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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우리춤 원류 찾기’ 첫 번째 여정 ‘법열곡’오는 5월 25일 오후 5시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법열곡’ 공연이 펼쳐진다.이는 한국춤 역사의 맥을 잇는 뜻깊은 공연으로, 1971년 벽사 한영숙 선생이 동시대 예술인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며 국립극장에서 올린 ‘한영숙춤 법열곡’이 그 첫째고, 20여 년이 지난 1994년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스승의 예술혼을 이은 그의 맏제자인 고(故) 이애주 선생이 펼친 ‘이애주춤 법열곡’이 그 둘째고, 다시 30년이 흐른 2024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화두로 쫓은 춤의 원리와 승무에 내재한 ‘법열의 미학’을 탐색하고자 준비한 ‘법열곡’이 그 셋째다.인문학자 이두현은 당시 ‘한영숙춤 법열곡’을 보고 "불교의식무의 법통이 조선말의 한성준 옹으로부터 그 손녀인 한영숙에게 이어져 오늘 그 제자들과 더불어 무대화됐다는 것은 감개무량한 바가 없지 않다”고 했다. 또한 민속학자 임동권은 ‘이애주춤 법열곡’에 대해 "좋은 춤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의 감춰진 세계를 밖으로 내뿜는 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평했다.법열(法悅)은 ‘불법(佛法)을 듣거나 생각하거나 행함으로써 생겨나는 가없는 환희’를 뜻한다. 우리 전통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승무(僧舞)가 바로 이 법열을 구현한 우리춤의 정수(精髓)다. 한영숙 선생과 이애주 선생이 나란히 ‘법열곡’을 통해 승무에 내재한 ‘법열의 미학’을 추구했던 과정이 잊힌 지금, 선생의 제자들은 영산재 전승교육사이자 이애주 선생의 법열곡에 함께 출연한 일운스님에게 오랜 기간 작법무를 학습하면서 전통춤의 단순한 복원·계승을 넘어 재창조와 확장의 시도를 보여준다.김연정 예술감독은 "선대 스승님들과 대중들을 모시고 불법을 담는 과정으로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승무에 다다르게 되죠. 승무는 한 알의 씨앗이 땅속에서 싹을 내고 줄기를 세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긴 듯하지만 찰나인 우리의 인생처럼 무상·무아의 생생한 생명 변화의 연속인 우주법계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불교 작법무를 학습하고 승무를 추면서 몸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의 환희, 비워냄으로써 충만해지는 법열 속에서 스승님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라며 ‘법열곡’의 부제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의 뜻을 전했다.이번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법열곡’에서는 일운스님과 지허스님, 해사스님, 회정스님, 기원스님이 특별출연해 불교의식무를 함께 공양하고, 이애주 선생의 제자들은 40분에 이르는 한영숙-이애주 류 완판 승무로써 궁극의 평화, 법열의 의미를 새긴다.이애주문화재단(이사장 유홍준)이 후원하고 이애주한국전통춤회(회장 윤영옥, 예술감독 김연정)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은 3대에 걸쳐 천착하고 있는 ‘우리춤 원류 찾기’,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첫 번째 여정이다.서울남산국악당 홈페이지에서 공연을 예매할 수 있으며 단체, 예술인, 학생 할인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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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1)<br>잔인한 적군의 시신까지 거든 바다의 오래된 신앙왜덕산(倭德山)의 비밀 피아를 나누지 않고 위령 바다사람들 심성 깃들어 왜군에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민속 관념은 인류의 박애 정신 아닐까 교착상태 빠진 한·일 문제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명량 전투가 끝난 뒤 임준영은 이틀 동안 작전 해역을 수색했다. 나는 임준영에게 전선 2척과 어선 5척, 그리고 군사 50명을 맡겼다. 임준영은 이틀 후 군사를 인솔하고 암태도로 돌아와 보고했다. 임준영은 떠다니는 적의 시체 2000여 구를 건져서 묻었다. 연안 갯벌 쪽으로 다가오는 시체만을 정리했고 원양으로 떠내려가는 시체는 수습하지 못했다." 김훈의 소설 중 일부다.난중일기를 기초로 쓴 이 소설에는 많은 수사자(水死者)가 등장한다. 해전(海戰)이니 응당 물에 빠져 죽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 읽기가 난처할 만큼 섬뜩하고 잔인한 묘사가 이어진다. 전쟁 노획에 수급(首級)이 가장 중요하다. 아군과 적군의 목들이 잘리고 소금에 절여져 진상된다. 베어 얻은 수급을 다 감당하지 못하여서인지 코와 귀만을 잘라 전과를 계산하기도 한다. 이를 일본으로 우송하여 만든 것이 교토 호코지(方廣寺) 귀무덤(耳塚, 미미츠카)이다. 코도 함께 베었으므로 비총(鼻塚)이라고도 한다.관련한 내용은 2019년 7월 18일자 본 지면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의 여기저기 수사자들을 거두어 묻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김훈의 상상력일까? 아니면 실제 있었던 일일까? 아마도 김훈은 진도 왜덕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라는 책을 쓸 때, 나는 진도 관련 자료들을 한 보따리 마련하여 그에게 준 일이 있다. 이후 연통한 바가 없어 그의 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이든 수상록이든 일정한 사실을 바탕삼아 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 에 나오는 수많은 수사자와 그 주검의 처리방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궁금증이 생긴다. 왜덕산은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시 진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적군이었던 왜군을 수습하여 매장해주었던 것일까? 설마 왜군을 특별하게 대우하기라도 했던 것일까?왜덕산과 교토 코무덤 평화제진도문화원 박주언 원장에 의하면 현재 진도군 군내면 왜덕산의 지명은 범덕산, 왜덕산, 왜덕전, 와덕산, 외덕산, 덕산 등이다. 한두 달 후 출판될 보고서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진도문화원으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정호 전 진도문화원장,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비롯해 나도 이 보고에 한 꼭지를 맡아 참여한다. 내가 맡은 분야는 수사나 익사에 대한 민속 관념 혹은 의례에 관한 것이다. 박주언 원장이 현재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6~70여 기의 묘지가 왜덕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창녕조씨 선산과 혼재되어 있어서 무명연고의 묘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와음을 감안한다 해도 족보의 주소가 한자 왜(倭)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와를 구웠던 지역이기에 와덕산(瓦德山)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다수의 묘지 주소를 무엇 때문에 왜덕(倭德)이라고 표기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박주언씨가 2004년 이라는 잡지에 기고하면서부터다. 2006년 일본인들이 왜덕산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지휘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현창 사업회 임원과 수도대 학생들이 그들이다. 왜덕산에 묻힌 이들이 자기 선조들이라고 생각해서다. 이후 박주언씨를 중심으로 진도에서 평화제라는 축제가 진행되었고 교토 코무덤 앞에서 같은 이름의 혼령제가 열리고 있다.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코무덤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민남녀의 코와 귀를 베어가 모아둔 곳이다. 당초에는 귀무덤이라고 했다가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라 코무덤이라는 수식을 부가했다. 귀보다는 코가 더 섬뜩해 귀무덤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전언이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 갔다. 왜군 장수들은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고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도 조선인 12만 6000명의 코가 묻혀있다 한다.교토뿐만이 아니라 몇 군데 코무덤을 더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토록 잔인했던 적군 왜병들의 시신을 거두어 진도의 동쪽 해안에 고이 묻어 주었다는 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혹시 어떤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는 아닐까? 그렇지 않다. 족보의 묘지 주소가 왜덕인 이유를 상고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덕산 사람들 곧 진도사람들은 멀리 교토의 코무덤까지 찾아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이 진도의 왜덕산을 방문하기도 한다. 코로나 여파로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해마다 9월에 진행하는 이 행사는 명량의 바다에서 연행했던 평화제의 확장이기도 하다.박주언씨가 오랫동안 연행해온 진도평화제라는 축제는 지금은 없어져 명량해전축제로 탈바꿈해버렸지만 원혼을 달랜다는 의미만큼은 여전하다. 적군의 시신들을 거두고 매장해준 왜덕산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여기에는 피아를 굳이 나누지 않고 위령한다는 바다 사람들의 심성이 깃들어 있다. 왜군이어서가 아니고, 왜군이어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매우 오래된 신앙이자 민속 관념 말이다. 민속학자들은 물속의 원혼이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기방어의례로 해석하곤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이를 인류가 지닌 박애 정신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간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사례라는 점도 부기해둔다. 쿄토의 코무덤과 진도의 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법이 더욱 긴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수사자(水死者)에 대한 바다 사람들의 생각물에서 죽은 것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적어도 음양관을 철학의 기저로 두는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인 정서이고 감성이다. 나는 이를 졸고, 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이를 다시 졸저, (민속원, 2018)에서 풀어 썼다. 비혼 청춘 남녀의 동반 수사(水死) 사건을 사례로 그들에 대한 '혼건짐 씻김굿'과 '망자혼사굿'을 통해 뭍과 물의 대칭성, 남과 여의 대칭성, 나아가 자연과 인류의 대칭성 등을 톺아보고자 했던 글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죽음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바꾸는 방식, 물에 빠져 죽은 이를 대하는 초혼제(招魂祭), 수륙재(水陸齋), 위안제(慰安祭), 여제(癘祭) 등이 그 사례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온 국민이 분노했던 이유도 이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심리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것이 수사자에게만 해당되며 혹은 개별적이거나 집단 간의 일에만 국한되겠는가? 전쟁의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한 가닥 피어오르는 싹이라고나 할까. 진도의 왜덕산을 보다 슬기롭게 바라볼 필요는, 그간의 수사자에 대한 민속적 관념이나 신앙의 태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교토의 코무덤 위령제를 매개로 한국의 변방 진도의 왜덕산이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를 소망한다. 전후좌우 갈등과 이념과 심지어 전쟁을 뛰어넘는 우리의 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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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광대' 문진수가 아시아 1인극제 합류하다'아시아1인극협회'가 주최하고 '아시아1인극제·거창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아시아1인극제는 1988년 고(故) 심우성 선생의 선언으로 서울에서 시작됐으며, 2007년부터 거창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 전통연희를 전공하는 문진수 아티스트가 전통(춤사위. 재담, 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서 국내외 참가자들과 국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아시아1인극제는 전통을 현대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아시아 지역 솔로 퍼포머들의 축제로 3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4개국 25명의 공연자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난리버꾸통’을 펼쳤다. 주최측은 "아시아의 전통예술은 어느 나라나 생존 위기에 놓여있다. 1인 공연분야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지만 세상을 비추는 불빛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겠다"고 전했다. 모집분야는 전통예술 장르를 모티브로 한 1인 퍼포먼스 작품으로 전통연희, 춤, 음악, 연극, 마임, 오브제 인형극, 서커스, 마술, 저글링, 복합장르 등 다양한 분야이다. 실내와 야외에서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이면 신청 가능하다. 출품 작품 공연시간은 20분 이내이다.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아시아1인극제'를 앞두고 지난해 많은 전승활동을 보여준 1인극 뫼비우스를 발표한 문진수 아티스트를 인터뷰 했다. 국내 전통예술 평론가 남정숙, 조춘영, 정형호 민속학자에 이어서 세계적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에까지 러브콜을 받고 있는 문진수의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Q. 안녕하세요. 문진수 선생님 작품은 무대에서 매년 보고 있습니다. 아시아 1인극제 참여(합류)하게 된 계기는 A.제가 아시아 1인극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현재 아시아 1인극제 예술감독을 맡고 계신 마임의 대가 유진규 선생님의 추천으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2022년 민속학자 故 심우성 선생님의 아드님 심하용 한국민속극박물관 관장님께서 공주 아시아 1인극제를 대신할 '공주돌모루예인축제'를 만드셨고, 그곳에서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명성과 작품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직접 뵙고 인사드릴 수 있어 영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Q.유진규 선생은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A.그런데 공교롭게도 선생님을 뵌 건은 2004년 공주 아시아 1인극제 였습니다. 거창 아시아 1인극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공주 아시아 1인극제'에 같은 장소에서 제가 공연을 했었는데, 아마도 유진규 선생님께서는 저의 존재나 함께 출연한 것도 모르실 수 있습니다. 이후 20여년 만에 '공주돌모루예인축제'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유진규 선생의 추천으로 1인극제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아시아 1인극제 운영위원(연희)으로 추천해 주셨고 미력하나마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Q.작년 아시아 1인극제 내놓은 작품은 A.'뫼비우스'라는 작품입니다. 부 제목은 '흑사 위에 백사'이고 천의무봉 중에서 12발을 내세워서원을 형상화 했습니다. 거기에 재담에 얹어서 시대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공연입니다. Q.전통 연희가 아닌 새로운 모더니즘이라는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의 목소리를 1인극에 담아내는 작픔을 마치고 어떤 영감을 받으셨는지요 A.공연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유진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저에게는 큰 화두가 되었습니다. "얘는 광대인데 그냥 광대가 아니야! 아름다운 광대야”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광대가 되기 위하여 늘 정진하고 노력하며 정신과 육체를 가치 있게 다듬고자 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광대로 살고 싶습니다. Q.뫼비우스. 흑사 위에 백사' 시놉시스는, 배경음악, 연출, 안무는? A.우리는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양극화 되면서, 피지배자는 지배자의 억압과 횡포에 저항하면서 이 세상을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검은 세력과 요괴들의 검은 마법에 어지럽혀진 인간 세상에서 구원과 평화를 기원하는 작품입니다. 배경음악은 남사당 대전지회에서 협연해주셨고, 연출, 안무는 제가 맡았습니다. Q. 오늘날 흑사를 상징하는 부류는? A. 인간세상을 쥐락 펴락하는 사회 특권층 목사, 박사(지식꾼), 변호사, 판사, 검사, 정치가 등을 통털어 지칭합니다 Q.'뫼비우스' 작품 주제는 A.지배자 권력의 억압과 횡포에 맞선 피지배자의 '저항정신'을 시대비판 의식으로 담아냈습니다. Q. 