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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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국악인 김영임 “아리랑, 첫 소절만 불러도~”"대통령 취임식 같은 많은 국민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특별한 ‘아리랑’을 선보이는 게 꿈입니다. 2013년부터 아리랑보존회 이사장도 맡아왔습니다. 아리랑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담고 있거든요. 6·25전쟁을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대한민국 모습을 한 시간짜리 아리랑 편곡에 맞춘 영상으로 선보이는 거예요. 전 애국자도 아니고, 솔직히 나라 정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하얀 치마저고리에 머리 쪽지고, 살림과 노래만 하는 여자죠. 그래도 우리 아리랑이 소중하단 건 아주 잘 압니다. 첫 소절만 불러도 절절한 선율이 가슴을 툭 치고, 대한민국 네 글자가 계속 떠오르는걸요.”(‘소리인생 50년’, 조선일보, 2023.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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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을 읽다"카메라를 든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알고 싶다면, ‘그때 그 사진 한 장’을 읽어야 한다. 이 책 속의 사진들은 절묘하게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항시 수첩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하여 "기록"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은 기록하고 발췌는 나중이다. 이 책에서는 기자로서의 세상을 보여준다. 기자는 1968부터 1991년까지 많은 이들, 상황을 기록한다. 만약 세상에 기자가 한 명이라면 모든 사진들이 특별하겠지만 신문사도, 기자도 많다. 그래서 세상은 특별하고 유일한 사진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한 유일 사진을 엮은 책이 ‘그때 그 사진 한 장’이다. 이 책에서는 사진을 새롭게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준다. 첫 번째,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사진으로 보여줘야 한다. 14 페이지 "거리에서" 의 캡션에서 "어느 시대나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사람이 있고, 친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친절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 사진 속의 서울의 거리나 지금 당장 서울의 거리를 나서도 동일한 장면은 포착할 수 있다. 이는 곧 이 시대상과 빈부격차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려면 부자인 사람들만 촬영해서도, 가난한 사람들만 촬영해서도 않된다. 이 두 장면이 동시에 보이는 그 각도에서 장면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촬영해야 한다. 아마 이 기자는 이 순간을 위해서 기다렸을 것이다. 두 번째, 순간의 선택을 위해서 노력하고 집중해야 한다. 24페이지 "만원 열차"에서의 등교하는 학생들로 기차가 매달린 모습을 촬영하였다. 사람들로 꽉 찬 대중교통은 현재도 있다. 그 안에서는 시대상을 볼 수 있고, 특이한 행각들이 때로는 일어나기도 한다. 그 상황을 재미있게 촬영해야만 하는데, 그 때 카메라가 없으면 이 장면을 생생히 보더라도 기록을 놓치게 된다. 세번 째, 촬영 대상의 색다른 모습을 포착해야한다. 이 책의 178페이지 "얼굴"에서는 서정주 시인의 지금까지 보지 못한 살아있는 표정을 촬영한 것이다. 이는 우연찮게 시인 앞에 기자가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다신 없을 사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유명한 사진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저서 ‘결정적 순간’ 책 속에는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와 "사진을 찍을 때 한 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 이고, 찰나의 승부를 거는 이유는 사진의 발견이 곧 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보며 내내 마음에 눈을 뜬 채 피사체를 바라보고 그 찰나에 승부를 걸었구나 싶었다. 또한, 이 책에는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다각화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촬영 할 때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담아야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기자는 때론 과감하지만 촬영 대상자에게는 친근하게 다가간 결과다. "하루 한 번 잠깐 멈춰 마음의 눈을 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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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퇴계의 생각은?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진기한 새들은 서로 화답하며 온갖 소리로 우네 그윽한 곳 요즘은 찾는 손님이 없다보니 푸른 풀이 뜰 안에 마음껏 났구나 霧捲春山錦繡明 珍禽相和百般鳴 幽居更喜無來客 碧草中庭滿意生 1565년 봄 퇴계 이황은 4년 전 완공된 서당에서 봄을 맞으며 서당 앞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이 머물며 수양과 교육에 진력할 좋은 땅을 구해 5년 여 공사기간 끝에 마련한 도산서당의 앞 뜰에 봄이 왔음을 시(詩)로 표현해 본 것이다. 퇴계는 봄날의 아침 풍경에 이어 한 낮을 묘사하는 시도 지었다.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 뜻 말하는데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庭宇新晴麗景遲 花香拍拍襲人衣 如何四子俱言志 聖發咨嗟獨詠歸 아침이 한 낮으로 바뀌면서 살짝 비가 온 마당에 햇빛이 서서히 들고 있고, 비에 씻긴 풀과 꽃 향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앞 두 줄은 그런 뜻인데 뒤의 두 줄은 무슨 뜻일까? 네 명의 제자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중에 유독 시 읊고 돌아온다는 말에 대해 성인(공자)가 감탄을 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내용의 시다. 무언가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퇴계가 무심코 이런 귀절을 넣어 시를 지을 분이 아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보니 귀절의 배경에는 공자가 네 제자와 나는 대화가 있었다. 공자는 어느 날 자로(子路)와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네 제자에게 차례로 각자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하니 자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차 천 대의 군비를 갖춘 제후의 나라가 강국 사이에 끼어 군대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으로 피폐하여 기근이 덮쳐 곤궁에 쳐했다면 제가 그 정치를 맡아 3년 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하고, 도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염유(冉有)가 대답했다. 사방 6, 7십리 또는 5, 6십리 쯤 되는 지역의 정치를 제가 맡아 3년 만에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공서화(公西華)가 대답했다. 저는 꼭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희망을 말씀드리면 종묘의 조상 제사와 빈객이 모이는 회동(會同)의 제사 때에 단(端)의 예복을 입고 장보(章甫)의 관을 쓰고 의례를 보좌하는 소상(小相)의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증점(曾點)은 그때까지 슬(瑟)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튕기고 있다가 퉁하고 내려놓더니 자세를 고쳐 대답했다. 춘삼월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나가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올까 합니다. 