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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명인 정은하' 1주기 추모식 개최지난 24일 충북 단양 방곡사에서 '아리랑 명인 정은하 1주기 추모식' 개최했다. 제자, 친지, 회원들 50여 명이 모여 극락왕생을 빌었다. 오전 10시부터 묘허스님 정봉스님 지범스님이 12시까지 엄숙하게 제행했다.제자 곽동현씨가 헌가(獻歌) 서도잡가 '제전'을 올렸다. 이어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주최의 추모공연은 이사장 곽동현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마치 21년 전 제가 제1회 대구아리랑제 첫 무대 해설을 하는 날인것 같습니다. 그만큼 정은하 선생이 가셨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립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국악신문 기미양 대표는 거의 매일 전화를 통해 아리랑연합회와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운영 등에 대해 걱정했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첫 순서는 허윤도 지부장이 스승의 업적을 기리는 자작 시조창 '팔만대장경'으로 추모의 뜻을 표했다. 이어 제자 김수희 오은비 신수진 백선혜 전은석 임옥자 허윤도 안정인 최문희 허희자 전성희 김미숙 황효숙 성은주 최문희 강옥선 홍인숙 조정원 등이 참석하여 한오백년, 대구아리랑 등을 올렸다. 세번째 무대는 정은하 선생의 애창곡 '경상도아리랑'을전성희(대구아리랑보존회),김미숙(영남아리랑보존회),최문희(성주의병아리랑보존회장),황효숙(울릉도아리랑보존회장)이 헌정했다. 초장부터 눈물을 보이더니 4분이 모두 울면서 부르게 되자 객석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은하 선생의 애창곡 '경상도아리랑'을 전성희(대구아리랑보존회), 김미숙(영남아리랑보존회), 최문희(성주의병아리랑보존회장), 황효숙(울릉도아리랑보존회장)이 헌정했다. 네번째 무대는김천시립국악단 조우석 악장의대금연주 '청성곡'이 구슬픈 가슴을 아득히 여며 주었다. 다섯번째는 관객의 요청에 의해곽동현 명창의서도잡가 '제전'이 다시 한번 불려졌다. 오늘 같은 날은 하루종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어서 더 불러달라는 것인 듯하다. 여섯번째는임옥자(성주아리랑보존회장),허희자(진천아리랑보존회장),성은주,안정인(성주아리랑보존회)이 '정은하 본 대구아리랑'으로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정회장이 작사 작창한 대구아리랑이다. 평생 오리지날 경상도 사투리를 투박하게 던지는 고인의 음성이 들리는 둣하였다. 휘날레는 울릉도와 제주에서 온 제자들과 전 참석자 모두 일어나서'최계란 본 대구아리랑'을 대합창으로 성료했다. 곽동현 회장은 "오늘같이 갑자기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멀리 울릉도에서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를 올립니다. 올해 22회 대구아리랑축제에서 다시 한번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사)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이사장은 "영천이 고향이신 정은하 스승이 25년 전 남겨준 '영천아리랑' 음반과 영천아리랑대축제는 영천의 명물이 되었다.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서 인류무형문화유산 영천아리랑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해 명소에 영천아리랑노래비를 세웠다."라고 하며 영전을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올렸다. 공연 후 가족대표로 김수희씨가 인사를 했다. 3년 제사를 모신다며 내년에도 꼭 만나자고 청하였다. 참석자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내년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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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마지막 양반’ 반재식 선생님 영전에선생님을 뵈온지 코로나 시기 4년. 청명한 계절쯤에는 뵈올 수 있으리라 고대하고 있던 중 뜻밖의 부음을 맞았습니다. 선생님, 그립고, 그립고 한없이 그리울 따름입니다. 10여년 전 종묘와 창경궁의 연결로가 생긴다며 같이 걸어 보자하셔서 종묘와 창경궁을 함께 거닐고, 이곳 장례식장 앞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그저께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가랑비를 맞으며 이곳 식장을 올라 영정을 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국악로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논의하던 후인들은 이제 선생님을 기억 속에만 담게 되었으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학계에 계시지는 아니하셨지만 존경스런 학자로 사셨습니다. 늘 고서와 문헌을 귀하게 여기시고 가까이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국악인이 아니시지만 어떤 국악인 못지않게 국악을 애호하셨습니다. 국악로 제정에 앞장 서셨고, 만담보존회를 설립하셨고, 근대 국악 명인들의 전기를 저술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공직자는 아니셨지만 종로의 전통문화 보존정책 수립에 어느 공직자 못지않게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1993년 저의 건의에 고심하신 끝에 종로문화원을 설립하셨고 초대 원장을 역임하시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한 문화유산을 관장하는 종로구의 전통문화 보존정책 수립에 기여하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한 때 심취하셨던 수석 예찬을 다 두시고 어떻게 가십니까?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구입 하시고 그 장대함을 감탄하시던 문자향을 어이 두시고 가십니까? 박춘재 이창배 같은 명인들의 국악혼을 어찌 두시고 가십니까? 선생님의 자태만큼 정갈한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마련하시려던 소박한 그 꿈을 그냥 두고 어떻게 가십니까? 선생님, 이제 이 영결식으로 영영 선생님을 보내드립니다. 선생님의 인자하심을 가슴 깊게 담고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새겨 놓으신 국악로와 종로문화원 역사는 세월이 갈수록 빛을 발할 것입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선생님 편안히, 편안히 영면하옵소서 2023년 10월 16일 후인들을 대신하여 김연갑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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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농대 중심 5·18 열흘전 의기투합 5·18때 시위 선두에 섰던 농악반 불온한 세상 떨쳐 일어난 바람 5·18이후 본격적인 정비 나서 마을로 들어가 화순한천농악 배워 졸업생에 이어 지금가지 명맥이어 징과 꽹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남대 정문에서 막힌 시위대는 농대 후문으로 탈출하여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오후 세시 경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약 20여 분간 농악놀이를 했다. 1980년 5월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 불기소사건 기록편14(2006)" 중 김양래 조서에 나오는 상황들이다.