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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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2>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5>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대로 서성거리며 하던 일은 놓지 않았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그러기만 하였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대답도 네 아니오 그리고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기만 하였다. 다래를 만난 것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괴로움이라고 할까 횡액이 그렇게 이동해 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닿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봐야 지난번 불러내어 행군을 하며 얘기하다 돌려보낸 후 처음으로 만난 것이지만 정말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그러다 어떻게 될려는지 걱정이었다. 딸이 당하는 불행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있을까. 아내가 당하는 고통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날 그녀를 뿌리치고 오긴 했지만 줄곧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불러내어 얘기를 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고 그녀에게도 오히려 그렇게 마음이 걸리고 괴롭게 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고쳐서 생각을 하였다. 몇 줄 그의 마음을 적어 보내고자 썼다 지웠다 하였지만 다시 구겨버렸다. 그냥 참았다. 스스로 당하는 고통에 그녀에게 닥쳐올 고통이 겹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박연은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크게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하여 두 가지로 고쳐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대로 악학에 출사하도록 하라.” 임금은 그에게 제기된 문제를 가르고 명하였다. 대신들 누구 하나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요망스러운 말이 어떻고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 것이 어떻고 죄니 벌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의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것이었다. 핵심은 변함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연은 벼슬을 파직하고…에만 정신이 꽂혀 실의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랬었다. 도대체 벼슬은 무엇이고 직이란 무엇인가. 문과 초임으로 생원과에 급제하고 다시 6년 피 말리는 각고 끝에 진사과에 급제,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한 후 몇 년이 되었던가. 스물 여덟 살 때부터이던가. 그 때까지는 또 숨이 넘어가도록 과거 시험 공부를 하였었다. 그 합격 급제의 기쁨도 잠시였고 한 발 한 발 한 단계 한 단계 숨도 크게 못 쉬며 앞만 보고 달려 승승장구乘勝長驅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승진이 느리고 말직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균적이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봤을 때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떻든 자신의 자리 그것을 벼슬이라고 하지만, 벼슬 직職이라고 하지 않는가, 관직의 토속어인 벼슬은 전통적으로 우리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 벼슬을 차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좌우간 그 자리에 대하여는 불만이 없었고 또 직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것이 솔직한 것이 아니란다면 그런 내색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였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서 하였다. 또 직이란 직무이기도 하다. 일이다. 일을 하기 위한 자리이다. 벼슬이란 결국 직책이며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직을 당하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말이 안 되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왕은 그에게 벼슬은 떼고 일은 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참으로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종 임금은 그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권도의 제소가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던지 부당하고 사감이 개재 되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여부가 어떻든 세종은 박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여 그랬는지 그것이 대단히 정당하고 아니고도 중요하지 않다. 일을 하게 해 준 것이다. 그것을 며칠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엎드려 사죄하였다.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고 눈물을 철철 흘리었다. "더 잘 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준 주군 세종 임금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벼슬을 파직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이라면 그리고 불편이라면 오히려 그것에 대하여 감읍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통과 불편이 은혜를 알게 하였고 그것이 현실을 직시하게 한 것이다. 그 횡액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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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81>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4> 그날 이후 말 수를 줄이고 자신이 할 일만 하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상언할 글을 정리하고 전적을 뒤지며 집무실 귀퉁이에서 앉지도 않고 서성거렸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 살아온 궤적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자리를 탐하고 이권을 추구하고 불만을 표하고 한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그러지를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탓하고 원망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 모른다. 