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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낭독'의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K-문화독립군'1일 K-팝페라 분야의 선두 주자 듀오아임과 'K-문화독립군'이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공식 기념식에서 뮤지컬 페치카 배우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낭독 뮤지컬'을 공연했다.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여정, 대한민국 만세’를 주제로 한 이번 기념식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양규 장군 역의 지승현 배우가, 애국가는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노래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강상민 성악가와 국방부 성악병이 선창했다. 이날 가장 주목을 받은 순서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제재로 낭독과 뮤지컬로 꾸며진 부분이다. 독립선언서 낭독은 독립운동가로 분한 배우들의 뮤지컬 퍼포먼스로 진행됐으며, K-문화독립군과 이종찬 광복회장이 함께 했다. 지금 얼음 어는 마음이라 하여 우리가 여기를 강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물이 물로 이어지고 길은 길로 이어진다고 우리들 중에서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끝을 보았나/뮤지컬 페치카 중에서) 공연이 시작되자 주세페김이 뮤지컬 페치카의 ‘누가 끝을 보았나'(이상백 시, 주세페김 작곡) 노래를 부르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한 후, 이어서 10명의 배우들이 독립선언서를 격정적인 목소리로 낭독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교육, 문화, 정치, 외교, 무장투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풍찬노숙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지켜낸 단호한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피가 낭독이라는 장르를 통해 절절히 재현되었다. 결말에서 이종찬 광복회 회장이 공약3장을 단호한 어조로 낭독을 끝내자 관객들은 큰 박수로 호응하였다. 이어서 주세페김의 '대한독립 만세' 선창과 참빛친구들과 물푸레중창단 어린이들이 가세하여 뮤지컬 페치카의 대합창 ‘독립의 노래’를 부르자 행사장은 갑자기 태극기 물결로 가득 찼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울컥하는 참석자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이 작품을 연출한 주세페김 예술감독은 국민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한 발음과 혼(魂)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여기에 주세페김이 이번 행사를 위해 작곡한 배경음악 '빛을 향하여(Towards the light)'가 낭독 분위기를 크게 고조시키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구미꼬김, 황건, 차은진, 서미소, 김정민, 조여진, 박성진, 양승원, 전효혁 배우들 전원이 독립선언서 공약 3장를 모두 암송을 하였다는 것이 감동이었다. 일제 침략에 대해 저항하는 독립투사로 분하여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붉은 단심이 뜨겁게 전해졌다. 무대를 풍성하게 보여준 출연진이 어린이에서부터 중장년까지 3세대가 출연하여 더욱 감동이 더해지는 장면이 되었다. 공연을 마치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무대 뒤로 찾아와 전 출연진과 특히 어린이들의 열연에 대해 격려를 해주었다. 한편 듀오아임(소속사:지케이컴퍼니)은 10여 년 전부터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랑코리아와 독보적 창작음악들을 선보여 왔다. 그동안 의병장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러시아 페치카 '최재형' 같은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애국정신를 기리기 위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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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독립운동가최재형 상' 공모전 개최(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는 제5회 최재형 상 공모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최재형 선생이 실천한 '페치카 정신'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 받아 최재형 상 선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다. 접수방법은 최재형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서식을 다운 받아 작성해서 전자 메일 주소(choijaihyung@naver.com)로 접수하면 된다. 대상은 상금 1천만원과 상패가 주어지며 단체상은 명예로운 상패가 수여된다. 제1회는 2020년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첫 번째 대상 수장자는 안산 고려인단체 '너머' 창립에 큰 역할을 했던 조영인 대표가 수상했고, 2회는 옥수수 박사로 널리 알려진 김순권 박사가 수상했다. 제3회 수상자는 김준일 한문화재단 이사장이 받았고, 제4회는 이태석재단의 구수환 이사장이 수상했다. 제3회 4회 수상자는 상금 1천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제1회 단체상 수상은 영산그룹(대표 박종범), 제2회는 수산그룹(대표 정석현), 제3회는 쓰리테크놀로지(대표 이장우)가 받았다. 4회 수상기업은 한국콜마(윤동한)가 받았다. 이 외에 특별활동가 상은 상패와 약간의 부상이 있는데, 1회는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민족학교를 운영하는 김 발레리아 교장선생에게 주어졌고, 제2회 때는 안산 '너머'의 기초를 놓은 김승력 대표가 받았다. 