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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가 김채원 단장, 연출력과 무대 장악력에 찬사한국무용(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전수자)가로 활동하고 월광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한양대, 중앙대학교 등에서 지도자로 활동해 온 김채원 <아리 앤 랑 무용단> 단장이 ‘2016 사할린아리랑제’ 총연출과 독무 출연으로 연출력과 무대장악력을 발휘하여 사할린교민과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 행사는 한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회장 정은하)가 사할린주한인협회, 사할린주이산가족협회, 사할린주노인회 3개 교민단체의 초청으로 지난 12월 1, 2일 <사할린한인문화회관>과 <홈스크시문화회관>에서 8도아리랑과 춤으로 두 차례 펼쳤다. 12개 지역 아리랑 단체 37명이 펼친 8도아리랑 무대는 고려인 2, 3세와 러시아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보였다. 1세대가 1930~40년대 고국에서 듣고 부른 곳곳의 아리랑으로 구성했다.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안상옥 함미경 위정순 김은자 이화정 강복순), 상주아리랑보존회(김동숙 박노경 김인순 김갑태), 대구아리랑보존회(김상준 이상헌 곽노린 김선오), 영남아리랑보존회(정은하 권숙조), 성주아리랑보존회(임옥자 이금향), 서울아리랑보존회(유명옥), 구미아리랑보존회(장선주), 부산아리랑보존회(김희은), 청주아리랑보존회(강옥선), 문경아리랑보존회(송옥자 장순덕 안원규 최옥자 장순자 임이순), 아리 앤 랑무용단(김채원), 김애경무용단(김애경)이 조국의 혼을 담은 무대로 박수를 받았다. 또한 한인 징용 유적지인 ‘이중징용위령비’와 ‘망향의 탑’ 추모제의 위령제 연출도 맡았다. 이번 두 무대의 총연출과 마지막 무대인 <북을 울려라>에 독무로 출연, 탁월한 연출력과 무대장악력을 발휘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특히 현지 언론 <새고려신문>과 <한국어TV방송>의 주목을 받았는데, 현지 공연 연출팀으로부터 내년 공연의 출연 의뢰를 받기도 했다. 김 단장은 이번 출연 단체들로부터 아리랑의 다양성과 각 아리랑의 속성들을 파악하는 기회였고, 이 경험을 발전시켜 해외 동포공연 맞춤형 ‘아리랑 얼쑤!’ 팀 운영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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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제주의 들노래 합동공연영·호남·제주의 대표적인 농요가 고성 우산리 앞 들판에서 울려 퍼진다.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 고성농요보존회(회장 김석명)은 제19회 정기 공연 및 영·호남·제주의 들노래 합동 공연 한마당을 오는 20일 오후 2시 고성군 고성읍 우산리 앞 들판 고성농요 공연장에서 펼친다. 특이 이번 공연은 영·호남, 제주의 대표적인 들노래를 초청 모심기, 논매기, 밭매기, 보리타작, 길쌈 일 등을 직접 하면서 전승 민요를 부르는 전국 유일의 현지 공연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공연은 풍년 기원제를 시작으로 대통령상을 차지한 경북 공처농요와 전북 순창농요, 제주도 농요보존회의 공연, 그리고 경남 고성농요로 이어진다.특별 출연으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진주·삼천포 12차 농악 및 고성 김임종 명창의 고성 전통상여소리, 우리소리 국악학원의 가야금 병창, 허덕순 국악연구소 삼도 설장구, 이영자 무용단의 전통 굿거리 등이 참여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 관중 모두에게는 고성막걸리인 농주(農酒)와 국수를 제공, 일요일 전통체험의 가족 나들이로 적당하다.김석명 회장은 "귀중한 문화유산인 전승민요와 농경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현지들판에서 공연하게 됐다”며 "농촌을 생각하고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청소년의 교육현장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문의는 ☎011-571-8668. 홈페이지 nongyo.com이나 고성농요(한글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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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지역춤, 대구·경북지역의 춤지리와 기후환경에 따른 대구·경북인의 기질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무더운 날이 많다. 그리하여 대구·경북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중시하며 이러한 생태환경적 배경으로 대구·경북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켜왔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배경과 춤전승 대구·경북지역은 역사적으로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의 중심이 송도(개성)와 한양(서울)로 옮겨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영남호족의 세력이 여전히 핵심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선비(양반)정신’이 깃들어 있는 독특한 지역춤의 특성을 전승하여왔다. 신라시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는 가야지무(伽倻之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琴舞)가 있었고,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창무(黃昌舞)와 처용무(處容舞), 상염무(霜髥舞), 무애무(無?舞), 오기(五伎) 등 남성춤도 많았다. 그밖에도 도솔가무(兜率歌舞), 회소곡(會蘇曲),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 등 민간생활과 밀접한 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관기와 권번춤 전승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와 상주로 이어져 온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34년)에 대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국가와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지금의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년,영조 43년),『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 발간), 『경상도 읍지』(1832년경), 『영남읍지』(1871년경,1895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 등>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등 4명이 대구기생조합이나 서울로 진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 중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 김천조합 소속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고,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달성권번’이 새로 설립되었다. 무형문화재 종목의 연희와 춤들 대구·경북지역이 고대부터 근대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침탈의 거점인 부산·경남지역이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유교와 양반문화를 비롯한 예술문화는 여전히 대구·경북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농악영남지역 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고깔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북부권이 남부권보다 더 큰 고깔을 쓰는 경향을 보이며, 판굿도 발달하여 7종목(고산, 욱수, 청도차산, 금릉, 비산(날뫼), 구미무을, 경산보인)이나 지정되어 있다. 그 특징은 원박적이고 아주 빠른 리듬과 웅장한 북춤과 화려한 고깔춤이 발달했으며, 천왕매기굿(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나 지신밟기에서 잡귀잡신을 쫓는 힘찬 덧배기가락과 덧배기춤이 발달했으며,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와 뒤풀이춤이 발달했다. 고산농악(대구 1호)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태극무늬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각자 춤추는 춤굿, 손잡고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나선형(螺旋形)으로 들어갔다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등이 특징이다. 욱수농악(대구 3호)은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과 원형으로 춤을 추는 둥글데미,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춤 등이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경북 4호)은 천왕기(天王旗)싸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꿋꿋하고 향토적인 옛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금릉빗내농악(경북 8호)은 마을의 성황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가 섞여진 동제(洞祭)의 형태로 진풀이 농악과 무당굿과 줄다리기 등이 혼합되어 가락이 매우 강렬하고 종류도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뫼북춤(대구 2호)은 대구비산농악에서 북을 연주악기로 추는 북춤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무을농악(경북 40호)은 쇠와 소고는 전원이 전립에 상모를 쓰고 이외에 배역들은 모두 백색의 큰 고깔을 쓰는데,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길굿가락과 정적궁가락, 덧배기가락 등 경상도 특유의 쇠가락이 발달하였다. 경산보인농악(경북 41호)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하였고, 섬세한 덩덕궁 가락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탈춤탈춤은 부산·경남지역 낙동강 하류에 7종목(야류·오광대)이나 국가 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연희적인 면이 발달했으나, 대구·경북지역은 별신굿놀이 성격으로 재담이 적고 연희보다 의식성이 많은 하회별신굿탈놀음(국가 69호)과 예천청단놀음(경북 42호) 2종의 탈춤이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더불어 수호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음의 탈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10종11개)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음의 반주는 꽹과리 중심의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탈춤의 기원과 전승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천청단놀음은 대구·경북지역의 향토성을 보이면서 벽사진경을 추구하는 주술성과 상류층에 대한 풍자를 투박한 춤과 몸짓, 토속적인 가락에 실어서 전달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키로 만든 큰 탈이 쓰인다는 점, 신령스런 동물이 부정을 물리치는 듯이 하는 동작과 춤에 커다란 부채모양의 주지판이 사용된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소리춤안동놋다리밟기(경북 7호)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맨 앞에 노년부터 젊은 부녀자 순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등(다리 역할)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춤으로 호남의 진도 해남 등지에 강강술래가 있다면, 영덕지역에는 월월이청청(비지정)이 있다. 노래와 춤놀이에는 달람세, 절구세, 둥둥데미, 실감기 등의 소리춤이 전한다. 근대 춤 전승 인맥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부산·대구지역만 남게 된 정부는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현재 대구 CGV한일극장으로 재건축)을 지정하여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의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소산 → 백년욱(대구 18호)정소산(호 小山, 본명 鄭柳色, 1904~1978)은 1900년대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춤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교방춤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출생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하규일(1867-1937)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고,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보면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가르쳤다. 제자 백연욱은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 정소산류 수건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 춤은 궁중춤과 민속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수건춤으로, 처음 등장하여 먼저 절을 올리고 춤을 추는 궁중춤의 예법과 춤사위가 장중하고 단아하며 절제미가 있는 점이며, 춤이 전개됨이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을 돋우는 민속춤의 요소도 함께 담고 있다. 박지홍 → 권명화(대동권번, 대구 9호), 최희선(달성권번)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姜太弘,1893-1957)이 부산 등지로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958)이었다. 박귀희(朴貴姬), 박초향(朴初香),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등이 판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이때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1929~2010)은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권명화 살풀이춤의 특징은 수건으로 고(苦)매듭을 엮었다 푸는 살을 푸는 과정이 유일하게 담겨있고 영남교방춤과 덧배기 춤가락이 깃들여 있는 점이다. 그밖에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였다. 김상규 → 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박성실 등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인물은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다. 김상규는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로 판검사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가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다. 