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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2흙의 소리 이 동 희 유랑 <5> "자네가 대답을 해봐.” 박연은 느닷없이 다래에게 화살을 돌리었다. 화살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는지 모르지만 그가 무작정 따라오라고 해 놓고 그녀에게 그런 연유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요?” 어리둥절한 다래는 모르겠다고 하며 술을 한 주전자 더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잔을 더 나누고는 혀가 꼬부라져가지고 말한다. "뭐 선생님이 저를 아끼시고 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허허허허… 그건 그리여. 허허허허… ” "그리고 부족한 저를 가르쳐 주실라고 하는 거지요.” "허허허허… 잘 아네.” "자주 찾아 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너무 잘 아네. 허허허허…” 다래는 그제서야 호호거리며 다시 스승의 무릎에 올라 앉는다. 그리고 그는 다래를 꼭 껴안는다. 한참 그러다 그녀를 내려 앉히고 술잔을 들고 비운다. 그리고 술을 따라 다래에게 준다. "네. 선생님.” 다래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 바로 마시고 반배를 한다. "호호호호… 고마워요. 선생님.”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이다. 그러나 그가 묻는 말에는 답을 하지는 못한다. 그는 다시 뜸을 들인다. 그리고 잠을 자고 나서 길을 가며 이야기를 하였다. 새벽 닭이 울고 희붐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 길을 나섰다. 큰댓자로 누어 코를 있는 대로 골다가 그가 깨우는 대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따라나선 것이다. 박연은 허위허위 앞장을 서서 쉬지도 않고 걸었다. 햇살이 달 때까지 얘기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마치 쫓기어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땀을 뻘뻘 흘리었다. 얼마를 정신없이 걷다가 그녀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해장이나 좀 하고 가야지요오.” "따라오곤 있는 거지?” "아이 참 선생님도. 호호호호…” "허허허허… ” 박연은 돌아도 보지 않고 웃기만 한다. "가다가 샘물이나 한 바가지 들이키고 가는 게 나을 거여. 허허허허…” "물이 됐든 술이 됐든 좀 숨을 들이고 가요오, 네에.” 그러는 사이 마을 장터 앞을 지나게 되었고 다래는 거기 주저 앉고 만다. 너나 없이 출출하던 터였다. 술국에 해장도 하고 밥도 한 덩이씩 말아 요기를 하였다. 그리고 금방 다시 일어나 걸었다. 얼마를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며 세수를 하고 발을 담갔다. 숲 속의 새 소리가 반기고 물고기가 뛰었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일세.” "좋다는 얘기지요.” "그렇지.” 자연 풍광도 아름답고 삽상颯爽하지만 배가 적당히 부르고 얼근히 술기운이 돌았다. 중천으로 향하고 있는 해가 흰 구름 사이를 들랑 날랑 하였다. 소슬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매일 일에 쌓여 헤어나지 못하고 먹을 갈아 쓰고 상주를 하기에 여념이 없던 생활을 벗어나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또 한 마디 해 볼까요?” "그럴 티여?” 다래는 새타령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물에 들어서서이다. 몸을 흔들어 춤을 추며 만면 웃음을 띄고였다. 그녀는 소리를 계속 뽑을 기세였다. 그는 전날처럼 손바닥으로 그의 옆 자리를 두드렸다. 넓적한 돌바닥이었다. 그녀가 와서 앉기를 기다려 어제 하려던 얘기를 꺼낸다. "자네를 그냥 둬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불러낸 거여.” 너무나 무겁고 근엄한 표정이다. 그의 생각이 얼굴에 다 씌어 있었다. "네에…” 그녀는 얼른 말귀를 알아차린 것이다. 졸지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발만이 아니고 온 몸이 물 속에 잠긴 것 같다. "괜찮은 기여?” "안 괜찮아요.” 박연은 고개를 한참 끄덕끄덕하다가 다시 말한다. "자네 인생은 자네가 사는 게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 없는 게여. 내가 뭐라고 자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선생님…” 박연은 다래의 얘기를 손을 저어 제지하며 말을 계속하였다. "내가 자네 소리에 대하여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여 왔지만 자네의 사생활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뭐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지.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나. 금쪽같은 자네에게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러나 그러나 말이여. 그것은 사랑이 아니여. 사랑이 아니고…” 그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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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1흙의 소리 이 동 희 유랑 <4> 내려가는 큰길로 접어들고부터는 한참 힘을 내어 걸었다. 발길이 가볍고 머리가 개운하였다. 손목을 잡지 않아도 여인은 사내의 보폭을 잘 따라 왔다. 주저 앉았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사내는 허위허위 달리다 싶이 하였다. "얘기 좀 하면서 가요 선생니임.” 조금 천천히 가자는 것이다. "잘 따라오는 구먼 그래야.” "제가 선생님 나이 절반도 안 되는데 못 따라갈까보아 그러세요?” "그래야?” 사내는 힘을 더 내어 걷기 시작하여 한참 앞서 가며 말하였다. "얘기 있으면 던져 봐 어서.” "그래요. 좀 기다리세요.” 다래는 치마를 벗어들고 고쟁이 바람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는 허리를 쥐고 색색거리며 부지런히 따라부치고 있었다. 박연은 발걸음을 줄이며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참으로 귀여운 그녀의 용모와 노래소리만 떠올리며 걸었다. "선생님 언변에 중이 훌떡 넘어 갔어요.” 스님은 그들에게 곡차까지 대령을 하였던 것이다. 아까 먹은 주기가 도는 것이었다. "자네한테 넘어간 게 아니구?” "그런 땡중은 아니던 데요.” "허허 그려? 어떻든 갈 길이 먼데 거기서부터 주저앉으면 안 되지.” "잘 하셨어요, 선생님. 어서 앞장을 서세요.” "앞만 보고…” "예. 호호호호….” 그녀는 고쟁이를 끌어잡고 웃어대며 걸었다. 정말 앞만 보고 숲만 보고 걸었다. 해가 다 기울고 어둠이 묻어왔지만 계속 걸었다. 어디 가서 잘까, 뭘 먹을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니 되지 않았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빨리 가야 했고 잘 다녀 와야 했던 것이고 무사히 제 자리로 복귀를 하여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걱정도 전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 믿고 아끼고 그리고 사랑… 글쎄 극진히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해가 꼴딱 지고도 얼마를 더 가다가 멀리 희미한 주막등酒幕燈을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쉬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몇 번 물어보기도 하여 어림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국밥에 반주를 한 잔씩 곁들여 저녁을 게눈 감추듯 하고 잠자리를 정하는 대로 술을 한 잔 더 시켰다. 두 사람에게는 노자가 넉넉하였다. 흥청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안주는 주는 대로 묵이었다. "날이 새면 또 바로 나서자고.” 잔을 부딪으며 박연이 말하였다. 그러니 조금만 하고 자자는 것이었다. "제 염련 마세요.” "그래도 될까. 발병이 안 놔야 할텐데…” 다래는 자신의 다 부르튼 발을 감추며 술을 따른다. "병나면 업고 가셔야지요. 뭐.” "누가 업어야 되겠나?” "거야 뭐 제가 업어야 되겠지만… 호호호호…” "그래야. 형편대로 해야지. 허허허허…” 그러다 한 마디 더 한다. "방 하나 더 달라고 하여 가서 편히 자아.”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꼭 끌어안고 자야지요. 호호호호…” "그래서 쓰나?” 박연이 반배를 하며 눈을 흘기었다. "그러면 도로 올라갈래요.” 이번엔 웃지도 않고 말한다. "그건 안 되지.” "그렇지요?” "그러면 저쪽 한 옆으로 자아.” "싫어요. 선생님 팔베개하고 잘래요.” "어제 밤 그랬잖어? 그러면 안 돼야.” 그러자 이번엔 다시 그의 무릎에 올라앉아 교태를 부리며 허락을 받고야 말 기세다. 박연은 눈을 감고 술잔을 주욱 들여 마시고 다시 다래에게 따르며 내려 앉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와 이런 행각을 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좀 더 있다가 그의 향리에 다녀 올라오며 말하려 하였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왜 자네와 같이 졸지에 나그네 길을 떠나느냐 하면 말이여.” 다래는 잔을 얌전히 두 손을 모아 받으며 말한다. "그건 말씀 하셨잖아요. 선생님.” 그랬다. 며칠 같이 지내며 소리를 다듬어 보자고 하였다. 그녀는 몸을 빼내는 것이 어려웠지만 두 말도 않고 그러겠다고 따라나선 것이었고. 하늘과 같은 스승의 뜻을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또 무엇이 있어 말하려고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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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0흙의 소리 이 동 희 유랑 <3> 피리를 불다가 춤을 추다가 같이 따라 소리를 하다가 사내는 신이 났고 여인은 소리를 있는 대로 다 주어 섬기었다. 모르는 것은 몰라도 아는 것은 다 끌어다 대었다. 잘 못 하는 것도 있고 틀리는 것도 있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시부적시부걱 잠시도 쉬지 않고 불러대었다. 틀린 것은 다시 하였다. 중천에 있던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철량한 바람은 연락부절로 불어대었다. 한여름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늘이 있었고 바람이 있었다. 조금 출출하긴 하고 목이 마른 대로 다른 수는 없었다. 더 하자는 말도 없었고 그만 하자는 말도 없었다. 또 힘들거나 어렵거나 싫증이 나지도 않았다. 여인은 노래를 계속하였고 사내는 춤을 추다가 장단을 맞추다가 하였다. 급할 것도 없고 부담이 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관객 앞에서보다 조심스러웠고 어떤 가객보다 귀한 처지였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화답을 하였다. 얼마를 더 그렇게 소리를 하던 다래가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더 해요 선생님?” "다 한 기여?” 박연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밤새도록이라도 할 수 있지요. 몇날 며칠이라도 할 수 있어요.” "해도 안 졌는데 밤 새울 것까지는 없고, 좀 쉬었다 해야.” 그만 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더 하자는 얘기도 아니었다. "참 선생님은 천상 선생님이셔요. 호호호호…” "허허허허… 누가 아니라는 사람이 있는 개비여. 좌우간 이제 좀 쉬어.” 그렇게 말하며 다시 그의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와서 앉으라는 것이다. 다래는 쪼르르 그의 옆자리로 와서 풀밭이 아니고 무릎으로 올라 앉으며 또 목덜미를 팔로 휘감는다. "누가 보면 어쩔라고 그랴.”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래요, 선생님도. 아무도 없는 무주 공산이구먼요.” "저 아래 동네가 환히 바라보이잖어. 개짖는 소리도 다 들리고.” "호호호호… 닭 우는 소리도 들리는 데요.” "그러게 말이여.” "호호호호…” 다래는 마구 호들갑스럽게 웃어대며 박연의 목덜미와 수염을 입술로 부벼대며 더욱 진하게 교태를 부린다. 그리고 박연은 또 그런 다래를 한참 보고만 있다가 한 마디 하였다. "애 썼어.” 그 말에 다래는 무릎에서 내려 앉으며 물었다. "잘 했다는 것은 아니고요?” "오늘 다 끝낼려고 그러는 기여?” 역시 스승은 잘 했다고 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장단을 치고 춤을 추고 피리를 불고 하는 것과는 별도로 박연의 의견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다래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생각 없이 있는 대로 불러댄 것이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두서 없이 제풀에 신이 나서 놀아본 것이고 있는 대로 끌어다 붙인 것이었다. 다 부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은 그동안 술자리에서 술이 취해 부른 소리밖에 없기도 하였던 것이다. 스승을 멀리 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일어나 성 둘레를 따라 걸었다. 박연은 다래의 손목을 잡고 흔들며 걸었다. 여인의 혈맥은 팔딱팔딱 뛰었다. "정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예요.