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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문경새재(鳥嶺)와 관문(關門)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5천만의 고개, 고갯길의 대명사 문경새재를 다녀가신 분들께서 여행기를 쓸 때‘새재’를 ‘세제’로 표기하여 하이타이 세제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른 뜻은 하늘을 나는 ‘새’와 고개를 말하는 ‘재’를 말하는 것이고 한문 표기는 조령(鳥嶺)이다. 문경새재 유래를 말하기 전에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이라는 구슬픈 가락의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노랫말에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으악새’가 과연 무엇일까? 새일까? 억새일까? 많은 사람이 ‘으악새’는 ‘억새풀'이고 ‘으악새가 슬피 운다'는 것은 ‘새가 구슬프게 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억새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를 말한다라고 알고 있으나, 이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가 ‘으악’하고 우는 새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하니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으악’하고 우는 새는 ‘왜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으악새’를 아직도 ‘억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떠도는 유머 중에 5대 어거지(억지)가 있다. 위에서 말한 ‘으악새’를 억새라고 우기는 것과 청남대를 대학교 이름이라고, 구제역을 전철역 이름이라고, 복상사를 절 이름이라고, 몽고반점을 중국집 상호라고 우기는 것 다섯 가지이다. 필자가 2개를 추가하여 7대 어거지가 되었다. 추가한 두 가지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 또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것이다. 앞에 다섯 가지 어거지는 웃고 넘기시고 뒤의 두 가지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서 힘을 합쳐 막아주셔야 하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새재’의 유래는 무엇일까? 첫째는 ‘초점’(풀 草자, 고개 岾자)이라 해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으로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이 남아 있는 새재의 옛 지명이다. 둘째는 조령(鳥嶺)으로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는 의미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셋째는 새로운 재라는 의미로 옛길 하늘재에서 새로 개척된 길인 조령으로 이동로가 바뀐 것에 유래되었고, 넷째는 사이에 있는 재라고 해서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중간에 있다는 것으로 4가지의 설이 있으며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남 지역에서 옛날 한양가는 큰일이 세 곳이 있었다. 속설에 의하면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죽령으로 가면 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의 문경(聞慶)새재를 즐겨 넘었다고 한다. 즉 영광스러운 과거급제 소식을 전하고 전해 듣는 기쁨의 고개, 경사의 고개라고 하는 그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된 3개의 조령 관문(鳥嶺 關門)이 있다. 관문은 국경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검문하고 물품을 조사하던 곳이다. 문경새재 초입에 있는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은 조선조 숙종 34년(1708)에 축성되었으며 초곡성이라고도 한다. 영남은 조선 시대 때 경제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영남으로 통하는 문경새재 고갯길은 일본과 조선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정치 및 통상로이고 특히 군사적으로 중요하여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관하고 축조한 관문 및 산성이 있는 곳이다.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은 3개의 관문 중 제일 먼저 설관, 축성된 관문이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당시 영의정인 서애 류성룡이 간하고 수문장인 충주 사람 신충원이 축성하였다 한다. 문경이 무너지면 충주가 무너지고 충주가 무너지면 도성(한양)을 지킬 수 없다는 군사 전략적인 이유로 급히 세운 곳이다. 원래 이름은 중성, 조동문, 주서문이라 하였다가 후에 조곡관이라 하였으며 주흘관과는 114년의 시차가 있다. 여기에는 ‘신립과 새재 여귀’라는 전설이 있는데. 신립 장군이 임진왜란 시 새재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할 때 백전노장 김여물 부장 등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갑자기 모병한 훈련 받지 못한 병사들이 대다수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고심하는 중에 신립 장군을 사모하다가 원을 품고 자결한 처녀 원귀가 나타나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어찌 대장부답지 않게 이처럼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하고는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그만 요사스러운 원귀의 말을 믿고 그곳에서 싸우다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대패하여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었다. 뒷날 사람들은 천혜의 요새인 새재에서 석공, 수공, 화공을 이용한 산악전을 폈더라면 승전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안타까워하였고 역사는 가정할 수 없고 지나간 일이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그때 만약 신립이 조령을 사수하였더라면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는 치욕을 피할 수 있었고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은 주흘관과 같은 시기에 축성된 관문으로 경상도와 충청도, 영남지방과 기호지방,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경계 지점이며 영남지방이 조령의 남쪽이란 뜻이니 여기서부터 영남지방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제1, 2관문은 남쪽 적을 방어하기 위해 남쪽으로, 제3관문은 북쪽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세워져 있다. 그래서 문경새재 관문과 조령산성 안은 하나의 요새로서 안전지대가 되는 곳이며 여차하여 나라에 환란이 있을 시 임금이 몽진하거나 파천할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다. 이제 지상(紙上)으로 가 본 문경새재와 관문 여행을 마칠 시간, 조령관 용마루 빗물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끝을 맺고자 한다. 문경새재에 비가 내리면 제3관문 조령관 용마루 남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조령천과 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로 빠지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남한강 충주댐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서해로 가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 사람이 살면서 어느 길로 가느냐? 어디에 서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여기 이 빗물과 같이 아주 조그마한 차이(선택)가 궁극적으로 천양지차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조령관 용마루 빗물이 주는 교훈을 새기면서 모두 바른 선택으로 좋은 길로 가시고 좋은 자리에 우뚝 서시길 바란다. 신경림 시인이 지은 장시 ‘새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 고개 넘으면 새 세상 있다는데, 우리끼리 모여 사는 새 세상 있다는데…” 한이 많은 우리 민초들은 수많은 침략과 전쟁 속에 핍박과 수난을 겪으며 가난한 삶을 살아오면서 항상 새 세상을 꿈꾸며 살았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어 따뜻한 남쪽 나라 어딘가에 내가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신천지를 그리워했고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한양이 있는 곳, 넓은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곳 어딘가를 동경하며 복지의 땅, 이상향(유토피아)을 그리워한 것이다. 그래서 문경은 우리 모두에게 경사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는 땅이며 문경새재는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우리 모두의 고개이다. 문경새재 / 이만유 높은 산 깊은 계곡 물 따라 길 따라 고갯길 걸으면 까짓것 어디서 누가 뭐하든 몰라도 좋다 산허리 굽잇길 우거진 숲 사이 빠끔히 내민 파란 하늘에 흰 구름 한 점 두둥실 떠가면 까짓것 아랫동네 지지고 볶는 것 그냥 몰라도 좋다 고개 넘어 한줄기 시원한 바람 가슴에 품으면 까짓것 세상사 모든 것 다 잊어도 좋다 굽이치는 폭포수에 온갖 시름 씻어내고 소나무 바람 소리에 마음을 빗질하면 희다 못해 푸른빛 도는 옥양목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된다 신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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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문경새재 바위굴과 새재우(雨)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로 선정된 문경새재(조령-鳥嶺)는 조선 3번째 임금인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된 길이며 조선 시대 제5번 국도인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문경새재 바위굴은 2관문과 동화원 사이 문경새재아리랑비에서 200m 정도 오르면 조곡천 옆에 꽤 큰 굴이 있다. 문경새재는 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개로서 역사, 전설, 설화, 민요 등 많은 이야기가 스며있다. 먼 옛날 문경새재를 넘던 과객이 갑작스러운 소낙비를 피해 길옆 바위굴에 들었는데 어럽쇼! 웬 처녀가 먼저 비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외딴 산길이라 인적도 드물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사위는 어두컴컴 적막한데 청춘 남녀 둘만이 이 좁은 공간에 있다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가 그만 불같은 젊음이 타올라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다. 엉겁결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을 끝낸 선비는 이름 석 자도 아무런 정표도 없이 급히 옷을 고쳐 입고 훌훌 떠나 버렸다. 남녀가 은밀히 만나고 나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여자는 배가 불러왔다. 그 후 처녀는 아들을 낳고 운명이라 생각하며 수절하며 살았다. 아이가 성장하였는데 마을 서당에 가면 친구들에게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당하자 "왜 나는 아버지가 없나요?”하며 어머니에게 가정사 내력과 아버지에 관해 물었다.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때의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여주었고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엉겁결에 본 그 선비의 엉덩이에 주먹만 한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굳은 결심을 하고 아버지를 찾아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헤매게 되었다. 그러든 어느 날 깊은 산골길을 가다가 그만 세찬 소낙비를 만나게 되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우르르 급히 길가에 있는 주막으로 달려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는데 옆에 서 있는 풍채가 좋은 중년의 선비가 혼잣말로 말하기를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雨) 같구나” 함으로, 아들이 그 말을 듣고 본능적으로 짚이는 바가 있어 "선비님! 방금 말씀하신‘새재우’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은즉 그 선비는 문경새재에서 있었던 그날을 떠올리는 듯 감회에 젖어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하므로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신분과 내력을 말하고 확인하니 두 사람이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아버지는 상처(喪妻)하여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정처 없이 이곳저곳 팔도를 떠다니는 중이라 아들이 새 가정을 꾸며 셋이 함께 살자고 간곡히 원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아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어머니와 상봉케 하였고 셋은 오랫동안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 바위굴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더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글을 쓰면서 언뜻 생각이 떠오른 것은 이즘 문경새재를 찾는 관광객이 예전보다는 못하다고 하는데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새로운 관광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이 바위굴을 활용했으면 한다. 방법은 출산율이 낮고 이혼율이 높은 현 상황에 부응하여 위해서 말한 "이곳 바위굴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더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대로 이 바위굴을 테마로 해서 업데이트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바위굴 내외부를 잘 꾸며 놓고 갓 등 선비복과 쓰개치마 등 옛 부녀자 복장을 하게 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 홍보하여 전국의 연인이나 부부가 찾아오는 새로운 명소를 만들었으면 한다. 문경새재 바위굴 / 이만유 문경새재 깊은 계곡 바위굴 인연 전설 빗속의 뜨거움은 천생연분 맺음일세 연인이 손잡고 들면 영원 행복 사랑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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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문경 탄광촌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석탄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부존에너지 자원이다. 문경은 국내 제2의 탄전지대로서 1926년 대성탄좌가 남한 최초의 석탄광산으로 개광되었고 그 이후 73개의크고 작은 광산들이 생겨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석유, 가스 등 고품질 연료의 공급과 화석연료로서 환경 문제 등으로 인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94년 7월 30일 은성광업소가 마지막 문을 닫으면서 문경 인구16만 명의 번창했던 한 시절 영화를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내 고향 문경이 다시 도약하는 제2의 번영을 꿈꿔보면서 오늘은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탄광촌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은성광업소 13편 병반 근무 시 갱내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44명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었다. 화재 바로 전날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날이라 큰 뉴스에 가려졌지만, 화재가 난 다음 날 북한 방송에서 이 사고에 대해 보도가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북한에서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한 것일까? 이상하게 여긴 정보기관에서 사회 혼란을 획책한 간첩에 의한 방화로 추정하고 당일 근무자들을 조사했다는 비공식적인 뒷말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인은 담뱃불 등 여러 설이 있었으나 정밀 조사 결과 석탄을 운반하는 체인컨베이어 마찰 과열로 고무 부분에서 발화한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이렇게 탄광에서는 크고 작은 많은 사고로 인명피해가 자주 발생하므로 광부의 생활은 전전긍긍 불안하였고 그런 관계로 탄광과 탄광촌에는 금기사항이 많았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광부가 출근하기 전에는 여자가 광부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광부들의 출근길에 여자가 가로질러 가면 부정(재수 없다)을 탄다고 하여 광부 출근길에는 대체로 여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광부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는 이장이 출근 시간 직전에 "동민 여러분, 지금 광부 아저씨들이 출근하는 시간이니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마을 방송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금기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급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런저런 탄광촌의 금기사항을 살펴보면, 전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출근하지 않는다. 남편 출근할때 잔소리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인이 도시락에 쌀때 죽을 사(死)자는 불길하다고 해서 밥을 담을 때 4번의 주걱질로 밥을 푸지 않는다. 도시락 보자기는 길하다는 청색, 홍색만을 사용한다. 남편이 출근한 후 벗어 둔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바깥쪽으로 두면 혼이 나간다는 뜻이고, 갱내에서는 귀신을 부른다며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출근길에 생명체를 밟거나 짐승을 치면 그날은 더욱 조심하거나 출근하지 않는다. 등이다. 막장(working face)은 터널의 굴착에서 최전위(最前位)의 단면이고 탄광의 갱도 끝에 있는 채굴이나 굴진(掘進) 작업장이다. 막장은 밀폐된 공간이고 지열과 지하수에 의해 덥고 습하면 공기도 희박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온몸은 금방 땀으로 뒤범벅이 된다. 옷에 스며든 땀을 여러 차례 짜서 입기도 하며 진폐를 예방하기 위해 쓰는 방진마스크도 안전을 위해 입는 광부복도 더위와 숨이 차서 착용하기가 어려워 팬티 바람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금방 콧구멍이 막히고 입속은 까맣게 되지만 성과를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 그런 막장을 사람들은 광부를 비하하는 말로 변질시켜 ‘끝장’의 뜻으로 인생 갈대까지 간 사람, 막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으로 인식하며 몸만 성하면 언제든지 일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고 사회적으로 이것저것 해도 안돼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탄광으로 온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을 만든 산업 역군인 광부들을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광부들은 캄캄한 지하 악조건하에서도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하며 내일의 꿈을 키우고 희망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이다. 광부와 쥐는 친구이고 쥐는 광부의 생명을 지켜준다. 갱내에서 쥐를 발견하면 광부들은 안심하고 작업을 한다. 갱내에는 석탄층에서 발생하는 폭발성 가스인 메탄가스나 유독가스인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 위험 가스가 많으므로 갱내에 쥐가 살고 있다는 것은 유해 가스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고 사람의 청력으로 들을 수 없는 미세음이나 진동을 듣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갱내에서 발생하는 출수 사고나 붕괴 사고 등을 미리 예감한다. 그래서 광부들은 쥐가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비실비실하는지 그 움직임을 보고 사고의 위험을 미리 인지하여 피할 수 있다. 