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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민속신앙은 옛적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신앙이다.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등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믿음의 행위로서 단군신앙, 미륵신앙, 조상신‧성주신‧조왕신 등 가정신앙과 서낭당‧산신당‧장승‧솟대‧동제(洞祭) 등 마을신앙, 점복신앙, 풍수신앙, 무속신앙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그중 무속신앙(巫俗信仰)은 신령(神靈)이 실재한다고 믿고 신력(神力)을 얻은 무당(巫堂)을 주축으로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종교적 토속신앙이다. 무속신앙의 일종인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은 규모가 큰 마을굿으로 우리의 소중한 무형문화자산이므로 널리 알리고 잘 보존, 전승했으면 한다. ‘오얏골 별신굿’은 10년 주기로 개최하는 별신굿으로 우리 문경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독특한 민속문화이며 굿을 하는 날에는 인근 마을 주민은 물론 먼 곳 외지인들까지 모여들어 큰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별신굿은 내륙지역보다는 해안지역에서 많이 열린다. 내륙지역에는 현재 소수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문경지역에는 호계 부곡리 ‘오얏골 별신굿’을 비롯하여 산북면 ‘김용리 별신굿’, ‘석봉리 별신굿과 샛골 별신굿’, ‘내화리 화장별신제’, 동로면 적성리 ‘벌재 큰마 별신굿’ 등에서 별신굿을 지냈으나 지금은 호계 ‘오얏골 별신굿’만이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다.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은 호계면 부곡리 오얏골에서 약 300년 전부터 ‘별신굿’이 열려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나 1995년 이후 고령화된 농촌의 현실과 굿판을 열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민속을 지키고 전통을 되살리려는 마을주민들의 간절한 뜻과 문경시의 지원으로 그 맥을 잇게 되었다고 안도했으나 2007년 3월 3일∼4일에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정월 대보름 행사로 개최되었다. 2년 뒤인 2009년 2월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호계 부곡 용당(암굴)에서‘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 재현행사’가 열렸다. 마을 어르신이 말씀을 녹취한 것을 보면‘1959년과 1968년에는 점촌 '달판네' 무당이 왔고, 1977년에는 안동 '애숭이' 무당이 왔다. 그러고 나서 1986년에는 예천의 무당이 했고, 1995년의 별신굿에서는 상주의 무당이 왔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10년 주가로 별신굿을 연 것을 알 수 있는데 2009년 이후에는 개최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2007년 12년 만에 개최된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이 연행(演行)할 때 필자가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되돌아보면,그날 내륙지방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별신굿 취재를 위해 각 매스컴은 물론 민속학자, 사진작가, 외지인 등 500여 명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뤘는데 특히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10년에 한 번 열리는 별신굿인데 내 생전(生前)에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꼭 봐야겠다.' 하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기도 하였다. 오얏골 별신굿에 대한 유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두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중 암굴(용당)에서 흘러나오는 용천수가 가뭄에 나오지 않자, 이 속에 살고 있는 용이 심술을 부려 샘을 막고 있다고 하여 별신굿을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용천수는 마을의 식수원이면서 농업용수원으로 주민들의 삶과 생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재앙을 막기 위한 굿이라 본다. 호계 오얏리 별신굿은 경북 내륙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별신굿으로 정체성 있는 전통문화로 계승함은 물론 지역민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열었다. 별신굿을 준비할 때 칠팔십 대 어르신을 포함하여 남녀노소 100여 명의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부정을 막는다고 하여 왼쪽으로 꼰 새끼로 국내 최대 규모인 길이가 300m의 금줄을 친다. 별신굿 당일은 무당 입동(入洞), 상당‧하당‧용당의 부정굿, 용떡(제물) 옮기기, 치성굿(소지올리기), 선왕굿, 용당굿, 거리굿 등을 열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하고 독특한 별신굿을 선보였다. 별신굿의 전 과정을 지면 관계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별신굿 첫 행사로 ‘무당 입동’을 보면, 무당은 정월 열나흘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에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에서는 미리 농악대를 꾸려 무당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을회관 앞에서 풍물을 울리고는 무당을 맞이하러 간다. 무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뒤, 마을 사람이 "술렁수"하고 외치면 무당이 "예이"라고 대답한다. 이때 예포를 울리고 한바탕 놀음판을 벌인다. 별신굿은 보통 5년 또는 10년에 한 번 행해지며 ‘특별히 신에게 즐거움을 고하는 굿’이란 뜻에서 붙여진 특별 기원 축제로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하는 점에서 동제(洞祭)와 유사하나, 동제는 동민 중에서 뽑은 제관이 제사를 주관하지만, 별신제(굿)는 무당이 주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글을 마치면서 아주 특별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을 하회마을 ‘안동 선유 줄불놀이’처럼 관광 상품화하여 매년 개최하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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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원모정(遠慕亭) 효(孝)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갑골문자를 뿌리로 한 한자(漢字) 중에서 ‘孝(효)’ 자를 뜻풀이하면 노인 노(老)자와 아들 자(子)를 합친 것으로 늙은(노, 耂) 부모를 아들(자 子)이 업고 있는 모양으로 자식이 노인이 된 부모를 잘 봉양한다는 의미이다. 조선 시대 통치이념이고 생활 규범이 되는 성리학에서 충과 효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지니며 효행이야말로 칭송받는 미덕이었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 송죽리 덕암마을에는 효의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원모정(遠慕亭)이란 정자가 있다. 원모(遠慕)는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 선조를 사모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亭子)는 유상지소(遊賞之所)로서 자연 속 경치 좋은 곳에 세우는 것이 대다수인데 이 원모정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효의 실천 도장으로서 언제나 충효(忠孝)에 대한 교훈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원모정(遠慕亭)은 1930년(庚午)에 산양면 송죽2리 덕암마을에 지극(至極)한 효자인 참봉(參奉) 고응두(高應斗-1564∼1627)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300여 년이 지난 뒤 그 후손인 치당공(痴堂公) 고완(高浣) 선생이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지난 2018년 10월 ‘개성고씨 신천군수 종중(회장 고정환)’이 앞장서 문중에서 십시일반 모금을 하고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원모정(遠慕亭) 중수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날 권대진 전 문경시노인회장께서 원모정에서 나온 상량문을 번역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백행의 근본인 효의 중요함에 대해 설교하셨다. 그리고 정자 앞에 육각 원두막을 설치하는 등 효를 테마로 한 ‘효공원(孝公園)’을 조성하여 원모정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역사를 배우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이 원모정에는 감동적인 효(孝) 이야기가 있다. 1930년(경오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 진성이씨(眞城李氏) 이기호(李琦浩) 선생이 지은 기문(記文)을 인용해 기술하면, 1592년(선조 25)에 왜적이 침략한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약탈과 살생이 자행되는 전란으로 극심한 혼란과 피해를 볼 때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왜병들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효자 고응두는 팔순의 노부(老父)를 업고 온 힘을 다해 달아나게 되었다. 