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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에누리 없는 고서점 ‘엿장수 마음대로’란 말이 있다. 엿장수가 엿을 늘이듯 무슨 일을 제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못마땅한 투로 이르는 것으로, 고서점 주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서 가격은 고서점 주인 마음대로란 말인가. 사실 그렇다. 고서점 주인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고서 가격을 정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수요자인 수집가가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평가 기준에 많은 차이가 있다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다. 고서점 주인이 아무리 합당하다고 생각해 제시한 값이라도 그 책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거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고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책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 책이 누군가에게 팔린다면 그 순간 이것은 합당한 가격이 되는 것이다. 결국 고서는 사고파는 값이 정가다. 호산방에서는 고서의 가격을 정할 때 몇 가지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책정한다. 그 요인이란 그 책이 갖고 있는 희귀성·효용성·시장성 등이다. 우선, 희귀성이란 자료의 희귀한 정도를 말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 35년 전쯤의 일이다. 하루는 어떤 고서점 주인이 내게 아주 귀한 책을 보여주겠다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십 년 넘게 고서점을 했지만, 이런 책은 처음 봅니다.” 주인의 이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책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얼마냐고 물었다. 순간 주인은 조금 난감해 하는 눈치다. 내가 가격을 너무 성급하게 물은 것이다. 그는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내가 책을 펼쳐 보지도 않고 대뜸 가격부터 물었으니 맥이 빠진 것이다. 주인은 조금 멈칫하더니, 아주 귀한 책이라 ○○원은 받아야겠다고 한다. 내가 즉시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도리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 책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어 보이기만 했다. 서점 주인이 내놓은 책은 1898년 영국에서 발행된 비숍(I. B. Bishop, 1831-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었다. 비숍은 영국의 여성 작가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나 여행했다. 남장을 하고 나귀를 타고 다니며 여행할 정도로 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그때의 여행기로,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베스트셀러다. 지금은 많이 알려지고 번역본도 나왔지만, 35년 전쯤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매우 귀한 책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이 책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기에 그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책을 보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장정이 매우 인상적이다. 푸른색 천 바탕에 영문 제목과 저자명을 금박으로 처리하고, 붉은색과 검은색의 태극문양을 압인했으며, 그 옆에 다시 붉은색 네모 바탕에 ‘朝鮮’이란 한자 제목을 금박으로 디자인했다. 그런데 한자 제목인 ‘朝鮮’의 ‘鮮’자가 ‘’으로 뒤집혀 인쇄되었다. 이는 아마 외국인이 편집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잘 몰라 글씨가 뒤집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디자인 차원에서 일부러 뒤집어 놓았다면 이는 대단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사진 78) 나는 고서를 살 때 여태껏 내 입으로 깎아 달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흥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흥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서점 주인에게 가격만 적당하다면 한 푼도 깎지 않고 책을 살 터이니 꼭 받을 가격만 말하라는 암시를 주어 왔다. 그래서 조금 비싼 듯해도 두말 않고 사기도 한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되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주인은 긴장하게 마련이다. 설령 눈앞의 책은 포기한다 해도 다음 것들에 대한 흥정을 미리부터 해 놓는 식이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흥정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주인에게 설명할 틈을 주지 않고, 또 책을 살펴보지도 않고 사겠다고 한 것은 주인과의 기싸움이다. 조금 비싸게 사는 것도 기싸움에서 이기는 한 방편이고, 이것이 결국은 싸게 사는 길이다. 위의 예에서처럼 고서의 희귀한 정도가 가격을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서점 주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효용성이란 책의 활용성을 고려한 것으로, 고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이러한 가치 또한 책에 따라, 이용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가의 수배 내지 수백 배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평가의 일부도 결국은 고서 가격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필가 박연구(朴演求) 선생이 호산방에서 이태준(李泰俊)의 『무서록(無序錄)』을 사 간 적이 있다.(* 사진 79) 그는 이때의 사연을 『책과 인생』 창간호(1992년 3월)에 「쌀 한 가마니 값과 맞바꾼 수필의 정수」라는 글로 발표했다. 그는 이 수필에서, 수필의 정수로서 김용준(金瑢俊)의 『근원수필(近園隨筆)』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무서록』을, 망설임 끝에 쌀 한 가마니 값으로 구입한 가난한 문사(文士)의 호사를 고백했다. 박 선생이 처음부터 이런 수필을 쓸 생각에 『무서록』을 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가까이 두다 보니까 글의 소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무서록』은 범우사에서 문고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선생이 원고료나 인세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면 이 책값보다 훨씬 더 받았을지도 모른다. 안 받았으면 또 어떠한가. 고서란 이렇게 활용하는 것이다. 한편 박 선생이 고백한 대로, 가난한 문사의 처지에서 이 책의 당시 가격 10만 원은 분명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 만약 이 책의 가격이 2~3만 원 정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이 책이 박 선생에게까지 차례가 갔을까. 아마 박 선생과 만나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갔을 것이다. 그래서 고서는 적당히 비싼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꼭 필요한 사람을 기다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시장성이란 수집가의 선호도에 따른 시장 논리를 말함이다. 어떤 특정 분야의 책을 찾는 수집가가 많으면 자연 그 분야의 책값은 오르게 마련이다. 또는 앞으로 누가 이 책을 찾을 것을 예측하여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10~20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외에도 고서 가격을 결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남들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책이라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고서점 주인이 이것을 예견하고 준비해 놓았다면 수집가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집가가 이것을 모두 알아차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알아차린다 한들 주인의 손에 들어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고서 가격은 고서점 주인 마음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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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8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의 길을 걸으며 조선시대에 서점은 서사(書肆)·책사(冊肆)라 불렸고,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서포(書僩)·책포(冊僩)·서점(書店)이라고도 불렸다. 해방 이후 서점이라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현재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책방(冊房)은,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기구였으며, 특히 세종 때는 궁중의 인쇄를 맡아보던 출판기관의 명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은 1908년 고유상(高裕相)이 설립한 회동 서관(匯東書館)이다. 회동 서관은 1897년에 세워진 고제홍 서사(高濟弘書肆)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해조(李海朝)가 번역한 『화성 돈전(華盛頓傳)』을 비롯해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이광수(李光洙)의 『단종애사(端宗哀史)』 등 이백여 종이 넘는 책을 출판하면서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 근대 출판문화를 이끌어 온 주역이다.(도판 55-56) 회동 서관은 출판사와 서점을 겸했을 뿐만 아니라 문방구류의 물품도 판매했다. 우리나라 초창기 고서점의 역사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제1부에서 언급한 쿠랑의 기록으로 미루어 회동서관 같은 서점에서 고서도 함께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오늘날의 고서점은 고서를 사고파는 곳이다. 따라서 일반 서점과는 그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서점을 찾는 고객들은 대개 연구자나 고서 수집가들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고객의 수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또 고서점을 운영하려면 고서에 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럽에는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서점이 수두룩하다. 