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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20 다시 읽는 'Song of Arira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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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20
다시 읽는 'Song of Ariran'(2)

기찬숙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 특집부
  • 등록 2021.01.16 07:00
  • 조회수 112,195

80년 전인 1941년 뉴욕 존데이 출판사에서 발행된 ‘Song of Arirang’은 1965년 일본에서 안도지로의 역으로 アテテソ-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되었다이어 1987년 마쓰데라 이오꼬 번역으로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11판까지 발행했다그리고 1972년 미국 파나 프레스에서 ‘Song of Arirang’재판이 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1987년 연변역사연구소에서 한국어판 '백의동포의 영상'으로 발간되었고중국어 번역본은 홍콩 난유애 출판사에서 白衣同胞 影像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서야 아리랑이란 표제로 발간되었다그리고 2년 후인 1986년 보유판 '아리랑 2-김산 생애 보충'이 발행되었다김산에게는 자신의 격한 항일 투쟁적 삶이 적국 일본에게 먼저 전달된 셈이다역설인가 당연지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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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산 '아리랑' 노래복원>,연합뉴스,2007.03.01).  항일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이 부른 것으로 기록된 '아리랑' 노래가 복원된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영화음악에 맞춰 불렀다는 기록에 따라 명창 김영임 씨가 당시 곡조를 찾아 녹음했다. 음반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설명도 함께 수록했다.

 

필자는 2007년에 음반 김산아리랑’(신나라 뮤직)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 ‘Song of Arirang’소재 김산 구술의 아리랑관련 기록을 꼼꼼히 분류한 바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1930년 초부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의 정황에서 진술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193011 "나는 일본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다고 진술했다. 나에게 그 이상의 어떤 시련이 또 있었겠는가?”로부터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 형을 마치는 19344월 전후가 된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김산은 영화 아리랑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동포사회에까지 상영되어 반향을 일으키는 정점인 1930년을 전후하여 체험하고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In Korea we have a folksong, a beautiful ancient song which was created out of the living heart of a suffering people. It is sad, as all deep-felt beauty is sad. It is tragic, as Korea has for so long been tragic. 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김산)

 

이 명징한 아리랑 인식의 결정체, 김산의 진술 중 하나이다. 과연, 이 시기 이 땅의 지식인 중 누가 민요 아리랑’, ‘노래 아리랑’, ‘그 넘어의 아리랑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다행히 여기에 꼽을 수 있는 이가 있긴 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한 사람, 영화감독 나운규(羅雲奎.1902~1937)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견주기는 격이 떨어지지만 정치학자 고권삼(高權.1901~?)을 한 사람 더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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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초판본 김산과 님웨일즈 공저아리랑 원전 (소장자:김산연구회 기미양)

 

#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다. 민족성이랄까 할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아리랑고개, 그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이런 일관된 정신을 거기 담지(擔持)한 것이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이외다.

(중략)영화가 문화사업의 하나라면 민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백 리 밖에서 아무리 기를 흔들어야 그 기가 민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언제나 우리는 민중보다 보()만 앞서서 기를 흔들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나운규)

 

나운규가 작고하기 1년 전인 1936, 영화 '아리랑'의 감독 당시를 회고한 대목 중 일부이다. 영화 아리랑을 고개를 넘는 활기찬 패기를 넘는 남성상을 그리려 했지만 그런 역할을 했는가를 스스로 회의하고, 영화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중들에게 가파를 현실을 극복하자고 추동한 것이다.

 

# "비폭력 비협동의 理想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아이롱(아리랑)主義는 근본적이요 적극적인데 더욱 가치가 있다. <아이롱主義>는 정치사상에 있어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중략) ‘아이롱主義의 철학은 평화주의이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使徒요 인류평화의 指導者이다.”(고권삼)

 

정치학자 고권삼이 1933년 일본 발행한 近世朝鮮興亡史로부터 1947년 서울에서 발행한 '朝鮮政治史'에 기술한 아리랑主義중 일부이다. 정치학자임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33년이란 시점의 평화행복은 천황 지배하의 순응에 따른 것임으로 친일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거기다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강사와 제주도에서 좌악계열 정치가로 활동(1949년 월북하여 생사불명) 하면서도 이 친일적 인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든 나운규는 영화론과 민중론을 투영해, 고권삼은 정치론을 적용해 아리랑의 성격을 재규정한 의미있는 인물들이다. 모두 풍전등화의 1910년대 초에 때어나 민족적 수난의 극점에 이르는 1930년대를 자신만의 길에 투신하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기에 아리랑을 남달리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산 이로 유독 진지하고 실천적인 아리랑론을 진술한 김산은 언제 아리랑을 체험하여 옹골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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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독자 고영광선생환영회> 기념사진, 위 왼쪽부터 농민문학회장 이동희 , CTN TV 김지호사장, 대기자 리영희, 고영광선생, 조정래선생, 아래줄 왼쪽으로부터 김연갑, 중국동포 통역, 김산연구회장 기미양. (사진=벤처아리랑). 2002.12. 6.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