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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진흥법’ 전문가위원회 3차 회의(사)한국국악협회(이사장 이용상) ‘국악진흥법 전문가위원회(위원장 박상진)’ TF(소위원회) 3차 회의가 협회 사무국에서 열렸다. 이 번 회의에서는 정부기관과의 공감대를 확대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문화체육관광부 2030청년자문단 위원’ 박예원 위원을 초청, 의견을 청취했다. 박 위원은 2017년 이전부터 진행해 온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에 대한 문제점들을 다양하게 소개하며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 등에서 나타난 모니터링 부재 등 실효성 문제를 제시했다. 또한, 지난 20년 간 창작공연 생태계 지원과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공유했다. 이어서, 소위원회 위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국악진흥법 제11조’의 전문인력 양성 기관과 관련한 내용과 ‘국악진흥법 제13조’의 국악 관련 단체의 육성‧지원에 관한 정책적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도출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자평했다. 특히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역할에 대한 심층적 진단을 통해 새로운 비전 및 수행과제를 보완하고 개선해야 할 점들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박상진 위원장은 "국악진흥법 발전을 위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실태조사를 통하여 정책을 입안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라고 하였다. 참석자는 이용상(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박상진(전문가위원회 위원장,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하응백(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 이희병(노원전통문화체험관 관장), 김상연(전남대학교 교수), 박예원(문화체육관광부 2030청년자문단 위원, 객원), 7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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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포항국악제 전국기악경연대회(12/16-17)■행사명: 제19회 포항국악제 전국기악경연대회 ■경연종목 관악부분, 현악부문 (고등부, 일반부), 기악부문 (초등부, 중등부, 신인부) ■일시 ▶예선: 12월 16일(토)-고등부,일반부 10:00~17:00 12월 17일(일)-단심제:초등부,중등부,신인부 10:00~12:00 ▶본선: 12월 17일(일) 13:00~16:00(고등,일반부), 축하공연 및 시상식:16:00~17:00 ※예선 및 단심제 : 접수 역순 본선, 결선 : 추첨 ■대회장소 포항예술고등학교 예송관 3층 ■주 최(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주 관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포항지부 ■후 원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 경상북도교육청 ,포항시, 경상북도포항교육지원청, (사)한국국악협회, 국악신문, 포항예술고등학교 ■대회구분 ■예선, 단심제 : 정악,산조,창작곡 중 택일 ■본선 : 정악,산조,창작곡 중 택일 ■결선 : 정악,산조,창작곡 중 택일 ■참가요강 ▶참가자격 ■학생부 : 초•중•고등학교 재학생 ■일반부 :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 전공자(유사한 해당대회에서 장관상 이상 수상자는 제외) ■신인부 : 만18세이상 비전공(취미생)자 ◦군복무자는 소속부 대장 추천서 제출 ▶참가부문 고등부, 일반부 : ■관악부문(대금, 피리, 해금, 개량악기포함) ■현악부문(가야금, 거문고, 아쟁, 개량악기포함) ■초등부, 중등부, 신인부: 기악부문 (대금, 피리, 해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소금, 퉁소, 단소, 개량악기 포함) ▶경연시간 - ■예선 :일반부 5분내외 고등부 4분내외 ■본선 : 일반부 7분내외 고등부 5분내외 ■결선 : 일반부 10분 내외 -단심제:초등부, 중등부, 신인부 3분 내외 (단 사정에 따라 경연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참가 신청방법 ▶신청기간 : 2023.11.20.(월) 09:00∼12. 8(금) 18:00【19일간】 ▶접 수 처 : (우37637)경북 포항시 북구 우창동로 70 테라스 31 603호 포항국악학원 ▶접수방법 : 이메일, 우편 이메일 diya3797@daum.net ☎)054-614-3798 ※ 우편접수 마감은 당일 도착분에 한함. ※ 참가신청서는 (주)국악신문 홈페이지(www.kukak21.com)에서 다운받아 사용가능 ■제출서류 ■일반부 ―참가신청서(소정양식) ※반드시 사진부착 ―현역 군복무 중인자는 소속부대 책임자 추천서 제출 ―본선 진출자는 신분증 지참 ■고등부 ―참가신청서(소정양식) ※반드시 사진부착 ―본선 진출자는 신분증 지참 ―학교장 추천서 또는 재학증명서 ■초·중등부 ―참가신청서(소정양식) ※반드시 사진부착 ―학교장 추천서 또는 재학증명서 ■신인부 ―참가신청서(소정양식) ※반드시 사진부착 ―신분증 사본 ■참 가 비 없음 ■반 주 반주자는 참가자가 대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단, 고수가 없을시 주최 측 지정고수 지원가능 고수비: 단심제,예선-무료, 본선-10만원, 결선-10만원) ■.유의사항 가. 본선진출자는 오후 1시부터 경연이 시작됨으로 12시까지 장소에 입소하여 본인확인, 추 첨하여야 함. 나. 참가자는 신분증(주민등록증 또는 학생증)을 반드시 지참하여야 함. ■훈격과 시상 (※부득이한 사정일 경우 시상은 변동될 수 있음) 일 반 부 (관악•현악) 대 상 1명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상장 및 상금 100만원 금 상 1명 경상북도지사상 상장 및 상금 50만원 은 상 2명 포항시장상 상장 및 상금 각40만원 동 상 2명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상장 및 상금 각30만원 장 려 상 4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고 등 부 (관악•현악) 금 상 2명 경상북도교육감상 상장 및 상금 각 40만원 은 상 2명 포항교육지원청 교육장상 상장 및 상금 각 30만원 동 상 2명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상장 및 동상 각 20만원 장 려 상 4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중 등 부 (기악) 금 상 1명 포항교육지원청 교육장상 상장 및 부상 은 상 1명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동 상 1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장 려 상 2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포항지부장상 상장 및 부상 초 등 부 (기악) 금 상 1명 포항교육지원청 교육장상 상장 및 부상 은 상 1명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동 상 1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장 려 상 2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포항지부장상 상장 및 부상 신 인 부 (기악) 금 상 1명 포항시장상 상장 및 부상 은 상 1명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동 상 1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상 상장 및 부상 장 려 상 2명 (사)신라만파식적보존회 포항지부장상 상장 및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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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문학산 경기12잡가. 기악 전국국악경연대회(11/18)■행사명: 제10회 문학산 경기12잡가. 기악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회기간 : 2023년 11월 18일(토) ▶전체경연 단심제 : 2023년 11월 18일 (토) 09:00 ~ 대면심사 ■대회장소 : 인천국악회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수봉안길 78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7-5 ) ■주최.주관 : 인천무형문화재 제21호 이순희경기12잡가 보존회 ■후원 :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미추홀구, 인천광역시교육청, (사)한국국악협회, (사)한국예총 인천광역시연합회, (사)한국국악협회 인천광역시지회 ■경연종목 : 민요-초등부. 중.고등부. 일반부. 명인부 ■기악-초등부 .중.고등부. 명인부 ■민요학생부 – 민요, 잡가등 모두 가능 ■민요일반부 – 경.서도.남도 민요만 가능(12잡가 부를 수 없음) ■민요명창부 - 12잡가, 잡가, 송서율창등 잡가 가능(민요 부를 수 없음) ■기악 - 관악, 현악, 타악 등 ■참가자격 : ① 학생부 - 초, 중. 고등학생 및 청소년 ② 일반부 -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학생을 포함한 만20세 이상 남, 여 ③ 명인부 -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학생을 포함한 만20세 이상 남, 여 ■신청방법 : 인천국악협회 홈페이지(www.인천국악협회.com)공지, 공고 접속 대회 참가신청서 (소정의 양식)다운로드, 사진(3cm×4cm), 신분증(학생증,재학증명서,주민등록등본) ■접수 : 2023년 10월 05일 ~ 2023년 11월15일(수요일) 17:00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99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204호 ☎ 032)438-2288 ※ 대회진행상 접수마감이후 접수 및 당일접수 불가 ▶ 제출서류 1.참가신청서는 소정 양식의 신청서를 복사하여 사용가능(사진부착1부) 2.신분증: 학생부는 학생증사본또는 재학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명인부,일반부는 신분증 또는 주민등록등본 ▶이메일 jabga12@naver.com(이메일접수 후 확인요망) ▶우편 접수 시 필히 등기우편으로 접수바람 (일반우편접수 불가) ■ 신청금 : 없음 ■ 경연시간 ■학생부(초.중.고등부) 민요,기악- 5분이내(단심제) ※11월18일(토) 오전9시 경연시작(참가신청순) ■일반부 민요,-5분이내(단심제) ※11월18일((토) 오후9시 경연시작(참가신청순) ■명인부 민요,기악-7분이내 (단심제) ※11월18일((토) 오후9시 경연시작(참가신청순) ■유의사항 ▶ 반주자는 각자대동. 주최 측 지정고수 신청가능 ■학생부 - 고수비 없음 ■일반부, 명인부 - 지정고수비 5만원(접수시 납입) ▶ 신청서 접수이후 서류반환이나 고수비 환불 불가 ■ 심사 ▶심사위원은 해당분야 최고권위자 중에서 위촉하며 행사당일 발표함 ▶심사 및 운영규정은 이순희경기12잡가보존회 운영규칙에 의함 ■ 기타문의: 인천무형문화재 제21호 이순희경기12잡가보존회 ☎ 032)438-2288 ■ 각 부문별 시상 내역 ■명인부 시상내역 구분 훈격 민요 기악 시상 대 상 인천광역시장상 1명 1명 오십만원.상장 최우수상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상 1명 1명 상장 우 수 상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1명 1명 상장 준우수상 한국국악협회인천시지회장상 1명 1명 상장 장 려 상 인천무형문화재제21호경기12잡가보존회장상 2명 2명 상장 ■민요일반부(단체부포함) 시상내역 구분 훈격 민요 시상 대 상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장상 1명 삼십만원.