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
(62)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민속신앙은 옛적부터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신앙이다.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등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믿음의 행위로서 단군신앙, 미륵신앙, 조상신‧성주신‧조왕신 등 가정신앙과 서낭당‧산신당‧장승‧솟대‧동제(洞祭) 등 마을신앙, 점복신앙, 풍수신앙, 무속신앙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그중 무속신앙(巫俗信仰)은 신령(神靈)이 실재한다고 믿고 신력(神力)을 얻은 무당(巫堂)을 주축으로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종교적 토속신앙이다. 무속신앙의 일종인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은 규모가 큰 마을굿으로 우리의 소중한 무형문화자산이므로 널리 알리고 잘 보존, 전승했으면 한다. ‘오얏골 별신굿’은 10년 주기로 개최하는 별신굿으로 우리 문경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독특한 민속문화이며 굿을 하는 날에는 인근 마을 주민은 물론 먼 곳 외지인들까지 모여들어 큰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별신굿은 내륙지역보다는 해안지역에서 많이 열린다. 내륙지역에는 현재 소수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문경지역에는 호계 부곡리 ‘오얏골 별신굿’을 비롯하여 산북면 ‘김용리 별신굿’, ‘석봉리 별신굿과 샛골 별신굿’, ‘내화리 화장별신제’, 동로면 적성리 ‘벌재 큰마 별신굿’ 등에서 별신굿을 지냈으나 지금은 호계 ‘오얏골 별신굿’만이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다.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은 호계면 부곡리 오얏골에서 약 300년 전부터 ‘별신굿’이 열려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나 1995년 이후 고령화된 농촌의 현실과 굿판을 열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민속을 지키고 전통을 되살리려는 마을주민들의 간절한 뜻과 문경시의 지원으로 그 맥을 잇게 되었다고 안도했으나 2007년 3월 3일∼4일에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정월 대보름 행사로 개최되었다. 2년 뒤인 2009년 2월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호계 부곡 용당(암굴)에서‘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 재현행사’가 열렸다. 마을 어르신이 말씀을 녹취한 것을 보면‘1959년과 1968년에는 점촌 '달판네' 무당이 왔고, 1977년에는 안동 '애숭이' 무당이 왔다. 그러고 나서 1986년에는 예천의 무당이 했고, 1995년의 별신굿에서는 상주의 무당이 왔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10년 주가로 별신굿을 연 것을 알 수 있는데 2009년 이후에는 개최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2007년 12년 만에 개최된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이 연행(演行)할 때 필자가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되돌아보면,그날 내륙지방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별신굿 취재를 위해 각 매스컴은 물론 민속학자, 사진작가, 외지인 등 500여 명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뤘는데 특히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10년에 한 번 열리는 별신굿인데 내 생전(生前)에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꼭 봐야겠다.' 하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기도 하였다. 오얏골 별신굿에 대한 유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두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중 암굴(용당)에서 흘러나오는 용천수가 가뭄에 나오지 않자, 이 속에 살고 있는 용이 심술을 부려 샘을 막고 있다고 하여 별신굿을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용천수는 마을의 식수원이면서 농업용수원으로 주민들의 삶과 생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재앙을 막기 위한 굿이라 본다. 호계 오얏리 별신굿은 경북 내륙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별신굿으로 정체성 있는 전통문화로 계승함은 물론 지역민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열었다. 별신굿을 준비할 때 칠팔십 대 어르신을 포함하여 남녀노소 100여 명의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부정을 막는다고 하여 왼쪽으로 꼰 새끼로 국내 최대 규모인 길이가 300m의 금줄을 친다. 별신굿 당일은 무당 입동(入洞), 상당‧하당‧용당의 부정굿, 용떡(제물) 옮기기, 치성굿(소지올리기), 선왕굿, 용당굿, 거리굿 등을 열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하고 독특한 별신굿을 선보였다. 별신굿의 전 과정을 지면 관계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별신굿 첫 행사로 ‘무당 입동’을 보면, 무당은 정월 열나흘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에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에서는 미리 농악대를 꾸려 무당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을회관 앞에서 풍물을 울리고는 무당을 맞이하러 간다. 무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뒤, 마을 사람이 "술렁수"하고 외치면 무당이 "예이"라고 대답한다. 이때 예포를 울리고 한바탕 놀음판을 벌인다. 별신굿은 보통 5년 또는 10년에 한 번 행해지며 ‘특별히 신에게 즐거움을 고하는 굿’이란 뜻에서 붙여진 특별 기원 축제로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하는 점에서 동제(洞祭)와 유사하나, 동제는 동민 중에서 뽑은 제관이 제사를 주관하지만, 별신제(굿)는 무당이 주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글을 마치면서 아주 특별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문경 호계 오얏골 별신굿’을 하회마을 ‘안동 선유 줄불놀이’처럼 관광 상품화하여 매년 개최하기를 제안한다.
-
(61) 원모정(遠慕亭) 효(孝)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갑골문자를 뿌리로 한 한자(漢字) 중에서 ‘孝(효)’ 자를 뜻풀이하면 노인 노(老)자와 아들 자(子)를 합친 것으로 늙은(노, 耂) 부모를 아들(자 子)이 업고 있는 모양으로 자식이 노인이 된 부모를 잘 봉양한다는 의미이다. 조선 시대 통치이념이고 생활 규범이 되는 성리학에서 충과 효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지니며 효행이야말로 칭송받는 미덕이었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 송죽리 덕암마을에는 효의 전범(典範)이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원모정(遠慕亭)이란 정자가 있다. 원모(遠慕)는 ‘세대가 멀어질수록 더 선조를 사모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亭子)는 유상지소(遊賞之所)로서 자연 속 경치 좋은 곳에 세우는 것이 대다수인데 이 원모정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효의 실천 도장으로서 언제나 충효(忠孝)에 대한 교훈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원모정(遠慕亭)은 1930년(庚午)에 산양면 송죽2리 덕암마을에 지극(至極)한 효자인 참봉(參奉) 고응두(高應斗-1564∼1627)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300여 년이 지난 뒤 그 후손인 치당공(痴堂公) 고완(高浣) 선생이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지난 2018년 10월 ‘개성고씨 신천군수 종중(회장 고정환)’이 앞장서 문중에서 십시일반 모금을 하고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원모정(遠慕亭) 중수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날 권대진 전 문경시노인회장께서 원모정에서 나온 상량문을 번역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백행의 근본인 효의 중요함에 대해 설교하셨다. 그리고 정자 앞에 육각 원두막을 설치하는 등 효를 테마로 한 ‘효공원(孝公園)’을 조성하여 원모정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역사를 배우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이 원모정에는 감동적인 효(孝) 이야기가 있다. 1930년(경오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 진성이씨(眞城李氏) 이기호(李琦浩) 선생이 지은 기문(記文)을 인용해 기술하면, 1592년(선조 25)에 왜적이 침략한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약탈과 살생이 자행되는 전란으로 극심한 혼란과 피해를 볼 때 이 마을에도 예외 없이 왜병들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효자 고응두는 팔순의 노부(老父)를 업고 온 힘을 다해 달아나게 되었다. 재앙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하니 아들 등에 업힌 아버지가 이러다 둘 다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한사코 아들의 등에서 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심이 남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며 아버지를 꽉 붙잡고 내려놓지 않자 아들의 귀를 깨물었다. 아들의 귀에서 붉은 피가 솟아 옷을 적시고 어깨로 흐르는데도 아들은 태연자약하며 마치 고통을 모르는 듯이 하였다. 더욱더 아버지를 업은 팔에 힘을 굳게 하면서 오히려 아버지가 혹시 놀랄까 다칠까만 염려하였다. 이와 같은 다급한 상황에서 그만 추격해 온 왜적들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이제는 죽는구나 했었다. 그러나 이들을 쫓아 오면서 이 상황을 다 본 왜병들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과 아들의 효심을 칭찬하며 살려 주었다. 당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빼앗는 재앙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애와 효성으로 부자(父子)가 서로 그 도리(道理)를 다하는 지극한 정성이 이역 오랑캐 무리에게도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응두는 아버지 사후에 애통함이 예제(禮制)를 넘었으며, 3년을 시묘(侍墓)살이하고, 선조왕(宣祖王)의 승하 때에는 소복을 3년간 입었다. 이를 전해 들은 경상도 관찰사(경상감사)가 그의 효행을 조정에 추천,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인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명하고, 참봉(參奉)을 증직(贈職)하였다. 사람들은 충신(忠臣)을 효자(孝子)에서 찾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했으며, 그 뒤로 이런 사실을 창석 이준(瘡石 李埈)이 상산읍지에 ‘조란실기(遭亂實記)’로 기록했고,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도 ‘효행록(孝行錄)’을 지어 남겼다. 그런데 이번 원모정 중수 시 개성고씨 신천군수 종중이 공개한 것 중에 주손인 치당공 고완(高浣)이 지은 상량문에 우리나라 연호나 국호를 사용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 건축물에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隆熙)’를 쓴 것에 대해 모두 주목했다. 이는 가문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보다는 충(忠)을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또 있었다. 1592년 4월 14일에 왜군 제1진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부산포에 침입하여 시작된 7년 전쟁에서 왜군 제2진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 선봉장인‘사야가(沙也加)’라는 20대 초반 젊은 장수가 조선을 침략하여 진격하다가 난을 피해 살길을 찾아가는 무리 속에 한 가족을 보았다. 모두가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가운데 중년의 사내가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아이들과 함께 허둥지둥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왜군들이 총칼을 휘두르는 급박한 상황에도 끝까지 어머니를 업고 가는 모습을 본 왜군 장수 사야가(沙也加)는 순간 일본에서 볼 수 없는 효를 실행하는 그를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왜군의 장수가 되었지만,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소 예의지국 조선을 동경하였는데 자기 목숨이 경각에 처했는데도 노모를 끝까지 모셔 가는 것을 생생하게 목전에서 보게 되니 무엇이 대의(大義)이며 가치 있는 삶인가 고심하며 갈등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내 사야가는 뜻을 같이하는 부하 수백 명과 함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을 통해귀순하였다. 곧바로 조선의 장수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누차 큰 공을 세워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어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 金氏)’라고 부른다. 이 사람이 바로 김충선(金忠善) 장군이고 조선 백성의 효심이 결국 세계사에도 없는 역사를 남기고 기적을 이뤄냈다. 효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더 소개하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전설로서 경주시 인왕동 남천에 ‘효불효교(孝不孝橋)’가 있었다. 이 다리의 유래를 보면 신라 시대 때 아들 7형제를 둔 한 과부가 긴긴밤이 외로워 베개를 부둥켜안기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어 봐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을 수없이 보내다가 그만 개울 건너 사는 홀아비와 눈이 맞았다. 밤마다 몰래 내를 건너가는 어머니를 본 효심 깊은 아들들이 차가운 냇물을 건너다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아들들은 조선 시대 사회 윤리에 어긋나지만, 어머니도 감정과 애환을 지닌 사람이며 한 여인이라는 갈등 끝에 내린 결정으로 어머니가 밤에 편히 물을 건넬 수 있게 돌다리를 놓아주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두고 효불효교(孝不孝橋)라 불렀는데 살아 계신 어미에게는 효이지만, 저승에 계신 아버지에게는 불효인데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60) 문경새재에 봉황(鳳凰)이 날아들다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봉황(鳳凰)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천년에 한 번 꽃피는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 정도로 고결하며, 기린·거북(현무)·용과 함께 신령스러운 네 가지 동물인 사령(四靈)의 하나로 중화 문명의 상징이며 중국의 신조(神鳥)다. 볏이 있는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고 볏이 없는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며 암수를 합해서 봉황이라 하는데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믿었다. 봉황(鳳凰)의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전체 모습은 닭과 같고 오색 문채(文彩)를 띠고 있는데 중국 후한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자전(字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악집도(樂汁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또 어떤 문헌에는 ‘머리 앞쪽은 수컷 기린, 뒤쪽은 사슴, 목은 뱀, 꽁지는 물고기로 용과 같은 비늘이 있고, 등은 귀갑(龜甲)과 같으며, 턱은 제비, 부리는 닭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용과 학이 교미하여 낳은 새라고도 하였다.이처럼 봉황의 모양을 각각 다르게 묘사하거나 설명한 것은 봉황이 전설 속 상상의 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벽사(辟邪)의 신통력을 가진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으로서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가 있다. 다시 말해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일컫는데 그중 남쪽을 수호하는 남방신(南方神)은 주작으로 곧 붉은 봉황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남쪽에 주작이 그려져 있고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을 찾을 때나 건물을 지을 때도 하나의 기준이 된다. 봉황 문양은궁궐, 사찰,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 고려청자, 민화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전통혼례식에서 봉황(닭)을 날려 보내는 등 우리 역사와 민속과 전통 속에 살아 있으며 조선 시대 때에는 성군(聖君)의 상징이기도 하였으며 청와대 와 대통령의 상징 마크가 봉황인 까닭도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 이렇듯 봉황은 우리들의 삶 가까이 있다. 문경에도 예외가 아니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는 실재하는 서울 경복궁(景福宮)과 똑같이 설계하여 지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있다. 궁궐 남쪽에 자리 잡은 광화문 위쪽 천장을 보면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이 봉황이 궁궐 밖 사악(邪惡)한 기운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어 왕손이 번성하고 종묘사직을 지키면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신령한 봉황이 문경새재에 살고(?) 있다.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봉황이 있다. 이 봉황은 실재의 봉황이 아니고 신기하게도 소나무 가지가 어울려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관광객이 우연히 발견하여 알려졌는데 연간 수백만 명이 문경새재를 찾아오지만, 대다수 관광객이 이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데 이번 기회에 이를 널리 알리고 문경새재를 방문하신 모두가 봉황의 기운을 받아 횡액(橫厄)을 물리치고 건강하고 뜻하는바 모든 것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해 본다. 