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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박물관 – 삼례 박대헌」 책례冊禮 - 책씨를 뿌리는 사내가 있다. 그는 책 속에서 산 날이 더 많다. 책농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심례心禮 – 책 나무가 자라도록 애쓰는 사내가 있다. 그는 책 숲을 거닐며 논다. 책꾼 몸짓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른다. 창례創禮 – 책 열매 거두는 꿈에 부푼 사내가 있다. 그는 책신처럼 책마을을 지킨다. 책달인 경지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가 2013년 내게 보내온 시다. 그는 내가 영월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삼례에 거는 기대도 컸으리라. 2013년 6월 5일 책박물관이 영월에서 삼례로 옮겨 새롭게 문을 열었다. 삼례책마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볕이 잘 드는 이층 서재에 수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책속에 파묻혀 살았으면 하던 것이 내 십대 후반의 꿈이었다. 이때부터 고서수집에 뜻을 두더니 1983년 서른 청년에 고서점 호산방을 차리고, 1999년엔 영월에 폐교를 빌려 영월책박물관을 세우고 잘 나가던 광화문의 호산방도 모두 그곳으로 옮겼다. 그 후 2010년 12월 영월책박물관 문을 닫고, 호산방을 서울 프레스센터로 옮겼다. 파주 출판도시와 인사동을 거치는 사이 2013년에 완주군 삼례읍에 책박물관을 옮겼다. 그리고 2015년 8월 호산방 마저 삼례로 옮기고 책마을 사업에 매진했다. 그러는 동안 『서양인이 본 조선』『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고서 이야기』『한국 북디자인 100년』등 네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30여 차례의 고서 전시를 기획하였으니 40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책과의 모진 인연이다. 현재는 삼례책마을에서 세 개의 전시를 동시에 기획하여 전시 중이다. 책박물관의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 그림책미술관의 <요정과 마법의 숲> 삼례문화예술촌의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전이 그것이다.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는 인류 최초의 문자인 고대 오리엔트 쐐기문자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파피루스, 인도네시아 바탁족의 골각문자, 아메리칸 인디언의 암각 그림문자와 세계 여러 나라의 필사본, 타자기 등 모두 186종 2,775점의 전시이다. <요정과 마법의 숲>은 그림책미술관 개관기념으로 준비했다. 1940년대 영국 동화작가 그레이브스(G. Graves)의 미간행 타자 원고와 아일랜드의 나오미 헤더(Naomi Heather, 1911~1989)의 원화 전시다. 책도 출간했다.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전은 제1부‘초현실주의 탄생과 사랑의 폭주-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 마리 로랑생’ 제2부 ‘나폴레옹과 「조선 서해안 항해기」’ 제3부 ‘그대 프랑스 화가들의 반란’으로 구성되었다. 아폴리네르 관련 희귀 도서와 세잔과 외젠 부댕 등 벨 에포크 시대의 오리지널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유물은 모두 호산방 소장품이다. 나는 전시를 통해 ‘책이란 무언인가’ 말하고 싶었다. 이제 '박대헌의 고서 이야기'(2000.09. 09~2021.06.02/총 39회)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격려를 보내주신 '국악신문'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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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본의 심장을 쏘다, 창작판소리 <안중근> 초연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창작판소리 <안중근>이 6월 5일(토), 6일(일)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만고의 영웅 대한국인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작품으로 창작판소리연구원의 예술총감독 임진택 명창이 안중근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를 기본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소리를 붙여 작창하였다. 안중근은 누구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경, 중국의 하얼빈 역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아시아 전체가 치를 떠는 공공의 적을 저격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자 대한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쓰러져 곧 숨을 거두었다.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안중근의사는 뤼순감옥에 수감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모두 여섯 번의 공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항소를 거부하고 그해 3월 26일(향년 31세)에 순국하였다. 안중근의사는 왜 이토를 쏘았을까?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살아 있는 한 동양평화는 계속 어지러울 것이고 대한제국과 일본은 서로 증오할 것이기에, 대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의사 의거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는 단순히 이토의 제거가 아닌 일본이 계획하는 침략전쟁을 막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시 조명되는 안중근의 사상 사형 집행을 앞두고 미완성인 채 후대에 남긴 ‘동양평화론’ 속에 담긴 안중근의사의 선구적인 발상은 오늘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라는 시대적 화두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침략 가해자였던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사죄와 반성은 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자기네 평화헌법마저 부정하면서 극도로 우경화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다시금 내비치고 있다. 안중근의사의 사상을 되짚어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창작판소리 <안중근> 줄거리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안중근의사가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안응칠로 태어나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고 결국 조국이 사라진 시대에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하얼빈 의거를 결행에 옮기기까지의 삶의 궤적과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을 따르는 재판의 요구는 묵살된 채 끝내 일본의 짜인 각본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에 오늘날까지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유언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소리로 지었다. 임진택 명창은 왜 판소리 <안중근>을 창작하였는가? 안중근의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소리를 이끄는 도창으로 직접 실연하는 임진택 명창은 "해방 직후 박동실 명창이 이준, 안중근, 윤봉길 세 분의 의거를 담은 ‘열사가’라는 판소리를 창작한 바 있다. 허나 명창이 6.25 때 월북함으로써 그가 남긴 열사가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며, 또한 열사가 안에 안중근 대목은 불과 20분 정도 분량으로 온전한 한 바탕의 소리로서는 부족함이 있기도 하다. 새로운 안중근 판소리의 필요성과 작금의 급박한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로 불 때 안중근이 자칫 과거의 인물로만 박제 되어서는 안 될 터이며,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창조적 예술정신이 요구된다.”면서 "창궐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열강의 야합에 맞서 싸우는 안중근이라는 대한국인을 우리시대의 새로운 의사(義士)로 부활시키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이번 작품의 각오를 밝혔다. 의사의 서거 111년이 지난 오늘은 기필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의 유해를 대한의 조국으로 모셔오고 그가 바라는 진정한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에 구사된 기법과 미학 창작판소리 <안중근> 공연은 1인 다역을 하는 한 사람의 광대와 한 사람의 고수가 등장하는 판소리 전통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다수의 소리꾼이 어머니 조마리아, 빌렘신부, 채가구 역장, 일제 검찰관 등의 여러 배역을 맡아 안중근의사와 함께 시대의 증인으로 무대에 서는 입체창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는 전통판소리의 미적 특징을 고수하면서 중립적으로 관찰되어 객관화된 사건의 분위기와 인물의 신분, 성격에 따르는 이면(裏面)의 효과를 높이는 장치이다. 판소리 <안중근>의 눈대목(절정)은 이토의 북만주 시찰 정보를 듣고 하얼빈 역에서 저격하는 1909년 10월 21에서 26일까지 안중근의사의 행적이다. 거사 결정과 작전수립,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얼빈으로 이동 그리고 계획의 변경, 역에서의 기다림과 이토의 저격이 이루어지는 엿새간의 장면이 아니리(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 없이 소리 장단으로만 비장함, 긴박감, 긴장감, 통쾌함, 의연함이 20여 분간 그려지는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이 표현된다. 창작판소리와 그림 영상의 만남 이번 공연에는 화가 박불똥이 미술감독을 맡아 작화에 나섰다. 일반적으로 판소리 무대의 배경으로 쓰이는 병풍 대신에 화가의 포토꼴라주 작품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안응칠 역사’를 자신만의 리얼리즘으로 포착한 시각 이미지들을 분해 조립하고 유기적으로 엮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특히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가 중첩되고 반복과 복제되는 작업은 동영상을 보는 듯한 율동감마저 자아낸다. 무심하게 숨어 있는 작은 이미지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안응칠 역사’는 작은 힘들이 모여 하나의 큰 역사를 이루어 낸 우리 민중들의 삶 하나하나의 역사인 셈이다. 나오는 사람들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은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명창 정권진(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이른바 ‘비가비광대’이며 1970년대 이후 마당극 운동을 주도한 연출가이자 문화운동가이다. 특히, 전통판소리의 박제화를 극복한 ‘살아있는 판소리꾼’으로서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을 넘어 새로운 ‘창작판소리12바탕’ 완성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백범 김구>(2010년)를 시작으로 <남한산성>,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세계인 장보고>, <전태일>에 이은 <안중근>은 그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어머니 조마리아 역을 맡은 중견 소리꾼 남궁성례는 정권진 명창과 김소희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에게 사사하고 현재 유튜브 ‘풍류당 보라사부’ 채널에서 판소리 남도창을 강의하고 있다. 소리꾼 강응민(안중근 역)은 현재 안양국악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청년 국악인으로서 지역의 전통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지난 2019년 <수궁가>를 완창 바 있다. 소리꾼 최민종은 단국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고 소리패 ‘낭만판소리’를 꾸려 판소리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으며 제12회 인천국악대전 판소리부 일반부 최우수상(2012년)을 수상했다. 소리꾼 배재정은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장 출신으로 임진택 명창으로부터 창작판소리를 사사하고 있으며 2020년 창작판소리 <전태일>에 출연하며 제2의 인생을 소리꾼으로서 시작했다. 북채를 잡는 박명언 고수는 박봉술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의 손자로서 소리와 고법을 모두 익혀 ‘소리할 줄 아는’ 고수로 이름이 높으며 나주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고법 일반부 대상(2008년)과 완도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일반부 최우수상(2010년)을 수상한 재원이다. 이번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년도 원로예술인공연지원 사업 기금과 기아(주) 노사합동 사회공헌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되었다. 공연은 전석초대, 무료이며 예약은 전화(010-3675-1518), 홈페이지(www.pansorilab.com)로 날짜와 관람인원을 남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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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출판사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 베스트셀러5월 7일 문예출판사가 출간한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이 5월 20일 기준으로 예스24 소설분야 베스트셀러 11위에, 예스24 국내도서 TOP100에 올랐다. 문예출판사는 예스24와 함께 예스24 단독 굿즈로 살바도르 달리의 삽화를 이용한 양장 노트를 제작했고, 이 이벤트는 5월 17일 예스24 실시간 이벤트 랭킹 3위에 올라갈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은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돈키호테’와 20세기 초현실주의 미술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의 컬래버레이션이다. 문예출판사가 국내 최초로 살바도르 달리 삽화를 수록해 출간한 ‘돈키호테’ 살바도르 에디션은 이제껏 대중에 소개되지 않은 달리의 독특한 삽화로 가장 돈키호테다운 ‘돈키호테’ 판본이라는 평가와 함께 독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 1권의 삽화들은 1946년 미국 랜덤하우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명성이 자자한 라만차의 돈키호테의 일생과 업적 제1부’에 실린 드로잉과 수채화 작품들이다. 화가뿐 아니라 작가, 영화감독, 무대미술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인정받은 살바도르 달리는 ‘맥베스’, ‘몽테뉴 수상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많은 문학작품의 삽화가이기도 했다. 달리의 예술적 영감은 조국 스페인에 관한 주제를 접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세르반테스의 작품에서 달리가 돈키호테라는 인물에 깊이 매료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와 광인의 유일한 차이는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모토로 삼았던 달리의 마음속에는 분명 돈키호테가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천재성이 달리의 천재성을 끌어냈고, 환상과 마법으로 가득 찬 독창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돈키호테’에서 가장 유명한 풍차 전투 장면을 돈키호테 머릿속 상상으로 표현한 그림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또 달리가 사랑했던 엠포르다 지방과 아내와 집을 짓고 살던 리가트 항구의 모습을 작품 속 라만차의 풍경에 담아낸 것은 이 작업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보여준다.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 2권의 삽화들은 1957년 프랑스 파리의 미술전문 출판인 조셉 포레가 출간한 ‘라만차의 돈키호테’에 실린 석판화 작품들이다. 랜덤하우스판 ‘돈키호테’ 출간 후 10년 만에 포레는 달리에게 ‘돈키호테’에 수록할 새로운 석판화 시리즈를 제안했고, 포레의 설득으로 작업을 수락한 달리는 석판화에 전무한 새로운 기법들을 탐색하고 실험했다. 가장 유명한 기법은 화승총에 잉크를 듬뿍 바른 탄환을 넣고 발사해 독특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달리는 이 기법을 ‘불리티즘(bulletism)’이라 명명했다. 개미처럼 작은 병사 무리로부터 시작된 소용돌이가 갑옷 입은 돈키호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림(작품명 ‘돈키호테’)에서 이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잉크에 적신 빵을 석판 위에 놓고, 코뿔소의 뿔로 눌러 으깨는 기법은 잭슨 폴록 같은 액션 페인팅 작가들의 기법과 유사한 다이내믹한 선들을 만들어낸다. 달리는 이 기법으로 돈키호테가 풍차 거인의 환영을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가장 단순명료한 풍차를 그려냈다(작품명 ‘풍차에 대한 공격’). 2권의 삽화들은 돈키호테의 서사를 직접 연상시키지는 않지만, 폭발적인 색채와 이미지들은 작품에 흐르는 한결같은 절박함의 정서를 자아낸다. 달리는 서구 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 ‘돈키호테’의 삽화에 신화와 상상 그리고 현실이 결합된 그의 세계를 오롯이 담아냈다. ‘돈키호테’ 살바도르 에디션은 전 세계에 출간된 ‘돈키호테’ 판본 중 가장 특별하고 가장 ‘돈키호테’다운 판본이 될 것이다.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을 번역한 역자 김충식은 40여 년간 스페인어 사전과 교재를 집필하고 연구 및 강의를 통해 한국에 스페인어와 스페인 문화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오래전 스페인 세르반테스 박물관을 방문한 후 ‘돈키호테’를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10여년의 노력 끝에 ‘돈키호테’ 1, 2권을 완역해냈다. 스페인어사전 집필자답게 풍부한 어휘를 활용해 속담과 수사가 많은 원작의 특성과 문체를 최대한 살렸으며, 작품 속에 녹아 있는 당시의 시대상과 고유한 문화까지 담아내고자 애썼다. ‘돈키호테’에 대한 가장 정확한 역주로 알려진 마르틴 데 리케르 판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본문에 인용된 중세 기사소설과 유럽 고전의 출처와 숨은 의미까지 밝힌 상세한 옮긴이 주를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돈키호테’에 대한 역자의 남다른 애정이 묻어나는 치밀하고 정성 어린 번역은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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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2『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30여 년 전, 열화당 이기웅(李起雄) 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책 표지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마침 나는 오래 전부터 장정(裝幀)에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차였다. 무심결에 얘기를 하니, 이 대표는 다짜고짜 열화당에서 책을 내자고 제의했고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 후 이 사실을 잊을 만하면 이 대표는 어떻게 돼 가냐고 나를 다그치곤 했다. 