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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아리랑문화 연대, 한일문화교류 재정립 端緖로!㈜국악신문 대표 기미양입니다. 오늘 이 모임은 재한일본인 모임 ‘라일락회’가 주최하는 송년회입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아리랑’을 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우리는 2012과 14년 남북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아리랑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동시에 중국이 자국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중국 당국의 저의와 중국동포사회 아리랑 실상에만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일본 속의 아리랑 사정은 또 다른 차원의 아리랑문화임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2010년 신나라레코드사 발매 ‘일본에 건너간 아리랑’ 음반 기획 과정에서 막연하게 짐작했을 뿐인데, 2000년대 들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져서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창관 선생의 조사로는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음반 속에 수록된 아리랑음원 수가 200여종이나 돤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충분히 진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2014년은 북한이 유네스코에 아리랑을 등재한 10주년이고, 2025년은 한일회담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2026년은 영화‘아리랑’ 개봉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다시 아리랑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아리랑’의 존재는 한일회담 60주년을 맞으며 관심을 갖고 접근할 필요를 갖습니다. 민족적 감정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서 새로운 교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를 근거로 새로운 한일문화교류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선 바라기로는 양국 국영방송에서 공동 기회 보도를 하고, 양국 전문가들 간의 학술대회를 펼치고, 이어 양국 교차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이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리라고 봅니다. 오늘 발표자 네 분은 일본아리랑에 대한 1차적 접근자들로 너무나 적합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자리를 확대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국악신문은 주목하여 다루고자 합니다. 귀한 자리를 제공해 주신 라일락회에 다시 감사 드립니다. 2023. 12. 22. ㈜국악신문 대표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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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아리랑을 말한다"22일 오후 2시 일본인회 라일학회 주관으로 "일본아리랑을 말한다"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인사동 태회빌딩 회의실에서 개최된다. ‘일본아리랑’의 전모를 대상으로 네 전문가가 근대사 속에서 일본 속에서 아리랑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된다. (주)국악신문의 후원으로 모든 자료의 번역을 담당한 ‘라일락회’, 한국에서 가장 오래 주재하는 기자 '구로다 가쓰히로' 선생, 유튜버 정창관 선생,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 네 분이 각각 발표를 한다. 발표주제와 발표자 제1주제:アリラン講演原稿2312横 /구로다 가쓰히로(일본 산케이신문 객원논설위원) 제2주제:'한일의 마음을 이어주는 노래 아리랑’/강은혜 (일본인 모임 '라일락' 회원) 제3주제:일본속의 아리랑음반을 살피다/정창관(정창관의 아리랑 유튜브 운영자) 제4주제:일본 속의 아리랑’ 9개체요 존재양상/김연갑(아리랑연합회) 기미양(아리랑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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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아리랑’을 아십니까?‘일본아리랑’을 아십니까? ‘일본아리랑’ 40종, 1931년부터 1965년 까지 일본 속에서 제작되어 음반에 수록되어 음원이 확인 되는 아리랑 종류가 40여 종이 확인이 된다. 이를 ‘일본 속의 아리랑’ 또는 ‘일본아리랑’이란 이름으로 논하는 자리가 펼쳐진다. 그동안 남북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중국이 자국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이웃나라 일본인들이 듣고 부른 아리랑이 40여종에 이른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1932년 소화시대 최고의 작곡가 고가마사(古賀政男) 編曲 佐藤惣之助 作詞에 淡谷のり子와 長谷川一郎(蔡奎燁)이 부른 ‘アリランの唄’ 등이다. 이런 아리랑이 1965년까지 발매된 음반에 수록된 것이 53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가수 스가와라 스즈코(菅原 都々子)가 자신이 부른 아리랑만해도 6종(‘아리랑’, ‘아리랑 달밤’, ‘아리랑 애가’, ‘그리움은 아리랑고개 넘어’, ‘아리랑 이야기’, ‘아리랑 애가 이야기’)이나 된다. 그리고 이를 SP·LP·EP 음반을 발매하며 여기에 60여번이나 아리랑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는 매우 주목할만 한 사항이다. 그런가 하면 장르에서도 엔카, 전통성악 신나이, 째즈 형식의 아리랑도 있고, 영화, 미술, 공연 분야로도 확대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에 의해 아리랑문화를 형성시켰다. 이는 일본의 음악적 개방성에 의한 아리랑 정서 수용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피압박 민족 ‘고난극복 메타포(metaphor)’로서 아리랑의 보편 가치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아리랑’ 40여종의 곡명을 살피면 가장 많은 것은 아무런 수식 없이 쓴 ‘아리랑’(アリラン)이다. 1931년 첫 아리랑부터 1965년까지 12가지가 되는데, 8가지는 곡조가 ‘본조아리랑’이다. 가사도 1, 2절은 거의 본조아리랑을 수용하고 있다. 후렴도 반드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アリランアリランアラリヨ アリラン峠を越えゆく)를 썼다. 또한 3, 4절은 모두 개사한 것이다. 여기에 ‘노래’라는 의미로 쓰이는 ‘アリランの唄’(小唄, 節 포함)가 13종인데, 이 역시 거의 곡조는 본조아리랑이다. 이 경우는 1절과 후렴 전행은 같으나 2~3, 4절을 개사한 것이다. 이 같이 두 경우는 번안작품이 분명하다. 이는 언급한 바 있듯이 ‘일본아리랑’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것은 1926년 개봉된 영화‘아리랑’의 주제가임을 재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悲歌’, ‘哀歌’, ‘夜曲’, ‘新曲’이 각 1종이다. 주제(主題)가 짐작이 된다. 지명을 쓴 것은 단 두 가지만 확인된다. 만주아리랑(満州アリラン-1937)과 도쿄아리랑(東京アリラン-1959)이다. 같은 곡명은 アリラン夜曲(1935)과 아리랑 항구(アリラン波止場-1960) 이 각 2종이다. 그리고 서양 음악 리듬을 제목에 쓴 경우가 두 가지인데, 아리랑룸바(アリランルンバ-1952)와 아리랑맘보(アリランマンボ-1954)이다. 1950년대 일본의 댄스 음악의 유행상을 짐작케 한다. 장르상 주목하는 작품도 있다. ‘가요이야기(歌謡物語)’ 가 두 작품인데, ‘아리랑가수’ 스가와라 쓰즈코의 두 작품이다. 그 내용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한편 ‘고개’를 쓴 것은 한 종이 있는데, ‘고개 상’(峠)을 쓴 ‘아리랑고개 (アリラン峠-1951)이다. 한자권에서는 주로 고개를 ’嶺‘을 쓰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쓴 것이 확인되었다. 이외의 곡명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추억(アリランの思ひ出-1933) ‘가요이야기 아리랑애가 엘레지’(歌謡物語アリラン哀歌 エレジー1951) ‘가요 아리랑이야기’(歌謡物語 アリラン物語-1952) 울지마 아리랑처녀(泣くなアリラン娘-1952) 아리랑 달밤(アリラン月夜-1953) 동경아리랑 고개 저편(憧れはアリラン峠の彼方-1954) 아리랑 자장가(アリラン子守唄-1955) 아리랑 고개의 추억(アリラン峠の思い出-1960) 이상의 곡명에서 작품의 주제를 어느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즉, ‘이별의 정한’ 내지는 ‘과거 회상’이 된다. 30년동안 발표된 전체 곡명 중 ‘아리랑(アリラン)’과 ‘아리랑우타(‘アリランの唄)’를 쓰는 것이 절반에 이른다. 곡조와 후렴 전행 또는 후행을 거의 공통으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아리랑’ 주제가 또는 ‘본조아리랑’의 번안(飜案) 작품들이다. 본조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이를 대상으로 4인이 모여 이에 대한 의미와 성격 등을 논의 한다. 자료를 유튜부에 정리하여 검색을 가능케 한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 이를 분석 해제와 번역을 한 ‘라일락회’, 가장 오랜 재한 주재 일본인 구로다 가쓰히로(黑くろ田だ 勝弘かつひろ)기자,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이 함께한다. 주최는 ‘라일락회’, ㈜국악신문이 후원한다. 22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빌딩 회의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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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 재해석 독립군 스토리 '비밀의 노래'강원 정선군은 아리랑의 시원설이 전해지고 있는 정선아리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두 번째 뮤지컬 퍼포먼스 '비밀의 노래'가 14일 아리랑센터 아리랑홀에서 펼쳐진다고 13일 밝혔다. 13일 정선군에 따르면 비밀의 노래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군들이 아리랑을 비밀 암호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했다. 정선아리랑을 중심으로 전국 팔도 아리랑, 당시 음악, 춤 등으로 우리 민족의 일상과 희로애락을 풀어낸 작품이다. 아리랑의 다채로운 매력에 역사적 사실까지 더해져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문화재단의 상설 공연 '아리아라리'를 연출한 윤정환 감독이 한민족의 소리 정선아리랑을 소재로 제작한 두 번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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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경새재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의 만남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지난 주말 11일 문경 시민들이 사할린동포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양주를 찾아갔다. '아리랑도시 문경’을 알리고‘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 및 대중화를 위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 이만유)’가 주관, 개최한 올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열렸다. 아도위 회원 34명이 이른 아침 문경에서 버스로 3시간 반을 달려 이렇게 먼 곳 양주를 찾아간 연유는, 2014년 사할린 귀국 동포 101명(현재 95명)이 양주시에 새 둥지를 틀어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고, 문경새재아리랑의 확산을 위함이었다. 율정마을 ‘양주시 사할린동포회(회장 : 김정희)’와는 이미 몇 차례 우리와 만난 인연이 있었으며, 특히 2018년‘디아스포라 아리랑제’가 열렸을 때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서 아도위가 주관한 고유제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어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도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와 러일중 동포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행진을 했다. 이 당시 이 분들도 함께 무대에서, 광장에서 만났다. 당시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이름으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양주시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직전 회장, '카레이스키아리랑'(카레이스키는 러시아어로 ‘고려인’을 의미)을 창작하신 김세르게이 작곡가,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최나타샤(최미분)단장,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 의정부 전호열 아리랑 애호가께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고 축사 및 격려사를 해 주셨다. 먼저 이만유 위원장이, 오늘 ‘양주시 사할린동포회’를 찾아와 여러분과 함께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열게 되어 반갑고, 이 만남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며,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이 역사가 오래되어‘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하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아리랑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 민간인들이 뭉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시키기 위해, 지난 2017년 아도위를 창립, 아리랑학교 등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근래 인지도가 높아지고 문경새재아리랑을 주목하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편곡하고, 여러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어 가슴 뿌듯하다. 모쪼록, 오늘 아리랑학교가 끝날 때까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고,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이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창작 발표하여 아리랑으로 코로나를 물리치자는 노래를 널리 알렸다"고 격려해 주었다. 직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으며, 오늘 이렇게 사할린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아도위에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은 "지금까지 양주사할린동포회와 문경시민들과는 7번의 만남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신 아도위에 감사한다"고 하였으며,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도위가 받은 감사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어서 신현국 문경시장(함광식 문화관광농업국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 ‘문경새재아리랑 소리꾼 송영철과 만남’과 문경오미자 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위원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이날 아도위 황동철 이사의 사회로 시작한 아리랑학교는 식전행사로 ‘한두리국악단(단장:함수호)’의 여는 마당, 사물과 태평소(함수호: 쇠, 유대상: 설장고, 김원섭: 북, 이성자: 징, 김경숙: 태평소)의 풍물 공연으로 이날의 행사를 축하했다. 이어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 최미분) 20명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어서 한두리국악단 반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합창단(단장:박순자)의 ‘아리랑연곡(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축하 공연이 있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아도위 창작곡인 이만유 작사 함수호 작곡의 ‘코로나아리랑’과 권순애 작사 함수호 작곡 ‘풍년아리랑’공연이 있었으며,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이고,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이야기’란 주제로 이만유 위원장이의 특강으로 아리랑은 어떤 노래인가?, 아리랑의 기원과 유래, 어원은 무엇일까?, ‘문경새재아리랑’은 우리 아리랑사에서 어떤 위치,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이춘자・전정남・안복수 위원의 지도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으며, 안복수・이성자・김금옥 위원의 ‘다듬이 공연 및 체험’, 곽말득・신준식・조홍자 위원의 ‘하모니카 공연’, 가야금 함수호・해금 이기옥・장고 김경숙 국악인의 ‘가야금 합주’, 김영애・정행복 위원의 ‘신나는 가요 공연’, 정송위・김옥화(후) 위원의 ‘뱃노래’, 전정남・김옥화(선)・박춘자 위원의 ‘우리 비나리’, 사물놀이에는 쇠 함수호・설장구 유대상・북 김원섭・징 이성자, 태평소 김경숙의 멋진 공연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함께하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날 공연 총괄 지휘는 함수호 단장, 행사의 모든 기록(사진, 동영상)은 오석윤 감사가 수행하였다. 이상으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아도위가 준비한 떡과 수박, 오미자 와인 등과 사할린 동포께서 직접 구운 러시아식 빵과 차를 들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 아도위 회원들은 대한민국 아리랑사에 또 하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가슴 뿌듯하게 ‘아리랑도시 문경’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 아니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그날까지 문경새재아리랑의 전도사가 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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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 얼쑤!