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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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 (조춘영)통일의 그날에 벌일 ‘나라풍물굿’을 할 날을 그리며 2019년 3월 1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역 광장에 이르는 세종대로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수백 개의 풍물패, 수만 명의 풍물꾼들이 울리는 ‘만북’(만 개의 북) 소리가 웅장하고 신명나게 울려 퍼졌다. ‘만북 울림!’이다. 이날 전국의 풍물꾼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풍물굿판에 이어 <만북으로 열어 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을 선포, 채택하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새로운 100년, 생명의 새 세상’으로 향해 가는 원년(元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모인 이들 모두가 굿쟁이이고 보면, 이날의 선언문은 단순한 말모이가 아니라, 신력(神力)을 갖춘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풍물굿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이 된 것이다. 그에 앞서 2014년에는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 정책과 제도가 생긴 이래 국가무형문화재와 지방무형문화재에 40여 개의 풍물 단체가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와 1950~1960년대 근대화 지상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농악은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를 지나 절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이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여성농악단과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여 80년대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대학풍물굿 운동을 통해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고, 사물놀이의 세계화를 거쳐, 당당히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풍물굿 문화와 21세기의 풍물굿 농악/풍물굿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기층 오락, 예술이다. 전통적으로 민간에서는 세시풍속으로 일 년 중의 각종 절기에 맞춰 다양한 쓰임새와 목적으로 농악/풍물굿을 놀았다. 농악/풍물굿은 그 양식 안에 음악, 무용, 연극, 놀이, 종교, 군사, 교육, 사회, 문화 등의 요소가 망라되어 총체문화를 이룬다. 풍물굿은 바로 민중 자체요, 민중생활의 요체이며 한민족 시민대중문화의 원천이다. 온갖 신과 만나게 해 주는 매체다. 굿은 신이다. 신명이다. 신탁이다. 일상 속에서 성스런 것들을 끌어들여 정성으로 놀리고 참 마음으로 풀어내어 현실 가운데 어려움을 깨나가는 도구다. 전국의 마을 당산 앞에서, 중앙마당에서, 집집 처소에서 장구, 징, 쇠, 소고들 풍물소리가 끊긴 적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도 풍물굿은 죽지 않고 새로이 재창조되어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풍물굿은 한편으로 급격하게 탈-맥락, 재-맥락화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촛불시민혁명 과정에서 풍물굿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다른 흐름으로는 10여 개 대학에 전통연희과에서 전공자들이 풍물굿을 공부하고 졸업한다. 무형문화재 지정을 준비하고 있는 지역 풍물굿, 토박이 풍물굿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풍물굿은 이 시대 그리고 21세기를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상쇠, 풍물굿의 지휘자이자 예술가이자 살림꾼! 이러한 풍물굿의 저력과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전국에 얼마나 많은 상쇠가 있을까? 굿문화와 풍물굿이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가? 어찌하여 그러한가 직접 묻고 싶었다. 어떠한 실천들이 있었고, 어떠한 지향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풍물굿은 어디로 가는 있는지 답을 듣고 싶었다. 답은 현장에 있다. 『하늘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필자가 오늘의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풍물굿문화를 이어줄 다리 공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고, 입덕을 베풀어[인터뷰] 일구어낸 소중한 공덕의 탑이다. 저자는 세계, 전국, 지역, 지방, 마을을 누비며 풍물굿의 현장을 섭렵하였다. 저자 조춘영은 풍물굿 연구자, 담론가로서 이 시대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풍물굿쟁이의 소리를 담아야 할 사명감에 넘치지만, 그것인 힘겨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노동, 두레적 품팔이라는 생각이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풍물굿의 굿쟁이(지휘자)이자 지도자이며, 살림꾼(일꾼)이자 스승이고, (풍물) 사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상쇠에 주목하였다. 무엇보다 상쇠는 시대를 읽고 예술문화를 말하며 지역과 생명공생체를 이끌어가야 할 감수성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다. 여전히 대다수 민속학자나 풍물굿 연구자들이 전통문화라는 범주 속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풍물굿 연구의 결과물은 무형문화재 정책이나 제도에 포함된 일부 단체들 혹은 전통마을풍물굿으로 한정된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에서 새 길을 내고 이 시대 담론, 시대 의식이라는 지평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그래서 20세기 풍물굿이 아니라 ‘21세기 풍물굿’, 즉 풍물굿의 현재와 미래를 상쇠들과 더불어 조망하고자 한다. ‘21세기 상쇠론’ 전과 후 이것이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업이 아니다. 2016~2017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풍물굿쟁이들은 매주 풍물굿판을 벌였고, 저자는 이를 동영상과 면담 구술집으로 기록했다. 1차 결과물로 《새나라로 가는 길굿 - 촛불시민혁명 풍물굿에 대한 기록과 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박근혜국정농단 촛불집회는 이미 과거지만 촛불시민혁명은 과거형,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시대의식의 연장에서 본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은 기획되었다. 이제 풍물굿쟁이도 당당하게, 이제 풍물굿이라는 이름도 떳떳하게, 이제 무시와 멸시와 천시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풍물굿판을 벌이고자 하는 염원도 담겨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현재형이듯 풍물굿도 현재형이다. 과거, 역사, 전통이라는 옛것 프레임으로 한정할 수 없다. 왜? 전국의 수많은 풍물굿쟁이와 광장, 마당에서 벌인 풍물굿판이,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새나라로 가는 길굿이, 2019년 3.1 100주년 기념 만북울림 나라굿이 증명하였다. 그래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이다. (풍물굿을 농악이라는 20세기 무형문화재 제도 속 국가주의에 예속된 종목으로 잡아놓을 수 없어서 21세기 미래 시점을 펼쳐내고자 했다.) ‘21세기 상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전국 30여 명의 상쇠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남녀노소, 지역과 영역을 고려하여 25명에서 그쳤다(그중 10명을 이번 권1에 수록하였다. 나머지는 곧 나오게 될 다음 책에 수록된다). 풍물굿이라는 연구 주제로는 최초로 전국 범위에서 다양한 (풍물적) 배경을 가진 상쇠들을 만났다. 면담을 하기 전에 이미 수년 전부터 교류를 하였음은 물론이고, 실제 면담에 들어가서도 두 번의 밤을 새고서야 면담 완결된 상쇠도 있고, 면담 후 이어진 이틀간 뒷풀이를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비오는 날 강화 들판을 보며 꽹매기 소리도 주고받고, 보존회 사무실에서 수시로 결재를 주고받는 가운데 진행된 수고로운 면담도 있었다. 저자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간 겪어온 고난과 고민의 고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 일은 다반사요, 같은 동지로서 굿판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에 공감의 눈시울이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이 작업을 시작했을까? 꼭 했었어야만 했나?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상쇠를 만날 기대와 설렘에 충분히 행복했으니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책을 읽는 당신, 굿쟁이들의 일이라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통일의 그날에 남과 북의 모든 풍물패가 모드들어 휴전선을 넘나들며, 지난 역사의 원망과 한숨을 모두 씻어내며, 신명으로 새 나라 건설을 축원하게 될 ’나라풍물굿’을 벌일 것을 기약하고 있다. 권1 말미에 논문 '21세기 풍물굿 현장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실어 풍물굿 현장의 다양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권2(2020년 하반기 출간 예정)에서는 종합적인 차원에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을 제시할 예정이다. 저자 조춘영 박사는 풍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이며, 현자에서의 풍물 상쇠이기도 하다. 