고서점 주인 중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나 서지학 관련의 저서를 낸 사람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고서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특별하다. 이들 서점들 중에는 여러 방면의 고서를 두루 다루는 곳도 있지만, 문학·역사 등 한 방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서점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서점 주인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서점 경영도 고객 중심이다. 잘 만들어진 도서목록은 학술자료로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고서점의 운영 방식은 대부분 주먹구구식이다. 동화책에서부터 한적까지 두루 취급하는 백화점식이다. 또 대부분의 고서점이 헌책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서 목록을 제작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의 서점 주인에게서는, 고서를 취급한다는 자긍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십 대 때는 도예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었다. 한때 도예 학원을 운영하는 등 이십 대 시절의 모든 정열을 도자기에 바쳤지만, 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도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서른이 다 되도록 방황만 했다. 그 시절 내게 유일한 낙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서울의 여러 고서점을 드나드는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서와 고미술품에 관한 약간의 지식, 이것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서점이다. 궁리 끝에 독립문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주고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사무실이었다. 전화도 월세로 빌렸다. 지금은 전화가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백색전화니 청색전화니 해서 전화 놓기도 어려웠고, 가설비도 무척 비싼 시절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 호산방(壺山房)을 열었다. 이때가 1983년, 내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호산방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조선 말기 서화가 중에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이 있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호를 호산(壺山)이라고도 했다. 나는 일찍이 그의 서화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자기에 깊이 빠져들면서, 장차 도자기 가마를 갖게 되면 당호를 호산방으로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호(壺)’자는 항아리를 뜻하니 도자기 가마의 이름으로는 썩 어울릴 듯했다. 결국 도자기 가마가 아니라 고서점을 차리게 됐지만 고서점하고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막상 가게를 차렸으나 고서화 몇 점에 약간의 책이 전부였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 둔 고서가 커다란 힘이 되었다. 한 권을 팔아 두 권을 사고, 두 권을 팔아 다시 네 권을 사는 식으로 사업을 꾸려 나갔다. 처음에는 아주 힘들고 어려웠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다. 그동안 작은 아파트도 하나 장만하고 세 들어 있던 가게도 인수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필사본과 간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와 문학 관련 양장본이었다. 1992년, 장안평 호산방을 광화문으로 옮겼다. 교보문고 건너편 광화문 우체국 옆 한일빌딩 아케이드, 지금은 센트럴빌딩으로 이름이 바뀐 건물이다. 호산방이 보다 발전하려면 시내 중심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주위에서는 다들 광화문으로 옮긴 것을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광화문과 고서점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는 달리 광화문 호산방은 유명세를 치루고 사업이 나날이 번창해 갔다. 호산방이 점점 안정되어 가면서 고서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도 훨씬 깊어졌다. 취급하는 고서의 수준도 월등히 차이 났다. 단순히 취미로 고서를 수집할 때는 기껏해야 해방 이전의 문학서적 정도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호산방을 시작하고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고 활자본의 감식은 물론 간찰과 필사본의 내용, 더 나아가 누구의 친필인가를 가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한적과 간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래야 가르쳐 주는 선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필사본과 간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호산방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문·호외·육필원고·포스터·광고지·음반·영화필름 따위의 비도서 자료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 자료는 책 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호산방 사업과는 무관하게 수집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말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고서점에 딱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고서점 주인은 깎아 줄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가격을 부르고, 수집가는 무조건 반으로 뚝 잘라 깎고 본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다. 사실 고서점에서의 에누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생리적으로 이러한 흥정을 싫어해서 길거리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남들만큼 흥정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단골 고서점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호산방을 운영하면서 처음부터 정찰제를 실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과연 손님들한테 먹혀들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음 호산방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 한 손님이 들렀다. 한참 동안 책을 살피더니 십여 권의 책을 골라 놓는다. "이거 다 얼마요?” "책 뒤에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책 가격을 본 손님의 표정과 말투가 곱지 않다. "얼마면 되겠네” 한다. 내가 정색을 하고, "우리 서점은 정찰제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골라 놓은 책들을 휙 내팽개치듯 하고는 돌아갔다. A 선생이었다. 고서 수집가로는 꽤나 알려진 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호산방에 몇 차례 더 들르고서야 정가대로 책을 사 갔다. 그때의 표정이 마치 땡감을 씹은 듯했다. 그 후로도 그는 나의 원칙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렇듯 A 선생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껄끄러운 사이였다. 나는 책을 팔 때는 분명 고서점 주인이지만 다른 고서점에서 책을 살 때는 손님이 된다. 이때 가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물러서곤 했다. 그 책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물론 비싸다는 말도 절대 하지 않는다. 고서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인데 어떻게 내 기준으로 남의 물건을 싸다 비싸다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차이가 날 뿐인 것이다. 고서점이란 겉모습으로는 매우 고상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어설픈 의상을 입히고 그 의미를 확대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고서 매매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문화적 의미도 없다. 고서를 팔고 사는 것은 말 그대로 비즈니스다. 그런 비즈니스에 굳이 문화적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아마추어의 어설픔일 뿐이다. 나는 당당한 프로를 지향한다. 억지로 의미를 끌어다 붙이기보다는, 고서 매매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지금까지 대다수 고서점에서의 고서 매매 행태는 비문화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님이 몇 권을 주섬주섬 골라 주인 앞에 내놓으면 적당히 흥정하여 팔고 사는 것이 우리 고서점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이라도 이 손님에게 부르는 값과 저 손님에게 부르는 값이 다른 경우도 생긴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상행위인가. 이래 가지고는 결코 고서점의 위상과 신뢰를 높일 수 없다. 나는 정찰제만이 공정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 판매가격을 공개함으로써, 고서 자료의 원활한 순환이라는 측면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판매 가격의 공개는 매입 가격의 암시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매물이 나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고서점은 좋은 고서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개인 수장가들의 서재에 숨어 있는 자료들을 끌어내 그것을 순환시켜야 고서점도 살고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판매 가격의 공개는 그런 의미에서 매물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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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7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끝나지 않은 소동 지금까지 난고문학관 소장 김병연 친필 관련 자료 넉 점의 진위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들 중 「선생부지하」 「금강산」 「반휴서가」는 김병연의 친필이 아닌, 최근에 만들어진 가짜 글씨로 결론 내릴 수 있다. 