지난 11일 오후 2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사할린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문경시민 40여 명이 양주사할린동포회(회장:김정희)를 찾아서 아리랑으로 동포애를 나누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이만유, 아도위)가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일환으로 10년 전 사할린에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양주사할린동포회를 찾았다. 양주 사할린 동포들은 2018년부터 문경시민들과 문경(2번). 광화문광장, 사할린(3번), 정선 등에서 7번을 만났다. 특히 2018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사할린 현지 사할린공연단(단장:이진선) 35여 명이 초청되었을 때, 당시 문경시민들과 문경새재에 올라서 '아리랑고유제'(제사장:이만유)에도 함께 참가했다. 당시 2018문경새재아리랑제 주제곡 '카레이스키 아리랑'의 작곡가 김세르게이 선생이 사는 곳이 양주 율정마을이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의 배우자이다. 지난날 문경시민들과 사할린 동포들의 만남을 헤아려볼 때 이번 행사는 그만큼 의미가 깊다. 매년 양주 사할린 동포에게 문경사과를 보내주는 익명의 회원도 있다. 환영 축하 공연으로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미분 회장과 회원 20명이 사할린아리랑을 선사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 합창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기미양 국악신문 대표이사,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축사를 전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최근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의 초청으로 파주사할린동포회원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에서 개최한 '통일아리랑평화축제'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불렀다는 노래가 아리랑이고, 지역마다 아리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역사 기록에도 서민과 왕이 같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고 봅니다. 저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처음 들어본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늘 부모님이 일하실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서 따라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사람들이 모이면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라고 소감과 함께 축사를 전했습니다.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담론이 횡행하지만, 오늘 사할린 동포를 대표하는 권경석 회장에게 감사장을 받는 두 단체의 활발한 전승활동 사례를 들어 자랑 좀 하겠습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 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입니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 답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정선, 진도, 밀양에 이어 사할린을 가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실행을 못하고 해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하려고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창조성'을 주목하는 아리랑의 속성에 주목하여 왕십리아리랑을 창작. 보급에 성공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창작아리랑의 창출 가능성을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어느 고을이든 공동체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할리아리랑보존회도 전승단체로서 정선에 세운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건립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양주 사할린 동포는 해외 전승단체로 2018년 문경 디아스포라 아리랑 축제에서, 매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 지난해 12월 정선에 세운 유네스코아리랑비건립식에도 동행해 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김세르게이 작곡가와 사할린아리랑보존회가 살고 계시는 양주 율정마을을 아리랑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 이렇게 오늘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여러분과 사할린 동포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3년간 임기를 마치고 3개월 전 귀국한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넙죽 바닥에 엎드려 사할린 동포들에게 전통 방식의 큰절을 올렸다.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모두가 갑자기 가슴이 울컥 숙원해졌다. 이어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교직을 맡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그리운 동포들이 살고 있는 사할린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톡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만 올 수 있고, 부모가 사망하면 2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히나 전쟁으로 4년이나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문경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이후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과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공로상을 수여했다. 아도위 이만유 위원장은 "오늘 행사는 우리 아도위가 '새로운 아리랑 역사를 쓴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대일항쟁기 이후 70여 년 동안 사할린에 억류된 동포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얼굴을 마주보니, 매년 문경새재아리랑제와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문경에 방문을 할 수 있는 방향도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공로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혜솔 회장은 "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 이후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회원들과 힘이 닿는 날까지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전수교육,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에도 앞장 서겠습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어 신현국 문경시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시가 보낸 문경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과 문경오미자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회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식전 행사를 마치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이 환영사에서 "코로나가 오기 전 양주사할린동포회는 그동안 문경시민들과는 7번을 만났다. 2018문경새재아리랑제(디아스포라 아리랑) 2019문경찻사발축제에 초청되어 2번이나 문경을 방문했고, 2018년 사할린아리랑제가 열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고윤환 문경시장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광화문 광장)에서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전승 단체들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오늘 이렇게 먼길을 찾아주신 문경시민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지난 2018년 12월 아리랑연합회에서 관광버스를 보내 주어서 우리 양주 사할린 동포들이 양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통일아리랑축제'에서 북한, 중국, 일본 동포들이 부르는 여러 아리랑을 처음 들었다. 이후 사할린합창단을 만들어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라고 회상했다. 이어서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제1부에서 아도위 문경시민들이 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이 이어서 연곡으로 소개되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함수호 단장이 작곡한 창작아리랑 풍년아리랑, 코로나아리랑을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서 힘차게 선보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였다. 이어서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다. 이춘자, 전정남, 안복수 회원이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 구절 한 구절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이춘자 강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 못하는 동포들이 금방 따라서 부르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문경아리랑을 배운 동포 중 이영헌씨는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나가보자고 하며 언제냐"고 물어본다. 문경아리랑을 따라서 부르면서 신명이 나서 어깨춤도 추었다. 한편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은 작년 대구아리랑경창대회에 동영상을 보내는 비대면 심사에 출전해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행사를 마치고 양주에서 직접 구운 빵과 차를 준비한 다과회에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문경에서는 떡과 수박, 문경오미자 와인을 준비해서 내놓았다. 오후 6시 아도위 회원들은 동포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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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주헝가리 한국문화원, '아리랑의 문화, 아리랑, 한국 문화의 창窓' 특강본 시리즈의 첫 번째 프로그램은 아리랑의 문화(The Culture of Arirang)이다. 이번 강연을 위해 현재 45년의 긴 역사를 지닌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회장이며,‘아리랑의 연구자’이자 운동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김연갑 회장을 직접 초청해,‘아리랑, 한국 문화의 창窓’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강연 내용은 아리랑의 역사와 전통,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아리랑의 위상, 해외전파와 디아스포라 아리랑, 민요에서 모든 장르로 확산된 문화로서의 아리랑, 그리고 한류의 원류로서의 아리랑의 의미 등을 정치, 외교, 문화예술 영역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흥미롭게 풀어갈 예정이다. 아울러,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평창아라리, 정선아라리 등 다양한 아리랑 및 각 지역의 민요를 모던 밴드 음악으로 재구성하는 창작음악집단인 민요밴드 bob의 공연을 통해 전통 민요로서의 아리랑의 모습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간도 제공된다. 국내외 한국 문화 전문가들을 초청해 한국 문화의 본류本流인 아리랑(Arirang)을 시작으로,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 선호를 통한 ‘한국’적인 성별 분리주의와 성역할, 성혐오 등 한국의 문제적 한 장면과 예술 작품의 연계성에 대한 논의와 인터넷 미디어 플랫폼의 발달을 배경으로 BTS 이후 글로벌 시장에 ‘안착’한 케이팝(K-POP)의 현재 좌표와 향후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어서 본연의 언어, 음식, 관습, 정체성이라는 뿌리를 되찾은 본질적 ‘한국다움(Koreaness)’의 시대를 거쳐 한국이 '잊혀진 전쟁에서 K팝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으로 어떻게 부상했는지, 그리고 향후 전망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은 한류확산으로 한국문화 체험기회 증가하며, 한국문화의 특징, 역사 등 한국문화·사회 관련 인문학·철학 강좌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지난 해 부터 시범 추진한 인문학 강좌를 확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국 문화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키워드 혹은 의제를 중심으로 총 4회의 인문예술 강좌 시리즈를 진행한다.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원장 인숙진)은 올해 '코리아 살롱 1.5'라는 시리즈로 총 4회의 인문예술 강좌 시리즈를 진행한다. 1.5는 1과 2사이의 중간, 헝가리와 한국의 중간 지점, 상호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인원장은 '올해는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11년째 되는 해이다. 이번 강연을 통해 한국의 높은 문화적 다양성,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미덕의 노래이자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과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노래로, 한류 열풍의 중심에 아리랑문화가 한국 문화의 원류로서 어떤 역할과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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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문경새재’도 아리랑?삼목 作 "선생님, 제가 보낸 카톡 사진 보셨어요? 점촌 버스터미널 사거리에 걸린 프랭카드인데요, 내일 강연 안내인데, 아리랑연합회 김** 선생 문경에 온다는 내용만 있어요. 아리랑 강연 내용은 없고요. 점촌 시내 곳곳, 문경읍 면 단위에는 200개나 부쳤다고 합니다. 재밌네요.” 문경시가 주최하는 시민 대상 아리랑 특강 안내 프랭카드. 내용이 아리랑을 강의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아리랑 연합회 김**가 문경에 온다는 식의 표현이라서 어색하고 재미있다고 기찬숙 선생이 알려온 것이다. 이 시기 문경아리랑은 물론 아리랑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20012년 6월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강연이었다. 강연 주제는 아는 이들이라면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내용이다. 70분간의 강연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 나오는 ‘아리랑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문경새재가 바로 '아리랑 고개'라는 말입니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향입니다.” 이 요지의 강연을 계기로 문경지역에서는 소위 ‘문경아리랑 붐’이 일어났다. 당시 송옥자 회장이 문경아리랑을 알려오고 있었지만, 시청과 문화원과 일반인들에게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다”는 인식이 번지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020년까지 문경지역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행해진 사업과 행사를 보면 그야말로 획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망하게 이뤄졌다. 정선이나 밀양 또는 진도 지역에서 20여년간 이뤄진 것들이 한 시장의 5년 임기 내에 이뤄진 것이다. 대충 추려도 이럴 정도이다. 첫째는 문경새재아리랑제‘가 대규모, 정례화, 대외 행사로 확대, 개최 둘째는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을 공식화, 국회 정책발표회, 아리랑 가사 서예 작품화 셋째는 문경새재아리랑과 다듬이 소리 브랜드화 행사(광화문 천명 다듬이 행사) 넷째는 문경시 ‘아리랑도시’ 선포 다섯째는 경복궁 중수 후의 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의 연결고리 학술 담론화 여섯째는 헐버트 채보아리랑과의 연결, 독일 홈볼트 아카이부 독일포로 고려인 유리콜라이 아리랑 음원 전시 및 관련자 초청 행사 일곱째는 최초의 통속아리랑 H. B. 헐버트 채보 아리랑악보비 건립 여덜째는 문경시장 사할린아리랑제 동행 및 해외 연주자 초청 공연 아홉째는 민요학회 주최 문경새재아리랑 주제 학술대회 등 개최 열 번째는 전승단체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와 아리랑문화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양립 이상의 과정에는 문경시청이라는 관官의 지나친 주도로 전승주체가 소외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10여 년간 점령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 ‘아이디어만 빼 먹는 관’이라는 구태도 구설에 올랐다. 이 중심에 삼목이 있었다. 삼목은 이 아리랑 공사公事에 스스로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드러나게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와 그 위상이 정립 또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문헌과 음반 기록으로 그 실체를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1896년 H. B. 헐버트가 기록한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대표사설은 이후 ‘구아리랑’에서부터 1926년 밀양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까지 전승된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즉, 경복궁 중수(1865~1872)7년 기간에 문경의 새재에서 나는 특산물인 박달나무가 공사장 도구 자루로 다 베어져 나간다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이 새재는 경복궁 중수 기간 삼남의 부역꾼들이 반강제적으로 오가며 넘었던 고개이다. 