이처럼 해마다 작품 발표회를 하다 보니 논밭을 팔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가로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정막(정순영)과 김기전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문교부 인가)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당시 대구)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 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의 춤 미래 대구·경북지역이 오랜 역사의 부침(浮沈)속에서도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 북부춤의 중심적 특징과 더불어 향토춤의 특징을 온전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춤 신명이 많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지역의 심성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20세기 초기에는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최희선, 권명화(대구 9호), 백년욱(대구 18호) 등이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현대춤과 발레 역시 끝까지 지역을 지켜 온 김상규(안동대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역출신 무용교수가 많은 것도 근원적으로 춤의 고장이기 때문이지만 김상규가 대학교수로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춤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진출한 이숙재(한양대 명예교수), 김복희(한양대 명예교수), 박인숙(한성대 교수), 백현순(한체대 교수) 등이 ‘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구본숙(영남대 명예교수), 박연진(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임혜자(계명대 명예교수), 김현옥(계명대 교수), 장유경(계명대 교수), 김희숙(무용가), 박현옥(대구가톨릭대 교수), 김소라(대구가톨릭대 교수), 이화석(대구예술대 교수), 강정선(대구무용협회장), 김죽엽(한국무용가), 최두혁(계명대 교수),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 채명(무용평론가), 김용철(섶무용단), 손윤숙(발레) 등과 수많은 무용가들이 대를 이어 대구·경북춤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춤의 인프라는 2015년 이래 매년 세계안무페스티벌(DICFe, Daegu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을 펼치며 세계적인 안무도시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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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교방굿거리춤’ 명인 김수악"그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그 앞에만 갔다 오면 춤이 달라진다" 춘당(春堂) 김수악은 전설적인 영남 제일의 춤꾼이다. 김수악은 1926년 함양군 안의읍에서 만석꾼 집안 장남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명이 길어지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7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26세에 어머니가 되었지만 춤이 더 귀했다. 결혼과 육아로 춤을 접었는데.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19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1960년대 초반 남편 사별후 시골 아낙네로 살던 중 국가의 권유로 '진주 검무' 예능보유자가 된다. 19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19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19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 중 둘째로 출생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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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자 지정 논란, “근본적 해결 요구한다”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예고 기간에 ‘이의 신청서’가 문화재청에 접수되었다. 발신자는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교육사 김영임과 김장순이다. 5월 12일 공고로부터 인정 예고 기간이 한달이다. 이 신청 내용이 22일 열리는 문화재위원회에 상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의 신청 내용은 "제척 사유가 있는 무형문화재위원들의 인정 예고 결의에 참여한 것은 잘못으로, 절차적 정의에 반하여 당연 무효”라는 주장이다. 문화재위원회 제척(除斥) 위원은 경기민요와 서도소리 유파의 통합 또는 부정 근거를 마련한 2009년 한국국악학회 '경기민요 편'과 '서도소리 편' 집필자들이다.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개인종목 전승활성화 학술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서 "경기민요는 유파별 전승계보가 뚜렷하지 않아 전승과 관련 없는 종목”이라고 하였다. 유파 통합 또는 부정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본 것이다. 이번 이의 신청을 문화재청이 어떻게 처리할지가 주목된다. 우선 유파 ‘통합 또는 부정’에 대한 문제로, 과연 문화재청이 용역 보고서에 의지하여 있던 유파를 철회를 한 것인가? 이에 대해 국악계에 그 여부를 이해시켜야 하는 숙제가 있다. 이 문제는 2012년 문화재위원회가 "경기민요에 유파가 존재하지 않아 보유자 추가지정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쟁송으로 이어진 바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는 세 유파 중 두 유파를 배제하고, 한 유파에만 2인을 지정 예고하였다는 주장이 나온 터에 이를 결의 한 문화재위원회 자체를 문제 삼은 것으로 다소 복잡하다. 48년 전 안비취(유산가·제비가·소춘향가·십장가), 묵계월(적벽가·선유가·출인가·방물가), 이은주(집장가·형장가·평양가·달거리) 보유자 지정 당시, "12잡가를 4곡씩 나누어 지정하여 유파를 인식한 것이다”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유파별이 아니라 단지 복수 지정일 뿐이며, 12곡 전체를 각기 전승하게 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대치한다. "말 붙임새, 장단, 출연음, 조성이 세 선생님 별로 다르다. 유파의 존재 근거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도 "유파는 전승계보가 다르고, 가사가 다르고, 노래별 장단이 달라야 하는데 12잡가에는 음악적 요소에 명백한 차이가 없다”로 갈린다. 또한 "12잡가의 시김새는 ‘농음(弄音)’으로, 현악기의 유파 구분 기준인 농현(弄絃)과 같다”에 대해 "소리하는 이들의 개성적 표현일 뿐이다”로 대치한다. 연장선상에서 "35년 넘게 저마다의 색깔로 전승한 계보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에 대해 "베토벤 작품을 저마다의 개성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음악적인 개성의 차이이다”라고 극단적으로 대치한다. 이러한 유파에 대한 대치는 2009년 용역보고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에 대해서도 "충분한 자료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아니라 집필자가 이미 발표한 논문의 자기 견해 복제일 뿐이다”라는 강한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원로 자문위원단의 지적 사항 없다는 검토를 거친 내용이다”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논란의 배후로 지목된 보고서의 집필자가 2인이 문화재위원으로 참여하여 결의를 한 5월 12일의 지정 예고는 "절차에 있어서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무효”라는 강력한 주장이다. 이것이 어떻게 처리되느냐가 문제될 수밖에 없다. 받아 들여진다면 유파를 인정하고 재심사를 하여 보유자 지정 예고를 다시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의 신청은 그것대로 두고, 2인을 보유자로 결정하여 관보에 게재하는 절차를 밟을 것이다. 관계법상 이의 신청 처리에 따른 결정 시한은 6개월이다. 이 기간에 유파 존재 여부와 이에 논리를 제공한 이들을 배척한 상태에서 재논의가 있을지, 아니면 기존의 기조대로 "유파는 없다. 이를 수용하고 심사에 응한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일”로 바로 결정을 내릴지 주목이 된다. 1975년부터 쌓여 온 ‘제57호 경기민요'에 대한 논란. 그 간의 우여곡절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번의 유파 인정 여부와 문화재위원 제척 이의신청 문제는 '판소리', '대금' 등 분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숙고가 필요한 이유다. 문화재청의 정합적인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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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송만갑의 소리제를 이어간 금파 강도근흥보가를 가장 멋들어지게 불렀던 이는 고(故) 강도근 명창이다. 판소리 명창 강도근(姜道根)은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명은 강맹근(姜孟根)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은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줄타기 명인 강원종의 아들이자, 대금산조 명인 강백천의 사촌동생, 판소리 명창 안숙선의 외삼촌이다.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10세 때부터 남원의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사사했다.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부른 흥보가는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 1865-1939)-김정문(金正文, 1887-1935)으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수궁가'에도 능했는데, 그가 부른 수궁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으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동편제의 마지막 명창 강도근은 우직한 농사꾼이기도 하다.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초연한 고집스러운 소리꾼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농사꾼임을 자처하며 고향 남원에서 농사를 지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리에서는 검은 흙냄새가 난다. 판소리에서는 이런 소리를 ‘철성(鐵聲)’이라고 한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모습으로 약간 쉰 듯하면서도 청청한 수리성과 가늘고 단단한 상청을 이루는 성음이 특징이다. 생전 고향 남원을 떠난 적이 없어 음반은 적은 편이다. 1990년 흥보가와 수궁가완창 LP레코드 음반을 통해 그의 소리 세계를 접할 수 있다. 강도근 후계자 양성소를 설립, 동편제 소리의 맥을 이어온 판소리 동편제의 마지막 대가이다. 안숙선(국립창극단장)은 초기에 그가 길러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17세 되던 해에 동편제 판소리 명창 김정문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강도근은 흥보가 중'제비 후리는 대목'이 특기이다. 20세 때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 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고, 25세 때에 구례로 가서 박봉술의 형 박봉채(朴奉彩)에게 판소리를 지도받았다.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서 7년여 동안 혼자 공부한 후 하동으로 유성준을 찾아가 판소리 수궁가를 배웠다. 해방을 전후해서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호남창극단 등을 전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목포, 이리, 여수, 순천 등지의 국악원에서 창악 강사를 지냈다. 1973년 이후 남원국악원을 창립하여 강사를 지냈고, 틈만 나면 선유폭포 등 지리산 등지를 다니며 연습을 한 노력파였다. 조선시대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 오던 그는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금파 감도근 약력 남원 출생 (1918-1996) 1928년(10세) 김정문에게 흥보가 사사 1953년 부산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최우수상 1981년 한국국악협회 국악공로상 1985년 남원시민의 장 문화장 1986년 KBS국악대상 1992년 동리대상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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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의 명인. 녹야 김윤덕녹야 김윤덕은 1918년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지만, 풍류를 익히는 즐거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정지선에게 양금정악을 배운 것에서 시작해 가야금정악, 거문고 정악을 배우며 지방 풍류를 두루 익혔다. 1947년 상경한 김윤덕은 다양한 산조를 접하게 되었고 풍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커졌다. 산조에 대 한 지평을 넓혀가던 그는 정남희의 음악적 깊이와 격조에 큰 인상을 받았는데, 정남희의 산조가 뿌리가 실한 산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야금산조는 조선 말기 김창조가 시나위음악을 토대로 판소리 음악을 도입해 연주하며 유명해졌는데, 그즈음 한숙구와 박팔괘가 가야금산조를 짜서 연주하였고, 그 이후에 가야금산조 명인들이 탄생해 나름대로 가락을 지어 보유자의 이름을 딴 가야금산조들이 등장했다. 정남희는 가야금산조 1세대인 김창조와 한숙구가 사사한 안기옥에게 가야금산조를 전승받았고, 김윤덕은 자신이 인정한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가야금산조의 기본은 탄탄한 오른손 터치와 왼손 농현, 그리고 성음인데, 각자가 배운 산조가락을 변형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독창적인 연주법을 창안하는 것이 실력 차이를 만들어낸다. 음악적 재질이 매우 뛰어났던 김윤덕은 스승인 정남희의 산조에 새로운 가락을 짜 넣어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의 산조는 이영희, 황병기, 원한기, 이재숙, 김승희 등에게 이어졌다.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는 중중모리와 자진모리장단에서 헤미올라(Hemiola)·신코페이션(Syncopation) 등 장구 장단과 엇갈리어 떨어지는 가락이 3배나 되는 등 복잡하고 다양한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백한 농현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흐름이 남성적이고 묘법이 뛰어나며 미세한 삼라만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는 평을 받는다. 김윤덕은 가야금을 반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뛰어났고, 거문고산조 등 다양한 민속 풍류를 아우르는 명인이었다. 당시 민속악인으로 유일하게 자신의 가락을 악보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1950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국악 원에 출강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1960년대 이후부터 서울대학교와 국악예술학교 등에 강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애정을 보였다. 그가 제자들을 ‘제자님’이라고 존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음반 작업도 활발히 했는데, 1960년대에 거문고산조 음반을 취입하였고, 1977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기록 음반에 가야금산조를 취입하였다. 또한 『가야금구음정악보』,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 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윤덕은 국악기 명인들과 함께 해외공연을 다니며 우리 전통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 사절단 역할도 톡톡히 했는데, 미국 카네기홀에서는 10회 앙코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난 4월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우표가 발행됐을 만큼 근대 국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재청) 녹야는 어려서부터 정자선(양금풍류), 김화동(가야금병창), 김광석(가야금풍류), 김용근(거문고풍류)에게 풍류 음악을 익혔고, 20대 후반부터 정남희, 강태홍에게 가야금산조를 한갑득에게 거문고산조를 전수받았다. 가야금산조와 거문고산조의 명인. 그의 가락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 우조, 계면조, 평조의 구분이 확실하고 흐름이 남성적이었으며 단모리 가락의 묘법이 뛰어나고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가야금과 거문고 외에도 양금·설장고 등 많은 악기에 고루 능했고 가락을 기록할 때는 한글 문자보다 양악의 오선보를 병용했다.