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그래. 몸을 잘 빼었어.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산천경개나 즐기자고.”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무슨 소리여, 이제 와서. 나만 믿고 따라와.” 박연은 그녀의 손을 놓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적사 앞을 지났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야지.” 스님에게 소맷자락이 한 번 스치는 것도 오백 전생의 인연이라고 하였는데 그냥 지나갈 수가 있느냐고 하였다. 스님은 옳은 말씀이라고 하면서 손수 가꿨다는 결명자차를 진하게 울여 따른다. 송화가루로 만든 다식도 한 바가지 내왔다. "노랫소리 잘 들었습니다.” 스님은 그런 말도 하였다. "그러셨어요? 그래 어떻든가요?” 다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뭐 노래야 잘 모르지만 하루 종일 호사하였습니다.” "정말 그러셨어요? 그러면 제가 한 마디 더 해도 될까요?” 다래는 대답을 들어도 보기 전에 회심곡을 불러대기 시작하였다. 일서서서 노래를 하다가 밖으로 나가 법당 앞에 있는 탑을 돌면서 계속하였다. 스님도 어깨를 들썩들썩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저녁을 지을테니 공양을 하고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쌀 한 되 반 되도 안 되겠지만 공양을 시주하겠다고 하고 산사를 내려왔다. 빨리 가던 길을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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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9흙의 소리 이 동 희 유랑 <2> 나무도 보고 숲도 보면서 한참 더 걸었다. 낮잠을 자다 깬 다래는 억지로 박연이 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그러나 얼마를 더 안 가서 샛길로 접어들었다. 독산성 보적사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거기서 다시 한참 산길을 걸어서 산사에 이르렀다. 멀리 많은 인가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이었다. 지금의 오산시 독산성로(지곶동) 세마산이다. "불공을 드리게요?” "그러지 뭐. 좀 쉬기도 하고.” 박연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절로 들어섰다. 오래 된 낡은 절이었다. 두 사람은 세 부처를 모셔 놓은 법당으로 들어가 꿇어 엎드려 절을 두 번 세 번 하였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박연은 다래가 헛된 욕정의 굴레를 벗고 가인으로 대성하길 빌었다. 그리고 지금 가는 길, 무사히 잘 갔다 오길 축원하였다. 그다음으로 아버지 어머니 묘소가 잘 보존되고 또 그리고 명계에서 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였다. 박연은 다래가 먼저였다. 지금으로선 솔직히 그랬다. 다래도 뭘 빌었는지 엎드려 절을 하며 한동안 중얼중얼 하였다. 법당을 나오다가 주지로 보이는 노스님을 만났다.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나무관세음보살… 합장을 하는 스님과 절 앞 뒤를 돌아보았다. 백제 때(아신왕 10년)에 나라에서 창건했다고 하고 저쪽 뒤로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쌓을 때 지은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절 이름을 어디에 써놓은 데도 없고 다만 전설 한 자루를 들려준다. 어느 춘궁기에 먹을 것이 쌀 한 되밖에 되지 않던 노부부가 그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집에 돌아갔더니 곳간에 쌀이 가득하였다. 이를 부처의 은혜로 알고 부부는 그 후로 열심히 공양하였다. 여기에서 보적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뒤에 있는 옛 독산성으로 올라갔다. 아늑한 분지, 동네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올라왔다. "야아아 좋다! 정말 제격이네.” 박연은 두 팔을 벌리고 감탄하며 소리를 질렀다. "정말 시원하고 좋네요.” 다래도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제격은 뭔가요?” "하하하하하… 그렇게 맞출 수가 없네.” "뭐가요? 뭐가 그래요?” 박연은 한참 더 너털 웃음을 웃다가 앉음새가 좋은 풀밭에 편안하게 앉는다. 그리고 다래도 그 옆으로 앉으라고 손바닥을 두드린다. 다래가 그의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알았어요, 선생님. 호호호호…” "허허허허…” "선생님은 천상 선생님이셔요.” "그래서 어쨌다는 기여?” "꼼짝을 할 수가 없다는 기지요. 호호호호…” "그리여? 하하하하…” 다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일어선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해는 중천에 떠 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새들은 소리를 다 죽이었다. 네가 나를 볼 양이면 심양강 건너와서 연화분蓮花盆에 심었던 화초 삼색도화三色桃花 피었더라. 이 신구 저 신구 잠자리 내 신구 일조낭군一朝郞君이 네가 내 건곤乾坤이지 아무리 하여도 네가 내 건곤이지 다래가 목청을 돋우어 ‘달거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월이라 십오일에 망월望月하는 소년들아 망월도 하려니와 부모봉양 생각세라 이 신구 저 신구…는 후렴이었다. 2월 3월로 이어지는 월령가月令歌와 남녀간의 애정과 자연 풍광을 노래한 잡가이다. 적수단신赤手單身 이내 몸이 나래 돋힌 학鶴이나 되면 훨훨 수루루룽 가련마는 나아하에 지루에 에도 산이로구나 경상도 태백산太白山은 상주尙州 낙동강이 둘러있고 전라도 지리산智異山은 두치강豆治江이 둘러있고 충청도 계룡산은 공주公州 금강錦江이 다 둘렀다 나아하에 지루에 에도 산이로구나. 나아하에 지루에…도 후렴이었다. 박연은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봇짐 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다. 다래는 레퍼토리를 바꾸었다. 태평가太平歌였다. (이랴도) 태평성대太平聖代 저랴도 태평성대로다 요지일월堯之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니 놀고 놀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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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8흙의 소리 이 동 희 유랑流浪 <1> 아무래도 무리하고 무모한 길이었다. 박연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혼자는 몇 번 오르내렸지만 나약한 여인을 끌고 같이 먼 길을 간다는 것이 큰 짐을 잔뜩 지고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친 걸음이었다. 무사히 잘 다녀오게 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가 늘 그러는 것처럼 하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것이다. 집에서도 그랬고 관직으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부모에게도 그랬고 아내에게도 그랬다. 공부를 할 때 스승에게도 그랬고 유생들에게도 그랬다. 피리를 부는 데도 그러하였고 짐승에게도 그리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묘 앞에 모셔 놓은 호랑이 친구에게도 그리하였다. 산천초목 무엇에나 그렇게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묻어 준 그 친구에게도 문안을 하리라, 생각하였다. "뭘 그렇게 많이 생각을 하셔요?” 다래가 그의 손에 끌려 따라오며 물었다. 힘이 드는지 아양을 떨고 웃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자네 생각 말고 무슨 생각을 하겠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허허허허… 잘 다녀와야 될 터인데 걱정을 하고 있었어.” 전혀 딴 얘기는 아니었다. "호호호호… 그렇게 걱정이 되셔요?” "걱정을 안 해도 되겠나?” "호호호호… 염려 마셔요. 길에서 주저앉지는 않을게요. 그 대신좀 쉬었다 가요.” "그래야지. 허허허허… 그래, 그럼.” 참으로 귀엽기도 하고 착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쉬려고 하였다. 줄곧 걷기만 하여 목덜미에 땀이 흥건했다. 다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렸다. 수원 근방까지 온 것이었다. "어디 좀 쉬고 요기는 좀 더 가다가 할까?” "그래요, 선생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래는 아무 데고 퍼질러 앉는다. 그도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을만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처음부터 너무 강행군이지?” "선생님은 따라갈 테니 염려 마셔요.” 숨을 계속 헐떡거리면서 말은 그렇게 하였다. 두 사람은 한참 그렇게 땀을 들이고 다시 걸었다. 박연이 잡아 끈 것이다. 몇 번 내를 건느고 산을 넘었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나절이 겨워서 지나게 된 거리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었다. 병점餠店, 떡 전골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저앉았다. "많이 걸었네. 좀 쉬었다 가지.” "좋지요.” 다래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털썩 앉는 것이었다. 우선 떡을 한 쪽씩 떼어 주는 대로 난전에서 손에 받아먹었다. 콩나물국에 물김치도 벌컥벌컥 마시었다. 요기가 되는 대로 마루로 들어앉아술도 한 주전자 시키었다. 첫잔은 그냥 마시고 두 번째 잔은 서로 부딪었다. "우리 잘 해보세.” "네에. 선생니임” "허허허허… ” "나는 집채 무너지는 줄 알았어. 허허허허…” 박연은 참으로 기특한 다래를 바라보고 계속 웃으며 말하였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있던 다래가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고 배를 잡고 웃어댄다. "호호호호…” 볼수록 기특하고 귀여웠다. "너무 무리한 것 같애. 되는 대로 가자고.” 다래는 무슨 대꾸 대신 잔을 들고 계속 웃기만 하다 스승에게 한잔 가득 따라 준다. "호호호호… 언제는 선생님 하고 싶은 대로 안 하셨어요?” "허허허허… 그랬던가?” 다래는 불평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였다. 그러나 박연의 마음 한구석은결리었다. 아픈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궁중의 여악을 폐하도록 하였던 것이고 그녀는 졸지에 낭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보다 시대와 나라와 명분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늘 푼수가없는 도량이기도 하지만 늘 그랬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술을 두어 잔씩 더 하였다. 국밥을 한 그릇씩 하고는 안쪽으로 들어가 눈을 붙이고 한 심씩 잤다. 그리고 깊은 잠이 들기 전에 일어나 다시 행군을 시작하였다. 박연은 눈을 붙이기 전에 길 안내를 받았던 것이다. 한참 가다가 있는 보적사寶積寺라는 고찰 그리고 그 주변 경관에 대해서 알아두었다. 거기서 쉬기도 하고 또 다래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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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7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5> "뭐가 그래요.” "이 세상에서 자네가 제일 귀하다는 거여.”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내가 왜 정말이 아닌 말을 말하겠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사나이의 가슴을 끌어안고 목덜미를 휘감는 것이었다. "저는 요오, 이 세상에서 선생님이 제일 높으신 어른이어요.” "높으신 어른에게 이러면 되는 기여?” "그럼요. 뭐가 안 될 것이 있어요. 싫으셔요?” "높은 것 하고…” "좋은 것 하고는 어떻게 다르냐고요?” "……” "그야 말해 뭘 해요? 제일 좋아하는 거지요 뭐.” "뭐는 뭐여?” 그녀는 다시 더 가슴속을 파고들며 끌어안는 것이었다. 턱수염에 입술은 마구 문지르며. 저고리를 다 풀어헤친 채로였다.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가 술에 취할 때마다 그랬다. 그리고 언제나 그가 자제력을 발휘하여 사태가 더 진전되지 않도록 몸을 빼었다. 목석이 아닌 그도 무척 힘들었지만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사도도 무너지고 모든 것이 허무러진다고 생각하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늘 말하기도 했다. 자신이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다. 신주처럼. 마지막 보루처럼. 어쩌면 그런 것을 믿고 그녀는 또 그러는지 모른다. "잠은 깬 기여?” "예. 잠도 깨고 기운이 났어요.” "그럼 일어나. 일찍 길을 나서자고.” "예에.” 대답은 바로 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한참 동안 더 꾸물거리고 있는다. 그러다 양팔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매무새를 차리는 것이었다. 두 훼 닭이 울고 어둠이 가셔지기를 기다려 길을 떠났다. 짐을 가볍게 꾸렸다. 괴나리봇짐 속에 무게 나가는 것은 다시 한번 버리고 미투리와 노자 그리고 피리 한 자루만 챙기었다. 