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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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금의 시선] 폭우가 지나고 나면(1)밤새 천둥을 동반한 굵은 비가 내렸다. 낮에도 앞을 가려볼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고, 강물이 불어나면서 교통이 통제되었다. 이북지역인 북쪽에도 28일 밤부터 7월 1일까지 개성과 강원도 황해남북도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경보가 있었다. 그리고 평양을 비롯한 일부지역에 위험 수위를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남북이 동시에 집중호우가 내리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지만 사전 통지도 없이 황강댐의 방류는 불안한 예감을 넘어 괴씸한 생각마저 든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북쪽에서 최악의 재난상황이 된다. 도로와 철길이 파괴되고 농경지가 물에 잠기면서 눈앞에서 다 자란 농작물을 잃게 된다. 2020년에도 곡창지대인 황해도를 비롯한 일부지역이 폭우로 피해를 입었다.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고지도자가 황해북도 은파군을 방문하면서 식량이 우선 공급되고, 빠른 수해복구를 지시했다. 폭우로 농경지와 도로, 철도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 빗물로 인한 식수 오염으로 콜레라,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생겨나 주민들을 괴롭힌다. 북쪽의 장마는 6월 말부터 길게는 8월 초까지 이어지는데, 폭우가 내리면 좁은 강이 삽시에 불어나고 심하면 강뚝을 넘는다. 수면이 낮은 곳은 물난리에 집안이 수라장이 되는데, 그나마 집이 통째로 밀려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때로는 돼지며, 닭이며 집안살림살이들이 둥 둥 떠내려 온다. 그걸 걷어내려다 오히려 물살에 밀려가므로 멀거니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우비도 넉넉하지 않아 비닐을 가져다가 비옷을 만들었다. 해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상량보다 많은 폭우가 내리면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 산사태까지 생기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남쪽에는 강하천 정리가 잘되어 있어 폭우가 쏟아져도 그 많은 빗물이 하수구를 통해 순간에 빠진다. 폭우가 지나간 뒤 개천에 나가면 무섭게 아우성치며 흐르던 강물이 둔덕진 곳에 홍수의 잔해만 남겨놓고 홀쭉한 실개천이 된다. 비가 오면 우산을 준비하고 번개가 지나치면 잠시 전원을 꺼놓는다. 이러한 간단한 대비는 어렵지 않아 때로는 커피잔을 들고 비 내리는 소리를 피아노 선율처럼 감상하기도 한다. 실시간 재난상황을 알려주고 있어 편리하고, 이동수단이 좋아 우비만 챙기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환경이다. 벼락과 천둥을 동반한 폭우는 다른 성질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중부지역에 몰려든 정체전선은 하필이면 경기 수도권에, 황해도와 강원도, 서해안의 북쪽으로 오르내린다. 남북이 소통도 못하고 있는데 폭우까지 쏟아놓으니, 무책임한 방류에 사람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된다. 위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없고 북쪽에서는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우면 도움도 청하고, 방류할 때는 이웃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얌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나눌 수 없는 풍요로움에 반쪽은 가난한 마음이다. 폭우가 지나면 폭염이 시작되니 남북한 모두 별일 없이 정체전선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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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靑瓦臺) 개방에 관한 10문 10답1. 개방 의미와 기념행사 청와대를 국민 모두가 누리는 열린 공간,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는 약속이 실현된다.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에서 ‘국민 쉼터’로, 불통과 분열의 상징에서 ‘국민 통합 공간’으로 태어나는 것. 역사적인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고 새 시대를 여는 희망과 기쁨을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소수의 권력자들만 향유했던 다양한 시설과 경치를 국민 모두가 여유롭게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약속을 담다’-7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하는 공연 ‘희망을 나누다’-푸른 잔디가 펼쳐진 녹지원과 춘추관 앞에서 즐거운 문화예술공연 ‘역사를 그리다’-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과 왕의 어머니들을 기리는 칠궁 역사공연 ‘자연을 품다’-경복궁에서 청와대를 거쳐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 ‘문화를 펼치다’-청와대 곳곳에서 남녀노소 함께 즐기는 문화체험 축제의 장 ‘전국을 누리다’-전국 청와대 유관장소(세종 대통령기록관, 청주 청남대, 합천 청와대세트장)에 서도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는 특별 행사 ‘청와대, 국민품으로’ 운영 시간 2022년 5월 10일(화) - 5월 22일(일) * 5월 10일(화) 낮 12시 ~ 20시 * 5월 11일(수) ~ 21일(토) 07시 ~ 19시 * 5월 22일(일) 추후 공지 기념 행사 장소-청와대, 경복궁, 북악산 일대, 전국 유관장소 2. 역사적 기능은? 답-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으로 사용.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 어영(御營)·연무장(鍊武場)·과거장(科擧場)·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제7·8·9대 조선총독 관저, 광복 후 조선주둔군 사령관 관저, 1948년 8월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 2022년 5월 초까지. 이 집무실에는 회의실·접견실·주거실·경호실·비서실·영빈관 등 기능을 하였다. 3. 명칭의 베경은? ‘경무대(景武臺)’-1960년 4월까지 초대·2대·3대 이승만 대통령 12년간 집무실 명칭. ‘청와대(靑瓦臺)’-1960년 8월부터 제2공화국 대통령(윤보선)부터 사용. 대리석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하였다. 4. 재임 대통령과 기간은? 이승만(1948∼1960) 1963∼1979년(5∼9대) 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 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 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 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 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 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 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집무하였다. 5. 본관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로 외국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이 방문했을 때 사용하였다. 전통 건축양식을 통해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게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청기와를 이었다. 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건물 앞 잔디마당은 국빈 환영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 전통의장대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 6. 영빈관(迎賓館)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 개최 건물.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다.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 13m, 둘레가 3m이며 내부는 무궁화·월계수·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7. 상춘재(常春齋)는?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 116평이다. 8.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 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310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9. 관저(官邸)는? 전통한식으로 본채는 팔작(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되어 있다. 10. 춘추관(春秋館)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 1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언론사 기자 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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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국악공화국과 달리는 기차’ 이야기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狂車/鑛車) 이야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충돌을 마주하고 달리는 기차”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변경 가능한 선로로 달려오는 기차에 의한 희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담론이다. 전자는 두 진영의 충돌 상황이거나 선의의 공동체 구성원을 희생물로 수장이 무책임한 대치국면을 야기할 때의 비유이다. 후자는 달려오는 기차의 선로 변경 여부를 통해 어떻게 희생을 줄일 것인가의 가설이다. 바로 이 두 기차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곳이 있다. 한 측이 4월 21일 대통령(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획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21일대통령’과 ‘23일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함)을 선출하고, 또 한 측이 이틀 후인 23일 대통령을 선출한 ‘국악공화국’이다. # "브레이크가 없는 두 기차가 마주 달려오고 있다. 어떻게 할래?” "뛰어 나간다” "왜?” "충돌하는 거 구경하려구!” 빨리 나가 기차를 멈추게 하여 충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국의 불꽃(피 튀기는 싸움)을 구경하러 나간다는 것이다. 방관을 넘어 냉소에다 저주까지 반영한 대답이다. 지난 '국악공화국'의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결코 농(弄)이거나 망언만이 아니라 실제 나왔던 이야기 이다. 그런데 분규로 갈라진 두 진영에서 대통령이 배출되고 나서 또 들려오는 이야기는 더 절망적이다. 지난 2년은 수비만 했는데, 이제는 21일 총회의 무효소송과 "두 건의 금품수수 확인서를 갖고 있다”고 ‘수습위원회’에서 발언한 것을 두고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는 말이 돌기 때문이다. 2020년 초 당선무효 소송으로 극한 대립을 해오다 금년 3월 패소한 측이 소송전을 불사하겠다고 한 것이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 아니라면 공수가 바뀐 2차 무효소송전이 전개될 것이 뻔하다. 아!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두 기차를 어떻게 하면 승객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인가? #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狂車) ‘트롤리호’가 달려온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다섯 명이 작업을 하고 있는 선로와 변환기(變換機)를 작동하면 선로가 바뀌는 측선에서 한명이 작업을 하는 상황이다. 그대로 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전환기를 작동시켜 한명이 작업하는 측의 선로로 가게 할 것인가? "그대로 가면 5명이 죽고, 측선으로 가면 한명이 죽지?” "측선으로 돌려서 한 사람을 죽이고, 다섯 사람을 살려!” "전환기를 돌려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동인가?”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첫 챕터에 나와 유명해진 ‘트롤리 딜레마’(기차 논쟁)을 재구성한 것이다. 정치철학계의 문제적 논제로 사고(思考)실험의 한 케이스인데, 소수 인권 문제와 목숨의 수치 문제를 다룬 것이다. 다양한 조건하에서의 실험인지라 결론도 매우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데, 여기서는 단순화 시켰다. 