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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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을 읽다"카메라를 든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알고 싶다면, ‘그때 그 사진 한 장’을 읽어야 한다. 이 책 속의 사진들은 절묘하게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항시 수첩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하여 "기록"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은 기록하고 발췌는 나중이다. 이 책에서는 기자로서의 세상을 보여준다. 기자는 1968부터 1991년까지 많은 이들, 상황을 기록한다. 만약 세상에 기자가 한 명이라면 모든 사진들이 특별하겠지만 신문사도, 기자도 많다. 그래서 세상은 특별하고 유일한 사진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한 유일 사진을 엮은 책이 ‘그때 그 사진 한 장’이다. 이 책에서는 사진을 새롭게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준다. 첫 번째,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사진으로 보여줘야 한다. 14 페이지 "거리에서" 의 캡션에서 "어느 시대나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사람이 있고, 친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친절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 사진 속의 서울의 거리나 지금 당장 서울의 거리를 나서도 동일한 장면은 포착할 수 있다. 이는 곧 이 시대상과 빈부격차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려면 부자인 사람들만 촬영해서도, 가난한 사람들만 촬영해서도 않된다. 이 두 장면이 동시에 보이는 그 각도에서 장면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촬영해야 한다. 아마 이 기자는 이 순간을 위해서 기다렸을 것이다. 두 번째, 순간의 선택을 위해서 노력하고 집중해야 한다. 24페이지 "만원 열차"에서의 등교하는 학생들로 기차가 매달린 모습을 촬영하였다. 사람들로 꽉 찬 대중교통은 현재도 있다. 그 안에서는 시대상을 볼 수 있고, 특이한 행각들이 때로는 일어나기도 한다. 그 상황을 재미있게 촬영해야만 하는데, 그 때 카메라가 없으면 이 장면을 생생히 보더라도 기록을 놓치게 된다. 세번 째, 촬영 대상의 색다른 모습을 포착해야한다. 이 책의 178페이지 "얼굴"에서는 서정주 시인의 지금까지 보지 못한 살아있는 표정을 촬영한 것이다. 이는 우연찮게 시인 앞에 기자가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다신 없을 사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유명한 사진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저서 ‘결정적 순간’ 책 속에는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와 "사진을 찍을 때 한 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 이고, 찰나의 승부를 거는 이유는 사진의 발견이 곧 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보며 내내 마음에 눈을 뜬 채 피사체를 바라보고 그 찰나에 승부를 걸었구나 싶었다. 또한, 이 책에는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다각화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촬영 할 때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담아야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기자는 때론 과감하지만 촬영 대상자에게는 친근하게 다가간 결과다. "하루 한 번 잠깐 멈춰 마음의 눈을 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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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퇴계의 생각은?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진기한 새들은 서로 화답하며 온갖 소리로 우네 그윽한 곳 요즘은 찾는 손님이 없다보니 푸른 풀이 뜰 안에 마음껏 났구나 霧捲春山錦繡明 珍禽相和百般鳴 幽居更喜無來客 碧草中庭滿意生 1565년 봄 퇴계 이황은 4년 전 완공된 서당에서 봄을 맞으며 서당 앞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이 머물며 수양과 교육에 진력할 좋은 땅을 구해 5년 여 공사기간 끝에 마련한 도산서당의 앞 뜰에 봄이 왔음을 시(詩)로 표현해 본 것이다. 퇴계는 봄날의 아침 풍경에 이어 한 낮을 묘사하는 시도 지었다.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 뜻 말하는데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庭宇新晴麗景遲 花香拍拍襲人衣 如何四子俱言志 聖發咨嗟獨詠歸 아침이 한 낮으로 바뀌면서 살짝 비가 온 마당에 햇빛이 서서히 들고 있고, 비에 씻긴 풀과 꽃 향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앞 두 줄은 그런 뜻인데 뒤의 두 줄은 무슨 뜻일까? 네 명의 제자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중에 유독 시 읊고 돌아온다는 말에 대해 성인(공자)가 감탄을 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내용의 시다. 무언가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퇴계가 무심코 이런 귀절을 넣어 시를 지을 분이 아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보니 귀절의 배경에는 공자가 네 제자와 나는 대화가 있었다. 공자는 어느 날 자로(子路)와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네 제자에게 차례로 각자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하니 자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차 천 대의 군비를 갖춘 제후의 나라가 강국 사이에 끼어 군대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으로 피폐하여 기근이 덮쳐 곤궁에 쳐했다면 제가 그 정치를 맡아 3년 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하고, 도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염유(冉有)가 대답했다. 사방 6, 7십리 또는 5, 6십리 쯤 되는 지역의 정치를 제가 맡아 3년 만에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공서화(公西華)가 대답했다. 저는 꼭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희망을 말씀드리면 종묘의 조상 제사와 빈객이 모이는 회동(會同)의 제사 때에 단(端)의 예복을 입고 장보(章甫)의 관을 쓰고 의례를 보좌하는 소상(小相)의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증점(曾點)은 그때까지 슬(瑟)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튕기고 있다가 퉁하고 내려놓더니 자세를 고쳐 대답했다. 춘삼월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나가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올까 합니다. 