다래의 짐을 그가 조금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그녀가 끌고 온 거문고는 객줏집 벽장 속에 넣어 두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걷다가 자다가 가는 데까지 가려는 것이다. 다래는 거문고를 걸머지고 가겠다고 하였지만 그가 말렸다. 사실 이렇게 결행을 한 목적이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고 그것을 어떻게 하고 하는 데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 구실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또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그녀의 몸을 빼내자는 것이다. 누가 있어 그 사생결단의 치정극에서 헤어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설사 왕이라 하더라도 왕자들의 얽힌 관계를 풀 도리가 없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면 그 수렁-꿀과 같은 감미로운-바닥 속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래는 그런 굳은 의지가 없었고 아니 아예 의지 자체가 없었다. 꿀사발을 누가 빼앗지 않고는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그가 아니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라 하더라도 아무리 신임이 두텁고 개혁 정책을 입안하는 실세라 하더라도, 설사 백전노장이라 하더라도, 덤터기만 쓰기 십상인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도 자청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걸음만 재촉하였다. 먼동이 터 오고 퍼언하게 길이 펼쳐졌다. "부지런히 가야 해야.” "알았습니다요.”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다래가 여전히 아양을 부렸다. "한나절 될 때까지 가다가 요기를 하고…” "한심 자고요.” "그래 그러고 해거름에 걷는 게 좋을 거여.” "잠은 또 자야지요.” "그럼 잠은 자야지. 다래 소리도 들어보고…” "그럼 또 한잔해야지요.” "해야지.” 그의 걸음은 가속도가 붙어 빨라졌다. 산과 길과 물이 이어졌다. 고개를 넘을 때는 멀리 우거진 숲이 보이었다. 그럴 때마다 땀을 들이고 쉬며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무만 보았어. 숲은 못 보고.”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이 몹시 찬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허허허허…… 멀리 보아야지. 앞만 보고 살았던 거여.” 울울창창한 숲을 바라보며 숨 가쁘게 몰아치던 일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갈급하게 지내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억지로라도 복대기탕 속에서 벗어난 것이 참으로 잘 한 것 같다. 그랬다. 물론 다래에게도. 그는 끙, 힘차게 소리를 내며 일어나 다래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지런히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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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6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4> 지친 심신을 눕힌 채 정신없이 자고 있던 다래는 왜소한 남자의 품을 다시 끌어안으며 의식을 차렸다. "조금 더 자도 돼요?” 그도 깊은 잠을 자다가 깨며 끌어안고 있는 여인의 팔을 풀어준다. 그리고 큰댓자로 두 팔을 쭉 뻗었다. 여인도 옆으로 널부러지며 하품을 한다. "그래 푹 더 자. 실컷 자고 가야지.” 여인은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된 듯 흐트러진 몸을 추스른다.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인 건 알고 있는거여?” "아아이. 제가 뭘 어쨌지요?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네요.” "으음.” "선생님은 그런 것도 가르쳐 주셔야지요.” "가르칠 게 따로 있지.” "호호호호…” 그러며 다시 남자를 힘껏 끌어안는다.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기도 하였다. "다 가르쳐 주셔야지요. 호호호호…” "으음. 으음.” 그런 것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래의 행위가 싫다기 보다 참고 견디기가 힘든 대로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여러날 같이 지내야 하는데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 자아.”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다래와의 얼핏 이상한 행각이 알려지면 누가 이 사정을 이해할까, 아마 그 자신 이외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한 사내의 흑심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탓할 것이 뻔하였다. 본인 다래 자신도 겉으로는 표시를 내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누구보다도 그녀는 믿고 있었고 언제나 자신의 신념을 굽힌 적이 없었다. 옳은 일이라고 판단되면 누가 뭐래도 밀어붙이는 그였다. 혈육보다 더 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다래였지만 여악을 금하는 상소를 그 자신이 하여 하루아침에 궁중 출입을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예악의 논리와 국가 대계의 원대한 그림 속에 악도 중요하지만 더 앞에 세워야 하는 것이 예였고 그 구도構圖에서 박연의 결단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이에는 그의 다래에 대한 하애下愛가 발휘된 것이었다. 물론 명분은 따로 있어 내세운 대로지만 속마음은 사랑스러운 그녀가 너무 유명해지고 끝간데 없이 널을 뛰는 인기라고 할까 세간의 관심을 주저앉히고자 한 것이다. 장안 한량들이 그녀를 가만 두지 않았고 왕자들도 치정관계를 벌이었다. 세종의 정처인 소현왕후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이 물량공세를 취하고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 영빈 강씨의 아들 서장자庶長子 화의군和義君 이영이 서로 쟁탈전을 벌이었다. 친형제들이었고 아끼는 왕자들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하고 시간적으로는 뒤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런 불행의 사태를 막고자 한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라기보다 너무나 아끼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음악의 재질을 발휘하는 데는 꼭 궁중만이 아니고 어디서든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불편한 조건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장안의 사기四妓로 꼽히고 그 중에서도 으뜸의 자리매김을 하던 그녀의 명성이 꺾이지는 않았지만 거덜먹거리지를 못하게 되었고 떵떵거리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의 첩이 되고 누구의 소실이 되고 동가숙 서가식 하며 곡예를 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름난 기녀들도 사정은 같을런지 몰랐지만 다래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대단히 신통한 것은 궁중의 여악을 폐하도록 상주하고 실행한 것이 누구인 것을 알고도 불평 한 마디 언짢은 소리 한 마디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먼저 말하지 않았고. 뒤에도 그랬다. 미안하게 됐다든지 일이 그렇게 되었다든지. 어디까지나 도덕 군자로서 그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바다같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어떻든 이 세상에 이 천지에 그가 아니면 그녀를 구하여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순한 한 여인이 아니라 진주 같은 보물 같은 나라의 귀인이었던 것이다. 박연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처롭고 귀여웠다. 눈을 감았다. 이미 각오한 일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녀를 구하고 살려야 하는 것이다.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느냐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도 그렇고 그녀도 그랬다. "그래.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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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5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3> 며칠 후 박연은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명분은 부모님 묘소를 참배한다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묘가 허물어졌다는 말을 듣고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몸을 뺄 수 없는 사정이었다. 청을 넣으면 안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통고를 하고 퇴청을 하였다. 혹시 왕에게 고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누가 될 것 같아 그런 언로도 택하지 않았다. 뒤에 그를 찾고 사정을 알면 오히려 칭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였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나라 일에만 매달려 있던 그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조만간 그의 빈자리를 알고 찾을 것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모르지만 어떻든 터럭만큼도 누가 되고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구우일모九牛一毛만치도. 부모님의 일은 구실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데 다른 무엇보다도 좋은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라기보다 다른 구실은 명분이 약하였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 묘 생각이 마음 한쪽을 짓누르고 있었다. 집안 조카에게 부탁을 하고 아들 중우를 보내어 보수를 한다고 하였지만 늘 죄스러웠다. 직이 뭐고 벼슬이 뭐길래 아버지 어머니의 잠자리를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단 말인가. 다래의 일로 그런 생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의 계획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녀가 부모보다 먼저였던지 모른다. 그렇게 빈정대도 할 말이 없다. 그만큼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없이귀하게 대하며 끔찍하게 여겼다. 어느 자식보다 누구보다 소중한 애물이었다. 그에겐 제자란 말이 그렇게 살갑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을 다 주고자 했고 아는 것을 다 가르쳐주고자 했다. 어떤 것이나 무엇이나 다 쏟아 그녀의 입속에 몸속에넣어주고 싶었다. 그것은 스승이다 제자다 라기보다 더 깊고 높은 관계였다. 관계를 초월한 무엇이었다. 그런 존재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그동안 누누이 얘기하여왔고 또 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 것 같지만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떻든 그녀를 위하여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참배를 구실로 하여 잠시 일을 내려놓고 길을 떠났다. 잠시가 될지는 몰랐다. 뭐가 먼저였는지 따질 것은 없고 묘소 보수를 확인하고 참배를 하는 것이 구실만은 아니었다. 하사 받은 안마는 신주처럼 모셔놓고 괴나리봇짐을 지고 나섰다. 그는 말을 탈 수가 있었지만 또 한 사람은 말을 타보지 못한 것이다. "고불 대감처럼 소를 탄다면 모를까…” "그렇군!” 박연은 그녀의 얘기에 동감이었다. "유람 가는 게 아니여.” "네. 알아요.” 고생길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고행이었다. 변장을 한 것은 아니고 평복을 입고 보따리 속에도 관복은 없었다. 다래도 편하고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입고 준비하도록 하였다.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았다. 다래가 몸을 빼는 데는 무척 힘이 들었다. 가느니 못 가느니 며칠 동안 몇 번 뒤 변동을 치다가 결국 야반에 도망을 쳐 온 것이다. "도리가 없었어요.” 양쪽에서 때려죽일려고 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박연은 생채기 투성이 다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참으로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고맙네. 