다만 위의 경우라면 대다수의 응답자들이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희생시키는 선로 변경을 선택한다고 답하는 유형의 예를 제시한 것이다. 이를 현실의 ‘국악공화국’에 적용하면 어떨까. 어렵지 않게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여기서는 도덕이나 정의(正義)의 문제는 논외하기로 한다. 21일과 23일 선출된 대통령 체제를 위의 두 선로에 처한 상황이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이에 누군가가 변환기를 작동시켜 희생을 줄이는 한 쪽을 택할 수 있다는 조건도 있다고 하자. 당연히 전환기 작동자와 각각의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데, 다행히 비상대책위원회(박상진 현 학교법인 국악학원 이사장)가 존재함으로 작동자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문제는 선택 또는 희생(犧牲) 값인 양측의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조건을 더듬거려 채우면 이런 정도일 것이다. 첫째, 두 체제 정통성 여부이다. 그런데 모두 희박하다. 왜냐하면 서로 극열 부정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제 시점에서 법적으로는 ‘21일대통령’ 체제가 약하게나마 우위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를 받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 매우 애처롭고 슬픈 현상이다. 제3자적 입장으로 이 나라는 ‘웃기는 짬뽕’ 신세인 것이다. 둘째, 각 집행부 구성원과 회원수도 따질 필요 없이 퉁 쳐야 한다. 임시총회 대의원 수와 참가인원 수로는 23일 대통령 체제가 월등하나 가장 중요한 일반 회원은 공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21일대통령’ 체제의 ‘이핵관’들의 회비 납부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차후 법적으로 문제가 되겠지만, 아직 법적 판단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셋째, ‘국악공화국’ 수장(首長) 자격문제다. 이는 중요한 대목이다. 해서 세분하여 따져 보기로 한다. 다만 전제하는 것은 객관적 자료에 근거하기 보다는 세평에 기댄 것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필자에 의해서 버전을 달리해 객관화 할 필요가 있다. 자격의 기본은 국악분야의 전문성 문제이다. ‘국악공화국’ 역대 수장 중에는 예능 보유자들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명인명창들과 이론가들이 많았다. 이점에서 전문성은 제일의 조건이 된다. ‘21일대통령은 의상실 운영자(문예분과)이자에 ’전통예술진흥회 이사장이긴 하지만 장르적 전문성은 희박해 보인다. 반면 ‘23일대통령’은 농악분야 경기도 지정 보유자(농악분과)로 이미 20대 초반에 ‘전주대사습 농악부문 장원'을 획득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문성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우위에 있다. 둘은 예술인 공동체 수장이란 점에서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가도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공통으로 부족한 점이 확인된다. 인성(人性)과 포용력인데, ‘21일대통령’은 전자가 부족하고, ‘23일대통령’은 후자가 부족하다.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격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셋은 예술가로서의 문해력(리터러시)이다. 이는 당선 취임사의 호소력 내지 표현력 같은 언변이나 저술 등을 통한 주관성 피력 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후자가 높은 편이다. 이 문제는 대외 협력관계, 관공서 접촉에서 중요한 강점이 된다. 넷은 현대의 지성인 척도라는 경청력(傾聽力)이다. ‘21일대통령’은 주변의 한 측근에 의하면 "5분 이상의 대화가 어려운 분”이라고 하는 평이 있었다. ‘23일대통령’은 필자와 수차의 통화와 SNS소통 경험으로는 맥락적 대화가 가능한, 나름의 자격을 갖췄음이 보인다. 다섯은 약속 이행의 신뢰성 문제이다. ‘21일대통령’은 SNS에 의한 약속에 대해 거의 지키지 않았다. 감성적인 국악인들에게, 팩트를 기다리는 기자와의 약속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되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기자에게 기사의 신뢰성을 언급하였다. 이에 비해 ‘23일대통령’은 즉각은 아니지만 최소한 담당자나 제3자를 통해 약속을 지키려는 자세를 취했다. 선거 기간에도 짜증이 담기긴 했지만 자료 송부에 대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이 신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공연히 문제를 삼기 위해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즉, 지난 소송 '씨즌1'에서의 합의 불발에서 알 수 있듯이 상호불신이 원인이었다. 이번의 '씨즌2'에서도 이 신뢰성은 합의에 있어서 걸림돌이 된것으로 보인다. 여섯은 예의(禮儀)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회상규상의 기본 예의 정도를 말한다. 이는 인성의 문제와도 직결되는데, 대면이나 통화에서 확인되는 것이기 보다는 sns에서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21일대통령’은 관련된 기사에 대한 즉시 반응에서 정정 요구나 반박문이 아닌, 냉소적인 비아냥과 막말의 문자로 표현한다. 기자로서는 모멸감을 느낄 정도이다. 이 부분은 다른 기자에게서도 수차례나 들었다. 반면에 ‘23일대통령’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이지 무례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무성의 하기는 해도 무례함은 아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이는 소송 사건과 갈등 해소에 대한 진정성 문제이다. 필자는 각각의 총회 선출이 있은 이튼날 SNS를 통해 갈등해소에 대한 나름의 안(案)을 제안했다. 간절한 마음에서 행한 것이다. 그런데 ‘21대통령’은 무반응이다. 반면 ‘23대통령’은 "반목을 해소하는데 노력하겠다”는 취지와 함께 중립적 중재에는 참여하겠다는 반가운 회신을 보내왔다. 2022년 4월 24일 일요일 10시 54분에. 이 회신에서 ‘국악공화국’ 회복 가능성과 치유력을 읽을 수 있었다. 반가워서 가슴이 뛰었다. 이런 자세는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필자는 즉시 "예 좋은 자세! 화이팅”이란 문자로 화답했다. 이 태도가 부디 의지로 확장되어 실천력으로 발휘되길 바란다라는 마음에서다. 사실 기껏 3, 4차례 정도로 만나 본 인상기에다가 주변 인물들과의 뒷담화를 통해 축출한 결과이니 부족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필자 만용의 결과인 이런 평가는 그 동안 술자리 안주에 뒷담화로 뒤통수 까기에서 비로소 문자화 한 것이 처음일 듯하다. 지금까지의 소송 전말이나 정관 조항을 들먹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동굴에서 헤어나지 못한 분들은 이것을 작은 기준점으로 삼아 판단하셔도 될 듯하다. 뭐 소설로 가볍게 읽을 꺼리이기는 하지만~ . 그러면 이제 어설픈 결말을 내리기로 한다. 브레이크가 없어 멈출 수 없는 기차 앞에 불행하게도 21일과 ‘23일대통령’ 체제가 놓여있다. 두 체제는 머지않아 다시 소송으로 확대되어 충돌하고, 파국을 맞을 지도 모른다. 그 파국은 우선 문화체육관광부의 인가 취소 같은 문제로논의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회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한 쪽을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쪽 체제를 통해 회원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방법 외에는 없을 듯하다. 파괴된 선로가 더 파괴되기 아예 못 쓰게 되기 전에.... 그래서 이상에서 살핀 조건들을 고려하고, 비교한다면 이제 전환기를 어느 선로로 작동시켜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 현실의 문제이다. 희생을 줄이는 선로 선택을 할 수밖에! 가능한 한 빨리! #"21일대통령 체제 선로로 틀까?” 아니면 "23일대통령 체제 선로로 틀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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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에 대한 말’이어령선생 유해는 오늘 오전 8시 30분 발인되었다.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엄수된다. 선생에 대해서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학다식하고, 달변가였다. 20대부터 60년 동안 130여종의 책을 냈다. 교사·교수, 문예지 발행인, 신문사 논설위원 등 1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거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선생은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언론이 선거 기간임에도 대대적으로 추모 기사를 쓰고 있다. 이 추모사들에는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생전을 기억하고자 한다. # "부고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의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이인화 문학평론가) #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국제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분이다. 선생은 문학·음악·미술 등 각계를 꿰뚫어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미지(未知)와의 연결고리를 평생 찾아오셨다. 일본이 축소지향이라면 우리의 반도 문화는 좀 더 열리고 중성적인 여러 가변성을 지녔다는 점을 파헤치고 다듬었다. 애국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었다. 글 마다 마지막에서는 ‘한국 사람’ ‘우리 역사’로 귀결됐다. 언젠가 프랑스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투정했더니, 그 말을 책 광고에 넣으셨더라.”(화가 이우환) # "세상에 대한 훌륭한 카피라이터였다. 이어령 선생은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을 한마디로 딱 찍어서 알려주고 시각을 열어줬던 분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문화인이었다.(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 "장관 임기 마지막 날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처리 안건 순서를 살짝 바꿔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안을 위쪽에 올려 놓으셨다고 한다. 예술 영재들에게 실기 중심의 교육을 하는 문화부 산하의 전문학교를 설립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어령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5분간 한예종 설립에 대해서 역설한 뒤 설치안이 통과하면서 한예종 설립이 본격화됐다. 한예종은 이듬해인 1992년 개교했다. 이어령 장관이 없었으면 오늘날 손열음·김선욱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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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산소(山所) 및 납골장과 수목장국중성(정읍 향토사가) 산소(山所)란 ? 산소라 하면 조상의 묘지를 이르는 말로서 묘지의 본 뜻을 말 한다면, 묘지의 봉분은 흙무덤인데 이는 풍수상 땅속에 흐르는 생기(生氣)는 흙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흙무덤을 높여 쌓아야 생기를 많이 받는다는(乘氣生)데에 본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가 가장 강하게 뭉쳐있다는 곳은 산이라 하여 묘를 산에 모셨다는 뜻에서 산소라 하였다는 해석이다. 산소라 하면 조상 대대로 이어오면서 가계 혈통을 이어온 구심점이었으며 효(孝)의 상징이었고 전통문화의 근원이었다 할 것이다. 농토를 기업으로 하여 선영의 산소를 지켜온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이었다. 농사가 생업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는 자손들은 부모슬하에서 농사에 전념 하는 것이 평생의 업이었다. 장성하여 가정을 갖게 되면 부모가 나누어 주는 분깃에 따라 분가하여 자립하였다. 이같이 부모는 언제나 없이 자손들을 품안에 두고 보살핌으로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이끌어 온 그 선친과 선영을 모셔온 저 산소가 있는 곳이 우리의 터전이었고 우리의 고향 이었던 것이다. 그러했던 고향은 일찍부터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외부에서는 공단시설이 들어와 대내외적으로 섞이고 바뀌다보니 어느덧 옛 고향이라는 정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부모를 떠나 고향을 등지다보니 섬겨오던 선영의 산소는 은연중 멀어지게 되고 효행마저 소홀해져가는 세월은 흘러 드디어는 그때 그 세월에 비하여 오늘에 와서는 아직 살아있는 부모도 남에게(시설)맡기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보니 돌아가신 뒤의 저 산소는 무슨 의미가 있을가?