이 봉황은 바로 조선 시대 신임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받던 교인처(交印處)인 교귀정(交龜亭) 앞 노송(老松)에 깃들여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우연히 시선이 가거나 아니면 어떤 계시(啓示)에 의해 이를 보게 되면 하루의 일진(日辰)이 좋은 것은 물론, 복권을 사면 당첨될 확률이 높고,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취업이나 수능 등 시험을 앞둔 사람이라면 합격하거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봉황을 보게 되면 좋은 기운이 3년까지 그 효험이 지속되어 만사(萬事)가 형통(亨通)한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문경새재를 찾아와서 한 번쯤은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 외 문경에는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나 봉황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 마성면 신현3리 봉생(鳳笙)마을 유래를 보면 먼 옛날 안동 권씨 한 분이 처음 정착하였는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나 마을 옆 동그란 야산에 있는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 묘터를 잡고 묘혈(墓穴)을 파는 중에 반석(盤石)이 하나 나왔다. 이 바위를 들어내니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된다는 생황(笙簧) 소리가 은은히 들리면서 갑자기 봉황이 날아올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전설을 듣고 마을 이름을 ‘봉생’이라 불렀다. 그런데 봉생의 한문 표기를 보면, 봉황이 난 곳이라 날 生(생) 자를 써서 봉생(鳳生)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생황 笙(생) 자를 쓴 봉생(鳳笙)으로 되어 있음은 바로 생황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훨훨 날아 조금 떨어진 산에서 울었다 하여 그 산 이름이 봉명산(鳳鳴山)이 되었다. 봉명산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것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조’에 ‘봉명산은 현의 동쪽 8리에 있다’라는 기록이다. 그리고 생황과 관련된 곳으로 문경시 가은읍 선유구곡(仙遊九曲) 제8곡 난생뢰(鸞笙瀨)가 있는데 여기가 난새(鸞鳥)가 날고 생황 소리가 울려 퍼져 곧 신선의 세계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곳이다. 통일신라 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가 자리 잡은 곳의 지세(地勢) 또한 봉황이 날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과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일주문인 봉황문(鳳皇門)이 있다. 필자가 사는 서쪽 산 바위 위에 봉황이 자주 내려앉았다고 하여 봉암리(鳳巖里)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임(初任)으로 3년간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교사)로 재직할 때 하숙집이었던 청운각 우물에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자란 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에 있는 ‘강릉최씨 열부각(江陵崔氏 烈婦閣)’의 주인공인 ‘강릉최씨’는 소녀 시절 시서(詩書)를 배우고 예절과 행실이 남달랐는데 안타깝게도 남편이 일찍 죽게 되었다. 그때 애끓는 마음으로 지은 제문 중에 ‘봉황이 함께 날아 어울려 노래를 즐겼는데 봉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아 황이 홀로 슬피 우네’라는 구절이 있다. 강릉최씨는 제문을 읊은 이후 절식, 자결하니 모두가 열부(烈婦)라고 칭송하였고 조정(朝廷)에서 그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한 정려(旌閭)를 내렸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
(59) 문경새재 산불됴심비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문경새재’에는 한글로 된 아주 특별한 비석이 하나 있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26호로 지정된 ‘조령산불됴심표석(鳥嶺산불됴심標石)’이다. 조선 시대 때 산불 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비로,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높이 157㎝, 저변 너비 75㎝, 정상 너비 55㎝, 저변 둘레 255㎝, 중간부 둘레 92㎝)을 다듬지 않고 ‘산불됴심’이라는 한글로 된 글자(각자 깊이 0.5cm로 음각)를 세로로 새겨 놓은 비석이다. 문경새재는 영남(嶺南-영남지방)이 시작되는 곳이며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낸 9개 대로 중 4, 5번 대로가 지나는 길이라 관리는 물론 통신사,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보부상 등 많은 사람이 지나는 길이기에 울창한 숲을 보호하기 위해 경고성 계도문으로 관할 조령별장이 세웠다고 본다. 특히 이곳에는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로 사용할 황장목(금강송) 산지이기 때문에 산림 보호가 더욱 필요하다고 판단되며 한글로 새긴 것은 일반 백성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산불됴심비’는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데 언제 세워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구개음화(口蓋音化) 현상으로 보았을 때 조선 영·정조(渶·正祖)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이 비의 글씨 됴심은 고어체(古語體)이고 ‘됴심’은 ‘조심’의 옛말이므로 한글 변천의 실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근현대에 이르러 한글로 된 비(碑)나 표석(表石)이 많지만, 조선 시대 때 세워진 수많은 비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한글 비석(碑石)이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에서 5기(基)밖에 없다고 한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1397년~1450년)께서 1443년(세종 25년)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하시고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였지만, 한글은 평민이나 상민(常民), 부녀자들이나 쓰는 언문(諺文-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으로 취급받아서일까? 양반이나 선비들은 특권의식과 유식함을 과시하는 듯 계속 한자를 사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비석을 세울만한 위치에 있는 사대부 다수가 한문으로 된 비문을 새겼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서울 李允濯 한글靈碑)’는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비석으로 1536년(중종 31)에 세워졌는데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가 2007년 보물 1524호로 승격됐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 142㎝, 폭 63㎝, 두께 18㎝ 규모이다. 이 비석은 국한문 혼용 비석으로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녕ᄒᆞᆫ비라거운사ᄅᆞᄆᆞᆫᄌᆡ화ᄅᆞᆯ니브리라 이ᄂᆞᆫ글모ᄅᆞᄂᆞᆫ사ᄅᆞᆷᄃᆞ려알위노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풀이하면 "영(靈)한 비(碑)라. 거운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으리라. 이는 글(한문)을 모르는 사람더러 알리노라.”라는 한글 경고문인데, 우리나라 비문으로서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인흥군 묘계비(仁興君墓界碑)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있으며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가 1686년에 이곳이 아버지인 조선 선조의 제12 왕자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1604~1651)의 묘역임을 표시함과 동시에 훼손을 막기 위해 세웠다. 비에는 전서체의 제목과 한글 및 간기(刊記) 등이 새겨져 있는데 북쪽 비면 하단에는 20자 5행으로 "이비가극히녕검니심도사람이거오디말라”라고 쓰여 있는데, "이 비가 극히 영검하니(영묘한 위력이 있으니) 생심(生心)(어떠한 생각으로이라도) 사람이 거오(倨傲)(거만스럽게 낮추어 보지)하지 말라”라는 경고성 한글 고어가 새겨져 있다. 경남 진주시 비봉산(飛鳳山) 자락에 있는 의곡사(義谷寺) 주차장 오른쪽에는 18세기 중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6호로 지정된 ‘진주 의곡사 한글비석(晋州 義谷寺 한글碑石)’이 있다. 이 한글 비석은 전면에는 중앙에 ‘(南)無阿彌陀佛 塔’이라 새겨져 있고, 좌측에 이보다 좀 작은 글씨로 ‘父母生天目連經’이라 한자로 새겨져 있으며, 우측에 대칭이 되도록 이 한자의 음을 한글로 "부묘ᄉᆡᆼ쳔목연경”이라 새겼다. 그리고 유일하게 해외에 있는 한글비는 1624년 일본 지바현 다테야마(館山)시에 있는 불교사찰 다이간인(大巖院)에 세워진‘사면석탑’이다. 동서남북 네 면에는 각각 한글과 중국의 전서체 한자, 일본식 한자, 산스크리트어로 각각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특이한 것은 음가가 없는 'ㅇ' 받침을 써넣은 것이다. 이는 ‘동국정운식’ 표기로 훈민정음 창제 초기부터 16세기까지만 사용된 표기법으로 새겨진 한글 비석이다. 그런데 왜 400여 년 전 일본 사찰에 ‘한글 비석'을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다테야마 지역의 향토 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숨진 조선인들의 혼을 위령하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한글을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하며 당시 다이간인의 주지 오요(雄譽)가 일본과 조선 사이에 일어난 비극적인 전쟁인 임진왜란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와 신뢰 회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비를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글 비석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현존하는 5기의 한글 비석 중에 문경의 ‘산불됴심비’만이 순수 한글로만 비문이 새겨져 있고, 그 외 네 곳의 비는 한글과 한문이 혼용된 비석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 하나 ‘문경시’만이 보유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자연보호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 한글비, ‘산불됴심비’의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해 이 기회를 빌려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대한민국 보물이나 국보로 승격을 추진한다. 둘째, ‘산불됴심비’를 다양한 이미지로 브랜드화한다. 셋째, ‘산불됴심체 글꼴’을 만들어 전 국민이 사용케 한다. 넷째, ‘산불됴심비’를 다양하게 형상화한 상품을 만들어 문경특산물로 만든다. 다섯째, 문경새재 입구나 국도변에 초대형 ‘산불됴심비’를 세워 문경의 상징물로 한다.
-
(58) 신통방통 지명 이야기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지명(地名)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낸 어떤 고장이나 장소, 즉 마을이나 지방, 산천, 지역 따위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지명을 언제 누가 지어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다수 지명은그 고장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산, 강, 고개, 들, 골짜기 등과 같은 땅의 모양과 위치, 특성을 나타내거나 역사, 전설, 설화 등에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 마을은 ‘양짓마’나 양촌리로, 서당이나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동이나 향교리, 효자가 난 마을은 효자동,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은 장승배기, 배가 드나든다고 뱃나들 등과 같다.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예언이 함축되어 있고 앞날을 예견하는 지명이 있어 수백 년 아주 먼 후일 그 지명이 뜻하는 바대로 실현되는 곳이 많으며, 사람의 이름에도 길흉이 있고 이름이 주는 의미가 그 사람의 삶과 일치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경북 울진 온정리와 같이 따뜻할 온(溫) 자가 들어간 지명이 있는 곳에서 온천(溫泉)이 개발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먼저 사람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면‘성명의 좋고 나쁨이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짓거나 풀이하는 점술을 철학에 빗대어 이르는 말’로 성명학(姓名學)이 있다. 사람의 성명은 물론 상호, 회사명, 단체명, 지명 등의 이름에도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존재한다고 믿고 우주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해로운 이름은 피하고 이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가(作名家)를 찾아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 앓고 3일째 죽는 것) 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이름 짓기를 원하며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다가 더 좋은 뜻과 운기(運氣)가 있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하는 사람도 있다. ‘안득기’라는 학생이 있었다. 공부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너 이름 뭐꼬?” 하니 " 안득깁니다”하니 "뭐 안드낀다꼬” 학생은 자기 이름을 말했는데 선생님은 ‘안 들린다’라고 장난치듯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 성이 나서 혼을 냈다는 것인데 이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야기다. 그리고 ‘노상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더니 노상 술을 마셨다는 사람이 있었고 ‘오미자’란 이름을 가진 여성분이 ‘문경오미자축제’에 오셨다가 오미자란 이름을 가진 덕분에 오미자 선물을 받아 가기도 하고 ‘김말자’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성분께서는 어린 시절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부모를 원망하며 부끄러워했는데 나중에 결혼하고 ‘김밥집’을 내었는데 운명인 듯 김말자 이름대로 김을 말아 판매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되고 난 뒤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에게 감사했다는 등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로 옛날부터 전해오길 ‘월악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날이 오리라' 했다는데 충주댐이 들어서서 예언대로 월악산이 호숫물에 비쳤고, 충주댐이 들어선 곳의 옛 지명이 ‘물막이골’이라 했는데 물 막는 댐이 생겼으니 놀랍고, 1992년에 기공식을 개최하고 청주공항이 들어설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이 활주로 양쪽 끝 마을 이름이 각각 비상리(飛上里)와 비하리(飛下里)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방향에 비상리(飛上里-청원군 내수읍)가 있고, 비행기가 착륙하는 방향에 비하리(飛下里-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가 있고, 관제탑이 들어선 자리에는 관제리(管制理)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니 마치 이 지역 조상들께서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설 것을 예견하는 선견지명이 있으신 듯 신기롭고 신통스럽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에 ‘하품리(下品里)’라는 마을이 있다. 하품리는 조선 시대 때 정승이 세 분이나 살았던 곳이라‘품실(品室)’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분동(分洞) 되면서 위쪽은 상품리(上品里), 아래쪽은 하품리(下品里)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농촌 지역이라 농산물을 생산하여 출하(出荷)하면서 산지(產地)를 표시하는데 ‘하품(下品)’이라 하니 아무리 우수한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해도 질 낮은 하품(下品) 취급을 받는 듯한 어감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졸릴 때 하는 나오는 ‘하품’한다는 느낌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 2005년 주민들이 행정기관에‘정품리(正品里)’로 개명을 요구하였는데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13년 9월 명품리(明品里)로 변경되었다. 경북 문경시 동로면에는 ‘수평리(水坪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수평리는 예로부터 ‘넓은 들판에 물이 차서 수면이 평평하게 된다’는 풍설(風說)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1986년 12월에 준공한 경천댐이 생겨 옛사람들이 예견한 수평(水坪)이란 이름 그대로 ‘물이 평평한 마을’이 되었다. 경천댐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인 황장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상류인 금천을 막아서 만든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로 물이 맑으며 수심이 깊고 넓은 호수다. 호수 위쪽에 있는 ‘천주봉(天柱峰)’과 주변의 산과 나무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각각 특색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치면 그 수려한 풍경이 일품이다. 그리고 연못에서 용이 승천한 마을, 또는 큰 못에서 용이 나타나 뒷산으로 올라가 마을을 지킨다는 ‘용연리(龍淵里)’가 문경읍에 있다. 여기에 2014년에 준공된 문경댐이 생겼다. 그리고 용연리에 인접한 곳에 평천리(平川里)가 있고 수평동(水平洞)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는데 이 또한 신비스럽게도 이름에 걸맞고 지명이 예견한 대로 용이 살다 승천하는 큰물이 모인 댐이 생긴 것이다. 이렇듯 재미있는 이름 이야기와 우연인 듯 아닌 듯 앞날을 예견하는 ‘신통방통 지명 이야기’를 마친다. 구름나무/ 이만유 경천호에 천주봉 비치면 한 그루 구름나무에 물을 준다 하루 잠시 스치면 두둥실 하늘 닿는 마음을 삼류 로맨스로 전락시키기 싫어 탈 쓴 주인공이 되었다 어느 날 바람 스쳐 지나고 휑하니 텅 빈 그 자리에 그리움은 목이 긴 한 마리 학이 되었다 한줄기 불씨 봄눈 녹듯 사라지고 노을 지는 어스름 길에 호수 위 떠 오르는 별을 마중한다
-
