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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6)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심청가의 올라가는 중 흥보가의 내려가는 중 "중 올라간다. 중 하나 올라간다. 다른 중은 내려오는디 이 중은 올라간다. 저 중이 어디 중인고, 몽은사 화주승이라. 절의 중창 하랴하고, 시주집 내려왔다. (중략) 죽장을 들어 메고 이리 끼웃 저리 끼웃 끼웃거리고 올라갈제 한 곳을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개천물에 풍덩 빠져 거의 죽게 되었구나." 익히 알려진 판소리 심청가의 '중 올라가는 대목'이다. 판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강의 서사는 비슷하다. 가사 중의 개천물에 빠져 죽게 된 어떤 사람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다. 심청을 기다리던 중 더듬더듬 문밖으로 나갔다가 개천물에 빠져버린 상황이다. 심청전이라는 거대 서사는 곽씨부인의 죽음과 심청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봉사가 물에 빠지는 장면, 중이 올라와 구하는 장면 등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수상한 복선(伏線)은 반복된다. 판소리라는 노래로 변환된 이후에도 리듬이나 선율의 변별을 통해 암시는 확장된다. 신격이나 기이한 캐릭터의 등장에 사용한다는 엇모리장단이 그중 하나다. 흥보가에도 중이 나와 집터를 잡아주는 광경이 묘사되는데 엇모리장단을 사용한다. 다른 점은 흥보가의 중은 내려오고 심청가의 중은 올라간다는 점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흥보가의 흥보는 지상의 어떤 존재로, 심청가의 심청은 천상의 어떤 존재를 암시한다고나 할까. 판소리의 중요한 패트런(후원자)이었던 조선 후기 양반들의 기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해한 한문 투의 사설, 중국 고사의 원용 등 우리 같은 서민들은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이 즐비하다. 그나마 장단과 선율에 얹어 이면을 그려주니 다행이랄까. 심청가 중타령에 나타난 암시와 복선(伏線) 몇 가지만 짚어본다. 몽은사(夢恩寺)라는 사찰 이름부터 심상찮다. 문자 그대로라면 꿈속의 은혜, 꿈속의 사찰이다. 통상 은혜를 입은 절이라고 풀이한다. 화주승(化主僧)이야 걸식을 토대 삼은 비구(比丘, 남자 승려) 탁발승의 일원이니 특별한 해석이 필요치 않겠지만 사찰의 중창(重創)이라는 코드도 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암시다. 어떤 사건이나 건물을 헐기도 하고 고쳐서 새롭게 짓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외역(馬嵬驛)은 중국 섬서성의 지명이다.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의 난을 맞아 피난을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양귀비 곧 양태진(楊太眞)을 죽인 곳이다. 고사를 인용한 심학규의 상황 설정, 이 또한 암시로 읽어야 한다. 주목할 것은 화주승의 행색이다. 벼슬한 중이 쓰는 굴갓을 썼다거나 도가 높은 스님이 짚고 다니는 육환장(六環杖)을 들었기 때문이다. 비범한 도사 혹은 천계의 인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심청의 인당수 희생과 연꽃 환생에 이르기까지 암시와 복선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심청가에서 화주승으로 묘사된 이 캐릭터는 어디에서 비롯된 인물일까? 흥보가의 도승(道僧)에서 무속의례 제석(帝釋)까지 "중의 뒤를 따라간다. 이 모롱 지내고 저 고개를 넘어서서 고봉 정상 두루봉에 저 중이 가다가 접붓 서며 이 명당을 알으시오. 천하지 제일강산 악양루 같은 명당이니 이 명당에다 임좌병향 오문(壬坐丙向午門)으로 대강 성주를 하였으면 명년 팔월 십오일에는 억십만금 장자가 되고 삼대 진사 오대 급제 병감사가 날 명당이니 그리 알고 명심하오." 박봉술 바디 흥보가 중 집터잡이 대목이다. 신재효가 정리한 사설로 재구성된 예들은 더 풍부하다. "감계룡(坎癸龍) 간좌곤향(艮坐坤向) 탐랑득(貪狼得) 거문파(巨文破) 반월형(半月形) 일자안(日字案)에 문필봉(文筆峰) 창고산(倉庫山)이 좌우로 높았으니~" 풍수적으로 재물과 벼슬을 잉태하는 명당을 한자어투성이로 장황하게 읊어나간다. 심청가의 화주승이 심봉사를 물에서 살려내고 종국에는 눈을 뜨는 대목의 복선으로 기능하는 캐릭터임에 반해, 흥보가의 중은 도승으로 출현하여 명당을 점지해주는 캐릭터로 기능한다. 훨씬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무속의례에 나타나는 중은 명당을 비롯하여 대궐 같은 집을 지어주고 벼슬도 하게 해주며 온갖 이승의 복락을 만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중이 제석천(帝釋天)이고 이 신격이 등장하는 거리가 제석굿이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제석신앙이 불교적인 신으로 출발하여 민속신앙으로 수용되고 가신신앙과 접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보가의 도승이나 심청가의 화주승을 제석에 비유하는 이유는 이런 확장된 제석의 서사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석이 도도하고 고고한 위치에 좌정한 것만은 아니다. 저잣거리에 나오게 되면 구겨지고 비틀어져 희화화된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시대 탓도 있겠지만 판소리와 무속의례, 가신신앙까지 두루 포획하고 있는 불교적 제석이 내동댕이쳐진다. 당금애기를 매개 삼는 민요 중타령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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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5)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판소리가 유네스코 지정 인류 구전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것은 2003년 11월 7일이다. 2001년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 맞이한 경사였다. 