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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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새롭게 만나는 우리 춤의 계보시대를 관통하는 우리 시대 예인들의 무대, 국립국악원 ‘일이관지(一以貫之)’ 5월 21일부터 3일간 ‘조선춤방Ⅱ’ 열린다. 예술로 이치를 꿰뚫은 우리 시대 예인들의 무대인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조선춤방Ⅱ’가 5월 21일부터 3일간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열린다. 국립국악원은 작년 10월, 기획공연 '일이관지' 시리즈에 ‘조선춤방’이라는 부제를 걸고, 개화기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권번, 사설국악원, 고전무용교습소를 통해 전승된 한국 근현대 전통춤의 맥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평단의 큰 호응을 받은 바 있다. 문화재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다양한 춤맥을 무대로 소환하여 "전통춤 공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공연 ‘조선춤방Ⅱ’는 전통춤의 맥락을 더욱 확장하여 국경을 넘어 해외로 이주한 디아스포라의 춤맥과 신무용 계열의 춤맥까지 포괄하여 조망한다. 첫날인 21일(화)은 광주의 한진옥 춤방과 부산의 김동민 춤방 무대이다. 한진옥은 ‘호남의 이매방’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춤실력과 북장단으로 유명했던 춤사범이다. 김동민은 대지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부산에 최초의 민속무용학원을 열고 민속춤을 체계화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던 인물이다. 문화재 비지정 종목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영호남 춤의 두 거장이 소환된다. 둘째날 22일(수)은 한순옥 춤방, 전황 춤방, 박성옥 춤방의 무대가 열린다. 한순옥과 전황은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 출신으로 한국전쟁기에 월남하여 한국무용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박성옥은 최승희의 전속 악사로 알려진 인물로 춤의 창작에도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초대 단장을 지냈으며 당시 탄생한 작품들이 지금도 이 예술단의 레퍼토리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유일한 후계자였던 김춘호의 춤맥을 오철주의 춤으로 이번 공연에서 만날 수 있다. 리틀엔젤스예술단도 특별출연한다. 23일(목)에는 한국 근대춤의 선구자 최승희, 조택원, 배구자의 후계자들이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춤맥을 조명한다. 특히 이 날은 최승희의 제자로 중국 조선족 무용을 개척한 박용원 춤방과 배구자의 제자로 하와이에서 한국춤을 지켰던 한라함(Halla Huhm) 춤방을 통해 이국땅에서 이어가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춤맥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신무용의 거장 조택원의 제자이자 부인이었던 김문숙의 대표작 '대궐'과 '가사호접'도 기대되는 무대이다. 공연은 오는 21일(화)부터 23일(목)까지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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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세실풍류, 51명이 근현대춤 100년사 선보인다국립정동극장이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온 근·현대 춤꾼들의 100년 여정이 담긴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온 춤꾼 51명의 무대가 이번 달 매주 화·목요일 여덟 차례 공연이 이뤄진다. 배구자·최승희·조택원 등 신무용 시기 춤부터 200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댄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해 온 우리 전통춤에서 신무용의 예술성을 감상할 수 있다. 근대 신무용이 등장한 1920년대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 국립무용단 창단기,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됐던 한국창작춤,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 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4일과 9일에는 1920년대 신무용을 조명한다. 지난 4일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이 선보였다. 배구자·최승희·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노해진·안나경·최신아·국수호·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랐다.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성행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무용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오늘날 새롭게 재현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의 맛깔스런 해설로 흥겹게 진행되었다. 1920년대 신무용 선구자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민요춤을 김선정이 재현했다. 객석은 첫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1920년대 뮤직박스에 이끌려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 막이 오르자 어두운 무대 배경에는 서서히 배구자의 춤자태를 보여주는 사진이 나오고,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무용가는 잠시 그대로 배구자의 몸짓을 흉내 내고 정지 되어 서 있다가 춤을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 불려졌던 민요는 오늘날 불려지면서 지금 시대에서 느껴지는 정서보다는 다르게 젖어들었다. 소박하고 정겨웠다. 일상복을 입는 한복에 앞치마를 두른 이웃집 처녀가 집안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제 멋에 못이겨서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다. 첫 무대는 많은 박수를 받으면서 다음 무대가 더욱 기대되었다. 다음은 '배구자의 타령춤'을 노해진이 재현했다. 무대 배경에 나온 배구자가 입은 무용복과 똑같이 재단을 해서 만든 옷인데, 배구자는 색동무늬가 박힌 옷을 입었고, 무용가는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 그린 무늬가 박힌 무용복을 입었다. 노해진은 배구자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려는 집중력 있는 연기력과 호흡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물 흐르듯이 시간이 흘렀다. 일단 타령조로 불린 무용곡이 신났다. 따라서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타령조라고 붙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구자는 1936년 직접 부른 도라지타령, 천안삼거리 곡이 담긴 음반을 낸 가무악에 능한 예술가다. 이 두곡을 엮고, 배구자의 영상, 사진, 기사자료를 참조하여 만든 신민요춤이라고 소개가 되었다. 무용을 보여주는 동안 무대에서 나오는 영상에는 미국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100세를 맞이하는 배구자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1928년 발표한 아리랑은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신무용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아리랑이 그 당시 최고의 유행가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만큼 배구자는 시대의 트랜드를 읽을 줄 아는 한국 근현대무용의 선구자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유럽, 남미, 미국 등 15개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세계적 무용가 반열에 오른 최승희의 대표 작품 '초립동'과 '검무 격'은 안나경 무용가, 쟁강춤은 북한출신 최신아 무용가가 재현했다. 최승희는 현대무용 계열의 창작춤은 주목받지 못하다가 1934년 일본에서 조선풍 소재 창작춤을 발표하면서 대성공을 이루고 대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1937년 동경에서 초연된 '초립동' 춤을 1995년 김백봉이 새로이 안무한 작품을 안나경이 무대에 올렸다. 신명나는 밀양아리랑 선율에 맞추어서 빠른 템포로 추었는데, 허공에 들었다 났다하는 발동작을 앙징맞게 연출하며 누나같은 색시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천진난만한 어린 신랑의 모습을 자연스레 연출하면서 큰 박수를 받았다. 최승희의 상장적인 춤이라고 하는 쟁강춤은 북한무용을 대표하는 무용이다. 최승희의 쟁강춤은 무희춤이라고 불리는데, 최승희의 '무희' 춤을 바탕으로 여러 명의 무용수가 나오는 군무이기 때문이다. 쟁강춤은 손목에 '쟁강, 쟁강' 소리를 내는 쇠팔찌를 걸고 흥겨운 리듬을 울리면서 추는 춤이며, 본 작품은 지난날의 '쟁강춤'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재형상하여 훌륭한 무대 예술 작품으로 완성한 특색있는 춤이다. 북한출신 최신아 무용가가 최승희 직계 제자답게 시원시원하게 보여 주었다. 1987년 파바다가극단에서 최승희 직계제자 김응범 선생에게서 쟁강춤을 배웠다. 남한 지역 전통 춤사위는 대개 느린 템포로 정중동을 표현한다. 여기에 북한 춤사위는 러시아 예술의 영향으로 남한보다 훨씬 빠른 템포를 유지한다. 한 시간이 넘는 무대를 남한춤만 채우기보다는 북한춤도 함께 보여주면 음악적 바란스가 안정적이라고 본다. 무대는 지루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외동포들에게 전통 춤사위만 보여준다면 러브콜이 없는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2019년 러시아 사할린아리랑제 무대에서 최신아가 선보인 쟁강춤으로 러시아 동포사회와 시민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오늘 무대에서도 연기력이 뛰어난 최신아는 쟁강춤을 완벽하게 선사했다. 그 댓가로 우뢰와 같은 관객의 박수를 선물로 받았다. 검무 격(格)은 검무는 신라 시대 때부터 만들어져 내려오던 검무를 모티브로 1934년 창작된 최승희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검무가 원형을 잃어버리고 검의 움직임만을 주로 담은 섬약한 모습 무사(武士)의 검무, 즉 검술의 무도정신을 이어받은 움직임들로 창작했다. 작품 '검무_격格'은 김백봉이 최승희의 원작 '검무'를 1995년 격(格)이라는 부제로 안무 발표한 작품이다. 무예를 닦는 무인의 기백과 그 속에 깃든 기혼(氣魂)의 이상경(理想境)을 하나의 격의 경지로 표현했다. 안나경은 최승희의 춤사위를 체화하고 자신있게 보여주었다. 신라를 상징하는 금관악기와 금색이 도는 금으로 만든 신발 등 화려한 금색 치장은 신라에서 숭상하는 검을 숭상하는 검도정신을 춤으로 형상화했다.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을 국수호가 재현했다. 전문가에 의하면 그 시설 조택원의 춤사위를 잘 표현했다라고 평했다. 원로 무용수답게 완숙한 선과 호흡을 선사하여 기장 큰 박수를 받았다. 조택원의 가사호접(袈裟胡蝶)은 조택원이 1935년 경성공회당에서 가진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초연 당시의 제목은 '승무(僧舞)의 인상(印象)'이었으나 이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창작춤을 위해 처음으로 음악을 작곡한 작품이었고, 작곡은 김준영이 맡았다. 작품은 속세를 동경한 승려가 심산유곡을 버리고 새벽녘에 사바세계로 내려오며 시작된다. 가사를 벗어 던지고 환희와 광란의 춤을 추던 승려는 지쳐 쓰러져 생각한다. 불교에 의지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가사를 집어 들고 산에 가려 해보나 이미 파계승이 되어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도,뒤로도 갈 수 없는 승려는 가사를 집어 던지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가사호점은 승려의 파계와 귀의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희열을 한국의 춤사위로 표현하고 있다. 조택원의 만종'을 김형남·김호은이 재현했다. 만종이라는 명화를 재해석하여, 신선한 스토리를 상상하게 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춤사위가 아름다웠다. 남과 여의 호흡이 잘 어울어져서 펼쳐지는 큰 원 속에서 마치 두마리 나비가 사랑을 찾아서 희롱하는 모습은 객석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조택원의 만종은 19세기를 풍미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만종'과 프레데리크 쇼팽의 '야상곡'에 영감을 얻어 창작된 2인무다. 조택원의 집 2층에 살고 있던 음악가 김생려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 엘만이 피아노곡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한 쇼팽의 '야상곡'을 밤낮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연주를 듣던 조택원은 마침 방에 걸려있던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만종은 1935년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조택원의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부부가 '야상곡'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비길 데 없는 평화와 고요, 비현세적인 경건함과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신비가 조택원의 머리에서 춤을 추었고, 상상을 실현하여 작품 '만종'이 창작되었다. 한편 9일에는 신무용 2세대 김진걸·김백봉·최현·황무봉·최희선·송범의 작품을 정민근·안귀호·정혜진·김혜윤·윤미라·손병우·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11·16·18·23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 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했던 시기다. 당대를 대표하는 김매자·배정혜·국수호·문일지의 작품 등 창작춤 24편이 4회에 걸쳐 공연된다. 25·30일에는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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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세실풍류,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국립정동극장(대표이사 정성숙)이 '세실풍류 : 법고창신,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개최한다. 4월 한 달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총 8회에 걸쳐 열리는 이번 공연은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 온 근현대 춤꾼들의 여정을 50개 작품으로 선보인다. 이번 공연의 주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옛것을 바탕으로 늘 새로움을 창조해온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다룬다. 1920년대 근대 신무용의 등장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와 국립무용단 창단기의 춤 그리고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었던 한국창작춤을 거쳐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근현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4일(목)과 9일(화)에는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을 다룬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4일에는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 노해진, 안나경, 최신아, 국수호, 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린다. 9일에는 한국전쟁 후 신무용 2세대 김진걸, 김백봉, 최현, 황무봉, 최희선, 송범의 작품을 정민근, 안귀호, 정혜진, 김혜윤, 윤미라, 손병우, 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 11·16·18·23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 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했던 시기다. 