게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마지막 그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조국은 우리를 외면하고 결국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식들과 함께 이국땅에 묻히게 된다. 이별과 고향, 이 두 가지가 외할머니에게 뼈아픈 한이 되어 살아오셨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반드시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려야 한다고 내 귀에 못이 박히게 중얼거리셨다

 

돌아가시는 날 하얀 눈이 많이 내렸다. 나를 불러서 바라 보시면서 "영자야. 내가 지켜드리지 못한 나의 어머니와의 약속을 너는 지켜야 한다. 반드시 외할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라고 유언을 남기시고 눈을 감으셨다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산의 고통은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나에게 대물림이 되었다.(계속)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