재앙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하니 아들 등에 업힌 아버지가 이러다 둘 다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한사코 아들의 등에서 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심이 남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며 아버지를 꽉 붙잡고 내려놓지 않자 아들의 귀를 깨물었다. 아들의 귀에서 붉은 피가 솟아 옷을 적시고 어깨로 흐르는데도 아들은 태연자약하며 마치 고통을 모르는 듯이 하였다. 더욱더 아버지를 업은 팔에 힘을 굳게 하면서 오히려 아버지가 혹시 놀랄까 다칠까만 염려하였다. 이와 같은 다급한 상황에서 그만 추격해 온 왜적들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이제는 죽는구나 했었다. 그러나 이들을 쫓아 오면서 이 상황을 다 본 왜병들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과 아들의 효심을 칭찬하며 살려 주었다. 당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빼앗는 재앙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애와 효성으로 부자(父子)가 서로 그 도리(道理)를 다하는 지극한 정성이 이역 오랑캐 무리에게도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응두는 아버지 사후에 애통함이 예제(禮制)를 넘었으며, 3년을 시묘(侍墓)살이하고, 선조왕(宣祖王)의 승하 때에는 소복을 3년간 입었다. 이를 전해 들은 경상도 관찰사(경상감사)가 그의 효행을 조정에 추천,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인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명하고, 참봉(參奉)을 증직(贈職)하였다. 사람들은 충신(忠臣)을 효자(孝子)에서 찾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했으며, 그 뒤로 이런 사실을 창석 이준(瘡石 李埈)이 상산읍지에 ‘조란실기(遭亂實記)’로 기록했고,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도 ‘효행록(孝行錄)’을 지어 남겼다. 그런데 이번 원모정 중수 시 개성고씨 신천군수 종중이 공개한 것 중에 주손인 치당공 고완(高浣)이 지은 상량문에 우리나라 연호나 국호를 사용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 건축물에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隆熙)’를 쓴 것에 대해 모두 주목했다. 이는 가문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보다는 충(忠)을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또 있었다. 1592년 4월 14일에 왜군 제1진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부산포에 침입하여 시작된 7년 전쟁에서 왜군 제2진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 선봉장인‘사야가(沙也加)’라는 20대 초반 젊은 장수가 조선을 침략하여 진격하다가 난을 피해 살길을 찾아가는 무리 속에 한 가족을 보았다. 모두가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가운데 중년의 사내가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아이들과 함께 허둥지둥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왜군들이 총칼을 휘두르는 급박한 상황에도 끝까지 어머니를 업고 가는 모습을 본 왜군 장수 사야가(沙也加)는 순간 일본에서 볼 수 없는 효를 실행하는 그를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왜군의 장수가 되었지만,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소 예의지국 조선을 동경하였는데 자기 목숨이 경각에 처했는데도 노모를 끝까지 모셔 가는 것을 생생하게 목전에서 보게 되니 무엇이 대의(大義)이며 가치 있는 삶인가 고심하며 갈등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내 사야가는 뜻을 같이하는 부하 수백 명과 함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을 통해귀순하였다. 곧바로 조선의 장수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누차 큰 공을 세워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어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 金氏)’라고 부른다. 이 사람이 바로 김충선(金忠善) 장군이고 조선 백성의 효심이 결국 세계사에도 없는 역사를 남기고 기적을 이뤄냈다. 효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더 소개하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전설로서 경주시 인왕동 남천에 ‘효불효교(孝不孝橋)’가 있었다. 이 다리의 유래를 보면 신라 시대 때 아들 7형제를 둔 한 과부가 긴긴밤이 외로워 베개를 부둥켜안기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 봐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을 수없이 보내다가 그만 개울 건너 사는 홀아비와 눈이 맞았다. 밤마다 몰래 내를 건너가는 어머니를 본 효심 깊은 아들들이 차가운 냇물을 건너다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아들들은 조선 시대 사회 윤리에 어긋나지만, 어머니도 감정과 애환을 지닌 사람이며 한 여인이라는 갈등 끝에 내린 결정으로 어머니가 밤에 편히 물을 건넬 수 있게 돌다리를 놓아주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두고 효불효교(孝不孝橋)라 불렀는데 살아 계신 어미에게는 효이지만, 저승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불효인데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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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문경새재에 봉황(鳳凰)이 날아들다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봉황(鳳凰)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천년에 한 번 꽃피는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 정도로 고결하며, 기린·거북(현무)·용과 함께 신령스러운 네 가지 동물인 사령(四靈)의 하나로 중화 문명의 상징이며 중국의 신조(神鳥)다. 볏이 있는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고 볏이 없는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며 암수를 합해서 봉황이라 하는데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믿었다. 봉황(鳳凰)의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전체 모습은 닭과 같고 오색 문채(文彩)를 띠고 있는데 중국 후한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자전(字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악집도(樂汁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또 어떤 문헌에는 ‘머리 앞쪽은 수컷 기린, 뒤쪽은 사슴, 목은 뱀, 꽁지는 물고기로 용과 같은 비늘이 있고, 등은 귀갑(龜甲)과 같으며, 턱은 제비, 부리는 닭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용과 학이 교미하여 낳은 새라고도 하였다.이처럼 봉황의 모양을 각각 다르게 묘사하거나 설명한 것은 봉황이 전설 속 상상의 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벽사(辟邪)의 신통력을 가진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으로서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가 있다. 다시 말해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일컫는데 그중 남쪽을 수호하는 남방신(南方神)은 주작으로 곧 붉은 봉황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남쪽에 주작이 그려져 있고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을 찾을 때나 건물을 지을 때도 하나의 기준이 된다. 봉황 문양은궁궐, 사찰,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 고려청자, 민화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전통혼례식에서 봉황(닭)을 날려 보내는 등 우리 역사와 민속과 전통 속에 살아 있으며 조선 시대 때에는 성군(聖君)의 상징이기도 하였으며 청와대 와 대통령의 상징 마크가 봉황인 까닭도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 이렇듯 봉황은 우리들의 삶 가까이 있다. 문경에도 예외가 아니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는 실재하는 서울 경복궁(景福宮)과 똑같이 설계하여 지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있다. 궁궐 남쪽에 자리 잡은 광화문 위쪽 천장을 보면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이 봉황이 궁궐 밖 사악(邪惡)한 기운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어 왕손이 번성하고 종묘사직을 지키면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신령한 봉황이 문경새재에 살고(?) 있다.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봉황이 있다. 이 봉황은 실재의 봉황이 아니고 신기하게도 소나무 가지가 어울려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관광객이 우연히 발견하여 알려졌는데 연간 수백만 명이 문경새재를 찾아오지만, 대다수 관광객이 이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데 이번 기회에 이를 널리 알리고 문경새재를 방문하신 모두가 봉황의 기운을 받아 횡액(橫厄)을 물리치고 건강하고 뜻하는바 모든 것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해 본다. 