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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논단, '산유화 단상(斷想) 3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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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논단, '산유화 단상(斷想) 3題'

산유화가는 백제의 農夫歌였다
농부가의 유래와 산유화가
산유화는 ‘산 나리꽃’ 이었다

  • 특집부
  • 등록 2022.10.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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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중성(익산 향토사학자)


산유화 노래는 옛 백제시절 농민들이 불러온 농부가였다. 원래 백제의 풍토에서 발상한 국민적 얼이 담긴 민중의 소리요 그것은 그들만의 속성에서 나온 농민의 소리가 원형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 산유화였다 할 것이다. 오늘날 민속음악에서 산유화메나리니 하는 용어에 이론(異論)이 있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어원적 본의(本義)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산유화가는 백제의 농부가였다


산유화에 대하여는 가람 이 병기 선생이 제기한 한산세고 흡제고서(韓山世稿翕齊稿序)를 소개한 내용에 의하면 산유화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었다.

 

"산유화라는 노래가 농가에서 불러져 세전(世傳)하였는데 이는 백제시절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부여에 그 내력을 아는 노인이 말하기를 의자왕 때 까지 산유화와 고란(皐蘭)의 두 노래가 있었는데 나라가 망한 후 산유화는 남고 고란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이 같이 전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부여의 고적 보존회에 백제의 산유화 노래가 보전되어 전한다 하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문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고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또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는 한국민요사에서 "부여지방에는 세전된 백제유가(遺歌)산유화가 있으며. 그 노래는 이양 할 때나 수확 시에 남녀 농가인 들이 모두 부른다.” 하였다. 이와 같이 산유화가는 농사철에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양주동 박사의 고가연구에서는 "산유화가는 옛 백제 유민(遺民)의 노래라 하였는데. 백제 유민이라면 나라가 멸망한 후의 유이민들을 말함인데. 앞의 흡제고 서문에 의하면 산유화는 의자왕 이전에도 있었다. 함을 보아서는 백제가 멸망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산유화는 여지승람에도 옛 백제 시절에 불러온 노래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전승여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조 때 학자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선생이 답사차 호남 지방에 들어서니 온 들판의 푸른 논에서 산유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가 평소 그 지방의 수령과 교유관계가 있어 당도한 곳은 금마(익산)였다 한다. 그 날은 수령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인지라 백성들이 전별의 정을 못 잊어 떠나는 행차를 둘러싸고 눈물바다를 이루는 정경을 보고 신 광수 선생은 금마별가라 하는 32수의 연작시를 남겼는데 그 중의 열여섯 번째가 산유화가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處處 山有花 곳곳에 산유화 가락

齊發翠和中 푸른 논에 일제히 퍼진다네

欣然謂農夫 흔연히 농부에 이르는 말

善哉勤用功 좋구나 부지런히 지었구나(국역 금마별가에서 인용)


이에서 미루어 볼 때 호남지방 에서는 산유화의 노래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 왔다는 실증적 사례라 보아진다. 그리고 앞에 부여의 보전 산유화에서 보듯이 산유화는 농부들이 농사일을 내용으로 부르는 노래였고. 신 광수 선생이 채록한 산유화 내용에서도 푸른 논에서 일하면서 산유화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벼가 푸르게 자란 물 논에서 논매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일면에서 보아도 산유화가는 모심고 논매는 일을 노래한 것이 산유화가라는 것임을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일반 사전에서도 정의하기를 논에서 모심고 김매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으니 산유화가는 곧 농요요 농부가임을 알 수 가있다. 이에 산유화에 관심을 두어 채록한 석북 선생의 학문과 위상을 참고하여 둔다.

 

이가원 박사는 그의 한문학연구에서 석북 신광수(1712~1775)는 성호 이익(1681 ~ 1763)보다 31년의 후배요 연암 박지원(1737~1805)보다는 25년의 선배로서 행시(行詩). 악부(樂府). 염체(艶體-詩體의 하나). 전기(傳記)등의 모든 학문적 방면에서 걸출한 대가였다고 한다.