전국의 풍물 현장을 두루 답사하며, 전문 풍물패 또는 마을공동체 풍물패의 상쇠들을 만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의 풍물굿 문화의 변천, 성장, 진화 과정을 들어보고, 특히 상쇠를 중심으로 하여 풍물굿과 상쇠의 예술가적 특성, 문화적/장르적 미래, 한국사회에서 풍물의 의의와 전망 등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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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봉에서 사할린까지' (한만희)나는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전 공직생활에 특히 음양으로 영향을 준 생사를 넘나들며 수행했던 4년의 군 생활과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한 4년의 '사할린한국교육원장'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2021년 2월19일부터 ROTC4기 중앙회 카페에 향노봉의 북쪽사면인 1031골짜기에서의 4년 군 생활을 14회에 걸쳐 연재했다. 첫회에 AP(잠복초소)에 근무하면서 잠복근무 나갔을 떄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썼는데 부관병과로 사단사령부 인사처에서 근무했던 동기가 말하기를 "나의 경우 전방 전투사단에 배속되어 근무를 하긴 했어도 영외 거주라 출퇴근했고 주말이면 통근 버스로 서울 외출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근무했는데, 한 소위가 근무한 이야기를 읽으니 나는 너무 편하게 근무하다가 제대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의 댓글을 보면서 참 내가 힘들게 군 생활을 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바보같이 너무 힘들게 군 생활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공부하는 수필교실에서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힘들었던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쉽지 않았던 사회생활이나 그 어려운 외국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여유로운 인생의 후반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오히려 힘들었던 4년의 군 생활과 역시 4년의 외국생활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1943년생인 나는 태어나고 바로 해방을 맞았고 곧 이어 6.25동란이라는 대혼란을 겪었다. 이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죽음을 맞았고 거기에다 고부갈등으로 어머니까지 가출하면서 우리 5남매의 운명은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우리 5남매의 삶을 위하여 정상적인 논농사에 비해 몇 배가 힘든 13마지기의 천수답 농사와 1,000여 평 밭농사 일도 할머니의 몫이었다. 무슨 말로 할머니의 고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사회 전체가 6.25가 가져온 엄청난 비극 속에서 헤어나려 허덕이고 있는 그 당시의 시골은 발전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상태였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반복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스럽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나는 성장했고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빼곰히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시골생활이 싫어 온다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출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고모 집에 몸을 의탁했다. 새로운 꿈을 꾸고 가꾸고 싶어 박차고 나왔지만 모두가 살기 바쁘다 보니 누구하나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얼마동안 우왕좌왕하다 시골로 내려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는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든 길을 찾아야했다. 어떻게 해서 나온 길인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혼자 길을 찾고 찾다보니 희망의 끈이 보였고 한번 붙잡은 끈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그 끈을 쫓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갔다. 망망대해의 쪽배 같은 고학 생활 속에서도 희망은 하루하루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꿈과 희망의 끈은 대학졸업과 ROTC장교 임관이라는 결실을 안겨 주었다. 계속되는 적의 습격으로 생과 사가 교차하는 어려움 속에서 4년의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친 것도 힘들었던 농촌에서의 경험과 고학하면서 체질화된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의 정신자세가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면서 잠시 모교의 조교로 근무하다 중등교사 공채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어 학교를 전전했다. 그리고 교사 생활 20년 만에 많은 교사가 소망하는 장학사가 되었다.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해외 근무의 길이 있다는 걸 알았고 사할린교육원장 공모에 지원해 합격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준비룰 했다. 바쁘긴 해도 비교적 안락한 장학사의 생활을 과감히 접고 떠나는 나를 친구들과 지인들은 말리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환하는 격변기여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떄 였다. 정치 사회 문화가 180도 다른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는 전환기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악조건의 러시아를 일부러 찾아 들어간다는 것을 친구들은 이해 못했고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도 과거 펜팔할 때부터 가졌던 외국에 대한 호기심을 막지 못했다. 이런 저런 난제를 극복하고 사할린에 도착하여 성공적으로 교육원을 개원하고 운영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려웠던 4년의 군대생활이 밑받침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당시 러시아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교육부에서 3번씩이나 전국에 사할린한국교육원장 모집 공모를 했음에도 응모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감히 응모할 수 있었던 용기도 또한 어릴 때 시골에서의 고생, 고학, 그리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AP(잠복초소), CP(검문초소), GP(비무장지대 경계초소)장 생활이 포함된 힘들었던 4년의 군 생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조건이 열악한 러시아 땅 사할린에서 교육원을 개원해서 본 괘도에 올려놓기까지, 나는 사할린과 한국을 오가면서 온갖 힘들고 궂은 일을 기지와 지혜로움으로 잘 해결하고 뒷받침해 주어 교육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데 도움을 준 집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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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휴먼과 SF (최병구)2020년 1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가 지구를 덮쳤다. 그리고 이 책의 머리말을 쓰고 있는 2020년 12월, 전 세계적인 3차 대유행이 한참 진행 중이지만, 백신 승인 소식이 들려오면서 코로나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힘든 일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터널의 출구가 보인다는 희망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일상은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글도 여럿 제출되었다. 그 요지는 대략 자본주의가 파괴한 환경과 시장경제가 뒤바꾼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인식과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문명사회가 자연환경을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며 발전한 것과 성장 중심의 시장경제가 인간을 자본에 종속시킨 것에 대한 경고는 최근까지도 수없이 이루어졌다. 불과 6년 전에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 체제에서 시민의식을 상실한 자기를 반성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생활을 이유로 무관심해졌고, 세월호 사건은 곧 잊혔다. 그러니까 그간 수없이 이루어진 경고가 코로나 19를 겪으며 나의 신체에 직접적인 제약이 가해지자 새삼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 우리는 진짜 변할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지만, 과거를 돌이켜볼 때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어쩌면 문제는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쉽게 바뀌지 못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에서 ‘왜 우리는 쉽게 바뀌지 않을까?’로 말이다. 우리는 지금-현재 사회의 문화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공감한다. 다만 그 잘못되었다는 인식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습성이 문제이다. 이 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름과 행동 사이의 괴리, 혹은 올바름을 잊어버리는 이유를 찾고자 한 결과이다. 2011년 경향신문 특집기사에서 처음 생겨난 신조어가 ‘삼포세대’이다. 