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3 (수)
흙의 소리 이동희 소명5 그리고 여러 제사에 대하여 계속 말하였다. 원단圓壇 적전耤田 선잠先蠶 등의 제사는 지금 조정에서는 모두 태주를 사용하는 음악으로 되어 있다. 태주는 지신에 제사 지내는 음악이므로 사직에 이를 쓰는데 원단은 하늘에 빌며 고하는 제사이니 같은 것을 쓰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선농先農과 선잠도 선대의 인귀人鬼이니 사직에 제사 지내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또 삼제三祭 안에서 당상과 당하에 순전히 태주의 양성만 사용하게 되니 어찌 그것이 마땅한가. 삼제의 음악도 정세하고 당연함을 보지...
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4 "본시에 벼슬한 사람은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 없사오나 당시의 아악이 바르게 고쳐지지 않아 저서가 있지 않은 것도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신악新樂을 가르쳐 익히고 공인들의 재주를 취하는 데에 모두 이 책을 상고하면 그 공이 적지 않을 것이나 제사지내는 데에 겸하여 쓴다는 것은 전의 규정을 받고서도 완전히 이에 의거하지 않았으니 지금 이 책을 가지고 본조의 아악에 소용되는 법을 상고한다면 모두가 심히 정밀하고 적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선국악장에 대해서 문제점을 조심스럽게 ...
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3 "주례周禮에 보면 예법 제사의 일을 맡아 하던 춘관春官의 태사太師가 육률六律과 육동六同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합하였는데…” 육률은 십이율十二律 가운데 양성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 황종黃鍾 태주太蔟 고선姑洗 유빈蕤賓 이칙夷則 무역無射이며 육동은 음성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 협종夾鍾 중려仲呂 임종林鍾 남려南呂 응종應鍾 대려大呂이다. 박연은 소리의 종류를 설명하고 상주를 계속하였다. 물론 글로 써서 올리는 것이고 한자 한자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대개 두병斗柄(국자모양의 북두칠성...
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2 시대의 부름이었다. 새 시대가 되었다. 왕이 새로 바뀌고 시대가 새로 바뀐 것이 아니라 새 왕이 들어서면서 새 시대를 연 것이다. 예는 나라의 근본이었고 땅에 떨어진 예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세종 즉위 4년에 군권 등 왕권을 다 내려놓지 않고 있던 상왕 태종이 명을 다하여 새 정책의 수립은 가속이 되었고 폭이 넓어졌다. 예는 시대정신이었고 이를 실천하는 활력이 악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비 학자 거유들이 요로에 포진하여 번득이는 새정책 문화의 기틀을 좌우하고 있는 가운데 ...
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召命 1 때가 이른 것이다. 새로운 예악 정책이 시작되었고 박연의 상소가 계기가 되었다. 같은 무렵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세종조 초기부터 예악 특히 악의 정립에 나섰다. 태종 6년(1406)에 설치하였던 악학樂學을 재가동시킨 것이다. 고려 말 유학 무학武學 음양학 의학 등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된 기관으로 음악에 관한 옛 문서들을 고찰하여 음악 이론과 역사 등 악서樂書를 편찬하고 악공들의 의례, 악기 제작, 악공 선발 등의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예문관 대제학 맹사성孟思誠 유...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6 왜 그런가. 예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몇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이것으로 새 나라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었으며 그 중심에 박연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표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던가. 그가 말하고 얘기했다기보다 가르쳤던 것이 그에게 되돌려졌고 그 이론을 실천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 알맹이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예기禮記는 유교의 경전이다.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라...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5 박연은 관로官路라고 할까 벼슬 길에 나간 후 주로 청직淸職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 시강원 문학 등 간원諫院 헌부憲府 춘방春坊의 요직을 두루 거치었다. 문장과 학문에 단연 두터운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악의 중심에 서서 조선조 국악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까지 다른 관직들을 맡기도 하였다. 전지하기를, 제생원 의녀 중 나이 젊고 총명한 3 4인을 골라 교훈을 시키어 문리를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인하여 의영고義...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4 광풍과 고뇌 그리고 그에 따른 혼란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양녕대군의 폐세자위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은 동시에 행해졌으며 두 달 뒤 왕은 세자에게 선위禪位를 하였기 때문이다. 6월과 8월의 일이었다. 8월 10일 왕세자 충녕대군은 왕으로 즉위를 하였다. 