늘 현안으로 되어 있는 문건을 읽고 쓰고 퇴고하고 다시 쓰고 다시 읽고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앞에서도 얘기하였지만 시를 쓰거나 어떤 작품을 쓰고 논문을 쓴 것이 아니고 제도의 개혁이나 새로운 시책 방법 들을 건의하고 상언하고 한 것이었다. 몇 편의 시문詩文 외에는. 주로 예악에 관한 것이고 악률 악기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악기 제작에 관한 것이고 직접 악기 제작을 한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술을 한 잔 하는 것인데 그럴 때도 하던 일을 생각하고 풀리지 않는 꼬투리를 풀고 있었다. 다래와 같이 잔을 나누며 소리를 듣고 또 같이 소리를 하고 대금을 불고 할 때도 그랬다. 문득 생각나는 요체가 있으면 그것을 매듭을 짓고 갑자기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 번득이는 찰라의 상想이 스치면 그것에 대하여 골돌히 생각을 하거나 쪽지에 적고 또 손에도 적고 어떨 때는 소매 끝에다 표시를 해 두기도 하여 너덜거렸다. 지필묵紙筆墨을 내오랄 때도 있었다. "해해 참 선생님도. 술집에 무슨 그런 것이 있습니까요?” "그러면 치부책은 뭘로 적나?” "칼로 그어 놓지요.” "그럼 칼이라도 가지고 와 봐.” "괜히 그러다 사람 잡지 마시고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기억했다 말씀드릴께요. 제 머리는 인정하시지요? 그런데 여자를 앞에 놓고 뭐 하시는 기라요? 제가 그냥 치마 저고리로만 보이셔요?” "허허 그랬던가?” 술을 마시면서도 여자 앞에서도 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좌우간 다래는 그런 일이 있은 후 늘 먹을 갈아 놓고 있었다. 집안 일 돌아가는 것도 몰랐다.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 집이었다. 밥상 머리에서 그렇게 해라, 그러면 안 된다 하는 것으로 자녀 교육을 하였고 그보다 앞서 스스로 솔선하고, 으음 기침을 하는 것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였다. 위로 딸이 둘이고 맏아들(孟愚) 둘째 아들(仲愚) 셋째 딸 셋째 아들(季愚) 넷째 딸 7남매가 작은 집에서 복대기를 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아버지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첫딸은 알성급제를 하고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는 사위를 보았지만 남편은 하늘이다,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는 것이다, 두 마디밖에 한 것이 없다. 아들들에게는 늘 욕심을 부리지 말고 분수를 지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본을 보인다고 생각하고 늘 삼가고 면려勉勵하였다. 옷과 신을 기워서 착용하고 그런 것에 오히려 자부심을 가졌다. 지켜지지 않는 것이 술이었지만 자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늘 과음을 하고 주사를 늘어놓는 계우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번은 양껏 먹게 하고 술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이겼다. 그 때부터 주도酒道가 통하였다. "대개 술이 화가 됨은 심히 크다. 어찌 곡식을 없애고 재물을 허비할 뿐이랴.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렵히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잃어서 혹은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며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어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고 세종 임금의 계주교서戒酒敎書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유언처럼 말하였다. "불초不肖란 말이 있다. 부모의 덕망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여라.” 삼남 아이들은 모두 숙연하였다. "물론 꽁생원 아버지보다야 더 나아야지요.” 계우가 말하였지만 형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뒷날 맹우는 임강현령臨江縣令(정5품) 중우는 벽동군수碧潼郡守(정4품) 그리고 계우는 집현전集賢殿 한림翰林(정9품)을 거쳐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교형絞刑,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종1품)이 되었는데 글쎄 아버지 박연은 아들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일밖에는 몰랐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고 시대를 위한 일이었던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악성樂聖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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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80>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3> 전에 불러내어 알아듣게 얘기한 후 돌아갔는데 다래는 그 뒤 소식이 없었다. 소문에는 아직도 그러고 있었다. 소문도 보통 소문인가, 장안이 떠덜썩하였고 왕실이 시끄러웠다. 한량들이 목을 메는 데다가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배가 다르긴 하였지만 나이가 한 살 많은 형 화의군和義君, 세 왕자가 서로 차지하려고 사랑 싸움을 하고 제일 나이가 어린 평원대군이 먼저 다래를 들여앉힘으로 치정 싸움은 더욱 치열하였다. 형제간에 말하자면 제수와 형수를 서로 빼앗고 빼돌리고. 춤을 잘 추는 다래는 허리가 가는 초나라 미녀라는 뜻으로 초요갱楚腰䡖이라 불리었다. 평원대군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초楚나라 왕이 허리가 가는 사람을 좋아해서 궁정에는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굶어죽는 사람도 있었다는 고사古事를 들먹이며. 좌우간 왕자들은 죽기살기로 쟁탈전을 벌이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옥고를 치르고 또 하나는 유배를 가는 말로를 치닫는다. 초요갱은 한량들에게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였다. 다래는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어느 양반댁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그 집안이 역모逆謀와 연관되면서 술집 기생이 되었다. 