취업과 내 집 마련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의 탄생을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2021년을 눈앞에 둔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바로 ‘집’이다. 폭등하는 아파트 가격을 목격하며 누군가는 투자자 주체로 재빠르게 탈바꿈했고, 또 누군가는 하염없이 올라가는 아파트 가격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문화가 20-30대에 자리 잡은 지는 오래되었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지난 10년 동안 출산율을 높이고 아파트 가격을 잡기 위해 정부가 쏟아 부은 돈과 노력이 엄청난데, 왜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된 것일까?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정부의 무능이다. 지난 10년 진보 정권과 보수 정권이 번갈아 나라를 통치했으니, 무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공통된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엘리트만 모인 정부의 관료가 무능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정부의 정책이 대중들에게 반영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들의 (무)의식이 고정되었을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우리는 자본을 쫓는 삶이 부끄럽거나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올바른 선택이다. 이 두 가지는 상당 부분 겹쳐있는 것 같다. 얼마 전 벌어진 의사 파업 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의 엘리트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의해 키워진 존재다. 2019년 초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의대 입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명문대’와 ‘의대’가 합쳐지면 타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거대한 성을 이룬다. 그리고 그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그 너머를 욕망하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진실을 만들어낸다. 자본 증식을 위해 인간을 도구화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기준이 진부한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승자독식’의 논리를 깊게 체득한 사람들의 세상에서 승리한 엘리트들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런 습성은 지난 20년간 정치, 경제, 교육, 사회문화 등 다양한 영역이 복잡하게 얽혀져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로부터의 예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10년 전부터 문제를 인지했음에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개인의 내면과 사회제도가 상호작용을 한 결과이다. 그간 우리는 문제를 개인 혹은 사회, 어느 한쪽으로 수렴시켰다. 개인의 문제로 수렴되면 더 많은 노력을 하라는 명제로 귀결되고, 사회의 문제로 수렴되면 불평등한 사회제도의 개선을 촉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현실 인식으로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하듯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제도가 접촉하는 방식이다. 시스템은 오래기간 다양한 주체 사이의 힘의 논리가 작용하여 구축된다. 가령 현재 대학이라는 제도는 해방 이후 역사적 변곡점마다 이루어진 정부 정책과 ‘학벌’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중첩된 결과이다. 1990년대까지 가능했던 흙수저의 서울대 입학이 2020년 현재 불가능한 이유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들의 교육 격차를 만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의 교육은 경제와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중첩되어 있다. 실물경제와 자산가치의 불균형이 날로 심화되는 코로나 국면에서 세계 경제가 확인시켜주듯, 오늘날의 빈부격차는 그간의 시스템이 낳은 결과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상황이 이러니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개인의 욕망을 먹고 자란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제도의 변화란 요원한 일이다. 이 지점에서 지난 30여 년의 시간동안 우리 사회의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7년 아이폰이 처음 등장하고 불과 10여년 만에 스마트 폰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그 변화의 핵심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삶의 다양한 요소들의 경계가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경계가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주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부모의 재력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고 노동소득으로 아파트 한 채 사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치적 입장도 사회문화도 이러한 경제에 근거한 삶으로부터 결정된다. 최근 10년 간 이루어진 이러한 변화가 온전히 과학기술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과학기술이 큰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스마트 폰의 등장이 ‘서학개미’ ‘동학개미’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자본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최근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내면과 제도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만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테크놀로지, 젠더, 노동을 열쇠말로 삼고, SF소설을 통과하며 이러한 상황을 진단하고 가능한 미래를 가늠하고자 했다. 이매뉴얼 윌러스턴이 ‘역사적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구성한 항목이 과학과 인종/젠더 차별주의이다. 근대과학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종과 젠더에 따른 서열화가 구축되었다. 오로지 자본 증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방향은 과학의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념이기도 하다. 포스트 휴먼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서 유행한지는 제법 되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변화해야할까라는 질문은 절박하다. 코로나 정국에서 근대의 시스템 전반의 위기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포스트 휴먼, 다시 말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인간은 어떤 공동체를 꿈꿔야할까? 나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자식 세대를 위해 반드시 묻고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이 물음에 미약하게나마 답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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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강부원)누구나 빛나고 윤기 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원하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스스로 밝은 빛을 내는 발광체는 드물다. 대부분 눈에 띄지 않거나 살며시 타오르다가 이내 꺼져버린 성냥개비 같은 신세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의 경우가 대개 그렇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모두 밝게 빛나 보이게 마련이다. 범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크고 높은 업적을 남기거나 초월적 능력을 발휘한 한 시대의 영웅들이 연상된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할 인물을 손꼽을 때 불세출의 지도자나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한 정치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껏 그래왔고 그렇게 배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역사책엔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만 주로 회자된다. 그 외 다른 분야의 인물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성장주의와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 살펴보면, 경쟁에 매몰된 짓무른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황금만능주의로 혼탁했던 시절을 맑게 정화했던 빛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스스로의 삶을 가꾸고 정돈하는 건 물론 남을 위한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은 존재들. 척박한 영토를 개척하며 수백 번 넘어져도 스스로 다시 일어선 자들. ‘대문자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하고 뜨겁진 않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사람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띠며 밝게 빛나던 존재들을 찾다 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모아졌다. 