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내 4개의 써클이 있었다. 4-H, 밀알, 청봉, 한농 등이다. 대표 6명으로 '농악반설립추진위원회'를 열었다. 호남혼구사에서 구입한 징과 꽹과리 등 20여종의 국악기, 의상 등도 꼼꼼하게 거론된다. '전남대농악반연혁'에는 4월 19일 발기총회, 회칙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김양래(임학4), 박승환(농학3), 장환(청봉회장), 정성찬(농대문예부장), 최종석(농학4), 김선출(탈반) 등의 발기인 이름이 나온다. 다시 조서 내용이다. "피의자 박관현의 범죄사실 14항 나,의 기재내용과 같은 경위로 '민족민주학생회' 반정부 시국성토 불법시위 후, 동일 18:00부터 19:00까지 가두시위로 귀교시 연일과 같은 방법으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적극 활동하고, 동년 5. 16. 15:00경 피의자는 농악대를 인솔, 도청앞 광장에 도착 후 동교 및 재광 각 대학 시위학생 14,300여명이 합세한 시위에서 전항과 같은 농악놀이를 공연 후 동일 17:00부터 18:30까지 가두 시위시 동교생의 선두에서 농악놀이를 공연으로 시위학생의 진출을 유도 및 시민을 선동하면서 유동3거리, 중앙여고 앞을 경유 도청앞 광장까지의 가두시위에 적극 활동 하는 등 반정부 불법시위에 농악공연으로 학생 및 시민들을 선동하고 광주 폭동사태를 유발케 하는 등 피의자는 광주 일원의 안전과 평온을 저해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위반한 자 등인 바..." 연이어 검거, 자수, 미 검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조서는 물론 여러 구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가장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농악부대였다. 전남대 농대가 그 중심에 있었고, 조선대 등 재광 각 대학 농악대들이 연합해 뒤를 따랐다. 징과 꽹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남대 정문에서 막힌 시위대는 농대 후문으로 탈출하여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오후 세시 경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약 20여 분간 농악놀이를 했다. 1980년 5월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 불기소사건 기록편14(2006)" 중 김양래 조서에 나오는 상황들이다.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내 4개의 써클이 있었다. 4-H, 밀알, 청봉, 한농 등이다. 대표 6명으로 '농악반설립추진위원회'를 열었다. 호남혼구사에서 구입한 징과 꽹과리 등 20여종의 국악기, 의상 등도 꼼꼼하게 거론된다. '전남대농악반연혁'에는 4월 19일 발기총회, 회칙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김양래(임학4), 박승환(농학3), 장환(청봉회장), 정성찬(농대문예부장), 최종석(농학4), 김선출(탈반) 등의 발기인 이름이 나온다. 다시 조서 내용이다. "피의자 박관현의 범죄사실 14항 나,의 기재내용과 같은 경위로 '민족민주학생회' 반정부 시국성토 불법시위 후, 동일 18:00부터 19:00까지 가두시위로 귀교시 연일과 같은 방법으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적극 활동하고, 동년 5. 16. 15:00경 피의자는 농악대를 인솔, 도청앞 광장에 도착 후 동교 및 재광 각 대학 시위학생 14,300여명이 합세한 시위에서 전항과 같은 농악놀이를 공연 후 동일 17:00부터 18:30까지 가두 시위시 동교생의 선두에서 농악놀이를 공연으로 시위학생의 진출을 유도 및 시민을 선동하면서 유동3거리, 중앙여고 앞을 경유 도청앞 광장까지의 가두시위에 적극 활동 하는 등 반정부 불법시위에 농악공연으로 학생 및 시민들을 선동하고 광주 폭동사태를 유발케 하는 등 피의자는 광주 일원의 안전과 평온을 저해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위반한 자 등인 바..." 연이어 검거, 자수, 미 검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조서는 물론 여러 구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가장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농악부대였다. 전남대 농대가 그 중심에 있었고, 조선대 등 재광 각 대학 농악대들이 연합해 뒤를 따랐다. '전남대농악반'에서 '오월농악(오월굿)'까지 몇 주 전 전일빌딩에서 '전남대농악반창립과 오월에 대한 구술좌담회'가 열렸다. 발기인이었던 최종석, 김선출이 구술해주었다. 전남대학교농악연구회(회장 우남일)가 주최한 자리였다. 기왕의 보고서나 조서 내용에 없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5.18에 대한 많은 담론들 중 농악 이야기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농악이 의미가 없어서였을까?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정작 시위대를 견인했던 주력부대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이 전남대농악반이다. 증언들이 많다.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주문하였다는 얘기도 있고, 그 이전부터 '탈반'을 꾸려 활동하던 김선출이 농대 한농회에 와서 제안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농대 중심으로 약 30여명 정도가 의기투합을 한 때가 5.18 약 열흘 전이었다. 광주역 앞 서울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30여명이 4박5일 동안 농악연습을 했다. 전남대 정문과 동문으로 시위대들이 출발할 때 선두에 섰다. 도청앞 광장에서도 누군가의 연설 시작 전에 십여 분 농악놀이로 분위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농악 가락은 어떠했을까? 최종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채, 삼채, 오방진 등 가벼운 가락들이 주류였다. 용이한 가락들로만 보면 5월 시위를 위해 급조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일촉즉발 사회분위기가 이를 추동한 것은 맞지만 5.18 이후 농악놀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그 이전 꾸준하게 농악놀이를 배우고 전승했던 내력이 이를 말해준다. 시위의 선두에 섰던 농악반은 5.18 이후 본격적인 정비를 하면서 화순한천농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마을로 들어가 한두 달 같이 일하면서 배우는 현장학습이었다. 