말하자면 자로는 강병(强兵)의 나라, 염유는 부민(富民)의 나라, 공서화는 예악(禮樂)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고 증점(曾點)은 기수라는 데서 물놀이하다가 바람 쐬고 놀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공자가 다른 제자들 말에는 빙긋이 웃기만 하다가 증점의 말은 그것을 인정하고 허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갑자기 그의 시에 왜 이 구절을 집어 넣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주희(주자)는 다른 제자들이 섣불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만 증점은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자세에 대해 올바르게 천명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른 제자들이 남을 부리고자 하는 의욕을 이야기했지만 증점은 자기를 다스리고 싶은 그 마음이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공자가 높이 인정한 것은 증점이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할 태도를 정해 자기완성의 길로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어서 그것이 곧 올바른 군자의 길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퇴계가 봄날의 시에다 이런 뜻을 담은 것은 퇴계가 고향인 안동 도산에 내려와 서당을 열고 생활할 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퇴계는 친형님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완전히 굳혀 1561년에 서당 건물을 완성했고, 서당 주변에는 집 옆의 샘을 살리고 연못부터 울타리, 화단까지 직접 디자인했고, 집 앞 오솔길의 입구와 낙동강 변의 천연대와 천광운영대까지를 찾아 다듬어놓음으로써 서당 일대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학문과 수양과 교육을 시작했다. 퇴계는 그렇게 도산서당을 세워 거기에서 증점이 말하고 공자가 인정한 학문의 방법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증점의 일화는 세상을 자기가 다스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퇴계는 선비들이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다(明道救世)’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은 반드시 관료의 삶을 사는데 있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인용한다. 그것이 도산서당으로 들어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참된 수양과 학문과 교육으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자는, 이른바 ‘물러섬(身退)의 학문’이 퇴계의 속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학자들도 모두가 논어를 읽고 주희를 공부했기에 공자가 증점에 대해 평가한 이 부분을 다 공부하고 주희가 말한 이런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은일적 삶을 항상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때론 관료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기에 세속에서의 성공과 명성의 유혹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러나 퇴계는 겉으로만 물러가는 척하는 풍토를 아쉬워하며 진정으로 자연으로 돌아와 공자의 속 뜻, 공자가 말한 요순의 세상을 위한 방편을 몸으로 체현하자는 것이며, 그 말을 봄에 대한 시의 두 번째 연(聯)에서 말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하루가 지나는 과정을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와 수양의 길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퇴계는 학문과 덕행을 힘쓴 옛 성현들의 삶을 시 속에 녹여 그들의 길을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퇴계가 도산에 들어온 이유이자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필자의 최근 저서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에서 밝혀 보았다. 많은 분들이 학문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왜 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운가?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면, 학문을 하신 분들은 진실해야 하는데 왜 온갖 요설과 사설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학자들이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학문을 하는 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는 퇴계의 생각을 이 멋진 봄에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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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도산서원의 품격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은 게 몇 번쯤 될까?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러함에도 첫 번째 봉심(奉尋)만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1980년 추향(秋享)이었는데, 초헌관(初獻官)으로는 퇴계 선생의 직손(直孫)인 백주(白洲) 이원윤(李源胤) 옹(翁)이, 상례(相禮)는 도산(陶山) 하계(下溪) 출신인 이윤항(李潤恒) 옹(翁)이었다. 진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초성까지 참 좋았던 어른이었다.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필자는 어떤 계기에서였는지는 모르나, 그 경건한 도산서원 향사에 ‘학생’ 신분으로 참사(參祀)하게 되었다. 같이 간 이로는, 고등학교 5년 선배인 권혁윤(전 안동과학대 교수), 한 해 선배인 박명철(전 고등학교 국어교사), 한 해 후배로 현재 안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이성규 박사였다. 그때가 벌써 43년 전 일이다.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도산서원에도 매화가 피었겠지? 싶어서 귀경을 잠시 미룬 채 서원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 ‘도산탐매(陶山探梅)’에 나선 셈이다. 예상대로 매화는 막 피기 시작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옆에 조성된 매화원은 물론 역락서재(亦樂書齋) 앞의 노거수(老巨樹)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산다는 것은 꽃 소식을 듣는 일’이라더니, 와서 보니 ‘참 잘 왔다’였다. 퇴계 선생께서 남긴 "문 닫은 채 솔바람 듣고(松風關院聽), 눈 속 매화를 화로 낀 채 바라보네(梅雪擁爐看)”라는 선생의 싯구가 떠올랐다. 아직은 쌀쌀한 봄날, 아랫목이 그리울 때인지라, 도산서당 완락재(玩樂齋)의 아담한 방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선생께서 계셨다면 문을 열고 이렇게 막 핀 매화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매설(梅雪)’은 눈을 맞은 채 핀 설중매(雪中梅)일 텐데, 그것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옹로(擁爐)’ 즉 화로를 낀 채 본다는 표현은 신의 도움까지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다 15년간 대제학까지 지냈던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가 퇴계시 가운데 더욱 맛을 느꼈다는 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쾌한 기분을 품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옥진각(玉振閣)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보아도 감명 깊었던 지극히 소박한 서기(書丌, 冊床)와 아울러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매화연(梅花硯)과 매화등(梅花燈)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이들 기물(器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생을 뵙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유가 있어 시선을 다른 자료들로 옮겼다. 