(57) 일심각(一心閣) 윤 씨 열녀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지금은 모든 관습이나 가치관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고 특히 MZ세대에게는 열녀(烈女)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생소하고 가당치 않다고 하겠으나 유학(儒學)을 국가통치이념으로 하고 생활 규범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는 달랐다. 국가(왕)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충효사상(忠孝思想)과 여자들을 속박하고 가학(加虐)하는 굴레였던 여필종부(女必從夫-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름), 불경이부(不更二夫-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함.), 일부종사(一夫從事-한 남편만을 섬김)라는 말이 그 시대 덕목(德目)이었으며 절대 가치였다. 열녀란 절개가 굳은 여자,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을 말한다. 이를 실행한 여인은 정려(旌閭)라고 해서 나라에서 충신, 효자와 같이 마을 입구나 대문 앞에 붉은색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수절(守節)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는 열녀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봉건적 발상이었다. 세종과 성종 때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글과 그림을 넣어 만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발간하여 모든 백성이 이를 본받도록 하였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 마을 앞 길가에‘열녀 윤씨 일심각’이 있다. 일심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원래 비석의 글자가 풍우(風雨)에 마멸되자 1973년에 문경읍에서 새로 비석을 만들어 보호각 안에 함께 세웠다. 열녀(烈女) 윤 소사(尹 召史, 소사는 과부(寡婦)를 점잖게 일컫는 말)는인조 14년(1636)에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병자호란 때 보병으로 참전했던 정병(正兵) 조막룡(趙莫龍)의 처로 불행하게도 남편이 쌍령(雙嶺)전투에서 전사하자 애통한 마음으로 복(服)을 입고 삼년상을 치르고 계속 소복 차림으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슬픔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를 본 부모님이 청상(靑孀)이 되어 한평생을 외롭게 지낼 딸이 너무나 애처로워 여러 차례 재가(再嫁)를 권하자 불경이부(不更二夫)인데 어찌 다시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얼마 뒤인‘順治十一年 八月(효종 5년 1654년)'에일부종사로 정절을 지킨 윤 소사(召史)를 표창하려고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일심각 열녀 비석에 얽힌 또 다른 내용의 전설이 있다. 조선 시대 문경 하초리, 지금 일심각이 있는 자리에 살림이 넉넉하고 금실 좋은 신혼부부가 살았다. 부인의 미색 또한 천하일색이라 모두 부러워하였다. 그 집 아래 가난한 노총각 친구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랫집 남자가 윗집 남자에게 주흘산에 약초를 캐러 가자고 했다. 이 두 사람은 깊숙한 산속 계곡으로 가게 되었는데, 재물과 여자에 탐이 난 아랫집 남자는 친구인 윗집 남자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를 산삼이 나는 곳이라며 바위 밑 경사진 곳으로 유인하고 바위를 굴려 눌러 죽였다. 그때 붉은 피가 용솟음치듯 솟아나며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산에서 내려와 태연스레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아내는 아랫집 남자를 찾아가 남편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아랫집 남자는 가기는 같이 갔었으나 올 때 찾으니 먼저 내려갔는지 없더라고 대답하였다. 아내는 며칠 몇 달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소식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해가 바뀌고 이젠 체념 속에서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만 아랫집 남자의 계략(計略)에 넘어가 그와 같이 살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이들은 아이 셋을 낳게 되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전 남편을 잊지 못했으나 어쩔 수 없이 새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소낙비가 몹시도 내리는 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던 남자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싱긋이 웃었다. 이상히 여긴 부인이 그 이유를 묻자 남자는 계속 웃기만 했다. 부인이 계속 왜 웃느냐고 다그쳐 물으니까 이제는 옛일이고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어찌하겠어! 하는 마음에 옛날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처마 밑으로 빗물이 떨어져 흐르는 것을 보니 그때 그 산속에서 당신 전 남편을 바위로 눌러 죽였을 때 붉은 피가 흘러내리던 것과 같네” 하며 죄책감도 없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깜짝 놀라며 지금껏 이 남자와 산 것이 불륜(不倫)한 생활이고, 이 사악한 남자에게 속은 것에 분노하며 억울하게 죽은 전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남자뿐만 아니라 낳은 자식들도 악의 피를 받은 아이들이라 생각하여 부엌에서 식칼을 가지고 나와 남자와 아들 셋을 모두 죽였다. 그런 연후에 비참하게 죽은 남편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자기도 자살하여 기구한 생을 마쳤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나라에서 열녀비를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열녀 윤씨가 묻힌 ‘소밭등’이라는 곳이 있으며, 남편이 죽었다는‘응기뜽’이라는 곳도 주흘산 안에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마을 어르신에게 들은 이야기로 1973년 문경새재로 가는 도로를 확장 포장할 때 이 비석을 하초리 마을 안쪽으로 옮겨 놓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을에 갑자기 멀쩡했던 사람이 아프거나 죽고 외지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사고와 우환이 연이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하나둘 모여서 수군대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윤씨 열녀비를 옮겨서 동티가 난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 다시 제자리에 모셔 세우기로 하고, 1988년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제사를 지냈더니 그 이후부터 거짓말처럼 사고나 우환이 사라지고 마을이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필자가 이를 전해주신 어르신에게 "열녀 윤 소사께서는 아직도 전사했다는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믿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마을 안쪽이 아닌 동구 앞 길가에서 기다리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해야 하는데 길에서 떨어진 곳에 자기를 가져다 두니 화가 나서 동티를 부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 이후 이 내용을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하여 해설하였음.
-
(56) 우리 마을 녹색길 지킴이이만유/전 우리마을녹색길지킴이단 단장 길은 문화와 역사, 우리의 삶이 담겨있는 그릇이다. 잠시 멈추고 뒤돌아볼 틈도 없이 빠르게 직선으로만 내달리는 현대인들이 자연 속에서 ‘느리게 걷기’를 통해 사색하고, 소통하고, 새로운 삶의 가치와 지혜를 깨닫는 공간이 바로 길이다. 천천히 걸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깊이 생각하고 안 보이던 것을 볼 수 있으며 사색의 심도가 깊어질 수 있다. 길은 느림과 곡선의 미학 속에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이런 길의 효용성을 높이고자 우리 지역의 역사‧문화와 아름다운 자연이어우러진 친환경적 보행자 중심의 길, 누구나 찾아오면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명품길을 만들고 지키고 운영하기 위해 2011년 문경시가 안전행정부 시행 ‘우리 마을 녹색길’ 공모사업에 선발되었다.국‧도비를 포함 10억 원의 예산으로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5.0km의 ‘선유동천(仙遊洞天)나들길’을 조성하였다. 이를 이어 2012년2년 연속 공모사업에 선발되는 성과를 올려 8억 원의 사업비로 4.4km의 ‘체험길 조성사업’을 완료하였고 2013년 2억 원 예산으로 ‘선유동천 나들길 경관 조성사업’을 실시하여 안전 펜스, 목교, 안내간판 등을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총사업비 20억을 투입하여 명품길 ‘선유동천 나들길’이 완성되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통상적으로 행정기관에서는 사업연도에 편성된 예산을 집행하여 길을 내고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면 그것으로 사업 완료라고 생각하고 그 길과 시설을 활용하여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을 운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기반 시설인 하드웨어만 있고 사업추진 주목적이 되는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관광 분야 민간자원을 활용하겠다며 시민들로 구성하는 ‘우리 마을 녹색길 지킴이단’을 조직 운영하기로 하였다면서 녹색길 관할 지역 행정기관인 가은읍에서 필자에게 협조 요청을 해왔기에 쾌히 응하였다. 이 길은 여러 가지 ‘녹색길’ 유형 중에‘수변공간 활용형’으로조선 선비들의 이상향이요, ‘유학의 꽃’이라는 구곡원림 중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선유칠곡’과 ‘선유구곡’ 일원을 대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녹색길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 서로 소통하고 더 많은 지역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공동체 활성화도기대한다는 사업추진 목적에 부합되며 이 녹색길이 후백제 견훤대왕 유적지, 아자개장터, 문경새재자전거길, 석탄박물관, 운강이강년기념관, 봉암사, 대야산, 희양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보아 이 모든 것이 실현되길 바라면서 2013년 6월 지역주민 21명의 단원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마을녹색길지킴이단(단장 : 이만유)’을 창립하고 녹색길 정화, 관광객 안내해설, 시설 및 동향 모니터, 행사 참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활동영역 확대와 효율성 증대를 위해 ‘우리마을녹색길지킴이단’과 ‘문경구곡원림보존회’의 통합운용이 필요하다는 중론에 의해 2014년 6월 30일 ‘선유동천 나들길’ 지킴이 활동을 마치고 현지에서 통합발대식을 하였다. 통합 전에는 녹색길 정화와 소규모 안내해설 위주로 활동하였는데 통합 이후 관내 외 문화단체, 사회단체 등에서 시행하는 규모가 큰 사업에 참여하였다. 예를 들면 ‘문경문화원’에서 문경새재에서만 개최하던 ‘달빛사랑여행’을 녹색길로 장소를 변경 추진하자고 건의하여 2014년 7월 12일 전국에서 오신 관광객 250여 명이 참여한 ‘선유동천나들길달빛사랑여행’을 실시할 때 단원 10명이 안내해설을 전담하였다. 그 외 경북교육청 소속 교육공무원 해설, 문경문인협회 해설, 시민과 함께하는 구곡탐방 해설, ‘세계유교문화재단’ 주관 ‘선유구곡 라디엔티어링’ 해설을 하기 위해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을 처음 찾아오신 관광객들이 ‘대한민국에 이런 비경이 숨어 있었다니!!!’하고 감탄하는 ‘선유동천 나들길’이 전국 최고의 숲길로 선정됐다. 산림청이 실시한 ‘2018 숲길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울진군 금강소나무숲길’ 등 전국 25개 유명 숲길 중 ‘문경 선유동천 나들길’이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듯이 명실공히‘선유동천 나들길’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길’이다. 세심대에서/ 이만유 세심대 맑은 물이 마음을 씻어준다 노을처럼 타는 단풍 마지막은 모두 붉다 망각의 바람에 날린 붉은 마음 한 가닥 사랑도 인생사도 바람이고 구름인걸 연초록 봄날 희망 푸르렀든 여름 열정 세심대 흐르는 물에 미련 없이 보내리
-
(55) 조선의 명당 ‘연주패옥(連珠佩玉)’과 ‘말무덤’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신라 말 도선비기(道詵秘記)로 유명한 도선(道詵)에 의해 비롯되어 고려 때 크게 유행하였으며 지형(地形)이나 방위(方位),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하여 집터나 묏자리를 구하는 이론이다. 근래에 와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초로 한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예부터 명당(明堂)의 유형은 다양하다. 우리가 자주 들을 수 있는 명당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천계(天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보통 닭이 20여 개의 알을 품으므로 이 지형의 소응(昭應)은 받게 되면 대대로 많은 자손을 둘 수 있어 집안이 번성하고, 무리를 이끄는 위대한 호걸이 난다는 명당이 있고,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은 선녀가 금(琴)을 타고 춤추고 노래한다는 땅으로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고 부자가 되며 과거급제 등 집안에 경사가 많이 생겨 잔치를 자주 연다는 명당이다.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은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승천하듯이 쌍용이 구슬을 가지고 희롱하니 후손들이 곧 등용되어 대관(大官)이 날 수 있는 곳이다. 그 외 자손이 모두 원만하고 고귀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연화부수형(蓮華浮水形), 박정희 대통령을 탄생시킨 금오산(金烏山) 제왕지지(帝王之地)인 삼족오(三足烏)의 기운을 받은 금오탁시형(金烏啄屍形)등이 있다. 풍수상 절대 집(양택-陽宅)을 지어서는 안 되는 3가지 집터로 살풍(殺風)을 맞을 수 있는 계곡, 삼각형 모양의 땅, 날카로운 칼날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충(冲) 받는 위치’는 피해야 한다고 풍수 전문가 최우식 교수는 말했다. 우리나라 대통령 관저였던 청와대(靑瓦臺) 터는 서울의 천원(天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악산의 강한 살기가 압도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지 않은 흉지(凶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청와대 살았던 역대 대통령 누구도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학자들은 경복궁은 사람이 사는 땅이고 청와대는 죽은 자의 땅이라며 거기에 살면 불운하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 8대 명당(明堂) 중 하나라는 대명당 연주패옥형(連珠佩玉形) 묫자리가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 있다. 이 명당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대감과 두사충(杜師忠)과의 인연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국 명나라 원정군사령관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을 수행한 풍수 전략가 두사충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의 패전 책임을 지게 되어 참수(斬首)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예천 출신 약포 정탁 대감의 구명(救命)으로 살게 되었다. 두사충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후지지(身後之地-생전에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잡아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 연주패옥 명당 묘터이다. 약포 정탁 대감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이 전략상 불가피하게 조정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죄로 파직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국문(鞫問)으로 반죽음 상태에서 곧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대감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순신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을 선조에게 보내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목숨을 건 정탁 대감의 직언(直言)이 이순신을 살리고 이순신은 군사 120여 명과 병선 12척뿐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여 대승한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했다. 그런 정탁 대감에게 두사충이 잡아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명당은 선녀인 옥녀가 화장하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옥구슬을 꿰어 목에 걸고 있는 형세(形勢)로 옥관자(玉寬子) 서 말, 금관자(金寬子) 서 말이 나온다는 곳이라고 한다. 즉 옥관자(玉寬子)는 조선의 왕과 왕족, 당상관인 벼슬아치가 쓰던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이고 금관자(金貫子) 금으로 만든 관자로 정이품, 종이품의 벼슬아치가 달았는데 이런 관자를 각각 서 말을 지녀 자자손손 수없이 많은 관리를 배출하고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놀랍고 아주 특별한 명당이다. 이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명당이 있는 곳에 말무덤(馬塚-마총)이 하나 있다. 무송대(舞松臺)라는 큰 바위 옆에 노송 한 그루가 있고 거기에 말무덤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두사충이 조선 땅을 모두 살펴보고 백두산 정기를 머금고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이곳에 조선의 팔대 명당(八大 名堂)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명당을 찾아내어 자기 목숨을 구해준 약포 대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대감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해주었다는데 대감과 가족이 한양에 있는 관계로 대감의 구종(驅從-관원을 모시고 다니던 하인)에게 묘터를 알려 주게 되었다. 그 후 정탁 대감이 낙향하여 자기 아들에게 두사충이 정해준 묫자리를 찾아 정확한 위치를 알아두라 하여 아들은 구종과 함께 이 무송대에 이르러 "그 명당이 어디냐?" 하고 묻자 "예, 여기서 백보지내(百步之內)에...”하며 손을 들어 위치를 가리키며 말하고자 하는데 갑자기 말이 미친 듯이 날뛰며 뒷발질하여 구종이 즉사하게 되었다. 아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하고 화가 치밀어 단칼에 말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하여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 진혈(眞穴)은 세상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이 영원히 시간 속에 묻혀 버렸다. 이후 전국 지관(地官)들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명당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싸여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풍수가 진혈이라고 판단되는 곳을 매수하여 소유하고 있는데 모 그룹 재벌이 20억 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200억 원을 달라고 해서 매매가 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오늘날에도 연주패옥혈 명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고, 지금까지 진혈(眞穴)을 찾지 못한 채 말무덤 사방 백 보 안에 알게 모르게 묘를 쓰고 있다고 한다. 어느 유명 풍수지리학자께서는 여기는 백두대간의 모든 氣기 이곳에 응취(凝聚), 응결(凝結)되었기에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기가 강해서 일반인이 여기에 묘를 쓰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도 있고 비보(裨補) 또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정탁 대감집 말(馬)이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천기누설(天機漏洩)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주인인 정탁 대감 가문(家門)의 멸문(滅門)을 막기 위해 구종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는 설과 구종이 자기 선대를 모시려는 욕심으로 딴 곳을 가리키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전설의 명당 / 이만유 문경 동로 갈밭골에 연주패옥(連珠佩玉) 천하 명당 두사충이 은혜 갚은 약포 대감 신후지지(身後之地) 외롭게 전설을 품고 누워있는 말무덤 백두산 정기 서린 조선 땅 최고 명혈 천기누설(天機漏洩) 막음인가 말 뒷발질에 사라졌네 무송대 육백 년 노송 너는 알리 진혈(眞穴)을