이에 앞서 1964년 다섯 번째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그만큼 판소리가 갖는 국내외적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판소리의 영문명은 'Pansori epic chant'이다. 에픽은 장편서사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찬트는 구송(口誦)이라는 점을 강조한 번역이다. 춘향전 심청전 등 예로부터 전해져 온 장편 이야기를 노래로 꾸민 장르임을 분명하게 해두었다. 또 챈트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비롯해 불교의 독경이나 범패 등 성가 혹은 송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반복적인 곡조로 부르는 노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말한다. 처지, 판국, 형편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마당'이라고도 하고 '장(場)'이라고도 한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비롯된 예술 양식임을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판소리는 어떤 마당에서 옛이야기를 지어 부르는 노래 양식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러 과정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날 독립된 음악 양식으로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의 음악적 기원을 전라도 무가로 여기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무가 기원설'이다. 하지만 고전소설이라고 하는 거대 서사가 있고, 판소리꾼으로 불리는 광대들의 활동 내력이있다. 문학적 지형과 음악적 재구성을 두루 살펴야 실체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두부 자르듯 이것이다 저것이다 일방적인 규정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의 억양과 말하기 방식, 노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등이 주요하게 채택된 장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판소리 미학까지 따질 필요도 없이 소리 자체가 그렇다. 예컨대 '니 광한루 댕개왔노!'라고 아니리를 하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창의 바닷가에서 나들이를 시작한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후포는 지금도 줄포, 우포, 사포 등 포구 혹은 옛 포구들에 쌓여 줄포만을 형성하는 지류 중 하나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로부터 포구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은 바닷물 길이 끊겨버렸지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서남해 물길과 맞닿는 공간이다. 후포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전봉준이 나고 자랐던 고을에 이르고 판소리를 정리하고 가르쳤던 신재효의 고을 고창읍에 이른다. 법성포와 변산반도를 눈앞에 두고 줄포만을 나온 배들은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거쳐 영산강에 닿고 나주에 닿는다. 김소희는 나중에 박석기가 마련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연마하게 되지만 광주가 영산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맥락은 서남해 바닷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편제와 여성 판소리꾼의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흥선 대원군과 신재효의 드라마틱한 삶도 어쩌면 이 물길들을 통해서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재효의 아버지가 수도 한양에건정(말린 물고기) 물류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점, 신재효 땅을 밟지 않고는 고창 땅을 지날 수 없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조선 후기 판소리 후원자들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풍경들이다. 고창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이른다. 서편제의 확산이 사실상 나주사람 정재근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인정한다면 이 물길을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편의 판소리는 광주를 비롯해 여러 바닷길을돌며 한 지형을 형성했다.근대기 진도와 목포에서 형성한 판소리의 맥락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목포의 장월중선과 안향련, 진도의 신치선과 이병기를 기억해둘 일이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 완도, 강진, 장흥, 고흥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대 지류와 형성사를 만나게 된다. 우리 판소리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그 하위 분류로 보성소리와 동초소리로 나눈다. 동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동초제는 고흥 거금도 사람 김연수가 재구성한 양식이다.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한다. 동초제를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았던 오정숙은 그녀의 소원대로 일면식도 없는 땅 거금도 스승의 곁에 묻혔다. 서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보성소리는 나주사람 정재근의 법통을 이은 정응민이 지금의 보성에서 재구성한 양식이다. 순창사람 박유전을 서편제의 시조로 삼긴 하지만 나주와 보성을 빼면 그 맥락을 제대로 좇기 어렵다.