이들이 일평생 온몸으로 써내려간 자기 서사를 역사란 이름으로 다시 정리해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한편 이들 대부분은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당대엔 ‘괴짜’ 혹은 ‘별종’으로 불렸지만, 지금 돌아봤을 때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시간을 앞서 살아간 전복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겐 혼자만 잘살기보다 타인과 함께 두루 잘사는 방법을 고민하느라 애쓴 흔적도 깊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출세와 성공을 쫒는 입신양명의 가치관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궤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와 명예보다 ‘자유’와 ‘해방’을 선택했고,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공의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길을 걸었다. 이들 모두는 ‘진취적인 사상’과 ‘유연한 생각’을 품은 새로운 인간형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며 신문과 방송 같은 미디어가 세상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대중문화의 힘은 더욱 세지고 강해졌다. 곰곰 돌이켜 보건대 20세기는 과연 ‘문화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대중문화의 현장에서 활약하거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재현물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 소개된 사람 전부를 20세기 한국사의 주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최소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생각을 크게 변화시키고 감정을 격발한 존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힘겨운 지난 세기를 살아내며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거나, 이들의 활동 덕분에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도 했다. 이들이 끼친 유무형의 영향력은 세상의 많은 걸 바꿨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어려운 이웃을 위해 먼저 발 벗고 나서거나 사회와 문화 예술 분야에서 찬란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들을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이라고 부르려 한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성숙한 제도와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주역이며,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장 앞선 곳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어둠과 두려움을 몰아내고자 눈에 불을 켜고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이들은 어떤 작은 빛이라도 더 밝게 반사하며 온 세상에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스물여섯 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참기 힘든 일을 잘 견뎌내며, 어려운 이웃에게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20세기 한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마련되길 바란다. 그러면 비로소 성장과 개발의 압력에 치여 살던 소시민들이 느꼈던 마음의 소외와 영혼의 갈증을 빈틈없이 위로해준 이들이 누구였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출간한 책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은 격동하는 20세기 한국사의 현장에서 세상과 맞서 싸운 자들의 일대기를 다뤘다. 이번 책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과 분위기를 만들어낸 반짝이는 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우뚝 세운 이야기다. 지난 번 책이 한국사에 숨겨진 인물들의 남모를 행적에 주목했다면, 이번 책은 누구나 얼핏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다시보기’에 해당할 터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두 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구성과 일관된 형식을 취해 ‘20세기 한국사 인물 시리즈’로서 연속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은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의 후편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1권에 이어 나온 2권으로서의 소박한 지위로만 그치길 바라지 않는다. 이 책은 1권에서 서술한 인물들과 분별되는 명확한 기준과 새로운 시각을 반영해 선정한 매력적인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독자적인 별권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일상에 영감을 더하는 지식 채널 ‘아홉시’에 매주 연재했던 글을 분류하고 새로 고쳐 묶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던 팬데믹 상황에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온라인 매체에 연재하며 애독자를 얻고 그 결과 출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사람들과 멀어지다 보니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새로 배우게 된 셈이다. 즉 이 책은 코로나 유행이 가져온 역설과도 같은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나 마찬가지다. 첫 책을 냈을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던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난다. 격려해준 선생님들과 축하를 전해 준 동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은 매한가지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날카로운 서평과 정성스러운 후기를 남겨준 이름 모를 독자들에게도 어떻게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중한 독자들을 생각하면 좀 더 성실하게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고에 한결같이 관심과 애정을 보내준 김형욱 편집자께 특별히 고마운 마음이 크다. 성긴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된 건 온전히 그의 공로 덕분이다. 김형욱 편집자는 출간을 준비하는 나에게 든든한 조력자이지만, 나 역시 그가 매체에 연재하는 글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하다. 그도 나와 같이 매주 글을 쓰고 연재를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묘한 동지애가 생기기도 했다. 책을 준비하는 동안 명민하고 따뜻한 그의 글을 보고 깊이 배울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라기보다 은은하게 자신을 드러낸 밤하늘의 별빛이다. 그러니 이 책이 유명한 인물들의 위인전이라기보다 다정하고 친근한 이웃의 삶을 기록한 수기로 읽혔으면 좋겠다. 역사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의 소소한 삶을 세밀하게 기록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의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약자들과 함께했으며 시련을 견뎌낸 인물 26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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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아시아 전통 합주의 흐름(김중현)한국과 아시아의 음악인들은 1993년 '오케스트라 아시아' 창단을 시작으로 2008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2014년 '실크로드 오케스트라' 등 각국의 전통악기로 구성한 새로운 형태의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활발한 상호 음악교류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지난 100여 년 간 아시아 전통음악은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과정을 경험하였다. 특히 근·현대시기에 아시아 각국의 전통악기를 중심으로 전통관현악단이 탄생하였는데, 주로 서양에서 발달한 오케스트라의 연행방식을 모방한 형태로 편성되었다. 서양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모방한 아시아의 전통음악 관현악단은 아시아의 근·현대 이전의 전통음악 연행방식에서는 흔치 않았던 지휘와 작곡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한국의 경우 연주자들이 전통음악의 5음 음계 대신 평균율을 의식하는 음률감으로 변화하였다. 관현악단 연주형태에서는 악기편성, 연주자의 수, 악기배치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이렇듯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단들은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전통 방식이 아닌 서양 오케스트라를 모방한 서양 미학적 관점과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아시아 각 지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궁중과 민간 관현악단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아시아 각국의 전통관현악단은 서양에서 발달한 오케스트라의 연행방식을 도입한 형태로 앙상블을 만들었으며, 작곡과 지휘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아시아 전통관현악은 각국에 서양음악이 유입된 이후 그영향으로 서양식 관현악합주 형태를 띠었는데, 이는 자국의 전통양식과 합주형태의 계승보다 서양의 합주형태를 모방한 것에 더 가까웠다. 