말하자면 자로는 강병(强兵)의 나라, 염유는 부민(富民)의 나라, 공서화는 예악(禮樂)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고 증점(曾點)은 기수라는 데서 물놀이하다가 바람 쐬고 놀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공자가 다른 제자들 말에는 빙긋이 웃기만 하다가 증점의 말은 그것을 인정하고 허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갑자기 그의 시에 왜 이 구절을 집어 넣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주희(주자)는 다른 제자들이 섣불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만 증점은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자세에 대해 올바르게 천명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른 제자들이 남을 부리고자 하는 의욕을 이야기했지만 증점은 자기를 다스리고 싶은 그 마음이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공자가 높이 인정한 것은 증점이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할 태도를 정해 자기완성의 길로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어서 그것이 곧 올바른 군자의 길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퇴계가 봄날의 시에다 이런 뜻을 담은 것은 퇴계가 고향인 안동 도산에 내려와 서당을 열고 생활할 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퇴계는 친형님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완전히 굳혀 1561년에 서당 건물을 완성했고, 서당 주변에는 집 옆의 샘을 살리고 연못부터 울타리, 화단까지 직접 디자인했고, 집 앞 오솔길의 입구와 낙동강 변의 천연대와 천광운영대까지를 찾아 다듬어놓음으로써 서당 일대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학문과 수양과 교육을 시작했다. 퇴계는 그렇게 도산서당을 세워 거기에서 증점이 말하고 공자가 인정한 학문의 방법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증점의 일화는 세상을 자기가 다스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퇴계는 선비들이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다(明道救世)’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은 반드시 관료의 삶을 사는데 있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인용한다. 그것이 도산서당으로 들어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참된 수양과 학문과 교육으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자는, 이른바 ‘물러섬(身退)의 학문’이 퇴계의 속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학자들도 모두가 논어를 읽고 주희를 공부했기에 공자가 증점에 대해 평가한 이 부분을 다 공부하고 주희가 말한 이런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은일적 삶을 항상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때론 관료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기에 세속에서의 성공과 명성의 유혹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러나 퇴계는 겉으로만 물러가는 척하는 풍토를 아쉬워하며 진정으로 자연으로 돌아와 공자의 속 뜻, 공자가 말한 요순의 세상을 위한 방편을 몸으로 체현하자는 것이며, 그 말을 봄에 대한 시의 두 번째 연(聯)에서 말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하루가 지나는 과정을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와 수양의 길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퇴계는 학문과 덕행을 힘쓴 옛 성현들의 삶을 시 속에 녹여 그들의 길을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퇴계가 도산에 들어온 이유이자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필자의 최근 저서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에서 밝혀 보았다. 많은 분들이 학문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왜 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운가?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면, 학문을 하신 분들은 진실해야 하는데 왜 온갖 요설과 사설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학자들이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학문을 하는 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는 퇴계의 생각을 이 멋진 봄에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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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도산서원의 품격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은 게 몇 번쯤 될까?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러함에도 첫 번째 봉심(奉尋)만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1980년 추향(秋享)이었는데, 초헌관(初獻官)으로는 퇴계 선생의 직손(直孫)인 백주(白洲) 이원윤(李源胤) 옹(翁)이, 상례(相禮)는 도산(陶山) 하계(下溪) 출신인 이윤항(李潤恒) 옹(翁)이었다. 진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초성까지 참 좋았던 어른이었다.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필자는 어떤 계기에서였는지는 모르나, 그 경건한 도산서원 향사에 ‘학생’ 신분으로 참사(參祀)하게 되었다. 같이 간 이로는, 고등학교 5년 선배인 권혁윤(전 안동과학대 교수), 한 해 선배인 박명철(전 고등학교 국어교사), 한 해 후배로 현재 안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이성규 박사였다. 그때가 벌써 43년 전 일이다.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도산서원에도 매화가 피었겠지? 싶어서 귀경을 잠시 미룬 채 서원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 ‘도산탐매(陶山探梅)’에 나선 셈이다. 예상대로 매화는 막 피기 시작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옆에 조성된 매화원은 물론 역락서재(亦樂書齋) 앞의 노거수(老巨樹)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산다는 것은 꽃 소식을 듣는 일’이라더니, 와서 보니 ‘참 잘 왔다’였다. 퇴계 선생께서 남긴 "문 닫은 채 솔바람 듣고(松風關院聽), 눈 속 매화를 화로 낀 채 바라보네(梅雪擁爐看)”라는 선생의 싯구가 떠올랐다. 