또 김병연의 친필 간찰 영인본이라 하는 「내우혜서」는 ‘난고 김병연’이 아닌 ‘김병연’과 동명이인의 글씨를 영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간에는 김병연의 친필이라고 소문난 글씨가 종종 나돌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문한 탓인지 그의 친필이라고 생각되는 필적을 아직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시를 지었으면서도 그의 친필이 아직까지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까닭은 평생 방랑생활로 생을 마감한 김병연의 생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김병연의 친필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의 친필이 세상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설명한 객관적인 요소를 모두 증명해 보이지 않고는 그의 친필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자료의 고증은 냉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사실을 통해, 모든 역사 연구는 정확한 기록과 자료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처럼, 역사란 기록이다. 또 기록은 역사가 된다. 그러나 그릇된 기록이 그릇된 역사를 만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자, 2003년 12월 17일자 『강원도민일보』 사설에는 ‘난고문학관의 가짜 김삿갓 친필’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묻혀 있는 영월에 어렵사리 문을 연 난고문학관의 그의 친필 넉 점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돼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가짜’를 주장한 이가 한국 고서 연구의 권위자이고, 사석도 아니고 『고서연구』에 논문을 게재하면서 밝힌 것이니까 이를 영월군 관계자의 말처럼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친 진품’이라며 가볍게 일축하긴 어렵다. 난고문학관 측이 일부러 ‘가짜’를 ‘진짜’라고 이제껏 속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문학관 측, 즉 영월군이 친필 넉 점을 사들이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 위작을 진품인 것처럼 속였거나, 가짜를 진짜로 잘못 알고 영월군에 ‘납품’하는 실수 또는 고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경위를 밝혀내 잘못됐으면 시인하는 것이 지금 이 불을 끄는 최선책이다. ‘가짜’를 제기한 이는 "김병연(김삿갓)의 위작 글씨가 버젓이 난고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며 우리 문화의 수치”라고 폭로 배경을 밝혔다. 그의 말처럼 ‘가짜’가 사실이라면,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계승 발전시켜 보려던 지역 역량이 비웃음당한 꼴이다. 그보다, 지역주민들이 누려 보려던 지방문화 향수 그리고 지역의 문화정서에 대한 문화사기꾼들의 폭력이다. 어떻게 만든 난고문학관인지, 그리고 들어간 수십억 원이 누구의 돈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난고문학관의 명예가 곤두박질하는 것은 물론 김삿갓의 고장답게 적어도 그의 친필 몇 점을 갖추어 놓았다고 자랑하던 지역주민의 긍지가 먹칠당하는 이 지경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의 작품을 문학관이 소장하기까지 나름대로 고증과 조언을 받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누구의 안목이나 전문성을 비방하거나 원 소장자의 컬렉션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짜’를 주장한 이가 인용한 문헌자료나 그의 안목에 대해 무조건 동의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원군과 추사를 조심하라”는 말이 명언이 되다시피 하고 있는 고문서·고미술품 시장의 흑막에,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지자체가 덜컥 걸려든 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추사의 글씨 오십 퍼센트가 위작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마당에 김삿갓 글씨라고 진품만 돌아다닐 리는 없다. 난고문학관의 ‘친필’이 그 시장에 떠도는 ‘가짜’라는 것이 이번 논란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문제의 친필 입수 경위를 밝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역의 문화실추를 회복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지방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봉으로 삼고 있는 고문서·고미술품 거래 관행에 경종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후 영월군에서는 이렇다 할 입장이나 대책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이자 2004년 2월 5일 ‘난고 김삿갓 친필 관련 진위 여부에 대한 답변’을 영월군 홈페이지 등에 내놓았다. 이 사태가 알려지고 50여 일 만에 영월군의 공식입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밝혀진 것이다. 여기에서 영월군은 "현재 전시된 김삿갓 친필은 총 네 종인데 원본이 두 종, 이미 공개되었지만 원본이 분실되거나 소장자를 알지 못하는 복사본과 영인본이 각 한 종 있다”고 말했다. 즉 "「선생부지하」와 「금강산」은 친필이고, 「내우혜서」는 영인본, 「반휴서가」는 복사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반휴서가」 등 세 종은 친필이고, 「내우혜서」 한 종은 영인본이다”라고 했던 종전의 주장과 다른 말이다. 영월군은 「선생부지하」 시문에 대해, "정근호 선생 조부의 유품으로, 이미 KBS 〈진품명품〉 프로에서 진품으로 판정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친필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품명품〉은 어디까지나 텔레비전 쇼일 뿐이다. 2003년 9월 24일 『동아일보』 사회면에 ‘케이비에스 〈진품명품〉 칠억 도자기는 가짜’란 제목 하에 "KBS 〈TV쇼 진품명품〉이 최근 역대 최고인 칠억 원의 감정가를 매겼던 도자기가 뒤늦게 가짜로 판명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것은 〈진품명품〉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또한 영월군은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가 같은 종이라는 지적에 대해, "「내우혜서」는 영인본이고 「반휴서가」는 복사본”이라며, 「반휴서가」에 대해서는 종전의 친필이라는 주장에서 복사본이라고 번복했다. 그러나 난고문학관 설명문에는 개관 당시부터 친필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또 영월군은 처음부터 이것을 친필이라고 언론에 발표했었다. 그러던 영월군이 이제 와서 복사본이라고 번복하여 발표한 이유는 뻔하다. 이 두 글씨를 진본이라 증명하기 위해서는, 두 곳에 사용된 종이가 서로 다른 종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글씨의 종이가 같은 종이라면 적어도 둘 중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이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영월군에서는 뒤늦게 「반휴서가」가 친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초의 친필 주장을 복사본이라고 번복했다. 그러나 「반휴서가」는 영월군에서 처음 말한 대로 친필임에 틀림없다. 다만 난고 김병연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근래에 쓴 ‘친필’인 것이다. 고서화를 포함한 고미술품의 가짜 소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것을 만드는 수법도 다양해져 전문가들도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국보 274호였던 ‘거북선 별황자총통(別黃字銃筒)’. 1992년 8월, 해군은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 총통을 발굴해내는 개가를 올렸다. 사흘 만에 국보로 지정된 이 총통은 그러나 1996년 6월 가짜로 밝혀졌다. 진급에 눈이 먼 한 해군대령이 골동품상과 짜고 가짜를 만들어 바다에 빠뜨린 뒤 건져낸 것이다. 2003년 10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성리학의 세계」전에 출품될 예정이던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의 유묵(遺墨)이 가짜로 판명된 일이 있었다. 또 「2005 서울 서예비엔날레」의 출품작 일부가 위작 논란에 휘말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장에서 철거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위작들은 각종 전시회에 출품되어, 별 탈 없이 전시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진품으로 행세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 차원의 문화행정에서도 실수를 범하는데, 영월군의 행정력과 문화적 안목으로는 김삿갓 가짜 글씨를 알아내기란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실수가 있다 해도 고치면 되는 것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난고문학관에는 문제의 가짜 글씨 넉 점이 아직까지 그대로 진열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사진 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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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6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내우혜서(內友惠書)」 간찰과 「반휴서가(半虧書架)」 시문 먼저 「내우혜서」 간찰을 살펴보자.(*사진 71)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김병연이 강릉 김 석사(碩士)에게 보낸 편지로, 1857년 3월 19일에 쓴 편지다(영인)”라고 씌어 있다. 이 간찰에는 ‘김병연(金炳淵)’이란 이름이 씌어 있는데,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난고 김병연의 간찰이라고 주장함은 억측에 불과하다. ‘병연(炳淵)’이란 이름자는 아주 희귀한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난고 김병연이 살던 시대에 ‘김병연’이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씨를 난고 김병연의 간찰로 단정 짓기 위해서는 글의 내용에서 이 글이 난고 김병연이 쓴 것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적어도 편지를 받은 사람과 난고의 친분관계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간찰의 내용은 일상적인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편지를 쓴 이가 난고 김병연임을 입증할 만한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김 석사와 김병연의 친분관계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설령 이것이 난고 김병연의 친필 편지라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김병연’이라는 이름이 적힌 간찰은 적지 않게 발견되기도 하며, 김씨 집안의 족보를 뒤지다 보면 ‘병연’이라는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편지 끝 부분에 ‘김병연’이라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글씨는 난고문학관의 설명문대로 영인본이 틀림없다. 