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
(22) [문경의 King Road 4] 문경을 방문한 역대 대통령이만유 (향토사 연구원) 절대왕정 또는 절대군주제 하의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아니지만 지금도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권한과 책무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시작으로 하여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왕은 아니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통치자로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이 문경을 방문했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단편적이나마 문경과 함께한 근현대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제2대, 제3대 이승만 대통령의 문경 방문은 1957년 9월 26일 문경시멘트(쌍용양회 문경공장) 공장 준공식 때였다. 국내 최초의 문경시멘트 공장 건립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재정 지원을 통해 1955년 11월 30일 기공하여 1957년 9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했다. 당시 해외 원조가 대부분 소비재 중심이었던데 반해 문경시멘트 공장 건립은 생산재 시설에 대한 투자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녔다. 연간 2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는 곳으로 당시 충주비료 공장과 함께 수학여행 및 산업시설 견학지로 유명했었다. 대한민국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쌍용양회 문경공장은 61년 만인 2018년 4월 30일 조업을 중단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경상북도와 문경시가 산업 역사와 보존 가치가 높은 건축물을 "산업 유산”으로 지정하고 공장을 포함 주변 20만㎡ 용지에 사업비 2,697억 원을 투입해 수소연료전지발전소, 익스트림 스포츠 테마파크, 영화 창작 스튜디오, 국립산업역사박물관, 청년 창업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문화 창작 스튜디오 설치 등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 윤보선 대통령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1962년 3월 퇴임 후 그해 봄에 문경새재를 다녀갔다. 문경새재는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된 옛길로 사적 147호로 지정된 곳이며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인 문경새재에 산행을 오셨다가 새재산장(새재할매집)의 돼지고기 양념구이를 드셨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문경새재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3. 박정희 대통령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및 제5·6·7·8·9대 대통령으로 18년 5개월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시절부터 문경에 총 10여 차례 방문하였다고 한다. 1976년과 1978년 11월 24일에 청운각, 문경초등학교, 문경새재를 방문하였으며 이때 문경새재 옛길을 포장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하라는 지시를 하여 지금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명품 길 문경새재(명승 32호)가 자연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1937년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초임지로 1937.4∼1940.3월까지 3년간 문경보통학교(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訓導=교사)로 재직한 관계로 문경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그때 박 전 대통령이 거처했던 하숙집으로 청운각(1978년 10월 경상북도 보존 초가옥 1호로 지정)이 보존되어 있고, 여기에 관련 자료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제가 열린다. 4. 최규하 대통령 제10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7월 29일 가은읍 수해 현장을 시찰하고 문경새재를 방문하였다. 이때 건의가 있어 1관문 주흘관까지 도로포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5. 전두환 대통령 제11·12대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4월 문경군청, 대성새마을유아원과 수평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예비군 훈련을 참관하였다. 6. 노무현 대통령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2월 15일 문경휴게소 광장에서 열린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상주 구간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퇴임 후인 2008년 6월 23일 권양숙 여사와 함께 관광차 문경새재와 오미자체험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7. 박근혜 대통령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6년 12월 27일 문경을 방문하여 마성면사무소에서 지역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문경 거점산지유통 사업설명회”에 참석하여 300여 농민들의 박수 속에 입장하여 사업추진 상황을 듣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문경초교 교사시설 하숙집이었던 청운각에 도착해 옛 제자들과 주민들의 영접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2007년 8월 14일 오후 6시 30분 중부내륙고속도로 하행선 문경휴게소에 잠시 들려, 문경을 비롯해 영주, 봉화, 예천, 안동, 상주, 김천 등에서 활동 중인 자신의 캠프 관계자와 휴게소 이용객 등 200여 명으로부터 열열한 환영을 받고 구미로 떠났다. ☆ 청운각 박근혜 오동나무 이야기 10여 년 전 청운각 마당의 옛 우물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솟아오르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관계자에 의하면 2006년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청운각을 방문한 뒤 이듬해 우물 속 벽에 작은 나무 하나가 자라기 시작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생육을 멈추고 있다가 2011년 7월(18대 대선을 17개월 앞둔 시점)에 갑자기 잎과 가지가 무성히 자라 높이 2m의 오동나무가 우물 위로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오동나무는 예부터 봉황이 둥지를 튼다는 나무로 전해져 왔는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길조로 여기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하늘나라에서 대권 도전에 나선 딸을 돕기 위해 신성한 오동나무를 보낸 것이라는 입소문이 돌았다. 이 소식이 퍼져나가자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이 오동나무를 구경하거나 기를 받기 위해 몰려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하늘의 뜻인지 딸 박근혜는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위에 열거한 대통령 방문지를 토대로 기존 관광지와 연계하여 대통령이 남긴 일화를 모아 스토리텔링화하여 "길의 고장 문경, 대통령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관광코스를 개발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 관광코스 : 문경새재⇨청운각⇨쌍용양회공장⇨동로 경천호
-
(21) [문경의 King Road 3] 후백제 왕 견훤의 성장설화이만유(향토사 연구원) 4. 후백제 왕 견훤의 성장설화 및 전투로 (아차마을, 금하굴, 말바위, 근품산성) 견훤이 왕이 되기 전 문경 궁기에 살 때 말바위에서 용마(龍馬)를 얻었다. 견훤은 하늘이 장차 내 왕업을 돕기 위해 이 용마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말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고 적지산 산꼭대기로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그곳에 이르렀으나 화살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화가 난 견훤이 "이게 무슨 용마냐?” 하며 칼로 말의 목을 베는 순간, "피웅∼”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나무에 꽂혔다. 말이 화살보다 빨랐다. 견훤은 "아차!” 소리를 지르며 성급한 것에 후회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 되었다. 이러한 연유(緣由)로 견훤이 출생한 마을을 ‘아차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라는 용마전설이 있다.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차마을에 한 부유한 가정에 규중 처녀가 살았는데, 밤이면 처녀 방에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서 처녀와 정담을 나누다가 동침까지 하고는 새벽이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또 다시 밤이면 나타나고 하기를 무릇 수개월이나 되었다. 마침내 처녀는 잉태하여 배가 부르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부모에게 사실을 실토하였고, 처녀의 말을 들은 부모는 깜짝 놀라 딸에게 말하기를 "그 사나이가 오거든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다가 몰래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매어라.”라고 일러놓았다. 다음 날 새벽에 실오리를 따라서 계속 찾아가 보니 굴(금하굴金霞窟)로 들어간 지라 따라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가 몸에 실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후 그 사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얼마 후 처녀는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가 후백제 왕 견훤이다라는 견훤(甄萱)의 출생 설화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 50열전 견훤 조에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그때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라는 기록도 있다. 근품산성(近品山城)은 문경시 산양면 현리 뒷산인 근품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산성으로 토석 혼축, 편축식, 테뫼식으로 축성된 길이 1,600m 산성이다. 927년(태조 10년) 정월 왕건이 용주(龍州-예천 용궁)를, 3월에는 근품성(近品城)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견훤은 9월에 근품성을 쳐서 불살랐다. 이어 고울부(현 경북 영천)을 거쳐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였다. ★ 견훤의 출생, 성장 설화 및 전투로 루터(관광코스) : 금화굴과 숭위전⇨말바위⇨농바우⇨천마산⇨견훤산성⇨근품산성 5. 공민왕의 몽진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복주(현 경북 안동)로 몽진(蒙塵)하러 가게 되었고 난이 쉽게 평정되지 않자 인근 지역을 순행하던 중 문경 주흘산 법흥사(法興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런 연유로 경사스럽고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인 문경(聞慶)이라 지명이 생겼으며, 절 이름도 나라가 은혜를 입은 절이라 해서 법흥사에서 혜국사(惠國寺)로 변경되었다. 또 공민왕이 산양면 위만리에 있는 산길을 지나다가 나뭇가지에 왕의 옷(용포龍袍)을 걸어두었다 하여 그 산의 이름이 왕의산( 王衣山)이라 불렀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 공민왕 몽진로 루터(관광코스) : 하늘재⇨혜국사⇨대궐터⇨마전령(馬轉嶺)⇨근품산성⇨왕의산 6. 경순왕의 구국 기원로 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후삼국 시대 때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 구국을 기원한 원당으로 사용했다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가람고(伽藍考)”와"교남지(嶠南誌)”권 36 문경군 조(1937년)에 절의 북쪽에 2층 극락전이 있고,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되어 조선 세조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목탑형식의 건물로서는 현재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두 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문화 자산이다. 임진왜란 때 봉암사가 불탔는데 그 당시 다른 전각은 다 타버렸는데 극락전만 불타지 않아 왜병들이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몇 차례나 지붕에 던져도 불이 붙지 않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신비감을 주는 건물이 봉암사 극락전이다. ★ 경순왕 구국 기원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금화굴⇨희양산성⇨봉암사 7. 경순왕의 귀부로(歸附路)와 마의태자의 망국 한탄로 신라의 국력이 패퇴하여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향하여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여 신라를 고려에 바쳤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시 경순왕의 행렬은 30리에 달할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행렬이 움직이기 위해선 신라의 교통로 중 제일 큰길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립령을 통과하는 길이다. 그럼 경순왕의 이동 경로를 추정해 보면 경주-영천-구미(의성)-상주(예천)-문경-충주-이천-서울-개성으로 연결되며 문경 내의 이동로는 상주에서 당교를 거쳐 토끼비리를 지나 계립령을 넘어 충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는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홀로 풀을 베어 먹으며 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인데 월악산자락에 자리한 미륵사 대원사지는 마의태자에 의해 세워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마의태자 역시 경순왕이 갔던 길을 따라가다가 개골산으로 갔다고 추정되는데 그 경로는 경주-영천-구미-상주-문경-충주-양평-홍천-인제-금강산이 된다고 보며 문경 구간의 경로는 경순왕이 간 길과 같다고 본다. 마의태자는 나라가 망하였으니 죄인이 되고 상주가 된다는 뜻으로 마의를 걸치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문경의 '토끼비리'와 '하늘재'를 넘어갔다고 보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하였으랴?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 ★ 경순왕 귀부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유곡역지⇨토끼비리⇨요성⇨관음⇨하늘재
-