여기에서 ‘새재’는 ‘고개’로, 고개는 ‘고난’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삼목은 1985년 헐버트 기록을 발굴, 소개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1905년 오키타 긴조(㳞田錦城)의 ‘한국의 이면韓國 裏面’ 소재 아리랑 기사, 1925년 동아일보의 ‘박달나무 민요’. 1929년 ‘개벽開闢’의 ‘문경요聞慶謠’, 1930년대 이재욱의 ‘영남민요조사자료’의 문경지역 민요자료 등을 발굴하여 존재를 밝혀냈다. 이러한 문헌 전승을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확인은 거의 삼목의 몫이었다. 한편 이 시기 더불어 거둔 성과가 또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발매된 지역 아리랑 음반의 발굴이다. 즉, 1936년 밀리온 레코드사가 발매한 최계란 소리 ‘대구아리랑(1936년)’이 2008년에 발굴되고,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가 발매한 서영신 소리 '동래아리랑(1937년)’이 2009년 발굴 되고, 같은 해 '신밀양아리랑(1936년)' 등이 신나라음반 자료실에서 발굴되었다. 이미 장소성을 부여한 강원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의 지명 아리랑이 뒤늦게 발굴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명 아리랑도 발굴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음반 수집가들에 의해 또는 대학 연구소 음원 아카이브가 주목한 장르는 판소리 명창 음반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이나 손기정 선수 같은 역사인물의 육성 음반 등이었다. 지역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두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국적인 아리랑 신드롬과 함께 지역 아리랑 음반들에 관심을 보여 발굴되었다. 이에 의해서 ‘경주’, ‘춘천’, ‘문경’ 지명의 아리랑도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삼목으로서는 당연한 기대였으며, 국내와 일본 및 해외의 음반 판매사의 싸이트를 주목하고, 1930, 40년대 신문 광고도 살피게 되었다. 2017년 11월 초, 제10회 문경새재아리랑제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 문경을 바쁘게 오가던 시기이다. 고속버스가 충주를 거쳐 점촌을 향하는 중에 기 선생 특유의 높은 톤이 들려왔다. 기 선생이 안국동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 색인 작업을 통해 ‘아리랑연표’를 작성하다 찾아낸 것이다. "포리돌 음반 광고에 ‘문경새재’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건 분명 문경새재아리랑인 것 같아요. 왜냐면 오태석과 정남희 반주에 조앵무와 임소향이 부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분명 이건 문경아리랑 음반입니다.” 나는 문경문화원 일을 보면서도 건성이었다. 마음 한쪽은 빨리 서울에 들어가서 기록을 보고 싶어서 다. "일제강점기 문경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는 기대는 했지만, 실제 그 존재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 요 몇 년 동안 추정한 것이 실제 현실로 드러난 것이니 신비하기도 했다. 급한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 온 삼목은 기 선생이 출력해 놓은 조선일보 1939년 1월 19일자 ‘포리도루 조선음반 신보’ 광고를 보았다. 분명하게 2월 신보 광고란에 ‘聞慶새재’가 들어있다. 반주자 두 분과 노래한 두 분도 분명히 나와 있다. 다만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없을뿐이다. 그러나 삼목은 확신을 했다. 여러 문헌에서 ‘아리랑’이 붙지 않은 ‘문경요’나 ‘박달나무 민요’가 모두 문경아리랑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성경린과 장사훈이 펴낸 ‘朝鮮의 民謠’에서도 ‘聞慶새재’로 곡명을 달았는데, 그 가사는 문경새재아리랑이다. 그런데 이 광고만으로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실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기사와는 다르게 광고 게제 일시와는 시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음반은 발매 되지 않고 광고만 나왔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광고만 나오고 발매는 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70여년이 지나도록 실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이 두 가지 의문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찾기 시작했고 관련 기록을 수소문 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매일 색인 검색을 하는 김종욱 선생에게 부탁한 결과 의미있는 자료가 왔다. 그것은 매일신보 1938년 7월 17일자와 9월 25일자 경성방송국(JODK) 국악 프로그램에서 ‘문경새재’가 송출되었음을 확인했다. 여기에 따르면 부른 이는 다르지만 같은 반주자에 의해 방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음반 발매 여부와는 또 다르게 ‘문경새재’가 국악인들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광고자료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음반 존재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발굴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이를 언론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기 선생은 "우리가 음반을 찾고 발표해야지 이 자료만 알리면 안된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 "그 음반 찾게 되면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기사를 보고 찾았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눈이 밝아서 '최초 발굴'이라고 떠들면서 찾았다는 기사를 내는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삼목으로서는 누가 찾든 빨리 음원을 확보하여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제고하고, 연구 자료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드디어 2017년 11월 3일, 문경문화원 고성환 사무국장을 통해 문경매일신문과 대구매일신문에 자료를 공개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 한민족아리랑연합회와 아리랑학회는 2일 문경새재아리랑이 1938년 7월 17일 오후 8시 KBS라디오 전신인 조선방송(JODK)에 방송됐고, 영국의 레코드사가 취입해 음반으로도 내놓았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와 광고를 비롯한 방송자료를 발견해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기사의 말미는 이렇게 여몄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경새재아리랑은 헐버트 선교사가 서양 악보로 채보하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방송을 타고 임소향이 음반을 낸 이후인 1940년대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 널리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일 임소향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문경새재아리랑은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널리 불렸을 것이다-고 했다.” 이 기사는 ‘문경새재’라는 음반명과 곡명을 아예 ‘문경새재아리랑’으로 특화, 단정하였다. ‘문경새재’는 ‘문경새재아리랑’ 또는 ‘문경아리랑’으로 특정, 검색 키워드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음반이나 기타 문헌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 이 기사로 문경과 소장자들에게 전해져 반향이 컸다.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이 공감을 표해왔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도 "문경아리랑이 다른 지역 아리랑과 함께 중요한 위치였음을 확인시켜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드디어 기사의 결과가 나왔다. 존재에 대한 기사가 나간지 1년,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면 관장이 소장 자료를 공개했다. 광고 문안과 동일했다. "Polydor X-517-A(10386BF) 南道雜歌 梅花打鈴·聞慶세재 吳太石·丁南希·曺鸚鵡·林素香 伴奏 韓成俊·金德鎭·鄭海時” ‘南道雜歌 聞慶새재’ 불은 라밸의 폴리도루 음반, 너무나 반가운 음반이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노재명 관장이 가사지歌詞誌까지 발굴, 공개했다. 획기적인 발굴이다. 이로서 3절의 가사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중모리)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야 눈물이 난다.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밭을 매고 저 논 갈아 양친 부모님을 봉양허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물을 건너고 저 산 넘어 우리 님 계신 곳을 찾어가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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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1/694쪽’의 아리랑(하)묘한 여운을 간직한 채, 접어둔 이 책은 책장 속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2년 여가 지난 어느날, 삼목은 아세안게임행사시 많은 문화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삼목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행사의 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발표회’라는 프로그램의 첫 순서 ‘선구자’, 그 옆에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으로 되어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설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1963년 12 30 시민회관, 조두남(1984년 작곡) 작곡 발표회에서 바리톤 김학근 불러 유명해진 곡. 이후 7년간 기독교방송의 ‘정든 우리 가곡’ 시그널뮤직으로 우리에게 친근해진 가곡이다. 작시는 작곡가와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시인 윤해영의 작품이다.” 그리고 선구자 3절이 병기되어 있었다. ‘제2의 애국가’로도 표현되는 가사이다.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분명 애국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그러나 삼목은 곧 출판 할 아리랑 사설집 편집 최종 교정을 보면서도 미심쩍어 한 ‘滿洲 아리랑’과는 상반된 시상詩想이에서 일종의 불안감마저 들었다. 분명 만주 아리랑‘은 ’오족五族‘이란 어휘에서 친일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짖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목은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제공해준 정보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제16號’로만 출전을 밝히고, 윤해영 작품임은 명기하지 않은 채 수록했다.(‘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 현대문예사, 1986. 214쪽)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삼목은 당시 국립극장 허규 극장장, 기획자 이광수, 회원 원재식씨 등과 ‘아리랑축제’를 추진하는 등 동분서주할 때다. 그 와중에 몇 년 만에 다시 윤해영을 되살려 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으로부터다. "예상했던 대로 만선일보에 안수길, 윤해영 같은 이들의 자료가 많이 나왔어요. 아세아문화사에서 만선일보 영인본을 냈어요. 그런데 김형이 우려했듯이 윤해영은 문제가 있어요. 아리랑만주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확실해요. 그 가요 ‘아리랑 만주’와는 또 다른 작품이요. 윤해영은 결국 아리랑을 세 편 쓴 것이 되는데. 저녁에 만납시다. ‘滿洲 아리랑’ 복사했으니까.” 1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2 말발굽 소-리 끊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3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아리랑 만주’ 보다는 간결한 작품이다.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 1941년 1월 1일자에는 신춘문예 민요부에 당선된 작품이다. ‘아리랑 滿洲’ 제1절의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와 이 작품의 3절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는 같은 맥락이다. 만주국의 이념인 ‘五族協和’의 표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삼목은 강원대 박민일 교수에게 윤해영의 작품 사본을 송부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리랑을 친일 도구로 쓴 것인가!” 삼목은 차마 윤해영의 아리랑 작품들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리랑의 변절, 이런 막다른 표현이 겁이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박민일 교수로부터 ‘친일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받았다. 읽지 않고 뒤처 놓았다. 그럼에도 ‘친일 아리랑’이란 표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여운으로 따라왔다. 1995년 중반은 국학연구 붐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이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각종 간행물들이 국가기관이나 연구단체 등에서 수집하여 각 도서관에 비치됨으로서 가능했다. 만주지역에서 간행 된 출판물과 정기간행물도 이 시기 전후 영인 되어 연구 자료화가 가능했다. 만선일보(1936~1948)나 흥아협회 기관지 ‘재만조선인통신’,‘중국조선족문학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과로 만주지역 조선인 문학에 대한 학계의 조명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윤해영이란 시인에 대한 작품도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95년 중반 이 시를 비롯한 윤해영의 시가 총 9편이 있음이 드러났다. 인천대 오양호 교수가 논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에서 밝힌 것이다. 9편은 다음과 같다.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발해고지, 사계, 척토기, 낙토만주 이 논문의 결론은 "9편의 시에 나오는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와는 정반대다. 결국 윤해영이 선구자 작시 이후 변절한 증표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대비는 이미 가곡 ‘선구자’가 받고 있는 평가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 연변인민출판사가 간행한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이런 평가이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몸에 지니고 나라와 미녹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 되여 불리우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중반의 윤해영의 시에 대한 평가였다. 이로부터 윤해영은 ‘선구자’ 외의 작품은 친일 시로서 혐의嫌疑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외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1984년 조두남선생이 작고할 때 까지도 문제가 없던 것으로, 1982년 세광출판사 발행 조두남 수필집 ‘그리움’에서 기술한 짧은 진술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1932년 목단강의 허름한 여관에 묶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내게 ‘용정의 노래’를 주며 작곡해 달라고 사라졌다. 아마도 이 젊은이는 독립군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 돌아와 선구자로 곡명을 바꾸어 발표했다.” 조두남은 이 책을 낸 2년 후 작고했다. 그런데 해방 전 까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한 재 중국 음악인들이 한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진술이 거짓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조두남이 ‘징병령 만세’ 같은 친일 작품을 작곡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랬으며, 윤해영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함께 음악활동을 했음은 물론, 친일 시를 썼다는 사실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급기야 한국에 유학을 온 연변 음악가 류연산씨가 2004년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라는 책에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음악활동상을 밝혀 조국에 알린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두남과 윤해영은 친일 음악가로 규정되었다. ‘선구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슨 윤해영은 아리랑을 친일의 도구로, 민족 정서를 팔아먹은 반역의 시인이 되었다. 아리랑의 역사에서나 한국문학사에서나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쓴 이는 윤해영이 유일함에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까지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 ‘용정의 노래’를 ‘선각자’로 바꾸고 시도 일부 개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는 애초부터 친일 시였다는 것이다. 삼목으로서는 자료적인 관심 외에는 어떤 해석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장 속에 넣은 ‘半島史話와 樂土滿洲’를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 3일자 삼목의 일기장에는 여러 메모 한 모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어제 산 김연수의 ‘몽상의 시인 윤해영’을 대충 읽었다.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친일시인이 아니라 진솔한 민족시인"이란 규정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적 해석 영역에서 이런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다섯 문장을 인용하여 놓았다. 