이후 단과대, 심지어는 작은 학과까지 농악반이 만들어져, 캠퍼스 빈 곳에는 여지없이 농악 동아리들의 북장고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월농악(오월굿)'이란 이름으로 5.18의 본격적인 시작이 5월 14일이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선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시위가 있던 풍경이었고 그 시위의 선두에 농악반이 있었다. 어쩌면 이들의 북장고 울림이 광주와 남도의 시공을 울리는 공명(共鳴)이었고 불온한 세상 떨쳐 일어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공명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농악하는 것을 '울린다'고 한다. 남도천지 들에서 바다에서 아니 역사 이래 한반도의 시공을 가르며 쇠와 가죽을 울리고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세상과 공명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도모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나이 40을 불혹이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엉거주춤 40주년을 보내버린 지금 다시 오월을 맞는다. 불혹이라니 대체 무엇에 혹하지 말며 무엇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야 할 것인가. 40년이 넘은 지금, 재학생들의 동아리는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농대를 중심 삼았던 전대농악반은 졸업생들에 의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 대학의 이른바 풍물패들도 사라졌지만 오월풍물단, 4.19풍물단, 굿스쿨 등 여러 단체들과 문화재로 지정된 각양의 농악들이 전승 재구성되고 있다. 감히 '오월농악' 아니 '오월굿'이란 이름을 붙이는 이유랄까. 고대로부터의 사회사적 뿌리를 갖는 농악일진대, 그것이 세상과 공명하여 5.18의 아름다운 울림을 낳았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본질과 확장에 대해, 그리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어떤 변화와 비전으로 우리사회의 공명을 준비하거나 펼쳐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불혹이란 오로지 세상과 더불어 공명하는 것을 이르는 언설일 뿐이다. 고목 스러진 자리, 씨앗들 뿌려져 새로이 나무 자라고 더 울창한 숲이 된다. 오월농악(오월굿)이란 이름을 붙이며, 가신님들 영전에 다시 옷깃 여민다. 비로소 남도 산하 아름답게 울리던 굿 소환하니 어찌 기쁘니 아니한가. 남도인문학팁-전남대농악반의 사회사적 뿌리 1960년부터 1973년까지 광주농고와 전남대 농대에서 농악을 가르쳤던 이주완(1910~1973)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전남농악대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1964년) 했다. 관련 정보는 표인주 외 공저, <이주완의 풍물굿과 이경화의 예술세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농업 관련 써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농대라 오래 전부터 농악에 큰 비중을 두었던 것. 그뿐일까. 혼란스럽던 유신 전후, 남도에는 많은 민주인사들이 내려와 사회운동을 했다. 예컨대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이후 해남에 내려와 있던 작가 황석영, 시인 김남주는 물론 이대출신 탈춤반 '한두레', 전남대와 조선대의 탈반 출신들이 만든 '광대', 야학 등 무수한 운동가들과 모임들 말이다. 이들에 의해 민요, 연극, 열사가 등의 판소리, 마당극, 특히 풍물로 호칭되는 농악이 연희되었다. 전후 맥락을 보아하니 이 풍경은 동학농민전쟁에 가 닿는다. 그들 또한 징과 꽹과리를 울리면서 압제와 부조리한 세상을 징치하고자 했다. 그뿐일까? 설령 이름은 다르고 형태나 구성은 달랐겠지만, 연말연시의 의례에서부터 농업과 어업의 각종 두레, 혹은 임진왜란, 삼국전쟁 등으로 거슬러 오른다. 아니 어쩌면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울리던 북소리와 쇠소리로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감히 이름붙이는 오월농악(오월굿)은 그렇게 장구한 뿌리를 가지고 탄생하였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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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 ‘상주아리랑의 김동숙님’ 영전에15년 전 이맘 때 세찬 눈발 속에서 열린 상주아리랑 행사장에서 처음 뵈었지요. 넉넉한 기품으로 맞아주셨던 감회가 선명하게 떠오름니다. 요 며칠전 정선에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비 건립식에 오시겠다는 전갈에 반가웠는데, 하루 전날 입원하셨다는 소식에도 얼마 후 상주아리랑경창대회 때 뵙지라고 안심했는데, 이렇게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상주아리랑에 주신 열정은 잘 피어갈 것입니다. 든든함 지니시고 가십시오. 저도 함께 하여, 회장님의 ‘상주아리랑’을 크게 피워내겠습니다. ‘상주아리랑의 김동숙님’ 부디 편히 영면하시옵소서! 2022. 12. 08. 후인 김연갑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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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69)<br> 청자투각편현대적인 맛과 멋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기물의 표면을 안과 밖이 통하도록 뚫어 장식한 것을 청자투각이라고 한다. 이 기법은 반건조 상태의 태토를 조각칼로 뚫어 조각을 해야 함으로 상당히 노련한 솜씨를 필요로 한다. 뚫린 문양이 작고 섬세할 경우 유약에 의해 투각이 메꾸어 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와 같은 청자투각은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시도된 것으로 보이지만 제작이 까다롭다보니 전하는 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근래 청자투각편을 한 점 구했다. 크기가 작아 기형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 망설이다가 구입을 한 것은 색감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비색이라고 할 수 있는 녹청색인데 안쪽으로만 빙렬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균열이 없이 말끔하다. 거기에다 파이고 깍인 홈에 따라 유색이 짙어지고 엷어지는 등 농담의 효과도 있어 더 아름다운 색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 청자투각편의 기종은 무엇이며 나타내고자 한 문양은 무슨 꽃이었을까. 청자투각에서 보이는 꽃은 대개가 연당초문 아니면 모란당초문이다. 