(20) [문경의 King Road 2] 김춘추와 김유신의 삼국통일로이만유(향토사 연구원) 2.김춘추와 김유신의 삼국통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지시로 고구려에 가서 보장왕에게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은 죽령이 본디 고구려 영토이니 이를 돌려준다면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였으나 김춘추가 나는 그런 결정을 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거절하여 구금된 사실이 있었다. 이때 김춘추가 고구려로 갔던 길이 바로 하늘재(계립령)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지금의 문경과 상주 경계 지점에 당교(唐橋)가 있었는데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으나 소정방이 고구려,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마저 치려고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김유신 장군이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잔치를 열고 대접하는 척하며 짐독(鴆毒)을 넣은 술로 전멸시키고 땅에 묻은 곳이 당교(뙤다리)이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 삼국통일로 루터(관광코스) : 당교⇨유곡역지⇨토끼비리⇨고모산성⇨하늘재 당교(唐橋) 이만유 1,300여 년 전 지금은 문경 상주 경계 지점 3번 국도 아래 나무다리 뙤다리 당교 하늘재 넘어 교통의 요충지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게 한 전초기지 당교전투의 현장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삼키려는 야욕을 숨긴 채 이곳에 주둔하여 때를 기다릴 때 짐짓, 환영연을 베풀어 짐새의 독이 든 술로 피살 나라를 구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영웅 김유신 장군의 지혜와 용기가 스민 곳 당교의 힘 여기 신라의 정신과 혼이 있어 갈 길 먼 대한민국의 앞길을 밝혀 주리라 힘찬 도약으로 번영하리라 통일의 그날이 찾아오리라 3. 태조 왕건의 남진로(南進路)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토끼비리”라는 곳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문경현지 에 보면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고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 왕건이 남하해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줘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兎遷)이라 불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토끼비리라는 용어는 태조 왕건과 관련된 토끼 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그리고 산양면 현리에 신라 시대 산성인 근품산성(편축, 퇴뫼식, 토석혼축, 1,600m)이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신라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며 927년 후백제(견훤)의 땅이었으나 왕건이 1월에 용주(예천군 용궁)를 3월에 근품산성을 함락시켰으나 9월에 견훤이 다시 처서 성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말을 훈련시켰던 "치마단”이란 지명도 남아 있다. * 남진로 루터(관광코스) : 하늘재⇨고모산성⇨토끼비리⇨근품산성
-
(19) [문경의 King Road 1] 진평왕의 사불암 경배로(敬拜路)이만유 (향토사 연구원) 문경의 정체성을 한 말로 표현한다면 "길”이다. 다시 말해 문경은 "길의 고장”이다. 길은 사람과 물류 이동은 물론 문화의 통로이자 침략의 길목이기도 하다. 길과 걷는 것이 21세기의 사회적 트렌드가 되었고 한 때 지역마다 길 만들기 열풍이 불었고 그 대표적인 길이 지리산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도산구곡 예뎐길, 울진 십이령길 등이 있다. 그러나 문경에는 이미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로 뽑혔고, 근대 아리랑의 시원지 "아리랑고개”로 알려지기도 한 6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옛길 "문경새재”가 있다. 문경은 땅 전체가 우리나라 지리문화의 보고이자 길 박물관이다. 역사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이며 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로서 앞에서 말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유명하지만 우리나라 최고(最古, 서기 156년 개척)의 고갯길인 "하늘재(계립령)”와 옛길의 백미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관갑천, 토천)”까지 있다. 길의 종류는 다양하다. 마을의 좁은 골목길인 "고샅길”을 비롯해 "오솔길” "갈림길” 강가나 바닷가 낭떠러지 위로 통과하는 비탈길인 "벼룻길” "꼬부랑길” "하룻길과 천릿길” "꽃길과 덤불길” "돌길과 황톳길” 등이 있고 길이란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는 것만이 길이 아니라 "인생은 나그넷길”도 있고 "학문의 길” "출세의 길” 죽어서 가는 "황천길” "살길과 죽을 길” "인생의 뒤안길”도 있다. 이제, 길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유사 이래 문경 땅을 밟은 왕들의 자취를 더듬어 "문경의 King Road(왕의 길)”를 찾아 역사를 반추할 기회를 가져보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1,400년이 훨씬 넘는 시기에 신라왕이 수레를 타고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문경까지 행차했던 길을 역사와 설화를 들으면서 걸어본다면 어떤 감회에 젖어 들까? 왕들이 찾아왔거나 지나간 각각의 길들에 대한 이름을 붙이면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다. 1. 진평왕의 사불암 경배로(敬拜路)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방불(四面石佛)은 모두 3기로서 경주와 충남 예산, 문경의 사불산(四佛山)에 각각 1기씩 남아 있다. 원래 동서남북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불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사방불은 경주와 문경을 예로 살펴보았을 때 대체로 서방에 아미타불과 동방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다.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진평왕 9년(587)에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에서 떨어졌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사불암을 보고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승사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법화경을 외는 중을 청해 이 절을 맡겼으며 나중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쌍연이 피었다.”라고 되어 있어 "천강사불 지용쌍연(天降四佛 地湧雙蓮)”이라는 연기 설화가 남아 있다. 불상이 새겨진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사면에는 모두 불상 1구씩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높이 약 295㎝, 너비 약 150㎝로서 커다란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로서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세부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모두 여래상인 것으로 보인다. 동쪽과 서쪽은 좌상(坐像)이고 남쪽과 북쪽은 입상(立像)으로 추정되며 진평왕이 사불산 가까이 와서 산북면 소야리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으니 그곳에서 사불암을 처음 볼 수 있어 기쁨에 겨워 환희에 찬 목소리로 탄성을 지르면서 경배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그 고개를 환희재라고 한다. * 경배로 루터(관광코스) : 내화리 화장사지(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 화장산성 ⇨ 미면사 ⇨ 환희재(산북 소야) ⇨ 사불산 대승사 ⇨ 사불암 (다음 회 계속)
-
(18) 석문구곡石門九曲석문구곡石門九曲 문경구곡원림보존회 초대 회장 이만유 제1곡 농청대弄淸臺 월방산月芳山 끝자락 남으로 뻗어 나와 층암절벽層巖絶壁 태고암太古巖 청대淸臺 서와書窩 있던 곳 밤이면 달빛 가득 산 은연隱然히 비치고 벼루 아래 금천수錦川水 맑음을 희롱하네 *淸臺 :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권상일의 호 *書窩 : 선비가 글하는 움집 제2곡 주암舟巖 부벽浮碧 건너 산 아래 배 한 척 떠 있다 어휘야 선유仙遊를 즐기며 뱃머리 돌리니 근품산近品山이 눈앞일세 노 저어 나아간다 일월봉日月峯 산그늘에 대나무 푸르네 *浮碧 : 강에 떠있는 푸른 바위 제3곡 우암대友巖臺 군자봉君子峯 우뚝 솟아 우암정友巖亭 그림 같고 부유富裕하나 검소儉素한 삶 아름다운 이야기 있네 우암채공友巖蔡公 장수지지藏修之地 천년바위 창연蒼然한데 난간欄干에 기대서니 멀리 모연暮煙이 아련하네 *藏修之地 : 학문에 힘쓰는 곳 제4곡 벽입암壁立岩 현리縣里 큰들 목 축이는 새들보 맑은 물에 바위 위 붉은 꽃 비치니 선경仙境이 예로구나 두꺼비 바위 뒤에 뱀산이 노려보고 뱀산을 노려보는 황새바위 멀리 있네 제5곡 구룡판九龍坂 아홉 용龍 서려 있어 구룡판九龍坂 마을이라 큰 인물人物 난다 하여 산혈山穴 끊어 붉은 흙 수양버들 휘늘어진 언덕 훈풍薰風이 산들산들 어위야 뱃노래 한곡 꾀꼬리가 화답和答한다 제6곡 반정潘亭 세월歲月의 무정無情함에 산천山川도 변하였나 나그네 쉬어가던 반정潘亭은 볼 수 없네 큰 나무 그늘에 황소가 누워있고 비파산琵琶山 소나무 위에 백로白鷺가 한가롭다 제7곡 광탄廣灘 두 줄기 물길 만나 넓은 여울 이루고 푸른 산과 어울려 동천洞天을 이뤘구나 금빛 모래 너부내에 붉은빛 잠기면 영각影閣의 천년千年 노송老松 전설傳說을 이고 섰다 *洞天 : 神仙이 사는 곳/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선비의 은거지/ 살만한 곳 *너부내 : 넓은 내 제8곡 아천鵝川 돌산을 휘돌아 조약돌 맑은 물 야산野山과 냇물이 어우러진 수려秀麗한 계곡溪谷 세심대洗心臺에 마음 씻고 물 위를 바라보니 복숭아꽃 둥둥 극처極處가 멀지 않네 *極處 : 궁극에 다다른 곳=이상향 제9곡 석문정石門亭 금천錦川 청류淸流 양편兩便으로 바위 절벽 높이 솟고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 머물던 석문정石門亭 고고高古한데 연비어약鳶飛魚躍 별천지別天地에 광풍제월光風霽月 가득하니 무위자연無爲自然 복거卜居한 여기가 도원桃園일세 *鳶飛魚躍 :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생을 즐김을 이르는 말.(생명 약동) *卜居 :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복지, 복택 *光風霽月 :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 석문구곡石門九曲은 경북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 일대에 자리하는 원림園林으로 금천錦川과 대하천大下川을 따라서 약 9㎞에 걸쳐 전개되고 있다. 이곳에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1715-1795)이 석문정石門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복거卜居하였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중심으로 구곡원림을 경영하며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한 것과 같이 이 원림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구현하고 무위자연의 삶을 산 곳이다.
-
(17) 진남교반 병풍바위에 새겨진 일본 헌병 순직 마애비(磨崖碑)이만유/문경구곡원림보존회 초대 회장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경북 팔경 중 제1경인 진남교반(鎭南橋畔) 병풍바위에 구한말 일제가 새긴 것으로 보이는 마애비(磨崖碑, 석벽에 글자나 그림 불상 따위를 새긴 비)가 있다. 비문은 "故陸軍憲兵二等軍曹大山辨藏君之碑(고육군헌병이등군조대산변장군지비)”이고 그 옆에 "電線監視歸途溺死(전선감시귀도익사) 明治三十一年七月三十日(명치삼십일년칠월삼십일)”이라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 중 " 二等軍曹(이등군조)”, 明治三十一年(명치삼십일년), 大山辨藏(대산변장) 등의 기록이 생소하여 알아본 결과 二等軍曹(이등군조)는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의 계급체계 중 하나로 군조(軍曹)가 있고 그 위에 二等軍曹(이등군조), 一等軍曹(일등군조)가 있다. 이것을 현 한국 육군 계급체계에 적용하면 정확한 대응은 아니지만 모두 부사관으로서 중사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은 明治三十一年七月三十日(명치삼십일년칠월삼십일)인데 明治(명치)는 일본 메이지 천황 시대의 연호(1868~1912)로서 明治三十一年은 1898년에 해당 하고 大山辨藏(대산변장)은 おおやまへんぞう(오오야마헨조우)로 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마애비 내용을 살피면, "고 육군 헌병 이등군조(중사) 대산변장(오오야마헨조우-말할 땐 오를 장음으로 한 오야마) 군의 비이며 전선 감시활동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익사했다. 이를 기려 명치 31년(1898년) 7월 30일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마애비 출현의 역사적 배경에서, 당시 국제 열강관계 및 한일 정치 상황과 경술국치(1910년)가 있기 전인데도 일제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아야 하고, 전선 관리의 주체, 어떤 전력을 왜 일본군 헌병이, 그리고 어느 군대 소속이 관리, 감시 감독했느냐는 것은 규명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1898년은 고종 때에 사용한 대한제국의 첫 번째 연호인 광무(光武) 2년이고 갑오개혁(1894), 을미사변(1895)이 있었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이 끝난 후 3년이 지난 시점이며, 이후 을사늑약(1905년), 러일전쟁(1904∼1905)이 있었다. 마애비 설치 전후의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일본 육군 헌병이 문경에 주둔, 임무를 수행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조사,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 육군 헌병의 활동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에서, 일제는 1881년 조례를 제정하고 헌병을 설치하였고 육군 헌병은 행정, 사법 경찰을 맡은 병과였고 민간인에게도 일반경찰 업무를 실시하여 검문, 체포, 구금, 수사 등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가 헌병제도를 앞세워 억압적인 식민 통치를 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반도 주둔 헌병 제도는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에 따라 구한말의 경찰권은 일본에 위임되었고 독립운동을 억압하고 항일봉기에 대비하는 데 필요한 조직이었다. 그리고 전선의 감시활동을 했다는 전기는 무엇인가? 혹시 경북 문경은 한반도 석탄 생산에서 강원도 다음으로 제2 탄전지대이어서 일제가 지질조사를 끝내고 침략 시 석탄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전 전력을 공급한 시설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이 들었다. 그러나 남한 최초의 광산인 문경탄광(대성탄좌)이 1926년 개광되었고 1938년 일제가 수립한 은성광업소가 개광됐다. 이 지역에 전기공급을 위해 1941년에 조선전업(주)에서 설치한 강원도 영월화력발전소에서 고압 철주를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월발전소 건설 43년 전인 1898년에 전선 감시라고 하니 그 당시의 전선이 뭔지 알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아 이 또한 조사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비문에 있는 전선은 꼭 송전 시설의 전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조사를 했다. 일제는 1884년에는 일본-부산 간 해저전선을 설치하였고, 청일전쟁 이후 서울-인천 간 서로전선을 불법적으로 접수하고 이어 서울-부산 간 군용선도 불법적으로 가설하는 등 통신선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찾게 되었다. 일제는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헌병에게 각 전선을 지키도록 하였고, 1896년 이후 일반 전신업무를 취급했는데, 임시 육군전신대와 임시 헌병대를 두어 이를 운영하도록 했다는 자료가 있음을 보면 이는 전기가 아닌 통신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비 내용의 주인공도 그런 역할을 했던 헌병이 분명하다. 경북 팔경 중 제1경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진남교반에 있는 기암괴석이 길게 이어진 병풍바위에 인공적으로 새겨진 일제의 식민정책 흔적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이 마애비는 2015년 발견, 2016년 7월 보도한 것이나 본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더 세상에 알리는 것은 이 자료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추가 자료를 수집하고, 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근대사를 정립하는 역사 사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