작업 중 도시락 먹을 때 쥐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생명을 지켜주는 쥐에게 고마움의 표시이고 정이다. 죽탄이란 물과 석탄이 뒤범벅되어 마치 죽처럼 된 상태를 말한다. 지하 갱도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갱도를 굴착할 때는 우선으로 이 물을 배수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하에 있는 물이 배수로로 빠지지 못하고 석탄층으로 스며드는 경우가 있다. 석탄층에 물이 계속 스며들면 물과 석탄이 섞여 팽창하다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순간 터지게 되고 엄청난 힘으로 광부가 있는 갱도로 밀려 나온다. 많은 양의 죽탄에 휩쓸리면 갱내에 철로 된 장비들도 엿가락처럼 휘게 되고 사람의 사지가 절단되는 등 치명상을 주며 죽탄에 매몰되면 인명구조가 어렵고, 심할 때는 시신도 찾기가 힘든 상상을 뛰어넘는 끔찍한 상황이 된다. 은성광업소에서 1981년 죽탄사고가 발생하여 9명이 매몰되어 8명이 사망하고 1명은 115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큰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무너진 갱속에서 사투 1백15시간, 매몰 광부 극적 생환’이란 신문 보도에 나온 그 기적의 광부 이름은 ‘이옥철’, 캄캄한 어둠과 배고픈 공포의 5일간을 비상 식염과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살아 돌아온 의지의 광부는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시 졸업 후 처음으로 신문 지면에서 만난 중학교 동기였다. 그래서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현재 어디서 살고 있는지 수소문해 보았더니 구출되고 얼마 뒤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운명의 여신은 구원의 손길을 두번 주지 않았구나 하며 원망과 허무를 느꼈다. 여성을 금기시하는 광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광부가 있었다. 탄광에서 사고로 순직한 남성의 부인을 선탄부로 특별 채용한 것이다. 여성 광부들은 석탄과 돌을 분리해내는 선탄 작업을 하는데 겨울철이 가장 힘들었다. 얼어붙은 석탄과 돌에 손이 달라붙어 장갑을 끼고 있어도 항상 동상으로 고생하였고, 몇십 년 동안 선탄장에서 일한 여성 광부들은 관절로 인해 손마디가 굵어지게 된다. 그런데 기름기 있는 괴탄과 석탄가루로부터 피부 보호 차원에서 손과 얼굴에 좀 짙은 화장을 하는데 말하기 좋은 사람들이 남자 꼬실려고 저런다고 수군대기도 하여 남편 잃고 시부모 봉양하며 자식 키우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였다. 탄광촌에는 애환이 스민 숱한 이야기가 많지만, 마지막으로 미소를 짓게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떤 광부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대우가 좋은 화약관리자 시험을 현지에서 보게 되었는데 시험관의 질문에 긴장하여 "화약 100개 정도를 넣고 폭파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니 답은"대발파”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큰소리로 "꽝”입니다. 라고 해서 시험관도 응시자도 모두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고 시험관이 기분이 좋아졌던지 "합격!”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광부가 갱도에서 작업 중에 남몰래 술을 먹었다가 감사관에게 들켰는데 변명의 말이 "비번에 먹은 술이 본방에 취합니다.”라고 하여 한바탕 웃고는 용서하였다고 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화석(化石)/ 이만유 가은선 폐선로 위에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있다 힘겹게 숨 쉬는 그의 폐에는 삼억년 전 고생대 석탄기 양치류가 자라고 삼엽충이 바스락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다 일억 오천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공룡이 밟고 지나고 익룡이 날개를 퍼덕이다 부리로 쪼면 각혈을 한다 고통은 뱀처럼 꿈틀댄다 따가운 햇볕이 정수리를 내리쬐는 정오 힘에 부친 듯 눈을 감는다 검은 하늘 칠백 미터 지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소리 소리들 곡괭이 소리, 착암기 소리 공기압축기 소리, 권양기 로프 소리 체인벨트 돌아가는 소리 광차 소리, 폭약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김씨! 하고 부르는 소리 저녁노을 붉게 물드는 시간 이제 차오르는 숨을 고르기 위해 조용히 눕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탄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떠난다 손을 흔든다 가은선 폐선로 위에 한 남자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몸에 검은 피, 순환을 멈추고 천천히 화석이 된다 고정탄소비율 95%의 석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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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 그날을 뒤돌아보며(2)이만유/전 문경시종합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장 이 소식을 들은 문경시민들은 환영하며 축제 분위기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2일 저녁 영강체육공원 특설무대에서 시민 20,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 유치 확정 기념 범시민 경축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성공적인 대회개최와 시민화합을 다짐하는 축제의 장으로 제2군 작전사령부 의장대, 문경시립어린이무용단의 식전행사를 시작으로 2,015개의 풍선 날리기, 성공개최를 위한 퍼포먼스, 다짐 선포식, MBC 가요 베스트가 진행되어 태진아, 설운도, 박상철 등 인기가수들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2015년 10월 2일 오후 5시 30분‘우정의 어울림, 평화의 두드림’이란 슬로건 아래 마스코트 ‘해라오니’와 ‘해라온’이 반겨주는 가운데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개막식’이 박근혜 대통령,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관용 경북도지사, 김상기 공동조직위원장, 알둘하킴 알시노 CISM 회장 등 1만 8,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군체육부대 메인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다. 식전행사로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인 블랙이글스의 에어쇼를 시작으로 특전사 1여단의 태권도 시범이 있었으며 이어서 122여 개국 선수단이 각국의 다양한 군복을 입고 입장하여 환호받았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화합체전, 경제체전, 문화체전’을 넘어 인류평화와 번영의 메시지를 세계에 발신하는 세계군인체육대회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라는 환영사를 하였고 이어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에서 세계 군인들이 스포츠로 하나가 되어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감동의 퍼포먼스로 우리 전통 민요 ‘쾌지나칭칭나네'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형형색색의 군복을 입고 평화를 상징하는 솔저댄스를 함께 추었으며, 전통놀이인 차전놀이, 줄다리기,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이 순간만큼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모두 자유와 평화의 미소를 지으며 어우러져 화합의 장을 펼쳤다. 개막식이 끝나고 2015년 10월 2일부터 10월 11일까지 8개 시군 각 경기장에서 117개국 7,045명의 선수 임원이 24개 종목에서 서로의 우의를 다지면 진영과 이념을 떠나 스포츠 정신을 발휘하며 뜨거운 경기를 펼쳤으며 선수는 선수대로 자원봉사자는 자원봉사자 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대회 성공을 위해 분야별로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든 대회 일정을 끝내고, 마지막 날인 10월 11일 오후 6시 대회 10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폐막식이 있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상기 김관용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 압둘하킴 알시노 CISM 회장, 고윤환 문경시장 등 주요 초대 손님과 관객, 대회 참가 선수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각국의 화합을 다지고 인류애를 되새기는 ‘평화의 축제 한마당’이란 주제로 진행됐다. 이날 폐막식을 보고 있는 필자는 세계 유일 분단국에서 개최하는 평화의 대전인 이번 군인체육대회에 북한도 참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대했지만, 끝내 참석하지 않은 채 끝나게 됨이 못내 아쉬웠다. 폐막식은 사전 문화행사로 1군 사령부 태권도 시범단의 태권쇼를 시작으로, 개회식 때 있었던 솔저댄스를 다시 함께 즐겼으며, 3군 연합 록 밴드 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압둘하킴 알시노 CISM 회장이 본 대회에서 뛰어난 기량으로 최다 메달을 획득한 러시아 선수단에 ‘최고 국가상’을 시상하였으며, 대회 내내 미소와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봉사한 대회 성공 숨은 주역인 자원봉사자들을 대표한 이만유(문경시), 장민주(서울시) 봉사자에게‘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했다. 이때 필자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대회인 군인체육대회 폐막식 행사장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꽃다발을 받는 순간의 감동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고 영광이었다. 이어 2019년 제7회 세계군인체육대회 차기 개최지인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로 대회기와 성화 램프를 인계한 후, 김상기・김관용 공동 조직위원장의 환송사 및 압둘하킴 알시노 CISM 회장의 폐회사, 이한성 의원과 고윤환 문경시장의 기념사 등이 있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인구 8만 문경시가 우려를 확신으로 돌려놓고 세계적인 대회를 훌륭하게 치러냈다. 4만 서포터즈가 함께한 봉사대회, IT를 통한 디지털 대회, 가장 한국적인 문화대회로 세계군인체육대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비록 대회를 밝혔던 성화는 꺼지지만, 우리의 결의와 다짐은 결코 꺼지지 않는 평화의 횃불로 지켜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식후 문화행사는 ‘The One, 하나 됨’을 주제로 ‘평화의 기틀’, ‘우정의 나눔’, ‘화합의 완성’, ‘미래로 향한 달’, ‘세계수’ 5장의 주제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피날레로 육군 55사단 군악대 김재중 일병이 록 스타일로 재해석해 전 세계 군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아리랑’을 부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우리의 전통 음악‘옹헤야’ 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10일간 선수들을 지켜준 성화가 꺼지고 ‘미래로 향한 달’이 떠올랐다. 이어 경기 기간 나눈 평화와 우정이 ‘세계수'가 되고 그 열매를 가슴속에 품고 돌아가 세계 곳곳에 심어 평화와 화합이 세계에 널리 퍼지기를 기원하며 선수 관객 모두가 함께 어우러진 화합의 장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회 종합 성적은 1위 러시아(금 59, 은 43, 동 33), 2위 브라질(금 34, 은 26, 동 24), 3위 중국(금 32, 은 31, 동 35)에 이어 한국은 금메달 19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25개로 4위를 기록하였다. 역대 세계군인체육대회 참가 중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해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고 보니 군인체육대회와 나와의 인연은 조금은 특별하고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2010년에 있었던‘2015 세계군인올림픽의 성공적인 유치를 위한 시민 대토론회’에서 시민 자격으로 의견을 발표하였고, 개최지 시민으로서 작은 역할을 하기 위해 문경구곡원림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회원 일동 이름으로 세계군인체육대회에 100만 원 성금을 냈으며, 대회 시 자원봉사자로서 활동하고 폐막식 때 참가 선수 대표와 압둘하킴 알시노 CISM 회장으로부터 자원봉사자들을 대표해서 ‘감사의 꽃다발’과 대회 마스코트 인형을 선물 받았으며, 문인으로서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는 염원시와 대회개최 축시를 써서 문학으로 군인체육대회를 홍보하였기 때문이다. 축,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이만유 가슴이 뛴다 대한민국 오천 년 역사 이래 처음 열리는 세계 군인들의 큰 잔치 대한민국 한복판 서울이 아닌 인구 팔만 소도시 경북 문경에서 열리니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나 누가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나 백두대간 문경의 등뼈 정기 뻗고 생명의 젖줄 영강, 금천 푸른 물줄기 유장한 곳 자자손손 이어갈 삶의 터전 여기, 대한 삼경 문희의 땅에 피 묻은 총칼 내려놓고 우정의 깃발 높이 들고 평화의 나팔 크게 불면 우리의 소원 통일이여 찾아오리 우리 모두 꿈꾸는 세계평화 찾아오리 아! 대한민국 아! 문경이여 영원히 번영하리라 영원히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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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015 세계군인체육대회 그날을 뒤돌아보며(1)이만유/전 문경시종합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장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의 불씨는 2009년 8월 26일 15시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에서 ‘불사조 상무부대’의 문경 시대 개막을 알리는 ‘국군체육부대 이전사업 시설공사 기공식’이 있던 날 지펴졌다. 이날 기공식은 8만 문경시민의 큰 기대와 희망 속에 개최되었다. 경기도 성남시에 있던 ‘불사조 상무부대’의 문경으로의 이전 첫 삽은 당시 신현국 문경시장의 강력한 리더쉽과 출향인사, 시민들이 이룬 쾌거로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날이 있기까지 영주시, 괴산군, 진천군 등 다른 유치경쟁 시군과 경합하며 피나는 노력 끝에 맺은 결실로 2007년 4월 11일 국방부에서 국군체육부대 문경 이전 발표가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4월 13일 점촌역 광장에서 "국군체육부대 유치 시민 한마당 경축행사"를 개최하며 희망의 팡파르를 터뜨렸다. 이날 기공식에는 한승수 국무총리, 이상희 국방부 장관,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이한성 국회의원, 신현국 문경시장, 이정은 국군체육부대장, 이종상 한국토지공사 사장, 김종인 대림산업 대표를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과 문경시민 등 2,5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국군체육부대 건설은 2011년 10월까지 3,907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148만㎡ 부지에 메인스타디움, 축구장, 야구장, 실내외훈련장 등 건축물 59동에 건축면적 89천㎡로 25개 종목 70여 종의 체육시설이 건설되고 영외아파트 128세대 등이 들어서게 된다. 특히 국군체육부대가 건립되면 부대 장병과 가족 등 1,000명의 상주인구 유입과 전지 훈련단, 면회객, 각종 대회개최 등 연간 30만 명이 방문 또는 체류하게 되어 문경지역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전망했었다. 그 당시 문경시는 부대 이전으로 만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며 원대한 꿈과 의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2015년 세계군인올림픽(처음은 올림픽이라고 하였음)’을 유치한다는 것이었다. 국방부에서도 군인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이었고 이미 외교안보정책조정위원회에 2015년 군인올림픽 유치의 건을 상정해 놓고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올해 안에 군인올림픽 기구에 유치신청서를 제출하겠다는 방침이었다. 2010년 1월 15일 영강문화센터 1층 사무실에서 ‘2015 세계군인올림픽 유치 추진기획단’을 결성하고 신현국 시장을 비롯하여 2015 국군세계올림픽추진단장인 황용대 부시장을 비롯하여 김대일 부의장, 이춘대 도 체육회 이사, 김남규 2015 세계군인올림픽 유치 부단장, 양세일・김국현・신순식 2015 추진 자문위원 등과 함께 현판식을 했다. 이날 오후에는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강문화센터 대회의실에서 ‘2015 세계군인올림픽의 성공적인 유치를 위한 시민 대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인사말에서 세계군인올림픽을 유치하면 다양한 체육시설의 보강과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으로 문경은 세계적 스포츠 메카가 될 것이라며 국군체육부대 이전에 이어서 또 하나의 신화를 창조하자”고 하였다. 대토론회 주제발표는 대구경북연구원의 오창균 박사가 ‘2015 세계군인올림픽 유치의 지역적 의미’에 대해 발표하고, 황종규 동양대학교 교수의 진행으로 김남규 2015 세계군인올림픽 유치 추진부단장, 박인규 대한체육회 국제교류팀장, 신홍범 계명대학교 교수, 김대업 대영리츠 대표, 강창교 문경대학 교수가 토론에 참석했다. 주요 내용은 '2015세계군인올림픽' 유치의 배경과 목적, 올림픽 개최의 의의, 대내외 여건, 시민 의식조사 결과, 시설계획, 운영계획, 파급효과 분석 등이었으며 5명의 지정패널 외에도 토론회에 참석한 시민 중 즉석에서 제안, 건의하는 등 열띤 분위기였다. 이때 필자도 발언권을 얻어 ‘군인체육대회 개최는 문경에 실익이 있어야 한다. 8개 시군 분산 개최와 1만 5천여 명의 선수와 임원의 숙박을 대구에서 한다는 기본계획에 대해 그렇게 해서야 지역 경기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일부라도 한국과 문경의 문화를 알릴 수 있는 고택투어(산양면 현리, 녹문 등)로 전환하도록 하고 국내외 관광객 관련 관광프로그램과 전문가 양성도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대회 제 시설 등은 잘 보전 관리하여 대회 후 지속적 소득 자원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라고 대안을 제시하거나 건의하였다. 세계군인올림픽 대회는 1948년 프랑스 ‘니스’에서 세계평화 기여를 목적으로 시작하여 올림픽처럼 스포츠 전 분야에 걸쳐 4년마다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데 130여 개국 1만 5천여 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하는 올림픽 다음가는 세계적인 대회이다. 이 대회가 문경에서 개최되면 1조 7,776억 원의 경제적․사회적 부가가치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제6회 세계군인체육대회의 문경 유치 경과를 살펴보면, 2011년 3월 22일∼3월 24일 알제리의 알제에서 개최된 CISM(세계군인스포츠위원회) 이사회에서 문경 개최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결정 후, 5월 8일∼12일까지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회원국 133개국 중 83개국 23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제66회 CISM 서울총회’가 개최되었고 회기 중 5월 11일 14시 50분에 더디어 역사적인 ‘2015세계군인체육대회’개최지를 문경시로 최종 확정 발표했다. 이어서 5월 12일, 문경시가 CISM와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의 개최 협약을체결하였다.(계속) 새날이 열리고 그날이 오리/ 이만유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성공적 개최를 염원하며 - 새날이 열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 내린 한반도 생명의 등줄기 백두대간의 중심에 황장산, 주흘산, 희양산, 대야산 우뚝 솟아있다 경사스러운 소식 듣는다는 이곳 문경 산처럼 든든한 대한민국 군인체육부대 불사조 상무 보금자리 틀고 이제 2015년 10월 2일 전쟁의 아픔 가시지 않고 생채기로 남은 냉전의 산물,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남과 북이 함께 춤추며 노래하며 어울리고 세계 110여 개국, 만여 명의 군인들이 모여 세계평화와 인류에게 희망을 줄 큰 잔치 열리니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깃발 만방에 펄럭인다 태양신 삼족오 기상으로 대회 마스코트 해라온, 해라오니 평화, 우정, 화합의 전령사 되고 행복과 사랑을 전파하는 수호천사 되어 사상과 이념과 종교를 떠나 어서 오라 손짓한다 성공개최 기원하며 두손 모아 기도한다 도전과 열정이 뭉치고 스포츠를 통한 우정의 어깨동무 하면 남북이 하나 된다 동족끼리 피 흘린 아픔을 씻어낸다 통일의 그날이 온다 세계가 하나 된다 인류생존 이래 창칼로 흘린 피 씻어낸다 세계평화 그날이 온다 오대양 육대주 하나 된다 지구국(地球國) 탄생의 초석이 된다 둥둥둥 우정의 어울림, 평화의 두드림 멀리멀리 온 누리에 퍼진다 인구 팔만의 작은 도시 문경에서 새 역사가 시작된다 신화를 창조한다 기적을 이룬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대한민국 문경에서 세계 군인들의 축전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가 열리고 화합을 위한 감동의 하모니 울려 퍼지면 아! 