빼어난 미모에다 날렵한 몸매의 춤으로 뭇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날 박연 앞에서 술을 따르며 노래를 부른 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었다. 천운이었던지 비운의 시작이었던지. "좋은 재주를 너무 천하게 쓰는 구나!” 다래는 자신의 노래와 춤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누구나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찬사를 보내거나 감탄을 하였다. 침을 흘리거나 넋을 놓았고 그것을 또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허줄구레한 서생 박연은 고개를 저으며 한탄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래는 박연에게 술을 곱게 따르면서 정중히 묻는다. "제 소리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요?” 너무도 깎듯하고 겸손하여 박연이 다시 보았다. 일어나다 앉았다. "소리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는데 좀 아쉬운 데가 있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또 뭔가요?” "노래면 노래고 춤이면 춤인 게지.” "왜 너스레를 떠느냐 이거지요.” 박연은 무릎을 탁 쳤다. "아네!” 다래는 박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그저 들은 대로 본 대로 하는 것 뿐이라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알으켜 달라고 하였다. 그런 다래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너무 예뻤다. 박연은 노래를 다시 해보라고 하였다. 춤도 다시 한 번 춰 보라고 하였다. 다래는 시키는 대로 하였다. "훨씬 좋아졌네.” 갈 때마다 달라졌다. 갈 때마다 하나씩 둘씩 지적을 하여주고 칭찬을 해 주고 하였다. 거문고도 배우게 하고 새 곡목이라고 할까 레퍼토리를 늘리게 하였다. 다래는 하나를 얘기하면 둘을 알아들었다. 재예才藝가 뛰어나고 머리가 영민하였다. 열성이 또 대단하였다. 그래 봐서인가 일취월장 발전하였다. 노래다 춤이다 거문고다 하는 것도 그랬지만 박연에게 너무나 극진하였다. 다래도 그랬지만 박연도 그랬다. 그녀의 노래 춤도 좋았고 사람됨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웠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도를 지키었다. 번번히 흐트러지는 것을 박연이 잡아주었다. "선생님은 너무 선생님 같애요.” "그러면 됐네.” 그녀를 관기官妓가 되도록 하고서부터 박연은 정말 하늘 같은 스승이 되었다. 다래는 일약 일류 기생이 되었다. 조선초에 유명한 4대 기생이 있었다. 옥부향玉膚香 자동선紫洞仙 양대陽臺 초요갱, 그 중에도 초유갱은 세종이 만든 궁중무용을 익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극한 스승 박연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리고 평원대군 이임의 총애를 받아 나라에서 새로 제정된 악무樂舞를 배우고 세종 임금의 눈에도 들게 되었다. 박연은 여악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지만 다래의 행운은 무수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박연은 비틀거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얼마를 더 걷다가 혼자말처럼 다시 말하였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살 도리를 해야지. 몸이 무너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모처럼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의 한 일에 질책을 받고 스스로 위안을 하고자 찾아간 곳이 다래였고 그녀에게 질책 아닌 당부를 하고 가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경고를 한 것이었다.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는 다래의 사랑의 행각에 그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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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9>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2> 박연이라는 것이었다. "상호군(上護軍) 박연이 신한테 말하기를, 승문원承文院의 터를 살펴본 것은 필시 호걸이 날 것을 막으려고 그런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그 말을 듣고 상소한 것입니다.” 박연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권도의 말을 듣고 즉각 박연을 불러서 물었다. 박연이 어리둥절하며 엎드려 대답하였다. "한漢나라 역사에 동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東方有天子氣)라고 한 말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승문원 터를 살펴본 것을 신의 망령으로 호걸이 날 것을 의심하여 살펴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권도에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 솔직히 아뢰었다. 승문원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아로 태종때 설치가 되었다. 모두들 표정들이 굳어 있었고 임금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도 또한 서생으로서 어찌 사리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간사한 생각을 내었단 말인가.” 청천벽력이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한 번도 임금을 실망시킨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잘 못 된 일인지 몰랐던 것 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일이었다. 너무나 황공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의정 좌의정 여러 대신들이 도열해 박연을 바라보며 임금의 다음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연은 무엇보다도 맹사성 대감 앞에서 왕궁에서 질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황공하고 면구스러웠다. 다른 대신들에게나 임금에게도 그랬지만 고불대감 앞에서 정말 몸둘 바를 몰랐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요망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 죄로 벌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러나…” 세종 임금은 주저 없이 말하였다. 추상 같았다. 늙은 서생이 경중을 모르고서 망발한 것이고 또 아악雅樂을 전문으로 맡아서 공이 없지 아니하므로 다만 벼슬만을 파직하고 그대로 악학樂學에 출사出仕하도록 하라. 임금의 말에 모두들 눈을 감았다. 