저자 김연수의 주장이다. *"낙토만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환유로 민족의 꿈이고 기도이며 또 기도가 소원하는 파노라 마의 내용이다.” *"만주국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만주가 사실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으니 의당 지금도 우리의 땅이라는 저의가 담긴 시이다.” *"오색기(五色旗)도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가 아니라 고구려의 오색기다.”*"낙토, 오색기, 오족 등 그의 어용적 자세를 추정하게 하는 낱말들을 쓴 것은 실은 저의를 감추고 검열 등에 선수를 치기 위한 (검열관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시를 외향적 의미로 단정 짓는 무지한 현상이 안타깝다. 윤해영이야 말로 일제 강점기 재 만 시인 가운데서 가장 특출한 방식으로 저항정신을 구현하면서 저항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저항시인이다. 그것은 민족의 꿈을 이렇게 아리랑 정서에 담아 검열과 감시의 장애물을 넘어 민족을 향해 읊은 진솔한 시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삼목은 ‘한국의 아리랑문화’(국제문화재단 편)를 공동 집필했다. 그 중에 ‘훼절의 아리랑, 악극 아리랑’ 항목에서 1940년대 일제 국민총동원 체제 악극 상황을 파악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나니오부시 아리랑’ 같은 작품이 그 하나인데, 유독 아리랑을 표제로 내세운 작품들이 악극화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연예단을 동원하여 군수공장 같은 곳의 위문공연용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삼목은 이런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소수민족이나 식민지 상황에서 외세에 대한 최후적인 대항에서는 가장 민족적인 정서로 대응한다. 저항력과 결속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의 말기적 상황에서 아리랑을 내세워 저항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삼목은 오랜만에 윤해영의 아리랑 시를 떠 올렸다. 그리고 나름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윤해영도 당시 만주국의 군사적 팽창의 위협 하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족적인 정서를 내 세워 최후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이다. 삼목의 청춘시절 ‘1/694쪽’의 아리랑, 30여 년을 앓고 있다. 아리랑의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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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本調가 뭐야?”(상)삼목 作 "朝鮮에도 民謠가 있다. 四千年의 오랜 歲月을 두고 이 겨레의 착한 性情이 純一하게 發露한 게 곧 우리의 民謠이다.” "朝鮮民謠 중에서 가장 널리 普及된 것으로 적어도 朝鮮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면 이 노래(아리랑)를 모르지 않는다.” 겨레의 착한 성정으로 부르는 것이 민요이고, 그 민요 중에 모두가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이는 1949년 발행된 ‘朝鮮의 民謠’ 공편자共編者인 성경린成慶麟과 장사훈張師勳의 인식이다. 전자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로 이미 ‘조선의 아악’(1947), ‘조선음악독본’(1947)을 지은이요, 후자 역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이다. 그리고 함께 현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이력으로서 당시로서는 민요나 아리랑뿐만 아니라 국악 전반에 대한 해석권解釋權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그런데 최근 한 학회에서 ‘‘朝鮮의 民謠’를 들어 기존의 아리랑 명칭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논란을 촉발시킨 바가 있다. 이로서 삼목의 ‘한국의 아리랑문화’ 외에서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던 이 책의 아리랑 언급이 오랜만에 소환되기에 이르렀다.(문제를 제기한 이도 삼목의 책을 보고 반론으로 제기한듯하다.) 2022년 10월 초, 기奇(찬숙) 선생의 통화음이 다급했다. "혹시 학술회의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끝났는데요. K교수가 논평하면서 '본조아리랑'은 주제가 아리랑이 아니라, 1894년 헐버트 채보 아리랑이고, 주제가 아리랑은 '서울아리랑'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 근거가 제가 듣기로는 성경린과 장사훈 공편 ‘조선의 민요’를 거론한 것 같아요. 그런데요~?” 기 선생이 다급한 어투와는 다르게 조금은 미심쩍은 투로 말끝은 흐렸다. "그런데라니요? 그게 뭐요? 또 뭐가 있었나요?” 기선생이 이 본조아리랑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한국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문학사전’ 표제어 ‘본조아리랑’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삼목과 함께 ‘아리랑 스터디그룹’에서 많은 논의를 한 주제로, 다양한 전거典據를 들어 스터디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사전 편찬의 책임자 중 한 분이 뒤늦게 자신이 참가한 사전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해당 항목의 본문 일부는 이렇다. "본조(本調)아리랑은 주제가‘아리랑’으로 출발하여 ‘신민요 아리랑’, ‘유행가 아리랑’으로 불리다가 ‘신아리랑’ 또는 수식 없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된 것을 말한다. 본조아리랑은 성경린·장사훈이 최초의 민요 개론서 ‘조선의 민요’에서 처음 사용된 명칭이다. ‘본조’는 1940년대 말 국악계에서 사용한 용어로, 음악적 원류(源流)나 본류(本流)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의 확산 장르에서 본(本)·원(元)·중심(中心)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용어이다.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아리랑과의 변별을 위해 1960년대에 일반화된 것이다.”(기미양, 본조아리랑,한국민속문학사전) 분명히 본조아리랑은 1926년 개봉된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를 지칭함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 ‘본조’의 의미는 음악적 본류의 의미가 아니라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술상에서나 공연분야에서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틀렸다고 한 것이다. 삼목은 기 선생이 말끝을 흐린 것이 마음이 쓰여서 다시 되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요? K교수가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학술대회에서 서울아리랑으로 하자는 주장은 있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주장한 바가 있는 거 아녜요? "예 그렇긴 한데요. 이번에는 좀 감정이 실렸어요. 100% 정확한 워딩은 아닌데, M학회가 있는 한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논리나 팩트에 의한 학술적 성과가 아니라 마치 M학회가 유권해석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하필 내가 전화를 받느라 컴퓨터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있어서 듣지 못했는데. 참. 뭐예요?” "예, 그에 대해서 논평자로 참가한 Y교수도 동의를 했어요. 두 전직 학회장이 이런 식의 발언을 한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그렇다. 우선 감정적인 부분은 두고, 팩트를 다시 체크하기로 했다. 삼목은 다시 서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간행된 국악개론서들에서 아리랑 언급 부분들을 체크했다. 특히 ‘본조아리랑’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성경린·장사훈의 민요 사설집 ‘朝鮮의 民謠’를 찾았다. 이 책의 일러두기에는 참고한 서명이 나오는데, 속가집·조선민요선·가곡보감·가요집성·가요집 등에서 사설을 간추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민요집이 사설 중심의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음악적 창을 주안主眼으로 본 가사, 후렴, 구호 등 확연하게 구별하여” 수록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분명히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 선생의 집필에서 분명히 한 것이 이 가사집에서 ‘본조아리랑’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 것이지, 이 책의 ‘본조아리랑’ 기록(해석과 사설)이 반드시 본조아리랑임을 밝힌 최초의 기록이란 뜻은 아니다. 주관처에서 원고 내용을 줄여달라는 요청에 의해 그 부분은 삭제 된 것이라고 한다. 이제 실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자. 이 책의 첫 아리랑은 경기도편의 本調아리랑·新아리랑·아리랑세상·別調아리랑·긴아리랑, 5편이다. 이어 강원도편의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평안도편 긴아리·경상도편의 밀양아리랑, 전라도편의 진도아리랑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 그리고 긴아리랑이다. 우선 문제의 세 편의 사설과 해설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本調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이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①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므나 ②남산 밑에다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 한다 ③아리랑고개다 정거장 짓고/ 전기차 오기만 기다린다 ④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⑤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되네 ⑥말 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가네 ⑦아 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 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⑧신장로 가장자리 아카낢은/ 자동차 바람에 춤을 춘다 ⑨먼동이 트네 먼동이 트네/ 미친님 꿈에서 깨여나네 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新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간다 ②성황당 까마귀 깎깍짖고/ 정든님 병환은 날로깊어 ③무산자 누구냐 탄식마라/ 부귀와 빈천은 돌고돈다 ④감발을 하고서 주먹을 쥐고/ 용감하게도 넘어간다 ⑤밭 잃고 집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⑥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 ⑦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⑧쓰라린 가심을 움켜잡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⑨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메인다 ⑩원수로다 원수 로다/ 총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⑪일간 두옥의 우리 부모/생각할수록 눈물이 난다 ⑫아리랑고개는 얼마나 멀게/ 한번 넘어가면 영 못오나 ⑬우리의 성립 군아/ 뜻과 같이 성공을 하세 긴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 구료/ 아리랑 고개로 나를넘겨주소 ①만경창파 거기 둥둥 뜬배/ 게 잠깐 닻주어라 말 물어보자 ②기차는 가자고 왠 고동을 트는데/ 님은야 팔을 잡고 낙루만 한다 ③우연히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회를 더욱 산란케한다 ④달도 밝고 별도 총총한데/ 임은 날 버리고 왜 아니 찾노 ⑤물속에 뜬 달과 낭군의 맘은/ 잡힐 듯 하고도 내 못 잡아 ⑥누구를 보고자 이 단장했나/ 임가신 나루에 눈물비 운다 이상 세 편에서 해설이 있는 것은 두 편이다. 그런데 이 중 유의미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본조아리랑-"서울의 것을 본조아리랑 그 밖에 밀양아리랑~ ” 긴아리랑-"아리랑에서 가장 일쯕이 생긴 거라고 하지만~ ” 이상과 같이 매우 소략하다. 여기에서 ‘본조아리랑’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란 부족하다. 그 이유를 짚어 보자. 첫째는 본조아리랑의 해설에서 단지 서울에서 불리는 아리랑이란 정도일뿐이라고 했고, 긴아리랑 해설에서는 헐버트 채보 아리랑 즉 구아리랑 또는 京卵卵打令(서울아리랑타령)의 존재를 무시하고 가장 오랜 긴아리랑이 가장 오랜 것이라고 했다. 정리하면 전자는 지역적 분류 정도이고, 후자는 분명한 오류인 것이다. 둘째는 제시된 本調아리랑과 新아리랑의 사설에서도 '구아리랑'인지 '본조아리랑'인지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奇선생이 본조아리랑 사설로 제시한 것을 대비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본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본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신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본④-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왠말인가 이상에서 대비한 바와 같이 ‘긴아리랑’을 빼고는 사설만으로는 독자성을 갖지 못함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의 첫 자료 ‘본조아리랑’은 명칭만 본조아리랑이지 실제는 구아리랑과 또 다른 아리랑 사설들의 모음일 뿐이다. 물론 후렴과 일부 사설들이 ‘구아리랑’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 명칭들은 특별한 인식 없이 편의적으로 부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신’이나 ‘긴’에 대해 변별로서의 ‘본조’를 부여한 것일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K교수가 이 책을 보고 ‘구아리랑’(헐버트 채보 아리랑)을 ‘본조’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 곡명을 ‘서울아리랑’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폈듯이 이 책이 명명한 본조아리랑은 그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임으로 타당성이 없다. 또한 음반 역사에서는 이미 ‘구아리랑’을 ‘서울아리랑’(‘京卵卵打令’/1913년 N6170/1928년 V49047)으로 명명하였음으로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 아닌 서울아리랑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것도 부당한 주장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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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야학, 아리랑 가르쳐주다 징역을”삼목 作 영덕군 관할 보훈지청에 문의한 지 사흘 만에야 전화가 왔다. 삼목이 문의를 겸해서 의뢰를 한 것은 권도순權道順이란 인물의 공적에 관한 것이었다. 답변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 ‘아리랑’을 검색하면 김상순金尙順이란 인물이 검색된다. 1931년 대구지방법원이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4년(주문)을 언도한 인물이다. 26세로, 사는 곳이 경상북도 영덕군 오보면 대부동 220 번지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사건개요’란에 뜻 밖에도 이런 내용이 담겼다. "야학교 흑판에 아리랑고개에 폭탄을 두고 자본주의를 항복시키자는 내용의 시를 쓰고 생도 11명과 노래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19,167건 중 유일한 ‘아리랑’이란 키워드로 검색이 잡히는 자료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바로 이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23세 권도순에 대해 문의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목이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자신의 저서 ‘한국의 아리랑문화’란 책에 소개한 인물이 권도순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청년 권도순(權道順) 군은 동리에 노동 아동을 모아서 야학을 하여 오던 바”라고 주어로 취급한 신문 기사를 따랐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의 다른 인물에 대한 문의이면서 항일 공적을 들어 수훈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건의가 목적이었다. 분명하게 국가기록원 사이트에는 이런 문구를 전재됐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역사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열들을 찾아 그 공적을 널리 알리고, 당사자 및 후손들이 정당한 예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예우하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일 만에 온 통화로 삼목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확인한 결과 권도순은 보훈대상자가 우리 청에서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니 상세한 것은 국가기록원으로 해 보세요. 그리고 말씀하신 아리랑 부르다 사건이 되었다는 얘기는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윗분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건 문화부 소관 아닌가요?” "전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을 부른 것이 경찰에 잡혔던 사건이라고 내가 당시 조선일보 기사까지 읽어줬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그리고 문화부 소관이라고요? 참 허탈하네요.” 삼목의 실망스러운 답변에 다시 이어진 공직자의 응답이 더 가관이다. "선생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는 그 민요 아리랑을 불렀다고 사건이 되었다는 얘기잖아요? 아리랑, 그냥 민요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부른 게 사건이 됐고, 뭐 항일운동 같은 것을 했다는 얘기잖아요? 그 얘기를 윗분에게 어떻게 보고하나요?” 20대 말 정도의 여성 공직자의 답변이 아리랑과 항일운동과 무슨 관련이냐는 투다. 40여분 정도의 통화에서 충분히 취지와 성격을 전했는데, 물론 이런 사항이 상식常識이지는 않지만 항일독립운동가 추서 같은 보훈업무를 담당하는 공직자가 이런 정도의 이해력을 갖지 못한 것이라 안타까웠다. 