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그의 가락은 형식과 구성에 있어 우조, 계면조, 평조의 구분이 확실하고 그 흐름이 남성적이었으며 단모리 가락의 묘법이 뛰어나고 미세한 삼라만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스승의 전통을 이어 받아 '김윤덕류 가야금산조'와 '김윤덕류 거문고산조'를 만들었으며,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저서에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구음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가 있다. 녹야 김윤덕 약력 전북 정읍 출생(1918-1978) 1930년 천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정자선(鄭慈善)에게 양금을, 1932년 김광석(金光錫)에게 가야금을, 1933년 김용근(金容根)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1947년 정남희(鄭南希)에게 가야금산조, 1948년 한갑득(韓甲得)에게 거문고산조 전수받음 1945년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으로 활동 1950~196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 및 국악사양성소 강사 겸직1961년 서울대학, 숙명여고, 서울국악예술학교 재직 일본·멕시코·유럽·미국 등지에서 해외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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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 이전 월하 없고 월하 이후 월하 있을까김덕순은 "월하 이전 월하 없고, 월하 이후 월하 있을까”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여성가객이다. 한국전쟁 피난시절 노인들의 시조소리에 매료돼 홀로 소리를 새기다가 주변의 권유로 시조로 입문했다. 낭랑한 목소리를 타고 났으며 발음이 정확하다. 남녀병창으로 부르는 가곡 태평가를 들어보면 힘과 무게가 있어 남성가객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1936년서울 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이병성에게 시조를 배웠고, 1958년도부터는 이주환에게 가곡을 배웠다. 임석윤, 정운산, 이창배에게도 각각 시조 및 시창 등을 배웠다. 1968년도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장학 육성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고, 1969년 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을 거쳤고, 1970년에는 전국시우단체총연합회(全國詩友團體總聯合會)를 발족시켰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국립국악원 연주원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에는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밖에 대학에서 후진들을 가르쳤고, 각종 공연 및 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하여 여창가곡과 시조의 진수를 알렸다. 음반으로는, 1976년 '김월하 시조집', 1986년 '한국의 전통가곡'(국립국악원) 등에 그녀의 여창가곡, 가사 및 시조가 실려 있다. 국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1984년 국악대상과 세종문화대상, 1988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2년 국민훈장 보관장, 19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및 1995년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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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천안시립풍물단, 산청 주말 공연이번 주말 신명나는 무대로 관객들을 매료시킬 다양한 공연이 산청에서 펼쳐진다.산청군은 오는 27일과 28일 주말 상설공연으로 마당극과 천안시립풍물단 공연을 마련했다고 24일 밝혔다.27일과 28일 오후 2시 산청 금서면 동의보감촌에서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 '찔레꽃'이 열린다. 27일 오후 3시 단성면 남사예담촌 내 기산국악당 야외공연장에서는 '하늘 광대 연희'라는 주제로 천안시립풍물단 공연이 진행된다.1987년 천안시에서 창단한 천안시립풍물단은 21세기 문화시대를 맞아 수준 높은 문화향유를 위해 서한우 예술감독 중심으로 예술역량강화는 물론 다양한 무대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지난 2022년에는 (사)국가무형문화재 평택농악보존회가 주최하고 문화재청과 국립무형유산원이 후원하는 '제21회 전국 웃다리농악 경연대회'에서 '천안 방축골 농악'을 선보이며 종합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도 받았다.이들이 선보일 천안 방축골 농악은 지난 2007년도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한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을 통해 재조명받아 천안시립풍물단을 통해 전승돼왔다.특히 보존성과 예술성에서 가장 중요한 축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기능보유자 고 이돌천 선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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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재즈가 하나로…순천만정원박람회 크로스오버 공연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을 품격 있게 채울 세계적인 재즈 그룹 '지리(CHIRI)'의 크로스오버 콘서트가 26일과 27일 오후 7시 오천그린광장에서 열린다. ‘지리(CHIRI)’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인 배일동 명창과 호주의 재즈 드러머인 사이먼 바커,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스콧 팅클러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이다. 판소리 드럼 트럼펫 피아노 연주가 더해진, 동·서양의 선율을 결합한 퓨전 음악을 선사한다. 어떠한 가림막도 없이 탁 트인 잔디 광장에서 펼쳐지는 '지리'의 공연은 배 명창의 소리와 재즈 연주가 있는 그대로 전해져 관람객에게 더 큰 감동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은 1시간가량이며, 즉흥적인 소리와 연주도 더해질 예정이다. 노관규 순천시장은 24일 "박람회장에서 지리의 공연과 함께 서서히 저무는 노을, 그리고 화려한 경관으로 물들어가는 밤의 정원이 주는 매력도 같이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일동 명창은 순천 출신으로 순천만정원박람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지리(CHIRI)’는 판소리와 재즈를 한 데 엮어 새로운 음악 장르를 선보이며 국내는 물론이고 호주, 미국, 이집트 등 해외에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6월 오천그린광장에서 최백호&동화락 콘서트(2일 오후 4시), 남상일·박구윤·김산옥 공연(3일 오후 5시), 나윤선 콘서트(7일 오후 7시)도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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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마지막 무동(舞童)' 김천흥 명인심소 김천흥(1909~2007)은 평생을 전통예술의 전승과 복원이라는 일념으로 살았던 예술인이었다. 심소 김천흥 선생은 14세가 되던 1922년,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이후 1923년 순종황제의 오순(五旬) 기념 진연에 참가해 12개 종목의 궁중무용을 전수 받아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다. 2007년 99세로 영면하기 직전까지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했다.또한 심소 선생은 1970년대 말부터 궁중무용 재현의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 33종의 궁중무용을 재현했다. 현재까지 문헌에 의해 전해지는 궁중무용은 총 57종으로 이중 45종의 궁중무용이 심소 선생에 의해 재현, 전승됐다. 악가무(樂歌舞)에 능했던 김천흥 보유자는 1950년대후반에 전국 각지를 돌며 전통춤과 연희를 발굴하였고,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여러 편의 조사보고서를 남겼다. 또한 이왕직 아악부의 후신으로 국립국악원이 개원하자 궁중무용의 맥락을 잇기 위해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시절에 익힌 춤과 옛문헌에 의거한 ‘봉래의‘. ‘보상무’, ‘박접무‘, ‘무신향’ 등 40여종의 궁중무용을 복원하였다. 이 자료들은 예술사적 성과를 넘어 한국 근현대예술사의 발전과정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보고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국가지정기록물로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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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221세기 밀레니엄시대(2000년)를 맞이한 김덕명(1924~2015)옹은 어느덧 고희(古稀)도 훨씬 지난 76세였지만 노년기의 공연활동과 지역민속발굴과 지도에는 장년 못지않게 원숙함과 열정이 넘쳐있었다. 2000년 4월19일 <국립극장 50주년 국립무용단 제79회 정기공연> 양산학춤 특별초청공연으로 영남춤 명인 ‘서울 나들이’에 초청되어 갈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4.12) 예고기사와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4.19)에 네 사람이 펼치는 네 가지 색깔의 춤판에 대한 소개에서 "소리는 호남, 춤은 영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풍류의 정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남춤이 한국춤의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다. 춤이 중앙집중 되었고, 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호남쪽 춤이 주요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4人4色 나흘간의 춤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영남춤이 처음으로 서울의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 이번 공연의 4색이 영남춤판의 주인공은 영남춤의 명인들인 김덕명, 김온경, 이윤석, 하용부이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씨는 양산 사찰학춤을 들고 나온다. 외로이 양산학춤을 지켜온 김씨는 이번 무대에서 이 춤의 원형을 선보였다”라고 알렸다. 이어서 5월 16·17일 호암아트홀무대에 오르게 되자 각종 매스콤에 대서특필하였다. 서울신문(5.2)기사 ‘인간문화재 3人의 전통춤 진수’와 조선일보(5.11) ‘인간문화재 한 무대에’ 기사에는 ‘사상 유례 없을 대원로들의 합동공연이 마련된 무대는 오는 16·17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제18회 명무명인전>, 세 노옹은 첫날 잇따라 무대에 선다’라고 하였고,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인 김덕명옹은 ‘양산사찰학춤’을 춘다.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된 통도사에서 대대로 계승되었다는 이 춤은 지난 87년 일본 NHK의 세계춤 종합평가에서 ‘춤의 황제’라는 극찬을 들었다"라고 알렸다. 2002년 9월 6~7일, 공연기획사 이일공과 호암아트홀이 주최하고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세계민족무용연구소가 후원하는 행사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공연이 있었는데, 각종 매스콤에 예고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덩실 덩실 얼쑤! 8인 男舞 한마당,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남자들이 추는 정통 민속춤이 한자리에 모인다. 남무(男舞)부재 현상 속에 민속무용은 그나마 궁중무용에 비하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다. 특히 문장원·황재기·김덕명은 80대로 민속춤의 산증인이다’ ,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 아비들>에서 멋과 흥으로 대변되던 우리 춤의 진수를 선보인다.’라고 했으며, ‘양산사찰학춤의 김덕명(80)은 일본 기생의 잉어춤 등에 능하고 학춤은 국내 최고라는 평이다. 학이 땅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고 암놈을 희롱하는 행동을 표현한 춤으로 도포와 갓을 쓰고 춘다.’(서울신문, 8. 29) 그밖에도 연합뉴스(8.29), 한국경제(8,29), 현대불교(8.20), 조선일보(9.5) 등에 예고기사로 크게 보도되었다. 춤판에서 남자춤꾼들의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전통무용은 현대무용이나 발레에 비해 '남무부재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춤에 한 평생을 걸어온 8명의 남성춤꾼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오는 9월6일, 7일 이틀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지는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화제의 공연이다. 무대에 오르는 8명의 춤꾼중 셋은 이미 80대의 고령으로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리만 만들어지면 어디에서든 어깨를 들썩이며 일품 춤사위를 뽑아내는 '끼'와 '열정'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옹(80)은 고고한 학의 자태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양산학춤을 선사한다. 훨훨 날다가 내려앉아 두루두루 살피고 먹이를 휙 낚아채는 학의 모습을 선비의 차림으로 유장하게 표현해 낸다.’(한국경제, 8.29) ‘제도권 무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한국 전통춤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농악판, 탈춤판, 사랑방 등 선조들의 삶 주변에서 흥겨운 '놀이'로 추었던 춤의 원형질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아울러 호방한 남성춤을 만나기 어려운 무용계 현실에 비춰볼 때도 분명 이색적인 무대다.(현대불교, 8.29) ‘공연 제목은 설화 속 춤꾼 '처용'에서 따왔다. 출연자들은 공연장이나 학교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전통춤을 지켜온 명인들이다. '무용가'로 불린 적이 없지만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남다른 사람들로, 생활터전의 주변에서 명맥을 이어온 춤의 자유로운 멋과 흥을 느낄 수 있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80)씨가 선보이는 양산사찰학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돼 왔다는 학춤이다. 선비의 평상복인 도포에 갓을 쓴 채로 먹이를 살피다 휙 낚아채는 학을 재현한다. 김씨는 한량을 넘어선 직업 춤꾼으로 양반춤. 지성승무. 한량무. 나례무 등 다양한 춤사위를 보유하고 있다.(연합뉴스, 5.29) ‘무대에 오르는 춤을 보자.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에 비해서는 대접이 형편없는 춤들이다. 그러나 명인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한 세상을 보내고 있다. 당대 최고 즉흥춤이라는 문장원의 동래입춤, 맵시있는 자태가 빛나는 황재기의 고깔 소고춤,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시키는 김덕명의 양산 사찰학춤, 다양한 디딤의 묘미가 살아있는 정인삼의 진쇠춤, 굵고 시원한 마당춤…. 김덕명(78)옹은 어릴 적 부모가 보낸 절에서 도망쳐 나와 농악패를 따라 나섰다가 춤과 인연을 맺었다.’(조선일보, 9. 5) 2003년 11월 22일에는 <팔십인생의 춤> 학산 김덕명 80인생 정통고전춤 발표회(양산)가 양산문예회관에서 있었다.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습득하여 올바르게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한 무대로 그 문화생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순수 정통 학산 김덕명류의 팔십 인생의 춤이 선보이는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도 직접 무대에 선다. 