틈나는 대로 원고를 써 보았지만 좀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진전도 없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999년 4월, 영월책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우여곡절 끝에 열화당에서 출간되었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이 대표의 조언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담당 편집자였던 이 대표의 따님 수정 씨는 기획에서부터 편집은 물론 원고를 깁고 다듬느라 필자인 나 이상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책,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정과 양장(洋裝)이 처음으로 만난 1883년부터 6·25가 끝난 1953년까지, 즉 우리의 근대 인쇄ㆍ출판 70년간 단행본들의 장정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책에 따라 살펴보았다. 여기에 실린 자료 역시 내가 직접 수집한 것들로, 『서양인이 본 조선』에서처럼 고서 수집과 연구에 이르는 과정에서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사진93) 우리는 어떠한 책에 처음 다가갈 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음미하기에 앞서 두 눈을 자극하는 이미지 앞에 놓인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것의 구체적인 꼴과 감촉을 손안에서 느낀 후에야 비로소 그 내용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감정·사상을 기록한 책은 단순히 읽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어루만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만드는 기획·편집 과정 못지않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물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제작의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그 중 책의 겉모습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장정으로서, 표지·면지·표제지·케이스 등을 시각적으로 꾸미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장정은 사람마다 각각 개성이 다르듯 책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제각기 어울리는 모습을 가지며, 장정가·저자·출판사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던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여건까지 반영한다. 결국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은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품인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경제·예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장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서 수집을 시작하면서부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장정이라는 말도 몰랐거니와 그 개념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저 됨됨이가 반듯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을 보면 왠지 가슴이 설레고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 후 장정이 출판편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화적이나 문학적으로 이름난 책들은 대체로 장정도 잘 되어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이런 책을 한두 권 수집하다 보니 어느새 수백 권이 되었다. 우리의 장정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정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기상도(氣象圖)』를 들고 싶다. 『기상도』는 김기림(金起林)의 시집으로, 이상(李箱)이 장정을 했다. 1936년 7월 8일 창문사에서 발행되었다. 모두 424행의 장시로, 「세계의 아침」 「시민 행렬」 「태풍의 기침시간」 「자최」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 일곱 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기이한 소재와, 기지·해학·풍자·반어 등의 수법을 이용해 모더니즘 시를 시도한 작품이다.(*사진94) 잘 알려진 대로 이상은 시인이며 소설가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자상(自像)」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1933년, 종로에서 다방 ‘제비’와 카페 ‘낙랑’ ‘쓰루’ ‘69’를 경영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이태준·박태원·김기림·윤태영·조용만 등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특히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리는 등,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방면에도 많은 재능을 보였다. 이상이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의 장정을 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문화풍토가 그렇듯이 이상과 김기림의 친분관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창문사는 서양화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출판사로,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 연상이었지만 1921년에 신명보통학교를 같이 졸업한 사이였다. 구본웅은 화가이면서 예리한 비평안을 지닌 문필가이기도 했다. 그는 창문사 일을 도우면서 이상 등 여러 문인들과 교우관계를 가졌고,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 1938년 문예잡지 『청색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이상은 구본웅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1936년에 창문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기상도』는 그때 장정한 책이다. 이 책은 두꺼운 합지를 표지로 씌워, 얼핏 한 장의 검은 판지처럼 보인다. 검정색에 가까운 암회색 종이를 씌우고, 그보다 조금 옅은 색의 종이 띠를 약 이 센티미터 폭으로 잘라 앞뒤에 두 개씩 세로로 덧붙였다. 표제 ‘김기림 저 장시 기상도(金起林 著 長詩 氣象圖)’는 보일 듯 말 듯 작은 크기의 어두운 레몬색 활자로 표지 위에 도장 찍듯이 직접 찍었다. 일반적으로 표지 인쇄는 사용하는 표지의 재질에 따라 인쇄를 하거나 금박, 압인(押印) 등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기상도』의 표지는 위의 모든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만 했다. 표제지는 활자의 크기를 이용했는데, ‘기상도(氣象圖)’의 활자를 모두 석 장(張)에 걸쳐 약 9·12·15포인트로 점점 키워 마치 이 시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마지막 장의 저자명 바로 아래에는 ‘장정 이상(裝幀 李箱)’이라 적어 넣었다. 상아색 본문 용지에 작은 글씨로 시행을 촘촘히 배열하고 여백을 많이 살렸으며, 인쇄 상태도 양호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한 편집을 보여주고 있다. 제본은 철사매기로 했다. 당시의 편집은 장정은 물론 본문편집까지 편집자가 거의 혼자 도맡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장정에 관심을 둔 몇몇 장정가의 출현으로, 장정과 본문 편집 작업이 비로소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상도』의 경우, 장정뿐만 아니라 본문 편집 작업도 이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석 장의 속표제지와 본문의 편집 양식이 동일인의 솜씨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상은 교정과 조판 등 출판과 관련하여 김기림과 상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상은 『기상도』 장정에서, 특정 사물의 형상이나 추상적인 문양에서 벗어나 표지 전체를 암회색 계통으로 일관하면서, 표제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문자도 보이지 않는 한 덩어리 어둠의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표지란 독자에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정보를 상징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상도』는 표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서명과 저자명의 표기가 거의 무시되었다. 한마디로 장정의 이론과는 거리가 먼 디자인이다. 이러한 장정으로는 『기상도』의 내용이나 김기림 시의 성향을 독자에게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기상도』에 실린 작품들이, 「태풍의 기침시간」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는 기지·해학·풍자·반어 등의 수법을 이용해 모더니즘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또 모를까, 설령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 하더라도 『기상도』 장정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연상하길 기대하기란 사실 무리다. 그러나 이상은 『기상도』 장정을 한 덩어리의 암회색 공간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장정이 나오기까지는 『기상도』의 내용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무엇보다도 북디자이너 이상의 정신세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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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8‘풍류방’ 동참, 영상작가 천승요 「국악신문」이 국악전문 매체로서 정립되는 시점은 제30호를 전후하면서 부터이다. 창간으로부터 2년 후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근거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편집진용을 갖추었다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이는 고문과 편집국장과 편집위원이란 진용을 구성, 운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체성을 들어내는 편집 방향을 설정하여 사업화와 기사화 하였다는 점이다. 전자는 앞에서 고문 정범태, 편집국장 우실하, 그리고 편집위원 최치성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후자는 ‘국악인 자료의 수집, 정리와 이의 교육자료화’ 사업이다. 국악인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의 교육자료화 사업은 국악신문이 내세운 사업으로 이를 대외 서비스하는 부서, 기획 기사로 집중하였다. 그 일환이 ‘풍류방 운영’과 ‘명인명창 선생님들의 사진 구합니다’이다. 독자를 위한 서비스와 독자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는 양방향 사업이다. 이 두 가지 사업은 3년 정도 지속하였다. 이 사업은 민속음악 자료를 구축하여 국악 사료화 하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국악사의 중심이 바로 민속음악임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이 점은 국악신문의 창간이념의 실천인 것이다. ‘풍류방’은 초기 고문 사진작가 정범태 선생의 자료를 활용하는 코너(사업)이다. 그러다 제48호에서 부터는 ‘비디오 천승요’가 참여하는 코너로 확대 되었다. 전자는 스틸 사진이고 후자는 동영상이다. 이는 ‘풍류방’의 활성화를 입증하는 것으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풍류방은 전통예술과 문화의 자료가 있는 곳 입니다>라는 ‘풍류방’ 코너는 이렇다. "음악 소리 춤 인물 등의 자료들은 우리 문화를 아끼는 슬기로운 이들에게 값있는 양식이 될 것입니다. 보고 싶은 자료나 찾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풍류방으로 연락 주십시오. 사진 정범태/비디오 천승요”(「국악신문」 제40호, 1996. 11. 27, 1면 하단 5단통 박스) 천승요 선생은 이 시기 프리랜서 비디오 작가로 시작하면서 국악신문에 동참한 것이다. 1976년 서울대 국악과 자료실에서 국악자료 수집을 시작한 선생은 1979년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시청각 자료실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국악인 기록작업에 들어갔다. 1996년 중반, 문예진흥원을 퇴직한 상태였다. 이때까지 선생이 기록한 공연은 모두 1만3000여 편, 테이프만 해도 4000여 개 분량이다. 여기에는 한영숙(무용) 김숙자(무용) 김월하(여창가곡) 씨 등 이미 작고한 명인들의 생애가 생생히 담겨 있다. 선생의 기록 방식은 일반 방송의 방식과는 다르게 객관적 시각에서 공연 현장을 기록하는 촬영 방식으로 민속학 자료와 예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 2014년에는 <무용 토크 콘서트 30년, 순간을 영원히, 천승요>라는 토크 공연이 있었다. 30년간의 기록 작업에 대한 회고와 후진들에 대한 가이드까지 실제 자료를 통해 소통하는 기회였다. 이후 2018년 무용 기록에 대한 학술대회(서울문화재단, 우봉이매방춤보존회 비대위 주관으로 열린 '춤문화 유산, 저작권 타당한가 토론회) 등을 주도하며 영상기록의 활용 가치를 강조했다. 이상에서 제시된 천승요 선생의 영상기록 관련 어록을 통해 입문 동기와 그 가치를 확인 할 수 있다. # "전생에 화가인 인연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는 전통예술의 기록 지식과 기록 영상자료의 현실을 그려가고 있다.” # "1980년대 1세대 명인들은 본인들의 춤을 긍지 있게 공연했지만, 무형문화재 정책 때문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춤이 통일되면서 많은 춤꾼들의 춤들이 사라져 갔다.” # "자료에서 그 예술인들의 예술혼이 보여야 진정한 자료다. 자료란 나무(매니아)를 키우는 거름이요 새(예술가)는 나무숲에서 살아야한다” # "모든 영상물 가운데 예술성과 운동성을 함께 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무용영상이다. 스포츠는 역동성과 속도감은 있지만 예술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음악이나 연극을 영상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역동성이 떨어진다.” # "통영에서 조각배를 타고 ‘통영 오구굿’을 찍다가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화면이 끊겨 버린 웃지 못할 장면도 담겨 있다. 몸은 빠졌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카메라는 배 위로 던져 필름을 구했다” # "지금 저는 30년 만에 외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료는 공개돼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동안 기록한 자료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천승요 선생은 공연자체는 물론, 무용인의 근접촬영과 공연 전후의 분위기 등도 수록하는 것이 특징으로 일반인뿐 아니라 전수받고 연구해야 하는 사람들도 참고할 수 있도록 한 기록이다. 이런 작가 정신을 인정 받아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수여하는 2003년 ‘춤비평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전통 예술 촬영에 반평생 천승요 씨’ 등의 활동상이 국내외 방송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는 인터넷 방송국(http://artskorea.tv)을 운영하고 있다. 선생은 「국악신문」 초기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분이다. 지난 2020년 김호규 대표 1주기 추모공연 ‘씻김’에 귀한 영상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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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음악, 그림으로 감상해 보세요 - 세계문화관 인도·동남아시아실 상설전시 정기 교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민병찬)은 3월 23일부터 상설전시관 3층 인도·동남아시아실에서 회화 전시품을 교체하여 새롭게 선보인다. 이번에 공개하는 전시품은 총 5점으로, ‘라가말라(rgamla)’를 주제로 선정한 4점의 인도 회화와 1점의 자이나교 순례도이다. ‘라가말라’는 ‘멜로디(라가rga)’의 ‘묶음(말라mla)’이라는 뜻이다. 인도 전통 음악에서 유래한 개념인 ‘라가’는 감정이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음조와 가락을 가리키는데, 종류에 따라 특정한 계절 혹은 시간대에 연주하여 그 분위기를 나타냈다. ‘라가말라’는 라가 여러 개를 한 세트로 묶어 시나 그림으로 창작한 것으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라가말라 세트와 양식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17세기에 인도 데칸Deccan 지역 북부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라가말라 회화 4점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가장 주목할 작품은 봄의 라가를 그린 < 바산트 라가Vasant Rga >이다. 화가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생명력과 희열을 표현하기 위해 홀리Holi 축제를 그림의 소재로 선택하였다. 홀리 축제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온 것을 축하하는 인도의 전통 축제로, 지금도 매년 2월이나 3월에 열린다(올해는 3월 28-29일). 축제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색색의 물감과 가루를 서로에게 뿌리며 봄이 온 것을 즐긴다. 이 그림에서는 화려한 정원에서 푸른 피부를 지닌 크리슈나Kria 신이 양치기 소녀인 고피Gopi들과 서로에게 붉은 물감을 물총으로 쏘며 즐기는 흥겨운 장면을 나타냈다. 꽃이 피고 세상이 여러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봄에 감상하기 안성맞춤인 작품이다. 더불어 가을 저녁의 라가인 < 가우디 라기니Gaud rgin >와 동틀 녘의 라가인 < 비바사 라가Vibhsa rga >, < 바스카라 라가Bhaskara rga >도 만나볼 수 있다. 평면적인 공간 표현과 색면으로 분할한 화면 등, 데칸 지역 회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외에도 자이나교 신도들의 순례 체험을 위해 그려진 그림 한 점도 함께 전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느새 성큼 다가온 봄을 맞이하여 인도·동남아시아실에 오셔서 생생한 인도 회화의 색과 아름다움에 푹 빠져보시길 바란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그림들은 모두 인도·동남아시아실 내에 설치된 디지털 돋보기 키오스크를 통해 더욱 자세히 감상할 수 있다. 육안으로 관찰하기 힘들었던 세부 요소나 그림 표면의 반짝거림을 보다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상설전시관 인도·동남아시아실은 연중 무료 관람이며, 이번 공개는 2021년 9월 26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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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1: 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박병천 명인·김영태 시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서재 창유리로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 화사한 햇살을 되받으며 나뭇잎들은 표정과 농암을 달리하며 형형색색으로 오색의 향연을 연출해 내고 있다. 여느 수목들보다 키가 월등한 은행나무는 간간이 스치는 소슬바람결로 파란 하늘폭에다 황금색 노란 붓질을 하고 있고, 늘 푸른 실향나무와 반송 사이로 진홍빛 얼굴을 내민 빨간 단풍가지는 왠지 오늘따라 먼 옛날 농본 시절의 ‘선녀와 나무꾼’ 같은 아련한 사랑 이야기라도 애써 발설해 내고 싶은 품새다. 대자연의 호흡 같은 바람이 또 지나는 모양이다. 