(16) 성혈(性穴)과 칠성신앙전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 시냇가 큰 바위 위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 낙동강 상류인 경북 문경시 산양면 금천 일원에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알바위가 산재하여 있다. 여기에 선명하게 새겨진 북두칠성 별자리가 여럿 있다. 일반적으로 알바위의 둥근 구멍은 성혈(性穴)이라고 하며 알구멍, 홈구멍, 바위구멍, 알터, 알미, 알뫼, 암혈, 굼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그러면 성혈을 왜 바위에 새기고 무엇을 형상화 한 것이며 그 용도나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도 다양한 해석이 있다. 여성 성기를 상징하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모방 주술 의식의 표현으로 만든 민간신앙 유적이라는 견해가 주류이나 태양, 별자리, 제단, 알(난생), 윷판, 은하수(많은 수의 알구멍을 촘촘히 새긴 것) 라는 주장도 있다. 이곳 금천 성혈 유적은 각각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있는 것 같지만 잘 관찰하니 금천변 일원 일정 지역 내에 분포된 것으로 보아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세력이 큰 1인 통치권자(소국의 왕, 부족장) 영역 안에 있는 청동기인들의 어떤 행위의 소산물일 것이다. 본고에서는 별자리, 특히 북두칠성에 대해서만 논해 보겠다. 고서에 의하면 북두칠성은 천지후설(天之喉舌)이라 해서 하늘의 목구멍과 혀에 해당한다고 하며 하늘을 상징하고 전능의 신으로서 인간의 수명과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영수 영남대 교수는 "북극성은 왕의 별자리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북두칠성 별자리는 하늘의 신이고 하늘의 중심에 있고 하늘 왕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인류는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칠성신앙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생을 영위하면서 인간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결국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어떤 힘을 지녔다고 믿고 신성시하는 토템 등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장수하고자 하는 신앙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선사시대 청동기인들은 하늘이 두려움의 대상이고 북두칠성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믿고 길흉화복 등 모든 것을 주관하는 북두칠성을 섬기는 칠성신앙을 가졌다고 본다. 그 증거가 바로 산양 금천 알바위에 새겨진 북두칠성이다. 이렇게 칠성신앙은 청동기시대에서 비롯되었으며 고구려·고려 무덤 속에서도 북두칠성을 그려 넣은 벽화가 있고, 조선시대 장례에는 북두칠성을 새겨 넣은 칠성판을 사용하였으며, 칠성굿을 하는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이 되었고, 도교의 칠성 숭배와 북두신앙은 물론이고, 불교에서도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모시는 칠성각을 두고 있으며,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장독대에 정화수 떠 놓고 비는 신 역시 북두칠성으로 칠성신앙은 긴 세월 계속 이어져 왔고 이렇듯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다. 이제 타임캡슐을 타고 3천여 년 전으로 과거 여행을 갔다가 다시 21세기 문경 금천으로 돌아와 그때 그들이 남긴 북두칠성 별자리를 여행해 보자. 필자가 금천변 기존 성혈이 새겨진 알바위를 재조사하여 북두칠성 별자리를 찾아낸 곳은 총 6개로 상류부터 나열하면, 제일 위쪽에 "문경 현리 부벽 북두칠성 별자리 1호”와 "문경 현리 형제암 북두칠성 별자리 1호”가 각각의 알바위에 있고, 중간 지점에 "문경 연소리 북두칠성 별자리 1호”와 "문경 연소리 북두칠성 별자리 2호”는 큰 바위 좌우에 새겨져 있으며, 제일 아래쪽에 "문경 왕태리 북두칠성 별자리 1호”와 "문경 왕태리 북두칠성 별자리 2호”도 큰 바위에 조금의 간격을 두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두칠성 별자리가 있는 3곳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관할 영역(국경)과 중심지의 표시일까? 이렇듯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청동기시대 유물인 성혈이 산양면 금천 일원에 산재하여 있고 그중 칠성신앙을 증명하는 북두칠성 별자리가 요소마다 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곳이 청동기인들의 집단거주지이며 나아가 한 부족 아니 소왕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칠성신앙의 근거지, 시원지라고도 할 수 있으며, 문경 금천에는 하늘의 신이며 왕인 북두칠성이 지상에 내려와 있으니 "금천은 왕의 터전!” 여기가 바로 북두칠성 즉 하늘을 섬기는 고대 왕국의 터전이다. 끝맺으면서 한 말씀드린다면, 전에도 두 차례 보도자료를 낼 때 문경의 청동기시대 유적에 대한 정밀조사와 발굴 및 표지판 설치 등 보호 대책을 강구하자고 건의하였는데 아직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웃 상주시는 지난해 문화재 전문 연구 기관에 용역을 주어 "상주 오봉산 암혈(岩穴) 유적, 문화재 정밀지표조사”를 마치고 올해 그 결과 보고서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우리 지역에 몇 년 전 연소리 연화지 옆 알바위가 없어졌고, 지난해 생태하천 조성사업 시 용궁 소천서원 옆 알바위가 훼손되어 사라진 사례가 발생한 바가 있다. 관내 대형 사업이 추진되면 고인돌과 알바위, 구곡원림 등에 대해 필자가 공사업체와 감독관, 관련 기관을 찾아 훼손방지에 대해 협조를 요청하면서 나름 감시활동을 하며 지켜내려고 노력하였으나 민간인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관 내외를 탐방할 때 알바위가 경작지에 있을 경우, 토지 주인이 농사에 방해된다며 중기를 동원 깨어낼 위험에 처하기도 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설득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보호에 취약하고 위험에 처해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문화재 지정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
(15) 문화관광도시 문경을 만든 민간 주역들의 이야기이만유/문경문화유적회 초대회장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2005년 1월 11일 폐광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문경시에 문화관광의 새바람이 불어오고 이에 발맞추어 "문경문화유적동호회”란 이름으로 문화재 보호활동과 지역 문화관광을 선도하고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가진 순수 민간단체가 첫 출발을 하였다. 우리 문경시는 일제강점기부터 검은 황금, 검은 진주라는 석탄산업의 혜택으로 지역 경기가 호황이었고 석탄만 캐내면 천년만년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때는 자타가 인정하듯 문경이 잘나갔던 시절이었다. 석탄 경기가 좋았던 1970-80년대엔 인구가 16만 명이 넘었으며, 안동 가서 양반 자랑하지 말며, 남도 어딘가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문경 와서 돈 자랑하지 말라 는 말이 생겼으며, 삐루(맥주) 소비가 대도시를 능가했음은 물론, 탄광촌 뒷골목에는 강아지가 시퍼런 배춧잎(만 원짜리 지폐)을 물고 다닌다고 할만 치 돈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문경시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인해 모든 광산이 문을 닫게 된 상황에서 앞일을 대비해 석탄에 버금가는 대체산업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다. 결국 폐광 후 급격한 인구 감소와 경기불황으로 찬바람이 불어오고 살길이 막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지의 문경인이 그냥 쓰러질 수 없는 일, 관민이 한마음으로 이 난국을 극복하고자 하여 수려한 자연경관과 유무형 역사 문화자산을 활용하여 많은 투자비가 들지 않고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굴뚝 없는 산업, 문화관광사업을 선택하고 집중한 결과 사극 전용촬영장인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을 만들고 대동강 물을 판 봉이 김선달이 문경 시민들 보면 형님! 하고 무릎 꿇을만한 혁신적 아이디어로 달빛을 판 "문경새재과거길 달빛사랑여행”, 폐철로를 활용한 국내 최초의 레일바이크가 운행되고, 길조차 문화재로 만들어 옛길을 관광 자원화하는 등의 사업을 펴 마침내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위”로 선정 연간 관광객이 최고 600만 명 이상 다녀가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모두가 놀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저력이고 성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지역 경기 향상과 주민 소득증대에 직결되자면 시설투자 등 하드웨어만으로는 부족하고 소프트웨어 즉 운영 프로그램이나 관광객을 맞는 따스한 손길과 마음을 지닌 스토리텔러 관광 전문 민간인력이 필요하였다. 이 전문인력 산실이 바로 우리 "문경문화유적회”다.라고 말할 수 있다. 본 회 창립은 "대한민국 문화원대상”을 수상하신 채대진 전 문경문화원장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필자가 그 뜻에 따라 손을 맞춰 함께 이루어 나갔다. 공무원 정년퇴직 후 우연한 기회에 원장님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문경문화원 문화학교에 특수반으로 문화유적반을 신설하기로 하고 홍보하여 여기에 호응하는 49명의 교육생이 모여들어 2004년 10월 5일 제1기 문화유적반 개강식이 개최되었고 필자가 학생대표를 맡아 "문경의 문화와 역사”를 열심히 함께 배웠다. 그중 참고 견딘 30명이 수료하였으며 그해 12월 문화학교 종합 발표회 시 두근대는 가슴으로 첫 스토리텔링 발표회를 가졌으며 그 이듬해에는 중급반 교육을 1년 더 받아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해설기법을 높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배운 지식을 지역발전을 위해 활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더니 모두가 뜻을 같이해문화유산 지킴이, 문화관광해설 및 안내도우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목적으로 문화단체를 결성하기로 하여2005년 1월 11일 26명으로 구성된 "문경문화유적동호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임원으로 고문은 채대진 문화원장·고재하 향토사연구소장, 감사 이충재·정희열, 회장 이만유, 부회장 이창근·이한숙, 사무장 강길자였다. * 이후 단체 명칭도 "문경문화유적회”로 변경하고 해마다 문화학교 수료생을 영입, 회원 수가 늘어나 지금까지 70여 명이 왕성한 활동을 하며 문경문화관광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창립 초창기 주요 활동실적과 에피소드를 되돌아본다면, 고모산성 등 관광객이 많이 찾는 주요 명소 및 문화유적지에 대한 정화 및 관내 문화재지킴이 활동을 정기 및 수시로 전개하였으며, 아직 배우는 단계였지만 당시 문경시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3명밖에 활동하고 있지 않아 많은 관광객이 오시면 속수무책 대체할 전문인력이 없었다. 그때 우리를 주목하고 임시해설사로 활동하라는 제의가 들어 왔다. 당시 남효근 박약회 회장님께서 유치한 박약회 전국총회가 문경에서 2005년 4월 17일 개최되었고 전국의 박약회 회원 1,227명이 오셔서 20여 대의 버스로 관내 문화유적 및 관광지 답심 시 안내 해설을 맡게 되고 이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그때 우리 회원 전원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순회 코스에 있는 문화재는 물론, 유교 예절, 현판 글씨, 예상 질문 등에 대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 안내 해설에 임했는데 어느 회원은 10시가 되기 전에 꼭 잠자는 습관이 있었지만 12시가 넘도록 자지 않고 공부하는 부인을 보고 남편이 "뭔 일이야?”하고 놀랐다고 하고, 부친상을 당하고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슬픔을 참고 참여한 회원, 병원에 입원 투병 중에도 나온 회원, 서울대학병원에 부인의 진료 예약 일자를 연기하면서까지 나온 회원, 안내 하루 전날 팔이 부러져 깁스하고도 나온 회원, 독실한 교인으로 교회에 나가야 하는 데도 참석한 회원, 친척 결혼으로 서울 가야 하는데도 참석한 회원 등 사명감과 열성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그래서 문경문화유적회가 창립 당년 1년간 안내 해설한 활동실적을 보면, 박약회 전국총회 700여 명, KT 가족 4,000명이 문경 하계휴양을 할 때에 숙소인 M빌리지모텔에서 1달여 동안 안내소 운영, 삼성전자 직원 306명, 현대백화점 VIP 고객 50명, 문경상이군경회 80명, 서울중랑·파주·부산사상문화원 190명 등 5,872명을 안내하는 실적을 올렸으며 그 이듬해에도 꾸준히 주요 관광지에서 안내 해설을 하였으며 특히 전국적으로 유명한 야관여행 상품인 "문경새재과거길 달빛사랑여행”해설, "운강이강년기념관” 고정 배치 해설 등 자원봉사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 이후 이런 활동이 알려지자 지자체의 관광사업 발전에 기여한 민간단체 우수 사례로 국내 최대 중앙 일간지 조선일보를 비롯한 경향 각지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취재 보도하였으며 특히 안동 MBC 특별 초청 "퀴즈쇼 문화재발견” 프로그램에 출연하였고 대구 MBC "경상도愛발견-보물찾기” 프로그램에서 고모산성 현지 활동상황을 취재 방송하였다. 또한 행정기관에서는 문경시 자체 문화유산해설사 제도 도입 차원의 시장 명의의 "문화유적안내원증”을 발급 패용하게 하여 자긍심을 높이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과 성과에 의해 "문경문화유적회”가 명실상부 문화관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관광 활성화와 지역경재발전을 위해 필요한 단체로 부상하였으며,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게 초창기부터 활동하던 회원들은 전문화되어 제도권 안에서 보장받는 신분. 즉 경상북도 문화관광해설사, 석탄박물관 과학해설사, 향토사연구위원 등으로 20여 명이 활동하게 되었다. 결국, 두 말 필요 없이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문화재를 지키고 문화관광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경문화유적회”와 그 회원들이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문화관광도시 문경을 만든 진정한 민간 주역들이다.
