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일)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소암素庵 조운조 교수가 벌써 정년을 맞았다니, 세월의 속절없음이 다시 한번 새삼스러워진다. 특히 곱살한 인상의 조 교수도 영락없이 노인세대로 편입된다는 사실 앞에 서고 보니 마치 화개화락의 덧없는 세상살이를 곱씹는 듯싶어 절로 마음이 공허해지기도 한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조 교수의 이미지는 우선 매사에 부지런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나 역시 인생을 비교적 폭넓게 적극적으로 살아왔다고 자임하는 처지이기에, 바로 이 같은 조 교수의 진취적인 삶의 자세에 내심 많은 공감대를 느끼곤 했다.
여기서 세세하게 나열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동안 조 교수는 교육자로 연주가로 문필가로 사회활동가로 누구보다 폭넓은 인생을 살아왔다. 이 같은 행적은 물론 조 교수의 인생관에 기반한 삶의 유형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에서 그를 그만큼 필요로 했다는 반증임과 동시에, 또한 조 교수가 그만큼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조운조 교수가 한국 음악계에 참 좋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되는 일 중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한국정악원의 맥을 이어온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정악원에 열정을 쏟은 일은 누가 뭐래도 역사의 맥을 잇는 일이었다. 통시적인 역사의식이 앞서지 않고는 될성부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을 조 교수는 묵묵히 해냈다. 한편 모르긴 해도 조 교수의 체질이나 품성은 ‘정악적’이지 않나 싶다. 물론 내가 겪은 이심전심의 주관적 느낌이다.
과연 정악이란 무엇일까. 작게는 조선조 5백년을 뻗어내렸고, 넓게는 유교사상의 근간으로 수수백년을 풍미하며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정악禮樂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음악적으로는 《논어》의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즉 우륵의 표현을 빌리면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의 경계가 아니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곧 유학의 핵심사상이랄 중용의 세계가 아니던가.
이렇게 볼 때 조운조 교수는 영락없이 정악적인 인물임을 공감하게 된다. 그의 인품에서 스며나는 인간적 따듯함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내게는 그 수다한 일들을 소화해 가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견지해 가는 항상성恒常性이 유달리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 교수의 그 같은 인생 행로를 지켜보며 문득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어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자로 예술가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결같은 인상과 처세와 평판을 잃지 않고 있는 그 굳건한 내면의 신념은 곧 천변만화의 세파를 겪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수시처중隨時處中의 의연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조 교수의 품성은 다분히 정악적이요 예악적이라는 표현이 걸맞지 않을 수 없다.
소암 조운조 교수가 드디어 대학교수직을 졸업한다. 서양에서 졸업(Commencement)이라는 말은 ‘시작’을 뜻한다. 하나의 단원을 마침과 동시에 다음의 새로운 단원으로 이행하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대나무도 생육하면서 마디節를 하나 만들고, 그 마디를 발판으로 다시 쭉 뻗어나간다. 삼라만상 대자연의 이치다.
소암 선생도 이제 영년퇴은盈年退隱이라는 하나의 옹골찬 인생의 마디를 만들었다. 이 소중한 마디 다음에는 다시 제2의 광할한 인생 드라마 무대가 펼쳐져 있다. 2모작 인생 드라마에서도 성실하고 존경받는 주인공으로 명연기를 해내길 고대한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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