아직은 쌀쌀한 봄날, 아랫목이 그리울 때인지라, 도산서당 완락재(玩樂齋)의 아담한 방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선생께서 계셨다면 문을 열고 이렇게 막 핀 매화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매설(梅雪)’은 눈을 맞은 채 핀 설중매(雪中梅)일 텐데, 그것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옹로(擁爐)’ 즉 화로를 낀 채 본다는 표현은 신의 도움까지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다 15년간 대제학까지 지냈던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가 퇴계시 가운데 더욱 맛을 느꼈다는 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쾌한 기분을 품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옥진각(玉振閣)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보아도 감명 깊었던 지극히 소박한 서기(書丌, 冊床)와 아울러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매화연(梅花硯)과 매화등(梅花燈)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이들 기물(器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생을 뵙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유가 있어 시선을 다른 자료들로 옮겼다. 복제품들로 전시장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진품(眞品)들에 눈길이 더 갔다. 영문으로 번역까지 된 안내문을 가만히 읽게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편집해 조선 선비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가 펼쳐져 있었다. 그 책 첫째 장 하단(下段)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상(上)’이라는 묵서(墨書)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도산서원 광명실(光明室)에 소장된 책 가운데 한권 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를 소개한 안내문에는 "1561년 문인 황준양(黃俊良)에 의해 간행된 목활자본 15권 8책이다.”라고 되어있었다. 문제는 ‘황준양’이라는 표기다. 혹시 싶어 황금계(黃錦溪) 종손에게 확인해보니 그렇게 쓴 예는 없다고 했다. 오식(誤植)이다. 이어진 "선생의 수택본으로 곳곳에 비점(批點)과 주기(註記)가 있다”는 부분은 일견 완전해 보이지만, 첫째 장 상단에 주묵(朱墨)으로 주서(註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註記)’는 ‘주기(朱記)’가 바른 표기일 듯하다. 문제가 있다 싶어 다른 안내문까지 이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다. "선생의 8대손 초초암공(草草唵公:泰淳)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이교(金履蕎)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10권 10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초초암공’은 대사간을 지낸 ‘초초암공(草草庵公)’이 정답이고, ‘김이교(金履蕎)’는 우의정을 지낸 죽리(竹里) ‘김이교(金履喬)’이며 ‘복사’는 ‘필사(筆寫)’가 바른 표현이다. 그 옆에 있는 등경(燈檠) 설명문에는 "등잔을 엊어 놓던 등잔거리로서”라는 것에 ‘엊어’라고 오식(誤植)한 것을 진작 인지해서인지 ‘ㄴ’을 ‘수기(手記)’해 궁색하게 잘못을 수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역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도산서원의 품격에는 모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방식이다. 고식지계(姑息之計)다. 우리의 유산은 ‘세계유산 등재’를 자랑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기리고 배워 후대에 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오식을 오래도록 간과, 방치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문화재 당국이나 도산서원 관계자는 물론 필자를 포함한 관람객 모두에게도 등한(等閑)히 여겨 지나친 잘못이 없지 않다고 본다. 조속한 시일 내에 그 정오(正誤)를 살피고 가려서 바로잡아야 한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다. *고식지계 (姑息之計):임시방편으로 당장 편한 것을 택하는 꾀나 방법.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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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함흥도시 연구인가도시공간이 흥미로워 관련된 도서를 읽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2012년 경기남부지역 통일교육센터 상근직 강사로 2년간 활동했다. 통일교육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대해 무지함을 느꼈다. 경험으로 강의를 이어가기에는 지식이 한참 부족했다. 무지함을 벗어나고자 북한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관련 수업을 듣으며 내가 살았던 공간이 궁금해졌다.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구는 시골답지 않는 도시다. 석탄이 식량만큼이나 중요해 탄맥 있는곳에 인력을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까지 고층건물이 희소하고, 하모니카로 부르는 급조된 단층집이 많았다. 생산에 집중했기에 서비스업이 부족하고 문화생활이 자유롭지 않다. 새로 나온 영화는 명절시즌에 맞추어 방영되는데, 그걸 보려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섰다. 뒷거래로 뭉치표를 구매해 야매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유행되었던 음악, 무용, 영화가 흑백화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연구는 평양 위주로 많았고 지역도시 함흥관련 선행연구가 적었다. 중요하게 식민도시에서 사회주의도시이행 관련 연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석박사 논문을 함흥으로 준비했다. 함흥을 읽다보니 내가 살았던 고원군 수동구보다 훨씬 이야기가 많았다. 함흥은 외사촌형제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가 함흥 주변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닳도록 드나들었던 지역이다. 함흥에 있는 ‘도지방총국기능공학교’에서 직업교육도 받았다. 함흥역전과 동흥산구역, 회상구역으로부터 장진, 부전으로 가는 신흥선 기차를 타고 다녔다. 함흥냉면에 원조 ‘신흥관’에서 농마국수도 먹었다. 1984년에 지어진 함흥대극장 앞으로 수 없이 지나다녔다. 함흥에 얽힌 이야기를 담으니 살아온 생애처럼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어온 흔적이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길이 생기고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들어왔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사람을 만들듯 도시생애를 통해 사람과 사회가 변화해온 과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이유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을 올리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흔적을 남겨놓았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래서 도시를 변압기에 비유한다. 