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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5) <br>분청사기제기편당당한 기형에 힘찬 문양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내가 다닌 직장이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하던 곳이었다.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하는 곳은 국내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는 했었다. 그런데 근래 바둑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다가 주7일휴무제라는 것을 보았다. 직장에서 일주일에 7일씩이나 논다니 순간적으로 참 많이도 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돌이켜 보니 그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논다니 그 것은 노는 것이 아니라 실업자라는 이야기였다. 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백수나 실업자라고 하면 좀 풀이 죽은 이야기인데 돌려서 주7일휴무제라고 하니 유머스러한 것이 나름대로 괜찮은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내가 젊은 시절 도요지 답사에 그나마 열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다니던 직장이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한데다 업무상 지방 출장을 많이 다닌 탓도 있었다. 출장을 가서 일을 마치면 주변에 가마터가 없는가 살펴보게 되고 또 격주토요휴무일에는 가방을 메고 혼자 산천을 누비고 다닐 수가 있었으니 그 덕을 많이 본 것이다. 하긴 격주라고는 하지만 토요휴무제를 실시하는 곳이 별로 없다보니 그야말로 그 날은 나만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집사람은 일터로 아들은 학교로 가고 지인들이래야 다 근무를 하고 있으니 마땅히 갈 곳도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격주토요휴무일이면 가방을 둘러메고 산천 구경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그 곳에는 가마터가 있었던 것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를 찾아 본 것도 출장 때가 아니라 격주토요휴무일에 가방을 메고 일부러 찾아 갔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고속버스로 나주를 간 후 택시를 대절해 찾아 갔었는데 좌측으로 작은 저수지를 끼고 올라가자 나타난 작은 시골 마을이 운봉리 백운마을이었다. 마을 건너편 감나무 밭이 가마터였는데 밭을 일구며 가마는 파손되어 흔적이 별로 없는 가운데 밭 위쪽으로 갑발과 수풀이 뒤엉겨 있는 곳에서 더러 도편이 보였다. 하지만 인화분청의 사발과 접시가 보이는 등 특색은 별로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다만 조선청자에 음각의 화염문과 구름문이 보여 박물관이나 도록에서 보이는 유물들과의 연과성이 주목되는 곳이기는 하였다. 운봉리 분청사기 도요지를 생각하면 별다른 추억이 없는 가운데 그나마 내게는 이곳에서 만난 인상 깊은 도편이 한 점 있다. 굽과 굽에 연결된 몸체가 일부 남아 있는 작은 도편이어서 정확한 기형은 알 수 없지만 굽이 높은데다 기벽이 유난히 두꺼운 것으로 보아 제기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된다. 굽 안과 몸체의 안쪽은 무문인데 굽과 몸체 외면의 문양이 특이하다. 예외적으로 높은 굽 아래에는 뇌문을 돌리고 굽과 몸체에는 백상감의 문양을 새기고 있는데 흡사 한자의 회(回)자 같은 문양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청색의 고운 유약에 시원스러운 백상감의 문양은 상품의 분청사기 제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고나 할까. 여하튼 결손이 심해 전제적인 모습은 그려 볼 수가 없지만 당당한 기형에 힘찬 문양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도자기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출장 때문에 또는 격주토요휴무제를 이용해 가방을 둘러메고 산천을 누비고 다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아득한 날들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운봉리 분청사기 가마터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 눈을 시원케 하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던 그 산과 들에 근래 유례가 없는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고 산사태가 생기고 인명의 손실이 있는 등 피해가 막심하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서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며 수해로 인해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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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4) <br>백자청화편들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편에 관심이 많은데다 수집도 하다 보니 도자기 조각도 쓰인 데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따라서 자료를 찾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쓰인 데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쓰임이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죄인을 다루는 조선의 형벌 중에 압슬형(壓膝刑)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것이 바로 깨진 사기그릇 조각이었다. 깨진 사기그릇 조각 위에 죄인을 꿇어앉히고 무릎 위에는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 고통을 주는 형벌이 바로 압슬형이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무릎을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 중에도 도편들을 모아 붙여 모자이크를 만드는 표현 양식이 있다. 이 때의 도편들은 물론 옛것은 아니고 근래의 도자기 가마터나 공방 같은 곳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통 도자기 도편들을 실제 사용한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충청북도 연기군 금사리 분청사기 도요지를 답사했을 때의 일이다. 주민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염전 바닥에 깔기 위해 이 곳의 도편들을 수거해 가져간 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황당한 경우도 있다. 경기도 광주에는 모 대학 연습림 사무소가 있는데 정문 양 옆에 세워진 기둥을 보면 분청사기 도편들이 박혀 있다. 인근의 가마터에서 나온 도편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장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를 무지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지 애교로 보아 주어야 할지 여간 헷갈리는 일이 아니다. 도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찾아 본 다섯 점의 백자청화편들은 모두 19세기 분원리산이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합뚜껑의 초화문, 항아리의 초화문, 사발 창 안의 초화문, 합뚜껑의 산수문, 그리고 중앙의 화장용기 뚜껑의 꽃무늬 도편들이다. 태토는 정선되고 유약은 약간의 청색이 가미된 청백색이다. 그 위에 고운 빛깔의 청화가 들어 있는 조선 후기 상품의 백자청화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일대는 조선조에 관요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화목의 조달을 위해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광주군 일대를 옮겨 다니던 관요는 금사리 시기의 시험기를 거쳐 영조 28년(1752) 분원리로 옮기면서 그 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정착한다. 그리고는 1884년 민영화가 될 때까지 130여 년간 왕실 백자를 생산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고 민영화가 된 후에도 20세기 초까지 요업이 이루어졌던 곳이니 아주 중요한 가마터라고 할 수 있다. 다섯 점의 백자청화편들은 모두 민영화 이전 관요 시절의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백자들이다. 하지만 한 점 한 점이 인연을 맺은 시기와 장소 그리고 추억들이 있으련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아무런 기억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더구나 과거 분원리를 찾을 때면 가마터만 돌아본 것이 아니라 마을 곳곳의 밭이며 집터며 골목 등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었으니 더 더욱 기억이 희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지도 모를 일이다. 분원리 도편들은 좀 갖고 있는 편이지만 그나마 작고 앙징스러우면서도 태토며 유약이며 청화의 빛깔들이 비슷한 것들을 찾다 보니 이처럼 다섯 점이 모아졌다.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나로서는 따로따로 있을 때보다 또 다른 나름의 맛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글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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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3) <br>백자철화초문호때 이른 더위라도 먹은 탓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중국 도자기 중에는 박태(薄胎)자기라는 것이 있다. 일명 단벽(蛋壁)자기나 탈태(脫胎)자기라고도 하는 것이다. 반 건조 된 기물을 물레 위에 거꾸로 얹어 놓고 돌려가며 표면을 윤기가 날 때까지 칼 같은 것으로 두께가 균일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 이배(利坯)라고 한다. 이처럼 만들어지는 얇은 자기에 암화(暗話)라는 것이 있는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환한 곳이거나 불빛이 있으면 빛이 투과되어 문양이 나타난다. 박태자기는 두께가 0.15mm 밖에 안 되는 것이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손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정도로 약하다. 실용성 보다는 도공이 자신의 기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 도자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도자기에 일찍이 박태자기 같은 것은 없었다. 도공이 자신의 기술을 뽐내기 위해 극한까지 밀어 붙였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완벽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은 엉성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 우리 도자기의 특징이다. 분청이 그렇고 달항아리가 그렇고 고려다완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다. 깔끔하고 정교한 맛은 없어도 손맛이라고나 할까 푸근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든다. 빤질빤질해 밉상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어리숙해 보이지만 정감이 가고 무언가 소통이 될 것 같은 사람 냄새가 풍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도자기에 박태자기가 없다고 해서 아쉬워 할 필요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우리 도자기의 특징을 두고 여러 사람의 언급이 있지만 핵심을 짚은 글 중의 하나가 이태준의 <고완(古翫>이라는 수필에 나오는 한 구절이 아닐까 생각된다. "옛 물건의 옛 물건다운 것은 그 옛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자취를 지녔음에 그 덕윤(德潤이 있는 것이다. 외국의 공예품들은 너무 지교(至巧)해서 손톱 자리나 가는 금 하나만 나더라도 벌써 병신이 된다. 비단옷을 입고 수족이 험한 사람처럼 생활의 자취가 남을수록 보기 싫어진다. 