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면 구례의 송흥록으로부터 남원, 전주의 소릿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길만 통해서도 우리 판소리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을 나들이하며 철썩이는 파도와 탁한 뻘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들을 마주한다. 판소리를 품은 움직이는 그림, 아니 이 풍경은 어쩌면 판소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도의 판소리 마실을 가려면 바닷길을 따라 둘러보기를 권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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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4)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남도 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남도 풍속의 지형은 넓고도 깊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풀어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삼국시대의 향가로부터 오늘날의 가요까지, 영산강이며 섬진강에서 한라 백두까지 남도에서 발원하고 재구성된 문화들이 켜켜이 쌓이고 확산하였다. 이 스펙트럼을 가늠하기란 어린 날 운저리(망둥어) 잡으러 개옹에 나갔다가 잊어버린 검정 고무신짝 찾는 일보다 어렵다. 전문적인 연구자라도 그럴진대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다. 어딘가 혹은 무엇인가 샘플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다양한 장르가 국가의 강제나 지방정부의 요청에 따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고 더러는 잔존 유산으로 남아있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도다. 전국 유일이라고 말하면 다른 지역에서 오해하겠지만 인구 삼만 안팎의 작은 섬에 강강술래,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들노래, 남도민요 등 십수 개가 넘는 무형유산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탄탄하게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중의 다섯 가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내가 줄곧 주장해왔던 상가의 윷놀이나 유네스코 지정 매잡이 풍속 등은 거의 세간에 알려져 있지도 않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전통적인 통과의례, 씨줄 날줄로 엮는 의례와 놀이, 들과 산과 바다에서 행하는 생업의 풍경들이며 그림과 글씨, 몸짓과 소리 예술들이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축약해놓은 듯, 거대 보고서를 압축해놓은 듯 구성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시, 서, 화, 창의 각 장르들을 이처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을 갖고 있다는 점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즐겨 말해왔다. 남도 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진도지역 판소리 소사(小史), 이병기와 신치선에서 신영희까지. 진도 문화 중에서 그 위상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판소리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를 이어받은 인간문화재가 진도사람 신영희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 그 일단을 소개해두기로 한다. 판소리에 전념한 예인들로 박동준, 신치선, 이병기, 양상식, 허회, 최귀선 등을 들 수 있고, 고수로는 김득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진도지역 판소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신영희의 부친 신치선과 이태백의 부친 이병기(본명 이병규)를 거론해야만 하다. 신치선은 1899년 전남 담양에서 신창연(申昌連)과 나주임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을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성장했다.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송만갑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1920년대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했다. 나이 40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여 신영희를 낳았다. 1946년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하여 진도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1948년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이때 제자들이 안득윤, 박연수, 박옥수, 신홍기, 신천행, 회동리의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했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 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옮겨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 순회공연 및 만주 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의 악화로 타계했다. 이병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사람이다. 해방 직후 정의현이 설립한 진도 최초의 국악원에서 판소리 강사 생활을 했다. 진도 전역을 돌며 판소리 강습과 창극 지도 및 활동을 했다. 특히 지산면 지역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판소리 강습생이었던 이임례와 혼인하여 지금의 아쟁 명인 이태백을 낳았다. 