학산 김덕명은 양산시 동면출신으로 양산학춤을 오늘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장본인이며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 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춤사위를 선보여 왔는가 하면 후진양성에도 평생을 몸 바쳐 온 예인이다.(경남일보, 11.21) '지난 94년부터 양산학춤과 연등바라춤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양산시와 경남도에 여러번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며 '내가 죽기 전에 학춤과 연등바라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꼭 보고싶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내가(김옹) 가진 28가지의 춤을 표현하는 제자는 아직 없어 죽기 전에 다 전수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하다'고 걱정한다.‘ (부산일보, 11.28)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한 이번 공연은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마련했다.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 선생도 직접 무대에 올랐다.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한 학산 김덕명 선생은 양산사찰학춤, 연등바라춤, 지성승무 등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현대불교, 12.1) 2005년 제8회 세계무용축제에서 다시 <전무후무(全舞珝舞)> 국보급 춤의 명인 6명이 무대에 올렸을 때에도 김덕명은 빠지지 않고 양산학춤을 추었다. ‘<전무후무(全舞珝舞, 珝는 옥이름 후)>. 춤의 명인 6명이 한 무대에 오른다. 강선영의 태평무, 김덕명의 양산학춤,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문장원의 입춤, 이매방의 승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가장 젊은 장금도(77)부터 최고령 문장원(88)까지, 이들의 평균 연령은 82세다. 김덕명 양산학춤은 너울너울 학을 닮아가는 한량을 그린다.’(조선일보, 9.22) ‘김덕명의 인터뷰 중 "학춤 출 땐 정신부터 학이 돼요. 요즘 춤추는 사람들은 장식에 치중하느라 뿌리를 놓치는 것 같아. 우리끼리야 누가 잘 하나 따져 뭘 해.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서야 80 넘어 90이 다 될 때까지 고생고생 하며 춤출 수 있나. 앞으로 열흘 몸 건사 잘 해서 무대에서 구부러지지만 마시소들!(웃음)”(조선일보, 9.28) ‘걷는 것은 두려우나 춤은 두렵지 않다…. 지난 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 하루를 위해서 일생을 장만해온 것처럼, 몸이 아니라 춤만 남았다….” 어느 이의 말처럼 전무후무한 공연이었다. 젊은날의 그것만 했으련만, 80년 묵은 육신에서 곰삭은 춤 맛은 감히 평할 것이 아니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 내외 관람하면서 "아주 신명이 났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다.’(경향신문, 10.10)(양산신문, 10, 5) 2008년 12월 5일 영남명무전 <무림평전(舞林平定)>이 통영시민회관 대극장에 있었다. 경남도의 전통 춤판을 지켜가는 남성 5인방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덕명, 이윤석, 하용부, 김선옥, 김홍종 선생이 영남명무전 ‘무림평정’(舞林評定)으로 다음달 5일 통영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경남도 전통춤계의 큰 어른들인 다섯 선생은 전국전통예술계에서도 반열에 올라있는 춤꾼들이자 광대들이다. 이들 다섯 춤꾼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지난달 람사르 총회 기념 인간문화재 명무전에서 한 무대 오른 후 이번에 통영을 찾게 됐다. 우리나라 대표 춤꾼이자 큰 선생인 김덕명 선생은 이번 공연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곧음과 부드러움, 세심함과 단아함을 표현하는 호걸 양반춤으로 통영시민들과 만난다.<경남매일, 11월 24일> 호걸양반춤의 김덕명, 채상소고춤의 김선옥, 통영문둥북춤의 김홍종, 덧뵈기춤의 이윤석, 밀양북춤의 하용부. 경남 전통 춤판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는 명인들의 춤사위가 통영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이번 공연제목 ‘무림평정(舞林評定)’에는 다른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연출을 맡은 김홍종 선생은 "춤판을 평정한다는 제 잘난 멋의 과시가 아니라, 한 가지 분야에서 올곧게 정도를 지키며 살다보면 누구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세상의 이치를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김덕명 선생과 같은 선배를 아울러 모시고 싶은 후배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양산신문, 12. 21> 구순의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와 자태는 제자들을 사로잡았다. 학산 선생은 공연이 아닌 발표회라는 것도 강조했다. "공연은 돈 받고 보여주는 거야. 발표회는 연습 결과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춤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양산학춤보존회는 구시대, 장악원 등 전문 예술인에 의해 생성돼, 1930년대에 평양 명기 김농주에 의해 양산권번에 정착됐다. 학산 선생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호걸양반춤의 호탕하고 의기 넘치는 춤도 선보였다. 구운몽을 바탕으로 만든 무언 무용극인 한량무의 해학은 웃음 을 연발하게 했다.<양산신문, 12.4> 2014년 3월20일 진주전통예술회관에서 학산 김덕명선생의 제2회 한량무발표회를 가졌다.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량무’ 공연은 학산 김덕명선생의 가르침으로 우리나라에 하니밖에 없는 일곱배역이 있는 극으로 된 무용이다. 한량, 색시, 상좌, 주모, 승려, 별감, 마당쇠로 총 9마당으로 구성돼 있다.<진주인터넷신문, 2014. 3.20> 이상에 소개한 신문기사 외에도 많은 공연활동과 전수활동이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구십대에 이르기까지 중앙무대와 향토무대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무대를 장식하며 남성다운 춤, 영남덧뵈기춤, 사찰계춤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덕명은 양산 통도사와 양산 권번에서 전승된 독특한 춤사위를 지닌 독보적인 춤꾼이다. 그런데 양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보류된 안타까움 속에 있을 때 진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진주와 연을 맺게 된 것은 마지막 기녀출신들의 노력으로부터였다. 당시 김덕명은 그가 소원하던 학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보류된 후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었을 때 연로한 진주의 보유자들이 김덕명을 찾아 지속적인 부탁을 했고 또한 진주는 전국 제일의 종합예술행사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는 예향이라는 것과 그의 학춤발굴자였던 서국영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진주의 예술이 기녀들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교방이 해체된 후 1913년 기녀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진주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진주권번이 운영되었으나 부실하였다가 1938년‘최치환’에 의해 진주예기권번이 창립되었다. 진주권번의 춤 선생인 최완자(崔完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로 감영에 선발되어 궁중연희에 참가했다. 그녀의 제자 김수악(金壽岳), 강귀례(姜貴禮), 강순금(姜順今)등이 1967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김덕명을 모셔와 1976년부터 예향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79년 5월2일자로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한량무가 지정되면서 보유자 김덕명 외 7명으로 등재되었다. 김덕명의 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 깊고 빛나는 업적은 진주와 양산(梁山)지역에서 무형문화재를 전승시켰으며, 민속놀이 발굴과 전승에도 큰 공로를 김해지역에서 문화예술의 밑거름으로 남긴 가락오광대와 석전놀이, 김해농요 등을 발굴 전수시킨 흔적을 볼 때 그를 다재다능한 예술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1990년 후반, 양산시 덕계리에서 망시곱배기놀이 발굴하여 경남무형문화재 제23호 웅상장원놀이로 지정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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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백중놀이(오북춤)' 의 대가 김상용김상용 옹(金尙龍,1916~2004)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35년부터 밀양보본계 원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에 밀양국악협회 부 회장이 되었고, 1980년 밀양민속예술보존협회 창립회원의 한 사람으로 부회장을 거쳐 1982년 에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밀양백중 놀이 보유단체가 인정되면서 밀양백중놀이보존 회의 회장이 되었다. 1982년에 전수교육을 위한 악사로 선정되었고 1986년에 이수조치 되었으며 1987년에 오북춤과 농요 로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3년에는 경남 무형문화재 제7호 감내게줄당기기의 동부줄도감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기도 하였 다. 1977년에 경남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병신춤으로 개인상을 수상하였 고, 1981년에는 개천예술제 민요경창부문 특별상을 수상하였으며, 1986 년에는 마산시민의 날 민요·판소리 경창대회에서 입상하였다. 1935. 01 ~ 밀양백중놀이보존회 전신인 ‘밀양보본계’ 회원으로서 故 하보경 선생께 '병신춤' 등 '밀양백중놀이' 전수1970.01.01 한국국악협회 밀양시지부 지부장(17대) 역임1981.10. 01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전수교육조교 선정1987.07. 01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보유자(오북춤)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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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백중놀이』 보유자 김상용(金尙龍,)씨 88세 별세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보유자 김상용(金尙龍, 향년 88세)씨가 2004. 5. 3(월), 06:14 밀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ㅇ생년월일 : 1916. 7. 27ㅇ빈 소 : 한솔병원 장례식장 2층(경남 밀양시 내이동 184번지 ☎ 019-5511-3767/박동영)ㅇ영 결 식 : 2004. 5. 6(목), 11:00ㅇ장 지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월산리 선영 ㅇ주요경력- 1935. 1 ~ 밀양백중놀이보존회 전신인 ‘밀양보본계’ 회원으로서 故 하보경 선생께 병신춤 등 밀양백중놀이 전수- 1970. 1. 1 한국국악협회 밀양시지부 지부장(17대) 역임- 1981.10. 1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전수교육조교 선정- 1987. 7. 1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보유자(오북춤) 인정ㅇ가족사항 : 부인, 5남 3여 ※ 밀양백중놀이는, 바쁜 농사일을 끝낸 농사꾼들이 음력 7월15일경 지주로부터 하루 휴가를 얻어 흥겹게 노는 놀이로서, 농사일에 직접 종사하는 농사꾼들의 어려운 농업노동이 전체 놀이에서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음. 문의,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전화 042-481-4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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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 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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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 판소리부문 차하 염경애- 1973년 7월 16일, 전라북도 남원출생 - 염금향, 성우향, 조상현, 안숙선 선생에게서 사사 -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 2002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 장원 대통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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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인정하는 송파산대놀이, 보러가자29일 토요일, 오후 3시 제58회 송파산대놀이 정기공연이 개최되는 서울놀이전수관을 찾았다. 반가운 봄비가 소슬소슬 내리는 가운데 둥근 돔 모양의 천막으로 친 마당에서 신명나는 탈춤판이 벌어졌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앞 줄에 자리를 잡고 박경래 송파구청장, 김웅 국회의원, 정창래 송파구의회의장을 비롯한 김광철, 장종례, 이강무, 전 정 의원이 참석해서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탈과 탈춤의 기원은 원시 수렵과 어로생활에서 동물탈을 쓰고 위장하여 사냥의 성과를 올리는 한편, 사냥 성공을 기원하며 탈춤을 추거나 그 염원을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서울경기에서는 '산대놀이' 혹은 별산대놀이,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춤' 도는 '놀탈', 강원도 지역에서는 '탈놀이'로 경상도에서는 '들놀음', '오광대', '탈놀이', '별신굿놀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약 250여 년 전부터 송파진, 현재 잠실 석촌호수 남쪽 주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한강 줄기 주변에 서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연희되어 온 산대탈놀음이다.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산대놀이는 구파발, 애오개(阿峴), 사직, 녹번, 노들(露梁津) 등지에 전승 되었으나 모두 소멸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의 송파지역만이 전승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퇴계원산대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한국의 탈춤’ 18종이 유네스코 인류뮤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병옥 교수에 의하면 "송파산대놀이는 오늘 보여주는 탈놀음 12마당이 온전히 전승되고 있으며, 탈 32개가 되는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연희 순서는 먼저 산대놀이 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탈춤을 추면서 길놀이로 마을과 장터를 돌아와 탈을 벗어 고사상 앞에 놓고 탈고사를 지낸 다음 12마당을 진행한다. 기미양 객원기자가 당일 행사장에서 이병옥 명예보유자에게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주체 및 연행과 예술성에 대해 살펴보았다.(편집자 주) Q. 송파산대놀이 유래 및 역사는 A.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소멸되었고, 지금은 그 맥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송파진은 전국 15대 향시(鄕市) 중의 으뜸인 상역지로 강원도의 뗏목상인과 삼남지역의 마행상과 보부상들이 몰려들어 270여개의 객주집이 성행한 장터였다. 