이 봉황은 바로 조선 시대 신임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받던 교인처(交印處)인 교귀정(交龜亭) 앞 노송(老松)에 깃들여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우연히 시선이 가거나 아니면 어떤 계시(啓示)에 의해 이를 보게 되면 하루의 일진(日辰)이 좋은 것은 물론, 복권을 사면 당첨될 확률이 높고,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취업이나 수능 등 시험을 앞둔 사람이라면 합격하거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봉황을 보게 되면 좋은 기운이 3년까지 그 효험이 지속되어 만사(萬事)가 형통(亨通)한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문경새재를 찾아와서 한 번쯤은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 외 문경에는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나 봉황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 마성면 신현3리 봉생(鳳笙)마을 유래를 보면 먼 옛날 안동 권씨 한 분이 처음 정착하였는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나 마을 옆 동그란 야산에 있는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 묘터를 잡고 묘혈(墓穴)을 파는 중에 반석(盤石)이 하나 나왔다. 이 바위를 들어내니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된다는 생황(笙簧) 소리가 은은히 들리면서 갑자기 봉황이 날아올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전설을 듣고 마을 이름을 ‘봉생’이라 불렀다. 그런데 봉생의 한문 표기를 보면, 봉황이 난 곳이라 날 生(생) 자를 써서 봉생(鳳生)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생황 笙(생) 자를 쓴 봉생(鳳笙)으로 되어 있음은 바로 생황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훨훨 날아 조금 떨어진 산에서 울었다 하여 그 산 이름이 봉명산(鳳鳴山)이 되었다. 봉명산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것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조’에 ‘봉명산은 현의 동쪽 8리에 있다’라는 기록이다. 그리고 생황과 관련된 곳으로 문경시 가은읍 선유구곡(仙遊九曲) 제8곡 난생뢰(鸞笙瀨)가 있는데 여기가 난새(鸞鳥)가 날고 생황 소리가 울려 퍼져 곧 신선의 세계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곳이다. 통일신라 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가 자리 잡은 곳의 지세(地勢) 또한 봉황이 날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과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일주문인 봉황문(鳳皇門)이 있다. 필자가 사는 서쪽 산 바위 위에 봉황이 자주 내려앉았다고 하여 봉암리(鳳巖里)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임(初任)으로 3년간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교사)로 재직할 때 하숙집이었던 청운각 우물에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자란 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에 있는 ‘강릉최씨 열부각(江陵崔氏 烈婦閣)’의 주인공인 ‘강릉최씨’는 소녀 시절 시서(詩書)를 배우고 예절과 행실이 남달랐는데 안타깝게도 남편이 일찍 죽게 되었다. 그때 애끓는 마음으로 지은 제문 중에 ‘봉황이 함께 날아 어울려 노래를 즐겼는데 봉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아 황이 홀로 슬피 우네’라는 구절이 있다. 강릉최씨는 제문을 읊은 이후 절식, 자결하니 모두가 열부(烈婦)라고 칭송하였고 조정(朝廷)에서 그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한 정려(旌閭)를 내렸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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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문경새재 산불됴심비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문경새재’에는 한글로 된 아주 특별한 비석이 하나 있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26호로 지정된 ‘조령산불됴심표석(鳥嶺산불됴심標石)’이다. 조선 시대 때 산불 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비로,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높이 157㎝, 저변 너비 75㎝, 정상 너비 55㎝, 저변 둘레 255㎝, 중간부 둘레 92㎝)을 다듬지 않고 ‘산불됴심’이라는 한글로 된 글자(각자 깊이 0.5cm로 음각)를 세로로 새겨 놓은 비석이다. 문경새재는 영남(嶺南-영남지방)이 시작되는 곳이며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낸 9개 대로 중 4, 5번 대로가 지나는 길이라 관리는 물론 통신사,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보부상 등 많은 사람이 지나는 길이기에 울창한 숲을 보호하기 위해 경고성 계도문으로 관할 조령별장이 세웠다고 본다. 특히 이곳에는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로 사용할 황장목(금강송) 산지이기 때문에 산림 보호가 더욱 필요하다고 판단되며 한글로 새긴 것은 일반 백성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산불됴심비’는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데 언제 세워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구개음화(口蓋音化) 현상으로 보았을 때 조선 영·정조(渶·正祖)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이 비의 글씨 됴심은 고어체(古語體)이고 ‘됴심’은 ‘조심’의 옛말이므로 한글 변천의 실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근현대에 이르러 한글로 된 비(碑)나 표석(表石)이 많지만, 조선 시대 때 세워진 수많은 비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한글 비석(碑石)이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에서 5기(基)밖에 없다고 한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1397년~1450년)께서 1443년(세종 25년)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하시고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였지만, 한글은 평민이나 상민(常民), 부녀자들이나 쓰는 언문(諺文-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으로 취급받아서일까? 양반이나 선비들은 특권의식과 유식함을 과시하는 듯 계속 한자를 사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비석을 세울만한 위치에 있는 사대부 다수가 한문으로 된 비문을 새겼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서울 李允濯 한글靈碑)’는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비석으로 1536년(중종 31)에 세워졌는데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가 2007년 보물 1524호로 승격됐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 142㎝, 폭 63㎝, 두께 18㎝ 규모이다. 이 비석은 국한문 혼용 비석으로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녕ᄒᆞᆫ비라거운사ᄅᆞᄆᆞᆫᄌᆡ화ᄅᆞᆯ니브리라 이ᄂᆞᆫ글모ᄅᆞᄂᆞᆫ사ᄅᆞᆷᄃᆞ려알위노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풀이하면 "영(靈)한 비(碑)라. 거운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으리라. 이는 글(한문)을 모르는 사람더러 알리노라.”라는 한글 경고문인데, 우리나라 비문으로서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인흥군 묘계비(仁興君墓界碑)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있으며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가 1686년에 이곳이 아버지인 조선 선조의 제12 왕자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1604~1651)의 묘역임을 표시함과 동시에 훼손을 막기 위해 세웠다. 비에는 전서체의 제목과 한글 및 간기(刊記) 등이 새겨져 있는데 북쪽 비면 하단에는 20자 5행으로 "이비가극히녕검니심도사람이거오디말라”라고 쓰여 있는데, "이 비가 극히 영검하니(영묘한 위력이 있으니) 생심(生心)(어떠한 생각으로이라도) 사람이 거오(倨傲)(거만스럽게 낮추어 보지)하지 말라”라는 경고성 한글 고어가 새겨져 있다. 경남 진주시 비봉산(飛鳳山) 자락에 있는 의곡사(義谷寺) 주차장 오른쪽에는 18세기 중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6호로 지정된 ‘진주 의곡사 한글비석(晋州 義谷寺 한글碑石)’이 있다. 이 한글 비석은 전면에는 중앙에 ‘(南)無阿彌陀佛 塔’이라 새겨져 있고, 좌측에 이보다 좀 작은 글씨로 ‘父母生天目連經’이라 한자로 새겨져 있으며, 우측에 대칭이 되도록 이 한자의 음을 한글로 "부묘ᄉᆡᆼ쳔목연경”이라 새겼다. 그리고 유일하게 해외에 있는 한글비는 1624년 일본 지바현 다테야마(館山)시에 있는 불교사찰 다이간인(大巖院)에 세워진‘사면석탑’이다. 동서남북 네 면에는 각각 한글과 중국의 전서체 한자, 일본식 한자, 산스크리트어로 각각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특이한 것은 음가가 없는 'ㅇ' 받침을 써넣은 것이다. 이는 ‘동국정운식’ 표기로 훈민정음 창제 초기부터 16세기까지만 사용된 표기법으로 새겨진 한글 비석이다. 