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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

‘창극조’에서 ‘판소리’로

특집부
기사입력 2021.07.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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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성과 직설적인 화법의 통쾌한 남도인문학자 목포대 이윤선 선생의 칼럼이 연재된다. 새롭게 마련된 금요 고정칼럼 이윤선의 현장성 있는 남도인문학에서 남도 풍류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 만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 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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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 남도민속학회 회장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


    1941년 잡지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의 지은이 김태웅 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 명창이 백칠십여 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 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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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개화기 최초 서양식 사설극장 원각사,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졌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 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 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 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 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 시기와 관련된 것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 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 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 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 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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