이렇듯 아시아의 근·현대적 전통관현악단이 등장하였으며, 그 등장 시기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적 전통관현악단은 자국의 전통관현악을 계승한 새로운 음악적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전통관현악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맞추어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동시에 자국의 전통음악을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음악적 변화와 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아시아 각국이 연대하여 다국가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를 형성하였다.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모여 자국의 전통악기를 사용하고 서양의 오케스트라 형태를 모방하여 관현악 편성으로 구성한 악단을 의미한다.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는 20세기 후반 아시아 음악인들이 상호 간의 연대를 통해 만든 다국적 전통악기 합주형태를 의미하고 통칭하는 용어로 필자가 새롭게 명칭을 정하였다. 특히 본 책에서는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는 국악관현악과 아사아 소통하며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한·중·일 '오케스트라 아시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실크로드 오케스트라'를 주요 대상으로 기술하였다. 본 책에서는 근·현대에 전개된 아시아 각국의 전통관현악단이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로 연합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양상이 펼쳐지는지 그 형성과정과 음악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20세기 후반 아시아 음악인들이 연합하여 새로운 음악문화를 만들고 활동한 과정이 인류음악사 속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조명해보고자 한다. 본 책에서 살펴볼 논의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 각국의 전통관현악은 서양음악 수용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였는가를 살펴보았다. 둘째,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변화가 무엇인지 아시아 각국에서 서양음악을 받아들이고, 또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을 때 제기되었던 문제와 해결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오케스트라 아시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실크로드 오케스트라'의 세 가지 유형의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가 음악 문화적 형성과정에서 경험한 특징을 살펴보았다. 셋째,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각국의 전통악기들의 음악적 융합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선보인 음악과 작품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넷째,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활동을 살펴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다문화적 관점과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음악문화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제2장은 근·현대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의 전개양상을 살펴보겠다. 한국의 국악관현악, 중국의 민족관현악, 일본의 현대 방악의 생성과 변천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각국의 악기 편성과 창작곡의 연주 경향, 단체 등을 살펴보고,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의 전개양상을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 순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오케스트라 아시아' 창단의 모체가 되었던, 한국의 '중앙국악관현악단', 중국의 '중앙민족악단', 일본의 '일본음악집단'의 공연자료 인쇄물 및 회의 자료 등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기타 아시아 국가들은 문헌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전통악기합주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음률 체계, 악기 편성, 악기 개량에 대하여 파악하였다. 제3장의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의 형성과정은 '오케스트라 아시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실크로드 오케스트라'의 형성과정을 검토하고 각각의 오케스트라의 형성 배경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먼저 형성 배경은 추진 주체에 따라 정부주도, 민간주도로 구분하여 추진 사례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아시아의 연합오케스트라로서 각국이 추구하는 목적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악기편성과 작곡, 연주 공연에서 나타난 협의 과정, 진행 과정을 파악하고 그 특징을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음악 활동과 특징을 실제 공연과 창작된 악곡의 분석 및 음악작품의 특징을 파악하고 음악 문화적 의미를찾는데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제4장은 아시아 각국 전통관현악의 전개양상과 ‘아시아 전통악기 오케스트라’ 형성과정 검토 및 악곡의 특징 분석을 통해 나타난 음악 문화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다문화주의와 문화상호주의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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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애의 "전북지역 가야금산조 시김새 특징적 연구"[박사 논문]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선율구조, 시김새의 결합구조 및 활용 양상 등을 중심으로 음악적 구조와 특징을 확인한 결과 전북지역의 가야금산조는 고유의 뿌리 깊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남지역의 가야금산조에 비해 활발한 연주 및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지역의 초기 가야금산조를 연구한 본고의 비교, 분석이 활발히 전승되고 또 이론적 근거가 뒷받침된 연주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기를 희망하며, 전북지역의 특유의 음악적 어법을 녹여낸 새로운 산조의 구성 기반이 될 수 있기를 하는 바램이다. 본 연구는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북 지역의 신관용ㆍ신쾌동ㆍ김종기 가야금산조 중 진양조ㆍ중모리ㆍ자진모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선율구조, 시김새의 결합구조 및 활용 양상 등을 중심으로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음악적 구조와 특징을 확인하였다. Ⅱ장에서는 본 논문의 연구대상인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전승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영채에게 배운 신관용의 가야금산조는 강순영을 거쳐 현재는 강정렬, 안옥선, 강동렬, 정해임 등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박학순에게 배운 신쾌동의 가야금산조는 현재 전승되고 있지 않다. 박한용에게 배운 김종기의 가야금산조는 정금례와 김삼태를 거쳐 현재 변금자, 김인제, 김진애 등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Ⅲ장에서는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악곡구조 및 유사선율을 파악한 후 전남지역 가야금산조와의 비교를 통해, 시김새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특징을 살펴보았다.첫째, 진양조의 악곡구조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관용 산조이다. 신관용 산조의 진양조는 계면조로 시작한 뒤, 평조ㆍ계면조ㆍ우조로 진행한 후 평조로 단락을 맺는다. 첫 단락을 계면조로 시작하는 점은 독특하지만, 악장의 후반부에 우조 단락이 나온 후 종지 단락으로 악장을 맺는 점에서 전남의 성금연류 가야금산조와 유사하다.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진양조 유사선율에서 나타난 시김새 활용은 선율의 시작에서 ‘휘어쳐올리는목’+‘미는목’이 가장 많이 나타났다. 즉 한 각의 선율을 하나의 음으로 시작할 때 주로 ‘휘어쳐올리는목’+‘미는목’의 시김새 결합구조를 활용한다. 또한 선율의 시작에 나타나는 시김새 활용은 ‘밀어끊고올리는목’, ‘밀어올리는목’, ‘미는목’, ‘다루치는목’과 시김새를 활용하지 않는 순으로 나타난다. 선율의 전개구는 ‘밀어올리는목’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시작구와 전개구에서 하나의 음이 지속될 때 ‘밀어올리는목’으로 시작을 마무리하고 전개를 시작하는 효과를 주기 위해서이다. 이 외에도 선율의 전개구에는 ‘미는목’의 시김새 활용이 나타났다. 선율의 종지구는 제6박에서 ‘밀어올리는목’으로 장식하며 선율을 종지한다. 이는 전북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시김새 활용이다. 따라서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진양조에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시김새 활용은 종지구인 제6박에서 ‘밀어올리는목’으로 선율을 종지하는 것이다.둘째, 중모리의 경우, 신관용은 계면조로 시작하여 평조로, 신쾌동은 계면조로 시작한 후 평조로 연결하여 계면조로, 김종기는 계면조로 악곡을 구성한다. 모두 첫 단락을 계면조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전남의 성금연류와 가장 유사하다.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중모리 유사선율에서 나타난 시김새 활용은 선율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에서 특징적인 활용 양상이 나타난다. 