-
(14) 영강에 흐르는 넋 - 故 김석태 선생을 추모하며 -이만유/전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장 님은 갔습니다 정의와 사랑의 촛불이 꺼졌습니다 모두의 가슴에 아쉬움과 슬픔을 남기고 님은 갔습니다 올바른 지식인으로 시대를 구하려는 민주투사로 자연을 지키려는 시민운동가로 정론 직필하는 언론인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꾸민 문학인으로 아픈 이웃을 보듬는 신앙인으로 빛나는 족적과 감동을 남기시고 님은 갔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이비들이 춤추고 금권의 눈치를 보며 불의에 빌붙어 득세하는 못난 사람들과 순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가슴 아파했고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손을 잡게 했던 님은 갔습니다 이제 누가 여기 문희 땅에 정의와 불의를 논하며 옳고 그름을 따져 말하랴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의 손길을 보듬으랴 어디에서 푸른 소나무의 고절함을 곧은 대나무의 기상을 다시 볼 수 있으랴 이제 님은 가셨지만 여기 우리 삶의 터전에 사랑의 씨를 뿌리고 정의의 씨를 뿌렸으니 그 씨앗들이 뿌리를 내려 이 산하에 꽃을 피우리 열매를 맺으리 님이시여! 이 땅이 생긴 이래 흘렀고 앞으로 영원히 흘러갈 저 푸른 영강에 님의 의로운 혼, 님의 올곧은 정신이 문경의 역사와 함께 흘러갈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 위에 한 시대의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천년만년 세상을 밝힐 횃불로 빛날 것입니다 님이시여! 하느님 곁에서 고이 잠드소서! 시작 노트 필자는 고 김석태 선생과는 나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평생을 같은 지역에서 살았고,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장을 선생은 3대, 필자는 7대 때 맡아 문경문학의 정체성 확립과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기본적인 삶의 철학이 같아 의기투합했었다. 그러나 가는 길과 하는 일이 달랐기에 계속 함께할 수는 없었으나 때에 따라 이런저런 사업을 같이 추진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09년 5월부터 6개월간 문경생명문화원(원장:김석태)이 기획 추진한"생명대학”에서 고인의 뜻을 따라 "문경의 역사와 문화”란 주제로 강의한 것과 낙동강 발원지 "초점”을 세상에 알리고 발원지 공원을 조성하고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2009년"낙동강발원지문경초점조성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이 사업을 추진할 때 필자는 추진위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낙동강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 황지 한 곳이 아니라 1454년 단종 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태백산 황지, 문경현 북쪽 초점, 순흥 소백산, 이렇게 3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널리 알리고 이 문헌을 근거로 경상북도와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2011년 4월 낙동강 발원지 문경초점 공원 조성공사를 마무리하고 동년 6월 표지석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필자가 작사한 "초점을 아시나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 뒤 2013년 8월과 2018년 11월 2회에 걸쳐"낙동강발원지초점문화제”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고 김석태 선생은 알게 모르게 오직 지역 사랑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시고 큰 업적을 남겨 셨다. 그중에 필자와 함께한 것은 위와 같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평상시 지역사회 크고 작은 문제점이 발생하면 의논하고 걱정하며 뜻을 같이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문경의 참지식인, 의인을 잃은 슬픈 마음에 고인께서 한평생 함께한 문경의 젖줄 "영강” 푸른 물에 선생의 넋과 정신이 오늘도 내일도 잊히지 않고 영원히 함께 흐르길 기원하며 삼가 이 시를 바칩니다.
-
(13) 영강구곡시(潁江九曲詩)서시(序詩) 대한삼경(大韓三慶) 문경에 상서로운 기운 일고 수정보 대조보에 물 가득 출렁인다. 기산영수(箕山潁水) 맑은 물이 옥토를 적시니 솔개가 높이 날고 물고기 뛰는구나. *대한삼경(大韓三慶) : 문경에는 "문경삼관(慶聞三關) 대한삼경(大韓三慶)”이란 말이 전해오는데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慶聞)에서 나라의 큰 경사 소식을 세 번 듣는다는 예언을 말한다. *기산영수(箕山潁水) : 중국 하남성에 있는 산과 시내로 "요(堯)임금과 소부(巢父),허유(許由)의 고사”가 있는 곳인데 조선에도 이에 버금가는 기산영수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문경(조령산과 조령천 또는 돈달산과 영강)에 있다고 한다. 아침 햇살 비치니 뭇 생명 춤추고 고 선생 애민사상 소나무보다 더 푸르네. 도도히 흐르는 영강수 유장(悠長)한데 산고수장(山高水長) 원두 향해 노 저어 나아가세 *고 선생 : 계정(溪亭) 고흥운(高興雲-1523∼158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고성군수를 지냈으며 여름 땡볕에 일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영신숲에 소나무를 심어 그늘에 쉬게 하였다. 제2곡 송정소(松亭沼) 송정 노송 물에 어려 한 폭의 그림 같고 영빈서당(潁濱書堂) 글 읽는 소리 바람결에 들려온다. 소나무에 걸린 달 보며 세사를 잊었더니 흐린 물 휘돌아 흘러 강물이 맑아지네. *영빈서당(潁濱書堂): 산양면 반곡리에 있는 서당으로 부훤당(負暄堂) 김해(金楷)가 지은 이설기(移設記)와 청대 권상일이 찬한 글과 산양 지역의 향촌 자치규약인 "향약소절목”이 전한다. 제3곡 수정보(水晶洑) 민초들 마음 새긴 고공(高公) 마애비 빛나고 영신들 사천 두락에 풍년가 소리 더 높네. 쌀은 백성의 하늘이라 웃음꽃 피어나고 봇도랑 물소리 졸졸 안 먹어도 배부르네. *고공(高公) :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 조선 중기의 학자로 여러 벼슬을 거쳐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냈다. 저서로는 효빈잡기(效顰雜記), 태촌집(泰村集), 농가월령(農家月令) 등이 있고 영강에 수정보를 축조하였다. 제4곡 뱃나들(舟津) 회화나무 아래 정공(鄭公) 기린 죽림정(竹林亭) 있고 강물 위에 철새들 한가로이 노니는데 영남의 물산 실은 배 들고나던 나루터에 노을 속 작은 고깃배 외롭게 떠 있네 * 정공(鄭公) : 죽림재(竹林齋) 정방시(鄭邦時-1607∼1684), 평생을 고절한 은사(隱士)의 삶을 사셨고 당시 사림에서 명망이 높았다. 제5곡 별암(鱉岩) 갈마봉 아래 푸른 물속 자라 바위 숨어 있고 목마른 말이 내려와 목 축이는 명당터에 세계군인 모두 모여 평화 깃발 펄럭인 곳 만세지(萬歲池) 별암들에 고부이가(鼓缶而歌) 들리네. *고부이가(鼓缶而歌) : 북치고 질장구 치는 아름다운 대동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에서 험난함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혁신의 의미가 담겨있다. 제6곡 견탄(犬灘) 청운의 꿈 안고 먼 길 재촉하는 나그네 저녁노을 붉게 물든 여울 황금물결 이는데 물소리 정겨운 징검다리 건너며 바라보니 오정산(烏井山) 기슭 멀리 저녁연기 피어나네 제7곡 삼태극(三太極) 흰옷 입은 도인(道人)이 살았다는 물태극 길태극 산태극의 신비한 땅 어룡산(魚龍山) 고부산성(姑夫山城) 성돌에 낀 이끼 창연한데 휘돌아 흐르는 물에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네. *天理流行 : 하늘의 이치가 널리 퍼져 행해진다. 제8곡 병풍바위(屛巖) 층암절벽(層巖絕壁) 높다란 병풍을 둘렀네. 천길 벼루 위에 아슬아슬 토끼비리 왜군(倭軍)이 춤추고 마의태자 망국의 한스린 길 천년도 한순간 꿈이었구나. *벼루 :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 제9곡 용연(龍淵) 가은천 소야천 만나 영강을 이루고 경북팔경 제일경 신비로운 진남교반(鎭南橋畔) 때를 만난 잠룡(潛龍)이 승천한 여기가 송림 우거진 예가 진정 동천(洞天)이로다. * 동천(洞天) : 신선이 산다는 별천지. 영강구곡(潁江九曲)은 구곡문화가 조선시대의 유물로만 남아있지 않고 선비정신 등 유교문화를 계승 및 발전시키기 위해 2013년 1월 창립된 문경구곡원림보존회에서 전국 최초로 21세기 '신 구곡원림'을 설정, 경영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2년 여에 걸쳐 현장과 문헌을 찾으면서 노력한 결과에서 2016년 12월 12일 우리 지역 생명의 젖줄인 영강 중 영신숲에서부터 마성면 소재 진남교반에 위치한 용연(龍淵)까지 총 17.2km 구간에 '영강구곡원림'을 설정하고 경영해 오고 있다. 구곡원림은 구곡의 시원이 되는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주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한 것과 같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구곡에서 성리학을 구현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산 곳이다.