그런데 왜 400여 년 전 일본 사찰에 ‘한글 비석'을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다테야마 지역의 향토 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숨진 조선인들의 혼을 위령하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한글을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며 당시 다이간인의 주지 오요(雄譽)가 일본과 조선 사이에 일어난 비극적인 전쟁인 임진왜란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와 신뢰 회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비를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글 비석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현존하는 5기의 한글 비석 중에 문경의 ‘산불됴심비’만이 순수 한글로만 비문이 새겨져 있고, 그 외 네 곳의 비는 한글과 한문이 혼용된 비석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 하나 ‘문경시’만이 보유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자연보호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 한글비, ‘산불됴심비’의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해 이 기회를 빌려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대한민국 보물이나 국보로 승격을 추진한다. 둘째, ‘산불됴심비’를 다양한 이미지로 브랜드화한다. 셋째, ‘산불됴심체 글꼴’을 만들어 전 국민이 사용케 한다. 넷째, ‘산불됴심비’를 다양하게 형상화한 상품을 만들어 문경특산물로 만든다. 다섯째, 문경새재 입구나 국도변에 초대형 ‘산불됴심비’를 세워 문경의 상징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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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신통방통 지명 이야기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지명(地名)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낸 어떤 고장이나 장소, 즉 마을이나 지방, 산천, 지역 따위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지명을 언제 누가 지어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다수 지명은그 고장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산, 강, 고개, 들, 골짜기 등과 같은 땅의 모양과 위치, 특성을 나타내거나 역사, 전설, 설화 등에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 마을은 ‘양짓마’나 양촌리로, 서당이나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동이나 향교리, 효자가 난 마을은 효자동,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은 장승배기, 배가 드나든다고 뱃나들 등과 같다.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예언이 함축되어 있고 앞날을 예견하는 지명이 있어 수백 년 아주 먼 후일 그 지명이 뜻하는 바대로 실현되는 곳이 많으며, 사람의 이름에도 길흉이 있고 이름이 주는 의미가 그 사람의 삶과 일치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경북 울진 온정리와 같이 따뜻할 온(溫) 자가 들어간 지명이 있는 곳에서 온천(溫泉)이 개발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먼저 사람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면‘성명의 좋고 나쁨이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짓거나 풀이하는 점술을 철학에 빗대어 이르는 말’로 성명학(姓名學)이 있다. 사람의 성명은 물론 상호, 회사명, 단체명, 지명 등의 이름에도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존재한다고 믿고 우주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해로운 이름은 피하고 이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가(作名家)를 찾아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 앓고 3일째 죽는 것) 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이름 짓기를 원하며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다가 더 좋은 뜻과 운기(運氣)가 있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하는 사람도 있다. ‘안득기’라는 학생이 있었다. 공부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너 이름 뭐꼬?” 하니 " 안득깁니다”하니 "뭐 안드낀다꼬” 학생은 자기 이름을 말했는데 선생님은 ‘안 들린다’라고 장난치듯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 성이 나서 혼을 냈다는 것인데 이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야기다. 그리고 ‘노상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더니 노상 술을 마셨다는 사람이 있었고 ‘오미자’란 이름을 가진 여성분이 ‘문경오미자축제’에 오셨다가 오미자란 이름을 가진 덕분에 오미자 선물을 받아 가기도 하고 ‘김말자’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성분께서는 어린 시절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부모를 원망하며 부끄러워했는데 나중에 결혼하고 ‘김밥집’을 내었는데 운명인 듯 김말자 이름대로 김을 말아 판매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되고 난 뒤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에게 감사했다는 등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로 옛날부터 전해오길 ‘월악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날이 오리라' 했다는데 충주댐이 들어서서 예언대로 월악산이 호숫물에 비쳤고, 충주댐이 들어선 곳의 옛 지명이 ‘물막이골’이라 했는데 물 막는 댐이 생겼으니 놀랍고, 1992년에 기공식을 개최하고 청주공항이 들어설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이 활주로 양쪽 끝 마을 이름이 각각 비상리(飛上里)와 비하리(飛下里)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방향에 비상리(飛上里-청원군 내수읍)가 있고, 비행기가 착륙하는 방향에 비하리(飛下里-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가 있고, 관제탑이 들어선 자리에는 관제리(管制理)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니 마치 이 지역 조상들께서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설 것을 예견하는 선견지명이 있으신 듯 신기롭고 신통스럽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에 ‘하품리(下品里)’라는 마을이 있다. 하품리는 조선 시대 때 정승이 세 분이나 살았던 곳이라‘품실(品室)’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분동(分洞) 되면서 위쪽은 상품리(上品里), 아래쪽은 하품리(下品里)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농촌 지역이라 농산물을 생산하여 출하(出荷)하면서 산지(產地)를 표시하는데 ‘하품(下品)’이라 하니 아무리 우수한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해도 질 낮은 하품(下品) 취급을 받는 듯한 어감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졸릴 때 하는 나오는 ‘하품’한다는 느낌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 2005년 주민들이 행정기관에‘정품리(正品里)’로 개명을 요구하였는데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13년 9월 명품리(明品里)로 변경되었다. 경북 문경시 동로면에는 ‘수평리(水坪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수평리는 예로부터 ‘넓은 들판에 물이 차서 수면이 평평하게 된다’는 풍설(風說)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1986년 12월에 준공한 경천댐이 생겨 옛사람들이 예견한 수평(水坪)이란 이름 그대로 ‘물이 평평한 마을’이 되었다. 경천댐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인 황장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상류인 금천을 막아서 만든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로 물이 맑으며 수심이 깊고 넓은 호수다. 호수 위쪽에 있는 ‘천주봉(天柱峰)’과 주변의 산과 나무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각각 특색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치면 그 수려한 풍경이 일품이다. 그리고 연못에서 용이 승천한 마을, 또는 큰 못에서 용이 나타나 뒷산으로 올라가 마을을 지킨다는 ‘용연리(龍淵里)’가 문경읍에 있다. 여기에 2014년에 준공된 문경댐이 생겼다. 그리고 용연리에 인접한 곳에 평천리(平川里)가 있고 수평동(水平洞)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는데 이 또한 신비스럽게도 이름에 걸맞고 지명이 예견한 대로 용이 살다 승천하는 큰물이 모인 댐이 생긴 것이다. 이렇듯 재미있는 이름 이야기와 우연인 듯 아닌 듯 앞날을 예견하는 ‘신통방통 지명 이야기’를 마친다. 