그러나 우리 조선시대의 공예품들은 워낙이 순박하고 타고나서 손때나 음식물에 절수록 아름다워진다” 조선 도자기가 왜 순박하고 왜 그 순박함이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이처럼 간명하게 정리한 글이 또 있을까. 백자철화초문호편은 17세기 지방산이다. 굽은 모래받침에 평굽이며 주구는 이른 시기의 달항아리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판알처럼 밖으로 말아 붙인 형태다. 유색은 회색이 많이 가미된 회백색이며 크기는 작은 주먹만 한 것인데 몸체 양쪽에 철화로 초문을 넣고 있다. 그런데 그 무심한 듯 그려진 철화 초문을 보면서 나는 묘하게도 피카소가 떠오른다. 백자철화호편과 저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데이빗 더글러스 던컨의 사진전 도록 <피카소의 비밀, 피카소의 사랑>에는 피카소가 식사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한 장 보인다. 식사가 끝나 갈 때의 사진인지 칼과 포크가 놓인 접시는 부스러기만 조금 남아 있을 뿐 비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손으로 양 끝을 잡고 피카소가 입으로 뜯고 있는 생선이다. 살은 이미 입맛을 돋우며 입안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생선은 앙상한 뼈만 남아 있다. 새하얀 등뼈를 중심으로 빗살처럼 양옆으로 퍼져 있는 뼈들이 흡사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백자철화초문호편의 철화무늬를 보면서 피카소를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철화무늬에서 보이는 초문의 중심선과 좌우의 곁가지들이 흡사 피카소가 입에 물고 있는 생선뼈와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뽐낼 것 하나 없는 백자철화초문호편을 보면서 중국의 백태자기를 생각하고 피카소까지 떠올려 보다니 때 이른 더위라도 먹은 탓일까.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어디 시원한 수박 화채라도 한 사발 마시면서 머리라도 식혀 보아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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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2) <br>분청상감합뚜껑편추억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이규진(편고재 주인) "콩밭 매는 아낙네야 /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 칠갑산 산마루에 /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흙냄새 물씬 풍기는 고향집 어머니를 생각나게 만드는 정겨운 가사가 아닐 수 없다. 전 국민의 마음을 애잔케 하며 주병진이라는 가수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던 <칠갑산>이라는 바로 그 노래다. 이 노래로 인해 칠갑산 또한 유명세를 타며 전 국민의 산으로 떠오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과 정산면 장평면에 걸쳐 있는 높이 559.8m의 산이다.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었다. 대치천 장곡천 지천 잉화달천 중추천 등이 산을 빠져나와 금강으로 흘러간다. 특히 깊고 급하게 흐르는 지천과 잉하달천이 계곡을 싸고돌며 일곱 곳에 명당을 만들었다고 해 칠갑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칠갑산 등산은 대개 산허리에 있는 휴게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측의 저수지인 천장호를 끼고 산을 내려가면 계곡이 전개되는데 우측으로 이어지는 마을 끝집에 면한 밭 일대가 천장리분청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다. 물론 칠갑산에는 천장리분청가마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휴게소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끝자락에 이르면 숲에 가려 미미하지만 흔적이 보이는데 신덕리분청가마터다. 분청사기합뚜껑편은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것이다. 분청사기합뚜껑편의 상감은 아주 복잡한 문양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우선 도자기 뚜껑의 경우 안쪽에는 대개 문양이 없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안쪽에도 중앙의 국화문과 원문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국화문 등이 보인다. 그래도 안쪽은 바깥쪽 외면에 비하면 문양이 단순한 편이다. 뚜껑의 바깥쪽 즉 윗면은 흑백상감으로 복잡하기가 짝이 없다. 중앙에 국화문과 연판문을, 이를 둘러싼 원과 원 사이에 연주문을, 그리고 그 밖으로는 우점문 안에 국화문을 배치한 복잡한 구도다. 따라서 자유분방한 분청을 보는 느낌보다는 정제된 청자의 여운이 짙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복잡한 문양의 뚜껑을 가진 합은 또 얼마나 다양한 문양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칠갑산을 차로 넘으며 휴게소에 머문 적은 있어도 등산을 한다든가 해서 산을 올라 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칠갑산의 속내나 아름다움의 진수를 맛보았다고는 할 수가 없는 처지다. 하지만 칠갑산 노래라던가 그 품에 안겨 있는 천장리분청가마터나 신덕리분청가마터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칠갑산을 찾아 본 것도 가마터를 답사해 본 것도 오래 전 일이고 보면 추억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더 더욱 그리움으로 애틋한 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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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1) <br> 청자귀면수막새편고려인들은 청자기와로 지붕을 덮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1963년 5월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당시 미술과장)과 당시 직원이었던 정양모(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관장은 청자가마 조사를 위해 강진 사당리를 찾는다. 그리고는 소쿠리 등에 청자 도편을 담아 갖고 나온 동네 아주머니들을 만난다. 당시만 해도 청자기와편은 세상에 알려져 있던 것이 서너 조각에 불과할 때였다. 따라서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의종(毅宗) 11년(1157) 기사에 "왕이 이궁(離宮)을 지었는데 태평정(太平亭)이라 하였다. --- 또 북쪽에 양이정(養怡亭)을 지었는데 그 지붕은 청자로 덮었다”는 기록이 과연 신빙성이 있느냐 하는 의구심이 있을 때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아주머니의 소쿠리 속에 청자막새기와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놀란 정양모 관장 일행이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묻자 자기 집으로 안내를 했다. 그 곳이 가마터였고 64~65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명품 청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란꽃을 장식한 수막새와 당초무늬가 있는 암막새 등 다양한 종류의 청자기와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이정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청자기와는 양이정 지붕에만 덮었었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당리 당전부락에서 출토된 청자기와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당리에서 출토된 청자수막새의 모란문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가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양이정 외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청자기와는 사당리에서만 출토된 것도 아니다. 초기 청자 가마인 원흥리에서도 보이고 강진과 쌍벽을 이루는 부안 유천리에서도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자료는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선운사 동불암에서 출토된 수키와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청자기와는 왕실에서 뿐만 아니라 절에서도 사용되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고려시대에 청자기와는 더 널리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1990년대 초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후 북한의 고미술품들이 중국을 경유해 남한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당시만 해도 좋은 물건들이 흔했고 모조품에 대한 우려도 별로 없을 때였다. 이 무렵 인사동에서 구입을 한 것이 청자귀면수막새편이다. 사당리 당전에서도, 원흥리에서도, 부안 유천리에서도 이런 종류의 청자귀면수막새가 일찍이 출토된 적은 없었다. 청자수막새라고 하면 으레 모란문밖에 알려진 것이 없었던 시절에 듣도 보도 못하던 청자귀면수막새편이 보였으니 당시로서는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입수를 했고 지금까지 오래도록 잘 보관해 오고 있는 중이다. 청자귀면수막새편은 귀면쪽 문양은 전체가 살아 있지만 뒤로 길게 이어지는 부분은 손상을 입어 잘려 나가고 없다. 잘린 부분을 보면 정선된 태토가 회색빛을 들어내고 있으며 안쪽은 유약이 없는데 토진과 어울려 더러 누르스름한 황토색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인 외면에는 푸른 비색의 유약이 빙렬 없이 곱게 입혀져 있으며 귀면은 도범으로 찍어낸 모습이다. 귀면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와당 같은 것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라 도깨비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느낌이다. 도깨비는 두 줄의 양각 선 안에 배치를 하고 있는데 눈 코 입과 귀가 있으며 세 개의 뿔이 달려 있다. 청자에 이런 귀면을 새겨 기와로 사용한 것은 아마도 벽사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태토며 유약 그리고 조형감각 등 청자귀면수막새편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성기 고려 시대 청자를 대표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기존에 알려진 것 중 이런 형태의 청자기와가 없다보니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인 가게에 내가 일찍부터 소장해온 것과 똑 같은 청자귀면수막새편이 한 점 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같은 도범으로 찍어낸 것이 분명한 것이어서 생각다 못해 이 것도 내가 인수를 해 지금은 같은 모양의 청자귀면수막새편을 쌍으로 소장하고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나로서는 잘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실 청자기와는 도자기 선진국인 중국에도 없고 우리보다 후진국인 일본에는 당연히 없는 기종이다. 말하자면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우리만의 자랑스러운 도자기 유물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비취빛 기와로 지붕을 장식한 집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해 보였을까. 상상만으로도 눈부시지 않은가. 그런데 상상을 좀 더 구체화 시켜 볼 수 있는 곳이 한 곳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보면 거울못이라는 연못이 있고 이곳에 정자가 한 동 서 있는데 청자정(靑瓷亭)이라는 이름 그대로 지붕이 청자기와다. 물론 옛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려시대 청자기와 지붕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보니 아쉬운 대로 감상은 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을 기회가 있다면 잠시라도 시간을 내 연못가를 거닐며 정자 지붕에 나타난 고려인들의 마음과 그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나름의 멋과 운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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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0) <br>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웅진과 곰나루의 역사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공주(公州)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475년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지명은 웅진(熊津)이었다. 538년 도읍이 부여로 옮겨가기까지 이곳에서 64년간 5명의 왕이 즉위하였는데 왕릉 발굴로 널리 알려진 제25대 무령왕이 가장 유명하다. 