주제를 상징하는 구체적 행위는 A. 흑사에 대항하는 백사가 돌리는 상모의 큰 원은 공생과 화합을 상징합니다. 주제의식을 원으로 상징했습니다. Q.줄거리는 A. 인간과 요괴가 공존하는 어지럽고 혼탁한 요지경 세상. 악의 흑주술을 따르는 검은 세력은 요괴들과 야합하여 세상을 온통 흑마법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고 뒤흔들며 설상가상 검여사까지 등장하여 검은 세력들은 한층 더 득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힘을 모아 검은 세력과 요괴를 물리치려 시도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세상을 오히려 악으로 물들인다.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무고한 자기편 사람들을 잡아들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듭니다. 소위 말하는 내전이 일어난거죠. 이후 검은 세력의 막강한 힘과 권력 앞에 무너지고 마는 인간 세상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제의를 지내게 된다. 소망에 답하듯 혼탁한 검은 무리 흑사에 대결하는 백사(12발 상모)가 출현하고 협객 금복주의 활약과 희생으로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과 12달 축원 덕담, 숭고한 희생에 대한 '비나리'의 의미를 담은 춤과 마지막 신명을 다해 '12발 상모' 연희를 보여주면서 대단원을 올리고 막을 내렸습니다. Q.전통연희 중 어떤 제재를 선택해서 표현하셨나요 A. 검은 세력 흑사를 상징하는 검은 색 의상, 백사를 상징하는 12발 상모입니다. 거기에 극적 스토리텔링 바탕위에 펼져지는 재담, 12발 상모연희, 춤사위로 풀어낸 1인 연희극 작품입니다. Q.기획 의도는 A.‘문진수류 열두발 상모춤 1인 연희극, 뫼비우스(검사 위에 백사)’는 열두발 연희에 새로운 창작과 시대적 이야기를 더해 선보이는 1인 연희극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기존 풍물판에서 12발 상모가 보여주는 부속 연희로서의 한정된 기예와 제약에서 벗어나 미학적인 가치와 몸짓의 예술성과 함께 검은 세력(검은색 의상)과 그에 저항하는 백사(12발 상모)의 대립, 극적 갈등의 해결, 염원과 제(祭)를 통해 시대의 정신을 담아 표현하고자 하였다. 전통민속 예술(연희)의 전통성과 시대의 목소리를 '재담'이라는 전통연희 장르를 조합하여 현대적 해석을 모색했습니다. Q.작품 목적은 A. 첫째, 시대에 맞서는 민중정신, 인간 삶의 애환을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며 평안을 기원하는 민중공동체의 가치를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둘째, 전통의 '현대적 해석', 즉 전통연희극 창조작업을 통해 전통의 확장을 모색했습니다. '춤사위/재담/소리'의 조합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셋째, 벽사진경(辟邪進慶)을 추구하는 제의적 행위 '굿'을 통해 전통예술이 구현하는 공동체의 조화와 공생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Q.작품의 완성을 위해 어떤 점에 노력했나 A.전통 12발 상모 연희를 재창조하며, 전통 연희와 풍물굿의 고사 소리 등에서 구전되어 온 재담들을 해석한 바탕 위에 사회적 가치, 시대에 대한 해학과 풍자를 재담에 담아 연희극을 재창작하였고, 12발 상모 연희와 함께 유려한 춤을 추면서 재담을 해야하기에 숨이 차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 머리에 상모를 쓰고 재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춤과 연희를 보여주며, 또한 고난도 연희의 끝에연달아 재담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짧게는 35분. 길게는 2시간도 할 수 있는 저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평소 체력 증진에도 힘썼습니다. Q.극적 요소는 A. 인간 세상을 혼란시키는 검은 세력과 백사의 대결구조, 12발 상모를 검은 세력에 대항하는 주체로, 재담 행위는 저항하는 민중의 주체로 대비시켰다. 즉, 12발 상모 연희와 춤사위, 재담 행위는 각각의 주체로서, 극적인 대립과 갈등 구조를 표출하는 연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Q. '1인극'으로 보여준 전통연희 작품을 관객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연희자의 시선에서, 다시 말하면 무대에서 바라보는 관객들과의 교감은 주고 받았나요. 특히 외국에서 온 아티스트로 출연한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A.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를 하고 보신 것 같습니다. 백사의 출현(전개)과 갈등(클라이막스) 해결(대단원)이라는 드라마틱한 극적 과정이 넘어갈 때마다 관객은 알아채고 추임새와 박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작품 속에서 재담과 춤, 연희를 통해 서사의 매듭을 매고 달고 풀어내며, 외국아티스트들과 춤과 연희라는 '몸의 언어'만으로도 충분한 감흥과 신명을 주고 받았습니다. 지난 해 줄판,살판 등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광대 문진수 아티스트는 전통과 현대의 충돌, 억압에 맞선 '저항'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뫼비우스'작품을 발표했다. 전통연희를 현대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장르로 탄생시켰다. 세계를 향해 12발 상모를 내걸고 현대적 아티스트로 새로이 태어났다. 전통과 모더니즘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광대로.... 전문가 평에 의하면 품격있는 가무악에 능한 문진수의 멋들어진 유려한 춤사위, 재치 넘치는 재담, 화려한 12발 상모 기예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어느새 관객들은 연희꾼 문진수의 스토리텔링을 따라 검은 세력의 횡포에 함께 분노하며, 인간 세상의 갈등과 대결을 마치고 조화(구원)를 기원하게 되는 과정에 공감했다고 전한다. 올해 아시아1인극제 1차 모집에 한국 작가 80여 명이 경연에 참가했다고 한다. 유진규 심사위원장에 의하면 "예술계 각 분야 전문 심사위원 8분이 개개인 기예능과 이력, 작품목적과 주제 등을 채점하여 그 중 12개 작품을 선정해서 세계인들과 같이 6월 20일부터 5일간 거창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고 전한다. 전통작품을 근간으로 한 어느 장르 작품이 나올지가 궁금해진다. 운영위원 문진수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발표는 다음주 2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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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봉 이매방의 삶과 예술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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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이윤선, '남도를 품은 이야기'민속학자 이윤선 작가가 최남단 도서 해안의 민속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책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를 펴냈다.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서 의미를 톺아내는 것이 시대정신”이라고 믿는 민속학자 이윤선. 이름도 빛도 없는 변방과 소외된 이들, 여성을 포함한 민중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바로세우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한국학’의 길을 모색하는 이다. 저자는 남도 특히 도서 해안 지역에 전하는 구전과 설화, 소리와 춤, 인물과 역사 등을 망라한 ‘남도 인문학’을 통해 한국 정신문화의 요체를 발견하고 나아가 세계를 다시 만난다. 이 책은 남도 문화의 숨결이 살아있는 구수하고도 아름다운 산문을 통해 웅숭깊은 남도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남도 인문학, 낮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다전남북 지역을 이르는 통칭 ‘호남’과 ‘남도’. 지역학에서 ‘호남학’은 흔히 역사 중심의 용례가 많고 ‘남도학’은 문화 중심의 용례가 많다. 즉 호남학이 역사적 입장이나 호국 정신사적 맥락을 드러낸다면, 남도학은 서민문화, 민중문화 혹은 평민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학적 맥락이 강하다는 것이다. 호남학보다는 남도학이 호남을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더 넓은 의미의 ‘한국학’을 포섭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 이윤선은 남도의 역사와 민속 등 무형 유산 전체를 아우르며 이 땅의 풍속과 정서를 규명, ‘남도 인문학’을 주창하고 있는 민속학자이다. 그 자신이 전라남도 진안 출신으로, 판소리와 무가 등 소리에도 밝아 ‘남도의 문화적 자산’이라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도 문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학자이기 이전에 스스로가 생래적 자질을 타고났거나 진도라는 특수한 지역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그 문화적 자질을 습득한 사람”이라는 평(김선태 목포대 교수)을 듣는다. 남도 인문학을 표방한 이 책에서 저자는 특히 도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민속과 예술을 포함한 남도 문화 전반을 소개하는데, 이는 "소외되고 낮은 이들, 이 땅의 민중과 그 후세들이 이어가는 생활문화를 주목하는 것이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서 의미를 톺아내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시대는 서민의 인권과 역량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경향만 보더라도 선거권의 쟁취, 여권의 신장, 지배세력에 대한 항거 등 피지배 계급의 역량이 강화돼왔다. 이것을 시대정신이라 부른다면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단연코 서민의 문화다. 한국 정신문화의 요체를 서민의 말과 몸짓, 풍속에서 길어 올려야 시대정신에 부합한다. 남도는 여성을 포함한 민중들의 삶을 토대로 삼는 생활문화의 수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말하는 남도 정신문화의 요체이다.” 남도에서 세계로 가는 인문 여정이 책에는 역사와 인물, 풍속과 전통, 구전과 설화, 소리와 춤 등 남도의 풍요로운 문화유산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적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나주 유배지에서 국가 통치철학을 가다듬고 떠난 정도전과 같은 역사적 인물부터 공옥진, 장월중선 등 남도가 낳은 걸출한 예술가들의 생애와 그들이 꽃피운 문화 이야기, 남도 특유의 식도락과 옹기배 등의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토속적이고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그중에서도 매향이나 우실의 발달, 노두, 독다믈, 물때, 바닷가의 신앙과 무속 등 독특한 도서 해안 문화가 생생히 드러나는 이야기 등은 해양 문화권 비교 연구로 내공을 쌓은 저자의 깊이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심은 아시아 이웃 국가들을 지나 남태평양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미크로네시아에서 남도의 ‘진놀이’와 닮은 원무 놀이를 하는 현지 아이들을 만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자바국(인도네시아)과의 교류 흔적을 찾고, 젓갈이 발달한 베트남을 우리와 함께 ‘발효 문화권’으로 묶으며 공동 연구를 제안한 것은 우리 향토를 이해하는 눈을 통해 세계를 만나는 경험이다. 여성과 서민 일반 풍속을 다룬 부분들도 흥미롭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문집을 낸 담양 출신 송덕봉은 16세기 양반 사대부 부부관계의 전형과 달리 첩실을 둔 남편 유희춘을 꾸짖기도 할 만큼 굴종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으며, 곡을 하고 삼년상을 치르기는커녕 조문객들과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죽음도 축제로 승화시키는 남도의 상례는 권위적인 기층 질서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다. ‘소외되고 낮은 이들의 삶에서 한국 정신문화의 요체를 찾는다’는 저자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 편 한 편 읽을수록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빠져들게 되는 이 책은 「전남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에 실린 글편을 엮은 것이다. 단편소설 「바람의 집」으로 등단(2020년 목포문학상), 시집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를 출간하는 등 문인으로도 발돋움하고 있는 저자의 미려한 문장과 진한 장맛 같은 구수한 산문을 맛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인 저자는 '나를 성찰하는 민속학 연구'’를 표방하는 민속학자이자 판소리와 무가 등 남도 소리에 밝은 예인이다. 특히 남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문화와 아시아 도서해양 문화권을 비교하는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20년 단편 '바람의 집'으로 목포문학상을 받고 데뷔한 저자는 시집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를 펴내기도 했다.이 책은 남도의 풍속과 정서를 탐미하는 저자의 인문 에세이로 저자가 '전남일보'에 연재하는 칼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에 실린 글들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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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곧 한여름이 오고 장마가 시작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화산업이 주눅 들긴 했지만 연례적인 테마들은 변함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무엇일까? 한여름 밤의 영화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 그렇다. 고전적으로는 여고괴담 시리즈다. 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여성 특히 처녀성을 강조하는 고전적 이미지는 소설 장화홍련전으로 좇아 오른다. 아니, 뱀에게 바친 처녀 이야기로, 백년 묵은 여우 이야기로 갈래를 치며 끊임없이 좇아 오른다. 이들 서사는 아마도 어떤 시대 어떤 의도에 의해 강요되거나 권장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권선징악의 표상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드라마 <도깨비>마저도 성격은 귀신에 가까웠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파괴한 것 같지는 않다.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 스토리의 얼개는 물론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역사 이래 여성이 억압과 핍박의 중심에 서있었으니까. 도깨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도깨비는 후덕한 남성상을 그 배경으로 한다. 본래부터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민속학자 임동권이 보고했던 도깨비들, 1960년대까지 채록된 다종다양하던 도깨비들 속에는 처녀 도깨비, 여성도깨비들이 대거 등장한다. 지면상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남성을 능욕한 여자도깨비 이야기 등이 흥미롭다. 남성의 몸을 가시덩굴로 긁고 개똥을 먹여 보기 좋게 전복시켜버린다. 남성 전유의 섹슈얼리티가 전복되는 순간이랄까. 처녀귀신의 함의를 무너뜨리는 도깨비 본연의 모습이 여기 있지 않을까?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도깨비굿으로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도깨비굿을 소개했다. 여성 전유의 전복(顚覆) 축제 말이다. 왜 여성들만 모여서 해괴한 의례를 치렀을까. 일반적인 기우제가 비내림을 염원하는 것이라면 기우제 도깨비굿은 비 내리지 않은 자연현상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란제의였다. 이 의례의 목적은 기왕의 질서를 뒤엎는다는 데 있다. 부조리한 사회를 뒤집어엎고 난망한 세상을 뒤집어엎는 상징이자 놀이이며 의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내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지만 남근에서 두꺼비로, 불에서 물로, 남깨비에서 여깨비로, 불도깨비에서 물도깨비로의 전화(轉化)다. 일종의 카니발리즘이다. 바흐친은 이 용어를 권위적이며 모순적인 기존의 질서가 폭발적으로 터지는 축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낡은 권위에 대한 비판과 해체는 결국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정격에 대칭되는 비정격, 권위에 대칭되는 비권위편에 있는 것은 여성, 어린이들을 포함한 노약자, 장애인 등이다. 여성성으로 상징되었을 뿐, 도깨비굿의 컨셉 안에 이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 사람 살만한 세상이라고 하고 민주화되었다고도 하지만 이들이 속했던 위치나 위상은 역사 이래 고정되어 왔다. 권력에 대항할 힘이 없거나 무력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 말이다. 공장의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죽고, 버스타고 가다가 건물이 덮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다. 한여름 밤의 여고괴담 시리즈를 새삼 상고하며 도깨비굿을 소환해본다.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분기마다 절기마다 행해진 뒤집음의 의례적 맥락이 또렷해진다.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가지>에 나오는 왕 살해 매커니즘을 닮았다. 