복제품들로 전시장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진품(眞品)들에 눈길이 더 갔다. 영문으로 번역까지 된 안내문을 가만히 읽게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편집해 조선 선비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가 펼쳐져 있었다. 그 책 첫째 장 하단(下段)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상(上)’이라는 묵서(墨書)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도산서원 광명실(光明室)에 소장된 책 가운데 한권 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를 소개한 안내문에는 "1561년 문인 황준양(黃俊良)에 의해 간행된 목활자본 15권 8책이다.”라고 되어있었다. 문제는 ‘황준양’이라는 표기다. 혹시 싶어 황금계(黃錦溪) 종손에게 확인해보니 그렇게 쓴 예는 없다고 했다. 오식(誤植)이다. 이어진 "선생의 수택본으로 곳곳에 비점(批點)과 주기(註記)가 있다”는 부분은 일견 완전해 보이지만, 첫째 장 상단에 주묵(朱墨)으로 주서(註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註記)’는 ‘주기(朱記)’가 바른 표기일 듯하다. 문제가 있다 싶어 다른 안내문까지 이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다. "선생의 8대손 초초암공(草草唵公:泰淳)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이교(金履蕎)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10권 10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초초암공’은 대사간을 지낸 ‘초초암공(草草庵公)’이 정답이고, ‘김이교(金履蕎)’는 우의정을 지낸 죽리(竹里) ‘김이교(金履喬)’이며 ‘복사’는 ‘필사(筆寫)’가 바른 표현이다. 그 옆에 있는 등경(燈檠) 설명문에는 "등잔을 엊어 놓던 등잔거리로서”라는 것에 ‘엊어’라고 오식(誤植)한 것을 진작 인지해서인지 ‘ㄴ’을 ‘수기(手記)’해 궁색하게 잘못을 수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역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도산서원의 품격에는 모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방식이다. 고식지계(姑息之計)다. 우리의 유산은 ‘세계유산 등재’를 자랑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기리고 배워 후대에 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오식을 오래도록 간과, 방치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문화재 당국이나 도산서원 관계자는 물론 필자를 포함한 관람객 모두에게도 등한(等閑)히 여겨 지나친 잘못이 없지 않다고 본다. 조속한 시일 내에 그 정오(正誤)를 살피고 가려서 바로잡아야 한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다. *고식지계 (姑息之計):임시방편으로 당장 편한 것을 택하는 꾀나 방법.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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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박물관.....'신복 神服'을 발간하며샤머니즘박물관에서는 2022년 사업으로 '신복(神服)' 도록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살아있는 신령 그림 신도(神圖)” (2018년), "샤먼 영물(靈物)” (2019년)에 이어 발간되는 샤머니즘박물관의 도록 시리즈입니다. 이번에 발간되는 '신복(神服)>에는 의대(衣襨)를 비롯한 띠, 가사, 갓, 포, 주머니, 가체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록되는 신복 모두가 신앙 현장에서 쓰였던 것이고, 서울굿 금성당제 신복의 경우에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복은 무교의 본질과 신앙 구조를 비롯한 기능∙의미∙형태 등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형적 자료입니다. 이들은 신앙성이 강조되는 신성한 귀물(鬼物)이면서 신물(神物)이며 인간이 신과 만나는 매개체로서의 성물(聖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복을 한 권의 도록으로 묶어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굿은 함경도굿, 평안도굿, 황해도굿, 서울굿, 경기도굿, 충청도굿, 전라도굿, 경상도굿, 남해안굿, 동해안굿, 제주도굿으로 나누어집니다. 이와같은 구분은 굿의 형태가 지역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적 굿에 따른 신복 또한 형태와 의미 등이 다르게 응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도록에 수록된 신복은 서울굿, 황해도굿, 평안도굿의 것입니다. 황해도굿과 평안도굿은 북한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남한에서 전승이 이어지고 있고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합니다. 서울굿은 한때 한양굿으로 불리면서 인접 지역의 경기도굿과 다소 차이를 갖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두 지역의 굿이 섞이면서 신복 또한 혼합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에 본 도록에서는 서울굿 신복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신복(神服) 발간에 도움 주신 평안남도무형문화재 성황대제 예능 보유자 이정연님을 비롯한 송석란 전승교육사님, 최송인 이수자님, 황해도무형문화재 해주본영대동굿 김정숙 보유자님, 국가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이수자 및 금성당제보존회 강민정 부회장님에게도 고마움 전합니다. 끝으로 은평구 김미경 구청장님과 은평구의회 기노만 의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모든 분께도 감사의 말 전합니다.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관장 양종승)에서는 2022년 사업으로 『신복(神服』 도록을 발간하였다. 이는 『살아 있는 신령 그림 신도(神圖)』(2018)와 『샤먼 영물(靈物)』(2019)에 이은 세 번째 도록(圖錄) 시리즈이다. 신복은 신앙성이 강조되는 신성한 귀물(鬼物)이면서 신물(神物)이며 인간이 신과 만나는 매개체로서의 성물(聖物)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복(神服)은 무교(巫敎)의 신앙 의례적 본질과 구조를 비롯한 기능, 의미, 형태 등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유형(有形)의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이번 『신복(神服』에 수록된 유물은 샤머니즘박물관의 소장품으로써 의대(衣帶)를 비롯한 띠, 가사, 갓, 포, 주머니, 가체(加髢) 등 과거 신앙 현장에서 쓰였던 것과 현재도 전승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금성당제 신복을 포함하고 있다. 신복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그 하나하나에 담긴 유무형 유산의 의미는 한민족 전통신앙 및 민속의 한 면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에, 이번 샤머니즘박물관이 발간한 『신복(神服』 도록은 앞으로의 민속학 및 복식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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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첫 책 출간 ‘여성의 삶으로부터, 전통을 잇다’전통문화 계승에 수십년을 헌신한 경남 여성 8명의 삶을 담은 책이 나왔다. 경상남도여성가족재단은 7일 "경남여성의 삶을 기록하고 재조명하는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첫 책으로 <여성의 삶으로부터, 전통을 잇다>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책에서는 이옥수(88) 거창삼베길쌈 예능보유자, 김옥연(80) 통영오광대 명예 예능보유자, 조순자(79) 가곡 예능보유자, 배순화(77) 매듭장 보유자, 김태연(75)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강옥선(71) 고성농요 전승교육사, 황둘선(62) 사천마도갈방아소리 전승교육사, 최선희(62) 밀양백중놀이 전승교육사 등 8명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재단은 경남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예술 분야에서 20년 이상 헌신한 60대 이상 여성으로서, 국가 또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보유자 또는 전승교육사를 대상자로 선정했다. 