-
(54)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성황신(城隍神)은 민속신앙에서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성황당(城隍堂)은 성황신을 모신 당(堂)으로 지역에 따라 서낭당, 서낭신이라 불린다. 국어사전에는 서낭당과 서낭신의 원말이 성황당, 성황신이라 한다. 통상적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라고 하지만, 일부 민속학자는 성황당은 마을 전체가 치성을 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마을 뒤편에 당집을 지어 신을 모시는 봉안처(奉安處)이고, 서낭당은 마을사람과 불특정 행인들이 소원을 비는 곳으로 고갯마루나 마을 어귀 또는 길섶에 돌무더기, 노거수(신목). 등을 신격화하거나 신이 머물러 있는 곳(거소, 居所)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필자도 해설이나 강의 시 오래전부터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귀신(鬼神) 중에는 불러들이는 귀신과 쫓아내는 귀신이 있는데 대체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은 원귀, 악귀, 수살귀(水殺鬼), 달걀귀신 등으로 귀(鬼)로 부르고. 잘 되게 하고 이롭게 하는 좋은 귀신은 성주신(城主神), 조왕신(竈王神), 성황신 등으로 신(神)이라고 부른다. 성황신은 횡액(橫厄)을 막아주고 사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당연히 좋은 신이다. 성황당은 지역, 장소, 형태, 성별, 노소 등에 따라 천황당ㆍ국사당, 골맥이, 할미당, 할배당, 각시서낭, 애기서낭, 배(船)서낭, 돌서낭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한 분만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녀 신을 함께 모시는 곳도 있다. 국사당(國師堂)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 도성의 수호신(守護神祠)으로 북악산과 남산에 신사(神祠)을 짓고 무신도(巫神圖)를 모셨으며 특히 남산 신사를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 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으나 후에는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금지됨에 따라 점차 무속화(巫俗化)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비는 민간 신앙으로 정착하여 일반 백성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경북 문경에는 역사가 오래된 옛길 문경새재 제 1관문 주흘관 성벽 뒤에 ‘문경새재 성황당’이 있다. 여기에 모셔져 있는 여신(女神)은 얼마나 영험한지 ‘나라를 구한 성황신’이다. 성황당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제 1관문의 축성과 비슷한 시기인 1700년경에 건립하고, 1844년 중수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성황당이다. 이곳은 주흘산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라고 하는데 큰 회화나무에 오색천이 둘려있고 항상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울고 있으며 당집 주변에는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어 더욱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 이게 무슨 말일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큰 공을 세운 최명길(1586~1647)과 문경새재 성황신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최명길이 소년 시절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중에 문경새재에 이르러 깊은 산속을 혼자 걷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진 뒤를 보니 웬 젊고 자색이 아리따운 여인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뒤 여인이 재빨리 최명길을 앞질러 가는데 뒤태 또한 아름다워 젊은 혈기에 여인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하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만 여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하자 최명길이 잡아주면서 동행하게 되었다. 길을 가면서 대화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 최명길은 호랑이와 산적이 많은 문경새재, 이 험한 길을 여인이 혼자 걷는다? 혹시나 내 간을 빼내 갈려는 천년 묵은 여우가 변한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 듯 스치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경계하자 이 여인이 눈치를 채고 방긋 웃으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오라 새재 성황신입니다”라고 하였다. 당황하였지만, "지금 어디를 가십니까” 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한양에 갔다 오던 길에 성황당에 걸려 있는 비단 치마를 보고 예쁜 자기 딸이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얼른 옷소매 속에 치마를 훔쳐 넣고 가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그 괘씸한 좌수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최명길은 그 말에 매우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어찌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며 조심스럽게 "죽이지는 말고 잘못에 대한 벌을 주거나 가져간 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두도록 하겠으니 노함을 거두시고 살려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명길은 급히 안동으로 가서 외숙에게 인사만 드리고 서둘러 그 좌수의 집을 물어 찾아가니 집안에서 곡소리가 크게 들리고 좌수의 딸이 영문도 모르게 급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좌수에게 제가 죽은 따님을 살려 보겠다고 말하고 딸이 있는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열고 안을 보니 문경새재에서 보았던 그 여인(성황신)이 누워있는 좌수 딸의 목을 막 누르고 있었다. 보기에는 죽은 것 같지만 아직은 영혼이 이승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최명길이 성황신에게 큰절을 올리고 부디 살려주기를 간청하니 "내 그대의 정성에 감탄하여 청을 들어 주겠소” 하며 이러이러한 일을 하도록 하였다. "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고 나와 성황신이 일러준 대로 좌수에게 말하길 "모월 모시에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비단 치마를 가져온 적이 있지요” 하고 물으니 좌수가 놀라며 "그건 저만 아는 일인데 어찌 그것을 아시오” 하며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소년 최명길은 의젓하게 위엄을 갖추고 "그것 때문에 성황신이 노하시어 딸을 죽이게 되었소. 백배사죄하고 당장 가져온 비단 치마를 불사르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제사 지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좌수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거짓말처럼 죽은 딸이 다시 회생하였다. 며칠을 쉬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성황신이 최명길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새재 입구에서 "이제 오십니까” 하며 웃으면서 맞으며 "후일 그대는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며 그때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큰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전쟁이 나면 절대 맞서 싸우지 말고 화친해야만, 종묘사직을 지키고 백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꼭 명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명길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에 정말로 문경새재 성황신의 예언대로 최명길은 과거에 급제하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점차 올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고, 병자호란을 당하였을 때 조정대신 모두가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데, 오로지 홀로 어려움을 감내하며 성황신의 계시를 따라 주화론(主和論)을 펴 국난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훗날 역사는 최명길의 화친(和親) 주장이 현명했고 결국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소년 시절 최명길과 문경새재 성황신과의 만남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쨌든 성황신의 예언과 계시가 나라를 구하게 된 것이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인 ‘문경새재 성황신’은 그 신통력이나 영험함이 특별하여 예전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장원급제를 바라고, 보부상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소원을 빌었으며 지금도 사시사철 전국의 많은 무속인은 물론이고 일반인 찾아오는 기도처가 되었다. 특히 신내림굿이나 기존 무속인들의 신통력이 떨어질 때는 기를 받아 이를 복원하기 위해 찾아온다. 시쳇말로 신통력의 업데이트, 기(氣)의 충전소라고 할 수 있다.
-
(53) 역사를 바꾼 토끼 이야기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2023년 계묘년(癸卯年)은 ‘검은 토끼의 해’다. 육십 간지의 40번째로 계(癸)는 흑색, 묘(卯)는 토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토끼는 온순하고 지혜롭고 꾀가 많아 예로부터 매우 신성한 동물로 여겨 왔고 강한 번식력으로 다산의 상징이며 만물의 성장과 번창, 풍요를 의미하며 만화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고 사랑스러운동물이다. 토끼와 관련된 고사 중에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과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교토삼굴(狡兎三窟)’이란 말이 있다. ‘교활(狡猾)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라는 뜻인데 이는 토끼가 천적(天敵)이 나타났을 때나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도망갈 굴을 3개 준비해 둔다는 것으로 사람도 어려움이나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미리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 놓아야 한다는 지혜를 일컫는 말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만일을 대비한 ‘플랜 B’‘플랜 C’를 만들어 두라는 말과 같다. 다만 나쁜 짓, 비난받을 짓, 부끄러운 짓을 하고 비겁하게 남을 속이면서 숨고 피할 굴이 아닌 국익을 위하는 것과 국민이 고난과 고통을 받을 때 그 위기를 대처하고 탈출하기 위한 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굴로써 교토삼굴의 지혜가 필요하다. 지난 2011년 신묘년(辛卯年) 토끼해를 맞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우리나라 154만여 개의 지명 중에서 토끼와 관련된 지명이 158개라고 밝힌 바가 있다. 그중에 경북이 17개인데 상주시 함창읍의 ‘토끼골’, 안동시 남선면 원림리의 ‘중토갓’, 봉화군 재산면 상리의 ‘묘골’ 등과 함께 문경시 농암면에 ‘토끼밭골’이란 지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경의 ‘토끼비리’는 빠져 있다. 토끼비리는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고모산성, 석현성과 이어져 있다. 이곳은 중요한 군사요충지이며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옛길의 백미’, ‘한국의 차마고도’라고 불리는 곳이다. 길이 문화재가 되면서 국내 처음으로 ‘명승 제31호’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관갑천(串岬遷)’, ‘토천(兎遷)’이라고도 하며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갑천은 용연(龍淵)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가 구불구불 6∼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정(南征) 시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 사투리로서 낭떠러지 아래에 강이 흐르거나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벼랑과는 구별된다. 어떤 관광객은 ‘토끼비리’라고 하니까 ‘토끼가 무슨 비리(非理)를 저질렀나?’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 길은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관도(官道)인 ‘계립령(鷄立嶺-하늘재)’과 연결된 길로 개통된 이후 1,8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과 말발굽이 밟고 지나가면서 바위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비가 오고 난 후에는 거울처럼 얼굴이 비칠 정도이다. 토끼는 지혜롭고 신성한 동물이라 했다. 만약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가는 길에 문경 토끼가 없었다면 그리고 토끼가 길을 인도하지 않았다면 ‘고려’라는 나라는 있을 수가 없다. 길을 찾아 헤매다 지친 상태에서 후백제 왕 견훤의 공격을 받아 전쟁에 패하거나 죽었다면 후삼국 통일은 물론 고려를 건국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를 이은 조선도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한다. 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된 표현일까? 어쨌든 태조왕건은 시각을 다투는 전시(戰時)에 문경 토끼의 도움을 받아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고, 927년 1월에 후백제 땅인 용주(龍州-현 경북 예천군 용궁)를 3월에는 문경 산양에 있는 근품성(近品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며 927년 11월 대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벌어졌던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929년 12월에 개전하여 930년 1월에 승리한 고창전투(古昌戰鬪-고창은 현 경북 안동)를 시점으로 전세를 호전시켜 승기(勝機)를 잡고 후삼국 통일과 고려를 건국하는 대업을 이룩했다. 결론적으로 태조왕건이 대업(大業)을 이룩하는 데 있어 1등 공신은 ‘문경 토끼’이다. 후삼국 세 영웅 궁예, 견훤, 왕건 중에 태조왕건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한 토끼비리 ‘문경 토끼’는 그 또한 ‘역사를 바꾼 주인공’이다. 토끼비리 낙엽/ 이만유 그냥은 아쉬워 나그네 발길에 밟힐지라도 가을 오후 햇볕 따스한 옛길에 누워 긴 세월 남겨진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그림자 드리운 푸른 바윗길에 한 점 붉음을 수놓고 그렇게 떠나고 싶다 고구려 보장왕을 만나려고 김춘추가 지나고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경순왕이 지나고 천년왕국이 무너진 망국의 한을 품은 채 마의태자가 지나고 고모산성 신라 병사들의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태조 왕건이 길을 잃고 헤매다 토끼의 도움을 받고 왜군의 꽹과리, 징 소리 북소리가 들리고 비분강개한 이강년의 분노가 스며있고 과거 보러 가는 가난한 선비 이야기가 있고 돌고개 넘는 보부상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젊은 선비와 처녀의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가 있고 신라 병사와 국군이 나란히 누워있고 성황당 앞 눈물 가득 외로운 여인이 서 있고 한 무리 건장한 사내들이 지나고 깔깔대는 아이들이 지나고 한줄기 북풍이 불면 천 길 벼루 아래로 떨어져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배를 타고 푸르렀던 아름다운 시절과 폭풍우 치든 날의 두려운 시간을 지나 이제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옛길에 누워 긴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한 생애 찰나의 삶일지라도 감사하며 바람과 함께했던 그날들 그리움 가득 안고 떠나련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
-