이 스토리를 토대로 만든 것이 영화 '휘모리(1994년 작)'다. 최근 국가 지정 판소리 문화재로 지정된 이난초, 해남 씻김굿 명인 이수자, 우수영 부녀요 보유자 이인자, 광주시 지정 판소리 문화재 이임례 등이 모두 형제 조카 사이다. 이병기 작곡이라고 전해지는 해물유희요 <빈지래기타령>을 포함하여 <숙영낭자전> <봄이 오면> 등이 전해진다. 진도사람 신영희는 김소희 수제자로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된 국창이다. 1942년 2월 6일 지산면 인지리에서 신치선의 딸로 태어났다. 인지리에서 성장하다가 의신면 초사리로 이사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어려서 부친 신치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후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 정순임의 모친 장월중선, 이난초의 스승 강도근 등 수많은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1975년에 서울에 올라가서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소희 문하에서 수업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있다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흔히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를 판소리 삼걸이라고 했다. 1976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1979년 연극 '다시라기'로 배우 데뷔를 했다. KBS 코미디 쇼비디오자키-쓰리랑 부부(도창역)로 장기간 출연하여 판소리의 확장에 힘을 쓰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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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3)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장생포는 지금의 여수 선소를 포함한 포구 이름이다. '곡(曲)' 혹은 '가(歌)' 등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생포는 어떤 포구였으며 어떤 노래였을까? "시중 유탁(柳濯)이 전라도에 출진함에 위엄과 은혜가 겸비하여 군사들이 장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왜구가 순천부 장생포에 이르자 유탁 장군이 구원하러 감에 왜구들이 바라볼 뿐이었다. 장군이 곧바로 붙잡았다가 놓아주니 군사들이 매우 기뻐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악지〉(1454년)의 기록, 이 노래가 장생포다. '전라도에 출진함'은 전라도 아닌 곳에서의 출진, 예컨대 '합포(지금의 마산 합포구)만호'였을 때를 추정하게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준옥 교수 등이 밝혀두었다. 유탁 장군이 '합포만호'였던 충혜왕 때는 왜구 침입이 없었고 '전라 양광도 도순문사'였던 충정왕 때와 전라도 만호로 임명된 공민왕 때 즉, 장생포 전투는 유탁 장군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이라는 것이다. 1344년(충혜왕) 원나라로부터 '합포만호'로 임명되었고 1352년에 전라만호가 되었다. 한편 다른 기록도 있다. "장성포(長省浦), 부의 60리에 있으니 고려 때 왜인이 침입해서 여기에 이르자, 유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니 적들이 쳐다만 보다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의 기록이다.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이 핵심 정보다. 선학들이 밝혀둔 장생포의 위치를 추적해본다. 순천부 동쪽 60리 포구, 장생포의 위치 문헌에서 언급한 (순천)부 동쪽 60리 전후한 지역의 포구들은 만흥포(萬興浦), 기질을포(其叱乙浦), 탄잠포(呑潛浦), 성창포(城倉浦), 조음포(助音浦) 등이다. 용문포(龍門浦)는 부의 동쪽 55리, 며포(旀浦)는 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장생포가 몇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정보는 전후 맥락을 고려한 위치와 거리 정보다. 이런 점에서 유탁 장군의 이전 거처였던 합포만호를 포함, 울산 남구 장생포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의 문헌 자료들을 검토한 선학들의 견해는 지금의 여수반도 내 포구에 집중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의 포구 검토가 도움이 된다. 변남주 교수가 발품을 팔아 전국의 포구를 조사했다(고석규 외, '장보고 시대의 포구 조사' 참고). 옛 기록에서 위치를 비정할 때 방위 호명은 해로(물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위상 남동쪽이라도 물길에 따라 동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서에 여수지역 포구를 모두 순천부의 동쪽으로 표기한 이유다. 용문포(龍門浦)는 『읍지』에도 부의 동쪽 55리로 나와 있는데 용인포, 용개라고 불렸으며 현재 '고돌산포'에 해당한다.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다음은 읍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동쪽 60리라 한 곳이다. 만흥포(萬興浦)는 만흥개라고도 하는데 만흥동 만성리 해수욕장 부근이다. 탄잠포(呑潛浦)는 화양면 장수리 자매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조음포(助音浦)는 종화동의 종포, 종개, 쫑개로 추정하고 있다. 기질을포(其叱乙浦)는 모사포로 추정한다. 성창포(城倉浦)는 현재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중에서 장성포를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순천부(팔마비)에서 여수 선소(장생포 내안)까지 동남향 직선거리를 재보니 27.46Km다. 60리는 관례적 환산법으로 계산하면 24km, 도량형법에 따르면 25.2Km에 해당한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지리서의 설명과 부합한다. 