석북의 작품은 앞서 개척하지 못한 영역에서 개척한 것은 악부였으며. 악부는 당시 사회상을 가장 잘 표현한 문학이라 하였는데. 이에서 그의 악부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한벽당 십이곡(寒碧當 十二曲)과 금마별가(金馬別歌)와 관서별곡(關西別曲)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별곡이 가장 이름 높은 대표작 이었다고 한다. 내용은 우리나라 승경지가 중국인의 호평과 국내 사대부들의 풍류가 이곳에 집중하면서도 중국과 같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은 이름 높은 시가(詩歌)로 강산을 빛내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시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북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지어진 것이 관서 별곡이라 한다. 이 관서 악부가운데 제15절에 일반시조 배장단(一般時調排長短)이라 하여 때 시자를 쓴 시조라는 용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를 시조(時調)라는 용례의 효시로 삼기도 한다. 또한 석북의 명성은 당대를 풍미하여 그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 하였다 한다. 석북의 행력은 60세에 연천 현감 기로과(耆老科) 장원 당상에 오르고. 우승지의 명을 제수 하였고. 그 뒤 영월부사를 거쳐 우승지로 여생을 마쳤다.


2. 농부가의 유래와 산유화가


앞장에서 산유화 노래는 농요 또는 농부가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농요가 언제부터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전하는 기록으로는 저 중국의 고 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열전 또는 진서 등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마한의 풍습은 해마다 5월이면 하종(夏種)을 마치고 제사를 지내고는 무리를 지어 술 먹고 노래와 춤을 추는데 밤낮없이 즐긴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뒤를 따라 땅을 밟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이 중국의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추수를 마치고도 그와 같이 한다.”(국사편찬위 중국정사 조선전 참조)


이에서 마한 이라면 백제의 전신이니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이전부터 농요를 즐기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일찍이 일본 땅에 노래와 춤을 전수한 나라였다 하며 그에 따른 악기도 중국 것이 아닌 백제의 악기로 가르쳤다 하며. 그 음악도 백제의 풍속무(風俗舞) 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문헌에는 없고 전해줘서 받았다는 일본의 기록에서 찾았다. 하니 한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일본에 전했다는 가무는 백제 지방의 풍속무(風俗舞)였다 하니 그것은 곧 전통적으로 이어온 농요풍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옛 백제의 풍속요가 후대로 이어 왔기에 근래에 까지도 시골 농촌에서는 동네마다 모심고 논매기 때가되면 두레를 지어 집단으로 풍장을 치며 농사일을 해 왔던 것을 우리는 보아 왔다. 원래 민요와 농악은 그 유래가 전문 소리꾼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일하면서 그 일을 흥겨롭게 노래로 표현한 것을 일러 농요라 하였고. 또한 민간에서 불렀다 해서 민요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농요란 농사꾼들이 농사일을 가사로 표현한 노래가 농요요, 민요란 농사일과 관계없는 것 까지 민간에서 불렀다 하여 총칭한 표현으로 구분된다.

 

원래부터 농요라 할 때 요()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하여 무리 도()자를 써서 도가(徒歌)라 하였고. 또한 도가의 원뜻은 진흙 논 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라 하여 진흙도()자를 써서 도가(塗歌)라 하기도 한다 하였다 (. 徒歌曰 塗歌-대동 운부군옥) 그리고 도가(塗歌)라 함은 옛날부터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곡조도 문서도 없이 부르는 노래라 하여 도가 무장곡(塗歌 無章曲 자전)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농요의 본의는 농부들이 물 논의 진흙 속 에서 모심고 김매는 일을 노래지어 부르는 소리를 농요 라하고, 이는 농부들의 노래라 하여 농부가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의 본의는 농요이며 산유화요 산유화의 원형이라 보고자 한다.


3. 산유화는 산나리 꽃이었다


산유화(山有花)라는 말은 옛날부터 백제의 농부들이 불러온 노랫말 이었다 하는데. 그러면 산유화라는 말의 어원이 궁금하다. ‘부여고적보존회에서 전한다는 산유화 노래의 가사를 다시 보자.