당대를 대표하는 김매자·배정혜·국수호·문일지의 작품 등 창작춤 24편이 4회에 걸쳐 공연된다. 25·30일에는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이사는 "근현대의 급변하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시대에 따라 우리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새로움을 추구했던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귀한 자리에 춤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라고 공연을 올리는 소감을 전했다. 회차별 프로그램 공연일 테마 출연자 작품명 4/4(목) <조선의 마음에서 태어난 춤> 1920년대 이후: 신무용의 등장 김선정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노해진 배구자의 타령춤 안나경 최승희의 초립동 최승희의 검무_격(格) 최신아 최승희의 쟁강춤 국수호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 김형남·김호은 조택원의 만종 4/9(화) <꺼지지 않는 창작의 불씨>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 정민근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안귀호 김백봉의 청명심수 정혜진 최현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김혜윤 황무봉의 연연(連緣) 윤미라 최희선의 달구벌입춤(達句伐立舞) 손병우 송범의 참회 김장우·최영숙 송범의 은하수 4/11(목) <춤의 새로운 도화선>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의 등장 최지연 김매자의 광(Shining Light) 김성의 김매자의 日舞 <하늘의 눈(目)> 이고운 배정혜의 유리도시 김세령 배정혜의 떠도는 혼 계현순 문일지의 멀리 있는 무덤 이윤경 국수호의 비천(飛天) 4/16(화) <타오르는 창작의 혼>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2 윤덕경 해를 마시다 정은혜 언제나... 그리고, 그러나 백현순 다시 꽃밭으로 이애현 봄날의 기억 태혜신 사르다 남수정 락무(樂舞) 4/18(목) <미래를 밝히는 정열의 횃불>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3 손인영 유유유(有.柳.流) 박시종 달빛아래, 농(弄) 김수현 홀연춘풍 만목개화(忽然春風 蔓木開花) 윤명화 메타포 3 홍경희 흰 바람 소리 윤성주 담청 4/23(화) <거침없는 창작의 불길> 200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4 이정윤 백송(白松) 황재섭 금시(琴詩) 조재혁 현 一. 안덕기 허튼가락춤 김평호 정글-봉우리 김용철 붉디 붉은 4/25(목) <새로 피어나는 춤>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이이슬 HOME(solo ver) 황서영 버티- 송윤주 MUSE 이지현 한몫 보연 율곡(汩曲) 유선후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 4/30(화) <청춘의 춤, 작열하는 푸른 불꽃>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조인호 BIRTH 박기환 香그이 김주빈 새다림 SeDarim 박철순 동화(홀로 서기) 기무간 비로소:걷는 사람 정명훈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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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창작춤 100년사 담은 50개 작품 선보인다한국 창작춤을 이끌어 온 근현대 춤꾼들의 여정을 50개 작품으로 선보인다. 국립정동극장이 '세실풍류 : 법고창신,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개최한다. 4월 한 달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총 8회에 걸쳐 열리는 이번 공연의 주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옛것을 바탕으로 늘 새로움을 창조해온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다룬다. 1920년대 근대 신무용의 등장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와 국립무용단 창단기의 춤 그리고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었던 한국창작춤을 거쳐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근현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주 4일(목)과 9일(화)에는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을 다룬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성행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무용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 노해진, 안나경, 최신아, 국수호, 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린다. 그 뒤를 이어 한국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위 창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신무용의 외형적 변화를 이뤄내며 한국 무용계의 단단한 토대를 다진 신무용 2세대 김진걸, 김백봉, 최현, 황무봉, 최희선, 송범의 작품을 정민근, 안귀호, 정혜진, 김혜윤, 윤미라, 손병우, 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 둘째 주와 셋째 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여러 국제 행사를 통해 해외 무용 단체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한 시기로, 당대를 대표하는 안무가 김매자, 배정혜, 국수호, 문일지의 작품이 무대 위 펼쳐진다. 그들의 뒤를 이어 한국창작춤을 이끌어온 교육자, 시·도립 무용단의 수장, 탁월한 안무력의 남성춤꾼들의 작품 등 한국 창작춤 작품 24편이 4회차에 걸쳐 공연된다. 마무리를 장식할 25일과 30일에는 2010년대 이후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가장 활발하게 동시대의 창작 동향을 이끌고 있는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폭넓어진 한국춤의 언어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이사는 "근현대의 급변하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시대에 따라 우리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새로움을 추구했던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귀한 자리에 춤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라고 공연을 올리는 소감을 전했다. 4월 4일부터 매주 화·목 19시 30분에 공연된다. 3월 7일부터 국립정동극장 공식 홈페이지 및 인터파크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공연일 테마 출연자 작품명 4/4(목) <조선의 마음에서 태어난 춤> 1920년대 이후: 신무용의 등장 김선정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노해진 배구자의 타령춤 안나경 최승희의 초립동 최승희의 검무_격(格) 최신아 최승희의 쟁강춤 국수호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 김형남·김호은 조택원의 만종 4/9(화) <꺼지지 않는 창작의 불씨>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 정민근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안귀호 김백봉의 청명심수 정혜진 최현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김혜윤 황무봉의 연연(連緣) 윤미라 최희선의 달구벌입춤(達句伐立舞) 손병우 송범의 참회 김장우·최영숙 송범의 은하수 4/11(목) <춤의 새로운 도화선>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의 등장 최지연 김매자의 광(Shining Light) 김성의 김매자의 日舞 <하늘의 눈(目)> 이고운 배정혜의 유리도시 김세령 배정혜의 떠도는 혼 계현순 문일지의 멀리 있는 무덤 이윤경 국수호의 비천(飛天) 4/16(화) <타오르는 창작의 혼>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2 윤덕경 해를 마시다 정은혜 언제나... 그리고, 그러나 백현순 다시 꽃밭으로 이애현 봄날의 기억 태혜신 사르다 남수정 락무(樂舞) 4/18(목) <미래를 밝히는 정열의 횃불>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3 손인영 유유유(有.柳.流) 박시종 달빛아래, 농(弄) 김수현 홀연춘풍 만목개화(忽然春風 蔓木開花) 윤명화 메타포 3 홍경희 흰 바람 소리 윤성주 담청 4/23(화) <거침없는 창작의 불길> 200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4 이정윤 백송(白松) 황재섭 금시(琴詩) 조재혁 현 一. 안덕기 허튼가락춤 김평호 정글-봉우리 김용철 붉디 붉은 4/25(목) <새로 피어나는 춤>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이이슬 HOME(solo ver) 황서영 버티- 송윤주 MUSE 이지현 한몫 보연 율곡(汩曲) 유선후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 4/30(화) <청춘의 춤, 작열하는 푸른 불꽃>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조인호 BIRTH 박기환 香그이 김주빈 새다림 SeDarim 박철순 동화(홀로 서기) 기무간 비로소:걷는 사람 정명훈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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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2) <br>김진걸 명인의 '산조춤' 춤사위산조춤 신무용 제2세대 중 독창적 미적 감각 작품 중 역작을 꼽으라면 바로 1957년 첫 선을 보인 김진걸의 '산조춤'이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산조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순수하게 소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키워드입니다. 제 산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을 아우른 작업인데, 승무·탈춤·무속춤 등을 모두 함축했어요.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도 비로드로 만들고 버선 대신 맨발에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습니다.”(김진걸,1953년) ‘산조’는 기악 독주라는 뜻이다. 1953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에서 춤 영감을 얻어 추기 시작했고 1960년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걸류 산조를 발전시켰다. 산조음악과 발생을 같이하여 기방의 입춤 형태에서 파생된 산조춤은 인간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신체라는 움직임의 매체를 통하여 표출해 내는 인간의 해방, 육체의 해방을 의미하고 있다. 그의 산조는 오른발과 왼팔 위주의 춤사위로 구성된다. 남성적인 춤사위는 탈춤에서 볼 수 있는 오른쪽 다리 직각으로 세워들기와 왼팔 내뻗기 등이다. 발사위가 은근하고 화려해 여성 무용수에게 인기있는 춤이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모든 전통에 그 맥을 두고 있으며, 동작의 시각적인 면에서 선을 강조하고 있다. 산조춤은 모든 한국장단을 갖고 있으며, 한국무용의 많은 춤사위의 표현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춤으로써,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그만큼 창작의 면모에 있어서도 표현 범주가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김진걸 김진걸(金振傑)은 ‘음악의 무용화’를 화두에 두고 삶의 희노애락을 춤사위에 담아낸 역작 '산조춤'을 발표했다.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무렵 춤에 입문했다. 1940년대 초반 일본무용가 요시키(吉木) 문하에서 현대무용을 배웠고, 조택원·장추화·이채옥에게 사사했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959년 시공관에서 신무용적 미감이 짙은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초대 단원으로 발탁되어 후일 지도위원을 지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약 20여년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1983년), 제 7회 무용대상(1986년), 화관문화훈장(1987년), 예술문화 공로상(1988년) 등을 수상했다. 김진걸 약력1926년 서울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42년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0년 요시카 문화생 입문 1944년 길목 무용연구소 입문1946년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1951~1953년 국방부 정훈군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1975년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1956년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4-1992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 재직 1978~1985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89년 『金振傑 散調춤 舞譜-내 마음의 흐름』(은하출판사) 출간 1989년 ‘김진걸 산조춤 무보’ 제작 1998~2008년 전통예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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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조춤의 대가, 김진걸산조 춤의 명인 김진걸(金振傑, 1926-2008) 1926년 출생, 2008년 사망. 서울 출신의 무용가이다. 조택원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계의 맏형이자, 한국 신무용의 2세대를 대표한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래, 모두 11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규모가 큰 무용극보다 '산조'(散調)등의 걸작을 만들었다. 아울러 김진걸무용연구소를 설립해 김영희, 조흥동, 이운철, 정명숙, 문일지 같은 재능 있는 무용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 밖의 주요 출연 작품으로 <영은 살아 있다>, <심청> 등이 있고 주요 안무 작품으로는 <배신>, <향토의 선율>, <초혼> 등이 있다. 제자로는 임미자, 조흥동, 민준기, 이운철, 정명숙, 김세일라, 문일지, 김숙자, 김경자, 심의식, 정금란, 조카딸 김수남, 정창영, 유정숙 등 우리 무용계를 빛내는 명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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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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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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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 전통춤 계승과 발전방향문화론적 시각과 미래 방안 1. 전통춤 패러다임과 계승 문제의 접근방법 문화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환경이 변함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면서 변천한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형성되며 춤의 양상(樣相)과 양태(樣態)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모(變貌)한다.서양춤의 변모는 고대의 의식적(儀式的)인 리투얼 댄스(Ritual Dance)로부터 중세 포크댄스(folk dance)와 코트댄스(court dance), 절제와 균형의 합일을 강조하는 18세기 클래식 발레(Classical Ballet), 꿈과 이상의 도약을 향한 19세기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의 주관적인 형식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된 모던 댄스(Modern Dance)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왔다. 