상장 최우수상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1명 상장 우 수 상 한국예총인천시연합회장상 1명 상장 준우수상 한국국악협회인천시지회장상 1명 상장 장 려 상 인천무형문화재제21호경기12잡가보존회장상 2명 상장 ■중•고등부 시상내역 구분 훈격 민요 기악 시상 대 상 인천광역시 교육감상 1명 1명 일십만원,상장 최우수상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1명 1명 상장 우 수 상 한국예총인천시연합회장상 1명 1명 상장 준우수상 한국국악협회인천지회장상 1명 1명 상장 장 려 상 인천무형문화재제21호경기12잡가보존회장상 2명 2명 상장 ■초등부시상내역 구분 훈격 민요 기악 시상 대 상 인천광역시 교육감상 1명 1명 일십만원,상장 최우수상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1명 1명 상장 우 수 상 한국예총인천시연합회장상 1명 1명 상장 준우수상 한국국악협회인천시지회장상 1명 1명 상장 장 려 상 인천무형문화재제21호경기12잡가보존회장상 2명 2명 상장 ※ 시상내역은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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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경기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11/11)■행사명:제29회 경기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일 시 : 2023년 11월 11일(토) ■학생부 단심제 ■일반부(단심제), 명인부 (예선) 2023년 11월 12일(일) 오후 2시 본선 및 결선 ■명인부 (민요, 무용, 기악 ) 본선 ( ※ 예선 3위 이상 입상자만 본선심사 ) 2023년 11월 12일(일) 오후 6시 축하공연 및 시상식(달맞이극장) ■장 소 :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경연순서 : [예선] 접수순으로 진행 [본선] 추첨으로 진행 ■경연부문 : ■명인부 : 민요 (경․서도 입창, 좌창) 무용, 기악 ■일반부 : 민요 (경․서도 민요 ․ 전민요(토속민요가능,잡가불가)․ ■학생부 : (경․서도 민요, 좌창) ․ 전통무용 ․ 기악관악, 기악현악 ■참가자격 ■학생부 (중학생, 고등학생) 개인 ■일반부 (대학생과 대학원생, 일반인) 개인 ■명인부 (대학생 이상인 자, 일반인) 개인 ※ 각 부문별 대상 수상자는 동일부문 참가불가 ※ 비취학 청소년(검정고시, 홈스쿨링 등)은 그 연령에 준해 참가 ■신청서 접수 방법 - 접수기간 2023년 10 월 26 일(목) ~ 11월 7(화)까지 - 접수방법 : 신청서는 이메일로 제출하며 이메일 제목과 신청 파일명을 동일하게 작성하여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 1. (기악) 명인부 홍길동 2. (현악) 학생부 홍길동 로 작성하여 제출합니다. - 신청서 다운로드 : (주)국악신문 www.kukak21.com 경기도지회 홈페이지 www.kgukak.com ■참가비 없음. ■신청서 접수방법 : E-mail 접수 ■민 요 : kggafolk@gmail.com ■무 용 : kggadan@gmail.com ■기 악 : kggains@gmail.com ※ 유의사항 1) 민요 일반부와 학생부는 단심으로 경연됨. 2) 명인부 본선은 예선 3위 이상 입상자만 본선 심사합니다. (각 부문 1위 입상자들로 종합 결선 진행함.) 3) 실내에서 연습은 경연에 방해가 될수 있으니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출서류 : ․ 참가신청서(소정양식) www.kgukak.com다운로드 ․ 개인정보 수집 활용 동의서 ․ 신분증 사본(학생증) 및 가족관계증명서(학생부에 한함) ■문의처 ․ 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수원시 팔달구 효원로 307번길 20 경기아트센터내) Tel(031)236-1070, 548-1046 / Fax (031)236-1080 (통화가 어려울시 메일로 문의 kggukak@hanmail.net) ■경연방법 및 곡명 부문 민요 전통무용 기악 명인부 일반부 학생부 명인부 학생부 명인부 학생부 경연종목 경.서도 입창.좌창 경.서도 민요 (토속민요 가능) 경.서도 좌창 및 입창 전통춤(전통창작춤 포함) 현악 및 관악 경연시간 5분이내 5분이내 4분이내 5분이내 4분이내 5분이내 4분이내 본선 5분이내 5분이내 5분이내 음악 - 무용 본선 진출자는 반주음악 준비. (USB- 경연곡 한곡만 담을것) 경연순서 및 경연방법 - 민요 일반부, 전 학생부문은 단심으로 한다. - 민요 명인부 : 예선은 경서도 좌.입창 1곡(5분이내), 본선은 예선곡과 다른 1곡, - 기악 명인부 본선의 경우, 심사위원이 임의로 다른 부분(진양, 중모리, 자진모리 中)을 다른 부분을 지정해서 들을 수 있다. ■시상계획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지 원 금 시상인원 계 기 악 무 용 민 요 명인부 종 합 대 상 국회의장상 5,000,000 1명 5,000,000 대 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00,000 2명 4,000,000 금 상 경기도지사상 1,000,000 3명 3,000,000 은 상 경기도의회의장상 700,000 3명 2,100,000 동 상 예총경기도연합회장상 500,000 3명 1,500,000 장 려 상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장상 300,000 3명 900,000 민 요 일반부 대 상 안산시장상 700,000 1명 700,000 최우수상 경기도의회의장상 500,000 1명 500,000 우 수 상 예총경기도연합회장상 300,000 1명 300,000 장 려 상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장상 200,000 1명 200,000 관 악 현 악 민 요 무 용 학생부 대 상 경기도교육감상 400,000 4명 1,600,000 최우수상 안산예총회장상 300,000 4명 1,200,000 우 수 상 (사)전통국악진흥회 이사장상 200,000 4명 800,000 장 려 상 한국국악협회경기도지회장상 100,000 4명 400,000 * 훈격 및 시상금 내역은 주최측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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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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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예산전국사물놀이 경연대회(11/04)1. 개최목적 사물놀이의 올바른 계승과 발전, 그리고 사물놀이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화합을 이끌어 내며 민족 음악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신진 음악인을 발굴 육성함과 아울러 사물놀이 세계화의 토대를 구축한다. 2. 행사명 :제23회 예산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 3. 행사진행 가. 주 최 : 예산군, 사단법인 민족음악원 나. 주 관 : 사단법인 민족음악원,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 다. 후 원 :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부, 농림축산식품부, 교육부, 충청남도, 충청남도 교육지청, 예산군, 예산군 교육지청, 한국예총, 한국국악협회 4. 대회기간 ■학생부(초, 중, 고, 학생 개인부)경연 : 2023년 11월 04일 09:00(토) ■일반부(동호인부 및 비나리부 예선/본선, 전문인부)경연 : 2023년 11월 05일 09:00(일) 5. 대회장소: 예산군 문예회관 대극장(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아리랑로 185-14) 6. 대회요강 가. 참가자격 1) 참가인원 : 각 부문 인원 제한 없음 (부문별 15개팀 내외 접수) 2) 참가자 구분 ■학생부(토요일) ▶ 단체부문(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 단일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단체에 한함. 고등부→중등부→초등부의 순서로 진행함. (복수학교 구성은 구성원 중 최고 학년의 학생부로 참가) ▶ 개인부문(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 단체부문 참가자도 개인부문 참가 가능. 초, 중, 고 통합운영(단체부문 경연 후 오후에 경연) ■일반부(일요일) ▶ 동호인부 : 동아리 및 각종 일반 동호회 단체 (전공자 1인 이상 포함시 전문인부로 참가) ▶ 전문인부 : 대학 전공자 및 공인 활동 단체 ▶ 비나리부 :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창자1인(반주단 대동 가능) 3) 기타 전년도(2022년도) 학생부, 일반부 대상팀은 당해 연도에 한하여 참가할 수 없음. (2022년도 학생부 종합대상 : 고등부 "국립전통예술중학교”,일반부 종합대상"서울예술대학교 한국음악단”) 위 참가자 구분을 위반할 시 본 대회 홈페이지에 게시하며 향후 3년간 본 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함은 물론, 대회 후 발견될 시 입상을 취소하고 상장과 상금은 회수함. 나. 제출서류 1) 참가신청서 1통(본 대회 소정양식) - 별첨참조 - 네이버 카페 : 예산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http://cafe.naver.com/samullks) 다. 신청서 교부 및 접수 1) 기 간: 2023년 10월 01일 – 11월 01일 (18:00까지 접수분) 2) 접수방법 : 이메일 접수 3) 접수처 이메일 :samullks@naver.com(사물이광수) 4) 참가비 : 없음 5) 심사위원 - 행사당일 발표(‘직접 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 심사 회피제도 운영) 6) 문의전화 : 041 - 333 - 3777, (사)민족음악원, 사무총장 서정훈 010-8635-9838 라. 경연방법 1) 경연순서 : 경연 당일추첨(경연당일 08:30분 추첨 예정) (추첨시간은 참가팀에 한해서 추후 통지, 추첨에 참가 못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음) 2) 경연시간 : 학생부(초,중,고등부 단체 또는 개인), 동호인부 – 단체 7분 이내, 개인 5분이내 비나리부 : 예선 5분이내, 본선 7분이내 전문인부(단체 또는 개인) - 10분 이내 3) 최종결선 ■학생부 : 교육부 장관상 ▶ 초,중,고등부 단체부문 및 학생부 개인부문 각 1위팀간 최종 결선(3분이내) ■일반부 : 국회의장상 ▶ 동호인부, 전문인부 단체 및 개인, 비나리부 각 1위팀간 최종결선(3분이내) 7. 시상계획 ※ 위 시상계획은 사정상 변경될 수 있음 ※ 시상(상격)과 관련한 최종 계획은 추후 본 대회 홈페이지 참조 ※ 모든 상금과 부상은 상격과 무관하게 대회 주최 측에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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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남도민요경창대회 총평연이틀에 걸친 경연, 첫날에 딸막딸막 심중이 진동하더니 둘째날 마침내 속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공명하게 하였을까? 남도민요가 가진 힘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무형유산이 이야기와 노래다. 대략 삼천 년 전 시경(詩經)으로부터 신라시대의 향가, 고려가요를 거쳐 지금의 민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수천년 수만년 사람들의 흉중을 움직인 동력이다. 내뱉는 것도 탄(歎)이요 들이마시는 것도 탄(呑)이다. 감당치 못할 시련을 들이마셔 내뱉는 기술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시김새와 장단이다. 지난 1세기 남도민요는 이른바 국악판의 쟁패를 거듭하다가 판소리, 산조, 병창 등과 더불어 마침내 한국의 국악계를 장악하였다.