(52)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을 지켜주는 영산(靈山), ‘우두머리 의연한 산’이라고 해서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도읍지(都邑地) 또는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으로 나라나 고을의 난리(亂離)를 평정(平定)하거나 나지 못하게 지켜주는 주산(主山)을 말한다. 주흘산 유래 중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와 있을 때 이 산에 머물렀다고 해서 왕이 머문 산이란 뜻으로 임금 주(主)자를 붙여 주흘산(主屹山)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2002년 UN이 ‘세계 산의 해’ 지정을 계기로 산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2002년 10월 산림청에서 ‘대한민국의 산의 날’을 10월 18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선정·공표한바 있다. 산자수명한 문경에는 조선 시대 황장목(금강송)을 보호하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인 황장산(黃腸山 1,077m)과 문경의 진산 주흘산(主屹山 영봉-1,106m, 주봉-1,076m, 관봉-1,039m), 백두대간의 단전이라는 희양산(曦陽山 998m),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한 듯하다는 대야산(931m) 이렇게 4개의 명산이 있다. ‘백두대간 중심의 고장’ 문경답게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명산을 보유하고 있다. 주흘산이란 이름은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주흘(主屹)’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고 ‘고려사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흘산은 현 북쪽에 있고, 나라에서 매년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소사(小祀)를 지낸다고 하였다. 주흘산 소사를 지내는 곳은 문경읍 상리에 있는 ‘상리신당(上里神堂)’이며 신당 안에는 ‘성황지신(城隍之神)’과 ‘토지지신(土地之神)’ 이란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 나라에서 지내는 제향(祭享-제사의 높임말)은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었는데, 대사는 종묘와 사직에서 지내는 제사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사는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선농단(先農壇) 제사, 산천·성황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신성한 큰 산과 바다와 강인 악해독(嶽海瀆),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잠신(蠶神)에 제사 지내는 선잠(先蠶),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우사(雩祀) 등에 대한 제사이다. 소사는 명산대천(名山大川), 농업신(農業神)인 영성(靈星), 얼음을 관장하는 신인 사한(司寒), 말을 지켜주는 신인 마조(馬祖)‧마사(馬社)‧선목(先牧), 말에게 재해(災害)를 끼친다는 귀신(鬼神)인 마보(馬步),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둑에 지내던 제사인 둑제(纛祭) 등이 있었다. 그중 주흘산과 관계되는 제사는 유명한 산과 강에 지내는 명산대천(名山大川) 제사로서 전국의 23처에서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초에 정기적으로 지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수시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명산대천제’를 지내는 23처는 1414년(태종 14)에 정해졌는데,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도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 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 명소(德津溟所), 풍해도(豐海道: 현 황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의 영흥 성황(永興城隍)·함흥 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 익수(九津溺水) 등이었다. 그중 주흘산(主屹山) 산신이 영험해서인지 성종 25년(1494)에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하윤(河潤)이 임금의 쾌차를 빌기 위해 이곳에 와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성한 문경의 진산을 두고, 주흘산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역 어르신과 유림에서는 불손하다며 부정하게 말하거나 비하하면 안 된다며 핀잔을 주시는 분이 있다. 주흘산은 명산답게 곳곳에 옛길, 여궁폭포, 꽃밭서들 등 명승을 이루고 있고, 많은 문화유산과 역사, 전설을 품고 있다. 주흘산 중턱에 신라 846년(문성왕 8)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창건한 혜국사가 있고,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문경 조령 관문을 비롯해 명승 32호 문경새재, 기념물 18호인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 문화재 자료 226호인 조령 산불됴심 표석, 성황당, 산신각, 문경새재아리랑 등 유무형 문화유산이 있으며 고려 왕과 관련된 대궐터, 어류동(御留洞), 전좌문(殿座門)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전국의 모든 산이 임금이 있는 한양 쪽을 향하고 있는데 유독 문경 주흘산만이 돌아앉았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돌아앉게 된 이유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전국의 산들이 새 도읍지의 주산이 되기를 바랐는데 소식을 늦게 들은 주흘산이 급히 달려가다가 문경에서 고개를 쭉 빼 들고 북쪽을 바라보니 이미 삼각산(북한산)이 떡하니 주산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라 그만 낙심하여 삼각산 보기 싫다며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의 전설은, 주흘산이 비록 도읍지 주산은 되지 못했지만, 천연요새를 만들어 내가 여기서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에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조총으로 무장한 18,700명의 왜군을 거느리고 침입한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이를 막지 못했다. 이는 왜군이 두려워한 요새를 군사전략으로 이용하지 못한 사람 탓이지 주흘산 잘못은 아니다. 주흘산 이만유 작사, 황선우 작곡, 정희열 노래 백두대간 중심에 우뚝 솟은 주흘산 한국의 백대 명산 그중의 으뜸이네 경사스런 소식 많아 복 받은 우리 문경 백만 년 지켜왔고 천만년 지켜나갈 아름답고 웅장한 주흘산 아∼ 주흘산 대한민국 중심에 높이 솟은 주흘산 주봉 영봉 부봉 절경 중의 절경이네 공민왕 머물렀던 대궐터 혜국사 꽃밭서덜 여궁폭포 맑은 물 깊은 계곡 신비롭고 멋있는 주흘산 아∼ 주흘산
-
(51) 문경 연가 ‘문희(聞喜)의 노래’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지금 대한민국에는 시인도 많고 시집도 많이 출판되고 있으나 사람들이 시를 안 읽고, 시집이 인기가 없고, 유명서점 시집 코너가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존중받는가?’라는 화두 앞에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또 독자나 일반인들이 자칭 타칭 시인이라는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특별히 주목받는 시집으로 인기 있는 유명 시인들도 있지만 그런 시인은 극소수이며 일반적으로 시인이나 시집이 크게 대접받지 못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자고 제의를 받지도 못하고 대다수가 자비 출판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누구의 책임일까? 독자를 나무랄 수는 없다. 좋은 영화는 천만 명의 관객이 모여든다. 그렇다면 이 책임은 고스란히 시인의 몫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등단 14년 동안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아니 안 냈다. 어느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내 시집이 라면 끓인 냄비나 가구 받침용 물건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는데 나도 약간은 그런 마음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집을 낸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무명 시인인 필자가 2년 전에 첫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를 냈다. 보통 시집 2권 분량인 164편 모두가 내 고향 문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역 정체성 부각과 문경의 문화, 역사, 명품, 명소 등문경을 주제로 하여 문학으로 문경을 알리는 시집으로 기획 편집하였다. 이 시집이 운이 좋아서인지 지방화 시대에 기획 의도 좋아서인지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자비출판이 아닌 나랏돈(문화예술 창작활동비 지원)으로 시집을 출판했다. 어느 지인이 문경 50여 년 문학사에서 정부 지원으로 시집을 낸 것이 필자가 처음이라고 하였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육군 일병 시절, 전우신문에 활자화된 내 詩, 오랫동안 잠들었다 다시 깨어나,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시인이란 이름으로 14년, 그러고도 시집 한 권 없었는데, 나랏돈으로 시집을 낸다. 가장 문경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 믿고, 내 삶의 터전‘문경’ 그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린 이야기, 인류 문명에 큰 변화를 초래한 코로나19 극복과 삶 등을 틈틈이 쓴 시, 스스럽지만 펴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문화콘텐츠학 박사이며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인 권갑하 시인께서 시집 해설을 써주시면서 요약한 글 ‘이만유 시인의 시적 특징’을 소개하면, 첫째 시인의 시심이 남달리 뜨겁다는 점을 꼽았다. 시심은 불씨와 같아 뜨겁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어질 수 없다. 둘째는 남다른 정신문화 의식을 들 수 있다. 이 또한 뜨거운 시심에서 분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문화로 모인다는 점이 소중하다. 셋째는 틀에 갇히지 않는 유연한 사고와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이다. 이는 자유시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하고 있음에서 그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이 또한 관습화된 틀을 거부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마침내 경계에서 꽃을 피우고자 하는 자유 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시집 ‘문희(聞喜)의 노래’, ‘시인의 말’에서) 이 시인은 "지금은 지방화시대,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시대다. ‘지역 중심의 세계화’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지역 문인들의 문학 활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역의 특수한 고유성에 객관적 보편성을 더할 때 진정한 의미의 명작이 탄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이만유 시인의 지역 문화운동에 기반을 둔 문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 활동은 예사롭지 않은 족적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했다. 시집을 내고 난 뒤, 밤새워 읽었다./ 며칠 동안 끝까지 다 읽었다./ 문경을 주제로 한 시집답게 이 시집이 문경이다./ 문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카페에 올리고 독후감 쓸게요./ 문경 관련 책을 내는데 詩를 사용해도 될까요./ 저도 고향이 문경이라 마치 고향 속에 있는 듯 합니다. 두고 두고 잘 감상하겠습니다./ 덕분에 문경에 대해 추억하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느 시와 달리 술술 잘 읽혀서 좋았고 문경 사투리도 간간히 눈에 띄어 정겨웠습니다./ 저의 고향 문경을 이토록 쉽고 재미있고 깊이 있게 받아 적어주셨네요. 언제 한번 뵙도록 하지요./ 고향 문경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담긴 좋은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시집 연휴를 즐겁게 합니다. 제 고향 문경을 다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어 참 멋진 시집입니다./ 마스크로 뒤덮인 우울한 나날 속에서도 <신선한 열정>으로 서정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시고, 시의 참모습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주옥같은 시편들로 하여 저의 나날이 더불어 즐거워지겠습니다./ 진정한 문경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멋진 시인님의 아름다운 시집을 받아봅니다. 너무 멋져요. 독후감 쓸게요./ 특히 문경 출신 ‘한민족독도사관학교 관장’이며 ‘독도 시인 천숙녀 시인’께서 ‘문희(聞喜)의 노래’ 시집에 실린 모든 시를 ‘풀꽃 시화’로 만들어 코팅해 보내주셨다. 이렇게 많은 분들께서 시집을 읽고 소감과 격려 말씀을 보내주셔서 부담을 가졌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며 시집 출판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반응 -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를 내고 - 이만유 내 시집 보냈더니 이런저런 인사말 중 "술술 잘 읽히는 시 그래서 좋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칭찬인 듯 아닌 듯 특별히 주목받는 명작은 못 되지만 어려운 시 사양하고 짧게 쉽게 재미있게 그렇게 쓰자 했는데 그럭저럭 뜻대로 나무에 바람 스치듯 쉽게 쉽게 읽히지만 시루에 물 빠져도 콩나물은 자라듯이 가슴속 여운이 남는 그런 시가 됐으면
-
(50) 문경문화원, ‘대한민국 문화원상 대상 수상’이만유/전 문경문화원 이사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9년 10월 14일 11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개최된 ‘2009 전국문화원의 날 기념식’에서문경문화원이‘대한민국 문화원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날 기념식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행사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고흥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이한성 문경·예천지구 국회의원, 신현국 문경시장, 한국문화원연합회 최종수 회장을 비롯하여 전국 지방문화원장(227명) 등 문화원 가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정해 국악인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그날은 문경시의 경사였고 창립한 지 반세기의 역사를 지닌 문경문화원의 영광이었다. ‘향토 전통문화로 지역발전에 이바지하는 문경문화원, 대한민국 문화원상 대상 수상’이란 제하의 언론 보도가 경향 각지에서 이 수상의 기쁨을 전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장사익 문화예술인의 축하 공연도 있었으며 재경 문경인 다수와 함께 필자도 시상식에 함께하였는데 문화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긍심 가득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국 227개 지방문화원 중에 문경문화원이‘문화원상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훌륭한 선배들이 닦아온 터전과 기반이 있었지만,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고 도전하며 인화를 주요 덕목으로 하는 훌륭한 리더십이 있는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큰 업적을 이룬 14~15대 문경문화원 채대진 원장이다. 아마 문경문화원 역사상 이때가 문경문화원 최고의 전성기였고 문화원 가족이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였으며 문화인다운 문화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대상 수상 공적 사항을 보면 회원 증가율 130.9%, 자체 회비 납부율 102%, 자체 적립금 4천만 원, 연 10만 원 이상 회비 납입자 233명, 총회비 수입금 연 3천만 원, 사무국 체계구축, 회원 참여 장려 프로그램 운영 등 자립 비율이 우수하고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문경시의 연 7억 이상 사업비 지원을 통해, 문경문화제, 경상감사 교인식 및 도임 행차 재현, 문경새재 과거길 달빛 사랑 여행 성공적 추진, 문경새재 명소화 프로젝트, 문경 2색 여행, 문경새재아리랑제, 호계별신굿 재현, 관례 재현, 전통 혼례, 견훤왕 및 운강 선생 향사 봉행, 독서문화상 공모, 경로효친 및 내 고장 문화유적사랑 실천 수기 공모, 학생 수상 작품집 발간, 문화유적반 교육, 풍물교육, 22개 반의 문화학교, 청소년 충효 교실, 새문경아카데미 운영, 향토 사료 발간 등 수많은 향토문화 보존과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고 있음을 평가받았다. 문경문화원과 필자가 인연을 맺은 것은 33년의 공직생활을 끝낸 그 이듬해인 2004년 3월 어느 봄날 관광버스를 타고 충청 지방으로 문화탐방을 하러 가는 동행자로서 문경문화원 채대진 원장을 만나게 되었고 문화원 회원 가입을 권유받고 뜻한 바 있어 바로 문경문화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경시가 폐광 이후 침체한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문화관광 웰빙의 고장 문경’이란 기치를 걸고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 문화관광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때에 이에 부응한 문화원의 바람직한 활동이 무엇인가를 고심하는 원장님의 뜻을 따르면서 의기투합하여 문화원 활동 영역을 넓히는 사업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게 되었다. 필자가 문화원 사업에 참여하고 보람을 느낀 첫 번째 사업이 문화관광 분야의 민간 전문인력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2004년 10월 5일 ‘문경문화원 문화학교’에 ‘문화유적반’을 특별 신설하는 계획에 참여하여 49명의 교육생 대표로 활동한 것이다. 그해 연말에 수료식을 마친 뒤 이대로 헤어지면 교육받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배운 지식을 지역발전 위해 활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문화재지킴이와 문화관광해설을 주목적으로 하는 모임을 발의하고 2005년 1월 11일 26명으로 구성된 ‘문경문화유적동호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2개월 과정의 교육만으로는 전문화가 미흡하다고 판단, 중급반 1년 과정을 건의, 진행하였다. 그 후 필자를 비롯해 20여 명의 회원이 문화관광해설사, 자연생태해설사, 과학해설사 등으로 선발되어 활동하였고 회의 명칭을 ‘문경문화유적회’로 변경하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문화원의 핵심 인적 자원을 지닌 문경문화원 소속 단체로 건재, 7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문화원 활동 중 필자의 두 번째 의미 있는 역점 사업은 구곡원림을 조사, 연구, 보존하기 위한 단체 결성을 발의하여 2013년 1월 15일 ‘문경구곡원림보존회’를 창립한 것이다.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조선 선비들의 이상향인 구곡의 보존 활동, 구곡 알리기를 위한 구곡사진전 개최, 언론방송에 기고 및 출연을 통한 홍보,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경상북도가 구곡원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실시한 ‘백두대간 산림문화자산 탐방 교육’을 공동 추진하였고, 2014년 7월 야간 여행 상품으로 인기 있는 달빛사랑여행을 문경새재에서만 개최하던 것을 '선유구곡 달빛사랑여행'으로 변화를 추구해 보자는 의견을 제안하고 앞장서서 실행하였다. 2014년에는 주자가 경영한 구곡원림 시원지인 중국 무이산 ‘무이구곡 탐방’을 기획 추진하였고, 2014년 12월 문경시민을 대상으로 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하는 ‘새문경 아카데미’시 식전 공연 대신 ‘사진으로 보는 문경의 구곡원림’이란 주제로 강의하였다. 그리고 구곡원림을 관광 자원화하고 교육장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유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시대의 구곡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1세기 신 구곡‘영강구곡원림’을 설정 경영하고 있다. 이 단체 역시 ‘문경문화유적회’와 같이 문경문화원 소속 단체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문경문화원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필자는 그 외 문화원 활동으로 운영위원·이사·감사로 17년, 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과 자문위원으로13년간 활동하였다. 그리고 계간지‘문경문화’ 편집위원 및 수십 번 기고, 문화유적반·충효교실·관내 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경향토사 강의하였으며 아리랑학교 추진 및 주관과 아리랑제 추진위원·아리랑 포럼좌장·경창대회 심사·고유제 및 가사짓기대회 주관, 아리랑제 종합평가회를 개최하였다. ‘경상감사 도임 행차와 교인식’ 재현 시 도사 등 역활 수회, 문화원 주관 ‘옛길컬처텔러 양성 교육’ 수강생 대표 및 텔러회 회장, 외부 인사가 문화원으로 의뢰한 문경의 문화와 역사 조사 및 탐방 시 안내 해설, 경복궁 등 문화원 문화 탐방 시 현장 해설,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추진한 문경새재과거길달빛사랑여행에 1회부터 114회까지 거의 전부 참여 및 해설을 하는 등 크고 직은 문화원 추진 사업에 17년간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참여, 활동하였다. 이렇게 인연을 맺고 긴 세월을 함께한 문경문화원, 필자는 그동안 문화원 정체성 확립과 7만 문경 시민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21세기 시류에 부합하는 문화원다운 문화원으로 거듭나고 발전하기를 위한 고언(苦言)을 하다가 불합리와 구제 불능의 절벽에 부딪혀 "문경문화원이 제가 꿈꾸는 문화 활동을 하는 데 있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통감하며 문경문화원 회원을 탈퇴코자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2021년 11월 26일 회원 탈퇴서를 제출하였다. 장장 17여 년에 걸쳐 전력투구 해 온 나의 열정을 불태웠던 정든 문화원과 결별하고 이제는 문화 가족이 아니다. 지금 점촌 구도심 중앙에 100억여 원을 들여 건립한 문화원 건물이 크고 높지만, 빛나는 ‘대한민국 문화원상 대상’ 수상 이후 10여 년 시대 감각 부재와 비전이 없는 상황에서 제 역할은 물론 더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되는 듯한 아쉬움에 그날을 되돌아보며 올해 새로 선임된 임원들에게 변화와 발전을 기대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어두움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
