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막소설 '아름아리'] 제2화 “야학, 아리랑 가르쳐주다 징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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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소설 '아름아리'] 제2화 “야학, 아리랑 가르쳐주다 징역을”

  • 삼목
  • 등록 2023.01.1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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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목


영덕군 관할 보훈지청에 문의한 지 사흘 만에야 전화가 왔다. 삼목이 문의를 겸해서 의뢰를 한 것은 권도순權道順이란 인물의 공적에 관한 것이었다. 답변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 아리랑을 검색하면 김상순金尙順이란 인물이 검색된다. 1931년 대구지방법원이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4(주문)을 언도한 인물이다. 26세로, 사는 곳이 경상북도 영덕군 오보면 대부동 220 번지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사건개요란에 뜻 밖에도 이런 내용이 담겼다.


"야학교 흑판에 아리랑고개에 폭탄을 두고 자본주의를 항복시키자는 내용의 시를 쓰고 생도 11명과 노래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19,167건 중 유일한 아리랑’이란 키워드로 검색이 잡히는 자료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바로 이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23세 권도순에 대해 문의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목이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자신의 저서 한국의 아리랑문화란 책에 소개한 인물이 권도순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청년 권도순(權道順) 군은 동리에 노동 아동을 모아서 야학을 하여 오던 바라고 주어로 취급한 신문 기사를 따랐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의 다른 인물에 대한 문의이면서 항일 공적을 들어 수훈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건의가 목적이었다. 분명하게 국가기록원 사이트에는 이런 문구를 전재됐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역사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열들을 찾아 그 공적을 널리 알리고, 당사자 및 후손들이 정당한 예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예우하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일 만에 온 통화로 삼목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확인한 결과 권도순은 보훈대상자가 우리 청에서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니 상세한 것은 국가기록원으로 해 보세요. 그리고 말씀하신 아리랑 부르다 사건이 되었다는 얘기는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윗분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건 문화부 소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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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일본 부천정(富川町) 조선노동야학교 학생과 교직원 사진

 

"전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을 부른 것이 경찰에 잡혔던 사건이라고 내가 당시 조선일보 기사까지 읽어줬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그리고 문화부 소관이라고요? 참 허탈하네요.”


삼목의 실망스러운 답변에 다시 이어진 공직자의 응답이 더 가관이다.


"선생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는 그 민요 아리랑을 불렀다고 사건이 되었다는 얘기잖아요? 아리랑, 그냥 민요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부른 게 사건이 됐고, 뭐 항일운동 같은 것을 했다는 얘기잖아요? 그 얘기를 윗분에게 어떻게 보고하나요?”


20대 말 정도의 여성 공직자의 답변이 아리랑과 항일운동과 무슨 관련이냐는 투다. 40여분 정도의 통화에서 충분히 취지와 성격을 전했는데, 물론 이런 사항이 상식常識이지는 않지만 항일독립운동가 추서 같은 보훈업무를 담당하는 공직자가 이런 정도의 이해력을 갖지 못한 것이라 안타까웠다. 아리랑을 민요 아리랑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이 닫힌 인식, 이 분이 겪은 교육과정에서 아리랑이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 조약 직전 시위대가 아리랑을 부르며 일제를 규탄했다는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리랑은 더 이상 민요 아리랑만이 아닌, 그 이상의 노래다. 모든 사료는 그 고유 성질만이 아니라 상품성이란 쓰임새까지 있어야 한다. ‘알면 들을() 수 있다가 아니라, ‘들으면 알아야(보아야) 한다’.”


이런 인식은 삼목의 아리랑관이다. 1930년대 신문 기사 속의 아리랑 고개가 민요 아리랑만이 아닌, ‘야학과 아리랑’, ‘항일운동과 아리랑’, ‘창작 아리랑’, ‘창조적 계승론등으로 의미확대를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훈처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사실 삼목의 기대는 순진하게도 이러했다.


"선생님, 윗분께서 자료를 빨리 보고 싶으시다며, 언제 우리 청에 오실 수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이런 예상은 고사하고 아예 "아리랑이라서~” 없었던 일로 하자니! 삼목은 공직자들에게서 수 없이 겪어 왔던 허탈감을 또 맛보게 되었다. 해당 기사를 다 읽어 주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이니. 삼목은 전화에서 신뢰를 주기 위해 구투舊套의 기사체 문장을 그대로, 리고 자신의 책에 재인용한 것이지만 조선일보 1931년 기사라고 하여 읽어준 것이다.