다만 고불만은 박연의 거동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좀 더 잘 하라, 더욱 신중히 하라고 충고하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정말 너무나 죄스러웠다. 임금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어떻게 운신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못 다 한 일 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비 오듯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 누굴 볼 수도 없었다. "혼신을 다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물러나와 궐 밖으로 나오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넋이 나간 것인가 바람이 든 것인가, 한 없이 헤매다 당도한 곳은 다래가 있던 술집이었다. 거기 다래는 없었다. 술을 스스로 따라 몇 잔 마시고 다래에 대해서 물었다. 만나기가 힘들거라고 하였다. 왕자들에게 몸이 쌓여 있다고 했다. 아리따운 기녀가 다래 대신 술을 따른다. "술은 내가 따를 터이니 노래나 불러봐요.” 노래를 있는 대로 부르고 춤도 있는 대로 춘다. 용모가 뛰어나고 노래도 잘 불렀다. 박연은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거문고를 뜯을까 묻는 것을 사양하고 계속 독작을 하였다. 해가 졌는지 날이 새었는지도 몰랐다. 계속 자작으로 술을 마시고 떡이 되어 있는데 다래가 왔다. "그래 왔어, 잘 있다며?” "선생님! 아닙니다.” 다래는 꿇어앉아 있었다. "그럼 뭐여?” "선생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갈수록 수렁으로 빠집니다.” 그녀가 꿇어앉은 채 술을 따라 두 손으로 바친다.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자 다래는 계속 그러고 있는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계속 노력해 보겠습니다.” 박연은 몸을 가누고 앉으며 술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 반배를 하며 말한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난 자네를 믿어.” 그리고 박연은 일어나 정신을 차리며 비틀거리었다. 박연은 그 말을 하러 온 것처럼 아무리 말려도 뿌리치며 비틀비틀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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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8>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1> 왜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세종 임금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으로 물러난 권진權軫을 불러 강녕전康寧殿 경회루慶會樓 경복궁景福宮 수리 등에 관하여 의논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강녕전은 나만이 가질 것이 아니고 만대에 전할 침전寢殿인데 낮고 좁고 또 어두워 늙어서 이 침전에 거처하면 잔 글씨를 보기 어려워 정무를 처결할 수가 없을 것이니, 내가 고쳐 지어서 후세에 전해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좋습니다.” 임금의 뜻에 모두들 좋다고 아뢰었다. "경회루는 영건營建한 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처마를 받친 도리가 벌써 눌리어 부러졌으니 처마 받침을 수리하고자 하는데…” 대신들은 그러면 당연히 수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의견을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전사政事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집을 수리하고 짓는 일 등 모든 것을 그렇게 하였다. 그것이 세종 임금의 자세였다. 예로부터 제왕은 다 역상曆象을 중하게 여기어서 요堯임금은 희羲씨 화和씨에게 명하여 백공百工을 다스리었고 순舜임금은 선기옥형璿璣玉衡에 의거하여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임금은 또 의견을 물었다. "내가 간의簡儀 만드는 것을 명하여 경회루 북쪽 담 안에 대臺를 쌓고 설치하게 하였는데 사복시司僕寺 문 안에 집을 짓고 서운관書雲觀에서 번들어 숙직을 하면서 기상을 관측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역상은 해 달 별 천체가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현상이다. 선기옥형은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데 쓰던 기구이고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 역일曆日 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대신들은 그냥 좋습니다 옳습니다고만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학구적이고 진취적인 임금의 의지 앞에 고개가 수그러졌다. 허리까지 굽혀졌다. "너댓간 집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희 등은 그렇게 말하였다. 계속 그렇게 찬의贊意만 표한 것은 아니었다. 장의동藏義洞에 있는 태종太宗 잠저潛邸의 옛터가 이제 더부룩한 풀밭이 되어서 차마 볼 수 없으니 다시 궁전을 지어서 부왕父王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임금이 물었을 때 모두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잠저는 태종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것 같다. "원묘原廟를 세워서 만대에 이르도록 법전法典을 정하였으니 따로 궁전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소나무나 심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말하였다. 묻는 것이었다. "경복궁에 4대문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태조 때에 북문을 두고 목책을 설치한 것을 뒤에 막아버리고 성을 쌓았는데, 내가 다시 북문을 낼까 하는데…” "좋습니다.” "근자에 글을 올리어 지리地理를 배척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우리 조종께서 지리로써 수도를 여기다 정하였으니 그 자손으로서 쓰지 않을 수 없소. 정인지鄭麟趾는 유학자儒學者인데 역시 지리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고, 나도 생각하기를 지리의 말을 쓰지 않으려면 몰라도 만일 부득이하여 쓰게 된다면 마땅히 지리의 학설을 따라야 할 것인데, 지리하는 자의 말에, 지금 경복궁 명당에 물이 없다고 하니 내가 궁성의 동서쪽과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북쪽 등 몇 곳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어서 영제교永濟橋의 흐르는 물을 끌고자 하는데…” "좋습니다.” 위에서 물어본 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를 묻고 의견을 들었는데 다 좋다고 하였다. 