내 말을 들어줘서.” 목숨을 걸고 와 준 것이었다. 며칠을 기다린 말죽거리 객줏집에서 만났다. "선생님 말씀인데요.” 다래는 그의 넓적한 품에 안기며 색색거리는 것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여인은 벌써부터 지쳐 있었다. "늦은 김에 푹 자고 가자고.” "그래요. 선생님!” 그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을 감고 꼬시라지는 것이었다. 지친 여인의 나약한 여체를 안은 채 그도 눈을 감았다. 참으로 귀엽고 영명한 여인이었다. 자신을 하늘처럼 받드는 여인, 이 세상 끝 어디에도 없는 영롱한 꽃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였다. 귀엽고 아름다운 것은 그녀의 미모뿐이 아니었다. 행동뿐이 아니었다. 첫눈에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였다. 됐다 바로 이거다, 그는 그녀의 소리를 듣고 첫 마디에 인정을 하였다. 말로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느낌으로 전광석화처럼 인정을 하고 무릎을 쳤다. 그녀는 그가 만든 편경의 틀린 음을 잡아내 주었다. 그가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는 천재적인 기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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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44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2> 박연은 다래가 따라주는 술을 몇 잔 더 마시고는 다시 말하였다. "그냥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잘 있나 어쩌나 하고.” 그가 여악을 금하는 상주를 올린 뒤로 다래는 궁중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그 뒤 여러 소문이 많았던 것이다. "호호호호…… 절 혼내주려고 오신 줄 알아요.” 다래는 고개를 푹 떨구고 시무룩한 얼굴로 술을 계속 따랐다. "뭐 그렇다기 보다… 자네하고 한잔하고 싶어서….” "죄송합니다. 마음대로 잘 안되어요.” "마음대로 되면 인생이 아니지.” "그런가요? 호호호호…” 다래는 그러며 술을 따르고 요염하게 웃어젖히며스승에게로 바싹 다가 앉는다. "죄송해요. 정말 잘 할게요. 선생님 자주 못 뵈니 자꾸 허트러지는 것 같아요.” 그러고는그의 무릎에 앉으며 교태를 부리는 것이었다. 상채와 팔다리를 주무르기도 하고 전에 없이 더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이러면 대작을 못 하지.” 박연은 싫지는 않았지만 아니 대단히 기분이 좋고 전신의 생기를 느꼈지만 말은 다르게 하였다. 그녀는 계속 아양을 떨고 생글거리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극하였다. 음탕한 웃음이나 몸짓이 아니고 의녀처럼 환자를 만지고 주무르는것이었다. 어떻거나 서로가 믿고 존경하고 애틋한 시선을 마주치면서였다. 좌우간 그동안의 쌓였던 피로가 가셔지고 활기가 돋는 것이었다. 몇 년째 하루도 영일이 없이 격무에 시달렸던 것이다.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일을 찾아서 만들어 자청을 한 것이고 거기에 대한 보상은 생각도 하지 못하던 터에 너무도 황공惶恐한 왕의 하사가 내려졌고 그 감정을 나누고자 찾은 다래에게서 또 너무도 넘치는 환대歡待를 받고 누리고 있는 것이었다. "왜 안 하던짓을 하고 그래야? 어서 내려앉아요.” "호호호호… 잔을 주셔야지요.” 그래야 내려 앉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으음.” 그러나 대뜸 그녀에게 잔을 건네지는 않고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노래는 좀 늘었겠지?” "모르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뭘 할까요?” "거문고는 없지?” "대령하겠습니다.” 다래는 금방 거문고를 갖다 놓고그 옆에 앉으며 뜸도 들이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거문고 병창竝唱, 농부가 창부가였다. 준비가 안 된 채 목소리를 높이니 째지고 고르지 못하였다. "그동안 뭘 한 거여?” 다래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얼굴을 붉히며 사죄를 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소리가 굳어지면 안 돼야. 손도 그렇고. 매일 다듬어야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로 되는 게 아니여.” "다음 뵐 때까지 잘 다듬어 놓겠습니다.” 박연은 한참 다래를 바라보다가 잔을 쥐여주는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얌전히 꿇어앉기를기다려 술을 넘치도록 따랐다. "나랑 같이 며칠 지내면 어떨까?” 너무도 의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래는 놀라는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았지만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어.” 같이 지내면서 지도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즉흥적인 생각이었지만 대단히 단호하였다.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래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술부터 다시 따라 반배를 하였다. 연지 장죽을 지우고 두 손으로 곱게 바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어.” 박연은 잔을 받아 들고 다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내 말을 들어줘서.” "선생님 말씀인데 무엇이라도 따라야지요.” "따르는 게 아니여. 앞서가야지.며칠 말미를 만들어 보겠네. 이왕이면 산천경개 좋은 곳으로 가서…” "네? 네.” 박연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다. 물론 달래의 흐트러진소리를 다듬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그녀의 생활 태도를 바로잡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주지육림 속에 빠져 있는 기생이 아니라 고고한 명기 명창의 길을 걷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으으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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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3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1>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너무나 값지고 귀한 선물이었다. 무엇이 이보다 더 한 선비의 마음을 넘치게 채울 수가 있을까. 감동이었다. 감읍하였다. 말이 막혀 울먹이고 있다가 소리 없이 울었다. 돌아서서 울다가 주위를 상관하지 않고 훌쩍거렸다. "왜 무슨 일이 또 있어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동료가 걱정스레 물었다. "좋은 일이 아닌가요?” "너무 좋아서요.” "그렇게나요?” "자꾸 눈물이 나네요.” 박연은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연일 과로가 누적되어 쓰러지기 직전에 소식을 접하였다. 자다가 꾼 꿈같았다. 몸이 떨리었다. 50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쓰고 있던 상주 청원서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전적만 들여다보고 먹만 갈 뿐이었다. 자꾸 먹이 손에 묻고 생각이 흐트러졌다. 뭐라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은데 생각뿐 첫 문맥이 잡히지 않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렇게 시작하였다. 그리고 솔직히 눈물이 나고 떨리는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였다. 그러나 고개를 저으며 접었다. 어떻게 이리도 설레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더욱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친밀하게 시작하다가 다시 지웠다. 그저 무언으로 중후하고 간절한 표현을 대신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자신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한 마디쯤 말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또는 감사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든 마음의 표시를 하려고 하였지만 생각 같지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채 서성거리던 박연은 오후가 되자 더욱 허둥대다 퇴청을 하였다. 어디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으로 갈 생각은 아니었고. 한동안 이리 저리 쏘다니다가 정처를 정하였다. 다래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만나서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다. 만나면 해 줄 말이 있었다. 낮잠을 자고 있던 다래가 주막으로 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둑어둑하여서 야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선상니임!” 날씬한 몸매를 사뿐 사뿐 움직여 스승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그동안 잘 계셨지요.” "임금님 만나기보다 더 힘드네.” 혼자 무료히 낮술을 마시고 있던 박연이 다래에게 말하였다. "그걸 모르셨어요? 임금의 아들 셋이 저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고 있어요.” "무슨 신소리를 하고 있는 거여.” "하늘같은 선생님에게 제가 왜 신소릴 하겠어요?” 다래는 장안의 소문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계속 절을 하면서였다. "아니 그런데 무얼 하는 거여?” 웬 절을 또 하느냐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계세요, 사부님!” 다래는 큰절을 두 번이 아니고 세 번 네 번을 하고 다시 꿇어앉는 것이었다. "아아니 내가 뭐 관운장이라도 되는기여?” "무슨 말씀이세요? 공자님 맹자님보다 더 위시지요. 저에게는 임금님보다 하느님보다 높으신 어른이신걸요!” 성인에게 절을 하는 예절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인 박연은 자기 자신이 어떤 반열에 있는 줄은 잊은 채 흐뭇한 웃음을 쏟아놓았다. "하하하하… 참으로 대견한지고, 나에게 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렸다.” "제가 왜 허튼소리를 하겠습니까? 누구 안전이라고.” "누구는 누구여 시골뜨기 불통 선비지. 선비는 맞나?” "아아이 선생님 하늘같은 스승이신 사부님! 웬 청간이셔요?” 다래는 여전히 단정한 자세로 꿇어앉은 채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아양이 아니고 교태를 부리는 것이었다. 교태가 아니고 예의를 다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방금도 평원대군과 잠을 자다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쁘게 하고 와야지요.” "그래 그래야지. 잘 했어. 정말 이쁘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로 다듬어 온 미모를 절감하고 있었다. 향내 분내가 진동하였다. "좌우간 편히 앉으시게.” 그제서야 박연은 다래에게 편히 앉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용건을 말하였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같이 술이나 한잔 하려고….” 그러며 하사받은 안마 얘길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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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2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 <5> 그것은 왕이었다. 임금이었다. 맹사성이 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시로 읊은 것-역군은 이샷다-처럼 임금의 은혜였다. 은혜래도 좋고 그런 뜨겁고 크나큰 바위와 같이 불덩이와 같이 햇살과 같이 그를 누르는 어떤 힘이었다. 빛과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 누리고 베푸는 것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을 하고 몸을 바수는 것이었다. 자신을 다 쏟아붓는 희열이었다. 어떤 대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계산에서 다른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하고 수고하는 즐거움이었다. 그것을 받아주고 인정하여 주는 보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는 능동적으로 결행을 하고 책임도 그가 졌다.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임하면서 가르치고 타이른 대로 스스로 행하고 실천하여 본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값진 일인가. 아름다운 일인가. 그 자리같이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하고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나라에 관직을 맡고 있어 무슨 일을 하든 어느 곳에 가 있든 늘 하늘이 내린 하늘 같은 임금을 생각하였다. 