후반부 중 제9박은 시김새를 활용하지 않고, 제10박은 ‘휘어쳐올리는목’+‘꺾는목’, 제11~12박은 ‘미는목’+‘밀어올리는목’으로 시김새를 결합하여 활용하는 점은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중모리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다.셋째, 자진모리 악곡구조는 전체 악장이 계면조로만 구성되어 있다. 전남의 김죽파류ㆍ성금연류가 동일하다.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자진모리 유사선율에서 나타난 시김새 활용은 선율의 제2박과 제4박에서 ‘미는목’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김종기 산조에서만 ‘휘어쳐올리는목’+‘미는목’의 시김새 결합구조를 활용한다. 김종기 산조 외에 전북과 전남은 대체로 ‘휘어쳐올리는목’ 대신 ‘밀어올리는목’을 활용하므로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자진모리는 김종기가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전북지역 신관용ㆍ신쾌동ㆍ김종기 가야금산조의 연주자별 독창선율에 나타나는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았다.첫째, 신관용 산조의 독창선율에 나타나는 특징을 장단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양조의 경우, 선율의 리듬ㆍ음정을 중심축의 기준으로 전ㆍ후를 대칭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긴장을 이완시키며 자연스러운 진행을 한다. 한 각의 끝에서 다음 각으로 진행하는 선율 전개에는 ‘딸꾹질목’ㆍ‘흘러내리는목’ㆍ‘꺾는목’ㆍ‘밀어올리는목’ㆍ‘미는목’ 등의 시김새를 활용한다. 또한 옥타브 순차하행과 옥타브 도약한 후 순차하행하는 특징이 나타난다.중모리의 경우, 한 장단 안에서 동일한 시김새를 반복하여 활용한다. 예를 들어 제3박에서 ‘미는목’을 제시한 뒤 제5ㆍ6박에서 ‘미는목’을 반복하여 시김새를 활용하거나, 진양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속적으로 시김새를 반복하여 선율을 전개하기도 한다.자진모리의 경우, 3+3소박, 4+2소박의 연속적인 리듬변화와 함께 한 장단 안에 2ㆍ2ㆍ2소박의 리듬구조로 잉어걸이 붙임새가 나타난다. ‘끊는목’+‘감아내는목’으로 시김새를 활용하며 완자걸이의 진행으로 전개한다. 3소박을 한 단위로 하여 ‘꺾는목’+‘미는목’으로 시김새를 활용하여 순차 하행하는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둘째, 신쾌동 산조의 독창선율에 나타나는 특징을 장단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양조의 경우, ‘밀어올리는목’+‘흘러내리는목’의 시김새 결합구조를 활용하는 경우가 절반이 넘는다. 또한 신관용 산조와 마찬가지로 ‘밀어올리는목’-‘밀어올리는목’을 연속적으로 활용하여 선율을 전개하기도 한다.중모리의 경우, ‘밀어끊는목’과 ‘끊는목’으로 장식하며 반복하는 시김새 활용이 나타난다. 제1~3박과 제10박에 ‘밀어끊는목’, 제4~6박에 ‘끊는목’으로 반복해서 활용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자진모리의 경우, 2ㆍ4+2ㆍ4소박, 4ㆍ4ㆍ4소박의 리듬구조 변화, 또는 2ㆍ2ㆍ2+3ㆍ3의 리듬 구조이다. ‘꺾는목’과 ‘미는목’+‘밀어올리는목’으로 시김새를 결합하여 활용한다. 완자걸이 진행 이후 잉어걸이의 붙임새가 반복하여 진행한다. 또한 2ㆍ2ㆍ2+2ㆍ2ㆍ2소박의 리듬 구조로 고음역대의 수직적 선율 진행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셋째, 김종기의 독창선율에 나타나는 특징을 장단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양조의 경우, 종지구인 제4~6박에서 ‘미는목’-‘미는목’+‘미는목’의 시김새 결합 구조를 활용하여 선율을 종지한다.중모리의 경우,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작 부분에서 ‘밀어끊고올리는목’으로 시김새를 활용한다.자진모리의 경우, Ⅲ장 유사선율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율의 시작과 전개부분에서 ‘휘어쳐올리는목’+‘미는목’으로 시김새를 결합하여 활용한다.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독창선율에 나타난 시김새 활용의 특징을 정리하면, 진양조는 대칭구조의 진행으로 반복하는 시김새 활용 양상이 나타난다. 또한 시김새를 결합하여 연속적으로 활용한다. 중모리는 전반부에서 동일한 시김새를 연속적으로 활용한다. 자진모리는 3ㆍ3+4ㆍ2+3ㆍ3소박의 진행으로 자유로운 리듬변화, 2ㆍ2ㆍ2+3ㆍ3소박의 리듬 구조로 잉어걸이 붙임새가 나타난다. 또한 완자걸이 진행 이후 잉어걸이 붙임새로 반복하여 선율 진행한다. ‘꺾는목’-‘미는목’-‘밀어올리는목’의 시김새 결합구조를 활용한다. 선율의 시작과 전개부분에서 ‘휘어쳐올리는목’+‘미는목’의 시김새 결합구조를 활용한다. 이는 전북지역 가야금산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전북지역의 가야금산조는 고유의 뿌리 깊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남지역의 가야금산조에 비해 활발한 연주 및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모쪼록 전북지역의 초기 가야금산조를 연구한 본고의 비교ㆍ분석이, 전북지역의 가야금산조가 활발히 전승되고 또 이론적 근거가 뒷받침된 연주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전북지역 특유의 음악적 어법을 녹여낸 새로운 산조의 구성의 기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향후 전북지역과 전남지역 가야금산조의 비교 연구를 넘어 각 지역 별 가야금산조와의 비교 연구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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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이 책은 2019년 2월, 3·1운동100주년을 맞아 성신언론인회 등의 지원을 받아 독립출판(비매품)했던 ‘3·1정신과 여성교육 100년’의 후속 격이다. 전작은 성신여대(성신학원)가 3·1운동의 발원지인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1921년 설립된 태화여학교를 승계한 역사적 사실을 재발굴하면서, 3·1운동이 한국여성에게 끼친 엄청난 영향을 전반적으로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다. 고루한 국사책 속 태화관이 아닌 현재에도 유효한 공간적 의미와 장소성을 되새기는 동시에, 국내에는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대학사(大學史)’ 연구의 한 형태로 알음알음 찬사를 받기도 했다. 민족대표들에 의해 기미독립선언식이 이뤄진 태화관이 ‘여성에 의해, 여성을 위한, 여성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은 거족적 항일운동이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인구 절반의 삶에 끼친 지배적 영향력을 강렬하게 상징한다. 오히려 한 세기가 흐른 3·1운동 100주년 기념 물결에 여성의 자리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2019년 광복절 옛 태화관 자리에 조성된 ‘3·1독립선언광장’ 준공식에는 역시나 나이든 남자들만 즐비하니 치적을 자랑했다. 그해 말 종교인연합이 추진한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은 ‘할아버지’들의 대잔치로 그쳤다. 한국여성운동의 초석이 다져진 공간조차 다시금 남성들의 전유지가 되는 것은 금방이다. 그 동안 내가 사로잡힌 어구는 ‘역사는 발굴이며 해석이고 경합이 된다’는 어느 역자의 말이었다. 한 번 잊힌 역사가 복원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한 줌이라도 권력을 쥔 자들의 편의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사실도 어떻게 취사선택되는지를 여실히 보았다. 무엇보다 여성의 역사가 얼마나 홀대되는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였다. 유사역사학은 배제해야함이 분명하나 근거와 증거가 뚜렷함에도 이른바 ‘정통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한국사가 특정 학교 출신의 초엘리트를 자부하는 몇몇 ‘남성’ 교수들, 혹은 정치적 이용가치에 따라 권력에 빌붙은 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목격했다.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학문적 사기’에 준할 만한 분식(粉飾)도 뻔뻔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또 그 카르텔은 어찌나 공고한지, ‘학문의 자유’나 ‘지성의 전당’ 같은 말들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절감했다. 3·1운동의 평화적 시위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촛불광장’까지 이르는 민주주의적 의미를 지니는 혁명이었고 무엇보다 한국여성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한 사람 몫을 하는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한국여성이 정치적 주체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며 여성 참정권을 획득하는 근거가 된다.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신분, 계급, 성을 떠난 평등을 임시헌장에 명문화하고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한다. 임시정부 계승을 천명한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수립과 함께 역시 성인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선거권을 부여한다. 2022년 3월1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개관을 했는데도 여성참정권이 ‘서프러제트’ 같은 무력투쟁을 수반한 서구와 달리, 해방 후 미군정을 거치며 거저 얻어졌다하는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아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 비단 이뿐이 아니다. 여성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잊히고 지워지기 일쑤다. 끊임없는 발견과 재해석, 의미부여 없이는 한 세대만 지나도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사라져 버리곤 한다. 