-
(12) 선비 정신과 문인이만유(전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장) 窮不失義 達不離道(궁불실의 달불이도) 아무리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의로움을 잃지 말며 거침없이 잘 나아갈 때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말라. 맹자 진심 편에 나오는 글이다. 몇 년 전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이사장 취임사 중에 "문인은 선비이고 선비는 명예를 존중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평소 필자도 "시인은 이슬을 먹고사는 선비다.”라고 생각해온 터라 공감하였기에 선비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선비란 곤궁에 처해도 의(義)를 잃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했으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예절을 알며, 말과 행동이 같으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불의에 대항하며, 정의로우며,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궁극적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선비란 그 시대의 지성인, 지도층, 엘리트로써 나를 다스릴 줄 알고 남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자기에게 엄격해야 한다고 믿는다.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로 선비(양반)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선비는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체면이나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으나 그 안에는 자기 관리와 정도를 걷는 나름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옛날 선비들은 기개가 대단했다. 나라에 중난(重難)한 일이 일어나 간(諫)할 때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도끼로 나를 죽여 달라는 결의(決意)를 나타내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기도 했다. 다시 말해 상소(上疏)할 때에 도끼를 가지고 대궐 문밖에 나아가 엎드려 바른 소리를 내어 죽기로 직언할 수 있는 기개를 보이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용기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지부상소를 올린 인물 중에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년) 선생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591년(선조 24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겐소를 사신으로 보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릴 것을 요청해오자 선조에게 지부상소를 올려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하며 대궐 밖에서 사흘간 버티며 뜻을 관철하려 하였으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선생은 1876년(고종 13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해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면서 도끼를 들고 나타나 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렸다. 이렇듯 조선의 선비들은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도를 배우고 말은 번듯하게 하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言行一致, 知行合一) 선비가 아니라고 하였고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잘 헤아리고 행동함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선비다라고 했다. 오늘 이 시대의 선비는 전문지식과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실천하는 지성인으로서 사회적 공론을 향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의롭고 정도를 가며 공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며 시대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진정한 선비는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선비의 꿋꿋한 기개를 뜻하는 사기(士氣)의 의미는 변질 사용되고 있지만 사기를 가지고 공사 간에 잘못이 있으면 원로, 사림(유교 단체), 문인이 지적하고, 깨우쳐 주고, 혼내서 정도를 가게 해야 하는데 침묵하고 있는 것은 존재 의의가 없고 자기 할 일을 다 못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문인은 선비다. 그리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문학작품이 광풍제월(光風霽月)처럼 천성이 맑은 선비의 마음으로 인생과 자연을 노래하고, 선현들을 찬양 칭송하고, 웃고 울며 아파하는 사람 이야기를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때로는 기개를 가진 문인이 되어 선비 정신으로 쓴 글들이 혼란과 불신, 불의의 세상을 바로잡는 매의 눈이 되어 정의롭고 바른 사회를 이룩하는 역할자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마지막으로 근래 문경에서 문협이 자기 사업을 다른 단체가 가져가는 일 등이 있어 이를 시정하라, 문협의 정체성 확립, 리더로서의 합당한 역할, 공익적인 활동, 주인의식을 갖자라는 주장을 한다고, 리더십 부족으로 문협이 갈등과 혼란을 초래한 당사자들, 불의하고 공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편파적, 편향적인 사고로 떼를 지어 자기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또 문제 발생 원인 제공자가 오히려 쌍욕을 한 자의 편에 서서 적반하장 격으로 바른말, 옳은 말을 한 사람을 비상식적이고 악의적으로 징계하는 횡포를 보였다. (추후 내용 공개 위계) 조선조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중 죽임을 당하니 삼족을 멸하는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체를 거두는 이가 없었다. 이때 영월 호장이던 충신 중의 충신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께서 모두 만류하였으나 "신하 된 도리로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라며 단종의 시신을 수습, 장사지내면서 '爲善被禍吾所甘心'(위선피화오소감심)좋은 일을 하고 화를 입는 것을 나는 달게 받는 바이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이 언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겁하고 용기 없고 불의한 문인이 되지 말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며, 문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말라. 오늘따라 "문인은 선비다.”라는 말이 무색할 뿐이다.
-
(11) '코로나아리랑'과 타임캡슐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코로나19 확진자가 3월 17일 기준, 하루 신규 확진자 621,328명, 총 누적 확진자 수는 8,250,592명이며 하루 사망자는 429명, 누적 사망자는 11,481명(치명률 0.14%)이라고 밝혔다. 놀라운 상황이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한국에서는 2020년 1월 20일 첫 번째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였다. 발명 당시 급속한 전파력과 치명률이 높고 백신도 치료 약도 없는 긴급사태에서 전 인류가 공포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이 대재앙을 맞아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손 씻기 등의 기초적 방역 수단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래로서, 특히 아리랑으로서 코로나를 극복하자는 의지를 담은 코로나아리랑을 2017년 아리랑 연구, 보급, 전승을 위해 창립된 국내 유일한 순수 민간단체인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전국 최초로 자체 역량을 발휘, 창작하여 2020년 7월 14일발표회를 개최한 이후 "찾아가는 아리랑학교”와 각종 공연, 유튜브, SNS 등의 매체를 통해 보급하였다. 질병으로 인한 국가적 환난이 발생하였을 때 재난을 극복하자며 아리랑으로 국민을 계도, 계몽한 역사상 사례는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우두를 접종하자고 불렀던 1930년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이후 90여 년 만에 탄생한 이"코로나아리랑”은 학계에서 아리랑의 기능성을 살린 아리랑의 ‘역사 새로쓰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아리랑”은 "코로나19”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를 염원하며 방역을 위한 기본 수칙 지키기와 극복 의지를 담은 것으로 전 국민이 모두 함께 불러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고자 만든 것이다. < 코로나아리랑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름도 생소한 코로나에 지구가 휘청 야단났네 치료 약도 예방약도 없다니(약 있어도 변이종이 생기니) 이를 우야면 좋겠노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 차려라 우리는 할 수 있어 겁내지 말고 거리두기 꼭 하고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잘해 막아내세 환경 소독 기침 예절 잘 지키고 건강한 생활 유지하자 힘내자 모두 힘내자 모두 이기자 코로나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이 "코로나아리랑”은 한국 신문 최초로 창간 100년을 맞은 조선일보가 지난 2020년 11월 5일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된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봉인식”에서 발표된 바와 같이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첨단 기술 제품과 디지털 파일과 각계 각층에서 보낸 물품·메시지 등 타임캡슐 수장 물품 550점이 담겨 있다. 거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마스크, 김세나(11) 양의 편지, 미스터트롯 CD, 최불암 배우 기념물, 삼성 갤럭시, 박찬호 모자, BTS CD, 산악인 엄홍길은 머플러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코로나아리랑” 관련 자료(사진, 동영상)도 함께 매설되었으며 국내 아리랑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이 타임캡슐은 50년 뒤인 조선일보 창간 150주년이 되는 2070년 3월 5일 개봉한다. 코로나19의 변이종인 오미크론이 맹위를 떨치며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하루빨리 공포의 팬데믹이 끝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민족은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마다 아리랑을 부르면 희망과 용기를 가지며 극복해 왔다. 아리랑고개 저 넘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있다. 코로나, 곧 위대한 인류에 의해 정복될 것이다. 힘내자 모두 힘내자 모두 이기자 코로나
-
(10) 고려 공민왕과 왕의산(王衣山) 왕의목(王衣木)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고려 공민왕이 용포를 걸어 두었던 나무가 살아있다” "왕의산(王衣山) 느티나무 고목,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10여 년 전에 필자가 쓴 글의 제목이다. 고향에서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 당시 마을 어른들에게서 듣고 반신반의했던 고려 공민왕이 몽진 길에 용포(龍袍)를 걸어 두었다는 나무의 실체를 퇴직 후 문화관광 해설사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현지 확인하고 세상에 알리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건의한 문건이다. 이 산이 왕의산(王衣山)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경상북도 복주(안동)로 피난을 가면서 문경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 경북 문경시 산양면 위만2리 상위마을 뒷산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는데, 쉬면서 용포를 걸어두었다는 나무가 있기 때문에 산의 이름이 임금 왕(王) 자에 옷 의(衣) 자를 써 왕의산이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이곳을 ‘옷걸골’이라고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661년 전, 다시 말해 1361년(공민왕 10년) 10월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11월에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피난길(몽진)에 올라 파주-이천-음성-충주-문경을 거쳐 12월에 복주(福州, 경북 안동)에 도착했다. 홍건적은 공민왕 즉위 무렵에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구성된 종교적 농민 반란군이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공민왕의 특명을 받은 총병관 정세운은 이방실·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군대를 정비, 강화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 난을 평정하였다. 공민왕은 안동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인 1362년 2월에 환도 길에 올랐다. 상경 때에는 조령을 넘지 않고 상주를 거쳐 청주-죽주-파주로 해서 개경으로 돌아갔다. 공민왕과 왕의산(王衣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역사와 전설을 품고 있는 우리 지역 중요한 문화자산인 이 왕의목(王衣木)을 잘 관리, 보존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행정기관에 다시 촉구하는 의미로 지난번에 쓴 글을 재차 보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왕의산'은 문경시 산양면·산북면과 예천군 용궁면을 경계로 그리 높지 않은 해발 338.6m의 산이다. 이 산 정상부에는 영남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면서 지나는 '문고개'라는 고개가 있고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은 검게 변한 속을 드러낸 채 고목이 되어 서 있다. 지난해(2020년) 문경 YMCA 주관하는 관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개 탐방 프로그램에 해설자로 참여하며 현지에 가서 살펴보니, 나무는 개미들의 집이 되고 쇠약해져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하루빨리 점검하고 보존대책을 세우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연기념물은 학술 및 관상적 가치가 높아 그 보호와 보존을 법률로 지정하는 것인데 동물의 종과 서식지, 식물의 개체·종 및 자생지, 지질 및 광물 등으로 우리나라는 약 400여 점이 지정되어 있고 나무로는 노거수, 성황림, 호안림, 방풍림, 어부림, 보해림(補害林), 역사림 등이 주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문경 왕의산 왕의목(王衣木)은 수령은 물론 나무나 숲과 관련된 특별한 고사나 전설 등이 전해지는 역사림 범주에 들어가며 천연기념물로서 충분한 자격과 지정요건을 갖추었다. 영남대로 문경에는 지정학적으로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역사 및 전설,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공민왕이 피난 중에 난이 빨리 평정되지 않자 인근을 순행하던 중 문경에서 홍건적의 난을 물리쳤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하여 경사 경(慶)자에 들을 문(聞)자를 써 문경(聞慶)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와 문경의 진산 주흘산에 있는 혜국사(惠國寺)와 어류동(御留洞), 전좌문(殿座門), 산북면 가좌리 등이 모두 공민왕과 관련된 지명과 전설들로 남아 있다.