공주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23년(940)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곰나루라고도 불리는 웅진, 즉 공주의 역사에 대해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근래 지인으로부터 양도를 받은 한 점의 분청사기 명문 도편 때문이다.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죽절굽에 태토비짐돌받침을 하고 있다. 태토비짐돌받침은 대개 세 개나 네 개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유약을 안 칠한 굽에 큼직한 두 개의 받침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외면에는 우점문이 시문되고 있으며 포개 구었던 흔적으로 다른 도편 조각도 일부 붙어 있다. 안쪽을 보면 우점문과 연판문 안에 둥글게 네 줄의 원을 돌리고 그 중앙에 큼직하게 글자를 새겨 넣고 있는데 주(州)는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공(公)자는 획이 확실치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공(公)자로 보아 공주로 읽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분청사기에서 보이는 명문은 관사명이 대부분이다. 지방명도 흔치는 않지만 경기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알려진 40여 곳 중 31곳이 경상도 지역이어서 편중 현상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 분청사기에서 공주명은 발견된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면 공주명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귀한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공주 지역 어디에서 만든 것일까. 공주시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는 철화로 유명한 저 학봉리를 비롯해 온천리 도신리 가산리 중흥리 안양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가마터에서 공주명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바 없다. 도대체 이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어디서 만든 것일까. 유약은 살아 있어 번들거리고 백상감 일색에다 명문 자료로는 글자의 크기가 다른 지역의 지명들에 비해 유달리 커 보인다. 하지만 이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출토지를 알 수 없다보니 즐거움뿐이 아니라 내게 호기심과 더불어 진한 궁금증과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공주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려 강 건너를 보면 곰나루가 보인다. 수운을 중심으로 한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곳이건만 근대적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더구나 1933년 금강교가 개통되며 서해안 지구로 통하던 도강(渡江) 기능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노송이 어우러진 자연 경관은 아직도 옛 정취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희미해진 웅진과 곰나루의 역사처럼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 또한 그냥 지워지고 잊혀져야 할 도편은 분명 아닌 듯싶다. 하지만 그 고향은 물론이거니와 유전해온 내력조차 알 수가 없다보니 궁금하다 못해 안타까워 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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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9) <br>분청상감국화문발편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며 이규진(편고재 주인) 충청북도 연기군과 인접해 있는 공주시 의당면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중흥리와 가산리가 그 것이다. 두 곳 모두 특이하게도 주민들에 의해 거래를 목적으로 도편이 수거되었다가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가마터와는 무관한 곳에 버려지는 등 교란이 심한 곳이다. 두 곳 중 가산리 보다는 중흥리가 더 관심이 배가되고 있는 듯싶은 데 그 것은 아마도 일찍이 강경숙 교수의 <분청사기>에 명문 자료가 소개된 데다 특색이 있는 물고기 문양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산리 가마터는 서너 곳이 알려져 있지만 흔적은 미미하며 마을에서 뒷동산을 넘는 소로 주변이 주민들이 도편을 수거했다 버린 곳이어서 전에는 무더기를 이루고 있던 곳이다. 하지만 중흥리와는 달리 명문 자료도 보이지 않으며 물고기 문양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인화문이 촘촘히 박힌 사발이나 접시 등이 보이는 등 특색이 별로 없는 가마터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을 찾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인데 한 번은 KBS 모(某) 국장과 함께 답사를 갔다가 차바퀴가 농로 옆으로 빠지는 바람에 애를 먹다 결국은 레카 차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은 가산리 그 것도 주민들에 의해 도편들이 교란된 장소에서 만난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가산리에서 보이는 도편들은 인화문이 주를 이룬 가운데 별다른 특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은 이 가마터에서도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굽은 내화토 받침에 주변으로 돌아가며 뇌문을 돌리고 있다. 굽에서 시작되는 외면에는 세 줄의 선문과 연판문이 보이고 있다. 여기까지라면 별다른 특색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문양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목되는 것은 이 분청상감국화문발편에서는 가산리 가마터의 특징인 인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잘라져 나간 외면에는 인화가 장식되어 있었을지는 몰라도 남은 도편만을 놓고 보면 상감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은 이 가마터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면을 장식하고 있는 백상감의 국화문을 보면 그야말로 이런 종류로는 유례가 없이 빽빽하게 열 송이가 가득 들어차 있다 보니 답답해 보이기도 하련만 전혀 그렇지를 않고 아름답다. 국화문이야 고려청자에서부터 사랑을 받아온 문양이기는 하지만 분청상감국화문발편에 와서 재탄생한 느낌이 들 정도로 문양의 배치가 새로우면서도 신선한 맛이 느껴진다. 가산리 가마터는 차가 있을 때는 천안에서 연기군을 거쳐 찾았었고 차가 없을 때는 공주에서 택시를 이용해 찾아갔던 곳이다. 물론 앞 동네 지근거리에 있는 중흥리와 한 코스로 답사 일정을 잡고는 했었던 곳이다. 인화무늬만 잔뜩 보이는 가산리 가마터에서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한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 사실 이러한 무늬는 가산리 가마터는 물론이거니와 분청을 통 털어서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신기하면서도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청자는 물론이거니와 분청과 백자에서도 보이는 국화문은 꽃 중에서는 우리 도자기에서 가장 많이 장식된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에서도 월요 청자에서 이미 음각의 국화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청자와 분청의 경우 음각보다는 흑백상감에서 더 특색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국화가 공예품이나 도자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것은 옛사람들이 화중은사(花中隱士)라 해서 가을 서리에 온갖 초목이 모두 시들 때, 꿋꿋이 피어나는 그 고상한 품격을 군자나 은자로 비견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며, 편안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도연명의 저 유명한 시 한 구절도 바로 이런 국화와 은자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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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8) <br> 백자각병편무려 18각을 이루고 있으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엘 가면 전통찻집 '석다원(石茶園)'이 있다. 일반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수석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곳. 이곳에는 아파트 한 채 값과 맛 바꾸었다는 저 유명한 3단석 '선단(仙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가 보금자리를 틀었지만 그 돌이 아니더라도 석다원에는 명품 수석들이 아직도 많아 안복을 누리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과 향기로운 차 향기. 그리고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수석들은 멋과 풍류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멋과 풍류가 어찌 수석인들 만의 몫이겠는가. 이곳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고은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석다원의 박은종(朴恩鍾)님과 여주인인 그 부인을 처음 접한 것은 '무석재(撫石齋)의 수석(壽石)'이라는 석보를 통해서였다. 돌을 어루만지는 서재의 수석이라니 이 얼마나 범상치 않은 제목인가. 그런데 책장을 넘겨보니 제목 못지않게 한 점 한 점이 수준 이상의 돌들이었다. 3단석 <선단>을 처음 본 것도 이 석보에서였다. '선단' 이외의 돌들도 수석의 맛과 멋과 깊이를 알지 못하고서는 수집과 배열 방식이 불가능한 것들이어서 나로서는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박은종님을 처음 본 것은 고 송성문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한강의 혼'을 기증하고 나서 수석인들이 어울려 구경을 갔을 때였다. 그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작년에서야 늘 궁금해 하던 석다원을 처음으로 찾아 볼 수 있었으니 뒤 늦은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석다원을 처음 찾았던 그날 나는 여주인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더 것은 3단석 선단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시절 선단에 매료되어 엄청난 금액을 무리해 구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등은 수석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듯 싶어서 감동으로 가슴마저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다시 두 번째로 석다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건만 그동안 작은 변화가 있어 보였다. 창가에는 못 보던 도자기도 두 점이 놓여 있었다. 조선 후기 지방 가마 것으로 주구는 손상이 있는 등 크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미가 있다는 느낌은 드는 것이었는데 동행을 했던 후배가 그동안 안목이 늘었는지 잽싸게 챙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석다원에 대해 글이라도 한 편 써 보려면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 후배로부터 다시 양도를 받은 것이 바로 이 백자각병편이다. 