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받기 위해서 베푼다던가? 그래서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혜택을 부모에게 못 갚고, 자식에게 갚는다 했다. 납골장 그동안 장례문화의 개선책으로 종래의 봉토 분묘에서 납골장으로 변화 되면서 가족묘지의 형태들이 많이도 달라져 왔다. 이에서 납골장(葬)과 납골당(堂)은 다른 개념이다. 납골장은 화장한 유골을 석탑이나 석실에 봉안함을 말하고 ,납골당은 화장한 유골을 일정장소에 보관 유치하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화장장의 총칭의 개념은 납골(納骨葬)이라 하겠다. 원래 납골장의 시원은 불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인데 이는 불타(佛陀)의 유체(遺體)를 다비(茶毘:화장)를 치르고 나서 그 유골을 석탑을 지어 봉안하였다는 데에서 기원한 장법이었다. 그에 따라 불교의식을 통하여 일반에서도 일부 화장풍습이 있어 왔으나 양속을 해친다하여 매장법이 존속되어 왔던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납골장이 권장되면서 이제는 일반화 된 것 같다. 어떤 묘지에는 수십 기의 비석만 세워 있는 데가 있고, 석탑을 지어 주위를 공원으로 조성한 데가 있는가하면 땅을 파고 반 지하 형으로 하여 지붕을 흙으로 덮은 유골탑등 다양한데, 기존의 분묘도 석재물로 사각을 둘러 있는 데가 많아졌다. 그런데 한번 설치된 석재는 몇 천년이가도 영구히 남을 것인데 저와 같이 산지마다 석재 구조물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온 산천이 석재는 천지가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자않다. 이같이 일반 종문이나 가족 묘지들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늘어나는데 이는 개인 소유지에 따르면 전국적이고 산발적이다. 그리고 납골당은 아직 납골 묘 또는 수목장으로 가기 전의 대기실 같은 곳이겠는데, 이는 각자의 유골함을 벽면의 칸막이 선반에 번호순대로 층층이 진열되어져 있는데 이는 마치 아파트 층을 상상케도 한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흙집에서 살 때는 무덤도 흙집이더니 아파트 문화에서는 무덤도 아파트를 닮았다는 풍자도 있다. 그러나 종전의 묘지하면 유현(幽玄)하고 음습한 분위기였는데, 그와는 달리 납골묘지는 기념탑 같은 분위기에서 선영을 기리며 추억을 기념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참배할 수 있는 성소의 엄습함이 있다. 수목장 종전의 묘지라는 개념 하에 서는 인생종말의 구역으로 인식이 되어 왔으나 보다는 생전에 선호하는 선경이요 낙원으로 모신다는 의미에서 아름답게 정원을 꾸미거나 그만한 자연 경관으로 모신다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 수목장이겠다. 납골당과 수목장은 다 같은 화장장 이지만 납골장은 집(탑)을 지어 그 안에 유골을 봉안하는 반면 수목장은 나무밑에 유골을 뿌리거나 도자기 유골함을 묻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수목장은 그 나무에 영혼을 의탁하는 관계이기도 하므로 한편 그 나무의 건강여부에 따라서는 그 영혼에 대한 안부의 표징이라는 의미에서도 자손들로 하여금 자주 돌아보게 되는 성묘의 의미는 납골장보다 우리의 정서에 가깝다고 하겠다. 수목장의 기원은 성경에서도(창35:8)야곱의 모친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을 상수리 나무밑에 장사지내고는 그 나무 이름을 ‘탄식의 나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사회에 수목장이 인식되기는 90년대 초에 전 고려대 교수가 생전에 자기 죽음의 기념수를 남겼다는 계기와 아울러 필자의 졸저(꽃과 나무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에도 수목장을 제안한바 있었다. 이 같이 기념수를 정하여 수목장으로 모신다면 후손들에 대대로 이어지는 성수로서의 대 물림이 될 것이며, 그런 의미에 서는 수목장은 굳이 선산이 아니어도 내집 정원이면 어떠랴. 선영을 성수(聖樹) 밑에 모셔두고 그 옆에 유훈이나 좌우명 하나쯤 세운다면 후대에 실전(失傳)할 염려도 없을 것 이며, 항상 살아있는 저 나무의 생동감은 후손이 전해 받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상사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순환법칙이라 했거늘, 영혼이야 넋이야 얼인 그것은 항상 내 안에 있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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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3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씨는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쌓인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히신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3부를 연재한다. 일본 땅에 묻히신 외할아버지를 찾다 (3부 편) 언제나 일본 외할아버지 사시던 곳에 가보나라는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제주 진외가집에서 외할아버지는 종전 이후 재혼도 하지도 않고 혼자 아들을 키우시다가 오사카에서 돌아가셨다고 알려 주었다. 1990년 한러수교 이후 한국의 친척들과 연락도 계속해 왔는데 세월이 바쁘다 보니 일본에 묻힌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을 생각만 가슴에 담고 가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2019년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낯선 외국 남자가 친구하자는 신청이 들어와서 페친이 되었다. 한국말로 답변을 했더니 그분이 사할린 한인 역사와 나의 가족사에 관심을 보였다.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난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 2세로 살고 있다고 하며, 나의 제주도 출신 부모님이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다가 이중징용된 가족사에 대해 가슴 아퍼했다. 일본 친구는 30여 년 간직하고 있던 외삼촌의 연락처를 달라 하시고 오사카에 계신 외삼촌 댁에 전화해 보겠다고 하셨다. 기적처럼 외삼촌 댁 전화번호와 주소는 바로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외삼촌은 12년 전에 별세하셨고, 외숙모는 살아 계시다고 전해 주었다. 이 소식을 받고 나는 이틀 동안 설움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 오사카에 사시는 얼굴도 모르는 외숙모 집 전화번호를 떨리는 손으로 두드렸다. 제주도가 고향인 재일교포 외숙모는 한국말을 잘 못하셔서 일본말을 섞어가며 오랫동안 가족 얘기를 해주셨다. "언제가 올 너의 소식을 기다렸다. 내일 당장 오라. 보고 싶다"라고 울먹이셨다. "외숙모님! 외삼촌을 못 만난 것이 마음이 아퍼요. 더 일찍 연락을 하는 건데 사는 것이 힘든 시기라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가는 것이 러시아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내일이라도 가고 싶지만 준비를 해서 연락을 드리고 가겠습니다.”라고 전하고, 석달 후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로 찾아갔다. 드디어 낯선 땅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묘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할아버지, 엄마 대신 제가 70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오늘에서야 엄마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외할머니가 평생 그리워 하시던 아버지를 손녀인 제가 찾았어요. 마지막 유언을 엄마 대신 제가 지켜 드렸어요. 이제 슬퍼하지 마세요. 편히 쉬세요” 먼저 생전에 만나지 못하고 헤어진 부녀간의 영혼을 위로해 드렸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 하던 오라버니(나의 외삼촌)의 묘앞에서 모자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 순간부터 나는 눈만 감아도 우리 외가 가족이 얼마나 슬프게 살아오셨는지 이제는 뼈저리게 알 것 같다. 아버지를 그리워 하던 딸(어머니), 아들을 그리워 하던 어머니(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제주도에 남겨두고 온 딸을 만나셨으리라. 외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만나셨으리라. 나는 이제서야 돌아가신 엄마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나) 엄마! 이제 편안히 잠드소서..... 나는 이 글을 남기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 4대에 걸친 가족사는 사할린에 사는 손자에서 손자로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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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서 설을 맞이한 영주귀국 사할린 2세새해 아침 인천 남동구 달맞이 마을 사할린에서 신체가 불편한 어머니(주고분, 1936년생)를 모시려고 지난 달 4일 영주귀국한 사할린 2세인 딸(김기자, 1957년생)과 사위(김정호 1958년생)을 만났다. 지난해 1월 사할린동포지원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사할린 영주귀국 대상이 직계비속까지 확대되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안내와 러시아어 통역은 사할린 동포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선생이 맡아 주었다. 12년 전 대한민국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1세인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2세가 영주귀국을 선택하고 조국에 들어온 것이다. 두 무릎관절 수술 후 혼자 바퀴가 달린 의료기에 의지하고 거동하시는어머니는 "조국에서 그리운 우리 막내딸을 이렇게 오게 해주어서 감사하다. 매일 기도를 했다. 같이 살게 해달라고...사할린에서 남편을 여의고 한국에 혼자 나와서 살다가 오늘 아침 설날에는 떡국을 같이 먹게 되다니...꿈만 같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미안하다. 1200명이나 신청했는데. 350명만 오게 되었다. 아직 오지 못한 분들께 미안하다."면서 딸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과 정든 집과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들어왔다. 이 근처가 아닌 멀리 시흥에 아파트를 배정 받았다. 인천에 자리가 나면 가까운 데로 오게 해주면 좋겠다. 아직 한국말도 서툴어서 고생을 한다."면서 눈물을 짓는다.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에서 주립 도서관에서 근무를 하다가 이주한 김기자씨는 "가장 시급한 것은 정착 프로그램과 메뉴얼이다. 아직 준비가 안된 것으로 안다. 한국말이 서툴어서 동네 마트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힘들다. 시흥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3번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 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받기 힘들다. 아직 한국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이 안된다. 우리가 한국말이 잘 안나오니까. 우선 한국말부터 배우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리고 빠른 정착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라고 말했다. 사할린에서 오기전 사할린주한인협회(박순옥)가 주관한 설명회에서는 지자체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가 일정 기간 동안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는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회유와 강제로 사할린으로 끌고 가서 탄광과 산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억류되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식민백성이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부는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이란 표식을 받고 어려운 삶 속에서 살아왔다. 1990년 한러수교가 시작되면서 영주귀국 사업으로 사할린 동포들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여 전국 25개 지역에서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월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는 지원 대상을 기존 동포 본인과 배우자, 장애자녀에서 직계비속 1인과 그 배우자까지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책무로 규정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사할린동포와 그 가족 91명은 지난달 27일 이 법에 근거해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동포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감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정착을 위한 사할린 동포들만을 위한 특별한 기본 매뉴얼이 시급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어 배우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어떻게 시작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전개가 되어야 한다. 