새날이 열리고 통일이여! 그날이 오리 세계평화여! 그날이 오리 기필코 그날이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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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다문화가족 백일장- 이 땅에 작은 민들레꽃,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2014년 3월 24일 문경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 제7대 회장 취임식이 있었다. 어느 지역보다 먼저 어려운 여건에서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고 반세기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문경땅에 문학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한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신 선배 문인과 현재 활동하고 계신 선후배 문인들 앞에 부족한 사람이 중책을 맡게 되어 어깨가 무거웠었다. 그때 나름대로 깊이 생각하고 고심하여 임기 내 실현할 것들을 취임사에서 밝혔는데 요약하면 21세기는 문화예술의 시대다. 문화예술이 가진 힘은 무한하며 물질, 기술만이 자원이고 가치생산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문학을 포함한 문화예술은 무형의 자산이고 인류에게 삶의 지혜와 행복을 가져다줌은 물론이며 무한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을 통해 인간성 회복과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 구현을 위한 길잡이가 되고 즐거움과 깨우침을 주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 문경문인협회는 문인들만의 문협이 아닌 시민 가까이 다가가 함께하고 소통하여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역발전에 기여하는 문협이 되도록 하자고 호소하면서 첫 번째 역점 사업으로 추진할‘문학을 통한 문경의 명소, 명품창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향토의 역사, 문화, 전설, 설화, 민요 등 문화자산과 오미자, 사과, 도자기 등 농특산물을 주제로 한 시를 창작하여 문학의 힘으로 문경 홍보 및 명소, 명품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방자치 시대에 부응하여 문경시를 주제로 창작한 작품을 공모하는 특색 있는 문경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하겠고, 시비공원도 조성될 수 있도록 힘쓰겠으며 시낭송분과의 활성화와 문협회원이 시낭송가가 되도록 하고 가을 정기 시낭송회 시 기관장님들 외에 어린이, 학생, 다문화가정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토록 하여 시민과 함께하도록 하겠다. 또 시극의 주제와 스토리를 우리 지역의 전설, 설화를 극화하여 문경의 정체성 확립 및 문화를 창달할 수 있도록 하겠으며 ‘다문화가족 백일장’도 추진해 보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필자가 문경문인협회 회장 임기 동안 ‘문경문학’과 ‘백화문학’ 문예지 발간 등 관례적이고 통상적인 사업 외에 역점을 두고 새롭게 추진한 특별한 사업은 첫째 위에 언급한 ‘문학을 통한 문경의 명소, 명품창조 프로젝트’이고 둘째가 ‘다문화가족 백일장’이다. 이 두 사업은 지금까지도 문경문협의 중요사업으로 계속 추진하고 있다. 그럼, 오늘의 주제인 ‘다문화가족 백일장’추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당시 문경시장님에게 면담을 요청,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지원을 얻어내었고 마침내 2015년 11월 21일 ‘문경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가슴에 담긴 말을 글로 쓰세요.’라는 주제로 ‘제1회 문경시 다문화가족 백일장’을 개최하였다. 그 당시 다문화가정은 420여 세대에 자녀 수가 450여 명, 그중 학생 수가 200여 명이었다. 여기에 배우자, 부모 등 가족들을 모두 합하면 1,500여 명이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또 다문화가족과 연을 맺고 있는 친척들까지 포함한다면 1만 명이 넘고 결과적으로 이분들은 문경시 8만 시민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고 보면 다문화가족은 우리 문경시에서 아주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하는 소중한 사람들이고 필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 현재 문경시 다문화가정 : 452세대, 1,933명, 자녀수 649명 학생 수 미달로 폐교 위기에 처한 농촌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고 초 고령화된 농촌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농촌 마을에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어 생기가 넘치고 문경이 젊어지고 활력이 늘어났다. 그리고 인구 증가가 우리 시의 지상목표인데 현재 이를 충족시키는 요소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귀농 귀촌 인구의 증가와 젊은 다문화가족의 출산이므로 이 또한 이바지한 공이 크다고 하겠다. 문경문인협회가 다문화가족 백일장을 개최하는 뜻은 이분들이 환경과 풍속이 다르고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쌓인 애환을 글로 토로케 하여 응어리진 마음을 치유하게 하고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자는 데 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도 다문화가족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며 이웃임을 인식하게 하고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 지역사회발전에 함께 이바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쓰고 자기의 뜻을 정확히 표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백일장 개최는 언어가 다른 결혼이주여성들에게 한글 제대로 배우기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보겠다. 그래서 그날 백일장에 참여한 분들께 지금까지 배운 한국어 실력을 마음껏 펼치시고 뽐내보세요. 그리고 가슴에 담긴 사연을 글로 써서 막힌 것이 있으면 뚫고 쌓인 응어리가 있다면 풀어내시기를 바라며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일 시상을 위해 심사하는 동안 즐거운 한때를 보냈는데 정희열 향토 가수의 공연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바탕 어울림이 있었고 각자의 장기자랑과 애창곡을 부르며 즐거운 시간 속에 모두가 한 가족 같은 느낌으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날 백일장에서 수상한 결혼이주여성이 쓴 작품 중에는 ‘가정을 위해 일터를 향해 어두운 새벽 속으로 사라지는 남편을 바래다주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보 사랑해요.’라고 혼자 중얼거렸다는 애틋한 마음의 표현과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말도 부족하고 솜씨도 없지만, 가르치고 도와주세요. 잘할게요. 사랑해요.’하는 고민을 말하기도 했으며 ‘이 땅에 작은 민들레 홀씨로 떨어진 나는 민들레꽃, 지나는 길손들의 발길에 밟힐지라도 꽃이 되어 웃으며 더 멀리 더 높은 곳을 지향하겠다.’라는 ‘민들레의 꿈’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또 자녀들이 쓴 글에서는 "어머니는 베트남 사람, 아버지는 한국 사람, 나는 반반인 사람이에요. 하지만 저는 우리 집이 좋아요.” 했고 또 다른 학생은 "내가 싫은 것은 친구들한테 왕따 당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하루빨리 이 어린이들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들이 해소되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차별 없는 보통의 삶이 영위되길 기원했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시민들에게 드릴 말씀은 풍속도 기후도 문화도 음식도 말도 다른 문경에 보금자리를 튼 결혼이주여성과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가족을 우리와 다른 남이 아닌 똑같은 우리라고 생각하시고 그분들이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주어 함께 손잡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렇게 다문화가족 백일장을 무사히 마치고 일회성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처한 현실과 생각, 고민, 고뇌, 갈등, 꿈과 희망, 의지, 아픔, 고난의 삶, 희로애락, 살아가는 지혜,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 진실과 사랑 등을 담아낸 글들을 오랫동안 남기기 위해 문경문인협회가 발간한 백화문학 제43집에 수록하였다. 그 후 이 글의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이 일게 하였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시인이란 납으로 금을 만드는 연금술사다.’ ‘사막에서 장미를 키우는 사람이다.’‘시인은 모름지기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고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이다.’라고 했다. 우리 문경 문학인은 ‘다문화가족 백일장’을 계기로 따스한 가슴으로 이웃을 보듬으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문학인으로서 8만 시민들과 문학을 통해 소통하며 지역발전과 행복한 문경,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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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경의 추석 세시풍속이만유/문경향토사 연구사 추석에 관한 우리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문경에서는 예로부터 "먹기는 추석처럼 먹고, 입기는 설날처럼 입는다”라는 말과 "먹는 것은 추석날같이 먹고, 입는 옷은 장가갈 때처럼 입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이야 모든 것이 풍족한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먹고사는 것이 어렵고 모든 것이 부족한 시절이라 배불리 실컷 먹고 즐길 기회인 추석이 기다려졌고 일 년 내내 추석만 같기를 바라는 민초들의 소박한 소망이 담긴 말이다.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로서 가배(嘉俳), 가배일(嘉俳日), 가위, 한가위,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문헌상 추석의 유래는 중국의 ‘수서(隨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와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에 신라인들은 산신(山神)에 제사 지내기 좋아하며 팔월 보름이면 왕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을 시켜 활을 쏘게 하여 잘 쏜 자에게는 상으로 말이나 포목을 준다.”라고 했다. 우리 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추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왕이 육부(六部)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어 두 왕녀에게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추석 한 달 전부터 길쌈을 하여 팔월 보름에 성과를 따져서 지는 편은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으니 이를 가배라 한다. 이때 진 편의 여자들이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 하였는데 뒷사람들이 그 소리를 노래로 지은 것이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석이 신라 초기에 이미 자리 잡았으며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와서도 큰 명절로 여겨져 9대 속절(俗節)에 포함되었다. 고려 9대 속절은 원정(元正, 설날)·상원(上元, 정월대보름)·상사(上巳)·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중구(重九)·팔관(八關)·동지(冬至)였다. 이 명절들은 조선 시대로 이어져 추석은 설날, 한식, 단오와 더불어 4대 명절의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우리나라 세시풍속이 대다수 농경의례로서 농사라는 생업과 직결되어 있었던 만큼 근래 산업사회 이후 농촌의 인구 감소와 농업이 국가 경제에 있어 그 비중이 축소됨으로 인해 세시 명절 또한 약화하였고 추석 역시 공휴일로 지정됨으로써 차례와 성묘하는 날로 그나마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점점 전통문화는 퇴색되어 가고 있다. 그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 많지만 문경의 추석 세시풍속은 어떤 것이 있었는가? 그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추석 전에 조상 산소를 말끔히 벌초하고, 가능한 한 햇곡식과 과일로 차례에 올릴 제물을 준비한다. 명절 떡은 대다수 집에서 솔잎을 깐 시루에서 쪄낸 ‘송편’을 준비하였고 그다음으로 ‘마구설기’나 ‘기지떡’을 많이 만들어 먹었다. 기지떡은 기증떡, 증편, 기주떡, 술떡, 벙거지떡 등으로도 불린다. 쌀가루에 술(주로 막걸리)을 넣어 발효시킨 뒤에 밤, 대추, 잣, 깨, 석이버섯, 각종 꽃으로 고명을 뿌리고 쪄낸다. 기지떡은 술과 고명의 향기로 새콤달콤한 풍미가 일품이며 소화가 잘되며 빨리 쉬지 않는 특성을 가진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떡이다. 흥덕 예동에서는 추석 차례를 떡으로 지내는데 찹쌀과 팥을 섞어서 만든 ‘마구설기’라는 떡을 만들어 쟁반에 깔고 송편을 얹고 그 위에 기지떡을 놓아 조상의 수대로 올렸다고 한다. 추석날 아침에 차례를 지낸다. 차례 음식은 설날 차례 때와 비슷하지만 설날의 떡국 대신 추석에는 송편 또는 밥을 놓는다. 추석이 수확기보다 일찍 와서 햇곡식을 거두지 못하면 묵은 곡식으로 지낼 수밖에 없지만, 일부는 햇곡식이 나는 음력 9월 9일 중구절에 차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차례를 마치고 음복을 겸해 아침 식사를 한 후에는 성묘하러 간다. 포와 과일 등 간단한 음식을 가지고 산소에 가서 술 한잔을 올리고 재배로 성묘하고 묘소 앞에 둘러앉아 조상 얘기, 옛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겹게 살았던 일들을 나눈다. 추석날 읍면동에서는 이동 대항 씨름대회를 열기도 하였고 강변 모래사장에서 마을 사람끼리 혹은 이웃 동네끼리 편씨름하고 서로 친목을 도모하였다. 이 씨름놀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고 또한 도깨비하고 씨름하여 왼 다리만 번쩍 들면 이긴다는 전설이 있는 걸 보면 아주 역사가 오래된 민속놀이다. 이윽고 보름달이 떠오르면 합장하고 각자 가슴에 품고 있던 소원을 빈다. 읍면동별로 추석 세시풍속을 살펴보면 위에 기술한 문경의 추석 세시풍속과 대동소이 하나 조금 특이한 것들로 산양면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정칠월, 동동팔월”이라 하여 추석을 즐기는데 햇벼를 수확하지 못하면 덜 익은 푸른 벼를 베어 나락을 쪄서 말려 사용한다. 옛날에는 근친(覲親)이라 해서 추석 때가 좀 한가한 시기라 추석을 전후해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부모를 뵙기도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면 시집과 친정 중간 지점에 만남을 약속했다. 이것을 "반보기”라 했는데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문경읍에서는 읍사무소가 주관하여 송아지를 상품으로 걸어놓고 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규모가 꽤 커서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으로 나누어서 밤이 늦도록 경기가 벌어졌다. 마성면의 경우에는 신현 강변 모래사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는데 1주 정도 지속되기도 했다. 온갖 장사꾼과 놀음 꾼이 몰리고 야시장이 열려 큰 축제가 되었다. 그리고 산양면 반곡리에서도 마을 앞 영강 모래사장에 모여 씨름대회를 했는데 포내, 진정, 석골을 비롯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추석 오후에 모여 마을별로 겨루었다고 한다. 그 외 산북 서중리 기록에 산북면에서도 마을 대항 씨름대회가 있었다고 하였고 점촌 창동 기록에도 송아지를 상품으로 걸어놓고 마을 대항 씨름대회가 열려는데 달이 밝은 밤에도 계속 씨름했다고 한다. 호계면 가도리에서는 추석에 ‘다리밟기’를 했다고 한다. 둥근 보름달을 보며 다리를 건너면 일 년 내내 액을 물리치고 다리가 아프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문경 고요1리에서는 1970년대에 마을에서 콩쿨대회(노래자랑)가 열리기도 했다. 격세지감, 중추절 큰 명절에 지금은 문경시 관내 어디에도 추석 고유 전통행사나 씨름대회 하나 열린다는 곳이 없다. 시대는 변하고 성인도 시속(時俗)을 따르라. 했으니 아쉽지만 어쩌랴! 올해 유례없는 무더위로 고생했던 여름도 지나가고 태풍 힌남노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지만 이제 선선한 바람,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좋은 계절이다. 모두 보름달처럼 풍성한 한가위, 즐겁고 행복한 추석 명절과 연휴 보내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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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문경의 워낭소리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이만유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2009년 1월 15일 개봉되어 관객 수 292만 명이란 대기록을 세운 한국 독립영화 사상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당시 관객 동원 3만이면 대성공이라는 저예산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경이적인 것이었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경북 봉화 산골 노인 부부와 늙은 소가 한 식구처럼 살아가는 꾸밈없는 모습과 수명을 다한 소가 죽음을 맞았을 때 장사지내고 절에서 천도재를 올리는 등 이별의 슬픔을 담은 영화로 생로병사의 삶을 되돌아보고 사유하게 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워낭소리 영화가 한창 인기를 끌 무렵 필자가 자원봉사활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눈앞에서 ‘워낭소리’ 영화에서 본 그 장면이 거짓말처럼 현실로 나타났다. 워낭(말이나 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 단 방울)을 매단 소가 끄는 소달구지 위에 할머니가 타고 있고 할아버지가 앞에서 소고삐를 잡고 가는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두 분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와 사연을 듣고 중앙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경북 문경시 호계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 정우섭 할아버지와 최순희 할머니셨다. 그때 쓴 글을 회상하며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인 우리 모두의 고향인 농촌, 할아버지, 할머니, 함께 살아온 순한 눈의 소 그리고 삶과 죽음, 이별을 생각해 보며 지금도 변함없는 문경의 수려한 산천과 아름답게 살아가는 문경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더 나누어 보고자 한다. 호계 막곡에서 논밭이 있는 창리들을 가고 오자면 영강에 놓여있는 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놓은 시멘트 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그 다리 위에 노을이 물들고 영강의 맑은 물이 붉게 물드는 저녁때가 되면 댕그랑댕그랑 워낭소리가 들리고 앞에는 할아버지가 소를 끌고, 뒤에는 소달구지 위에 할머니를 태우고 들에서 돌아오는 노부부의 정겨운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할머니께서 오래전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고 게다가 퇴행성관절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잘 걷지 못하자 안타까운 마음에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나 소달구지에 할머니를 태우고 다니셨다. 소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그날 가는 길을 척척 알아서 갔다. 요즈음 모두 소에게 배합사료를 먹이로 주지만 할아버지는 힘든 농사일을 해 주고 매일 교통수단이 되어주는 친구 같고 한 식구 같은 소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매번 정성을 다해 쇠죽을 끓여 먹였다. 두 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들에 가고 올 때는 물론 농협 연쇄점에 생필품을 사러 갈 때도 소달구지를 타고 가며 이웃 동네 나들이나 점촌 오일장에 가실 때도 항시 타고 다니시니 이웃이나 지나는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가용이 좋습니다.” 