내 책에서 비주류들의 전이지대, 평범한 존재들의 혼불, 가장 낮은 자들의 유쾌한 반란이라고 호명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도깨비같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재구성하기 위해 떨쳐 일어난 여성들, 아니 이름도 빛도 없이 충직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들이 도깨비굿의 분장 주체들이다. 처녀귀신과 도깨비의 섹슈얼리티를 넘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섹슈얼리티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산물인 성에 관련된 행위, 태도, 감정, 실천, 정체성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개념이다. 도깨비 이야기 중 전형성을 갖고 있는 귀태(鬼胎)의 경우를 사례 삼아본다.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처녀 임신에 대한 대응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여성에게 강요된 정절 관념과 순결에 대한 강박이었고 셩폭행과 음행 누명에 대한 원귀서사를 대량생산함으로써 처녀귀신이라는 기피 담론을 정당화시켜주는 섹슈얼리티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괴담 속의 여귀설화는 어떤가?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담론의 기능은커녕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유포시킴으로써 억압 기제를 오히려 강화시켜오지 않았는가. 햐얀 소복을 입고 입가에는 피를 흘리는 순결한 처녀상 혹은 여고생의 기괴한 이미지들만을 드러내 불안감과 공포심을 자극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시각적인 부분을 드러내 파편화시키고 극단화시키는 이유는 물론 기왕의 체제나 담론에 대한 복종과 굴복 혹은 흡수에 있다. 이를 반역하고 전복하는 것이 도깨비굿의 내면이자 속성이었다. 나는 이 여성성을 <삼국유사>와 섬진강을 매개 삼는 두꺼비와 달, 그리고 갯벌과 마을숲의 여성성에서 찾고자 했다. 이것이 처녀귀신으로 표방되는 섹슈얼리티에만 국한되겠는가. 탄소발자국을 너무 많이 낸 반생태적 환경, 여전히 가진자들의 놀음으로 치닫는 정치적 현실, 이 세상은 여전히 빛도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희생과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 나는 올 초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ᄒᆞᆯ미디어, 2021)>를 출판했다. 처녀귀신과 도깨비의 이중성이 아니라 본질적인 우리 욕망의 투사물을 통해 한국사회를 통째로 읽어내고 싶었다. 여고괴담류의 섹슈얼리티를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우리는 구체적인 무엇을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다 선명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하고 하는 짓도 우수해야 한다. 하지만 귀신과 도깨비는 선명하기보다 흐리멍덩하고, 논리적이라기보다 우유부단하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불합리한 존재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그런 존재다. 확실한 공간에서 출몰하는 정격의 신성이 아니라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공간에서 출몰한다. 마을과 숲 사이가 그렇고 바다와 육지 사이 갯벌이 그렇고 땅과 강 사이의 습지가 그렇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다. 제국과 서양으로부터 들어와 이땅의 주인노릇을 하는 이른바 고등종교의 신격들에 치여 행간과 여백으로 숨어들어버린 이 땅 토종의 신격들이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엉뚱한 존재로 살아남아 혹은 시대마다 기발한 모습으로 재창조되어 민중의 욕망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귀태나 원귀처럼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를 정당화시키기도 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처녀귀신과 도깨비로 나뉜 행간이었다. 치우친 균형, 기울어진 운동장, 편향된 시대감각들을 바로잡는 것 말이다. 다그치고 몰아치는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도깨비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그것을 여백이라고 생각한다. 바다와 강 사이의 갯벌 혹은 습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 기능도 없어 보이는 그 여백 말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무장지대 같은 곳이다. 좀 더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여유다. 일등이지 않아도 꼴찌이지 않아도 회색분자여도 괜찮다. 나는 끊임없이 생태적 본원 레퓨지움으로 돌아올 도깨비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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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 산학협력단, ‘하회선유줄불놀이의 전승과 무형문화적 가치’ 학술대회안동 하회선유줄불놀이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규명하고, 축제화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오는 20일 오전 10시부터 국립안동대학교 국제교류관 중회의실에서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문화재청의 ‘2023년 미래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사업’ 공모에 선정된 안동대 산학협력단의 줄불놀이 사업단이 주최하며,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후원을 한다.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로 평가되는 하회선유줄불놀이는 하회의 방풍림인 만송정쑤에서 화천을 가로질러 부용대로 이어지는 줄불, 맞은편 절벽 위의 부용대에서 불타는 솟갑단을 절벽 아래로 던지는 낙화,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화천 위를 수놓아 떠다니는 달걀불로 이뤄졌다. 과거 하회에서는 7월 기망(旣望)의 시기에 선유줄불놀이가 행해졌으나, 일제강점기에 그 전승이 단절되고 말았다. 1960년대 이후 선유줄불놀이의 재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고, 현재에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비롯한 지역의 중요 행사 프로그램으로 연행되는 등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하회선유줄불놀이의 전승과 무형문화적 가치'를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민속학자, 문화콘텐츠 전문가 등이 참여해 선유줄불놀이의 역사, 현대적 재현과정, 문화유산적 가치와 축제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제1세션에서는 한양명 안동대 문화유산학과 교수의 ‘낙화놀이의 유형과 하회 선유줄불놀이의 위상’을 주제로 발표가 시작되며, 이어 놀이연구소 ‘풂’의 소장인 이상호 박사가 ‘낙화놀이의 분포와 유형 비교'를 주제로 발표한다. 제2세션에서는 지역 문화산업체 도움소의 우종익 대표가 ‘낙화봉의 제작방법과 전승지식’을, 국립무형문화연구원의 정형호 박사가 ‘하회선유줄불놀이의 무형유산적 가치’를, 안동대 문화유산학과 이진교 교수가 ‘하회선유줄불놀이의 현대적 전승양상과 축제화 방안’을 주제로 발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학술발표뿐만 아니라 하회마을보존회 전현직 이사장을 비롯한 주요 전승자가 참여하여, 선유줄불놀이 활성화를 위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경청·반영할 수 있는 자문회의도 함께 열린다. 이진교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가 "하회마을의 대표적 볼거리이자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선유줄불놀이의 문화유산 지정과 현대적 활용방안을 위해, 그동안 진행되었던 조사·기록화 사업의 추진 성과를 집약해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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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의 지역춤, 광주·전남지역춤지역춤이란 특정지역의 생태문화적 배경 속에서 지역민들에 의해 공통적 특징을 형성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춤을 말한다, 한국의 전통춤은 지역마다 색다른 지역춤들이 전승되고 있다. 한국의 지역춤을 형성하게 된 생태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전국을 영남과 호남, 강원과 충청, 수도권과 북한 지역춤 등으로 나누어 대표적인 춤 종목과 특징을 연재한다. 기후와 지리환경에 따라 발달한 농경민속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국토 구조로 인해 위도에 따라 기후환경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부지역은 북부지역에 비해 온화하고 따뜻한 기후로, 삶이 여유롭고 느긋하여 속도가 빠른 춤이나 도약하는 춤보다는 느리지만 멋스러운 민간춤이 발달하였다. 지리적으로 평야지역은 풍농으로 인한 풍요롭고 흥겨운 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교통이 발달하여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고 전파력이 좋아 춤의 종류도 다양하다. 평야지대로 갈수록 폭넓게 움직이는 ‘수평춤’이 많고, 산악지대는 ‘수직춤’이 많다. 수직춤이 발로 뛰어오르는 도약과 무릎 굴신이 특징이라면 수평춤은 발의 옮김과 손을 넓게 펴들고 추는 춤사위가 특징이다. 광주·전남지역은 따뜻한 남쪽지방에 위치하고, 산보다 평야가 많아 풍요로운 농경문화가 자리잡고 있어 농악과 농요를 비롯한 농경민속춤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농경지를 향한 ‘앉은춤’, ‘엎드린춤’, ‘굴신춤’ 등 대지지향적인 ‘하향춤’이 많으며, 주로 손으로 이루어지는 농경생활은 농경모의적인 손춤, 팔춤, 곡선춤이 발달했다. 북쪽지역의 도약춤과 대비되는 남쪽지역의 춤 특징인 ‘답지(踏地)춤’을 비롯하여 ‘평걸음’, ‘지숫는 춤’, ‘양팔 들사위’ 등 수평춤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약을 억제하는 평면적인 춤과 빠르지 않으면서 흥이 넘치는 손춤, 내면적인 멋을 가진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같은 예인들의 춤이 주로 전승되고 있다. 세시풍속에 따른 추석문화권춤 세시풍속을 지역문화권으로 나누는 민속학계의 통설은 북부지방의 단오문화권, 중부지방의 단오·추석문화가 복합된 백중문화권, 따뜻한 서남지역 평야지대의 추석문화권으로 구별한다. 민속학자 김택규는 단오권이 ‘도당굿-입체적·동적’, 복합권이 ‘별신굿-평면적·동적’, 추석권이 ‘당산굿-평면적·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춤문화권 역시 단오권은 수직적·입체적·동적인 춤, 추석문화권은 수평·평면·정적인 춤, 복합권은 그 중간으로 수직·수평과 입체적·평면적인 정중동의 춤이다. 그중 호남지방은 추석문화권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곡창지대에서 풍년을 가져다 준 천신과 지신에 감사드리며 그 기쁨의 축제를 벌이는 지역이다. 이들은 천신보다 지모신을 더 숭배하는 대지지향적 하향춤과 땅을 자근자근 밟는 강강술래의 답지춤, 수평적인 양팔사위와 여밀사위 등의 하향춤을 많이 춘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광주·전남지역춤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느린춤’, ‘곡선춤’, 아래로 여미는 ‘하향춤’과 손목놀림이 많은 ‘손춤’이 발달하였고, 발걸음춤으로는 부드럽게 대지를 밟아주는 ‘답지(踏地)춤’이 발달하였다. <정범태(2006), 한국백년1, 서울: 눈빛출판사, pp.12~13.> 광주·전남지역 농악춤 한국의 농악권은 호남 우도농악, 호남 좌도농악, 경기 및 충청농악, 영동농악, 영남농악 등 다섯 지역으로 나뉜다. 호남지방은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우도농악과 좌도농악, 두 가지 유파로 분류된다. 호남 우도농악은 익산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로 쇠와 장구춤을 중시하고 가면잡색놀이가 특징이며, 당산제와 마당밟기를 중심으로 부포상모춤,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장구가락이 아주 발달하였으며 윗놀이보다 밑놀이가 발달하였고 악기별 개인놀이가 발달하였다. 이에 비해 호남 좌도농악은 전주, 남원, 여수로 이어지는 산악지대로 쇠와 장구놀이를 중시하고 잡색탈춤과 동물 등 배역놀이가 발달하였으며, 고깔보다 전립을 쓰는 채상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우도농악보다 가락이 빠르고 윗놀이가 발달하였으며 집단적인 진풀이가 특징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서 걸립패들의 농악은 곡창지대에서 판굿에 대한 후한 쌀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능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탈춤 종목이 독립적으로 발달되지 못하고 잡색(雜色)들의 가면극놀이가 농악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소리춤의 대표 <강강술래> 소리춤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르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강강술래가 있다. 남성들이 추는 소리춤과 여성들이 추는 소리춤으로 나눌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여성소리춤이 많이 발달했다. 기본적으로 원무 형식의 집단춤이지만 놀이적인 것이 혼합된 대형변화 형식도 많다.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강강술래에는 고사리 꺾기, 청어엮기와 풀기, 덕석몰이, 바늘귀 꿰기, 남생아 놀아라, 쟁기질놀이, 문지기놀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강강술래는 일반적으로 여성소리춤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녀유별(男女有別) 사상이 깊었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춤에서도 이런 현상이 깊게 투영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해군의 야간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가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부녀자들이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하였으며, 그 시간동안 군사들은 잠을 자고 대낮의 전투를 대비했다는 이야기가 강강술래의 기원설로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현재도 전남 여러 지역의 강강술래가 여성소리춤으로 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신안 비금도 등지에서는 남녀가 함께하는 강강술래가 전승되고 있기도 하여 지역에 따라 남녀소리춤으로도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매방의 승무와 살풀이춤 이매방(1927~2015)은 전남 목포출신으로 어린 시절 집 옆의 목포권번에서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의 가르침으로 기방춤 기본을 익혔고, 이대조(검무, 승무), 박영구(승무, 법고), 이창조(검무)등으로부터 전통춤을 다졌고,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서도 춤을 계속하였다가 상경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1987), 제97호 살풀이춤(1990)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평소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지”라는 말씀을 하였으며, 여성보다 더 고운 춤을 춘다는 평을 받았다. ‘하늘이 내린 춤꾼’, ‘국무(國舞)’등의 칭호를 붙인 『이매방화보집』(이병옥·김영란 집필, 2011)을 봉정할 만큼 이수자들만도 수백 명에 이르며 명무제자(너무 많아 명단 생략)들도 수두룩한 범한국적인 최정상의 춤꾼이었다. 한진옥류 검무와 재인춤 광주·전남지역 명무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타지방에서 춤사범이나 춤꾼으로 생애를 보낸 이들(강태홍, 박지홍, 김계화, 이매방 등)이 많은데, 이에 비해 끝까지 고향을 지킨 명무에는 한진옥(1911~1991)을 꼽을 수 있다. 한진옥은 ‘못 추는 춤이 없는 춤의 팔방미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그가 선대 명무였던 이장선(굿거리·바라무·살풀이·부채춤·승무 등), 신갑도(팔도 검무), 이창조(검무, 창), 장판개(창) 등으로부터 다양한 춤과 소리를 전수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많았었는데, 대부분이 떠나자 "지방에 살다 보니 알아주던 사람도 떠나가고 남는 건 회한뿐”이라며 "백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끼니 간 곳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곤 했었다. 자칫하면 맥조차 끊길 뻔했던 스승의 ‘팔방춤’의 맥을 제자 김다복, 임순자가 잇고 있을 때 지역의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을 공연 해설 때마다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떠나고 김자연 등이 겨우 맥을 있고 있어 안타깝다. 속히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의 맥을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옥진의 <1인 창무극>과 허튼춤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 알려진 공옥진(1931~2012)은 곱사춤, 병신춤, 원숭이춤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이 시대의 광대춤꾼이었다. 