영인본이란 책이나 글씨 따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인쇄한 것을 이른다. 영인본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종이가 필요한데, 「내우혜서」의 경우에는 옛 종이를 사용했다. 물론 이것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도리어 옛 종이를 영인에 사용함으로써 사실감을 높이려 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서를 전시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인에 사용한 종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다음에 설명할 「반휴서가」가 최근에 만들어진 글씨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반휴서가」 시문(*사진 72)에 대한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1840년 후반에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서재를 소재로 쓴 시”라고 설명돼 있다. 이는 전남 동복의 향토사학자 M씨의 「김삿갓 초분지(初墳地)에 대한 고찰(考察)」(1999)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논문은 제1회 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논문 공모전에서 입상한 논문이다. M씨는 이 논문에서 「반휴서가」를 김병연의 친필이라 전제하고, "1840년 후반에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서재를 소재로 쓴 시”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다. 「반휴서가」의 내용을 논하기 이전에, 「반휴서가」의 글씨가 김병연의 친필임을 먼저 증명해 보였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약 「반휴서가」가 김삿갓의 친필이 아니라면 그의 주장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강원대 남윤수 교수는 「반휴서가」 시에 대해 "운자(韻字)도 맞지 않으며, 마지막 결구(結句)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강촌(江村)」의 일부를 적고 있는데, 이는 시도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다. 여기에 글씨 또한 치졸하여 한눈에 거슬리는 작품이다. 이러한 지적 이외에도 「반휴서가」가 김병연의 친필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나는 앞서 「내우혜서」의 설명에서, 영인에 사용된 종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가 같은 지질의 종이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반휴서가」가 최근에 쓴 글씨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반휴서가」가 옛날에 쓰인 글씨라면 그 종이가 「내우혜서」 영인에 사용된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를 같은 종이로 보는 이유는, 첫째 이 두 종이가 같은 제지소(製紙所)에서 만들어졌고, 둘째 원래 같은 공책에 묶여 있던 종이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의 두 종이가 같은 제지소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발초자리로 알 수 있다. 발초자리란, 종이를 뜰 때 대나무 발을 사용하는데 이때 밭고 성긴 정도가 줄 모양으로 나타나는 무늬 즉 종이의 결을 말한다. "이 발초자리의 모양은 제지 작업 여건에 따라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작업 조건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한지(韓紙) 장인 장용훈(張容熏) 선생의 설명이다. 즉, 「반휴서가」와 「내우혜서」의 종이에서 이 발초자리의 무늬가 같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이 두 종이가 원래 같은 공책에 묶여 있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반휴서가」의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종이에는 오른쪽 약 일 센티미터 정도 세로로 접혔던 흔적이 길게 나 있다. 또 거기에는 약 팔 센티미터 간격으로 뚫린 네 개의 송곳 구멍 흔적이 있다. 종이의 윗부분은 원래 모습 그대로이고 아랫부분은 찢긴 흔적이 있어, 원래는 이보다 조금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종이는 공책에서 뜯어낸 종이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구멍 네 개의 흔적은 한적을 꿰맸던 실 자국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려 나간 아랫부분에 구멍 하나를 더해 원래는 구멍이 다섯 개였을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한적은 주로 다섯 바늘로 꿰매는 오침안정법으로 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종이의 원래 크기는 세로 약 삼십오 센티미터, 가로 약 이십이 센티미터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난고문학관 진열장에 전시된 자료를 눈대중으로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다. 난고문학관 이층 전시실에는 「내우혜서」와 「반휴서가」 글씨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제 이 두 종이가 같은 종이라는 결정적인 사실을 증명해 보일 차례다. 「반휴서가」 오른편에 전시된 「내우혜서」 글씨를 시계방향으로 구십 도 돌려 보면 두 종이에 나타난 얼룩 자국을 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둘 다 마치 어린애가 요에 오줌을 싸 놓은 듯이 얼룩져 있다. 이것은 고서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물이나 빗물 따위가 스며들어 얼룩진 것으로, 이 얼룩의 모양은 같은 책에 묶여 있던 종이라면 닮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두 종이가 희한하게도 닮은 얼룩 자국을 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공책에 묶여 있던 빈 종이에 누군가가 최근에 「반휴서가」를 쓰고, 다른 종이 한 장을 「내우혜서」 영인본에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휴서가」가 김병연의 친필이 될 수 없다는 명확한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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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5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금강산(金剛山)」 시문 「금강산」 시문의 경우,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1850년(1851년의 잘못─저자) 화순 동복에서 금강산 시회(詩會)의 일부를 써 놓은 친필”이라고 씌어 있다. 시문의 말미에는 "道光三十一年金炳淵書于於也同福”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金炳淵書于於也同福”은 "김병연이 동복에서 쓰다”라는 뜻으로 쓴 문구로, 어법상 맞지 않는다. 여기서 ‘於也’ 두 자가 빠져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되는데, 과연 김병연이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강원대학교 남윤수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다음으로, 이 글은 도광 3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도광 연호는 30년(1850)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도광 31년’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용되지도 않았다. 혹시 김병연이 실수나 착각으로 ‘도광 31년’이라 썼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난고문학관 설명문에 ‘도광 31년’을 ‘도광 30년’에 해당하는 ‘1850년’이라고 표기한 것은 혹시 이를 염두에 둔 궁색한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시문은 김병연의 시 「금강산」의 일부로, 노승(老僧)의 시에 답한다는 「답승금강산시(答僧金剛山詩)」의 대구시(對句詩)이다. 시인 정공채(鄭孔采)의 『오늘은 어찌하랴—김삿갓 시의 인생』에는 이 화답시가 모두 열네 번 오갔는데, 난고문학관의 「금강산」에는 다섯 번의 화답이 실려 있다. 알려진 대구시와 비교하면 순서가 뒤바뀌고 많은 부분 생략되었으며, 특히 셋째 연에서는 노승과 김병연의 화답이 서로 바뀌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뀐 꼴이 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이 난고문학관의 설명처럼 모두 김병연의 친필이라면, 우선 이 두 글씨가 같은 사람의 필체임을 판명해야 한다. 필체를 대조하는 데는 예리한 감식안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십대에 쓴 글씨와 오륙십 대에 쓴 글씨를 대조해 보면 같은 사람의 글씨라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 해서(楷書)로 쓴 글씨와 초서(草書)로 쓴 글씨는 대조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은 1850년과 185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어 시차가 거의 없고, 서체도 행서(行書)에 가까워 대조하기가 용이한 편이다. 글씨를 대조하기 위해서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보았다. 「선생부지하」의 끝에서 두번째 행과, 「금강산」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의 ‘金’자를 보자. 첫 획과 두번째 획을 보면, 「선생부지하」에서는 첫 획이 두번째 획 위에 있고 「금강산」에서는 두 자 모두 첫 획이 두번째 획 아래에 있다. 다음으로 「선생부지하」의 끝에서 두번째 행과 「금강산」 끝 행의 ‘書’자를 보자. 「선생부지하」에서는 정자(正字)인 반면에 「금강산」에서는 약자(略字)로 되어 있다. 이처럼 ‘金’자와 ‘書’자를 비교해 보면 「선생부지하」와 「금강산」이 서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道光’ ‘三十’ ‘年’ ‘炳淵’ ‘同福’ ‘山’ 등의 겹치는 글자를 살펴보면 「선생부지하」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보이고, 「금강산」의 글씨는 오른쪽으로 쏠리고 있다.(*사진 70) 이렇게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글씨를 비교하여 검토해 본 결과 이를 같은 사람의 글씨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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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4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소동의 시작 고서화를 보는 눈에는 터럭만큼의 착오도, 한 점의 용서도 있을 수 없다 해서 선인들은 ‘금강안혹리수(金剛眼酷吏手)’라는 말을 썼다. 