제3회 활동가 상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세종학당을 운영하고 있는 허선행 교장이 받았고, 작년 4회 때는 활동가 상이 두 명이었는데 폴란드 전 한인회장 남종석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고려신문사 한 블라디슬라브 씨가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은 "제2, 제3의 최재형 선생 같은 분들이 발굴 되어 최재형 선생의 페치카 정신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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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선생 부부 합장 기념 음악회 성료독립운동가 故 최재형 선생 부부의 103년만의 합장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는 11월 17일 저녁 7시부터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용산아트홀 대극장 미르에서 ‘최재형부부 합장 기념 후원음악회’를 개최한다. 이번 음악회에는 용산구청과 마론윈드 오케스트라가 힘을 보탰다.앞서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8월 14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자리에서 ‘백 년 만의 해후,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이란 슬로건 아래 최재형 선생과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 부부의 합장식이 거행됐다. 부부는 지난 1920년 최 선생 서거 이후 103년 만에 함께 영면에 들었다.마론윈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진행되는 음악회는 ▲최재형 선생 생애 영상 ▲최재형 선생님(베이스/바리톤 윤종민) ▲백학(배우 황건) ▲최재형 / 태극기(역사어린이합창단) ▲향수 (윤종민·황건) ▲독도는 우리 땅 ▲기념사업회 소개 및 감사패 증정 ▲아리랑 (Arirang) ▲용산 (Mountain of Dragon) ▲Auld Lang Syne(윤종민·황건·역사어린이합창단) 순서로 이어졌다. 문영숙 (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장은 "올해로 창단25주년을 맞은. 마론윈드 오케스트라도 재능기부로 웅장한 무대를 만들어 주었고 베이스바리톤 윤종민교수님 배우황건님도 재능기부 출연으로 감동을 주었다. 특히 윤종민교수의 최재형선생님 노래는 장중한 연주와 함께 더욱 빛났고 황건배우의 백학은 러시아독립운동을 상기시켜 주었다. 듀엣으로 두분이 부른 향수는 당시 고향과 조국을 떠나 일제와 싸우셨던 선열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짐작해보는 시간이었다.다음에는 최재형 장군의 의병정신을 주제로 한 무대를 올리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음악회 무대밖에서는 24개의 액자로 최재형사료와 사업회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도 함께 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는 국민모금액을 최재형묘 복원 사진집을 발간해 오시는 분들께 전달했고, 그동안 최재형기념사업회를 후원해준 기업. 한국파마.아시아발전재단 조남철상임이사. 면사랑 정세장 사장님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또한 최엘레나 여사를 국내로 모셔오는데 큰힘을 실어준 엘지 유플러스와 손정일교수님에게도 감사패를 전달했다 최재형 선생은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로 이주한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했다.러일 전쟁 이후 국외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어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해 재창간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 대한 기여로 '시베리아 페치카'라고 불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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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치카' 최재형 부부, 순국 103년만에 국립서울현충원서 합동안장식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과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가 순국 103년 만에 고국 땅에 도착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합동 안장됐다.14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최 선생 부부의 합장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이종찬 광복회 회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독립 관련 보훈단체장, 회원, 최재형 선생의 유족 등이 참석했다.최 선생의 묘는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조성됐으나 이른바 '가짜 유족 사건'으로 멸실돼 현재까지도 빈터로 남아있다. 앞서 최 선생의 묘는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조성됐으나 2009년 가짜 후손에 의해 다른 시신이 묻혔다는 사실이 확인돼 빈터로 남게 됐다.이후 유족들은 멸실된 묘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희망해왔음에도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하도록 규정한 국립묘지법에 따라 묘를 복원할 수 없었다.이에 국가보훈부는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의 위패와 배우자의 유골을 함께 묘에 합장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최재형 선생을 부인 최 엘레나 여사와 함께 국립묘지에 합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최 선생은 ‘페치카’로 불렸다.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의미로, 평생 시베리아 동포들을 돌봐줬던 그의 독립운동에 투신한 뜨거운 열청에 대한 존경의 의미이다. 1907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안중근 의사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그는 시베리아 동포들의 ‘대은인’으로 추앙으면서 '러시아의 페치카'라고 불렸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은 9세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하여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모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조국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1920년 최 선생이 지원한 무기를 바탕으로 치른 청산리ㆍ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우수리스크를 급습해 최 선생을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족들과 동포들은 최 선생의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이후 최 선생의 부인 최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가족까지 돌보다 1952년 키르기스스탄에서 홀로 잠들었다 합장식에는 최 선생의 유족들과 박민식 장관, 이종찬 광복회 회장,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러시아 사할린 동포를 대표하여 참석한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러시아 동포들은 말도 배우기 전에 집안에 걸린 최재형 사진을 보면서 '페치카'라는 말이 각인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었다. 