-
(9) 문경새재아리랑 ‘홍두깨’ 이야기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문경새재를 넘어갈 제/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나네” 문경새재아리랑의 대표 사설(辭說)이다. 1896년 우리 아리랑을 처음으로 악보에 담아 해외에 알린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서울과 경기 인근에서 채록한 ‘아르랑’(일명 '헐버트 아리랑')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라고 하는 ‘홍두깨 방망이’이란 사설이 들어있다. 당시 경성에서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유행한 '아리랑타령' 사설이다. 박달나무는 문경시의 시목(市木)이며 오래 전부터 문경새재 주변에 군락을 지어 자생하는 재질이 곧고 단단한 나무로서 시민의 강인한 정신과 굳건한 기상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가진 나무이다. 홍두깨는 옷감을 감아서 다듬이질 하거나 칼국수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넓게 펴는 등의 용도로 사용하는 도구로서 지금은 쉽게 볼 수 없지만 1930년대까지 우리 조상들의 가정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지름 8cm, 길이 80cm 정도로 둥글게 깎아 표면을 곱게 다듬은 박달나무 막대이다. 예전부터 이 문경산 박달나무로 만든 홍두깨는 조선 팔도에 널리 팔려나가는 인기 품목인 문경의 특산품이었다. 우리 전래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의미와 같은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뜻밖에 좋은 일을 만난다는 "홍두깨에 꽃이 핀다”, 예기치 못한 말이나 행동을 불쑥하거나 뜻밖에 좋은 일을 만남을 이르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등 홍두깨와 관련되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이 홍두깨가 남성의 남근(男根)을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사용되며 북한에선 현재도 남성의 그곳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인다고 한다. 위에 기술한 문경새재아리랑 사설에 나오는 홍두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詩나 노랫말은 다의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학계에서 이 문경새재아리랑 속 홍두깨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시 도끼, 망치, 끌 등 각종 연장 자루로 물박달나무가 일시에 다 베어져 나간 것에 대한 문경사람들의 집단적 상실감이 담겼다는 역사성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경에서 전래되는 민담(folktale), 즉 민초들의 일반적 삶과 생활 속에서 전해지는 이바구에서 '홍두깨'는 나이 40살 먹도록 장가 못 간 노총각의 애환이 담겨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 사설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는 권력이나 돈이 있거나 살만한 집의 총각들은 적령기에 때맞추어 다 짝을 지어 장가간다는 의미이거나, 비록 나무토막이지만 "너는 예쁜 처자들 곁으로 갈 수 있으니 좋겠구나" 라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설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길로 놀아나네”는 그 장가 간 총각들은 좋은 팔자를 타고 나 아름다운 신부와 밤낮으로 신혼의 즐거움 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이게 뭐람” 하며 부러워하며 한탄하는 절규의 노랫말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시골에서 40살 먹도록 장가 못 간 노총각한테 마을 할머니들이 측은한 마음으로 "야 이놈아! 새벽에 성황당에나 가봐라!”라고 했다는데 성황당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람들은 거기에서 길흉화복을 빌었다. 예전에는 소박맞은 여자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될 경우 새벽에 이불보를 들고 고갯마루 성황당을 찾아가 그 옆에 서성거리면 길가는 과객 중에 여인을 처음으로 본 남자는 이유 여하 신분 불문하고 데리고 가 함께 살아야 했다. 하나의 관행이고 풍속이었다. 여자의 입장에서도 소박맞아 내쫓긴 마당에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어떤 남자를 만날지는 복불복이었다. 보쌈은 사람을 강제로 보(褓)에 싸서 잡아 와 결혼하는 풍속인데 일종의 약탈혼(掠奪婚)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 시대는 공식적으로 이혼과 개가(改嫁)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칠거지악 등으로 소박맞거나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한 가난한 하층민이나 재가가 허용되지 않은 과부들의 삶을 위해서 나라에서 슬쩍 눈감아 준 것이 보쌈이란 풍습이다. 또 과부가 죽어 원귀가 되면 가뭄이 자주 들게 된다든가, 노총각이 많으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서 왕이 민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어느 정도 묵인한 것이기도 하다. 보쌈은 떳떳한 혼인이 아니므로 일종의 신분 세탁용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남편을 둘 이상 섬겨야 할 흉한 팔자를 타고난 딸을 위하여 양반집에서 액땜용 보쌈으로 변질되기도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보쌈은 여자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수절과부가 노총각이나 홀아비를 같은 방식으로 납치해서 같이 살기도 했다. 그러나원칙적으로 보쌈의 대상은 과부나 이혼장인 휴서(休書)을 받은 소박녀로 국한하였다. 휴서 또는 수세라고 하는 할급휴서(割給休書)는 나비 모양의 옷섶 조각이다. 이것이 당시 사회에서 이혼증서로서 비공인 효력을 가지며 이를 지닌 여인은 새 남자를 만나 개가할 수 있는데, 소박맞아 떠나는 부인에게 그래도 그동안 몸을 섞으며 함께 살아온 남편이 이별하면서 다른 남자 만나 알콩달콩 잘 살기를 바라며 여인의 새 삶을 위해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이 상해 막말을 하며 헤어지는 부부일 경우 이 휴서를 주네마네 하는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한다. 다시 말해 성황당에서 소박녀가 처음으로 만난 남자에게 인연이 끝났다는 의미를 지닌 이연장(離緣狀)인 ‘휴서’를 보여주면, 남자는 여자가 가진 이불보로 보쌈하여 집으로 데려갔다.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보쌈을 하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암묵적 하나의 의식을 통해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며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여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이로써 "문경새재아리랑 ‘홍두깨’ 이야기”는 문경새재의 물박달나무와 노총각이 얽혀있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되고, 노랫말의 기원이 되는 다의적 스토리텔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문경새재아리랑 사설의 다의적 의미는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8) 문경선 주평역 근대문화유산 지정 필요전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 문경시 신기동 소재 주평역은 문경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점촌역과 불정역 사이에 있다. 1956년 1월 1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국내 제2의 탄전지대인 문경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운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경에는 크고 작은 석탄 광산이 70여 개 있었으며 석탄산업합리화 시책으로 1994년 7월 31일 은성광업소가 마지막 문을 닫게 되자 문경선, 가은선 철로의 석탄 운송이라는 주 역할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평역도 1995년 여객 운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평역은 문경선 역 중에서 유일하게 1996년 배치간이역(역무원 배치 근무)으로 지정되어 화물전용역으로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신기에 있는 쌍용양회 문경공장이 가동되고 있어 시멘트 생산에 필요한 장비, 재료 및 생산물을 운송하기 위해 철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2018년 04월 30일 자로 쌍용양회가 조업을 중단하게 되자 주평역의 화물 취급도 중지하게 되었고 역으로서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은 본 주평역이 일반적인 역과 다른 특성과 한국철도사에 남길만한 문화유산적 가치를 지닌 지역성과 주평역의 특성을 알리려는 것이다. 쌍용양회처럼 근대화산업유산, 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야 한다. 다음을 살피면 야외 '열차박물관' 지정 요건은 충분하다고 본다. 주평역의 특성은 한국철도공사 관할 역 중 유일하게 완목신호기가 설치된 구간이었다. 2010년 9월 7일 이후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재도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완목신호기는 물론 함께 사용하던 완목신호기 제어기, 통표폐색기와 통표수수대(통표걸이)가 당시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다. 완목식신호기(腕木式信號機)는 철도 창업기에 영국에서 고안되어 전 세계적으로 채용되었던 역사가 오래된 철로 안전운전 신호체계이며 높은 기둥 위에 직사각형의 완목(가로대) 을 설치하여, 완목이 내려졌다 올려졌다 하며 각도에 의해 신호를 나타내는 아날로그식 신호기(信號機)며, 수동으로 레버를 움직이고, 그 운동을 케이블로 전달하여 신호기의 가로대를 움직이는 기계식으로 되어 있다. 점촌역과 주평역 구간은 폐색구간이다. 폐색구간이란 하나의 선로를 상하행 열차가 같이 사용하는 단선(單線) 구간의 철도로서 양쪽 역에서 상하행 열차가 동시에 운행되면 충돌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방지하고 열차 운행의 안전을 위한 보안장치의 하나로 통표폐색식(通票閉塞式)을 운용, 폐색구간의 양단 역에 상호통표폐색기를 설치한 장치이며 이 통표폐색식에서 사용되는 증표를 통표라 한다. 통표(通票)는 열차 운행 때에 통표폐색식 운전구간에서 역장이 기관사에게 주는 통증(通證). 즉 운전허가증으로 지름이 약 10cm의 놋쇠로 만든 원판으로 중앙에 원형, 사각형, 삼각형, 십자형, 마름모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은 구간마다 정해져 있고, 순서대로 순환, 지정되어 있으며 1개 구간의 역 간에는 1개의 통표만 인출이 되며 인출된 통표는 양쪽 역 중 어느 역의 통표폐색기에 다시 삽입되지 않으면 운행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필자는 철도 관련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다. 다만 가치 있는 지역 문화자산의 발굴 및 보전, 연구, 활용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며 필요하면 홍보 및 관련 기관단체에 제안하는 순수 민간 자원봉사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문경선 주평역 근대문화유산 지정 필요”라는 제하의 글에서 주평역의 희귀성이나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문화예술의 도시 문경이라는 품격을 높이기를 바란다. 주평역의 문화유산 지정을 통해서 녹슬고, 훼손, 망실 등의 위험에서 제대로 된 보존 및 관리가 되길 바란다.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핀 역사에서 '문경새재아리랑'과 '고향역'같은 그리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시랑차'나 '꼬마열차'가 운행되는 '추억의 기차역'이란 테마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다. 강원도 정선에 가면 관광테마로 운행되는 한칸짜리 '정선아리랑 꼬마열차'가 정선아리랑과 함께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메타버스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디지털 시스템이 아닌 아날로그 시스템이 운영되는 역사에서 "야외 열차박물관”을 설치하여 추억의 장소가 되고 잃어버린 감성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영화촬영소나 교육장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또 하나 문경의 명소가 태어날 것이다. 주평역은 문경 지역민들과 70년을 함께 한 근대문화유산으로써, 문경 지역성을 간직한 특색있는 역사이다. 이러한 귀중한 공간이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지정하여 사라질 수 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기를 바란다.
-
(7) 나무 시집보내기이만유/전 향토사연구위원 희망을 가득 품은 밝고 둥근 달이 떠올랐던 임인년(壬寅年) 정월 대보름,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달집태우기 등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음력 정월 보름날을 상원(上元)이라 해서 옛적에는 설날보다 더 성대한 명절로 보냈으며 여러 가지 풍속이 있었다. 그중 가수(嫁樹), 즉 "나무 시집보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 민족은 심성이 착하고 정이 많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추운 겨울을 나는 새들을 위하여 나뭇가지 끝에 까치밥을 남겨 놓거나,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에 밭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는 농부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소에게 미안하다며 소와 함께 짐을 나누어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미물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배려하는 마음에 감동하여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다”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씨앗을 뿌릴 때도 한 구덩이에 3개를 뿌린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새를 위해, 하나는 땅에 있는 벌레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먹기 위함이란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며 한 가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았다. 옛 문헌에"나무 시집보내기”는 정월 초하룻날이나 대보름날 새벽닭이 울 때에 과일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둠으로써 그해에 과실이 많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풍속이다. 시집보내는 방법은 Y자형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우는 형태가 일반적이나 일부 지역에서는 오곡밥이나 만두를 꽂아두기도 한다. 돌을 끼울 때 "해마다 새신랑 맞으니 사주에도 없는 자식을 난들 어찌하리오” 하거나, 욕설로 도색 주술을 외기도 하는데 상스럽고 음란한 말일수록 효험이 좋다고 한다. 또 과실이 많이 달리기를 바라며 도끼로 나무를 찍는 시늉을 하면서 "올해 열매 많이 안 열면 내년에 잘라 버린다!”