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서울(한양,경성)에서는 경기소리가 바탕이었지 남도소리는 끼지도 못했다. 무엇이 이리 만들었을까? 남도소리의 기술과 내력을 빼고 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갱번으로 대표되는 생태적 요인, 삼남 곡창지대라는 경제적 요인, 무계의 목숨 건 연마 등이 밤송이처럼 내외면에 포진해있다. 내가 기왕에 주장하던 ‘남도음악의 쟁패, 시김새의 정초’를 참고하기 바란다. 판소리와 민요는 같고 다르다. 판소리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서'사라면, 민요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서정'이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과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기술은 서로 같으면서 다르다. 고 조공례 어머니는 내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도아리랑을 부를 때 마치 판소리처럼 '에헤에헤'하고 너무 음정을 세우지 말아라." 어느 대회보다 이번 대회 경연자들의 격조가 높았다. 명창부의 상위권에 든 서너 경연자는 모두 대통령상을 주고도 남음 직했다. 거듭 주문하고 싶은 것은, 지난 1세기 우리가 확인했듯이, 어떻게 사람의 흉중을 후벼팔 수 있는가, 어떻게 타자의 마음을 진동할 수 있는가, 그 공명의 기술에 대해 더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횡격막의 다른 이름이 계면(界面)이고 이를 소리기술로 구성한 것이 계면조다. 천구성보다는 수리성을 높이 치는 이유가, 판소리든 민요든 이면(裏面)의 소리라는 데 있다. 특히 서정의 소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 곧 공명하는 것이다. 미처 큰 상을 받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또 상을 먼저 받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모두 남도민요의 대의를 실천하는 주인공이라는 점 상기하자. 남도민요경창대회는 본래 진도문화원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진도국악협회에서 진행하고 있다. 내가 문화원 근무하던 시절에 그 씨앗이 뿌려지고 발아하였는데 벌써 25회째가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김수연 선생 이하 명인들과 더불어 남도민요에 대한 갈무리를 할수 있는 기회여서 기뻤다. 내 평생의 명예가 시나브로 열매를 맺은 셈이기도 하지만, 이름도 빛도 없이 남도땅 전역에서 서로 마음 열고 노래하던 조상들께, 장차 지친 마음 위로하며 공명의 소리 이어갈 미래의 주역들에게 무한한 영광을 돌려 드린다. 본인은 이론과 실기를 두루 겸비한 연구자이기에 내 제자들 후진들에게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 심사평을 하였고, 그 대략을 몇 자 남겨둔다. 특별히 다섯 살 어린아이들부터 연로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흉중을 털어내 경연에 참여해주신 점 거듭 감사드린다. 수천 년 수만 년 인류의 중요한 유산으로 전승되온 민요가 앞으로도 수천 년 수만 년 이어갈 것을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그 책임자이고 주인공이다. 2023년 10월 8일 제25회 대한민국남도민요경창대회 심사위원장 이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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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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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67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장)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취임을 계기로 "문화로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환경이 잘 조성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회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앞으로도 문화가 경제가 되는 저작권 강국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건강한 저작권 생태계를 만들고 한류 콘텐츠 저작권을 보호하는데 노력하겠다.”라고 문화체육관광부는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문화예술저작권은 한류 콘텐츠 수출 호조에 힘입어 2020년 상반기 이후 7개 반기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흑자를 주도한 대부분은 음악(K팝) · 영상 저작권 수지(2억8000만달러)에서 나왔다. 즉, BTS(방탄소년단) ‧ 블랙핑크와 같은 K팝 가수들의 활약과 K드라마의 성과 등 다각도의 노력의 결과가 반영되어 올해 상반기 저작권 무역수지가 역대 2위의 흑자를 달성한 것으로 문화체육관광부는 분석하고 있다. 문화가 경제가 되고 저작권 강국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건강한 저작권 생태계를 만들고 한류 저작권을 보호하는데 노력하겠다는 문체부의 비전과 미션은 바른 제시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국악진흥법’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K팝과 K컬처의 원형자산은 전통음악이고, 전통문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악문화산업의 진흥과 육성’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한국국악협회의 전문가위원회가 정책개발을 연구 중에 있다고 한다. 이때에 문화체육관광부의 유인촌 장관이 새로 임명되었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잘 하는 장관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무에 능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장관을 역임한 후에는 시민사회 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시민문화 향유를 위해 현장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도 그 운동에 함께 할 것을 직접 권유 받은 적이 있다. 현충원 참배에서 유인촌 장관은 방명록에 "문화로 국민에게 희망과 위로를”이라고 적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가슴이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현재와 같이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려울 때 일수록 국민들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문화가 담당해야 한다. 정부 부처 중에서도 문체부가 당연히 그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국민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것은 국민들이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들이 요구하는 문화수준을 정치문화 수준에서 소화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요소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로써 국민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겠다 라는 유인촌 장관의 메시지는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쯤해서, 2014년 정기국회에서 통과된 <문화기본법>을 상기하고자 한다. <문화기본법>이 통과됨으로써 우리나라 문화정책 흐름 중 아주 큰 흐름을 맞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문화는 국가 경영에 주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소극적 관리와 지원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다 1990년 ‘문화부’ 설치를 기점으로 문화정책이 국가 경영의 주요 영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화복지 개념의 탄생, 그리고 문화산업이 팽창되면서 문화정책의 영역은 대폭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문화정책의 대상은 예술 창작자에 대한 지원이거나 산업생산자에 대한 지원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문화에 대한 대상은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 혹은 인접 분야에 국한되었다. 그리하여 문화의 수용자이며 당사자인 국민은 국가의 관심 영역 밖에 있었다. 그러나 <문화기본법>이 제정됨으로써 그 정책적 대상이 국민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이다. 이 <문화기본법>은 문화에 대한 정의조차 "삶의 총체적인 양식이면서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 물질적 ‧ 지적 ‧ 정신적 산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개인과 집단의 감성을 표현하는 가치, 활동이나 제도”까지로 확대 적용하고 있다. 과거 문화예술진흥법에 기록된 문화예술에 대한 정의, 즉 "문화예술이라 함은 문학, 미술, 음악..... 등을 말한다.”와 전적으로 다른 인식과 개념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문체부는 문화예술의 창작자에게만 해당되는 지원이 아닌, 국민의 문화 향유권인 문화적 권리에 더 큰 방점을 두고 글로벌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글로벌 정책이 한류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문화융성의 시대에 대비한 <문화기본법>이라고 여겨져 기대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그러나, <문화기본법>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것은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흥과 끼를 기반한 창의적인 DNA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국민들의 다색다양한 창의적인 끼가 발현될 수 있도록 정책으로 반영하는 것은 K컬처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국악 진흥법> 또한 <문화기본법>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적으로 연구되어져야 하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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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전국고수대회 대통령상 수상 강형수씨판소리의 기본이 되는 고수인의 저변확대와 신인들의 발굴 육성 등 최고명고수 등용문을 위해 전주시와 (사)한국국악협회 전북도 지회(손현배 지회장)가 주최한 제43회 전국고수대회가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지난 5일부터 6일까지 2일간 전주 덕진예술회관(덕진동)에서 열렸다. 초등부, 중.고등부, 노인부, 신인부, 일반부, 명고부, 대명고수부등 총 7개 부분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81명이 참가해 열띤 경연이 펼쳐졌다. 중.고등부 대상은 교육부장관상, 일반부 대상은 문체부장관상, 명고부 대상은 국무총리상, 대명고수부 대상은 대통령상이 각각 주어지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회이다. 