한국지명총람 15(전남편Ⅲ)에 의하면, "장생포는 장성포, 장성개와 같다. 쌍봉명 안산리, 소호리, 선원리, 학룡리, 시전리, 웅천리에 걸쳐있다. 고려 30대 충정왕 2년(1530년 표기는 1350년의 오기) 5월에 왜구가 병선 66척을 이끌고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전라 양광도 도순문사 유탁 장군이 정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왜적의 배 한 척을 무찌르고 왜적 13명을 죽이니, 그들이 놀라 달아나서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으므로 유 장군이 스스로 장생포 노래를 지어 부르고, 군사들이 기뻐하여 동동곡(動動曲)을 불렀으므로 더욱 이름났다." 장생포(長栍浦)라는 이름은 벅수(남해안 지역에서 장승을 부르는 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 여수에 벅수가 많은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장생포는 북소리와 관련된 노래이자 연희(演戱) 여수시 쌍봉면 시전리 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둥둥골'이라 한다. 둥둥골 뒤편이 고락산(鼓樂山)이다. 한국향토문화대전에 의하면 북소리에서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최인선 교수에 의하면, 고락산성은 중간에 본성이 있고 산의 정상부(해발 335m)에 보루를 갖추고 있는 백제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산 자체가 성이었다는 뜻이다. 한편 여수 진남관 북쪽은 종고산(鐘鼓山)이다. 한산대첩 때 산이 스스로 울어 충무공 이순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웅웅웅 소리를 낸다 한다. 이 또한 북소리 울려 진군하는 진남(鎭南) 혹은 승전고(勝戰鼓)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니 <장생포>를 북과 연결 지어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락산성(鼓樂山城)에 왜 북 고(鼓)자를 붙였는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장생포의 발생이 유탁 장군과 그 군사들의 승전가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자연스럽게 북(鼓)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할 만하다. 괘락산(掛樂山)이라고도 하는데 테뫼식 즉,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발권식 산성, 시루성, 머리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참고하면 고락산성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산 자체가 큰 북의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수 장생포를 배경으로 고려 말엽에 지어져 대중 사이에 유포된 노래가 <장생포>라고 주장하는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 때의 산성이기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호명의 의미가 크다.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다는 장생포 노래, 그와 관련하여 불리거나 춤으로 추었다는 장소를 현재의 여수 장성마을로 비정한 것은 이런 전거들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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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2)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몸으로 체화되고 맘으로 발원된 몸짓과 소리들이 소박한 타악기들에 얹혀 시공을 가른다. 땅의 조건과 하늘의 이치를 목으로 풀어낸 소리를 정가(正歌)라 했지만, 오로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로 풀어내는 이 소리야말로 천지를 왕래하는 아정한 소리임이 틀림없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인가? 기품이 높고 바르다는 뜻이다. 정가에 비해 속가(俗歌) 그중에서도 천한 계급이 담당하던 씻김굿의 소리를 어찌 기품이 높고 바르다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악(樂)의 격조는 계급의 대물림이나 신분의 귀천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귀천의 이데올로기가 가리고 있던 행간을 들추면 비로소 보인다. 어떤 선율이 흉금을 털어내며 어떤 리듬이 격조를 재구성하는지.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나", ‘송가인 신드롬’, ‘남도 트로트’ 등 개인사를 넘어선 노래 기반의 사회현상을 여러 차례 주목해온 바 있다. 당골 송순단 선생의 음반 작업에 몇 줄 보태면서 이렇게 썼다. "송순단의 굿소리를 수리성이나 천구성을 넘어 귀성(鬼聲) 곧 신에 이르는 소리라 하는 것은 그녀의 영육에 배어든 삶의 서사를 두고 나온 말이다." 아름다운 동행, 운명의 굿판 숙명의 소리 기억을 되살려 정보 몇 오라기를 소환한다. 송순단의 소리는 진도 지산면 지역 무당이었던 친정어머니 여금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나주 출신 외할아버지로 거듭해 올라간다. 열다섯에 시작한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어머니, 오빠, 동생, 아이, 아버지 등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으로부터 그녀가 상속받은 것은 지상의 어떤 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울한 것이었다. 외눈봉사 아버지와 가난한 집, 이 땅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심청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절절한 가족사를 넘어 지역의 역사에 깃든 그녀의 서사가 대하를 이룬다. 죽음을 딛고 일어나 오보살의 법제를 받고, 진도씻김굿 준보유자였던 이완순의 율격을 받았다. 남도 씻김굿의 대표 연행자로 현장을 누비며 남도 전통의 소리 법제와 부채(負債)를 또한 한 몸에 받았다. 