훗날 유일하게 대왕으로 호칭하게 된 제4대 세종대왕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이종무李從茂 임명, 대마도 정벌, 각도 거주 왜인倭人을 노비로 하는 등 군권을 놓지 않고 행사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아직은...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3 세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승의 말이고 또 성인의 가르침이며 현군의 실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말을 찾아 일러 준 스승이 참으로 고마웠다. 자신을 이롭게 해 주려는 얘기만은 아니었다. 현실이 그러하였다. 이제 와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 들어내면 혼란만 일으킬 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여러 사람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고 깨닫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2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냥 이대로 있기만 하면 되는 건지, 날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어요.” "예? 그게 무슨?” "올바른 행실을 하고 무엇을 가려서 하고 자나 깨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고 그런 것은 쉬워요. 하는 데까지 하면 되지요. 그런데…” "아아, 그래요?” "예.” "그것도 극복해야지요.” 세자는 스승을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박연은 그제서야 세자가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알았다. 자신을 위해 두 형이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형 양녕은 온 천지를 유랑하...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1 곧고 바르게 넓은 길을 가는 것이다. 한시도 쉼 없이 주저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그것이 누구라 하더라도, 앞만 향하는 것이다. 늘 인의의 길을 잊어본 적이 없지만 대장부가 됐든 졸장부가 댔든 앞만 보고 대도를 걷는 것이다. 왜 무엇을 위하여 그러느냐고 누가 있어 묻는다면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고 무슨 논리는 없다. 선인들 현인 성인들의 가르침대로 실행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긋남이 없이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행하는 ...
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8 그러니까 박연의 나이 34세 태종 11년(1411)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어 포상을 받았다. 태종 5년에 생원과에 급제(문과 초시初試)하고 6년 뒤 식년시式年試 대과大科(문과)에 급제하여 2단계시험(복시覆試)을 다 거친 것이다. 그후 42세 세종 원년(1420)에 집현전 교리校理에 배수되고 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중임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으로 발탁된다. 문학은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세자시강원에 ...
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7 졸지에 박연은 큰 짐을 지게 되었다. 작정을 한 것도 아니고 느껴지는 대로 아악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였는데, 그 분야에 특별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피리를 불고 퉁소를 불던 기량과 관계없이 궁중음악 의식가 제례악 등에 매력이 있었던 것이고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생원시 급제 발표를 하고 국왕과 문무백관 앞에서 연주하던 전정고취에 대한 감격과 짐승들이 화답하던 부모님 시묘 때 자신의 피리소리와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꿈이고 착각일지 몰랐지만 그런 생각에...
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6 아雅는 궁궐에서 연주되는 궁중음악 곡조에 붙인 가사歌詞이다. 시이다. 「시경」에 소아小雅 74편 대아大雅 31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 시이다. 이들 시의 내용은 주周나라 개국을 칭송하고 선왕宣王을 영송詠頌하는 것 등 다양하다. 역사시 서사시가 많다. 순정純正한 것을 대아, 풍이 섞인 것을 소아라고도 하였다. 아는 바로잡음의 뜻을 가지고 있고 정正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는 조정 정악...
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5 그런 집념의 나날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정말 꽃이 피는지 잎이 지는지 모르고 지냈다.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한 점과 같은 목표를 향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박연은 생원시에 급제를 하였고 다시 성균관의 유생으로 들어가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계속 학업을 닦기 시작하였다. 영동 향교 유생의 배움이 소학이라고 하였다면 성균관 유생의 배움은 대학이었다. 가르침도 달랐고 물음도 달랐다. 임금(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