다만 이런 공사들을 한 목에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니 그 선후 완급을 참작하여 순차로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아뢰기도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황희 신상 등이 지리 아는 사람을 데리고 못을 팔 곳과 소나무 심을 곳을 가 보게 하라고 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지리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말하는 것이었다. "권도權蹈가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혹시 호걸이 난다면 나라의 이익이 아니다’ 하고 이 말을 ‘남에게서 들었다’ 하였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도(권도)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소.” 임금이 또 그렇게 의논해 묻자 모두가 그렇게 하시라고 아뢰었다. "도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말씀 올린 것이라면 비록 옳지 않더라도 묻지 않는 것이 가하지만 근거 없는 말을 남에게서 전해 듣고서 글을 올렸을 것 같으면 그 말했다는 사람을 묻는 것이 가합니다.” 그래서 권도를 불렀고 권도가 말하였다.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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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7>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7> 여기에 다 옮기지 않는다. 이러한 의절들이 지금은 물론 사용되지 않고 있다. 다 지나간 시대의 제도이고 절차일 뿐이다. 그것도 지금 시대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임금을 하늘처럼 하느님처럼 받들던 제도와 사례들이 이제 무엇인가, 구시대적인 하나의 유물일 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이고 역사적인 사실이고 기록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또 무엇인가, 어떻든 박연은 거기에 모든 생을 바쳤다. 그가 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다 쏟아부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천성을 다 한 것이다. 임금을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순 것은 아니었다. 쌍청의 정각길 굽어보니(雙淸小閣俯長程) 명리에 달리는 사람도 많구나(朝暮閒看走利名) 개인 달빛은 언제나 가득하고(霽月滿庭非假借) 맑은 바람은 저절로 불어오네(光風拂檻豈招迎) 찬 술잔에 금 물결 일고(冷侵酒斝金波灩) 시원한 경내에 구슬 잎사귀 날리네(涼掃雲衢玉葉輕) 이 경치 이 마음 한결같거니(此景此心同意味) 다시야 어느 곳에 집착할 소냐(更於何處役吾形) 그 무렵일까. 「제쌍청당題雙淸堂」에서 그의 심경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쌍청당은 송유宋愉의 당호이다. 박연보다 늦게 나서 일찍 세상을 떠난 선비이고 그의 정사精舍 쌍청당에서 쓴 시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독서를 좋아하여 열두 살 미관未冠의 나이로 부사정副司正이 되었다. 태조왕후太祖王后가 태조太祖廟에 말부末附, 합사合祀되지 않음을 통탄하여 글을 써서 올린 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그 후배이자 동료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본 것이다. 난계유고의 두 번째 실린 시이다. 첫 번째 시는 앞에서 소개했지만 그 뒤에 쓴 「제송설당題松雪堂」인데 자신의 당호인 송설당에서이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갔는가, 세종 임금의 승하昇遐를 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읊은 것이었다. 고향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며 조그만 정사를 짓고 박연에게 청하여 ‘雙淸堂’이라 편액扁額하였는데 거기서 쌍청처사雙淸處士로 불리며 필연筆硏과 금기琴碁로 여생을 보냈다. 박연이 한 올곧은 선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쌍청당 송유가 난계 박연에게 편액을 청한 마음이 그려진다. 한다는 인물들이 많은 가운데 박연에게 청한 것은 왜일까. 회덕 아래 영동, 인접한 지역적인 인연 때문인가. 거기 지프내 강촌의 시골내기 난계의 흙내 풀내가 풍기는 인정 때문인가. 어쩌면 강직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조그만치도 사욕을 취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늘 재능이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학문이 짧음을 인정하면서 누구에게나 번번이 물어보고 그것을 인용하고 확인하고 하던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편액의 그림을 떠올려 본다. 청淸은 무엇이고 쌍雙은 무엇인가. "너무 과합니다. 가당치도 않는 칭송이어요.” "그러면 거문고를 뜯어 답례를 하시오.” "예?” "허허허허… 왜 어려워요?” "불합격이면 어떡하지요?” "그거야 안 되지요. 허허허허…” 너무도 열심히 거문고를 뜯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는 쌍청당과 난계의 그림을 떠올려본다. 박연은 그 답례로 허리춤의 피리를 꺼내어 또 열심히 불었다. 그 후하던 일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가지고 임하였다. 시에 쓴 대로 다시 어느 다른 곳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예조참판 권도權鞱의 참소讒訴를 입어 파직을 당하였다. 그 경위가 어떻든 달리던 말이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동안 아악을 전문으로 맡아서 일을 하였고 공을 많이 쌓았으므로 악학에 출사하도록 하였다지만 준마의 앞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답답하고 안타까왔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숨을 쉴 사이도 없이 뒤로 되돌아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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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6>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6> 임금이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군신,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데 기일期日의 전날 예조에서는 내외간에 맡은 직무를 충실히 할 것을 선포하여 각각 그 직분을 다하게 한다. 그날 밝기 전에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나면 내전으로 환궁還宮하며 군신들도 물러난다. 유사有司가 임금의 자리를 근정전 북벽 남향에 설치하고 향로 두 개를 앞 기둥 밖의 좌우에 놓아둔다. 전악은 남쪽에 가까운 북향으로 현헌〔軒懸〕을 정전에 베푼다. 협률랑의 지휘 자리를 전상殿上 서쪽 동향하는 자리에 마련하며 사복이 어연과 말을 뜰에 벌여 놓는다. 