구름나무/ 이만유 경천호에 천주봉 비치면 한 그루 구름나무에 물을 준다 하루 잠시 스치면 두둥실 하늘 닿는 마음을 삼류 로맨스로 전락시키기 싫어 탈 쓴 주인공이 되었다 어느 날 바람 스쳐 지나고 휑하니 텅 빈 그 자리에 그리움은 목이 긴 한 마리 학이 되었다 한줄기 불씨 봄눈 녹듯 사라지고 노을 지는 어스름 길에 호수 위 떠 오르는 별을 마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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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일심각(一心閣) 윤 씨 열녀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지금은 모든 관습이나 가치관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고 특히 MZ세대에게는 열녀(烈女)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생소하고 가당치 않다고 하겠으나 유학(儒學)을 국가통치이념으로 하고 생활 규범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는 달랐다. 국가(왕)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충효사상(忠孝思想)과 여자들을 속박하고 가학(加虐)하는 굴레였던 여필종부(女必從夫-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름), 불경이부(不更二夫-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함.), 일부종사(一夫從事-한 남편만을 섬김)라는 말이 그 시대 덕목(德目)이었으며 절대 가치였다. 열녀란 절개가 굳은 여자,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을 말한다. 이를 실행한 여인은 정려(旌閭)라고 해서 나라에서 충신, 효자와 같이 마을 입구나 대문 앞에 붉은색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수절(守節)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는 열녀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봉건적 발상이었다. 세종과 성종 때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글과 그림을 넣어 만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발간하여 모든 백성이 이를 본받도록 하였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 마을 앞 길가에‘열녀 윤씨 일심각’이 있다. 일심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원래 비석의 글자가 풍우(風雨)에 마멸되자 1973년에 문경읍에서 새로 비석을 만들어 보호각 안에 함께 세웠다. 열녀(烈女) 윤 소사(尹 召史, 소사는 과부(寡婦)를 점잖게 일컫는 말)는인조 14년(1636)에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병자호란 때 보병으로 참전했던 정병(正兵) 조막룡(趙莫龍)의 처로 불행하게도 남편이 쌍령(雙嶺)전투에서 전사하자 애통한 마음으로 복(服)을 입고 삼년상을 치르고 계속 소복 차림으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슬픔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를 본 부모님이 청상(靑孀)이 되어 한평생을 외롭게 지낼 딸이 너무나 애처로워 여러 차례 재가(再嫁)를 권하자 불경이부(不更二夫)인데 어찌 다시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얼마 뒤인‘順治十一年 八月(효종 5년 1654년)'에일부종사로 정절을 지킨 윤 소사(召史)를 표창하려고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일심각 열녀 비석에 얽힌 또 다른 내용의 전설이 있다. 조선 시대 문경 하초리, 지금 일심각이 있는 자리에 살림이 넉넉하고 금실 좋은 신혼부부가 살았다. 부인의 미색 또한 천하일색이라 모두 부러워하였다. 그 집 아래 가난한 노총각 친구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랫집 남자가 윗집 남자에게 주흘산에 약초를 캐러 가자고 했다. 이 두 사람은 깊숙한 산속 계곡으로 가게 되었는데, 재물과 여자에 탐이 난 아랫집 남자는 친구인 윗집 남자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를 산삼이 나는 곳이라며 바위 밑 경사진 곳으로 유인하고 바위를 굴려 눌러 죽였다. 그때 붉은 피가 용솟음치듯 솟아나며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산에서 내려와 태연스레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아내는 아랫집 남자를 찾아가 남편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아랫집 남자는 가기는 같이 갔었으나 올 때 찾으니 먼저 내려갔는지 없더라고 대답하였다. 아내는 며칠 몇 달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소식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해가 바뀌고 이젠 체념 속에서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만 아랫집 남자의 계략(計略)에 넘어가 그와 같이 살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이들은 아이 셋을 낳게 되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전 남편을 잊지 못했으나 어쩔 수 없이 새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소낙비가 몹시도 내리는 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던 남자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싱긋이 웃었다. 이상히 여긴 부인이 그 이유를 묻자 남자는 계속 웃기만 했다. 부인이 계속 왜 웃느냐고 다그쳐 물으니까 이제는 옛일이고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어찌하겠어! 하는 마음에 옛날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처마 밑으로 빗물이 떨어져 흐르는 것을 보니 그때 그 산속에서 당신 전 남편을 바위로 눌러 죽였을 때 붉은 피가 흘러내리던 것과 같네” 하며 죄책감도 없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깜짝 놀라며 지금껏 이 남자와 산 것이 불륜(不倫)한 생활이고, 이 사악한 남자에게 속은 것에 분노하며 억울하게 죽은 전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남자뿐만 아니라 낳은 자식들도 악의 피를 받은 아이들이라 생각하여 부엌에서 식칼을 가지고 나와 남자와 아들 셋을 모두 죽였다. 그런 연후에 비참하게 죽은 남편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자기도 자살하여 기구한 생을 마쳤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나라에서 열녀비를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열녀 윤씨가 묻힌 ‘소밭등’이라는 곳이 있으며, 남편이 죽었다는‘응기뜽’이라는 곳도 주흘산 안에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마을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로 1973년 문경새재로 가는 도로를 확장 포장할 때 이 비석을 하초리 마을 안쪽으로 옮겨 놓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을에 갑자기 멀쩡했던 사람이 아프거나 죽고 외지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사고와 우환이 연이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하나둘 모여서 수군대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윤씨 열녀비를 옮겨서 동티가 난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 다시 제자리에 모셔 세우기로 하고, 1988년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제사를 지냈더니 그 이후부터 거짓말처럼 사고나 우환이 사라지고 마을이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필자가 이를 전해주신 어르신에게 "열녀 윤 소사께서는 아직도 전사했다는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믿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마을 안쪽이 아닌 동구 앞 길가에서 기다리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해야 하는데 길에서 떨어진 곳에 자기를 가져다 두니 화가 나서 동티를 부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 이후 이 내용을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하여 해설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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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우리 마을 녹색길 지킴이이만유/전 우리마을녹색길지킴이단 단장 길은 문화와 역사, 우리의 삶이 담겨있는 그릇이다. 잠시 멈추고 뒤돌아볼 틈도 없이 빠르게 직선으로만 내달리는 현대인들이 자연 속에서 ‘느리게 걷기’를 통해 사색하고, 소통하고, 새로운 삶의 가치와 지혜를 깨닫는 공간이 바로 길이다. 천천히 걸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깊이 생각하고 안 보이던 것을 볼 수 있으며 사색의 심도가 깊어질 수 있다. 길은 느림과 곡선의 미학 속에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이런 길의 효용성을 높이고자 우리 지역의 역사‧문화와 아름다운 자연이어우러진 친환경적 보행자 중심의 길, 누구나 찾아오면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명품길을 만들고 지키고 운영하기 위해 2011년 문경시가 안전행정부 시행 ‘우리 마을 녹색길’ 공모사업에 선발되었다.국‧도비를 포함 10억 원의 예산으로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5.0km의 ‘선유동천(仙遊洞天)나들길’을 조성하였다. 이를 이어 2012년2년 연속 공모사업에 선발되는 성과를 올려 8억 원의 사업비로 4.4km의 ‘체험길 조성사업’을 완료하였고 2013년 2억 원 예산으로 ‘선유동천 나들길 경관 조성사업’을 실시하여 안전 펜스, 목교, 안내간판 등을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총사업비 20억을 투입하여 명품길 ‘선유동천 나들길’이 완성되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통상적으로 행정기관에서는 사업연도에 편성된 예산을 집행하여 길을 내고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면 그것으로 사업 완료라고 생각하고 그 길과 시설을 활용하여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을 운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기반 시설인 하드웨어만 있고 사업추진 주목적이 되는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관광 분야 민간자원을 활용하겠다며 시민들로 구성하는 ‘우리 마을 녹색길 지킴이단’을 조직 운영하기로 하였다면서 녹색길 관할 지역 행정기관인 가은읍에서 필자에게 협조 요청을 해왔기에 쾌히 응하였다. 