아리랑을 ‘민요 아리랑’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이 닫힌 인식, 이 분이 겪은 교육과정에서 아리랑이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 조약 직전 시위대가 아리랑을 부르며 일제를 규탄했다는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리랑은 더 이상 민요 아리랑만이 아닌, 그 이상의 노래다. 모든 사료는 그 고유 성질만이 아니라 상품성이란 쓰임새까지 있어야 한다. ‘알면 들을(볼) 수 있다’가 아니라, ‘들으면 알아야(보아야) 한다’.” 이런 인식은 삼목의 ‘아리랑관’이다. 곧 1930년대 신문 기사 속의 ‘아리랑 고개’가 민요 아리랑만이 아닌, ‘야학과 아리랑’, ‘항일운동과 아리랑’, ‘창작 아리랑’, ‘창조적 계승론’ 등으로 의미확대를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훈처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사실 삼목의 기대는 순진하게도 이러했다. "선생님, 윗분께서 자료를 빨리 보고 싶으시다며, 언제 우리 청에 오실 수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이런 예상은 고사하고 아예 "아리랑이라서~” 없었던 일로 하자니! 삼목은 공직자들에게서 수 없이 겪어 왔던 허탈감을 또 맛보게 되었다. 해당 기사를 다 읽어 주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이니. 삼목은 전화에서 신뢰를 주기 위해 구투舊套의 기사체 문장을 그대로, 그리고 자신의 책에 재인용한 것이지만 조선일보 1931년 기사라고 하여 읽어준 것이다. "영덕군에 있는 청년 권도순(權道順) 군은 동리에 노동 아동을 모아서 야학을 하여 오던 바 어떤 날 밤 담임한 선생이 오지를 아니하여 방을 빌려준 김상룡(金尙龍)은 아이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민망히 여겨 복습을 시키다가 ‘아리랑’이란 노래를 가르쳤다는데 그것이 불온(不穩)하다는 이유로써 영덕경찰서를 거쳐 대구지방법원 1심공판에 10개월 징역에 4개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고 지난 4월 3일에 집에 돌아왔고 아리랑고개(以下 6行 畧)라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하여 지난 4월 9일에 김상순 군을 구금하고 또 3일 후에 그의 동무 박재술(朴在述)을 구금한 이래 월여를 두고 취조를 하던 중 돌연히 지난 2일에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는 바···” 기사 내용에서 ‘야학’과 ‘아리랑 노래’와 ‘아리랑고개 6행’이 주목된다. 특히 삼목은 생략 된 6행의 기사 중의 아리랑 사설을 영화‘아리랑’에서 불러 탄압을 받은 사설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영화‘아리랑’ 여주인공 신일선여사의 증언이나 ‘조선가요선’이란 책에서 삭제된 ‘아리랑’ 사설 등을 통해 추정한 것이다.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딜가고/ 쪽박의 신세가 원말이냐 사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에다가 불지를란다” 또 아니면 만주지역에서 조사된 이런 아리랑 사설이다. "XX(독립)당의 出沒이 자즈니/ 領事舘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런 사설까지도 불러주기도 하며 "아시겠습니까?”와 "이해되시죠?”를 중간중간에 넣어 나름 설득을 하려고 노력을 한 바이다. 그리고 요지를 다시 이렇게 정리해 주기도 했었다. "소인이 제시한 것처럼, 신문에는 권도순을 중심인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김상순은 주문에 아리랑 관련 내용이 적시되어있는데, 권도순은 ‘범죄혐의 업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보완해 줄 것을 바랍니다. 그리고 기사에서 생략한 6행의 ‘아리랑’은 요청하면 언제든 소인이 연구한 결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공적이면 보훈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를 꼭 윗분한테 고려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런 삼목의 통화에 상대의 답변 말미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삼목으로서는 기대할만했다. 사실 영화감독 나운규선생 외에 또 한 사람의 아리랑 관련 수훈자가 있게 된다면 아리랑의 또 다른 성격과 위상을 일반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영덕 대부동(현 영덕읍 대부리) 야학 터를 찾아 표식을 하는 계획도 갖고 있는 터였다. 당연히 마음먹고 전화를 한 것이다. "예, 그동안 사실 기록이 보완되어 수훈이 추서 된 경우는 많습니다. 윗분께 전하겠습니다.” 첫 통화 당시의 끝말이었다. 기대할만했다. 그런데 3일 만에 온 답변은 실망스러운 것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랑과 항일운동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라는 뒤늦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삼목으로서는 화를 누르고 이를 진전시킬 방안을 또 궁구해야 했다. 삼목으로서는 1930년대 전후 야학夜學에서 항일노래로서의 애국가愛國歌 사건을 검토한 바가 있었다. 야학과 노래운동의 연관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 야학에서 아리랑도 불렸을 것이란 추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단순히 돈 없는 아이들이 비정규로 수학하는 사설교육 시설(물론 관립도 있었다)이란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아동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어 문맹자들의 계몽에 성과를 올렸으며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하여 지위향상과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민족실력양성에 공헌하여 당시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민중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민족사적 의의는 매우 막중했던 것이다. 삼목은 설 연휴를 보내고 영덕을 가기로 했다. 수첩에 이렇게 썼다. 1. 야학 터 주소지 특정 표식 2. 장소성 부여 3. 아리랑과 야학, 아리랑과 항일운동 상황 보편화 4. 지역문화 콘텐츠화 5. 영덕군지편찬위원회와 함께 조사 6. 영덕군청, 김상순, 궈도순 독립유공자 추서, 보훈처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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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022제주아리랑축제.....'탐라순력아리랑'제주아리랑보존회와 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 공동주최로 지난 18일 제주시 탑동 탐라공원 공연장에서 2022제주아리랑축제가 개최되었다. 주제는 '탐라순력아리랑'이다. 영천 출신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1653~1733)1653-1733)이 남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가 보물로 지정이 되면서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영천과 제주가 아리랑판에서 만났다.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그린 기록 화첩 '탐라순력도'는 제주의 자연·역사·풍속·자연·문화·방어실태를 그림으로 그려서 한눈에 볼 수 있다. 다음은 문헌으로 전해지는 제주아리랑으로 불려지는 '꽃타령아리랑' 사설이다. 만화방창(萬花方暢) 방끗 만화방창 방끗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장대(帳臺)에 일등미색(一等美色) 곱다 자랑 마소 담안에 붉은 빛은 편시춘(片時春) 홍도화(紅桃花)라 1936년 김두봉 편찬의 「제주도실기」에 수록된 ‘꽃타령’, 일명 ‘제주아리랑’ 17수 중 한 수이다. 「제주도실기」에는 이 출전이나 작사자나 시기를 밝히지 않아 작품 이름 외에는 미상인 상태다. 20여년 전 이 작품을 발굴, 소개한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은 이 작품의 후렴을 주목하여 본 사설의 창작년도는 아리랑 후렴의 형성 시기인 19세기 초 이전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후렴을 제외한 본 사설은 육지에서 들어온 지방관 정도의 유학자일 것이고, 시속(時俗)음악도 즐길 줄 아는 인물일 수 있다. 여기에 추정되는 인물이 「악학편고」(樂學便考)와「악학습령」(樂學拾零)이란 악서를 편찬한 제주목사 이형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는 ‘꽃타령’과 아리랑의 관계, 그 작가를 제주목사 이형상으로 추정하는 것에 의아해 하였다. 그런데 이번 20여 년이 지나 ‘탐라순력도’에 대한 자료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형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년간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탐라순력도’라는 기록화첩을 남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의 악서 중 「악학습령」은 시조·가곡을 수집 정리한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분이 경북 영천 출신임도 알게 되었다. 이번 영천아리랑보존회와 제주아리랑보존회 공동행사의 계기성과 20년 전 ‘꽃타령’의 작자를 이형상으로 추정하는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국 아리랑을 통해 18세기 제주 역사와 제주목사 이상현, 그리고 ‘탐라순력도’를 이해하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번의 행사를 통해 영천의 역사 인물과 제주아리랑의 퍼즐 하나가 맞추어진다. 금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10주년이라서 더욱 의미로운 일이다. 이번 공연의 기획의도는 첫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주아리랑'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계기를 찾아간다. 둘째,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와 함께 제주아리랑을 재조명 한다. 셋째. 이형상의 고향 영천과의 연계를 소환하기 위해 영천아리랑을 제주에도 알린다. 넷째, 제주아리랑의 컨텐츠화를 시도한다. 강소빈 회장은 "지난해부터 탐라순력도에 나와있는 경로잔치를 재현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연출하여 이형상을 주인공으로 한 소극을 만들어서 무대화하였다. 그 무대에서 당연히 아름다운 기녀들이 제주아리랑 '꽃타령아리랑'을 불렀다.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회장은 "제주에서 영천아리랑을 처음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영천에서 제주목사로 간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가 제주시의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제주에 오니 더욱 뜻깊은 행사이었다."라고 전했다. 1부에서는 제주 토속소리 '서우제소리'와 '제주아리랑', 해녀 퍼포먼스가 선보이고. 2부에서는 '영천아리랑'과 '뱃노래, 제주 허벅춤 등 다채로운 장르를 통해 제주의 소리와 제주아리랑환타지(조천아리랑. 우도아리랑, 하르방아리랑)을 알렸다. 초청 공연으로 무대에 선 서울아리랑보존회 유명옥 명창은 '애국가아리랑'과 '아미일영아리랑'이 불렸다. 특히 가파도에서 온 해녀가 해녀복을 입고 허벅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해녀의 삶을 읊어대는 1인극 퍼포먼스는 제주 여성의 고난과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휘날레에는 '아리랑 대합장'을 관객과 함께 했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국제적으로 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입증하는 새계적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2014년는 아리랑이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미래 세대에 물려줘야 할 우리나라 총체적 유산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아리랑은 우리나라 전통민요의 하나”라는 표현에서 독립 종목 또는 독립 장르 ‘아리랑’으로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와 문화재청이 보고서에 언급한 아리랑의 수는 2012년 이전에 불러지는 60여 종이라고 했고, 이 ‘아리랑’은 지역성과 형태를 표제화 하고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다. 이것이 아리랑이 지닌 덕목의 하나로 누구든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로 문화적 다양성을 표현해 온 것이다. 제주도아리랑을 전승하는 회원들이 제주 역사와 ‘제주아리랑’이 상호 이해하고 아리랑문화의 가시화에 기여하길 바란다. 오늘같이 제주에서 ‘영천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이 만나는 장을 마련해 준 두 단체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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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좀 보소, “밀양아리랑 여기 있소”‘잇다 밀양아리랑’ 刮目! 아리랑은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전승된다. 아리랑은 세대에서 세대로 계승되어 생활 속에서 불리는 일상의 노래이다. 노래로 번지고 정서로 스민 결과 아리랑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냥 ‘아리랑’이라고도 하고,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라고도 하고, 이념적 지향을 지닌 ‘아리랑문화’라고도 한다. 흔한 노래이면서, 민족을 상징하는 기표이면서, 저항·대동·상생정신을 표방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흔하디흔한 노래이지만 한민족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체이면서 보편의 문화현상이다. 아리랑문화는 힘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중의 비애와 한(恨)의 비극적 정조(情調)를 수렴하였다. 해방공간과 산업화 시대에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민중 의지를 발현시켰다. 그리고 오늘에서는 미래의식을 추동하여 상상하고 가치화하고 있다. 아리랑은 같으면서 다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다. 오늘의 아리랑문화는 하비투스적이고 프랙털적인 일종의 암묵지(暗默知)이다. 모든 아리랑은 나름의 속성(屬性)을 갖는다. 속성은 실체(實體)의 본질적인 성질이다. 그 아리랑이 내재한 특징이나 변별성을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정선아라리는 아리랑의 원류로서 시원성(始原性)을 속성으로 갖는다. 진도아리랑은 강한 놀이성에 의한 즉흥성(卽興性)을, 본조아리랑은 다양한 음악적 실천과 사설의 정한적(情恨的) 해석으로 누구나 가까이하는 보편성(普遍性)을 속성으로 갖는다. 완벽한 밀양아리랑 데이터 베이스 구축 밀양아리랑의 속성은 곡조의 발랄(潑剌)함과 명료함으로 인하여 시기와 상황을 달리하는 사설의 대체(代替)로 기능을 다양화하는 동시대성(同時代性)이다. 이 밀양아리랑의 속성을 두 권의 책과 아카이브로 증명하는 성과가 나왔다. 바로 밀양시 밀양문화재단이 6개월의 작업으로 이뤄낸 ‘잇다 밀양아리랑 데이터 베이스 1과 ‘잇다 밀양아리랑 전승현황 1’이란 두 권의 자료집 발간과 ‘밀양아리랑 아카이브’(https//mycfarchive or.kr) 구축이다. 밀양아리랑 메타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문화콘텐츠진흥원, 전통문화예술진흥재단, 정선아리랑 아카이브, 기존 세 곳의 아리랑 주제 데이터베이스 밀양아리랑 분분을 보완하게 되었다. 물론 밀양아리랑만의 특화로 독점적이라는 사실에서는 주목이 되고도 남는다. 특히 ‘북한에서의 밀양아리랑과 경상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의 해외 전승’ 부분은 유용성이 큰 부분이다. 이 외에도 사설의 변이상을 추적하는데도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아직 밀양아리랑 아카이브의 활성화로 그 성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다른 지역 콘텐츠 사업과 연구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리라고 본다. 사업의 방향성과 양적 측면에서 거의 완벽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베이스 1’은 아카이브 구축의 필수 작업으로 4개 파트로 나눠 기술했다. 국내외 문헌과 논문, 음반, 북한 전승, 해외 전승 등 697개 자료를 목록화했다. 중국동포사회와 북한 지역 전승 상황을 담은 자료는 주목된다. ‘전승현황1’에서는 3개 파트로 7개 단체와 전승 단체의 현황, 가창자 실상, 그리고 활동자 구술 채록을 담았다. 충실한 오늘의 밀양아리랑 현상을 읽을 수 있다. 이용만과 신명숙 선생의 구술은 짧지만 압도적이다. 밀양백중놀이보존회 감내게줄다리기의 지속적인 활동은 오늘의 밀양아리랑으로 정립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음도 확인된다. ‘아리랑 친구들’ 부분은 타지역에 사례로 제시될 만하다. 그런데 게줄다리기 초기의 김상용 선생의 활약상과 동시대 함께 활동한 박동령 선생의 구술이 없는 점이 의아하다. 남는 문제, 접근성과 활용도 높여야 그런데 옥에 티도 보인다. 밀양아리랑의 역사, '밀양아리랑제'의 역사와 경과 등에 대한 기술이 미비하다. 일반인들의 관심도는 역사, 어원, 종류에 있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또한 주목도에서도 미비점이 보인다. ‘밀양아리랑’으로 특화된 자료(소수이지만)에 대한 별도 보고로 1차적 가시화를 하지 못한 점이다. "밀양아리랑 역사는? 밀양아리랑 곡조는? 밀양아리랑 가사는? 밀양아리랑축제는?”라는 질문을 우선 충족시켜주고 메타데이터를 제시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다. 친절함은 편의성에 앞선다. 한정된 전문가보다는 일반 대중의 접근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또 있다. 사업성은 활용도로 계측된다. 진도의 ‘아리랑마을 조성’, 문경시의 ‘서예로 엮은 아리랑 1만수’ 발간, 정선군의 ‘아리랑센터’ 운영 등에서 확인이 되듯이, 투자 대비 활용도가 낮다는 문제다. 후발 주자인 밀양문화재단 사업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아리랑문화의 본질이 ‘번짐과 스밈’에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안과 내용’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관점에서 떠들썩한 만큼의 내실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업과 실천의 진정성으로 귀결이 된다. 우리 조상들은 아리랑을 이익 지향이 아닌 가치 지향으로 다른 노래에 번지게 했고, 다른 장르에 스미게 했다. 이 ‘번짐과 스밈’ 대로 성과 또한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거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활용 방안은 매우 꼼꼼하게 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업에 대해 한 관계자는 "밀양아리랑 데이터 베이스 구축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등재에 값하는 것이다. 