백자각병편은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지방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유색으로 보아 18세기 후반 쯤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구는 손상되어 목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지만 이 백자각병편의 특징은 아무래도 돌아가며 몸체에 각을 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인 금사리 시기에 이르면 우리 도자기에도 그 동안 못 보던 각을 친 기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병 같은 것에 보이는 것은 대개 8각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백자각병편은 무려 18각을 이루고 있으니 각병 치고는 꽤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찻집 석다원. 수석과 차와 음악이 어울려 멋과 운치와 풍류가 넘치는 곳. 그리고 주인들의 인품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곳. 가까운 곳에 있으면 매일이라도 찾아 흠뻑 그 향기에 취하고 싶건만 오호 통재라 강을 건너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어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석다원이 생각나는 날이면 할 일 없이 석보 '무석재의 수석'이나 뒤적여 보며 아쉬움을 달래 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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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7) <br>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정한수 한 사발 떠놓고 이규진(편고재 주인) 어린 날 고향집에서 바라보던 하늘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여름 저녁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 찐 옥수수를 먹으며 바라보던 하늘에는 왜 그리도 별들이 많았던 것일까. 보석처럼 별들이 반짝이던 밤하늘을 가로질러서는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고는 했었다. 그 많고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서울 하늘을 바라보아도 이제 별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탁해진 공기에 의해, 아니면 인간이 밝힌 불빛에 가려져 별들은 얼굴을 숨긴 채 자신의 모습을 침묵 속에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졸연히 별을 볼 수 없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운 좋게 저녁마다 달과 별을 보며 살고 있다. 내가 침실로 쓰고 있는 아파트의 제일 큰 방을 먼저 주인은 아이들 방으로 썼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는 천장에 붙여놓은 달과 별들이다. 형광 물질로 만든 이 것들은 잠자리에 누워 소등을 하고 나면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나는 싫든 좋든 달과 별을 마주 보면서 살 수 밖에 없으니 행복한 일이라고나 할까. 탁해진 공기에 의해, 인간들이 밝히 불빛에 의해 서울 하늘의 별들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밤하늘의 별이 보기 어려워 진 것은 그리 오래 된 세월은 아니다. 별은 밤하늘에서 늘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경외심과 더불어 그 것을 바라보며 인간의 길융화복과 연결시켜 온 것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별이 바로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북두칠성이야말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별자리로서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시작해 여기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북두칠성은 자루 부분을 표(杓)라고 하고 머리 부분을 괴(魁)라고 한다. 괴의 첫머리부터 시작해 천추성(天樞星) 천선성(天璇星) 천기성(天機星) 천권성(天權星) 옥형성(玉衡星) 개양성(開陽星) 요광성(搖光星)으로 불리며 각각의 별들은 그 이름에 걸맞는 점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2자리에 배속되어 사람의 생사와 운명을 주관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은 19세기 분원산이다. 넓직한 굽에 직립한 입술 등 전형적인 조선 후기 완의 모습이다. 굽은 모래받침에 두 줄의 청화선을, 입술 바로 아래에는 뇌문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태극문과 북두칠성을 그려 넣고 있다. 현재는 두 개의 태극문 사이에 한 개의 북두칠성만 보이고 있지만 원래는 돌아가며 네 개의 태극문과 네 개의 북두칠성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내저 중앙에는 도안화 된 복자도 들어 있다. 나로서는 청화로 이런 구도의 북두칠성이 들어간 도자기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이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은 어디에 사용되었던 그릇일까. 북두칠성이 인간의 생사와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라고는 하지만 이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이 죽음과 관련된 유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보아도 부장되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출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정한수 한 사발 떠놓고 하늘을 향해 자식 점지를 기원하던 그 애틋한 사연의 그릇일까. 아무래도 인간의 죽음보다는 탄생과 관련된 쪽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는 이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을 보면서 우리의 하늘에서 사라진 별들과 더불어 그 많고 많은 전설과 신화들마저도 지워져 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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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6) <br>분청철화연당초문병편직접 습득을 한 것은 아니고 이규진(편고재 주인)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좌측 인물이 아사카와 노리타카, 중앙이 야나기 무네요시, 우측이 한복을 입은 여인이다. 이들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세 점의 도자기가 보이는데 중앙의 것이 저 유명한 백자청화진사연화문호다. 지금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지만 당시만 해도 사진에 보이는 인물인 노리타카의 것이었다. 이 사진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자기 전시회가 열린 장소에서 이를 주최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사카와 노리타카 및 다쿠미 형제와 함께 경복궁 집경당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을 개설한 것이 1924년. 그에 앞서 22년 경성의 조선귀족회관에서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하는데 사진은 바로 이 때의 것이니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도록에서 볼 수 있는 이 사진은 '이조 도자기 전람회' 관련 자료로서는 흔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근래 지인의 소개로 이와 관련된 재미난 자료 한 점을 입수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원래의 소장자는 이미 작고를 했지만 이 자료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듯 봉투에는 귀중문서라는 글씨가 명시되어 있다. 이 글씨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도자기 전시회인 '이조 도자기 전람회' 안내문은 귀하고도 귀한 자료가 아날 수 없다. 자료는 가로 33 세로 25Cm 크기의 종이인데 여기에 등사판 글씨가 들어 있다. 이 것을 세 번 접으면 담배 갑보다 약간 커 보인다. 앞은 영문과 한자로 이조 도자기 전람회가 표기된 가운데 중앙에는 분청호가 그려져 있는데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솜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뒤에는 작은 도자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것을 모두 펼치면 네 면이 되는데 표지와 뒤가 한 면이 되고 한 면은 전람회장 평면도가 그려져 있고 두 면에는 한자와 일본어를 병용한 "이조도자기전람회에 대하여”라는 안내문이 실려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조선민족미술관 개관에 앞서 1922년 10월 1일 경성 조선귀족회관에서 이조 도자기 전람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구체적인 안내문이니 이 얼마나 흔치 않은 귀중한 자료랴. 근래 구입한 도자기 자료 중 이보다 더 나를 흥분시키며 즐겁게 한 것은 아마도 없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의 민예품과 도자기에 대해 야나기 무네요시는 많은 물건을 수집도 하고 글도 썼지만 사실 도자기 전문가는 그가 아니라 아사카와 노리타카다. <조선도자명고>를 펴낸 동생 다쿠미보다도 실은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가마터 답사를 체계적으로 한 것도 노리타카요 분청이 고려 것이 아닌 조선조 것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도 그였다.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이들이 1928년 계룡산 가마터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우측이 아사카와 노리타카 중앙이 야나기 무네요시 좌측이 아사카와 다쿠미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으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서 있는 발치에는 가마터이다 보니 도편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런 것들 까지도 부러워지는 것인지. 그래서 오늘은 계룡산 가마터에서 나온 도편을 한 점 찾아보았다. 도편은 굽도 주구도 없어 정확한 기형은 알 수 없지만 내면에는 유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병의 일부가 아닐까 추측된다. 남은 조각도 크기가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당초 철화 문양만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흡사 덤벙을 연상시키는 흰색의 귀얄문 바탕에 철화로 그려 넣은 연당초문은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도록 같은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것이어서 흥미로우면서도 신기할 뿐이다. 이 분청철화연당초문병편은 계룡산 가마터에서 인연을 맺은 것이다. 직접 습득을 한 것은 아니고 동네 어른께 얻은 것이다. 오래 전 일인데 추석 연휴를 맞아 계룡산 가마터를 찾은 적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키 큰 사내가 산기슭이랑 밭고랑 등을 기웃거리며 살피는 것이 안 되어 보였는지 교회 옆 민가에 사시는 어른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을 건네 준 것이다. 따라서 이 도편을 보고 있노라면 그 날의 내 행색이랄까 남루함이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하고 남 보기에 안쓰러워 보인들 어떠랴. 지나간 세월과 더불어 그 때 그 시절의 열정이 없어진 듯싶어 그 것이 오히려 내게는 그립고 안타깝고 아쉽기만 할 뿐이니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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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5) <br>백자청화각병지석편수화의 화실에 놓여 있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널리 알려진 수화 김환기 화백의 화실 사진은 55년 작가가 직접 찍은 것이라고 한다.