한국춤 역시 고대의 제천의식춤(祭天儀式舞), 중세의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민속춤(民俗舞), 근세의 궁중춤(宮中舞), 민속춤(民俗舞),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현대의 전통춤(傳統舞), 창작춤(創作舞), 외래춤(外來舞) 등 각 시대별로 주요한 패러다임(paradigm)이 존재해 왔으며, 또 각 시대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의상 우리는 근대이전 시대의 전통양식을 갖춘 춤들을 통틀어 ‘전통춤’이라고 하고 근대 이후에 유입된 발레와 모던댄스를 ‘외래춤(외국춤)’으로 구분한다. ‘한국춤’은 협의로 전통춤과 한국창작춤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고, 광의로 한국에서 한국인이 추는 외래춤까지도 포괄하기도 한다. 명칭도 한때는 ‘신무용’, ‘고전무용’, ‘한국무용’, ‘민속무용’, ‘전통무용’ 등으로 두서없이 부르기도 하였고, ‘무용’과 ‘춤’도 혼용하여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근대는 갑오경장 이후 서구 열강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모든 문물이 서서히 유입되고 변화양상을 보이면서 1902년 협률사의 등장으로 과거에 궁중과 기방 등에서 추던 춤들이 최초로 극장공간과 공연문화가 태동하면서 극장춤으로 시도되었다. 외국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는 발레와 현대춤이 자리 잡아 가면서 전통춤과 창작한국춤과 함께 한국춤계를 주도하며 저변을 확대해갔다.이에 근현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춤의 계승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문화론적 시각에서 계승문제를 접근하고 미래 발전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전통춤 계승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 중에서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기하여 계승문제를 파악하기로 한다.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2. 전통춤 현황과 접근배경 1) 전통춤 종류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현황 한국의 전통춤도 시대변천에 따라 부침(浮沈)을 계속하면서 현대까지 전승되었다. 이상은 전통춤 분류와 몇몇 종목의 예시일 뿐이고 근현대로 전승한 궁중춤 50여종, 무당들의 무구춤 300여종, 재인청춤(화성 50여종, 안성향당춤 40여종)과 전통예인들이 전승한 춤(한성준 80여종, 김인호 30여종, 김덕명 20여종) 등등 정병호 정리 370여종을 포함한 필자 조사 1000여종의 전승춤 등 수없이 많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강강술래(8호, 소리춤), 진주검무(12호), 승무(27호), 승전무(21호), 처용무(39호), 학연화대 합설무(40호), 태평무(92호), 살풀이춤(97호) 등 8종이며,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한량무(서울45호), 살풀이춤(서울46호), 동래학춤(부산3호), 동래고무(부산10호), 동래한량춤(부산14호), 승무·살풀이춤(경기8호), 안성향당무(경기34호), 고깔소고춤(경기56호), 승무(대전15호), 입춤(대전21호), 살풀이춤(대전20호), 승무(충남27호), 살풀이춤(대구9호), 호남살풀이춤(전북15호), 한량춤(전북44호), 호남산조춤(전북47호), 예기무(전북48호), 진주한량무(경남3호), 진주포구락(경남12호), 진주교방굿거리춤(경남21호), 범패와 작법무(인천10호), 날뫼북춤(대구2호), 수건춤(18호), 진도북춤(전남18호), 화관무(황해4호), 평양검무(펑남1호), 부채춤(평남3호) 등 27종이 있다. 그밖에도 중국 동북3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조선족춤 중에도 많은 춤종목이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즉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족농악무(象帽舞、乞粒舞)를 비롯하여 길림성의 조선족아박무(牙拍舞, 안도현), 조선족부채춤(연변주), 조선족칼춤(도문시), 조선족원고무(도문시), 조선족학춤(안도현), 조선족접시춤(훈춘시), 조선족장고무(도문시), 조선족손북춤(手鼓舞, 도문시), 조선족방치춤(棒槌舞, 도문시), 조선족상모춤(연변주, 국가급), 조선족삼노인(화룡시), 조선족탈춤(도문시), 조선족칼춤(연변주), 조선족찰떡춤(떡메춤 打糕舞, 연변주), 요녕성의 조선족농악무(农乐舞, 乞粒舞, 본계), 조선족탈춤(철령), 흑룡강성의 조선족접시춤(碟子舞, 감남현), 조선족물동이춤(顶水舞, 목단강시), 조선족아박무(牙拍舞, 해림시) 등 20여종이 지정되어 있다(2012년 목록). 2) 전통춤 계승문제의 접근배경전통춤 계승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 <문화의 5대 특성>과 <문화인류학적 3대 시각>에서 전통춤의 계승문제를 분석하고 나타난 문제점을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는 발전방향을 제시하기로 한다. 현대생활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문화(culture)’는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 5대 특성(속성)을 가진다.① 학습성(후천성): 인간의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② 공유성: 인간은 서로 공통된 행동과 생활양식, 즉 서로 고유한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③ 축적성: 문화는 서로 발달하고 상호작용하며 축적되면서 진보하게 된다.④ 변동성(다양성): 축적되는 문화를 통해서 항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동하여 발전한다.⑤ 전체성(통합성): 문화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비슷하게 연관되어 통합성을 지닌다. 또한 문화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시각에는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또는 cultural relativism)’ 그리고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이 있다(한상복 외, l985). ①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문화는 생활양식의 여러 측면, 즉 정치, 경제, 법률, 가족, 친족, 종교, 예술, 관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이라든가 사고방식, 생산양식, 인간관계, 신앙생활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그 문화와 관련된 많은 항목들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 설명해야 의미관련(relevance)을 좀 더 명확하고 본질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승무는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무엇으로 추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는데 흔히 춤사위와 계보 수준에서 머물면 그 춤의 총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이 춤동작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cultural relativism)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적 맥락과 그 민족의 생활사(life history)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타문화를 함부로 평가 비하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자세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각기 역사와 가치,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해 편견이나 ‘자민족중심주의(문화국수주의, ethnocentrism)’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아무리 미개민족의 하찮은 민속춤이라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뛰어난 발레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자기 민족춤은 우수하고 타민족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동안 근현대기를 지나면서 한국전통문화를 우월하게 놓거나 비하하는 수많은 사례를 겪으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통춤에서도 한국과 여타 아시아국의 춤에 대해 비교우위나 비하의식이 남아있고, 무형문화재 지정춤과 비지정춤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서 추종과 외면현상으로 수많은 춤들이 소멸되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흔히 궁중춤은 품격이 있고 민간춤은 저급하다는 시각과 문화재 지정춤은 우수하고 비지정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은 그릇된 태도이며 다같이 소중한 한국전통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③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비교론적 시각은 두 지역 이상의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유사성 또는 공통점과 상이성을 명확히 규명하여 ‘보편화(普遍化, generalization)’하고 ‘특정화(特定化, specification)’하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일반화(一般化)’하는 관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영숙살풀이춤(재인계, 서울중부지역)과 이매방살풀이춤(기방계, 호남지역), 김숙자살풀이춤(신당계, 경기남부지역) 등의 보편성과 일반성, 지역성, 공통성, 상이성 등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3. 전통춤 계승의 문제점 1)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춤은 이러한 특성에 맞게 잘 전승하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통춤 계승에서 나타난 문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 –정책과 여과능력 부재 국권마저 상실했던 근대시기에 아무런 대응과 여과 없이 일본을 통해 서구문명이 유입되었다. 1926년 이시이바꾸(石井漠)을 통해 서구 현대무용이 유입되었고, 최승희, 조택원들이 제자로 일본유학을 다녀와 한국무용계를 주도하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유럽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이 유입되어 한국무용계에는 한국무용(전통춤 포함), 현대무용, 발레의 삼분법으로 대학무용학과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 열등주의와 사대주의 19세기말 갑오경장(1894)으로 구시대적 문물제도를 버리고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개혁을 기점으로 근대화는 점차적으로 정착되어갔으며, 한편에서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사정을 반영한 측면을 중시하였고 그것은 민족적 자각의 발로가 되어 민족주의가 발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문화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힘입어 ‘신무용’이 ‘예술’로 인정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전통시대의 춤을 ‘비예술(非藝術)’로 기녀나 무당이나 민간인들이 추는 낡고 촌스런 문화로 무시하는 경향도 팽배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의식이 깨어나 최남선, 손진태, 송석하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민족자각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였고, 신무용에 대응하는 전통춤을 발굴하고 무대화하는 노력도 미약하나 발현되기도 하였다. 1902년 협률사와 1907년 광무대 등에서 재인청출신 김인호와 뒤를 이은 한성준 등이 전통춤의 무대화를 위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정립하였다. 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원형전수와 폐쇄적 교육 한국의 전통적 교육방식은 도제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능분야 역시 스승의 독창적 비법을 전수받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똑똑한 제자들은 스승의 기법을 배우고 자기개발을 통해 더욱 문화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원형전수’라는 미명하에 스승의 기법을 한 치라도 변화시키면 위법이라고 하여 문화의 발전지체 현상 속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매방 승무와 살풀이춤을 순서 하나라도 틀리면 큰 죄를 짓는 국가문화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창조적 계승의 원천봉쇄 해방 후에는 더 개방적이어서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외래문화가 직수입되어 이전보다 수용과 대응문제에서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 왔다.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법률 제961호)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문화재보호법에 안주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지내왔지만 지정되지 못한 수많은 전통춤들은 반대로 더 소외되고 인멸되는 비극을 잉태하였다. 게다가 ‘원형보존’이라는 무형문화재법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 일방적 전수만이 지속되면서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변화해가는 현대문화와 세계화에 더욱더 멀어지고 대한민국시대의 전통춤을 창조해내지 못하는 편식과 전통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다. 2) 제도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① 무형문화재 제도 지정당시의 문제-전통문화의 소멸위기-국가관리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대 국제정세의 서세동점(西勢東占)과 근현대화로 인한 ‘전통문화유산의 소멸위기’를 극복하려는 시급성 때문이었다. ② 무형문화재 제도 현재의 문제-‘원형’보존의 박제화-‘전형’ 개념도입현재는 ‘문화원형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전승과 평가의 기준이 되는 ‘문화원형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이다. 원형(原形)과 원형(原型)은 있긴 있으나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화의 속성은 원형질(原形質)은 있으나 형태(形態)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무형(無形)문화재인 것이다. 문화원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마다 변화된 형태를 남기면서 ‘성장(成長)하는 생명체(生命體)’와 같은 것이다. 시간의 흔적은 있으나 고정된 형태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시형(時形) 또는 시형(時型)’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비지정문화재의 무관심과 소외현상도 심화되는 역기능도 나타나고 있으며, 지정종목도 ‘원형전승’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퇴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2015년 다시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되면서 ‘원형(原形)’논리에서 ‘전형(典型)’으로 그동안 지나치게 박제화 되었던 무형문화재의 발전변모의 가능성을 담보하면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운영기준과 연계한 법안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근본적으로 전통시대의 문화 변동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고 장기적인 변화였다. 이러한 정적인 문화환경에 살아온 한국인은 근대 서구문명의 범람과 현대화 과정에서 동적인 문화변동에 대처능력도 미흡했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개혁에 미온적이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제식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전수받아온 장인정신은 변화를 부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수동적인 전승에 안주하여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일각의 전승 성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4. 