다양성과 현재에 이르는 동시대성을 입증한 것이다.”라고 호평했다. 또한 콘텐츠 전문가는 "교류 상황이 진전된다면 북한 문화유산처에도 제한적 접근을 가능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해외 동포사회단체에도 적극 알려 활용할 수 있게 하자”라고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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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말한다] ‘아리랑의 문학 수용과 문화 창출’‘아리랑의 문학 수용과 문화 창출’은 민요 아리랑이 전승, 확산되는 과정에서 시, 소설, 희곡 등 문학문화뿐만 아니라 대중가요 등 다양한 예술문화에 수용되면서 새로운 문학문화와 예술문화를 창출하고 있는 양상을 고찰하면서, 아리랑을 기반으로 새롭게 창출된 문학문화와 예술문화가 갖는 의미와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를 위해 대표적인 향토민요, 즉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지역아리랑을 중심으로 이들 아리랑이 민요로서 전승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학 갈래와 예술문화, 특히 대중음악에 수용되면서 어떻게 창조적인 요소로 작용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변용, 창출된 문학과 문화 텍스트가 가지는 성격과 의미를 구명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아리랑 자체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 ‘아리랑문화’의 현상과 양상을 연구한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아리랑의 문학 수용과 문화 창출’ 부분이며, 제2부는 ‘지역 민요의 생태와 문화지리’ 부분이다.제1부에서 1장 「치유(healing)의 노래로 본 아리랑의 전승 맥락」는 아리랑을치유(healing)의 노래라는 측면에서 아리랑의 생성과 전승의 다양한 국면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아리랑의 옛 노래라 할 수 있는 <청산별곡>이 갖는 성격을 파악하고, 근대계몽기에 황현이 아리랑을 두고 말한 '신성의 염곡'이 갖는 의미와 선교사 헐버트가 들은 아리랑이 갖는 성격을 풀이와 치유의 노래로 재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로 확산되었던 서울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향토민요가 갖는 성격을 노랫말을 통해 다양하게 파악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한민족 이주의 역사 속에서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떠나 살았던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아리랑을 부르며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민족의 통합에 기여했던 점을 고찰했다. 2장 「밀양아리랑의 문학문화 수용과 문화 창출」은 현대시, 현대소설, 수필 등으로 문학 갈래를 넓혀서 밀양아리랑과의 교섭과 수용 문제를 천착하고자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밀양아리랑을 수용한 현대시 작품들을 소리 권역 출신 시인들과 소리 권역 밖 출신 시인들의 작품으로 구분하여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 파악하고, 홍성원의 소설 <밀양아리랑>과 박규헌의 소설 <불사조>이 밀양아리랑이 어떤 서사화의 관점과 맥락을 보여주는지, 그리고 밀양아리랑 관련 여러 수필들이 어떤 담론적 특성을 보여주는지를 고찰했다. 아울러 밀양아리랑의 대중가요 수용과 관련하여 광복 이후에 불린 대중가요가 갖는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집중 검토하고, 이어서 밀양아리랑을 기반으로 새로운 음악의 창출을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BTS(방탄소년단)의 <아리랑 연곡> 등을 폭넓게 살피면서 향후 밀양아리랑의 다양한 문화 창출을 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3장 「정선아리랑의 문화 수용과 공감의 시학」은 정선아리랑의 시적 수용이 민요 형식의 단순한 차용으로 성공적인 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 정선아리랑의 리듬, 정서, 주제의식 등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바탕으로 하되, 오늘날의 삶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 인식과 연결되도록 하면서 시의 미적 근대성을 새롭게 모색하고자 할 때 바람직한 민요의 시적 변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아울러 정선아리랑의 대중적 확산과 관련하여, 정선아리랑이 김옥심, 하춘화, 조용필, 김영임, 정세훈, 김현성, 이현수, 송소희 등 대중가요 가수와 소리꾼들을 만나면서 활기를 띠고 있는 양상을 고찰하는 가운데 특히 창의적인 대중가요로 재진입한 <보고싶다 정선아!>를 주목해서 논의했다. 4장 「동래아리랑의 전승 맥락과 정체성 문제」는 오케이(OKeh)레코드사에서 1937년 5월에 서영신이 고재덕의 피리 반주로 SP음반에 취입한 동래아리랑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글은 동래아리랑의 발굴 경위와 가사 복원 과정을 밝히면서, 그동안 동래아리랑의 가사를 잘못 복원하고 해석함에 따라 빚어진 문제점들을 논의했다. 동래아리랑이 동래지역에서 구전되어 온 민요가 아니라, 기존 정선아리랑의 가사 패턴과 작시 원리를 바탕으로 정선아리랑의 곡조로 부른 신민요로서의 아리랑임을 밝혔다. 그리고 동래아리랑이 정선아리랑의 곡조로 부른 것이기 때문에 음악적 측면에서 지역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아리랑이지만, 문학적 측면에서 동래온천, 현해탄 같은 지역 명칭이 동래지역과 연관된 문화적 기억을 떠올리는 중요한 지리적 장소를 환기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가진 노래로 보았다. 5장 「부산지역 아리랑의 전승 양상과 아리랑문화의 생성 국면」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늘날까지 진행된 일련의 민요 조사의 성과를 살피면서, 아리랑으로 채록된 자료의 성격과 의미를 밝힌 후, 부산지역에서 불린 민요의 가창 현황과 그 판도를 살피는 한편, 부산지역에서 아리랑을 수용한 현대시, 시조 작품들과 대중가요들이 갖는 성격과 의의를 검토했다. 나아가서 국립부산국악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국악뮤지컬 <자갈치아리랑> 등 다양한 창작, 공연을 포함하여 소리꾼 김희은과 최윤영이 부산지역에서 아리랑의 새로운 가창 판도를 만들고자 한 노력들을 살폈다. 6장 「해외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의 아리랑 수용과 담론 양상」은 재중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 작품들에서 필자가 찾은 아리랑 시(44편)을 대상으로 고찰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윤해영의 「아리랑 만주」와 같이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선전하는 친일적인 작품도 있었지만, 많은 아리랑 시는 민족사의 현실을 형상화하거나 민족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작품들로 탈식민주의를 구현하는 작품들이었다. 민요 아리랑이 재중 동포시인들의 시를 복고적 세계로 귀환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시세계를 모색하는 데 자극과 기회를 제공하고, 민요 아리랑이 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도 다양한 시적 변용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음을 확인했다. 제2부의 1장 「<모심기 노래>에 나타난 생태학적 사유와 상상력」은 부산지역에서 채록된 <모심기 노래>를 대상으로, 이들 민요에 나타나는 생태학적 특성을 ‘자연 본위의 사유와 상상력’, ‘순환론적 생태관과 상상력’, ‘자연과의 교감과 공존 지향’이란 세 가지 범주적 특성에 따라 고찰한 것이다. 2장 「<범벅타령>의 전승 양상과 담론 특징」은 <범벅타령>의 전승 과정과 전승 양상을 밝힌 후, 특히 서사민요로 불리는 <범벅타령>의 담론 특징을 구명한 것이다. <범벅타령>은 1930년대부터 여러 기녀 출신 소리꾼들이 취입한 유성기 음반과 방송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되면서 민요화되는 과정을 겪었음을 밝혔다. 아울러 잡가 <범벅타령>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전승되었음을 파악하는 한편, <범벅타령>은 주로 남성들이 가창하지만 남성 가창자의 노래가 여성의 불륜에 대해 남성에 의한 징벌과 훈계가 이루어짐으로써 윤리적 단죄를 보여주는 반면, 여성 가창자의 노래는 남성의 횡포와 성적 억압에 대한 저항과 성 해방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해서 살폈다. 3장 「함양지역 <범벅타령>의 문화지리학적 조명」은 함양지역에서 채록된 <범벅타령>이 다른 지역에서 채록된 <범벅타령>과 달리 ‘바람난 부인’을 춘향으로 설정하고, 춘향의 불륜 행위를 초점화한 서사민요임을 주목한 글이다. 함양지역에서 왜 이런 <범벅타령>이 불리게 되었는지를 문화지리학적 관점에서 함양지역의 ‘장소성’ 등 문화지리학적 특성에 따라 파악하고자 했다. *민속원, 2021, 33,000원 *저자 박경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문학석사), 부산대학교대학원(문학박사)졸업. 현 부산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한국문학회장, 한국민요학회장 역임, 이주홍문학상(2005), 부산시문화상(2017) 수상.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문학의 정신사론』(1993), 『한국 근대 민요시 연구』(1998), 『한국 민요의 유형과 성격』(1998),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 탐구』(2000), 『아동문학의 도전과 지역 맥락』(2010), 『현대시의 고전텍스트 수용과 변용』(2011), 『현대시의 문화 읽기』(2020) 외 여럿과 편저로 『부산민요집성』(2002),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16~18-경상남도 함양군 편』,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0~22-부산광역시 편』,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4~26-경상남도 남해군 편』,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7~28-경상남도 산청군 편』(2014~19) 외 여럿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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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br> ‘2005’의 아리랑<10> 강원도의 아리랑 전승 실태지금까지 7회에 걸쳐 강원도의 아리랑 상황을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를 통해 살펴왔다. 강원도의 아리랑은 전국 7개 아리랑 권역 중 중요도나 전승 범위의 광역성에서 단연 주목이 된다. 그런 만큼 다양한 논점을 살피게 되었다. 이번 회에서는 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의 전승 범위를 2005년 상황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아라리의 전수자가 강원도의 거의 전역에 풍부하게 존재해 온 것은 이 노래가 이 지역 민중들의 기층적 삶에 이처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라리는 향토민요로서 강원도의 기층문화로 뿌리 깊고 넓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라리는 문화적 뿌리가 튼튼한 노래이기에, 민요생태학적 측면에서 볼때 자연스런 전승이 단절된 오늘의 상황 아래에서도 아리랑 전수자들이 아직 도처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인용문은 2003년 발행된 김시업 편 ‘정선의 아라리’ 같은 조사자료에서 확인되는 전승 상황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민요의 전승 조건이 상실된 상황이지만 강원도의 아리랑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승자가 적지 않게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아라리가 지역민들의 기층적 삶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아라리는 문화적 뿌리가 튼튼한 노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라리는 긴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 강원도의 아리랑을 말한다. 이들은 인위적 조건에서 전승되기도 한다.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유자들을 통한 교육 전수를 말한다. 긴아라리와 엮음아라리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으로, 자진아라리는 ‘강원도 무형문화제 제5호 학산오독떼기’ 종목에서 체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자는 보유자 4명, 이수자 6명, 전수장학생 14명에 의한 정선아리랑보존회로 조직되었고, 후자는 보유자 3명, 이수자 3명, 전수장학생 4명, 보존회 회원 40여명이 학산오독떼기보존회를 결성하여 전승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보존회 회원 중에는 자연스럽게 체득한 이들이 상당수라는 점이다. 자연적 체득이란 전수교육과 같은 인위적 전승이 아니라 가족공동체 또는 마을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을 말한다. 민속의 가장 바람직한 전승 형태이다. 보유자 김길자의 경우 가정에서 할머니 정옥선과 부친 김병하(2007년 작고)로부터 자연스럽게 소리를 익힌 사실이 그 한 예이다. 이러함에서 정선지역이 비교적 자연적 전승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정선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전승 중심지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두 지역 보존회는 전수교육 중심의 정기적 축제, 공개 공연, 창극공연, 경창대회, 시장공연, 전수교육, 그리고 가사 짓기 같은 활동을 통해 전승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괄목할 것은 초등학교 교육에서의 성과와 경창대회 정례화와 타지역 경연자를 참여시켜 교류를 확대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강원도 아리랑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유지시키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문화재청 발간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 강원도의 아리랑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는 아리랑문화의 원형으로 보호할 필요성 또한 크게 요구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강원도의 경우는 전수자 일부가 자연 체득자여서 인적 자원이 두텁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전체 아리랑사의 위상을 강조하였다. "강원도 향토민요 아리랑은 아리랑 노래문화의 모태이면서, 아리랑 노래문화를 성장시킨 자원아라는 면에서 그 문화사적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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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br> ‘2005’의 아리랑<8>아리랑 발생설2005년 문화재청 발간 보고서 중 ‘강원도 아리랑의 존재양상과 전승실태’에서 경복궁 중수와 아리랑의 확산에 대해서는 기존설을 답습하고 있다. 1930년 총독부 기관지 ‘언문 조선’에 발표된 김지연의 ‘조선민요 아리랑’ 해설에 제시된 주장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제시하였다. "19세기말에 대중의 호응을 넓게 받는 노래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연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서울과 경기지역에 통속민요 아리랑이 형성된 것은 경복궁 중건 때일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발생을 경복궁 중건 때로 보는 견해는 일찍부터 제기되어 온 바이다. 이를테면 김지연은 아리랑의 발생과 관련된 여러 설을 소개하면서 경복궁 중건시에 팔도에서 부역꾼들이 징발되었는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연희를 벌였고 이 때 부역꾼들이 각 지방의 노래로 자신들의 심회를 풀어내는 가운데 아리랑이 불렸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 대목에는 세 가지 의미 있는 논점을 담고 있다. 하나는 1800년대 말의 서울 경기지역 아리랑은 ‘통속민요 아리랑’이다. 이미 음악적 장르를 달리한 아리랑이란 말이다. 둘은 이 지역의 통속민요 아리랑 형성은 1865년으로부터 7년간의 공사를 마친 1872년 경복궁 중수 이후라는 것이다. 셋은 공사에 동원된 부역꾼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부른 고향의 노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르게 되면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지는 오늘날 일반화 된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공사 현장에서 누가 어떤 아리랑을 불러 확산의 계기를 마련했느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한국의 아리랑문화」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즉, 강원도의 아라리는 남북한 강을 따라 서울 경기 일원에 이른 시기에 전해졌다. 이에 강원도 아라리가 뗏꾼들이나 부역꾼들이 중수 기간에 불러 새로운 아리랑을 형성시켰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수공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박달나무의 대량 공출에 대한 상실감을 호소하는 "문경새재 박달나무~ ”로 시작하는 ‘문경새재소리’ 또는 ‘문경새재아라리’가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음악적으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통속민요 아리랑으로 첫 번째 형성된 것으로 대표사설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인 경기잦은아리랑(H.B 헐버트 채보)과 음악적으로 제일 가까운 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분석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경복궁 중수 현장에서 새로운 아리랑을 형성시키게 한 것은 부역꾼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한 문경새재아리랑이란 것이다. 단 전제하는 것은 통속민요 아리랑의 첫 번째를 ‘경기잦은아리랑’이냐 ‘긴아리랑’이냐라는 논란이 있지만 전자가 후자에 앞서 형성된 아리랑으로 본다는 것이다. 경기지역 통속민요 아리랑을 형성시킨 계기가 대규모 장정들이 부역꾼으로 집결한 경복궁 중수 공사장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어떤 아리랑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강원도아리랑’ 또는 ‘정선아라리’라고 말해왔으나, 이제는 ‘문경새재아리랑’으로 좁혀야 한다. 