즉 ‘금강야차(金剛夜叉) 같은 눈매와 혹독한 관리의 솜씨’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안목이란 고서화의 진위를 가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 작품 하나하나가 예술로서 얼마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을 판단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즉 고서화를 감식해내고 그 참맛을 느끼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고서화의 진위를 가려내는 일은 그것을 감상하기 위한 기본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만큼 가장 기초적인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고서 수집가나 연구자들이 고서 수집에서 가장 난감해 하는 경우는 간찰이나 필사본을 대할 때일 게다. 여기에는 물론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누군가의 친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항상 뒤따르기 때문이다. 또 이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기도 한다. 글씨의 진위를 알아내는 방법에 딱히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글씨를 접해 보고 나름대로 연구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듯싶다. 다만 연구 방법에도 요령은 있게 마련인데, 다음에 이어질 김삿갓 가짜 글씨 사례는 고서를 감정하는 요령에 관한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선인들의 시편(詩片) 하나, 간찰 하나에서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본다. 또 이들의 친필을 통해 마치 선인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설령 그 글씨가 예술적 경지를 썩 갖추고 있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누구누구의 친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흠모의 정을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박물관에서 주로 접하게 되는데, 박물관은 인간사회의 문화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로, 학문적 계몽은 물론 사회적 계몽을 위한 곳이다. 2003년 10월 11일 영월군에서는 조선 말기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시세계를 기리고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난고문학관을 세웠다. 이곳은 김병연의 생가 터와 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난고문학관 개관식에 참석하고자, 영월읍 내에서 『K일보』 P기자를 만나 함께 길을 나섰다. 고씨동굴을 지나 옥동에 들어서자 가을 들판이 펼쳐진다. 왼편으로 옥동천을 따라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감흥이 새롭다. 옥동은 고려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가 있었던 곳으로,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옥(獄)’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옥동(獄洞)’이라 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다 해서 ‘옥동(玉洞)’으로 바꿨다 한다. 절벽의 가을 단풍도 좋지만 겨울의 설경도 그만이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옥동을 지나면 곧 고지기재가 나온다. 재를 넘어 이삼 분 달리면 폐교된 와석분교가 있다. 와석분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산길로 접어들면 든돌·싸리골·노루목으로 이어지는 약 5~6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내가 박물관 터를 잡기 위해 영월을 찾아다니던 34~35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숨겨진 비경이었다. 이때만 해도 소달구지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그런 산길이었다. 난고문학관은 이 계곡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영월군에서는 이 일대를 ‘김삿갓 계곡’이라 이름 짓고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문학관 광장에서 개관식을 마치고, 건물이 좀 비좁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전시실에는 ‘김삿갓 친필 글씨’라는 설명과 함께 모두 넉 점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이 나왔다. 가슴이 뛰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쥐똥을 씹은 기분이었다. 동행한 P기자에게 어딘가 마땅찮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했다. 다음날 영월군 문화관광과 C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삿갓 글씨에 대한 나의 의견을 조심스레 말했다. "내 눈에는 글씨 넉 점 모두 어딘가 이상해 보이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C과장으로부터, 전문가에게 의뢰해 고증을 거친 작품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 보라고 재차 충고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허튼소리 말라는 투였다. 그날 이후에도 그러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나는 다시 L계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난고문학관 설립 계획에서부터 개관까지 모든 사업의 실무 담당자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 역시 C과장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날부터 이에 관한 글을 준비해 그 해 겨울 『고서연구』 제21호(2003년 12월)에 「난고문학관 김병연 친필 관련 자료의 진위에 관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다. 물론 원고를 송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C과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金笠)의 본명으로, 순조 7년(1807)에 경기도 양주의 안동(安東)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고, 입(笠) 또는 삿갓은 속명이다. 홍경래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다가 반군에 항복한 김익순(金益淳)의 손자로, 난이 진압되자 익순은 사형을 당하고 일가는 멸족했다. 이때 병연의 나이 여섯 살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게 되었다. 그 뒤 익순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자 형제는 아버지 안근(安根)이 살고 있는 양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불과 일 년 만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고 어머니 함평(咸平) 이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후 어머니는 강원도 영월로 옮겨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았다. 스무 살 때에 장수(長水) 황씨와 결혼하여 장남 익규(翼圭)를 낳았다. 그 후 집안 내력을 알고는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방랑길에 나섰다. 사 년 만에 귀향하여 일 년 남짓 머물 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다가 철종 14년(1863)에 57살을 일기로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 시문 난고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위 ‘김삿갓 친필’은 「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 시문과 「금강산(金剛山)」 시문, 「내우혜서(內友惠書)」 간찰, 「반휴서가(半虧書架)」 시문 등 모두 넉 점이다.(*사진 68) 먼저 「선생부지하」(*사진 69) 시문을 살펴보자. 난고문학관 설명문에는 "이 친필 시는 이서면 장항리(노루목)가 고향인 서예가 우창 정근호 선생이 조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으로 95년 5월 21일 KBS 〈진품명품〉 프로에서 김삿갓의 친필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김삿갓이 유랑하다 생을 마감한 곳이 화순 동복 구암리였음을 뒷받침할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씌어 있다. 우선 이 시문의 말미에는 "1850년에 난고 김병연이 동복여소에서 쓴 시묵(試墨)이다(道光三十年蘭皐金炳淵書于同福旅所試墨也)”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를 김병연의 친필로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과연 김병연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기록으로 남겼겠느냐 하는 점이다. 김병연은 세상을 등지고 평생 방랑생활을 한 사람이다. 자신의 신분과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면서, 이처럼 ‘난고 김병연’이라고 호와 이름을 자랑스레 밝힌다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어딘가 어색하다. 둘은, ‘도광(道光)’이란 청나라 연호를 썼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사회에서 통용되던 연호로, 관변문서(官邊文書)나 족보의 서문, 발문, 또는 행장(行狀), 비문(碑文) 등 예와 격식을 갖춘 기록문에서 그 사용한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생 방랑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글로써 비판하던 김병연이 굳이 중국의 ‘도광’ 연호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음으로 「선생부지하」 글씨의 호불호(好不好)에 대해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글씨는 김병연이 쓴 것만큼 결코 잘 쓴 글씨가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 김병연의 필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혹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의 글씨가 얼마만큼 잘 쓴 글씨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글씨의 좋고 나쁨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호불호란 글씨의 잘 쓰고 못 쓴 정도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이고 어떤 글씨가 잘 못 쓴 글씨일까. 이것은 말로써는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이를 분별해내는 심미안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심미안이 어느 정도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짜 글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결코 잘 쓴 글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호불호를 볼 수 있는 심미안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신석우(申錫愚)는 『해장집(海藏集)』의 「기김대립사(記金笠事)」에서 김병연의 글씨에 관해, "매일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그치지 않고 제자백가의 글을 베끼는 붓을 쉬지 않았다. 