그가 문학으로 있으면서 무엇을 가르쳐서가 아니었다. 백성으로서 신하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며 임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어버이를 하늘같이 스승을 하늘같이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배어있는데 그렇게 실행하였었는데 이제 부모가 되고 스승이 된 그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었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 사재부정司宰副正 노중례盧重禮 교수를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 겸 악학별좌樂學別座에 제수除授되는 등 여러 일을 맡아 하였는데 어디서 무얼 하든 직무에 매달려 퇴청할 줄 모르고 끼니를 거르며 밤을 새우기를 밥 먹듯이 하여 끊임없이 새 정책을 입안하고 발의를 하였던 것이다. 박연이 쉰이 되던 해 세종 9년(14237) 석경石磬을 만들었고 다음 해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53세 때는 그동안 정신없이 밀어붙이던 개혁의 상주는 봇물이 터지듯 마구 쏟아졌다. 2월에 향사享祀 때 악율을 바로잡으라는 글을 올리고 3월에 아악의 음절을 조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7월에 봉상 소윤으로 아악에 향악을 쓰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 9월에 헌가를 고제대로 만들라는 글 11월에 조회악공은 공사비자公私婢子로 충당하라는 글, 12월에 조회악을 조정하라는 글, 악현樂懸을 고제대로 만들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토고土鼓를 만들라는 글, 당상악堂上樂에 부拊를 쓰라는 글, 대고大鼓를 만들라는 글, 토부土缶를 구어 만들라는 글, 뇌고雷鼓 영고靈鼓의 제도를 바꾸라는 글, 편종編鐘을 갖추어 만들라는 글, 종경鍾磬을 교정하라는 글, 죽독竹牘을 고쳐 만들라는 글, 궤제机制를 고치라는 글, 석경石磬을 만들기 전에는 아직 와경瓦磬을 쓰도록 하라는 글, 생호笙瓠를 본제대로 만들라는 글들을 올렸다. 얘기가 더러 중복되지만 도무지 숨이 가쁘다. 밤중에 고불 대감을 찾아가서 의논하기도 했던 대로 무무武舞에는 형관을 쓰지 말라는 글, 일무佾舞는 고제대로 하라는 글도 올렸다. 예악 전반에 관한 정책 제도 그리고 악기 하나하나의 운영 관리 체계를 과감하게 고치고 유지하고 모든 영역 부분 부분을 샅샅이 세밀하게 점검하고 주물렀다. 악공들의 복식을 갖추라는 글도 올렸다. 여러 제소祭所마다 각기 창고 하나씩을 세우라는 글, 제향악祭享樂을 갖추라는 글, 제사 때 쓰는 율관律管을 지으라는 글을 올리고 재랑齋郞과 공인工人을 엄히 다스리라는 글, 악부樂部마다 음악을 교정하라는 글, 화악華樂에도 아조我朝의 가곡을 쓰라는 글을 올렸다.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헌가軒架를 고제대로 하라는 글, 조회악에 악공을 예습시키라는 글, 좌전坐殿 때 풍류를 시종 갖추라는 글, 조회악과 당상당하의 조하朝賀 때 헌가만을 쓰라는 글, 조회악에 월율月律을 쓰라는 글, 악가樂架를 예비하라는 글, 악감조색樂監造色을 설치하라는 글들도 올렸다. 스스로도 정신이 없었다. 허둥지둥하였지만 어느 하나 잘못 올린 것은 없었다. 모르고 빠뜨린 것은 있어도 알고서 올리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이 닿는 데까지 젖 먹던 힘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는 한 달이 더 있었다. 윤閏 12월에는 또 아악보雅樂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판서判書에서 이조吏曹판서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또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너무 숨이 찼다. 이듬해 정월에는 왕으로부터 안마鞍馬가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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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1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 <4> "잠은 다 달아났으니 한잔 하세.” 잠 안 올 때 먹던 것이라고 하면서 조그만 잔에 따라서 박연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었다. 잔도 하나이고 안주도 없었다. 그 근엄한 표정도 한껏 누그러뜨리며 웃음까지 띠는 것이었다. "뭘 하는 기여. 어서 들고 나도 따라줘야지.” "네.” 박연은 얼른 마시고 꿇어앉으며 떨리는 두 손으로 조그만 잔을 맹사성에게 따랐다. 술이 대단히 독하였지만 감미로왔다. 상기한 약초 냄새가 느껴지고 속이 찌르르 하였다. "편히 앉으시게. 이제 용무는 끝났으니 한잔하고 가요. 잠을 자고 내일 일을 해야지.” "알겠습니다. 고불 대감님.” "술 마실 때는 부처보다도…” "아 네. 동포東浦 대감님.” "허허 허허…” 맹사성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받아 마시고 금방 다시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박연은 편안한 자세로 다시 잔을 받았다. "안주는 그림으로 하시고.” 밤이 늦었으니 도리가 없지 않으냐는 듯이 벽에 걸린 편액을 바라보았다. 창 옆으로 붉은 천도복숭아가 매달린 그림과 잉어가 한가하게 노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밤늦게 사람을 깨우고 무엇을 시키고 싶지 않은 청백리 고관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시 반배를 하였다. "대감님의 그 너그러운 마음은 진수성찬으로 상을 차린 안주보다 아름답습니다.” "무슨 당찮은 소릴 하는 건가.” 박연의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피리를 불까. 피리로 말하면 난계가 더 낫지.” "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나 야심합니다.” "그러네. 그러면…” 맹사성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책상다리를 하고 눈을 감는다. 박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안중에 없는 듯 하였다. 시를 읊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잠든 이 밤 노소 잔을 나누니 / 그림 속의 포도송이 비단잉어 안주로다 / 다만 바라는 바는 추하지 않게 취하고 싶네” "잉어는 너무 과합니다. 복숭아로 하겠습니다.” "그런가. 이번엔 난계가 한번 읊어보시게.” 참 희한한 장면으로의 연속이었다. 밤중의 술자리는 주흥을 밭둑과 물가로 몰고 가 싱싱한 과일과 물고기가 놓인 풍경을 연출하고 노련한 선비의 삶을 쏟아 놓는 것이었다. "그러고 싶습니다만 다음 날을 기약해야겠습니다. 아침 일찍 입궐을 하셔야 합니다.” 야심하다는 말은 더 하지 않아도 주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술은 다시 따르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사양할 수 없었다. 그날 결국은 박연이 이김으로 조회에서 무무의 상소를 하게 되었고 바로 이조와 병조로 내려보내 실현을 하게 되었다. 맹사성은 세종 14년(1432) 좌의정에 오르지만 3년 뒤 벼슬을 간청하여 사양하고 환해宦海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고향 온양 시골로 내려와 앞에 흐르는 금곡천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읊으며 지냈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깊은 흥취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금잉어錦鱗魚가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함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그날 밤 야심에 읊던 즉흥시가 연상된다. 탁료는 막걸리이며 인어는 잉어이다. 강호의 사시四時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수四首로 되어 있는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의 봄이다. 매수 종장마다 역군은, 역시 또한 임금의 은혜라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안식安息이 모시던 왕의 은혜이며 덕분이라고 읊고 있는데 그 시대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 충성스럽고 청렴한 관리 선비의 대표적 표상이기도 하지만 국문학 원류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강호사시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단 시조, 단시조로서의 연시조이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라 / 이 몸이 서늘함도 역군은 이샷다 여름이다. 가을 겨울을 노래한 강호사시가도 음미해 보기 바란다. 가령 예를 들어 얘기한 것이 길어졌다. 무엇이 박연의 그 많은 입안과 상소 그리고 실현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것이 물론 추진력이 되고 바탕이 되었지만 그를 아껴주고 가르쳐주고 밀어준 훌륭한 인덕으로 인하여서이고 그보다 무엇보다 그의 힘이 되고 신통력을 발휘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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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0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 <3> 시대의 정신이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변화를 요구하였고 개혁을 요구하였다. 박연은 그 중심 바람맞이에 서 있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동안 책을 읽고 공부하고 닦아 온 바탕에다 경서經書 사서史書 예악서禮樂書 그리고 모든 고문서 전적들을 다 섭렵하고 모든 사례들을 샅샅이 뒤지고 고구考究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맹사성 유시눌 같은 제조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 많은 선학 전관들의 자문을 받고 다시 되묻고 하여 초안을 확인하고 다시 쓰고 하였다. 밤을 새워 문헌을 뒤적였고 끼니를 거르고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쓴 것을 다시 읽어보고 고쳐 쓰고 또 청서를 하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령, 좌의정 관습도감 제조提調 영악학領樂學의 자리에 있던 맹사성 대감에게는 무시로 자문을 받았다. 크고 작은 문제들을 시도 때도 없이 물어대었다.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밤중에 찾아갈 때도 있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하다 보면 그렇게 될 때가 많았다. 북촌 꼭대기 맹사성의 집에 당도하면 피리소리가 났다. 퇴청 후 또는 저녁 식사 후 불기 시작한 피리를 밤늦게까지 계속 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사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덜 하였다. 그런데 밤이 늦고 불이 다 꺼진 때도 그냥 돌아온 일이 없었다. 밤에 찾아가는 것도 염치없는 일인데 자는 사람을 깨우기까지 하였다. 그것도 고불古佛이다. 너무나 근엄한 대감이 아닌가. 그러나 자다가 일어난 맹사성은 개의치 않고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날도 밤이 늦었다. 내일 아침 고할 것인데 아무리 전적을 뒤지고 참고하여도 마음에 안 들고 미심쩍고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절차를 밟는 것이기도 했다. "어서 오시게.” 무슨 일인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너무 무례한 줄 압니다만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내일 아침 아뢸 것인데 하교를 받고자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연은 정말 너무 무례함을 자복하며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하였다. "딴 소리 말고 어서 용무를 말하시게.” 그러면서, 내가 나라 일 하는 것이 임무인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오히려 나무랐다. 그리고 밤이 늦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깨우지 않겠다고 양해를 구하기도 하였다. 하인을 시켜 무엇을 내오게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박연은 더욱 몸둘바를 모르고 내일 고할 사항을 늘어놓았다. 무무武舞의 법에 관한 것이었다. "무무는 선왕이 난을 평정하신 공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합니다. 면류관을 쓰고 방패를 잡은 것은 원래 제왕이 친히 춤을 추던 제도로서 그대로 고치지 않은 것입니다. 예기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맹사성은 아까부터 의관을 차리며 말하였다. "지금 무무를 하는 사람은 형조와 의금부에서 거관去官한 사람들이 많이 섞이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형옥刑獄에서 도끼 작도를 잡고 살육하는 사이에서 늙었으므로 그 습성과 소양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들인데 하루아침에 아악에 참례하여 청묘淸廟에 돌아오니 행동거지가 완만하고 거칠며 얼굴 모양이 늙고 추한데다가 면류관을 쓰고 방패를 잡게 되니 아주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악학樂學에 명을 받은 후로부터 자제들 중에 대신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계속하여 갈아세우고 그럴 수가 없는 것은 아직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악의 춤추는 사람을 다시는 형관刑官을 지낸 사람을 섞어 붙이지 말고 자제들 가운데 대신할만한 사람이 없으면 모두 삭제할까 합니다.” 