우선 교육을 받은 자원 봉사자들이 나서서 도와 주어야 한다. 당장 필요한 부분부터 면담을 통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정부는 영주귀국을 원하는 사할린동포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오신 동포들이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세심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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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2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씨는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쌓인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히신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2부를 연재한다. 무국적으로 살다가신 아버지와 어머니(2부) 부친 박정환(1919년생)은 전라남도 목포 근처 작은 하의도라는 섬이다. 1944년 부친은 하의도의 한 사람과 함께 강제동원을 당했다. 사할린에서 부친은 산판(벌목장)에서 일했다. 우리 부모는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코르사코브 항구 근처에서 만나서 살림을 차렸다.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동포들은 그 당시 코르사코브에 도착하자마자 공동묘지부터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갈 때 부모님의 유해를 가지고 가기 위해서다. 이후 사할린에 와서 산판과 탄판에서 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일본 탄광으로 다시 징용을 받아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을 맞고 죽어간 사람들. 사할린에 돌아왔으나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 이렇게 잃어버린 가족들 사진을 가슴에 품고 몇 년간이나 모여서 살았다. 모여서 살다가 러시아 국적을 받든지 북한 국적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 다 무국적이셨다. 러시아 국적을 받으면 조금은 자유롭고 경제적 혜택도 많아서 동서들이 같이 받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을 하셨다. 혹시라도 국적 문제로 고향에 돌아갈 길이 막힐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셨다. 집에서는 조선말만 사용하게 했다.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우리말을 잊으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셨다. 그 덕에 우리 형제는 조선말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나는 1951년 코르사코브에서 맏딸로 태어난지 한 달이 되어 사할린 북부 스미르늬흐구역 오노르마을 근처 동포들만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유는 고향땅에서 함께 끌려 온 부친의 동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산판(벌목장)에서 함께 작업을 했다. 오노르 마을에서 마침내 내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나 연이어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 밑으로 남동생을 세 명이나 봤다고 나를 추켜 세워 주셨다. 이후 나는 8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북적북적한 스미르늬흐 마을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란 눈을 가진 백인 러시아 사람을 봤는데, 언어도 다르고 외모도 낯설어서 놀라웠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 이곳 사람들이 왜 우리랑 달라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선사람들이 어떻게 사할린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강제징용을 당했는지,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던 당시 얘기를 그때 처음 설명해 주셨다.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우리 가족은 돌아갈 조국이 있고, 밀양 박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뿌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나’라는 존재를 당당하게 했다. 아버지 나이와 비슷한 1세 분들은 만나면 똑같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다. 당시 사할린은 고향이 같으면 서로 서로 의형제를 맺고 기념 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그 사진을 앞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셨다. 나 죽으면 이 사진을 누군가는 고향집에 언젠가는 가져가게 될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죽는날까지 간직하다가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간다. 그리고 누구나 항상 밤에 라디오 수신기를 켜고 한국 방송을 기다리셨다. 혹시나 고향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면서,...우리 아버지도 한국 노래를 들으시면서 자주 우시기도 하셨다. 당시 어린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노래가 즐거운데 왜 우시지?”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안하시고. 먼 하늘만 쳐다보시디가 독한 보드카를 한잔 드시고 주무셨다. 어느덧 나는 결혼을 하게 되어 집을 떠나게 된다. 88서울올림픽 때, 어느날 부모님 댁을 찾았다. 엄마와 아버지 두 분 다 눈이 퉁퉁 부어 계셨다. 밤새도록 우셨다고... 어제 늘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바로 아버지 ‘박정환’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셨다. 사방팔방으로 연락을 취해 사할린 동포들을 돕고 있는 일본의 변호사 타카기 켄이찌를 통해 편지로 연락을 하게 된다. 다음 해 아버지 친척의 초청을 받아서 나는 난생 처음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을 통해 한국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이시고, 아버지의 형과 남동생은 6.25전쟁 때 실종되셨다고 했다. 한 집안 삼형제가 뿔뿔히 헤어지게 된 것이다. 남의 나라들이 일으킨 전쟁이 만든 상처는 너무 컸다. 한국 방송에서 우리 아버지를 찾은 분은 한국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다. 소식이 주고 받다가 한국 적십자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리운 조국 땅에 발을 내렸다. 어머니는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외할아버지의 소식부터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고향인 하의도, 친척들이 사는 목포,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를 다 찾아가서 친척들과 눈물 젖은 상봉을 했다. 물론 서울도 가보았다. 제주도에는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업어 주며 키웠다던 조카들을 만나서 가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보자 마자 피를 나눈 형제라는 피붙이들이 나누는 뜨거운 정은 사할린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오라버니 연락처를 받게 되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겠다고....엄마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약속을 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에 친척이 있는 경우 외국방문 허가가 떨어졌지만 일본에서 친척을 찾고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면서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으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1995년에 돌아가셨다. 다음 해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엄마도 없으니 고국으로 가고 싶다.'라는 의사를 나타내셔서 우리는 가족 모임에서 '그렇게 해드리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영주귀국을 하셔서 처음에 아버지는 춘천 '사랑의집' 양로원에서 계시다가 나중에는 노환으로 재활기관인 인천 '사할린한인복지회관'으로 옮기셨다. 1년 후 나는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되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사할린에서 일을 그만 두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여러 가지 힘든 일과 통역을 하면서 휴일마다 인천 양로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찾아서 위로해 드렸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나서 출가를 한 맏딸이 출산을 하게 돼서 손녀를 돌봐주기 위해 완전히 사할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다. 그리고 나서 2008년에 아버지께서는 조국에서 10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사할린으로 가져와 어머니의 묘 곁에 나란히 안치해 드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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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전’을 마치며/이종선취월당 밝은 창가에서 이종선 시와 노래는 원래 하나이다. 노래가 시이고 시가 노래이다. 우리 시에는 낭만과 사랑이 들어있고, 정한과 흥이 녹아 배어 있다. 필자는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일 년이 넘도록 노래로 불리던 시를 붓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우리의 시를 붓으로 노래한 것이다.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연재하면서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붓이 시의 흥취와 운율의 고저장단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흐름은 미세하여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나 나는 내내 이 느낌으로 글씨를 썼다. 평시조는 사설시조를 제외하고는 대개 45자 내외로 글자 수가 한정되어 있다. 제한된 글자를 한 서체로 연작連作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같은 체제의 중복으로 자칫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변화를 주는 일이 절실했고, 나는 매번 고심하였다. 고체, 궁체, 민체의 모든 한글서체를 총동원했고, 필 속의 완급緩急, 먹의 농담濃淡과 획의 윤삽潤澁을 활용하여 시의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정, 장방형의 구도와 선면 형태 등 다양한 지면에 주제를 돋보이는 장법章法을 구사하였다. 종이도 장지, 한지 중국선지 문양지 등을 고루 써서 변화를 주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한글 서체 조형의 변화에 천착해 왔다. 한 글자가 지니고 있는 수평과 수직구조의 조형을 벗어나고, 정형화된 일정한 자간과 행간의 관계를 자유롭게 운용하는 것이다. 수평과 수직구조를 벗어난 불균형의 자형에서 생성되는 활동성을 이용하여 생동감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부정형적不定形的인 낱글자에 대소의 변화를 주어 글자와 글자를 조응하게 하고, 이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다음 글자들의 조응을 통해 안정을 이루어 가면서 행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행의 운용에 있어서도 낱글자의 운용에서처럼 첫 행의 불안한 구조를 다음 행이 보완하면서 안정을 이끌고 행과 행이 조응하여 전체 화면의 균형과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내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크고 작은 돌들을 이리저리 쌓아 이룬 석축이나 돌담에서 느끼는 자연미와 조화미를 내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마치 개성이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소통하고 융화하면서 건강한 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식물들이 모여 산야를 이루고 각기 다른 물체들이 온천지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과 맞닿은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연 속에서 순리를 따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삼라만상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필자의 이 작업은 주로 고체작품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는 민체에서도 이어져 얼핏 같아 보이지만 작품마다 글자마다 모습과 표정을 달리하였다. 