"영덕군에 있는 청년 권도순(權道順) 군은 동리에 노동 아동을 모아서 야학을 하여 오던 바 어떤 날 밤 담임한 선생이 오지를 아니하여 방을 빌려준 김상룡(金尙龍)은 아이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민망히 여겨 복습을 시키다가 아리랑이란 노래를 가르쳤다는데 그것이 불온(不穩)하다는 이유로써 영덕경찰서를 거쳐 대구지방법원 1심공판에 10개월 징역에 4개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고 지난 43일에 집에 돌아왔고 아리랑고개(以下 6行 畧)라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하여 지난 49일에 김상순 군을 구금하고 또 3일 후에 그의 동무 박재술(朴在述)을 구금한 이래 월여를 두고 취조를 하던 중 돌연히 지난 2일에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는 바···”


기사 내용에서 야학아리랑 노래아리랑고개 6이 주목된다. 특히 삼목은 생략 된 6행의 기사 중의 아리랑 사설을 영화아리랑에서 불러 탄압을 받은 사설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영화아리랑여주인공 신일선여사의 증언이나 조선가요선이란 책에서 삭제된 아리랑사설 등을 통해 추정한 것이다.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딜가고/ 쪽박의 신세가 원말이냐

사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에다가 불지를란다


또 아니면 만주지역에서 조사된 이런 아리랑 사설이다.


"XX(독립)당의 出沒이 자즈니/ 領事舘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런 사설까지도 불러주기도 하며 "아시겠습니까?”"이해되시죠?”를 중간중간에 넣어 나름 설득을 하려고 노력을 한 바이다. 그리고 요지를 다시 이렇게 정리해 주기도 했었다.


"소인이 제시한 것처럼, 신문에는 권도순을 중심인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김상순은 주문에 아리랑 관련 내용이 적시되어있는데, 권도순은 범죄혐의 업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보완해 줄 것을 바랍니다. 그리고 기사에서 생략한 6행의 아리랑은 요청하면 언제든 소인이 연구한 결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공적이면 보훈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를 꼭 윗분한테 고려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런 삼목의 통화에 상대의 답변 말미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삼목으로서는 기대할만했다. 사실 영화감독 나운규선생 외에 또 한 사람의 아리랑 관련 수훈자가 있게 된다면 아리랑의 또 다른 성격과 위상을 일반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영덕 대부동(현 영덕읍 대부리) 야학 터를 찾아 표식을 하는 계획도 갖고 있는 터였다. 당연히 마음먹고 전화를 한 것이다.


", 그동안 사실 기록이 보완되어 수훈이 추서 된 경우는 많습니다. 윗분께 전하겠습니다.”


첫 통화 당시의 끝말이었다. 기대할만했다. 그런데 3일 만에 온 답변은 실망스러운 것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랑과 항일운동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라는 뒤늦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삼목으로서는 화를 누르고 이를 진전시킬 방안을 또 궁구해야 했다.


삼목으로서는 1930년대 전후 야학夜學에서 항일노래로서의 애국가愛國歌 사건을 검토한 바가 있었다. 야학과 노래운동의 연관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 야학에서 아리랑도 불렸을 것이란 추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단순히 돈 없는 아이들이 비정규로 수학하는 사설교육 시설(물론 관립도 있었다)이란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아동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어 문맹자들의 계몽에 성과를 올렸으며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하여 지위향상과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민족실력양성에 공헌하여 당시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민중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민족사적 의의는 매우 막중했던 것이다.


삼목은 설 연휴를 보내고 영덕을 가기로 했다. 수첩에 이렇게 썼다.

 

1. 야학 터 주소지 특정 표식

2. 장소성 부여

3. 아리랑과 야학, 아리랑과 항일운동 상황 보편화

4. 지역문화 콘텐츠화

5. 영덕군지편찬위원회와 함께 조사

6. 영덕군청, 김상순, 궈도순 독립유공자 추서, 보훈처 의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