전통춤의 미래 발전 방향 1) 전통춤에 대한 문화론적 발전 방향① 문화에 대한 3대 시각인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을 견지해야 한다. 특히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으로 1000여종에 이르는 비지정 춤에 대한 관심과 전승에 지정춤과 동격으로 전승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화, 무대화, 전승력을 키워야 한다. ② 문화의 5대 특성인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의 입장에서 발전시킨다. 특히 변동성(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제는 ‘원형’보다는 ‘전형’의 개념으로 발전적인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전형개념에는 ‘원형’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최초 전수 당시의 춤을 기본으로 간직하며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발전적인 노역을 경주하는 이중적이고 양면적 전승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축적성이며 역사성이 되어간다. 2) 전통춤에 대한 원론적 발전 방향 ① 삼원적(三元的) 전승방향 국제로 시야를 넓혀 한국과 가까이는 한중일, 그리고 세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삼원적(三元的)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한국의 전통춤을 원형대로 지켜나가는 일(원형적 전승), 전통춤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일(발전적 전승), 세계가 하나로 집약되고 가까워지는 현대사회에 세계춤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춤을 창조해 나가는 일(창조적 전승)이다. ② 세계화 방향 지금까지 전통문화는 「토착화」에 주력했다면 이후는 세계적인 「보편화」가 과제이다. 소멸되던 전통춤은 일차적으로 한국화(韓國化)작업이었다. 글로벌시대에는 세계화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 주체성이 ‘국내적’(한국문화, 한국춤)이라면 세계성은 ‘국제적’(국제문화, 국제춤)이다. 주체성이 자기를 지키는 ‘보수’라면 세계성은 자문화와는 별개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이다. 또 문화논리로 보면 주체성은 ‘전통성, 수구성, 독창성’이고 세계성은 ‘외래성, 통합성, 전파성’에 비유된다. 즉 주체성(국내문화)과 세계성(국제문화)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두 명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상반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수입이 문화수출보다 비중이 더 컸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국제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여태 밑지며 살아왔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지 우리문화를 세계시장에 내세우는 노력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한류문화, K-culture’(K-pop, 한국음식, 화장품, 드라마 등)가 세계무대에 전파되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전통춤이 국내적으로 스포츠댄스, 힙합 등에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일과 더불어 ‘한류춤, K-dance’로서 세계무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 ③ 대한민국시대 신전통춤의 창조 노력 5천년의 한국 문화사에서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도자기문화를 살펴보면 선사시대 토기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기로 창조하여 찬란한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전통춤도 시대별로 다양한 춤들이 창조되고 전승되었다. 근세말 효명세자는 20종의 궁중춤을 창조했다. 김인호와 한성준은 100여종의 전통춤을 정립하여 전승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무용가들은 대한민국시대 전통춤을 창조 또는 재창조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시대나 근대의 과거춤에 매달려 미래춤을 창조하는데 소홀히 했다. 우리보다 북한은 전통춤은 무시했지만 민족적인 색채를 띤 새로운 민속춤을 부단히 창출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전통고수에 매달리는 동안 북한은 재창조에 매달렸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신전통춤, 재창조춤 등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백봉 부채춤은 세계무대에서는 한국민속춤으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통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신전통춤들이 쏟아져 나와야 미래국가시대가 도래했을 때 대한민국시대에 찬란한 전통춤들이 창조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문화(춤)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력(전승력)을 지니고 진화하며 오랜 동안 전승하게 되는데 문화의 속성에서 벗어나면 소멸된다.”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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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의 지역춤, 부산·경남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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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 부채춤·화관무 만든 무용가 김백봉 별세한국무용의 르네상스를 이끈 김백봉(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무용가가 1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고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 ‘부채춤’과 ‘화관무’의 창시자로서 한국 무용 르네상스의 최정점을 이룩한 무용가이다 "김백봉을 제외하고 한국무용을 논할 수 없고 특히 군무(群舞)는 그의 영향으로 이뤄졌다”(송범 전 국립무용단장) 학계에서는 20세기 한국무용의 개척자가 최승희, 조택원, 한성준이라면 한국무용 르네상스의 정점에 김백봉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인은 1927년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1943년 최승희 무용단원으로서 일본·만주·중국·동남아시아 각국을 순회 공연했다. 최승희는 고전 무용의 현대화를 이끈 시초로 한국 무용계의 전설로 꼽히는 인물이다. 김백봉은 1944년 스승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동생 안제승(1928~1998)과 결혼했다. 1946년에는 최승희와 함께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단 제1무용수겸 부소장, 상임안무가로 활동했다. 198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서울시 문화상, 캄보디아 문화훈장, 대한민국예술원상, 보관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부터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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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0)김종욱 요즈음의 또 한 개의 악극단 ‘무지개’가 탄생되었다. 동 악극단은 홍금석洪金錫씨 주재로 시내 주교정 43번지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창립공연으로는 오는 26일부터 1주일 간 시내 제일극장에서 홍영洪影 작 겸 연출로 악극 ‘낙화유수落花流水’(전 10경)를 올린다고.(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청우대] 거리를 다리는 음악전차가 거듭 일본 이아기로 죄송한 터이나 목하 동경 시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에 걸쳐 매일 음악을 연주하는 전차가 달리고 있다 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제도帝都 청정화운동’의 한 가지로 도민생활국都民生活局 교육과와 문부성文部省 음악국이 주체가 되어 청산차고靑山車庫에서 세 대의 전차를 발차시켜 여기에 여성 취주악단과 합창단이 탑승되어있다는 것이다. 남의 하는 것을 그대로 직입直入 모방模倣하라는 것도 싱거운 일일지는 모르나 도대체 우리 수도엔 생활하는 낭만이 없다. 샐러리맨은 생활고와 아침 저녁으로 전차 행열 또 만원속에 시달리고 거리마다의 먼지통에 상 찡그리고 사는 모양, 생활지옥이라면 과장이랄까. 여자 경관의 교통정리와 도람 깡의 휴지통도 좋지만 ‘귀로부터의 청정화운동’ 한 번 모방할 법하다. 음악교육과는 영역 아닐지는 모르나 다- 우라 수도의 명랑화를 위하여 운수부와 한 차례 건네보면 어떻소? (컷은 동경의 음악전차) (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대두擡頭하는 반동과 그 극복책(4): 채정근 극장 관계인은 극장 건물을 연예물의 향상과 극단과의 공존공영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하기보다 일정시의 경영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영리에만 급급하려는 기풍이 대다수다. 이 영리를 위한 극장 수입 증가를 꾀하는 나마에 당당한 한성극장협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맹극장의 관리인 중의 일부 인사는 저속한 악취미를 지나 악랄惡辣한 상연물을 연예단체에 강요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일부에서 문화인은 산반算盤을 모른다 하며 극장 경영의 자격이 없는 듯이 폄貶하는 유배流輩도 있으나 실은 문화인들이 경영에 절대로 참가해야 한다는 근거가 나오는 것이다. 이상에서 주로 연예단의 경제적 예술의 향상발전을 위하여서는 극장 획득 내지 극장과의 밀접한 제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를 위하여서는 연예단은 극장협회와 어떻게 하여서든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장에 극장협회에 예속隸屬하라는 뜻이 아니고 또 극장협회 측으로서는 연예단과의 협력을 하지 않는 한 외국영화 식민지화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 아니라 조선 연예계에 대하여서는 반역적 행위를 범행하는 죄과를 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현재의 극장의 대부분이 적산 관리에 속하여있는 극장의 이윤이 그대로 관리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만큼 더욱 문화적인 면을 살려 연예계를 향상 시키는 것이 관리인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것이다. (계속) (藝術通信 263호. 1946년 8월 12일) = 무용 = [광고= 조선무용예술협회朝鮮舞踊藝術協會 창립공연 곡목] ‘원무곡’= 서울무용원 정지수 한동인 조영희趙英姬 김이원金梨園 이경희李卿姬 허문경許文卿 김영 유성희柳星姬 ‘봉선화=’ 조용자 ‘산신무山神舞’= 정인방 ‘비단緋緞거미’= 한동인 마음= 이석예 ‘탕자蕩子의 골맥骨脈(제삼열품第三列品)’= 김해성 ‘고苦’= 구연묵具然黙 ‘탈춤’= 임경희 ‘만종’= 조택원 이석예 김선영 ‘무고舞鼓’= 이석예 강선옥姜善玉 ‘해방’= 박용호 ‘아리랑 회상곡’= 진수방 ‘산에 즐거움’= 함귀봉 김용화 ‘여명黎明’= 조환曺煥 ‘다부라의 리듬’= 장추화 ‘화랑’= 정지수 ‘지열地熱’= 김미화 ‘애국가’= 전원(藝術通信 264호. 1946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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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32)김종욱 경향지방에서 가장 많은 문학청년을 포옹하고 있는 인천문학동맹에서는 그동안 과학적 행사 방법을 고려 중이던 바 금반에 시인 김기림 씨와 오장환吳章煥 씨를 초빙하여 28일 즉 어제 오후 7시 반부터 인천 제2 공회당(무덕전武德殿)에서 시강연과 낭독회 ‘시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인천 발) (藝術通信 251호. 1946년 7월 29일) = 무용 = [최승희 여사의 38 이북 행은 북조선에 큰 수확-조택원趙澤元 씨 담- ] : 작보昨報한 무희 최승희 여사의 38도 이북에 대하여 조선무용예술협회 위원장 조택원‘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귀지貴紙를 보고 비로소 처음 알았는데 동 여사의 이번 38도 이북 행에 대하여서는 위선 나로서는 조금 섭섭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의 중심지대인 38도 이남 남조선무용계에 있어서 같이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 여사의 38도 이북 행은 북선 예술가는 물론 일반에게도 큰 수확이 있을 것을 믿는다. 물론 그 반면에 남조선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요컨대 나는 언제든지 38도 선이 철폐될 것을 믿으며 또한 급속히 실현될 것을 갈망하는 바이므로 나는 그때까지 동 여사의 북조선 예술계의 재건에 있어 건투하여주기를 바란다. ”(藝術通信 251호. 1946년 7월 29일) = 음악 = [군악대원 제2차 모집]: 인천해안경비군악대 경성사무소(명치정 국제악기상회 내)에서는 작일부터 월말까지 제2차 군악대원(하사관 급) 수명을 모집 중인데 지원자는 전기 사무소로 문의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藝術通信 251호. 1946년 7월 29일) [8. 15 기념행사첩]: 국악원= 8. 15 기념행사로 예술과의 후원을 얻어 해방 1주년 기념 공연으로 임서방씨 구성의 국악 ‘언 파레이드’를 동원 전원 총동원하여 오는 8월 23일부터 5일까지 3일 간 시내 국도극장에서 개최.(藝術通信 251호. 1946년 7월 29일) = 영화 = [‘영화연구’ 예회 연기]: 지난 번 영화동맹 강좌 수강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영화연구회’ 예회는 8월에 한하여 부득이 18일 오전 11시로 연기하였다고 한다. 장소는 동회 사무실(藝術通信 252호. 1946년 7월 30일) [군정 영화시보 9. 10보 내용]: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 제작 뉴스의 9, 10보는 얼마 전의 8보와 함께 불일 일반 공개되리라 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런데 이 시보는 원래 일정한 발행 시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대략 우금까지 월 1회의 실시를 보고 있었으나 금번에 한하여 주보적인 형식으로 연속 공개케 된 것은 주목할 만한 능률이라 할 것이다. 9보 내용: 1. 연희대학교 창립30주년 기념식 2. 인천해안경비대의 훈련 3. 불탄 법요식 거행 4. 조미친선 육상경기 실황 5. 특보 ‘아이젠하워; 원수 내조 6. 특급 해방자호의 진급 7. 미국의 종자 도착 10보 내용: 1. 전국 농악대회 광경 2. 미국 영령 추도식 3. 전국 특산품 전람회 4. 군정청 공로직원 표창 5. 자유신문 도시 대항 야구실황 (藝術通信 252호. 1946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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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19)김종욱 =영화= 기보 조선영화사 제작 ‘조선의 손’ 기획 좌담회를 래 15일 조선고고학계의 권위자들과 군정청 예술과 기타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동사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39호 1946. 7. 14) =음악= [고려교향악단 야외연주회 준비 ]: 고려교향악단에서는 시민 위안을 위하여 금하기 중 매 토요일마다 덕수궁에서 야외연주회를 개최코자 방금 준비 중인데 이 연주회는 자유신문사에서 후원하리라고 한다.(藝術通信 239호 1946. 7. 14) = 영화 = [조영 사진부 20일 개관 ]: 조영에서는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보통 사진부를 이번에 동사 연기부원 김일해, 권영팔權寧八, 김걸金傑 씨 등 3씨에게 경영권을 일임하였다는데 방금 내부수리와 기구증설을 비롯하여 사진연구 상담실까지 완치하고 특히 이번 신장 후부터는 일반실도 설치한다는데 개관은 늦어도 오는 20일부터라 한다.(藝術通信 240호. 1946. 7. 15) [변사 구락부원 방역선전에 활약 ] : 제1차 가두방역 선전에 많은 성과를 걷운 변사구락부에서는 거 13일부터 또다시 2차 선전의 활동을 개최하고 있다.(藝術通信 240호. 1946. 7. 15) = 영화 = [영화동우회 임총 결의로 영화예술연구회로 개칭] : 영화동우회에서는 지난 14일 정오부터 본사 회의실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동회의 명칭을 영화예술연구회로 개칭하는 동시에 현존 간사제를 위원제로 변경한 다음 동 연구회는 매월 한번 씩 월례회를 개최하고 영화비판과 연구발표를 할 것과 기외에 동회의 사정으로 영화시사회, 간담회, 기관지 발행 등의 계획을 결의하였는데 특히 동 연구회는 절대로 기성 단체의 산하가 되지 아니하고 끝까지 자주독립 적에서 발전해 나아갈 것을 결의하였다 한다.