전의는 1품 이하의 문관 자리를 전정殿庭 길 동쪽에 종실宗室과 1품 이하의 무관의 자리를 길 서쪽에 관등官等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향하여 서로 마주 보게 설치한다. 감찰監察 두 사람은 문무반 뒤 북향으로 자리하고 판통례 전의 독전관讀箋官 치사관의 자리를 현헌 동쪽에 마련한다. 통찬 한 사람은 남쪽에서 약간 뒤로하여 모두 서향하고 통찬 또 한 사람은 현헌의 서북에서 동향하게 한다. 봉례랑奉禮郎은 문 밖의 자리를 홍례문弘禮門 안에 설치하고 문관은 길 동쪽에 종실 및 무관은 길 서쪽에 마련 품계品階에 따라 자리를 달리 하여 겹줄로 서서 북쪽 위(北上)를 위位가 되게 한다. 군신 조하의절은 그렇게 시작된다. 왕세자 의절과 같은 것도 있지만 의식 절차가 서로 다르다. 몇 번 말한 대로 여러 신하들의 의식 하나하나의 세세한 절차 동작 위치 방향 등을 기록한 행사 대본이다. 물론 같은 부서의 협력이 있고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을 해보지만 박연이 숱한 전적을 뒤지며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퇴청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등잔불 심지를 돋우며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이고 집에 가서도 저녁 숟갈을 놓자마자 책상으로 물러 앉아 닭이 울도록 날이 새도록 먹을 갈아 쓰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맆문을 나서곤 한 것이다. 집의 얘기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않을 때가 많았다. 글을 읽고 쓰고 청서淸書를 하고 할 때도 그랬고 악기를 뜯고 두드리고 소리를 비교할 때도 그랬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체면이 볼만했다. 한두 해가 아니고 이십 년 삼십 년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왕에게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받았다고 하였는데 상을 받고 칭찬을 듣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였다.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익숙해졌고 오히려 그게 편하였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니고 자기를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제도를 바로잡고 의식과 절차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을 끊임없이 쉼 없이 하였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한 것이었다. 천명이었고 천직이었다. 좌우간 그랬다. 현헌은 궁중의 제례 때 악기 배설排設, 원래는 제후諸侯의 악기 배설을 말한다. 감찰은 조선 사헌부의 정 6품 벼슬로 사제祠祭 조정회의朝廷會議 과거 등에서 백료百僚를 규찰糾察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리하여 엄고가 처음 울리면 병조에서 모든 시위의 줄과 의장을 정돈하여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문과 전정殿庭에 베푼다. 그리고 유사는 전문箋文을 올려놓을 탁자와 방물方物을 올려놓을 탁자를 계단 위에 설치한다. 모두 의식은 평상시와 같이 한다. 예조정랑禮曹正郎은 조복을 입고 용정龍亭에 여러 도에서 올린 전문을 받들며 고악鼓樂이 앞에서 인도하여 서문으로 들어가서 근정전에 이르면 악이 그친다. 영사令史는 푸른 공복을 입고 전문이 든 함函을 마주 든다. 정랑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여러 도에서 올라온 사신使臣 들은 각기 방물을 가지고 동서 문으로부터 들어가서 탁자 위에 놓는다. 다시 엄고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전문은 나라의 대사가 있을 때 신하가 임금께 써 올리던 사륙체四六體의 글, 방물은 감사나 수령守令이 임금에게 바치는 그 고장의 산물이다. 예조정랑은 조선조 육조六曹에 딸린 정6품 벼슬이다. 이조吏曹 호조戶曹 공조工曹에 3명씩 형조刑曹 병조兵曹에 4명씩을 두었다. 용정은 나라의 옥책玉冊 금보金寶 등을 실어 나르던 교여轎輿, 수레이다. 이윽고 엄고가 두 번 세 번 울리면 행하여지는 의식 절차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치사관이 서계로부터 올라와서 임금의 앞에 나가 북향하고 꿇어앉으면 통찬은 여러 신하들을 꿇어앉게 한다. 여러 관원들이 모두 꿇어앉으면 치사관이 하례를 하고 임금은 선교를 한다. "전하의 지극히 어진 덕으로 천지 원기를 체험하시어 큰 복을 받으소서.” "새로움을 맞이하는 경사를 경들과 더불어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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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5>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5> 조하의절을 더 보자. 엄고嚴鼓가 처음 울리면 병조兵曹에서는 여러 시위의 줄과 의장들을 정돈하여 문과 전정殿庭에 베풀되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좌중호左中護는 중엄中嚴을 청하며 궁관이 각기 제자리로 나가는 것을 돕는다. 우중호右中護는 어인御印을 짊어지고 의식대로 나오면 시위관은 모두 문(閤門)에 나가서 봉한다. 임금이 거동할 때에 엄숙한 위의威儀를 보이고 백관과 시위군사가 제자리에 대기하도록 큰 북을 울리었다. 좌중호는 내금위內禁衛 충의위忠義衛 충순위忠順衛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士 등을 이끌고 식장에 들어와 시위侍衛를 도맡아 지휘하던 관원이다. 우중호는 좌중호보다 낮은 직위이고. 엄고가 두 번째 울리면 좌중호는 외판外辦을 정돈시켜 왕세자가 조복朝服을 갖추고 나오게 하되 좌우 시위는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좌중호가 인도하여 근정문 밖의 위치에 나아가 앉게 한다. 판통례判通禮가 중엄을 청하여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오되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입는다. 전악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자리에 나오면 협률랑이 지휘하는 자리에 나가고 모든 시위관은 각기 기복器服을 입고 있고 상서관上瑞官이 보(御寶)를 받들고 나오면 시위관은 모두 문에 나가 봉영한다. 외판은 임금의 거동 때의 의장이고 통판례는 나라의 큰 의식에서 절차에 따라 임금을 인도하여 모시던 관원이다. 원유관은 왕과 왕세자의 조견복朝見服인 강사포에 쓰던 관이다. 엄고가 세 번 울리면 전의는 치사관의 통찬을 통솔하여 먼저 자기 위치에 나가고 봉예랑奉禮郎은 3품 이하의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여 위차位次에 나아간다. 첨지僉知와 통례通禮가 왕세자에게 위차에 나가 서향하고 설 것을 청하고 판통례가 외판을 정돈시키고 중금中禁에게 말하여 엄嚴을 전하면 지휘봉을 들어 보인다. 그러면 임금이 여연을 타고 나오는데 산선繖扇 시위는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임금이 나가려고 의장이 움직이면 협률랑이 수그리고 엎드렸다가 지휘봉을 들고 일어나고 악공은 축柷을 쳐서 융안지악을 연주한다. 봉예랑은 나라의 큰 의식 때 문무백관을 인도하던 집사관이다. 통례는 통례원의 정3품 벼슬, 좌우에 각 한 사람씩 있다. 중금은 액정서掖庭署의 별감 밑에 두는 심부름꾼. 