참가자가 직접 명창을 추첨하였고 집계방식은 전자집계로 참가자 경연 후에 현장에서 점수가 공개되어 공정성과 투명성을 더했다. 박시양(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심사위원장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참가해주신 분들게 감사하며 지금까지 해 오신 학습에 나만의 기준과, 선생님만의 기준 외에 객관적 기준으로 나의 학습을 점검하는 자세였으면 좋겠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원할한 진행과 공정한 운영이 되도록 힘써주신 전북국악협회에 감사함을 전했다. 이번 대회에서 대통령상 수상자는 강형수(서울,49) 참가자로, 왕기석 명창과 함께 호흡을 맞춰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 7명과 출연명창은 총11명으로, 문화재 두분과 대통령상 수상자들을 모시고 진행하였다. 한국국악협회 전북도 지회 손현배 지회장은" 이 전국고수대회는 고수 부문 단일대회로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전국 유일한 대회이다. 내년 대회는 전국에서 더 많은 고수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예산증액 및 다양한 방법으로 계획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셨으면 좋겠고, 올해 대회는 전체적인 진행이 매끄럽다는 칭찬이 자자했다"고 전했다. △대명고수부 = 대상 강형수(서울), 최우수상 장재영(서울), 우수상 안태원(서울), 장려상 주선우(경기) △명고부 = 대상 유민혁(대전), 최우수상 조인경(전북), 우수상 김정기(경기), 장려상 이주현(경북) △일반부 = 대상 임기원(서울), 최우수상 이수(대전), 우수상 김강유(서울), 장려상 채준서(전남) △신인부 = 대상 옥승호(전북), 최우수상 박명자(전북), 우수상 강미란(전남), 이완영(전북) △노인부 = 대상 김성규(전북), 최우수상 박영옥(전북), 우수상 김순옥(전남), 장려상 이금순(전남) △중.고등부 = 대상 이주아(전북), 최우수상 표지훈(전북), 우수상 김도훈(경기), 장려상 손서진(서울) △초등부 = 대상 문건희(전북), 최우수상 이태호(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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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화성시 정조 효 전국국악대전(11/04)행사명: 제8회 화성시 정조 효 전국국악대전 1. 목적 가. 전통예술의 올바른 전승 및 체계적 계승 발전을 마련. 나. 지역 청소년 인재 발굴 및 양성에 기어코자 함. 다. 우리전통 악,가,무를 통해 세계 속 한류 문화흐름에 이바지하고자 함. 라. 생활 예술인들 및 전문 예술인들의 역량을 강하하고 전통음악 활성화에 기여 하고자함 1) 행사명 : 제8회 화성시 정조 효(孝) 전국 국악대전- 구) 화성시 청소년국악경연대회 2) 일 시 : 2023/11/04 토요일 오전9시 ~ 3) 장 소 : 수원대학교 음악대학 4) 주 최 : (사)한국국악협회 화성시지부 5) 주 관 : (사)한국국악협회 화성시지부 6) 후 원 : 경기도교육청, 경기화성오산교육지원청, 화성시, 화성시의회, 화성문화원, (사)한국예술인총연합회 화성지부 2. 참가자격 가.일반부 -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19세 이상의 남 · 여. - 1인 1부분 참가에 한함. - 대통령 수상자 및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제외. - 국가 or 시,도 지정문화재 보유자 또는 전수조교 제외. - 본 대회 대상 수상자(개인및단체)는 수상년도 이후 1년간 참가 불가. 나. 학생부 - 전국 초,중,고등학교 재학생 및 동일자격 소유자. - 1인 1부분 참가에 한함. - 본 대회 대상 수상자(개인 및 단체)는 수상년도 이후 1년간 참가 불가. 3. 경연 부분/시간 ∎현악부문 – 거문고, 가야금, 해금, 피리, 대금 ,아쟁 등 중 택1 _ (경연시간 5분 이내) ∎관악부문 – 해금, 피리, 대금 ,아쟁 등 중 택1 (경연시간 5분 이내) ∎무용 부문 – 한국전통무용, 창작무용 택1 (경연시간 5분 이내) ∎성악 부문 – 민요(각도민요), 정가, 판소리, 가야금병창 중 택1 (경연시간 5분 이내) ※ 상황에 따라 각 부문별 경연시간 단축 될 수 있음. ※ 무용 출전자는 반주음악준비. (반주음원은 USB만가능 , CD 및 TAPE 불가) (반드시 참가자 직접 확인 후 제출, 음원 플레이가 되지 않는 경우 실격처리됨.) 4. 경연대회 유의사항 ⦁본 모집요강 및 인터넷지원신청서 접수 유의사항을 숙지하지 않아 생기는 불이익은 참가자 본인의 책임으로 간주한다. ⦁무용부문 참가자는 반주음원을 준비한다.(CD 및 TAPE 불가, usb만가능) ⦁학생부는 초등부, 중 고등부 부문으로 치뤄진다. ⦁고수는 본인대동을 원칙으로 하나 집행부에서 지정한 지정고수 활용가능. (사무국문의) ⦁일반부(종합결선)진출자는 본인 확인(신분증지참) 및 순번 추첨 불참 시 집행부 공개 추천으로 순번을 부여한다. ※ 지정고수비 (50,000원) 주최 측과 무관하며 사례비는 반주자에게 직접전달. 단, 반주자의 원활한 준비를 위해 지정고수 필요 하신 분은 신청서에 기재요청. ※ 접수확인 : 2023/10/9(월) ∼ 11/2(목) 접수마감일(자정) 까지 접수확인 ※ 경연순서는 접수순으로 진행됩니다. (참가 접수 후 확인전화 및 메일활인 필수) 5. 상훈(시상내용) (*훈 격은 주최 측 사정에 의해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6 . 참가신청 가. 접수기간 : 2023/ 10/ 09(월) ∼ 11/ 2(목) 접수마감일(자정) 까지 ※ 경연순서는 접수순으로 진행됩니다. 나. 접 수 처 : 이메일 접수 1) 이메일 : hsart3056@daum.net/gukak2018@naver.com(참가신청서,신분증 동시제출) ※ 메일 제목 _ [제8회 화성시 정조 효 전국국악대전] 성악 홍길동 2) 사)한국국악협회 화성지부 / 연락처 ☎031-353-3327/010-3896-4550 ※접수완료 후 접수확인 답변 메일 발송하오니 꼭 확인 부탁드립니다. 3) 제출서류 1. 참가신청서 (서명필수) 2. 반명함판 사진 1매 3. 통장사본 1부 4. 신분증 및 학생증 (사본제출) 다. 신청서다운 : (주)국악신문(www.kukak21.com/) 화성시 국악협회(www.hkka.or.kr) 라. 결과보고 : 2023. 11. 06(월)국악신문 홈페이지 7. 심사요강 심사위원 결정방법 및 절차 o 신청서 접수 마감 후 심사위원 선정심사규정에 따른 인사로 지역별 선정. o 전국 전공 대학교수 급 인사 및 중견 국악인 중 전공별, 류파 별 선정. 심사기준 -최저 90점, 최고 99점으로 상. 하 한 점수 규정. -종합대상은 대상 수상자들만 별도로 심사를 한다. 심사절차 o 경연 대회운영규정 및 심사요령, 심사회피제도 게시. o 각 부문별 심사위원장 선정, 경연시간 등 결정. o 각 부문별 경연 종료 후 심사위원장 심사평 실시. o 각 부문별 경연 종료 직후, 심사위원별 점수 집계 표 게시. 심사항목 박자 음정(가락) 예술성 태도 기량 현악 25 25 20 10 20 관악 25 25 20 10 20 무용 25 25 20 10 20 성악 25 25 20 10 20 심사회피제 시행 여부 ■시행 미시행 수 상 자 결정방법 o - 각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하여 가장 높은 점수부터 순위결정. o - 각 부문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하여 높은 점수가 종합대상. ※ 동점일 경우 연장자 우선 (생년월일) 심사결과 공개여부 예선 본선(결선) ■경연자 전체 심사위원별 점수 공개 수상자 대상 심사위원별 점수 공개 경연자 전체 심사위원 총점 공개 수상자 대상 심사위원 총점 공개 경연자 전체 순위 공개 수상자 순위 공개 비공개 ■경연자 전체 심사위원별 점수 공개 수상자 대상 심사위원별 점수 공개 경연자 전체 심사위원 총점 공개 수상자 대상 심사위원 총점 공개 경연자 전체 순위 공개 수상자 순위 공개 비공개 심사위원 사전교육 시행계획 ■시행 미시행 - 심사위원 사전교육 진행 8. 수상자 사후관리 계획 2023년 수상자 사후관리 계획 o 협회 주관 각종 대회 시 심사 및 축하공연 기회 제공 o 유관단체 행사시 참여 추천 o 대외 공연 문의 시 공연기회 부여 2024년 수상자 사후관리 계획 o 협회 주관 각종 대회 시 심사 및 축하공연 기회 제공 o 유관단체 행사시 참여 추천 o 대외 공연 문의 시 공연기회 부여 ▶ 심사회피제도 - 참가신청서에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을 기입하여야하며, 또 참가자는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이 심사위원으로 참가 할 때 는 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신청해야한다. -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었음이 발견이 될 시에는 본 주최/주관 단체는 수상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해당 상장, 상금을 반환하여야 한다. - 참가자는 이 조항을 수락하고 참가하는 것에 동의하여야 한다. 9. 시상 및 결과보고 가. 시상식진행 - 2023. 11. 04.(일) 오후17시~18시 예정(일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음) - 축하공연 관람 및 시상 진행. - 결과 발표 전 종합 심사평 진행. - 시상 후 귀가 ※ 전 참가자는 경연 후 축하공연 관람 필수 ※ 당일 상장을 수령하지 못하는 경우, 사무실방문 본인 직접수령 및 우편수령(주소확인 필) 나. 결과보고 : 2023. 11. 06(월) (주)국악신문 홈페이지 게시(http://www.kukak21.com/) 10. 안내사항 ※ 코로나 19 또는 날씨악화 등의 상황으로 인하여 경연대회 날짜가 변경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 코로나 19 상황에 따라 중앙재난안전 대책본부 방침이 변경되면 추후비대면 영상촬영으로 대체하여 화성정조 효 전국국악대전를 전환, 진행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한국국악협회 화성지부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매곡리 60-7 B104호 Tel. 031-353-3327 / 010-3896-4550 E-mail :gukak20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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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여주 세종대왕 여민락 전국국악경연대회(11/4) (민요/기악)■행사명: 제4회 여주 세종대왕 여민락 전국국악경연대회 ■일 시: 2023년 11월 4일 (토) 오전10시 ■주최·주관 : (사)한국국악협회 여주시지부, (사)한국예총 여주지회 ■후원 : 여주시 ■장소: 여주 여성회관 ■경연부문 : ■민요 (명창부-경.서도입창, 좌창, 선소리산타령) (일반부-경.서도민요, 좌창, 선소리산타령, 전민요) ※토속민요 가능 (단체부-경.서도민요, 좌창, 선소리산타령, 전민요) ※토속민요 가능 ■기악 (일반부-가야금병창 포함) (학생부-가야금병창 포함) ■참가자격 :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일반 및 학생 ■명창부 참가자는 25세 이상인 자 ■대학생은 일반부 이상으로 참가가능 ■학생-기악부문은 초, 중, 고등학생 ■단체부는 2인 이상/ 단체 중복출전 불가 ■종목별 경연 내용 및 경연 시간 * 학생부, 일반부, 단체부 – 단심제 * 명창부 – 예선, 본선 * 참가비 없음. 지정고수비 무료 (지정고수 희망 시 참가 신청서에 반드시 표기) * 참가자는 9시에 도착하여 본관 공연장1층에서 경연순서 추첨을 해야 함 (단, 민요 단체부와 기악 일반부는 오후경연으로 12시까지 도착하여 경연순서 추첨 진행) 구 분 경연내용 경연시간 일반부 단체부 명창부 민요 경,서도민요,잡가,좌창,입창 중 택1 5분 이내 7분 이내 7분 이내 * 경연시간은 대회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구 분 경연내용 경연시간 학생부 (초,중,고) 일반부 기악 가야금(병창포함),거문고,아쟁,대금,피리,해금,양금 산조 5분 이내 7분 이내 * 경연시간은 대회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접수기간: 2023. 10. 2(수) ~ 11. 