하면 할아버지는 "차비도 안 주고 타네”하며 농을 하지만 함께하는 것이 행복에 겨운지 두 분은 연신 싱글벙글하신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시집와서 6남매 낳아 잘 키우고 힘든 농사일 하느라 고생고생하다가 병을 얻었으니 내가 죽을 때까지 태워 주어야지 하시면서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문경은 산천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여기 노부부처럼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산다. 중국 하남성에 선경으로 유명한 기산영수(箕山嶺水)가 있는데 옛날 요나라 시절 관직과 명예를 마다하고 수려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무위자연을 즐긴 ‘소부’와 ‘허유’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 두 은사(隱士)는 학식과 덕망이 높아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아 제왕이 되고도 남는 인물이었는데 하루는 요임금이 허유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하자 귀가 더러워졌다고 영수로 달려가 귀를 씻었는데 마침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나오든 소부는 그 소리를 듣고 그런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가 없다고 강 상류로 몰고 가 물을 먹였다는 고사가 있다. 그런데 이병연이 지은 조선환여승람에 문경이 바로 조선의 기산영수(箕山潁水)의 고장이라고 하며 기산은 조령산 아래 작은 산이며 영수는 영강으로 이어지는 조령천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학자인 태촌(泰村) 고상안(高商顔) 선생의 태촌문집(泰村文集) 남석정기(南石亭記)에 돈달산(遯達山)과 영강(潁江)을 기산영수라 하였으니 중국의 기산영수 못지않게 문경의 산천이 아름답고 현자가 은거할 만한 곳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 문경이다. 후속 이야기로 당시 ‘문경의 워낭소리’라는 필자의 글을 인터넷에서 본 ‘KBS 6시 내고향’ 팀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문경에 와서 이 내용을 현지 취재하고 방송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되겠는가를 묻길래 문경 사람들의 정겹고 아름다운 삶과 수려한 자연을 보여 줄 수 있으며, 관광도시를 지향하는 문경시를 전국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두말없이 좋다고 하여 그해 4월 2일 호계면 막곡리와 흥덕시장 일원에서 촬영하여 4월 6일 오후 6시에 KBS 1TV ‘6시 내고향’에 방영되었다. 이렇듯 문경은 산천도 사람도 아름답고 그 안에서 오순도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우연히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을 보고 글을 써 기고하고 그로 인해 전 국민이 보는 공영방송인 KBS에서 방송된 ‘문경의 워낭소리’‘소달구지에 할머니 태운 할아버지의 순애보’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래도록 남기고 싶다. 워낭소리/ 이만유 서산 노을 비춰 강물 붉게 물들면 영강 새마을 다리 위에 댕그랑댕그랑 워낭소리 들린다. 할부지가 끄는 소달구지 위에 앉은 할머니 긴 세월 짐 지고 온 할부지 등을 잔잔한 미소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어둠이 내린 강변 하나둘 별이 뜨는 저녁 귀갓길에 댕그랑댕그랑 워낭소리 들린다. 할부지 궁금한 듯 뒤돌아본 소달구지 위에는 60년 전에 보았던 예쁜 새색시가 수줍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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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컬처텔러의 눈으로 본 '컬처텔러'컬처텔러를 아십니까? 컬처텔러를 아십니까?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러는 많이 들었고 익히 잘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컬처텔러는 생소한 용어이다. 경북 문경은 하늘재, 문경새재, 토끼비리 등 옛길이 많이 있다. 그래서 통상적인 내용보다는 옛길에 대해 특화된 해설이 필요하여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옛길 컬처텔러는 스토리텔러이지만 범위를 옛길로 한정해 전문화한 관광 분야 전문인력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10여 년 전 정부에서 지역인재 육성을 위해 추진한 "영남 옛길 컬처텔러 양성 교육”을 문경문화원과 옛길박물관이 주관하여 추진할 때 수강생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교육 대상은 경북 북부지역 5개 시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20명을 선발했기 때문에 나름 기본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라 교육 효과는 배가 될 수 있었다. 필자는 교육 전후로 해서 10여 년간 문화관광해설사란 이름으로 스토리텔러, 컬처텔러로 활동하였다. 컬처텔러는 해설사(이야기꾼)로서의 기량을 갖추고 활동해야 하므로 지역의 문화 역사 등에 대한 소양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고 찾아온 관광객에게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달하는가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자면 동일한 소재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다르고 독특하게 전개하는 등 고도의 테크닉으로 오감을 작동할 수 있는 재미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해설이 될 수 있도록 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럼 옛길 컬처텔러가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활동해야 할까? 교육 당시 수강생으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아 수료식 전 "컬처텔러의 눈으로 본 컬처텔러”라는 주제로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해서 스토리텔러를 꿈꾸는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의미로 단편적이고 체계적으로 작성하지 못한 것이지만 기술해 보고자 한다. 길은 주인이 없다. 걷는 이가 주인이다. 산천(계곡, 폭포, 단풍 등)의 아름다움은 거기 있다. 그러나 거기를 찾는 사람만이 그 아름다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우리 컬처텔러는 많은 사람이 길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역량을 발휘하여야 하겠다. 옛길 컬처텔러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어렵다. 그러나 필자는 컬처텔러란? 우리말로 "이야기꾼”, 라틴어로 "호모나랜스(Homo narrans)”, 영어로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다.라고 했다. 특히 컬처텔러는 옛길과 관련된 모든 옛길문화를 총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입담이 좋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이야기 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한다.”라는 이론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정보에 대한 사실적 전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감동적인 스토리를 입히는 사람을 말한다. 이화경 작가가 쓴 장편 역사소설 "꾼”은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 김흑의 이야기이며 별별 인생을 살다 간 이야기꾼들의 삶을 그렸다. 고갯길이나 주막의 봉놋방,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극적인 순간에 멈추고 짐짓 이야기를 다른 것으로 돌리면 모인 사람들이 안달하며 엽전을 던져 준다, 그러면 하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나 현실감 있고 극적으로 이야기했는지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흥분한 청중이 이야기꾼을 나쁜 사람으로 오인하고 낫으로 죽이려는 일까지 발생하였다고 한다. 우리 컬처털러는 김흑처럼은 할 수 없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능력을 갖춰야 한다. 작가는 "삶 밖의 삶, 현실 바깥의 세계, 사랑 넘어 사랑, 죽음 이후의 죽음, 꿈 너머 꿈 등 인생살이 울고 웃는 이야기들을 드라마틱하게 들려주어 고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희망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이야기꾼이다.”라고 하였다. 가장 이상적인 컬처텔러는 이런 이야기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감염력이 강하고 인간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유능한 컬처텔러는 길 위의 문화, 역사, 전설, 설화, 민요, 자연물 등기존에 존재했던 사실들을 획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계층의 수준에 맞게 재가공한 후 재미있고 설득력 있고 감성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므로 이런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필자는 누군가 내게 문화관광해설사나 컬처텔러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받거나 강의할 때 해설사나 텔러는 학식이 높은 대학교수에서부터 우리 생활 속에 재미와 활력을 주는 거리에서 각설이타령 하는 엿장수, 광대까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컬처텔러는 다기능 다능력을 가진 만능 탤런트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옛길 컬처텔러인가? 하는 물음을 나에게는 물론 동료 수강생에게 던졌다. 기껏 3개월 과정으로 유명한 길 몇 군데 걸어본 것, 유명 강사에게 몇 강의 들은 것, 옛길 관련 과제 2개 쓴 것이 전부인데 교육 이전과 이후의 변화는 있었나? 있었다면 무엇인가? 문화관광해설사 활동 연장선상에서 지식습득, 현장 체험 수준으로 끝난 것은 아닌가? 사실 필자가 이런 질문을 한 진의는 교육 수료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컬처텔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없다. 아직은 나도 여러분도 전문 컬처텔러가 아니다. 수료하는 오늘이 다시 출발하는 날, 다시 시작하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진정한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자면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땅과 길을 이해하고 이야기꾼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자. 그러자면 1달에 2번 이상 새로운 길을 걷고, 하룻길에 최소한 열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숨은 이야기 3가지를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최소한 3년의 수련 기간을 가진 이후에 컬처텔러라고 말하자. 니체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는 직선으로 빠름을 추구하는 시대이지만, 곡선의 느림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게 할 것이다. 이러함으로 우리 옛길 컬처텔러의 역할과 존재가치는 실로 막중하고 크다. 컬처텔러 눈으로 본 컬처텔러는 열정적이고 순수하고 멋지고 아름다웠다. * 필자는 본 교육 시 수강생 대표와 수료 후 지속적 관계를 위한 옛길컬처텔러회를 조직 운영 시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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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풍요금천 행복산양(豊饒錦川 幸福山陽)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이만유 연두색 신록이 아름다운 2013년 5월 어느 날, 필자가 사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 거리에 현수막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산양면사무소에서 "산양면 슬로건”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문경시의 브랜드 슬로건이 "긍정의 힘! Yes 문경”이지만 당시는 "새로운 도약, 일등 문경”이었다. 문경의 특성과 비전을 담은 역동적 이미지의 브랜드를 통한 지역의 정체성 확립과 마케팅 그리고 시민화합을 도모하여 미래지향적인 도시 이미지를 구현한다는 의미인데 모두 잘 만들어진 구호였다. 최일선 행정조직인 면(面)이 독립성을 가진 지방자치단체는 아니더라도 면민들을 하나로 결집하고 애향심을 가지게 하며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 지역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슬로건을 제정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현수막이 걸린 며칠 뒤 채호식 산양면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면민들로부터 접수된 산양면 슬로건에 대한 수상작 선정심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지역 인사 및 단체장 등으로 구성된 협의체의 일원으로서 심사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청된 작품들이 다 애정이 담긴 좋은 작품이었지만, 산양면의 정체성과 미래 비전을 잘 표현한 적합한 작품으로는 조금 미흡하다는 의견이 다수여서 그중 세 개의 작품을 뽑고 그 세 작품의 좋은 뜻과 문구를 발췌하여 새로운 조합으로 슬로건을 정하자는 의견을 내고 합의했다. 이날 필자는 심사에 임하면서 슬로건은 어떤 단체의 주의, 주장, 지역의 특성 따위를 간결하게 나타내는 짧은 어구이면서 대중의 행동을 변화하고 유도하는 선전에 쓰이는 짧은 문구다. 그리고 슬로건은 이해하기 쉽고 표현이 단순해야 하며 감성을 담아야 하며 지역발전 방향과 비전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또한 산양면의 이미지를 명확히 하고 역사, 문화, 전통 등의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읽는 순간 나타내자고 하는 바가 각인돼야 한다. 암호 같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배제하고 설명과 해설이 필요 없는 문구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글자 수는 16자 이내로 하고 기 다른 지자체에서 사용하는 것이나 유사한 것은 배제하여야 한다는 요지의 내용을 피력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풍요금천 행복산양(豊饒錦川 幸福山陽)”이다. 산양면은 월방산, 금품산, 왕의산 정기가 어리고 대미산 황장산에서 발원한 아름다운 금천(錦川)이 흐르는 곳, 선사시대인 신석기시대의 유물 돌화살촉과 청동기시대 지석묘가 반곡리에서 발견되었고 금천변에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성혈(性穴, cup-mark)이 집단으로 발견되는 등의 근거에 의해 문경 땅에서 가장 오래전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삼한시대 때는 진한계 근기국(勤耆國), 삼국시대(신라)에는 근품현(近品縣), 통일신라시대에는 가유현(嘉猷縣)이었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산양현(山陽縣)이 되었다가 지금까지 그대로 산양면(山陽面)으로 불리어 왔다. 이곳에는 만고 충신 "충의공 엄흥도”의 충의 정신이 깃들어 있고 조선시대 수계소를 두고 인륜을 지킨 곳, 봉정과 반곡리의 불교 유적과 후삼국 때에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왕 견훤의 전투가 있었던 "근품산성”과 근대문화유산인 "구 문경금융조합 사택” 등이남아있으며 제3공화국 시절 1개 면에서 국회의원 2명이 동시에 배출되었고 국회의장(채문식)이 난 곳이다. 산양면 소재지인 불암리는 시가지(巿街地)가 대한민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십자형 바둑판같이 잘 정리된 도시형 거리로 형성되어 있고, 1940년대 양방 의원(후생의원) 개설되어 현대적 의료혜택을 먼저 본 곳, 농협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금융조합이 점촌보다 먼저 설립된 곳이다. 1940년대 초반부터 영월화력발전소 고압전기를 받아 점촌 등으로 분배하는 변전소가 있었고 일반가정에 전기가 문경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곳, 조선시대 후기부터 성했던 산양 2일 7일 오일장은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크게 열렸다. 그리고 산양장터는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척사운동 만인소의 도회소가 있었고, 1919년 4월 문경 지역에서 처음으로 3․1 만세운동을 기도하였던 곳이며 광복 이후 지금의 전국장사씨름대회와 같은 수준의 장사씨름대회가 열리는 등 근대화가 가장 먼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산물의 집산 및 물류가 풍부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교통이 발달하는 등의 이유로 상권이 점촌으로 집중되고 평야지 특성상 고소득 작물이나 특산물이 없는 벼농사 위주의 지대가 되다 보니 외부 유동 인구의 유입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기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비문화와 고가(古家), 산성, 불교유적지 등 문화관광 자원이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읍면동 간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정책의 부재와 앞을 내다보는 열정적인 지역 리더의 부재 등으로 지역발전과 경제 활성화를 기할 수 있는 문화 관광지로 부상될 기회를 상실하여 문경시 14개 읍면동 중에서 제일 변화와 발전이 없는 경제적 오지가 되어버렸다. 10여 년 전 문경시에서 권역별 균형발전을 통하여 다 함께 잘사는 문경을 만들겠다며 금천 주변 종합개발계획을 통하여 산양 지역을 5개 지구로 나누어 개발하고 산양면 소재지 정비사업, 문경한우 테마 광장 건립과 먹거리 조성을 추진하며, 한옥 숙박촌과 구곡역사관 건립 및 근품산성 정비 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일부만 이루어지고 경제적 효과를 낼 수 있는 큰 사업들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렇다고 좌절할 수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도 없는 일, 심기일전하여 산양의 옛 영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인구 감소로 인한 지방소멸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문경시도 예외가 아니며 특히 산양면은 더욱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데, 마침 문경시가 경북에서 유일하게 행정안전부에서 실시한 "인구감소지역의 주민참여형 소생활권 활성화 프로젝트” 공모사업에 선정되었고 그 사업추진 대상지가 산양, 호계로 되어 있다고 하니 이 기회를 활용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할 것이다. 때맞춰 얼마 전 김학련 면장이 재임 시 산양면 슬로건 전광판을 면 소재지 불암리 입구에 설치하였다. 올해 7월 1일 민선 제9대 신현국 문경시장이 취임, 새 시대 제2의 문경 도약을 이루고자 하는 때에 문경시 행정당국과 문경시의회, 산양면민 모두가 힘을 합쳐 "풍요금천 행복산양(豊饒錦川 幸福山陽)”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시 산양면의 새역사를 쓰고 금천의 기적을 이뤄내길 기대해 본다. 산양 찬가 /이만유 근품산 우뚝 솟고 비단내(錦川) 흐르는 정겹고 아름다운 메빛고을(山陽) 삼한시대 진한계 근기국(勤耆國)으로 삼국시대 근품현(近品縣)으로 통일신라시대 가유현(嘉猷縣)으로 고려, 조선시대 산양현(山陽縣)으로 불리며 긴긴 세월 살아온 삶의 터전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방어하고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활용한 근품산성 후삼국 영웅, 견훤과 왕건이 자웅을 겨루던 곳 고려 공민왕이 몽진 길에 용포를 걸어두었던 왕의산(王衣山) 긴긴 세월 지켜온 역사의 현장이다 삼천년 전 청동기인들의 삶의 흔적 성혈(性穴)이 남아있고 조선의 선비들이 꿈꾼 이상향 구곡원림이 경영된 금천유역(錦川流域) 근품산 월방산 왕의산 정기 받아 걸출 인물 배출하여 문화의 꽃 활짝 피고 산물이 풍성한 곳 긴긴 세월 이어온 풍요의 곳간이다 보라! 저기 저 붉은 아침 태양을 그리고 저 찬란한 빛이 비치는 여기 이 땅을 위대한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 자자손손 이어 살아갈 후손들의 꿈이 꿈틀대는 곳 우리 모두 두 손 모아 합장하면 뜨거움이 울컥 용솟음치는 심장의 고동 소리 들리고 가슴엔 잔잔한 감동이 흐르지 않는가 시대마다 명암이 점철하지만 구름 걷힌 새날이 아름다운데 누가 어제와 오늘의 아픔을 말하랴 모두 굳건한 의지로 청정한 마음으로 서로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자 다 함께 한 마음으로 힘차게 나아가자 우리 모두 손잡고 꿈을 이루자 풍요 금천(錦川) 행복 산양(山陽) 산양이여! 찬란한 빛으로 영원하리라 연년세세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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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아리랑 도시 문경”에 뿌리 내린 아도위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아도위) 위원장 문경시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아리랑 도시”를 선포한 지방자치단체다.