그런데 청자투각편에서 보이는 꽃은 연꽃이나 모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꽃잎은 12장으로 되어 있으며 꽃잎과 씨방에는 음각으로 선을 그어 입체감을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연꽃이나 모란이 아니라면 청자투각편의 꽃은 아무래도 국화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청자투각에서 국화문을 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고 보면 이 청자투각편의 꽃이 국화라면 여간 흥미로운 문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투각편의 기종은 무엇이었을까. 청자투각의 기종으로는 돈(墩)이 가장 많이 보이고 화분받침 필가 베개 향로 등도 더러 실견할 수 있다. 하지만 청자투각편은 필가나 베개 향로 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콕 집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돈이나 화분받침 쪽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청자투각편에서 보이는 국화문은 흔치 않은 것이지만 사실 여타의 청자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은 흑백상감의 국화문이다. 왜 고려인들은 그처럼 국화를 좋아했던 것일까. <양화소록>을 보면 국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고려 충숙왕 때라고 한다. 이때 국화에 대한 중국의 문화적 인식과 관념도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여 진다. 특히 황국은 신비한 영약으로 달여 마시면 장수를 한다고 믿어 왔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환갑잔치 같은 때 헌화로도 사용하고는 했다. 유교 쪽에서 보면 국화는 의(義)를 상징하기도 한다. 뜻을 지켜 꺽이지 않는 선비정신과 일치하는 은일화(隱逸花)라 하여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은자에 비유되기도 했다. 이 모두가 꽃 치고는 고아한 습성을 지닌 뜻으로 풀이해서 의미를 부여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군자 중의 하나인 국화는 조선시대에도 꽤 귀하고 비쌌던 모양이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 중 자식에게 보낸 편지에는 국화 한 이랑만 팔아도 한 달치 식량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로 보아 과거에는 국화가 지금처럼 흔한 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국화가 장례식 때 고인의 영전에서 많이 보이는 것도 서양처럼 동양에서는 장미가 흔치 않아 대용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보면 귀한 꽃으로 흔치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현재 남아 있는 청자투각편을 보면 꽃과 줄기 모두 사실적이지는 않다. 도안화 되어 장식적인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타의 청자에서 보이는 흑백상감의 국화절지문이 그나마 사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청자투각편의 국화문은 군더더기를 지우고 거의 알몸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는 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색감의 비색과 더불어 작지만 도안화 되어 현대적인 맛과 멋을 풍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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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옛길 문경새재 선정비(善政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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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20회 무안 전국승달국악대제전 대통령상 수상자 김태호초등학생 시절 그저 춤추는 것이 좋아 들어가게 된 무용동아리에서 한국무용을 처음으로 접하고 지금까지 벌써 2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무용을 전공하게 되면서 故임이조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제 춤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전통 호흡과 춤길, 몸의 쓰임새, 예인으로서의 자세를 아주 체계적으로 알려주신 참 스승님이셨습니다. 10여년전 선생님께서 갑작스레 지병으로 작고하시고 춤 인생에서 큰 산을 잃은 저는 정말 힘겹게 선생님의 춤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온전히 잘 지켜왔다고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영광을 하늘에 계신 故임이조선생님께 먼저 돌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회 일주일 전에 아버지께서 지병으로 갑작스레 작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 참가를 많이 고민하였는데 아버지 생전에 제가 큰 예인이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하셨고 이번 대회도 기다리셨던 터라 어머니께서 꼭 나가서 좋은 성적 얻어 아버지께 올려드리라는 말씀에 힘을 얻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결과로 아버지 영전에 대통령상을 올려드릴 수 있게 되었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항상 응원해 주신 어머님과 가족들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경상국립대학교 민속무용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제 인생의 절대적인 두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끼는 제자로 때론 엄한 부모님처럼 이끌어 주신 경상국립대학교 민속무용학과 강인숙 교수님과 임수정교수님입니다. 두 분으로 인해 제가 지금까지 춤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무용가로서 학문적으로, 실기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데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 평생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영광을 누릴수 있게 이번 대회를 만들어 주신 무안군수님, 무안 전국 승달국악대제전 대회 관계자분들과, 항상 저의 춤을 좋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춤 벗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살아가면서 그 감사함 잊지 않고 갚아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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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페치카 최재형 지사 순국 102주기오늘은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 페치카 최재형 지사 순국 102주기입니다 저는 오늘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또 순국선열들의 피로 일군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최재형 선생의 영전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조국을 잊은 적이 없건만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두 번이나 버렸습니다. 