심지어 내가 살아온 반세기 안 되는 시간동안에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함을 목격했다. 2016년 강남역여성표적살인사건 전후로 등장한 온라인 페미니스트들 중 일부가 자신들이 이 땅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무지를 탓해야할지, 기억되고 기려지지 못한 여성사를 안타까워 해야할지 아연했다. 남성들이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나아갈 때, 여성들은 맨땅에서 또다시 시작해야하는 일이 허다한 이유다. 사소하게는 가문의 치장부터 국가 간 전통·영토 전쟁까지 역사는 단순히 지켜야할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사’는 사학계측에서도 여성학계측에서도 뚜렷한 대접을 받지 못하며 부유하는 모양새다. 다행히 여성계가 염원해 온 국립여성사박물관이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내 부지를 결정하고 2024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여성사라는 분야가 국내에 확고히 자리 잡는 동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이 ‘종군위안부’ 같은 피해자적 위치가 두드러졌다면, 2010년대 들어 여성운동과 더불어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는 점이다. 2019년에는 태화여학교 출신 여성 8명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뒤늦게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김동희(1900~), 김상녀(1912~), 남윤희(1912~), 노보배(1910~), 민임순(1913~), 신준관(1913~), 정태이(1902~), 홍금자(1912~)가 그들이다. 1930년 1월15일 서울에서 태화여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체포돼 구류형을 받은 것이 확인돼 모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민족성지 태화관에서 비롯된 ‘태화여자관’이 지난 세기 여성계에서 그 역할과 위상 면에서 상징하는 바가 컸을 텐데, 이런 중요한 기록들이 정사(正史)화 되지 못하고 낱낱이 흩어져가는구나 싶어 책을 쓰는 내내 속이 쓰렸다. 간신히 사료에 흔적이 남은 몇몇 인물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여성사의 명확한 한계다. 분단상황 등이 더해 아직 확보, 정리되지 못한 근현대사에서 증발된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정립할 의무가 더욱 뚜렷해진다. 참고로 2021년 KBS에서 현충일 특집으로 ‘연순, 기숙’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해 눈길을 끌었는데, 10대소녀시절 여자의용군,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나섰던 여성들의 육성을 담은 것이다. 애국심, 의협심, 정의감 등은 남성 참전용사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자식들에게조차 이 사실을 숨긴 것은 노벨상 수상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에 나오는 바와 같이 여군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터이다. 훗날 영웅으로 추앙받기라도 할 심산으로 싸웠던 것이 아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기억되지 못한 여성의 스토리(Herstory)가 얼마나 많을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본서는 ‘태화’라는 키워드를 통해 당대 한국여성들이 여학생이라는 근대적 주체로 탈바꿈하며 어떻게 새로운 차원의 삶을 개척해나갔고, 그 정신이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어떻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지를 밝히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지위가 어머니와 아내로 주로 제한됐던 시대에도 그들의 ‘살림’과 ‘키움’이 우리사회를 지탱하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을 지를 가늠해 보려한다. 태화관이 한국여성사에서 왜 핵심적 표상으로 기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가 이 책을 쓰는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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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희,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악보집을 출간하며꿈에도 그리운 나의 스승, 김죽파 선생님을 회고하다. 1970년 2월 서울대학 음대 국악과 2학년이 되던 해 나는 죽파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종로구 사직동 아담한 한옥집에 계신 죽파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도 위풍이 당당하셨고 위엄이 있으신 대장부같이 잘생긴 분이셨다. 죽파 선생님께서는 나를 보시자 눈을 크게 뜨시고 가까이 오라고 하시며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시고 가야금을 타보라 하시고는 함께한 교수께 "우리 가문을 지켜나갈 수 있는 소중한 아이인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죽파 선생님은 친할아버지 김창조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와 어린 시절 공부하시던 때를 이야기해 주셨다. ”가야금 산조를 만드신 김창조(1856-1919, 전남 영암), 그 분이 내 친할아버지이시며 나는 할아버지의 가야금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할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배웠다"라고 말씀하셨다." 죽파 선생님께서는 어린 시절 9세까지 친할아버지 김창조 선생에게 풍류, 산조, 병창을 배우시고 할아버지 타계후 김창조 선생의 수제자 모정마을 한성기 선생에게 산조, 풍류, 병창을 사사하고, 한갑득 선생에게 거문고 사사, 한일섭 선생에게 아쟁을 사사, 심상건 선생에게 심상건 산조를 사사, 그 외에 많은 명인들로부터 춤, 판소리, 병창 등을 익히셨다. 위대한 스승 죽파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나의 예술의 길은 일생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20년간 죽파 선생님 댁에서 동거동락하며 풍류, 산조, 병창, 아쟁을 전수받게 되었다. 죽파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시고 득음의 경지에 도달해야하는 사명감에 내가 힘겨워할 때마다 죽파 선생님은 "혼이 줄에 떨어져야 내 마음도 움직이고 남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셨고, 세상 사람들과의 일로 마음 아파할 때는 "멀리 높이 나는 새는 명중 당하지 않는다”라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몸이 약했던 나를 위해 아침, 저녁을 손수 지어주셨고, 결혼후 아이를 출산한 뒤에는 선생님 댁으로 퇴원케 하시고 잦을 넣어 양즙을 짜서 산후 조리를 직접 해주셨다. 죽파 선생님께서는 20년간 온갖 정성으로 산조 가락가락 가르쳐 주시고 나의 예술과 삶 전체를 이끌어 주셨다. 1980년 죽파 선생님께서는 「양승희 가야금 독주회」를 위해 기존 죽파 산조 가락에 진양조(변청, 본청 20가락), 중모리(우조 22가락), 중중모리(4가락), 자진모리(4가락)휘모리(변청, 본청 36가락), 무장단 뒷가락, 짧은 다스름 등 새 가락을 짜 넣어 55분의 현재 전해지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완성하시고 "너에게 주는 내 선물이다”라고 흡족해하셨다. 이중 휘모리 가락들(변청, 본청)은 친할아버지 김창조 선생에게서 8세 때 배운 가락들로서 죽파 내면에 존재해있다가 61년 만에 표출된 가락들이다. 1984년 죽파 선생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국악계 원로 선생님 댁을 찾아가 양승희가 가문을 이어나가게 해주실 것을 부탁드렸고 1988년 나는 준인간문화재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 때 다른 파트에 선정된 분들은 감격으로 흥분하여 기뻐할 때 죽파 선생님께서는 "양선생은 어려서 아무것도, 좋은지도 모른다. 심성이 여려서 가문을 지켜나갈 수 있을 찌 걱정된다.” 고 하시며 웃으셨다. 1988년 내가 KBS 명인전에 뽑혀 국악원 우면당에서 죽파류 가야금산조 전바탕을 타게 되었을 때 나의 공연이 끝나자 국창 김소희 선생님께서 "이제 양선생이 되었네. 형님 마음 놓고 돌아가셔도 되시겠어요”라고 하셨고, 죽파 선생님께서는 나를 안고 감격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내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됐다. 됐어” 라고 하시었고 그 이듬해 타계하셨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때 "되었다” 라는 뜻을 알지 못했음으로 스승님 타계하신 후 모든 대학강의를 접고 15년간을 수험생처럼 시간을 짜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윤윤석 선생에게 아쟁, 철금, 김소희 선생님, 김수연 선생님에게 판소리, 정예진 선생에게 병창, 서한우 선생에게 설장구와 춤 등을 공부하였다. 어느날 운보 김기창 화백 그림(물 속의 금붕어)을 보면서 가야금을 타던 중 금붕어가 느린박자, 빠른 박자에 맞추어 꼬리를 흔드는 찰나적인 환상을 경험, 활연 관통하듯 스승님이 원하시던 소리가 내 손을 통해 가야금 가락에 묻어나는 순간을 체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TV와 인터뷰하였는데, 「한 예술가의 득음의 경지」라는 타이틀로 "나의 예술의 길”이 그해 대학 연합고사의 영어 듣기 평가 시험으로 채택되었다. 년과 1989년 3월 죽파 선생님과 함께 일본 공연을 갔을 때 일본 문부성 장관은 직접 저녁 식사 초대로 환대하셨고, 장관께서는 나에게 "어린 나이에 벌써 인간문화재”가 되었냐고 반가이 맞아주셨고, 죽파 선생님의 공연을 들은 어느 교포 청중은 "선생님의 손이 내 조국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조국의 소리를 듣게 된 것에 대해 살아있음이 감사하며 큰 영광입니다”라고 하였다. 일본 CNN TV는 연일 한국 인간문화재 죽파 선생님의 일본 현지의 근황과 공연을 TV를 통해 방영하였다. 1985년 일본 공연후 죽파 선생님께서는,"유일무이한 나에 제자 승희야, 나에 계승자가 되려면 일심으로 가시밧길, 山을 넘고 물을 건너 좌절함이 없이 지극한 긍지와 인내로 음악에 광명이 올 때까지 분투 노력에 굴함이 없기를 일심으로 빌 뿐이다. 사랑하는 나에 승희 허수이 생각지 않겠지. 죽파는 성공을 빌면서, 日本 공연을 함께 맞치고, 1985年 9. 29日. 竹坡” 라고 부채에 적어 주시면서 나를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인정하시고, "김창조 내 친할아버지가 산조를 만드셨으니 밝혀주고 가문을 지켜달라”고 유언을 남기시고, 1989년 9월 10일 타계하셨다. 