필법이 또한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고 전하고 있다. 신석우는 한때 김병연과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고, 훗날 한성부판윤과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신석우가 쓴 글의 내용은 신뢰하기에 충분하며, 그의 글씨를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김병연의 글씨를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고 평한 대목에서 김병연의 글씨가 뛰어났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품격이라는 것을 계량해 보일 수는 없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글씨임에는 틀림없다. 난고문학관의 「선생부지하」 글씨는 이 수준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이 글씨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잘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누구의 글씨를 흉내내고자 하여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체로 자유롭게 썼기 때문이다. 가짜 글씨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본(母本)을 모사(模寫)하는 방법이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모본을 참고로 하여 모사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모본을 유리판 사이에 놓은 뒤 그 위에 종이를 얹고 유리판 밑에서 형광등 불빛을 비추어 그대로 복사하듯이 모사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이미 알려진 유명인의 글씨 위작에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모두 비벽(鄙僻)과 갈필(渴筆)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벽이란 글을 쓸 때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관으로, 일종의 갈겨쓰는 버릇을 말한다. 또 갈필이란 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달필(達筆)이나 속필(速筆)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러나 모사한 글씨에서는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글씨의 꼴을 흉내내는 데 급급하다 보니 속도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것인데, 이 방법은 모본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필체대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김병연의 경우처럼 친필이 존재하지 않아 모본으로 삼을 만한 자료가 없을 때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때문에 어떤 필체로 쓴들 그 인물의 필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글씨는 구별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가짜 글씨에는 앞에서 말한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지 않는다. 「선생부지하」 글씨에서는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필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짜 글씨를 가장 쉽게 판별해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비벽과 갈필이다. 물론 이것은 육안으로도 알아볼 수 있으나, 이를 더욱 쉽게 판별하는 방법은 형광등 불빛이나 햇빛에 비춰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때 필력이 있는 글씨는 먹 자국이 거침이 없이 자연스러운 데 반해, 필력이 떨어지는 글씨, 즉 가짜 글씨는 속도감이 없고 필치가 부자연스럽다. 또 더러는 개칠(改漆)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기도 한다. 「선생부지하」 같은 시문이나 간찰은 봉투에 넣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관례이다. 물론 처음에는 봉투에 넣어져 있었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봉투는 분실되고 안의 내용물만 남아 있는 일도 흔하다. 「선생부지하」의 경우에는 봉투는 없고, 접혔던 부분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등 손상된 흔적이 있다. 이런 문서는 보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접힌 채 보관되기 때문에, 외부의 여건에 의해 종이가 손상을 입었다면 그 부위가 접혔던 겉 부분이 더 크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종이를 펼쳤을 때, 겹쳐서 접었던 부위가 규칙적으로 손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문은 접혔던 곳의 손상 부위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상된 것으로는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선생부지하」 시문은 배접이 되어 있다. 배접이란 글씨를 쓴 종이나 천 뒷면에 다른 종이나 비단 따위를 겹쳐 붙이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것은 표구의 한 과정으로, 작품의 보관 측면에서 보면 굳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종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배접을 할 수도 있지만, 배접을 하면 그만큼 진위 감정에는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위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 중 하나다. 「선생부지하」 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의 일부와 김병연의 시로 알려진 두 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김병연이 자신의 시문을 언제 어디서 썼다는 것을 밝힐 정도로 예를 갖추고 도연명의 시를 함께 적어 놓은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또 이 세 편의 시를 구분하지 않고 연결하여 쓴 것도 그렇다. 강원대 한문교육과 남윤수(南潤秀) 교수는 "내용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을 김삿갓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평했다. 설령 「선생부지하」가 누군가의 친필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김병연의 친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가 또 있다. 이 글씨가 김병연의 친필이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의 또 다른 필적과의 대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 떠도는 김병연의 필적이란 하나같이 근거 없는 것뿐이므로 대조 작업조차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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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3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한 삼십 년쯤 됐을까. 호산방 손님 중에 젊은 화가 H씨가 있었다. 하루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을 들고 와 자랑했다. 1955년 10월 산호장(珊湖莊)에서 발행된 박인환(朴寅煥)의 『선시집(選詩集)』이었다.(* 사진 64) 원래 그 책은 1955년 10월에 출간되어 서점에 배포되기 직전, 인쇄소 화재로 모두 불탔다. 그래서 이듬해인 1956년 1월에 다시 제작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박인환 연구자나 몇몇 수집가 정도다. 박인환의 『선시집』은 1956년 1월에 다시 초판본이 출간되었으며, 표지는 호부장(糊付裝)으로 되어 있다. 호부장은 제본에서 옆을 매는 방식의 하나로, 속장을 철사로 매고 표지를 싼 다음 표지째 함께 마무리 재단을 하는 제본 방식이다. 그런데 H씨가 가지고 있는 『선시집』은 하드커버의 고급 양장이었다. 판권의 발행일자는 ‘1955년 10월’로, 바로 화재 직전에 출판된 오리지널 판본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 판본은 처음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 책에는 저자가 시인 장호강(張虎崗)에게 증정한 친필 서명이 있었고, 그 옆에는 만화가 김의환(金義煥)이 직접 그린 박인환의 캐리커처가 있었다. 또한 면지와 속표지 그리고 뒤표지 면지 등에는 김광주(金光洲) 이진섭(李眞燮) 송지영(宋志英) 박거영(朴巨影) 차태진(車泰辰) 김광식(金光植) 조영암(趙靈巖) 등의 친필 메모와 함께 ‘1956년 1월 16일’에 썼다는 기록도 있었다. 또 같은 날짜의 『한국일보』 서평이 스크랩되어 붙어 있었다. 이로 미뤄 본다면 1월 16일 출판기념회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지인들이 이 책에 친필 축하 메시지를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65~67) 어쨌든 박인환은 화재 직전에 이 책을 인쇄소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고, 출판기념회 때 이 오리지널 판본을 장호강에게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화재를 피한 오리지널 판본이 몇 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책이 유일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여러 문인들의 친필 메시지가 적혀 있다는 것은 그때 이미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잘 말해 준다. 寅煥이 인환이가 冊가게에서 처음 만난 그 寅煥이가 十年을 하로같이 詩 속에서 詩를 찾으며 읊으며 용하게도 오늘까지 뻗혀왔다는게 진정 반갑구나. 소설가이자 당시 언론인이었던 송지영의 축하 메시지다. 이 메모에 등장하는 ‘책가게’란 박인환이 종로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를 말한다. 박인환은 1945년 해방을 맞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말고 그 해 말 종로에 고서점 ‘마리서사’를 차렸다. 마리서사란 이름은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리 로랑생은 19세기 프랑스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연인이기도 하며, 당시 몽마르트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싱싱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화가였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을 만나고 많은 예술적 자극을 받아 시를 썼으며, 연인에게 바치는 시 「마리」를 남기기도 했다. 