도시는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기도 하지만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연결되어 도시 성격을 만든다. 사람이 모여 있는 만큼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공간을 지배하고 도시문화를 만든다. 도시와 도시는 비교 가능하다. 개발된 지역과 덜 개발된 지역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회를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에 도시가 있다. 공간은 영원한데 사람과 사회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왔다. 색바랜 기억과 지식으로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꺼낸다. 자연, 사람, 사회 요소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다. 북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도시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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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12월은 춥다(2)매서운 추위가 계속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 볼이 빨갛게 얼어 든다. 아무리 추워도 영하 30도씩 오르내리는 겨울을 살았기에 지금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살았던 사람이 눈 속을 뒹굴러도 끄떡없을 패딩을 입고 춥다고 야단이다. 춥지도 않을 추위가 춥다고 생각되니 따뜻한 남쪽에 적응이 되었나 싶은데 다시 보면 추위보다 마음이 추울 때가 있다. 시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북한이탈주민 모두는 시인이다. 돈을 벌어서 가족에게 보내고 현재 삶에도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남쪽 사람들처럼 좀처럼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시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 생기는 것도 아니요. 아프니 그냥 써 본 것이 어느 날 시가 되어 시린 마음을 다독인다. 시를 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누군가 읽어주고 공감한다면 기쁨은 배가 되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북한이탈주민 이지혜 씨는 시를 써본 적 없다. 그는 십 년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또 다시 맞이하는 새해가 두렵다. 떠난 것이 불효가 되어 못 견디게 그리운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편지를 쓴다. 다섯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음산이 막혀 있는 것도 아닌데, 가로 지른 분단선 하나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혹하고 야속하다. 그리움을 담으면 꿈속에 엄마가 꼭 안아준다. 엄마품이 따뜻하고 포근해서 온기로 추위를 견딘다. 행복을 멀리한 적 없고 이별을 가까이한 적 없으나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이 평범한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그렇게 그리움을 한 자 한 자 새겨 시를 짓는다. 북한이탈주민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워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고 잊기에는 인연이 남아 있다. 헤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잊혀질까 두려워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혼란한 사이를 탈출해 완전한 남쪽 사람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다. 아직 사이를 벗어나지 못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시를 짓는다. 시린 마음에 온기를 유지하려 문장을 만든다. 차가운 시선이 머무를 때 시와 문장을 만들며 마음을 덥힌다. 고향에 12월은 춥다. 동지섣달 한 허리를 베어 먹을 만큼 춥다. 무너지게 내리는 눈사태에 연탄불에 모여들어 배가 볼록한 도루메기를 구워먹었다. 오그랑 팥죽을 먹으며 긴나긴 겨울을 보냈던 시기도 있다. 따뜻한 기억은 가족과 함께 있었을 때이고, 차가운 기억은 상실했을 때 마음이다. 자식을 두고 온 어미와 어미를 잃은 자식이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느낀다면 가을과 겨울 사이를 벗어난 사람이다. 시를 써본 적 없는 사람이 시인이 되어 아픔을 노래할 수 있다면 다가오는 새해가 두렵지 않겠다. 고향이 추우면 따라서 마음도 시리다. 남북관계가 얼음이 되면 따라서 마음도 얼어 든다. 북쪽도 따뜻한 남쪽처럼 등 따시고 배부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추위에 당당하겠다. 주저 없이 가을과 겨울 사이를 벗어나 새해를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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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고향 12월은 춥다(1)갑자기 추워졌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고향에서는 김장이나 식량이나, 땔감은 마련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단단히 준비를 해야 추운 겨울을 이길 수 있다. 북쪽 고향에 추위는 매섭다. 김장독이 꽝꽝 얼고 밖에 나가면 코끝이 베어진다. 추워지고 있는데 남북의 정치상황은 그 보다 더 춥다. 일상인듯 날아오르는 미사일과 현실성이 의심되는 통일정책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북쪽 고향 12월은 남쪽만큼이나 바쁘다. 12월에 어떻게 해서라도 계획을 끝내려고 몰아치기 전투를 하고, 가정에서는 식량이나 땔감도 마련해야 한다. 집안이나 집밖이나 마지막 12월을 넘기려 힘을 써야 할 때다. 날아오르는 미사일을 지켜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 눈이 오기 전에 산에 내린 도토리나 밭에 널려있는 시래기를 한톨도 남기지 말고 집으로 가져와야만 기나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12월에는 각종 행사가 많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몰라도 수령 생모 김정숙을 기념하는 행사에 목청껏 노래를 불러야 한다. 12월 24일 행사 준비를 하려고 근무시간이 끝났어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래연습을 했다. 진달래를 연상시키느라 흰 종이에 분홍물감을 들였다. 노래를 뽑는데 에너지를 쓰고는 1972년 12월 27일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한 날이 공휴일이라 쉬는가 싶다. 그런데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추모 행사가 계속 이어지게 생겼으니 고향에 12월은 분주하고 춥다. 