필자는 문자를 대함에 한자를 중국 글이라 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우리 문화에 젖어들어 체화되었고, 한자를 이용하지 않고는 의미소통이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따로 할 수 없어, 한문까지야 능통할 바 없다 하더라도 한자 자체를 모르는 체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글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상형문자인 한자를 아울러 쓸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문자의 소리와 표정을 두루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한자를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독해를 위해 필요한 경우 작품에 기꺼이 이용한다. 이 연재 작품에 한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 친숙하게 사용됐던 문투이기에 현대인들에게는 낯설지만 피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썼다. 특히 시인의 시상을 옮기려 하였고 창자의 흥을 얹으려 하였다. 글자와 행간에 운율을 실었고 붓 끝에 흥을 실어 붓으로 노래를 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 내 마음 속에서만 울리었고, 춤사위는 손가락 끝을 통해 보이지 않는 대로 붓 터럭의 가닥을 흔들었다. 작품을 쓰는 내내 태백이 되어 달빛 아래 술잔을 기울였고, 가끔은 도연명을 만나려 오류촌을 찾기도 했다. 황진이를 그리워하다가 이름 모를 시인을 만나 코가 삐뚤어지기도 여러 번. 세상에 좋다는 산촌 경개를 거침없이 두루 하였으며, 때론 속절없는 외로움에 가슴을 에다가, 있지도 않는 부귀공명을 버리고 끝내 운림 처사가 되었다. 고래 영웅들이 나누어 누린 복락을 나는 붓으로 노래를 부르며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이 아니 어찌 천복이 아니겠는가. 이번의 전시회는 국악신문에 2020년 9월부터 매주 연재하였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작품 중 52점이 출품되어 백악미술관에서 12월 9일부터 1주일간 진행하였다. 내가 드러낼 수 있는 한글서예의 모든 것을 선보이는 기회였다. 붓으로 불린 우리 음악사설이 국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물론 서예인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호응을 이끈 것은 성과라 하겠다.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국악신문사에 큰 고마움을 전한다.(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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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학관” 그 정체성과 미래를 위하여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이만유 지난 12월 4일 문경시 산북면 소재 문경문학관이 개관 3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지역 문화 창달과 문학 저변 확대를 위하여 사재를 들여 문학관을 설립한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문경문학관 설립을 계획할 때 지역 문인들에게 문경문학관이 개관되면 적절한 시기에 문경시에 기부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은 그대로 설립자가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지역 문학 진흥을 위해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문학관 이름을 문경문학관으로 하는 것과 운영하면서 지역 문학회나 문인들과의 마찰과 갈등이 있는 등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설립 당시 시민들의 공공 소유 지명인 "문경”을 개인 문학관이 쓴다는 것에 대해 일부 지역 문인 등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고, 이 문학관은 거기에 이름을 올린 개인들의 문학관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존작가의 이름을 걸고 문학관을 세우는 것도 예가 없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이곳은 13명 이름으로). 그 유명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시를 쓴 국민시인 안도현 시인도 공개석상에서 내 생전에 내 이름으로 문학관을 세우거나 이름을 올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개관할 때 "문경 문학의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구호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경문인협회가 창립된 지 50여 년의 역사가 흘렀고 문경에 살면서 문경을 노래하며 문경에서 문학 활동을 하신 문인들께서 50여 년 전에 이미 빗장을 열었고 그 후배 문인들이 대를 이어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해 왔는데, 지금에 와서 현재 생존해 있는 대다수 출향 문인과 소수 지역 문인의 사진과 이름을 걸고 마치 지금까지 문경에는 문학도 문인도 없는 것처럼 하며 문학 불모지 문경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듯한 용어를 사용하여 울분을 자아내었고,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문인들께서 어려운 시기에 정말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고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신 분들이 많다. 아마, 이미 돌아가신 원로 문인들 혼령께서 저승에서 이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소위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었다는 문학관에 걸린 생존 문학인 중 다수는 문경문인협회 회원도 아니고 외지에 살면서 문경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고 심지어 출향 문인들까지 참여하는 문경문인협회 문예지 "문경문학”에 원고를 청탁해도 잘 응해주지 않던 분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이분들은 훌륭한 문인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이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었다는 것은 어불성설 말이 되지 않으며 어이없는 일이다. 과연 이분들 말고 문경문학관에 문경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사진을 걸 문인은 없을까? 물론 문학관 이름에 문경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설립자 개인의 것이니 누구의 사진을 걸던 누가 뭐라 하겠는가? 지역 유림에서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을 모실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듯 문학관에도 문경을 대표하는 문인을 선정할 때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잣대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선정해야 하는데 몇몇 추진위원들이 선정했는지 설립자가 임의로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무형의 가치를 지닌 문학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저울에 달아 좋다 나쁘다를 구분 선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매년 시행하는 문경문학상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경문인협회가 주관하고 문경문학관 설립자가 상금을 후원하였는데 지난해 문경문학상 시상식 개최 후 보도자료를 보면 이 사업이 문경문학관 사업으로 보도가 되었다. 슬쩍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이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였더니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편이 갈라지는 등 이로 인해 문경문학회가 혼란과 갈등으로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했다. 문학이 무엇인가. 문학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는 문인들이 스스로는 물론이고 시민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야 하겠는가?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지냈는데 이 무슨 변고인가. 남을 돕거나 후원을 하는 사람은 남이 모르게 하고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 있어야 빛이 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지역 원로 문인께서 문경문학관의 미래를 걱정하여 이미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있었고 개관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문경시에 기부하시던가 법인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건의성 의견도 설립자에게 제시한 것으로 안다. 결론적으로 문경시민의 공유, 무형문화자산인 "문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문경문학관”을 개인이 계속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비록 개인이 사비로 설립했다 하더라도 문경이라는 이름을 쓴 이상 사유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문학관 2층에 설립자의 조상인 퇴경당 권상로의 유물 등으로 전시실이 개설되어 있고, 12월 4일 행사 시 설립자의 대형 석재 시비 제막식이 있는 등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문경문학관의 미래를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아래 3가지를 문경문인협회 전직 회장이며 사람 시민이며 문인의 이름으로 제안한다. 첫째, 약속한 대로 문경시에 기부한다. 둘째, 법인화한다. 셋째, 문학관 이름을 변경('문경'이란 명칭을 제거하고)한다. 이를 위한 문경문학관 설립자의 결단이 필요하며, 여의치 않으면 시민들과 문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개최하고, 여론조사를 하던가 해서 이른 시일 내에 지역 현안의 하나를 원만히 해결하기를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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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만들기공동체, 북녘 음식 ‘꼬리떡’ 나눔 행사지난달 31일 내고향만들기공동체에서 용인시의 후원을 받아 고향음식체험 꼬리떡 만들기 행사가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2층에서 진행되었다. 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내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하고자 만들어진 단체이다. 지역주민과 이웃이 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고향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행사를 많이도 했다. 행사에 앞서 그동안 단체의 활동성과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2020년 1월에 만들어졌으며 지역주민들과 협업하여 지역 답사 등 여러 활동을 했다. 경험을 기초로 올해 용인시와 남북통합문화센터의 후원을 받아 총 11회 고향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행사를 진행했다.앞으로 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내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지역주민과 함께 함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경제적, 정서적 자립을 이루고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여 마을활동가로, 봉사자로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행사에는 그동안 꾸준히 후원해오신 분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떡은 우리의 오래된 문화로 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의례나 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떡이다. 