이에 2005년 문화재청 발간 보고서 ‘지역별 아리랑 전승 실태 조사보고서’ 중 ‘강원도 아리랑의 존재양상과 전승실태’에서 문제의식 없이 서술된 ‘아리랑 발생설’은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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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br>아리랑의 전형성(典型性)2016년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 지정은 기존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점 또는 지정 요건인 ‘원형성(原型性, Archetype)’에 대한 반성적 대안으로 입론된 ‘전형성(典型性.Typicality.Prototypicality)’에 근거한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 정책상 원형중심주의에서 전형중심주의로의 전환의 결과이다. 전자는 산업화 시대 급변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현상불변과 현상동결을 기준으로 기·예능 보유자 전수체계 운영 정책이고, 후자는 자발적 전승공동체에 의한 변화와 재창조에 의한 다양성을 가치로 보는 관점이다.결국 전형중심주의로의 전환은 아리랑의 지정으로부터이고, 법적 근거가 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발효도 아리랑 지정으로부터이다. 이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으로부터 54년만의 변혁으로 아리랑의 현재적 향유와 공동체적 계승 체계에 가치를 부여한 첫 사례인 것이다. ‘전형(성)’에 대해서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 1항에서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했고, 동 법률 제2호에서는 "무형문화재를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하는데 구현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고유한 가치, 기법 또는 지식”이라고 했다. 이는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라는 일반 개념의 설명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 전형은 유형(類型)과는 다른 개년이다. 유형은 대상으로 하는 범주 안에서 무엇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추상화 과정을 거처 일반화 된 개념이고, 전형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대상 전체를 포괄 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개별화 된 개념이다. 즉, 개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가장 큰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예술적 형상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이를 지역 아리랑에 적용하면 "특정 지역 공동체 범주에서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대상화 하여 향유하고 계승하는 실체로서의 아리랑”이 된다. 같은 이치로 포괄적인 아리랑의 전형(성)도 동일하게 개념화 할 수 있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과 201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지정도 포괄적 명칭 ‘아리랑’으로 대상화하였다. "60여 종”을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으로, "향토민요 또는통속민요로 불리는 모든 아리랑 계통의 악곡”을‘아리랑’으로 지칭하였다. 이는 각각의 아리랑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두 보편성을 지녔다고 본 것으로 전형성을 인정한 것이다. 전형성이 확립되어 일반화 되어야만 이를 대상으로 하여 문화적 확장력이 발휘되고 창조적 계승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전형성 확립과 공적 인정은 중요한 것이다. 이 아리랑의 ‘전형성’ 또는 ‘전형화’는 언제 확립되었을까? 이는 아리랑을 독립된 문화현상으로 보아 ‘아리랑문화’라는 언표(言表)를 가능하게 하는 상황임을 말하는데, ‘한국의 아리랑문화’(김연갑 외 공저, 2011, 박이정출판)에서는 확립시기를 1930년 전후로 보았다. 이 관점은 1926년 개봉 영화<아리랑>의 흥행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아리랑의 자장력을 확인시켜주는 상황에 기반한 것이다. 필자 역시 동의한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아리랑의 전형성이 확립된 상황임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요사이는 <아리랑타령>이 어찌나 流行되는지 밥 짓는 어멈도 아리랑, 공부하는 남녀학생도 아리랑, 심지어 어떤 女學校에서는 唱歌試驗을 보는데 학생이 집에서 혼자 아리랑타령을 하던 것이 버릇이 되야 다른 唱歌를 한다는 것이 아리랑타령을 하야 선생에게 꾸지람을 듣고 또 어떤 집 家庭에서는 자기 시아버지가 漢江을 가는데 人力車를 타고 간다고 하닛가 며느리가 하는 말이 ‘단 十里못가서 발병이 나싯가바 인력거를 타셔요’ 하닛가 시어머니는 또 ‘버태고개(白峴)가 여간 어려우냐고 한다는 말이 아리랑고개가 좀 어려우냐’고 하야 시어머니와 며누리가 모도 아리랑으로만 놀다가····.”(‘별건곤’, 제16·17호, 1928년 12월호, p151) # "아리랑의 민요가 혹은 무용화가 되고 혹은 영화화가 되었으나 극화가 된 것은 토월회의 금번 공연이 처음이라 하겠다. 첫째 제재를 거기에서 취한 것부터 매우 기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만이 얼마나 많은 흥미를 끄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사람으로 누구든지 친함을 가진 민요이다. ‘아리랑 고개’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 그것이 공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별문제라고 하더라도 ‘아리랑고개’는 마음 깊이 우리들에게 하소하는 바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쯤은 어찌함인지 조선 땅의 모든 것과 빈틈을 발견할 수 없이 꼭 들어 맡는 감을 준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동아일보,1929,11,26.) 이상과 같은 자료를 통해 1920년대 말 아리랑의 전형성은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된 아리랑의 전형성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변이와 재창조가 이뤄진다. 그 중 주목되는 분야가 아리랑을 표방한 ‘선전가(宣傳歌)’이다. 표제에서 ‘아리랑’을 쓰거나 곡조를 아리랑곡조를 부곡한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선전가란 어떤 존재나 효능 또는 주의 주장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특정 가사와 곡조로 구성한 아리랑 표제 노래인데, 이는 아리랑이 일반화 되지 않은 상태, 즉 전형화가 확립되지 않은 대상이라면 출현이 불가능하다. 상호나 상표명과 같은데 대중의 예민한 반응을 필요로 하는 선전가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조사로는 면화 수확을 장려한 ‘면화십장가(棉花十獎歌)’, 충북 수안보의 온천을 선전하는 ‘수안보온천가’, 종천연두 예방접종을 선전하는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그리고 문맹퇴치를 위한 계몽운동가 ‘문자보급가’ 등이 있다. 이 중에 ‘한글보급운동가’는 그 곡조를 아리랑으로 활용한 노래로, 1920년대 말 70%에 달하는 문맹율의 민중을 대상으로 전개한 계몽운동가이면서 항일적 요소를 담고 있는 노래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오는 3월 1일 종편방송 TV조선에서 3.1절 특집방송으로 이 ‘한글보급운동가’를 소재로 한다고 한다. 아직 노래로 재현된 바가 없어 의미가 있는데, 아리랑연합회가 제시한 자료는 조선일보 1931년 1월 7일자에 발표된 ‘문자보급가’이다. 조선일보는 이 노래를 악보와 함께 발표하며 "이 노래가 뜻으로나 곡조로나 우리 향토의 맛과 냄새를 짓게 가졌음에 있어 더욱 그러하다.(중략) 이 노래는 우리가 아무쪼록 우리 대중이 부르게 되도록 일반화 하게 하고 싶다. 그리하야 우리 악단에서 동서악계에 이름이 높으신 김형준씨에게 위탁하야 악보를 편성한 것이니 우리가 가지고 오던 우리의 정취에 맞는 악곡을 잡아서 여기에 뜻있는 노래를 얹어서 이렇게 부름이 어찌 뜻 없는 일이라 하리요”(조선일보,1931,01,16.)라고 설명했다. 가사는 박봉준(朴鳳俊), 편곡은 김형준(金亨俊)이 담당했다. 문자보급가(아리랑曲調) 에-헤 에헤야 우렁차다 글 소경 없애란 소리 높다 우리나 강산에 방방곡곡 새살림 소리가 넘쳐나네 에-헤 에헤야 우렁차다 글 소경 없애란 소리 높다 아리랑 고개는 별고개라요 이 세상 문맹은 못 넘긴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공중에 다니는 저 비행기 산천이 우렁찬 저 기차는 우리님 소식도 알겠건만 문맹에 속타는 이 가슴아 한밤이 대낮된 오늘날에도 눈뜨고 못봄은 어인일이냐 배우자 배우자 어서 배우자 아는 것 힘이요 배워야 산다 4행 사설에 후렴 형식이 특이하나 내용으로 보아 2행을 중첩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은 사설 끝에 "流行아리랑曲”이라고 단서를 달았기 때문이다. 이 ‘유행아리랑’의 곡조는 본조아리랑, 즉 영화'아리랑' 주제가의 곡조이다. 이로서 영화'아리랑' 주제가 곡조가 이 시기 일반인에게 보편적인 아리랑, 즉 전형화한 아리랑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준다. 1930년 전후라는 시점, 이는 아리랑의 전형화가 확립된 시기로 그 자장력으로 무한한 아리랑문화를 확장시켜 가는 역사적인 기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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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에코랄라아리랑' 콘서트 ‘코로나아리랑’ 공연지난 11월 7일 문경에코랄라 개장 2주년을 맞아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격려와 위로 차원에서 개최한 ‘문경 에코랄라아리랑 콘서트’에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 합창단 15명이 참석, 코로나아리랑을 포함 3곡의 아리랑을 열창했다. 이날 부른 ‘코로나아리랑’은 위 단체가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정상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인명피해도 막심한 상황에서 아리랑으로 코로나를 극복해 보자는 의미로 착장 발표한 것이다. ‘코로나아리랑’은 모두가 함께 불러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지난 7월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발표회 이후 본회 위원들은 개인별, 단체별로 ‘코로나아리랑’을 보급하는 데 최선을 다해 왔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보급 활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하며 본 공연 상황을 여러 매체에 보도하고 동영상은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적극 활용, 확산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문경시의 비법정 ‘아리랑문화도시’ 선포에 따라 아리랑의 전승, 교육을 시민운동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주목되는 문화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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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br> 아리랑문화의 남상(濫觴)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94년 전인 1926년 10월 1일 오후 4시부터 5시 10분까지 서울 종로 3가 극장 단성사에서는 ‘아리랑’이 여섯 번이나 불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영진이 두 명의 순사에 의해 포승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눈물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그 순간 단성사 악대의 반주에 의해 아리랑을 부른 가수는 유경이(劉慶伊)이다. 당시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 개봉 당일의 상황이다. 단성사에서의 개봉상연은 단 3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울 지역 극장의 재상연을 거듭하여 전국에 확산되었고, 이미 소문에 의해 알려진 주제가 아리랑은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영화<아리랑>을 끌어들이는 자장력(磁場力)을 발휘했다. 1926년 단성사에서 영화<아리랑>의 개봉으로부터 흥행 상황은 1929년을 정점으로 자장력을 형성하고 문화 유전형질 ‘아리랑’밈(Meme)을 확산시켰다. 이 밈은 문학은 물론 연극, 무용 같은 무대공연 부야로 증식 되어갔다. 그동안 ‘아리랑’ 밈의 증식 사례를 1929년 박진 연출 연극<아리랑>으로 꼽았다. 그러나 최근 사료의 발굴로 1927년 11월 발표된 시 <아리랑>이 확인되면서 서열이 뒤집혔다. 개봉 1년후 문학 분야에서 아리랑의 의미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게 된 것이다. 시 <아리랑>은 1927년 11월 『문우』 제5호에 발표되었다. 이 『문우』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재학 조선인들의 모임인 ‘문우회’에서 발간한 잡지이다. 이 모임의 회칙에 의하면 "本會는 朝鮮文藝의 硏究 及 獎勵를 目的으로하고, 京城帝國大學 豫科 內에 置하고, 目的을 達하기 爲하여 每學期 一回式 朝鮮文藝雜誌를 發刊함”이라고 밝히는 동시에 『문우』를 ‘조선문예잡지’라고 규정했다. 곧 교지나 학습지가 아닌 문학지로 자임한 것이다. 이 문예지의 필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조선문예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제국대학의 학생이자 식민지 조선의 선구적 지식인이라는 위치에 있고, 변방인 조선인으로서 갖는 자의식과, ‘제국대학’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갖는 ‘교양인’, ‘세계인’으로서의 감각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전문 작가와 학생의 위치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기도 하다. 제 5호에 수필, 시, 소설, 논평을 발표한 유기춘-유진오-고유섭-한재경-민태식-정종실-노병운-한용균-이병일-최재서-신남철-이효석-김봉진-조용만-김종무-조규선-원흥균 그리고 근원 같은 이들의 이후 행적에서 확인된다. 다음 근원(槿園)의 시 ‘아리랑’도 이런 성격과 수준의 작품이다. <아리랑> 마을 닭의 첫 소래에 놀래 깨어 아침이슬을 밟으면서 들을 지나 언덕을 넘어 굽은 산길을 올라가는 초부樵夫! 손에 든 작때기로 어깨에 매인 지게를 치며 깊은 산에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피와 같은 늙은 낙일落日은 넘어가고 회색灰色의 장막帳幕으로 변하여 가는 넓은 들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초부樵夫! 피곤한 몸을 질질 끌면서 없는 기운을 억지로 내어 허공에 우렁차게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아침에 노동할 힘을 주고 저녁에 피로를 회복식히는 미묘한 농촌의 고운 노래! 도회의 우울을 멀리 떠나서 한폭의 그림같은 자연미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3연의 자유시다. 시적 긴장감은 부족하지만 아리랑을 농촌의 초부나 도회 노동자의 우렁찬 노래로 해석한 것은 소중하다. 특히 ‘아리랑’ 이라는 작품 표제가 주목이 된다. 이를 통해 '아리랑 밈'의 자기 복제 1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지식인들에게 아리랑 밈의 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가 문학 아리랑, 나아가 오늘의 광대한 아리랑문화의 남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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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br> 영화<아리랑>과 아리랑문화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자기복제로 세대를 이어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생물학적 존재를 DNA이라 한다면, 하나의 완성된 정보(지식/문화)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과 문자를 매개로 보존, 전파되는 것을 밈(Meme)이라고 한다. 밈은 유전자와 매우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데, 아리랑이란 곡을 예를 들면, 미상의 작자가 만들고, 작자는 같은 동네 친구에게 이 곡을 들려줌으로서 아리랑은 친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복제하였다. 그 친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줌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이란 곡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아리랑이란 곡을 만든 작자와 친구가 사망한다고 하더라도 아리랑이란 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대를 뛰어 넘어 자기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밈은 돌연변이(突然變異)도 일으킨다. 이 곡을 들은 밀양에 사는 친척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곡을 전하는데 그만 완벽하게 기억을 해내지를 못한다. 스스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을 보완해서 밀양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자기 동네사람들에게 전파한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이 밈이란 DNA와 같이 새로운 개념의 문화 자기복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의 아리랑 밈에 대한 설명은 매우 제한적이다. 즉 민요 또는 노래로서의 아리랑만을 한정한 것이기 때문인데, ‘아리랑문화’의 밈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리랑문화’의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노래 아리랑은 1926년 영화<아리랑> 개봉과 그 흥행의 여파로 전 문화예술 장르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았다. 영화<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에 의해 아리랑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노래 아리랑뿐만 아니라 전 장르의 문화 공유로 형성된 정서(情緖) 통합체 아리랑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文化)란 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생활양식을 의미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습득하고 전달받아 기층화 되고 누적된 현상이다. 그 결과 '습득된 행동'을 비롯해서 '마음 속의 관념', '논리적인 구성', '통계적으로 만들어진 것', '심리적인 방어기제' 같은 것이 바로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다만 문화는 '구체적인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고 그 자체가 행동은 아니다'(레슬리 A. 