오늘 두 분의 합동봉환식을 맞이하게 되어 기쁘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회장은 "최채형 선생은 국외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고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부인 최 여사는 자본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키르기스스탄으로 유배되어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안중근 의사의 남은 가족까지 돌보다 1952년 키르기스스탄에서 홀로 잠들었다."고 전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날 추모사에서 "최재형 선생님과 같이 일신을 독립운동에 바치시고 그 곁에서 내조하며 독립운동을 함께하신 분들이 있어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며 "이제 대한민국이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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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독립운동가 최재형한말의 독립운동가.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최재형의 집안은 극심한 가난으로 당시 하산에 있는 한인학교에도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서 러시아학교에 다녔다. 11세 때 집에서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었고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페테르부르크까지 항해했고 이때 많은 견문을 넓혔다. 7년간의 선원생활로 러시아 뿐만아니라 세계문물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했으며 이때문에 러시아 군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한인들의 자녀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러시아어와 문물을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고등소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한인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조선인들은 최재형을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1908년 4월 얀치혜에서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 연해주 일대에 출병하여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헌병대가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서 최재형의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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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페치카 최재형 지사 순국 102주기오늘은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 페치카 최재형 지사 순국 102주기입니다 저는 오늘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또 순국선열들의 피로 일군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최재형 선생의 영전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조국을 잊은 적이 없건만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두 번이나 버렸습니다. 한번은 이념의 장벽에 가려 긴 망각으로 버렸고, 한번은 국립묘지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연해주 항일투쟁의 페치카 최, 최재형 선생은 이제 우리가 예우에 맞게 모셔야 합니다. 최재형 선생은 102년 전인 1920년 바로 오늘 4월 7일에 재판도 없이 일본의 총탄에 돌아가셨습니다. 대한민국은 사후 42년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70년 11월 17일에 바로 추모식을 하고 있는 이곳 서울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08위에 묘를 만들어 모셨습니다.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바쳐 항일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허묘로 모신 분들이 있고 최재형 선생의 묘도 허묘였습니다. 당시 후손으로 등록된 사람은 최규흠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의 후손들은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당시 철의 장막이라 일컫던 소련에 살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야 대한민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1995년에 독립운동가 후손초청사업으로 최재형의 막내딸 최 엘리자베타와 손자 최 발렌틴이 한국에 왔고 최재형의 후손으로 등록되었던 최규흠이란 사람과 DNA검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최규흠이 가짜후손으로 밝혀졌습니다. 가짜후손이 무려 30여년 동안을 유족연금을 받았던 것입니다. 2004년에야 비로소 최재형의 막내딸 최 엘리자베타가 유족연금 수급자로 등록되었고 2005년 사망하여 손자 최 발렌틴이 이어받았습니다. 2006년, 최 발렌틴은 국립서울현충원의 안내를 받아 애국지사묘역 108위 최재형의 묘에 참배를 했고 그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후 2009년에 최 발렌틴이 현충원에 참배하려 했으나 묘는 멸실되었고 묘가 있던 빈 터에 꽃다발을 놓고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사진을 남겼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08위는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묘였습니다. 