굿을 하려고 해도 떡이 있어야 하고, 개업을 하거나 이웃에게 인사할 때도 떡을 돌린다. 떡은 만들고 나누는 전통적 관습으로 지난 1일에는 ‘떡 만들기’ 문화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루 내고 쪄내고 삶은 과정이 번잡한 떡 만들기 중에서 꼬리떡은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맛과 멋을 동시에 낼 수 있어 선물해도 손색이 없는 떡 종목 중 하나이다. 가장 손쉽게 만들고 선물하기 좋은 것이 꼬리떡이다. 꼬리가 있어 꼬리떡이다. 꼬리떡은 익어가는 가을처럼 색의 조화로 운치를 더하는 떡 종류 중 하나이다. 쌀가루는 찰지게 반죽하여 모양은 잎사귀 모양으로 손으로 비벼 꼬리를 만든다. 반죽이 무르면 꼬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문양이 새겨진 떡쌀을 박기도하고 동그랗게 말아 왕사탕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다른 떡에 비해 만들기도 쉽고 선물로 이웃에 나누어도 손색이 없다. 색의 조화를 넣어 멋을 내는 것은 결혼이나 의례 행사가 있을 때이다. 고향이 북쪽인 나에게 꼬리떡은 반갑고 익숙한 음식이다. 일상적으로 쌀가루가 아닌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식으면 굳어져 꼬장떡이라 하기도 한다. 가루만 있으면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모양도 동글납작하게 만들어 세 손가락 도장을 찍기도 하고 잎사귀 모양으로 꼬리를 뽑기도 한다. 옥수수 꼬리떡은 쪄내지 않고 반죽하여 가마에 빙 둘러 붙인다. 김을 올리면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다 익었다 싶으면 떡을 떼어내는데 꼬리떡은 밑면이 과자처럼 바삭해있다. 불의 세기를 잘 조절하고 익어가는 냄새를 잘 알아야 맛있는 꼬리떡을 먹을 수 있다. 남쪽에서는 쌀가루로 만드는데 만들기도 쉬워 아이들도 따라서 체험해 볼 수 있다. 내고향만들기공동체에서는 2020년에 꼬리떡 만드는 행사를 어른과 아이와 같이 했고, 지난달 31일에도 꼬리떡 만들기 행사를 진행했다. 전통적인 관습이 있으므로 떡은 음식을 넘어 나눔과 배려, 정(情)을 주고받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남쪽의 생활은 살아있는 순간 모두가 선물이다. 받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고향 정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다. 고향에서 일상으로 만들었던 꼬리떡을 만들고, 나누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서럽다 아니할 것 같다. 가을 단풍이 향수를 자극하고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더욱더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꼬리떡을 만들어 이웃과 이웃에게 나누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뒤이어 꼬리떡 만들기 행사가 진행되었다. 꼬리떡은 고향에서 익숙히 해먹던 음식으로 남쪽에서는 색다른 음식이기도 하다. 재료와 만드는 방법은 같지만 떡에 꼬리가 붙어 있는 것이 다르다. 쌀가루가 귀하기 때문에 색깔의 조화가 있는 꼬리떡은 잔치상에나 오르고 일반적으로 옥수수가루로 만든다.떡을 담아보내는 봉투에 나눔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가 씌여진 것이 이색적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봉투에 시를 계속해서 인쇄를 해서 사용하려고 한다.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앞으로도 봉사와 체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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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1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공모전은 북방지역 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해온 것을 격려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 씨는 수기에서 70여년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오사카에 묻히신 외할아버지 묘를 찾게 돼 70년만에 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박 씨는 "사할린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린 밀양 박씨 가문의 영광이지만, 동시에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힌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민족방송은 올해 코로나19로 별도 시상식을 거행하지 않고 수상자에게 바로 전달하기로 했다. 수상작은 KBS라디오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연재한다. 이산(Diaspora)과 나의 외할머니(1부) 나는 작년에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에 걸려서 죽음의 고개에서 헤매다가 살아났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이셨다. 꿈에서 만난 어머니에게 "지금 너무 아퍼요.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매일 기도를 했다. 20여일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다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나는 살아 생전에 못 다한 고조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이어지는 긴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다. 4대에 걸쳐서 가라후또(사할린)에 살게 된 조선인의 이야기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에 인한 이산과 다시 일본 땅으로 끌려가는 이중징용을 당하게 되는 슬픈 가족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어머니 현민제(현남열,1928년생)는 제주도가 고향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1944년 우리 어머니는 16세가 될 무렵에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 오신 아버지를 찾기 위해 홀로 제주 본가 할머니 곁을 떠나 사할린으로 건너오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은 어린 아들과 남편은 강제징병으로 끌려가고 어린 딸들과 주부들까지 정신대로 일본이나 남영군도나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이 되어 가는 시대라서 할머니는 어린 손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있는 사할린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외조부님이 되시는 우리 어머니의 부모님은 두 딸을 본가에 맡기시고. 두 분은 1940년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아들 하나만 데리고 계약기간 2년만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기다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할린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우리 외조모는 일제에 의해 가족이 헤어지는 첫 번째 이별을 당한 것이다. 제주도 친할머니 집에 남겨져 함께 살던 언니가 시집가서 어린 두 아들들을 돌보고 있게 되자, 할머니는 손녀에게 "얘야, 가라후토 아버지를 찾아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몰린 일제가 조선 어린 여자들을 정신대로 끌고 가는지라 할머니가 겁이 나서 손녀딸을 부모가 있는 사할린에 보내려고 한 것이다. 꽃같은 16세를 맞이한 소녀는 늘씬하고 고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 볼 때마다 더욱 불안해진 할머니는 너 혼자라도 가야 한다고 떠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미수가루를 뱃속에 차고 홀로 배를 타야만 했다. 아니면 정신대로 끌려갈 판이다. 배 밑바닥에서 간신히 20여 일 지내고 나서야 일본땅을 통해 사할린에 도착을 해서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에수토루) 구역의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바로 며칠전 일본으로 이중징용을 당해 17살 어린 아들까지 데리고 가라는 일제에 의해 이미 일본 고베의 한 탄광으로 강제동원 되어 떠나버린 뒤였다. 그리운 아버지는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낯설은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을 뒤로 하고 2년만 있다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난 후였다. 당시 일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 탄광으로 강제로 끌려가야만 하는 세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이 되셨다. 남겨진 두 딸과 함께 평생 동안 힘들고 외로운 여생을 사셨다. 고향에서 끌려갈 때는 2년만 일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다가 이중징용으로 다시 일본으로 내몰린 것이다. 1년 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부자는 일본으로, 모녀는 사할린으로....... 갈라지고 찢어져야만 했다.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서 한 개인이 당해야만 하는 ‘이산의 이산’을 겪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두 번째로 당하는 가족의 이별인 것이다. 사할린에 도착한 어머니는 가족을 만난 기쁨보다는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날 수 없다는 슬픔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까지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다고 외할머니가 통곡하시는 모습이 늘 생생하다고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땅에서 돌아온 사람들만 만나면 "하늘 같은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샛별같은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 이런 사람을 아십니까"라고 찾고 찾으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더 슬펐다고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젊은 나이에 평생 수절하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그리워 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딸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민제야 너는 반드시 나 대신에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손을 꽉 잡으셨다. 죽는 순간까지도 너무나 억울해서 눈도 못 감고 떠나가신 어머니의 두 눈을 감겨드리며 "네”하고 굳게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마지막 그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조국은 우리를 외면하고 결국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식들과 함께 이국땅에 묻히게 된다. 이별과 고향, 이 두 가지가 외할머니에게 뼈아픈 한이 되어 살아오셨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반드시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려야 한다고 내 귀에 못이 박히게 중얼거리셨다. 돌아가시는 날 하얀 눈이 많이 내렸다. 나를 불러서 바라 보시면서 "영자야. 내가 지켜드리지 못한 나의 어머니와의 약속을 너는 지켜야 한다. 반드시 외할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라고 유언을 남기시고 눈을 감으셨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산의 고통은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나에게 대물림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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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아리랑은 역(易) 사상에서 나왔다”국중성/익산향토사학자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담긴 민족의 노래로 이어왔다. 그런데 그 노랫말이 어디서 나왔으며 그 뜻이 뭔지 일삼 궁굼했는데 알고 보니 아리랑은 주역(周易)의 하도(河圖)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이란 우리 선사세대적부터 학문의 최고 경전으로 읽혀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유학자들이 평생을 이에 종사했어도 일가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 이 역이다. 