울안의 활엽수 단풍잎들이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우수수 떨어진다. 그들 낙엽 중에서도 기품 있는 노란 은행잎의 낙하는 단연 압권으로 인상적이다. 필경 차생此生과의 인연을 하직하는 어느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만 같아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황홀한 전면의 풍광을 바라보는 눈길과는 달리, 고삐 풀린 나의 상념은 느닷없이 거꾸로 회전하며 엉뚱하게도 저만큼 어제의 어떤 죽음의 단상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망령스런 상념들의 변덕이 아닐 수 없다. 달짝지근한 추억과 서정적인 밀어들로, 아니면 부평초 같은 인생 행로에 묵직하게 철들어 가는 사색의 추錘를 달아주기 일쑤이던 단풍과 낙엽들이, 어느새 느닷없이 쇠락과 죽음을 첫 화면으로 떠올려 주고 있으니 정녕 희한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엉뚱하다 싶다가도 곰곰 되짚어 보니 이내 수긍이 가며 괜히 계면쩍어지기도 한다. 초속 230여 킬로미터로 내닫는 지구의 공전 속도를 까맣게 잊은 채,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장년쯤이려니 하고 어이없는 몽환 속에 지내온 게 민망해서인 것 같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나들이 때면 지하철 역무원들은 내가 창구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늘 한 박자 빨리 ‘공짜표’를 민첩하게 밀쳐 내주더라니! 적료한 침묵 속에서 나는 진양조 가락 같은 끈적한 곡선으로 낙하하는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어느새 어떤 죽음의 풍경을 아련히 떠올려 보고 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을 뒤적뒤적 음미해 본다. 그러고는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내일의 죽음에 대한 다짐도 슬며시 해 본다. 지난해 늦가을이었다. 나는 아산중앙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진도 씻김굿 하면 으레 대명사처럼 떠올리던 이름 박병천 예인의 타계였다. 당혹스러우리만큼 빈소의 분위기가 여느 상가와 달랐다. 상주들의 표정도 침울하기는커녕 화평하기만 했고, 조문객들의 분위기도 전혀 낌새가 달랐다. 웬걸, 낯익은 얼굴들과 자리를 함께한 후 들은 얘기는 내심 적잖은 충격이었다. 함께 자리한 당대 명인들인 김덕수나 장사익의 설명조에는 오히려 신명기까지 느껴졌다. "어제 저녁에도 노래로 한판 벌였는데, 내일 저녁에는 더 많은 끼쟁이들이 모여 정식으로 한판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야 고인도 흐뭇해하실 거고, 우리 또한 고인의 진의를 받드는 일이 될 거라는 것이다. 아, 가는 자와의 이별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나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한 기발한 대안이라도 찾은 양 괜스레 기분이 고양돼 그들과 또 한 번의 소주잔을 부딪쳤다. 귀갓길에 탄 버스가 잠실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서울 야경이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강심에 잠긴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그 불빛 사이로 훤칠한 키의 박병천 옹이 멋들어지게 북춤을 추는 환상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렸다. 정말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더니 당대 명인과 영별을 하고 나니 아까운 사연들이 한둘이 아니구나 싶었다. 연습으로 익힌 기예가 아니라 조상 대대로 세습돼 물려받은 멋의 원형질에서 우러나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예술판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정도 그렇거니와, 특히 열두 가지가 있다는 진도 씻김굿 중에서 그가 재현해 낼 수 있다고 하던 일곱 가지 유산마저 끝내 역사의 미궁 속으로 영영 사라졌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버스가 한강 다리의 야경을 뒤로 하고 강변길로 들어섰을 때, 내 생각의 끈은 또다시 죽음을 한판 놀이굿으로 받아들이는 낯설지만 매력적인 장면으로 이끌려 갔다. 아니 인생을 얼마나 달관하고 해탈했기에 만인이 칙칙하게 여기는 죽음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며 여유작작하게 한판 통과의례적인 놀이판까지 벌일 수가 있을까? 골똘한 생각 끝에 떠오른 답은 곧 진도 씻김굿이었다. 알려진 대로 진도 씻김굿은 죽은 자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시켜 극락세계로 천도薦度시키는 굿의식이다. 절망이나 비탄이 끼어들 계제가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리고 축원해야 할 상황이다. 진도 씻김굿판이 비감悲感의 페이소스를 넘어 일렁이는 신명기를 느끼게 되는 연유도 아마 이래서일 게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평생을 죽음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신바람의 굿판을 별여 온, 그래서 삶과 죽음이란 종이 한 장 차요, 유명幽明이라고 하는 밝고 어둠의 변환에 지나지 않음을 체관諦觀한 박 옹의 입장에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는 저만큼 하찮은 다반사茶飯事쯤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내가 기획했던 베트남이나 몽골 같은 해외 공연에서도, 무대에 오르기 전 거나하게 술 한잔 곁들이고는 무르익은 신명판을 풀어내더라니….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그는 가망 없이 남몰래 암 투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 문상 중에서야 알았다. 진정 죽음을 초탈했다는 것은 이런 경지이지 싶었다. 7월 12일 저녁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르코 예술극장에서는 고 김영태 시인 1주기 공연이 있었다. 잘 알고 있듯이 김영태 시인은, 시인이자 화가이자 클래식 음악 마니아이자 무용평론가로 활약한 19세기적 기인奇人 같은 멋쟁이 로맨티스트였다. 문화예술계에 스며든 그의 인간적 매력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바로 그 추모 공연이었다. 서울현대무용단 대표 박명숙 교수와 국립발레단 단장 박인자 교수가 주축이 된 그날 밤 범무용계의 헌정 공연은, 고인에 대한 사모의 정은 물론 죽음에 대한 또다른 의미망을 각자의 가슴속에 촉촉이 새겨 주는 기회가 됐다. 칠흑같은 공간에 침묵이 흐르고, 은빛 같은 한 줄기 조명 핀이 어느 좌석에 꽂힌다. 가열 123번 좌석이다. 특히 무용 공연 때면 늘 개근하던 고인의 붙박이 지정석이다. 핀이 밝힌 좌석에는 채 온기가 가시지 않았을 고인의 모자와 바바리코트와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순간 고인에 얽힌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뭉클한 회억懷憶에 젖게 했다. 무대는 고인의 면면을 떠올리는 편집 화면과 무언의 몸짓들로 차분하게 이어져 갔다. 야릇한 비감과 미감의 조화로운 교직交織은 가슴에 잔잔한 물무늬를 일으키며 현실을 예술의 진경眞境 속으로 환치해 가고 있었다. 아하, 죽음도 이렇게 삶처럼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그날 밤 추모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수목장을 예상해서 고인이 마지막 남긴 유작시 낭송이었다. 제목은 ‘전등사 나무’였다. 강화도 전등사를 내 한 손으로 들지 모르겠다 가볍다 그리고 어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내 몸인 나무가 정해졌다 나뭇가지에 손이 매달려 내 등을 두드린다 "자네 여기 올 줄 알았지” 잘 왔다고 전등사의 밤 추녀 진보라 곡선 아래 나를 맡겨 버린 나무 서 있다 서해 바다에 떠 있는 빈 배를 향해 늦가을 햇살은 여전히 눈부신데, 창밖에는 또 대지가 후~ 하고 입김을 내뿜는 모양이다. 노란 은행잎들이 우수수 지는 걸 보니.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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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문) 미국 경매 통해 들여온 ‘호렵도 팔폭병풍’ 국민에 공개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이하 재단)과 함께 지난 해 9월 미국 경매에서 매입하여 국내로 들여 온 《호렵도 팔폭병풍(胡獵圖 八幅屛風)》(이하 호렵도)을 18일 오전 10시 국립고궁박물관(관장 김동영)에서 공개한다. ‘오랑캐(胡)가 사냥하는(獵) 그림’이라는 뜻인 호렵도는 청(淸, 1616~1912)의 황제가 사냥을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국의 명·청 교체 후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연이어 겪은 후 조선에는 청을 배척하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청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며 청의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조선의 복합적인 시대배경 아래 무비(武備)를 강조한 정조(正祖, 1752-1800)의 군사정책과 맞물려 호렵도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돌아온 호렵도는 비단 바탕의 8폭으로 이루어진 연결병풍으로, 산수의 표현과 화면 구성이 탁월하며 인물과 동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고 매우 정교하여 호렵도 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주요 구성은, ▲ 폭포를 시작으로 스산한 가을 분위기의 산수가 숙달된 화원 화가의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 제1-2폭, ▲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이 묘사된 제3폭, ▲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복식 차림의 청 황제와 다양한 자세의 기마인물들이 등장하는 제5폭, ▲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창과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꾼들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제7-8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렵도를 처음 그린 화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하나인 김홍도(金弘道, 1745-1806?)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홍도의 작품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록으로만 남아있으며,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에 반해, 이번에 돌아온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표현 등에서 수준 높은 궁중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조선 시대 호렵도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이번 환수가 더욱 뜻깊다.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조선 후기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론을 편 실학중심의 농촌경제 정책서 이번에 공개되는 호렵도는 그동안 민화를 중심으로 했던 호렵도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고, 전시·교육 등 폭넓은 활용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월 18일부터 박물관 내 궁중서화실에서 국민에게 공개된다. 문화재청과 재단은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국외문화재 환수여건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외소재문화재 발굴과 환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정부혁신 사업의 하나로 적극적인 공개와 활용을 통해 우리 국민의 문화유산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자긍심을 고취해 나갈 계획이다. Public Presentation of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with Hunting Scene Purchased from an Auction in the U.S. - Hunting Scene, a high-quality court-style painting goes on display at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on February 18 -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dministrator, Kim Hyun-Mo) and the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Chairman, Choi Eungchon) is presenting the Eight-Panel Folding Screen with Hunting Scene(hereafter, Hunting Scene) to the public at 10 a.m. on February 18 at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Director, Kim Dong-Young). The painting was purchased at an auction in the United States in September 2020. Hunting Scene(胡獵圖, K. Horyeopdo), whose title means northern barbarian people hunting, depicts the emperor of the Qing dynasty (淸, 1616?1912) enjoying hunting. Joseon dynasty was invaded twice by Manchu forces (in 1627 and 1636) over the years that the Ming dynasty (明, 1368?1644) was being replaced by the Qing dynasty in China, and antagonism toward the Qing dynasty predominated in the Joseon court. However, with a surge of influences from Chinese culture in Korea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interest in Qing China grew among the Korean people. Against this complex background and in line with the military policy of King Jeongjo (正祖, r. 1776?1800), who stressed preparedness for war, paintings of hunting scene began to be produced in Korea. Hunting Scene, which has recently returned to Korea, consists of eight silk-backed panels. It is considered a masterpiece among paintings on this theme for its excellent landscape expression, well-organized composition, and exquisite, vivid depiction of human figures and animals. The first and second panels show an autumnal landscape that begins with a waterfall. The bleak atmosphere of autumn is aptly expressed in the skilled brushstrokes of a court painter. The third panel depicts women from the imperial family going out in a splendid palanquin. The fifth panel features a Qing emperor in a blue robe with a white dragon design and men on horseback in diverse poses. The seventh and eighth panels show a hunter taking aim at a tiger and deer with a bow while others fly at the animals wielding spears and an iron weapon. It is known that this theme was first painted in Korea by Kim Hong-do (1745?1806), one of the most renowned painters of the Joseon dynasty. His version failed to survive, and is known only from a mention in Essays on Rural Life and Economy (林園經濟志, K. Imwon gyeongje ji). Most of the extant folding screen paintings on this theme are in the folk painting style. By contrast, this Hunting Scene shows features of a high-quality court painting with its magnificent expression of the landscape and exquisite depiction of human figures. It is particularly meaningful as a glimpse into what these paintings looked like in their early stages. This Hunting Scene will be managed by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and will be on display at the Paintings and Calligraphy of Joseon Royal Court Gallery from February 18. The returned Hunting Scene is expected to broaden the scope of research into paintings on this theme, which has thus far been focused mainly on folk painting, and will be utilized for diverse purposes including exhibition and education. Despite the difficult situation caused by the COVID-19 pandemic,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the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will continue to make sincere efforts to identify and retrieve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and broaden opportunities for Korean citizens to enjoy and take pride in Korean cultural heritage through public display and effective utilization of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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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3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한 삼십 년쯤 됐을까. 호산방 손님 중에 젊은 화가 H씨가 있었다. 하루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을 들고 와 자랑했다. 1955년 10월 산호장(珊湖莊)에서 발행된 박인환(朴寅煥)의 『선시집(選詩集)』이었다.(* 사진 64) 원래 그 책은 1955년 10월에 출간되어 서점에 배포되기 직전, 인쇄소 화재로 모두 불탔다. 그래서 이듬해인 1956년 1월에 다시 제작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박인환 연구자나 몇몇 수집가 정도다. 박인환의 『선시집』은 1956년 1월에 다시 초판본이 출간되었으며, 표지는 호부장(糊付裝)으로 되어 있다. 호부장은 제본에서 옆을 매는 방식의 하나로, 속장을 철사로 매고 표지를 싼 다음 표지째 함께 마무리 재단을 하는 제본 방식이다. 그런데 H씨가 가지고 있는 『선시집』은 하드커버의 고급 양장이었다. 판권의 발행일자는 ‘1955년 10월’로, 바로 화재 직전에 출판된 오리지널 판본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 판본은 처음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 책에는 저자가 시인 장호강(張虎崗)에게 증정한 친필 서명이 있었고, 그 옆에는 만화가 김의환(金義煥)이 직접 그린 박인환의 캐리커처가 있었다. 또한 면지와 속표지 그리고 뒤표지 면지 등에는 김광주(金光洲) 이진섭(李眞燮) 송지영(宋志英) 박거영(朴巨影) 차태진(車泰辰) 김광식(金光植) 조영암(趙靈巖) 등의 친필 메모와 함께 ‘1956년 1월 16일’에 썼다는 기록도 있었다. 또 같은 날짜의 『한국일보』 서평이 스크랩되어 붙어 있었다. 