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로서 우리 민초들이 희로애락을 느낄 때 부르는 노래이며 제2의 국가(國歌)와도 같은 민족의 노래이다. 우리 문경에도 오랜 세월 동안 불리어 왔던 "문경새재아리랑”이 있다. 이 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며 실제적 아리랑고개가 "문경새재라”라고 하면 무슨 소리를 하나? 의아스럽게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이 주장에 대해 근래 학계나 민요학계에서 점차 인정하는 추세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길 위의 노래, 고개의 소리로서 백두대간을 따라 출현한 메나리토리 ‘아라리’로부터 시작되었고 토속민요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변환되는 변곡점에 있었으며 아리랑이 조선 팔도로 널리 확산하게 된 그 뿌리를 찾아가면 근대 아리랑의 종주격인 문경새재아리랑이 있다. 아리랑과 불가분의 관계인 1865년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와 문경새재와 물박달나무와 문경새재소리가 얽힌 역사, 그리고 1912년 문경지방 초등학교 교사에 의해 총독부에 보고 기록된 "문경풍년아리랑”은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바뀐 최초의 기록이다. 이런 흐름에 영향받아 1896년 역사 이래 최초로 아리랑 악보로 쓰이고 해외에 알려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들어 있는 헐버트 아리랑의 발표와 1926년 큰 인기를 끈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 기폭제가 되었고 1930년 영남의 30개 시군을 대상으로 조사, 정리한 대구 출신 국학자 이재욱이 쓴 ‘영남전래민요집’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후 문경새재아리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통과 역사성 위에 송옥자 회장이 2001년부터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을 창립하여 지금까지 전승 및 보급활동을 하고 있고, 1980년에 설립한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과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의 ‘문경새재아리랑의 역사적, 민요사적 연구’를 거듭한 연구 성과에 의해 그 사실들과 중요성이 점차 입증되어 가고 있다. 아리랑이 2012년 12월 5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4년 11월 27일 북한도 "아리랑 민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고 이어서 2015년 9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하였다. 이에 부응한 문경시는 위와 같은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2015년 12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였다. 이에 발맞춰 "아리랑도시 문경”에 걸맞은 시민 활동이 필요하다는 뜻을 가진 소수 시민이 발의한 후, 다수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어 아리랑의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 교육, 공연, 홍보를 통해 아리랑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2017년 6월 21일 발기인회, 2017년 6월 29일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창립총회 및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아울러 우리 지역 아리랑만이 최고이며 중요하다는 편협된 사고에서 벗어나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면서 세계의 것’이라는 아리랑 속성을 일반화하기 위해 모든 아리랑을 인정, 존중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그때 발표한 선언문은 아래와 같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선언문 아리랑은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한민족공동체 문화의 정수임을 다시 한번 더 자각한다./ 이와 같은 아리랑이 우리나라 지역마다 전승되어 왔고,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음을 확인한다. 문경시에는 아리랑고개인 문경새재가 실존하고,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여러 지역 아리랑에서 불리는 등 근대 아리랑의 생성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던 문경새재아리랑이 있어 아리랑 도시로서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바탕 위에 2015년 12월 13일 문경시가 ‘아리랑 도시’를 선포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며, 이를 높이 평가한다. 이와 같은 사실과 문경시의 "아리랑 도시” 연장선상에서 문경시민들의 자발적 아리랑 모임인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해 9인이 발기인회를 결성하고 추진한 결과 오늘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 우리나라 모든 아리랑을 존중한다. -. 우리나라 모든 아리랑이 문경에서 역량을 펼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아리랑 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야 한다. -. 아리랑 관련 사업에 문경시민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를 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한다. -. 문경새재아리랑 전승, 공연, 교육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 아리랑 관련 콘텐츠를 꾸준히 개발하여야 한다. 2017년 6월 29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 일동 아도위는 창립 이후 창의적이고 시대에 부합하고 현실적인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서 추진하였다. 첫번째 사업으로 "아리랑은 문경시민의 기본 교양과목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 되려면 8만 시민이 우리 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불러야 한다. 문경시민들이 아리랑을 잘 부르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리랑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그 대상을 영향력이 큰 기관단체인 문경시, 문경시의회, 문경교육청, 문경문화원, 문경예총, 각 축제추진위원장, 읍면동장, 각급학교장, 각 사회・문화・예술 단체장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각종 축제, 행사, 교육, 회의 때에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학교에서는 특활 계획 시 아리랑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필수적으로 편성 시행해 줄 것을 당부, 호소하는 협조 공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아도위의 주요 활동 상황은 아래와 같다. - 2017년 11월 6일 문경새재아리랑제 workshop 진행 * 주제 : 아리랑, 문경에 다 모이다 (위원장: 좌장) - 2017년 2018년 문경문화원 주관 "아리랑학교” 운영 력-아리랑답사 주관 - 2018년 7월 30일 "제1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학술토론회”개최 * 주제 :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 - 2017년 9월∼2018년 3월 문경새재아리랑 "기준 악보” 제정에 자문단으로 참여 - 2018년 12월 10일∼11일 "디아스포라 아리랑제” 참여 * 고유제(최초), 가사 짓기 대회(부활), 평가보고회(최초) 주관 - 2018년 아리랑답사 및 교류-정선, 진도, 밀양 - 2019년 전국 최초로 시행한"찾아가는 아리랑학교” 주관/ 14회 402명 - 2019년 유명 관광지 "찾아가는 공연” 주관 - 2019년 위원 자질 함양을 위한 자체 "아리랑 경창대회” 개최 -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참여(36명)/ 문경새재아리랑 홍보 - 2019년 "의병의 혼불, 아리랑” 제12회 문경새재아리랑제 참여 * 고유제, 가사 짓기 대회, 평가보고회 주관 - 2020년 7월 14일 "코로나아리랑” 발표회/ (장소:중앙공원 야외공연장) - 2020년 11월 5일 코로나아리랑,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봉인 (문경새재아리랑 악보집, 아리랑영상물, 아도위 활동사진) - 2020년 11월 7일 ‘코로나아리랑’ 공연/ 에코랄라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 2021년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 5회, (참가자 총 560명) - 기타 : 관내 외 아리랑 전승, 보급, 행사 참여 및 지원, 후원 - 수상 : 2019년 10월 2일 문경시장상, 2019년 11월 18일 경북도지사상 문경새재아리랑은 어느 특정인이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문경의 정체성을 지닌 문화이며 역사다. 올해가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아도위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며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아리랑 도시 문경시민으로서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자긍심을 가지고 활동할 것이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기본적이고 정례적인 사업들은 내실과 변화를 추구하면서 새롭고 획기적인 사업도 기획 추진하고자 한다. 근래 본 단체는 국악인과 지역 가수들이 다수 합류하여 가단(歌壇)을 형성할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에 우리 45명 아도위 위원들은 아리랑 도시 문경에서 ‘아리랑꽃’이 활짝 피어나는 그날까지 매진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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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조선시대 풍속화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문경은 "길의 고장”이다. 문경의 정체성을 한 말로 표현한다면 필자는 "길의 고장”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문경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길을 테마로 한 "옛길박물관”이 있다. 그 안에는 길과 관련된 유무형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풍속화 여행을 떠나 보고자 한다. 위의 그림은 조선 후기 풍속화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1758년, 영조 34∼?)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특히 깊은 밤 이슥한 고샅길을 정감있게 표현한 것으로 시대를 초월 많은 사람에게 재미와 웃음을 주는 작품이다. 풍속화란? 인간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으로 그 시대 사회상과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역사, 문화, 철학과 해학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3대 풍속 화가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으로 주로 민중들의 삶을 그렸고 서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부터 이미 벽화를 통해 풍속화를 그렸으며 삼국시대 무용총 등 여러 고분 벽화가 그것이다. 조선 시대의 풍속화는 속화(俗畵)라고도 불렸다. 조선 전기, 중기에 사대부의 생활상인 수렵도, 계회도(契會圖), 시회도(詩會圖), 평생도 등을 그린 사인풍속도(士人風俗圖)가 있었지만, 서민의 생업, 놀이, 휴식 등 다양한 일상생활을 그린 서민풍속도(庶民風俗圖)는 실학 등 시대 변화에 따라 조선 후기에 성했다. 특히 정조(正祖) 때 화원들에 의한 풍속화 제작이 활발했고 풍속화의 꽃을 피운 김홍도, 신윤복 등이 활약했다. 그럼 신윤복은 어떤 인물인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도화서(圖畵署) 화원이었는지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종3품의 첨절제사(지방 군직)를 지냈다고도 하고, 김홍도와는 사제관계 여부도 (13살 차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모른다. 그는 미스터리,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오죽하면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에서는 여자로 묘사되기까지 하겠는가? 신윤복의 작품은 주로 한량과 기녀, 남녀 간 낭만이나 애정을 주로 그렸다. 지금 우리로서는 다행하게도? 신윤복이 화원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제도권 밖에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금기를 넘어 자유롭게 파격적이고 에로틱한 풍속화를 많이 그렸고 그걸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복잡한 현대 생활 속에서 풍자, 해학이 있는 풍속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은근한 미소를 짓게 되고 카타르시스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를 감상해 볼까요. 초승달인지 요상한 반달이 떠 있고 밤은 깊었는데 젊은 남녀가 은밀히 만나 뭔가를 다정히 속삭이고 있다. 어떤 분은 이 그림을 보고 그림 속 사내는 지금 속된 말로 작업 중에 있다. 경상도 남자라면 "됐나?” "내 얼라를 나 도” 했을 것이다. 그러자 여자는 속으로 "야호!”하며 쾌재를 부를 심정이지만 바로 얼씨구나 좋다고 하긴 여자로서 좀 그렇고 해서 쪼금 빼면서 콧소리로 "어데예” "언제예”하는 듯한 분위기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그림을 보는 이의 상상이고 이 여인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는 신윤복이 이미 그림에 답을 남겼다. 그림 속 신발이다. 자세히 보면 얼굴과 몸은 다소곳이 반대쪽으로 틀었으나 신발의 코가 이미 남자를 따라가고 있다. 이 둘은 남녀상열지사를 위해 아늑한 자리가 필요할 텐데 왜 물레방앗간이나 으슥한 곳을 찾지 않고 야밤중이라 하나 남의 눈에 띌 수도 있는 곳인 마을 안 담벼락 옆으로 왔을까.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쓰개치마 속 여인의 얼굴이 볼그스름히 홍조를 띠었고 입술이 봉선화처럼 붉은 걸 보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작가 신윤복이 지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 두근두근 뛰며 설레어 있다는 것과 입술을 붉게 칠한 것은 방금 입맞춤, 설왕설래(舌往舌來)가 있었다는 증표를 남긴 것이다. * 舌往舌來 : "입맞춤(키스)하다”를 직접 표현하지 못한 은어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용어 다시, 그림 속 담벼락을 보면 "月沈沈 夜三更(월침침 야삼경)-달빛 가뭇가뭇 어두운 삼경, 兩人心事 兩人知(양인심사 양인지)-두 사람의 마음은 그들 두 사람만 알리라.”라고 쓰여있다. 조선 시대에는 인정과 파루라는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고 보통 인정은 초경 3점(밤 10시경)에 종을 28번을 치고, 파루는 5경 3점(새벽 4시경)에 북을 33번 쳤다. 그렇다면 이 두 연인은 야삼경(밤 12시경)에 만났으니 당연히 통금 위반한 것이다. 그때 통행금지 위반자는 경수소(警守所)에 구금하고 위반한 시간에 따라 곤장형(棍杖刑)을 집행하였는데, 시간별로 차이가 있어, 초경 위반자 곤장 10도, 2경 위반자 20도, 3경 위반자 30도, 4경 위반자 20도, 5경 위반자는 10도를 부과하였다. 사랑에는 통금도 국경도 없다. 우리가 그림을 감상할 때는 그림 속의 주인공과 대화하고 내가 그 그림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해야 제대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는 환경과 분위기도 중요하다. 문경에는 풍속화를 볼 수 있는 옛길박물관도 있고 풍경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전설, 설화, 민요, 문화와 역사 등 숱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오래된 옛길, 토끼비리 등이 3곳이나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경으로 오셔서 풍속화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시기를 바란다. 월하정인(月下情人)/ 이만유 어두운 밤 눈썹달 아래 두 남녀 은밀히 만나 소곤소곤 방금 설왕설래(舌往舌來)라도 한 듯 홍조 띤 얼굴 분홍빛 입술이 뜨겁다 이 밤 두 마음 하나 된 발그레한 설렘을 어찌 차마 잊으리 그믐달 쪽배로 보낸 그대 보름달 환한 웃음으로 다시 오기 기다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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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박정희 대통령과 청운각(靑雲閣)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청운각은 경북 문경시에 있는 고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의 교사 시절 하숙집이다. 대한민국 5∼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대통령이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37.4∼1940.3월까지 3년간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訓導-일제 강점기 초등학교의 교원)로 초임 재직할 때, 인정 많고 남자 못지않은 호탕한 성격을 가진 김순아(金順牙) 아주머니 하숙집으로 1940. 4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기거하셨다. 이 하숙집 건물은 1928년(소화 3년)에 건축되었으며 1978. 10월 경상북도 보존 초가옥 제1호로 지정한 25평 규모의 초가집이다. 청년 박정희 훈도는 매일 새벽 6시가 되면 하숙집에서 가까운 문경읍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잣밭산에 올라 기상나팔처럼 트럼펫을 불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일찍 일어나 공부하고 주민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청운을 품고 있었다. 오늘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새마을운동”이란 위대한 꿈이 이미 젊은 박정희 가슴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청운각 외벽 담장 사이에 살구나무 고사목 둥치 하나가 투명 상자 안에 보존 전시되어 있다. 이 살구나무는 박정희 훈도가 하숙할 당시 탐스러운 살구가 주렁주렁 열렸고 이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던 반려목(伴侶木)같이 애정을 가진 나무였는데, 1979년 10월 26일 서거한 이틀 뒤 낙엽이 다진 늦가을 나목에서 때 아닌 두 송이 살구꽃을 피우고 난 뒤 대통령을 따라 생을 마감하고 고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나무를 "충절의 나무”라고 불렀다. 청운각에는 대문채 옆에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1978년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훈도 시절의 추억에 잠겨 이곳 저것을 둘러보시다가 디딜방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반가운 표정으로 "옛날 것하고 똑같구먼!” 하고는 한참 상념에 잠겼을 때 언뜻 눈시울을 붉혔다고 하는데, 이는 어릴 적 구미시 상모동 생가에도 디딜방아가 있었고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컥하는 감정이 벅차 올랐기 때문이었다. 디딜방아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박정희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님이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연세가 45세였다. 늦은 나이에 남세스럽기도 하고, 원치 않은 임신에다가 가난한 살림에 6남매를 두고 있는 처지에서 또 아이를 갖는 것이 부담되었다. 더구나 같은 시기에 시집간 딸도 임신했다. 옛말에 한 대들보 밑에 두 생명이 태어나면 둘 중 어느 한쪽 아이가 잘못된다고 하는 속설이 있기도 해서 딸을 위해 유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를 지우려고 남몰래 진한 간장을 한 사발을 마시기도, 섬돌과 언덕에서 굴러떨어지기, 밀기울 끓여 먹기, 버들강아지 뿌리를 달여 먹고 기절하기도 하고, 썩은 초가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빛깔의 빗물인 지랑물을 마시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낙태가 되지 않아 최후의 방법으로 디딜방아 공이에 배를 대고 충격을 주었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하였지만 끝내 아이를 지울 수가 없었다. 대통령이 디딜방아 앞에서 숙연해지고 눈물을 보인 것이 그런 고난의 시절을 보낸 어머니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점지해 준 생명을 인간이 어찌하겠는가? 