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부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화실이니 당연히 그림들이 있기 마련이고 수화의 작품이야 현재 메이저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기록 중이니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그림들보다도 화실 구석구석에 놓여 있는 백자들이다. 그런데 그 많은 백자들을 사면서 수화는 한 번도 값을 깍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63년에 쓴 '항아리'라는 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항아리 값을 깍아서 사본 적이 없다. 장사꾼이 부르는 값이란 내가 좋아하는 그 항아리 값보다 훨씬 싸기만 했다. 부르는 대로 주고 사고 난 내 심경은 항상 횡재한 생각뿐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값이 싼데 어떻게 값을 깍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재미있는 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수화가 백자들을 사들일 때만해도 그림이 팔리거나 잘 거래되던 시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책 표지화나 삽화 등을 그려 용돈을 벌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수화가 55년에 쓴 '그림 안 파는 이야기'라는 글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그림을 안 팔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안 팔기로 작정를 했다.` 값이 안 나가 안 팔기로 했다니 당시만 해도 그림의 거래가 신통치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백자들이 얼마나 대우를 못 받고 저렴했으면 수화가 그 많은 것들을 수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고미술품 특히 도자기들은 현재도 그 가치에 비해 너무도 대접을 못 받고 헐값이어서 안타깝다. 국보나 보물급 도자기들이 현대화 가격에도 못 미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불공정한 기현상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와 같은 빈생(貧生)의 입장에서 보면 또 결코 싸다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야말로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이유를 불문하고 싼값에 백자에 묻혀 살 수 있었던 수화와 그 시대가 몹시도 부러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아, 수화여. 백자항아리들이여! 나오느니 아쉽고 그리워지는 탄식밖에 없다. 18세기 전반 이른 바 금사리 시기로 오면 도자문화에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난다. 특히 임란 후 17세기에 생산이 부진했던 백자청화가 다시 제작되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이에 힘입어 사대부 취향의 산수문이나 초화문을 그린 그릇들이 다수 제작된다. 특히 이 시기의 특징적인 기형으로는 달항아리와 떡메병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중국적 자기의 특징인 각을 친 기형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에 와서 보이고 있는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청화각병지석편은 18세기 전반의 금사리 시기 것으로 보인다. 굽은 흡사 달항아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튼실한데 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붉은색을 띠고 있으며 군데군데 터진 흔적도 보인다. 검은모래가 섞인 모래굽이며 벌어졌던 몸체는 바로 9개의 각을 쳐 뽑아 올리고 있는데 각 면에는 청화로 글씨를 써넣고 있다. 상반부가 손실되어 전체적인 기형은 알 수가 없으나 내면의 불규칙한 유약의 흐름 등으로 보아 합이나 사발 등이 아닌 병인 것만은 분명해 보이다. 문제는 각 면마다 청화로 써 넣은 글자들이다. 청화의 발색이 선명치를 않아 글자의 해독이 쉽지 않은 것이다. 다만 숫자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시문 등이 들어간 것은 아니고 지석이 분명한 것 같다. 손상을 입어 하반부만 남은 것도 그렇지만 청화의 발색이 좋지 않아 글자의 해독이 어려운 것을 감안할 때 이 백자청화각병지석편은 실제 사용된 망자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아마도 가마터에서 일찍이 불량품임을 인정하고 폐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당한 크기며 각을 친 우람한 모습이 남은 형태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듬직한 중량감이 느껴진다. 거기에 알 듯 모를 듯한 청화 글씨들 또한 매력을 더한다고 볼 때 불량품이라고는 해도 이 백자청화각병지석편은 수화의 화실에 놓여 있는 백자들에 섞여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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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4)<br> 백자제기궤뚜껑편별다른 장식 없이 단아한 느낌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롤랑 바르트는 어느 학회에서 자기는 화장실에서 자주 책을 보며 거기서 책을 읽는 것이 제일 잘 몸에 새겨진다고 말해 청중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광주의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롤랑 바르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왜냐하면 화장실에 미니 서재를 구며 놓고 사는 사람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세상은 물론 내 일상과도 격리된 은밀한 나만의 공간이어서 사색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일까. 깊은 사색에 잠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볼적마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변을 보는 사람이 연상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책을 보거나 미니 서재를 꾸며 놓고 살지는 않지만 내게도 집안에 책은 넘쳐나는 편이다. 아파트의 방 하나는 아예 서고이고 거실 벽의 책장은 물론이거니와 마루에도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이 책이다. 그 뿐 아니라 침실에도 사방이 책 더미다. 그 많은 책을 대충 훑어는 보았지만 개중에는 읽지 않은 것들도 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에 보이는 `당분간 읽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는 경우도 많다. 많은 애서가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책은 읽는 것이기에 앞서 보는 것이요 여기저기 어루만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위안이요 변명이 될 수 있을까. 내게는 책뿐이 아니라 도편도 좀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 뿐 아니라 도자 자료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며칠 전에도 지인으로부터 교지 한 점을 양도 받았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사옹원 주부(主溥)에 대한 교지여서 구입을 한 것이었다. 사옹원이라고 하면 궁중 내에서 왕에게 올라가는 모든 진상품과 식사를 담당했던 관청으로서 이에 소용되는 그릇들을 관리하는 것도 이 곳의 업무였다. 실제 그릇 제작을 직접 담당했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은 바로 이 사옹원이라는 중앙 관서의 하급 부서인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거 사옹원의 직제를 살펴보면 도제조 1인, 제조 4인, 부제주 5인, 제거 2인, 제검 2인, 판관 1인, 종6품의 주부 1인, 종7품의 직장 2인, 종8품의 봉사 3인, 종9품의 참봉 3인과 사기장 380인, 서리 6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실제 사기번조작업은 종8품인 봉사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봉사 중 1명은 사기번조작업이 있을 때마다 분원으로 파견되었으며 이를 번조관 또는 분원낭청이라고 불렀다. 이에 따르면 주부는 사기번조를 담당하는 직접적인 직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직제와 달리 바로 위 직급의 판관과 더불어 1인밖에 없다는 점에서 다수로 이루어진 아래 위 직책을 연결하는 고리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주부를 임명한 교지의 발행 연도는 옹정 10년이다. 서기로 따지면 1733년이다. 이를 가마터와 견주어 보면 금사리에 해당된다. 금사리 백자가마터는 1726년부터 1752년까지 존속했던 곳이니 1733년은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교지가 분원으로 내려가 사기번조작업을 직접 관장했던 봉사 즉 번조관이나 낭청에 대한 것이 아니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옹원의 주부라는 직책인데다 금사리 시기와 맛 물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귀하면서도 재미있는 자료랴. 차제에 교지 발행 시기에 해당하는 금사리 가마터에서 나온 도편을 한 점 살펴보기로 하자. 백자제기 중 곡식을 담던 보(簠)와 궤(簋)는 양식이 비슷하다. 다만 땅을 상징하는 보는 사각형인데 반해 하늘을 의미하는 보는 원형이라는 점이 다르다. 백자제기궤뚜껑편은 몸체는 없어지고 타원형의 뚜껑만 남은 것이다. 상태는 뚜껑 아래 부분 가장자리로 약간의 훼손이 있을 뿐 양호한 편이다. 상단에는 네 개의 꽃잎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주름처럼 단을 이루어 내려가다 음각의 뇌문을 장식해 마감하고 있다. 전형적인 설백의 금사리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백자 제기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도자기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것이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제기의 원형이 중국의 청동기 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 조선 백자에 이르면 금속 제기의 원형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것이 만들어 진다. 분할된 굽, 거치문, 띠장식 등이 그 것이다. 이는 일부 18세기로 이어지는데 백자제기뚜껑편도 그런 경향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별다른 장식 없이 단아한 느낌을 주는 것이 금사리 시기 도자기들이 주는 특징이거니와 이 백자제기궤뚜껑편 또한 그런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매우 깔끔하면서도 정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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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3)<br> 백자천지현황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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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2)<br> 백자소각병편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 이규진(편고재 주인) 문예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여류 작가인 손소희 여사가 연재를 했었다. 소설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문단 이야기였는데 삽화도 본인이 직접 그렸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라 내용은 기억이 없지만 원고료를 받으면 자주 냉면과 불고기를 사 주시던 추억만은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손여사를 생각하면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본인의 첫 창작집으로 1949년 시문학사에서 나온 <이라기>가 없다고 해 구해 드린다고 약속을 했건만 지키지를 못했다. 원고 때문에 집으로 전화를 드리면 더러 남편인 김동리 선생이 받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동리 선생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그런 것이 아니다보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고는 했었다. 