연희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파장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어 산대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을축년(1925) 한강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산대놀이도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송파산대놀이 전수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산대'라는 명칭은 A. 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처럼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성행한 ‘가면극’에 ‘산대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대놀이의 ‘산대’가 뫼 산(山) 자에 무대 대(臺)자로 이뤄진 것과 같이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놀이가 열린다’라는 깃발을 들고 돌지만 예전에는 산대놀이를 앞두고 조금 큼직하게 만든 우마차 위에 얇은 판을 깎아 산 형상을 층층으로 올려 만든 ‘산대’를 끌고 다니며 연희 구경을 오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산대’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습니다. Q.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 이름에 ‘별’ 자가 추가된 것은 기존 놀이패들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양주읍에서 ‘별도’로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글자이고, 노들산대, 구파발산대 등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조선 시대 산대놀이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Q. 한반도 지역 탈춤 중에서 한양과 가까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산대놀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연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궁중 연회에 가장 많이 불려갔습니다. Q. 그렇다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전승 주체를 담당했던 계층은 다른가요. A.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입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한다면 기원과 등장 인물이 다른가요? A. 기원과 유래를 보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송파는 나루터여서 장꾼의 속성을 반영, 타령장단의 신명 나는 놀이춤으로 발전했고, 양주는 관에 대한 예속성 때문인지 염불장단에 의식춤이 발달했고,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습니다. Q. 탈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예술성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A. 춤(무용)과 음악·연극의 요소가 융합된 탈춤은 전통 공연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종합예술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이고 바로 예술성의 조건이지요. 특히 사회비판적 주제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Q. 반주음악은 A.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장구, 북, 피리2, 대금, 해금)의 악기구성으로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당악,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춤사위로는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Q. 그래서 탈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대치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이 핵심이라는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A. 그래서 일년 중 하루쯤은 지배자 집단이 억압 받는 피지배자들에게 그날은 욕도 먹고 너희들 목소리도 한번 질러보라고 풀어줍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변혁성을 가지고 있죠. 탈춤의 마무리는 갈등과 대립의 화해, 나아가 상호존중을 통해 사회 전반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연희 종목 중 탈춤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탈춤이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넘어 인류가 함께 즐기고 향유하는 무형유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Q. 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순서는 다음과 같다. A.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죠. Q. 보다보니 등장인물마다 여러 춤사위가 나와서 웃음이 나옵니다. 장단에 따라서도 다르면서 유사한 춤사위가 궁금합니다. A.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상위개념으로 불린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은 특수 배역만이 추는 춤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 옴중의 용트림, 노장의 복무(伏舞)와 함께 부채춤, 팔뚝잡이, 활개펴기,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 삼진삼퇴 등이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 춤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 여러 탈춤 중 송파산대놀이 춤사위 중 깨끼춤이 백미 중 백미라고 하는데, 과장마다 등장 인물마다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네요. 가장 인기있는 깨끼춤은 A. 탈춤 중 송파가 가장 많은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고, 40여 종이나 넘네요.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생성된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깨끼춤 종류로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몰아치기, 장삼치기,한삼치기, 맞춤[對舞]과 더불어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의 걸음걸이가 있다. 그 중 가장 인기있는 춤은 기본적인 화장무가 가장 섹시하고 화려한 춤새를 보여주죠. Q. 굿거리장단에 맞추어서 추는 건드렁춤은 주로 다음 막이 오르때,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건들건들 거리면서 나오니까 관중들이 와 하면서 흥을내는 데요. 등장인물마다 추는 춤새가 정해져 있고, 다양한 것 같아요. A. 건들걸음의 춤사위 종류는 뒷짐사위, 들사위, 쳐들사위, 흔들사위, 돌사위, 멜사위 등이 있다. 그밖에 배역에 따라 연닢·눈끔쩍이는 한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뒷짐이나 들사위로 등장하고, 말뚝이는 채찍을 휘돌리며 채찍춤을 추면서 샌님 가족을 이끌면서 뒷걸음, 돌걸음으로 등장한 다음 깡총걸음으로 장내를 뛰어 돌며 채찍을 휘돌린다. 이때 샌님·서방님·도련님의 걸음걸이는 한발 까치걸음으로 부채를 내렸다 들었다 하다가 건들걸음으로 들어와 나란히 자리 잡는다. 신할아비·신할미는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손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 걸음으로 등장하면 박수가 나오지요. Q. 탈춤을 출때, 복장과 탈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요. A. 탈춤 종목 중 송파가 가장 많은 탈을 보유하고 있죠. 가장 관객이 많은 한양이라는 지역성과 궁중에 불려간만큼 자본이 달리지 않았죠. 외국 사절이 오면 요즘으로 말하면 카퍼레이드 환영인사 같은 거죠. 사직동 모화관가지 거리 공연을 하면서 외국사절을 모시고...매일 공연도 보여주고, 지방에 있는 탈춤과는 관객의 눈높이가 높았죠. 한양으로 몰려드는 전국소리패들, 광대패들과 경쟁을 해야하니...자연히 분장도구가 화려해지죠. 탈은 바가지로 만든 탈인데, 소나무 껍질을 깎아 눈썹, 코, 볼, 입을 붙이고 한지(韓紙) 조각으로 여러 겹 덧붙여 말린 다음 단청(丹靑)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복식은 팔먹중들은 반장[赤·靑·黃·綠色]에 옷깃과 허리 띠는 주로 붉은 색이나 대비색이며, 각 배역마다 신분적 특징을 보여 주는 의상을 입는다. 의물과 무구도 배역에 따른 것으로 양반들은 합죽선, 취발이 녹음채, 말뚝이 채찍, 먹중갑(완보)은 곤장, 무당은 방울·부채, 샌님·미얄은 지팡이 등을 사용합니다. Q. 민족문화예술 '탈춤'의 예술성에 대해서 강조하신다면 A. 탈춤은 재담과 노래, 가무극적 총체성을 띠고 있죠. 재담이나 노래에 비하여 춤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연극성까지 구비해야 박수를 받죠. 풍자성이 강한만큼 탈을 쓴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나타내 주어야 하고,..가무에 능해야 하고. Q.인류무형문화유산 '탈춤'의 보편적 가치는 A.부조리와 갈등을 풍자하는데 머물지 않고, 해원상생을 위한 전통유산이며,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는 거지요. Q. 오월에는 축제의 달인데, 초청공연 가는 지역 축제는 어디인가요. A.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6일, 안동민속축제 7일,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지역사회 복지관에서 8일 공연합니다. Q. 전승교육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A. 10여년 동안 송파구 중대초등학교에서 송파산대놀이를 가르쳐왔다. 그런데 교장이 바뀌면서 올해부터는 수업이 사라졌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링 자랑스런 민속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나아가 사회변화에 대한 변혁성을 담보하고 있다.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세계 유네스코 신사위원단은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했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탈춤의 보편적 가치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와 장이 확대되기를 바란다. 첫째마당: 상좌춤놀이 첫째상좌가 맨 처음 등장하여 중앙에서 염불장단에 합장배를 하면서 천신께 탈춤의 시작을 알리고, 사방재배를 하며 놀이판을 정화하고 성황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춤판이 무사히 끝나도록 기원하는 의식무이다. 이어서 타령장단에 깨끼춤을 추면 둘째상좌가 등장하여 서로 대무하고 첫째상좌가 퇴장한다. 둘째마당: 옴중·먹중놀이 옴중이 제금을 치며 요란하게 등장하여 장내의 잡귀를 몰아내고 둘째상좌도 내쫓고 염불장단에 용이 승천하는 용틀임춤을 추고 놀 때 먹중이 등장하여 서로의 얼굴을 못생겼다고 흠 잡으며 곰보타령 사설을 늘어놓는 것이 흥미롭고, 비위생적 생활에서의 옴(전염병, 악귀) 발생을 예방의 중요성을 알린다. 셋째마당: 연닢·눈끔재기놀이 양반인 연닢과 눈끔재기가 얼굴에 흠이 있어 과거도 못보고 양반사회에서 소외당하지만 서민들인 먹중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어울려 놀면서 서민들의 포용력을 부각하고 양반사회의 폐쇄성을 풍자한다. 넷째마당: 북놀이 먹중들이 북을 가지고 장난치며 노는데 왜장녀가 등장하여 예쁜 색시(애사당)가 벗고(법고)를 칠테니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을 건네준다. 애사당이 옷을 벗지도 않고 법고를 치니 속았다고 북채를 빼앗지만 허세를 부리면 돈만 날린다는 것을 풍자한다. 다섯째마당: 곤장놀이 팔먹중들이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술만 먹고 노는 것을 곤장으로 호되게 다스려 공부를 게을리 하지마라고 훈육한다. 여섯째마당: 침놀이 가난한 서민이 잔치에서 과식 급체하여 쓰러지자 신주부(의원)와 먹중들 사이의 치료방법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여 의원들의 의술을 풍자하고 굶주린 서민생활을 폭로한다. 일곱째마당: 노장놀이 팔먹중이 노장을 끌고 등장하여 색을 탐하면 무서운 질병(흑달)에 감염된다는 경고하고 조롱하지만 노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색을 탐하여 파계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여덟째마당: 신장수놀이 신장수가 원숭이를 업고 등장하여 노장에게 신을 팔면서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여색에만 빠진 수도자에게 원숭이를 보내 조롱한다. 아홉째마당: 취발이놀이 사찰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취발이가 노장이 파계했다는 말을 듣고 홧김에 술을 마시고 취한 채 등장하여 노장을 내쫓고 소무와 합방하며 아들을 낳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공부시키며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열째마당: 말뚝이놀이 양반집 하인 말뚝이가 양반인 샌님가족을 모시고 나들이 나갔다가 숙소를 돼지우리로 정해주며 놀리면서 서민들을 개돼지처럼 하찮게 여기는 양반들을 역으로 풍자한다. 열한째마당: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 샌님이 본처인 미얄할미를 내치고 젊은 마누라와 놀아나지만 결국은 젊은 포도부장에게 빼앗기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표현하며 부도덕한 생활을 풍자하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열두째마당: 신할애비·신할미놀이 노부부의 갈등으로 신할미가 죽자 자식인 도끼와 도끼누이가 애통해 하며 무당을 불러 죽은 신할미의 넋을 위로하는 넋두리와 지노귀굿을 하여 극락왕생을 빌며 살아있는 자를 위로하는 무속적인 의식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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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희국악예술단, '2023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 개최한다지난 4일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에서 '세계 차 엑스포'가 개막했다.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한달동안 개최된다. 하동군과 '손양희국악예술단'은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한다. 명칭은 '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05.11-12.)과 '하동세계차엑스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05.27.)을 개최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맡고 창원 지역을 비롯해 경상남도와 타 시도의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9년부터 창원어린이국악단,'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단장과 지회장을 손양희 단장이 맡고 있다. 특히 25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25년 구독자인 손양희국악예술단의 활동과 전국국악경연대회 진행에 대해서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손양희국악예술단 손양희단장을 한달동안 전화와 방문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 주) 손양희 국악예술단 설립목적과 전승활동 Q. 손양희 국악 예술단 설립 목적은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민족예술의 정수 국악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나아가 우리 음악을 이끌어갈 전문 국악인의 밑거름인 차세대 명창과 명인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언제 조직되었나요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창원에서 1996년 제1회 창원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를 주관하면서부터 조직되었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 소개해주세요.. 설립 목적, 전승활동, 회원수.