나는 다시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천추의 그리움을 남기신 스승님의 喪主가 되어 국악장으로 눈물 속에 스승님을 하늘에 보내드렸다. 나는 죽파 선생님께서 생전에 늘 말씀하시던 산조 음악 가문의 뿌리인 김창조 산조는 어떻게 짜여졌으며 그 산조의 원형이 후세의 산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늘 생각하던 중 스승님 타계 1년 후 1990년 7월 중국 연변예술대학 초청 양승희 독주회를 갖게 되었고 연변예술대학 교장 김진(1927-2007) 교수가 특별 출연해 주심으로 귀한 만남이 되었다. 김진교수는 1955년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부에 5년간 유학하여 김창조 선생의 직계 제자인 안기옥(1894-1974, 평양음악대학 교수, 인민배우) 선생으로부터 김창조 가야금산조와 안기옥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그때 김진 자신이 채보한 악보와 테이프 및 50년간 북한에서 저술된 "조선예술”, "조선음악”, "문화유산” 등 350여 권의 책자, 문헌과 북한의 전통예술분야 1,000여편의 논문 등 김창조에 관한 모든 자료를 나에게 전해주었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복원, 초연하고 악보와 CD를 출반하여 김창조 선생이 산조 음악의 창시자 임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2000년 나는 죽파 선생님의 고향에 내려가 영암이 산조의 본향임을 TV와 언론에 천명하였고, 2014년 국가와 영암군의 190억원 후원으로 가야금산조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2011년 이후 (사)한국산조학회(이사장 양승희, 회장 김해숙)와 (사)김창조산조보존회를 설립하였고, 영암군 후원으로 김창조 가야금전국대회와 가야금기념관 개관 축하공연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2016년 영암군(전동평 군수)과 전남 교육청(장만채 교육감)의 지원으로 영암 초.중.고생들에게 가야금 교육을 시작하여 영암 어린이들은 교육부 장관상, 전남 교육감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영암 어린이 가야금연주단을 결성하여 매년 가야금산조 기념관 개관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가야금 산조 음악 가문은 가야금산조 창시자 김창조-인간문화재 김죽파-인간문화재 양승희로 이어지고 있으며, 김창조산조, 김죽파산조, 김죽파제 풍류, 가야금병창(명기명창), 안기옥산조(북한에 전승)를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사는 동안 이루어야 할 꿈은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가야금산조⌟가 등재되는 것이며, 세계가 경탄하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 가야금산조가 자손만대에 전해져 제자들이 靑出於藍청출어람되어 문화재가 탄생되고 가야금산조의 본향이 더욱 빛을 발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2020년 영암 교육지원청 후원으로 영암 어린이 가야금 교재로서 가야금 초급반 교재와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악보를 출간하게 되었다. 가야금산조는 많은 미분음으로 작곡되어 있어 서양 오선보 악보로 표기할 수 없는 부분이 많으나. 가야금산조를 구전심수로 배워가는 과정에서 이 악보의 서양 표기법 악보는 가야금 가락을 쉽게 암보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죽파 선생님으로부터 20년간 전수받은 대로 산조의 調조에 따라 다양하게 다른 농현법에 중점을 두고 바이브레이션으로서의 농현법과 장식음으로서의 농현법 등을 구분하여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채보하였다. 두 권의 악보집을 발간하도록 후원해 주신 영암군 전동평 군수님과 영암 교육지원청 김성애 교육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20년 12월 인간문화재 양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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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장편 판타지 소설 ‘광무(狂舞)’댄스 칼럼니스트 강신영 댄스판타지소설 ‘광무(狂舞)’는 댄스스포츠계 최초의 장편 판타지 소설이다. 댄스 지도서 중심의 책이 몇 권 있을 뿐, 관련 책이 많지 않은 댄스계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섬세하고 리얼한 본격 댄스스포츠 관련 소설은 없었다. 광무는 현실과 천상세계라는 독특한 배경 위에 진정한 댄스스포츠의 진수를 보여준다. 왈츠라는 댄스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강한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댄스스포츠를 접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댄스계에 몸을 담아왔던 청노루님의 풍부한 경험과 열정, 멋진 상상력을 더한 소설이다. 단순한 소설에 그치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 에니메이션으로도 만들면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탄탄한 구성과 줄거리의 완성작이다. 그간 나왔던 몇 편의 댄스 주제 영화들이 일본영화 <쉘위댄스> 외에는 대부분 제비족이나 어려운 환경의 댄서를 등장시킨 어두운 소재였다. 반면에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댄스스포츠는 그 자체가 꿈과 희망의 대상이다. 현실적으로는 댄스에 대한 편견, 경제적 문제 등으로 그렇게 화려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저자는 판타지 소설로나마 댄스에 대한 욕구를 표현했을 것 같다. 무슨 장르가 되었든 잘 하려면 미쳐야 한다. 저자 청노루님도 그랬다. 댄스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이 소설은 미국 영화 <조 블랙의 사랑 Meet Joe Black>을 연상시킨다. 1998년에 제작된 영화인데 마틴 브레스트 감독 작품으로 브래드 피트가 저승사자의 변신으로 출연했다. 저승사자가 현실 세계에 왔다가 데려가려던 사람 빌 패리쉬의 딸 수잔을 사랑하게 된 스토리의 영화다. 엔딩은 65세 생일 파티 때 부녀가 마지막 춤을 추고 저승사자와 함께 저세상으로 떠난다. 이 영화를 보면 죽음 자체나 저 세상은 무서운 것만은 아니다. 빌 패리쉬 자신도 멋진 일생을 보냈다고 자평하고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라고 했다. ‘광무(狂舞)’도 현실 세계는 물론 저 세상을 무대로 했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들게 재미있게 스토리를 리드했다. 댄스에 입문해 본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묘사가 훌륭했고, 댄스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공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든 작품이다. 후속작도 기대해 본다. 강신영: 현)여성경제신문, 전)중앙일보, 전)댄스스포츠코리아 고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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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읽다 출판, ‘아리랑민족의 디아스포라’나의 책 ‘아리랑민족의 디아스포라’(2021년 6월 글을읽다 출판)는 1904년 미국의 유명 작가 잭 런던 (Jack London)이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 Francisco Examiner)’지의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대한제국에 5개월간 파견되어 쓴 신문기사와 여행기 그리고 많은 사진에 관해서 2016년에 쓴 영어 논문, ‘History of Early-modern Korea Through the Eyes and Pen of Jack London, 1904’에 기반하여 썼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인으로서 태평양전쟁에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던 수십만 명의 조선인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논문과 단행본 출판물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연구에서 등한시되었던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훨씬 전인 1904년에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러-일전쟁에 조선인들이 참전하였을 것이라는 실마리를 잭 런던의 신문기사와 여행기 속에서 찾아냈다. 이 책은 일본과 미국의 내셔널 아카이브, 러시아와 한국의 일차 자료뿐만 아니라, 미국 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기록과 출판물을 추적하여 발췌한 역사적 사실들을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1930-45년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인의 일본군 참전이 그보다 30-40년 전인 1904년으로 소급되어야 할 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식민지배 이전인 1904-05년에 조선인들이 왜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한·미·러·일 4개국의 일차 자료를 찾아본 결과, 일본군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에도 많은 조선인이 참전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1860년대부터 대규모로 발생한 조선인의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로의 이주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헤게모니 전쟁 속에 양편으로 갈라져서 싸워야 했던 조선인의 비극이 그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나 미국에 건너와 교육받고 오랫동안 생활한 필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조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난 160여 년 동안 한반도를 떠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 다민족 디아스포라를 형성해 살아오고 있는 한국인들과 그 후세들에게 한국의 근대사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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