후손이 가짜로 판명되어도 그 묘의 주인은 최재형 선생이십니다. 후손만 바꾸면 되는데 후손에게 연락도 없이 묘를 멸실시켰다는 것은 최재형 선생을 독립운동사에서 삭제시킨 것과 같습니다. 행정착오로 가짜후손을 등록했다면 진짜 후손이 나타났을 때 시행착오를 밝히고 제대로 모셨어야 합니다. 후손들은 그래도 할아버지의 조국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구나 하면서 참배를 하고 그 다음에 왔을 때 또 참배를 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후손에게 연락도 없이 묘는 없어지고 빈터만 보는 손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당시 최발렌틴은 언어도 통하지 않아 어디에 하소연도 못한 채 그냥 돌아갔습니다. 손자는 2010년 자신이 러시아어로 출간한 『최재형』 책에 사진과 함께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최재형 기념사업회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2015년 부부위패비 5번에 겨우 부부의 이름만 올렸습니다. 최재형기념사업회와 최재형 선생의 후손들은 어마어마한 재산과 생명까지 바친 연해주 항일독랍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을 200여 명이 넘는 부부위패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린 것이 항상 죄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2020년,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후손들은 최재형 순국 100주년을 맞아 보훈처와 청와대를 찾아가 후손도 모르게 멸실시킨 최재형 선생의 묘를 복원시켜 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현행법만 내세워 반드시 유골이나 시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정부가 잘못한 일이 밝혀지면 새정부가 바로잡아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이 순국선열의 예우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법이 바뀌었다고 잘못된 행정을 그래도 답습한다면 그 또한 과거의 행정착오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입니다. 보훈처에 알아본 결과 30여년 간이나 가짜후손 행세를 한 최규흠은 이름만 있을 뿐 모든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현재 최규흠은 작고한 상태입니다. 이는 누가 봐도 묘를 멸실시키면서 가짜후손의 기록도 삭제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는 누가봐도 행정실수를 감추기 위해서였죠. 현재 최재형 선생의 부인 최 엘레나페트로브나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의 희생자로 머나먼 키르기스스탄 비쉬켁 공동묘지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후손들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요청합니다.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최재형 부인의 유골을 봉환해올테니 1970년 11월 17일 조성되어 2006년까지 존재했던 최재형 선생의 묘를 복원하여 부부합장묘를 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최재형기념사업회와 최재형 후손들은 키르기스스탄 대한민국 대사관과 협력하여 올해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올해는 대한민국과 키르기스스탄 수교 30주년입니다. 현재 후손들한테도 동의서를 다 받아놓았습니다. 부인의 유골과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의 집 마당에서 흙 한 줌을 가져오거나, 최재형 선생의 유품을 애국지사 묘역 108위에 부부합장묘로 복원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7주년이며 최재형 선생 탄신 162주년입니다. 이렇듯 뜻깊은 해에 최재형 부부 합장묘를 애국지사 묘역 108위에 복원해주신다면 새정부는 상징적으로 순국선열을 제대로 모셔서 과거정부와 차별화가 될 것입니다. 정부는 지난해 홍범도 장군의 훈격을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시켜 유해를 고국으로 안장했습니다. 훈격을 최고등급으로 승격한 이유가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초기 독립운동의 태동지였던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였고 한인들의 페치카였습니다. 엄청난 재산과 목숨을 바쳤고 당시 연해주 한인들에게 난로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1962년 서훈심사는 최재형 선생의 신분이 낮고 후손도 없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있다는 것을 관심을 가진 분들은 다 공감합니다. 더더구나 연해주에서 최재형 선생과 동시기 활동한 분들의 서훈은 거의 2등급인 대통령 장이고 1990년 이후 서훈을 받은 분들도 모두 대통령장입니다. 최재형 선생의 서훈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데 재심의 조항이 없어서 조정을 못한다고 합니다. 미비한 조항은 보완하면 되고, 없는 조항은 필요시 새로 만들어 재심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법이 없어 못한다는 것은 직무유기나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이 고향이라 지원해 줄 지자체도 없습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구성원들은 최재형 선생과 혈연도 지연도 없는 순수한 단체로 그 어떤 이권도 사리사욕도 없습니다. 오로지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최재형 선생을 제대로 알리고 선양하는 단체입니다. 오늘 최재형 순국 102주기를 맞이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도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나눠드린 묘지복원 책자와 그 안에 묘지복원 동의서가 들어있습니다. 펜도 넣었으니 돌아가실 때 묘지복원사업에 찬성하는 서명을 꼭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상으로 최재형 선생 102주기를 추모하며 기념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4월 7일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문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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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독립군 다짐2021 UCC 공모전○ 공모주제 - 그 어머니, 그 아들 #안중근 의사 <장부가>와 #조마리아 옥중편지 <아들아 아들아> 노래부르기 UCC영상 공모 ○ 기간 및 일정 - 2021.9.2 (안중근의사탄생일) ~ 11.03 (학생독립운동기념일) ○ 지원자격 - 개인 / 단체(학생의 경우 지도교사상) (학생, 교사, 가족, 대학생, 군경, 동호회, 해외동포, 외국인 등 제한 없음) ○ 접수방법 - 유튜브영상 업로드 필수 참조사항 1. 