(49) 꿈이 실현되는 21세기 신(新) 구곡 ‘영강구곡원림’이만유/전 문경구곡원림보존회장 전국에서 처음으로 순수 민간인들이 뜻을 합쳐 구곡원림에 대한 조사, 연구, 보존, 홍보 활동과 수려한 구곡원림을 관광 및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창립된 ‘문경구곡원림보존회’가 2016년부터 ‘유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시대 구곡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문경지역 생명의 젖줄기인 영강에 21세기 신(新) 구곡인 ‘영강구곡원림(潁江九曲園林)’을 설정, 경영하고 있다. 경북 문경에는 낙동강 상류인 영강과 금천이라는 2개의 강이 있다. 산양면과 산북면을 흐르는 금천에는 3개(청대구곡, 석문구곡, 산양구곡)의 구곡원림이 있는 반면에 문경지역 중심을 흘러가는 문경 제1의 강이라 할 수 있는 영강 본류에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하고 시가(詩歌)를 읊고 성리학을 구현하였던 공간이었지만 아쉽게도 구곡원림을 설정. 경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 보존회는‘영강구곡원림’을 설정, 경영하기로 결의하고 9명으로 구성된 TF팀을 가동해 합의체 기구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차적으로 영강구곡원림의 처음과 끝 구간을 문경시 영신동 영신숲에서 마성면 신현리 봉생정 앞 용연까지(17.2km)로 정하고 구곡의 표준위치와 각 곡의 이름을 짓는 등 5개월여 기간 동안 기본조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추진을 위해 2015년 9월 21일 근암서원에서 20여 명의 회원이 모여 ‘영강구곡원림 설정 발대식’을 가졌다. 각 곡의 명칭과 전담 팀원은 다음과 같다. 제1곡 영신숲(永新-이만유), 제2곡 송정소(松亭沼-박순자), 제3곡 수정보(水晶洑-정의학), 제4곡 뱃나들(舟津-신준식), 제5곡 별암(鱉岩-최경호), 제6곡 견탄(犬灘-남기태), 제7곡 삼태극(三太極-오석윤), 제8곡 병풍바위(屛巖-손해붕), 제9곡 용연(龍淵-김봉기)이다. 이후 추진팀의 체제를 정비 강화하여 전 회원이 참여하도록 하였고 각자 옛 문헌과 향토 사료를 찾고 현지 활동을 통하여 문경과 영강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닌 곡마다 지명유래, 지리적 특성, 명승지, 인물, 문화유적, 역사, 전설, 설화. 민요 등을 조사 수집하고 옛 사진 자료 확보와 현재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촬영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집된 자료는 곡별 책임자가 수시 및 정기 모임에서 발표, 토론하고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쳐 최종적으로 제출된 원고의 정리, 편집을 위해 편집위원 4명(이만유, 손해붕, 오석윤, 신준식)을 선정 추진하였다. ‘영강구곡원림’ 제자(題字)는 한국서예협회 문경지부장 진우(珍雨) 변강정(邊康政) 선생이, ‘영강구곡시(潁江九曲詩)’는 우리가 지은 한글 시 10수(首)를 칠언절구(七言絶句) 한시(漢詩)로 조령한시회 회장 경재(景齋) 김진선(金鎭善) 선생이 한역(漢譯)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지 1년 7개월 만에 유관기관 및 문화단체에 배포할 ‘영강구곡원림’ 이란 제하의 자료집을 500부 발간하여 2016년 12월 12일 "영강구곡원림 설정 및 출판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그동안 조사, 편집을 위해 앞에선 임원 및 곡별 책임 회원은 물론이고 작은 자료 하나라도 정보를 주면서 활동할 때마다 묵묵히 뒤에서 챙겨주고 물심양면으로 돕고 용기를 북돋워 주신 모든 회원님과 특히 전체 원고를 주도적으로 편집하고 서문 등을 집필하신 손해붕 부회장과 고난도의 곡간 거리 측정 등 제 업무를 총괄 추진한 오석윤 사무국장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였다. 이제 영강구곡원림을 경영한 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새롭게 축적된 자료들을 모아 ‘신증영강구곡원림’을 발간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우리가 설정하고 경영한 21세기 신 구곡인 ‘영강구곡원림’이 관광 및 교육 자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지금,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때 발간한 책 속에 미래 희망 사항을 기술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영강구곡 제2곡인 ‘송정소’를 눈여겨보자. 일부러 만들래야 만들 수 없는 절묘한 위치에 있다. ‘영강체육공원’을 마주하고 있는 송정소 가운데 봉긋하게 솟아있는 야트막한 섬이 있다. 점촌 뒷산인 돈달산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전설의 섬인 ‘딴봉’이다. 그리고 그 옆 송정산 위에는 소나무와 정자가 있었다는데,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늘어진 소나무 가지가 소(沼)에 비치고, 물결 위에 일렁이는 정자를 연상해 보자. 시내 어디에서 이만한 경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운치 있는 명소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관광의 최적지가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이제 관광을 염두에 두고 제2곡 ‘송정소(松亭沼)’의 청사진을 그려보며 제안한다. 영강체육공원과 딴봉과 송정산을 연결하는 자연과 조화된 구름다리든 수중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리고 딴봉이나 송정에 창덕궁의 부용정 같은 정자를 지어보자. 다리 밑으론 카누들이 오가고, 수상스포츠로 휴일을 즐기는 관광객과 시민들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어른거린다. 또 제1곡 ‘영신숲’에서 제9곡 ‘용연’까지 걷기 코스나 자전거 길로 연계해 보자. 곡마다 표지석, 간략한 설명, 그리고 ‘영강구곡원림’ 시비가 세워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당대는 물론 후대의 문화이고 유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일련의 사업들은 비영리 자생 문화단체인 ‘문경구곡원림보존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다면 ‘영강구곡원림’은 결코 관광자원이 될 수가 없다. ‘영강구곡원림’ 탄생은 전통을 이어가고 변화에 앞서가기 위한 것으로써,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제안이다. 숙고해보아도, 우리 모두에게 풍요로운 경제 상품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본회의 제언을 심도 있게 고려하여, 타당성 조사를 바탕으로 가칭 ‘영강구곡 관광 사업’이 되었으면 하고 기원해 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영강구곡원림’의 비전이 희망 사항으로 책 속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우리가 희망하고 제안한 것들을 행정 당국에서 수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백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문경새재에 이어 문경 제2의 관광지가 될 수 있는 ‘점촌랜드마크’ 사업이 추진되면서 송정산 위에 ‘송정(松亭)’이라는 날아갈 듯한 정자가 이미 세워졌고, ‘영강체육공원’과 ‘딴봉’과 ‘송정산’을 연결하는 280m 영강보행교와 112m 출렁다리 조성사업이 지금 추진 중이며, 영강구곡 제4곡 뱃나들과 제5곡 별암이 있는 쪽 창리로 가는 영강 둔치 옆으로 4.5km의‘영강구곡경관길’조성과 3개소의 ‘전망대’ 설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우리의 기쁨이다. ‘문경구곡원림보존회’는 2013년 1월에 창립하여 구곡원림 보존은 물론이며 ‘구곡원림 사진전시회’ 등으로 구곡문화 알리기, 구곡원림의 ‘문화재 지정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활동과 구곡원림의 관광 자원화와 교육장화를 위한 노력을 해오고 있으며, 학문적 자료 축적과 방향 설정을 위한 ‘학술발표회’ 개최, 견문을 넓히기 위해 구곡원림의 시원인 중국의 무이구곡과 매년 2회씩 전국 유명 구곡원림을 탐방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해와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단체이며 역대 회장은 초대·2대 회장 이만유, 3대 회장 김경식, 4대 회장 김동익이며 현재 5대 엄동식 회장이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
(48) 사라진 고려 왕궁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고려 왕궁이 무너졌다. 21세기 새천년을 맞이하여 한국의 할리우드라고 할 수 있는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이 2000년 2월 문을 열고, 고려사를 조명할 수 있는 첫 역사 드라마 밀레니엄 KBS 특별기획대하사극 ‘태조 왕건’을 이곳에서 촬영하여 2000년 4월 1일부터 2월 24일까지 200부작으로 인기리에 방영하였다. 드라마는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 2년(서기 888년) 여름, 송악의 호족인 왕륭(王隆)이 열살 난 어린 아들 왕건을 데리고 신라 수도 서라벌을 찾아와 신라왕을 비롯한 문무백관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918년 마침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드라마는 절정을 이루고 재위 26년 향년 67세인 943년 5월 "인생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한 시대의 영웅이 생을 마감, 긴 여운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끝난다. 이 드라마를 촬영한 ‘태조왕건촬영장’은 석탄산업 사양화로 폐광 이후 문경이 미래 활로를 개척하는 전기(轉機)가 되었고 ‘문화관광도시 문경’으로 도약하는 분기점이고 변곡점이 된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런데 이 고려 궁궐이 세워진 지 7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초 설치 목표로 했던 고려 500년의 역사를 모두 담을 중심 무대가 사라진 것이며 비록 세트장이지만 국내 고려사 전문가 7인으로 구성된 고증위원회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단청하나, 기와 한 장에도 살아 숨 쉬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건축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지방자치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영상산업의 모델 샘플로서 근대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그 당시 철거에 대해 시민들의 찬반 의견이 있었지만, 세트장 건축 당시 향후 200억을 투자 고려촌 등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건축 주자재가 유리 섬유나 탄소 섬유를 넣어 만든 섬유 강화 플라스틱인 FRP이라 가볍고 기계적 강도, 내식성, 성형성이 뛰어나 소형 선박의 선체나 항공기의 기재로 쓰일 만큼 견고하여 잘 관리하고 보수하면 내구성이 있어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으나 다른 구체적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고려 궁궐 만월대는 북한 개성시 송악산(松嶽山)에 있는 고려 시대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창건하여 역대 고려왕들이 국가를 다스리던 궁궐이었다. 1361년 개혁 군주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폐허가 된 채 지금까지 궁궐터로만 남아 있다. 만월대는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 위에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昇平門)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 신봉문(神鳳門)과 창합문(閶闔門)을 지나면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이 자리하고 있다. 궁궐 안에는 편전인 선정전,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長和殿),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乾德殿), 희빈들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 강서(講書), 서적의 편찬 및 교정과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아들이던 장령전(長齡殿), 문한기구(文翰機構)인 연영전(延英殿)이 있었으며, 회경전 서쪽에 왕의 침전인 중광전(重光殿), 왕비의 침전인 곤성전(坤成殿),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 태조 왕건이 유조(遺詔)를 남겼던 신덕전(神德殿) 등 수많은 전각과 13개의 성문(城門)과 15개의 궁문(宮門)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궁궐 건축물 중 세트장에는 각종 자료와 고증을 거쳐 정교하게 설계된 왕궁 등 기와집만 46동이 들어섰는데 그중 핵심적이고 대표적인 전각으로써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은 아파트 7층 높이로 완벽히 재현, 웅장했었다. 그리고 조선 궁궐 경복궁(景福宮)의 광화문(光化門) 격인 고려 궁궐 정문인 승평문(昇平門) 또한 그 위용이 대단했었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영천 출신의 시인 왕평(王平)이 노랫말을 짓고, 개성 출신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이 1928년 고향 송도(松都)에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를 보고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며 작곡하였으며,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애잔하게 부른 ‘황성옛터’는 지금도 사랑받는 ‘민족가요’이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苗)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원천석(元天錫) 이렇게 황성옛터 노래와 흥망성쇠, 천운에 따라 부침했던 역사 속 고려 망국의 한을 노래한 시조를 읽으며 지금은 북한 쪽 개성에 있어 가보지 못하는 불타버린 왕궁, 빈터만 남아 있는 고려 궁궐 만월대, 이를 고증하여 지은 고려 궁궐 세트장이 비록 문화재적 가치는 없다 하더라도 비슷한 형태와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2007년 11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현장을 바라본 필자는 그 당시 심정을 아래의 글로 남겼었다. 고려궁은 무너지고 / 이만유 전국에 수많은 관광객이 고려왕국의 존망을 반추하며 이애리수가 애잔하게 불렀든 황성옛터 옛 노래를 따라 부르며 문경 세트장을 찾아왔던 감회는 사라지고 고려궁은 처참하게도 무너져 버렸다. 역사적으로 태조 왕건 드라마는 문경과 궁합이 맞고 테마나 콘셉트가 맞아떨어진 결과물 태조 왕건 촬영장 용사골 뒷산 조령산 장군봉은 개경의 송악산을 닮아 개성에 가지 않고도 개성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만월대 궁궐터를 가보지 않고도 만월대를 볼 수 있었다. 드라마 세 영웅 중에 견훤과 왕건은 문경과 인연이 깊으니 견훤은 문경 가은인이요 견훤 출생 설화가 담긴 아차마을과 금하굴 있으며 조선팔도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견훤을 치기 위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 시에 이곳에 이르니 길이 막혔다.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다. 하여 토천이라 한다 하였고 산양면 현리 뒷산에 있는 근품산성에서는 왕건과 견훤이 실제로 전투를 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적, 지리적으로 깊은 인연, 필연의 인연이 있는 문경을 빛나게 하고 잘살게 하는 선인들의 선물을 팽개치지나 않았는지 견훤 할배가 폐광 이후 문경이 못산다고 후손들 너거들 잘 살아보라고 하늘에서 보낸 선물을 포클레인이 부수니 노하시지나 않으셨는지 10년 뒤에 이관받아 고려촌 건설한다. 시민에게 약속해 놓고 문경시 재산 될 날이 내일 모랜데 받기도 전에 사라지니 고려마을 직제가 무색하구나 7인의 역사전문가로 구성된 고증위원회의 검증을 거쳐 건축한 태조 왕건 세트장 고려 시대 건축양식을 문경에서만 구경할 수 있었는데 고려마을 잘 다듬어서 용인민속촌 같이 가꾸어서 그 안에 고려역사관 세워두면 아이들 역사 공부하러 모여들고 왕궁 스테이(Palace stay) 하여 한 가족이 머물면 아버지는 왕. 어머니는 왕비, 아들은 왕자, 딸은 공주가 되어 백제왕. 고려왕 입맛 되로 골라잡아 왕실체험을 하도록 하면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차별화된 스테이 되어 대한민국 모든 가족 너도나도 다 모여들면 문경 찾는 관광객 천만 명도 넘겠다. 스쳐 가는 관광, 쓰레기만 남기는 관광에서 머물다 가는 관광, 돈 쓰고 가는 관광에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소. 문경새재 일원은 사극 촬영지의 최적지 비포장 길 이만한 데 없고 전봇대 전깃줄이 있나 현대 시설물이 있나 카메라 기사가 카메라를 잡고 360도 회전해도 아무 방해물이 없는 이곳 항공노선이 아니라 동시녹음 가능하고 이제는 반환받아 한 방송사의 몫이 아니라 오지 말라 해도 너도나도 모든 방송사 춤 흘리고 촬영하러 몰려 올낀데 이제는 문경시가 주인이라 돈 받아 챙겨 부자 되는 길이 여기에 있건만 어찌 이런단 말인가 21세기 수준 높은 관광객이 서울에 반듯한 정궁 있는데 2시간 거리에 있는 모조품이 볼거리가 될런가 나? 유일성, 차별성, 희소성이 값을 올리는 세상의 이치인걸 전국에 수많은 촬영지 중에 고려 시대 촬영장은 여기가 유일하고 지방촬영지 중에 미국의 할리우드 유니버설스튜디오에 버금가는 세계 4대 촬영장 규모에다 가장 성공한 촬영지로 지방차지사에 남을 기념물이요 현대문화유산이 될 것인데 승평문, 회경전, 건무문, 신덕전 오호통재라 아깝다 먼지로 사라졌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태조 왕건 드라마는 통일을 염원하는 기획 의도가 담겨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당나라 외세를 빌려 한 통일은 예속을 피할 수 없음에 가치가 없고 태조 왕건은 힘과 덕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이를 본받아 자주적 통일을 하자는 의미 깊은 촬영장이기에 어린이들과 국민들에게 산교육장이 되는 국민의 교육장 이제는 어디에도 고려궁은 없다. 어렵고 힘들고 살기가 고달픈데 70억이 어디 작기나 한 돈인가? 어찌 그리 통이 큰지 인심이 좋은 건지 50억 70억 80억 큰 사업만 좋아하니 민의를 읽고 가려운 곳 긁어 주는 소소한 민생사업 뒷전으로 밀려나고 큰 것만 치적이라 생각하면 어리석기 그지없소. 옛날과 달리 시민 수준 높아 모든 것 다 알고 있소 아! 어찌하려나 역리가 순리를 거역하고 합리보다 모순이 승리한 역성혁명에 고려왕조 무너지듯이 고려궁도 그렇게 무너져 버렸다.