(藝術通信 241호. 1946. 7. 16 ] =영화= [‘자유만세’ 출연 중 박순남朴順男씨 중상]: 고려영화협회 배우 박순남 씨는 지난 14일 성북정 성지城趾에서 ‘자유만세’ 탈옥 장면에 출연 중 높이 약 15미터 가량 되는 성 위에서 추락하여 발목에 중상을 입어 목하 자택에서 가료 중인데 약 2주간의 치료를 요한다고 한다.(藝術通信 242호. 1946. 7. 17) = 연극 = [무궁화악극단에서 고 박향림朴響林 여사 추도공연]: 무궁화악극단에서는 동 7월 19일부터 23일까지 동양극장에서 고 박향림 여사의 추도공연을 개최하여 수익 중 비용을 제외한 잔액 전부는 고 여사의 유가족에게 주기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42호. 1946. 7. 17) = 영화 = [고려영주映株 임시총회 소집 ]: 고려영화주식회사에서는 내 20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증자에 관한 건을 토의하기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42호. 1946. 7. 17) 음악. 키노드라마 제작 준비 대한문화흥업사大韓文化興業社의 신기획 ]: 대한문화흥업에서는 이번에 신계획으로 영화감독 신경균申敬均씨의 구성으로 음악, 키노드라마 약 4권 정도의 문화영화 제작을 준비 중인데 그 완성은 8월 하순 경이라 한다.(藝術通信 242호. 1946. 7. 17) = 사진 = [사진예술연구회원 3씨 태백, 오대 학술탐구대에 참가]: 조선산악회 주최로 거행되는 강원도 태백산, 오대산 연맥連脈의 학술탐구답사에 조선사진예술연구회 대표 회원 현일영玄一榮, 임석제林奭濟, 이동항李東港 3씨도 사진반 겸 학술부원으로 참가하여 오는 25일 30일 간 예정으로 서울을 출발할 터이라는데 이리하여 3씨의 손으로 사진에 수록된 태백, 오대산의 절경과 학술 탐구재의 활동 상황은 9월 중순 개관 예정인 사진전람회를 통하여 일반에 소개될 것이라 한다.(藝術通信 243호. 1946. 7. 19) = 무용= [조선무용예술협회 공연 8월 5일부터 3일 간 국도극장에서]: 조선무용예술가협회에서는 드디어 래 8월 5일부터 3일 간 국도극장에서 창립기념공연을 하기로 되었는데 프로 출연자는 다음과 같다 한다. 무고= 김선영金先英, 이석예李石藝, 이선옥李善玉, 산신무山神舞= 정인방, ‘희생’= 장추화, ‘산의 즐거움’ = 함귀봉, 미완= 김미선金美善, ‘비단나비’= 한동인, ‘아리랑 사상’= 진수방, ‘만종’= 이석예, 조택원, ‘원무곡’: 김령, 유성희, 이향희李鄕姬, 정지수, 한동인, ‘고독’= 이석예, ‘탕자의 골맥骨脈’= 김해성, ‘봉선화’’= 조용자, ‘해방’= 박용호,, ‘백이숙제伯夷叔齊’ = 정지수. ‘애국가’ 전원 (藝術通信 243호. 1946.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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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15)김종욱 6월 15일 국제-극장-에서 시사]:조선영화사에서 제작 중이던 ‘제주도 풍토기’와 ‘해방뉴스’ 제 6호는 드디어 이번에 완성되어 래 15일 오존 10시에 국제극장에서 관계자를 초청하여 시사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209호 1946. 6. 10) 무용가협회 역원 결정, 지난 8일 결성을 마친 조선무용가협회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 조택원, 부 위원장 함귀봉, 서기장 문철민, 중앙집행위원 조택원, 함귀봉, 문철민, 정지수, 장추화, 한동인, 박용호, 최승희 현대무용부 수석위원 최승희, 발레- 무용부 수석위원 정지수, 교육무용부 수석위원 함귀봉, 문예부 수석위원 문철민, 무용 미술부 수석위원 김정환 (藝術通信 209호 1946. 6. 10) [대한예술무용협회를 따로 조직]:선방예술무용연구소仙芳藝術舞踊硏究所 급 삼화예술무용三和藝術舞踊, 성미원무용연구소成美園舞踊硏究所에서는 거 8일에 신발족한 조선무용가협회와 별개 조직체인 대한예술무용협회를 조직하였는데 동회의 역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김천규金天圭, 상무위원- 成美園, 양선방梁仙芳, 김삼화金三和, 정인방, 김윤호金潤鎬 (藝術通信 209호 1946. 6. 10) = 영화 = [개칭 ‘서울 영화동호회’로 발족]: 기보한 바와 같이 영화강좌를 계기로 수강 동인이 모여 조선영화동우회(가칭)는 지난 9일 결성식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 명칭을 ‘조선영화동우회’로 개칭키로 정식 결정하였으며 반원般員은 다음과 같다. 간사장- 박철朴哲, 간사- 김명수金明洙, 안청송安靑松, 최창원崔昌園, 박명옥朴明玉, 권영철權寧哲, 윤주전尹柱專. 임시연락사무소- 영화동맹 내 (藝術通信 210호 1946. 6. 11) =영화 = [선구영화 제작 활동 재시再始 준비]: 고협 ‘자유만세’ 제작에 전반으로 협조하고 있는 선구영화사는 이것이 끝나는 대로 다시 동사 자신의 제작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고협에 협조하는 한편 기획 중인 ‘항구 부산’을 준비하고 있다. (藝術通信 210호 1946. 6. 11) [‘똘똘이의 모험’ 15일 크랭크 인 개시]: 남일영화사 각본 낭독회를 금 12일에 마치고 오는 15일부터 크랭크를 개시한다고 한다. (藝術通信 211호 1946. 6. 12) =영화= [조영 이용민씨 구성 촬영으로 조선사정 소개영화 ‘백의白衣’ 제작 착수]: 조선영화사에서는 순결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조선민족의 애인인 ‘백의’를 주제로 하여 조선의 풍물, 기계화 공업미에 대한 발전의 내용을 찾아 조선 사정 소개 영화(2권 160피트 정도)를 작 12일 크랑크 개시로 착수하였는데 구성과 촬영에 이용민 씨가 담당하고 있다 한다. (藝術通信 213호 1946. 6. 14) = 영화= [‘자유만세’ 예산 증액, 13일 크랑크 개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 의 제작 개시는 그간 제반사정에 의하여 예정보다 다소 지연되었는데 동 협회에서는 이를 기어코 오는 해방기념일에 봉절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 당초의 예산 120만원으로 인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군정청 영화과 급 예술과, 조선영화사의 적극적 후원 밑에 거 13일부터 크랑크를 개시하였다 한다. (藝術通信 214호 1946. 6. 15) = 영화= [열의는 이겼다-영화배우협단 공연 인상]: 연극배우가 영화에 출연하여 성공하는 예가 드물 듯이 영화배우가 또한 연극에 등장하여 성공한 예가 없다. 그 이유는 동양화가가 서양화에도 반드시 솜씨 있을 수 없는 비유를 들기 전에 상호 같은 연기의 길이면서도 그 방향에 전혀 딴 도표道標가 엄연히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의 교류(?)를 늘 경계하여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영화배우협회’ 제공의 ‘안개낀 항구’는 놀라운 시험이며 또한 주목되는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크랭크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얼굴, 소리, 그리고 동작 그것은 확실히 영화 팬 적인 인기의 매력을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편집이 그리고 흑백 음양이 가위 생명이었지 결코 꿰뚫은 호흡적인 것이 못 되는 비밀한 매력임을 어찌하랴. 이 걱정은 비단 필자만이 가진 조바심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무대는 드디어 수즙음 없이 열려간다. 독은기, 최운봉, 남승민, 김소영, 이금룡, 남홍일南弘一, 김영金瑛, 서월영, 이숙李淑 모두 다 열연을 하고 있다. (藝術通信 215호 1946. 6. 17) = 영화 = [영화검열 제7보] 수험일 제목 신청자 5월 28일 ‘차플린 대생활’ 부청 5월 28일 ‘라리의 모험’ 후생부 5월 28일 ‘정말 체조’ 부내 5월 28일 ‘포경선捕鯨船’ 후생부 6월 11일 ‘로이드 무용장군武勇將軍’ 김영규金英奎 6월 11일 ‘아이의 마음’ 김영규 6월 11일 ‘무적 타잔’ 신한 6월 11일 ‘몬티 일만리’ 신한 6월 11일 ‘몬티 세계일주’ 신한 6월 11일 ‘엉터리 스키’ 新韓 6월 11일 ‘해방된 내 고향’ 한창섭 = (藝術通信 217호 1946. 6. 19) = 무용 = [조택원무용단 남선 공연]: 조택원무용단에서는 해방 후 처음으로 오는 26일부터 대구를 기점으로 다음과 같은 목표로 순례 공연한다. 26일- 28일 대구시보 주최로 대구공회당, 29일- 7월 2일 부산체육회 주최. 3일 동래체육회 주최, 5일 대전 (藝術通信 217호 1946. 6. 19) = 국극= [‘황진이를 중지코 ’흥보전‘ 공연 결정 -국극사] : 국악원 직속단체인 국극사에서는 이번에 신작공연으로 ’명기 황진이‘를 할 계획이었는데 사정에 의하여 다시 김희용金熙用 각색으로 ’흥보전‘을 근일 중에 동양극장에서 하기로 되었다 한다. (예술통신 217호 1946. 6. 19) = 영화 = [‘똘똘이의 모험’에 장 경찰청장 등장] : 남일영화사 제작 중에 있는 ‘똘똘이의 모험’ 은 금 20일 방산국민학교에서 세팅 크랑크에 들어가는데 이날은 특히 장 경찰청장이 ‘똘똘이 수상장면에 등장한다 한다. (藝術通信 217호 1946.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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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50년대의 영화속에 우리가락 우리춤] 북한 장구춤 (최승희 딸 안성희)[1930~50년대의 영화속에 우리가락 우리춤] 1.1936년 [미몽] 무용가 조택원 2.1938년 [군용렬차] 북춤 3.1939년 [어화] 쾌지나칭칭나네 4.1939년 [사랑과맹세] 우리가락 5.1939년 [대단한금광] 북춤 6.1939년 [사려깊은부인]조선악극단 7.1940년 [수업료] 농악 8.1941년 [반도의 봄] 망향초사랑 9.1941년 [반도의 봄] 가야금연주 10. 1944년 [병정] 조택원 11. 1957년 북한영화[형제] 장구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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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 호흡으로 뽑아 내는 신비의 공명(共鳴), 이생강아직도 ‘생강 피리’를 못 잊어 하며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6ㆍ25를 전후해 시골 저잣거리나 고향 역 앞 행상한테 산 피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소리와 품질은 흉내낼 수 없다는 찬사뿐이다. 그 당시 피리 파는 중년 남자 옆에서 벙거지를 눌러쓴 채 피리를 구성지게 불어 대는 ‘피리 부는 소년’이 있었다. 의심 많은 사람들은 10세 안팎의 소년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 나서야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내놨다. 그때 피리 불던 소년이 바로 오늘날의 젓대(대금) 명인 이생강(李生剛ㆍ54, 1937년 3월 16일생) 씨다. 뒷짐지고 먼산 바라보던 중년 남자는 그의 아버지(壽德)로 역시 피리만 잡으면 흐드러지게 불었다고 한다."영락없는 비렁뱅이 행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재일 교포의 아들로 한국말이 서투르다 하여 괜히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았고 피리 자루 들쳐 메고 전국 산천 곳곳을 누비던 그 시절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신라 임금 신문왕(681~691) 때의 ‘만파식적’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우리의 민속 관악기 대금. 예로부터 ‘대금’보다 ‘젓대’로 널리 불리고 있다.이 시대 최고의 젓대 주자 이생강 명인은 피리 행상으로부터 국악계에 발을 디뎠다. 해방 직후 우리말이 서투르다 하여 동네 애들한테 뭇매를 맞은 건 그가 동경의 아사쿠사(淺草) 출생이었기 때문이다. 경남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출생의 아버지는 3대 독자로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포 딸인 어머니 김위선(金渭先) 씨를 만나 이씨를 낳았다. 생강씨 조부(경주 이씨)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선대에는 신의 점지를 받아 뭇사람의 맺힌 한도 풀어 주었다고 한다.그 피가 섞인 이씨의 젓대에 대한 천부적 감각은 5세 때인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사쿠사 옆집 어른이 척팔(尺八, 사쿠하치ㆍ일본식 퉁소)을 부는 것을 얼른 빼앗아 손바닥으로 흉내내면서부터 비롯된다. 아홉 살에 해방을 맞은 이씨는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부산 보수동에 정착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알거지가 된 이씨 부자는 ‘생강표’ 피리를 만들어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이씨의 파란 많은 ‘젓대 인생’은 참으로 우연찮게 맺어졌다. 1952년 여름, 전주 풍남동 전주역 앞에서 당대 젓대 명인 한주환(韓周煥, 1904~1963) 씨를 만나면서 본격 학습에 들어간다. 한명인은 피리를 팔며 멋지게 불어제끼는 이씨 부자의 가락에 반해 발길을 멈춰 섰던 것이다. 한명인은 전남 화순 능주 태생으로 젓대 산조의 초기 명인이었던 박종기(朴鐘基, 1879~1939)의 맥을 잇고 있는 대가였다. 박명인은 전남 진도인으로 무악 피리의 귀재였다. 진도 씻김굿 기능 보유자(인간문화재 72호)인 박병천(朴秉千)의 종조부가 된다. 이러한 연유로 ‘이생강제 젓대’는 박종기―한주환의 정통 맥을 잇고 있으며 이씨의 뒤는 아들 광훈(廣訓, 25, 중앙대 국악과 2년) 씨가 군말 없이 승계하고 있다.젓대는 예로부터 오랫동안 쓸 수 있는 황죽(黃竹)을 최고로 쳐 왔으나 최근에는 쌍골죽(雙骨竹)을 주로 사용하는 65cm 안팎의 죽관악기다. 대통좌상의 취공과 밑의 청공에 갈대 속에 있는 엷은 막을 붙여 진동으로 소리를 낸다. 주법으로는 저취(底吹, 부드러움), 평취(平吹, 곧고 굳음), 역취(力吹, 가장 높은음)의 세 가지가 있으며 산조는 무속적인 살풀이춤 반주서 사용돼 온 시나위의 즉흥 합주곡 형식에 속한다.젓대 산조로는 박종기(한주환ㆍ이생강)제와 강백천(姜白川, 1898~1982)제, 한범수(韓範洙, 1911~1980)제로 대별된다. 특히 이생강은 진양조ㆍ중모리ㆍ중중모리ㆍ자진모리의 4악장으로 구성되며, 사용되는 조격은 우(羽)ㆍ평(平)ㆍ계면조(界面調)가 고루 섞여 시나위 더늠 젓대산조에 비해 밝은 선율이 많다. 이씨의 젓대는 59년 경기 무악의 달인 지영희(池瑛熙, 피리 명인, 작고) 씨를 만나 피리 솜씨까지 붙어 금상첨화가 됐다. 한때는 임춘앵 여성 국극단 악사(1958~1959년)로 오진석(피리), 방태진(새납) 씨와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며 약관 명인으로 날렸다.이씨는 5세 때부터 배운 젓대 솜씨여서 나이는 어렸지만 나이든 제자들을 많이 가르쳤다. 60년 5월 처음으로 유럽 순회 공연을 나가 파리 공연장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꿀 따 오는 소리’라는 등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는 강선영(姜善泳), 임승남, 김문숙(무용가 조택원 씨 부인) 씨 등이 약관의 이씨와 함께 갔다.이씨는 20년 전부터 종로 쪽을 떠나지 않으며 전통국악연구소(서울 종로구 와룡동 태일빌딩 402호)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생만도 50명이 넘으며 전국 유명 상을 끊임없이 수상해 오고 있다.김경애(金京愛, 대구, 김경애 국악원장, 1986년 전주대사습 기악부 장원, 1989년 신라문화제 대통령상), 박환영(朴桓永, 국립국악원 젓대 주자, 1987년 동아국악콩쿠르 대상), 이용구(李鎔九, 1990년 전주대사습 일반부 장원) 씨와 김종선(金鐘善, 워커힐 국악 연주), 이형표(李炯杓, 방송 출연), 김현임(金賢任, 1989년 전주대사습 학생부 장원), 김현재(金玄載, 국악예고 3년) 양 등 손꼽을 만한 전수자들이 수두룩하다.아들 광훈 씨와 함께 조카 병금(炳金, 국립국악원) 씨도 젓대를 불어 든든하며 형 정화(正華) 씨는 현재까지도 일품 젓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동생 성진(成鎭, 리틀앤젤스 농악부) 씨는 통영오광대놀이의 장재봉(張在鳳, 작고) 씨한테 습득한 타악 장단으로 꽹과리, 장구, 북 등 타악기에는 무불통지다. ‘토마스 박’으로 유명하며 세계 순회 공연도 많이 다녔다.생강 씨는 중앙대와 국악예고에 나가 연구생을 가르치며 이씨를 거쳐간 제자들만도 4백여 명이 넘는다. 한주환제는 단전에서 복식 호흡으로 뽑아내는 특이한 주법이 ‘짐’ 넣는 방법부터 타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이씨는 호주를 제외하고 4대주 70여 나라를 순회하며 한국의 명금 젓대를 불었다. 종래의 18분(박종기), 32분(한주환) 젓대 연주를 이씨가 90분으로 완성시켰고 레코드까지 내놓았다. 국위 선양 공로로 1973년에는 국민훈장을 받는 등 상패와 상장이 쌓여 있지만 이명인의 바람은 국악계의 올바른 평가와 예우가 바로잡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 광훈 씨도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젓대를 학습시켜 ‘3대 명인 가문’을 이뤄 놓겠다고 다짐을 보였다."인연은 기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박종기 선생제를 잇고 있는데 그 어른의 증손자인 환영 군이 저한테 학습한 뒤 다시 맥을 이어 주고 있습니다.”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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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개념과 범위 김연갑/(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아리랑’이란 말은 다면체의 언어이다. 그런 까닭에 쓰임과 의미도 다양하다. 