박인환이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을 통해 프랑스 문학과 그 예술적 삶을 지향했음은, 박인환 아내의 회고나 김수영(金洙暎)의 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후 마리서사는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모태이자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송지영과 박인환은 이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생활의 방편이라기보다 문학 교류의 한 장(場)으로 여기면서 운영했던 것 같다. 그곳에 진열된 책 대부분은 그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과 일본의 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김수영은,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운영하던 두 해 남짓 동안이 "박인환이 제일 기분 내던 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H씨가 소장한 『선시집』 오리지널 판본은 인간 박인환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는 책이다. 따라서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책이라면 누구든 욕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날 나는 안복(眼福)을 누린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는 이같은 귀한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귀한 장서를 내놓으라고 말한 적은 없다. 내가 욕심나는 책이라면 남도 귀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질 텐데 어떻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껏 하는 소리가, "이다음 책을 처분할 의사가 있으면 내게 제일 먼저 알려 주시오” 하는 정도다. 그리고 이삼 년 후, H씨로부터 고서 일부를 정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그림공부를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삼사백 권의 문학서적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박인환의 『선시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 책 한 권 때문에 삼사백 권의 책을 산 셈이라 말해도 틀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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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2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1987년 3월, 어느 고서 경매전에서의 일이다. 『매창시집(梅窓詩集)』이 출품됐다. 매창은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으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부안(扶安) 기생이다. 경매전에 출품된 『매창시집』은 매창의 한시를 1957년에 시인 신석정(辛夕汀)이 번역한 그 친필원고본이었다. 십육절지의 갱지 육십여 장에 만년필로 썼는데, 출품자는 이것이 신석정의 친필원고인지를 모르고 경매에 출품했다. 나는 이 『매창시집』을 보는 순간 부안의 명기(名妓)를 떠올렸다. 매창에 관한 신석정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올라, 혹시 신석정의 원고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자마자 서문 끝 부분에 "丁酉比斯伐艸舍에서 辛夕汀”이란 서명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 글씨는 흘림체로 씌어 있어 ‘신석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 판독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출품자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매 마감 시간이 임박해 입찰 신청을 하려고 하니 누군가가 먼저 신청을 해 놓았다. 경합이 되었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경합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석정 원고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자만한 탓도 있다. 모든 경매가 그렇지만 경매에서 이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건이 욕심나면 무조건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최고가를 적어 내야 한다. 『매창시집』은 욕심을 내볼만한 책이라 소신껏 가격을 적어 냈다. 곧 신청이 마감되자 P선생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 신석정 원고본을 구했다!” P선생은 고서 수집에 일가를 이룬 분으로, 특히 금석문(金石文) 감식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분이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P선생이 상당히 높은 가격을 써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P선생은 자신만의 단독 입찰인 줄 알고 경매 접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매장에 한바탕 폭소가 쏟아졌고, 이렇게 해서 나는 『매창시집』을 내정가 이만 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이 책은 S박물관으로 들어갔는데, 가격은 구입가의 수십 배로 뛰어 있었다. 고서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구입 가격의 수십 배 되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매전에서도 눈이 밝으면 가끔 ‘땡잡는’ 수가 생긴다. 서점 주인이 귀한 책인 줄 알면서도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응당 고마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고맙다는 마음을 갖기보다는 되레 그 주인을 얕잡아 보게 된다. 반대로 별로 가치 없는 책을 귀한 책인 줄 알고 비싸게 부르는 고서점 주인을 신뢰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어찌 보면 고서점 주인은 프로이고 수집가는 아마추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서 수집에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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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1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는 한말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거의 이들이 남긴 것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1883년 고종(高宗)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내한한 미국의 외교관이자 천문학자인 로웰(P. Lowell, 1855-1916)과, 1900년 내한한 미국의 여행가 홈스(B. Holmes, 1872-?), 1904년에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영국 기자 매켄지(F.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 로웰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보스톤, 1886)에서 고종과 왕궁의 모습 등 조선의 풍물을, 직접 촬영한 스물다섯 컷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50) 이 사진이 바로, 외국 책자에 실린 최초의 우리나라 관련 사진이 아닌가 싶다. 홈스는 『버튼 홈스 사진집(The Burton Holmes Lectures)』(미시간, 1901)에서 백서른네 컷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진집은 간략한 여행기와 함께, 사진이라는 매체를 동원해 당시 조선의 모습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런던, 1908)에서 ‘의병 사진’ 등 모두 스물일곱 컷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51~52) 나는 이들을 포함해, 한말을 전후하여 우리나라를 다녀간 외국인들이 남긴 사진들을 대하면서, 혹시 필름 원판이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곤 했다. 당시의 필름은 유리판 위에 감광유제(感光乳劑)를 도포(塗布)한 유리필름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유리건판 또는 유리원판이라 한다. 내가 소장했던 유리건판으로는, 1906년 공주 영명학교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스(F. E. C. Williams)가 소장하던 공주 영명학교 관련 유리건판 구십여 점과, 일제시대 어류학자 우치다 게이타로(內田惠太郞, 1896-1970)가 남긴 물고기 유리건판 천팔십여 점 등이 있다.(* 사진 53~54) 우치다의 물고기 유리건판은 그가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 근무할 당시 한국산 어류의 생활사 연구와 생태학적 조사를 주도하면서 남긴 성과물이다. 이때의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한반도 어류의 서식 실태를 자세히 기록한 『조선어류지(朝鮮魚類誌)』(조선총독부, 1939)를 펴내기도 했다.(*사진 55) 우치다는 1942년 일본 규슈 대학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유리건판을 포함한 자신의 연구자료와 표본, 문헌자료 등을 그대로 남겨 둔 채 한국을 떠났다. 언제라도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해방된 후에는 영영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두고 온 유리건판을 포함한 연구자료들에 대한 그리움을 "육신의 일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치어(稚魚)를 찾아서』, 1964〕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연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자인 정문기(鄭文基, 1898-1995)도 참여했는데, 사진 촬영은 주로 나카노 스스무(中野進)가 맡았다고 전한다. 정문기는 우치다보다 두 살 아래지만 동경제대 수산과 칠 년 후배로, 실제로는 그의 제자로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유일무이한 조선인 수산 기사였다. 해방 후에는 부산 수산대학장 겸 농림부 수산국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어보(韓國魚譜)』(1954)와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1977) 등이 있으며, 1977년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우치다의 유리건판 자료들은 원래 정문기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십오여 년 전 어느 날, 제법 늦은 시간에 서울의 한 고서점에 들렀다. 이 서점은 삼십 년 이상 다녔지만 쓸 만한 책 한 권 구한 적이 없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서란 서점 주인의 안목에 비례해 좋은 책이 갖춰지기 마련인데, 고서에 대한 식견이 별로 없는 주인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귀중본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느 날처럼 그날도 서점 한편에 마대자루 여러 개가 있었다. 