김동리 선생은 1995년 작고를 하셨는데 묘비명을 미당 서정주 시인이 썼다고 한다. 한 분은 작가로 또 한 분은 시인이지만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단의 거목들로서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니 묘비명을 쓸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묘비명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 미당이 동리 선생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짐작이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떠나 그 말 자체를 즐기고 싶다.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문구인가. 나는 도자기에 푹 빠져 사는 그런 탐미파가 되고 싶지만 어디 언감생심 가당키나 한 일이랴. 어여쁘다라는 것은 예쁜 것의 옛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예쁘다보다는 어여쁘다라는 말이 얼마나 더 정겹고 맛갈스러운가.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예쁜 것도 그렇지만 어여쁜 것은 큰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크기가 40Cm가 넘는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예쁘다던가 어여쁘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궁색해 보인다. 적어도 도자기가 예쁘다던가 어여뻐 보이려면 귀엽고 깜직해 앙징스러운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없을까 도편을 뒤적이다가 찾아 낸 것이 백자소각병편이다. 왼쪽에 밑 부분이 달아난 것은 분원리에서 직접 답사를 통해 만난 것이고 우측의 비교적 온전한 것은 시중에서 구입을 한 것이다. 굽은 그냥 잘라버린 밑굽이고 몸체는 8각의 면을 치고 입술은 말아 붙인 형태다. 그런데 두 점을 놓고 보면 밑 부분이 달아난 것과 온전한 것의 차이를 제하면 유색이며 크기며가 너무도 똑 같지 않은가. 한 마디로 말해 두 점은 같은 18세기 후반 분원리 가마터에서 같은 도공의 솜씨로 만들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는 쌍둥이 형제가 분명한 것이다. 크기가 손가락만한 이 작은 백자소각병편은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작아 음료나 그런 것을 담아 쓰기에는 적당해 보이지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용도는 화장용기밖에 없어 보이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귀한 향수라도 담아 두었던 용기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 작고 앙징스러운 백자소각병편을 보고 있노라면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라는 말이 왜 자꾸 떠오르는 것일까. 일본 민예관에도 이와 똑 같이 작고 귀엽고 앙징스럽게 생긴 병이 한 점 있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들의 연관성이 늘 궁금해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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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1)<br>청자투각상감국화문보기 드물게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고려청자를 장식하는 기법으로는 음각 양각 투각 상형 상감 등이 있다. 안료에 따른 무늬로는 또 철화 동화 퇴화 금채 등이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장식기법이나 안료에 따른 무늬 중에는 병용해 사용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 같다. 사정이 있어 투각과 상감을 함께 쓴 자료가 없나 찾아보았는데 두 점을 보았을 뿐이다. 청자상감투조연당초문개(靑磁象嵌透彫蓮唐草文蓋)는 13세기 것으로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다. 장방형의 상자 형태로 화장도구의 뚜껑으로 보이는데 윗면 중앙에 위치한 능화형 창 안에 수금문(水禽文)을 넣고 여백에는 운문(雲文)을 상감하고 있다. 측면에는 연꽃과 연잎을 투각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상감으로 액센트를 주고 있다. 청자상감쌍학투각당초문침(靑磁象嵌雙鶴透刻唐草文枕) 또한 13세기 것으로 호림박물관 소장품이다. 일종의 도자 베개로 윗면에는 목을 교환한 두 마리 학을 원문 안에 상감하고 있으며 옆면은 당초와 능화창을 투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왜 청자에서 투각과 상감을 혼용한 것은 보기가 힘든 것일까. 투각은 사실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감도 마찬 가지다. 따라서 투각과 상감은 그 자체로 각각 의미가 있다 보니 구지 병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일까. 여하튼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아 본 결과는 투각과 상감을 병용한 것이 생각보다 흔치 않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내가 뜬금없이 투각과 상감의 병용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근래 인연을 맺은 청자투각상감국화문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편의 모양을 살펴보면 좌우에 흑백으로 선을 내리 그어 칸을 만들고 그 안에는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국화절지문을 상감하고 있다. 꽃은 백으로 줄기와 잎은 흑으로 처리 흑백 상감의 대비 속에 국화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좌우로는 투각의 흔적이 보이는데 아래 위가 잘린 것과 더불어 기형을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앞서 소개한 청자상감투조연당초문개와 청자상감쌍학투각당초문침이 위에 상감을 옆에 투각을 하고 있는데 비해 이 도편은 중앙에 상감을 하고 있고 좌우에 투각의 흔적이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투각상감국화문편의 기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두께로 보아 청자 의자인 돈편은 아닌 것 같고 화분대로 보기에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남은 흔적으로 보아 원통형에 돌아가며 교대로 투각과 국화문을 상감한 것으로 본다면 당연히 호나 병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은 청자 지통이나 필통은 아니었을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온전히 남아 있었더라면 어떤 기형이 되었던 청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 것이어서 도편이라고는 하지만 여간 애착이 가는 것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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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90) <br>10년치 간지명 중 일부 도편도편 중에 10년치 간지명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를 제작하는데 있어 흙(태토)과 물과 불은 기본적인 3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흙이 근간이라면 물은 수비를 하는데 있어서, 불은 소성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성을 위해 불을 지피려면 나무가 필요하다. 나무 중에서도 소나무가 필요한데 그 것은 다른 나무들보다 오래 타는데다 비교적 화력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모량이 많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주변의 소나무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서 화목을 가져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마터 자체를 옮기는 것이 유리했는지 1676년 승정원일기에 관요는 대략 10년을 주기로 이설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공사 중 훼손의 염려가 있는 가마터가 급하게 발굴이 되었는데 번천리 5호와 선동리 2,3호가 바로 그 것이다. 한국도로공사의 의뢰를 받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을 한 이 가마터의 보고서는 1986년 10월15일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라는 명칭으로 발간이 되었다. 이는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가마터 발굴조사보고서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주목 되는 것은 선동리 2호라고 할 수 있다. 가마는 이미 파괴되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교란된 상태에서나마 많은 도편을 수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굽 안에 음각으로 새겨진 10년치 간지명이다. 이로 인해 <승정원일기>의 관요 10년 주기 이설 기록이 현장에서 사실로 확인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게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도편 중에 10년치 간지명이 있다. 그 것도 다른 곳이 아닌 선동리 2호의 간지명들이다. 소개를 하면 경진(庚辰,1640) 신사(辛巳,1641) 임오(壬午,1642) 계미(癸未,1643) 갑신(甲申,1644) 을유(乙酉,1645) 병술(丙戌,1646) 정해(丁亥,1647) 무자(戊子,1648) 기축(己丑,1649)이다. 그러니까 1640년부터 1649년 까지 10년치 간지명이 되는 것이다. 간지명 중에는 원경(原庚)명도 보이는데 이는 시작된 해인 경신년이라는 뜻으로 보이며 간지명에 좌우(左右)가 들어간 것도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문제는 '승정원일기'가 기록하고 선동리 2호에서 간지명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관요 10년 주기 이설이 17세기 가마터에만 국한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아니면 그 이전 시기에도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5,16세기 가마터 분포 현황을 보면 꼭 화목만을 찾아 옮겨 다녔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기가 늦은 관음리보다 시기가 빠른 우산리 가마터들이 접근성이 불편했을 골짜기 더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단순히 화목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발굴보고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선동리 2호는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심하게 파괴가 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발굴 이전에는 논을 만들면서 나온 도편들이 흩어져 있어 눈길을 끌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면서 유심히 살펴보아도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가마터가 있던 곳에 작은 밭뙈기가 있어 시절 따라 농작물의 변화가 더러 보일 뿐 가마터가 있었다는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은 것이다. 선동리 2호에서는 간지명 뿐이 아니라 조선청자와 철화도 보이고 원 안에 제(祭)자를 넣은 백자청화도 보고가 되고 있다. 17세기 백자청화라면 귀하기가 짝이 없는 것인데 내게는 제자 없이 원만 남은 선동리 도편이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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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89)<br> 분청철화호편계룡산 산마루턱의 산빛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일제강점기에 가마터를 발굴한 것은 계룡산 분청사기도요지가 유일하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굴이 된 후 조사보고서는 1929년 3월25일 <계룡산록도요지조사보고(鷄龍山麓陶窯址調査報告)>라는 이름으로 발간이 되었다. 