이로 미뤄 본다면 1월 16일 출판기념회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지인들이 이 책에 친필 축하 메시지를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65~67) 어쨌든 박인환은 화재 직전에 이 책을 인쇄소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고, 출판기념회 때 이 오리지널 판본을 장호강에게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화재를 피한 오리지널 판본이 몇 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책이 유일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여러 문인들의 친필 메시지가 적혀 있다는 것은 그때 이미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잘 말해 준다. 寅煥이 인환이가 冊가게에서 처음 만난 그 寅煥이가 十年을 하로같이 詩 속에서 詩를 찾으며 읊으며 용하게도 오늘까지 뻗혀왔다는게 진정 반갑구나. 소설가이자 당시 언론인이었던 송지영의 축하 메시지다. 이 메모에 등장하는 ‘책가게’란 박인환이 종로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를 말한다. 박인환은 1945년 해방을 맞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말고 그 해 말 종로에 고서점 ‘마리서사’를 차렸다. 마리서사란 이름은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리 로랑생은 19세기 프랑스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연인이기도 하며, 당시 몽마르트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싱싱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화가였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을 만나고 많은 예술적 자극을 받아 시를 썼으며, 연인에게 바치는 시 「마리」를 남기기도 했다. 박인환이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을 통해 프랑스 문학과 그 예술적 삶을 지향했음은, 박인환 아내의 회고나 김수영(金洙暎)의 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후 마리서사는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모태이자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송지영과 박인환은 이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생활의 방편이라기보다 문학 교류의 한 장(場)으로 여기면서 운영했던 것 같다. 그곳에 진열된 책 대부분은 그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과 일본의 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김수영은,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운영하던 두 해 남짓 동안이 "박인환이 제일 기분 내던 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H씨가 소장한 『선시집』 오리지널 판본은 인간 박인환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는 책이다. 따라서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책이라면 누구든 욕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날 나는 안복(眼福)을 누린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는 이같은 귀한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귀한 장서를 내놓으라고 말한 적은 없다. 내가 욕심나는 책이라면 남도 귀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질 텐데 어떻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껏 하는 소리가, "이다음 책을 처분할 의사가 있으면 내게 제일 먼저 알려 주시오” 하는 정도다. 그리고 이삼 년 후, H씨로부터 고서 일부를 정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그림공부를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삼사백 권의 문학서적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박인환의 『선시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 책 한 권 때문에 삼사백 권의 책을 산 셈이라 말해도 틀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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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0편집국장 우실하 기업이든 언론사든 운영체계의 확립은 내적 조직의 강화와 외적 사세의 확장으로 시작된다. 모두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 수립 결과로, 전자는 적정 능력에 따른 직제의 수립이고, 후자는 모기업을 지원하는 자회사의 운영이다. 「국악신문」의 운영체계 수립은 창간 2주년을 전후한 제40호 발간 이후로부터다. 편집국 진용이 갖춰지고 전국에 지사를 설립한 시기가 바로 이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직제의 수립은 기자는 물론 전문가에 의한 고문과 자문위원 진용을 갖춘 것은 객관적인 위상을 확립한 것임을 알린 결과이다. 외적으로는 배달 업무와 지역 뉴스 확충을 위한 전국 주요 지역의 지사 설립이다. 전국 11개 지사인데, 춘천 평택 여천 마산 진주 남원 대전 김제 정읍 군산 인천지사이다. 모두 국악 거점 지역으로 지역소식 확보와 신문 배달업무에 긴요한 지역 안배인 것이다. 또한 부대사업으로 운영 자금 확보를 위한 ‘공연기회 대행’ 사업의 개설이 있었다. 대관업무, 홍보, 공연표 예매, 프로그램 전단 제작 등을 대행하는 업무이다. 제51호 판권을 보면 "고문 정범태, 발행 겸 편집인 김호구, 편집 이자균 김정아, 사진, 임준섭 정수미, 편집 자문위원 변영호 채치성 오용록 이명준 우실하”로 확인된다. 이 체제는 당시로서는 어느 주간 신문사 편집진 못지않은 진용이다. 특히 고문 정범태선생은 국악예술인 사진작가로서 당대 최고의 위치였고, 자문위원들 역시 당시 현장과 이론을 갖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다만 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우실하 위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초기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우실하 위원은 이후 편집국장과 필자로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이었다. 현재는 한국항공대 교수로 ‘3수 분화의 세계관’(2012년),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년),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년), ‘전통음악의구조와원리: 삼태극의 춤’(2004년)을 발간한 전통문화 학자이다. 2000년대 초에는 "요하(遼河)문명이 발견된 이후 중국은 자국 문명의 기원을 완전히 새로 쓰는 작업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의도대로 상고사 재편이 마무리되면 고조선 이후 한국사는 자동적으로 중국사의 한 갈래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라는 중국의 동북공정 상황을 전해 충격을 주기도 한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전문가 이다. 현재 동북아문화 전공교수로 또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글, 우주를 품다!’ 전시회 개최(본보 2월 3일자 참조) 중인 한글창제 원리를 풀이한 회화 작품으로 기법과 주제에서 화제를 낳고 있기도 하다. 우실하 위원은 본보 40호~60호 전후 편집국장 재직시 지면을 개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존의 현상적인 기사 중심에서 대부분을 외부 전문 필자의 심층기획 기사로 확충하여 질을 향상시켰다. 지면 구성에서도 사진과 표제 포인트를 대형화 하여 가독성을 높였다. 또한 자신이 직접 집필을 맡아 국악 전문지로서의 정체성 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중 연재물 두 편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본보 제49호 1997년 2월 28일자 ‘음악문화 다시 읽기’라는 코너 '우실하의 우리문화를 읽는 정당한 인식틀'이다. ‘다시 읽기’와 ‘정당한 인식틀’이란 키워드에서 짐작되듯이 전통음악 이해에 개혁을 촉구한 글이다. 2수 분화인 음양론과 3수 분화인 삼재론이 4,5세기 완전한 이론으로 자리 잡는데, 이는 2천년 전부터 자리 잡아 온 우리(東夷族) 사유체계이고, 이로부터 중국과 일본과 다른 우리 음악 특징이 발현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특징이 농현의 발달, 3분박 중심, 정간보 3등분 율명 기입, 시조 고악보 기입 특징 등이라고 했다. 이는 분명히 3국시대 이후 문헌 중심의 음악사 체계와는 다른 ‘인식틀’을 넘어선 이론이다. 앞의 연재에 이은 것이 ‘음양 오행 삼재론으로 본 풍물’이다. 강릉풍물, 전라우도 이리풍물, 경북 금륭농악 등의 농기와 복색과 집번 등을 이론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연재물은 2004년 저서 ‘전통음악의구조와 원리: 삼태극의 춤’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후 우리 전통문화의 근본 이론을 제시하는 다양한 집필이 이루어졌다. 이런 내용은 당연히 국악신문의 방향성, 즉 ‘민속음악 중심의 국악 위상 정립’이라는 창간 이념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실하 위원은 국악신문 26년사에 기억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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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 및 함’ 국보 지정 & 말모이 원고 등 6건 보물 지정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춰진 채 300년 넘게 풍산홍씨 후손가에 전래된「기사계첩 및 함」을 국보로 지정하고, 「경진년 연행도첩」, 「말모이 원고」 등 조선 시대 회화, 서책, 근대 한글유산 등 6건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국보 제334호 「기사계첩 및 함(耆社契帖 및 函)」은 1719년(숙종 45년)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제작한 계첩(契帖)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17년도부터 실시한 보물 가치 재평가 작업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의 기사계첩이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번 건이 두 번째 국보 지정이다.이번에 지정된 「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1653∼1719)의 발문, 각 행사의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초상화,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다른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 계첩에 수록된 행사그림 순서 ①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경희궁 흥정당에서 기로소에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 ②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이튿날인 2월 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 ③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4월 18일 경현당에서 왕이 기로신들에게 베푼 연회 광경 ④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기로신들이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행렬 ⑤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행하는 모습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되어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중의 한 명이었던 홍만조(洪萬朝, 1645~1725)에게 하사되어 풍산홍씨 후손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말해 준다. 이 계첩은 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싸개), 외궤(外櫃)로 이루어진 삼중(三重)의 보호장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으로,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추어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글씨와 더불어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아울러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제1051-5호「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分類杜工部詩(諺解) 卷十一)」은 1481년(성종 12년)에 류윤겸(柳允謙, 1420∼?), 조위(曹偉, 1454∼1503) 등 홍문관 학자들과 의침(義砧, 15세기) 승려들이 왕명을 받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두공부시(杜工部詩)’에 대해 여러 주석을 참고해 내용별로 분류하고 한글로 번역해 편찬한 「분류두공부시(언해)」의 권11에 해당한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간행한 번역시집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1455년(세조 1년)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찍었으며 동시기 만든 한글 활자인 ‘을해한글자’도 사용해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다. 이러한「분류두공부시(언해)」는 조선 전기 왕실에서 두보시(杜甫詩)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에 충실해 우리말로 정밀하고 아름답게 번역한 조선 시대 한글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이번에 지정된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은 을해자(乙亥字)와 을해자 병용(倂用) 한글금속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서, 동일한 권차가 알려지지 않은 희귀본이자, 반치음(半齒音, ㅿ), 방점(傍點), 아음(牙音, ㆁ) 등이 한글 창제 이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관리할 필요가 있다. 보물 제1219-4호「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諺解) 卷上一之二)」는 중국 당나라 승려 규봉(圭峰) 종밀(宗密, 780∼841)의 초본(베낀 글)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口訣)한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1465년(세조 11년) 주자소(鑄字所)에서 금속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간행한 것으로 줄여서 ‘원각경(圓覺經)’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대승경전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이후 사찰에서 수행을 위한 교과목 중 하나로 채택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마음을 수행해 원만한 깨달음(원각, 圓覺)에 이르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을유자’는 을유년인 1465년에 주조한 금속활자로, ‘원각경(언해)’을 간행하기 위해 한글 활자를 별도로 만들었으므로 이를 ‘을유한글자’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활자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1484년(성종 15년, 갑진년) 갑진자(甲辰字)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서 사용했으므로, 종류와 현존 예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이 을유자와 을유한글자로 찍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은 완질(完帙)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전래본도 많지 않은 편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 1의2」는 전래되는 판본이 적은 귀중본으로서, 15세기 국어학과 서지학, 금속활자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보물 제2084호「경진년 연행도첩(庚辰年 燕行圖帖)」은 경진년인 1760년, 11월 2일 한양에서 북경으로 출발해 이듬해 1761년 4월 6일 돌아온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내용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어람용(御覽用) 화첩이다. 사행단을 이끈 정사(正使)는 홍계희(1703∼1771)가, 부사(副使)는 조영진(趙榮進, 1703∼1775), 서장관(書狀官)은 이휘중(李徽中, 1715∼?)이 맡았고 그림을 담당한 화원으로 이필성(李必成)이 파견되었다. 화첩에 수록된 홍계희의 발문에 영조가 사행단이 떠나기 전 홍계희를 불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있던 심양관의 옛터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내용과 그 외 참고할만한 사적(史蹟)도 그려서 올린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결과, 이 화첩에는 그가 화가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을 찾아간 심양관(瀋陽館)과 산해관(山海關)의 옛터, 북경의 문묘(文廟) 등 유교 사적의 그림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그림은 다양한 시점이 적용된 입체적인 건물 표현을 통해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주며, 시각적으로 선명한 채색과 정교한 묘사는 18세기 궁중기록화의 수준 높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진년 연행도첩」은 제작 목적과 시기가 분명하고 영조의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 해당 유적지 장면, 그림과 관련된 도설(圖說), 설명식 발문 등이 일괄로 짝을 이뤄 사행의 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의도된 독특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아울러 18세기 중반 궁중회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작품의 성격 측면에서도 당시 시대상과 정치, 외교, 문화 등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또한, 이번 지정에는 조선~근대 한글유산 3건이 대상에 포함되었다. 특히, 근대시기 한글유산 2종은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련 아래 우리말을 지켜낸 국민적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성과 상징성이 있는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첫 번째로 보물 제2085호 「말모이 원고」는 학술단체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주관으로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과 그의 제자 김두봉(1889~?), 이규영(1890~1920), 권덕규(1891~1950)가 집필에 참여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 ‘말모이’의 원고이다. ‘말모이’는 말을 모아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오늘날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주시경과 제자들은 한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살려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말모이’ 편찬에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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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투(花歌鬪)의 진화진주교육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한 편에 눈길이 간다. 