전남 영광 출신으로 남도 판소리의 대가였던 아버지 공대일에게 창을 배웠다. 1945년께 조선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고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에 입상했다. 1973년 남도문화제에서 '1인 창무극'을 창안하였고 1978년에는 익살맞은 병신춤과 판소리 창이 곁들어진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정병호(중앙대교수)에 의해 발굴된 공옥진의 특이한 춤들은 병신춤 외에도 곱사춤, 원숭이춤 등 동물을 모방한 춤으로 천연덕스러움과 청승맞음이 담겨있었으며, 『병신춤을 춥시다』(1982, 문순태 저)로 공옥진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세상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당시 ‘1인 창무극’ 공연을 봤던 필자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눈물범벅으로 울었다가 배꼽 빠질 지경으로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장애인 단체의 거센 반발로 병신춤은 사리지고 동물 모방춤만 추게 되었으며, 그 후 뇌졸중으로 오래 고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전남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무대에 서는 투혼을 보여주었고, 필자가 해설을 했던 제 71회 <한국의 명인명무전>(국립극장)에서도 살풀이춤으로 생애 마지막 무대를 선보여 커다란 감동을 주고 떠났다. 박병천의 진도북춤과 씻김굿 진도북춤의 명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 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박병천 명인(1932~2007)은 무용계에서는 ‘진도씻김굿’보다는 ‘진도북춤’ 명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모두가 ‘박병천의 진도북춤’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명칭이 되었다. 박병천 명인의 춤바디도 우리가 흔히 아는 곱디 고운 기방계춤이나 고고하고 담백한 재인계춤 바디가 아닌 독특하고 투박한 민간계 춤바디를 지녔다. 박병천 명인이 보유한 예능 중 최고의 걸작은 ‘구음시나위와 징(鉦)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통춤꾼들은 앞을 다투어 살풀이춤이나 입춤 등의 반주곡으로도 많이 쓴다. 그런데 필자가 본 많은 공연무대에서는 구음소리만 들리고 춤이 묻혀 버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박병천의 구음소리가 워낙 심금을 울리니까 관객들은 춤보다 소리 감흥에 매료되어 춤이 눌리는 분위기가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춤의 기량과 끼가 박병천 구음소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춤꾼이 아니면 소리에 매몰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니 이 시대의 명인 중의 거장임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광주·전남지역은 지리환경의 영향으로 좌·우사위(수평적, 평면적)가 많고 ‘땅기운이 온몸으로 지피는 춤(대지지향, 하향춤)과 땅을 밟는 춤(답지춤)’이 특징이다. 또한 넓은 평야와 농경지가 많아 농악(우도, 좌도농악)과 소리춤(강강술래)이 발달하였다. 추석 때가 되면 햇곡식과 햇과일의 추수를 천신과 지신에 감사드리는 추석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육자배기토리의 노래와 시나위 선율이 발달한 관계로 춤도 흩어지다 모아진 산조(散調) 음악의 느린 장단에서 점차 빠른 장단을 넘어가며 자지러질 듯 혹은 숨죽일 듯 손사위를 펼치는 ‘산조춤’과 구구절절 맺힌 한과 삶의 애환을 담았다가 차원 높은 신명으로 승화하는 ‘살풀이춤’, 그리고 농경사회의 영향을 받아 민초들의 고단함이 녹아있으면서도 풍요와 신명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허튼춤’이 발달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에 판소리와 노동요 등이 지정되면서 광주·전남지역의 무형문화재에 판소리와 고법 12종목, 농악 6종목, 민요와 노동요가 15종이나 지정되어 가히 예향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춤 분야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호남출신 이매방 명무를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와 살풀이춤 보유자로 지정하였을 뿐이며, 광주·전남지역에서는 한 종목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아 지역춤들이 소멸될 위기에 있어 매우 안타깝다. 이병옥은 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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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민속기록학회 상반기 학술대회, "민속예술과 기록"2023 민속기록학회 상반기 학술대회가 '민속예술과 기록'이라는 주제로 오는 10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샤머니즘박물관에서 개최된다. 각 주제 발표는 아리랑, 판소리, 세시풍속, 민속활용을 중심으로 발표된다. 양종승 학회장은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2012년 등재), '판소리'(2003년 등재)는 민속예술 분야인데 무형문화재와 관련된 '기록전승'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민속예술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체계적인 기록과 기록자료 수집 및 고증 등은 이 분야 연구의 토대가 됩니다. 또한 이러한 자료에 대한 연구 및 활용도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민속기록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계기가 되는 학술대회가 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1주제 발표:기미양(아리랑학회) "<본조아리랑>에 대한 재검토" (토론: 김연갑/아리랑연합회) *제2주제 발표:유수영(전남대) "무속예인의 생애와 지역문화콘텐츠"(토론:변지선/호서대) *제3주제 발표:김덕묵(한국외대) "한·중·일 정월 세시의례의 종교적 성격과 구조"(토론:이병용/중앙대) *제4주제 발표:김지혜(한국외대) "한국어 교육에서 민속의 활용방법 모색' (토론: 심일종/서울대) 오늘날 국내외 외국인들이 'K-한류'의 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외국인들에게 민속을 활용한 교육도 중요하다. 언어와 문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민속예술과 기록'의 발굴과 연구는 중요하다. 본 학술대회에서는 동아시아 세시풍속의 비교 및 한국어교육에서 민속의 활용 방안도 발표된다. 한국 민속뿐만 아니라 인접국인 동아시아 비교는 우리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된다. 일 시 발 표 및 내 용 13:30 ~13:40 개회사: 양종승 회장 제1부: 민속예술과 기록 사회자: 반혜성(단국대) 13:40 ~14:05 발표주제: <본조아리랑>에 대한 재검토 발 표 자: 기미양(아리랑학회) 토론자: 김연갑(아리랑연합회) 14:05 ~14:30 발표주제: 무속예인 후손의 판소리 활동과 지역문화콘텐츠 -함평 국창 정창업 예인의 후학활동을 통해- 발 표 자: 유수영(우리문화콘텐츠연구소) 토론자: 변지선(호서대) 14:30 ~14:45 중간휴식 제2부: 자유주제 사회자: 노무라 미치오(장안대) 14:45 ~15:10 발표주제: 한·중·일 정월 세시의례의 종교적 성격과 구조 발 표 자: 김덕묵(한국외대) 토론자: 이병용(중앙대) 15:10 ~15:35 발표주제: 한국어 교육에서 민속의 활용방법 모색 발 표 자: 김지혜(한국외대) 토론자: 심일종(서울대) 15:35 ~15:50 중간 휴식 종합토론 사회자: 반혜성(단국대) 15:50 ~17:00 발표자, 토론자 및 참가자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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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꽃/김춘수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추천인: 김덕묵(민속학자) 우리들은 모두 누구에게 무엇이 되고 싶어한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오늘도 너를 생각하며 가만히 너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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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김덕묵의 민속기행' 유튜브 채널 소개민속학자 '김덕묵의 민속기행' 유튜브 채널 소개하고자 11일 외국어대학에서 한국학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김덕묵 교수를 캠퍼스에서 만났다. '김덕묵의 민속기행' 채널은 민속이라는 시각으로 현상을 재해석하고, 우리에게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제시해 주는 신선한 채널이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되는 영상이 기다려졌다. 김교수는 민속기록학회 설립부터 총무이사를 맡고 있고, 민속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문헌조사를 정리하다가 문득 영상으로 민속기록을 남겨 보자는 의미로 시작이 되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안타까운 것이 고향 문경에서 하나 둘 늘어나는 폐가가 이제는 철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주인을 잃고 버려진 녹슨 철대문 문양부터 주춧돌, 멍석발이, 절구통, , 창틀, 바구니, 고무신까지 .....시간이 더 지나면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는 로컬 민속을 영상 텍스트로 남겨 보자는 마음으로 채널을 열게 되었다고 전한다. Q. 안녕하세요. 교수님이 운영하시는 '김덕묵의 민속기행' 유튜브 채널 목적은 무엇인지요. A.첫째 민속 현장 답사를 통해 민속학의 시각으로 우리 한민족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학술적인 해석보다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민속의 현장을 찾아가서 그 의미를 알아보는 데 있다. 텍스트 밖의 현장은 또 하나의 교과서이다. 따라서 '김덕묵의 민속기행'에서는 민속의 현장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의미를 밝혀내어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주는 데 목적이 있다. Q. 교수님, 전공은 A. 석사, 박사 논문은 '황해도 무속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나의 민속학 관심 분야는 넓은 편이다. 민속 전 분야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민속신앙을 중심으로 ... Q.처음 시작한 날 A. 2021년 10월에 ‘민중들의 사랑을 받은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라는 영상을 처음 올리면서 유튜브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39편의 영상을 올렸다. Q. 국내외 답사를 하셨는데, 다녀오고 다루었던 주제는 무엇인가요. A.그동안 서울,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민구, 민속신앙, 민속놀이, 옛집, 무덤, 마을, 마을제, 유교제례 등을 다루었으며 해외로도 눈을 돌려 일본에서 민속놀이, 의례, 사찰 등을 다루었다. 김덕묵의 민속기행에서 그동안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대목은 '인왕산의 무속신앙'(2021년 10월), '개발로 사라지는 마을에 대해'(2021년 12월), '일본의 민속'(2022년 1월) 등이 있다. 전국 각지의 두지를 찾아다니면서 촬영했던 '두지 찾아 삼천리'(2022년 6월), '무덤은 사연을 싣고'(2022년 5월) 등이 있다. Q.앞으로의 계획 A.민속 전 분야에 대해서 다루어볼 계획이다. 또한 몽골, 중국 등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지역으로도 활동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저서 단독 1.『민속기록학과 지역공동체아카이브』, 민속원, 2016. 2.『전국의 기도터와 굿당』(전3권), 한국민속기록보존소, 2002. 3.『민속종교 연구방법론』, 한국민속기록보존소, 2011. 공저 1. 공저,『우리 인문학과 영상』, 푸른역사, 2002. 2. 공저, 『황해도굿의 이해』, 민속원, 2008. 3. 공저, 『샤머니즘의 사상』, 민속원, 2012. 4. 공저, 『샤머니즘의 윤리사상과 상징』, 민속원, 2014. 5. 공저, 『광명사람들의 삶과 놀이, 문화』, 광명문화원, 2016. 6. 공저, 『아카이브 콘텐츠 아카이빙』, HUNE, 2017. 학위논문 1.「황해도 진오귀굿 연구」, 한국학대학원 석사논문, 2000. 2.「황해도굿의 무속지적 연구」,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09 논문 :6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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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 ‘제7회 전통문화학교’서울 은평구(구청장 김미경)와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관장 양종승)에서는 ‘제7회 전통문화학교’를 4월 19일부터 5월 11일까지 4주간(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14시~16시) 8회 운영한다고 밝혔다. ‘금성당(錦城堂)’은 국가민속문화재이며, 이곳에 국내 최초의 샤머니즘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제7회 전통문화학교’가 개최되며, 주제는 전통문화와 부적, 연희, 국악, 상장례, 목가구, 민화이다. 제1강 4월 19일(수) 양종승 - 샤머니즘박물관장 ‘전통문화와 부적 신앙’ 제2강 4월 20일(목) 김삼대자 - 공예학자 ‘한국의 목가구 농(籠)’ 제3강 4월 26일(수) 동선본 - 함남무형문화재 퉁소 예능보유자 ‘함경도의 민속문화’ 제4강 4월 27일(목) 이문주 - 황해도무형문화재 놀량 사거리 보유자 ‘서도소리와 효 문화’ 제5강 5월 3일(수) 정종수 - 민속학자 ‘유교식 상장례와 국장’ 제6강 5월 4일(목) 윤광봉 - 일본 히로시마대학교 명예교수 ‘불교 민속과 연희예술’ 제7강 5월 10일(수) 서인화 - 서울시문화재위원 ‘조선시대 음악책’ 제8강 5월 11일(목) 윤열수 - 가회민화박물관장 ‘민화를 읽는 법’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즈넉한 금성당·샤머니즘 사랑방에서 전통문화계, 민속학계, 국악계 강사들의 품격있는 강의를 통해 전통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참여는 남녀노소 누구나 가능하다. 접수는 오는 4월 3일부터 18일까지이며, 신청서를 이메일(jinsugo@ep.go.kr)로 제출하거나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 학예실로 방문 접수하면 된다. 회차당 선착순 25명을 모집하며, 자세한 내용은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 학예실(02-389-6522)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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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잃어버린 도깨비, 항간에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한다. 도깨비를 몰아낸 이들은 누구인가? 어두컴컴한 밤에만 출몰하던 도깨비들이 밤을 낮처럼 쓰는 전깃불에 밀려 산으로 바다로 도망 다니다 종내는 사라지고 말았다. 탄소문명이 도시 밖으로 몰아낸 것들이 어찌 도깨비뿐이겠는가. 밤이면 밤마다 마을이면 마을마다 도깨비들과 함께 살았던 우리들에게 이 상실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밤도 없고 낮도 없으니 만물이 소생하는 아침도 없고 만물이 죽는 저녁도 없다.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니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모호해지는 것 같다. 여러 나라들 중 자살률 일등한지가 십 수 년이 넘었고 고독사율마저 그 상위를 점하려 한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는 거대한 공룡처럼 웅크리고 앉아 도대체 도깨비들의 출몰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이 문명의 공룡들은 들과 늪을 메우고 야산과 숲을 깎아 빌딩들을 세우고 길을 냈다. 디지털문명을 앞세워 광선과 광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단축하니 마을의 안과 밖이 또한 사라져 버렸다. 이 공룡이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끝이 어딘지 흐리멍덩한 내가 알 길이 없다. 선과 악을 명료하게 분별한다는 이들만이 도심을 배회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땔나무꾼들은 어디 낄 자리가 없다. 나는 이 문명의 끝이 두렵다. 단지 소망할 뿐이다. 그저 도깨비처럼 다소 멍청하고 혹은 익살맞고 때로는 엉뚱하게 서있고 싶은 소망,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그저 마을과 숲, 이것과 저것의 경계에 서 있는 먹빛의 존재 말이다. 왕도깨비, 그 많던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자 없던 구술시대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도깨비 이야기가 정보전달의 전부였다. 문자 있던 시대에도 문자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은 입에서 입으로만 도깨비를 이야기했다. 어느 시기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각과 도상과 부조들의 형상이 도깨비의 일부 기능을 대신했다. 하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서 접하는 도깨비가 우리 문화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점, 큰 이견을 내기 어렵다. 문자가 생기고 문자를 독점하는 지배세력들이 각종 도상과 문양으로 도깨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더러는 이데올로기를 얹고 더러는 지배집단의 욕망들을 뒤집어씌워 사람살이에 대한 해석을 가하거나 올가미를 씌워 구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숲과 늪과 도랑과 둠벙들, 바위와 돌과 나무와 더러의 인공물들에 투사했던 도깨비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념들이 쉽게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랴야마지준이 기록한 '조선의 귀신'이나 초기 민속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도깨비라는 맥락으로 모을 수 있는 이름들이 수백 개, 아니지 천여 개를 웃돈다.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청각 중심의 도깨비들이었다. 상상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도깨비들이 되었거나 엉뚱한 장소에서 탄생했던 존재들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의 오니가 막중한 영향을 끼쳤다. 