영상제목 만들기: 자유제목+(장부가 또는 아들아 아들아)+(신청인 단체 이름 명시) ※예시: 대한 영웅 안중근의 노래, 장부가(홍길동) ※예시: 영웅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옥중편지, 아들아 아들아(홍길동) 2. 필수 해시태그 삽입: #안중근 #장부가 #조마리아 # 아들아아들아 #옥중편지 #뮤지컬페치카 #K문화독립군 #다짐2021공모전 #신청자(개인,단체) 3. 공개, 퍼가기 허용 ○ 심사기준 - 진정성, 연출력, 가창력 (단체: 협동심, 인원수, 아이디어) ○ 시상내역 - 총액 2천만원 - 1등 600만원(1) / 2등 300만원(2) / 3등 100만원(5) / 특별상 100만원(3) - 보훈처장상, 광복회장상, K문화독립군상, 시도교육감상, 지역문화원장상 ※ 시도 교육감상(지역별 학생, 교사 시상) - 개인학생상, 지도교사상, 단체상 - 소속 학교에 토크콘서트 무료제공(2백만원 상당) (참고: 지도교사상의 경우 지역별 교육청의 참가여부에 따라 해당여부가 다름에 양해바랍니다.) ※ 우수작 제출자 중에서 뮤지컬 페치카 공연 단역 또는 조역으로 출연섭외 가능 ○ 문의 - ☏ 031-755-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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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선생 순국 제100주기 추모식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순국 제100주기 추모식’이 오는30일(금)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현충관)에서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 이하 ‘기념사업회’)주관으로 열리는 것으로, 당초 선생의 순국일인 4월 7일에서 코로나19로 추모식을 연기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기념식은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최재형 선생의 4대손인 최 일리야씨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약전 봉독, 추모사,장학증서 수여, 최재형 노래 등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최재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생계를 돕고 학교를 세웠으며, 러시아 정부가 지방정부 시장으로 추천할 만큼 한인사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선생은 한인 동포들에게 한량없이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로 불렸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선생기념관 1층 입구에는 ‘페치카’가 놓여 있다. 이날 추모식에 이어 ‘최재형 상(賞)’시상식이 이어진다.이번 시상은올해 첫 번째로 진행하는 것으로, 지난해 3·1문화재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1문화상 특별상(상금 5천만 원)을 최재형 가문을 수여했다. 그리고, 이 상금을 최재형 선생의 후손과 기념사업회가 합의를 통해 기념사업회가 위탁받아 이번 ‘최재형 상(賞)’으로 시상하게 됐다. 이번 시상을 위해 지난 4월 23일부터 5월 15일까지 추천자를 접수하고, 선정위원회를 개최하여 최종 수상자를 선정했다. 최종 수상자로 먼저, 본상에는 (주)에스디바이오센서 조영식 회장이선정됐다. 조 회장은 국내 거주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한글 야학인‘(사)너머’의 초대이사장으로 재정적 후원과 고려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해왔다. 단체상은 러시아 우수리스크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등 평소 재외동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공로로 영산그룹(회장 박종범)이 선정됐다. 특별활동가 상에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고려인민족학교를 이끈 김 발레리아 교장이 선정됐다.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 1858~1920)은 함경북도 경원(慶源) 사람으로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로 이주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적극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국내에서 오는 애국지사들을 맞이하고 이범윤(李範允) 등과 상의한 후 국권회복운동에중추기구를 만들기로 결심하여 동의회(同義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서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 고취에 진력하는 한편 항일 무장단체로 육성하였다. 또한 1909년에 안중근(安重根) 등 동지 14명과이등박문 등 일제 침략의앞잡이들을 모두 암살하기로 맹약하고 왼손무명지를 끊어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는데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10년 7월에 이르러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그를 인수하여 재간 및 노우키에프스크 한족민회장(韓族民會長)으로서 한교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자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은 앞으로의투쟁방법과 계획을 논의하였다. 또한 노령 한인 지도자들은 재차 무장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군인을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다. 1919년 11월 그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그 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한 ‘4월 참변’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동년 5월 22일 상해에서 순국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당시 참석자는 이동휘·안창호 등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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