지난 8월에 통과된 ‘전통놀이 화가투를 활용한 초등 국악기 이해력 향상 프로그램 개발’이란 다소 논제가 긴 논문이다. 초기 감수성이 형성되는 초등학교시기에 국악을 밀착시켜 주는 것이 효과가 크다는 전제로, ‘화가투(花歌鬪) 놀이’를 적용한 국악기 교육 실습에 관한 연구이다. ‘화가투’란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하던 실내 놀이로, 시조를 적은 종이쪽(카드)을 가지고 하는 놀이이다. 시조를 노래로 삼아 카드에 올려져 사용하여 일명 ‘가투(歌鬪)’라고도 한다. 민족문화수호 운동 차원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잡지 ‘新民’ 등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1922년 ‘가투’를 발행한 데 이어, 상품으로서 ‘정선화가투(精選花歌鬪)’, ‘개량화가투’, ‘정제화가투’, ‘보급판 가투’등이 다양하게 판매되었다. 이 놀이는 1926년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새봄 첫머리 현상 가투대회’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어 신년 놀이로 ‘자미 잇는 가투노리-조선뎍 취미를 본위로 한-’이라는 해설을 싣고, 14회에 걸쳐 ‘가투에 실린 시조 백수’를 분재(分載)하였다. 이 행사는 1940년 1월 13일에 제12회에 이르렀다. 1936년에는 동아일보사에서도 ‘婦人 가투의 밤’이란 행사를 개최하여 해방 전까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투는 ‘읽는 쪽’과 ‘집는 쪽’이 각 100장씩인데, ‘읽는 쪽’에는 시조 한 수가 모두 적혔고, ‘집는 쪽’에는 종장만 적었다. 가령 4명이 시조놀이를 한다면, 그 중 1명은 소리 내어 읊는 창수(唱手)가 된다. 전통적으로는 훈장 또는 연장자가 맡았다. 창수는 ‘읽는 쪽’을 차지하고, 나머지 3명은 ‘집는 쪽’을 고르게 분배한다. 창수가 ‘읽는 쪽’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 시조에 해당하는 ‘집는 쪽’을 먼저 찾아내는 이가 득점하게 된다. 잘못 짚었을 때에는 벌점이 주어진다. 창수는 ‘읽는 쪽’을 읽는 한편, 상벌과 승부규칙을 결정하는 심판관을 겸한다. 1935년에는 일본에서 들어 온 화투(花鬪/가투놀이(歌ルタ遊ピ)와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를 피해 한성도서(주) 불선사가 ‘가투’를 ‘시조노리’로 바꿔 발매했다. 이 때 시조 100수를 선정했는데, 시인 이은상(李殷相)이 담당했고, 최영수(崔永秀)가 삽화를 넣어 크기도 2배로 확대하였다. 또한 신민사가 주최한 가투 놀이는 서양의 트럼프와 일본의 화투 놀이 방법을 적용하여 흥미를 높여 운용하기도 했다. 이로서 화가투 놀이는 첫 째 주재가 시조였다는 점에서, 둘째 부녀자의 고상한 취미생활의 요구와 합치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셋째 ‘조선 정조(朝鮮情操)’를 일깨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시조부흥운동의 분위기 조성에 일익을 담당한 놀이로 평가 한다. 1980년대 들어 이 놀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또한 문화컨텐츠 차원에서도 접근한 바 있고 몇 편의 논문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내용이나 놀이 방식, 그리고 상벌에 있어 시대성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번 논문의 화가투 놀리는 내용과 놀이 방법을 변용하여 초등학생에 적용, 가능성을 실제화한 논문이어서 주목하게 된다. 황정수의 논문은 화가투를 ‘시조 가’에서 ‘국악기(器)’로의 변용과 ‘소리 듣기’, ‘소리내보기’ 등 초등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현장 실습형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리고 10차에 걸쳐 활용 프로그램 적용의 실제 결과를 실습사진 등과 함께 제시하였다. 고안(考案), 제작한 국악기 화가투 종류는 현악기 8종, 관악기 10종, 타악기 22종, 현악기 8종, 국악용어 22종 등을 사진으로 제시하고 설명을 한 카드이다. 이는 연구자 황정수의 고안이다. 특히 본론에서 적용 전과 후의 국악기 이해도에 대한 성과를 4, 5학년 남녀 학생의 구체적 증언으로 제시했다. 연구자는 결론에서 국악교육의 다양성을 제시하여, 국악 수업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편견에서 즐겁게 국악을 익힐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 개발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놀이형으로서 참여자 스스로가 탐색하는 방법을 통해 학습자의 관여도를 높일 수 있었음을 큰 성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전통놀이와 국악을 조화시켜 전통문화 전반에 대한 흥미를 높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연구자 황정수는 국악기 주제 화가투에 대해 다시 변용을 시도한다고 밝혔다. 악기 연주자의 복식과 연주 모습을 한국화로 표현한 버전(version)이다. 한복과 연주 모습, 그리고 채색화로 흥미를 높이기 위해서란다. 또한 새로운 시도로 아리랑을 화가투 주제로 고안하겠다고 밝혔다. 아리랑은 종류가 많아 단일 종목으로 가투화가 가능하고 인지도가 높아 효과도 높으리라 본다. 이런 변용과 시도는 ‘화가투’의 진화이다. 단순한 복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국악교육의 의미있는 학습교재의 출현이고,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문화콘텐츠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그 실현을 고대한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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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투(花歌鬪)화가투(花歌鬪):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하던 놀이로, 시조를 적은 종이쪽을 가지고 하는 성인여자놀이.내용시조가 카드에 올려져 사용되었던 놀이로 일명 ‘가투(歌鬪)’라고도 한다.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하였다. 이 놀이는 윤태오(尹泰五)가 경영하던 불선사(不羨舍)에서 1922년에 『가투』를 발행한 데 이어,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새봄 첫머리 현상 가투대회’(1926.2.25.)를 조선일보사가 후원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조선일보』는 1926년 1월 5일자 3면에 「자미 잇는 가투노리-조선뎍 취미를 본위로 한-」이라는 해설을 싣고, 이후 14회에 걸쳐 「가투에 실린 시조 백수」를 분재하였다. 이 행사를 제1회로 하여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가투대회는 1940년 1월 13일에 제12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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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편집국 방문] 한누리국악원 황정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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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문화재단, ‘최소리의 소리를 본다 : 두드림으로 그린 소리’展 개최화성시문화재단은 11월 10일(화)부터 12월 6일(일)까지 화성시생활문화센터에서 ‘최소리의 소리를 본다 : 두드림으로 그린 소리’展을 개최한다. 타악솔리스트이자 화가인 최소리 작가는 2007년 ‘소리를 본다(Seeing Sound)’ 전시 개최 이후 ‘소리를 본다’는 주제로 ‘나’의 소리, ‘우리’의 소리, ‘세상’의 소리를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물체와 에너지는 고유한 소리를 갖고 있다는 작가의 표현은 시리즈 전시를 포함해 작가 자신의 예술 활동과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의 ‘2020 미술창작 전시공간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개의 소규모 전시공간에서 평면과 입체 작품전시 그리고 빛과 소리의 컬래버레이션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최소리 작가가 2년여 동안 청정의 작업 공간인 지리산 청학동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탄생시킨 캔버스 시리즈 신작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두드림을 이용한 퍼포먼스와 작품을 연결해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는 최소리 작가의 이번 전시는 미술로 만나는 소리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자 화성시 서남부 지역의 시각 예술 분야 활성화를 위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소리의 소리를 본다 : 두드림으로 그린 소리’展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화성시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화성시문화재단은 화성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만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화성시 고유의 문화 자원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 개발, 지역 예술 활동 지원은 물론 공연, 축제, 전시 등 수준 높은 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동탄복합문화센터, 화성시미디어센터, 화성시생활문화센터, 화성시립도서관 등 운영시설과 찾아가는 문화 예술 서비스로 화성시 전역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문화와 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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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639호 기사계첩 국보 지정 예고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춰진 채 300년 넘게 풍산홍씨 후손가에 전래된「기사계첩」(보물 제639호)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경진년 연행도첩」등 조선 시대 회화, 불경, 마애불 등 5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耆社契帖)」(1978.12.7.지정)은 1719년(숙종 45년)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제작한 계첩(契帖)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다. 계첩(契帖)은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으로, 보통 참석한 인원수대로 제작해 나눠 갖는 것이 풍습이었음. 오늘날 기념사진과 유사한 기능이다. 기로소(耆老所)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들을 우대하던 기관이다. 1719년 당시 숙종은 59세였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갈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태조 이성계가 70세 되기 전 60세에 들어간 예에 따라 입소(入所)한 것이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17년도부터 실시한 보물 가치 재평가 작업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2019년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번이 두 번째 국보 지정이다. 이번 예고 대상인 보물 제639호「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金?, 1653∼1719)의 발문, 각 행사의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半身)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다른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 계첩에 수록된 행사그림 순서:①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경희궁 흥정당에서 기로소에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②숭정전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이튿날인 2월 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③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4월 18일 경현당에서 왕이 기로신들에게 베푼 연회 광경④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기로신들이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행렬⑤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기로신들이 기로소에서 연회를 행하는 모습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되어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중의 한 명이었던 홍만조(洪萬朝, 1645~1725)에게 하사되어 풍산홍씨 후손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말해 준다. * 홍만조: 조선 숙종 때 학자이자 관료. 호는 만퇴(晩退). 시호는 정익(貞翼). 본관 풍산(豊山). 1678년(숙종 4)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93년 강화유수, 동왕 2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쳤음.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다 하며, 묘소는 서산인 아산시 배방읍에 있음 이 계첩은 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외궤(外櫃)로 이루어진 삼중(三重)의 보호장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으로,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추어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보물 제639호「기사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글씨와 더불어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아울러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諺解) 卷上一之二)」는 중국 당나라 승려 규봉(圭峰) 종밀(宗密, 780∼841)의 초본(?本, 베낀 글)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口訣)한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1465년(세조 11년) 주자소(鑄字所)에서 금속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간행한 것으로 줄여서 ‘원각경(圓覺經)’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대승경전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이후 사찰에서 수행을 위한 교과목 중 하나로 채택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마음을 수행해 원만한 깨달음(원각, 圓覺)에 이르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을유자’는 을유년인 1465년에 주조한 금속활자로, ‘원각경(언해)’을 간행하기 위해 한글 활자를 별도로 만들었으므로 이를 ‘을유한글자’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활자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1484년(성종 15년, 갑진년) 갑진자(甲辰字)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서 사용했으므로, 종류와 현존 예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이 을유자와 을유한글자로 찍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은 완질(完帙)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전래본도 많지 않은 편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 1의2」는 전래되는 판본이 적은 귀중본으로서, 15세기 국어학과 서지학, 금속활자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分類杜工部詩(諺解) 卷十一)」은 1481년(성종 12년)에 류윤겸(柳允謙, 1420∼?), 조위(曹偉, 1454∼1503) 등 홍문관 학자들과 의침(義砧, 15세기) 승려들이 왕명을 받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두공부시(杜工部詩)’에 대해 여러 주석을 참고해 내용별로 분류하고 한글로 번역해 편찬한 「분류두공부시(언해)」의 권11에 해당한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간행한 번역시집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1455년(세조 1년)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찍었으며 동시기 만든 한글 활자인 ‘을해한글자’도 사용해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사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분류두공부시(언해)」는 조선 전기 왕실에서 두보시(杜甫詩)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에 충실해 우리말로 정밀하고 아름답게 번역한 조선 시대 한글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은 을해자(乙亥字)와 을해자 병용(倂用) 한글금속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서 그 중 권11은 기존에 알려진 자료에서 일부 결락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고, 반치음(半齒音, ㅿ), 방점(傍點), 아음(牙音, ㆁ) 등이 사용된 초기 한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 동일한 권차가 없다는 희소성과 한글 창제 이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관리할 필요가 있다. 「경진년 연행도첩(庚辰年 燕行圖帖)」은 경진년인 1760년, 11월 2일 한양에서 북경으로 출발해 이듬해 1761년 4월 6일 돌아온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내용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어람용(御覽用) 화첩이다. 사행단을 이끈 정사(正使)는 홍계희(洪?禧, 1703∼1771)가, 부사(副使)는 조영진(趙榮進, 1703∼1775), 서장관(書狀官)은 이휘중(李徽中, 1715∼?)이 맡았고 화원으로 이필성(李必成)이 파견되었다. 화첩에 수록된 홍계희의 발문에 영조가 사행단이 떠나기 전 홍계희를 불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있던 심양관의 옛터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내용과 그 외 참고할만한 사적(史蹟)도 그려서 올린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결과, 이 화첩에는 그가 화가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을 찾아간 심양관(瀋陽館)과 산해관(山海關)의 옛터, 북경의 문묘(文廟) 등 유교 사적의 그림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조선 시대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使臣) 중 하나로, 대개 12월 동지(冬至) 절기를 전후로 하여 파견했기 때문에 동지사(冬至使) 또는 동지사행이라고 하였음심양관은 1637년(인조 15) 청나라 수도 심양에 건립되었던 조선의 해외 공관으로, 일명 고려관(高麗館)이라고도 불렀고, 1637∼1644년 동안 청에 볼모로 잡혀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거처했다. 산해관은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교통·군사상 요지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중요한 관문 중 하나. 1644년 청나라 오삼계(吳三桂) 연합군이 이자성(李自成) 반란군과 격돌한 ‘산해관 전투’가 유명하다.