그 실상의 하나가 북한에서의 ‘아리랑민족’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사용이고 최근 대표적인 트롯 가수 나훈아가 ‘트롯 가요’의 장르 명을 ‘아리랑’으로 부르자는 제안을 한 경우이다. 전자는 민족동질성을 말하는 ‘한민족’이란 개념의 변용인듯한데, 결과적으로 남북간의 정치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용어로 쓰이고 있고, 후자는 마치 향찰 표기의 신라 가요를 ‘향가’로 부르는 것과 같은 논리인데, 이런 주장의 배경은 아마도 우리가 가장 널리, 가장 좋아하는 가요 장르를 우리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어떻든 오늘에서 아리랑은 곡명이나 특정 장르 명칭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념의 담론으로까지 확장되어 쓰이고 있다. 그만큼 그 의미가 간단치 않다. 아리랑의 범위는 곡명에서 ‘아리랑’을 쓰거나 여음(뒷소리나 앞소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나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리랑····’ 또는 ‘아라리가 났네’를 쓰거나 향토 가명이나 변이형인 ‘아라성’·‘아(어·우)리’·‘어러리’를 쓰는 것 등이다. 그리고 기층음악권 가운데 아리랑과 같은 곡조를 쓰는 것이 있는데 이 경우가 정선아리랑 곡조인 ‘한오백년’ 등이 있는데, 이 역시 포함된다. 우리는 여러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언필칭 아리랑의 종류와 그 사설을 들어 ‘50여 종에 6천여 수’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지역의 이름을 딴 것(진도·밀양 등), 기능에 따라 부르는 것(뗏목아리랑), 후렴의 음가를 명칭으로 한 것(‘아라성’)과 음악적 특성을 이름에 얹어 부르는 것(긴아리랑·엮음아라리) 등이 있다. 특히 조국을 떠나 해외에 사는 동포들이 지어 부른 창작 아리랑(중국 ‘기쁨의 아리랑’, 일본 ‘나의 아리랑’, 미국 ‘민들레아리랑’)이나 예술가곡(조수미의 ‘아리 아리랑’, 최영섭 작곡 ‘의병아리랑’)이나 국악가요(채치성 작곡 ‘꽃분이네야’)나 대중가요(조용필의 ‘희망의 아리랑’, 한 돌의 ‘홀로아리랑’)등을 포함하고, 또한 인접 장르에 삽입되어 불려지는 것(장소연 작 연극 의 삽입곡)들까지도 아리랑의 범위에 포함한다. 그런가하며 영화(나운규 감독 ·연극(박승희 워작 ·무용(최승희·조택원 등의 작품 )같은 무대작품 뿐만 아니라 담배 같은 생활용품 등도 있다. 이들 역시 아리랑의 범주에 포함된다. 특히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의 탄광이나 군사시설 구축 현장 주변에 있는 ‘아리랑고개’ 같은 민족사의 아픔을 담고 있는 지명 유래 같은 것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에는 중층적인 의미와 역사성이 담겨 있어 간단하지가 않다. 이를 굳이 나눈다면 광의(廣義)와 협의(狹義), 그리고 최협의(最狹義)로 구분할 수 있다. 광의의 아리랑은 정선아리랑(아라리)을 그 연원으로 갖는 민요 장르와 여기서 확산된 모든 음악양식의 작품군(作品群)과 여기에 타(他)장르인 문학·영화·연극작품 등은 물론 ‘아리랑담배’나 ‘아리랑 라디오’나 잡지 과 같이 생활 속에 확산된 문화현상까지도 포함된다. 협의로는 민속음악으로서의 민요 아리랑만을 말하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나름대로의 기층성을 확보하고 전승력을 갖고 불려지는 아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의 ‘아리랑’이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테스트로서의 아리랑으로, 곡명에서 ‘아리랑’을 쓰고 후렴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를 쓰는 민요 아리랑을 말한다. 소위 4대 아리랑(서울·정선·밀양·진도)을 비롯해서 중원·제주·울릉도아리랑 에다 ‘신아리랑’, ‘엮음아리랑’ 등이 있다. 최협의의 아리랑이란 개별적 수식 없이 그냥 ‘아리랑’이라고 부를 때의 것으로 1920년대 나운규 감독의 영화의 주제가로 탄생하여 서울·경기 지역에서부터 불려지기 시작하여 ‘신아리랑’으로 불리다 1940년대 ‘아리랑’ 또는 ‘본조아리랑’으로 대표성을 부여 받아 불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아리랑의 대표 또는 가장 중심적인 아리랑은 전한민족 구성원과 전 세계인에게 알려진 세마치장단에 2행 1련에 후렴이 있는 정형성을 갖고 불리는 아리랑이다. 이로부터 ‘아리랑’이란 곡명은 같지만 곡조나 사설이 다른 많은 버전이 있게 되었다. 이는 아리랑의 특징이기도 한 같으면서도 다른 아리랑, 다르면서도 같은 아리랑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리랑을 북한에서는 1920년대의 항일 민족운동에 영화이 크게 기여했고, 그 주제가이 해외 항일 빨치산 활동에 함께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1920년대 아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여러 명칭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은 ‘본조아리랑’ 또는 그냥 ‘아리랑’이다. 우리가 개별적인 아리랑을 지칭할 때는 바로 이러한 최협의(最狹義)의 아리랑을 말하는 경우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여타의 아리랑들은 각각의 역사성이나 자체적인 가치 평가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기보다는 본조아리랑의 명성,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사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명난다. 에서 민족감정으로 환치되어 확산되면서 민족사적 가치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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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무용단, 동무동락 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 개막서울시무용단의 전통춤 시리즈 ‘동무동락(同舞同樂)’ 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남성춤의 정체성 굳건하게 지킨 무용계의 선비 최현의 춤 무대에 올려 세종문화회관(사장 김성규) 서울시무용단(단장 정혜진)이 선보이는 ‘동무동락’ 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가 10월 1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다. ‘동무동락(同舞同樂)’은 ‘함께 춤추고 함께 즐긴다’는 의미로 서울시무용단이 2018년부터 매년 가을시즌 우리의 전통춤에 있어 본질과 성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여, 보다 깊이 있고 풍성한 몸짓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전통춤 시리즈다. 이번에 선보이는 <허행초>는 ‘이 시대 마지막 낭만주의자’ 최현의 춤들로 구성하였다. 최현은 조택원, 송범을 잇는 신무용의 대가로서 남성춤의 정체성을 지켜 낸 무용가로, 2002년 타계하기 전까지 무용극, 창극, 마당극, 뮤지컬, 무용소품 등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안무하였다. 그는 우리의 전통적 소재 속에서 섬세한 여성미와 품격, 동양적 남성세계를 재현하려 했으며, ‘동양문인화의 정신세계’라는 낭만적 춤세계관이 특징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주요작 ‘군자무’, ‘신로심불로’ 등을 통해 최현의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자유로운 나비를 꿈꾸었던 최현처럼 작품은 고운 선으로 ‘신명’, ‘흥과 멋’, ‘미얄할미’, ‘군자무’로 나비의 날갯짓을 그리다 그의 대표작 ‘비상’을 통해 한 마리의 고고한 학처럼 날아올랐다. 서울시무용단은 이번 공연에서 생전 최현선생의 춤사위를 오롯이 재현해 내기 위해 최현 선생의 부인이자 최현우리춤원 고문인 원필녀 선생에게 작품고증과 지도를 의뢰했다. 또한 국립무용단 <묵향> 등에서 음악으로 참여했던 참여한 유인상 사단법인 민족음악원 원장이 이끄는 라이브 연주단은 풍성하고 현장감있는 음악을 선사할 예정이다. 앞서 서울시무용단은 올해 5월 정혜진 신임단장의 지휘아래 한국적 춤사위에 현대적 움직임을 결합한 창작무용극<놋(N.O.T)>을 통해 새로운 변신을 보여준 바 있다. 정혜진 단장은 “전통은 창작의 초석이 된다”고 말하며 “원로 무용가 최현 선생님의 춤사위는 음악의 경지에 있어 완벽한 호흡과 깊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표현을 담는 춤이다. 무용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은 거의 작고하셨고, 이제 저희가 새로운 후배들에게 전통춤을 전승해야 할 때이다” 라고 이번 공연의 취지를 밝혔다. 이번 동무동락 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는 10월 10일부터 12일 까지 진행되며, 티켓금액은 2만원에서 4만원까지다.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등 주요 예매처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문의: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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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무용단, 한국 춤의 진수 선보인다 동무동락(同舞同樂) 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서울시무용단의 동무동락(同舞同樂) 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로 전승하는 최현의 예술혼 “전통을 잘하면 창작을 잘합니다. 전통은 창작의 초석이니까요. 전통춤을 추는 단원들을 보며 서울시무용단의 예술적 기량은 지금 최고 중에도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시무용단 정혜진 단장은 오는 10월 10일(목)부터 12일(토)까지 3일간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동무동락(同舞同樂)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를 선보인다고 전했다. 서울시무용단은 상반기는 대극장에서 창작무용을 무대에 올리고, 하반기에는 M씨어터에서 전통춤 공연을 한다. 동무동락(同舞同樂)은 ‘함께 춤추고 함께 즐긴다’는 의미로, 서울시무용단이 가을 시즌 우리의 전통춤에 있어 본질과 성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여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한 몸짓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2018년부터 만든 전통춤 시리즈다. 무용단은 앞서 전통춤 공연을 통해 김백봉, 배정혜, 국수호, 임이조 선생 등의 춤사위를 담아왔다. 이번 동무동락(同舞同樂)두 번째 이야기 “허행초(虛行抄)” 공연을 통해 최현 선생의 예술 발자취를 찾고 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것이다. 최현은 조택원, 송범을 잇는 신무용의 대가로 남성 춤의 정체성을 지켜 낸 무용가였다. 2002년 타계하기 전까지 무용극, 창극, 마당극, 뮤지컬, 무용 소품 등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안무하였다. 그는 우리의 전통적 소재 속에서 섬세한 여성미와 품격, 동양적 정신세계를 재현하려 노력했다. 최현의 춤은 완벽한 호흡이 움직임을 이룬 다음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마치 허공을 떠 있는 듯한 신비로움이 있어 마치 동양문인화의 정신세계를 표현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 정혜진 단장은 “무용가 최현 선생님의 춤사위는 음악의 경지에 있어 완벽한 호흡과 깊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표현을 담는 춤입니다 . 무용계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은 거의 작고하셨고, 이제 저희가 새로운 후배들에게 전통춤을 전승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이번 공연의 취지를 밝혔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무용단은 ‘허행초’, ‘비상’, ‘군자무’ 등 최현의 대표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국립무용단 <묵향> 등에서 음악으로 참여했던 유인상 음악 감독이 이끄는 현장감 있는 라이브 연주는 공연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다 .공연은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진행되며, 티켓 금액은 2만 원에서 4만 원까지다.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등 주요 예매처를 통해 살 수 있다. (문의: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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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45호 한량무 지정 기념공연 <조흥동 춤의 세계> 2.272015.2.27 (금) 오후8시 ~28 (토) 오후5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5호 한량무 지정 기념공연 공연개요 주최 월륜춤보전회 주관 공연기획MCT 문의 02-2263-4680 www.mctdance.co.kr 관람료 R석 50,000원 S석 30,000원 A석 20,000원 예매처 한국공연예술센터 | 02-3668-0007 인터파크 | 1544-1555 티켓링크 | 1588-7890 대학로티켓닷컴 | www.대학로티켓.com 스텝 연출 조흥동 조명감독 신호 무대디자인 김종석 음악편집 박성욱 진행 조수빈 염태선 홍보 한지원 서예지 장운영 출연 조흥동 고선아 원정숙 김미란 김정학 김남용 윤성철 김태훈 이영진 주승호 윤혜정 백진희 김은영 황규선 김상렬 전수석 이상윤 윤천섭 안영환 박철순 강대현 기무간 조한진 조완희 정찬민 최지환 허종근 특별출연 | 이광수 성창순 안숙선 채상묵 한국 남성전통춤의 대가로 정평이 나 있는 월륜 조흥동 선생의 한량무 서울특별시 무형 문화재 지정 기념 공연 어린 시절 무용에 입문하여 60년 넘게 한 길만을 바라보고 걸어오신 월륜 조흥동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량무가 2014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것을 기념하는 춤판을 무대에 올립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무용협회 고문 등 원로무용가로써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조흥동 선생은 스승 강선영 선생에게 배운 한량무를 원형 그대로 이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표 춤으로 만들어 조흥동 선생 하면 한량무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많은 무대에서 선보였습니다. 이러한 한량무가 2014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앞으로 더욱 지속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할 우리 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문화재 지정을 통해 긴 세월 전해 내려오는 우리 춤의 역사와 춤사위 구조를 정리하고 전승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며, 오랜 세월 유구히 지켜온 한국 전통춤의 가치를 재조명해보는 한국 무용의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흥동 선생은 이번 기념공연을 통해 이번 무대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량무의 기원이 된 원류 한량무 뿐만 아니라 젊은 무용수들이 한량무를 재해석한 창작 한량무 까지 다양한 버전의 한량무를 준비하여 관객들을 한량무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할 것입니다. 전통무로 일반 서민의 의식 속에 잠재된 자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한과 흥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한량’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미지와 춤사위가 완전히 부합되는 형태를 보이며 역동적이고 남성다움을 간직한 남성 춤의 대명사로 조흥동 선생만의 명무로 꼽히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번 기념공연은 조흥동 선생을 비롯하여 월륜춤보전회 뿐만 아니라 이광수, 명창 성창순, 안숙선 선생 의 축가 등으로 의미 있는 무대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이 공연은 2.27 (금) ~ 28 (토)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되며 한국공연예술센터 (www.koreapac.kr), 인터파크 (www.interpark.com), 티켓링크 (www.ticketlink.co.kr)에서 예매가 가능합니다. 