그것도 유명한 지관(地官)들은 물론이고 조선 왕업을 도운 무학대사가 대통령 생가가 있는 금오산(金烏山)을 보고 두 왕이 태어날 명당이라는 뜻의 "금오산 이왕설(二王說)”을 남겼는데 그 주인공으로 태어날 왕의 기운을 사람이 지울 수가 없었다. 천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917년 같은 해 7일여 차로 어머니는 박정희를 출산하고 누나 역시 아이를 출산하였다. 박정희 출생 시 아이의 몸이 다른 아이에 비해 까맣고 눈만 반짝거렸다는데 사람들은 어머니께서 임신 때 낙태하려고 검은색 간장과 지랑물을 먹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조부의 묘터가 하늘이 정해준 제왕지지(帝王之地) 명당으로 금오탁시(金烏啄屍) 발복(發福), 즉 금오(金烏)는 금까마귀로 금오산(金烏山) 정기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태양의 신 삼족오(三足烏)를 닮아 까맣다고 하였다. 박정희 훈도가 하숙집에서 즐겨 드신 음식은 칼국수, 수제비, 비름나물이고 술은 막걸리를 좋아했다. 특히 비름나물 무침을 좋아해 하숙집 여주인이 수시로 밥상에 올렸다고 한다. 어린시절 학교까지 20여 리 시골 산길을 걸어 다녔는데 하루는 몹시 배가 고파 집에 당도하니, 어머니께서 바가지에 비름나물을 비벼서 막 드시려다가 아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는데 보리쌀이 대부분이고 조금의 쌀이 섞인 밥에 비름나물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비빔밥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별미였다. 이후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는 비름나물을 구해 비빔밥을 해드렸다. 그러나 서울 시장에서는 비름나물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자 씨앗을 구해 작은 밭을 일구고 재배를 했다. 박대통령은 보리와 쌀 반반인 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비름나물 비빔밥을 그 어떤 진수성찬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맛있게 드셨다고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회생활 첫발을 디딘 문경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교사 생활을 끝내고 문경을 떠난 이후 서거할 때까지 9회 정도 문경을 방문하셨다고 하며(청운각 관리소장 진술) 문경에 오실 때마다 늘 청운각을 들리셨다고 한다. 서거하기 전 1978년이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박남우 청운회 회장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수학 경북지사가 조심스럽게 문경새재 올라가는 도로 포장을 건의하였다. 전국토의 산업화를 서두르는 대통령께서 예외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스며있는 옛길 문경새재 도로를 포장하지 말고 흙길 그대로 잘 보존하라 당부하였다. 1976년 국무회의에서도 문경새재의 옛 정취가 사라져서는 안된다며 도로포장 금지를 엄하게 지시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훈도 시절 제자들과 소풍을 오고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본 문경새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추억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래서 문경새재는 지금까지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전국에서 연간 수백만 명이 찾아와서 온 가족과 벗들이 맨발로 걷는 명소, 문경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사람이 생을 영위하면서 10년 앞을 예견할 수 있다면 다 부자 되고 성공할 것인데 대다수 1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달랐다. 선견지명으로 50년, 100년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판단에 의해 지금 우리 문경인들은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우 김지미는 백 년에 한 번 나는 미인이고, 박정희는 천 년에 한 번 나는 위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문경에는 박정희 훈도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제자들과 진남교로 소풍 갔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익사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한 일과 하숙집으로 찾아 오거나 학교에서 일본인 교장이나 훈도가 없는 수업 시간 중간 중간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자주 하였다고 제자들은 생생하게 전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흔적으로는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라는 휘호 표시석이 있고 1978년 청운각에 와서 기념 식수한 전나무가 당당하게 서 있다. 청운각 공원 중앙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북과 장구 형상의 "고부이가(鼓缶而歌)”라는 조형물이 있다. 鼓缶而歌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대동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에서는 고난과 역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혁신의 의미가 담겨있다. "하면 된다.”라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박대통령의 업적을 가슴에 얹어본다. 세계인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다.” 라며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계 정상의 석학이나 정치가들의 말을 반추해 본다. 우리는 5천 년 가난을 물리치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과 유훈을 이어받아 문화강대국으로써 우뚝 섰다.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세세년년 발전과 번영을 위해 정진해야 한다. 청운각은 잠시 머물다 간 하숙집이 아니다. 청운(靑雲), 푸른 꿈과 드높은 이상(理想)이 시작된 공간이며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산 교육장이다. 청운각에는 해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과 11월 14일 탄생일에는 제자들의 모임인 청운회가 주관하는 추도제 및 숭모제를 올리고 있다. 문경민의 충절이 깃든 문경의 자랑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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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문경 진안리 성지와 문경새재 기도굴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중 1위로 선정된 문경새재에는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도들이 모여 기도했던 기도굴이 있다. 이 굴은 문경새재 1관문과 2관문 사이 교귀정 위쪽 옛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을 오르면 길이 7m, 폭 5.5m, 높이 1m 크기의 자연 동굴로서 우리나라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세례명:토마스) 신부가 경상도와 충청도에 전교 활동을 하면서 자주 지나다녔던 길옆의 신도들 비밀 예배소였으며 이곳에는 지금도 당시 모셨던 십자가와 성모상 등이 남아 있다. 최양업 신부는 1년에 7천여 리를 짚신을 신고 전국을 걸어서 목숨을 걸고 밤낮없는 선교활동을 하다가 쇠약해진 몸에 병과 과로가 겹쳐 안타깝게도 문경새재 입구인 문경읍 진안리에서 선종(善終)하셨다.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서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2002년 9월 29일 주막터 토지를 매입하여 가톨릭 "문경 진안리성지”로 지정하였다. 선종(善終)이란 용어는 "착하게 살다 복되고 거룩하게 삶을 마쳤다”는 뜻인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서구의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성직자의 죽음에 대한 표현인 라틴어 "mors bona, mors sancta”을 번역하면서 사용한 말인데 莊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며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교 한문 교리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한국 천주교 초기부터 써온 용어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별세하셨을 때도 선종하셨다고 하였다. 사람이 생을 마감하고 죽게 되면 종교나 신분에 따라 죽음을 표현하는 용어가 다르다. 천주교는 선종하셨다고 하고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는 뜻의 소천(召天)하셨다고 하고, 불가에서는 사바세계인 이승에서 번뇌 없는 곳으로 가셨다는 의미로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하거나 입적(入寂) 또는 입멸(入滅)하셨다고 하며, 황제는 붕어(崩御), 왕은 승하(昇遐), 국가 원수 및 성인은 서거(逝去), 일반인들은 사망(死亡), 별세(別世), 운명(殞命), 영면(永眠), 작고(作故), 타계(他界) 등으로 표현하나 신분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사람이 죽을 때 오복(五福)의 마지막이 되는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할 수 있다면 누구나 더 바랄 나위 없는 선종이 될 것이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국경 감시가 심하고 천주교 박해가 심한 조선에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1835년 말에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모방 신부는 입국 후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836년에 15세의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이어서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김대건(안드레아) 합류하여 모방 신부 댁에서 함께 생활하며 라틴어와 교리(敎理)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최양업은 1836년부터 1842년까지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사이 1837년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 이후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받았고,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고 함께 선교사업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최양업은 1844년 12월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1846년의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와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는 비통한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하루빨리 귀국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노력을 하면서 극동 대표부가 있던 홍콩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서가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김대건 신부를 이어 두 번째 사제품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 시도 끝에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즉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여 리를 걸어 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충북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859년(철종 10) 말에서 1860년(철종 11) 8월에 걸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인 경신박해(庚申迫害)를 포함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이후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활동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진안리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로서의 활동을 멈추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최양업 신부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엄숙하게 장례가 치러졌고 그 시신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인 충북 제천의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천주교 신부는 백성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목탁과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탁덕(鐸德)”이라 불렀다. 후세인들은 이렇듯 존경받는 역사 인물 김대건 신부에게는 새남터에서 효수형(梟首刑)으로 참수되었기에 "피의 순교자”라고 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2여 년간 조선 팔도 가운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등 127개 교우촌을 찾아 사목하면서 해마다 7천여 리를 걸으며 목숨을 건 선교활동 중 과로사하였기에 "땀의 순교자”"길 위의 목자”라고 한다. 이 외에도 문경에는 거룩한 종교적 활동은 물론이고 선진 학문과 사상에 먼저 눈떠 민중의 삶을 바꾸려고 한 개혁운동가이며 인간이 인간다운 삶과 귀천이 없는 평등사회를 구현하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하다 순교한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여우목성지(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와 마원성지(박상근 마티아), 한실 교우촌, 먹뱅이 교우촌, 은재 돌마래미 교우촌 등 다수의 천주교 성지가 있다. 끝으로 2021년 지난해가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천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성인(聖人) 이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추대하기 위한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양업 신부를 시복(諡福)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붙이는 존칭인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였고 두 번째 기적 심사를 진행 중이다. 복자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순교하거나 2번 이상의 기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모쪼록 하루빨리 복자(福者)로 선포되길 바라며 "길의 고장, 문경”에서 최양업 신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길 위의 천국, 문경”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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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학의 힘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기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시인은 존중받는가? 사람들이 詩를 안 읽고, 시집이 인기 없고, 안 팔리고, 유명서점의 시 코너 판매대가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에는 시인도 시집도 넘쳐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시의 대다수 독자는 시인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 왜 그럴까? 누구의 책임일까? 독자를 나무랄 수는 없다. 좋은 영화는 천만 명의 관객이 모여든다. 그렇다면 이 책임은 고스란히 시인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단순하고 깊이 없는 시도 문제이나 너무 난해하고 모호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없는 시를 읽다가 "이게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 이것도 시냐?” 하며 투덜대게 하는 시,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처럼 머리를 아프게 해서 시를 외면하게 한다면 문학성, 예술성이 있고 없고, 간에 무슨 소용이겠는가? 8년여 전 문경문인협회 회장을 맡아 문경문협 문예지인 "문경문학 제9집”을 내면서 쓴 발간사를 다시 한번 반추하며 문학인으로서 본분과 사명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21세기를 문화예술의 시대라고 한다. 문화예술은 인류에게 삶의 지혜와 행복을 가져다줌은 물론이며 지역사회와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고 국가경쟁력을 향상할 수 있으며 무형의 자산이지만 무한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다. 그중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서나 사상을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시, 수필, 소설 등 창작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즐거움과 깨우침을 주는 것이라 했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제정한 "문학헌장”에서도 "문학은 인간의 목마름과 바라는 바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며,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빚어낸 예지의 결정이고, 순연한 영혼이 서식하는 진실의 집합체다. 더 크게는 인간 구원과 사회 정화의 길잡이이며, 영혼을 깨우치는 스승”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 문경문협이 비록 지역의 작은 문학단체이지만 문학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인들만의 문협이 아닌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 시민과 함께하고 소통하는 문협이 되어야 하며, 문학인으로서 품격을 갖춤은 물론 참여문학의 비중을 높여 사회의 평안과 시민들의 정서 함양과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역발전에 기여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 필자가 문협회장 취임 일성으로 주장한 "문학을 통한 문경의 명소․명품 창조 프로젝트”라는 특수 사업을 추진, 향토의 역사․문화․전설․설화․민요 등 문화자산과 오미자, 도자기, 사과 등 농특산물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을 창작하여 문학의 힘으로 문경의 정체성 확립 및 지역 문화 창달과 문경 홍보 및 명소, 명품을 만들어 보자고 추진한 사업이 지금까지 중단없이 계속 이어져 많은 작품이 창작되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시대에 부응하여 문경시와 관계되는 주제로 창작한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특색 있는 "문경문학상”을 제정하여 문경시가 대내외적으로 문화예술 도시 문경이란 이미지 구축과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정 당국에 1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거나 천만 원 정도의 지원으로 제대로 된 권위 있는 문경문학상이 될 수 있도록 건의하였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현재 문경에는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문인과 전국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출향 문인이 많이 있다. 그중 대다수가 시인이며 등단 장르가 다르더라도 시를 쓰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시인이란 누구인가? 라는 화두를 한번 던져본다. 시인이란? 정답이 없다. 그러나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워즈워스와 코울리지가 공동으로 낸 "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에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신경림 시인은 "詩는 대화”다. 라고 했다. 혼자만 알고 남이 이해 못 하는 대화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시인은 "生이라는 배에서 흔들리는 건달, 그게 바로 詩人이다.”라고 했다. 시인은 "치외법권적 권한과 면책특권이 있고 신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으며 김남주 시인은 "시인은 모름지기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고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시인은 유일하게 사람 人 자를 받은 문인이다. 소설가 수필가 철학자 작가 사상가 등의 호칭이 있지만, 오직 인간이어야 하는 자가 시인(詩人)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문경 출신 문학인들은 유명 무명을 떠나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문경, 더 나아가 온 인류에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다. 