한번은 이념의 장벽에 가려 긴 망각으로 버렸고, 한번은 국립묘지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연해주 항일투쟁의 페치카 최, 최재형 선생은 이제 우리가 예우에 맞게 모셔야 합니다. 최재형 선생은 102년 전인 1920년 바로 오늘 4월 7일에 재판도 없이 일본의 총탄에 돌아가셨습니다. 대한민국은 사후 42년인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70년 11월 17일에 바로 추모식을 하고 있는 이곳 서울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08위에 묘를 만들어 모셨습니다.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바쳐 항일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허묘로 모신 분들이 있고 최재형 선생의 묘도 허묘였습니다. 당시 후손으로 등록된 사람은 최규흠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의 후손들은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당시 철의 장막이라 일컫던 소련에 살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야 대한민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1995년에 독립운동가 후손초청사업으로 최재형의 막내딸 최 엘리자베타와 손자 최 발렌틴이 한국에 왔고 최재형의 후손으로 등록되었던 최규흠이란 사람과 DNA검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최규흠이 가짜후손으로 밝혀졌습니다. 가짜후손이 무려 30여년 동안을 유족연금을 받았던 것입니다. 2004년에야 비로소 최재형의 막내딸 최 엘리자베타가 유족연금 수급자로 등록되었고 2005년 사망하여 손자 최 발렌틴이 이어받았습니다. 2006년, 최 발렌틴은 국립서울현충원의 안내를 받아 애국지사묘역 108위 최재형의 묘에 참배를 했고 그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후 2009년에 최 발렌틴이 현충원에 참배하려 했으나 묘는 멸실되었고 묘가 있던 빈 터에 꽃다발을 놓고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사진을 남겼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08위는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묘였습니다. 후손이 가짜로 판명되어도 그 묘의 주인은 최재형 선생이십니다. 후손만 바꾸면 되는데 후손에게 연락도 없이 묘를 멸실시켰다는 것은 최재형 선생을 독립운동사에서 삭제시킨 것과 같습니다. 행정착오로 가짜후손을 등록했다면 진짜 후손이 나타났을 때 시행착오를 밝히고 제대로 모셨어야 합니다. 후손들은 그래도 할아버지의 조국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구나 하면서 참배를 하고 그 다음에 왔을 때 또 참배를 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후손에게 연락도 없이 묘는 없어지고 빈터만 보는 손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당시 최발렌틴은 언어도 통하지 않아 어디에 하소연도 못한 채 그냥 돌아갔습니다. 손자는 2010년 자신이 러시아어로 출간한 『최재형』 책에 사진과 함께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최재형 기념사업회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2015년 부부위패비 5번에 겨우 부부의 이름만 올렸습니다. 최재형기념사업회와 최재형 선생의 후손들은 어마어마한 재산과 생명까지 바친 연해주 항일독랍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을 200여 명이 넘는 부부위패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린 것이 항상 죄스럽고 안타까웠습니다. 2020년,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후손들은 최재형 순국 100주년을 맞아 보훈처와 청와대를 찾아가 후손도 모르게 멸실시킨 최재형 선생의 묘를 복원시켜 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현행법만 내세워 반드시 유골이나 시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정부가 잘못한 일이 밝혀지면 새정부가 바로잡아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이 순국선열의 예우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법이 바뀌었다고 잘못된 행정을 그래도 답습한다면 그 또한 과거의 행정착오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입니다. 보훈처에 알아본 결과 30여년 간이나 가짜후손 행세를 한 최규흠은 이름만 있을 뿐 모든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현재 최규흠은 작고한 상태입니다. 이는 누가 봐도 묘를 멸실시키면서 가짜후손의 기록도 삭제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는 누가봐도 행정실수를 감추기 위해서였죠. 현재 최재형 선생의 부인 최 엘레나페트로브나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의 희생자로 머나먼 키르기스스탄 비쉬켁 공동묘지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후손들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요청합니다.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최재형 부인의 유골을 봉환해올테니 1970년 11월 17일 조성되어 2006년까지 존재했던 최재형 선생의 묘를 복원하여 부부합장묘를 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최재형기념사업회와 최재형 후손들은 키르기스스탄 대한민국 대사관과 협력하여 올해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올해는 대한민국과 키르기스스탄 수교 30주년입니다. 현재 후손들한테도 동의서를 다 받아놓았습니다. 부인의 유골과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의 집 마당에서 흙 한 줌을 가져오거나, 최재형 선생의 유품을 애국지사 묘역 108위에 부부합장묘로 복원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7주년이며 최재형 선생 탄신 162주년입니다. 이렇듯 뜻깊은 해에 최재형 부부 합장묘를 애국지사 묘역 108위에 복원해주신다면 새정부는 상징적으로 순국선열을 제대로 모셔서 과거정부와 차별화가 될 것입니다. 정부는 지난해 홍범도 장군의 훈격을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시켜 유해를 고국으로 안장했습니다. 