라고 위협하기도 한다고 했다. 과수는 대체적으로 한 해 수확량이 많으면 영양 손실이 커 그 이듬해는 수세가 약해져서 열매가 거의 열리지 않는 해거리를 한다. 그래서 나무 시집보내기는 이를 피하여 해마다 많은 결실을 얻기 위한 바람에서 하는 것이다. 사람도 혼인을 하면 자녀를 낳고 사랑을 하면 행복감을 느끼듯이 나무를 혼인을 시키고 사랑을 하게 해 기분 좋게 하여 성장을 촉진하고 열매를 많이 달리게 하려는 농부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하나의 성적인 모방주술행위(模倣呪術行爲)로서 어떤 현상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려는 주술로서의 나무 시집보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 시집보내기는 과학적으로도 잎에서 광합성을 한 영양분이 뿌리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해 열매를 많이 열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추나무는 5월 단옷날에 시집을 보내고 도끼 뒤쪽으로 나무를 고루 잘 두드리면 열매가 떨어지지도 않고 크고 맛도 좋아진다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도끼에 신비한 잉태의 힘이 있다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도끼에는 마귀를 쫓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작은 도끼 서너 개를 몸에 지니기도 하였다. 특히 혼인 첫날밤 신부는 아이를 잉태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도끼를 요 밑에 깔아두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나무는 여성이고 돌과 도끼는 성교 혹은 남성의 상징으로 믿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스개 이야기 하나 하자면,옛날에 어떤 큰 부자가 고대광실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 마당에 몇백 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올해도 은행이 많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커다란 돌로 나무 시집보내기를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밤마다 꿈에 은행나무가 수염이 허연 노인으로 변신해서 나뭇가지에 끼워 넣은 그 돌을 들고 와 주인의 사타구니에 끼워 넣기를 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잠에서 깨어나는 고통을 당했다. 알고 보니 은행나무는 암수가 있는데 수나무에다 나무 시집보내기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 끼웠던 돌을 빼내니 다시는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 시집보내기 할 때 조심하세요. 농심/ 이만유 멧돼지가 밭에 들어와 일 년 농사를 다 망쳤다 주름진 할아버지 말씀 "산골 농사 요거 딱 농갈라 묵기라요 내가 반 묵고, 멧돼지가 반 묵고” "그래도 속상할 텐데요” 하니 "농사는 말이여 하늘이 반 내가 반, 반반씩 짓는 거여 그라니까 농갈라 묵는 거지” "속상해 안달하면 몸에 병 생기여”
-
(6)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사업 신중 추진 제언이만유/전 향토사연구위원 서기 867년 경북 문경 땅에 왕이 태어났다. 고전에 밤에 찾아온 손님이라는 "야래자 설화(夜來者 說話)”에 의하면 가은읍 갈동 아차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예쁜 딸이 있었는데 밤이면 이목이 수려한 자줏빛 옷을 입은 초립동이 나타나 처녀와 정을 나누다가 새벽이면 사라지고 또 다시 밤이면 나타나길 무릇 수개월이나 되었다. 결국 처녀는 아이를 잉태하여 어찌하는 수 없어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부모는 오늘 밤 그 사내가 오면 평상시와 똑같이 하되 몰래 바늘에 실을 꿰어 옷자락에 매어 두라 하였고 날이 밝자 실을 따라가 보니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굴속에는 옆구리에 금빛 띠를 두른 큰 지렁이가 몸에 실이 감긴 채 누워있었다. 그 후로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았고 10개월이 지난 후에 처녀는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 아이가 후백제 왕 견훤이다. 그 뒤 굴속에서 풍악이 울려 나왔고 그 소문을 들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굴을 그만 메워버렸다. 그런 후로 풍악소리가 사라지고 마을에는 불상사와 불운이 겹쳐 일어났다고 한다. * 이와 똑같은 야래자 설화는 후백제 시원지 광주(무진주) 북촌에도 전해오고 있다. * 역사는 승자의 것으로 지렁이 설화는 승자 측에서 지어낸 것으로 기껏 용이 아닌 보잘것없는 지렁이 자식밖에 안 된다며 폄하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설화를 지닌 채 천여 년의 긴 세월이 흘러가고 그 굴은 수풀이 우거져 사람들 기억 속에 사라졌다. 다시 말해 설화 속 굴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월 18일 국회 세미나실에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를 포함시키기 위한 토론회가 개최됐다. 그리고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분포돼 있는 "후백제 역사문화권” 전국 7개의 시·군(문경시, 논산시, 상주시, 전주시, 완주군, 장수군, 진안군)이 2019년 8월 20일 전주시에서 첫 회의를 시작으로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후백제 지방정부협의회” 구성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련의 이런 활동은 후백제의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백제, 신라, 가야문화권과 같이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기 위하여 지자체 간 협력체계를 구축, 후백제문화권 관련 지자체의 동반 발전과 정보공유를 위함이며, 문경시는 견훤 출생지인 가은읍 지역 등 관내 견훤대왕 유적지를 역사적, 장소적 근거를 기반으로 정비하여 문경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런 대형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자면 협의체 구성과 국가 예산 지원 근거가 되는 관련법의 개정 추진과 관련 문화유산의 정비, 복원, 보존도 중요하지만 이 사업을 기획 추진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우리 지역 후백제 관련 문화유산에 대한 문헌 및 현지 조사와 연구를 통한 역사고증 및 장소 비정 등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2013년 필자가 향토사연구 활동 중 아차마을을 찾게 되었고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 마을에 세거해온 전주이씨 집안의 이상호 어르신(당시 86세)을 만나 들은 이야기로서(녹취) 해방되든 해 겨울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매몰되어 사라진 설화 속 굴을 다시 복구하자고 하였으나 전혀 흔적이나 관련 정보가 없어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참고하여 어림짐작으로 지금의 위치에 5m 정도 땅을 판 곳이 현 금하굴이라는 것이다. 당시 마을에는 5개 반(10여 호)이 1일씩 교대로 작업을 했으며 본인이 당시 18세로서 직접 마을 어른들과 함께 해동이 될 때까지 굴 파기를 했으며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 굴을 모두 진짜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부 주민들의 말과 함께 마을 뒷산에 설화 속 굴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오래된 동굴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하굴과 그 주변의 토지(순천김씨 종중) 소유주였던 김두희(金斗熙) 박사께서 1997년 문경시장에게 보낸 "견훤유적지 조성사업에 대한 이견”이란 글에서 "금하굴은 견훤유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금하굴은 1946년 금하굴을 발굴해서 동민의 소득을 올려보겠다고 파다가 실패한 흔적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전설 속 초립동이 들어간 곳이 굴이 아닌 쏘(아차마을 뒷산에 민지쏘가 있음)라고 한 마을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이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금하굴에 안내판을 세우고 정비를 하여 홍보한다고 하니,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이 금하굴로 잘못 알고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후손들에게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알리는 것은 '가짜 민속지식'이 된다. 그런데 이미 문경시가 견훤왕과 관련된 향토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1996년에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 및 각종 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견훤유적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으로 2002년 6월 숭위전을 건립하고 금하굴 주변을 일제히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1월 26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 용역 최종보고회를 개최하고 이 보고서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 사업 추진 근거자료로 활용, 금하굴 정비와 생가 복원 등을 추진하여 관광자원화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이 사업 추진에 있어 우리 지역 견훤유적지 중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야래자(夜來者) 설화인 "견훤 출생설화”가 있는 금하굴(金霞窟)과 생가 복원 등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문헌 고증과 현지 등 다양한 조사를 통해 그 실체를 다시 한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실시했다는 "학술조사 및 개발용역보고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금하굴에 대해 위 이상호 어르신의 진술과 김두희(金斗熙) 박사의 기고문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크고, 생가 역시 금하굴처럼 아무 근거도 없이 소설 쓰듯 허구를 진실인양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정확한 학문적 연구와 역사적 고증 없이 마을 주민도 믿지 못하는 곳에 인위적으로 만든 현 금하굴도 재고되어야 하고, 생가터 역시 근거 없이 추측만으로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역사유적인 것처럼 한다면 후손들과 역사에 부끄러움이 되고 사업 완공 후 찾아오는 학생, 관광객을 기만하는 비교육적인 현장이 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기록을 참고하면, 후삼국은 후백제·후고구려·통일신라 3국을 말하는 것이며, 후삼국 시대는 892년 견훤이 무진주(현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후백제는 견훤(甄萱 867~936)이 신라 서남 해변을 방비하는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때 무진주(武珍州:光州)와 완산주(完山州:全州)를 장악하고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삼고 900년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농민이었다가 장군이 된 아자개(阿玆蓋)의 아들이다.
-
(5) 문경의 정월(正月) 세시풍속이만유 (전 향토사연구위원) 임인년 설날을 맞아 우리 조상들이 문경지역 생명의 젖줄인 영강과 금천유역에서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삶의 터전 위에 남긴 고유전통문화 중에 ‘문경의 정월 세시풍속’을 알아보았다. 설날에는 옛날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었던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아이들은 설날 아침에 꼬까옷 설빔을 차려입는다. 친족이 모두 모여 종갓집부터 차례를 지낸 후 세찬으로 음복을 겸해 아침 식사를 하게 된다. 아침상을 물리고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면 덕담과 함께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었다. 궁한 시절이라 용돈을 받기 어려웠는데 아이들은 신이 나서 친척과 이웃 어른에게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다. 그리고 오후에는 온 가족이 조상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 ‘복조리’는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누군가 모르게 대문 안에다 조리 한 쌍을 갖다 둔다. 조리값은 며칠 후 받으러 온다. 이 복조리에 엿, 돈, 김밥, 성냥 등을 넣어 두는데 엿은 엿처럼 재산이 늘어나라는 뜻이고, 돈은 자꾸 모여 부자가 되라는 뜻이며, 김밥은 볏섬을 뜻해 농사의 풍작을, 성냥은 불처럼 활활 일어나 잘 살게 해 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 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기도 했다. ‘앙괭이(夜光鬼)’는 설날 밤에 몰래 찾아와 제 발에 맞는 아이의 신을 신고 간다는 속설의 신(神)이다. 신을 도둑맞은 사람은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하여 설날 밤이면 앙괭이가 신을 찾지 못하도록 감추어 두고 잔다. 앙괭이를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대문이나 높은 장대에 체를 걸어 두는데 호기심이 많은 앙괭이가 체를 발견하고 체의 눈이 몇 개나 되나 세어 보다가 눈이 너무 많아 세다가 잊어버리고 다시 세기를 거듭하다가 그만 날이 밝아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그냥 되돌아간다고 전한다. 특히 정초(正初) 금기 중에 여자들은 초하룻날 외출을 삼가야 하고, 키가 큰 사람이 먼저 들어오면 상치가 잘 자란다고 좋아하고, 상을 당한 상주는 정월 대보름 안으로는 남의 집에 가기를 삼가고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택고사(安宅告祀)’는 정월 중 대개 보름 전에 길일을 택하여 지낸다. 무당을 불러 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시루떡과 정수를 올리고 조왕과 성주신에게 집안의 평안과 부귀, 풍년을 기원한다. 이때 가족들은 목욕재계하고 집 앞에 황토를 뿌린다. 정월(正月) 대보름날은 오곡밥 먹는데, 여러 집의 밥을 먹으면 1년 내내 좋은 일이 계속되고 농사도 풍년이 든다고 하며 ‘오곡밥을 아홉 집 이상 먹고, 남자들은 나무 아홉 짐을 하고, 여자들은 삼 아홉 광주리를 삼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가까운 이웃끼리 오곡밥을 나누어 먹는다. ‘개보름’이라 해서 정월 보름날에는 개밥을 주지 않는 풍습이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날 개한테 밥을 주면 그해 여름에 파리가 꾀고 개가 마른다. 하여 개를 굶기는데 ‘개보름 쉬듯 한다’라고 하는 말이 이 풍습으로 생긴 말이다. ‘용알뜨기’란 것이 있다. 정월의 첫 용날이나 대보름날 새벽 첫닭이 울기 전후하여 주부들은 샘에 가서 물을 뜬다. 전날 밤 용이 우물 속에 알을 낳는데 이 물 뜨는 것을 ‘용알뜨기’라고 한다. 이 물로 보름날 아침밥을 지으면 그해 풍년과 가정에 운수가 좋다 한다. 제일 먼저 뜨는 물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경쟁이 심하였다. 그리고 ‘부럼’은 대보름날 새벽에 잠에서 깨자마자 땅콩, 호두, 잣, 밤, 은행 등 딱딱한 것을 입안에 넣고 깨물어 먹는 것을 말한다. 