다시 말해 우리 문인들이 문학을 하는, 시를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항상 가슴에 새기면서 문학인으로서 역할을 다한다면 불의가 판치고 불공정이 난무하는 혼돈과 불안과 불신의 세상이 아닌 법치가 바르게 서고 상식과 도덕의 가치 속에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여! 여러분들의 문학작품이 척박한 우리의 삶 속에서 싹트고 뿌리내리고 자라 세상 속에서 향기롭게 꽃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확신한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시인이란 사명감으로 모두 건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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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비석을 세우는 이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이만유 근래 우리 문경 지역에 선현(先賢)들을 기리는 각종 비석이 세워지고 있다. 아픈 역사인 1592년(선조 25) 발생한 임진왜란 시 성재 고상증 선생의 "용사실기”와 천연재 권용중 선생의 "용사일록”이란 기록을 근거로 문경지역 의병의 창의(昌義)와 활동 내용을 담은 비문과 함께 "임란 문경의병 기념비”가 세워졌고, 구한말 대 성리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이 5년여 기간 문경시 심원사와 원적사에서 강원(講院)을 열고 유학(儒學)을 강의했다. 하여 세운 "간재 전 선생 강학비”, 그리고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신 "난계 김득배 선생 생거지비” 등 비석이 세워졌다. 마음을 모아 비석을 세우는 이유는 우리 지역 역사 인물 중에서 그 행적이나 업적이 훌륭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이 이를 되새겨 거울로 삼고 값진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본받아 교훈을 얻고자 함일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비석을 세우는 사람이나 비석을 보는 사람들이 조상이나 지역 자랑거리로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서 세우고 별 의미 없이 바라본다면 이는 아무 가치 없는 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정국가 시대나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사는 민주주의 시대나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는 것과 일상생활 속 삶을 영위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고 가치다. 그래서 한 국가이든 지방자치단체이든 문화, 사회단체이든 하다못해 학교 동창회, 반상회든 다수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에는 법치는 물론 옳고 그름의 구별과 상식과 양심으로 질서를 지키며 순리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난계 김득배(金得培 1312~1362) 선생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선생께서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서북면도병마사, 수충보절정원공신, 정당문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61년 홍건적이 침입 시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전력을 다해 방어했으나 애석하게도 패하였으며 이때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하였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의 지휘로 안우·이방실·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마침내 이들을 격퇴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공민왕의 총애가 정세운으로 쏠릴 것을 두려워하여 간계를 부려 왕지(王旨)를 꾸며서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선생은 반대, 거절하였으나 왕의 명령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정세운을 죽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공민왕은 교지를 내려 "이들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함부로 죽였다. 잡아, 처형하라"하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만고 충신 김득배 선생은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오호통재라! 이 안타까운 일을 당한 선생의 문하생인 직한림원(直翰林院)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청하여 선생의 시신을 거두고 아래와 같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아아! 하늘이시어! 이분이 어떤 사람이옵니까? 대게 듣건대 착한 자에겐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겐 화를 주는 것이 하늘이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를 벌주는 것이 사람이라 하니 하늘과 사람이 다르기는 하나 그 도리는 하나인데, 옛사람은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되,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도 말하였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전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임금의 수레가 멀리 피난 가고, 나라의 운명이 실에 달린 듯이 위태로웠는데, 오직 공이 맨 먼저 대의를 외쳐서 원근(遠近)에서 호응하였으며 자신이 만 번 죽기를 각오하고 만사(萬死)의 계책을 내어 삼한의 왕업을 회복하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여기서 먹고 여기서 자는 것이 누구의 공입니까?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주어야 옳고, 비록 죄가 있다고 해도 죄가 공보다 무거우면 죄를 승복한 뒤에 다스려야 옳을 것인데, 어찌하여 한마(汗馬)가 마르지 않고 개가(凱歌)가 그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이 창칼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바로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묻는 까닭입니다. 나는 압니다. 그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에 구천 아래에서 피눈물을 삼킬 것을 나는 압니다. 아아! 운명이로다.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얼마 전 "난계 김득배 장군 생거지 깃골 표지석” 제막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고 참석하지 말아야 할 몇몇 얼굴이 보여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하고 마치 김득배 선생을 해친 못된 김용(金鏞)과 같은 무리가 잘못을 잘못이라 하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을 오히려 비난하며 모함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문경의 하늘 아래 같이 있다는 것은 불명예이고 불행이다. 추후 기회를 보아 그 내용을 공개하겠지만 부당, 불의를 저지르고도 오히려 큰소리치고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문학을 한다고 예술을 한다고 활개 치며 편을 가르고 패를 지어 허세를 부리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들로 인해 지역 화합이 저해됨은 물론 문화도시 문경의 품격이 낮아지고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없게 되고 사람다운 삶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자리가 어느 자리인데 그런 사람이 고개를 들고 참석하는가? 이런 엄숙하고 성스러운 자리에 그런 삿된 사람이 참석한다는 것은 우리가 존경하는 "김득배 선생의 삶”과 "김덕배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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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 문경(聞慶), 지명 이야기이만유/향토사 연구원 문경의 지명은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관산현, 고려시대 때는 문희(聞喜)였다가 문경(聞慶)으로 바뀌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문경(聞慶)으로 불리어왔다. 문희, 문경은 들을 문(聞), 기쁠 희(喜), 경사 경(慶) 자로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기분 좋은 지명이다.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바라며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나 전국의 보부상들이 대박을 꿈꾸며 팔도를 다닐 때 주로 이용했던 고갯길이 문경새재다. 한양으로 가는 대표적인 큰길로 추풍령, 문경새재(조령), 죽령이 있었지만, 속설에 의하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 쓴다거나 죽 미끄러진다고 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으로 가는 길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인지 예로부터 문경은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 있다는 뜻으로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문경에는 "문경삼관(聞慶三關) 대한삼경(大韓三慶)”이란 말이 있다. 선견지명이 있는 옛사람들이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 풍토와 지형, 천문지리를 관찰하여 미래를 미리 짐작하여 숨은 뜻을 지명(地名)을 통하여 전한다는데 그래서일까?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관문 3개 있고, 그 문경에서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큰 경사 소식을 3번 듣는다는 예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첫 번째가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몽진하여 인근을 순행 중 문경 주흘산 어류동(御留洞)에 머물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 제1경이며, 두 번째는 주역학의 종장(宗長) 야산(也山) 이달 선생이 지리산에 계실 때 멀리 문경 쪽에서 서기가 비치므로 천기를 받아 나라에 경사가 있을 징조임을 알고 1945년 8월 14일 전국의 제자들을 문경으로 모이게 해서 꼬끼오! 꼬끼오! 하며 닭춤을 추었는데 이를 보고 제자들이 영문을 몰라 했으나 그다음 날 광복의 기쁜 소식을 들은 것, 다시 말해 꼬끼오! 닭이 울어 새날이 밝았다는 신호를 보낸 조국광복의 제2경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나라의 경사 제3경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처럼 남북통일이 될 것인데 그 소식도 문경에서 제일 먼저 듣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문경의 지명유래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선사시대(先史時代) 신석기시대부터 집단마을을 형성하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특히 산양 금천 주변 등 청동기시대 유물인 성혈과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 삼한시대(三韓時代) 마한·진한·변한 중에 변(弁), 진(辰)의 읍락국가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진한계 근기국(勤耆國)은 산양 지역이고, 진한계 호로국(戶路國)은 점촌과 호계지역이며,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은 상주 함창지방이고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은 함창 또는 용궁지역이나 우리 시의 일부가 포함된다. ○ 삼국시대(三國時代) 서기 505년(지증왕 6년)에 신라 지방제도 확정으로 관문현(冠文縣)・관현(冠縣)・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 불렀으며 현재의 문경・마성지역이다. 가해현(加害縣)은 가은・농암지역이며 호측현(虎側縣) 혹은 배산성(拜山城)은 점촌시・호계면 지역이고, 근품현(近品縣)은 현재의 산양・산북지역이다. 고동람군(古冬攬郡) 혹은 고능군(古陵郡)은 상주시 함창읍(咸昌邑) 지역이며 점촌과 영순면의 일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된다. 축산현(竺山縣) 혹은 원산(圓山)은 예천군 용궁지역으로 영순면의 일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되며 난산현(蘭山縣)은 동로・산북면 일부가 포함된다. ○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서기 757년(경덕왕 16년)에 신라 지방제도가 9주 5소경, 117군, 293현으로 개편되면서 관산현(冠山縣)이 되었는데 현재 문경・마성지역으로 고령군(古寧郡 : 현 함창)의 영현이다. 가선현(嘉善縣)은 가은・농암지역으로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이다. 호계현(虎溪縣)은 점촌과 호계면의 일부 지역으로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이다. 가유현(嘉猷縣)은 산양・산북지역으로 예천군(醴泉郡)의 영현이다. 안인현(安仁縣)은 예천군 영현으로 동로면 일원과 옛 화장면 일원이다. ○ 고려시대(高麗時代) 신라 경덕왕이 관산현(冠山縣)이라 한 것을 940년(고려 태조 23)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개칭하고 983년(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문희군(聞喜郡)과 가은현(加恩縣), 호계현(虎溪縣), 산양현(山陽縣), 영순현(永順懸)은 상주목의 속현이 되고 안인현(동로면과 옛 화장면)은 예천군에 폐합되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문경군(聞慶郡)으로 고쳤다. 공양왕 2년(1390)에 문경군(聞慶郡)에 감무를 두었으며 가은현(加恩懸)은 상주의 속읍에서 문경의 속읍이 되었다. ○ 조선시대(朝鮮時代) 서기 1414년(태종 14년)에 8도 체제를 완비하였는데 문경현의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고 호계현을 합병하였다. 가은현은 문경현의 속현으로, 산양과 영순현은 상주의 속현으로 있었으며 1892년(고종 29년)에 문경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에 8도 체제가 23부로 개편되고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군으로 지방행정 체제를 단일화하였다. 이때 문경이 상주, 용궁, 예천 등 이웃 군에 할양되어 문경군이 행정 편제상 없어졌다.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에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되고 문경군이 환원되었다. 1906년 1월 19일에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1906년 9월 24일 상주군의 산서, 산남, 산동, 산북, 영순면을 편입하였다. ○ 근․현대시대(近․現代時代) 서기 1914년 4월 1일에 용궁군의 서면과 함창읍의 동면 일부를 편입 현재의 시계(市界)를 형성(11면, 129리)하였고 1933년(경상북도령 33호)에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10면, 129리)되었고 1949년 3월 10일에 문경군청이 문경읍 상리에서 호서남면 점촌리 232로 이전하였다. 1956년 7월 8일에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법률 제393호)되었고 1963년 1월 1일 농암면 삼송리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68년 9월 3일 군 청사를 모전리 59-2번지로 신축 이전, 1973년 7월 1일 호계면 봉정리를 산양면으로 편입(대통령령 3789호)하였고 문경, 가은(이안면 저음리를 가은읍에 편입)이 읍으로 승격(대통령령 제6543호)되었다. 그리고 1986년 1월 1일 점촌읍이 호계면 별암 2리를 편입하여 점촌시로 승격(법률 제3798호)되었고 1989년 1월 1일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점촌시에 편입, 1995년 1월 1일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하여(법률 제4774호) 문경시가 되었다. 1999년 1월 1일 신기. 대성. 공평동을 통합하여 신평동을 설치하였고 2004년 1월 1일 점촌동, 중앙동, 신흥동, 신평동, 모전동을 점촌1·2·3·4·5동으로 동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 5개 동과 2개 읍, 7개 면이 있다. 그런데 문경의 지명 변천 과정을 보면서 눈여겨 볼 흥미롭고 특별한 것이 있다. 1895년(고종 35년) 5월 26일에 8도 체제가 23부로 개편되고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군으로 지방행정 체제를 단일화하였다. 이때 문경이 상주, 용궁, 예천 등 이웃 군에 할양되어 ”문경군”이 행정 편제상 없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 문경이 우리나라 역사상 1년여간 증발, 존재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896년(建陽 元年) 8월 4일에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될 때 문경군이 환원되었으니 망정이지 우리의 삶의 터전인 문경이 대한민국에서 사라질뻔한 아찔한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문경(聞慶)이란 지명이 문경현지(聞慶縣誌)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 보면 "恭愍王聞捷報於本縣仍改今名” 이란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년∼1374년)이 원나라 말 농민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피해 복주(福州:현 安東)으로 파천(播遷)했다가 지역 순방 중 주흘산(主屹山)에 머물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송경(松京: 現 開城)을 수복했다는 승전보 듣게 된 곳이라 하여 "들을 聞, 경사 慶” 자를 써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으로 문경(聞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삼국사기 권 34 잡지3에 "冠山縣 本冠縣 一云冠門縣 景德王改名 今聞慶縣”-"관산현은 본래 관현 또는 관문현이라 한다.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문경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今聞慶縣(금문경현)”를 주목해 보면 위의 공민왕 때 문경이란 지명을 처음 불리게 되었다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17대-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것인데, 그때 이미 문경이라 지명을 사용하였으니 편찬 그 이전부터 문경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공민왕이 1361년 11월 19일에 홍건적이 침략, 몽진길에 올라 동년 12월 15일에 안동에 도착, 1362년 2월 신축일에 환도했다면 1362년 공민왕 환도 연도와 1145년 삼국사기 편찬 연도와의 차이는 217년이다. 정리하면 공민왕이 문경 땅에 머문 시기보다 217년 전에 이미 문경이란 지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편입시켰다가 후에 문경군(聞慶郡)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으로 비교해도 127년의 시차가 있다. 정사와 설화로 이해해야 할지? 규명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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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낙동강 발원지 문경 초점(草岾)이만유(낙동강발원지초점보존회 연구위원) 낙동강(洛東江)은 우리나라 제2의 강,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유로(流路) 연장 521.5㎞, 유역면적 23,817㎢이며 영남지역 생명의 젖줄이다. 낙동강이란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동국여지승람이고 낙동강(洛東江)의 어원은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뜻이며, 또 가락국(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낙동강의 지리적 발원지는 태백시 매봉산(梅峰山) 천의봉(天衣峯)에 있는 너덜샘이다.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굽이돌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을 만나고 다시 영강(嶺江) 등 여러 지류를 받아들인 다음 물길을 남쪽으로 돌려 상주(尙州) 남쪽에서 위천(渭川)을, 선산(善山) 부근에서 감천(甘川), 대구(大邱)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남지(南旨) 부근에서 남강(南江)을 합친 뒤 동쪽으로 물길을 바꾸어 삼랑진(三浪津)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을 합치고 이어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그러나 위의 내용과 같이 지금까지 대다수 사람은 낙동강 발원지(發源地)가 태백 황지로만 알고 있었으나, 그런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태백 황지와 문경 초점, 영주 소백산 이렇게 세 곳을 발원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 근거 문헌은 1454년 단종 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로 원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大川三, 一曰洛東江. 