아주 오래 된 것인데다 시판된 적도 없다보니 구경조차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꼭 갖고 싶은 책 중의 하나여서 오매불망하다 결국은 포기를 하고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복사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고궁박물관 자리에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지하 서고를 방문해 보니 마침 책이 있었다. 양해를 구한 후 책을 갖고 나와 인근의 문방구점에서 복사본을 만들어 지금까지 간직해 오고 있다. 계룡산 분청사기도요지는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에 의해 공동으로 2차 발굴이 이루어졌고 93년에는 보완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7년에는 정밀지표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동안의 여러 가지 미비점들이 보완되었는데 그 결과물이 2007년 <계룡산 도자기>라는 제목으로 발간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29년에 나온 <계룡산록도요지조사보고>는 그 가치가 반감되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편뿐이 아니라 도자 관련 책자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가치가 저하되었다고는 해도 나는 지금도 기회만 있다면 이 책을 손에 넣고 싶은 심정이다. 계룡산 분청사기도요지라고 하면 아무래도 분청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다른 지방의 가마터에서도 분청철화를 혹간 볼 수 있지만 여기로 흔적만을 남기듯 조금 사용해 본 것과 전문적으로 널리 사용된 계룡산 가마터의 분청철화와는 어짜피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룡산 분청사기도요지의 분청철화라고 하면 나는 일명 쏘가리라고 하는 물고기 문양이 인상에 남는다. 따라서 이 문양이 있는 도편이라도 한 점 갖고 싶어 오랜 세월 관심을 가져보았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어서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분청철화호편은 몸체의 반쪽만 남은 것이다. 입술은 일부 남아 있지만 굽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몸체에는 귀얄을 분장하고 3단으로 나누어 아래 위로는 연판문을 중앙에는 초문을 철화로 장식하고 있다. 크기로 보아 단지에 가까운 것인데 온전했더라면 차호 같은 것으로 사용했으면 적당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기물이다. 계룡산 분청사기도요지에 대해서는 도록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을 갖고 있는데 이처럼 아래위로 연판문을 돌리고 중앙에 초문을 장식한 수법은 좀처럼 보기 힘든 양식이어서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나름의 멋과 맛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청철화하면 계룡산계룡산 하지만 이 것은 사실 막연한 이름이다. 생각해 보라. 계룡산이 어디 어느 동네 뒷동산은 아니지 않은가. 정확히는 계룡산 밑 학봉리가 맞는 것이다. 물론 학봉리에도 한두 군데 가마터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을을 통과하며 좌우로 널려 있고 동학사 아래 여관촌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이야 물론 흔적이 미미한 곳이 많겠지만 이처럼 대단위 가마터가 산재해 있고 분청철화를 대량으로 만들어 낸 곳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고 보여 진다. 분청철화호편은 가마터에서 직접 만난 것은 아니다. 어느 지인에게서 양도를 받았을 터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언젠가 가마터를 돌아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하니 이 정도만 해도 여간 귀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잘 보관해 오고 있는 중이다. 도편이라고는 하지만 온몸에 꽉 찬 느낌의 철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학봉리 마을 입구의 어여쁘게 생긴 교회 건물이며 흰 구름 둥실 떠가던 계룡산 산마루턱의 산빛이 가마터와 더불어 손짓해 부르고 있는 듯싶어 지금도 마음이 설레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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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88) <br>조선청자상감편시원한 해답이 있을 리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직관적이어야 하느냐 분석적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치가 않아 보인다. 직관은 전체와 통하고 분석은 부분과 연결된다고 볼때, 그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도자기를 볼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람직할까.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령 여기 백자달항아리가 한 점 있다고 하자. 기형만을 놓고 보면 아름답지가 않다. 우선 기우뚱한데다 중간에는 이은 자국도 보여 반듯하지가 않다. 색깔만을 놓고 보면 이 또한 아름답지가 않다. 색깔도 일색이 아니고 얼룩이 지는가 하면 탁한 느낌이다. 굽을 들여다보면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일찍이 지적했듯이 모래가 묻어 있고 깨끗지도 않은데다 지저분한 느낌마저 든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뜯어보면 결코 아름답지가 않은 것이 우리 도자기다. 그런데 이를 놓고 전체적으로 보면 아름답다. 기형이며 색깔이며 굽이며 부분적으로 볼때는 어설퍼 보이고 남루해 보이는 것들이 서로 보완을 하며 잘 익어 농익은 맛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신기하면서도 묘한 어울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도자기를 볼 때는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 부분적으로 보아서는 낭패를 하기가 십상이다. 우리 도자기를 분석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만드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우리의 전통 도자기는 도공이 이것들을 만들 때 섬세하게 부분에 신경을 쓴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알려진 바로는 숙달된 도공은 하루에 사발 정도는 3~4백 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를 만들려면 수비된 태토를 회전하는 물레 위에 얹으면 그대로 사발이 되어 나오는 것이지 부분적으로 요리저리 잘 만들자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의 라꾸 다완 같은 것은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태토를 손과 주걱으로 이리저리 다듬고 어루만져 만든다. 그러니까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조렇게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며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것들과는 달리 우리의 도자기는 만드는 과정부터 상대방을 의식치 않고 대범하다 보니 보는 방법도 직관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도자기를 아무리 직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온전한 도자기를 두고 볼때 이야기요 도편이 되면 그럴 수가 없다. 어짜피 부분적인 것이니 전체적으로 접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편에 관심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내게는 직관적인 것보다 분석적일 때가 많은데 아쉬운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청자상감편 두 점은 모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4호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른 바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입힌 백태청자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각각 흑상감이 들어가 있으니 귀한 것이다. 상감기법은 고려청자를 유명케 한 장식기법 중의 하나로 그릇 표면에 도구를 이용해 문양을 파낸 후 백토(白土)와 자토(赭土)를 채워 넣는 기법으로 소성 후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타나 흑백상감이 된다. 흑백의 상감기법은 고려청자를 이은 분청에서도 보이지만 백자에서는 흑상감만 더러 보일 뿐이다. 더구나 흔치 않은 백태청자에 흑상감의 문양이 들어간 것은 여간 귀하고 보기 힘든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만난 것이건만 아직도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는 것은 그런 귀한 인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점 모두 백태청자로 부분적으로 남은 것이어서 기형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짐작컨대 장군병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볼 뿐이다. 좌측의 것은 흑상감으로 위에 세 줄과 아래 두 줄 사이에 세로로 두 줄을 그어 구분된 칸을 만들고 그 사이에 문양을 넣은 양식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문양은 줄기와 잎과 열매인데 열매는 동글동글하고 잎 끝은 면상감을 하고 있다. 유색은 엷은 청색이며 빙렬은 없는 편이다. 우측의 것은 좌측의 것보다는 청색이 약간 짙은 편인데 고운 빙렬이 전면을 뒤덮고 있다. 여기에 흑상감으로 바른쪽에서부터 큼직하게 수복(壽福)을 새겨 넣고 있는데 글자는 훼손된 부분이 있어 온전치 않지만 남은 모양만으로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다. 좌측의 문양도 그렇지만 우측의 수복명 상감도 조선청자에서는 현재까지 온전한 것이 알려져 있는 것이 없어 보기 힘든 귀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백태청자는 조선 초부터 시작해 관요에서는 17세기 까지 보이는 기종이다. 하지만 부분만 남아 있다 보니 기형도 번조받침 등도 알아 볼 수가 없어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다행인 것은 쪼각이기는 하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밉지는 않아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수수이삭 같은 열매들은 무엇이며 수복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수복은 말할 것도 없이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거북이 소나무 달 해 사슴 학 등과 같은 십장생 문양을 통해 수복을 기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볼 때 백태청자에 직접 수복을 새겨 넣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어서 예외적인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평균수명이 나날이 늘어가는 요즘의 세태와 더불어 도자기를 빚던 아득한 세월 저편의 선조들과 요즘의 우리가 생각하는 장수와 수복의 의미는 과연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 것인가. 두 점의 조선청자상감편 앞에서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물론 시원한 해답이 있을 리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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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87) <br>백자철화용문호편철화로 춤추고 있는 용만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조선 초기 백자에 쓰인 청화 안료는 국내산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전량 수입을 해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외교 관계나 불가피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교역이 원활치 않을 경우 청화 제작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국내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가 청화 안료를 대신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다. 