불교적으로 도덕적 징치나 공간 경계의 문지기를 맡았던 관념들이자 형상들이었지 않나. 사실은 대부분 형상 없던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나타나거나 도깨비감투를 쓰고 나타나기도 하고 큰 혹을 달고 나타나기도 했다.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렸느니 하나 달렸느니 다투기도 하고 외다리 독각귀였던 도깨비들이 멀쩡한 두 다리로 달리기를 하는 등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면으로 크게 변화되었다. 한국 민화의 중시조라는 조자용은 귀면와에서 장승까지 유사 형상들을 모두 포섭해버렸다. 일본의 오니에 대해 한국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여성적인 귀신에 대해 남성성으로서의 도깨비가 강조되며 민족이나 나라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왕도깨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청각 중심의 도깨비 이미저리가 시각 중심으로 급변하게 되는 시대를 마치 한 계절의 바람처럼 그렇게 지나왔다. 경계의 스토리텔러, 호모나랜스들을 기다리며 한동안 나는 의심했다. 그 많던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던 것일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확인했다. 청각의 시대, 시각의 시대를 거쳐 이제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구별 너머 어딘가, 아니면 마을 숲 바위틈 어딘가, 아니면 지금은 없어져버린 마을 둠벙과 늪과 개펄 어딘가에서 발신해오는 도깨비들의 수런거림을. 거대한 산악의 신들과 장대한 바다의 신격들 틈바구니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이지대에 출몰했던 마치 우리네 민중 같은 도깨비들 말이다. 거기에는 도깨비들에게 투사했던 우리들의 추억과 회상과 욕망들, 누군가에게 전가했던 책임과 의무들, 아! 무엇보다 지극하고 그윽한 사랑들이 겹겹이 포개져있다. 누구에 대한 사랑인지는 보고 듣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 전혀 엉뚱한 결론을 만들어내는 녀석이 도깨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웅장함과 비장함에 가려 존재감을 잃어버렸던 하찮은 것들에 주목할 뿐이다. 쓰이지 않은 행간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읽는 이유라고나 할까. 이제 보이는가. 저기 저만치 북장구 들쳐 매고 낄낄대며 걸어오고 있는 이들. 찢어진 청바지에 히피복색을 두른 저 도깨비들. 탄소문명의 세례를 듬뿍 받은 도심에서 밀려나 개펄과 숲과 늪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저들 말이다. 이들은 남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들이고, 불과 기둥이라기보다는 물과 하찮은 나무 조각들이다. 서양이라기보다는 동양이고 중국이나 일본이라기보다는 한국이며 도심보다는 시골마을이고 가진자들 보다는 못가진자들 아, 무엇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먹빛의 사람들이다. 나는 기다린다. 끊임없이 스토리텔링하는 호모나랜스(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폰깨비,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간 도깨비 더 획기적인 변화는 새천년을 시작하던 벽두 월드컵의 붉은악마와 올림픽과 촛불집회 등을 겪으며 우후죽순 나타났던 도깨비들이다. 그 많던 이미지들이 치우라는 캐릭터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민족주의니, 국수주의니 해명한다고 해서 도깨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치우가 도깨비가 아니라고 외친들 도도한 영상시대의 이미지 중심 시선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해서는 앞서거니 뒷 서거니 도깨비들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청각의 시대, 혹은 다중시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이 또한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스마트폰을 '폰깨비'라 부르고자 한다.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낄낄대거나 겉으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들으며 조잘거리는 것, 이것이 전통적인 도깨비들의 특징 말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도깨비들은 그동안 얼마나 웅얼거리거나 조잘거리고 싶었을까? 말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는, 말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호모나랜스들임에 틀림없다. 몸과 분리된 혼들이 밤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공포를 이겨내며, 혼잣말하는 미친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살던 그 풍경들이 제4차산업시대라는 세기의 벽두에 다시 소환되고 있는 셈이다. 폰깨비, 이 용어는 근자에 트렌드가 된 '인싸용어(줄임말)'이기도 해서, 가상세계의 캐릭터들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전깃불을 들여와 몰아냈던 도깨비들이 사뭇 다른 형국으로 소환되는, 이것은 분명히 또 하나의 도깨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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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민속신앙은 옛적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신앙이다.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등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믿음의 행위로서 단군신앙, 미륵신앙, 조상신‧성주신‧조왕신 등 가정신앙과 서낭당‧산신당‧장승‧솟대‧동제(洞祭) 등 마을신앙, 점복신앙, 풍수신앙, 무속신앙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그중 무속신앙(巫俗信仰)은 신령(神靈)이 실재한다고 믿고 신력(神力)을 얻은 무당(巫堂)을 주축으로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종교적 토속신앙이다. 무속신앙의 일종인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은 규모가 큰 마을굿으로 우리의 소중한 무형문화자산이므로 널리 알리고 잘 보존, 전승했으면 한다. ‘오얏골 별신굿’은 10년 주기로 개최하는 별신굿으로 우리 문경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독특한 민속문화이며 굿을 하는 날에는 인근 마을 주민은 물론 먼 곳 외지인들까지 모여들어 큰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별신굿은 내륙지역보다는 해안지역에서 많이 열린다. 내륙지역에는 현재 소수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문경지역에는 호계 부곡리 ‘오얏골 별신굿’을 비롯하여 산북면 ‘김용리 별신굿’, ‘석봉리 별신굿과 샛골 별신굿’, ‘내화리 화장별신제’, 동로면 적성리 ‘벌재 큰마 별신굿’ 등에서 별신굿을 지냈으나 지금은 호계 ‘오얏골 별신굿’만이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다.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은 호계면 부곡리 오얏골에서 약 300년 전부터 ‘별신굿’이 열려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나 1995년 이후 고령화된 농촌의 현실과 굿판을 열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민속을 지키고 전통을 되살리려는 마을주민들의 간절한 뜻과 문경시의 지원으로 그 맥을 잇게 되었다고 안도했으나 2007년 3월 3일∼4일에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정월 대보름 행사로 개최되었다. 2년 뒤인 2009년 2월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호계 부곡 용당(암굴)에서‘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 재현행사’가 열렸다. 마을 어르신이 말씀을 녹취한 것을 보면‘1959년과 1968년에는 점촌 '달판네' 무당이 왔고, 1977년에는 안동 '애숭이' 무당이 왔다. 그러고 나서 1986년에는 예천의 무당이 했고, 1995년의 별신굿에서는 상주의 무당이 왔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10년 주가로 별신굿을 연 것을 알 수 있는데 2009년 이후에는 개최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2007년 12년 만에 개최된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이 연행(演行)할 때 필자가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되돌아보면,그날 내륙지방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별신굿 취재를 위해 각 매스컴은 물론 민속학자, 사진작가, 외지인 등 500여 명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뤘는데 특히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10년에 한 번 열리는 별신굿인데 내 생전(生前)에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꼭 봐야겠다.' 하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기도 하였다. 오얏골 별신굿에 대한 유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두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중 암굴(용당)에서 흘러나오는 용천수가 가뭄에 나오지 않자, 이 속에 살고 있는 용이 심술을 부려 샘을 막고 있다고 하여 별신굿을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용천수는 마을의 식수원이면서 농업용수원으로 주민들의 삶과 생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재앙을 막기 위한 굿이라 본다. 호계 오얏리 별신굿은 경북 내륙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별신굿으로 정체성 있는 전통문화로 계승함은 물론 지역민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열었다. 별신굿을 준비할 때 칠팔십 대 어르신을 포함하여 남녀노소 100여 명의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부정을 막는다고 하여 왼쪽으로 꼰 새끼로 국내 최대 규모인 길이가 300m의 금줄을 친다. 별신굿 당일은 무당 입동(入洞), 상당‧하당‧용당의 부정굿, 용떡(제물) 옮기기, 치성굿(소지올리기), 선왕굿, 용당굿, 거리굿 등을 열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하고 독특한 별신굿을 선보였다. 별신굿의 전 과정을 지면 관계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별신굿 첫 행사로 ‘무당 입동’을 보면, 무당은 정월 열나흘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에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에서는 미리 농악대를 꾸려 무당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을회관 앞에서 풍물을 울리고는 무당을 맞이하러 간다. 무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뒤, 마을 사람이 "술렁수"하고 외치면 무당이 "예이"라고 대답한다. 이때 예포를 울리고 한바탕 놀음판을 벌인다. 별신굿은 보통 5년 또는 10년에 한 번 행해지며 ‘특별히 신에게 즐거움을 고하는 굿’이란 뜻에서 붙여진 특별 기원 축제로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하는 점에서 동제(洞祭)와 유사하나, 동제는 동민 중에서 뽑은 제관이 제사를 주관하지만, 별신제(굿)는 무당이 주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글을 마치면서 아주 특별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을 하회마을 ‘안동 선유 줄불놀이’처럼 관광 상품화하여 매년 개최하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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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치 시대의 한국 지역학'지역자치의 시대, 작은 고을 무안에서 ‘지역학’을 묻다 무안이란 지명의 어원은 물아래 혹은 물안이라고 한다. 물아래 혹은 물안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영산강과 서해의 물과 바다를 뜻한다. 무안을 물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해양의 시대, 섬의 시대, 더욱이 지역분권과 자치의 시대, 지역학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 무안에서 지역학을 발신한다. 예사롭지 않다.이 책은 2021년과 2022년 두 차례 열린 지역학 학술회의의 결과를 합치고, 집필했던 관련 논고를 모아 펴낸 것이다. 무안문화원이 기획하고, 이윤선⦁이해준⦁윤명철⦁나승만⦁이창식⦁강진갑⦁송화섭⦁허남춘⦁천득염⦁강신겸⦁박상일⦁김희태⦁윤여정 등 다수의 학자가 참여했다. 무안향토문화총서 제12호로 발간됐다.출간을 주도한 이윤선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에서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해륙의 첫 관문이 바로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며 남도지역이고 무안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반도를 해만으로 바꾸어 읽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골을 따라 시선을 바꾸어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리라. 그런 점에서 작은 고을 무안에서 전국으로 발신하는 이 책은 의미가 크다. 서울 어느 권위 있는 기관이 아닌 무안문화원에서 한국의 지역학이란 책을 발간한 것이, 지역자치와 문화분권의 의미에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무안을 각자의 지역으로 바꾸어 보면 그 의미의 무게에 더욱 공감할 것으로 본다. 저자 이윤선 민속학자는 (사)서남해안포럼이사장으로서, 무안지역학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심포지움과 함께 이 책을 기획했다. 저서로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 『남도를 품은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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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 (조춘영)통일의 그날에 벌일 ‘나라풍물굿’을 할 날을 그리며 2019년 3월 1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역 광장에 이르는 세종대로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수백 개의 풍물패, 수만 명의 풍물꾼들이 울리는 ‘만북’(만 개의 북) 소리가 웅장하고 신명나게 울려 퍼졌다. ‘만북 울림!’이다. 이날 전국의 풍물꾼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풍물굿판에 이어 <만북으로 열어 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을 선포, 채택하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새로운 100년, 생명의 새 세상’으로 향해 가는 원년(元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모인 이들 모두가 굿쟁이이고 보면, 이날의 선언문은 단순한 말모이가 아니라, 신력(神力)을 갖춘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풍물굿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이 된 것이다. 그에 앞서 2014년에는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 정책과 제도가 생긴 이래 국가무형문화재와 지방무형문화재에 40여 개의 풍물 단체가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와 1950~1960년대 근대화 지상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농악은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를 지나 절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이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여성농악단과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여 80년대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대학풍물굿 운동을 통해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고, 사물놀이의 세계화를 거쳐, 당당히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풍물굿 문화와 21세기의 풍물굿 농악/풍물굿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기층 오락, 예술이다. 전통적으로 민간에서는 세시풍속으로 일 년 중의 각종 절기에 맞춰 다양한 쓰임새와 목적으로 농악/풍물굿을 놀았다. 농악/풍물굿은 그 양식 안에 음악, 무용, 연극, 놀이, 종교, 군사, 교육, 사회, 문화 등의 요소가 망라되어 총체문화를 이룬다. 풍물굿은 바로 민중 자체요, 민중생활의 요체이며 한민족 시민대중문화의 원천이다. 온갖 신과 만나게 해 주는 매체다. 굿은 신이다. 신명이다. 신탁이다. 일상 속에서 성스런 것들을 끌어들여 정성으로 놀리고 참 마음으로 풀어내어 현실 가운데 어려움을 깨나가는 도구다. 전국의 마을 당산 앞에서, 중앙마당에서, 집집 처소에서 장구, 징, 쇠, 소고들 풍물소리가 끊긴 적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도 풍물굿은 죽지 않고 새로이 재창조되어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풍물굿은 한편으로 급격하게 탈-맥락, 재-맥락화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촛불시민혁명 과정에서 풍물굿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다른 흐름으로는 10여 개 대학에 전통연희과에서 전공자들이 풍물굿을 공부하고 졸업한다. 