그림은 실제 경치를 그린 산수화와 건물의 배치를 그린 건축도로 나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한 부감법(俯瞰法)과, 평행사선형 투시도법 등 다양한 시점이 적용된 건물 형상은 입체적이고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주며, 명도가 높은 산뜻한 채색과 정교한 묘사는 18세기 궁중기록화의 수준 높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경진년 연행도첩」은 제작 목적과 시기가 분명하고 영조의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 해당 유적지 장면, 그림과 관련된 도설(圖說), 설명식 발문 등이 일괄로 짝을 이뤄 사행의 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의도된 독특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아울러 18세기 중반 궁중회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작품의 성격 측면에서도 당시 시대상과 정치, 외교, 문화 등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聞慶 鳳巖寺 磨崖彌勒如來坐像)」(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1979.1.25.지정)은 1663년(현종 4)에 제작된 마애불로서, 경북 봉암사 옥석대(백운대라고도 함)에 위치해 있다. 제작 시기와 주관자, 존상(尊像) 명칭은 풍계 명찰(楓溪 明察, 1640∼1708)의 문집『풍계집(楓溪集)』에 수록된「환적당대사 행장(幻寂堂大師 行狀)」을 통해 확인된다. 명찰은 17세기 승려 환적당 의천(幻寂堂 義天)의 제자로, 이 책에 의천이 발원해 마애불을 조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환적당 의천은 1603년(선조 36)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여 88세 되던 1690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 환적당이 봉암사에서 처음 수행한 것은 60세(1662년)부터 61세까지로, 행장에 의하면 백운대에 이 마애미륵여래좌상을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환적암(幻寂庵)을 지었다고 전한다.좌상은 높이가 539.6cm, 너비가 502.6cm 정도이며 머리 주변을 깊게 파서 광배 형상을 만들고, 위는 깊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얕은 부조(浮彫)로 처리했다.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부드러운 눈매, 단정히 다문 입 등이 자비롭고 인자한 인상을 풍긴다. 특히 얼굴과 자세, 착의법 등 세부표현에서 <나주 죽림사 세존괘불탱>(1622),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1653년) 등 17세기 괘불(掛佛) 표현요소를 찾아 볼 수 있어 불화와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불상의 수인(手印, 불보살을 상징하는 손모양)은 미륵불의 수인 중 하나인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두 손으로 긴 다발형의 꽃가지를 쥐고 있는 모양이다. 1663년이라는 뚜렷한 제작연대를 염두에 둘 때 마애불 도상이 확인된 기준작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은 문헌을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 동기, 주관자, 도상 등에 대해 고증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마애불이라는 점, 조선 후기 마애불 연구뿐만 아니라 미륵불상의 도상 연구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 가치가 높다. 또한, 사실적인 조각수법과 당대 불화와 연관성이 있는 창의적 표현 등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현존하는 청동북은 공명구의 위치와 형태에 따라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이중에서 「‘미륵원’명 청동북」은 뒷면이 뚫려 있는 형식으로, 이를 반자(盤子, 飯子, 半子, 判子, 般子)라고도 한다. 3개의 뉴(?, 손잡이)를 가진 전형적인 고려 시대 청동북으로, 안쪽에는 1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당좌(撞座)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당좌 안에는 14개의 연꽃 씨가 양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표면이 다소 마모되어 원래 금속 색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얕게 도드라진 양각으로 표현된 연꽃잎들의 배치가 균형감 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미륵원’명 청동북」은 12세기 청동북 중에서 비교적 큰 크기의 대형 청동북이며, 문양의 조각 솜씨가 좋고 주조 기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청동북의 제작 기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확실한 제작 연대와 명칭, 발원자와 사찰명 등이 확인되는 귀중한 작품으로서, 보물로 지정하기에 충분하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한 보물 제639호「기사계첩」 등 6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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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우리나라 제1호 ‘국악애호가’ 정창관, 국가가 화답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는 ‘2020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988년부터 국악 자료의 발굴 및 수집, 해외 배포를 통해 국악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국악애호가’ 정창관(鄭昌官/1952년생)선생이 예술진흥 공로 화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33년간 국악애호가로 향유자로서만이 아니라 국악계 기여자(寄與者)로 활동한 공적에 국가가 화답한 것이다. ‘국악애호가’란 호칭은 후보자 추천서 ‘소속 및 직위’란에 명기된 것으로, 본인과 추천인이 공유한 호칭이다. 우리나라 문화예술발전유공자 추천 공식문서상의 첫 사례이다. 앞으로 문화분야의 영예로운 호칭으로 자리 잡을 듯하다. 문화예술발전유공자 정부포상 제도는 문화예술 발전에 공헌한 문화예술인들을 북돋아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금년포상 유공자는 8개분야 18명으로 고인은 6인이고, 은관문화훈장 6인, 보관문화훈장 5인, 옥관문화훈장 4인, 화관문화훈장 3인이다. 이 중 국악분야 수훈자는 3인으로 작곡가이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故백대웅(1943~2011)교수가 은관문화훈장을, 대금연주자인 한소리국악원 조성래(1949~ )원장이 옥관문화원장을, 국악애호가 정창관 선생이 화관문화훈장을 받는다. 본보에 <정창관의 국악CD 신보유람>을 연재 중인 정 수상자는 진정한 국악애호가로서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왔다. 1896년 한민족 최초의 음원 발굴, 명인명창 음반 제작 기증, 국악CD음반 수집·정리 해외 배포, 유튜브에 아리랑 음원을 공개하는 등 국악애호가로 유례를 찾기 힘든 공헌으로 평가받으며 국악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수집 자료로 인해 전승국악의 모습을 세세히 밝힐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현대 국악학 연구와 고음반 연구로 국악학의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최근에는 국가기관에서도 하지 못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던 아리랑 음원을 지속적으로 찾아 유튜브를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국내·외 도서관에 국악 음반을 배포함으로 국악을 알리는데 크게 일조를 하고 있다. 정 수상자의 공적은 다양하다. 국악자료 발굴 및 정리, 국악연주자 후원, 국내외 보급 활동분야, 국가기관 자료 기증 주선분야에 독보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국악자료 발굴 및 정리분야는 복각음반의 효시인 LP음반 <판소리 5명창> 출반(1988년), <1896년 7월 24일, 한민족 최초의 음원> 발굴 및 음반출반(2007년), <1916년 고려인아리랑 1.2.3> 원통음반(3종) 및 <1916년 고려인아리랑 4.5.6> SP음반(2종) 제작, 1896년경 한민족 최초의 육필 오선보 발굴(2012년) 등이 꼽힌다. 국악연주자 후원 분야는 <정창관국악녹음집 1~15집> 출반(1998년 ~ 2012년), <정창관의 국악CD음반 세계> 개설·운영(1993년 ~ 현재), 젊은 국악인 & 어르신 국악인 연주회 후원사업(2003년 ~ 2019년), <새로운 창녕아리랑> 음반 제작, 창녕군에 기증(2016년) 등의 활동이다. 국내외 보급 활동분야는 <정창관의 국악CD음반 세계> 개설·운영(1993년 ~ 현재), 해외 유명 도서관 & 자료관에 국악CD음반 기증(2006년 ~ 현재), 국악방송 <정창관의 음반에 담긴 소리향기> 기획 및 방송(2001년 ~ 현재), 국악신문 <정창관의 국악CD 신보유람>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국가기관 자료 기증 주선분야로는 근대문화재 일제 강점기 빅터 금속원반 577매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주선(2011년), 권오성교수 국악자료 3,400여점 국악방송에 기증 주선(2017년), 음반수집가 이경호 음원자료 국악방송에 기증 주선(2018년) 등이 돋보인다. 이외에도 한국고음반연구회(1989년~현재) 창립멤버로서 현재 부회장으로 의미있는 활동하고 있다. 이 상의 공적 중에서도 독보적이어서 주목되는 활동은 희귀 고음반을 복각하여 박물관과 연구자에게 보급하는 활동이다. 희귀성과 고가임으로 연구자에게는 실물 확인이 어려운데 이런 복각으로 하여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에는 희귀 아리랑 SP음반 3종을 복각하여 보급하고 있다. 1930년 1월 채동원(채규엽)이 취입한 Columbia(400070-A) 발매 유행가<아리랑>, 1930년 3월 김연실이 취입한 Victor(49071-A) 영화주제가<아르렁>, 1931년 6월 일본가수 금색가면 취입의 Victor (51819-B) 유행가<아리랑>이다. 이 귀한 3종의 음원은 1896년 최초의 아리랑부터 총 667곡이 올라있는 Youtube ‘정창관의 아리랑’ 채널에서 들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업적을 평가 받은 것은 진정한 국악애호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편 이 번 수상 소식에 대해 서도소리 유지숙 명창은 "꼭 받으실 만한 분입니다. 국악애호가란 호칭이 정말 명예로운 것임을 국악계가 인식하는 계기이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음반기획자이며 화가인 이무성선생도 "정선생의 진정성을 국가가 알아주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 종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며 기쁨을 전했다. 유감스럽게도 월요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의 수상식은 가족 1명만 동반하게 되어 국악계의 축하 자리는 후일로 기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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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니어스타협회, 미술관과 함께 하는 친환경 ‘K방역 패션쇼’ 개최경기도 양주시가 주최하고 양주장욱진시립미술관(관장 조현영)과 한국시니어스타협회(회장 김선)이 주관하는 ‘미술관과 함께 하는 친환경 K방역쇼’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언택트 온라인 형태로 9월 26일 개최된다. 이번 패션쇼는 세계 방역에 모범이 되는 대한민국의 방역 우수성과 패션 감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취지로 기획됐다. 한국시니어스타협회는 장기봉 예술감독 연출 아래 국산 기능성 마스크를 활용한 국내 최초 ‘마스크 패션쇼’를 최근 개최한 바 있다. 이번 K방역쇼는 장 감독의 새로운 기획으로 기존 기능성 마스크에 서양화가 장욱진(1917~1990)의 작품을 활용한 게 특징이다. 협회는 마스크뿐만 아니라 ‘방호복’과 ‘패션’이라는 신선한 조합을 통해 한국이 코로나19 방역 우수국으로서 한발 앞선 선진 방역을 보여주는 계기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기존 방호복은 일체형으로 구성돼 움직임이 편하지 않은 데다 일회용이라 환경 문제까지 안고 있었다. 이에 의류 제조, 수출 업체 해리언(대표 김형일)은 이번 K방역 패션쇼에서 투피스 형태로 상, 하의를 따로 제작해 착용 편의성을 높이면서 백색 일변도의 디자인에서 벗어나 트렌디함까지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방호복을 선보인다. 해당 방호복은 물세탁이 가능하고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어 환경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했다. 이외에도 △버려진 페트병을 재활용한 의상 △한지를 활용한 가방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마스크 △신개념 패션 방호복 등이 멋진 영상과 함께 대중들에게 소개될 예정이다. 이번 행사를 공동 주관하는 조현영 미술관장은 "이번 친환경 패션쇼를 통해 한국의 위상을 알리고 미술관의 아름다움은 물론 근대 한국 화단의 거장 장욱진 화가의 작품 세계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패션쇼에 참가하는 모델은 모두 한국시니어스타협회 소속 모델들이다. 김선 한국시니어스타협회장은 "아이들, 성인, 시니어 모델들까지 3대가 함께하며 세대 화합 공연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패션쇼에 등장하는 친환경 의류, 마스크, 여성 의류, 한지 가방, 방호복 등은 모두 해리언이 제작 및 협찬한 것이다.한국시니어스타협회는 시니어 모델과 시니어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 모인 곳이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 가까이 차지하면서도 끼인 세대, 주목받지 못하는 세대, 그러나 열정이 넘치고 낭만을 아는 한류의 원조 부모 세대가 마음속 깊숙이 지니고만 있던 예능 본능을 일깨워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 보려고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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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라이프, ‘창조력 코드’ 출간… 인공 지능은 왜 바흐의 음악을 듣는가?북라이프가 스스로 생각하는 AI와 그 창조자 인간의 공생을 위한 가장 탁월한 안내서 ‘창조력 코드’를 출간했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옥스퍼드 대학 수학과 교수로 다양한 저서와 각종 방송, TED 강연 등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과학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키워드인 인공 지능과 창조력을 ‘창조력 코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며, 풍부한 인문·예술 지식과 방대하고 꼼꼼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우리를 단숨에 사로잡을 이야기를 가득 소개한다. 이 책은 창조력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고찰하고 알고리즘의 작동 원리와 수학적 기본 원칙을 알려 주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면서 예술에 대한 우리의 감정 중 어느 정도가 우리의 뇌가 패턴과 구조에 반응한 결과인지 또 수학·미술·문학·음악이라는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창조적’이라는 것의 진짜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지 그 답을 찾아간다. 최근 인공 지능의 빠른 기술 개발로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인류가 문명을 일으키며 지금껏 해 온 수많은 일 가운데 상당수를 인간 못지않게 기계가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창조의 영역은 어떠한가? 컴퓨터가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탁월한 소설을 쓰거나, 누구나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명화를 그릴 수 있을까? 기계가 독자적인 의식을 얻기 전까지는 기계의 창조력이 발현된 예술 작품이 아무리 정교하다 한들 그것은 인간의 창조력을 확장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공 지능은 이제 기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발전해 나간다. 그 예로 이세돌과 두 번째 대국에서 알파고가 보여준 제37수는 바둑의 정수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름답고도 창조적인 수였다.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의 초상화는 어떠한가? 인공 지능 화가는 사소한 붓자국의 비일관성을 지적받았을 뿐 렘브란트의 부활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인공 지능은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력을 발휘하고 있다. ‘창조력 코드’는 무엇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수학자의 관점에서 음악, 미술, 문학 등 장르를 가르지 않고 수학과 과학의 전 영역을 절묘하게 연결해,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독자들을 자극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과장되거나 부풀리지 않은 진짜 인공 지능의 창조력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는 인공 지능의 의식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비즈니스북스 개요 비즈니스북스는 ‘세계 초일류 경제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비즈니스맨들에게 꼭 필요한 책만을 엄선하여 출판한다’는 모토 아래 17여 년 동안 비즈니스와 경제, 자기 계발, 재테크 관련서들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이다. 언론연락처: 비즈니스북스 홍보팀 김미정 팀장 02-338-9449 이 뉴스는 기업·기관이 발표한 보도자료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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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文化 / Culture1. 文化 / Culture 1.1. 개요[편집] 도구의 사용과 더불어 인류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된다.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언어, 관념, 신앙, 관습, 규범, 제도, 기술, 예술, 의례 등이 있다. 문화의 존재와 활용은 인류 고유의 능력, 즉 상징적[1] 사고(언어의 상징화)의 능력에서 기인한다. 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였는데, 나중에 교양,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좁은 의미의 문화와 넓은 의미의 문화는 조금 다른데, 좁은 의미로는 교양과 발전된 의식 등을 의미하는 한편 넓은 의미로는 생활 양식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① 구미풍(歐美風)의 요소나 현대적 편리성(문화생활, 문화주택 등) ② 높은 교양과 깊은 지식, 세련된 생활, 우아함, 예술풍의 요소[2] ③ 인류의 가치적 소산으로서의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등[3] ④ 미디어(음악, 책, 게임 등) ①과 ②의 경우는 문화가 없는 인류가 과거에 존재하였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문화는 좁은 의미의 문화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과학, 특히 문화인류학계에서는 미개(未開)와 문명(文明: 高文化)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류가 문화를 소유하며 인류만이 문화를 가진다고 본다. 여기에서 문화란 인류에서만 볼 수 있는 사유(思惟), 행동의 양식(생활방식) 중에서 유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소속하는 사회(협동을 학습한 사람들의 집단)로부터 습득하고 전달받은 것 전체를 포괄하는 총칭이다. 또한 일정 공동체가 공유하여야 하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습성이나 선천적 요소 등은 문화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요인들도 생활 양식에 영향을 주어 문화로 발전할 가능성은 있다. 1.2. 정의 아직 정확히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다 다른 뜻과 정의를 내놓았기때문. 