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인터뷰] '고성농요' 전승 현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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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성농요' 전승 현장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 '고성농요' 보유자 김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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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농요 공연장면. 고성군 제공

 

경상남도 고성지역에 전승되는 농사짓기소리 '고성농용'가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성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농군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불렀고, 아낙네들은 길쌈하면서 길쌈소리를 많이 부르기로 유명하였다.

 

현재 예능보유자로는 김석명()이 지정되어 있다. 고성농요에는 모찌는 소리로 긴등지·짜른등지, 모심는 소리로 긴등지·점심등지·짜른등지·해걸음등지, 김매기소리로 상사디야·방아타령·치기나칭칭 등을 부르고, 이밖에 도리깨질소리가 불린다.

 

소가야의 옛 도읍지인 고성은 경남의 곡창으로 농사일을 천직으로 삼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농요로 씻고, "등지소리”로서 그 고달픔을 잊어왔다. 민요는 문자 이전의 아득한 시대에서 부터 민족 대부분의 생활에 자리잡고 그들의 공명, 공감에서 읊조리고 노래 불러져 생의 교훈으로 삼아 왔으며, 특히 고성지방은 조선후기에 가장 활발한 민요의 본고장이었으며 조선말엽 통영으로 가던 경상감사 행렬이 고성을 지나가다 들판에서 농부들이 부르는 "등지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도취되어 행렬을 멈추고 해지는 줄을 모르고 해가 저물어 다음날 후한상을 내리고 떠났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노동요가 발달된 고장이었다.

 

이와 같이 고성지방은 남해안의 대표적인 농경지대로 넓은 들판이 있고 바다가 가까우니 풍요한 농촌으로 형성되어 왔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모여 두레로 합동하여 일하기를 좋아했다. 우정을 나눌 수 있고 공동의식을 가지고 협동해서 상부상조하면서 생활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러한 마음, 이러한 집단작업에는 농요(민요)가 알맞게 그들의 마음을 집약하고 통일하고 공감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에는 들로 일하러 나아갈 때 부르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을 맞추고 흥을 돋구었으며 모찔 때나, 모심을 때, 논을 맬 때에 힘을 다하고 기운을 내고 협동해서 일을 했으며, 타작하고, 베짜기 하고, 물레질을 하면서 서로 마음을 호소하고 위로하며 정의를 돈독케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이 고성농요에는 그대로 전승 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고성농요는 그 가락이나 가사 및 농사양식이 외래문화에 물들지 않고 전승된 그대로를 실체화 했을 뿐 아니라 하루의 작업 중에도 아침, 점심, 저녁의 노래가 각각 다른점과 부모님께 효도하고 협동단결로서 나라에 충성을 노래하고 있으며 묵묵히 자신을 맡은 일에 충실한 농부들의 삶의 철학이 담아있다. 

 

또한 아녀자들의 삼삼기, 물레노래는 시집살이의 고달픔과 조상 숭배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고성농요는 음악적, 문학적으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함은 물론이며 조상들이 남겨준 삶의 철학이 오늘날 잃어버린 도덕성을 회복하는데 가장 소중한 교육 자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음악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고성지방을 계면조와 메나리조가 공존하는 지역으로서 남도의 육자배기적 창법과 영남민요의 특색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경북의 통명농요가 장3도→단3도적 음진행을 특색으로 하는데 비해 고성농요는 같은 경상도인데도 4도→3도 및 3도→2도적 음진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확연히 구별된다. 물론 경기민요나 서도민요, 제주도민요와 다름은 말할 것이 없다. 

 

고성농요는 호쾌하고 건강한 남성노동요인데 비하여 여성요는 구구절절한 그들의 한이며 애조로운 한국적 여인상을 엿볼 수 있다. 후렴구가 없이 유절형식의 교창노래가 많은 것도 그 특징이다. "조리자”의 기본선율은 리듬이 잘 짜여있어 음악적 우수성을 볼인다. 베틀노래와 동곡인 "삼삼기”는 가사 4구가 기본선율을 이루고 15박의 복합장단인데, 가사의 앞 2구는 8박(2拍+6拍)을 이루고 뒤 2구는 7박(2拍+5拍)을 이루어 독특한 구성을 하므로 우리 농요의 사설 붙임관계에 있어서 좋은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고성농요는 몇 곡을 제외하고는 4ㆍ4조로 되어 있는 것도 경상도 지방의 지방적 특색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고성농요의 공연시 과장별 장면이 관중들에게 전혀 지루함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노래의 빠르고 느림이 변화무상하여 느렸다가는 빠르며 장쾌하다가는 애조로운 장면이 옛고향을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흥겨워 어깨가 들썩들썩 하기도 하다.