티켓은 R석 50,000원 S석 30,000원 A석 20,000원에 판매합니다. ▶ 월륜 조흥동 선생 소개 한국무용협회 고문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민대학교 초빙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5호 한량무 보유자 서울예술단 예술총감독 역임 (1998) 국립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겸 단장 역임 (1994) (사)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역임 이천시 예술부문 문화상 수상 (2003) 대한민국 문화훈장 옥관장 수상 (2000)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95)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94) ※ 주요안무작품 황진이(2001),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2001), 화합의 빛(2002), 마의태자(2002), 삼별초의 혼(2003), 고성의 무맥(2004), 조신의 꿈(2004), 꿈꿈이었으니(2005), 봉수당진찬례와 우리춤의 맥(2006), 황진이(2007), 춤향기 그 색깔(2007), 달하_The Moon(2008) ※ 주요수상경력 이천시 예술부문 문화상 수상 (2003) 대한민국 문화훈장 옥관장 수상 (2000)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95)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94) 1941년 경기도 이천에서 4녀1남 가운데 막내 외아들로 태어난 조흥동 선생은 만8세에 무용에 입문, 춤에 대한 끼와 재능을 감추지 못하고 30대까지 김천흥, 이매방, 은방초 김석출, 박송암 등 17명의 전통춤 대가를 찾아다니며 춤을 배웠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춤꾼으로의 인생에 발을 디딘 조흥동은 당시 여성 일색인 무용계에서 남성으로서의 좁은 입지를 극복하고 자기만의 춤세계를 꿋꿋하게 일구어온 무용가이다. 1962년 국립무용단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춤무대에 등장, 전통무용은 물론 창작춤 등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한국무용계의 표현영역을 확장하며 새로운 춤세계의 지평을 열었다. 남성 전통춤의 개척자인 조흥동 선생은 수천가지 한국적 춤사위를 익힌 무용가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 전통춤의 독특한 매력을 세계 곳곳에 알리며, 1967년 동남아 6개국 순회공연을 필두로 84년 LA 올림픽 문화축전, 96년 LA 미주공연 등, 인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과 유럽 각국을 수차례 순회공연 하였고, 국내는 물론 해외공연계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문화예술계의 첨병으로서 그의 열려있는 작가정신은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94년 국립무용단장겸 예술감독을 역임하였고, 199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옥관장을 수상하였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서 다양한 활동과 경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우리 한국 무용계의 대표적 남성 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다. 조흥동선생의 춤은 자연스러운 춤사위, 풍부하고 진중한 표정이 잘 드러나는 특징을 지녔으며, 기품 있는 외모와 균형 잡힌 체형은 무대에서의 화려함으로 남성춤꾼의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또한 선생은 한국무용의 창작적 춤사위와 표현영역을 확대하며 무용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 공연 소개 1. 비나리 [출연 이광수]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노래하며 우리민족 고유의 소원을 바라는 곡으로 비나리의 명인 이광수 선생의 축하 비나리로 이번 공연을 축원한다. 2. 원류 한량무 [출연 조흥동 고선아 원정숙 김미란] 본래 한량무는 극적 요소가 가미된 춤으로 한량, 색시, 주모, 먹중으로 구분되어 시류를 풍자한 춤이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독무로 변하여 남성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본 한량무는 민속 무용의 창시자인 한성준(1871-1941)에 의하여 작무되었으며 현재 생존하여 계신 유일한 제자 강선영 선생님에 의하여 원형 그대로 조흥동에 이수되었다. 3. 진쇠춤 [출연 김남용 윤성철 김태훈 이영진 주승호] 진쇠는 우리 고유 타악기인 ‘꽹과리’를 말하며 가장 소리가 잘나는 쇠, 즉 ‘참쇠’라는 뜻을 가리키는 말로 진쇠춤은 쇠를 들고 절묘하게 가락과 소리를 내어 여러 신(神)을 불러들이며 그 신들로 하여금 잡귀를 물러나게 한다.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노래하고 팔도원님들이 왕 앞에서 국운을 빌며 제사 지낼 때 진쇠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근세에 와서는 경기도당굿 제석거리에서 추어졌으며 故조한춘·안지산·박용우·이동안·김숙자 등 여러분들이 추었던 것을 많은 고증과 유래 및 춤사위를 정립하여 진쇠춤 원형에 가깝게 완성해 오늘 무대에 재연한 작품이다. 4. 신노심불로 [출연 김정학] 신노심불로는 1949년 세계 현대무용의 대모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 아래 미국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초연 되었던 작품이다. 1956년 일본 공연 실황이 담긴 조택원 선생의 신노심불로 영상자료가 발견된 이후 최현을 거쳐 조흥동에 전수되고 있다. 신노심불로는 조택원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조흥동에 의해 복원·재연·창조되어 2007년12월9일 국립극장, 2007년 12월21일 서울 (구)역사박물관, 2008년 3월2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무대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5. 판소리 [출연 27일-안숙선 28일-성창순] 28일 성창순 심청전 中 부녀상봉 6. 한량무 [출연 조흥동] 한량무는 일명 선비춤, 신선춤으로도 불리며 1982 대한민국 무용제 전야제에서 관객으로부터 큰 호응과 찬사를 받은 춤으로 옛 선비의 고고한 자태와 남아의 기상품위를 마음껏 뽐내며 마치 학이 구름위로 비상하는 형상으로 춤추며 인생무상을 노래하듯 많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조흥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7. 중부살풀이 (조흥동류) [출연 윤혜정 백진희 김은영 황규선] 살풀이는 무속에 나오는 무무(巫舞-무속에 나오는 춤)로서 ‘살’은 인간의 삶의 액운 즉 독하고 모진 기운으로서 흉살과 재앙 등의 악귀의 짓을 의미하며, 이러한 삶의 해로운 원혼과 기운을 모두 풀어버리는 것을 ‘살풀이’라 한다. 팔도 굿중에는 모두 이러한 액풀이 과정이 있다. 특히 ‘경기살풀이춤’은 무속무(巫俗舞) 중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권의 춤사위를 집대성하여, 1990년 국립무용단에서 초연된 조흥동류 경기살풀이춤으로 정립된 작품이다. 8. 승무 [출연 채상묵]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僧舞(승무)는, 민속춤의 精髓(정수)라 할 만큼 한국춤의 모든 技法(기법)이 집약되어 있으며 품위와 격조 높은 예술형식의 舞作(무작)으로 평가 되고 있다. 힘있고 호화로운 장삼의 곡선미는 속세의 煩惱(번뇌)와 수도승의 苦行(고행)을 표현하듯 공간미적 형태의 아름다움과 內空(내공)의 호흡을 담아 표현되며, 法鼓(법고)는 풍요로운 민속장단의 2분박과 3분박, 또는 혼합 형태의 다양한 리듬으로 타주한다. 9. 한량 젊은그들 [출연 김상렬 전수석 이상윤 윤천섭 안영환 박철순 강대현 기무간 조한진 조완희정찬민 최지환 허종근] 월륜 조흥동선생의 후학들로 구성된 한량무 전수생들의 젊고 활기찬 작품으로 우리무용계 미래의 발전이 기대되는 무용수들의 한량무로 옛 춤사위와 디딤새의 절묘한 가락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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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무회의 <송범춤회고전 - 7주기 추모공연> 10.1-2송 범 춤 회 고 전 - 7주기 추모공연 1. 일시 : 2014년 10월 1(수)~2(목)일 오후8시 2. 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3. 주최 : 범무회 4. 주관 : 공연기획MCT 박숙자무용단 5. 티켓 : R석 30,000 원 S석 20,000 원 6. 문의 : 02-2263-4680 www.mctdance.co.kr 7. 공연소개 한국근현대무용사 그 자체, 무용가 송범을 추모하는 무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움직임으로 국립무용단 만의 무용극 형식의 창시자 국립무용단 출신의 많은 스타를 배출, 극장무용의 기틀을 견고하게 한 송범 선생 한국근현대사 무용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한국무용의 무대화를 견고히 한 무용가 송범의 작품 회고전이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공연됩니다.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전통무용을 무대화 하고 다양한 무용극으로 우리 춤의 대중화에 앞장서신 송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기획된 공연입니다. 오랜 시간 국립무용단의 예술감독을 맡으시며, 안무자로써 끝없는 고민 끝에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시고 전통을 보존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의 재창조를 통해 한국 창작무용계에 새로운 지평을 펼친 송범 선생의 작품을 제자들이 힘을 모아 송범 선생을 기억하는 공연이 될 것입니다. 17세 때 최승희의 춤을 보고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1945년 양정중학교(5년제) 졸업 후 조택원, 박용호에게 워킹발레 중심의 이시이바쿠 기본을 배웠고, 장추화무용연구소에서 조교로 활동하셨습니다. 장추화에게 모던댄스, 한국무용, 인도춤 등을 배웠고, 이때 모던댄스는 독일의 마리 뷔그만(1886~1973)의 기본동작들 이었습니다. 또한 한동인에게 발레도 배웠습니다. 한국전통춤을 기반으로 서양의 발레 등 다양한 무용을 접하며 춤의 시각을 넓힌 송범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국을 돌며, 다수의 공연을 진행하였고 해방 이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부단장을 맡아 1968년 멕시코올림픽, 1972년 뮌헨올림픽에 파견된 한국민속예술단에서 안무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진두지휘 하는 시기에 송범 선생만의 춤의 중심을 한국무용으로 다잡으셨으며, 1973년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 재조직되면서 국립무용단장이 되셨습니다. 1992년까지 「은하수」, 「도미부인」 등의 무용극 18편과 다수의 소품을 안무하며, 국립무용단 만의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무용극과 춤을 선보여 국립무용단 만의 색을 공고하게 다졌습니다. 송범선생의 무용극은 대형극장의 극장 시스템에 맞추어, 신무용을 춤의 기본기법으로 하고, 한국의 설화나 고전을 스토리텔링화한 20세기 후반 한국 장막무용극 형식이었습니다. 송범선생은 한국전쟁 이후 춤의 유산도 인물도 빈약한 상황에서 20세기 후반 한국춤계를 일궈내며,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우리 전통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 더욱 견고히 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국립무용단이 기반을 다지면서 무용계 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으며, 이러한 송범선생의 제자들이 이러한 극장예술무용을 기틀로 한 다양한 작품과 춤을 발전시키며, 한국무용계의 지금의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는 송범 선생이 노력하였던 기반 없이는 절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것이며, 앞으로도 송범 선생의 업적은 무용인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것입니다. 송범선생 이력 출생 1926년 충북 학력 양정중학교 졸업(1945) 조택원무용연구소, 박용호연구소 장추화 무용연구소 수학 경력 장추화 무용연구소 교육조교, 한국무용단 합류(1951), 코리아발레단 조직(1955), 한국무용가 협회 조직(1956),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취임(1961), 국립무용단 활동(1962), 멕시코 올림픽 한민속예술단 참가(1968), 중앙대 예술대학 교수(1972), 초대 국립무용단 단장(1973), 미국독립 200주년 기념공연(1976),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83~), 국립무용단 퇴임 및 중앙대 무용과 명예교수(1992) 수상 서울시 문화상(1968), 대통령 표창(1972),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1973),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3), 무용공로상(1982), 대한민국예술원상(1984), 금관문화훈장(2008) 공연작품소개 1. 생령의 신음 (출연_ 정혁준) 리스트작곡의 헝가리언 랩소디 중에서 반주음악을 삼아 6.25의 비극을 주제로 표현한 작품이며1959년 시공관에서 공연되었다. 2. 사랑가 (출연_ 1일 김장우 최영숙 / 2일 김장우 최정임 )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의 세계민속 예술제전에서 한국민속예술단의 레파토리로 처음 선정되어 추어졌던 는 한국적인 남녀의 사랑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춘향과 이도령의 상황을 빌렸다. 음악도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대목을 기악곡화 하여 사용함으로써 한국적인 정서를 잘 나타내었다. 송범이 직접 이도령으로 김문숙이 춘향으로 초연되었었다. 3. 부채춤 (출연_ 홍승욱, 서울예술대학교 동랑무용단) 1954년 11월 취봉 김백봉에 의해 창무 되어진 작품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군무로 재구성, 이후 현재까지 국내, 외의 공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극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김백봉의 예술관이 가장 집약된 작품으로 부채춤 전체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즉 생명력의 표현이다. 1992년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로부터 『명작무』로 지정 받았다. 4. 참회 (출연_ 박숙자) 피난지 대구에서 1951년 초연당시에는 상-상의을 반주 음악으로 사용했었다. 원래 1982년 부처님을 배경으로 파계승의 괴로움을 그리고 있지만 초연 때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신부의 고뇌를 묘사했던 작품이다. 초연 당시의 창작의도는 암담한 피난지 생활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당시의 상황을 종교적 양태를 빌려 표현하자는 것이었다. 5. 우물가에서 (출연_ 김승일 양승미) 1975년 선생님의 안무 작품으로써 순박한 시골 우물가에서, 처녀 총각의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서정적인 작품이다. 6. 즐거운 계절 (출연_ 중앙대학교 무용학과) 가을추수가 끝나고 풍성한 계절에 동네 아낙들의 장터모습을 그린 작품 7. 황혼 (출연_ 최영숙) 송범 무용의 한국무용 중 선의 흐름을 가장 잘 나타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965년 당시 시공간 무대에서 이라는 연제로 초연되었다. 8. 사형대 (출연_ 김나영) ‘사형대’는 6.25동란 때 전쟁의 살상과 남과 북의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비극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안무된 작품이다. 인간의 좌절 혹은 절망을 그려내는 듯한 이 작품은 송범 안무의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전형을 보여준다. 9. 강강술래 (출연_ 서울예술대학교 동랑무용단) 한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보름이면 부녀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원무를 추곤 하였다. 16세기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부녀자들로 하여금 강강술래를 부르며 원무를 추게 한데서 비롯하였는데, 그것은 공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수많은 군대가 있는 것처럼 적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 후 그것은 강강술래 라는 전통무용으로 전해져 왔다. 오늘 선보이는 송범의 달과 여인은 강가술래 형실을 빌어 1968년 재창작한 작품으로 한가을 밤, 달은 높이 떠 정취있게 비추며 처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맴돌며 노래하며 가을에 낭만을 수놓아간다. 10. 가사호접 (출연_ 1일 김충한 / 2일 국수호) 중의 속세와의 갈등을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반주로 깊숙이 나타낸 작품이다. 