춥기도 한데 북쪽은 더욱 살기가 많이 어려워진듯하다. 가족과 연계되어 송금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코로나19로 국경이 막혀서 장사도 할 수 없게 되자 더욱 어렵다도 한다. 지금까지는 너만 잘 살면 된다고 격려하던 가족들이 어렵다고 하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 자식 이 있고,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돈을 모아 보내주지 않을 수 없다. 돈이 마련되지 않아 보내주지 않으면 그런대로 마음이 아파 가슴앓이를 한다.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늘 마음을 졸인다. 미사일이 날아오르고 남북관계가 얼음이 되면 죄인이나 된듯 숨죽인다. 북쪽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남쪽 사람인듯 정말로 남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마음이 찢긴다. 그래서 아픔을 멈추려고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을 데려오는데 올인한다. 얼마 전에는 공안에 잡혀있는 아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보았다. 12월은 춥다. 고향이 추워지면 따라서 여기서는 더 추워진다. 하늘만 아는 미사일은 아니본듯 냉각된 남북관계에 떨지 말고 산이나 밭에 있는 땔 것이나 먹을 것은 모두 걷어 곳간에 넣을 일이다. 어야든 살아남아야지. 그래서 올해 마지막 12월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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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의 춤 그리고 춤론에 담긴 생명철학Ⅰ. 들어가며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1)이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개전되었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민족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이다. 본 글은 학술적 이론을 내 세우거나 특정 논지를 쟁점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2022년 5월 세 번에 걸쳐 개최된 춤꾼 이애주 추모행사2)에 참여하며, 상기한 그의 전통춤 계승 가치, 그가 시대적으로 창안한 창작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춤의 생명철학을 사회적 시각과 사상적 관점에서 살핀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면에는 오늘날 한계에 도달한 한국춤의 기능적, 형태적, 예술미학적 접근을 뛰어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되고 응용되는 우리 춤의 본질 및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술 현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의 목표가 삶의 생명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이애주 전통춤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을 예증 삼아 그의 춤 생애 그리고 그의 전통춤 세계관을 살펴 볼 것이다. 이애주 1주기 추모행사는 2022년 5월 10일 (화) 오전 11시 그가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 1주기 추모 나눔굿>으로 개막되었다. 다음 날 5월 11일 (수) 오후 8시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던 경기아트센터의 소극장에서 '우리 춤의 혼과 맥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추모공연이 있었고, 5월 27일 (목) 오후 2시부터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 한성준 바탕 한영숙 류 이애주 맥: 승무의 미학'(2022), '고구려 춤 연구'(2022),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2022)의 출판기념회 및 '이애주 춤: 학예굿'이 개최되었다. 추모행사에는 이애주와 함께 민족춤 문화 회복을 위해 사지 동거했던 동지 및 춤계 선후배, 동료 그리고 제자가 함께하였다. 춤 '땅끝', '나눔굿 밥', '도라지꽃' 등 세 개 작품에서 드러난 기획 의도, 춤판 현장, 이면에 담긴 이애주 춤의 생명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세 개의 작품에는 겉 치장을 요하는 미학적 춤이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 공동체 정신을 살리는 춤, 민중의 아픔을 품어 내는 치유의 춤 사상과 사회적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춤과 창작춤을 넘나들며 표명하고자 했던 이애주 춤의 본성과 의미를 탐색하고 그 속에 담긴 생명철학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시작하며 1. 이애주의 전통춤 및 계승 여기서는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가 전수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그리고 이애주 춤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계승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중,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만을 다루는 까닭은 첫째, 한성준-한영숙-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기본적인 춤이라는 점, 둘째, 경기제 대풍류 및 경기 무속음악을 춤 장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살풀이춤을 통해 보건대, 단아하고 우아한 독창적 춤 새로 추어진다는 점(이은주, 1998), 넷째, 전승 계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태평춤」은 이애주 자신이 늘 주장한 바와 같이 태평무의 원 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연에서도 원 춤에는 원 장단을 써야 한다며 경기도당굿 악사를 대동하여 「태평춤」 공연에 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애주 전통춤은 춤계에 익히 알려진 충남 홍성출신 한성준(남, 1874-1941) 그리고 그의 손녀 한영숙(여, 1920-1990)으로 이어져 온 족보 있는 전승계보를 갖고 있다. 한성준은 일찍이 전통연희 무대화와 예술화에 주목하여 이를 성취적으로 이룩해 낸 한국 근대 연희사의 거목이다. 그의 민족춤 예술화에는 신앙, 놀이, 의례로써 사유된 민중사상과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어서 민족주의적 사고와 미래를 향한 예술 창달의 미래관을 일깨웠다. 그동안 버림받고 묻혀 있던 옛 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춤 예술 발전을 도모하였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춤 문화운동가라고도 한다. 한성준의 춤 무대화 업적 뒷면에는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바탕삼아 이루어진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서려 있다. 한편, 한성준의 「승무」 및 여타 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용인 출신의 명인 김인호(남, 1858-1932)와 연결된다(이병옥, 2022, pp. 1-21). 