훈격을 최고등급으로 승격한 이유가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초기 독립운동의 태동지였던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였고 한인들의 페치카였습니다. 엄청난 재산과 목숨을 바쳤고 당시 연해주 한인들에게 난로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1962년 서훈심사는 최재형 선생의 신분이 낮고 후손도 없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있다는 것을 관심을 가진 분들은 다 공감합니다. 더더구나 연해주에서 최재형 선생과 동시기 활동한 분들의 서훈은 거의 2등급인 대통령 장이고 1990년 이후 서훈을 받은 분들도 모두 대통령장입니다. 최재형 선생의 서훈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데 재심의 조항이 없어서 조정을 못한다고 합니다. 미비한 조항은 보완하면 되고, 없는 조항은 필요시 새로 만들어 재심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법이 없어 못한다는 것은 직무유기나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이 고향이라 지원해 줄 지자체도 없습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구성원들은 최재형 선생과 혈연도 지연도 없는 순수한 단체로 그 어떤 이권도 사리사욕도 없습니다. 오로지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최재형 선생을 제대로 알리고 선양하는 단체입니다. 오늘 최재형 순국 102주기를 맞이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도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나눠드린 묘지복원 책자와 그 안에 묘지복원 동의서가 들어있습니다. 펜도 넣었으니 돌아가실 때 묘지복원사업에 찬성하는 서명을 꼭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상으로 최재형 선생 102주기를 추모하며 기념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4월 7일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문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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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영면하소서"…故이어령 영결식 엄수"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은 벗어버리고 이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으로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실 고 이어령 장관의 평안과 안식을 빕니다."문화체육관광부는 3월 2일(수)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엄수됐다. 문체부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원 설립, 도서관 발전 정책 기반 마련 등을 통해 문화정책의 기틀을 세운 고인을기리고 예우하기 위해 장례를 문체부장으로 거행했다. 특히 문인으로서 평생을 집필활동에 몰두하고, 문화부 장관 재임 시 도서관 발전에 큰 역할을한 고인을 기려 지성의 상징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 영결식에서는 고인의 영정 입장을 시작으로 묵념, 장례위원회 집행위원장인 박정렬 문체부 문화예술정책실장의 약력보고, 장례위원회 위원장인 황희 문체부 장관의 조사,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김화영 고려대교수의 추도사 등을 진행했다. 황희 장관은 조사를 통해 "고 이어령 장관님은 불모지였던 문화의 땅에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문화정책의 기틀을 세워 문화의 새 시대를 열어주셨다. 그 뜻과 유산을 가슴깊이 새기고, 두레박과 부지깽이가 되어 이어령 장관의 숨결을 이어나가겠다.”라고 고인이 장관으로 재직 시 직원들에게 당부했던 사항을 강조하며 고인의 뜻을 이어나갈 것을 다짐하고 추모했다. 조사와 추도사 이후에는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생전 영상을 상영했다. 영상에는 고인이 이룬 방대한 업적을 비롯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라.”와 같은 고인이 생전에 남긴 당부,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돌려주려고 해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와 같은 고인이별세하기 전 남긴 말을 담았다. 시인인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한 시대의 새벽을 깨운 빛의 붓,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밝히소서. 고 이어령 선생님 영전에 올린다"며 헌시를 공개했다. 그는 "분단의 나라에서 냉전의 벽을 깨뜨리는 서울올림픽의 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굴렁쇠 소년은 바로 선생님의 모습이었고 새천년의 아침에 북소리로 띄운 해는 이 나라 5000년 역사의 눈부신 새 아침이었다"며 "선생님은 이 땅의 한 시대의 어둠을 새벽으로 이끈 선각이시며 실천가이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아울러 "붓의 시대에서 오늘의 AI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혜안은 먼 미래를 앞서 내다보셨고 새 이론의 창출은 어김없이 실용화됐다"며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한예종을 비롯한 문화 대역사를 이루셨으며 20세기 한국의 뉴 르네상스를 떠받친 메디치로 영원히 새겨질 것"이라고 추모했다.문학평론가인 김화영 고려대 교수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가셨다는 선생님, 죽음이 올 때는 고개 돌리지 않고 뜬 눈으로 정 대면하며 '거기에 있겠다'는 선생님이 가장 명철한 선생님답다"며 "이제 편히 잠드소서"라고 애도했다. 이어 헌화와 분향을 진행하고 고인을 보내는 안타까움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첼로 앙상블로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엘레지(Élégie)’를 연주하고, 국악 공연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조창(弔唱) ‘이 땅의 흙을 빚어 문화의 도자기를 만드신 분이여’를연주했다. 한편, 고인이 영결식장으로 이동하는 중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지날 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설치된 ‘광화벽화’에 고인의 생전 영상과 추모 문구를 표출해 애도의 뜻을 더했다. 문체부는 혁신적인 문화행정가였던 고 이어령 전 장관을 기억하고, 문화행정에 대한 고인의 뜻과 열정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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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헐버트 박사 72주기 추모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72주기 추모 행사를 8월 31일 화요일 오전 11시에 비대면 방식으로 거행했다. 