이라는 제목으로 이 춤이 처음 추어진 때는 1933년 조택원의 무용연구소 제 1회 공연무대였다 故조택원 선생의 대표작으로 우리나라보다는 외국에 더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1975년 그의 제자였던 송범이 물려받았다. 신무용사에서 제자에게 공개적으로 물려준 작품으로 그 의의를 갖는다. 11. 고풀이 (출연_1일 이지영 / 2일 이지영, 중앙대학교 무용학과)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 바다와 연결된 민속신앙의식이 많이 있다. 이 가운데 남해안의 진도 씻김굿은 뛰어난 의식 절차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절차 중 물에 빠져 죽은 혼을 건져 하늘로 넋을 올리는 의식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출연 국수호 최영숙 홍승욱 최정임 박숙자 이지영 양승미 김나영 김장우 김승일 김충한 정혁준 중앙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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眀嘉 강선영 <불멸의 춤> 4.31. 일시 : 2013년 4월 3일 (수) 오후 4시 / 7시 30분 2. 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3. 주최 : 강선영춤보존회 4. 주관 : 공연기획 MCT 5. 문의 : 02-2263-4680 http://www.mctdance.co.kr (공연기획 MCT) 6. 공연소개 ■ 기획의도 우리나라 춤의 현대사, 명가 眀嘉 강선영 姜善泳 선생의 춤인생 80년. 한국무용계의 큰 획을 그으며 전통춤꾼으로서 그리고 한국무용의 창작적 춤사위와 표현영역을 확대하며 무용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시며 삶 자체가 한국무용의 역사이신 명가 강선영 선생의 춤 인생 80년을 기념하는 무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무대는 선생의 춤 인생의 시작부터 성장, 지금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예인의 길을 구축한 명가 강선영 선생의 전통 춤판으로 그녀의 80년 춤 인생의 모든 것을 한자리에 펼쳐 보이는 무대가 될 것입니다. 한성준· 강선영 그리고 「강선영춤보존회」제자들로 이어지는 3代의 우리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 사랑이 어우러지는 춤 무대. 강선영 선생 춤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이번 무대는 우리 근대 춤의 시조인 한성준 선생의 작품인 , , 등을 시작으로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춤을 향한 외길 인생을 살아온 강선영 춤 인생의 정수를 보여줄 까지 춤을 향한 강선영의 불멸의 열정으로 꽃으로 피워내는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 무당춤, 무용극 황진이 등 우리 무용사에 길이 남을만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제자 사랑에 대한 스승의 마음과 스승의 정신을 정성껏 이어가는 헌정의 무대로 감동의 시간으로 관객들을 안내할 것입니다. 이렇듯 이번 무대는 우리 무용계의 큰 어른인 강선영 선생의 헌정무대로서 이현자(태평무준보유자), 이명자(태평무전수조교), 양성옥(태평무전수조교), 김근희(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3호 경기검무 보유자), 조흥동(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 김정학(경기도립무용단 상임안무자), 박진희(상명대학교 무용과 교수)등의 현재 한국의 무용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중진·중견 무용가들과 함께 100여명이 넘는 선생의 수많은 제자들이 함께 꾸미는 무대로 모두가 한 자리에 아우르는 큰 춤판이 될 것입니다. 춤 속에 인생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명가 강선영 선생의 춤과 삶. 명가 강선영 선생께서는 무용가로서 매우 특별한 분입니다. 춤을 사랑하는 마음과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의 미덕으로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지혜롭게 헤쳐 온 강선영선생은 올해 나이 89세로 무용계의 존경받는 큰 어른이십니다. 10대 중반에 춤과 장단으로 한 시대를 호령하던 한성준(韓成俊) 문하에 입문하여 등을 전수받음으로서 춤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1950-60년대에는 전통춤의 전수보다는 창작 춤에 발군의 능력을 과시하듯 「초혼」, 「목란장군」, 「열두무녀도」, 「수로부인」, 「원효대사」, 「황진이」등을 선보이며 한국 창작 춤의 예술적 진화를 이끈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1940년 서울 부민회관 무대에 선 이래, 지금까지 170여 개국에서 1,500여 회가 넘는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무대에 널리 알렸으며, 2006년 한국 전통무용가로는 최초로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올랐고, 이어 유네스코 초청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또 1960년대에는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중동 등 한국과 정식 국교를 체결하지 않은 나라로 진출하여 한국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알리는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해오시며 예술적 업적은 물론이고 특별한 사회적 행보까지 우리 춤무용의 좁은 입지를 극복하고 자기만의 춤 세계를 꿋꿋하게 일구어 온 진정한 무용가입니다. 그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는 '몸과 마음이 일치된 예술 춤'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 명무’의 반열에 오르며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면서 인간문화재 보유자로서 1998년 안성에 『태평무 전수관』을 설립하여 전통춤의 보급과 지역문화 활성화에 힘쓰고 있습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1992년 선정, 무용콩쿠르 수상자의 군(軍)면제, 국립극장 경내 신무용가 조택원 선생의 춤비 건립 등 주요 현안을 정책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춤의 발전과 문화예술계에 헌신한 공로로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목련장,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이렇듯, 한국 춤을 대표하는 진정한 춤꾼, 멋과 기품, 흥과 신명을 두루 담은 아름다운 춤사위의 ‘강선영 선생 춤인생 80년’을 기념하는 이번 무대는 한국 춤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감동을 함께 하려는 작은 바램을 담아 무대를 열어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7. 공연내용 1) 신선무 신선무는 상고시대에 서호(西皓) 라는 노인이 높은 산에 올라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며 노닐다가 우의등선(羽蟻登仙)할 때 추던 춤이라는 옛 설화에 근원을 두어 창작한 춤으로 알려져 있다. 2) 승무 한국 전통춤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승무는 인간 내면의 갈등과 한, 그 극복의지를 표상화 한다. 이번 무대는 강선영이 한성준에게 승무를 사사할 당시의 춤을 바탕으로 독무를 군무로 구성되었다. 3) 장고춤 한성준의 장고춤은 한강수타령에서 자진한강수타령으로 이어져 다시 한강수타령으로 끝맺음을 하는 절제미가 넘치는 춤이다. 이 장고춤은 강선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번 무대는 독무에서 군무로 구성되었다. 4) 경기검무 경기검무는 활달한 기상과 강한 기질이 이 춤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춤은 한성준,강선영 그리고 현재 김근희로 이어지고 있으며, 김근희에 의해 경기문화재 53호로 지정받으면서 경기검무의 높은 예술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전승되고 있다. 5) 무당춤 이 춤은 1962년 국립무용단에 의해 초연된 강선영의 대표작으로 한국춤의 재발견과 예술춤으로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초연 당시 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는데 토속적인 원형을 가지고 문헌과 구전전승 등의 연구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무대화 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6) 즉흥무 즉흥무는 말 그대로 어떤 양식에 구애됨이 없이 무자의 감흥에 따라 즉흥적으로 추는 춤이다. 한성준은 『조선음악무용연구소』 원생들의 졸업시험에 반드시 이춤을 추도록 하여 춤실력을 평가 하였다. 7) 한량무 남자들의 독무 형식춤으로 알려진 한량무는 원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꾸미는 무용극 형식의 춤이었다. 한량, 색시, 먹중, 주모 등이 배역에 따른 연기와 춤, 그리고 장단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적 성격의 춤이다. 8) 훈령무 훈령무는 한성준선생이 한말 구군의 훈련모습을 연상해 만든 춤이다. 훈령의 비장한 각오가 절제된 춤사위로 표현되며, 무인적(武人的) 기상이 연상되는 일사불란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들을 통해 한성준 춤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9) 살풀이춤 한국 전통무용의 대표적인 춤이라 할 수 있는 살풀이춤은 아기자기 하면서 섬세하고 절제된 기교가 특징이다. 담백한 소박미와 한과 멋, 즉흥성이 강하다. 외적인 미의 형상화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한국 춤의 정수라 할 수 있다. 10) 황진이 ‘황진이’는 1981년 국립무용단 (안무: 강선영 극본: 김지일 작곡: 박범훈)에 의해 초연되었다. 극적 줄거리를 간결하게 하고 춤을 위주로 한 안무의도는 우리춤의 새로운 무용극 형식을 정립하였다. 오늘의 무대는 3장 (황진이와 지족대사의 2인무)이 공연된다. 11) 태평무 태평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보유자: 강선영)로 지정되어 있다. 나라의 풍년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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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한마당 "전은경의 예술의 향기" 11월 16일□ 일 시 : 2007년 11월 16일 (금) 오후 7시 30분 □ 장 소 :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 □ 주 최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 후 원 : 문화재청 □ 문 의 : 02) 3011-2178~9 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공연전시팀 ● 공연소개 1. 태평무 - 전은경, 양주영, 김세연, 이윤숙, 류지니, 박성진, 오은경 한영숙은 무속 장단에 추어지던 춤을 가야금 선율에 추었으며 처음에 입고 추던 무복 원삼 을 벗고 당의 만으로 추었다. 한영숙의 제자 정재만은 이 두 춤을 합해서 원형을 되살렸으며 원삼의 색깔을 화려하게 바꾸어 군무로 발전시켜 큰 태평무라 칭하였다. 2. 광대무 - 정용진 이 춤은 한영숙의 고증으로 정재만에 의해서 새롭게 각색되어진 춤이다. 광대의 맛깔스런 춤사위와 기교가 돋보이는 남성 솔로무이다. 3. 사랑가 - 전은경, 김종우 1940년대 근대무용가 조택원에 의해 안무된 작품으로 판소리의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재구성한 춤이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야기를 무용으로 표현한 이 춤은 조택원에서 송범으로 다시 정재만 으로 이어지고 있는 근대무용의 하나이다. 4. 청풍명월 - 양주영, 김세연, 이윤숙, 류지니, 박성진, 오은경 산조 춤은 음악의 가락인 산조형식에 맞춰 여러 유파로 전해진다. 이춤은 송범류의 산조를 정재만이 청풍명월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안무한 작품으로 부채를 들고 춤추며 여인의 심정을 거문고의 선율에 맞춰 서정적으로 그린 춤이다. 5. 살풀이 - 전은경 살풀이 장단에 춤을 붙여 춤추는 이의 심적고저 또는 내면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고도의 기교가 요구되는 춤으로 즉흥무 또는 수건춤 이라고도 불려지나 1935년 부민관 에서 초연되면서 한성준에 의해 살풀이춤으로 명칭이 고정되었다고 한다. 한과 비애를 풀어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이중구조를 지닌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정? 중?동과 절제미의 극치를 이루는 춤이다. 6. 장고춤 - 양주영, 김세연, 이윤숙, 류지니, 박성진, 오은경 장고는 우리 민족의 고유 타악기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악기로서 궁편과 채편의 음율이 마치 음과 양 같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 메고 여러 가지 리듬으로 변화시키며 추는 한국여인의 아름다운 몸의 곡선과 기교가 어우려 져 흥과 멋을 나타낸 춤이다. 7. 승무 - 전은경 한국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승무는 한국 춤사위를 총 집대성해 놓은 춤으로 질량의 확대가 크며 공간구성미가 아름다운 인간 내면철학의 경지로 승화된 춤이다. 경향류의 승무는 한성준 - 한영숙 - 정재만으로 전해지며, 종교적 색채를 띤 제의의 춤으로 천, 지, 인 삼재사 상이 내재된 의식무용이다. 담백하고 우아하며 공간 구성미가 돋보이는 절제된 무태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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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경의 예술의 향기" 11월 16일□ 기 간 :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 장 소 :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 □ 주 최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 후 원 : 문화재청 □ 문 의: 02)3011-2178~9 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공연전시팀 ● 공연소개 1. 태평무 - 전은경, 양주영, 김세연, 이윤숙, 류지니, 박성진, 오은경 한영숙은 무속 장단에 추어지던 춤을 가야금 선율에 추었으며 처음에 입고 추던 무복 원삼을 벗고 당의 만으로 추었다. 한영숙의 제자 정재만은 이 두 춤을 합해서 원형을 되살렸으며 원삼의 색깔을 화려하게 바꾸어 군무로 발전시켜 큰 태평무라 칭하였다. 2. 광대무 - 정용진 이 춤은 한영숙의 고증으로 정재만에 의해서 새롭게 각색되어진 춤이다. 광대의 맛깔스런 춤사위와 기교가 돋보이는 남성 솔로무이다. 3. 사랑가 - 전은경, 김종우 1940년대 근대무용가 조택원에 의해 안무된 작품으로 판소리의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재구성한 춤이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야기를 무용으로 표현한 이 춤은 조택원에서 송범으로 다시 정재만으로 이어지고 있는 근대무용의 하나이다. 4. 청풍명월 - 양주영, 김세연, 이윤숙, 류지니, 박성진, 오은경 산조 춤은 음악의 가락인 산조형식에 맞춰 여러 유파로 전해진다. 이춤은 송범류의 산조를 정재만이 청풍명월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안무한 작품으로 부채를 들고 춤추며 여인의 심정을 거문고의 선율에 맞춰 서정적으로 그린 춤이다. 5. 살풀이 - 전은경 살풀이 장단에 춤을 붙여 춤추는 이의 심적고저 또는 내면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고도의 기교가 요구되는 춤으로 즉흥무 또는 수건춤 이라고도 불려지나 1935년 부민관에서 초연되면서 한성준에 의해 살풀이춤으로 명칭이 고정되었다고 한다. 한과 비애를 풀어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이중구조를 지닌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정?중?동과 절제미의 극치를 이루는 춤이다. 6. 장고춤 - 양주영, 김세연, 이윤숙, 류지니, 박성진, 오은경 장고는 우리 민족의 고유 타악기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악기로서 궁편과 채편의 음율이 마치 음과 양 같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 메고 여러 가지 리듬으로 변화시키며 추는 한국여인의 아름다운 몸의 곡선과 기교가 어우려져 흥과 멋을 나타낸 춤이다. 7. 승무 - 전은경 한국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승무는 한국 춤사위를 총 집대성해 놓은 춤으로 질량의 확대가 크며 공간구성미가 아름다운 인간 내면철학의 경지로 승화된 춤이다. 경향류의 승무는 한성준 - 한영숙 - 정재만으로 전해지며, 종교적 색채를 띤 제의의 춤으로 천, 지, 인 삼재사상이 내재된 의식무용이다. 담백하고 우아하며 공간 구성미가 돋보이는 절제된 무태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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