연구책임을 맡은 재단의 이정희 연구위원은 "전통 문화예술 분야 여성을 책 주제로 정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서편제>였다. 하지만 이들을 만나서 들은 삶의 이야기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딸에게 남도소리를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편제>의 아버지는 영화 속 인물일 뿐이었다. 여성을 집안의 일원으로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던 시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문화를 딸에게 도제식으로 훈련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고 덧붙였다. 책에 실린 여성 대부분은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배운 전통 문화예술을 오랜 기간 연마하면서, 전통 문화예술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다. 8명 가운데 어릴 때부터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는 조순자 가곡 예능보유자뿐이다. 이옥수씨는 여자라면 당연히 삼베길쌈을 해야 하는 경남 거창 시골마을에서 태어났고, 70년 넘게 하다 보니 거창삼베길쌈 예능보유자가 됐다. 강옥선씨는 결혼해서 남편 고향마을에서 살았는데 고성농요가 계승되는 마을이어서 주민들과 함께 노래를 배우고 부르다 보니 고성농요 전승교육사가 된 사례다. 김태연씨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국악학교에서 춤과 악기를 배우다가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됐고, 황둘선씨는 우연히 찾아갔던 여성 농악단에서 무용·판소리·민요까지 배우면서 사천마도갈방아소리 전승교육사가 됐다. 최선희씨는 부녀소방대에서 오북 강연을 접하면서 북의 매력에 빠져 밀양백중놀이 전승교육사의 길을 걸었고, 배순화씨는 생계를 위해 편물점에서 배운 기술을 더 발전시켜 매듭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옥연씨는 먹고사는 일의 괴로움을 해소하려고 춤을 배우러 갔다가 통영오광대 명예 예능보유자가 됐다. 이정희 경남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서문에서 "여성 전통문화 보유자들의 삶은 영화 ‘서편제’를 떠오르게 하지만, 실제 만나서 들은 삶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며 "여성을 집안의 일원으로 인정도 안 하고, 기본적인 교육도 안 시키는 분위기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문화를 ‘도제식’으로 훈련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시대를 살아왔던 분들이었다”고 말했다. 책은 재단에서 수행한 ‘여성 생애구술사 기록전문가 양성과정’ 수료생 중 필진 7명을 선발해 공동으로 진행했다. 지역 생애구술사 전문가로 구성된 편찬위원회로부터 주제 선정부터 연구자문, 감수를 받았다. 경남여성가족재단은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연구를 지속 추진할 계획이며, 올해 한일합섬과 관련된 주제로 구술작업을 진행한다. 재단은 "2021년 ‘경남여성사 발간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경남여성 생애구술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는 옛 마산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여성노동자 등 한일합섬 관련 여성들을 발굴해서 책으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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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의 덧뵈기(문진수.남정숙)전승 재담 및 가사 복원 남사당은 꼭두각시놀음으로 1964년 4월에 중요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 나머지 5개 종목 모두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으며,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대표적인 전통연희 종목이다. 그동안 남사당 덧뵈기에 관한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68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40호」, 1974년 심우성의 「남사당패연구」등 연구서 형태의 파편적인 자료들이 남아 있을 뿐 전공자∙전승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도서들은 부족한 편이었다. 「남사당의 덧뵈기」를 통해 남사당의 역사적 조망, 남사당 선대 예인들의 공연모습, 덧뵈기의 구조와 내용, 전승자의 계보, 남사당의 탈, 재담 및 가사, 음악, 춤 등에 대한 자료들을 최대한 모으고 기록했으며, 전승되어 오는 원형에 가깝도록 구현하므로 가능하면 전공자∙전승자들, 연구자들의 교과서가 될 수 있도록 구체화했다. 또한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1965년, 2003년, 2018년 영상기록 및 채록을 기본으로 배역, 의상, 탈의 모양, 출연진, 대사 변화 등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비교분석도 하고, 타 장르와 구분되는 덧뵈기의 탈∙음악∙춤∙재담 및 가사에 대한 특징을 분석해서 넣었다. 1965년∙1974년∙1990년∙2018년 등 총 4개의 재담 및 가사 본은 전공자들에게는 교본이 될 뿐만 아니라 현장성 강한 공연예술의 전승자들과 연구자들에게는 전통예술의 역사적 변화양상을 살펴보기 좋은 전문자료가 될 것이다. 남사당은 백정들(?)이 아닌 궁중예인 남사당놀이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산대(山臺)라는 대형무대를 중심으로 열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중축제의 일환이었다. 특히 중국 등 외국 사신들이 방문할 때 환영행사로 이루어졌던 산대놀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남사당=백정'이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으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서는 왕이 참석하고 의금부에서 주관하는 국가행사에 칼을 사용하여 소를 도살하고 신분도 불분명한 내∙외국인이자 비전문가인 백정이 출연한다는 것은 현대와 비교해도 어색한 주장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남사당놀이의 전신인 산대놀이 공연을 하기 위한 궁중에 소속된 전문재인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까지 의금부, 나례청 등에서 전문적으로 관리할 만큼 교육받고 훈련받은 전문가들이었으며, 비단 옷과 한삼 옷 등 고급스런 무대의상을 입었던 전문재인의 신분으로 대우받았다는 그림과 기록들을 제시하므로 남색과 남창, 백정이라는 등의 남사당의 신분에 관한 광범위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고자 했다. 안성남사당놀이 이전에 한양본산대놀이 대부분의 국민들은 남사당놀이하면 안성을 떠 올릴 것이다. 그리고 탈놀이 전문가들은 남사당의 덧뵈기가 양주별산대놀이의 한 유파이거나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남사당의 덧뵈기」에서는 남사당의 덧뵈기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궁중 산대놀이를 전승한 탈놀이로, 마을굿에서 유래된 탈놀이와 다른 계통임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산대놀이가 금지되자 조선시대 궁중에서 산대놀이에 참가하던 전문재인들은 생계를 위해 먼저 애오개, 녹번, 사직, 홍제동, 구파발, 노량진 산대놀이 등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후 서울지역 산대놀이들이 양주, 송파, 퇴계원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들 산대놀이를 궁중의 산대놀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별산대놀이라고 지칭했다. 