무형문화재 지정을 준비하고 있는 지역 풍물굿, 토박이 풍물굿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풍물굿은 이 시대 그리고 21세기를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상쇠, 풍물굿의 지휘자이자 예술가이자 살림꾼! 이러한 풍물굿의 저력과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전국에 얼마나 많은 상쇠가 있을까? 굿문화와 풍물굿이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가? 어찌하여 그러한가 직접 묻고 싶었다. 어떠한 실천들이 있었고, 어떠한 지향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풍물굿은 어디로 가는 있는지 답을 듣고 싶었다. 답은 현장에 있다. 『하늘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필자가 오늘의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풍물굿문화를 이어줄 다리 공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고, 입덕을 베풀어[인터뷰] 일구어낸 소중한 공덕의 탑이다. 저자는 세계, 전국, 지역, 지방, 마을을 누비며 풍물굿의 현장을 섭렵하였다. 저자 조춘영은 풍물굿 연구자, 담론가로서 이 시대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풍물굿쟁이의 소리를 담아야 할 사명감에 넘치지만, 그것인 힘겨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노동, 두레적 품팔이라는 생각이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풍물굿의 굿쟁이(지휘자)이자 지도자이며, 살림꾼(일꾼)이자 스승이고, (풍물) 사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상쇠에 주목하였다. 무엇보다 상쇠는 시대를 읽고 예술문화를 말하며 지역과 생명공생체를 이끌어가야 할 감수성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다. 여전히 대다수 민속학자나 풍물굿 연구자들이 전통문화라는 범주 속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풍물굿 연구의 결과물은 무형문화재 정책이나 제도에 포함된 일부 단체들 혹은 전통마을풍물굿으로 한정된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에서 새 길을 내고 이 시대 담론, 시대 의식이라는 지평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그래서 20세기 풍물굿이 아니라 ‘21세기 풍물굿’, 즉 풍물굿의 현재와 미래를 상쇠들과 더불어 조망하고자 한다. ‘21세기 상쇠론’ 전과 후 이것이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업이 아니다. 2016~2017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풍물굿쟁이들은 매주 풍물굿판을 벌였고, 저자는 이를 동영상과 면담 구술집으로 기록했다. 1차 결과물로 《새나라로 가는 길굿 - 촛불시민혁명 풍물굿에 대한 기록과 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박근혜국정농단 촛불집회는 이미 과거지만 촛불시민혁명은 과거형,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시대의식의 연장에서 본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은 기획되었다. 이제 풍물굿쟁이도 당당하게, 이제 풍물굿이라는 이름도 떳떳하게, 이제 무시와 멸시와 천시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풍물굿판을 벌이고자 하는 염원도 담겨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현재형이듯 풍물굿도 현재형이다. 과거, 역사, 전통이라는 옛것 프레임으로 한정할 수 없다. 왜? 전국의 수많은 풍물굿쟁이와 광장, 마당에서 벌인 풍물굿판이,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새나라로 가는 길굿이, 2019년 3.1 100주년 기념 만북울림 나라굿이 증명하였다. 그래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이다. (풍물굿을 농악이라는 20세기 무형문화재 제도 속 국가주의에 예속된 종목으로 잡아놓을 수 없어서 21세기 미래 시점을 펼쳐내고자 했다.) ‘21세기 상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전국 30여 명의 상쇠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남녀노소, 지역과 영역을 고려하여 25명에서 그쳤다(그중 10명을 이번 권1에 수록하였다. 나머지는 곧 나오게 될 다음 책에 수록된다). 풍물굿이라는 연구 주제로는 최초로 전국 범위에서 다양한 (풍물적) 배경을 가진 상쇠들을 만났다. 면담을 하기 전에 이미 수년 전부터 교류를 하였음은 물론이고, 실제 면담에 들어가서도 두 번의 밤을 새고서야 면담 완결된 상쇠도 있고, 면담 후 이어진 이틀간 뒷풀이를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비오는 날 강화 들판을 보며 꽹매기 소리도 주고받고, 보존회 사무실에서 수시로 결재를 주고받는 가운데 진행된 수고로운 면담도 있었다. 저자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간 겪어온 고난과 고민의 고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 일은 다반사요, 같은 동지로서 굿판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에 공감의 눈시울이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이 작업을 시작했을까? 꼭 했었어야만 했나?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상쇠를 만날 기대와 설렘에 충분히 행복했으니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책을 읽는 당신, 굿쟁이들의 일이라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통일의 그날에 남과 북의 모든 풍물패가 모드들어 휴전선을 넘나들며, 지난 역사의 원망과 한숨을 모두 씻어내며, 신명으로 새 나라 건설을 축원하게 될 ’나라풍물굿’을 벌일 것을 기약하고 있다. 권1 말미에 논문 '21세기 풍물굿 현장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실어 풍물굿 현장의 다양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권2(2020년 하반기 출간 예정)에서는 종합적인 차원에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을 제시할 예정이다. 저자 조춘영 박사는 풍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이며, 현자에서의 풍물 상쇠이기도 하다. 전국의 풍물 현장을 두루 답사하며, 전문 풍물패 또는 마을공동체 풍물패의 상쇠들을 만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의 풍물굿 문화의 변천, 성장, 진화 과정을 들어보고, 특히 상쇠를 중심으로 하여 풍물굿과 상쇠의 예술가적 특성, 문화적/장르적 미래, 한국사회에서 풍물의 의의와 전망 등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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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1/694쪽’의 아리랑(상)삼목 作 1984년 초, 삼목은 경기도의 한 사립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86아시안 게임 개최가 발표되면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담론 속에서 아리랑, 김치, 태권도, 호랑이 같은 민족 상징에 대한 의미화 논의가 문화계 전반에 화두가 되어 있을 때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목도 열열하게 아리랑 자료 수집과 자라매김에 매진하고 있었다. 삼목이 새 학기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 출석부를 위치시키고 돌아설 즈음, 교무주임이 전화 받으러는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아 김씨, 나 장승백이 김이요. 오늘 서울에 오나요? 아리랑 자료가 나왔어요. 어, 비싸서 권하기는 좀 뭐 한데, 이게 만주국에서 나온 귀한 책이에요. 오늘을 넘기면 돌려주어야 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거요. 가격은~” 삼목은 어차피 토요일이라 서울 집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부리나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대지극장 앞에서 내려 다시 노량진행 버스를 타고 진오서적(당시 고가의 문학서적 위주로 판매하던 고서점) 근처 다방에서 여차저차한 사정을 들어 월급 날 값기로 하고 양도를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여러 번 망설이고, 많은 생각 끝에 한달 원급에 반을 더한 가격으로 샀다. 문헌 소재 ‘아리랑’은 거의 부속적으로 존재한다. 표제標題가 ‘아리랑’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제가 다른 컨텐츠 속의 하나로 끼어있거나 일부로 언급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끼어있는 경우는 잡지 속에 수필이나 시나 단편 소설 한편이 들어있는 경우이고, 일부로 언급 되는 경우는 어떤 이의 수필 속에, 회고기 속에 에피소드로, 또 아니면 ’아리랑을 불렀다‘ 정도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입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전체 값을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억울한 여건을 감수하고 값을 치르는 것이다. 삼목이 구입한 책 중에 거의가 이런 경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값을 치루고 산 것이 바로 ‘장승백이 김선생’(고서 중개인 중에는 매우 신사다운 분으로 일본어 번역에 능통한 분, 1990년대 말 작고)에게서 구입한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이다. 1943(강덕10)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가 발행한 책이다. 이 출판사는 당시 만주국의 지원으로 발행 되던 ‘만선일보’ 필진들과 만주국 조선인 문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다. 시기상으로 한반도에서나 만주에서 낸 책으로는 순 한글로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사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목차 첫머리는 대일본제국총리대신 장경혜, 중화민국정부주석 왕정위, 前조선총독 남차,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 사회 지도자 윤치호의 서문을 필두로 한 148항목의 방대한 책이다. 내용에서는 오세창의 기념 휘호를 비롯하여 역사학자 이병도, 만주건국대교수 최남선, 법학자 유진오, 작가 이광수, 민속학자 고유섭, 시인 이은상, 음악학자 함화진, 기자 차상찬, 신학자 채필근, 시인 윤해영 등의 그과 작품을 수록한 총 694면, 오늘날의 A3 싸이즈 대형 판형 책이다. 이런 책에 ‘아리랑’이 들어있었다. 속된 말로 148항목 중 1편의 시속에, 694면 중 단 한 면에, 끝에서 두 번째 쪽에서, 그것도 딸랑 ‘14줄 중에 아-리-랑’ 3자가 들어있을 뿐이다. 시 ‘樂土滿洲’, 윤해영尹海榮 작품이다. 낙토만주樂土滿洲 一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 광이 두르자 三끝없는 地平線에 五穀金波 굽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先驅者 한 千年 歲月後에 榮華萬歲 빛나리 제3절 2행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에서 ‘아리랑’이 나온다. "이렇게 작품의 표제에서도 아니고 시행의 한 어휘로 나온다. 이것도 아리랑 자료로 취급할 수 있나? 또 가치가 있나? 윤해영은 어떤 사람인가?” 삼목이 이 책을 살 때 수 없이 머리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목은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군정청 발간 독도 자료 수록 잡지 창간호와 사운 이종학 선생과 맞바꾼 ‘解放歌謠’라는 노래책 속 윤해영 작사 ‘滿洲 아리랑’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윤해영이 ‘아리랑’을 일회적인 시어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1947년 발간된 ‘해방가요’의 ‘滿洲 아리랑’은 이렇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一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二 말발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三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윤해영 시, 김기진 작곡, 백년설(1915~1980) 노래로 태평레코드사에서 1941년 12월에 음반으로 나왔다. ‘나그네 설음’과 ‘번지없는 주막’으로 명성을 날린 백년설의 유명세로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서 ‘아리랑 만주’도 널리 불렸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두 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만주 봉천’, 삼목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두 분 있었다. 어린 시절 설 명절이 되면 두 분이 사촌들과 함께 설을 지내러 서울에서 왔다. 3일 정도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화로를 감싸고 듣던 대부분은 만주 봉천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평안도 남시(사촌 형 중에 ‘봉천’과 ‘남시’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데, 그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란다.)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 온 이야기다. 삼목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4촌 누이는 눈물을 훌쩍이며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삼목이 또랑한 기억으로 담고 있는 것은 "왜놈들에게 속아서 만주로 간 거지”라든가 "그때 만주 신경은 지금 서울보다 더 좋고말고”라든가, "만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일본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을거고, 설 쇠러 그 곳으로 왔을 것인데~ ”이다. ‘낙토만주’와 ‘만주 아리랑’, 두 작품의 여운이 묘했다. ‘속았다’와 ‘좋았다’로 읽혀지며 아리랑의 정서를 흔들었다. 이상한 이런 감정은 왜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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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성황신(城隍神)은 민속신앙에서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성황당(城隍堂)은 성황신을 모신 당(堂)으로 지역에 따라 서낭당, 서낭신이라 불린다. 국어사전에는 서낭당과 서낭신의 원말이 성황당, 성황신이라 한다. 통상적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라고 하지만, 일부 민속학자는 성황당은 마을 전체가 치성을 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마을 뒤편에 당집을 지어 신을 모시는 봉안처(奉安處)이고, 서낭당은 마을사람과 불특정 행인들이 소원을 비는 곳으로 고갯마루나 마을 어귀 또는 길섶에 돌무더기, 노거수(신목). 등을 신격화하거나 신이 머물러 있는 곳(거소, 居所)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필자도 해설이나 강의 시 오래전부터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귀신(鬼神) 중에는 불러들이는 귀신과 쫓아내는 귀신이 있는데 대체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은 원귀, 악귀, 수살귀(水殺鬼), 달걀귀신 등으로 귀(鬼)로 부르고. 잘 되게 하고 이롭게 하는 좋은 귀신은 성주신(城主神), 조왕신(竈王神), 성황신 등으로 신(神)이라고 부른다. 성황신은 횡액(橫厄)을 막아주고 사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당연히 좋은 신이다. 성황당은 지역, 장소, 형태, 성별, 노소 등에 따라 천황당ㆍ국사당, 골맥이, 할미당, 할배당, 각시서낭, 애기서낭, 배(船)서낭, 돌서낭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한 분만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녀 신을 함께 모시는 곳도 있다. 국사당(國師堂)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 도성의 수호신(守護神祠)으로 북악산과 남산에 신사(神祠)을 짓고 무신도(巫神圖)를 모셨으며 특히 남산 신사를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 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으나 후에는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금지됨에 따라 점차 무속화(巫俗化)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비는 민간 신앙으로 정착하여 일반 백성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경북 문경에는 역사가 오래된 옛길 문경새재 제 1관문 주흘관 성벽 뒤에 ‘문경새재 성황당’이 있다. 여기에 모셔져 있는 여신(女神)은 얼마나 영험한지 ‘나라를 구한 성황신’이다. 성황당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제 1관문의 축성과 비슷한 시기인 1700년경에 건립하고, 1844년 중수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성황당이다. 이곳은 주흘산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라고 하는데 큰 회화나무에 오색천이 둘려있고 항상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울고 있으며 당집 주변에는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어 더욱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 이게 무슨 말일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큰 공을 세운 최명길(1586~1647)과 문경새재 성황신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최명길이 소년 시절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중에 문경새재에 이르러 깊은 산속을 혼자 걷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진 뒤를 보니 웬 젊고 자색이 아리따운 여인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뒤 여인이 재빨리 최명길을 앞질러 가는데 뒤태 또한 아름다워 젊은 혈기에 여인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하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만 여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하자 최명길이 잡아주면서 동행하게 되었다. 