부럼을 깨물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첫 부럼은 깨물어서 마당에 던져 버린다. 또 ‘귀밝이술(耳明酒)’이라 해서 이날 아침 식사 전후하여 집에서 담근 찬술을 어른들께 먼저 올리고나서 마신다. 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 그해에 좋은 소식을 빨리 많이 듣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문경지역은 옛부터 농악이 유명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농악대가 풍년을 기원하여 여러 가지 곡식 이삭을 벼 짚단에 싸서 세우는 장대인 ‘볏가릿대’를 세우기도 하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지신을 달래어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풍작 및 가정의 복을 축원하는 ‘지신밟기’를 해준다. 이때 쌀, 떡, 실, 돈 등과 촛불을 켜 놓은 고사상인 ‘꽃반’을 차려놓는다. 그래서 지신밟기를 꽃반이라고도 한다. ‘달맞이’는 정월 대보름달이 뜰 무렵에 동산에 올라가 달님에게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달점(月占)’이란 것을 보는데 커다란 양푼에 물을 떠 놓고 거기에 거울을 넣어 달을 비추어 달이 둥그렇게 뜨면 그해에는 풍년이 든다. 또 달의 색이 빨강, 노랑 등 색색으로도 비추는데, 이때 물색이 빨갛고 고우면 그해 신수가 좋다고 한다. ‘더위팔기’는 보름날 아침, 이름을 불러 대답을 하면 ‘내 더우’,‘내 더위 사 가게’하고 팔아 버린다. 그래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한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여름 동안 더위를 먹지 않는다. 반면 더위를 산 사람은 더위에 시달린다고 한다. ‘걸립’은 농악의 일종인 걸립놀이가 행해지는데 걸립패가 집에 들면 주인은 반갑게 맞아 마당 가운데 자리를 깔고 반에 양푼, 됫박, 말, 식기 등에 곡식이나 돈을 담아 정성껏 차린다. 이렇게 모인 것들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정월 첫 뱀날인 사(巳)일에는 썩은 새끼에 헌 고무신을 매어 불을 붙여 ‘뱀 치자! 뱀 치자! 외치면서 삽짝 밖에서 태우는 행사인데 뱀이나 독충의 침입을 막는 주술행위이고, ‘달집태우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를 때 솔가지 등에 불을 놓아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풍속인데 달집이 훨훨 잘 타야만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대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이므로 사람들은 소원지 써서 함께 불사른다. 근래 산북면에서 해마다 달집태우기 행사를 이어 왔으나 코로나로 인해 중지하였다. 정월(正月) 놀이로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종경도놀이(從卿圖, 昇卿圖) 등이 있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윷놀이 등 일부만 생활 속에 남아 있고 연날리기는 의성군에서 세계축제로 승화되고 대다수 놀이는 보기가 어렵다. ‘입춘(立春)’은 24절기 중에서 첫 절기로 이날에는 대문이나 기둥, 대들보, 천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滿乾坤福滿家) 등 입춘축(立春祝)을 붙인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태 속에 얼마 전까지 이어오던 우리의 고유 세시풍속이 원형을 잃고 퇴색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아직 일부 남아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어르신들의 추억 속에서 그리움만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도 설날과 추석의 차례와 성묘는 전승력을 갖고, 민족대이동이라 할 수 있는 명절 풍속을 이어가고 있고, 편리에 따라 자녀들이 사는 서울 등 대도시로 역귀성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세상이 많이 변하여도 사람 사는 이치는 같고 우리의 것이 소중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외래문화에 너무 치우치지 말고 우리 고유 정서와 가치관, 정체성을 가진 전통문화를 그대로 이어가거나 새 시대에 맞춰 변화, 응용, 승화시켜 지역 축제화는 물론 한민족의 위상을 높이고‘밸런타인데이’,‘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등 상술에 의한 것이 아닌 우리의 전통문화가 기반이 된 K-문화가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 콘텐츠가 되기를 바란다. 정월正月 맞이 이만유 詩 섣달그믐날 밤 아이들 신 훔치러 살금살금 온 앙괭이 문 앞에서 체 구멍 세다 밤새우고 둥둥둥 천신天神 맞이 영고迎鼓 울리면 환한 새 천지天地 열린다 잡사雜事 중단하고 다례茶禮 올리고 ‘새해 복福 많이 받았다지’ 언영言靈 담긴 덕담 주고받고 부럼 깨물고 나무 시집보내고 세주歲酒 귀밝이술 한잔에 모든 문이 열린다 정월 대보름 맞이하면 한해 꿈 실어 둥근 달 둥근 마음 아롱다롱 연에 실어 띄우리 풍년들고 태평하길 액을 쫓고 복을 비는 달집태우기 가슴과 가슴에 불꽃이 활활 북 치고 장구 치고 얼씨구절씨구 우리 모두 어울려 어깨춤 덩실덩실
-
(4) 문경약돌돼지 개발 이야기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물먹는 하마’라는 광고를 들어 보셨지만 ‘돌 먹는 돼지’ 들어 보셨나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신록이 찬란한 6월 어느 날, 문경시농업기술센터에서 박인규 계장님께서 모셔온 한 분의 귀빈을 소개받았다. 당시 필자는 센터 축산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날 만난 분은 한평생 교직에 계시다가 퇴직 후 광산업을 하시는 ‘삼선페그마타이트’ 전금배 대표이다. 이 만남을 계기로 문경의 대표 축산물 브랜드 ‘문경약돌돼지’와 ‘문경약돌한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금배 대표께서 한 보따리 서류와 깨진 바윗돌과 돌가루를 들고 오셔서 그동안 추진한 사업 실적과 임상시험 자료들을 설명하셨는데 가지고 오신 돌덩이가 바로 약돌돼지를 만드는 주재료인 페그마타이트(거정석)이었다. 우리나라에 남북한 합해서 페그마타이트 광산이 8개소 정도 있지만, 문경시 가은읍 수예리에 생산되는 것이 특수물질과 유효성분이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 페그마타이트 광석의 주성분에는 게르마늄(Ge), 셀레륨(Se), 홀뮴(Ho), 세륨(Ce) 및 방사 Energy를 방출함으로 기능성, 약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치약, 샴푸, 비누, 화장품, 탈취제, 건강용 목욕시설 석재 등으로 활용하였고 식수에 침지 알칼리수 음용, 민간요법으로 무좀, 아토피 등 피부 질환에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하나 인체에 사용하는 것은 의료법 저촉 문제 등이 있어 예외로 하고, 그 당시 수입농산물의 피해를 겪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농축산물 브랜드화가 주목받는 때라 직업의식이 발동, 이 광석을 이용한 기능성 축산물 생산을 생각하게 되었고 광산 측과 의견 투합하여 고품질 브랜드 축산물을 생산하기로 하고 바로 시험연구 사업을 기획 "거정석을 이용한 축산물생산 시험연구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사업추진을 위한 예산이 필요한데 회계연도 중반이고 추경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고심 중에 광산주께서 시험연구에 필요한 자재, 검사비 등 일체 경비를 부담하겠다고 하여 대상 축종을 돼지와 한우로 정하여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때 시험연구 사업계획서에 명시할 브랜드명으로 광물명을 사용하기보단 대중적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신비한 돌, 약이 되는 돌이란 의미로 약돌이라 하고 ‘문경약돌돼지’‘문경약돌한우’로 명명하였다. 그리하여 시 예산 1원도 투입 없이 농업기술센터는 시험연구 기획 및 기술제공만 하기로 하고 순수 민간자본을 이용 관민 공동으로 추진하는 1차 시험연구사업으로 약돌돼지는 1998년 8월 1일부터 11월 10일(100일간)까지 추진되었고, 시험연구 대상축은 영순면 김용리 문석환 농장, 호계면 견탄리 이동성 농장의 사육 돼지로 하였으며, 시험 연구팀으로 농촌지도사 이만유(팀장)∙박희성+삼선페그마타이트광산 전금배로 구성하였다. (문경약돌한우 1차 시험연구 기간 : 1998. 08.01∼1999.07.31(1년간)) 이렇게 추진한 페그마타이트를 이용한 최초의 약돌축산물 시험연구 사업의 결과는 놀라웠다. 시험사육 기간이 종료된 돼지를 도축하여 검사 시료를 채취하여 축산기술연구소에 육질 분석을 의뢰하고, 남은 돈육을 관계자들이 모여 시식회를 하였는데 모두 지금까지 맛본 돼지고기와는 완전히 차별화된 맛에 놀라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돼지 특유의 잡내가 없었고, 고기의 색깔도 선명하고, 부드러우면서 쫄깃쫄깃한 식감이 좋았으며, 식후 입안에 기름기가 남지 않아 개운하였으며, 익은 고기가 쉽게 굳지 않는 등의 특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분석한 육질의 결과도 획기적이었다. 관능검사(연도,향미) 및 색도가 고급육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고 필수아미노산 함량이 높고, 지방함량이 낮으면서 특히 우리 몸에 나쁜 포화지방은 적고 좋은 불포화지방 함량이 높았으며, 전단력과 가열감량 면에서도 개선이 되었으며, 중금속 중화효과가 있는 셀레늄 등이 함유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종합적으로 육질, 맛, 영양이 우수한 돼지고기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사육과정 중에 호흡기질병 등이 감소하여 항생제 등 약물투입이 적었고 일당 증체량을 높여 출하기간 단축과 사료 절감은 물론 도체등급 판정도 고급육 비율이 향상되어 농가 소득 증대에 기여할 수 있었다. 문경약돌돼지의 맛과 명성이 알려지고 난 뒤 대한민국 돈육 소비, 유통시장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약돌돼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특히 대구, 포항, 창원, 구미. 울산 등 근로자가 많은 곳에서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다수의 도시에 약돌돼지를 판매, 취급하는 식당, 식육점, 백화점, 마트 등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의 녹차를 먹여 키운 ‘녹돈’이 전국 돼지고기 유통시장을 주도하다시피 했었는데, 문경시와 상표권 및 특허권 사용계약을 체결하고 약돌돼지고기를 전담 공급하는 ㈜문경약돌돼지(김상준 대표이사)가 엘지유통 등과 손잡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쳐 ‘약돌돼지’가 우리나라 유통시장의 대세가 되었다. 그 뒤 필자는 다른 부서로 이전되고 2차 시험연구사업이 추진되어 대학교수, 연구소 연구관, 농가, 공무원 등 10명으로 구성된 팀이 6천만 원의 문경시 예산사업으로 추진하였다. 시험연구 결과는 1차 관민 합동 비예산 사업으로 추진했던 결과와 대동소이하였으며 그 후 문경약돌돼지 상표등록과 기술특허를 받았다. 이렇게 문경약돌돼지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문경시에서 약돌한우 사육을 권장하고 지원하여 성과를 올렸으며 그 후 문경에서는 약돌계란, 약돌송어, 약돌사과, 약돌오이, 약돌쌀, 약돌도자기 등 동식물과 가공품에 페그마타이트를 이용한 다양한 농산물과 상품이 생산되었다. 젊음과 내 한 생을 바친 공직생활 33년 중에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페그마타이트(거정석=약돌)란 광석을 만난 인연으로‘문경약돌돼지’ ‘문경약돌한우’란 이름을 짓고 첫 시험연구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이제 명실상부한 문경 축산물 대표 브랜드로 발전,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 이 모든 사업을 함께하고 도움을 주시고 오늘의 문경약돌 명품 축산물이 있도록 초석을 놓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아쉽게도 필자와 농장주 2분 외는 모두 고인이 되신 것에 대해 내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이라 지면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3) 전국 캘리그라퍼들이 선호한 詩 "문경새재아리랑”이만유(문경문화유적회 초대회장) 지난해 12월, 경북 문경시에서 후원하는 "제2회 전국공모 문경연가 캘리그라피 대전”이 "문경문학관” 주최로 개최되었다. 전국의 캘리그라피 작가들에게 국내 시인들로부터 공모한 "문경”을 소재로 쓴 31편의 詩 중에서 작가가 선택하여 작품화한 것이다. 캘리그라피는 손으로 그린 문자이다. 다음은 공모 작품 중 특선을 수상한 하경수 작가의 '문경새재아리랑'(시조)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문경새재아리랑 마을 뒷산 마루금이 초가집 반달 지붕이 조령천 물소리가 문경새재 열두 고개가 어울려 가락이 되어 곡선으로 흐른다 아리랑은 삶의 노래 고단한 민초의 노래 살아 온 굽이마다 숱한 사연 풀어낸다 모두 다 저 고개 넘어 꿈을 찾는 희망가 총 535점 작품이 접수되어 대상 1점, 최우수상 1점, 우수상 2점, 특별상 9점, 문경연가상 7점, 특선 124점, 입선 221점 등 365점이 입상했다. 이 수상작 중에서 대상을 포함, 총 48점이 "문경새재아리랑”으로 쓴 작품이다. 캘리그라피 대전 운영위원회에서 작품을 접수할 때 어떤 날은 3점이 오면 1점이 될 정도로 인기 있는 詩(시조時調)였다고 하였다. 이 시는 문경새재아리랑이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고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로 뽑힌"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창작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신이나 삶과 생활 속에는 직선보다 곡선이 더 잘 어울리고 함축성이 크다고 본 것이며, 직선은 곧지만 부딪힐 것 같은 날카로움이 있고 곡선은 둥글둥글 부드럽고 원만하다. 우리가 사는 마을 뒷산의 마루금이 곡선이고, 둥근 박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초가집 지붕이 반달처럼 둥글고, 문경새재 열두 고개(굽이)가 둥글고, 길 따라 흐르는 조령천 물굽이도 둥글고, 흐르는 물소리, 백성들의 마음까지도 둥글다. 이런 둥근 것들이 모두 어울려 문경새재아리랑이 된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굽이마다, 희로애락을 느낄 때마다 부르는 삶의 노래이고, 민초들의 숱한 사연을 풀어내는 노래이며, 문경새재 아리랑고개는 오천만 민족의 새 삶을 꿈꾸는 희망의 고개이다. 아래는 필자가 대상 수상 작가에게 보낸 축시이다. 축시 "제2회 문경연가 캘리그라피 대전", 대상을 축하하며 전국 캘리그라피 작가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고 또 대상작이 된 문경의 詩 "문경새재아리랑” 글과 서예나 그림은 마음에 안기고 품어야 표현되는 것 캘리그라피도 여운이 있는 시가 가슴에 머물 때 명품이 탄생한다. 붓이 춤추어 글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고 감성으로 세상을 울린 명작 제2회 문경연가 캘리그라피 대전 축 대상 박영은 님! (이만유 作詩)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2‘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3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5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6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
- 7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
- 8서울문화재단,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서울스테이지 2024' 5월 공연
- 9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
- 10국립극장 마당놀이 10주년…“새로운 얼굴 찾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