전승활동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1995년 손양희국악교습소로 시작하여, 2007년 손양희국악예술단으로 거듭났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자체 기획공연과 시, 도, 국가 공모사업을 기본으로 실행하면서, 각 시군의 축제나 국가 공식 기념일 행사에 초청을 받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 미국, 유럽 등 20여개국 해외 순회공연을 하며 폭넓게 공연 활동을 하는 전문 국악공연단체이다. 또한 후진양성과 계승발전을 위해 규칙적인 전승교육 활동에도 30여 년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해로 26회차가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인재 양성발굴에 핵심 사업 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예술단체이다. 회원은 100여 명과 예술단원은 25여 명이 활동한다 Q. 초대회장, 역대회장은? A. 초대 대회회장은 1996년 당시 창원국악협회장이셨던 故 박미숙선생을 필두로 노키아티엠씨 이재욱 회장, 공민배 전창원시장, 현, ㈜부경 김찬모회장으로 연결되어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고 계신다. 26년이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Q.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는 26회가 되는데, 언제부터 손양희 회장이 이어오고 계시나요 A.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창원 국악협회장의 별세로 존립의 기로에 선 국악경연대회를, 2년 지난 1998년 제2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25살밖에 안된 제가 맡아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작년 11월까지 제2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초반기 국악 불모지 창원에서 이 국악경연대회를 알리기 시작할 때,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Q.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 26년 돐을 맞이하는데, 자랑 좀 해주세요. A.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는 창원이 공업도시라, 예술 장르 특히 국악 분야는 아직도 열악한 편이다. 하여 고른 발전을 꾀하며 종합대회를 유치했다. 종합대상은 국회의장상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도지사상, 창원시장상, 도교육감상, 시교육장상 등 판소리, 기악, 민요.가야금병창, 무용, 풍물... 5개부문을 각파트에 5분의 권위있는 심사위원을 모시며 투명한 대회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문화관광부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평가에서 작년(2022년)은 B+ 등급과 그 3년 전에는 A등급을 받아 공명정대하고 내실있는 우수대회로 평가받았다. Q.최근 서울에서 하동차엑스포 알리기 행사를 했는데..오셨나요? 특별한 행사가 있었나요 A. 그날 행사가 이미 잡혀 있어서 참석못했다. 특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유명한 국민배우 ‘국민 아버지’ 최불암 씨를 행사 중 2023하동세계차엑스포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뜻깊은 위촉식도 가졌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 '2023하동차엑스포'와 '2023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명창대전' Q. '2023하동차엑스포' 소개해주세요. A.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 좋은 하동...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이지요.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2023하동세계차엑스포가 개최된다. Q. 전국에서 산수가 아름답가로 유명한 하동의 유래에 대해 자랑 좀 해주세요. A.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은 하동의 아름다움을 ‘호중별천(壺中別天)’으로 표현하며 ‘동쪽 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신선이 옥베개를 밀치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라고 극찬했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바로 세계적 차(茶)의 주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Q. 이번 손양희국악예술단에서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하는 국악경창대회 취지는 A.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3 대한민국 명창대전'과 '2023 전국청소 년국악경연대회'을 개최한다. 이는 세계가 주목하는 엑스포장에는 신명나고도 우수한 우리 전통음악인 풍악이 빠질 수 없으므로, 단순한 경연대회가 아닌, 축하공연 같은 경연대회를 통해 우리음악의 신명, 전통성을 하동을 찾은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함으로 엑스포장을 더욱더 활기차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꾀한다. 손양희 명창 국악계 입문과 국악활동 Q.국악계 입문은 어떤 계기로 언제 들어오셨는지요. 스승은? A. 부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년에 한국무용에 입문하였고, 초등학생때부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인정 받아, 합창부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한국무용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열심히 하였으나, 고2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유한 가세가 기울자, 9년 동안 받아온 무용교습은 포기해야 해서 절망적이였다. 그런데 그즈음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에서 판소리 무료 강습회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판소리가 나를 다시 소생시켰다. 故 선동옥 선생님(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입문하여 지금껏 소릿꾼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故 선동옥(수궁가), 故 이명희(흥보가,춘향가), 故 한갑주(적벽가), 성준숙(심청가)선생님들께 이수를 받았다. 2008년 12월에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 9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조교로 지정되었다. Q.손양희 선생님 전국경연대회에서 상을 많이 타셨는데, 가장 큰 상을 받은 때는 언제인가요 A. 2017년 판소리 입문 32년만에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16회 대구 국악제에서 판소리 부문에 참가하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후 12년만에 받은 상이다. 이때 가장 공력을 많이 들였을 때, 받은 상이다. Q. 창원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악단체로 손꼽히는 손양희국악예술단 자랑 좀 해주세요. A. 국악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의 학부 출신 또는 재학생을 회원이 많다. 그만큼 젊고 활력 넘치는 전문 국악단체이다.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김선희, 타악과 풍물로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 종합 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송기혁, 가야금 전공의 김수아 등이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부터 겨울방학 여름방학 기간 ‘2008 국악학교’를 개설하여 창원과 주변 국악인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다. 그래서 창원은 물론 경남에서는 널리 알려진 국악단체이다. Q. 가장 뜻깊고 추억에 남는 공연은 A. 2003년 10월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자 여류 문인으로 꼽히는 황진이를 소재로 한 창극 '황진이'를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국립 창극단 수석 단원 등 주요 출연진과 연출, 시나리오, 음악 등 주요 제작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주인공은 창원 지역의 소리꾼을 대표하여 제가 황진이 역을 맡았죠.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가 제작한 최초의 경상남도 지역 창극이었다. 2006년에는 창원 성산 아트홀 소극장에서 '제2회 손양희 판소리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창극 '토끼야 수궁가자' 에서 창원에서 연출자를 구하지 못해서 연출과 주인공을 맡았다. '황진이' 역과 '별주부'역을 맡은 때가 저희 소리에 대한 정열을 태웠던 시절인가 보다. 수궁가 완창발표회가 큰 동력이 되었다. 이후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Q. 기억에 남는 해외공연은 A. 2011년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왓에서 한국의 아리랑 콘서트’를 공연하였다. 우리가 갔던 곳은 캄보디아의 우리나라의 불교인 조계종이 세운 고아원 겸 보육시설 '아름다운나라'이다. 그해 여름 창원어린이국악단 14명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 산공부(합숙) 대신, 봉사 차원으로 15일 일정으로 갔다. 원장님은 조계종의 스님이셨고, 직원들도 한국분들이 고생하고 계시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우리는 캄보디아 학생들과 교류 및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풍물과 민요를 가르키며 함께 공부하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우리 창원어린이국악단 학생들이 신명나는 공연도 선보여주는 등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신명을 잘 전달하고 왔다. 이는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마음과 우리 국악의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했던 큰 계기로 기억된다. 양명창은 어려운 청년기, 국악에 입문하면서 판소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일찌기 20대 중반에 제2회 창원전국악경창대회를 맡으면서 국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구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명실공히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가무악에 타고난 재능으로 판소리·풍물·전통무용 등을 섭렵하고 공연 연출까지 해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초창기 2003년 뮤직컬 형식 창극 작품을 맡았지만 창원에서 국악 분야 연출자를 찾지 못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 Q. 하동 출신으로 유명한 국악인 누구신가요 A. 여러분이 계셨지만, 손꼽히는 두분을 소개합니다. 하동 악양에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이 있는데, 유성준(1873~1949)명창은 판소리 근대 5대명창중의 ‘동편제의 제왕’으로 불리어졌으며, 하동 악양면 신대마을에서 활동하시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선유(1873~1949) 명창은 송우룡 명창과 김세종 명창에게 사사했고, 최초로 판소리 다섯마당 창본 '오가전집'을 펴냈으며 진주권번의 소리사범으로 활동하셨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두 분의 명창이 하동을 기점으로 폭넓게 활동을 하셨고, 이 두 분을 기리는 판소리 기념관이 하동 악약면 있으며, 판소리 전승발전을 위해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Q.그동안 창원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A. 첫째로는 판소리를 30여년간 후학을 가르키며 차세대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자체 기획공연 및 타 지역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이 공연과 시, 도, 국가의 다양한 공모사 업 지원 및 선정으로 경남을 비롯하여 국내외 등 수 많은 순회공연을 하였고, 26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며 인재 발굴과 대중화에 힘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Q. 가장 좋아하시는 민요는 A. 우리의 민요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육자백이', '흥타령'을 특히 좋아한다. 구성지면서 질펀한 우리네 삶이 녹아있어 절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Q.한국국악협회 창원시지부, 하동지부와 같이 국악활동을 하시나요 A. 초창기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 창단 맴버였으나, 현재는 협회 활동은 하지 않고,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일을 하며 활동하고 있다. 한국국악협회 하동지부는 풍물놀이, 판소리, 한국무용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저변을 확대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Q. 하동에는 어떤 축제가 있나요. 그 축제에서 판소리를 많이 알리고 계시죠 A. 하동 송림 백사장과 섬진교에서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및 다리밟기 행사,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에서 산골 매실 매화 축제, 제17회 화개장터 벚꽃 축제, 하동군민의 날 기념식, 새해맞이 공연,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등에 초청 받아서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Q.코로나 3년간 경창대회 치루시면서 힘드신 부분은 A.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법에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고 큰 어려움 없이 대회를 치뤘다.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참가해주었다. Q. 20대 중반부터 쉬지않고 30여 년이 넘게 공적 국악활동 단체를 이끄시면서 힘드셨던 점, 보람이 되신 점은 A. 국악단체를 이끌어 간다는게 다른 단체도 그렇겠지만, 경제적으로 녹녹치 않아 어려움도 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단원들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슬기롭게 해결하며 걸어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지역에서 후원자들도 차츰 생겨나면서 공고히 자리를 잡아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Q. 국악발전을 위해 한 말씀하신다면. A. 우리 경남에는 대학에 국악과도 없고, 시립.도립 국악예술단체도 없다 보니, 국악발전에 악순환이 되고 있다. 특히 영남민요는 동부민요로 몰아가서 딱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울까지 가서 경기민요를 배워서 이수증을 받고 학원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렇게 국악발전이 타 시.도에 비해 열악한 현실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원들과 창원시립 또는 도립국악단 창단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걸어 간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을 통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 국악 발전의 현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 26회를 맞이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뒤에는 손양희국악예술단의 노력이 숨어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 받아서 이번 하동군과 함께 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국악명창대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가 된다. 