-
(47) '문경새재오픈세트장' 건립 비화(祕話)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은 당초 ‘한국방송공사’가 고려시대물을 촬영하기 위하여 사극 전용 촬영장으로2000년 2월 23일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뒤 용사골에 건립한 것이다. 당시‘KBS 문경촬영장’ ‘문경새재촬영장’ ‘태조왕건촬영장’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 촬영장은 문경시가 부지 65,755㎡와 왕건교를 설치하는 비용 등 4억 원을 제공하고 KBS가 공사비 28억 원을 투입하여 총사업비 32억 원으로 왕궁 2동, 망루 2동,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기타 13동을 건립한 국내 최대규모의 사극 촬영장이 조성되었다. 이로써 문경시는 21세기 새천년 웅비의 나래를 펼쳤다. 용사골은 조선 시대 군부대 격인 조령진(鳥嶺鎭)이 있었던 곳이며 지방 산성을 수비(守備)하는 수장인 별장의 품계가 9품 내지 7품 무관을 배치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문경관문과 조령산성은 왜군으로부터 한양을 지키기 위한 군사 요충지였음으로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숙종 때 설치한 것으로 보며 영조 때는 무관 4품을 배치했던 곳이었다. 당시 KBS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대규모 촬영장을 짓기 위해 물색을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너도나도 관심을 가지고 TF를 구성하며 유치경쟁에 돌입했다.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거나 정권 실세를 동원하는 파워 게임도 있었고 자기 출신 지역에 유치하여 치적으로 삼으려는 유명 인사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문경, 안동, 부안, 제천 등이 치열한 경합을 치른 후 문경으로 최종 낙점되어 문경새재 용사골에 촬영장을 짓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중심지이며 국방을 수호하던 유서 깊은 군사 요충지 문경새재에 사극 촬영장이 들어서는 것도 의미 있지만, 용사골(용상골) 이름 그대로 용이 승천하듯이 왕(용)이 사는 왕궁이 세워지는 것은 풍수지리 및 역사적 인연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촬영장 조성 후 첫 기획물인 대하사극으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에 후삼국의 세 영웅으로 궁예, 왕건, 견훤이 있는데 그중에 후백제 왕 견훤이 문경 가은 출신이라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 활동 시 촬영장에서 해설할 때 우스갯소리로 ‘석탄산업으로 한때 잘 나가던 문경이 폐광 이후 살아 길길이 막막해졌는데 하늘나라에서 견훤 할배가 고향 후손들을 불쌍히 여겨 촬영장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셔서 지금 관광객이 구름처럼 문경으로 모여 와 굴뚝 없는 관광산업으로 잘살게 되었다’라고 하기도 했었다. 실재적으로 촬영장이 문경새재 용사골에 유치된 이유는 사극 전용 촬영장으로 제 조건이 유리하고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촬영장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조령산 산세, 특히 촬영장 뒤편 장군봉이라 부르는 봉우리가 서기가 서려 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며 고려 왕궁 만월대가 있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 개성)의 송악산과 닮았다는 것은 물론이고 사극 촬영에 장애가 되는 포장된 길이 아닌 600년 된 옛길 문경새재 황토 비포장길이 있어 사극 촬영지로 더 이상 경쟁상대가 있을 수 없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필자가 해설했을 때 ‘개성에 가지 않고도 개성의 송악산과 만월대 궁궐을 볼 수 있으니 여러분은 오늘 문경에 옴으로서 개성 여행 경비 수십만 원을 버는 횡재(橫財)를 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거기에 더해서 사극 드라마는 편당 제작비가 많이 드는데문경새재에는 이를 절감할 수 있는 기존의 산성과 관문 등 문화유적이 있어 추가 세트가 필요 없고 현대물인 전주(電柱), 콘크리트 건물 등이 없어 촬영 기사가 카메라를 360도 막 회전해서 촬영해도 아무 장애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항공노선이 아니고 인근 군부대 군사 비행 구역도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 소음과 차 운행 통제로 차량 소음이 없어 동시녹음이 가능하다는 장점 등으로 환경적, 경제적 유리성이 크다는 이점이 있다. 뒷이야기이지만, 촬영장 설계를 할 때 부지 안에서 풍수지리상 드라마 성공을 위하여서는 왕궁터를 잘 잡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어느 곳에 둘까 고심하다가 유명 지관(地官)에게 의뢰하여 지금 왕궁이 있는 곳으로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 풍수 값으로 3,000만 원이 들어갔다고하며 초가지붕 관리를 위해 이엉을 가는데도 연 6,000만 원이 비용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촬영장 건립의 경제적 효과로는, ‘태조 왕건’ 드라마가 시작할 때 150부작으로 기획되었지만, 시청률이 60.2%로 높았고 ‘사극의 신기원을 열었다.’ ‘드라마 사상 전무후무의 최고의 흥행작’이라는 호평을 받게 되어 200부작으로 늘여 방영하였다. 이에 따라 영상의 힘, 매스컴의 힘이 얼마나 큰지 이 드라마가 방영되자 문경에 연간 관광객 수가 50만 명 정도에서 방송을 시작한 그해 100만 명이 되고 해마다 100만 명씩 늘어 500만 명 체제로 유지하다가 얼마 뒤 경이적인 600만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문경이 새롭게 발전하고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의 위상을 가진 국내 관광의 중심이 된 것은 촬영장 유치가 큰 분기점이 됐다. 당시 유명 경제전문가가 이 촬영장으로 인한 간접 경제 유발효과가 연 500억 원에 이르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는 촬영장이 6,000억 원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했다. 당시 KBS가 ‘태조 왕건’ 드라마를 기획한 의도는 자주통일 의식 고취 및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이 드라마를 통화여 합리화하고 대국민 메시지를 보내려 한다는 설도 있었다. 그 당시 이를 접한 필자는 관광객들에게 이렇게 해설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 즉 당나라의 힘을 빌려 통일한 것이라 진정한 자주통일이 아니고 어떻게든 당나라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통일인 데 반하여 태조 왕건은 스스로 힘으로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자주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지상목표가 남북통일인데 이 통일 역시 태조 왕건처럼 자주통일이 되어야 한다며 우리 국민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서 더 훌륭한 자유민주국가를 만들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튼튼하고 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었다. 이렇듯 우리가 재미나 흥미로 보는 드라마 하나에도 국가이념이나 통치자의 철학이 반영되고 대국민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문경 가은읍 석탄박물관 옆에 있는 ‘가은오픈세트장(연개소문촬영장)’에서 촬영되어 2006년 7월부터 1년간 100부작으로 방영된 SBS의 대하사극 ‘연개소문’ 역시 중국의 문화침략, 다시 말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왜곡하고 만약 북한이 붕괴한다면 한수(漢水) 이북을 자기들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기도로서 ‘동북공정’을 본격적으로 추진될 때 방영되어 그 실상을 알리고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이 작은 나라, 적은 군사로 대국인 수나라, 당나라와 싸워 이긴 위대한 역사를 교훈 삼아 우리 국민이 분발, 정신 무장하여 동북공정에 대비하자는 의도가 깔린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문경시와 KBS가 촬영장 건립 시 계약으로 10년 뒤인 2009년 문경시로 촬영장 시설 모두를 이관한다고 하였고 문경시는 이를 받아 고려촌으로 재개발 활용한다고 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2008년 아쉽게도 국내 유일한 고려 시대 촬영장인 궁궐 만월대(滿月臺) 세트장을 허물고 많은 예산을 투입 조선 궁궐 경복궁(景福宮)을 세웠다. 일설에는 KBS에서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을 이어 고려 사극을 계속 제작 방영하려고 했는데 정권이 바뀌고 새 대통령이 "나는 존경하는 역사 인물이 이순신이다.”라고 하여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전환하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제작 방영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쨌든 미국 할리우드 유니버설스튜디오에 버금가는 세계 4대 촬영장 규모의 하나로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촬영지로 지방차지사에 남을 기념물이 되고 현대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촬영장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현재의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은 KBS가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촬영을 위해 세운 세트장을 허물고 문경시가 공사비 75억 원을 투입하여 70,000㎡ 부지에 광화문, 경복궁, 동궁, 서운관, 궐내 각사, 양반집 등 103동을 건립하여 새로운 조선 시대 모습으로 2008년 4월 16일 준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기존에 있던 초가집 22동과 기와집 5동을 합하여 130동의 세트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 문경에는 현재 고구려 신라 시대물 촬영 오픈세트장 1곳, 조선 시대물 촬영 오픈세트장 2곳이 있다. 2008년 그때 일부 뜻있는 시민들이 고려 시대물을 촬영할 수 있는 만월대 궁궐을 허물지 말고 보수 유지하여 그대로 두고 조선 시대 궁궐 세트장이 필요하다면 다른 곳에 건립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랬다면 우리나라에서 모든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다 갖춘 더 완벽한 국내 유일 촬영장 메카로 부상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46) 불암리(佛岩里) 전설의 고향문경향토사 연구자 이만유 불암리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山陽面) 면 소재지로서 낙동강 상류인 금천(錦川)을 사이에 두고 예천군 용궁면(龍宮面)과 접해 있다. 원래는 마을 북쪽에 있는 금양교(錦陽橋)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냇물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쯤 큰 홍수로 모든 가옥과 전답이 피해를 본 후에 금천 서쪽으로만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불암리는 전국에서 시골 면 단위 마을로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점이 있다. 마을의 구획과 도로가 도시와 같이 반듯반듯하게 바둑판같이 십자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당시 일제가 신도시, 다시 말해 경북 북부지역의 행정 및 경제 거점도시를 여기에다 조성하고자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현재도 34번 국도가 동서로, 59번 국도가 남북으로 마을을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곳에서 갓난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필자가 이 마을에 대해서 그동안 듣거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 밤이면 아래 펼쳐질 이야기 속 현장에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와 추억이 서린 곳들이 사라지고 훼손되어 오히려 그 시절, 그 모습, 그 풍경들이 그립기도 하다. 불암리 마을 유래는 마을 서쪽 산의 바위에 봉황새가 깃들었다고 하는 전설로 인해서 봉암(鳳岩)이라 하였다. 그 후 이 바위 모양이 부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불암(佛岩)이라 하였으며, 예전에는 소원성취를 바라거나 특히 기자(祈子) 신앙으로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던 기도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문경시에서 가장 일찍 일반가정에 전기가 공급되어 남보다 먼저 문명의 혜택을 누렸다. 조선 시대 때도 저잣거리(시장)가 형성되었고 구한말부터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큰 2일, 7일 오일장이 열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으며 물류 또한 풍부해서 경제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곳이 어느 시점부터 활력을 잃고 쇠퇴의 길을 가게 되었다. 물론 산업화, 도시화, 교통의 발달 등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불암리가 쇠퇴하게 된 풍수지리 이야기가 있다. 불암리 마을은 동쪽과 서쪽에 야트막한 산이 둘러 있는데 이 두 산은 암수 두 마리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 명당이라고 한다. 그냥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여물을 배불리 먹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되새김질하며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형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쯤 동쪽 산,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바위를 금천(錦川) 제방 공사를 하면서 필요한 석재를 얻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파작업을 했는데, 땅을 진동하는 광음에 그만 소들이 기력을 잃고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발전은 커녕 쇠퇴하게 되었고 한다. 여기에 서쪽 산, 소의 머리 형상 부분에 묘를 쓰게 되어 이 또한 계속해서 기(氣)를 읽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쪽 산 아래로 흐르는 금천에 지금은 도로를 내면서 없어졌지만, ‘개쏘’라는 큰 소(沼)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기이하게도 자정이 되면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 오밤중에 웬 여자가 빨래할까? 궁금들 했었나 감히 무서워 아무도 가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한 용감한 청년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가니 긴 머리에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방망이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지라 "여보시오. 이 밤 중에 무슨 일이요?”하고 말을 붙였지만 대답하지 않다가 세 번째 물음에 방망이질을 멈추고 뒤를 확 돌아보는데 "으악!” 여인이 피를 머금은 붉은 입에 오색 무지갯빛 얼굴을 하고 노려보는지라 그만 청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죽게 되었다.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 뒤 유인하여 혼을 빼간 것이라고 하며 그 뒤에도 몇 사람이 그곳에서 더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벌벌 떨며 밤이 되면 무서워 밖을 나가지 못하였다. 또 하나 이야기는 역시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마을 북쪽에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왕버들이 10여 그루 서 있는 ‘묵은 천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비가 오는 밤에는 ‘귀신불’ 또는 ‘도깨비불’이라고 해서 공기 속에 바람 따라 새파란 불이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상엿소리가 들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고 하였다. 이 또한 밤에는 물론이고 한낮에도 그곳에 가지 못하는 무서운 곳이었다. 아마도 오래된 죽은 고목이나 동물 뼈가 있어 거기에서 나오는 인불, 즉 인화(燐火)라고 해서 인(燐)의 작용에 의한 불인데 그 시절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이야기로 마을 남쪽 끝자락에 ‘황새도랑’이라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현대식 화장장이 없을 때 금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모래사장에 장작을 쌓고 불을 붙여 화장하던 노천 화장터였고, 6.25 전쟁 당시에는 반동분자 처형장이었으며 주인 없는 시체를 갔다가 버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산그늘이 져서 음산하고 으스스한 곳으로 이곳 역시 밤이면 도깨비불이 떠다니므로 무서워 가지 않는 곳이었다.