이 길은 여러 가지 ‘녹색길’ 유형 중에‘수변공간 활용형’으로조선 선비들의 이상향이요, ‘유학의 꽃’이라는 구곡원림 중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선유칠곡’과 ‘선유구곡’ 일원을 대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녹색길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 서로 소통하고 더 많은 지역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공동체 활성화도기대한다는 사업추진 목적에 부합되며 이 녹색길이 후백제 견훤대왕 유적지, 아자개장터, 문경새재자전거길, 석탄박물관, 운강이강년기념관, 봉암사, 대야산, 희양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보아 이 모든 것이 실현되길 바라면서 2013년 6월 지역주민 21명의 단원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마을녹색길지킴이단(단장 : 이만유)’을 창립하고 녹색길 정화, 관광객 안내해설, 시설 및 동향 모니터, 행사 참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활동영역 확대와 효율성 증대를 위해 ‘우리마을녹색길지킴이단’과 ‘문경구곡원림보존회’의 통합운용이 필요하다는 중론에 의해 2014년 6월 30일 ‘선유동천 나들길’ 지킴이 활동을 마치고 현지에서 통합발대식을 하였다. 통합 전에는 녹색길 정화와 소규모 안내해설 위주로 활동하였는데 통합 이후 관내 외 문화단체, 사회단체 등에서 시행하는 규모가 큰 사업에 참여하였다. 예를 들면 ‘문경문화원’에서 문경새재에서만 개최하던 ‘달빛사랑여행’을 녹색길로 장소를 변경 추진하자고 건의하여 2014년 7월 12일 전국에서 오신 관광객 250여 명이 참여한 ‘선유동천나들길달빛사랑여행’을 실시할 때 단원 10명이 안내해설을 전담하였다. 그 외 경북교육청 소속 교육공무원 해설, 문경문인협회 해설, 시민과 함께하는 구곡탐방 해설, ‘세계유교문화재단’ 주관 ‘선유구곡 라디엔티어링’ 해설을 하기 위해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을 처음 찾아오신 관광객들이 ‘대한민국에 이런 비경이 숨어 있었다니!!!’하고 감탄하는 ‘선유동천 나들길’이 전국 최고의 숲길로 선정됐다. 산림청이 실시한 ‘2018 숲길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울진군 금강소나무숲길’ 등 전국 25개 유명 숲길 중 ‘문경 선유동천 나들길’이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듯이 명실공히‘선유동천 나들길’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길’이다. 세심대에서/ 이만유 세심대 맑은 물이 마음을 씻어준다 노을처럼 타는 단풍 마지막은 모두 붉다 망각의 바람에 날린 붉은 마음 한 가닥 사랑도 인생사도 바람이고 구름인걸 연초록 봄날 희망 푸르렀든 여름 열정 세심대 흐르는 물에 미련 없이 보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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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조선의 명당 ‘연주패옥(連珠佩玉)’과 ‘말무덤’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신라 말 도선비기(道詵秘記)로 유명한 도선(道詵)에 의해 비롯되어 고려 때 크게 유행하였으며 지형(地形)이나 방위(方位),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하여 집터나 묏자리를 구하는 이론이다. 근래에 와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초로 한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예부터 명당(明堂)의 유형은 다양하다. 우리가 자주 들을 수 있는 명당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천계(天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보통 닭이 20여 개의 알을 품으므로 이 지형의 소응(昭應)은 받게 되면 대대로 많은 자손을 둘 수 있어 집안이 번성하고, 무리를 이끄는 위대한 호걸이 난다는 명당이 있고,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은 선녀가 금(琴)을 타고 춤추고 노래한다는 땅으로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고 부자가 되며 과거급제 등 집안에 경사가 많이 생겨 잔치를 자주 연다는 명당이다.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은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승천하듯이 쌍용이 구슬을 가지고 희롱하니 후손들이 곧 등용되어 대관(大官)이 날 수 있는 곳이다. 그 외 자손이 모두 원만하고 고귀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연화부수형(蓮華浮水形), 박정희 대통령을 탄생시킨 금오산(金烏山) 제왕지지(帝王之地)인 삼족오(三足烏)의 기운을 받은 금오탁시형(金烏啄屍形)등이 있다. 풍수상 절대 집(양택-陽宅)을 지어서는 안 되는 3가지 집터로 살풍(殺風)을 맞을 수 있는 계곡, 삼각형 모양의 땅, 날카로운 칼날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충(冲) 받는 위치’는 피해야 한다고 풍수 전문가 최우식 교수는 말했다. 우리나라 대통령 관저였던 청와대(靑瓦臺) 터는 서울의 천원(天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악산의 강한 살기가 압도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지 않은 흉지(凶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청와대 살았던 역대 대통령 누구도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학자들은 경복궁은 사람이 사는 땅이고 청와대는 죽은 자의 땅이라며 거기에 살면 불운하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 8대 명당(明堂) 중 하나라는 대명당 연주패옥형(連珠佩玉形) 묫자리가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 있다. 이 명당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대감과 두사충(杜師忠)과의 인연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국 명나라 원정군사령관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을 수행한 풍수 전략가 두사충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의 패전 책임을 지게 되어 참수(斬首)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예천 출신 약포 정탁 대감의 구명(救命)으로 살게 되었다. 두사충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후지지(身後之地-생전에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잡아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 연주패옥 명당 묘터이다. 약포 정탁 대감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이 전략상 불가피하게 조정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죄로 파직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국문(鞫問)으로 반죽음 상태에서 곧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대감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순신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을 선조에게 보내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목숨을 건 정탁 대감의 직언(直言)이 이순신을 살리고 이순신은 군사 120여 명과 병선 12척뿐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여 대승한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했다. 그런 정탁 대감에게 두사충이 잡아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명당은 선녀인 옥녀가 화장하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옥구슬을 꿰어 목에 걸고 있는 형세(形勢)로 옥관자(玉寬子) 서 말, 금관자(金寬子) 서 말이 나온다는 곳이라고 한다. 즉 옥관자(玉寬子)는 조선의 왕과 왕족, 당상관인 벼슬아치가 쓰던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이고 금관자(金貫子) 금으로 만든 관자로 정이품, 종이품의 벼슬아치가 달았는데 이런 관자를 각각 서 말을 지녀 자자손손 수없이 많은 관리를 배출하고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놀랍고 아주 특별한 명당이다. 이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명당이 있는 곳에 말무덤(馬塚-마총)이 하나 있다. 무송대(舞松臺)라는 큰 바위 옆에 노송 한 그루가 있고 거기에 말무덤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두사충이 조선 땅을 모두 살펴보고 백두산 정기를 머금고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이곳에 조선의 팔대 명당(八大 名堂)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명당을 찾아내어 자기 목숨을 구해준 약포 대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대감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해주었다는데 대감과 가족이 한양에 있는 관계로 대감의 구종(驅從-관원을 모시고 다니던 하인)에게 묘터를 알려 주게 되었다. 그 후 정탁 대감이 낙향하여 자기 아들에게 두사충이 정해준 묫자리를 찾아 정확한 위치를 알아두라 하여 아들은 구종과 함께 이 무송대에 이르러 "그 명당이 어디냐?" 