2(목) 24:00 도착 분 ■참가신청 및 제출서류 : ■개인- 참가신청서 1부, 신분증사본 1부(학생증사본) (당일 신분증지참- 본인확인용) ■단체- 참가신청서 1부, 대표자 신분증사본 1부, 참가자명단 1부 (당일 신분증지참- 본인확인용) – e-mail 접수 (gongsuny@nate.com) ■참가신청서는 (주)국악신문, (사)한국예총여주지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가 접수는 e-mail 접수만 가능합니다. ■문 의 처 :사)한국국악협회 여주시지부 사무국 010-3495-8545 ■경연방법(학생부/일반부/단체부/명창부) ➀경연은 종목(부문)별로 실시한다. ➁민요 : 일반부, 명창부, 단체부 / 기악 : 학생부, 일반부 각 부문 경연순서는 당일 추첨을 통하여 순번을 정하고 경연한다. ➂명창부를 제외한 모든 부문은 단심제로 하며, 명창부는 예선,본선으로 경연한다. ■순위결정 심사점수는 최고, 최하점을 제외한 나머지 점수 합계의 평균으로 산출. 평균점수 상위 순으로 순위결정. 동점일 경우에는 연장자순(년,월,일)순으로 순위 결정. ■심사요강, 운영규정 및 심사규정 1. 목 적 : 본 규정은 본 대회의 심사위원이 각 부문의 경연을 공정, 엄격, 투명하게 심사함에 있다. 2. 명 칭 : 본 규정은 제4회 여주 세종대왕 여민락 전국국악경연대회의 심사규정이라 한다. 3. 명창부를 제외한 모든 부문은 단심제로 하여 경연하며 명창부는 예선, 본선 경연을 통해 순위를 결정한다. < 공통 사항 > ①본 대회 심사위원은 20년 이상의 국악관련 인사, 문화재급 및 국악관련 대학교수로 대회장이 위촉한다. ②각 종목(부문)별로 최고 득점자 순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③심사항목은 민요부문(음정 25점, 박자 25점, 예술성 15점, 태도15점, 가사 20점), 기악부문(음정 25점, 박자 25점, 예술성 25점, 태도25점)100점 만점으로 한다. ④각 분문별 심사는 별도로 하며, 심사위원은 5명 이상으로하고 최고와 최저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점수 합계의 평균으로 순위를 정한다. ⑤각 부문의 시간은 되도록 준수하되 대회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심사위원장의 권한으로 경연시간을 가감할 수 있다. ⑥본 대회 참가한 경연자 또는 인솔자 등이 대회 신분에 어긋나는 중대한 하자를 발생 시키거나, 대회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발견될 시는 심사위원장과 대회장이 합의하여 실격 처리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차점자를 수상자로 선정할 수 있다. ⑦본 대회에 참가한 경연자나 소속 인솔자가 본 대회 규정에 의한 경연절차나 심사 결과에 대하여 대회의 품위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언행이나 행동을 할 경우 심사 위원장과 대회장의 합의하에 3년간 본 대회의 참가를 제한할 수 있다. ■기타 사항 ①경연이 끝난 후 수작업으로 집계하여 필요시 장려상 수상자를 정하고 최고 득점자 순으로 순위를 결정하여 발표한다. ②모든 경연자의 점수와 순위는 대회 형편상 발표하지 않을 수 있다. ③대회 진행 중 일부 심사위원이 집계를 중단한 사태가 발생할 시는 각 개인에게 부여된 심사점수는 무효로 한다. ④대회 형편상 행사 내용이 일부 조정될 수 있다. ■ 시상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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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인천국악대제전 전국국악경연대회, 대상에는 이영훈종합대상 이 영 훈 (한국무용 부문) 초 등 부 상장 : 훈격 부문 대상 (인천시교육감상) 최우수상 (대회장상) 우수상 (인천시예총회장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인천시지회장상) 민요 박지민 모도리합창단 장한슬 김리현, 장세준 관악 김나연 김소연 서제인 김동연, 최다경 현악 민채희 이지인 김하율 전아연,박준희 무용 양려원 이현정 송소윤,오채은, 김서안,김은주 송소윤, 오채은 판소리 정채빈 김태성 이지율 이재은,유예은 중고등부 상장 : 훈격 부문 대상 (인천시교육감상) 최우수상 (미추홀구청장상) 우수상 (한국예총 인천시회장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인천시지회장상) 민요 이인해 김서정 박소현 김수아, 김선우 관악 김한아 최지윤 임서현 이동건, 김성은 현악 김희연 권별하 송우빈 문채연, 김려원 무용 김연서 오세인 오다은 - 판소리 김유진 - - - 민요일반부 상장 : 훈격 부문 대상 (인천시장상) 최우수상 (인천시의회의장상) 우수상 (미추홀구청장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인천시지회장상) 민요 박석신,이명희, 성혜숙,최영숙, 강경숙 박석신 이정희 이명희,이순이 민요명창부 , 일반부 상장 : 훈격 부문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최우수상 (인천광역시장상) 우수상 (미추홀구청장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인천시지회장상) 민요 김태수 김형근 엄지 김회복,김영지 기악 황진호 허준민 이호연 신현지,김한빛 무용 (국회의장상) 송민경 정미심 함유진,안수연 판소리 송오선 박명언 김진아 박경덕,전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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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공연이 된 제21회 대구아리랑축제무대는 북춤으로 정화되었다. 이어 진행자의 정중한 멘트가 이어졌다. "1956년 영천에서 출생, 60년대 말로부터 80년대 초 까지 서울에서 주경야독으로 전통소리를 연마,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고향 영천과 대구에서 경기민요와 영남민요의 무대화에 노력, 전국아리랑보존회 대구 지회장으로 활동, 2000년부터 본격적인 영남민요와 영남아리랑 전승 토착화,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계기로 ‘대구아리랑’ 작창과 ‘대구아리랑축제’ 창안, 대구 최계란 명창 추모 행사와 경창대회 창안, '아리랑상'공로상 수상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와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지정에 기여,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결성, 전승자 독려. '아리랑의 날' 선포식 참가 지난 대구아리랑축제 때만 해도 이 공간에서 지휘하던 그 분이 오늘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지난 1월 초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 우리가 사랑하는 아리랑 명인 정은하 선생이십니다. 이제 영정으로 모시고 오늘 행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출연자들 그리고 관객 여러분, 보내시고 처음 맡는 행사인만큼 정은하 선생에 대해 목례로 추모의 예를 표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23일 대구 달성아트센터 청룡홀에서 21회 대구아리랑축제는 다소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행사를 준비한 제자들의 마음과 주요 출연자들인 영남지역 아리랑보존회 회원들, 그리고 기꺼이 먼 걸음으로 참여한 명창들과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반영한 듯하다. 오후 7시, ‘대구아리랑축제’ 첫 무대는 ‘최계란명창전국아리랑경창대회’ 명창부 대상 수상자 한승연의 ‘정선아리랑’으로 시작되었다. 정은하 선생의 의지로 시작된 대구아리랑경창대회는 지난해까지 16명의 명창을 배출하고 이번 17회는 정선 출신 한승연이 대상을 받았다. 이들을 통해 ‘대구아리랑’과 대구아리랑축제를 전국에 알렸다. 초청 명창의 무대는 제1회 때부터 첫 무대를 꾸며준 김길자 강원도무형문화제 1호 정선아리랑보유자와 70년대 초 ‘청구성악연구소’에서 함께 수학한 경기민요 이수자 이금미 명창이 긴아리랑으로 무대를 빛냈다. 영남의 아리랑을 대표하는 ‘영천아리랑(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울릉도아리랑(울릉도아리랑보존회 황효숙)’ ‘성주아리랑(성주아리랑보존회 임옥자)’ ‘상주아리랑(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김학영,이상우)’ ‘경상도아리랑 (성주의병아리랑보존회 최문희)’ ‘독립군아리랑, 광복군아리랑(대구아리랑보존회 김상준,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허윤도, 김정수)’이 불려졌다. 이어서 ‘최계란 本 대구아리랑(동구지부 오은비)’ ‘정은하 本 대구아리랑(신수진, 전성희, 김천지부 허희자, 남구지부 백선혜, 경산지부 안정인, 달성군지부 성은주)’ ‘신대구아리랑(부회장 오은비, 이사 신수진)’ ‘밀양아리랑(수성구지부 조순남)’이 불려졌다. ‘부산아리랑(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 ‘홀로아리랑(이사장 곽동현)’ ‘본조아리랑(출연자 모두)’ ‘진도아리랑(어란이팀)’ 공연이 펼쳐졌다. 특별 순서인 정은하 선생 활동상을 보여준 동영상은 모두를 숙연케 했다. 영남지역 아리랑의 존재 부각을 위한 30여 년의 각고는 아리랑 역사에 길이 남는 역정임을 확인 시켜주었다. 특히 첫 제자인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대표, 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 대표, 울릉도아리랑보존회 황효숙 대표의 무대는 정은하 선생과의 각별한 교분으로 특별했다. 그리고 40여 년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온 이인수 대구교육대 교수, 김상준 외 광복군아리랑 팀의 무대는 정은하 선생에 대한 많은 상념을 떠 올리게 한 무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빛나고 듬직한 무대는 정은하 선생이 남긴 애 제자 곽동현, 신수진, 오은비가 불러준 신구 ‘대구아리랑’ 3곡을 연창으로 꾸민 공연이었다. 정은하 선생이 작창 한 최고의 창작 아리랑 1호인 ‘대구아리랑’을 부를 때는 객석 곳곳에서는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어린 시절 정은하 선생의 손길에 의해 소리길을 밟아 어엿한 소리꾼으로 성장하여 이번 두 행사를 꾸린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오전 9시 반 경창대회로부터 저녁 8시 반, 본 행사를 이어가는 동안 서로가 주고받은 눈길은 오는 정은하 선생의 1주기 추모공연을 하자는 합의였다. 이번에 참여하지 못한 역대 출연 명창인 이춘희, 강송대, 이호연 명창 등과 경창대회 배출 17명의 대상 수상자들이 함께하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대구시 ‘대구아리랑’ 보유단체 지정과 전국아리랑공연예술연합회 단체의 법인화를 이뤄내자는 묵시적 합의였다. 정은하 선생을 보낸 후 첫 행사는 단촐하지만 정성을 드린 무대였다. 진행자가 선생의 영정을 향해 "정은하 선생님 만족하셨지요. 든든하지요!”라는 멘트로 마무리 하였다. 정은하 선생의 부재를 극복하고 그 분이 심어 놓은 유지를 실천하자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였다. 