맹사성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듣고만 있었다. 아직 의견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살펴보시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시면 재랑齋郞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그 벼슬아치를 자원하는 사람 중에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서 정하게 하고 무공武工도 병조兵曹로 하여금 나이 젊고 일을 감당할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차정差定하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되겠네.” 맹사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일무佾舞에 대해서는 다시 또 하교를 받겠습니다.” "그러시게.” 맹사성은 언제나 그냥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깐깐하고 매사 의견이 많았다. 사실은 그래서 밤에라도 찾아와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박연이 일어서려 하는데 맹사성은 벽장에서 호리병을 꺼내오며 편히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관을 푸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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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9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 <2> 그리고 다시 계속하여 악현樂懸의 제도에 대해서 말하였다. 원래 십이신十二辰에서 법을 취한 것인데 일신一辰마다 편종 일가一架와 편경 일가를 설치하고 또 편경과 편종 사이에 종鍾 하나와 경磬 하나를 설치하되 자위子位에는 황종의 소리로 하고 축위丑位에는 대려의 소리를 하고 인위寅位에는 대주 묘위卯位에는 협종 나머지 위들도 다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우리나라 헌가악軒架樂은 일위마다 편종과 편경만을 설치하고 위에 따라 본율本律에 해당하는 종은 없으니 선왕이 법을 취한 뜻에 어긋남이 있다. 그러하니 이를 갖추어 주조鑄造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게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또 아뢰었다. 선농의 음악은 모두 토고土鼓를 사용하였었는데 지금은 노고路鼓를 사용하니 이는 제도가 아니다. 아악의 악기로서 토음土音에 속한 것은 질〔瓦〕로 만들었는데 훈塤과 부缶의 갈래가 모두 이것이다. 상고의 흙을 쌓아 만든 북을 본뜰 수 없다면, 질로 변죽〔匡〕을 삼고 가죽을 씌워 면面을 삼아 토고에 대용代用한다고 한 자춘子春의 말을 살펴서 따르는 것이 편할 것이다. 당상의 음악은 먼저 부拊를 친다. 부란 악기는 노래를 먼저 부르는데 소용되는 것으로 진양陳暘은, 당상의 음악이 시작될 때 기다리는 것은 부이고 당하의 음악이 시작될 때 기다리는 것은 고(북)이니 대개 당상은 문 안을 다스리는 것으로 부로써 하고 당하는 문 밖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고로써 하니 안은 부자父子요 밖은 군신君臣으로 사람의 큰 윤기倫紀이고 악이 실상實像으로 보인다, 하였다. 주례周禮의 도설圖說과 진양의 글과 임우林宇의 악보는 같지 않아 체제를 정하기 어려우므로 제조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주례도周禮圖와 진양의 예서와 악서 중에는 현고懸鼓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고, 현고는 진고晉鼓이다, 궁현宮懸은 네 모퉁이에 설치하고 헌현軒懸은 세 위位에 설치한다, 하였다. 또 순자荀子는, 현고는 모든 악의 군왕이 된다 하였다. 그러니 이제 아악의 대고大鼓는 이 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인 듯 하니 송宋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진고 하나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계속하여 박연이 아뢰었다. 질장구〔缶〕가 악기로 된 것은 요堯임금 때부터였는데 역대로 폐하지 않았고 진秦나라 때에는 더욱 이를 숭상하여 써서 한갓 악현樂懸의 악기가 될 뿐 아니라 온 세상이 모두 이를 좋아하였으니 성음聲音과 절주節奏가 있어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질장구는 그 모양이 그림과 같지 않으며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아니 하고 헌가 중에서 항열行列만 갖추고 있을 뿐이므로 질장구를 만드는 장인〔缶工〕의 유類를 헐공歇工이라고 이르게 되니 기만欺慢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송나라 때에 민간에서 아홉 개의 질항아리〔甌〕를 오성五聲 사청四聽의 소리를 맞추었다고 하였으니 헌가 중 열 개 질장구의 소리를 십이율로 나누어 소리를 내는 것이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또 흙으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 중에는 두드려서 소리가 나는 것도 있고 소리가 매우 맑고 조화로운 것도 있으며 소리가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니 대개 소리가 나고 아니 나는 것은 질그릇의 잘 익고 익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이며 소리의 높고 낮은 것은 악기의 두껍고 얇음과 깊고 얕은 관계이다. 그리고 이런 주문도 하였다. 지금 성 밖의 가까운 땅 마포 강가에서 다행히 질그릇 굽는 곳이 있으니 질그릇 잘 굽는 사람을 선택하여 인력도 공급하고 품삯도 주어서 역사役事를 맡기고 음율을 알고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을 시켜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면서 질그릇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되 반드시 도본圖本과 합치하고 소리가 음율과 조화되게 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악기가 만들어진 후에는 여러 악공이 각기 자호字號에 따라서 서로 쳐서 열 개의 질장구 소리가 저절로 한 음악을 이룬 후에 항열을 넣어 여러 소리에 맞춘다면 소리와 소리가 서로 응하여 매우 조리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하니 신은 한번 시험하기를 원합니다.” 너무도 세밀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었다.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것 하나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무나 해박하고 전문적이었다. 열 사람 스무 사람이 동원하여도 어려울 지식이고 실력이었다. 초인적인 능력이었다. 이론으로 서책의 고증으로만이 아니고 하나하나 일일이 다 실험을 해보고 실연實演을 해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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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8흙의 소리 이 동 희 절정絶頂 <1> 박연이 줄기차게 올리는 상서 상주 제언 아룀은 모두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도를 개선하고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신념과 의지는 새 시대 새 물결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도 하지만 새 물결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유영遊泳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이념은 성숙했고 그것을 실천할 계제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솔선를 하였던 것이고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그것이 새 시대 정신에 부합하였던 것이고 다들 동조를 하고 공감을 하였던 것이다. 몇 번 그런 예를 말하였었다. 전에 박연이 여악女樂을 금하도록 하라고 올린 글에 대해서도 이견異見들이 분분하였는데 그것도 평정을 하였다. 얼마 뒤의 일이지만 좌부대언左副代言 김종서金宗瑞가 왕에게 아뢰었다. "예악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악을 살펴 정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공자께서도 석달 동안 고기맛을 몰랐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예악은 중국과도 견줄만한 것이므로 옛날에 사신 육옹陸顒 단목지端木智 주탁周倬 등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예악이 갖추어져 있음을 보고 모두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으나 다만 여악이 섞여 있는 것을 혐의쩍게 여겼습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아악이 비록 바르다고 하더라도 여악을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김종서는 공자의 말을 다시 인용하여 말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할 때 반드시 음란한 소리 정성鄭聲을 추방하라고 했고 그것은 성인이 행한 징험徵驗을 보인 것으로서 여악을 아악에 섞을 수 없다고 하였다. "소신이 아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같은 정치는 지난 옛날에도 없었고 앞으로 오는 세상에도 없으리라 봅니다. 예악의 성함이 이와 같은 데도 오로지 여악만을 고치지 아니하고 누습을 그대로 따른다면 뒷날에도 이를 혁파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군신이 같이 연회하는 자리에서 연주하게 하시고 사신을 위로하는 연석에서도 쓰시는 것은 대단히 불가한 일입니다. 비옵건대, 크게 용단을 내리시어 유신維新의 미美를 이룩하소서.” 임금은 김종서의 충언을 듣고, 여악을 혁파해 버리고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등가登歌하게 한다면 아마도 음율에 맞지 않아 서로 어긋남이 있게 되지 않겠느냐고 염려하였고, 김종서는 다시 여악의 누습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어긋남이 있을지라도 연습하여 완숙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우부대언右副代言 남지南智도, 외방에서 더욱 심한 여악의 폐단을 고하고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게 하는 관기官妓의 폐단을 말하며 관기를 혁파하여 성치盛治의 실책을 제거해 달라고 하였다. "경들의 말은 지당하오.” 임금은 겸허히 대언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악을 쓸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서경書經의 사해四海가 팔음八音을 끊고 조용히 지냈다는 고사를 인용하며, 옛날 성대盛代라하여 어찌 이같은 음악이 없었겠습니까, 한 의견을 생각하였다. "사해에서는 어찌 다 남악을 쓸 수 있겠는가.” 매사 대단히 신중하였다. 어느 것도 그러했지만 여악의 문제는 깊이 생각하여 받아들이었다. 박연의 의견을 확인하기도 한 것이었다. 어떻든 박연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고하였다. 하나 같이 기존의 음악 음율의 체계를 바로잡고 새로 고쳐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상소는 절정에 이른다. 세종 12년 2월 19일 고한 것만 해도 엄청났다. 만지장서였다. 천신 지신 선농 선잠 사람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음악에 대한 것에 이어 모든 제악 향악에 대한 연주와 상하 선후 법과 절차 그리고 그 음양 천리에 맞고 그름에 대하여 조목조목 아뢰었다. 종묘에서 영신迎神하는 음악, 석전釋奠 선농 우사雩祀의 음악, 사직社稷에서 영신할 때의 음악, 산천제에 사용하는 음악, 원단圓壇의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을 맞이할 때의 음악, 신을 전송餞送하는 음악 그리고 종묘 선농 선잠 석전 우사 등 제사의 음악-너무 많아 세세히 고한 사항에 대하여는 줄이고 항목만 열거하지만-에 대한 음율 방위 변성 그에 따른 연유 등을 소상히 말하였다. 서로 다르고 같음을 얘기하며 고증하고 논거를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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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7흙의 소리 이 동 희 꿈 <6> 박연의 같은 날 이어진 상서였다. "제후諸侯는 상시로 제사지내는 법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이를 사용하였으니 예가 아니었고 또 그 때 쓰는 음악도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만을 사용했으니 전혀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영락 병신년 조용趙庸이 예조판서가 되어 이를 개정하여 제사는 기우제로 바꾸고 노래는 운한편雲漢篇을 사용하되 음악은 아래서는 황종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대려를 노래하며 주나라의 육합六合 제도를 회복하였습니다.” 운한편은 주나라 선왕宣王을 찬미한 부賦이다. 