그 예로 Hofstede, Hall, Kroeber & Kluckhohn, Spencer-Oatey, T.Schwartz, Geertz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의 문화의 정의를 보자. 밑에있는 정의도 하나의 예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저서〈원시문화 Primitive Culture〉(1871)의 서두에서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화는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다"[4]. 이러한 개념 정의는 50여 년 간 인류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인류학의 발전과 더불어 문화의 정의는 더욱 다양해졌다. 미국의 인류학자 앨프레드 루이스 크로버는 저서 〈문화의 성질 The Nature of Culture〉(1952) 에서 '습득된 행동'을 비롯해서 '마음 속의 관념', '논리적인 구성', '통계적으로 만들어진 것', '심리적인 방어기제' 등 문화를 구성하는 164가지의 요소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크로버는 문화를 행동으로 정의하게 되면 그 자체로 심리학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화는 '구체적인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고 그 자체가 행동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크로버의 사고 방식에 따르게 되면 결혼식이나 도자기에서 추상된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인류학자 레슬리 A. 화이트는 〈문화의 개념 The Concept of Culture〉(1973)에서, 결국 문제는 문화가 실재인가 추상인가가 아니라 이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해석하는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문화기본법은 "문화"를 문화예술, 생활 양식, 공동체적 삶의 방식,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 등을 포함하는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물질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로 정의하고 있다(제3조). 1.3. 동물의 문화 이 주제는 사회학계, 생물학계, 인류학계에서 의견이 다양해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주제이다. 하지만 일부 동물들은, 특히 침팬지나 돌고래, 일부새처럼 사회성이 높은 동물들의 경우에는, 조금은 단순한 형태로나마 문화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많다. 특히 어떻게 보면 다양한 동물들의 생활 행태 속에서 문화는 흔하게 발견된다. 다만, 인류의 문화는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정교하고 고도화되어 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실제로 동물의 문화와 인류의 문화의 차이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하에 그 일부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내용이 있을 경우 관련 전공자의 수정바람. 인류는 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문화화와 사회화를 달성하지만, 동물들은 사회적 촉진에 의존한다. 인류와 달리, 동물들은 문화의 규범화, 상징적 강화가 없다[5]. 인류와 달리, 동물들의 문화는 대부분 식이활동에 관련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인사법, 털고르기, 구애활동에 한정된다[6]. 인류는 종족적 표지(Ethnic Marker)[7]가 존재하지만, 동물에게는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의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누적되고 변화되지만, 동물의 문화에는 누적성이 없다. 1.4. 문화의 특징 1.4.1. 공유성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공유하는 것. 그러므로 공통된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명절에 성묘하러 대규모 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공유성은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프랑스인과 인사할 때는 볼에 뽀뽀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한국인과 인사할 때는 허리를 굽혀서 인사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그 예라 보겠다. 1.4.2. 학습성 문화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특징이 있다. 이를 학습성이라고 하는데,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 연필을 잡는 법 모두 후천적으로 익히는 문화이므로 학습성의 예가 되겠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다른 사회에서 성장하면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갖게 되는 것이 그 예이다. 1.4.3. 축적성 문화는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아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 기술이 축적되며 내용이 풍부해지고 더욱 발전하는 특징을 축적성이라고 한다. 1.4.4. 변동성 문화는 형성되고 안착하더라도 후에 그 문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이 특성을 변동성이라고 하는데, 없어지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기도 한다. 문화가 변동되는 원인은 새로운 문화 요소의 발명이나 발견, 가치관의 변화, 지식의 축적 등에 의해 변화한다. 1.4.5. 전체성 사회의 문화는 물질적 제도적 정신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요소들은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니, 쇼핑을 인터넷으로 하고 강의도 인터넷으로 보는 등 생활 양식이 바뀐다. 1.5. 역사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사회나 구 시대에는 종교가 문화를 지배하며 종교의 사원, 성당 등을 건립할 때 이용하기도 하였고 종교적인 색체가 강한 그림, 음악, 건축물 등을 생산하는데 종교를 유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소수 지배층이 향유하는 문화로 독점되어 초상화등을 그려주거나 클래식 음악 등이 생산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자유와 개인주의가 확립되고 매체가 발달되면서 다수의 대중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스타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들의 팬덤 문화가 생겨났으며 소수의 문화 생산자들이 정치인 보다 유명해지거나 강력한 영향력을 대중들에게 행사하게도 되었다[8]. 현대의 대중문화를 중세시대 등의 구 시대 단계에서 볼 수 있던 일부 엘리트 고급문화와 기층에 존재한 토착적인 대중 민속문화와의 사이에 나타난 중간문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9]. 1.6. 문화의 파급력 1.6.1. 소프트파워 : 국가간 문화력 차이의 효과 (TED, 왜 국가는 소프트파워를 추구해야 하는가?) 소프트 파워는 군사력, 경제 등의 물리적인 힘을 지칭하는 '하드파워'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조지프 나이 교수가 정립한 용어다[10]. 소프트파워는 강제력 등의 물리적인 힘이 아닌 자발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매력을 말한다[11]. 소프트파워의 단적인 예는 문화이다. 흔히 소프트파워의 파급력의 예시로 거론되는 것은 만주족의 피정복문화 동화다. 만주족은 한족을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피정복 종족인 한족에 동화되었다. 소프트 파워는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의 이성적, 감성적, 창조적 분야를 포함한다. 조지프 나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하도록 하는 힘인 문화, 이데올로기, 국제체제 창설 등의 능력 무형자원을 소프트파워라 정의했다. 그에 반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하도록 하는 힘 등의 군사력, 경제력 유형자원을 하드파워라고 말했다. '소프트파워'라는 문화적 측면의 강화는 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과 간접적인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예를 들면 한류 등의 영향으로 전자제품, 화장품 등의 판매 증가가 그것이다. 이렇게 증가한 경제력은 군사력에 증강에 투입되거나 다시 경제력을 확장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다. 소프트파워 등으로 증가한 영향력은 국제사회에서 미약하게 나마 해당 국가의 이미지를 개선시키고 어느 특정 사항에서 '타국 입장'에 민감한 부분이 아니라면 '타국에 동의'를 얻는 것이 보다 쉬어진다. 이렇게 개선된 국가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국제체제 창설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국제체제 창설 능력' 자체를 소프트 파워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소프트파워의 파급력에 대한 반대론자들도 있다, 사실 중동,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면 금방 깨닫는 사실인데 중동[12]이나 중국에서는 결국 피정복민의 하드파워[13]가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 왕조나 만주족 등이 동화되었지만 인도의 경우는 피정복민의 하드파워가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화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정복자들이 피정복민이 과학, 수학 등에서 분명 더 우수하더라도 하드파워가 없으면 소프트파워 자체를 경멸하는 경우가 압도적이고 일단 인류 역사에서 화해나 동화는 상대가 최소한의 존중은 받을 레벨이 돼야 가능했다[14]. 중국의 유목민 정복자 동화사례도 사실 문화도 문화지만 인구빨에 의한 것도 대단히 컷으며 특히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은 문화에 의해 동화되긴 커녕 끝까지 한족과 확실히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한족의 엄청난 인구빨과 유목민이 더 이상 힘을 못쓰는 근대산업력의 물결에 동화된 것이다. 그나마도 몽골은 내몽골만 잃었을뿐 엄연히 독립국가를 세웠으며 또 티벳과 위구르 역시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유지하다 중공군에게 강제로 합병 당한 것이다. 현재도 중국은 티벳과 위구르를 동화시키려 애를 쓰고 있는데 중화문명 시절에도 동화되지 않은 자들이 문혁이 이후 박살난 중국 문화에는 더더욱 동화될 리가 앖어 현재 중국은 그냥 한족인구를 미친듯이 몰아넣어 동화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물론 앞의 사례는 결국 하드파워가 역전되어 동화된 사례이지만 최소한 소프트파워가 우월한 민족이라면 타 민족의 하드파워가 강하다고 쉽게 동화되지 않고 있다가 반대의 경우 타민족을 빠르게 동화시킴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왕조 역시 원나라 같은 유목 제국의 하드파워가 강하다고 문화적으로 동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유목민 출신 백성들을 고려, 조선에서 빠르게 동화시켰다. 1.6.2. 인터넷 문화의 파급력[편집] 문화의 파급력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막강하다[15]. 사례를 하나 들자면, 과거 디시인사이드의 합성 필수요소 갤러리에서는 정치적 소스는 당대 대통령 정도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경선 시절 박근혜와 진실공방을 벌이면서 한 말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가 크게 유행하고, 때마침 불어닥친 빠삐놈 열풍으로 합필갤이 르네상스를 맞게되면서 인터넷 문화가 전반적으로 좌파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다만 이미 pc통신 시절부터 좌파가 강하긴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도 인터넷 여론전이 크게 한 몫 했을 정도) 그러나 2010년 12월 정사갤과 야갤에서 호성드립으로 합필갤을 뒤덮어버리면서 기존 합필갤러와의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기존의 장잉들이 작품을 올릴 곳을 잃게 되면서 합필갤을 떠나게 되었다. 남은 정사갤러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진보진영의 두 전 대통령, 소스로 쓰게되면서 운지(故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와 슨상(故 김대중 전 대통령 비하), 거기다 국내야구 갤러리 등지에서 유행하던 종범드립, 호성드립도 쓰이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치색을 떠나서 재밌으니까' 많이 쓰였지만, 이 소스들에는 지역드립과 고인드립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니 문제. 무의식적으로 (시계드립 등) 우파 성향을 보이거나, 지역드립, 고인드립을 가볍게 여기는 갤러들이 늘어났고, 이는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로 퍼지게 된다. 전자(전 대통령)는 애매하지만, 후자(야구선수)는 웬만한 좌파 사이트에서도 별 문제시되지 않고 유행할 정도였었다. (물론 좌파는 옳고 우파는 그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일베가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여러 커뮤니티들이 해당 드립들을 금기시하는 추세가 되어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여러 민감하거나 문제될만한 요소들을 가벼운 '놀잇감'으로 만들어 의식을 무뎌지게 할 수 있는지 증명된 사례로 남았다. 1.6.3. 매체 문화의 위력[편집] 이처럼 내용적으로 매우 민감한 매체를 접할 때, 자신은 "주의해서 보고 체험하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느껴도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변화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심리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있다. 간접광고가 대표적인 예이다. 문화와 미디어의 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인 괴벨스는 독일 전역에 라디오를 적극 보급하고 전 세계 최초로 정기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시도하여 당시 독일을 나치즘 사상으로 물들이는 데 성공한 무서운 역사도 있다. 1.6.4. 컬처쇼크[편집] 컬처쇼크의 한 장면 SDF Macross - Do You Remember Love? 컬처쇼크는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나 새로운 생활 양식을 접할 때 받는 충격과 공포를 이르는 말이다. 1.7. 문화에 대한 검열과 규제 ◇ 문화대혁명의 현장 문화에 대한 탄압과 시민에 대한 규제는 주로 전체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공산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와 파시스트 국가에서 시행되며, 경찰국가와 극우 정권에서 극도로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국외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및 대약진 운동과 러시아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문화검열과 각종 통제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괴벨스의 문화검열과 각종 통제와 북한의 도서정리사업 등이 있다. 특히 문화대혁명의 경우 중국의 사회 전반적인 부분을 30년 정도 후퇴시켰다는 의견들도 있다. 북한의 경우는 도서정리사업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사회전반적인 후퇴와 경쟁력 상실은 피할 수 없었다. 북한 성혜랑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건 이전까지 북한은 그냥 살기 괜찮은 사회주의 국가였으나, 반수정주의의 태풍 하에 대대적 인텔리 제거되었다고 한다. 북한 인텔리들이 만든 '문화'에 대한 총공격,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반문화 혁명이 휩쓸고 가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억압되고 후퇴되었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 외국 음악은 중국 및 소련의 것일지라도 금지됐었으며 중국 문학&러시아 문학과 마르크스의 서적들도 불태워졌다. 북한의 수많은 문화재가 박살났으며 서양 화가들은 현실 체험이라는 미명 하에 탄압되고 지방 농촌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반대로 문화에 대한 검열과 규제가 매우 적은 곳은 북유럽권과 서유럽권이다. 즉 영국, 프랑스, 독일 일대는 문화에 대한 검열과 규제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북유럽과 서유럽처럼 주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지는 민주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와 非파시스트 국가인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등의 경우 의외로 북유럽 및 서유럽보다도 검열과 규제를 철저히 하는 편이다. 이런 나라들이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롭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특히 황제,[16] 왕, 대통령, 총리 등을 대놓고 도를 넘어서서 심각하게 비방한다든지 하면 당연히 범죄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나라인 미국이라 해도 자국의 국민들을 감시 및 지휘·통제하는 FBI와 CIA가 있는게 아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과거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까지는 중국, 러시아, 독일, 북한 따위도 울고 갈 정도로 엄청난 검열과 규제를 했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이슬람권이 식문화나 여성의 의복에 대하여 심하게 통제를 한다. 한편으로 여성에 대한 처우가 나쁜 공통점과 의복규제가 동일한 선상에서 시행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종교적인 색체가 강할수록 문화에 대하여 통제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나키즘적인 성향이 강한 정부일수록 문화에 대한 통제를 거부하며 경제적, 발전적인 면으로 비교하자면 선진국일수록 자율적이며 규제가 적다. 공산국가의 경우 문화를 탄압하는 한편 체제유지 선동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문화를 변질시켰다. 당연히 이런 곳에서 탄생한 문화가 발전되었거나 온전할 수 없다. 이처럼 문화에 대한 검열은 독재국가와 종교국가, 공산국가, 경찰국가가 체제를 유지하고 독재를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이들은 독재를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반대급부로 전반적인 문화와 사회를 퇴보 시키는 것을 피할수 없었다. 독재를 강화한다고 문화를 건드릴 경우 국가 전체가 몇십년 단위로 후퇴하는 경우도 생기고 수많은 국부가 유출되고, 국민들이 외국의 발전된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무차별적인 검열은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위라 할 수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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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스펙트럼을 가진 가야금연주자 이수은 [The Emotion]"무한의 스펙트럼을 지닌 독보적 가야금 연주자" 이수은 [The Emotion] <Track List> 01. 감정 感情 : the emotion (05:00) 02. Wheel (03:51) 03. 별 헤는 밤(04:25) 2019년,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담긴 가야금의 진솔한 노래가 가을바람과 함께 찾아오다.무한의 스펙트럼을 지닌 독보적인 가야금 연주자 이수은이 2019년 9월 30일 1년만에 새로운 싱글 앨범을 발매한다. 