그렇다고 하면 조선 백자에 철화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 부터일까. 현재 실물로서 가장 오랜 된 것은 백자철화상선감태감정선명지석(白磁鐵畵尙善監太監鄭善銘墓誌石)이 있다. 이 지석으로 보아 적어도 1468년을 전후해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5C 후반부터 16C 전반의 관요 가마터에서는 아쉽게도 철화를 볼 수 없으며 16C 후반에 가서야 약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17C에 이르면 백자 문양으로는 철화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사용된다. 그 것은 임진왜란 후 청화의 수입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 철화가 그 대용으로 많이 사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C에도 초기의 관요 가마터인 탄벌리에서는 보이지 않고 상림리부터 시작해 선동리 송정리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궁평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에도 18C와 19C에서 계속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17C 철화를 대표하는 도자기로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보물 제 645호인 백자철화운용문입호(白磁鐵畵雲龍文立壺)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백자철화운용문입호는 구연부가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고 어깨는 풍만하게 벌어져 있으며 아래로 갈수록 급격히 줍아지다가 굽에서 다시 벌어져 마무리 되는 형태다. 구연부에는 철화로 당초문을,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복련대(伏蓮帶)를 장식하고 있으며 굽 위에는 이중으로 삼각문을 돌리고 있다. 몸체에는 여의두형의 구름무늬와 더불어 용이 살아 꿈틀대고 있는 느낌인데 17C 특징인 갈기와 수염이 앞을 향해 휘날리고 있다. 용의 비늘은 넓은 부채꼴이며 발톱은 세 개에 안경을 쓴 듯한 눈동자가 선명하다. 한 마디로 잘 생긴 백자입호에 적갈색의 철화용이 어울려 빼어난 장관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17C 관요산이 분명한 이 백자철화운용문입호는 어디서 제작된 것일까. 17C 관요인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마을 민가 뒤 밭에 주요가 위치해 있다. 여기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계곡에서 흘어내린 물이 도랑을 이루며 지나고 있다. 아주 오랜 전 이 도랑을 정비 할 때 나온 도편을 몇 점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가마터에서 산일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점의 도편이 뒤섞인 것이어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모양이나 철화의 색감과 문양 등으로 보아 보물 제645호인 백자철화운용문입호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한 점의 도자기에서 나온 도편이 아니라 여러 점의 도자기에서 깨진 조각들이기는 하지만 이것들을 종합해 유추해 보면 왠지 모르게 백자철화운용문호와 강하게 동질성을 느끼게 되고는 한다. 도편은 모두 철화가 들어간 것으로 주구가 살아 있는 것이 2점, 몸체가 3점, 굽이 2점으로 합이 7점이다. 주구에는 빗금 사이에 당초문을 어깨 부분에는 복련대를 장식하고 있다. 몸체는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는 용의 비늘이 보이는 2점과 3개의 발톱이 보이는 발이 한 점이다. 굽은 제법 큰 것과 작은 것인데 두 점 모두 삼각문을 돌리고 있다. 이런 철화의 문양과 백자의 태토와 유색 그리고 적갈색의 철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백자철화운용문입호의 고향은 바로 이곳 상림리 백자 가마터라는 강한 심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1631년부터 1636년경에 운영된 가마터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인조(仁祖)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1623년부터 재위가 끝나는 1649년 사이와 맛 물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인조 집권 시기에 운영된 관요가 분명한 것이다.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취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이 시기에 왕권을 상징하는 백자의 용 문양이 기운생동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인조하면 저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 떠오르건만 이 시기 백자호에서 철화로 춤추고 있는 용만은 가히 독립된 주권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힘이 넘쳐 보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옳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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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86)<br> 백자청화뚜껑편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국보 제219호인 백자청화매죽문호(白磁靑華梅竹文壺)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다. 높이가 41Cm나 되는 당당한 크기에 청화로 앞뒤에 매화와 대나무를 그려 넣은 초기 백자청화를 대표하는 명품 중에 명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품도 구입 당시에는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주장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물건이다. 다행이었던 것은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똑 같은 양식의 백자청화매죽문호편이 발견되어 그러한 의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백자청화매죽문호에 대한 저간의 사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성미술관 리움이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박물관 중의 하나다. 그런 권위 있는 기관의 구입 물건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반 시중에서는 얼마든지 진품을 놓고도 엉뚱한 시비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삼성미술관 리움이 물건을 구입하려면 관련된 전문가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세간의 평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백자초기청화는 귀하다. 수십 년 고미술업에 종사한 사람 중에서도 초기청화를 만져 본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다고 하면 초기청화에 대한 문외한은 의외로 많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문외한들이 나서서 감정을 하게 될 경우 어떻게 될까. 재미있는 것은 가짜를 진품으로 감정을 할 경우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진짜를 가짜로 판정해 나중에 책임을 감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하면 감정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처음 보는 것이거나 감정에 자신이 없는 물건이라면 어느 쪽을 택하게 될까. 심정적으로 당연히 책임이 없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청화뚜껑편은 잠시 동안이지만 시중에서 바람을 쏘였던 물건이다. 바람을 쏘이는 동안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값이 저렴해 지는 바람에 구입을 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이 것을 구입한 것은 내 나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래를 할 물건이 아니어서 나로서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입장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구입 후 나보다도 더 오래 고미술에 관심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전집 출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선배에게 보여 주었더니 횡재를 했다고 치하를 해주었다. 나 또한 이 백자청화뚜껑편을 볼 때마다 가치에 비해 헐값에 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기분이 매우 좋아지고는 한다. 백자청화뚜껑편은 연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달리고 그 아래로는 단을 이루듯 층을 만든 뒤 끝 부분이 꺽여지며 마우리 되는 전형적인 초기 백자 항아리의 뚜껑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온전치가 않다는 점이다. 토진(土塵)이 묻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지고 터진 부분도 여러 곳이 있다. 한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모래가 묻은 부분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일부러 꾸며서 인공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흔적들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화의 발색이다. 아무래도 조선 초기의 청화는 중국에서 수입을 한 것이다 보니 명 초기의 백자에서 보이는 특징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것을 보면 청화가 검게 뭉쳐 터지는 것 같은 부분을 볼 수 있는데 백자청화뚜껑편의 청화 또한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조선 초기의 백자청화뚜껑편인 것이다. 청화의 문양은 들국화 절지문을 세 군데 배치하고 그 사이에 나비가 두 마리 보인다. 이런 모양의 들국화는 보물인 백자청화망우대명초충문잔탁(白磁靑華忘憂臺銘草蟲文盞托)과 백자청화매조죽문호(白磁靑華梅鳥竹文壺)에서 보이는 형식이다. 나비 중 한 마리는 날개를 활짝 편 상태고 또 한 마리는 날개를 접은 모습이다. 꽃과 나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나비는 꽃에서 꿀을 채취하고 꽃은 나비를 통해 꽃가루를 전파한다. 공생관계로 밀접한 관계인 것이다. 왜 백자항아리 뚜껑에 이런 문양을 넣어야 했을까.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문양은 그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 않은 것들이 많다. 들국화와 나비도 그 의미하는 바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깊은 속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리움 소장의 국보 제219호 백자청화매죽문호에 대한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동서고미술 백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텔레파시가 통한 탓일까. 백사장은 자못 흥분된 목소리로 방금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백자 전시를 보고 나오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것과 한국의 명품 백자들이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 정말이지 그 수준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기계치에 속한 편이어서 아들에게 인터넷 예약을 부탁 했더니 이미 관람 신청이 보름 정도가 밀려 있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보긴 꼭 보아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옳을까. 관람 방법을 고심해 보아야 하겠지만 그런 전시가 열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봄을 앞두고 우리 고미술계에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꽃이라도 활짝 핀 느낌이어서 여간 황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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