基源有三. 一出奉化縣北太伯山黃池 一出聞慶縣北草岾 一出順興小白山 合流至尙州. 爲洛東江" 이것을 풀어쓰면 "대천(大川)이 셋인데 하나가 낙동강이다. 그 발원지가 세 곳이 있는데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와 문경현 북쪽 초점과 순흥 소백산에서 나온 물이 상주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이 된다."이다. 위의 내용으로 볼 때 낙동강의 발원지가 황지라고 주장하는 근거 문헌이 조선 제9대 성종 때인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인데 비해 문경 초점이 포함된 발원지가 셋이라는 내용이 있는 세종실록지리지"는 제6대 단종 때인 1454년에 편찬된 것이니 시기적으로 27년 앞선 것으로 역사성을 더 오래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초점은 어디인가?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양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국에 ×자형 아홉 개 도로망을 구축하였는데, 그중에서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이 제4로와 제5로이며 경상충청대로, 경상대로라고 하다가 지금은 영남대로로 불리고 있다. 이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새재인데, 새재는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 14년(1414)에 개척된 고갯길이다. 우선 문경새재의 새재에 대한 유래를 알아보면 초점, 조령, 새(新)재, 새(사이)재, 이렇게 4가지가 있다. 나머지는 생략하고 발원지와 관계있는 첫 번째인 초점(草岾)에 관해 설명하면, 풀 초(草)자, 고개 점(岾)자인데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으로 고려사지리지(1451년, 문종 원년)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단종 2년)에서 초점이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억새의 억 자를 빼고 새가(예전에 억새를 새라고 하였음) 많은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제 초점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었고 명확해졌다. 초점은 고갯길 새재에서의 특정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문경새재를 조령이라고 표기하고 새재라고 부르기 전의 옛 문헌상에 나타난 새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해서 10여 년 전에 낙동강 발원지에 대한 정리를 종합해서 문헌상 자료와 역사성을 감안하여 낙동강 발원지가 하나가 아닌 셋이 있다는 사실을 문경시민은 물론, 전 국민에게 알렸었다. 위에서 언급 한 바와 같이 문헌 자료에 의해 황지를 낙동강 발원지로 정했다면, 시기적으로 앞서 편찬된 문헌에 기초해서 정하는 것이 옳고, 그렇다면 황지 한 곳이 아닌 태백 황지와 문경 초점과 순흥 소백산 이렇게 세 곳을 발원지로 해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면 문경 초점이 낙동강의 발원지라면, 낙동강 물줄기의 시원이 되는 태백의 황지와 한강의 발원지라는 태백의 검룡소(儉龍沼)와 같이 용천수가 있는 못이나 샘이 있어야 하는데, 문경 초점에 있는 시원 지점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제3관문 조령관 옆에 있는 조령약수터를 시원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발원지의 개념이다, 굳이 발원지가 꼭 연못이나 샘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비가 내리면 한 골짜기 한 계곡 위에서부터 빗물이 흐르고 모여 개울이 되고 다시 천(川)을 이루고 강이 되는 것인데, 특정한 한 지점을 콕 집어 시원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황지든 검룡소든 그보다 높은 지대에서도 물이 나고 흐르는 곳이 있는데, 그 지점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한 예로 근래에 와서 낙동강수계 낙동강 발원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그 내용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1481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을 근거로 황지를 낙동강의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현지 답사한 결과,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삼수동에 걸쳐 있는 산 천의봉(天衣峰)의 동쪽 계곡에 있는 너덜샘을 발원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검룡소를 직접 답사한 어느 인사가 말하기를 "사실, 검룡소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한강은 시작된다. 금대봉 정상 아래에 있는 제당굼샘이 그곳이다”라고 하는 것과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 중에 "태백시에서 창죽동으로 가는 고개는 물줄기가 세 갈래로 나뉜다고 해서 삼수령이라고 불린다. 이 고개를 기점으로 한강과 낙동강, 오십천이 발원한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어느 한 지점을 발원지로 국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낙동강은 "황지냐? 너덜샘이냐?”,한강은 "검룡소냐? 제당굼샘이냐?” 발원지에 관해서 논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니 빗물이 모여 흘러가는 최상류, 최고지점의 계곡이나 골짜기를 발원지로 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며 문경의 초점도 지금 새재의 고갯마루가 경상도와 충청도,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가르는 경계 지점 분수령이며, 영남지방의 어원이 조령의 남쪽이란 뜻이니 여기가 바로 영남, 기호지방의 분기점이 되는 곳이므로, 새재 고갯마루 남쪽 계곡을 발원지로 보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령관에 비가 내리면 용마루 남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초곡천 소야천, 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 남해(부산)로 빠지고 북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한강으로 흘러 서해(서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령관 남쪽 이 일대를 낙동강 3대 발원지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무리가 없다고 본다. 용천수는 상징적인 것이 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세종실록지리지를 근거로 낙동강의 역사적 발원지는 한 곳이 아닌 태백의 황지, 문경의 초점(조령), 영주 소백산 이렇게 세 곳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를 하면 강원도 태백시의 함백산 동쪽에 있는 황지가 있는 인근 지역과 경북 문경시 북쪽에 있는 초점(새재)의 남쪽 일대 초곡천이 시작되는 곳과 경북 영주시 순흥 소백산 죽계천 지역을 낙동강 발원지로 보면 되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하나 제언(提言)하고자 한다. "낙동강발원지초점(새재)보존회”가 낙동강 발원지를 조성하고2011년 6월 28일 표지석 제막식을 개최했다. 그 이후 매년 "낙동강발원지초점(새재)문화제”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관련 기관(시도)이 외면하여 개최하지 못하다가 2018년 11월 24일 제2회 낙동강발원지초점(새재)문화제를 성황리에 개최하였지만, 다시 중단되었다. 모쪼록 제9대 문경시장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문경의 정체성 확립과 역사에 바탕을 둔 문경만의 축제가 개최되는 것이 바람직한바 낙동강 발원지 초점이 문경의 명소가 되고 특색있는 축제인 "낙동강발원지초점(새재)문화제”가 다시 개최될 수 있도록 관계 당국은 검토, 추진하길 바란다. 끝으로 표지석 제막식 때 노래로서 낙동강 발원지 초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필자가 가사를 짓고 박달이 가수가 부른 "초점을 아시나요”를 소개한다. 초점을 아시나요 낙동강 발원지 초점을 아시나요. 새도 쉬어 넘는 고개 문경새재 문경새재 옛 이름이 억새 우거진 초점이라 물은 생명 국토의 핏줄 푸른 물줄기 팔백 리 낙동강 팔백 리 낙동강 여기서 시작하네. 낙동강 발원지 초점을 아시나요. 새도 날아 넘기 힘든 문경새재 문경새재 옛 문헌에 낙동강 시원이 초점이라 영남지역 생명의 젖줄 푸른 물줄기 조령천 굽이돌아 조령천 굽이돌아 낙동강 이루네. 낙동강 발원지 초점을 아시나요. 고갯마루 조령관에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용마루 남쪽에 내린 비는 낙동강으로 북쪽으로 내린 비는 한강으로 흐른다. 팔백 리 낙동강 팔백 리 낙동강 물의 고향 아! 초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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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구곡원림을 지키는 사람들 이야기이만유/문경구곡원림보존회초대 회장 구곡(九曲), 구곡원림(九曲園林)이 뭔가? 지역마다 있는 팔경(八景)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 구곡이라니? 한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2013년 이전까지 문경에서는 상당한 식자층에서까지 구곡이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2012년 11월 15일 필자가 발의하고 26명이 동참하여 두 차례의 추진위원회 회의를 거쳐 2013년 1월 15일 문경문화원 2층에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순수 민간인들이 뜻을 합쳐 구곡원림을 조사, 연구, 보존하고 구곡문화를 계승 발전하기 위한 "문경구곡원림보존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난 뒤 신문, 방송 등에서 다투어 보도하고 구곡 사진 전시회 등으로 구곡을 알림으로써 점차 구곡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경찰서 정보과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서 그것도 정보과,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철렁! 웬일일까? 했는데, 내용인즉 경찰서장께서 이즈음 문경에서 구곡, 구곡 하는데 구곡이 뭐냐? 하고 간부회의 때 질문을 하니 구곡에 대해 제대로 아시는 분이 없어 전화했다고 하여 요약해서 설명해 준 적이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였으며, 그때 구곡이 문경 지역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구곡원림은 한마디로 말하면 정원이다. 인위적으로 꾸민 조경이 아닌 자연 그대로 시야에 들어오는 한 계곡 더 나아가 한 지역을 품은 넓은 정원이다. 그러나 구곡원림의 구성요건으로는 아름다운 산과 계곡, 물이 흐르는 아홉 굽이와 은거하는 유학자가 있어야 한다. 구곡원림의 시원은 옛 중국 남송의 주자가 경영했던 무이구곡이며 조선의 선비들이 주자의 삶을 숭모하며 관직과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고 무위자연의 삶을 살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며 성리학을 구현하던 공간이다. 그러니까 구곡원림은 단순히 경치 좋은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곡원림은 유학의 꽃이며 귀중한 문화자산이고 새로운 관광자원이며 삶의 교육장이다. 구곡원림 안에는 시가 있고 그림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성리학이 있고 교훈이 있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 있다. 문경구곡원림보존회의 주요 활동 사항을 되돌아보면 단체(전 회원) 및 분과별로 참여하는 구곡원림 조사, 연구, 보존 활동을 월 1∼2회 실시하였고, 매년 12월 구곡원림 보존 활동 종합평가회를 실시하고 취장보단 하였다. 아름다운 문경의 구곡을 홍보하기 위해 문경의 구곡원림 사계절을 담은 사진 전시회를 매년 개최하였으며, 국내 유명 구곡원림 탐방을 매년 1∼2회 실시하여 견문을 넓혔고, 2013년 4월 선유구곡 "KBS 한국 재발견” 방송에는 이만유, 오석윤, 손해붕, 박순자, 김영순 출연했다. 2013년 9월 경상북도가 구곡원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실시한 "백두대간 산림문화자산 탐방 교육” 공동 추진하고, 2014년 7월 야간 여행 상품으로 인기 있는 달빛사랑여행을 문경새재에서만 개최하던 것을 문경문화원과 함께 "선유구곡 달빛사랑여행”으로 추진하였다. 2014년 9월 구곡원림 시원지인 중국 무이산 "무이구곡” 탐방에는 회원 21명이 참가했다. 2014년 12월 문경시민을 대상으로 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하는 "새문경아카데미”를 구곡회가 진행하며 식전 공연 대신 "사진으로 보는 문경의 구곡원림”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2015년 1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구곡, 세계 유산적 가치 학술 세미나”에 회원 26명이 참석했다. 2015년 9월 조선 시대 속에 갇혀 있는 구곡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1세기 신 구곡원림으로 "영강구곡원림”을 설정, 경영하기 위해 테스크 포스팀 구성과 현지답사 후 발대식을 거행, 추진하여 2016년 12월 12일 "영강구곡원림 설정 및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여, 책 500부 발행 유관기관 및 문화단체 배포했다. 이후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5년 4월 선유구곡 산림문화자산 명승 지정 테스크 포스팀 구성 2015년 7월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 성금 100만 원 기탁 2015년 9월 "영강구곡원림 설정 및 출판기념회”를 개최 2015년 12월 "자원봉사 부분 우수단체” 문경시장 감사패 2015년 12월 "문화재 지킴이 활동 우수단체” 경북도지사 표창 2016년 10월 선유구곡에서 "시민과 함께 걷는 구곡 탐방”실시 2016년 10월 24일 이만유 회장 "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 수상 2017년 8월 자질 함양 및 효율적 사업추진을 위한 자체 "하계 워크숍” 개최 2017년 12월 명사 초청 특강/ 중원대학교 이상주 교수 2018년 8월 자체 "하계 워크숍” 개최 2018년 12월 명사 초청 특강/ 한국국학진흥원 최은주 책임연구위원 2019년 8월 자체 "하계 워크숍” 개최 2019년 12월 엄원식 학예연구사 초청 특강 2020년 8월 새롭게 발굴된 관산구곡 특강/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 유교문화박물관장 2020년 11월 "영강구곡 발전 방안” 워크숍 개최( 발표자 : 권갑하, 황대욱, 김동익/ 좌장 : 이만유) 우리나라에는 160여 개의 구곡원림이 있고 경북에 50여 개, 문경에는 11개의 구곡원림이 존재한다. 이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구곡원림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문경이 산수가 아름답고 선비가 많다는 증거가 된다고 본다. 현재 문경에 존재하는 구곡원림은 선유구곡(외재 정태진), 선유칠곡(대한제국 시절 칠우), 화지구곡(옥소 권섭), 관산구곡(손와 이경중), 남강구곡(남강 이원영), 쌍룡구곡(화운 민우식), 병천구곡(묵옹 송요좌), 석문구곡(근품재 채헌), 산양구곡(근품재 채헌), 청대구곡(청대 권상일), 영강구곡(문경구곡원림보존회)이 있다. 구곡원림은 경상북도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추진할 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문화자산이다. 이런 구곡원림을 순수 민간인이 스스로 지키고 보존하겠다고 뭉쳐 10여 년을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은 국내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고 전례가 없는 대단한 일로서 자긍심을 가질 보람찬 일이다. 또한 회원들은 정기적인 활동 외에 개인적으로도 수시 활동을 하며 특히 훼손 현장을 찾아가는 등 발로 뛰는 문화유산 지킴이 활동을 하였다. 우리 "구곡원림을 지키는 사람들”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고, 역사와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사람들이며, 온고지신하며 새 시대를 앞서가는 신지식이며, 문경을 빛내는 사람들이며, 숨겨져 있는 보물을 캐내고 지키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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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 -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을 맞아 -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 구국 민병 충의의 넋이시여 어둠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시여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선 호국의 영령들이시여 선조들이 살아왔고 후손들이 살아갈 이 땅, 이 산하에 흘리신 피 거룩한 희생 앞에 무릎 꿇고 촛불 켜고, 삼가 향불을 사릅니다 정의와 호국정신 우리 민족 핏줄 속에 면면히 흐르는 그 뜨거움 멀리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국가부흥 투쟁 참혹했던 임진왜란 7년의 처절한 피의 저항 구한말 암흑과 혼란 시대의 의분 투쟁 국권 피탈과 일제강점기의 압박과 수탈에 대항하여 오로지 나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제대로 군사훈련을 받지도 못한 채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못한 채 때로는 곡괭이 들고, 낫 들고, 맨주먹, 맨몸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거룩함에 고개를 숙입니다 앞선 자가 쓰러지면 다시 뒤에선 자가 앞으로 나오고 목탁을 내려놓은 스님도 붓을 던진 유생도 칼을 잡고 만주와 러시아의 망명길에서 멀리 구미(歐美)지역 교민도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한마음 되어 오늘 여기, 내일은 저기 들불처럼 일어나 싸우니 조총 든 왜군도 그 충의와 용맹스러움에 놀라고 겁낸 자랑스러운 의병 오늘 여기 이 고귀한 영령들을 기리는 제단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향불 연기 속에 흰옷 입은 선열들의 결기 찬 모습 보이고 그날의 분노와 울분의 함성 귀에 쟁쟁 들립니다 아! 가슴 벅찬 오늘 우리,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지금의 급변하는 국내외 정국과 현실 속에 민족의 나아갈 길을 바로잡아 현명하고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자 분열과 혼란을 거두고 모두 손잡고 가자 함께 나아가자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 이 땅에 뿌린 임들의 고귀한 피가 씨앗이 되고 밑거름되어 번영의 나라, 영광의 대한민국 되어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구국의 영령들이시여 삼가 엎디어 비옵나이다 고난의 그날 접어두시고 부디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추모 헌시에 붙여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 1일 "의병의 날”, 6월 6일 "현충일”, 6월 25일 "한국전쟁”, 6월 29일 "제2연평해전”으로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영령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로 기념일을 제정하여 매년 국가에서 기념식을 거행, 국민 모두 한마음으로 조국을 위해 순국하신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있다. 4년 전인 2018년 6월 1일,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행정안전부 주관 "제8회 의병의 날” 기념행사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의병정신선양회, 유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 문경의 한말 의병장 이강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개관한 "운강이강년기념관”에서 국가행사로 개최된 바 있다. 문경은 운강 이강년, 박열 의사 등 의병 독립 인물 73명이 서훈된 호국의 고장이다. 이날 의병의 날 기념행사 중에 추모 헌시 낭독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개최지인 문경 문인들을 대상으로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 헌시 공모”를 시행하여 뽑힌 자작 추모시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를 그날 필자가 직접 낭독하였다. 대한민국 역사상 많은 아픔이 스며있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ㆍ보훈 의식 및 애국정신이 함양되기를 바라며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면서 낭독한 추모 헌시를 다시 공유하기 위해 4년 전 그날을 되돌아보며 의로운 별들을 추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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