그 까닭은 명고수 한성준이 광무대(光武臺, 1898에서 1930년까지 서울에 존속했던 전통연희전문극장)에서 김인호 춤을 전문적으로 반주했고, 김인호가 권번에 나가 춤을 가르칠 때도 동참하여 장단을 잡아 주었다(이병옥, 2018). 명인으로 이름 석 자를 떨친 김인호는 전남 담양 출신 이날치(남, 1820-1892)의 제자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성준은 김인호에게서 많은 춤을 익혔고, 1930년대에 이르러 김인호가 사망한 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김인호가 남긴 춤을 정립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이병옥, 2022, 15). 이와는 또 달리, 한성준의 「승무」 등 전통춤은 또한 전북 정읍 세습무 출신의 전계문으로부터 전수되기도 하였다. 전북지역 단골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전계문(남, 1865-?)은 명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해적, 대금 등의 기악과 성악 그리고 춤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김익두, 2022, 48; 김익두, 전종구, 최동현, 최상화, 1992, 245-247). 이처럼 한성준 춤은 윗대로 올라가면 그 전승 계보가 김인호 그리고 전계문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음악에 능통한 고수였다는 것이며 그 출신 지역을 호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한 계보를 잇는 이애주는 1947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고,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의를 놀라게 하였다. 필자: 양종승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하여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National Treasures (민속과 문화정책: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 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민속기록학회 회장,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연구 관심사는 샤머니즘, 무형유산, 전통춤 등이며, 주요 연구로 "한국의 굿" (공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God Pictures in Korean Contexts (한국 샤머니즘 神圖) (공저), '우리춤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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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회 학술회의, “애국가 定位시킨다”국민악회 주최의 애국가 관련 학술모임이 결성되어 오는 9월 3일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한다’라는 대 주제로 발표회를 개최한다. 국민악회는 1980년 창설, 원로 작곡가 중심의 음악가 단체이다. 주최는 국민악회(회장 문성모)이지만 안익태기념사업회 국가상진연구회 한국음악평론가협회가 함께한다. 이들 단체는 지난 10여년간 애국가가 심한 내외상(內外傷)을 입었다고 진단하고, 이를 정위(定位)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여 행사 주제를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 한다’라고 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회에서는 작곡가와 작품 그리고 작사자와 가사 문제에 대한 파괴적 공격에 대한 반론을 네 전문가가 분담했다. 첫 발표자인 김승열(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숭실사이버대학교 외래교수)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의혹에 대한 해명과 변호’를,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중앙대 명예교수)교수는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 양상’을 발표한다. 세 번째는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문성모(前 서울장신대 총장, 국민악회 회장)회장이 맡고, 마지막은 김연갑(국가싱징연구회 분과위원장) 위원장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를 발표한다. 김승열교수는 2000년대 들어 안익태를 친일/친나치 인사로 매도하는 주장들에는 좌파진영인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중되었다고 전제했다. 이의 원인 제공자로 故 노동은 교수(1946-2016)를 꼽았다. 노 교수가 안익태가 연주하지도 않은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나 1944년 R. 슈트라우스의 ‘일본축전곡’을 연주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을 지적했다. 이런 오류를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교수의 2019년 발간 ‘안익태 케이스’가 그대로 승계했다고 비판한다. 이어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김보국 연구교수가 안익태의 헝가리 유학 시절을 추적한 논문과 방송의 인터뷰를 지적했다. 안익태가 1939/40학년도 등록서류에 안익태와 부모의 종교를 일본 ‘신도(Shintoi)’로 기재한 것이 명백한 타인 필적임에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등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다. 이런 실태는 "3국 동맹 체결 이후 엄중해진 전시(戰時)체제 하의 일제 강압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두 번째 발표는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중앙대 명예교수) 교수는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 양상’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전교수는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 주관을 위해 귀국한 안익태가 전국을 순회하던 때 대전사범학교 밴드부원으로 <애국가>를 연주한 경험을 들어 그의 강한 음악가적 열정을 회고했다. 그리고 1962년의 시작 된 국제음악제 준비과정에서 안익태가 국내 음악인가들 면전에서 "이 중에서 스코아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무시하는 등의 발언을 소개하며 국내 음악계 인사들, 특히 임원식(지휘자)과의 갈등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안익태가 국내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더라면, "한국음악계가 최소한 30년 이상 앞서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세 번째 발표 논문은 문성모(前서울장신대 총장, 국민악회 회장) 회장이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이다. 작사자가 아직도 확정되지 못한 채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음을 전제로 현행 애국가의 가사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논했다. 