하고 묻자 "예, 여기서 백보지내(百步之內)에...”하며 손을 들어 위치를 가리키며 말하고자 하는데 갑자기 말이 미친 듯이 날뛰며 뒷발질하여 구종이 즉사하게 되었다. 아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하고 화가 치밀어 단칼에 말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하여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 진혈(眞穴)은 세상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이 영원히 시간 속에 묻혀 버렸다. 이후 전국 지관(地官)들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명당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싸여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풍수가 진혈이라고 판단되는 곳을 매수하여 소유하고 있는데 모 그룹 재벌이 20억 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200억 원을 달라고 해서 매매가 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오늘날에도 연주패옥혈 명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고, 지금까지 진혈(眞穴)을 찾지 못한 채 말무덤 사방 백 보 안에 알게 모르게 묘를 쓰고 있다고 한다. 어느 유명 풍수지리학자께서는 여기는 백두대간의 모든 氣기 이곳에 응취(凝聚), 응결(凝結)되었기에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기가 강해서 일반인이 여기에 묘를 쓰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도 있고 비보(裨補) 또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정탁 대감집 말(馬)이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천기누설(天機漏洩)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주인인 정탁 대감 가문(家門)의 멸문(滅門)을 막기 위해 구종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는 설과 구종이 자기 선대를 모시려는 욕심으로 딴 곳을 가리키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전설의 명당 / 이만유 문경 동로 갈밭골에 연주패옥(連珠佩玉) 천하 명당 두사충이 은혜 갚은 약포 대감 신후지지(身後之地) 외롭게 전설을 품고 누워있는 말무덤 백두산 정기 서린 조선 땅 최고 명혈 천기누설(天機漏洩) 막음인가 말 뒷발질에 사라졌네 무송대 육백 년 노송 너는 알리 진혈(眞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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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성황신(城隍神)은 민속신앙에서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성황당(城隍堂)은 성황신을 모신 당(堂)으로 지역에 따라 서낭당, 서낭신이라 불린다. 국어사전에는 서낭당과 서낭신의 원말이 성황당, 성황신이라 한다. 통상적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라고 하지만, 일부 민속학자는 성황당은 마을 전체가 치성을 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마을 뒤편에 당집을 지어 신을 모시는 봉안처(奉安處)이고, 서낭당은 마을사람과 불특정 행인들이 소원을 비는 곳으로 고갯마루나 마을 어귀 또는 길섶에 돌무더기, 노거수(신목). 등을 신격화하거나 신이 머물러 있는 곳(거소, 居所)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필자도 해설이나 강의 시 오래전부터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귀신(鬼神) 중에는 불러들이는 귀신과 쫓아내는 귀신이 있는데 대체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은 원귀, 악귀, 수살귀(水殺鬼), 달걀귀신 등으로 귀(鬼)로 부르고. 잘 되게 하고 이롭게 하는 좋은 귀신은 성주신(城主神), 조왕신(竈王神), 성황신 등으로 신(神)이라고 부른다. 성황신은 횡액(橫厄)을 막아주고 사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당연히 좋은 신이다. 성황당은 지역, 장소, 형태, 성별, 노소 등에 따라 천황당ㆍ국사당, 골맥이, 할미당, 할배당, 각시서낭, 애기서낭, 배(船)서낭, 돌서낭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한 분만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녀 신을 함께 모시는 곳도 있다. 국사당(國師堂)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 도성의 수호신(守護神祠)으로 북악산과 남산에 신사(神祠)을 짓고 무신도(巫神圖)를 모셨으며 특히 남산 신사를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 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으나 후에는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금지됨에 따라 점차 무속화(巫俗化)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비는 민간 신앙으로 정착하여 일반 백성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경북 문경에는 역사가 오래된 옛길 문경새재 제 1관문 주흘관 성벽 뒤에 ‘문경새재 성황당’이 있다. 여기에 모셔져 있는 여신(女神)은 얼마나 영험한지 ‘나라를 구한 성황신’이다. 성황당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제 1관문의 축성과 비슷한 시기인 1700년경에 건립하고, 1844년 중수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성황당이다. 이곳은 주흘산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라고 하는데 큰 회화나무에 오색천이 둘려있고 항상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울고 있으며 당집 주변에는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어 더욱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 이게 무슨 말일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큰 공을 세운 최명길(1586~1647)과 문경새재 성황신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최명길이 소년 시절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중에 문경새재에 이르러 깊은 산속을 혼자 걷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진 뒤를 보니 웬 젊고 자색이 아리따운 여인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뒤 여인이 재빨리 최명길을 앞질러 가는데 뒤태 또한 아름다워 젊은 혈기에 여인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하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만 여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하자 최명길이 잡아주면서 동행하게 되었다. 길을 가면서 대화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 최명길은 호랑이와 산적이 많은 문경새재, 이 험한 길을 여인이 혼자 걷는다? 혹시나 내 간을 빼내 갈려는 천년 묵은 여우가 변한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 듯 스치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경계하자 이 여인이 눈치를 채고 방긋 웃으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오라 새재 성황신입니다”라고 하였다. 당황하였지만, "지금 어디를 가십니까” 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한양에 갔다 오던 길에 성황당에 걸려 있는 비단 치마를 보고 예쁜 자기 딸이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얼른 옷소매 속에 치마를 훔쳐 넣고 가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그 괘씸한 좌수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최명길은 그 말에 매우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어찌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며 조심스럽게 "죽이지는 말고 잘못에 대한 벌을 주거나 가져간 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두도록 하겠으니 노함을 거두시고 살려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명길은 급히 안동으로 가서 외숙에게 인사만 드리고 서둘러 그 좌수의 집을 물어 찾아가니 집안에서 곡소리가 크게 들리고 좌수의 딸이 영문도 모르게 급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좌수에게 제가 죽은 따님을 살려 보겠다고 말하고 딸이 있는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열고 안을 보니 문경새재에서 보았던 그 여인(성황신)이 누워있는 좌수 딸의 목을 막 누르고 있었다. 보기에는 죽은 것 같지만 아직은 영혼이 이승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최명길이 성황신에게 큰절을 올리고 부디 살려주기를 간청하니 "내 그대의 정성에 감탄하여 청을 들어 주겠소” 하며 이러이러한 일을 하도록 하였다. "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고 나와 성황신이 일러준 대로 좌수에게 말하길 "모월 모시에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비단 치마를 가져온 적이 있지요” 하고 물으니 좌수가 놀라며 "그건 저만 아는 일인데 어찌 그것을 아시오” 하며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소년 최명길은 의젓하게 위엄을 갖추고 "그것 때문에 성황신이 노하시어 딸을 죽이게 되었소. 