길을 가면서 대화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 최명길은 호랑이와 산적이 많은 문경새재, 이 험한 길을 여인이 혼자 걷는다? 혹시나 내 간을 빼내 갈려는 천년 묵은 여우가 변한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 듯 스치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경계하자 이 여인이 눈치를 채고 방긋 웃으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오라 새재 성황신입니다”라고 하였다. 당황하였지만, "지금 어디를 가십니까” 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한양에 갔다 오던 길에 성황당에 걸려 있는 비단 치마를 보고 예쁜 자기 딸이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얼른 옷소매 속에 치마를 훔쳐 넣고 가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그 괘씸한 좌수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최명길은 그 말에 매우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어찌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며 조심스럽게 "죽이지는 말고 잘못에 대한 벌을 주거나 가져간 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두도록 하겠으니 노함을 거두시고 살려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명길은 급히 안동으로 가서 외숙에게 인사만 드리고 서둘러 그 좌수의 집을 물어 찾아가니 집안에서 곡소리가 크게 들리고 좌수의 딸이 영문도 모르게 급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좌수에게 제가 죽은 따님을 살려 보겠다고 말하고 딸이 있는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열고 안을 보니 문경새재에서 보았던 그 여인(성황신)이 누워있는 좌수 딸의 목을 막 누르고 있었다. 보기에는 죽은 것 같지만 아직은 영혼이 이승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최명길이 성황신에게 큰절을 올리고 부디 살려주기를 간청하니 "내 그대의 정성에 감탄하여 청을 들어 주겠소” 하며 이러이러한 일을 하도록 하였다. "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고 나와 성황신이 일러준 대로 좌수에게 말하길 "모월 모시에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비단 치마를 가져온 적이 있지요” 하고 물으니 좌수가 놀라며 "그건 저만 아는 일인데 어찌 그것을 아시오” 하며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소년 최명길은 의젓하게 위엄을 갖추고 "그것 때문에 성황신이 노하시어 딸을 죽이게 되었소. 백배사죄하고 당장 가져온 비단 치마를 불사르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제사 지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좌수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거짓말처럼 죽은 딸이 다시 회생하였다. 며칠을 쉬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성황신이 최명길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새재 입구에서 "이제 오십니까” 하며 웃으면서 맞으며 "후일 그대는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며 그때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큰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전쟁이 나면 절대 맞서 싸우지 말고 화친해야만, 종묘사직을 지키고 백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꼭 명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명길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에 정말로 문경새재 성황신의 예언대로 최명길은 과거에 급제하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점차 올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고, 병자호란을 당하였을 때 조정대신 모두가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데, 오로지 홀로 어려움을 감내하며 성황신의 계시를 따라 주화론(主和論)을 펴 국난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훗날 역사는 최명길의 화친(和親) 주장이 현명했고 결국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소년 시절 최명길과 문경새재 성황신과의 만남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쨌든 성황신의 예언과 계시가 나라를 구하게 된 것이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인 ‘문경새재 성황신’은 그 신통력이나 영험함이 특별하여 예전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장원급제를 바라고, 보부상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소원을 빌었으며 지금도 사시사철 전국의 많은 무속인은 물론이고 일반인 찾아오는 기도처가 되었다. 특히 신내림굿이나 기존 무속인들의 신통력이 떨어질 때는 기를 받아 이를 복원하기 위해 찾아온다. 시쳇말로 신통력의 업데이트, 기(氣)의 충전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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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논단, '산유화 단상(斷想) 3題'국중성(익산 향토사학자) 산유화 노래는 옛 백제시절 농민들이 불러온 농부가였다. 원래 백제의 풍토에서 발상한 국민적 얼이 담긴 민중의 소리요 그것은 그들만의 속성에서 나온 농민의 소리가 원형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 산유화였다 할 것이다. 오늘날 민속음악에서 ‘산유화’니 ‘메나리’니 하는 용어에 이론(異論)이 있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어원적 본의(本義)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산유화가는 백제의 농부가였다 산유화에 대하여는 가람 이 병기 선생이 제기한 한산세고 흡제고서(韓山世稿翕齊稿序)를 소개한 내용에 의하면 산유화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었다. "산유화라는 노래가 농가에서 불러져 세전(世傳)하였는데 이는 백제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부여에 그 내력을 아는 노인이 말하기를 의자왕 때 까지 산유화와 고란(皐蘭)의 두 노래가 있었는데 나라가 망한 후 산유화는 남고 고란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이 같이 전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부여의 고적 보존회에 백제의 산유화 노래가 보전되어 전한다 하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문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고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또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는 「한국민요사」에서 "부여지방에는 세전된 백제유가(遺歌)산유화가 있으며. 그 노래는 이양 할 때나 수확 시에 남녀 농가인 들이 모두 부른다.” 하였다. 이와 같이 산유화가는 농사철에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양주동 박사의 ‘고가연구’에서는 "산유화가는 옛 백제 유민(遺民)의 노래”라 하였는데. 백제 유민이라면 나라가 멸망한 후의 유이민들을 말함인데. 앞의 흡제고 서문에 의하면 산유화는 의자왕 이전에도 있었다. 함을 보아서는 백제가 멸망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산유화는 ‘여지승람’에도 옛 백제 시절에 불러온 노래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전승여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조 때 학자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선생이 답사차 호남 지방에 들어서니 온 들판의 푸른 논에서 산유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가 평소 그 지방의 수령과 교유관계가 있어 당도한 곳은 금마(익산)였다 한다. 그 날은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인지라 백성들이 전별의 정을 못 잊어 떠나는 행차를 둘러싸고 눈물바다를 이루는 정경을 보고 신 광수 선생은 ‘금마별가’라 하는 32수의 연작시를 남겼는데 그 중의 열여섯 번째가 ‘산유화가’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處處 山有花 곳곳에 산유화 가락 齊發翠和中 푸른 논에 일제히 퍼진다네 欣然謂農夫 흔연히 농부에 이르는 말 善哉勤用功 좋구나 부지런히 지었구나(국역 금마별가에서 인용) 이에서 미루어 볼 때 호남지방 에서는 산유화의 노래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 왔다는 실증적 사례라 보아진다. 그리고 앞에 부여의 보전 산유화에서 보듯이 산유화는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르는 노래였고. 신 광수 선생이 채록한 산유화 내용에서도 푸른 논에서 일하면서 산유화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벼가 푸르게 자란 물 논에서 논매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일면에서 보아도 산유화가는 모심고 논매는 일을 노래한 것이 산유화가라는 것임을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일반 사전에서도 정의하기를 논에서 모심고 김매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으니 산유화가는 곧 농요요 농부가임을 알 수 가있다. 이에 산유화에 관심을 두어 채록한 석북 선생의 학문과 위상을 참고하여 둔다. 이가원 박사는 그의 ‘한문학연구’에서 석북 신광수(1712~1775)는 성호 이익(1681 ~ 1763)보다 31년의 후배요 연암 박지원(1737~1805)보다는 25년의 선배로서 행시(行詩). 악부(樂府). 염체(艶體-詩體의 하나). 전기(傳記)등의 모든 학문적 방면에서 걸출한 대가였다고 한다. 석북의 작품은 앞서 개척하지 못한 영역에서 개척한 것은 악부였으며. 악부는 당시 사회상을 가장 잘 표현한 문학이라 하였는데. 이에서 그의 악부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한벽당 십이곡(寒碧當 十二曲)과 금마별가(金馬別歌)와 관서별곡(關西別曲)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별곡이 가장 이름 높은 대표작 이었다고 한다. 내용은 우리나라 승경지가 중국인의 호평과 국내 사대부들의 풍류가 이곳에 집중하면서도 중국과 같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은 이름 높은 시가(詩歌)로 강산을 빛내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시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북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지어진 것이 관서 별곡이라 한다. 이 관서 악부가운데 제15절에 일반시조 배장단(一般時調排長短)이라 하여 때 시자를 쓴 ‘시조’라는 용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를 시조(時調)라는 용례의 효시로 삼기도 한다. 또한 석북의 명성은 당대를 풍미하여 그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 하였다 한다. 석북의 행력은 60세에 연천 현감 기로과(耆老科) 장원 당상에 오르고. 우승지의 명을 제수 하였고. 그 뒤 영월부사를 거쳐 우승지로 여생을 마쳤다. 2. 농부가의 유래와 산유화가 앞장에서 산유화 노래는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농요가 언제부터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전하는 기록으로는 저 중국의 고 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열전 또는 진서 등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마한의 풍습은 해마다 5월이면 하종(夏種)을 마치고 제사를 지내고는 무리를 지어 술 먹고 노래와 춤을 추는데 밤낮없이 즐긴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뒤를 따라 땅을 밟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이 중국의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추수를 마치고도 그와 같이 한다.”(국사편찬위 중국정사 조선전 참조) 이에서 마한 이라면 백제의 전신이니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이전부터 농요를 즐기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일찍이 일본 땅에 노래와 춤을 전수한 나라였다 하며 그에 따른 악기도 중국 것이 아닌 백제의 악기로 가르쳤다 하며. 그 음악도 백제의 풍속무(風俗舞) 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문헌에는 없고 전해줘서 받았다는 일본의 기록에서 찾았다. 하니 한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일본에 전했다는 가무는 백제 지방의 풍속무(風俗舞)였다 하니 그것은 곧 전통적으로 이어온 농요풍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옛 백제의 풍속요가 후대로 이어 왔기에 근래에 까지도 시골 농촌에서는 동네마다 모심고 논매기 때가되면 두레를 지어 집단으로 풍장을 치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을 우리는 보아 왔다. 원래 민요와 농악은 그 유래가 전문 소리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일하면서 그 일을 흥겨롭게 노래로 표현한 것을 일러 농요라 하였고. 또한 민간에서 불렀다 해서 민요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농요란 농사꾼들이 농사일을 가사로 표현한 노래가 농요요, 민요란 농사일과 관계없는 것 까지 민간에서 불렀다 하여 총칭한 표현으로 구분된다. 원래부터 농요라 할 때 요(謠)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하여 무리 도(徒)자를 써서 도가(徒歌)라 하였고. 또한 도가의 원뜻은 진흙 논 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라 하여 진흙도(塗)자를 써서 도가(塗歌)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謠. 徒歌曰 塗歌-대동 운부군옥) 그리고 도가(塗歌)라 함은 옛날부터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곡조도 문서도 없이 부르는 노래라 하여 도가 무장곡(塗歌 無章曲 자전)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농요의 본의는 농부들이 물 논의 진흙 속 에서 모심고 김매는 일을 노래지어 부르는 소리를 농요 라하고, 이는 농부들의 노래라 하여 농부가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遙)의 본의는 농요이며 산유화요 ‘산유화’의 원형이라 보고자 한다. 3. 산유화는 산나리 꽃이었다 산유화(山有花)라는 말은 옛날부터 백제의 농부들이 불러온 노랫말 이었다 하는데. 그러면 산유화라는 말의 어원이 궁금하다.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전한다는 산유화 노래의 가사를 다시 보자. 산유화에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 뒤여 상사뒤 또 충청도 예산 지방에서 전하는 산유화 노래도 있다. 메나리 꽃아 메나리 꽃아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져서 농사일 필역하세 이 상의 두 편 가사에서 보면 산유화는 메나리꽃 이라는 답이 나와있다. 산(山)을 뫼(메)라 함은 백제시절부터 학습교제로 가르쳐온 천자문(千字文)에 산(山)은 뫼(메)로 해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어린이 학습교재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같은 내용으로 해석이 되어 있음을 보면 산을 메(뫼)로 불러진 것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와서도 메산(山)자로 읽혀오고 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나리를 메나리로 불러진 것은 당시부터 일상 그렇게 전승되어온 명칭이 ‘메나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의 두 산유화 노래가 나온 부여와 예산은 같은 옛 백제의 연고지라는 의미에서도 신빙성이 있다할 것이다. 그 산유화 가사에서 볼 때 옛 백제인들은 산(메) 나리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보아가며 농사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옛날부터 농사일중에 가장 중요한 농사는 논농사 였으므로 모심고 논매는 시기에 맞게 피고 지는 꽃이 산에서 피는 나리꽃(메나리)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노래가사를 조합하여 보면 이런 해석이 된다. 메나리 꽃이 필 때 모를 심고 메나리 꽃이 질 때 김을 매세 그래서 옛날부터 시골 농촌에서는 모심고 논매는 일이 끝나면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큰 행사가 끝나는(필역) 셈이었다. 나라에서도 논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교본인 「농사직설」에서도 5월에 모를 심고 6월에 김매기를 세 번해야 마감(필역)된다고 명시 하고 있다. 저와 같이 식물의 생태를 보고 농사시기를 삼아 온 것은 조선 후기에 나온 ‘산림경제’나 ‘임원십육지’ 에서도 동 지후 새 싹이 돋는 시기에 밭갈이를 하고, 찔레꽃이 피면 목화를 심고. 