현 애국가의 ‘무궁화가’와의 관련을 전제로 "찬미가" 14장(1908년), ‘국민가’(1910년), ‘국가’(1014년), ‘애국가’(1931년), 윤치호 자필 4절 가사’(1945년), ‘한국애국가’(1945년)‘에 이르기까지의 가사 변천 과정을 살폈다. 작사자에 대해서는 기존설을 정리하고, "문헌적인 증거로 보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발표는 김연갑 위원장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라는 논문이다.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에는 "이미 확정해야 했다”는 전제로 더 이상 논란의 의미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어 애국가가 걸어온 역정(歷程)을 제시하고 ‘국가’ 아닌 ‘애국가’라는 명칭과 기능은 작사 작곡자나 국가(國家)가 정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민중(우리)이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라 누구도 현 애국가의 국가 기능 폐지나 새로운 국가 제정 주장은 ‘애국가 공동체’의 총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는 근대 혁명 국가의 경우와 다르게 제도를 초월한 민중의 공인 가치가 큰, 특이한 경우라고도 주장한다. 결론에서는 제헌국회의 ‘애국가 지속 사용 합의’를 존중하여 "통일이 될 때 까지”는 애국가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애국가의 곡명과 위상은 작사 작곡자의 의지가 아닌, 우리(민중)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애국가 자체가 친일을 한 적이 없음으로 비제도적이고 한시적인 국가 기능의 애국가 위상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선택이 지혜로운 집단지성이란 사실을 통일을 앞당겨 입증해야 할 뿐이다.”라는 주장으로 글을 맺었다. 이번 발표회가 다시 ‘애국가 논쟁’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이번 발표회를 주도한 문성모 회장은 "이번 발표회를 계기로 다양한 단체나 개인이 참가하는 열림 모임으로 확대,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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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죽음을 넘어 빛이 된 비운의 사진가.소멸함으로써 빛을 발하던 한 여인의 자가 촬영 사진. 그녀는 한평생 가치 있는 사진을 찍어왔지만 사망 직후에서야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이 비극적이지만 명예와 영광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기술한 책,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를 소개하려 한다. 이야기는 2008년 12월, 시카고 로저스 파크에서 한 노파가 빙판에 쓰러진 채 발견된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이름은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수십 년 동안 수만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진을 보지 못한 비운의 사진가이다. 그녀는 생사를 헤매다 2009년 4월 26일 사망한다. 장례는 그녀가 옛적에 17년간 보모로서 보살펴왔던 존, 매튜 그리고 레인 겐스버그 삼형제에 의해 치러졌다. 그들은 비비안의 초상을 요약해서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했다. 그것이 그녀의 사진이 빛을 보게 된 계기가 됐다. '시카고 트리뷴'에 존재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젊은 부동산 중개인 존 말루프가 찾던 것이었다. 그는 2007년에 열린 경매에서 비비안의 네거티브 필름이 담긴 상자를 샀다. 2년 후, 그의 감각적인 안목으로 자신이 구매한 것이 비범하다는 것을 확신했고, 구글 검색을 통해 얼마 전 올라온 그녀의 장례 보고서를 발견했다. 그 후로 삼형제를 만나 그들이 알고 있는 비비안 마이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삼형제는 기억했다. 그녀는 카메라를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숨 쉬듯이 사진을 찍었다. 마치 자신의 생명이 그것에 달린 것처럼.” -25p 존 말루프는 자신이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사들인 다른 구매자들을 찾아내 대부분의 사진을 사들였다. 하지만 뉴욕의 대형 미술관들은 그와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이베이에 네거티브 필름을 팔아 번 돈으로 시카고 문화센터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전시회를 열었다. 대중은 열광했고, 곧 이 파급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존 말루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를 제작했다. 이후 세간의 반응은 확실하게 좋았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는 지저분한 거리, 얼룩이 있고 찢긴 더러운 옷들이 등장한다. 구멍 난 신발과 도랑에서 노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지친 여자들과 세속적인 남자들이 등장한다. 두아노풍의 부드러운 노스텔지어는 전혀 없고, 학교 의자에 앉은 꿈꾸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앞에서, 정면에서 포착한, 전혀 미화되지 않은 현실이 그 속에 담겨 있다.” -36p 위의 글처럼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는 사람들과, 그들의 미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포착돼 있다. 사람 또는 삶의 형태에 초점을 맞춘 그녀의 사진과는 달리 인생은 외롭고 고달팠다. 그 어두운 인생의 내막은 이 책의 저자인 가엘 조스와 존 말루프에 의해 세상에 나온다. 비비안 마이어는 1926년 2월 1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불화로 인해 남편과 헤어졌고 불량아인 오빠가 빈번히 사고를 일으키는 가운데 혼자 방치되었지만, 친할머니 마리아 하우저 마이어와 외할머니 외제니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어머니와 비비안의 소식을 들은 뛰어난 사진가 잔 베르트랑이 모녀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저자 가엘 조스는 비비안의 사진가적 재능의 토대가 이 시기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후 1932년에 어머니의 고향 프랑스로 가서 6년을 보낸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어머니를 따라 돌아온 뉴욕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되자 보모 일을 직업으로 택한다. 일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할머니와 외할머니, 이모할머니의 유산으로 구매한 사진기 롤라이플렉스로 여러 사람들을 찍어왔다. 후에 시카고에서 50여년을 가난한 보모로 살면서도 사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작업은 사람들의 얼굴에, 초상 사진에 집중되었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아메리칸 드림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피곤한 노동자들, 장애인들, 삶에 지친 여자들, 씻지 못해 지저분한 아이들, 노숙자들의 얼굴에. 