그런 가운데 조선시대 학문적 이념이 되었던 퇴계 이이의 이기론(理氣論) 형성에 교량적 역할이 되었다는 서경덕 선생은 별에 하도를 걸어 놓고 3년 동안을 고심했다는 것은 하도가 우리 전통사회에 끼친 영향의 파급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 오게 되었던 것이다. 요즈음 역이라 말하면 때 지난 옛 것으로 치부할지 모르나 이는 고유한 우리 정신문화의 본 모습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역에서 말하길, "하늘에서는 상(像)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形)을 이룬다.(在天成象 在地成形)”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세상 물상이 먼저 있은 후에 수(數)가 있다는 뜻이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형체가 있는 물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으로 만물은 수로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의 근원이라 하는 하도의 수리(數理)에 의하면 천체 우주만상이 존재하는 과정은 1에서 10까지의 수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생존과정은 1에서 9까지 이루는 과정을 거쳐 10(十)에서 완성이 되니, 10까지 이루는 과정의 행로는 수많은 고난의 역정을 극복해야 10에 이른다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10이라는 수는 숫자의 끝이요, 그 다음에 오는 수는 1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이것이 세상만상의 순환 이치로서 곧 태극의 진리라 한다. 이와 같은 수론은 서구의 학설에서도 있다. 그리스 철학자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일상 쓰는 수는 실용적인 면보다 이론적인 천문학적 수론으로 본다하여 "10이라는 수는 이미 완성된 수이고 그 다음에 오는 수는 1부터 새로 시작이 되니 10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완전수이므로 10의 근원은 1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역의 하도 수리에서 세상사는 시작에서부터(1~9)의 과정에 대한 수련을 거쳐야 10에서 완성이 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상징하는 수이므로 이는 유(有)의 극이라 무(無)의 시작이니, 이것이 천체 우주만상의 근원인 태극(태극)의 진리라 한다. 그래서 자연의 현상계는 계절의 순환체계가 새로운 봄이 시작되면 여름에서 성장하고 결실하는 가을을 거쳐 겨울로 마감이 되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다시 봄으로 새로이 시작되니 이러한 순환체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변함이 없다. 같은 체계 안에 속해 있는 인간도 태어나면 성장하고 늙어지면 죽는데 그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이어서 새로 태어남이 계속되는 이러한 순환의 질서 속에 우리가 존재하여 있다는 그것을 거쳐야 할 과정일 뿐 그 과정의 순환은 쉼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천체 우주의 생성소장하는 순환체계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그것은 과정의 계속일 뿐 세상사는 끝이 없음으로 하여 역에서도 64괘 중 마지막 괘는 끝 괘라 하지 않고 미제괘(未濟卦)라 하였다. 이 같이 만물의 생성소멸하는 순환작용이 계속 되는 것을 함축적으로 도식화 하는 것이 하도이며 이 중앙의 핵심을 일러 태극이라 하였다. 이 태극을 상형화한 도문이 한문글자 아(亞)자와 맒은 모양이라는 뜻에서 그 아(亞)자는 곧 천지만유의 이치가 들어있는 태극이라 상징하였고, 그 아(亞)자 속에는 백십자 (十)가 들어 있다하여 이로부터 十자 논리가 형성되었고 그 十자(太極)에 이르기 위해서는 1에서 9까지의 고난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에서 글자 풀이로 아(亞)자 속에 리(裏)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개와 고개(嶺)을 넘어야 한다는 이 세 글자를 합하여 아리령(亞裏嶺)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아리령이란 인생역정의 과정이 이 아(亞)자 속의 十자에 대하여는 인간세대 학문이 있기 이전부터 인생 역정을 十자로 표현한 것은 멀리 원시 선민들이 남긴 암각화나 갑골문 등에서 찾아 볼 수가 있었으니 이 十자의 의미는 그 때부터도 인생 삶의 표현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十자의 태극은 천체우주 순환체인 염력은 만물이 대상임으로 인간만의 것이 아닌 것이라 하겠다. 그러한 광대무변한 태극의 아(亞)자에 대한 이 뜻을 세상에 파급시킨 것은 남사고(南師古)의 격암유록(格菴遺錄)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한 형식을 보면 아(亞)자를 파자문자(破字文字)로 하여 가사체(歌辭体)로 노래를 지어 전하였는데 궁(弓)자가 등을 맞대면 아(亞)자가 된다는 뜻으로 우리가 어릴적부터 ‘짝자궁’ 노래를 가르쳐 왔고, 그것은 하늘이 내린 도리(道理)라 하여 ‘도리 도리’하며 고갯짓을 시켜왔고, 성년이 되어서는 아(亞)자 속의 十자의 진리를 떠나서는 십리(十裏)도 못가서 발병(發病)이 난다는 노래로 아리랑(랑)을 부르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은유적인 파자문 형식에 되어 대중적인 파급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亞)자를 구비전승으로 이어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가 있는 아(亞)자는 상징적으로도 창호문살이나 가구 장식에 이르기 까지 이어왔으며 그 이면에는 태극사상이 우리의 정신문화에 끼쳐온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리랑의 아자는 역의 구도에서 나왔으며 그 의미는 천체 우주관적인 광대무변한 원리가 담겨있다는 그 뜻이 아리리령(亞裏嶺)이었다. 하도가 중국에서 건너온 낮선 학문이었으나 우리의 생활풍토에서 여과의 세월을 거쳐 우리 모습으로 나타난 아(亞)자 속의 十자의 과정은 저 멀리 원시선민적 부터 고난의 고개와 고개를 넘어 이어온 행로가 한반도에 이르러 아리령(亞裏嶺)의 고개를 넘어 아리랑으로 승화 되었던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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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금의 시선] '미나리김치'위영금(도산통일연구소 연구위원) 요즘 ‘미나리’영화가 인기몰이다. 지극히 평범한 이 영화는 미국으로 이주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비교되는 인기몰이를 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코로나로 텅 빈 영화관을 독차지 하고 ‘미나리’ 영화를 보면서 정이삭 감독이 ‘미나리’를 호명하여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는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네 얼굴은 왜 그렇게 납작하니?’ 데이빗(엘런 김)에게 건네오는 낮선 곳에서 친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막내딸이 이주한 이국땅에서 한국인이 애호하는 화투를 손자에게 가르쳐 주고 가지런히 칫솔질을 따라 하며 어느새 서로를 닮아가는 그곳, 척박하지만 인간미 있는 그곳,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울컥했던 것은 모니카(한예리)가 한국에서 온 어머니를 눈물로 포옹하는 장면이다.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감동적인 설정인가? 그리고 어머니가 꺼내 놓는 붉은 고추가루를 받고 또 다시 울컥해 하는 딸, 그리고 고향의 언어는 잊혀진 것을 기억하게 하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머니는 고향땅에서 가지고 온 미나리 씨를 미국 땅에 뿌린다.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 약효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손자의 병은 기적적으로 호전되지만 대신 할머니가 병을 얻고 가족들이 집을 비운 날에 정신을 잃어 실수로 그동안 일궈온 모든 농작물과 집을 태워버린다. 병원에서 손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 가는 할머니, 그곳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가족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감독의 의도이다. 그리고 그 힘은 가족이라는 의미로 전달된다. 영화에 몰입하면서 고향에서 늘 먹었던 ‘미나리 김치’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탈북민이라는 존재의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나리’는 번식력이 뛰어나고 식용과 약용으로도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물이다. 그리고 너무 흔하게 널려 있어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고향음식이다. 미나리는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습지나 음지에서 잘 자라고 항암작용과 염증치료에도 좋고 특히 간에는 특효이다. 해독제로 쓰인 미나리는 생선을 잘못 먹어 부작용이 있을 때 이것을 처방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국가정책으로 미나리밭 조성까지 했으니 지천에 널린 것이 푸른 미나리이다. 봄부터 시작하여 가을까지 자라는 미나리는 냉국이나 무침으로 먹기도 하고 김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미나리 김치’는 한약 같은 특이한 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절임으로 봉인했다가 며칠 뒤에 발효가 되어 숙성이 되면 꺼내 먹는다. 이제는 그 맛도 잊혀진 ‘미나리 김치’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미나리처럼 척박한 땅에도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모습은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러나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는 희망조차 없는 탈북민의 소망은 무엇일까? 영화는 바퀴달린 집이라도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이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타국 멀리 있더라도 어머니를 만날 수 있고 고향의 맛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4월 25일에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인이 서툴지만 ‘미나리’라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나도 이 사회에 속해 있는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에게 호명되는 것 같아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필자 소개 위영금: 경기대학교 대학원 북한학 박사 시집 '두만강 시간' 출간(2020) 도산통일연구소 연구위원 내고향만들기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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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문경새재아리랑 이 지경, 누구 탓인가?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지난 4월 6일 지역 모 신문사 사설에 "문경새재아리랑,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읽고 문경시민들로 구성된 순수 민간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사설에는 문경새재아리랑의 현 상황과 문제점에 관해 기술하고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라고 했는데 진정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아리랑도시 문경’은 존재하는 건지? 묵은 질문을 문경시에 던져본다.”라고 했는데 지금 이 사태는 문경시의 책임만 아니고 누구도 아닌 모두의 잘못이다. 아니 사설에서 말한 아리랑의 주역이고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 갈라지고 찢어지고 서로서로 인정하지 않고 조그마한 기득권만 있으면 그것도 권력이라 생각하면서 편 가르기하고 배제하고 다른 사람이나 단체가 아리랑 전승, 보급 사업을 하면 방해하면서 누가 누구를 탓하는 것인가? 문경새재아리랑에 애정을 가지고 문경새재아리랑의 뿌리를 찾고, 학술적 탐구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가치를 높이려고 찾아온 외부 인사들까지 실망하게 되었고 한 민간단체가 시대에 부응, 정성을 다해 활동하면서 코로나 19 방역을 위한 '코로나아리랑'을 만들어 발표회를 할 때, 외지 아리랑 전승 단체와 국내 국악계에서 큰일 보람찬 일, 아리랑 역사에 남을 일을 했다고 극찬할 때 문경시도 문화원도 전승자도 지원과 격려는커녕 관심 가져 주지 않았고 외면했다. 