산유화에 산유화야

저 꽃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더락 필역(畢役)하세

얼럴럴 상사뒤

어여 뒤여 상사뒤


또 충청도 예산 지방에서 전하는 산유화 노래도 있다.


메나리 꽃아 메나리 꽃아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져서 농사일 필역하세


이 상의 두 편 가사에서 보면 산유화는 메나리꽃 이라는 답이 나와있다. ()을 뫼()라 함은 백제시절부터 학습교제로 가르쳐온 천자문(千字文)에 산()은 뫼()로 해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어린이 학습교재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같은 내용으로 해석이 되어 있음을 보면 산을 메()로 불러진 것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와서도 메산()자로 읽혀오고 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나리를 메나리로 불러진 것은 당시부터 일상 그렇게 전승되어온 명칭이 메나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의 두 산유화 노래가 나온 부여와 예산은 같은 옛 백제의 연고지라는 의미에서도 신빙성이 있다할 것이다. 그 산유화 가사에서 볼 때 옛 백제인들은 산() 나리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보아가며 농사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옛날부터 농사일중에 가장 중요한 농사는 논농사 였으므로 모심고 논매는 시기에 맞게 피고 지는 꽃이 산에서 피는 나리꽃(메나리)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노래가사를 조합하여 보면 이런 해석이 된다.


메나리 꽃이 필 때 모를 심고

메나리 꽃이 질 때 김을 매세


그래서 옛날부터 시골 농촌에서는 모심고 논매는 일이 끝나면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큰 행사가 끝나는(필역) 셈이었다. 나라에서도 논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교본인 농사직설에서도 5월에 모를 심고 6월에 김매기를 세 번해야 마감(필역)된다고 명시 하고 있다. 저와 같이 식물의 생태를 보고 농사시기를 삼아 온 것은 조선 후기에 나온 산림경제임원십육지에서도 동 지후 새 싹이 돋는 시기에 밭갈이를 하고, 찔레꽃이 피면 목화를 심고. 복사꽃이 질 때면 콩과 팥을 심으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이 산야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데 그 중에는 농사에 해당한 시기에 어떤 꽃이 필 때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꽃이 질 때는 무슨 일을 해 왔던 그 같이 자연의 생태를 보고 농사의 시기를 가늠해 왔던 관습을 농민들은 더 믿어 왔던 것이다. 그 같이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이라 할가 거기에 인습이 되어온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관습이라 보고자 한다.


농사란 인간이 먹어야 사는 생명업 임에도 농사는 무식하고 천한 백성들이나 하는 것이 농사였다. 그러다 보니 농사에 밝은 백성들은 글을 몰랐고. 글줄이나 아는 양반네들은 농사일 같은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풍조요 관행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풍습은 중세기 유럽에서도 있었던 지라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유행한 노랫말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은 밭갈이를 하고

하와는 길 삼을 하던 시절

도대체 그 누가 양반이었다 하더냐


이는 극히 원론적인 논리다. 너나없이 편한 데로 빠지면 식량 농사는 누가 할 것인가 누가해도 해야 할 농사인 것을.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나라에서는 권농정책은 있어왔어도 농민을 위한 농서는 없었다. 세종 연간에 와서야 우리 농서인 농사직설(1429)이 처음 나왔고. 이어서 농가집성이니 세시찬요’(1655). ‘산림경제’(1715). ‘임원십육지’(1827)등 여러 농서가 나왔으나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한문체로 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중국에서 전래한 24절기력이 있었으나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자연에서 눈으로 보이는 식물력()을 더 믿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전국 어느 지방이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백제지방에서는 산에서 피고 지는 메()나리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논농사를 지어 왔기에 산()에 있는() 그 꽃()을 가리켜 산유화라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네 조상들은 산야에서 피고 지는 자연 현상을 본 받아 농사일을 해온 것은 아마도 먼 조상 때부터 이어왔던 생활방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농민들은 모심고 논매는 때를 기하여 피고 지는 메()나리 꽃에서 농사의 절기를 삼아 왔고 그 또한 산에 있는 꽃이라는 순박한 뜻에서 산유화라 하였으니 산유화는 곧 메나리였고. 메나리는 산나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