산선은 임금이 행차 할 때 따르는 의장의 하나로 베로 우산 같이 만들었는데 임금 앞에 서서 간다. 임금이 자리에 올라 향로에 불을 피워 연기가 오르면 상서관이 보를 임금 자리 앞에 평상시와 같이 놓아둔다. 그 때 협률랑은 지휘봉 휘麾를 눕히고 어敔를 긁어 악을 그치게 한다. 휘는 음악을 연주할 때 협율랑이 그 시작과 그침을 지휘하던 기旗이다. 누런 바탕에 용을 그렸는데 휘를 들면 음악이 시작되고 휘를 누이면 음악이 그치게 된다. 통찬은 왕세자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가 선다. 전의가 사배四拜 하라 하면 통찬은 찬자贊者에게 전하여 왕세자가 몸을 굽히면 서안악이 울린다. 사배 후 흥興(일어나다) 평신平身(엎드려 절한 뒤 몸을 본디대로 펴다)하면 악이 그치고 치사관이 서계西階로부터 올라와서 임금 앞에 이르러 북향하고 꿇어앉으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꿇어 앉게 한다. 왕세자가 꿇어앉으면 치사관이 ‘왕세자 신 아무개는 삼양三陽이 열리고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는 때를 만나 공손히 생각하건대 전하의 지극히 어진 원기를 몸에 받아 큰 복을 성대히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칭賀稱을 한다. 하례가 끝나고 부복俯伏(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다) 흥興하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부복 흥 사배 평신하게 한다. 왕세자가 부복 흥하면 악이 시작되고 왕세자가 사배 흥 평신하면 악이 그친다. 그러면 치사관은 본 위치로 돌아온다. 대언代言이 임금 앞에서 교명을 받고 뜰로 물러나 서향하고 서서 왕의 교지가 있으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꿇어앉게 한다. 왕세자가 꿇어앉으면 대언이 ‘새해를 맞는 경사를 세자와 더불어 함께 하리라.’ 하고 선교宣敎한다. 선교가 끝나면 대언은 임금 시위 자리로 돌아오고 통찬은 부복 흥 사배 평신을 도와 왕세자가 부복 흥하면 악이 시작되고 사배 흥 평신하면 악이 그친다. 첨지와 통례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나가면 종실宗室과 문무백관들은 조종에 들어가서 별의別儀와 같이 하례한다. 정말 너무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짠 각본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어디 다른 데에는 없고 전 시대 제도나 고래의 전적을 참조해 만든 것 같은데 참 너무도 많은 노력, 세세한 공력功力을 기울인 것이다. 악기를 만들고 음률의 고저 장단 청탁을 바로잡는 기능 못지 않게 예의 절차 제도 양식 등을 악과 절차와 조화를 이끌어낸 구성은 종합예술이었다. 그 각본이었다. 왕세자 조하의절에 이어 군신群臣 조하의절에 대하여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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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74>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4> 박연은 악서樂書의 자료를 모아서 찬집纂輯하고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그리고 써서 책으로 만들자고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 그러한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하여 계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 27권 7월 27일자 기사 대로 썼는데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지 그의 나이 74세 문종文宗 원년에 악보를 간행하자는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아악의 악에는 제향악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향악은 봉상시奉常寺에 구본舊本인 십이궁보十二宮譜와 아울러 20여 악장이 있어 익혀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연향악은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다가 경술년(세종 12, 1430)가을에 임금께서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중에서 연향아악 시장詩章 12편과 보법을 얻었으나 보법이 미숙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규례를 살펴 몸소 부연한 뒤에야 보법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따라서 부연한 보법 중에 그 성음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과 양로연養老宴의 음악에 넣었습니다. 또한 보법 전부를 주자소에 명하사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게 한 지 2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인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종 임금의 명을 거슬리는 것 뿐만 아니라 잊어버려 폐기될까 두렵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해야 될 근거를 조목 조목 제시하였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어버린다면 이미 금석金石에서 입혀져 나온 소리라도 어디서 나온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융안지보隆安之譜는 어리魚麗 제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는 황황자화皇皇者華 제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는 남산유대南山有臺 제3장에서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은 녹명鹿鳴 제1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어리는 사방이 평정되고 만물이 풍성하여 신명神明에게 고하며 칭송하는 내용이다. 황황자화는 임금이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신을 송영하는데 쓰인 음악이고 남산유대는 어진 사람을 얻음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며 녹명은 어리와 같으나 그 뒤 연례宴禮와 향음주鄕飮酒에서 쓰였다. 다 「시경」소아小雅 6편 중의 한 곡이다. "원컨대 전하께서 인행印行을 하도록 명을 내려 지체하지 말고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문종 임금은 이를 허락하여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우찬성 정분鄭芬 등에게 아악보를 주자소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 참으로 집요하였다. 박연의 집념은 식을 줄을 몰랐다. 박연은 그러한 일련의 상소 청원과는 달리 앞에서도 말한 대로 조하의절 같은 글을 써서 예악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먼저 ‘왕세자 조하의절’을 보자. 임금이 원정元正과 동지에 왕세자의 조하를 받는데 그 전날 예조에서는 내외관에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행할 것을 선포하여 각각 그 직분을 다 하게 한다. 