손양희 2012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 200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한승호 '적벽가' 사사. 2005 대구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이명희 '흥보가' 사사 2020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성준숙 '심청가' 사사 경상남도판소리보존회장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총집행위원장(26회) 경상남도무형문화재 판소리전수관 외 다수 출강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 대표 (2016~2022) 동국대학교(한국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2005~2008) 마산창신대학교(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판소리 학사 및 석사 졸업 2017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2016 제24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16 제25회 땅끝해남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한국문화예술위원장상 2016 제19회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창부 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15 제3회 미주 한국국악경연대회 '지도자상' 2006 제16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 2005 제2회 DELPHIC GAMES(문화올림픽) 한국대표(판소리) '단체우수상' 수상(말레이시아 쿠첸) 2003 제2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최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00 제2회 여수 전남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우수상' 2000 제18회 광주특장부문 판소리전국대회 특장부 '우수상' 1995 제6회 대구 전국국악제 '금상' 1989 제8회 창원 고향의 봄 축제 전국민요경창대회 '장원' 1985 제30회 부산 영남무용제 '최우수상' 1979 제1회 영남지구 무용콩쿨 '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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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방일영 국악상에 이생강씨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안병훈)이 주는 제12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대금 연주자 이생강(68.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 씨가 선정됐다.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이씨는 반주 악기로만 취급되던 대금을 독주 악기 반열에 올려놓은 대금 연주계의 최고 명인. 지금까지 수많은 음반, 연주회를 통해 대금 보급에 앞장서 왔다.시상식과 축하공연은 18일 오후 4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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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정경태씨 선정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윤주영)은 '제8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정경태(鄭坰兌.84.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 씨를 선정했다다.방일영 국악상 심사위원회는 "정씨가 시조 가사 가곡 등 정가(正歌)의 모든 분야에 정통한 이 시대의 보기드문 가객으로 시조보를 비롯해 가사보, 가곡보 등 각종국악보를 정리, 간행해 국악이론 체계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선정이유를 말했다.1994년 제정된 방일영 국악상은 해마다 국악발전에 공로가 큰 원로를 선정, 시상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3천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시상식은 16일 오후 5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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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방일영국악상에 이은관씨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윤주영)은 '제9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이은관(李殷官.85.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씨를 선정했다.방일영 국악상 심사위원회는 "이씨가 평생을 국악 대중화와 배뱅이굿 등 서도소리 발전에 바친 공로가 높이 평가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1994년 제정된 방일영 국악상은 해마다 국악발전에 공로가 큰 원로를 선정, 시상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3천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시상식은 다음달 22일 오후 5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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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국악상 신영희 명창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조연흥)이 수여하는 '방일영국악상' 제26회 수상자로 소리꾼 신영희(77·사진·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씨가 선정됐다. 전남 진도 출신인 신씨는 1953년 열한 살에 부친 신치선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이래 60년 넘게 소리꾼으로 활동해왔다. 특히 1988년 KBS 개그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에 출연해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국악의 대중화'를 앞장서 이끌었다.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회는 "신영희 명창은 독창(獨唱) 위주이던 판소리를 마당극과 방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스타일로 변주해 '나이 든 사람들이나 즐기는 고루한 전통'이란 편견을 깨뜨린 판소리계 대모"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94년 제정된 방일영국악상은 평생 국악 발전에 기여해온 공로를 바탕으로 하되 현재에도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펼치는 국악인에게 수여된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7000만원을 받는다. 시상식은 11월 21일 오후 5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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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형성과정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은 18개 종목으로 구성된다. 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강릉관노가면극(강릉단오제)·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동래야류·강령탈춤·수영야류·은율탈춤·하회별신굿탈놀이·가산오광대 등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속초사자놀이(강원)·퇴계원산대놀이(경기)·진주오광대(경남)·김해오광대(경남)·예천청단놀음(경북) 등 5개 시도무형문화재이다. 수영야류(水營野遊)는 부산 남구 수영동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수영동 수영공원 내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경상남도 낙동강 동쪽의 해안지대인 수영, 동래, 부산진 등에서는 가면극을 '들놀음' 또는 '야류'라고 불렀다. 수영야류는 원래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을 붙이지 않고 '들놀음' 또는 '야류(野遊)'라고 불렀다. 구전에 따르면 수영야류는 약 200년 전 초계 밤마리(현재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오광대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다. 당시 수영에는 오늘날의 해군기지라 할 좌수영이 있었는데 그곳의 대장인 수사가 밤마리 대광대를 불러다가 탈놀이를 놀게 하였으며 후에는 군졸들이 배워서 계속 놀게 되었다고 전한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산신제와 함께 거행되어 그해의 만사형통을 빌었다. 탈놀이를 놀기 전에는 가장행렬, 즉 길놀이가 있었고, 지신밟기와 함께 며칠간 계속 되는 이 기간 중에 탈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탈을 만들면 탈에 제사를 지내며 무사히 놀이를 마치기를 기원하였다. 일제가 집단적 집회를 금지함에 따라 1935년 전승이 단절되었다. 광복 이후 잠시 수영야류가 복원되었으나 지속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보존회와 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형성과정, 유래, 연희 과장, 특성,가면 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수영(水營)의 지역적 특성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지금의 해군 지역본부에 해당하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 水軍節度使營)이 현재의 수영구 수영동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원래 좌수영(左水營)의 준말로 폐영이 된 뒤에도 오늘 날까지 관아의 명칭을 줄여서 그대로 부르고 있다. 현재 수영이라고 할 때 좁게는 행정 구역상으로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지역이지만, 넓게는 수영동을 중심으로 인근의 망미동, 민락동, 광안동 일대를 포함하기도 한다. 수영지역은 장산과 금련산, 황령산, 배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그 사이에 수영강이 남쪽을 향하여 수영만으로 흐르면서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전형적인 배산 임수(背山臨水)의 형국으로 이런 지역은 취락을 이루기에 알맞은 곳이다. 더욱이 수영강 하류지역이 비옥하고 바닷물과 민물이 합수하는 수영만은 어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농업은 물론 수산업이 발달 할 수 있는 입지 조건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생활 여건에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이 농경에 관계된 의식을 행하고 이에 따른 놀이들을 하여왔다. 수영야류는 문헌이나 증빙할 만한 물증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좌수영수사가 군졸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합천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竹廣大)패를 데려다가 연희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수영사람들이 큰 장터인 밤마리에 가서 보고 온 후에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밤마리는 낙동강변의 수로요지(水路要地)로 어염상선(魚鹽商船)이 정박할 수 있는 하항시(河港市)여서 합천, 의령, 초계 등지와 고령, 안동 그리도 전라도지방에서까지 왔다고 한다. 더구나 6월에는 대마(大麻)의 집산지로서 난장을 이루었으니 그야 말로 큰 장터로 약 300호의 대 취락지였다고 한다. 여기에 거상(巨商)들의 비호 아래 유랑 놀이패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놀이패 중에서도 이른바 대광대 패가 죽방울 받기, 솟대놀이, 줄타기, 땅재주, 무동놀이, 요술 등의 곡예를 하여 관객을 모은 다음 탈놀음을 했을 것이다. 수영야류의 발생과 전파 과정 당시 탈놀음의 내용은 오방신장무, 중, 양반, 영노, 할미·영감, 사자무 등을 연희했다고 하는데 이 탈놀음의 내용이 경남, 부산 각지에 남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야류가 밤마리에서 퍼졌다는 전파설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1933년에 송석하(宋錫夏)는 「오광대 소고」에서 "오광대를 직접 포태(胞胎)한 것은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임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좌수영(동래군), 부산, 동래, 김해, 창원(마산), 통영의 오광대 급 야류, 이입계통(移入系統)이 모두 초계에서 원류(源流)를 시작하였다.” 라고 전제하고 구전파의 연대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좌수영은 수영사람들이 초계에 가서 보고 와서 창설한 것이며[동래군 좌수영 최창복씨 담] 동래읍은 수영것을 본 받아 시작한 것이고 [동래군 읍내 이흥욱씨 담] 부산진은 동래·수영의 면(面)을 모방하여 시작했다고 하였다 [부산시 백종기씨 외 제시 담] 오광대 계열도 언급하고 있다. 김해(가락)는 동래 것을 참고로 하여 시작하였고, 창원은 초계 대광대에서 배운 것이며 통영은 창원제(制)에 의하여 만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대광대에 의하여 창설 되었다고 하여 그 전파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수영야류는 다른 오광대나 야류보다는 비교적 일찍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밤마리의 유랑 연예단인 대광대 패의 연원(淵源)은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나라 가면극의 역사를 살펴서 대광대 패의 성격을 고찰하여 보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濊)의 무천 등과 같은 제천 의식시에 가면을 쓰고 놀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는 가면놀이가 보인다. 삼국사기 권 32악조에 우륵의 12곡 중 제8곡 사자기(獅子伎)는 바로 사자무인 것이다. 수나라나 당나라의 기악에 고구려의 무악이 고려기라 하여 들어있고,백제의 기악도 오나라에서 전수하여 7세기에는 일본에 전파한 사실(史實)은 1233년에 필사한 음악 서적인 「교훈초」 권4 기악조에 일본의 기악이 백제인 미마자(味摩子)가 가져온 무악이하 하였고, 또 1956년에 편찬한 일본의 연극 사전에도 기악은 고대의 외래예능이며 서기 612년 백제인 미마지가 귀화하여 일본에 전한 것이라는 기록에서 증명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가면극이 더욱 성연되었다.고려시대에는 신라에서 전승된 팔관회라던지 연등회, 나례(儺禮)에서 연행된 가무백희가 성행되는 가운데 이른바 산대잡극이 성립되었고, 교방가무희도 정리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산대잡극과 나례회가 전래되어 이른바 규식지희(規式之戲)와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에 배태(胚胎)되었던 무용이 가면극으로 인형놀이가 인형극으로 창(소리)이 판소리로 분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인조에 들면서 산대와 나례 등의 도감에서 관장 실시하던 국가적 행사인 공의(公儀)가 경제난으로 쇠태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도감에 예속되어있던 광대, 재인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됨으로써 공의의 쇠태는 심해져서 현종 때에는 금령(禁令)을 내린바 있었고, 영조 20년에는 결국 정파(停罷)되니 전국의 광대들은 각기 생계를 위하여 개별적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계의 대광대패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에 의하여 유착한 연예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남과 부산에 전파한 탈놀음은 산대도감에서 연희하던 광대들의 계통이라 할 것이니 수영야류는 산대도감 계통의 탈놀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파 과정이나 그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과장(科場)의 설정, 배역 등이 달라지게 되며, 내용과 표현에서 차이가 생겼을 것으로 본다. 