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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Pansori epic chant) 의 역사 ( Video :English subtitles)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판소리의 발생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있다.어진 화랑제도에서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화랑제도가 과거제도로 바뀌면서 예능에 능통한 일부 화랑들은 남사당을 조직하여 유랑하기도 하였고, ‘광대’란 말 역시 화랑의 방언이기에,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의 화랑에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한편, 전라도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문화적 풍신이 전라도 무속과 유사하고, 초기 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거의 무당이었으며, 무당들 중에는 전라도 지방출신이 많았다는 점 등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전라도 지방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 또한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
전승 정보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晩華集)> 의 <춘향가>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또 문헌 자료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에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는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다. 그래서 <관우희(觀優戱)> 라는 글로 이를 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12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다.
판소리 명창은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조 말기 정조 초기에 하한담·최선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황해천·송흥록·송광록·모흥갑·염계달·김제철·신만엽·방만춘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또 고종 초까지는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김채만·정정렬 등이 활동했다. 판소리는 점차 무대화되다가 여성국극단에 의해 여성창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판소리 예능보유자로는 춘향가에 김여란·김연수·김소희(본명 김순옥(金順玉)), 심청가에 정권진, 흥보가에 박녹주·강도근, 수궁가에 정광수(본명 정용훈(丁榕薰))·박초월, 적벽가에 박동진·박봉술·한승호(본명 한갑주(韓甲珠))가 인정되었으며 이후 춘향가에 오정숙, 심청가에 성창순·조상현이 인정되었다. 또한 춘향가에 성우향(본명 판례), 흥보가에 박송희(본명 정자), 적벽가에 송순섭이 새로 인정되었다.(2006년 상황) 현대로 넘어온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나타나, 각기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며 널리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