倬彼雲漢 昭回於天 밝은 저 운하여! 빛이 하늘에서 돌도다! 선왕을 보좌한 신하 잉숙仍叔이 지은 첫 절이다. 시경 대아大雅…에 있다. 운한은 은하수 천하天河를 뜻한다. 가뭄에 대한 걱정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충정이 담겨 있다. 박연은 그런 고사를 줄줄이 다 꿰고 있었다. "황종과 대려는 곧 자子와 축丑이므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서 선왕先王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니 그 율려가 소리를 합하는 법은 이미 그 당시에 쓰임으로 원단의 의식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다만 다른 제사의 음악에 편입編入되지 못한 것이 유감된 일입니다. 이제 신이 어명을 받들어 모두 다 개정한 것은 진실로 아무런 증험證驗도 없이 감히 이같은 억설臆說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농先農과 선잠先蠶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을 사용했으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옛 제도를 써서 아래에서는 고선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를 노래하여 석전의 음악과 같이 했습니다. 이는 곧 진辰과 유酉의 합으로 옛 사람이 성현에게 제사지내던 음악인 것입니다.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음악은 모두 대려궁을 사용했는데 이는 순수한 음陰뿐이었은즉 천신에게 제사하면서 순수히 음률을 사용한 것은 더 마땅치 않습니다. 이제 옛 제도에 의거하여 아래에서는 황종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대려를 노래하여 원단의 음악과 같이 했습니다. 이는 곧 자와 축을 합한 것으로서 선왕이 천신에게만 제사지내는 음악인 것입니다. 산천의 음악은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鍾을 노래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홍무예제洪武禮制 주현州縣의 의식을 의거하여 풍운뇌우와 단壇을 같이 하여 제사지내기 때문에 천신에게만 제사하는 황종 대려의 궁만 사용하게 되니 두 편을 다 같이 높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사雩祀(기우제)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과 당하에서 다 같이 대주궁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한 잘못입니다. 옛 제도를 찾아보아도 어떤 율을 사용했다는 글귀는 없으나 이는 여섯 위位의 신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와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의 글에 보면 구망句芒 욕수蓐收 현명玄冥은 소호少皞씨의 아들이요 축융祝融은 전욱顓頊씨의 아들이요 후토后土는 공공共工씨의 아들인 구룡句龍이며 후직后稷은 주나라의 시조이니, 이 여섯 분은 살아서 상공上公이 되고 죽어서 귀한 신령이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근본을 살펴보면 상세上世의 성현의 신은 반드시 석전과 선농의 예와 같이 고선 남려의 율을 사용하여야 할 것인데 다만 진양陳暘의 악현도樂懸圖 중에는 고鼓는 영고靈鼓를 사용한다고 하여 마치 땅의 신에 지내는 제사(地祇)와 비슷하게 하니 의심스럽습니다. 지기 제례로 한다면 반드시 대주와 응종의 율을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신迎神의 음악은 각기 그 소속된 바가 있으니 천신에게 하는 제사에는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하여 여섯 번 변하니 주관周官에, 그 음악이 여섯 번 변하면 천신이 모두 내려와서 예를 올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기에게 하는 제사에는 함종궁을 사용하여 여덟 번 변하니, 그 음악이 여덟 번 변하게 되면 땅의 신이 모두 나와서 예를 올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 귀신에게 하는 제사에는 황종궁을 사용하여 아홉 번 변하니, 그 음악이 아홉 번 변하게 되면 사람 귀신에게 예를 올 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영신의 음악은 소속되는 음율을 가리지 않고 다만 응안凝安 경안景安 등의 곡명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고 또 여섯 번 여덟 본 아홉 번 변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매양 제사에 신을 맞이할 때에는 모두 황종 일궁一宮만을 연주하여 삼성三聲으로 그치는데, 어떤 때는 이성二聲으로 그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성一聲으로 집례의 말에 따라 그치기도 합니다.” 고사와 전적典籍에 대하여 다 얘기하지 못한다. 밥보다 고추장이 많아서라기보다 주종主從을 추슬러야 하겠다. 어떻든 박연은 선왕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두 개정하여 조목별로 아뢰었다. 그의 꿈은 그의 일이었고 그 속에 번득이는 예지와 실천의 의지였다. 어쩌면 그것마저 의식하지 못하는 투지였던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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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6흙의 소리 이 동 희 꿈 <5> "박연은 세상 일에 통달한 학자이다.” 왕의 믿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언代言이 계사啓事한 것에 대하여 왕이 그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세종 10년 2월 실록의 기사이다. 비우유非迂儒 가위통유可謂通儒, 세상 일에 통하지 아니한 학자가 아니라 통달한 학자라 할 수 있다. 면전은 아니지만 박연은 몸둘바를 몰랐다. 그럴 때마다 더욱 겸허하게 직무에 임하였다. 자신에 대한 신임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과분하고 의외의 처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몸을 낮추고 움츠리었다. 지프내 강촌 마을에서나 향교에서 그의 피리소리를 듣고 괜찮다, 신기하다, 듣기가 좋다 또는 비범하다고 할 때 기분이 좋고 우쭐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과연 그런가 정말 나는 평범하지 않고 실력이 있는 것인가 되물어보았다. 선뜻 수긍이 안 되고 그것이 인정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고 또 스스로 그것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든 뒤에도 그런 습성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하여 모두들 후하게 평가하고 반대하지 않고 나쁘게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다행으로 생각하고 자위하며 계속 밀고나갔다. 왕이 자신에 대하여 인정하여 주고 신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늘 부담을 느꼈고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그때마다 더욱 잘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더욱 잘 하라는 신호로 알고 철저하게 터럭만큼도 실기를 하지 않도록 대처하였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잠자리에 들며 전적을 뒤지고 탐구하였다. 새벽 닭이 울 때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썼던 글을 다시 읽었다. 이미 상주를 한 것을 고쳐 쓰고 새로 쓰고 한 것이 여러 벌 되었다. 그의 글 쓰는 방법은 계속 고쳐서 쓰는 것이었다. 빠뜨린 생각과 사항을 집어놓고 문장과 문맥을 바꾸었다. 바꾼 것을 또 바꾸고 종전 것을 다시 채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청서淸書를 하였다. 그의 설득력은 문장에 있었다. 한 자 한 획 어긋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철저한 고증에다 시의적절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혁의 의지이며 시대정신이었다. 그것을 과감하게 표출하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박연은 앞에서도 얘기하였지만 정책과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촉구하는 글을 올리고 향사享祀때 올바른 음악을 쓰라는 등 계속 상주하였다. 석경을 만들었으며 편경과 특경을 완성하였다. 쉰을 넘기고도 박연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갈수록 더 뜨거워졌다. 세종 12년 2월 다시 향사 때 악율樂律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3월에 는 아악에 향악鄕樂을 쓰지 말라는 글을 올리었다. 9월에는 헌가軒架를 고제古制대로 만들라는 글을 올리었다. 물론 다 받아들여졌고 예조로 내려 보내어 실시가 되었다. 11월에는 조회 악공樂工은 공사비자公私婢子로 충당하라는 글을 올리고 12월에는 조회악朝會樂을 조성하라는 글을 올리었다. 악현樂懸은 고제대로 만들라고도 하였다. "종묘의 음악은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무역궁만을 사용하니 양은 있어도 음은 없습니다. 옛날 제도에 의거하면 아래에서는 무역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협종을 노래하였습니다.” 예조에서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의논한 봉상판관 악학별좌 박연이 상서上書한 조건을 아뢰었다. 의례상정소는 조선의 예제禮制를 정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로서 특별 기구였다. "협종과 무역은 묘卯와 술戌로서 음과 양이 합한 것이고 선왕先王이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제향하는 음악입니다. 사직社稷의 음악은 이보다 먼저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大簇宮만을 사용하였으니 역시 순수한 양뿐이었습니다. 옛날 제도에는 아래에서는 대주를 연주하고 위에서는 응종을 노래하였습니다. 대주와 응종은 인寅과 해亥로써 음과 양이 합한 것이며 선왕이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내는 음악인 것입니다. 석전釋奠의 음악은 전에는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남려궁南呂宮만을 사용했으니 화합함이 없었습니다. 옛날 제도를 살펴보면 아래에서는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를 노래하였습니다. 고선과 남려는 진辰과 유酉이므로 음과 양이 합한 것이고 해 달 별 바다에 제사지내고 성현에게 제사지내던 음악입니다. 원단圓壇의 제사는 환구圜丘이니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는 예입니다.” 상서는 끝이 없었다. 조목 조목 악율과 예법을 열거하며 아뢰었다. 철저한 고증이 뒷받침되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식이며 열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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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5흙의 소리 이 동 희 꿈 <4> 관습도감 제조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박연은 또 많은 일을 하였다. 물론 예악에 관한 것이었다. 계속 제도에 대해서 음률에 대하여 고치고 조정하고 바로잡아 개혁해야 될 문제를 제기하고 다시 탐구하고 상주하였다. 세종은 그런 박연의 의견을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밀어주었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모든 면에서 그랬다. 세종 9년(1427) 6월 23일 실록에 있는 내용이다. 임금은 몸도 불편하고 한재旱災가 걱정이 되어 정사 보는 것도 멈추었다. 그러면서도 말하였다. 을사년(2년 전)의 한재는 5월 초 하룻날 비가 한번 내리고 6, 7월 사이에 한번 내렸을 뿐으로 비가 넉넉하지 못하였으나 금년의 한재는 초목까지 말라서 을사년보다 심하기에 가을 수확의 가망이 없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나 이번에 한 번 내린 비가 을사년 비보다 훨씬 흡족하니 만일 각도에 내린 비가 이 정도만 된다면 백성들이 거의 굶주림을 면하겠는데 오랫동안 가물다가 폭우로 내려서 다시 한재가 있게 될까 염려스럽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는 거의가 다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지만 백성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임금은 또 각 관아의 아전으로서 나이가 많은 자는 다 거관去官토록 하라고 이조판서 허조許稠에게 명하였다. 거관은 일정한 기간이 차서 다른 관직에 임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단지 다른 관직에 임용함을 말하는 것 같다. 허조는 명을 받들며 계啓하였다. "가묘家廟의 제도에 아내 셋을 둔 자는 어느 아내로 부祔(合葬)할 것이며 맏아들이 벼슬이 낮고 다음 아들이 벼슬이 높거나 또는 맏아들이 병이 있고 다음 아들이 병이 없거나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옛 제도를 상고하여 의논해 정하도록 하오.” 허조는 임금에게 다시 계하였다. "시조始祖 세우는 일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권도權蹈의 상서에 공신功臣으로 시조를 삼기를 청하였는데 어떠한가?” "좋지 못합니다.” "그러면 개국開國한 뒤에 대부大夫된 분으로 시조를 삼는 것이 가하겠는지 의논하여 알리리라.” 