이번 행사는 이 성춘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장, 유 동균 마포구청장, 김 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김 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의 헌화 및 묵념으로 시작하여, 코로나19 관계로 시차를 두고 조 규태 서울YMCA 회장, 이 형모 재외동포신문 대표, 이 기대 33인유족회 부회장 등이 개별적으로 묘소를 참배하였다. 본 회 김 동진 회장은 "헐버트 특사는 을사늑약이 강박에 의해 이루어졌고, 대한제국의 주권이 사실상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라는 제목의 72주기 팸플릿과 헐버트의 조선시대(1890년) 평양 여행기 〈말 위에서 본 조선(Korea As Seen From The Saddle)〉을 출간하여 헐버트 박사 묘소에서 헌정하였다. 이어서 회원들에게 문자, 이메일, 홈페이지 등을 통해 72주기 팸플릿, 추모특집 헐버트의 조선시대(1890년) 평양 여행기를 전하고, 헐버트기념음악회 유튜브 동영상을 공개했다. 이번 추모 행사를 위해 박 병석 국회의장 등이 추모사를 보내왔다. 박 병석 국회의장은 추모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헐버트 박사님의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박사님의 고귀한 뜻을 받들고 그 가르침을 되새기길 바란다고 했다. 정부를 대표하여 이 성춘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추모사를 통해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 칭송하며, 이는 박사께서 단순히 우리나라를 사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자긍심을 가져도 될 훌륭한 국가임을 우리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이라고 했다. 또한, 크리스토퍼 J. 델 코소(Christopher J. Del Corso) 주한미국대사대리께서는 헐버트 박사는 한미 양국의 상호 이해 증진과 한국의 교육, 자유, 인권을 발전시키는 데 일생을 헌신하셨으며, 우리는 그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깊은 사랑과 두 나라의 영속적인 유대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열정을 잊지 말자고 했다. 김동진 회장은 추모식사에서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로 펜과 총을 넘나들며 한국인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특별한 길을 걸으신 헐버트 박사의 업적과 한국 사랑을 올바로 기억하여 업적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헐버트 박사를 흠모하는 많은 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여 앞으로 우리 정부가 헐버트 박사의 훈격을 올바로 복원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시기를 청한다고 했다. 특별 행사도 있었다. 헐버트 박사가 131년 전인 1890년 8월 29일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을 다녀온 뒤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메일(The Japan Weekly Mail)’에 1891년 6월 6일부터 10월 24일까지 10회에 걸쳐 기고한 평양 여행기 ‘말 위에서 본 조선(Korea As Seen From The Saddle)’을 출간하여 영전에 헌정했다. 이 글은 평양을 역사, 문화, 지리 측면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국제사회에 소개한 최초의 글로서 평양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경제적, 군사적 측면에서의 전략적 강점을 조명하며, 조선의 무역 통계를 제시하여 한반도 서해안의 평양, 목포, 의주를 개방하는 논리를 설파하고, 북쪽에 거대한 부가 존재한다고 131년 전에 이미 내다본 헐버트 박사의 혜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헐버트의 평양 여행기를 통해 남북이 하루빨리 하나 되고, 헐버트의 한민족 탐구 열정과 자주적 역사철학, 그리고 그가 분석한 평양 사람들의 특성과 한민족의 기원이 알려지며, 조선의 풍광과 한민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통해 우리 국민이 민족적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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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헐버트(Hulbert) 72주기 추모행사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유공자이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건국공로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수훈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72주기 추모행사를 오는 8월 31일(화요일) 11시에 비대면 방식으로 거행한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 관계로 정부의 집합금지 조치에 따라 주요 인사의 묘소 참배로 갈음한다. 묘소 참배는 이성춘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장, 유동균 마포구청장,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의 헌화 및 묵념으로 시작하여, 시차를 두고 조규태 서울YMCA 회장, 이형모 재외동포신문 대표, 오준영 라디바뮤직 대표 등의 참배가 예정되어있다.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박사가 1890년 평양을 다녀온 뒤 이듬해 1891년에 일본 영자신문 ‘재팬메일(The Japan Weekly Mail)’에 6월 6일부터 10월 24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한 평양 여행기 ‘말 위에서 본 조선(Korea As Seen From The Saddle)’을 책으로 출간, 헐버트 박사 영전에 헌정한다. 이 여행기는 평양을 역사, 문화, 지리 측면에서 소상하게 국제사회에 소개한 최초의 글로서, 조선의 풍광과 한반도 북쪽 사람들의 생활상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또한, 조선의 역사, 문화, 관습을 해학적으로 국제사회에 소개하였고, 평양이란 도시가 한민족 역사에서 갖는 위상을 심도 있게 파헤쳤다. 김 동진 회장은 "대한민국은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여 은혜를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특히 헐버트 박사의 건국훈장 등급(현재 3등급 독립장)을 재심의 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950년 헐버트 박사에게 서훈 당시 대한민국은 공적 심사가 없었기에 이를 바로잡아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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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국장 이혜균 대통령 표창 수상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21일 안중근의사기념관 이혜균(64세) 사무국장은 지난 1996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입사 이래 안 의사 선양활동을 24년간 지속해 오면서 투철한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갖고 부단한 열의와 창의력을 발휘하여 왔다. 