 

지금은 전국의 농요들 중에서 제일가는 전승처로 모범이 된 고성농요, 그러나 묻혀지고 잊혀져버릴 뻔하였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농요, 그러나 그 농요에 관심을 가진이는 지역의 향토 사학자도, 또는 문화재청도, 또한 우리음악을 연구하는 이도 아닌 고성여고에서 국사를 강의 하던 초임교사 김석명이였다. 고성에서 태어나 고성에서 자라 고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김 교사는 "학생들에게 과연 고성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문화가 무엇인가를 찾아서 알려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민속반을 조직하여 소가야 문화유적에 대한 탐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고성패총(고성읍 동외리 당산, 고성여중 운동장 서편 고분군 및 패총)을 발견하여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서신을 발송했다. 이에 국립박물관 탐사반이 내려와 확인했으며 그 뒤 동아대학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되어 현재 보존되고 있다. 이에 용기를 얻는 김 교사는 고성인의 정신(사상, 감정)이 가장 많이 용해되어 있는 분야를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고성오광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죖경남지방의 민속가면극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던 가운데 고성동중학교 재직 당시 농촌일손돕기로 학생들을 인솔하여 모심기를 나갔을 때 인근 논에서 모심기하는 농민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다니면서 고성 들판에서 들었던 구성진 소리였다. 그 뒤 주말이면 녹음기 한대, 공책 한권을 손에 들고 민속반학생 1~2명을 데리고 고성군내의 사랑방, 노인당, 정자나무 아래를 다니면서 농민요의 녹음을 시작했고 더욱이 방학 때는 농민요의 채집에 좋은 기회로 삼았다. 

 

어느 덧 정리된 가사는 200여 곡을 넘었고, 만났던 노인들의 숫자는 300명을 넘었다. 녹음테잎은 1가마 정도가 되었고 이 일을 알게 된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대서 특필로 보도했다. 언론의 자극은 더욱 김 교사를 채찍질했다. 좧사라져가는 죖고성 등지 소리’에의 고성인의 사상과 감정이 송두리째 용해되어 있으며 구절 구절마다 잘 나타나 있음을 생각할 때 이것야말로 꼭 보존 계승되어야 겠다좩는 확신을 갖게 됐으며 체계적인 전수 보존의 방법을 모색하게 됐으며, 김 교사가 녹음한 수 백명의 노인들 중 소리가 가장 우수한 49여명을 중심으로 고성읍 우산리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1977년 8월 9일 고성농요 전수회의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민요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고 이 고장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성의 "등지소리”를 되살리고 전수회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개천예술제에 출전하기로 마음먹는 김 교사는 학교근무를 마치고 고성읍 우산리 마을회관 마당에서 노래와 춤을 가르치며 늦은 시간까지 연습에 열중했다. 전수회원들은 하루종일 농사일을 하고 피곤한 밤시간에 연습하여 나오는 것을 죽기만큼 싫어했지만, 김 교사의 열의에 견디지 못하고 나오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11월 제28회 개천 예술제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차지했으며, 1978년 제10회 경상남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연이어 수상했고 동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함으로써 1979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다. 이후 1985년 12월 1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 받았다.

 

현재 고성농요는 인간문화재 2명(유영례, 김석명), 전수조교 3명 (천의생, 박이도, 김임종), 이수자 15명 등 45명의 전수자들이 있다. 그동안 고성농요는 대한민국국악제 초청 국립극장의 공연을 비롯하여 전국 순회공연과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 시범공연 등 국내외 공연으로 인기를 모아 왔으며, 영국 브리데니카사에서 죖한국 팔도 판소리전집’의 레코드 제작에 취입되어 세계 120여 개국에 보급 판매됐으며, KBS - TV를 비롯하여 MBC 등 방송 출연 100여 차례 및 신문 잡지 등 200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이후 고성농요는 1986년부터 매년 6월에 전국 최초로 농요 발표 공연을 현지의 들판에서 직접 농사일을 하면서 실시하여 전국민요 애호가와 학자들의 격찬을 받고 있다. 또한 고성농요 후계자 양성을 위하여 매년 방학 중에는 고성군내의 초 중 고 학생 및 교사,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향토민요(무료) 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6년부터 향토민요의 전수활동(향토민요 강습회나 민속반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그 예능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하여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2005년 수상자는 율촌 초등학교 최장미(3년), 임희정(3년), 최은지(6년), 장은실(6년), 방산초등 구연주(5년) 등 5명의 학생이 오는 1월 27일 시상식 갖는다.

 

35년이 지난 고성농요, 이젠 명실공히 전국의 농요들 중에서 제1의 모범 농요팀으로 계승발전하고 있다. 1971년 고성여고에서 국사을 강의 하던 초임교사 김석명이 아니였다면 우리 기억속에 잊혀졌다. 고생과 눈물, 후회 기쁨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35년이 지난 지금 순간이였다는 김 교사는 1992년 7월 1일자 예능보유자로 추가 지정됐다.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은 수많은 전통 문화들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문화생활의 변형으로 없어지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승문화 가운데서 꼭 보존되어야 하고 계승되지 않으면 안될 가장 소중한 민족적 전통문화는 언어와 노래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말과 글이 없어진다면 우리 민족이 어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조상 대대로 수 천년 동안 불러오던 민중의 숨결인 노래가 없어진다면 조상들의 사상과 감정이 송두리째 용해된 민중 전체의 얼을 다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고성지방에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추이를 알 수 있는 민요가 있고 이 노래들을 전수받아 부를 수 있을 들녁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김석명 명창... 현대는 선진국 문화가 쏟아져 밀려오는 시대이다. 국제화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내 것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오천년 문화민족으로서 당연히 그래야 하기에 우리 전통문화 지킴이로 김석명 명창에게 감사하다.

 

고성농요보존회 : 055) 674-2668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