임금은 이조판서 허조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하였다. "박연의 상서에 사대부는 사조四祖까지 제사 지내기를 청하였는데 그건…” "좋겠습니다.” 허조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나도 역시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박연의 의견은 모두 인정하고 공감하고 있었다. 임금은 이조판서에게 그것을 확인하려 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석 달 후에 있었던 기록에도 임금은 박연의 노력이라고 할까 공을 대변하고 있었다. 9월 9일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한 것을 보자. 박연의 진언陳言에 대한 의견을 올린 것이다. "악기를 갖추지 못한데다가 제단을 흙으로 쌓아 담이 없으니 더욱 미편未便하다 합니다. 신臣은 담을 쌓고 집 삼간三間을 지어서 사람을 시켜 보살펴서 지키게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직단社稷壇도 좁아서 헌관獻官이 오르내리면서 신위에 너무 가까우니 고쳐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하였다. "사직단을 고쳐 만드는 것은 이미 의논하였오.” 박연과 의논을 하였다고 할까, 얘기가 되었다는 것 같다. 계속해서 말하였다. 거서秬黍로써 율관을 고쳐 만드는 것은 비록 박연일지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황종을 본떠서 만든다면 비록 거서가 아니더라도 될 것이다. 중국의 황종과 박연이 만든 율관의 소리를 살펴본다면 그것이 조화되고 조화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렇게 소회를 밝힌 데에 대하여 신상이 아뢰었다. "박연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고 영악학領樂學 맹사성이 이를 도왔습니다.” 영악학은 조선 초기 악학樂學에 둔 으뜸 벼슬이다. 주종소鑄鐘所에서 편종을 제작할 때 맹사성은 영악학이었고 악학제조 유사눌 악학별좌 남급南汲 박연과 함께 편경 편종 등 타악기를 만드는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세종은 그 열기를 떠올리고서인가 눈을 지긋이 감고 말하였다. "그랬지.” 그리고 이어 말하였다. "악기는 박연에게 맡긴다면 성음聲音의 절주節奏는 거의 될 것이다.” 가득의可得矣, 단정적으로 말하였다. 한 신하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단호하고 확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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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4흙의 소리 이동희 꿈 <3> 박연은 조선 초기 정치적 이념이었던 척불숭유斥佛崇儒의 국가 정책을 빠른 속도로 국민 교육에 침투시켜 나가는 데에 성실한 정책 입안자였다. 그런 새 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실무자였다. 우리나라의 유학은 이미 포은 목은 야은 이른 바 삼은三隱과 같은 거유巨儒들이 일군 터전에 씨앗을 뿌려 놓았지만 백성들의 의식과 행동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실정이었다.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육례六禮를 교육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던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인륜대례인 관冠 혼婚 상喪 제祭의 예와 향례鄕禮 상견례相見禮를 실행하였다. 난세亂世를 성대聖代로 전환시켜 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는 실무자이고 입안자였으며 뒤에서 밀어주는 노련한 정치가가 있었다. 가령 맹사성孟思誠 유사눌柳思訥 같은 인물이 그의 의견을 믿고 추진하게 하였으며 앞에서는 임금이 또 그것을 믿고 받아들였다. 안을 올리는 것마다 예조로 내려 보냈고 그의 의견과 입안은 곧 정책이 되었다. 맹사성은 세종 때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조선조에서 가장 오랜 동안 좌의정의 자리에 있기도 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 감수하고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하였다. 어떤 사초史草도 마찬가지이지만 희대의 왕자 난의 장본인들이며 조선 초기 칼부림 피바람을 일으킨 정종 태종의 기록은 참으로 냉정하고 신중히 다루어야 할 역사였다. 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 신장申檣에게 양조兩朝 실록을 맡겨 진행하였었는데 정종실록定宗實錄을 완성하고 변계량이 죽자 좌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맹사성이 그 뒤를 이어 태종실록을 편찬하였다. 묘호廟號가 정해지기까지 정종실록은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이었다.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은 태종실록을 보고자 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어떻게 하였나 보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그것을 편찬자인 우의정에게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맹사성은 편찬업무를 함께한 박연에게 묻는 것이었다. "난계의 의향은 어떠하오?” 박연은 몸둘바를 몰랐다. 왕과 우의정의 고차적인 의견 개진에 그가 끼어들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어떻단 말이오?” "고불古佛 대감께서 결정하실 일이지만…” 고불은 맹사성의 아호이다. "고불이고 신불이고 의견만 말해 보시게.” "당연히…” "왕의 뜻을 따라야 된다 그런 얘기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대감님.” "당연히 말이지?” "네에…” "그래서 묻는 것이지만… 대체 사초란 무엇이고 청사靑史란 무엇인가.” 박연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이윽고 맹사성에게 참으로 어려운 왕과의 대좌 순간이 왔다. 그러나 왕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맹사성은 단호하게 세종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였다. 너무도 의외였지만 왕도 초연하게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근엄하게 말하였다. "그 이유를 말해 보시오.” 따지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었다.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불이 난계에게 묻듯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의정으로서가 아니라 실록 편수자로서 말하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법조문을 밝히듯이 또박 또박 되뇌이었다. 왕도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었다. 결국 세종은 그 법에 따랐던 것이다. 세종이 좌의정 황희에게도 그 같은 요구를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맹사성에게 먼저 요구했는지도 모르겠다. 둘 다 조선의 이름난 청백리淸白吏이지만 맹사성은 누구보다 깨끗할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냉정하였던 것이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음률에 정통한 맹사성은 예조의 관습도감慣習都監 제조提調로 악학별좌인 박연의 아악부흥 악기제작 향약창작과 함께 하였다. 박연의 의지를 굳히고 성숙시킨 데에는 다시 말하지만 뒤에 고불이 있었고 앞에 세종이 있었던 것이다. 고불은 그의 꿈의 그림자였다. 그 후 박연은 관습도감 제조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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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3흙의 소리 이 동 희 꿈 <2> 난초 난蘭 시내 계溪 난계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여러 곳에서 냇가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의 자태에 매료되어 그렇게 지었다고 하고 있다. 금강 상류 덕유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이 깊어진 마을 앞 지프내 냇가를 말한다. 짚어내는 영동 심천深川의 딴 이름이다. 그 강촌에서 태어난 하동河童 연然에게는 너무 고고한 명명이다. 뒤 어느 계기에 연堧으로 이름자를 바꾸었는데 자연스럽게 흙바탕 모래 바탕에 뛰놀며 자라던 아이는 어느 사이 빈터를 가꾸고 묘 안 담과 바깥 담 사이의 빈터 또는 성 밑에 있는 땅이라고 하는 삶의 의지와 시대적 경작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청정한 삶과 예악 악상의 소용돌이 그의 생애를 나타내고 있는 두 이름이다. 자字는 탄부坦夫라 썼다. 장가든 뒤에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인데, 평범한 남편이라는 뜻인가. 집의 이름 당호를 송설당松雪堂이라 붙인 것도 그렇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의 궤적이었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그 위에 내린 흰 눈과 같이 고절한 비범이 있었다. 사후 행장을 평가하여 이름 지어지는 시호諡號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난계유고의 제일 앞에 송설당이라 제題한 시를 실었다. 우뚝한 임금 글씨 법궁에 빛나니 그 광채 아롱져 화산도 밝구나 몸소 주고받아 정이 들던 날 큰 경륜 드디어 협찬하였네 천 길 샘 파던 그 의지 산태미 흙을 쌓아 산을 이뤘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찾아 갔는가 倬被天章映法宮 昭回影接華山崇 身扶授受相傳日 道大經綸贊化工 掘井千尋曾有志 爲山一簣不虧功 雲衢若許乘槎客 直欲尋源上碧穹 그 뜻을 다는 알 수가 없다. 난계의 평생을 통해 써 모은 글 가운데 시를 앞에 편집한 것은 그렇다 치고 그중에 제일 앞에 놓은 뜻이 있겠는데 어떻든 일생일대를 대표하는 어떤 의미가 담긴 것 같다. 임금은 누구를 가르치는가. 그것은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 4대의 왕을 모셨다고 할까, 거쳤다. 뒤의 세조世祖인 수양대군은 그를 전북 고산高山으로 유배시킨다. 나이 일흔일곱, 아들 계우가 단종 편에 섰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였다 해서 교수형에 처하고 그도 같이 처형하려 했지만 그동안의 여러 공을 봐서 살려준다는 것이었는데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죽는 것과 산다는 것은 천양지차가 아닌가. 어떻든 몸소 주고받고 하며 경륜을 협찬하였고 천 길 샘을 파고 흙더미가 산이 되도록 쌓아 올린 생애였다. 그것이 어디 흙이었던가. 은금과 같이 빛나는 것이 아니었던가. 죽어서 땅에 있을지 하늘에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고 그것이 왕이나 신하나 다를 것이 없다. 그때의 빛나던 별 같은 인걸들은 지금 어디에 무엇이 되어 있는가. 난계 박연의 아버지 박천석朴天錫은 고려 우왕禑王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통례通禮 부사副使 김오金珸의 딸이고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 귀부인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스물한 살 때 어머니가 61세로 세상을 뜨는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3년 시묘를 하고 여려서 못한 아버지의 몫까지 6년 동안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다. 산의 지킴이 호랑도 감동시켜 함께 했고 지금은 그의 묘 앞에 같이 묻혀 있지만 그 뛰어난 효행으로 25세에 임금(태종)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그리고 영동 향교에서 엄한 정훈과 돈독한 지도를 받고 학업을 닦아 생원시에 급제하고 십년 공부를 더 하여 진사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아가 모든 정과 열을 다 쏟아부었다. 12세에 영동향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바탕은 유학 경서였다. 기록들은 기질이 남다르게 뛰어났고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하는 일이 성인과 다름없었고 침착하고 사려 깊게 처신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쓰고 있다. 영동 여자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있으면서 향토사연구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지낸 김동대金東大 선생이 전적을 찾아 『악성 난계 박연』에도 쓰고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들이 있다. 난계 박연은 누구인가, 난계의 행적은 음악 외에 학자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공헌이 컸음은 그의 가슴에 유교적인 성리학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망국 고려의 폐풍과 누습의 잔재를 일소하고 참신한 신생 조선의 기풍을 세워서 북돋워 나가는데 국왕을 보필하여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풍부하고 이로理路가 정연한 주자 성리학의 소양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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