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4 (화)
민중시의 장을 연 신경림(89세) 시인이 22일 별세.
22일 오전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신경림 시인은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민중시인으로 꼽히는 문인이다.
1935년 4월 6일 충북 충주 출생, 충주고,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지>에 ‘갈대’, ‘묘비’ 등의 작품 추천 등단.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 도시에서 밀려난 서민, 정처 없는 유랑민 등 민초들의 애환과 굴곡진 삶의 풍경을 질박하고 친근한 생활 언어로 노래해온 그는 평생을 '민중적 서정시인'으로 살았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시 '갈대'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독과 고뇌를 탁월한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해 서정적이고도 대중적인 언어로 길어 올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즐겨 찾는 국민 애송시 '가난한 사랑노래'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친숙한 말들로 가난과 상실을 아프게 노래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을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이 시는 쓰러지고 짓밟힌 약한 존재들, 흔히 '민초'(民草)라 불리는 기층민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온 고인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다.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일찍이 신경림의 시 세계를 두고 "그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련다는 명료한 자의식으로 정체성의 징표를 삼으려 했다. 약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대변자 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라는 자기부과적 계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농무' 이후의 시편들이 그러한 점에서는 회의 없는 신앙고백으로 일관돼 있다"고 쓰기도 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시 '목계장터'에서)
그의 시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목계장터'에서 감지되듯이 떠돌이, 방랑, 바람, 유랑과 같은 말이다. 가난하고 척박한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아 정처없이 떠도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애환을 평이하고 간결한 언어로 노래한 것은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기류다.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 등단한 시인은 그러나 등단 직후 10년 가까이 작품활동을 중단했다. 대신 그는 강원도와 충청도 등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광부, 농부, 상인 등의 직업을 전전했고, 이때 각양각색 사람들의 고되고도 보람된 삶을 뼛속 깊이 체험한다.
젊은 시절의 이런 경험은 이후 그를 민중시의 대가,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시인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문학적 토양이 된다.
그는 이후 서사 장시, 기행시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시를 계속 선보임으로써 한국 서정시의 영역을 확장하고, 시 소재의 다양화 측면에서도 한국 시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반적으로 대지에 밀착한 삶의 언어로 쓰인 신경림의 작품들은 당대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하나로 묶는 '민중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시발점이 바로 내년이면 출간 50년을 맞는 그의 첫 시집 '농무'였다.
이 시집의 표제시 '농무'(農舞)에서 '농무'는 농민들이 풍물놀이에 맞춰 추는 춤사위를 뜻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춤사위가 한바탕 지나간 뒤의 농민들의 신명과 울분을 민중적 언어로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시 '농무'에서)
문학 외에 신경림의 공적인 삶의 또 다른 주요 축은 민주화 운동이었다.
군부독재의 칼날이 서슬 퍼렇던 1980년대에 시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상임의장 등 재야 운동단체들에서 자리를 맡아 반독재 투쟁을 펼쳤다.
이런 활동은 1990년대에도 이어져 대표적인 진보성향 문인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마지막 시집은 출판사 창비에서 2014년 나온 그의 열한번 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이었다. 창비는 1975년 3월 그의 첫 시집 '농무'를 시선 시리즈의 첫 권으로 출간한, 그와는 아주 인연이 깊은 출판사다.
고인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본다.
인생의 마지막 장(章)에 다다른 시인이 자신의 삶과 문학 전체를 담담하게 요약한 듯한 시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시인은 그렇게 한번도 자신을 불행하다 여기지 않은 채 평범한 사람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다가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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