그래서 지금도 양주별산대놀이, 송파별산대놀이, 퇴계원별산대놀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별산대놀이와 구분해서 본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이후 서울지역 별산대놀이들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대형 장시나 마을굿에 참여하면서 남사당놀이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안성남사당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이전에 한양본산대놀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남사당 덧뵈기 전승의 정신적 교본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전승되어 온 문화예술 등이 공동체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과 함께 전승을 위한 교재와 교육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동안 남사당에서도 전승되어 오는 자료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전승예술단체에서 그렇듯이 흩어져 있거나, 부분적인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승자와 교육시스템은 존재하고 있으나 교재가 부실한 채로 전승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번 「남사당의 덧뵈기」는 남사당 최초의 종합 완결판과 같은 성격으로 우리시대에 구현되고 있는 남사당 덧뵈기의 탈, 음악, 춤, 재담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로서 오늘에 와서야 남사당의 덧뵈기 교재가 완성되므로 전승문화예술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구비되었다고 하겠다.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자 전통예술, 전통연희임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현장예술인 남사당놀이가 변형되고 왜곡되는 운명을 극복하고 전승을 위해 애쓰신 선대 전문재인들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동시에 현재와 미래 남사당놀이 전승자들에게 남사당놀이의 올바른 전승을 위한 기준과 표준모델을 제시하고 싶다. 문진수 한양대학교 무용학 박사 대한민국 연희춤 협회 대표 前)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보존회/사단법인 남사당 회장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이수자 무형문화재 제15호 승무 이수자 무형문화재 제17호 영광우도농악 이수자 전북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장구, 북) 전수자 사단법인 남사당 대전지회장 광양버꾸놀이보존협회 부이사장 (주)예맥코리아 무용/연희감독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한국무형유산연구소 부소장 전 한양대, 진주교대, 극동대 외 다수 출강 남정숙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문화마케팅 정책 수립으로 문체부 장관상 안동하회별신굿탈놀이 유네스코 등재 연구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 무형문화유산센터 중장기 발전전략 수립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 국제상 연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교류지원센터 중기전략 수립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을 소재로 한 체류형 관광활성화 연구 예술의 전당 중기 발전전략 수립 한국관광공사 체코 프라하ASTA총회 총감독 순천 낙안읍성 민속문화축제 총감독 익산서동축제 총감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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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섬, 사할린을 떠나며판데믹 함께 눈물의 섬, 사할린에 들다 판데믹이 고개를 들던 3년 전, 나는 용케 국내 판데믹을 피하듯 한국을 떠나 눈보라를 헤치며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센 풍설에 비행기가 착륙이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눈의 나라' 러시아 사할린 조종사들에겐 모욕적일 수 있겠다는 걸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뜰의 '일제강제동원희생자추모비'와 '이중징용희생자추모비'에 묵념하고 동포들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희망을 품고 교육원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단 열흘만에 판데믹으로 인해 한국어·문화강좌를 원격수업으로 전환했고, 기존의 활발한 국내 교류사업들은 모두 취소되었다. 일제 강제동원과 냉전 역사에 연유한 이산과 슬픔의 섬은 4, 5월까지 산을 하얗게 덮었던 얼음눈이 녹으면서 차가운 물이 도시 전체를 돌아 흘러 차갑고 고립된 눈물섬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이 보다 많이 필요했던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깊이 정들며 사랑에 빠지다 정신 차린 3년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재미와 의미를 충족할 교육원(장) 역할 찾기 교류 단절의 시대 문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했다. 극동 3개 교육원장은 공무비자 90일이 만료될 즈음 국내(대한민국) 출장을 통해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 복귀해야 한다. 판데믹 기간과 경제 제재 시기에 국경을 넘는 일은 PCR 음성증명, 2주간 격리, 멀고 먼 항로의 힘겨움과 모험이 늘 함께 했다. 그럼에도 여행가방엔 한국어 및 문화체험·교육에 필요한 물품, 동포예술단체나 한국어채택교 선생님이 부탁한 물품(한복, 문화지도, 한지, 단어카드, 민속놀이도구, 공연도구 등)으로 채워졌다. 이런 것들은 교류가 원만할 때엔 방문하는 당사자나 단체가 사할린에 오면서 가져오거나 외교파우치를 통해 운송하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준비해준 내 자취 삶의 반찬꾸러미들은 포기하거나 최소화 해야했다. 한국과 사할린 사이 한국어교육․문화 물품을 나르는 메신저의 역할은, 힘들지만 독보적인 보람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한 교육공무원이 거의 고립된 사할린 동포들을 망각하지 않았구나 하는 인식을 드리지 않았을까 하는.....자족적으로 나름 생각해 본다. 한국의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재미와 의미를 결합하는 어떤 새로운 사업들을 찾고 실행했다. 사할린 동포와 러시아 현지인들이 잘 어울려 사는 것, 한국, 한국어·문화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을 유지․증진하는 것은 서로 관련이 깊다. 교육원의 역할은 문화적 스며듬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소 썰렁한 문화센터 로비에 이동식 TV를 배치하고 사할린우리말방송과 KPOP, 세계문화유산, 전통과 현대의 한국문화, 경제적 성취에 대한 영상을 거의 매일 상영했다. 영상을 안보는 것 같아도 센터에 출입하는 어른, 어린 학생들이 자주 시청하는 것을 확인했다. 러시아 유일한 한글신문 새고려신문도 놓아두면 금방 없어졌다. 또 학기초 가끔 학교의 교문맞이처럼 한국어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파티안경을 쓰고 어른, 청소년 수강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연말이 되면 한국노래 버스킹(대중 앞에서 노래하기)을 했다. 사할린에서 원장의 이런 모습은 낯설 것이다. 어색하지만 서로 웃음이 나오고 잘 통하지 않는 언어의 장벽을 넘는 바디랭귀지라고 할까... 재미있으며 쉽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원장이 품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 망설이긴 했으나, 품위, 권위로 살아 온 삶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무덤과 같은 홀로 생활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 생각하여 그냥 시도했고 즐겼다. 또한 평생교육 강좌 ‘세계의 민속춤’ 클래스를 열어 2세 동포 어르신과 현지인 함께 센터 강당과 도시 공원, 스키장 리조트 위에서 춤추고 어울리는 기회를 가졌다. 1세 어르신이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할린 할머니들이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본다. 사할린 할머니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와서 춤추며 밝게 웃는 모습을 도통 보기 어려웠다”고 하셔서 큰 보람을 느꼈다. 평생교육 강좌 ‘글쓰는 사할린’도 인상적이다. 사할린 동포 2세 ‘빅토리아 최’ 작가님을 강사로 모시고 동포 2세분들의 부모와 성장 시절에 대한 기억을 글로 써 역사와 유산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탄생한 강좌였다. 한국어가 서툴다면 러시아어로 써도 좋으니 제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부모들의 아픔과 그 아픔을 보며 자란 기억을 되살려 생명을 주자는 취지였다. 