아리랑 관련 단체에 대한 지원을 7년째 끊고 올해 아리랑제 예산 1억 원이 반으로 줄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즘 문경시의 아리랑 정책이 어쩌면 한때의 지자체장 치적을 위한 일회용 도구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스러움을 가지지만 그 원인은 아리랑 전승, 보급 단체의 내부 갈등에 의한 것이고 아리랑제도 모든 아리랑 관련인과 관련 단체가 모이고 힘을 합쳐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아리랑제 예산 1억 원이 내실 있고 더 다양성 있는 프로그램이 되어 추진되었어야 했는데 문경새재아리랑이 아닌 헐버트아리랑을 중심에 두었고 아리랑을 부르는 국악인이 아닌 일반 대중가수를 초청하는 등 정체성을 잃은 행사와 축제와는 무관한 아리랑 표시도 없는 부채를 선물용으로 구매 배부하는 등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이런 비효율적 예산집행이라면 1억 원도 많은 것이며 올해 예산이 감액된 원인 제공을 했고, 줄어도 할 말을 못 할 지경에 처한 것인데 무슨 남 탓을 하는지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아리랑도시 문경이 빛나고 문경새재아리랑의 보급과 전승을 제대로 하자면 내가 최고구나 아니면 안 되고 내 입맛에 맞으면 인정하고 나만, 우리 단체만 아리랑을 위해 일했다. 일한다라는 아집과 편견과 소아적인 자세는 결코 버려야 한다. 문화나 아리랑이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 소유물인양하는 그런 의식이나 행동을 한다면 그건 문화인으로 수치고 자격 미달이고 문화예술 도시 문경의 격을 낮추는 일이 될 것이다. 아리랑 관련 일부 리더, 단체의 이런 행태와 문화에 대한 인식 결여는 물론이고 아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독선적, 편향적인 시각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독이 되어 오늘 문경새재아리랑이 빛을 잃게 되고 내부 갈등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라도 아리랑 정신을 살려 너도, 나도 아리랑의 주역임을 인정하고 모두 하나 되는 아리랑도시 문경이 되길 바라며 문경새재아리랑이 7만 시민, 5천만 모든 국민이 알고 부르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한 조직이 붕괴하는 것도,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 때문이며, 정의롭지 못하고 내부 분란이 원인이 된다. 아리랑 관련 관민 단체 모두가 내 팔 네 팔 따로 흔들지 말고, '대동/상생'이라는 아리랑 정신을 다시 되새기면서 자기반성과 각성을 필요로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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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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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박동진 중사를 추모하며 - - 이만유 - 피 끓는 나이 약관, 스무 살에 장렬히 산화하신 6·25전쟁 호국영웅 님이시여! 그날,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있어 오늘 이 땅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그 운명이 걸린 "인천상륙작전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첩보대의 지상명령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야 하는 막강한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불타는 용기와 애국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셨으니 장하도다 그 이름 특수 상륙부대, 해군 육전대 1소대 1분대장 박동진 중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 8월 20일 새벽 영흥도 탈환 작전에 돌입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시다 마지막 발악하는 잔당을 맞아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나가 첫 번째 수류탄에 이어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순간 애석하게도 적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 장렬히 산화하시니 아! 슬프도다 님이시여! 님의 불타는 가슴에서 애국의 붉은 피 솟구치던 그날, 고향 주흘산도 울고 영강도 울었습니다 님이시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 승전의 북소리 지금도 높이 울리고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문경의 아들 대한민국의 건아여! 6·25전쟁 영웅이시여! 이제 고이 잠드소서 비록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이 있는 한 님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영웅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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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 100년 그들의 증언] 진도군 편: 강송대, 남도잡가의 '명창'흥타령 등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34호 '남도 잡가'의 기예능보유자. 남도잡가는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흥타령, 성주풀이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 말기 번창하다 서양풍 노래에 밀려난 조선조 마지막 서민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강송대는 창에 소질이 있어 어머니 이근녀 선생에게 육자배기를 배웠다. 어머니에서 강송대 그리고 손녀까지 이어지는 4대 국악 집안이다. 어머니 이근녀는 일제강점기 명창인 이화중선의 제자였을 정도로 소리에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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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그들은 우리의 땅도, 역사도, 문화도 빼앗아 갈 것이다이용수(판소리 이수자, 서울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참으로 걱정이 된다.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 눈에 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은 앞으로 계속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우선 중국부터 따져보자. 중국은 무서운 나라다. 몇년 전 사드보복 하는 것을 보라. 그들은 그간 동북공정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땅도 이미 자기들 수중으로 들여놓고 있다. 자신들의 땅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자기네의 것이라고 하고 만리장성도 확장하여 다시 만들어 놓고, 이제는 한강 이북은 자기네의 지배를 받았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고사도 왜곡하고 있다. 몇 년 전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대통령에게 이미 그런 뜻으로 자신 있게 말하지 않는가? 우리의 상고사도 자기들 위주로 만들고, 우리의 배달환국의 조상인 태호복희씨, 신농씨, 치우천황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제는 단군상마저도 크게 만들어 놓고 자랑하고 있다. 아리랑도 자신들의 문화재로 등록하고, 한복도 자기네 옷이라고 하고, 또 요즘은 김치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민족음악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까지 자기네들의 문화재로 등록하여 놓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문화를 뺏을 시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네의 조상인 태호복희씨가 만든 8괘의 태극기도 앞으로는 자기네 조상이 만든 것이니 우리가 쓰지 못하게 할 것이고, 우리의 판소리도 자신들의 문화라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 판소리는 대대로 내려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글로벌하게 만들어 놓은 문학의 보고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9000년 전부터 내려온 반고니 노고할미니 하는 모든 신화적 인물은 물론 앞에서 거론한 환인시대, 환웅시대, 단군조선 시대의 7,200년 우리 조상의 인물들이 다 나오고 중국의 요임금, 순임금을 비롯하여 우, 탕, 주문무 등 군주와 영웅시되는 인물들이 다 등장한다. 아시아의 역사이기도 하고 세계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까지를 총괄한다. 철학가와 시인 등 잘 알려진 인물은 물론 지리적으로도 치우천황시대 우리가 지배하고 살았던 중국대륙 전역은 물론 아시아 남방전역과 한반도를 다 대상으로 하여 소설과 판소리로 만든 것이다. 수궁가는 인도의 불교이야기 ‘전등신화’에서 시작하여 중국 남해바다를, 적벽가는 중국의 적벽강에서 시작하여 오, 위 촉 3국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역사적 사실 외에 판소리 속의 해학과 세세한 작품구성은 모두 우리 식으로, 흥부가와 심청가도 중국 일대와 한반도를 대상으로 지역과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설정하였다. 물론 춘향가는 주로 한반도와 남쪽지방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고. 이제 중국은 그럴 것이다. 판소리 속의 인물과 지역의 소재가, 그리고 한시를 비롯하여 문화적인 요소가 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판소리는 자기들이 만든 중국의 것이라고 언젠가는 주장할 것이다. 지금 우리 판소리 하는 세대가 가고 조용해지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중국의 문화가 오래 전부터 이렇게 훌륭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진짜 판소리 속에는 어마어마한 우주가 다 들어있고, 모든 세계의 문학과 음악이 다 들어있는, 그래서 우리 민족이 앞으로 먹고 살아갈 콘텐츠의 보고인 것이다. 보아라, 판소리의 위력을!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지금 BTS의 한류에 이어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전 세계 젊은 층의 유튜브 3억 뷰를 달성하여 또 하나의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또 한국의 방송국마다 진행되는 트로트의 참가자들 중에 잘한다는 평을 받은 참가자는 예외 없이 그간 판소리로 목청을 틔웠거나 목구성을 제대로 잘하는 경연자였다. ‘범 내려온다’는 수궁가를 그대로 옮겨 춤과 함께 공연한 것이 히트를 친 것이지만 주요 원인은 바로 그 장단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엇모리장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이 시절 ‘땅따먹기’놀이와 같이 땅 위에 선을 그어놓고 두 발로 서 있다가 왼발로 내딛고, 다시 또 왼발로 뛰는 깨금발 식의 장단이다.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장단이 아니고, 약간 엇박자를 내어 불안전 하는 듯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흥을 돋워주는 징단이다. 마치 지난 2002한일월드컵 때 응원박수 치는 것과도 같은 장단이다. "대-한민국!” 하며 소리내어 응원하면 이어서 "따단- 따. 단-따-!”하며 약간의 텀을 두고 엇박자로 나가는 그 장단을 말한다. 이 장단의 응원으로 당시 응원기에 무서운 얼굴상으로 그려진 우리 배달환국의 14세 천황을 ‘붉은 악마’라고 해서 자손들이 버릇없이 이름을 붙였지만 조상님은 그것도 어여삐 보아 우리나라를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 주셨다. 이번에도 같은 장단이라 할 수 있는 ‘범 내려온다’도 우리만의 엇모리장단이다. 이 장단은 어디에고 함부로 나오는 장단이 아니고 판소리 3, 4시간을 하는 한바탕에서 한 두 번 나올 정도의 장단이다. 언제나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일 때, 예를 들어 하늘에서 흰 수염을 기른 도사나 혹은 천사가 내려온다거나, 산에서 영험한 짐승인 호랑이가 내려온다거나, 고승이 나타나거나 무서운 장수, 예를 들어 관우나 장비 또는 조자룡 같은 무서운 장수가 나타날 때 위엄있게 하는 소리가 바로 이 장단이다. 우리민족을 앞으로 먹여 살릴 콘텐츠는 바로 판소리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장단으로 흥을 잘 살려야한다. 그러니 이처럼 판소리 속에 젖어있는 문화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그간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상고사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우리문화를 정립하여 확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못 박아 놓지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정부가 앞장서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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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프로젝트] 명인, 명창의 삶과 음악이야기 - 한국무용의 건축가, 배정혜한국무용의 건축가, 배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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