가끔은 보석으로 치장하고 모피를 두른 채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상류층 여성이나 더블 버튼 정장 차림에 시가를 문 채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사업가 남성의 모습을 냉소적인 눈으로 포착하기도 했다.” -111p 비비안이 어떻게 사진가적 재능을 발견했는지는 미스터리이다. 카메라 조작법을 알고 있던 어머니에게서 또는 어린 비비안을 돌봐준 잔 베르트랑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어쩌면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찍은 사진들에 대부분 사람이 찍혀 있다는 사실이 의문이지 않은가. 비비안은 그녀가 돌보는 아이들, 거리의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내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가난한 그녀가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왜 사진에 집착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가치 있는 필름들을 한가득 가지고 있었으면서 전문가들에게 보내지 않았는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인간관계에 상처가 있는 그녀가 왜 사람의 사진을 찍었을까? 그녀의 삶에는 수많은 상처와 이별, 외로움이 함께했는데 어떻게 사진에서 공감과 연민의 시선이 느껴질까? 수많은 사람의 사진을 찍으며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 카메라에 담아왔던 사진들이 빛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역광을 맞길 바라지 않았을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비비안 마이어의 일생, 그리고 그 이후. 저자인 가엘 조스가 집요하게 찾아낸 단서들이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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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에 스미는 평화음악제;…PLZ페스티벌 24일 고성 제진역서 개막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 ‘PLZ(Peace&Life Zone) 페스티벌’이 오는 24일 개막한다. PLZ 페스티벌은 ‘평화와 생명의 땅, DMZ’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고성·인제·양구·화천·철원 등 강원도의 접경 5개 군이 함께 주최하는 야외 음악 축제다. 페스티벌 조직위는 또 8월 3~5일 청소년을 대상으로 온라인 'PLZ 국제평화음악캠프'를 연다. 온라인 캠프는 전쟁의 상흔이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남아 있는 분단지역에서 문화예술이 갖는 기능과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 평화예술특강과 온라인 연주회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음악 꿈나무들의 기량 향상을 돕기 위한 온라인 마스터클래스도 펼쳐진다. 이어 DMZ평화의 길 테마노선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지역을 9월3일부터 10월 29일까지 20여개 콘서트를 펼칠 계획이다. 오프닝 콘서트는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고성군 제진역에서 정전협정 69주년을 앞두고 열린다. 동해선철도 남북출입사무소이기도 한 제진역은 북한으로만 철로가 향해 있어 시험 운행 이후 운행이 끊어진 상태다. 이날 공연엔 서울 비르투오지 챔버 오케스트라가 국내 대표 관악주자로 꼽히는 김한 클라리네티스트, 임미정 피아니스트(PLZ 페스티벌 예술감독)와 함께 한다.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제진역의 오프닝 콘서트엔 우크라이나 주한 대사를 포함한 12개국 외교관들도 참석해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한 데 모을 예정이다. 이밖에도 10월 29일까지 이어지는 축제엔 클래식 음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정상급 아티스트들이 출연한다. 2022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첼로 1위를 수상한 최하영 첼리스트, 2위에 오른 이바이첸, 발달장애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 등이 무대에 오른다. 행사는 온라인상에서도 펼쳐진다. 8월 3∼5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PLZ 국제평화음악캠프’에선 음악에 재능 있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특강과 연주회, 마스터클래스 등이 진행된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오케스트라 데 나시옹의 앙투안 마르기에 음악감독의 특강도 예정돼 있다. 임미정 PLZ페스티벌 예술감독은 "3년 만에 코로나로 인한 관람 제한이 완화됨에 따라 더 많은 지역 주민들이 현장에서 평화의 선율을 접할 수 있게 됐다”라면서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평화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세계 유일한 분단의 현장이면서, 한반도 평화를 넘어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DMZ평화의 공간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PLZ 페스티벌을 통해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 축제를 기획하고 총괄해온 임미정 예술감독은 국내외 공연을 통한 음악 평화운동 단체인 ‘하나를 위한 음악재단’의 이사장이면서 한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임미정 예술감독은 2019년 처음 화음을 선보인 뒤 매년 DMZ 곳곳을 순례해왔다. 올해는 민간인통제구역인 고성 제진역 콘서트를 시작으로 오는 10월 말까지 고성(군수 함명준), 인제(군수 최상기), 양구(군수 서흥원), 화천(군수 최문순), 철원(군수 이현종) 등 강원도 내 접경지역 5곳을 돌며 평화와 생명의 콘서트를 펼칠 예정이다.이날 개막식은 최기용 강원도 문화관광체육국장, 함명준 고성군수,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대사를 비롯한 각국 외교관, 지역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올해 PLZ페스티벌은 개막식에 이어 이날 제진역 플랫폼에서 진행된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오는 10월29일까지 온라인 국제평화음악캠프, 철원, 화천, 양구, 인제에서의 공연 등으로 구성됐다. 함명준 고성군수는 "최북단 고성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 제진역은 우리 지역이 유라시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런 곳에서 PLZ페스티벌을 열게 돼 무한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대사는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삶에 대해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이들이 갈구하는 평화에 대해서도 생각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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