백배사죄하고 당장 가져온 비단 치마를 불사르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제사 지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좌수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거짓말처럼 죽은 딸이 다시 회생하였다. 며칠을 쉬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성황신이 최명길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새재 입구에서 "이제 오십니까” 하며 웃으면서 맞으며 "후일 그대는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며 그때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큰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전쟁이 나면 절대 맞서 싸우지 말고 화친해야만, 종묘사직을 지키고 백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꼭 명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명길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에 정말로 문경새재 성황신의 예언대로 최명길은 과거에 급제하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점차 올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고, 병자호란을 당하였을 때 조정대신 모두가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데, 오로지 홀로 어려움을 감내하며 성황신의 계시를 따라 주화론(主和論)을 펴 국난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훗날 역사는 최명길의 화친(和親) 주장이 현명했고 결국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소년 시절 최명길과 문경새재 성황신과의 만남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쨌든 성황신의 예언과 계시가 나라를 구하게 된 것이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인 ‘문경새재 성황신’은 그 신통력이나 영험함이 특별하여 예전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장원급제를 바라고, 보부상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소원을 빌었으며 지금도 사시사철 전국의 많은 무속인은 물론이고 일반인 찾아오는 기도처가 되었다. 특히 신내림굿이나 기존 무속인들의 신통력이 떨어질 때는 기를 받아 이를 복원하기 위해 찾아온다. 시쳇말로 신통력의 업데이트, 기(氣)의 충전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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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역사를 바꾼 토끼 이야기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2023년 계묘년(癸卯年)은 ‘검은 토끼의 해’다. 육십 간지의 40번째로 계(癸)는 흑색, 묘(卯)는 토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토끼는 온순하고 지혜롭고 꾀가 많아 예로부터 매우 신성한 동물로 여겨 왔고 강한 번식력으로 다산의 상징이며 만물의 성장과 번창, 풍요를 의미하며 만화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고 사랑스러운동물이다. 토끼와 관련된 고사 중에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과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교토삼굴(狡兎三窟)’이란 말이 있다. ‘교활(狡猾)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라는 뜻인데 이는 토끼가 천적(天敵)이 나타났을 때나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도망갈 굴을 3개 준비해 둔다는 것으로 사람도 어려움이나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리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 놓아야 한다는 지혜를 일컫는 말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만일을 대비한 ‘플랜 B’‘플랜 C’를 만들어 두라는 말과 같다. 다만 나쁜 짓, 비난받을 짓, 부끄러운 짓을 하고 비겁하게 남을 속이면서 숨고 피할 굴이 아닌 국익을 위하는 것과 국민이 고난과 고통을 받을 때 그 위기를 대처하고 탈출하기 위한 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굴로써 교토삼굴의 지혜가 필요하다. 지난 2011년 신묘년(辛卯年) 토끼해를 맞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우리나라 154만여 개의 지명 중에서 토끼와 관련된 지명이 158개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중에 경북이 17개인데 상주시 함창읍의 ‘토끼골’, 안동시 남선면 원림리의 ‘중토갓’, 봉화군 재산면 상리의 ‘묘골’ 등과 함께 문경시 농암면에 ‘토끼밭골’이란 지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경의 ‘토끼비리’는 빠져 있다. 토끼비리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고모산성, 석현성과 이어져 있다. 이곳은 중요한 군사요충지이며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옛길의 백미’, ‘한국의 차마고도’라고 불리는 곳이다. 길이 문화재가 되면서 국내 처음으로 ‘명승 제31호’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관갑천(串岬遷)’, ‘토천(兎遷)’이라고도 하며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갑천은 용연(龍淵)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가 구불구불 6∼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정(南征) 시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 사투리로서 낭떠러지 아래에 강이 흐르거나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벼랑과는 구별된다. 어떤 관광객은 ‘토끼비리’라고 하니까 ‘토끼가 무슨 비리(非理)를 저질렀나?’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 길은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관도(官道)인 ‘계립령(鷄立嶺-하늘재)’과 연결된 길로 개통된 이후 1,8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과 말발굽이 밟고 지나가면서 바위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비가 오고 난 후에는 거울처럼 얼굴이 비칠 정도이다. 토끼는 지혜롭고 신성한 동물이라 했다. 만약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가는 길에 문경 토끼가 없었다면 그리고 토끼가 길을 인도하지 않았다면 ‘고려’라는 나라는 있을 수가 없다. 길을 찾아 헤매다 지친 상태에서 후백제 왕 견훤의 공격을 받아 전쟁에 패하거나 죽었다면 후삼국 통일은 물론 고려를 건국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를 이은 조선도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한다. 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된 표현일까? 어쨌든 태조왕건은 시각을 다투는 전시(戰時)에 문경 토끼의 도움을 받아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고, 927년 1월에 후백제 땅인 용주(龍州-현 경북 예천군 용궁)를 3월에는 문경 산양에 있는 근품성(近品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며 927년 11월 대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벌어졌던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929년 12월에 개전하여 930년 1월에 승리한 고창전투(古昌戰鬪-고창은 현 경북 안동)를 시점으로 전세를 호전시켜 승기(勝機)를 잡고 후삼국 통일과 고려를 건국하는 대업을 이룩했다. 결론적으로 태조왕건이 대업(大業)을 이룩하는 데 있어 1등 공신은 ‘문경 토끼’이다. 후삼국 세 영웅 궁예, 견훤, 왕건 중에 태조왕건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한 토끼비리 ‘문경 토끼’는 그 또한 ‘역사를 바꾼 주인공’이다. 토끼비리 낙엽/ 이만유 그냥은 아쉬워 나그네 발길에 밟힐지라도 가을 오후 햇볕 따스한 옛길에 누워 긴 세월 남겨진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그림자 드리운 푸른 바윗길에 한 점 붉음을 수놓고 그렇게 떠나고 싶다 고구려 보장왕을 만나려고 김춘추가 지나고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경순왕이 지나고 천년왕국이 무너진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마의태자가 지나고 고모산성 신라 병사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태조 왕건이 길을 잃고 헤매다 토끼의 도움을 받고 왜군의 꽹과리, 징 소리 북소리가 들리고 비분강개한 이강년의 분노가 스며있고 과거 보러 가는 가난한 선비 이야기가 있고 돌고개 넘는 보부상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젊은 선비와 처녀의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가 있고 신라 병사와 국군이 나란히 누워있고 성황당 앞 눈물 가득 외로운 여인이 서 있고 한 무리 건장한 사내들이 지나고 깔깔대는 아이들이 지나고 한줄기 북풍이 불면 천 길 벼루 아래로 떨어져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배를 타고 푸르렀던 아름다운 시절과 폭풍우 치든 날의 두려운 시간을 지나 이제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옛길에 누워 긴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한 생애 찰나의 삶일지라도 감사하며 바람과 함께했던 그날들 그리움 가득 안고 떠나련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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