운명이었을까. 그 아스라하던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야 비로소 작은 음악 하나를 기록했다. 장구 하나 허리에 대고 온갖 역신들을 마주하는 담대함의 소리다. 징 하나 엷게 울려 지상의 혼령들을 일깨우는 소리다. 가곡과도 같고 남도 전통의 '흥그래'와도 같은 선율이 고이 잠든 영성을 일깨운다. 차원을 넘어서는 공명의 소리요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더불어 가는 동행의 소리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보다 더 깊은 귀성(鬼聲)으로 백만 군사 이끄는 북소리보다 더 넓은 몸짓으로 맞서는 담대함의 소리다. 이제 외동딸 송가인이 국민가수로 등극해 이 땅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다. 나는 연이어 이렇게 썼다. 지극한 가슴 열고 어깨 겯고 가는 송순단의 소릿길, 이 소리 닿는 심연의 저 끝에, 우리 모두에게 이를 축복 있으리니. 만조상해원경, 경자년의 해원 만조상해원경, 본 이름은 옥추경(玉樞經) 또는 옥추보경이다. 독경할 때 읽는 경문 중에서 으뜸으로 친다. 1831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간행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외 출간본들이 몇 권 있고 그 뿌리는 중국 도교까지 이어진다. 영화 '사도'의 OST로 인용된 후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 압도적인 시퀀스, 정신병에 걸렸던 사도세자는 미친 듯 외는 옥추경을 배경 삼아 칼을 휘두른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을 기록한 대천록(待闡錄)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무작정 죽인 중관, 내인, 노속들이 100여 명에 이른다.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원인이다. 옥추경의 본래 기능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몸에 달라붙은 귀신을 쫓아내는 굿거리인데 사도세자는 이마저도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송순단의 만조상해원경(萬祖上解寃經)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망조상 후망조상 부모좌우조상 혼령님과 다생사자 다생남녀 형제숙백 숙질남매 원근친척 무주고혼 금일영가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만반진수 흠향하고 일배주로 감응하시고 살다 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궁에 전하시고~" 근자의 진도씻김굿에서는 연행되지 않는 장르이지만 송순단의 굿에서는 인용된다. 무경(巫經) 연행은 친정어머니 여금순의 굿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뭇 사람들은 만조상해원경 자체의 의미를 높게 치지만 송순단의 경우, 영육으로 체화되고 발원된 장단과 선율의 의미가 더 크다. 흰쥐의 해, 잔뜩 계획을 세우고 포부를 가졌던 한 해가 기울어간다. 반백 년을 더 살고도 항상 세모에 들면 후회가 남는다. 후회 중 가장 큰 일은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집값의 폭등과 경제난으로 자영업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쳤으니 고대사회라면 왕 살해가 일어날 상황이다. 하지만 원통한 마음 푸는 해원(解寃) 뒤에는 상생(相生)이 달라붙는다. 해원 상생, 맥락 없고 명분 없는 노래라면 희망 고문이겠지만 적어도 핍진(乏盡)한 개인사를 극복해낸 송순단의 노래 아닌가. 화려한 반주음악도 수려한 무대도 없다. 그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 들고, 천만 군사 호령하는 담대함을 율격에 담을 뿐이다. 바라건대 이 소리가 해원일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도 포부도 다 잃어버린 경자년 세모(歲暮), 타악기 하나 들고 외는 송순단에 그저 기대는 마음 처연하다. 가장 낮은 땅 이곳으로 해원이여 오라. 가진 자 못 가진 자 우호(友好) 하는 상생으로 오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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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현장성과 직설적인 화법의 통쾌한 남도인문학자 목포대 이윤선 선생의 칼럼이 연재된다. 새롭게 마련된 금요 고정칼럼 ‘이윤선의 현장성 있는 남도인문학’에서 남도 풍류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 만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 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 1941년 잡지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의 지은이 김태웅 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 명창이 백칠십여 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 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 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 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 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 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 시기와 관련된 것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 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 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 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 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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