-
(45) 아도위, 춘천의병아리랑을 찾아가다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지난해 밀양아리랑답사에 이어 춘천의병아리랑답사를 목적으로 오전 8시 문경에서 출발하여 4시간 만에 춘천에 도착했다. 의병의 고장 춘천에는 ‘대한 13도의군도총재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의 출생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 ‘춘천의 잔 다르크 윤희순(尹熙順) 의사’가 몸 바쳐 의병 활동을 한 곳이다. 의병사에 빛나는 문경 출신 운강 이강년 의병장과 의암 류인석 선생과는 스승과 제자로서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을 계승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와 일통대의(一統大義)를 핵심으로 충(忠)과 의(義)를 강조하며 항일 의병전쟁을 함께 수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의병을 주제로 한 아리랑이 공식적 기록으로 ‘춘천의병아리랑’과 ‘문경의병아리랑’ 둘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문경과 남다른 인연이 있는 곳이 춘천이다. 춘천 탐방 목적은 류인석 의병장의 사상과 업적을 살펴보고 의병 활동에서 불린 ‘춘천의병아리랑’을 듣고 배우면서 아울러 여성들의 의병 활동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작사 작곡한 윤희순 여성 의병장의 ‘안사람 의병가’도 알아보면서 ‘아리랑도시 문경’과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을 알리기 위해서 먼 길을 찾아간 것이다. 지난 5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 소속 위원 15명은 ‘춘천의병아리랑’을 찾아 길을 나섰다. 전국 아리랑전승지역을 찾아서 진도아리랑답사, 정선아리랑답사, 밀양아리랑답사를 수행하고 춘천아리랑을 찾아서 온 것이다. 고봉 기대승의 17대 직손인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의 추천으로 만난 기연옥 회장은 의병장 기우만의 고손녀로 의병의 후손이다. 집안 조상과 지역 의병들이 구국 활동을 벌이던 중 불렀던 '춘천의병아리랑'을 발굴하여 의병의 숭고한 의병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설립된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의 기연옥 이사장과 사전 협의를 거쳐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비를 들여 자비로 건립한 ‘춘천의병아리랑전수관’ 건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도착하자 마자 전면에 ‘환영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고 회원들이 마중 나와 반갑게 우리를 맞으며 환영해 주셨다. 상견례를 나누고 양 단체장 인사말로 행사의 문을 열었다. 이어서 서로 준비한 아리랑 악보가 적힌 유인물을 배부하고 ‘춘천의병아리랑, ‘뗏목아리랑’ 공연과 퍼포먼스가 있었다. 그리고 난 뒤 기연옥 명창의 지도 아래 춘천지역 아리랑을 배웠으며 이어서 이만유 위원장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인 ‘문경새재아리랑’의 역사와 보급 전승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며 그 후 함수호 단장의 장구 장단에 맞춰 아도위 합창단이 ‘문경새재아리랑’과 우리가 창작한‘코로나아리랑’‘풍년아리랑’등을 불렀다. 두 단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오래 사귄 친구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노래 부르다가 일정에 쫓겨 마지막으로 정을 담은 지역특산물을 선물로 주고받았으며, 앞으로 두 단체는 이번 아리랑으로 맺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로 약속하고 전수관 앞에서 포옹으로 아쉬운 작별을 나누게 되었다. 이날 의병 정신과 의병아리랑을 깊이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 ‘의암류인석기념관’을 방문, 김성진 학예연구사의 해설을 들으며 관람하였고, 춘천의 명소 ‘남이섬’을 들려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만추의 정취를 느끼며 즐겁고 유익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왔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2017년 창립 후 ‘찾아가는 아리랑학교’운영, ‘서울아리랑페스티벌’참가 등 대내외적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의 보급과 전승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폈으며 위원들의 견문을 넓히고 자질향상을 위한 국내 유명 아리랑 발생지인 정선, 진도, 밀양아리랑을 답사한 바 있다. 이번 춘천 탐방을 마치며 아직은 여건상 실현하지 못한 디아스포라 이산의 아픔이 있는 사할린 등 해외 동포들을 찾아가 아픔과 희망을 함께 노래하며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목청껏 부를 날을 기약해 본다.
-
(44) 옛길 문경새재 선정비(善政碑) 이야기
-
(43) 아도위 창립 1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를 뒤돌아보며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도시마다 역사, 문화, 특색, 성향, 위치, 경험, 기억 등에 의해 그 도시만의 색깔과 이미지가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의 삶을 영위해 온 사람들이 유무형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지역이나 도시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5년 12월 경북 문경시가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였다. 이에 발맞춰 2017년 6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순수 민간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이하 아도위)를 창립하여 아리랑의 연구, 발굴, 보존, 전승, 홍보, 교육, 공연을 통해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며 아리랑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금까지 활동해 왔다. 아도위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면서 지난 2018년 7월 30일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아도위 창립 1주년 기념, 제1회 학술토론회’를 개최한 바가 있다. 그 이후 4년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경새재아리랑 부르기 운동',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기준악보 제정’ 참여, ‘팔도 및 디아스포라 아리랑제’에 주도적 참여, ‘서울아리랑페스티벌’참가 ‘전국 아리랑전승지역답사 탐방’,‘코로나아리랑 창작 및 발표회 개최’ 등 의미 있는성과도 있었지만, 대내외적 요인으로 아직은 미흡하고 할 일도 많다. 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이 5천만 모든 국민이 알고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꿈꾸며 4년 전 처음으로 개최하였던 학술토론회 때 가졌던 꿈과 희망이 퇴색되지 않게 분발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래 기술하는 2018년 학술발표회 때 필자가 한 인사말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던 대로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헌신적인 42명의 아도위 위원님들과 함께 초심을 유지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문경새재아리랑의 새역사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져 본다 . 인사말 이번 아도위 창립 1주년을 맞아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며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던 중 ‘아리랑도시 문경’이 올해 ‘세계아리랑제’를 계획하고 있음에 즈음하여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제1회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의미 있는 날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함께 자리해주신 내외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발표하고 토론할 세부 주제는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의 재발견’과 ‘축제를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정체성과 위상 정립’입니다. 주제발표자, 지정토론자, 질의응답에 참여하시는 시민들께서는 아리랑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과 적극적인 참여로 토론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가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리랑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께서 발언하시는 자유토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바를 특히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고 아리랑제에 대한 실현 가능한 의견과 조언을 아끼지 마시고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저는 이번 기회에 문경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성공한 축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옛길이 많아 ‘길의 고장 문경’이 될 수도 있고 근대 아리랑의 뿌리로 ‘아리랑도시 문경’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축제는 당연히 축제마다 특성과 목적이 있고 축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보편성과 특이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리랑도시 문경’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경새재아리랑제’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이라는 보편성과 ‘근대 아리랑의 시원’으로서 문경새재아리랑이 부각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토속민요인 ‘문경새재소리’의 존재와 그 소리가 경복궁 중수 시 한양으로 올라가 경기권에 유행하여 1896년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B. Hulbert)박사가 영문 잡지 코리안 레포지토리 (‘Korean Repository’)에 실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리랑 채보 기록과 아리랑을 서양에 알리게 된 역사적인 사실에 이어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 주제곡인 본조아리랑으로 이어지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65년부터 7년간 경복궁 중수 시 한양 간 토속민요 ‘문경새재소리’가 문경으로 다시 돌아와 향토민요 아리랑으로 분류되는 ‘문경새재소리 아리랑’이 되고, 다시 통속 민요라고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으로 된 변천 과정을 겪는 것과 1930년 대구 출신 국문학자 이재욱이 쓴 ‘영남전래민요집’ 의한 ‘경북아리랑’으로 지칭한 ‘문경아리랑’의 존재와 진도아리랑에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라는 사설이 있는 것 등으로 인해 근대아리랑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문경이라는 지역성을 넘어 확장성을 보인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명사이고 위에 기술한 영남전래민요집은 물론이고 1896년 발표된 헐버트아리랑과 1911∼1912년 일제강점기 총독부 조사 자료에 근거해서 아리랑 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이다. 라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의 문경새재아리랑의 정체성에 관한 "아리랑고개론"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경만이 가진 특이성을 가지고 차별화된 프로그램으로 문경아리랑의 정체성과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축제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문경새재아리랑제는 아리랑의 전승과 보급, 전통문화의 계승과 지역문화로서의 정착, 지역민들의 상생, 대동의 장이 되고 아리랑을 통한 문화적 시민 통합으로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등 다기능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문경새재아리랑제’가 소수 아리랑에 관심 있는 주민이나 관광객의 축제로 머무르지 않도록 하고 지역이라는 경계를 넘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팔도 아리랑의 만남과 세계 각국의 교포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 시대에 맞고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고 단계적 발전과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시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금년도 추진하려는 ‘세계아리랑제’는 시기상조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의욕만 넘치고 앞서간다는 느낌이 들며 문경시민도 문경새재아리랑을 잘 모르고 대다수 국민도 문경새재아리랑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과 부족한 예산, 추진 주체의 불안정 등의 여건에서 세계아리랑제 개최는 관 주도 전시행정의 표출이라는 비난과 우려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수준까지 전승(무형문화재 지정 등), 보급과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 등 나름대로 기반을 조성 후에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면 명실상부한 세계아리랑제는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치고 필요 예산을 확보하여 지금부터 한 3∼5년쯤 후에나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준비할 시간도 짧습니다. 국제 행사를 치를 예산도 부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점에서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 아리랑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담긴 제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문경에서 천리나 떨어진 먼 곳 진도, 그 진도 사람들이 부르는 진도아리랑 첫 사설에 왜 문경, 새재, 물박달이란 낱말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문경아 새재야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이 사설이 전국의 많은 아리랑에서 불리고. 심지어 북한, 해외 아리랑에서까지 불리는 이유는 뭘까요? 이걸 알면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의 중요성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아리랑도시'가 아리랑도시답게 되는 그날을 위해 그때그때 유명 인사 몇몇 모셔와 소수 몇 사람들이 여론 수렴 없이 관 주도적이며 비합리적으로 아리랑 정책을 입안 추진함이 아니라 저항·대동·상생이라는 아리랑 3대 정신을 기본으로 아리랑의 주인인 시민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가는 아리랑도시 문경이 되길 소원하며 오늘 학술토론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바라본 오늘, ‘아리랑도시 문경’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리랑은 어느 특정인의 것이 아니다. 긴 세월 뿌리를 내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을 포함하여 그 지역 정체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더구나 많은 권한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이라 하더라도 임기 동안 잠시 그 지역을 대표하고 시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 뿐, 지역이나 도시의 근본이 되는 문화와 역사의 총체인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수백 년 이 땅의 주인인 민초들이 그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고 그 안에 그들의 혼이 깃들어 있고 문경 지역의 문화로 고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당연히 아리랑은 문경 정체성의 핵심의 한 요소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문경의 역사이고 문화이고 뿌리라는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토속민요의 힘, ‘일노래, 삶의 노래’
- 2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
- 3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일노래, 삶의 노래' 오는 23일부터
- 4(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
- 5유인촌 문체부 장관, '국제문화정책 추진전략' 발표
- 6'새 국악진흥법' 시행령·시행규칙 공청회 31일 개최
- 7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4)<br>북해도아리랑
- 8김연자 "노래 좋아 달려온 50년…88 폐막식 하늘 지금도 생각나"
- 9문화체육관광부, 지역 예술단체 22개 선정
- 10전란 속에 피어난 춤, 김동민 일가의 춤4代가 이어준 '오래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