우리말방송과 새고려신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였고 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살려 글을 썼고,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새고려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포 단체들의 행사나 잔치 등에 초대되면 꼭 한국탈과 한삼, 소고,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를 지참했다. 언제라도 민속춤클래스에서 함께한 밀양아리랑을 같이 추고, 소고춤과 탈춤, 사할린동포 애창곡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정체성(идентичность)의 실마리와 함께 카레이츠(корейцы)의 신명나는 문화를 보여드리고자 하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내 적성에 너무 맞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모국)과의 문화교류 단절을 보완하는 업무 찾기 교육원의 본연 업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교육이다. 판데믹 전까지 방학에 활발히 오고 가던 사업이 중단되자 한국어 학습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어학습은 익숙한 접촉과 소통이 핵심인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육원장 과제 수행 대회”였다. 한국의 시낭송, 자신의 꿈 말하기, 한식만들기나 KPOP 춤·노래 영상, 한국영화 감상 말하기 영상 등을 제출하면 한국음식 체험권이나 한국 기념품 등을 상품으로 주었다. 주말에는 한지공예와 매듭공예, 김밥만들기 등의 특별수업을 가끔 운영했다. 교육원 공간을 십분 활용해야 하고 말하기 기회를 자꾸 주는 것이 언어학습에 중요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022년 여름방학에는 처음으로 사할린 초·중등학생을 위한 한국어·문화캠프를 열었다. 한글학교와 한국어채택교 선생님·학생, 아리랑무용단이 리더가 되어 한식만들기, 한글쓰기, 민속춤, 민속놀이 코너를 운영하여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갖도록 했다.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과 채택 가능성이나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지방도시 10개교 학생 900여명이 참여했고 전세버스를 빌려 포로나이스크와 마카로프 도시를 향해 새벽에 출발하기도 했다. 캠프가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했고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했다. 한글학교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시작했지만, 단절의 시대에 참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어 선생님과 학생들, 아리랑 어르신들게 감사드린다. 단절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시도는 하바로브스크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만남이다. 하바로브스크한국교육원이 개최한 "한국어말하기 큰잔치”에 초대를 받아 사할린 아리랑무용단원을 모시고 참석했다. 무용단은 대회 축하의 의미로 무대에서 ‘도라지’ 춤을, 나는 개량된 ‘봉산탈춤’을 선보였다. 하바로브스크 고려인 아리랑예술단의 환대를 받았고 공연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하바로브스크 아리랑센터에서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뜨거운 포옹, ‘도라지’ 민요와 춤을 화합하여 공연하는 장면, 밀양아리랑 민속춤을 함께 추는 흥겨운 수업 장면은 마치 다큐멘타리의 한 장면 안에 들어간것 같았다. 문득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치는 블라디보스톡 24학교 교장 선생님의 제안, 즉 "지금 한국과 교류가 어려우니, 블라디보스톡·사할린·하바로브스크의 한국어 채택교끼리 공동수업이나 대면 교류 같은 것을 해보자.”는 말씀이 생각났다. 연해주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교류가 우선 현실화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이런 역사적인 자리에서 밀양아리랑을 가르쳐 드리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장면이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사실 교사연수에서 배운 봉산탈춤 기억을 살려 처음 체부라슈카 유치원 행사에서 모험적으로 초연한 적이 있다. 이 영상을 본 사할린국립대 엘비라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국 탈 색칠하기 행사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연하고, 행사 참가자들에게 가르쳐 함께 탈춤을 추게 되었다. 사할린에 처음으로 탈춤을 소개한 격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2022년 11월 30일,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에 등재 결정되어 남달리 보람이 컸다. 사할린 우리말방송 <한국의 상징> 코너에 ‘한국의 탈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상징> 코너에는 3년간 ‘한글’, ‘추석’, ‘아리랑’, ‘설’, ‘정월대보름’, ‘한식(절기)’, ‘한식(KFOOD)’, ‘온돌’, ‘직지·금속활자·한지’, ‘이순신·난중일기·거북선’, ‘독도’ 등 한국의 상징을 소개했고, ‘한국의 무술’, ‘청자와 백자’의 촬영을 마쳤다. 한국의 공무원으로서 사할린 동포들께 드리는 기억의 노래 선물을 녹음했다. 국내출장 중에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 나가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교육원 수강생 사할린 동포 2세 김경순님의 개사곡 두곡을 무반주로 불렀다. 부모와 어린 큰오빠의 이별과 50년 만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맺힌 사연을 담은 가사였다. KBS한민족방송을 진행하는 박해상 MC가 당신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사할린에 의미있는 노래들을 녹음하여 사할린 동포들께 선물로 드리라는 제안을 하셔서 녹음한 후 음악 CD를 만들어 주셨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지으신 가사가 그 분의 부탁으로 불러준 나의 목소리로 녹음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가족사 사연을 개사하신 김경순님이 2022년 제24회 KBS세계한민족체험수기대회 성인 부모님과 큰오빠의 한맺힌 사연을 수기로 제출하여 대상을 받은 것이다. 사할린 동포를 대표해서 받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이산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십여년만에 교육원 수강생 두분의 사연이 KBS한민족 방송에 사연이 소개되어 녹음하여 보내드리고 드리고 소정의 원고료도 받아 전해드렸다. 자주 글쓰시고 방송에 보내셔서 기록으로 남기시길 간곡히 소망한다. 3년 동안 맞이한 3번째 봄날, 헤아릴 수 없는 신명과 의미의 기억들이 사계절의 천연색으로 바뀌며 지나간다. ① 가을의 김치축제에서는 한국에서 가져 온 24시간 막걸리를 담가 현지인들과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막걸리 더 없냐고 묻는 현지 공무원이 계셔서 한번 더 담가 드렸다. ② 공무출장에서 복귀하며 가져 온 팽이, 제기, 딱지, 국궁, 비석치기 등 민속놀이 도구들을 배치하여 추석맞이 민속놀이체험 코너를 운영했다. 교육원과 문화센타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모습이어서 보람이 컸다. ③ 이 행사를 목격한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연구진이 한국교육원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여 난데없이 영어 인터뷰에 뛰어 들었다. 끝내고 난 보람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④ 한인회 여성회 초대로 야유회를 가서 6시간 동안 춤을 추었다. 러시아인 한 남성이 몇시간을 지켜보던 모습은, 마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3일 낮과 밤’ 동안 춤추던 동이족을 묘사하던 이웃 민족의 모습이 저러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⑤ 코르사코프 한인회에서 여름날 주최한 ‘한국의 맛’ 행사에서 원없이 노래하고 춤추었고 땀 흘렸다. 여름 한복이 없어 땀으로 고생했지만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사랑이고 신명이었다. 고스란히 인생의 끝까지 가져갈 장면들이 너무 많아 이렇게 이임한 후 떠나,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 시대가 야속하다. 