한데, 삐져나온 책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두어 권 살펴보니 눈이 번쩍 띌 만한 것들이었다. 보지도 않고 전부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평소 모습과는 달리 안 팔겠다고 버텼다. 하여튼 쓸 만한 책을 수십 권 골라 값을 치렀다. 주인은 흡족했던지, 길가에 세워 둔 자신의 승용차로 나를 데려갔다. 뒷좌석과 트렁크에 여러 개의 박스가 있었는데 왠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주인이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 하나를 보여주었다. 유리건판이었다. 거리의 불빛에 물고기 모습이 희끗 비쳤다. 어떠한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문기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가 많이 쏟아져 나와 한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것들을 찾아다니며 계속 수집하는 중이다. 2004년에는 영월책박물관에서 「유리물고기—1930년대 한국어류사진」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우리나라 담수어류·연근해어류의 유리건판 사진과, 이 중에서 이름이 확인된 이백여 점의 물고기 사진을 소개했다. 우치다의 어류 사진 중에는 해부도를 재연한 사진, 발생·성장 사진, 부분·확대 사진도 있었다. 이러한 사진들은 어류형태학 연구에서 사진 활용의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유리건판 위에는 각 물고기의 이름과 채집 날짜, 장소,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감돌고기·꼬치동자개·묵납자루·열목어·황쏘가리·흰수마자 등의 천연기념물과 보호대상 어류 사진이 포함되어 있어, 사적(史的) 기록으로서의 학문적 가치는 물론 한국 사진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 이들 자료 중에는 우치다가 관찰과 기록이라는 근대 과학자들의 기본적인 연구방식으로 어류들을 조사 정리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치다가 직접 그린 도감용 그림(*사진 56~57)에, 사진기의 전사(前史)로 언급되던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때 구입한 자료가 유리필름뿐 만은 아니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필사본(*사진 58)을 비롯하여 수백여 권의 물고기 관련 도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2011년 인사동 호산방 시절. 나는 이 자료들을 모두 해양박물관에 양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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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0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송광용(宋光庸)은 1934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화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일학년 때인 1952년, 학생잡지 『학원』이 창간되던 해였다. 현실은 전쟁통이었지만, 삭막한 와중에서도 산골 소년의 꿈은 피어났다. 송광용은 친구에게 빌려 본 잡지 『학원』에서 김용환의 인기 연재물 「코주부 삼국지」와 김성환의 「빅토리 조절구」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보고 흠뻑 빠지게 된다. 1956년 7월 3일 일기에는 ‘국부적’ 만화가들의 모습을 그려 놓고, 고바우 김성환과 코주부 김용환은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사진 46) 그후 1992년 2월까지 그는 사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그의 꿈은 오직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냉혹한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이 일기에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한 평범한 남자의 꿈과 현실, 희망과 좌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 만화사에서 하마터면 묻혀 버리고 말았을, 한 불행한 만화가의 삶과 그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송광용의 만화일기는 작가가 직접 갱지를 반으로 접어 A4 크기로 제본한 것으로, 표지에는 일련번호 와 각 권의 제목을 붙이고 권마다 일일이 표지 그림을 그렸다. 원래는 모두 백서른한 권이었으나, 1990년 9월 11일 영월지역 홍수 때 서른 권이 물에 잠겨 현재는 백한 권만 남아 있다. 다른 만화작품의 원고도 상당수 있었으나, 이 역시 홍수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2001년 3월, 나는 송광용 화백에게서 이 일기를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받았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서 그의 한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책들 중에는 물론 일기도 여러 권 있었다. 그 중에는 십 년 내지 이십 년치의 일기도 여럿 있었지만 그 내용은 대개 메모 수준이었다. 그러나 송광용의 만화일기는 달랐다. 2002년 영월책박물관에서 열린 「옛날은 우습구나—송광용 만화일기 40년」전은 송광용의 한풀이와도 같았다. 나는 전시에 맞춰 이 일기들을 모두 네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기획에서 제작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영월책박물관 대부분의 출판물이 그랬듯이 이 책도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이 편집디자인을 해주었다. 처음 정 선생은 한 열 권 정도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지만, 인쇄비며 제작비 관계로 네 권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정 선생을 설득하긴 했지만, 일련의 작업들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디자인의 식구 일고여덟 명이 모두 참여하여 한 달 이상 걸렸다. 물론 이때의 모든 디자인도 정 선생이 자청하여 무료로 제작해 주었다.(*사진 47~48) 지금 생각하면 그 네 권을 만든 것도 꿈만 같은 일이었다. 정 선생에게 진 마음의 빚이 두고두고 무겁다. 정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책의 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 책의 제목인 ‘옛날은 우습구나’는 킬리만자로의 고독한 분위기를 가진 한 남자의 초상화를 표지로 한, 송광용의 만화일기 제83호(1956년 7월 30일)의 제목에서 따왔다. 열병에 걸린 듯 만화에 빠진 송광용, 그에게 만화란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으며 신앙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의 일기를 보면, "세상에는 신도 하나님도 없다”거나 "아, 세상은 쓸쓸하였다”라는 식의 자조 섞인 어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쉬 이루지 못한 좌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몸담았던 우리 현대사의 풍경을 비춰낸 것이기도 했다. 신발이 떨어져 길을 걸을 때면 절벅절벅 흙탕물이 들어차는 가난, 군 제대 후의 상경, 그러나 ‘가난투성이’ 나라에서 일어난 오일륙 쿠데타, 만화 대신 택해야 했던 직장에서의 실직 등, 그의 개인사는, 「또 가려 하느냐」 「이렇게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돈 병」 「가시밭 길」 「서울과 또 나와 실직」 등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대에 부대끼고 이리저리 밀리고 치인 흔적들을 보여준다.(*사진 49) 젊은 시절 송광용에게 만화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오직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햇필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그런 희망을 나는 좋아한다”라고 일기(1956년 7월 11일)에 적은 송광용은, 만화를 공부하듯 일기에 집착했다. 그는 하루 일과 중 두서너 시간을 일기 쓰는 데 할애했고, 어떤 날에는 종일 만화 연습으로 일과를 채웠다. 그는 그 시절 만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용환·김성환·신동헌·김경언·정한기·박기정·백인수 화백의 그림을 똑같이 그릴 만큼 훈련을 거듭했을 뿐 아니라,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 칙 영(Chic Young)이 그린 미국 만화의 이야기 구조 등을 스스로 연구하고자 했다. 미술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누구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오직 만화가가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마 일기를 쓰지 않는다면, 이미 미쳐서 날뛰는 미치광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중학교 시절 일기에 적고 있으니, 그는 일찍이 만화일기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 같다. 만화가로 등단하기 위해 육십 년대까지 학원사 등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결과는 낭패였다. 만화일기를 보면 그의 좌절은 ‘나는 왜 만화가가 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만화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를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만들겠다”던 송광용의 만화 주인공 ‘곱구나’는 바로 그가 찾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군대 제대 후 암담한 사회생활 속에서도 그는 만화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어법을 만들어 나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만화가, 아니 ‘만화가 지망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만화일기를 통해 발산했다. 그러다 나이 오십 이후에는 만화보다 일기라는 매체에 더 의지했다. 그 역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만화가의 꿈을, "일기 쓰는 것만큼은 계속하면서 찾으려 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 만화가인가 만화가가 아닌가 하는 것은 처음에는 분명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일기를 모두 불태우려고 여러 차례 마음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용의 만화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물음이 종국에 가서 그에게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후인 2002년 10월 5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실은 내게 일기를 기증했을 때 그는 투병 중에 있었다. 병원에서는 이삼 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그후 일 년 반 정도를 더 살았다. 자신의 일기가 활자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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