충호위忠扈衛에서는 왕세자 위차位次를 근정문勤政門 밖의 길 동쪽, 북쪽에 가까운 서향으로 설치하고 동궁문東宮門 밖에 궁관宮官의 위차를 규칙대로 설치한다. 말 그대로 왕세자의 조하를 행하는 의례의 절차 규범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세종 12년(1430) 예조에서 아뢴 것으로 박연이 지은 것인지 정리한 것인지 「난계선생유고」에 가훈家訓과 함께 잡저雜著 편에 수록되어 있다. 충호위는 종친의 자제로 조직하여 호위와 제사 때에 제관의 자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날 유사有司가 임금의 자리를 근정전 북벽 남향으로 설치하고 향로 두 개를 앞 기둥 밖의 좌우에 놓아 두며, 전악典樂은 헌현軒縣을 전정에 베풀되 남쪽에 가까운 북향으로 진열하고, 협률랑協律郎의 지휘하는 자리를 전상 서계의 서쪽으로 동향하는 자리에 마련하며, 사복司僕은 여연輿輦과 말을 뜰에 진열한다. 전악은 조선조 악관직의 하나로 정5품, 협률랑은 음악을 지휘하던 악관으로 정7품이다. 사복은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어연은 임금이 타는 수레이고. 전의典儀는 왕세자 자리를 전정의 길 동쪽으로 북향하게 마련하고 전의 치사관致詞官의 자리를 헌(헌현) 동북쪽에 마련하되 통찬通贊 한 사람은 남쪽에서 약간 뒤로 모두 서향하고 또 통찬 한 사람은 헌현 서북쪽에 동향을 하게 한다. 궁관이나 익위翊衛는 그 시각에 모두 제 자리에 모이되 각기 기복器服을 입고 의장과 호위는 평상시와 같이 베풀어 놓는다. 전의는 나라의 큰 의식이 있을 때 모든 절차를 도맡아 진행시키던 집사관이고 치사관은 경사가 있을 때 임금께 올릴 송덕의 글을 맡은 관리이며 통찬은 전의의 명을 받아 의식의 절차를 큰소리로 외쳐 진행시키는 관리, 익위사翊衛司는 세자의 호위를 맡은 관청이었다. 예와 악의 절차를 치밀하게 연출하여 그 전범을 적어 놓은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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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73>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3> 박연이 음악을 정비하기 위하여 먼저 율관律管 제작을 하였다. 얘기한 대로 해주에서 나는 거서로 제작한 율관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결국 남양의 경석과 함께 악기 제작에 정열을 쏟았다. 율관 제작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박연의 음악적 생애에 닥친 제일 과제였다. 박연은 그 자신이 만든 악기의 소리의 높이에 따른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박연의 악기 제작은 그의 귀로 들어서 음고音高를 판별하였던 것이고 그의 정확한 판별력은 자타가 인정하였다. 세종임금도 박연이 음률音律에 밝음을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임금 스스로 뛰어난 음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화를 얘기하였었는데 박연의 율관 제작 악기 제작은 그런 믿음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박연의 악기 제작에 대하여 상언 상소한 글을 다시 보자. 생황笙篁의 원료인 바가지를 본래의 제도에 의거하여 만들자는 상소 훈塤을 옛 제도에 따라 개조하자는 상소 축柷을 옛 제도에 따라 바르게 고치자는 상소 토음土音인 부缶라는 악기를 분원分院에서 제조하자는 상소 대고大鼓를 제조하자는 상소 대나무로 만든 독牘이라는 악기를 개조하자는 상소 건고建鼓를 개조하자는 상소 종鍾 경磬의 소리를 올바르게 교정하자는 상소 편종編鐘을 주조鑄造하자는 상소 방향方響을 추가로 더 만들어야 한다는 상소 말이 상소이지 거기에 악기 제작의 당위성 제작의 원리 방법이 다 제시되어 있었다. 세종 12년 2월에 올린 것이었다. 13년 말에 올린 상소 하나 외에는. 이 악기 제작에 대한 상소로 한 해를 다 보낸 것이다. 악기 제작에 생애를 바친 절정기라고 할 수 있겠다. 52세 때이다. 생 훈 축 부 대고 건고 독 편종 편경 방향 등의 악기를 주례周禮와 진양陳暘 악서樂書 등의 기록 악리樂理에 근거하여 개정하고 제작하자는 청원이었다. 그의 정열적인 상소는 대부분 성과를 거두었고 제향祭享 회례會禮 조회朝會 등에 이러한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그의 상언 상소는 하나 하나 너무나 절절하였다. 마음에 와 닿았고 핵심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전적을 바탕으로 고서 고사를 인용하였다. 부라는 악기는 요堯 임금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역대로 폐지하지 않았다. 진秦나라 때에는 더욱 널리 사용되어 악현樂懸의 악기로 사용되었고 세간에서도 모두 좋아했다. 방향이란 악기는 양梁나라 때 상하가 통용하던 것으로 편종과 편경의 소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8음 중에 오직 경의 소리만이 사시에 변치 않는 것인데 방향 또한 그렇다. 그 나머지는 속이 비고 구멍이 뚫린 악기이므로 몸체가 얇고 속이 비어 음향의 기운에 감화되기 쉬우므로 한여름에는 건조해서 소리가 높고 한겨울에는 막혀 소리가 낮으니 반드시 경성磬聲에 의해 고른 연후에 음이 어울리는 것이다. 「시경」에 ‘내 경성에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훈이란 악기는 옛 말에 길이가 세 치 반이요 둘레가 다섯 치 반이라고 하였다. 진양陳暘이 말하기를 밑이 평평하면 구멍이 여섯 개인데 이는 수水의 수數를 택한 것이요 속이 피고 위가 뽀족한 것은 화火의 형상을 본받은 것이다. 훈이란 악기는 이와 같이 물과 불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를 이룬다. 그런 제작의 법을 모두 근거할 바가 있어 함부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축은 네모난 악기로 그 넓이가 한 자 네 치이고 속이 비고 사면을 빈틈 없이 기워 합치고 가운데에 한 구멍만을 내어 참나무 자루가 드나들게 했을 뿐 다른 구멍이 없는 악기이다. 그런데 오늘날-물론 그 당시를 말하는 것이다-사용되는 축은 참나무 자루가 들어갈 구멍이 있는데도 한쪽 곁에 둥근 구멍이 뚫리어 주먹이 들어갈만하다.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아도 이런 모양은 없다. 박연의 악기를 만들자고 청원하는 논리 이유들이었다. 고사와 고서를 인용할 뿐 아니라 음과 악의 이치를 말하였다. 일상의 감성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생이란 악기는 간방艮方에 속하는 소리인데 그 제도는 길고 짧은 여러 개의 관들이 가지런하지 않게 참차參差, 하나의 바가지 속에 꽂혀 있어 봄볕에 만물이 소생하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생笙이라 하였다. 또한 바가지를 몸으로 삼아 악기를 이루므로 박〔匏〕이라 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바가지로 만드는 것은 박덩굴이 땅에 뻗는 식물이기 때문에 간방에 속한 연유이다. "대저 흙으로 만들어진 악기는 두드려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있고 소리가 매우 맑아 조화로운 것도 있으며 소리가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습니다.” 흙의 소리 토음인 부라는 악기 제작에 대한 설득이었다. 박연 다운 논리였다. 산골 시냇물 소리 같은 사랑방 부엌에 활활 타는 장작불길 같은 조선 악기 제작 원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