화이트, 「문화의 개념/The Concept of Culture」, 1973,)라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우리의 <대한민국 문화기본법> 제3조에서는 문화를 매우 집약적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즉, 문화예술, 생활양식, 공동체적 삶의 방식,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 등을 포함하는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물질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라고 했다. 이런 정의에 기댄 ‘아리랑문화’에 대한 규정은 ‘감성적 특성’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한다. 동시에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한다. 그리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기도 하다. 이 감성적 특성의 총체가 아리랑문화이다. 이는 노래 아리랑의 정서만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전 분야 장르에서의 아리랑 주제화나 소재화로 형성한 정서인 것이다. 예를 들면 1926년 이후 1960년대까지 개봉된 9편의 ‘아리랑’ 표제 영화<아리랑>의 존재이다. 동시에 수많은 장르로 확대되어 정서를 적층시켰다. 1929년 막을 올린 연극<아리랑고개> 이후 10여편, 1927년 시 <아리랑> 이후 문학작품 30여편, 1928년 이후 무용<아리랑> 이후 30여편, 1929년 유행가 <아리랑 우지마라> 같은 유행가 20여편, 1934년 음반 <진도아리랑> 외 창작아리랑 5편 발매, 1931년 카페 <아리랑>과 1939년 <아리랑배> 같은 상호와 상품명이 50여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활문화, 심지어는 해외 동포사회에도 확장, 전승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랑문화는 적층을 이루는 문화이면서, 이를 기반으로 다시 자기증식으로 진화하는 문화이다. 이러함에서 아리랑문화의 밈은 단적으로 말하면 ‘아리랑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라는 열쇄말은 앞에서 열거한 전 장르의 작품 표제에 함축된 것이고, 이를 정서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열쇄말은 어디에서 출현하여 ‘감성적 특성’의 문화, 아리랑문화 형질을 촉진시킨 것인가를 묻게 된다. 그런데 이의 해답은 이미 위에서 제시하였다. 돌연변이라는 진화의 단서가 바로 최초의 타 장르화인 1926년 영화<아리랑> 개봉이다. 이 영화<아리랑> 이후의 현상을 "나운규와 영화<아리랑>의 역사적 무게가 노래 장르의 법칙을 압도한 결과”(김연갑, "메아리 원형 가능성 고찰”, 한국민요학회, 1986년)로 표현했듯이 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은 공시적 통시적으로 확장되어진다. 이 자장력이 오늘의 메타데이터Meta Date) 아리랑을, 메타인지(Meta Cognition)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아리랑문화는 노래 아리랑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발견하고 관찰하는 정신 작용을 수반하는 대상인 것이다. 지난 10월 1일은 1926년 영화<아리랑>이 개봉된 역사적 날이다. 동시에 제8회 ‘아리랑의 날’이다. 세계를 멈추게 하는 펜데믹 코로나19에 묻히고, 추석에 밀려 잊고 지냈다. 아리랑의 저항성과 남성성을 부여한 감독 나운규와 전 장르로의 확산을 촉발시킨 영화<아리랑>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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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r> 아리랑의 진화, 외국 찬송가2000년 들어서 아리랑의 공시적/통시적 확산 현상을 문화유전자(Meme)의 자기복제에 의한 진화 차원으로 재해석 되기 시작했다. 2011년 발간된 『한국의 아리랑문화』(김연갑 외, 박이정)로부터 오늘과 같은 세계적 아리랑의 전승 확산현상을 문화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한 진화 결과로 재해석하였다. 문화유전자 밈은 미메시스(Mimesis)와 유전자(Gene)의 합성어로 뇌를 통해 다른 개체의 뇌로 전파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생명체는 유전자(DNA)에 의한 수직적 자기복제로 진화하는데, 인간 사유의 총체인 문화는 이 밈의 수평적 복제에 의해서만 진화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진화 상황은 괄목할만하다. 해외에서 찬송가로 전승되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벨기에에서 카토릭 찬트로 불리는 ‘lullaby’(자장가)다. 세계적인 카토릭 성가단이 낸 음반 <CANTATE DOMINO>의 9번째 수록이다. 곡조가 본조아리랑이다. 런던 필하모닉 지휘자 출신의 영국인 말콤 와트 사전트(1895-1967) 씨가 채보해서 편곡하였다. 이 곡에 대한 해설이 매우 감동적이다. "신비로운 리듬은 아무리 험한 해일이 밀려와도 엄마품 속에서 잠든 아기처럼 우리를 편하게 잠 재워 준다.”고 들을 때마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고 찬미했다. 아리랑 리듬에 대한 이 같은 상찬은 근거가 있다. 2010년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소재 대중음악 연구센타 <뮤직 인텔리젼트 솔루션>에서 아리랑 선율을 분석한 결과에서 유추가 된다. "정말 아름다운 곡이다. 멜로디가 한 옥타브 안에서만 움직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아주 쉽다. 이 결과 한 소절만 듣고도 다음에 어떤 음이 나올지를 예상하게 해 준다. 앞부분에 세 음 ‘아~ 리~ 랑’이 있는데, 이 세음을 높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완벽하다.” 이 연구소는 이미 <마이 웨이>(My Way)나 <브릿지 오버 더 트라블드 워터>(Bridge Over the Trabeled Water) 같은 세계적인 히트 송의 공통점을 분석하여 신곡의 히트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기관이다. 네덜란드가 국가(國歌)를 선정하기 전에 응모작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가 국민 투표 결과와 일치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신뢰도에서 아리랑의 평가도 확인된다. 이는 스위스 성가단도 이러한 분석에서 성가로 채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발간한 찬송가집 『The Presbyterian Hymnal』에 수록된 찬송가 346장 ‘Christ, You Are the Fullness(그리스도, 찬양의 기쁨)’이다. 여기에 ‘Korean melody, Tune Name ARIRANG’으로 되어있다. 가사는 버트 폴만 (Bert Polman, b. 1945)교수가 1986년 시편 찬송가를 위해 작사했다. 편곡자는 데일 그로텐후이스(Dale Grotenhuis, b.1931)로 1986년 완성했다. 이 두 편의 해외 찬송가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일종이고 서양 찬송가사에서는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 방식이다. 아리랑이 해외에서 외국인의 손에서, 찬송가로도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본조아리랑이 밈으로 복제에서 복제로 거듭된 결과이다. 이는 아리랑의 진화이기도 하다. 미래에 아리랑의 진화는 더 멀리 계속될 것이다. ‘아~리~랑’의 음감과 선율과 리듬, 그리고 세계 유네스코가 부여한 ‘탁월한 보편 가치’가 밈으로 전파, 그리고 또 다른 공간에서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lullaby’ Sleep in my arms, the birds homeward fly, sleep in my arms, the cool evening falls round thee. Sleep in my arms, little baby, thy mother is here. Sleep in my arms, thou frail weary one, sleep in my arms, for thy Lord watch o'er thee. Sleep in my arms, the sweet Saviour will keep thee from harm. ‘Christ, You are the fullnes’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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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전국악협회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동포후원행사 성황리에 마쳐(사)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진행한 ‘2019 고려인문화대축제 및 동포후원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고 밝혔다. 2019년 8월 14일(수)부터 8월 18일(일)까지 진행된 동포후원행사는 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지회장 이환수)와 (사)국제휴먼클럽(총재 백은기)의 공동의 발전을 도모하고 고려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통해 타국생활을 하는 고려인들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고 민족의 얼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추진됐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시립예술극장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가요, 사물놀이, 전통무용, Sop solo, 민요, Ten solo, 전통무용, Duet, 전통풍물, 한국동요, 한국민요 등 다채로운 공연을 통해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동포들과 상호 교류했다. 특히 이날 공연에 참여한 모든 공연자가 무대 앞에 나와 선보인 고향의 봄과 아리랑 곡이 울려 퍼질 때에는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이번 일정에서는 시까시-알란마을(나나이족마을)에 방문하여 현지 소수민족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고, 아리랑문화센터에 방문하여 민간외교원탁회의 및 성금 전달 행사도 가졌다. (사)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 이환수 지회장은 “이번 동포후원행사를 통해 한국과 러시아 동포들 간의 문화 소통 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고려인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대한민국 문화강국의 자존심을 세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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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전국악협회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동포후원행사 떠난다.(사)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는 (사)국제휴먼클럽과 협업하여 진행하는 ‘2019 고려인문화대축제 및 동포후원행사’를 위해 2019년 8월 14일(수)부터 8월 18일(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떠난다고 밝혔다. 본 행사는 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지회장 이환수)와 (사)국제휴먼클럽(총재 백은기)의 공동의 발전을 도모하고, 고려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통해 타국생활을 하는 고려인들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고 민족의 얼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추진됐다. 이번 ‘2019 고려인 문화대축제 및 동포후원행사’에서는 가요, 사물놀이, 전통무용, Sop solo, 민요, Ten solo, 전통무용, Duet, 전통풍물, 한국동요, 한국민요 등 다채로운 국악 공연으로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동포들과 상호 교류할 예정이다. 대전국악협회는 이번 일정에서 시까시-알란마을(나나이족마을)에 방문하여 현지 소수민족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또한 아리랑문화센터에 방문하여 민간외교원탁회의 및 성금 전달 행사도 가질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는 이리나 김, 안도경(전통연희단 소리울림), 나현아(아토무용단), 강유경, 김선옥, 강항구 등 38여명 이 참석하여 러시아 하바롭스크 시립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꾸밀 예정이다. 휴먼클럽 백운기 총재는 “올해로 15회차를 맞은 고려인문화대축제 및 동포후원행사는 1998년부터 러시아 시베리아 동포들과 연을 맺으면서부터 시작되었고, 그간 러시아에서 격조 높은 국악공연을 선보이며 한국과 러시아 동포들이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해왔다. 지속적인 동포후원행사를 통해 전통문화예술의 저변 확대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사)한국국악협회 대전광역시지회 이환수 지회장은 “이번 동포후원행사를 통해 한국과 러시아 동포들 간의 문화 소통 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고려인 동포들에게 우리 국악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음은 물론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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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팝스오케스트라 여민 9월 19일일시 : 2006년 9월 19일(화) 19:00 장소 :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주최 : (사)전주세계소리축제 http://www.sorifestival.com ◈ 공 연 내 용 - Mission Impossible - 여민 +락 - Ave Maria - Memory - 해금협연 : 길은자 - LoveStory - When I Dream - 대금협연 : 차성은 - PipeLine - 가야금협연 : 김민영 - Wonderful Tonight - 대풍류 승무 : 이주희 - 도드리 - Ay Que Rico - 라틴밴드협연 : Karibe - Arirang#2 - 라틴밴드협연 : Karibe - The Godd, the Badd & the Ugly - I Just Call to Say I Love You * 출연진 소개 해 금 : 길은자 - 우석대학교 국악과 졸업 -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음악학과 수료 - 전주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단원 역임 대 금 : 차성은 -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국악관현악과 졸업 현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재학 컬처밴드 ‘ONE’ 동인 가야금 : 김민영 -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국악관현악과 졸업 - 2004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차세대 명인 등단음악회” 협연 - 2006 한국정악원주최 신인음악회 독주 승 무 : 이주희 -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및 대학원 졸업 - 일본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비교문화학 박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교수 라틴재즈밴드 : Karibe - KBS 열린음악회 출연 - 드럼페스티발 참가 - 1집 음반발매 ◈ 출연진 소개 이름 여민 여민은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창작국악”을 이름하고 있으며, 대중음악과 순수예술의 간극에 서있는 국악팝스오케스트라이다. 국악 31명, 스트링 8명, 밴드 6명, 합창단 30명으로 구성 2002년 여민국악단 발촉, 창단연주회 2003년 아리랑문화축제, 남원춘향제외 다수의 방송음악 및 방송세션 2004년 국악축전퓨전밴드로 개명, 2004국악축전 공연 2005년 국악축전 개막공연, 베트남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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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아리랑> 음반 발매-김연수가족 3대 10인에 의해- 정선아리랑이 토박이 3대 가족 10인에 의해 8장짜리 CD로 발매 되었다. 2003년 5월부터 2004년 8월 까지 신나라와 아리랑연합회가 공동기획하고 신나라가 발매한 이 음반은 우리나라 음반사에서도 단일 소리로 가장 방대한 음반이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특히 긴아라리는 물론 그 동안 정선아리랑의 한 지류인 ‘자즌아라리 · 엮음아라리 · 한오백년 · 경기제(김옥심제) 정선아리랑을 모두 담았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1년여 기간 신나라와 음반작업에 참가한 (사)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정선아리랑의 정본(政本)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고, 결국 정선아리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쏟았다. 매우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신나라 김기순 회장도 “신나라가 중심사업으로 추진하는 국악진흥의 한 아이템인 아리랑작업의 결실로, 정선아리랑의 학술자료화와 세계화에 목적을 두고 제작했다”며 역시 결과에 만족해 했다. 이 음반은 정선·영월·평창·태백에서 9가족을 선별, 그 중에 사설치레가 뛰어나고, 성음이 좋은 가족을 선별했는데, 한오백년과 경기제소리가 가능한 김연수 가족을 이의없이 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장녀 김순녀는 이미 20여년 전 정선아리랑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국악인으로, 정선 출신 유일의 국악협회 회원이며, 토속 정선아라리가 가능한, 그래서 한오백년과 경기제 정선아리랑을 구사하는 정선출신 소리꾼이다. 김연갑 이사는 “장녀 김순녀와 차녀 김순덕의 존재는 보배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토속가락을 지니고 경기제를 구사하는 언니와 전수능력이 뛰어나고 토속가락을 제 맛나게 구사하는 동생과의 조화는 장차 자매 국악인으로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또한 “신나라와 같은 좋은 파트너를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 중인 음반들도 역시 가치 있는 음원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 음반은 해설을 영문으로 곁들여 해외시장을 겨냥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을 통해 해외 한국학연구 단체의 공식 연구자료로 제시되리라고 한다. 또한 아리랑연합회와 은 ‘아리랑가족’ 제 1호로 선정, 학술적인 공연을 정례화 하여 가족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려고 전문가와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국제행사나 음악회에 적극 홍보하여 정선아리랑을 세계화 하는데 역할을 하게 할려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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