우리 음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며 가야금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리고 있는 이수은은 2017년 첫 정규앨범 [이수은의 가곡풍류]를 시작으로 2018년 EP앨범 [East and West]를 선보였다. 우리 고유의 멋과 풍류를 고스란히 녹여 동양과 서양악기의 조화로운 만남을 시도했던 이전 앨범에 이어 피아노의 잔잔한 연주와 가야금의 애절한 선율이 함께 어우러진 이번 크로스오버 앨범은 국악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보수성과 한계성을 뛰어 넘어 대중들에게 전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갈 예정이다. 특히 이번 앨범은 ‘기다림’과 ‘그리움’이라는 내면 깊숙한 감정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았으며 더욱더 깊고 성숙해진 가야금 농현의 미를 느낄 수 있다. 한국 창작음악의 밝은 미래를 양성하고 끊임 없이 연구하는 아티스트 이수은이화 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수은은 현재 이화여자 대학교 한국음악과 겸임교수로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고려대학교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관객들과의 소통에도 힘쓰는 그녀는 국립 국악 관현악단, KBS 국악 관현악당 등 국내 유수 악단과의 협연과 초청 연주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한편, EBS, KBS, 국악방송 등 다양한 미디어 채널에도 출연하며, 더욱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한국 창작음악의 모범적인 미래를 구현하고 있다.이러한 국내외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2018년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악경연대회인 ‘난계국악경연대회’에서 최고의 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전통과 창작을 아우르는 가야금 연주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 연주자 이수은은 오는 10월 3일 한국 문화의 집에서 ‘음악과 춤이 공존하는 이색산조’ 독주회를 가질 예정이며, 10월 16일에는 시인. 화가와 함께하는 즉흥 콜라보 공연 ‘이수은의 창작가야금 4 East and West’ 를 국립 국악원에서 개최한다. 그녀는 이날 이번 앨범 The Emotion의 수록 곡을 관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수록 곡 소개> 01 감정 感情 : The Emotion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늦은 겨울,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음들을 찬찬히 적어 내린 곡이다. 구슬픈 피아노 멜로디를 가야금이 그대로 이어받아 점점 짙고 화려한 화음을 만들어가는 이 곡은 내면 속 깊은 대화로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02 Wheel 하루하루 큰 의미 없이 지내다 보면 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무언가를 알기 위해 달리는 가을들판에 내 몸을 맡겨 스쳐 지나간 일들을 떠올렸다. 잔잔하고 소소했던 일들이 쌓여 결국 지금의 나를 있게 함을 깨닫고 화려한 꾸밈을 주지 않은 가야금 본연의 색을 들려주고자 연주한 곡이다. 03별 헤는 밤별 하나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애절한 가사와 선율로 표현한 가곡 ‘장석진 – 별 헤는 밤’을가야금을 위해 새롭게 작곡된 곡이다어머니를 별에 빗대어 그리워하는 가사의 가곡을 가야금 선율로 유려하게 표현하였고 '기다림'이라는 정서에 이어 '그리움'이라는 정서까지 더해 진한 모성애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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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립국악단 신춘음악회 <경기인물뎐> 3.201. 일시 : 2013년 3월 20일 (수) 오후 7시 30분 2. 장소 : 경기도 문화의 전당 행복한 대극장 3. 문의 : 경기도립국악단 기획실 031-289-6471∼3 http://www.ggac.or.kr/ 4. 예매 : 인터파크 1544-2344 http://ticket.interpark.com 5. 공연소개 2013년 새로운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경기도립국악단 ‘신춘음악회-경기인물뎐’ 2013년 새로운 봄을 맞이하여 경기도립국악단에서 나라의 태평성대와 도민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무대를 마련하였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조선의 왕, 정조대왕을 필두로 경기문화재단에서 선정한 경기도 위인 33인 중 4인(정도전.조광조.이이.정약용)을 사군자에 빗대어 전통음악과 함께 선보인다. 가(歌).무(舞).악(樂)에 화(畵)를 곁들인 공연을 통해 옛 선인들의 기품 있는 정신과 화려하고 웅장한 전통예술을 감각적으로 선사하고자 한다. 전통음악의 진정한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정조대왕과 함께, 태평성대를 꿈꾸며... 수원시에서 선정한 제11대 정조대왕 ‘윤성찬’과 혜경궁 홍씨 ‘한명숙’이 직접 경기도립국악단과 함께 2013년 봄을 맞이하여 신춘하례를 올린다. 웅장한 대북연주와 함께 화려한 봄의 무대가 열리고 그 위로 우렁찬 대취타 행렬에 이어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가 입장하며, 종묘제례악 일무와 교지를 통해 나라와 경기도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다. 경기도립국악단과 박채성 화가의 아름다운 매(梅)?난(蘭)?국(菊)?죽(竹) 이야기 사군자를 테마로 각각의 개성과 특색이 담긴 아름다운 우리 전통음악을 선보이며 이와 어울려 펼쳐지는 화가 박채성의 사군자 퍼포먼스를 통해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공연이 될 것이다. 움츠렸던 꽃들이 각양각색을 뽐내며 다시 소생하는 봄. 경기도립국악단 신춘음악회와 함께 당신의 2013년, 한해의 복을 꽃피었으면 한다. 6. 공연내용 1. 정조대왕 신춘하례 - 대북연주, 대취타, 종묘제례악 2. 매(梅) - 경기민요(매화타령, 창부타령, 경복궁타령) 3. 난(蘭) - 현악합주 ‘도드리’ ,생소병주 4. 국(菊) - 산조합주 & 군무 5. 죽(竹) - 사물놀이, 사자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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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국악관현악단<여름특집 가족음악회> 8. 181. 공연명 : 세종국악관현악단 2012 여름특집 가족음악회 "자! 떠나자, 국악의 바다로!” 2. 일시 : 2012년 8월 18일(토) 오후 7시 3. 장소 : 군포시문화예술회관 수리홀 4. 주최 : 군포시문화예술회관 5. 주관 : 세종국악관현악단 6. 지휘 : 박호성 (세종국악관현악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7. 협연 : 재즈피아노 - 진보라 (천재 재즈피아니스트, 음악방송 MC, 모델) 드로잉쇼 - 김진규 (오리지널 드로잉쇼 예술감독) 동요 - 김나영 (뮤지컬 명성황후 어린이 출연, 전국콩쿨 초등부 1위) 소리 - 정은경, 이지숙 (세종국악관현악단 소리꾼) 택견 - 충주시립택견단 (세계인류무형문화재,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8. 관람료 : 전석 1만원 9. 문의 : 군포시문화예술회관 390-3501~4 / 인터파크 1544-1555 < PROGRAM > 1. 서곡 " 창작관현악을 위한 뱃노래” (작곡 : 박범훈) 2. 어린이 김나영의 동심의 세계와 국악관현악 "통일 여행, 어린이 나라” ( 작곡: 허미경, 이수인) 3. 김진규의 오리지널 드로잉 쇼와 함께 하는 국악관현악 "The Look” (구성 : 박호성) 4. 천재 재즈피아니스트 진보라와 함께 하는 국악관현악 "Korean Ethnic Jazz” 5. 소리꾼 정은경과 이지숙이 부르는 새로 만든 노래와 국악관현악 "추억의 동백섬” (작곡: 백성기) 6. 세계무형문화재 등재 기념 "택견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국혼” ( 구성: 박호성, 정경화 ) 관람을 위한 주요 키워드를 짚어보면, 천재 수식어가 붙는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 - 대중들과 언제나 새로운 교감과 흥겨운 즉흥 연주로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연주. 진보라는 Jazz와 제3세계 민속음악의 접목(Ethnic Jazz)을 통해 나이와 인종을 초월하여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단독공연 외에도 외국 재즈 악단, 한국 음악 연주자, 인도 라가 음악가, 티벳 명상음악가, 클래식 연주자, 남미 퍼커션 연주자, 대중음악가 등과의 협연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세종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은 우리의 음악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위해 종합 공연 예술의 일환으로 새로운 ‘진보라표 재즈’를 보여 줄 것입니다. 무대 예술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오리지널 드로잉 쇼와 최초의 국악관현악 만남! - 마술같은 미술을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김진규 예술감독이 펼치는 화려한 무대 무대 위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화가가 됩니다. 국악관현악과 함께 하는 드로잉쇼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김진규 예술감독이 10년간 연구한 그 자체가 노력의 산물입니다. 그리는 순간의 즐거움 그리고 무대위에서 보여지는 마술같은 미술의 세계는 국악관현악과 함께 더욱더 화려한 쇼로 거듭납니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넌버벌 퍼포먼스로서 그림그리기를 직접 보여주는 독특한 구성의 무대예술은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함께 관객들의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는 새로운 "그림”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드로잉 쇼를 만들고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김진규 예술감독이 사용한 물감의 양보다 몇배 더 흘렸을 그의 값진 땀방울은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서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우리 민족무예 택견의 세계인류무형문화재 등재 기념, 국악관현악과 만나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충주시립택견단의 웅장한 협연 민족무예로서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택견, 199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 택견 인간문화재로 선정되신 정경화 명인은 우리 고유 무예 택견의 전수와 원형정리에 한 평생을 바치신 분으로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택견의 대명사라고 불리시는 분입니다. 더불어 충주시립택견단을 2011년 4월 29일 창단하여 미국, 일본,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 전 세계 각국으로 택견 보급을 위한 공연 및 지도를 하고 있으며, ‘충주세계무술축제’, ‘세종대왕 탄신 615돌 승모제전’, 전주아시아태평양무형문화유산축제, 대한민국민속음악대축제 등 국내 각 지역의 주요행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립택견단 창단이후 200여회의 시범 및 공연을 하고 있으며, 언론매체의 촬영 요청으로 SBS 일요스페셜, MBC 다큐멘터리 특별기획 ‘명인’, EBS의 ‘일인자’, 및 다수와 11월 28일 유네스코에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후 KBS, YTN, SBS, 연합뉴스 등에 출연하였습니다. 중앙경찰학교 택견 강습 및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건국대 등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승과 보급에 기여하고 있으며. 2011년 11월에 세계 유일하게 무예 종목의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 이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써 택견의 전승 및 보급을 위해 국내 활동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택견의 보급을 위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전국대회 각종 수상에 빛나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어린이 김나영의 창작 동요! 우리의 동심을 일깨워주는 창작동요는 언제나 추억 속으로의 여행으로 이어집니다. 각종 전국 동요대회에서 수상하였으며 특히 군포를 대표하는 수리콩쿨에서 1등을 차지한 바 있는 김나영 어린이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국악관현악과 어우러져 더욱더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기운을 북돋아 줄 것입니다. 젊은 소리꾼 정은경과 이지숙이 부르는 새로만든 우리 소리! 새로만든 노래를 현대 감각에 맞게 소리꾼 정은경과 이지숙이 전통적 창법으로 부르면서 관현악과 함께 어울러져 새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연주를 통하여 다시금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대한 고민을 그려봅니다.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일반인들의 정서를 흡수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음악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흥미로운 음악으로 창출되기를 기대하며, 국악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발견하는 열기 가득찬 무대가 마련될 것입니다. 젊은 소리꾼인 정은경과 이지숙의 전통적 발성에 의한 새로 만든 노래는 기존의 민요와 국악가요에 비교하여 감상하는 재미가 관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될 것으로 또 하나의 놓칠 수 없는 볼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여름방학 특집으로 준비 된 이번 공연에서는 청소년을 위해 우리음악의 정의와 대금, 피리, 해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장고 등의 우리악기에 대한 박호성 지휘자의 알기쉬운 눈높이 설명과 친절하고 재치 있는 이야기를 곁들여 감상하는 코너가 특별히 마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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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시상문화체육관광부는 ‘2010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부문별 수상자 6명을 발표했다. 어버이날에 즈음해 해마다 시상하는 이 상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녀를 훌륭한 예술가로 키운 어머니들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을 기리고 자녀 예술교육의 본보기로 삼고자 1991년 제정돼 올해로 20회째를 맞는다. 국악 부문 ▶ 해금연주가 강은일(경희대 겸임교수)씨의 어머니 박옥자(69) 여사도 딸이 예술적인 기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정성과 희생을 다했다. ▶무용 부문 무용가 양정수(수원대 교수)씨의 어머니 정순자(84) 여사는 공무원의 아내로 빠듯한 삶을 꾸리면서도 무용이 인정받지 못하던 척박한 시절에 딸의 꿈을 위해 패물을 팔고 손수 무용복을 지어 입히는 등 지원했다. ▶문학 부문에는 소설가 조경란씨의 어머니 장금례(61) 여사가 선정됐다. 꽃 같은 젊음을 가족에 바친 장 여사는 고된 창작의 길을 걷는 딸에게 언제나 따스한 사랑과 격려로 힘을 불어넣었다. ▶대중예술 부문에는 영화배우 전도연씨의 어머니 이응숙(72) 여사가 뽑혔다. 이 여사는 때론 처절하고 때론 안타까운 딸의 연기변신을 지켜보면서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묵묵히 딸의 선택을 믿어줌으로써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게 했다. ▶미술 부문에는 화가 하태임씨의 어머니 류민자(68) 여사가 선정됐다.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였던 하인두(1989년 작고) 화백의 부인인 류 여사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계속하는 가운데 딸 태임씨와 아들 태범씨를 주목받는 화가와 조각가로 키워냈다. ▶음악 부문 성악가 연광철(서울대 교수)씨의 어머니 허선옥(62) 여사는 농부의 아내로 평생 흙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어린 아들에게 쌈짓돈을 털어 풍금을 사주는 등 아들이 훌륭한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시상식은 김동건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에 보답하기 위한 수상자 자녀 예술인들이 어머니께 바치는 연주, 무용공연 등 사은행사와 그동안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의 애환과 사연 등에 대한 대담이 곁들여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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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꿈꾸다.展 6월1일~12일■ 일 시 : 2010. 6. 1(화) ~ 6.12(토) ■ 시 간 : 오전10시 ~ 오후6시 (월요일 휴관) ■ 장 소 : 의정부예술의전당 전시장 ■ 문 의 : 031-828-5826 음악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서양화가 이순형의 이색테마전시회 展이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오는 6월 1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클래식 음악에서 찾은 영감을 작가의 창의성을 통해 새로운 조형언어로 탄생한 다양한 입체, 평면작품 백여점이 전시된다. 음악과 미술이라는 이형(異形)의 장르가 화폭 속에서 만나 더욱더 음악적이고, 더욱더 미술적인 작품으로 관람객들을 유혹하게 될 이번 전시는 그림 속에서 음악적 선율을 듣고, 그 선율을 따라 다시 관람자 자신만의 회화적 이미지 혹은 영상 세계를 떠올려 보게 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림 안에서 미술 이외의 또 다른 예술 장르를 동시에 만나게 되는 흥미로운 체험과 함께 새로운 미적 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미 3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펼쳐 오고 있는 이순형 작가는 그동안 클래식 음악을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를 다양한 조형방식으로 표현하여 음악과 미술의 이상적 만남을 오랫동안 선보여 왔다. 그리하여 그녀의 화폭 안에서는 크고 작은 음악적 선율이 오르내리며 자유로이 흐르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캔버스 뿐 아니라 영감을 받은 선율을 따라 때로는 나무, 도자기 등의 조형물에도 그 음악성을 담아내고 있어 마치 음악과 미술과 그녀 자신이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내게 있어 음악은 자유와 진실의 통로,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형식에 매인듯하면서도 무한한 언어로 시름을 잊게 한다.”고 말하는 이순형 작가는 실제로도 음악에 대한 무한 사랑과 함께 월간 수필문학, 에세이, 클래식영산 등에 ‘그림이 있는 에세이’ 연재, KBS 제1FM 클래식 방송 ‘나의 사랑 나의 음악’에서 ‘화가가 이야기하는 클래식 음악세계’를 진행하는 등 여러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음악이 있는 미술세계를 전도해왔다. 이번 전시를 두고 이순형 작가는 “예술언어는 이제 음악, 미술, 문학, 영상, 연극 등 각각 다른 예술 장르의 벽을 허물고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다"며 ”이번 展도 통합적 예술체험으로 형체를 보여주는 것 중심의 구상에서 또 다른 판타지를 주고자 한다“고 전했다. 전시기간 중 6월 5일(토) 오후 2시에는 작가와 함께하는 작품 설명회도 진행될 예정이다. 작가로부터 직접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궁금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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