떠나는 이의 소망과 감사 지난 3년은 비록 판데믹과 제재로 인해 고립과 긴 우회로 값비싼 왕래의 비용을 치루었지만, 그 상황을 살아내기 위한 가치있는 역할 찾기와 재미와 신명을 주는 모험적 사업의 시도는 스릴과 보람을 준 시간이었다. 이제 떠나는 즈음에 동포분들께 소망하는 것은, 한국어든 러시아어든 글쓰기를 계속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한인사회에서 그런 기록들이 대대로 전달되어야 고통의 역사가 치유되고 생명과 힘을 얻을 것이라 본다. 사할린 동포들이 글을 쓰고 번역하여 다듬어 KBS 한민족 방송에 자주 보내시면 좋겠다. 그러면 다음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모국과의 연결을 쉽게 하여 자부심을 갖고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1세대 부모님이 영주귀국을 못하고 돌아가신, 2세대 어르신들은 부모의 고난과 갈망, 자신의 성장기를 더듬어 소중한 감성과 기원, 소망과 원망 등을 글에 마땅이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와 모국의 정부는 무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끝으로 고립과 고독, 환율의 공격과 온갖 제한들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보람으로 엮여진 교육·문화 여행과 모험을 보람있게 해주신 사랑하는 부모님, 가족, 형제자매, 첫날부터 끝까지 반갑게 응대해 주신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게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특히 교육원생 중 작년 KBS한민족방송체험수기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경순 여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또 사할린의 한인 언론방송·대학 및 교육계·문화예술계 지도자와 구성원 단원 여러분들, 또 다른 민족 이웃들, 늘 정성 가득한 한글학교와 교육원·한국어채택교의 한국어․문화 학습자 여러분·선생님들, 또한 성실한 우리 공관과 재외국민 이웃들, 사할린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한국의 국악신문, 아리랑연합회에도 감사드린다. 3개년 교육원장 임기 시절 사할린에서 맞이한 열두 계절동안 하루하루가 저에겐 빛나는 선물이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지 정리하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스파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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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함흥도시 연구인가도시공간이 흥미로워 관련된 도서를 읽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2012년 경기남부지역 통일교육센터 상근직 강사로 2년간 활동했다. 통일교육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대해 무지함을 느꼈다. 경험으로 강의를 이어가기에는 지식이 한참 부족했다. 무지함을 벗어나고자 북한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관련 수업을 듣으며 내가 살았던 공간이 궁금해졌다.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구는 시골답지 않는 도시다. 석탄이 식량만큼이나 중요해 탄맥 있는곳에 인력을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까지 고층건물이 희소하고, 하모니카로 부르는 급조된 단층집이 많았다. 생산에 집중했기에 서비스업이 부족하고 문화생활이 자유롭지 않다. 새로 나온 영화는 명절시즌에 맞추어 방영되는데, 그걸 보려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섰다. 뒷거래로 뭉치표를 구매해 야매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유행되었던 음악, 무용, 영화가 흑백화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연구는 평양 위주로 많았고 지역도시 함흥관련 선행연구가 적었다. 중요하게 식민도시에서 사회주의도시이행 관련 연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석박사 논문을 함흥으로 준비했다. 함흥을 읽다보니 내가 살았던 고원군 수동구보다 훨씬 이야기가 많았다. 함흥은 외사촌형제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가 함흥 주변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닳도록 드나들었던 지역이다. 함흥에 있는 ‘도지방총국기능공학교’에서 직업교육도 받았다. 함흥역전과 동흥산구역, 회상구역으로부터 장진, 부전으로 가는 신흥선 기차를 타고 다녔다. 함흥냉면에 원조 ‘신흥관’에서 농마국수도 먹었다. 1984년에 지어진 함흥대극장 앞으로 수 없이 지나다녔다. 함흥에 얽힌 이야기를 담으니 살아온 생애처럼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어온 흔적이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길이 생기고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들어왔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사람을 만들듯 도시생애를 통해 사람과 사회가 변화해온 과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이유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을 올리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흔적을 남겨놓았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래서 도시를 변압기에 비유한다. 도시는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기도 하지만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연결되어 도시 성격을 만든다. 사람이 모여 있는 만큼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공간을 지배하고 도시문화를 만든다. 도시와 도시는 비교 가능하다. 개발된 지역과 덜 개발된 지역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회를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에 도시가 있다. 공간은 영원한데 사람과 사회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왔다. 색바랜 기억과 지식으로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꺼낸다. 자연, 사람, 사회 요소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다. 북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도시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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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 (조춘영)통일의 그날에 벌일 ‘나라풍물굿’을 할 날을 그리며 2019년 3월 1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역 광장에 이르는 세종대로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수백 개의 풍물패, 수만 명의 풍물꾼들이 울리는 ‘만북’(만 개의 북) 소리가 웅장하고 신명나게 울려 퍼졌다. ‘만북 울림!’이다. 이날 전국의 풍물꾼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풍물굿판에 이어 <만북으로 열어 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을 선포, 채택하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새로운 100년, 생명의 새 세상’으로 향해 가는 원년(元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모인 이들 모두가 굿쟁이이고 보면, 이날의 선언문은 단순한 말모이가 아니라, 신력(神力)을 갖춘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풍물굿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이 된 것이다. 