주최측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 대구 시민들과 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 김신효 지회장 등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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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대구 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11/11)■ 행사몀: 제31회 대구 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 ■일 시 : 2023년 11월 11일(토) 10:00 ~ 17:00 ■장 소 :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 ■주 최 :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주 관 :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후 원 : 대구광역시 ․ 대구광역시교육청․ (사)한국국악협회․ (사)대구예술문화 단체총연합회, (주)국악신문사 세부요강 ■경연종목 - 중고등부, 일반부 : 사물놀이(앉은반, 선반 - 단체 및 개인놀음) - 초등부, 신인부 : 사물놀이(앉은반, 선반 - 단체 및 개인놀음) ※초등부, 신인부에 한해 사물놀이 가락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곡 참가 가능 ■경연시간 : 단체 10분 내외, 개인놀음 5분 내외 ■순번확인 : 추첨없음(접수역순) ■초등부, 중고등부 - 오전 9시 ■신인부, 일반부 - 오전 11시 30분 ■참가부문 : 초등부, 중 ․ 고등부, 신인부, 일반부(단체경우 인원수4~10명내외) ■참가자격 ■초등부 : 초등학교 재학생 및 그에 준하는 아동 ■중고등부 : 중,고등학교 재학생 및 그에 준하는 청소년 ■신인부 : 전공을 하지 않은 대학생을 포함한 만19세이상 성인 ■일반부 : 대학생을 포함한 만19세이상 성인 ※ 단체 및 개인에 대한 경연 및 심사는 별도 구분 없이 동일하게 진행함 ※ 참가자격, 경연부문 등에 대한 허위 사실이 발견될 시 참가 취소할 수 있으며수상시 수상취소는 물론 지급된 상장과 상금은 회수할 수 있음 ※ 단체 참가인원수는 4~10명을 원칙으로 하나, 초등부, 신인부는 관계없음 ※ 2022년대회 일반부 최고상 수상경력자는 참가할 수 없음 ※ 2022년대회 신인부 최고상수상팀은 팀원50%이상 인원 변경시 참가 가능 ※ 경연시간은 전체일정 진행상 당일 심사위윈 회의를 통해 조정될 수 있음 ※ 창작곡은 반드시 사물놀이 가락을 기반으로 한 창작 작품이며 초등부, 신인부에 한함 ■유의사항 - 학생부 참가자는 단일학교가 아니어도 무방하며, 단일학교가 아닌 경우 학교명이 아닌 단체명으로 접수하여야 하고 수상시 상장표기는 단체명으로 기재 - 특수학교 교급 편재는 통상관례에 준함 - 부문 중복 출전 불가 (단, 동일부문 개인 및 단체는 가능) - 참가팀 구성은 참가부문에 맞게 구성해야 함. 단, 중고등부는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단일팀을 구성해도 무방함 - 상장은 단체일 경우 단체명 한장만 발급되며 추가 발급 불가 참가신청서 교부 및 접수 ■신청기간 : 2023년 10월 4일(수) ~ 11월 3일(금) 오후4시까지 ■신청방법 : 방문접수, 우편접수, e-mail접수, 팩스접수(당일 원본 제출)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본 대회 소정양식) 신청서 다운로드 http://dggukak.imweb.me/ (주)국악신문사 ■참 가 비 : 없음 ■신청서 교부 및 접수 장소 - 주소 : (우:42672) 대구광역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문화예술회관 내 제2예련관(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 E-mail : gukakdg@naver.com - 전 화 : TEL(053)256-7957, FAX(053)289-5808 ※ 우편 또는 e-mail 접수 권장, 우편접수는 신청마감일 도착분에 한함. ※ 시상내용은 대회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대구광역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문화예술회관 내 제2예련관 TEL(053)256-7957 FAX(053)289-5808 http://dggukak.imweb.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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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제1회 전국 국악동아리 경연대회...사물놀이 ‘얼라’ 영예 대상 수상지난 23일 홍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1회 전국 국악동아리 경연대회에서 사물놀이 ‘얼라’(홍천)가 대상을 수상했다. 대상은 최우수상은 진도북춤 ‘전통연희단 잽이’(영월), 우수상은 판소리 ‘소리마루’(서울), 한국무용 ‘다해’(홍천) 등이 차지했다. 이 대회는 강원 홍천군과 한국국악협회 홍천군지부(지부장 윤동일)가 주최·주관하고, 홍천군의회와 한국예총홍천지회(회장 백금산)가 후원했다. 이번 대회는 올해 첫 개최된 대회임에도 서울, 부산, 전북 익산, 청주 등 전국 각지에서 한국무용, 판소리, 민요, 풍물, 사물놀이 등의 분야로 많은 참여자들이 몰렸다. 이 중 14개 팀이 본선에 진출해 실력을 뽐냈다. 이 날 경연대회에는 홍천국악협회 윤동일 지부장과 회원, 대통령상 수상자인 김보연 명창과 안소라 명창, 이재한 한국예총 강원특별자치도연합회장, 백금산 홍천예총 회장과 한종원 감사, 한춘녀 한국국악협회강원도지회장, 김완수 홍천군 경제진흥국장, 박주선 홍천문화원장, 최지순 전 강원도예총회장, 강영복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홍천지부장 등이 대거 참석해 경연대회를 축하했다. 윤동일 한국국악협회 홍천군지부장은 "전국 국악인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개최되어 이번 대회가 홍천과 국악의 저변확대 및 전통문화 계승발전에 기여되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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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전국 하남시 국악경연대회 (10/13)■행사명 | 제17회 전국 하남시 국악경연대회 ■일 시 | 2023년 10월 13일 금요일 오전 10시 ■장 소 | 하남문화예술회관 소극장(아랑홀) ■주 최 |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하남지회 ■주 관 | (사)한국국악협회 하남시지부 ■후 원 | 하남시 ■참가자격 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서 대학생을 포함한 만19세 이상의 남 · 여 ※ 명창부는 각 경연대회에서 경기도지사상이상 수상자는 참가할 수 없습니다. ※ 일반부는 단체부만 경연하며 2인 이상 출전해야 접수 가능합니다. ■경연부문 ■민요 명창부(예선/본선) | 경·서도 좌창 ■민요 일반부(단체) | 경·서도 민요(입창), 선소리산타령, 배뱅이굿, 재담소리, 향토민요 ■경연 방법 구분 경연 방법 민요 명창부(개인) 경·서도 좌창, 송서 5분 내외 민요 일반부(단체) 경·서도 민요(입창), 선소리산타령, 배뱅이굿, 재담소리, 향토민요 3분 내외 ※모든 참가자는 반주자를 직접 대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대회측에 지정고수가 필요할 경우 운영본부에 요청한 뒤 고수에게 직접 지급할 것(고수비 : 5만원) ■참가 신청서 접수 가. 접수기간 | 2023년 09월 18일(월) ~ 2023년 10월 12일(목) 오후 6시까지 나. 접수방법 |E-mail 및 우편 접수 ※ 접수는 근무 시간 내에 가능, 공휴일 제외 ※ 우편접수 가능(우편접수는 마감일 도착 분까지 유효함) ※ 인터넷 접수 시 사진 및 제출 서류의 원본은 경연당일 반드시 제출, 미제출 시 출전이 불가함 ※참가신청서를 메일로 제출할 경우 제목을 부문_이름으로 기재 ※ 우편접수 시 사무국에 잘 접수되었는지 확인할 것. 다.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소정양식), 주민등록증 사본, 사진 1매(반명함) 참가신청서(소정양식) http://www.kukak21.com/ (주)국악신문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 접수 시 주민등록증 사본, 사진 1매 삽입(반명함) 꼭 제출해주세요. • 메일접수 : hanamsori@naver.com • 우편접수 : 경기도 하남시 신장로 132 (덕풍동 3층) 라. 문 의 |(사)한국국악협회 하남지부 사무국 TEL : 031-792-0909 마. 참 가 비 | 없음 ○행사당일 세부일정 시 간 장 소 부 문 심사위원회의 10:00~10:30 회의실 심사위원 개회식 10:30~11:00 소극장 로비 본 행사 참가자 및 스텝 경연대회 11:00~12:00 소극장 민요 일반부 경연(단심제) 12:00~13:00 점 심 시 간 13:00~16:00 소극장 민요 명창부 경연 (예선/본선) 16:00~ 소극장 시상식 ※ 추후 대회 일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기타 사항 가. 본 대회는 공개 경연을 원칙으로 하며, 순서는 경연장에서 접수한 순서로 진행한다. 나. 심사 당일 집계표 및 채점표는 심사위원장의 승인을 받아 대회장 로비에 부착한다. 다. 모든 경연이 종료된 후 시상식에서 상장을 수여한다. 라. 본 모집요강 및 인터넷 지원신청서 접수 유의사항을 숙지하지 않아 생기는 불이익은 참가자 본인의 책임으로 간주합니다. 마. 상금이 있는 입상자는 통장사본 확인 후 원천세(3.3%)를 제외한 금액이 입금됩니다. (본인 명의로 된 통장으로만 입금이 가능하며, 타인의 이름으로 상금을 수령할 수 없습니다.) ■심사제도 ■심사위원회 구성방안 : 권위 있는 부분별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여 심사 ■심사절차 - 심사위원장은 대회당일 심사위원 중에서 호선한다. - 공정한 심사를 위해 「스승 및 8촌 이내 심사위원 회피제」를 실시한다. - 모든 경연의 결과는 대회의 심사가 끝난 뒤 http://www.kukak21.com/ (주)국악신문 홈페이지에 확인할 수 있다. - 점수가 동점일 경우 연장자를 우선으로 한다. ■심사기준 - 심사위원이 4명 이하일 경우에는 전체점수에 대한 총점제 방식을, 6명 이상일 경우 최상, 최하점수를 제외한 총점제 방식을 적용한다. 심사위원은 구성된 심사항목 및 배점에 맞게 점수를 부여하여야 하며, 경연자별 심사평을채점표에 간략하게 기록하여야 하고, 부문별 경연시간 내에 채점을 완료해야 한다. 경연이 끝난 후 점수의 재조정은 불가능하다. ■시상내용 ■민요 명창부(개인) 등위 훈격 시상인원 시상 내용 대상 경기도지사상 1 1,000,000원 최우수상 하남시장상 1 300,000원 우수상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장상 1 200,000원 장려상 (사)한국국악협회 하남시지부장상 1 100,000원 ■민요 일반부(단체) 등위 훈격 시상인원 시상 내용 대상 하남시장상 1 300,000원 최우수상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장상 1 200,000원 우수상 (사)한국예총 하남지회장상 1 100,000원 장려상 (사)한국국악협회 하남시지부장상 1 50,000원 ※ 시상내용은 추후 일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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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벼고을 국악제 전국 전통 국악 경연대회 (11/04)(무용.가야금병창. 타악.사물놀이.)■대회명칭 : 제9회 벼고을 국악제 전국 전통국악 경연대회 ■주최 배경 : 전통국악예술을 계승발전시키고 활성화 하여 유능한 국악인을 발굴육성 하는 실천의 장으로 ■대회기간 : 2023년 11월 04일 (토요일) 09시 ■대회장소 : 벽골재 농악전수관 ■주 최 : 사단법인 전통문화예술진흥회,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김제시지부 ■주 관 : 사단법인 전통문화예술진흥회 ■후원 : 국회사무처, 교육부, 농림축산식품부, 전라북도, 전라북도교육청, 김제시, 김제시의회, 김제교육지원청, 한국국악협회, (주)국악신문, ■경연종목 : 일반부, 학생부, 단체부 ■무용. ■가야금병창. ■타악. ■사물놀이. ■심사규정 : 본 대회 심사규정에 준함 ■신청서 및 접수 : 063-547-9529 팩스 063-545-3477 ■H 010-3657-9529, 010-3483-1774 ■메일 : lyb9529@hanmail.net ■다음카페 ; 벼고을국악제 전국전통국악경연대회 ■종합대상 국회의장상 (시상금 1,000,000원) *** 일반부(무용, 가야금. 타악.부문) 구 분 훈 격 무 용 가 야 금 타 악 부 상 개인 단체 산조 병창 개인 단체 대 상 도지사상 1 1 1 1 1 30만원 최우수상 시 장 상 1 1 1 1 1 1 우 수 상 시의장상 1 1 1 1 1 1 장 려 상 대회장상 2 2 2 2 2 2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 (시상금 500,000원) *** 학생부(무용, 가야금. 