사자가무가 동래에는 없으나 수영에 있는 이유는 수영의 지세(地勢) 때문이라 전하는 따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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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송파산대놀이 유래와 역사정의- 서울 송파 지역에서 전승하는 탈놀이 요약-서울·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를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애오개(아현)·녹번•사직•홍제동•구파발•노량진 등지에서 전승하다 소멸되었고, 현재는 양주·송파·퇴계원 산대놀이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송파나루와 장터에서 상업적 배경으로 펼치던 탈놀이이다. 유래 및 역사-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소멸되었고, 지금은 그 맥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다. 송파장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어 산대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을축년(1925) 한강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산대놀이도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송파산대놀이 전수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다. 내용-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다.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상위개념으로 불린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은 특수배역만이 추는 춤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 옴중의 용트림, 노장의 복무(伏舞)와 함께 부채춤, 팔뚝잡이, 활개펴기,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 삼진삼퇴 등이 있다. 타령장단의 깨끼춤은 송파산대놀이 춤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이다.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생성된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깨끼춤 종류로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몰아치기, 장삼치기,한삼치기, 맞춤[對舞]과 더불어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의 걸음걸이가 있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은 주로 등장사위에서 건들걸음으로 추는 춤이다. 건들걸음의 춤사위 종류는 뒷짐사위, 들사위, 쳐들사위, 흔들사위, 돌사위, 멜사위 등이 있다. 그밖에 배역에 따라 연닢·눈끔쩍이는 한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뒷짐이나 들사위로 등장하고, 말뚝이는 채찍을 휘돌리며 채찍춤을 추면서 샌님 가족을 이끌면서 뒷걸음, 돌걸음으로 등장한 다음 깡총걸음으로 장내를 뛰어 돌며 채찍을 휘돌린다. 이때 샌님·서방님·도련님의 걸음걸이는 한발 까치걸음으로 부채를 내렸다 들었다 하다가 건들걸음으로 들어와 나란히 자리 잡는다. 신할아비·신할미는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손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걸음으로 등장한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알려진 전승자들은 조영완(1865∼1949, 왜장녀•소무•가면 제작), 윤종현(1880∼1953, 옴중•가면 제작), 김도환(1889∼1951, 첫째 상좌•노장), 유천식(소매•애사당), 김동현(취발이) 등이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종현을 지도자로 하여 돌말이 놀이꾼들에 의해 계승된 1930년대에는 김순길(소매•팔목), 엄준근(옴중•신할아비), 이범만, 여태산 등이 활약했다. 지정 당시 예능 보유자는 이충선(李忠善, 1910∼1989, 장고•대금•피리), 김윤택(金澗澤, 1904∼1979, 첫째 상좌•취발이•초라니), 이범만(李範萬, 1907∼1984, 옴중•샌님),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둘째상좌), 허호영(許浩永, 1915∼1990, 말뚝이•가면 제작) 등 여섯 명과 후임 보유자 김학석金學錫(1940∼2014, 무당)도 작고하였다. 현재는 명예보유자 이병옥(李炳玉, 1947∼, 상좌·취발이)과 보유자 함완식(咸完植, 1956∼, 옴중•먹중)과 전승교육사로 안병인(安浦仁, 1954∼, 먹중), 이수환(李修煥, 1958∼, 노장), 김명하(金明河, 1955∼, 말뚝이), 이영식(李榮植, 1954∼, 팔먹), 강차욱姜次郁, 1964∼, 악사) 등을 비롯하여 활동 이수자인 전철규, 서병무, 전경희, 이한복, 김영숙, 탄종원, 김대현, 임채현, 장규식, 양흥기, 함승헌 등과 전수자인 강춘선, 어원석, 이준녕, 김태현, 김갑수, 이효녕 등과 악사 전수자에 김문조(피리), 엄태양(대금), 김희경(해금) 등이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반주 음악-길놀이에서 연주하는 행진음악과 놀이판에서 연주하는 반주음악을 나눌 수 있다. 길놀이에는 호적 한쌍·북·장고·바라로 편성되며, 행진에는 길군악으로 ‘능계’라는 음악을 연주하고, 길놀이과정에서 넓은 공터나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소에서는 멈추고 춤판을 벌리면 타령을 연주한다. 놀이판에서 춤의 반주에는 북·장고· 피리 한쌍·젓대·해금으로 편성된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쓴다. 길놀이 때 굿거리 장단의 선율은 창부타령과 비슷한 경토리로 되어 있다. 탈 마당에서는 배역에 따라 긴염불 장단과 허튼 타령과 굿거리 장단과 당악 장단을 쓴다. 복식ㆍ의물ㆍ무구-탈은 바가지탈로 소나무 껍질을 깎아 눈썹, 코, 볼, 입을 붙이고 한지(韓紙) 조각으로 여러 겹 덧붙여 말린 다음 단청(丹靑)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복식은 팔먹중들은 반장[赤·靑·黃·綠色]에 옷깃과 허리 띠는 주로 붉은 색이나 대비색이며, 각 배역마다 신분적 특징을 보여 주는 의상이다. 의물과 무구도 배역에 따른 것으로 양반들은 합죽선, 취발이 녹음채, 말뚝이 채찍, 먹중갑(완보)은 곤장, 무당은 방울·부채, 샌님·미얄은 지팡이 등을 사용한다. 특징 및 의의-송파산대놀이는 상역지의 거부 거상들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연희 규모도 컸으며 줄타기, 씨름대회, 풍물, 민요등 성대한 놀이판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이해타산도 작용하고 있었기에 놀이판의 성격이 달라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연희의 실제적인 주도권은 추렴한 상인들이었다. 둘째, 연희 시기는 장꾼을 끌 수 있게 비교적 농한기인 오월단오, 칠월백중을 택했다. 셋째, 전문성을 띤 유명한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놀이판을 성대히 만들었다. 넷째, 외부 장꾼과 별로 관계없는 길놀이는 약화되었다. 다섯째, 연희 장소도 마을 공터, 산기슭, 강가 등지에서 하던 것을 장터로 설정하였다. 여섯째, 놀이판의 규모도 커지고 관람 질서를 유지하고자 탈판에 금줄(새끼줄)을 치고 차일(遮日)도 쳤으며, 등•퇴장로도 만들었다. 그리고 춤사위의 형식적인 면에서 해서 탈춤(봉산•강령•은율)과 비교하여 산대놀이 춤사위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섬세하고 다양한 춤사위를 지니고 있다. 둘째, 동적인 춤사위보다 정중동靜中動의 춤사위가 발달하였다. 셋째, 염불장단의 춤이 발달하였다. 넷째, 팔사위에서 뿌리는 ‘한삼춤’보다 감치고 조이는 ‘손춤’이 많다. 다섯째, 도약무跳躍舞보다 답지무踏地舞가 발달하였다. 정사항-국가 무형문화재(1973) 송파산대놀이 기타-송파산대놀이는 극적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유사하게 열두 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나 마당구성의 짜임이 약간 다르다. 또한 다 같이 바가지탈을 사용하지만 탈의 수가 서른두 개로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신할미•무당 등 산대도감 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더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다. 송파산대놀이의 춤은 중부 지역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4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주제어-산대, 산대도감, 본산대놀이, 송파나루, 송파장, 상역지, 양주별산대놀이 참고문헌-이병옥, "송파산대놀이", 피아, 2006, 허호영, 「송파산대놀이 대사」,"서낭당" 3호, 한국민속극연구소, 1972,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81, 이두현,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90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이두현,"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필자-이병옥(李炳玉) 복합매체(multi-media) 사용 목록표] 사용 목록표 원고의 내용 이해를 도울 복합매체(이미지, 영상, 음원 등) 자료 정보 총 3건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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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3)지난 달 29일 송파산대놀이 공개 행사에서 전 12과장이 모두 연행되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과 가락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로 이충선(李忠善, 1901-1989/ 장고·대금·피리), 김윤택(金潤澤, 1904-1979/ 첫째상좌·취발이·초랭이), 이범만(李範萬, 1907-1984/ 팔먹중·샌님),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둘째상좌), 허호영(許浩永, 1914-1990/ 말뚝이·가면 제작)의 6명이 인정되었으며 모두 작고했다. 현재는 보유자 김학석(金學鉐, 1940- / 연희(무당)), 함완식(咸完植, 1956- / 옴중·먹중)과 전수교육조교 김성운(金聖運, 1945- / 피리), 안병인(安炳仁, 1954- / 먹중), 이병옥(李炳玉, 1947- /취발이), 이수환(李修煥, 1958- / 노장), 김명하(金明河, 1955- / 말뚝이) 등이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보존회에서 전하고 있는 연희본의 존재가 궁금합니다. A. 이두현본(1971년), 허호영본(1972년), 이병옥본(1982년)이 있는데, 현재 송파산대놀이 연희 교재로 쓰이고 있는 것은 1980년까지 제가 당시 예능보유자 이범만, 한유성, 문육지, 김윤택, 이충선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하여 정리한 연희본 이병옥본으로 전수를 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의 가면극 구성과 배역, 내용이 12과장이 어떻게 다른가요 A. 송파산대놀이는 가면극의 구성이나 내용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 12과장과 거의 유사하나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신할미·무당 등 산대도감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학계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산대'라는 명칭은 A.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처럼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성행한 ‘가면극’에 ‘산대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대놀이의 ‘산대’가 뫼 산(山) 자에 무대 대(臺)자로 이뤄진 것과 같이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놀이가 열린다’라는 깃발을 들고 돌지만 예전에는 산대놀이를 앞두고 조금 큼직하게 만든 우마차 위에 얇은 판을 깎아 산 형상을 층층으로 올려 만든 ‘산대’를 끌고 다니며 연희 구경을 오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산대’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습니다. Q.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 이름에 ‘별’ 자가 추가된 것은 기존 놀이패들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양주읍에서 ‘별도’로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글자이고, 노들산대, 구파발산대 등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조선 시대 산대놀이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Q. 한반도 지역 탈춤 중에서 한양과 가까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산대놀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연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궁중 연회에 가장 많이 불려갔습니다. Q. 그렇다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전승 주체를 담당했던 계층은 다른가요. A.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입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한다면 기원과 등장 인물이 다른가요? A. 기원과 유래를 보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송파는 나루터여서 장꾼의 속성을 반영, 타령장단의 신명 나는 놀이춤으로 발전했고, 양주는 관에 대한 예속성 때문인지 염불장단에 의식춤이 발달했고,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의 대표적 춤사위 특징은? A.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이 발달한 반면, 송파산대놀이에서는 타령장단의 깨끼춤이 발달한 것이 특징입니다. Q.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여러 배역의 탈을 쓰고 연희를 벌리는 탈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예술성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A. 춤(무용)과 음악·연극의 요소가 융합된 탈춤은 전통 공연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종합예술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이고 바로 예술성의 조건이지요. 특히 사회비판적 주제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Q. 그래서 탈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A. 그래서 일년 중 하루쯤은 지배자 집단이 억압 받는 피지배자들에게 그날은 욕도 먹고 너희들 목소리도 한번 질러보라고 풀어줍니다. 그래서 탈춤의 마무리는 갈등과 대립의 화해, 나아가 상호존중을 통해 사회 전반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연희 종목 중 탈춤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탈춤이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넘어 인류가 함께 즐기고 향유하는 무형유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Q. 올해 무형문화유산 공개 행사에서 여러 지역 탈춤을 볼 수 있는데, 기대가 됩니다. A. 5월에는 2일 북청사자놀음, 19일 은율탈춤, 21일 고성오광대, 29일 송파산대놀이가 공개행사를 했습니다. Q.서울놀이마당에서 불편하신 부분을 호소하신 적이 있는데 개선이 되었나요 A.서울놀이마당은 송파산대놀이 전승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전국에 있는 무형문화재의 발표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서울놀이마당에서 전통 공연 외 다른 공연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송파산대놀이 연습장인 전수관을 분장실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송파산대놀이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을 호소했습니다. 분장실을 따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아직도 변한 것은 없습니다. 송파산대놀이보존회와 각 지역 탈춤 보존단체들은 국가무형문화재·시도무형문화재 지정 등 체계적·지속적인 무형문화유산 보존·전승, 특히나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연과 체험·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한 활발한 전승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유네스코 인유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 등재에 큰 역할을 했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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