복사꽃이 질 때면 콩과 팥을 심으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이 산야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데 그 중에는 농사에 해당한 시기에 어떤 꽃이 필 때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꽃이 질 때는 무슨 일을 해 왔던 그 같이 자연의 생태를 보고 농사의 시기를 가늠해 왔던 관습을 농민들은 더 믿어 왔던 것이다. 그 같이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曆)이라 할가 거기에 인습이 되어온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보고자 한다. 농사란 인간이 먹어야 사는 생명업 임에도 농사는 무식하고 천한 백성들이나 하는 것이 농사였다. 그러다 보니 농사에 밝은 백성들은 글을 몰랐고. 글줄이나 아는 양반네들은 농사일 같은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풍조요 관행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풍습은 중세기 유럽에서도 있었던 지라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유행한 노랫말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은 밭갈이를 하고 하와는 길 삼을 하던 시절 도대체 그 누가 양반이었다 하더냐 이는 극히 원론적인 논리다. 너나없이 편한 데로 빠지면 식량 농사는 누가 할 것인가 누가해도 해야 할 농사인 것을.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나라에서는 권농정책은 있어왔어도 농민을 위한 농서는 없었다. 세종 연간에 와서야 우리 농서인 농사직설(1429)이 처음 나왔고. 이어서 농가집성이니 ‘세시찬요’(1655). ‘산림경제’(1715). ‘임원십육지’(1827)등 여러 농서가 나왔으나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한문체로 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중국에서 전래한 24절기력이 있었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자연에서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曆)을 더 믿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전국 어느 지방이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백제지방에서는 산에서 피고 지는 메(산)나리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논농사를 지어 왔기에 산(山)에 있는(有) 그 꽃(花)을 가리켜 산유화라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네 조상들은 산야에서 피고 지는 자연 현상을 본 받아 농사일을 해온 것은 아마도 먼 조상 때부터 이어왔던 생활방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농민들은 모심고 논매는 때를 기하여 피고 지는 메(山)나리 꽃에서 농사의 절기를 삼아 왔고 그 또한 산에 있는 꽃이라는 순박한 뜻에서 산유화라 하였으니 산유화는 곧 메나리였고. 메나리는 ‘산나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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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경기여고 경기인 민속학자 이소라‘농요(農謠)’ 연구로 알려진 민속학자 이소라 박사(79·사진)가 ‘자랑스러운 경기인’으로 뽑혔다.경기여고 총동창회인 경운회(회장 김영란)는 "15일 열린 개교 114주년 기념식에서 이박사를 제29회 자랑스러운 경기인으로 선정해 시상했다”고 17일 밝혔다.창원에서 태어나 부산여중과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법학과와 서울음대 작곡과(2년)에 학사 편입후, 국악대학원을 졸업한 이박사는 1983년 ‘논매기 소리’를 수집하는 등 전국에서 약 40년 동안 사라져가는 농요를 채집하고 연구 및 보존하는 데 힘썼다. 1985년 농요보존회를 결성하고 국내외에서 공연과 학술발표 및 답사를 수행하면서 한국 농요를 알려왔다. 2003년에는 민족음악연구소를 설립해 한국 농요와 해외 농요의 비교 연구 등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9년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주관 '아메리칸 인디언 구전 연구와 CD제작'에 참여한 업적은 한국의 음악학 수준을 세계에 알린 연구라고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북미 인디언의 민요를 찾아서’(2013년), ‘전남 지방 논매기 소리 총서’(2020년), ‘경기도 논매기 소리 음원집’(2022년) 등이 있다. 문화재청 전문위원과 공주대 지역개발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월산 학술상 (2014년) 옥관문화훈장 옥관장 (2017년)과 KBS국악대상 출판상(1992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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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거창서 아시아1인극제아시아1인극제가 이달 29~31일 거창에서 열린다. 아시아1인극협회(회장 한대수)는 유진규 예술감독을 새로 영입, 바뀐 '아시아1인극제·거창'을 새롭게 선보인다. 제의와 놀이가 함께하는 아시아 공연예술의 정체성을 이어받아 공연과 난장이 함께하는 축제 ‘난리버꾸통 *’이 펼쳐진다. 올해 연극제에는 인도, 일본, 방글라데시, 튀르키예, 타이 등 6개국 1인극 배우 25명이 출연한다. 이들은 연극제 기간 거창사건 희생자 박산합동묘역을 비롯해 거창문화원, 삼봉산 문화예술학교 등을 옮겨다니며 묘역, 극장, 마당, 폐교, 운동장 등 다변화하는 축제 공간에서 관객과 하나가 되는 공감을 공유한다. 본 공연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장르 1인극을 접할 수 있다. 개막 공연은 29일 거창문화원 상살미홀에서 열린다. 이날에는 개그맨 전유성 씨가 개막 개그를 선보인다. 이어 김선옥 진주·삼천포 12차 농악 명인 공연과 이은결 마술사가 펼치는 '환술과 퍼포밍 일루션의 만남'이 진행한다. 부대행사로 미니 솟대와 장승만들기, 도자기 빚기, 사주와 타로 체험행사도 열린다. 일본 최고의 판토마임 배우 시미즈 기요시와 기예인 센와카, 방글라데시의 록만 미르, 인도의 소마 다스, 태국의 농 하오, 투르키예의 셀베르 카부스, 무게수스 등 해외 초청 아티스트들도 함께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창작 판소리 임진택을 필두로 허창열, 이정훈, 이길영, 한받, 강해진등이 출연하고 30일 밤12시에는 거창군 고제면 삼봉산문화예술학교에서 황해도 굿 양정의 만신이 '대동굿 산천거리'로 난리버꾸통을 펼친다. 김현영 아시아1인극협회 기획팀장은 "아시아1인극제에서는 아시아 각국 지역색이 담긴 전통연희·퍼포먼스·무용극·음악극·마임·오브제인형극 등 다양한 장르 1인극을 만나볼 수 있다"며 "꿈과 희망, 열정적인 공연을 함께할 수 있는 축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1인극제는 올해로 32회째를 맞는다. 1988년 공주 아시아1인극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07년부터 거창에서 열고 있다. 연극제는 전통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고 주체적인 독창성으로 자생적 문화를 창출해 나가자는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 고 심우성 선생의 선언으로 시작됐다. 아시아1인극협회는 작년부터 ‘아시아1인극상’을 제정하여 아시아1인극의 발전과 부흥에 기여한 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2022년은 서연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한국 연희분야의 연구와 발전에 실천적 역할을 한 공로로 수상한다. 아시아 각국의 전통이 담긴 연희, 퍼포먼스, 마임, 무용극, 음악극, 연극, 오브제인형극, 마술, 저글링, 다원예술 등 동시대의 1인예술가들이 펼치는 색색의 무대가 코로나-19로 지난 몇 해간 힘들고 아팠을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의 난리버꾸통’을 선물할 것이다. 유진규 예술감독은 "거창은 작은 곳이다. 1인극인들도 작다. 그러나 우리는 작지만 빛나는 별을 꿈꾼다. 거창도 아시아의 1인극들도 작지만 별처럼 빛나기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축제에 앞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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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조선민속학회, 민속학90년' 24일 학술대회국립민속박물관과 한국민속학회가 24일 서울 종로구 민속박물관에서 '1932 조선민속학회, 민속학90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1부에서 1930년대 조선민속학회 활동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진다. ▲조선민속학회 연속과 단절(강정원·서울대) ▲한국 민속학사 방법론적 성찰(남근우·동국대) ▲'조선민속'과 '조선향토무용민요대회'로 본 조선민속학회(전경수·베트남 유이떤대) ▲1930년대 정인섭의 가면극 조사활동(허용호·경주대) 등의 발표가 진행된다.2부에서는 근대 민속학의 출발과 조선민속학회 연구성과를 논한다. ▲일제강점기 민속학자 비교: 손진태와 송석하를 예증삼아(김헌선·경기대) ▲조선민속학회 기관지를 통해 본 1세대 민속연구자들의 조선 민속 인식(유현주·컬처앤로드 문화유산활용연구소) ▲민속학과 박물관-특별전 '민속이란 삶이다' 중심으로(김형주·국립민속박물관) 등의 발표가 예정돼 있으며, 종합 토론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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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민속이란 삶이다' 특별전 개최국립민속박물관이 민속의 의미와 가치를 소개하는 '민속이란 삶이다' 특별전을 연다. 오는 27일부터 7월 5일까지 서울 세종로 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과거와 전통, 현재와 미래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삶을 펼쳐 보인다. 민속과 관련된 유물과 아카이브 자료 600여 점으로 민속이 근현대에 어떻게 학문으로 자리 잡고, 영역을 확장해 나갔는지 돌아본다. 필름 카메라,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 286 컴퓨터, PC통신 단말기 등도 전시장에 나온다. 한류 열풍으로 외국에서 화제를 모은 갓, 호미와 관련된 유물과 설명 자료도 볼 수 있다. 사진자료의 세부 내용은 전시실 내에 설치한 키오스크를 통해 자세히 확인 가능하다. 빅데이터 기반 머신러닝 기술을 접목시켜 흑백사진을 컬러화해 볼 수 있다. 100여 년 전의 할아버지·할머니의 희로애락을 보다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특별전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자이자 아키비스트(archivist)인 송석하가 수집·정리한 일제 강점기의 '민속 현지조사 사진카드' 원본 480여 장을 공개한다. 국내 전시 사상 일제 강점기 민속 사진 자료로는 최대 규모이다. 20세기 초 주목받기 시작한 민속학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관찰하고 조사하는 학문이다. 광복 이후 전통문화와 생활사의 중요성이 인식돼 1945년 11월8일 민속을 기반으로 하는 국립민족박물관이 창립됐다. 박물관은 1946년 4월25일 남산 기슭에서 개관했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문을 연 민족박물관이다. 이후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12월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의 분관으로 흡수되면서 사라졌다가, 한국민속관(1966)과 한국민속박물관(1975)을 거쳐 현 국립민속박물관(1992)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프랑스 여행가이자 민속학자였던 샤를 바라(1842~1893)가 쓴 '조선 기행'에서는 당시 조선을 모자의 나라로 표현했다. 흑립, 사모, 정자관 등 조선의 모자는 100여 년이 지나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드라마 '킹덤'을 통해 다시 주목받은 바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갓'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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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은 현재 우리 삶 다루는 것” ‘민속이란 삶이다’展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의 가치와 의미를 폭넓게 살펴보는 특별전 ‘민속이란 삶이다’를 7월 5일까지 선보인다.전시는 민속과 관련된 유물과 아카이브 자료 600여 점으로 민속이 근현대에 어떻게 학문으로 자리 잡고 영역을 확장해 나갔는지 돌아본다.김형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0세기 초반에 주목받기 시작한 민속학은 사람을 직접 만나 관찰하고 조사하는 인문학의 최전방에 있는 학문”이라며 "일제강점기에 몇몇 선각자들이 민속자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했고 그중 일부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우리 민속은 20세기 초에 학문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초기의 민속학자들은 민간신앙, 무속, 연희,놀이, 일생의례, 설화, 민요, 의식주, 생업 등 당시의 삶 전반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민속이란 그릇에 삶의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다. 전시에는 우리나라 최초 아키비스트(기록물 관리 전문가)이자 민속학자로 알려진 송석하(1904∼1948)가 정리한 일제강점기 민속 현지조사 사진카드 486장이 나왔다. 송석하는 약 90년 전 북청사자놀음과 봉산탈춤 등을 조사하고 카드별로 명칭, 지역, 날짜 등을 기록했다. 송석하 자료는 전시실에 설치된 키오스크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1932년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 민속학회인 ‘조선민속학회’가 발간한 학술지 ‘조선민속’, 국립민속박물관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국립민족박물관’ 편액도 공개된다. 1967년 정부가 마을신앙을 주제로 조사를 추진했을 때 작성된 ‘전국 부락제당 조사 설문지’와 설문 내용을 바탕으로 발간된 책 ‘한국의 마을제당’도 선보인다.1967년 건국 이래 최초・최대 규모의 민속조사, 2000년대 들어서야 빛봐 신앙은 한 민족이 가진 마음의 근원을 보여준다. 특히 부락제(部落祭), 동제(洞祭), 마을신앙 등으로 불리며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공동체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민속의 주요 관심사다. 1967년 당시 문교부 소속 문화재관리국은 건국 이후 최초로 마을신앙을 주제로 민속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민속학자의 주관으로 질문지가 만들어지고, 문교부 산하 전국의 각급 학교 교사들이 자신이 근무하고 있던 지역의 마을 신앙을 조사했다. 무려 6,000여 곳의 마을신앙과 관련 내용들이 수집되었다. ‘전국 부락제당 조사 설문지’는 그 조사의 결과물로 이번 특별전에서 원본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조사 결과물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의 마을제당' 시리즈로 소개된 바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현재도 전국 각지의 우리 삶의 면면을 기록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각종 사전류(세시풍속, 일생의례, 신앙 등) 및 다양한 보고서와 전시를 통해 민속을 국민들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민속학이 먼 옛날에만 관심을 두는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물품도 만나볼 수 있다. 필름 카메라,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 286 컴퓨터, PC통신 단말기 등이 전시장에 나온다. 한류 열풍으로 외국에서 화제를 모은 갓, 호미와 관련된 유물과 설명 자료도 볼 수 있다.김 연구사는 "일상 속 물건들은 모두 민속”이라며 "특별전을 통해 민속이 현재 우리의 삶을 다루는 것임을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는 과거와 전통, 현재와 미래를 사는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국립민속박물관의 시선으로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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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원 22일 토요상설 ‘국악이 좋다’국립남도국악원은 22일 오후 5시 토요상설 ‘국악이 좋다’ 공연으로 부처님 탄생일을 기념한 다양한 불교 음악, 무용 등을 중심으로 선보일 예정이다.이번 국립남도국악원 국악연주단 ‘산은 山 물은 물’ 공연에서는 개인놀음의 진수 ‘판굿’, 조선후기 대표적인 풍류음악 ‘영산회상’, 효의 대표적인 판소리 ‘심청가 중 공양미 삼백 석 시주하는 대목’, 석가탄신일을 맞아 사찰 승려들의 대표적인 춤과 예불을 중심으로 구성한 ‘승무’, ‘도량석’, ‘바라춤’, 국가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남도잡가 ‘보렴’까지 다채로운 공연을 준비 하고 있다.특히 이번 공연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국악원 연주단과 진도 구암사 현문스님의 합동 공연이다. 불교 현장에서 불리는 염불 소리와 전통음악의 만남도 기대되지만 지역의 문화·종교를 아우르는 공연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또한 민속학자 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이 공연해설을 맡아 불교음악과 우리 문화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전달해 관객들이 공연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도움을 줄 예정이다.토요상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객석 거리두기 운영을 위해 사전 예약으로 선착순 130명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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