타악부문) 구 분 훈 격 무 용 가 야 금 타 악 부 상 개인 단체 산조 병창 개인 단체 대 상 교육감상 1 1 1 1 1 1 10만원 최우수상 시 장 상 1 1 1 1 1 1 우 수 상 교육장상 1 1 1 1 1 1 장 려 상 대회장상 2 2 2 2 2 2 ■종합대상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시상금 500,000원) *** 어머니 사물놀이부, 학생 사물놀이부, 구 분 훈 격 사물놀 이 구 분 훈 격 사물놀이 초 중 고 등 대 상 도지사상 1 대 상 교육감상 1 최우수상 시 장 상 1 최우수상 시 장 상 1 1 우 수 상 시의장상 1 우 수 상 교육장상 1 1 장 려 상 대회장상 2 장 겨 상 대회장상 2 2 ■ 종합지도자상 도지사상 : 1매 *** 지도자상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 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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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축제 '온겨레 강강술래 경연대회', 한국국악협회 진도지부 장려상 수상전라남도와 해남군, 진도군이 공동 주최하고, 재단법인 명량대첩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온겨레 강강술래 경연대회'에서 한국국악협회 진도지부(지부장 이희춘)가 장려상을 수상했다. 2023 명량대첩축제 현장에 17만 6천여 명이 다녀갔다.해남 우수영과 울돌목 일원에서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진행된 이번 축제에서는 울돌목 바다를 무대로 한 해상전투와 드론을 활용한 하늘 해상전투 재현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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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국창 권삼득선생 추모 전국국악대제전 (10/21-22) (판소리, 무용, 기악(가야금병창),타악)※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대 회 명 :제24회 국창 권삼득선생 추모 전국국악대제전 ■목 적 :국창 권삼득 선생님 유지를 받들어 국악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여 후진양성에 기여하고,한국소리 국악예술 계승발전과 많은 군민에게 국악경연 및 공연에 대한 관람의 기회 제공에 있음 ■운영방침 :연례행사로 개최하고 전국 제1의 대회로 발전케 운영함 ■주최,주관 :㈔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 전라북도교육청,, 완주군, 완주군의회, 완주군교육지원청, (사)전북국악협회, (사)전북예총, (사)타앤울림예술원, 도내 방송사 및 언론사 ■대 회 장 :손 병 권 (사)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장 ■대회일자 :예선-2023년 10월21일(토) / 본선-2023년 10월22일(일) ■경연장소 : 완주군 향토예술문화회관(판소리,무용 단심제 및 예선/일반부 본선) 완주군 문화체육센타(타악,기악 단심제 및 예선)(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봉로 215) ■심사위원 :사계의 권위 있는 분으로 주관 측에서 위촉함 ■경연순서 :예선, 본선 모두 접수순서의 역순으로 진행, 본선은 당일 추첨 ■심사규정 :본 대회 규정에 의함 ■접수방법 ★필수사항: 참가신청서(선명한 정면사진 부착)/신분증(학생증)사본 ★접수일자 : 2023년 9월25일(월) ~ 10월18일(수) 오후 5시까지⇢접수일 이후 신청 불가 ★접 수 처 : (사)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 메일, 팩스, 전화 접수 E-Mail 접수 : son84300@naver.com 전화 063-262-4501 / 팩스 063-261-4501 - 접수 마감일 10월 18일 수요일 오후 5시까지 본 대회처 도착분에 한함. (참가자는 1부문 경연에만 참가 가능(단체, 개인 중복 불가) ★접수확인:접수 후 확인전화 필수, 접수오류로 인한 책임지지 않습니다. ★참가신청서 다운 (주)국악신문사 www.kukak21.com(경연대회 게시판) 완주국협 카페 https://cafe.naver.com/son84300 (카페 가입 후 다운 가능) ■참가자격 :전국 초, 중, 고, 일반(대학부 포함) ※ 단, 타 대회 장관상 수상자 및 문화재 기능보유자, 본 대회에서 동일부문 대상수상자는 불가 ■일반부(판소리, 무용, 기악(가야금병창) - 예선&본선, 타악 단체(단심제) ■신인부(판소리, 무용, 기악(가야금병창) - (단심제) ※ 신인부는 비전공자만 참여할 수 있음 ■학생부(판소리, 기악(가야금병창) - (단심제) ※ 판소리, 무용, 기악 일반부 예선 및 본선 경연곡은 자유곡으로 진행 경연종목 판소리 무 용 기악(가야금병창) 타 악 경연시간 일반 신인 학생 일반 신인 일반 신인 학생 일반단체 7분이내 3분이내 3분이내 5분이내 3분이내 5분이내 3분이내 3분이내 7분이내 ※경연시간은 대회진행상 필요에 따라 조정될 수 있음※ ■본선 경연종목, 경연시간, 참가금 ※ 참가비 없음 ■참고사항 * 일반부 본선 무용 부문은 반주음악 CD 제출을 시작 전에 꼭 체출해주시기 바랍니다. * 일반부 지정고수비는 5만원입니다. 본선 참가자들중 희망하시는 분은 아래의 계좌에 입금해주시기 바랍니다. ※ 지정고수비 입금 계좌 (농협 351-0769-6620-33 (사)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 * 경연도중 돌발 상황 발생시, 집행부에서 회의하여 공고하고 진행됩니다. ■수상자 사후관리 계획 ㅇ 수상자는 다음 경연 시연공연 계획 / 완주, 전북지역 공연 시 초청 계획. ■코로나19 관련 안전수칙 ㅇ 37.5℃ 이상일 경우 대회장 입장 불가. ※상황에 따라 모든 일정은 변경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청중평가단 : 일반부 판소리 본선 청충평가단 모집 *모집기간-10월 9일(월)(오전 10시) ~10월 13일(금)(오후 5시)/기간 내 도착분에 한함 *완주국협 다음 카페에 공고 게시 후 메일로만 접수 *판소리에 관심있는 30세(1993년생) 부터 전문가 및 애호가 3명 모집 *접수마감 후, 대회 집행부에서 선정, 개별연락 *필요서류-응모신청서 1부(완주국협 게시판에서 다운), 신분증사본 1부 ■경연순서 : 예선은 접수순서의 역순으로 진행, 본선은 당일 추첨 초.중.고 학생부, 신인부, 타악단체 단심제, 일반부 예선&본선 ■시상식 10월 21일 학생부, 신인부, 일반부 타악단체 시상식, 10월 22일 일반부 본선, 종합경연 시상식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참고사항 ㅇ참가자 전원은 9까지 행사장에 집결하여 접수 확인 및 광고사항 등을 확인해야 함 ㅇ경연대회(예선,본선) 진행 시, 사회자가 3회 이상 호명하여도 출전하지 않으면 기권으로 처리함 ■시상규모 및 내용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1.권삼득상 부 별 시상내용 상 격 시 상 금 인원 일반부 판소리 권삼득상 국희의장상 300만원 1 2.판소리 부문 구 분 일 반 부 신 인 부 고 등 부 중 등 부 초 등 부 인원 대 상 전라북도지사상 상금 70만원 완주군수상 상금 20만원 전라북도교육감상 상금 15만원 전라북도교육감상 상금 10만원 완주군수상 상금 10만원 5 최우수상 완주군수상 상금 50만원 완주군의회의장상 상금 15만원 완주군교육장상 상금 10만원 완주군교육장상 상금 10만원 완주군교육장상 상금 5만원 5 우 수 상 완주군의회의장상 상금 30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10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5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5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5만원 5 장 려 상 대회장상 상금 10만원 대회장상 상금 5만원 대회장상/상장 대회장상/상장 대회장상/상장 5 3.종합대상 부 별 시상내용 상 격 시 상 금 인원 일반부(개인) 종합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200만원 1 4.무용부문 구 분 일 반 부 신 인 부 인원 대 상 전라북도지사상/상금 40만원 완주군수상/상금 20만원 2 최우수상 완주군수상/상금 20만원 완주군의회의장상/상금 15만원 2 우 수 상 전북국악협회장상/상금 10만원 전북예총회장상/상금 10만원 2 장 려 상 대회장상/상금 5만원 대회장상/상금 5만원 2 5.기악부문(가야금병창 포함) 구 분 일 반 부 신 인 부 고 등 부 중 등 부 초 등 부 인원 대 상 전라북도지사상 상금 40만원 완주군수상 상금 20만원 전라북도교육감상 상금 15만원 완주군수상 상금 10만원 완주군수상 상금 10만원 5 최우수상 완주군수상 상금 20만원 완주군의회의장상 상금 15만원 완주군교육장상 상금 10만원 완주군교육장상 상금 10만원 완주군교육장상 5만원 5 우 수 상 완주군의회의장상 상금 10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10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5만원 전북예총회장상 상금 5만원 전북예총회장상 5만원 5 장 려 상 대회장상 상금 5만원 대회장상 상금 5만원 대회장상/상장 대회장상/상장 대회장상/상장 5 6.타악부문 구 분 일반부 단체 인원 대 상 전라북도지사상/상금 40만원 1 최우수상 완주군수상/상금 30만원 1 우 수 상 완주군의회의장상/상금 20만원 1 장 려 상 대회장상/상금 10만원 1 7.지도자상 지도자상 전라북도지사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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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제31회 단원전국국악경연대회(10/14)■ 목 적 본 대회는 역량있는 인재 배출과 육성에 기여하고자 하며, 또한 한국전통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하고 발굴 및 계승에 목적으로 한다. ■ 일 정 : 2023년 10월 14일 (토) 10:00 ■ 장 소 :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 화랑로 312) ■ 주최 및 주관 : (사)한국국악협회 안산지부 ■ 후 원 : 문체부, 안산시, 안산시의회, (사)한국예총 ■ 참가자격 : 만 19세 이상 ■ 경연부문 및 종목 ■ 기악 : 가야금, 거문고, 대금, 아쟁, 피리, 해금 ■ 성악 : 가야금병창, 경기민요, 서도민요, 정가, 판소리 ■ 경연곡목 - 일반부 예선 기악 : 산조 5분 일반부 예선 성악 : 자유곡 5분 본선 및 결선 : 10분 ■ 경연순서 시 간 순 서 09:00 ~ 10:00 일반부 기악 참가자 확인 및 경연순서 추첨 / 개최식 10:00 ~ 12:00 기악 일반부 예선 12:00 ~ 13:00 점 심 시 간 12:00 일반부 성악 참가자 확인 및 경연순서 추첨 13:00 ~ 13:30 기악 일반부 본선 13:30 ~ 15:30 성악 일반부 예선 16:00 ~ 16:30 성악 일반부 본선 17:00 ~ 17:30 결 선 18:00 시 상 식 *신청자 접수 상황에 따라 시간이 변동될 수 있음. ■ 참가신청 접수기간 : 2023년 09월 18일 ~ 10월 11일 오후 6시까지 (기간엄수) 제출서류 : ①참가신청서 1부 ②주민등록등본 또는 신분증사본 1부 ③개인정보 활용 동의서 1부 접수방법 : E-mail 접수 (ansangukak@naver.com) (이메일 접수만 가능 / 우편 및 방문접수 불가) ※메일 제목과 파일에 대회명_분야_참가자이름 순으로 기재 (예 – 제31회단원전국국악경연대회_기악_홍길동) 참 가 비 : 없음 지정고수비 : 있음 (5만원 / 농협 301-0227-9161-11 한국국악협회 안산지부) 문의전화 : 010 – 4802 – 4044 ■ 심사회피제도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 심사회피 제도> 참가자는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때에는 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경연 전에 신청해야 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고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었음이 발견될 시 본 협회는 수상취소를 결정할 수 있으며 수상자는 해당 상장을 반환하여야 한다. 