그에 앞서 2014년에는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 정책과 제도가 생긴 이래 국가무형문화재와 지방무형문화재에 40여 개의 풍물 단체가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와 1950~1960년대 근대화 지상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농악은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를 지나 절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이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여성농악단과 사물놀이를 중심으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여 80년대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대학풍물굿 운동을 통해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고, 사물놀이의 세계화를 거쳐, 당당히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풍물굿 문화와 21세기의 풍물굿 농악/풍물굿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기층 오락, 예술이다. 전통적으로 민간에서는 세시풍속으로 일 년 중의 각종 절기에 맞춰 다양한 쓰임새와 목적으로 농악/풍물굿을 놀았다. 농악/풍물굿은 그 양식 안에 음악, 무용, 연극, 놀이, 종교, 군사, 교육, 사회, 문화 등의 요소가 망라되어 총체문화를 이룬다. 풍물굿은 바로 민중 자체요, 민중생활의 요체이며 한민족 시민대중문화의 원천이다. 온갖 신과 만나게 해 주는 매체다. 굿은 신이다. 신명이다. 신탁이다. 일상 속에서 성스런 것들을 끌어들여 정성으로 놀리고 참 마음으로 풀어내어 현실 가운데 어려움을 깨나가는 도구다. 전국의 마을 당산 앞에서, 중앙마당에서, 집집 처소에서 장구, 징, 쇠, 소고들 풍물소리가 끊긴 적은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와도 풍물굿은 죽지 않고 새로이 재창조되어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풍물굿은 한편으로 급격하게 탈-맥락, 재-맥락화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촛불시민혁명 과정에서 풍물굿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다른 흐름으로는 10여 개 대학에 전통연희과에서 전공자들이 풍물굿을 공부하고 졸업한다. 무형문화재 지정을 준비하고 있는 지역 풍물굿, 토박이 풍물굿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풍물굿은 이 시대 그리고 21세기를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상쇠, 풍물굿의 지휘자이자 예술가이자 살림꾼! 이러한 풍물굿의 저력과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전국에 얼마나 많은 상쇠가 있을까? 굿문화와 풍물굿이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가? 어찌하여 그러한가 직접 묻고 싶었다. 어떠한 실천들이 있었고, 어떠한 지향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풍물굿은 어디로 가는 있는지 답을 듣고 싶었다. 답은 현장에 있다. 『하늘땅을 열어라, 캥~마주깽 놀아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필자가 오늘의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풍물굿문화를 이어줄 다리 공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고, 입덕을 베풀어[인터뷰] 일구어낸 소중한 공덕의 탑이다. 저자는 세계, 전국, 지역, 지방, 마을을 누비며 풍물굿의 현장을 섭렵하였다. 저자 조춘영은 풍물굿 연구자, 담론가로서 이 시대 풍물굿 현장을 기록하고 풍물굿쟁이의 소리를 담아야 할 사명감에 넘치지만, 그것인 힘겨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노동, 두레적 품팔이라는 생각이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풍물굿의 굿쟁이(지휘자)이자 지도자이며, 살림꾼(일꾼)이자 스승이고, (풍물) 사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상쇠에 주목하였다. 무엇보다 상쇠는 시대를 읽고 예술문화를 말하며 지역과 생명공생체를 이끌어가야 할 감수성과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다. 여전히 대다수 민속학자나 풍물굿 연구자들이 전통문화라는 범주 속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풍물굿 연구의 결과물은 무형문화재 정책이나 제도에 포함된 일부 단체들 혹은 전통마을풍물굿으로 한정된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에서 새 길을 내고 이 시대 담론, 시대 의식이라는 지평에서 풍물굿을 바라본다. 그래서 20세기 풍물굿이 아니라 ‘21세기 풍물굿’, 즉 풍물굿의 현재와 미래를 상쇠들과 더불어 조망하고자 한다. ‘21세기 상쇠론’ 전과 후 이것이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업이 아니다. 2016~2017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풍물굿쟁이들은 매주 풍물굿판을 벌였고, 저자는 이를 동영상과 면담 구술집으로 기록했다. 1차 결과물로 《새나라로 가는 길굿 - 촛불시민혁명 풍물굿에 대한 기록과 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박근혜국정농단 촛불집회는 이미 과거지만 촛불시민혁명은 과거형,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시대의식의 연장에서 본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은 기획되었다. 이제 풍물굿쟁이도 당당하게, 이제 풍물굿이라는 이름도 떳떳하게, 이제 무시와 멸시와 천시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풍물굿판을 벌이고자 하는 염원도 담겨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현재형이듯 풍물굿도 현재형이다. 과거, 역사, 전통이라는 옛것 프레임으로 한정할 수 없다. 왜? 전국의 수많은 풍물굿쟁이와 광장, 마당에서 벌인 풍물굿판이, 박근혜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서 새나라로 가는 길굿이, 2019년 3.1 100주년 기념 만북울림 나라굿이 증명하였다. 그래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이다. (풍물굿을 농악이라는 20세기 무형문화재 제도 속 국가주의에 예속된 종목으로 잡아놓을 수 없어서 21세기 미래 시점을 펼쳐내고자 했다.) ‘21세기 상쇠론’은 계속되어야 한다 전국 30여 명의 상쇠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남녀노소, 지역과 영역을 고려하여 25명에서 그쳤다(그중 10명을 이번 권1에 수록하였다. 나머지는 곧 나오게 될 다음 책에 수록된다). 풍물굿이라는 연구 주제로는 최초로 전국 범위에서 다양한 (풍물적) 배경을 가진 상쇠들을 만났다. 면담을 하기 전에 이미 수년 전부터 교류를 하였음은 물론이고, 실제 면담에 들어가서도 두 번의 밤을 새고서야 면담 완결된 상쇠도 있고, 면담 후 이어진 이틀간 뒷풀이를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비오는 날 강화 들판을 보며 꽹매기 소리도 주고받고, 보존회 사무실에서 수시로 결재를 주고받는 가운데 진행된 수고로운 면담도 있었다. 저자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간 겪어온 고난과 고민의 고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 일은 다반사요, 같은 동지로서 굿판을 지키는 일의 어려움에 공감의 눈시울이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이 작업을 시작했을까? 꼭 했었어야만 했나?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상쇠를 만날 기대와 설렘에 충분히 행복했으니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책을 읽는 당신, 굿쟁이들의 일이라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통일의 그날에 남과 북의 모든 풍물패가 모드들어 휴전선을 넘나들며, 지난 역사의 원망과 한숨을 모두 씻어내며, 신명으로 새 나라 건설을 축원하게 될 ’나라풍물굿’을 벌일 것을 기약하고 있다. 권1 말미에 논문 '21세기 풍물굿 현장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실어 풍물굿 현장의 다양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권2(2020년 하반기 출간 예정)에서는 종합적인 차원에서 ‘21세기 풍물굿 상쇠론’을 제시할 예정이다. 저자 조춘영 박사는 풍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이며, 현자에서의 풍물 상쇠이기도 하다. 전국의 풍물 현장을 두루 답사하며, 전문 풍물패 또는 마을공동체 풍물패의 상쇠들을 만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의 풍물굿 문화의 변천, 성장, 진화 과정을 들어보고, 특히 상쇠를 중심으로 하여 풍물굿과 상쇠의 예술가적 특성, 문화적/장르적 미래, 한국사회에서 풍물의 의의와 전망 등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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