참가자는 이 조항을 수락하고 참가하는 것에 동의하여야 한다. ■ 유의사항 복장은 한복을 원칙으로 함 신청서에 반주자 동반 여부를 필히 기재 요망 사회자가 3회 이상 호명하였을 때 출전하지 않으면 기권으로 처리함 부문별 경연시간은 당일 심사위원회의를 통해 변경이 가능함 경연자는 경연순서 추첨을 위해 대회 당일 오전 8시 50분까지 모여야 함 참가부문은 중복 참여 불가함 부문 중 정가는 개인반주자 대동해야 함 ■ 시상내역 일반부 기악 / 성악 시상내용 인원 (기악) 인원 (성악) 훈 격 종합대상 1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최우수상 1 경기도지사상 우수상 1 1 안산시장상 준우수상 1 1 안산시의회의장상 장려상 2 2 안산예총회장상 안산국악협회지부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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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등용문 제41회 전국국악대제전 성료경주시와 (사)신라천년예술단이 주최하고 한국국악협회 경상북도지회 (지회장김경애)가 주관하는 제41회 전국국악대제전이 지난 9월 9일부터 10일까지 2일간 경주시 화랑마을에서 열렸다. 지난 1983년 첫 대회를 시작으로 올해로 41회째 개최되는 전국국악대제전은 그동안 수많은 명인을 배출하며 전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악인들의 등용문으로 성장해 왔다. 관악, 현악, 가야금병창, 무용, 민요, 타악 6개 부문에 초등부와 중등부, 고등부와 일반부, 신인부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총 266팀 299명이 참가하였고, 수준높은 참가자들의 열띤 경연을 거쳐 총 115명의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본 대회 최고상인 영예의 대통령상은 일반부 현악부문에 참가하여 한갑득류 거문고산조를 연주한 위은영(전북도립국악관현악단 소속)씨에게 돌아갔으며, 상장과 상금 1천만원이 함께 수여되었다. 일반부 종합최우수상에는 타악부문 박진우(사물놀이 한맥 소속)씨가 국회의장상과 상금 5백만원을 수상하였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은 관악부문에 참가한 임효숙(나주시립국악단 소속)씨에게 상장과 상금 3백만원이 수여되었다. 교육부장관상은 고등부 타악부문에 신익영외 4명이 단체로 참가하여 상장과 상금 1백만원을 수상하였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대회의 공정성과 시민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각 부문별로 사전 신청을 받아 국민참여 심사위원이 함께 심사에 참여하였으며, 시상식에 이어 열린 축하공연에서는 역대 대통령상 수상자를 비롯한 전국 명인명창들의 축하무대도 열렸다. 한국국악협회경상북도지회 김경애 지회장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전국 각지에서 경주를 찾아주신 참가자들과 수상자들에게 감사와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본 대회가 더욱 발전하여 전통 음악을 올곧게 전승하고 저변 확대에 기여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나가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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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5일 전주 덕진예술회관 제43회 전국고수대회 개최고수중의 명고수를 가리는 제43회 전국고수대회가 10월 5일과 6일 이틀간 전주 덕진예술회관에서 열린다. 전주시와 (사)한국국악협회 전라북도지회(지회장 손현배)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대명고수부, 명고부, 일반부, 신인부, 노인부, 중.고등부, 초등부 등 7개의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우리 전통예술인 판소리의 기본이 되는 고수인의 저변확대와 연구 계승발전 그리고 신인들을 발굴 육성하여 국악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최고 명고수의 등용문이 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출연 명창으로는 김선이 광주광역시 문화재, 왕기석 전라북도 문화재를 포함, 천명희, 허애선, 주소연, 김찬미, 임현빈, 김미진, 김선미, 김도현, 노해현, 정승희 등 총12명의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창들이 대회에 출전하는 고수들의 북 장단에 호흡을 맞춘다. 대명고수부 대통령상 수상자에게는 대통령상과 우승기, 상금 천만원을 수여하며, 그 외에도 명고부 대상은 국무총리상, 일반부 대상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중.고등부 대상은 교육부장관상 등이 상금과 함께 수여된다. 손현배 지회장은 "전국고수대회는 지난 42년간 수많은 명고수를 배출한 수준 높은 대회로서, 국내 최고의 명창들과 권위 있는 심사위원을 선정하여 참가자들의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다” 고 말했다. 전북국협 카페와 인스타그램에서 제43회 전국고수대회 관련 다양한 소식과 함께 참가자, 관객 이벤트가 진행중이다. 포탈 다음에서 '전북국협' 검색을 하면 된다. @jbkm23s (전북국협 인스타그램), 전북국협 카페 주소는 https://cafe.daum.net/jbkm23 이다. 접수기한은 10월 2일(월) 오후 5시까지이며, 참가신청서 등을 작성해 이메일 <jbkm23s@naver.com> 또는, 팩스(063-261-4501)로 접수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주)국악신문 경연대회 게시판, 전북예총 국악협회 게시판에 나와 있다. 문의전화는 063-262-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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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영재 등용문, 제32회 군산 전국학생 전통예술경연대회 성료올해로 32회째를 맞고 있는 군산 전국학생 전통예술경연대회가 지난 9일(토) 군산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동영상 예선을 통과한 본선진출 12팀 총 참가자 129명이 축제장 같은 분위기로 경연을 마쳤다. 입시연습장 같은 기존대회와 달리 이 대회의 참가조건은 2인 이상 팀을 만들어 출전 해야하고 협력과 조화, 창의성을 높게 평가하는 독특한 요강을 가진 대회이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여러 장르의 융합과 성양 악기와 콜라보를 이루어도 좋고 신디사이저와 MR을 사용해도 되는 새로운 형태의 대회이다. 일주일 전 (9월 2일) 동영상 예선을 거친 초. 중. 고 4팀씩 12팀이 선정되고 본선에서는 오전에 무대 연습 시간을 가지며 본선 또한 모두가 수상자이기 때문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공연처럼 진행되며 준비한 음악을 시간제한 없이 경연하게 하는 것도 타 대회와의 차별된 모습이었다. 본선 경연팀 전부에게 소정의 참가 지원비가 지급되며 각 학부 대상팀에게는 추가로 장학금이 지급되는데, 영예의 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은 한국전통문화고등학교 3학년 박지민양과 유일여자고등학교 2학년 전지효양이 수상하였다. ‘수적천석’ 이라는 팀 이름으로 참가한 두 학생은 박종선류 아쟁산조를 합주하며 때론 피치카토 기법을 쓰기도 하고 계면조에서는 솔로 연주를 하다 다시 합주를하는 등 전통 음악을 기반으로 연주방법에 변화를 준 창의성이 높이 평가되어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대회장인 군산시국악협회 장재동 지부장은 ‘문화강국’을 만들어갈 우리 청소년들이 창의성을 바탕으로 세계인들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며 문화일꾼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돕기 위해 이러한 변화를 주게 되었다."며"한국의 청소년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하며 극한 경쟁에 내몰려 행복지수가 한없이 낮은 이 시대에, 전통 음악 경연대회만큼은 조화와 협력을 이루며 창의적인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바라며 이 대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가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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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협회 ‘국악진흥법’ 전문가위원회 1차 회의(사)한국국악협회(이사장 이용상)는 지난 8일 인사동 태화빌딩에서 ‘국악진흥법 발전위원회(위원장 박상진)’안에 ‘국악진흥법 전문가위원회 TF팀’을 구성하고 1차 정책 발표회의를 시작했다. TF팀에 참석한 전문가 위원은 이용상(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박상진(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김승국(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 양종승(이북5도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장), 하응백(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 한상일(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 이희병(노원전통문화체험관 관장), 정회천(전북대학교 명예교수), 김상연(전남대학교 교수), 박정곤(한국국악협회 상임이사) 등 10명이다. 이날 회의는 박상진 위원장의 개회사, 한국국악협회 이용상 이사장의 인사말, 전문가위원들의 토론회, 향후 일정과 논의 방법 등의 순으로 진행하였다. 이날 이용상 이사장은 회의 인사말에서 "이슬이 내려서 가을다운 기운을 더해준다는 백로날 같이 전문가 여러분의 기운이 한데 모아져 국악인들 모두가 풍요로운 삶과 한류확산, 문화융성으로 이어지는 뜻 깊은 회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진 토론회는 약 2시간에 걸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모임답게 열띤 토론으로 이어졌다. 보존과 전승은 물론, 계승과 발전, 그리고 국악문화사업 등의 주제에 이르러서는 토론의 절정을 이루었다. 각 전문가들이 미리 준비한 발표문을 통해서, 그동안 정부기관에 대한 아쉬운 부분들, 그리고 국악인들의 역할과 향후 사회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정책과제와 비전들을 각 분야별로 다양하게 제시하는 뜻깊은 회의가 되었다. 토론한 내용들은 정리하고 다듬어서 구체화된 정책으로 도출될 수 있도록 ‘전문가위원회 TF팀 소위원회’를 만들기로 의결하고 명단을 지정하였다. 이 ‘소위원회’는 5명 이내로 구성함으로써 심도있는 의견 도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각 관련기관의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의견을 청취하는 시간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정부기관과의 공감대를 더욱 원만하게 확대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박상진 위원장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출한 내용에 의해 모든 국악인들이 융화하고 통합해서 국악인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그럼으로써 국민들의 국악 향유의 질을 높이고 국악문화가 더욱 융성하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 만들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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