이러한 공적으로 2021년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정부포상식에서 올해 선정된 32명 가운데 모범 국가보훈대상자 17명과 대외유공 인사 6명 등 총 23명과 함께 수상했다. 이 사무국장은 국제적으로는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 현지 기관 및 민간단체 또는 개인을 상대로 안 의사 선양활동을 통한 친목을 도모하며 관련 자료와 연구자 발굴에 매진하며, 특히 20여 년 이상을 일본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조 하에 안 의사 관련 자료를 조사, 발굴, 국내로 환수함으로서 안 의사 사후 100여년이 지나도록 유해를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진본 유품(유묵 등)으로 모셔 영전에 바칠 수 있도록 기여하였으며,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진본자료의 증가로 박물관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009년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해 특별 유묵전을 개최하며 도쿄도를 비롯 교토의 류코쿠대학과 개인 소장자들을 설득해 무상으로 진본 유묵을 대여, 안 의사 사후 100년 만에 유묵 등 진본 자료를 한자리에 모아 전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일본 내 각 지역의 안 의사 진본 유묵 소장자들과의 오랜 기간 꾸준한 교류 및 설득으로 신뢰관계를 형성하며 유묵(3점) 및 가족사진 등 관련 자료(49점)를 무상으로 기증받아 옴으로서 일본인들로 하여금 우리국민의 나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경심을 느끼게 하였으며, 안중근의사의 유품이 더욱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중국과도 하얼빈, 여순지역 관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유해발굴을 위한 민간차원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으며, 미국에도 지회를 두어 현지교민을 대상으로 말하기 대회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음. 지난 2019년에는 유럽 16개국 교민단체와 안 의사 선양을 위한 지회를 구성해 화상회의 등을 통해 현지 교민들에게 안 의사를 알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 사무국장은 "한일간 친선행사 및 학술교류를 통해 우리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독립을 향한 한민족의 치열했던 저항의식을 일본국민들에게 전달하여, 일본과 한국의 개인 또는 단체간 상호 역사인식을 바로 세워 동아시아의 선린 이웃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고자 한다."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보훈처는 "이번 정부포상을 통해 마땅히 예우를 받아야 함에도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모범 국가보훈대상자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분들을 예우하고 존경하는 일에 힘써온 대외유공 인사들에게 국가가 감사를 드림으로써 국가유공자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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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방일영 국악상, 판소리 명인 송순섭 수상11월 19일, 송순섭 명인(84세,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이 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조연흥)이 수여하는 제27회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했다.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7000만원을 수여받았다. 송순섭 명인은 1936년 전남 고흥 출생으로 21세에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스승 박봉술에게서 적벽가를 사사하였다. 1994년에는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장원을 수상했으며, 1970년대 ‘국악 불모지’ 부산에서 판소리 창작극 10여 편을 기획하여 흥행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화관문화훈장, KBS국악대상, 동리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후 부산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을 거쳐 전남 순천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수상자는 "이 상을 동편제를 제대로 만들어주신 박봉술 스승의 영전에 바친다. 동편제를 앞으로 지켜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여 서슬 깊은 소리로 보답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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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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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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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故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속없고 철없는 사람故 김호규 사장님!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 272일 만에 늦은 추모식을 올립니다. 2019년 12월 13일, 추도문 낭독도, 노제도 없이 보내드렸습니다. 너무나 급작스러워 황망한 탓이었습니다. 오늘 2020년 9월 7일, 사장님의 영혼이 담긴 국악신문의 창간 26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에 하늘문공원에서 사장님의 피속에 흐르던 ‘김병섭류 설장고’ 가락과 혼이 담긴 국악신문 창간호, 제10호, 제100호를 올립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영전에 삼가 보고 드립니다. 특별한 국면과 새로운 언론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그동안의 지면 신문에서 인터넷신문으로의 전환으로 재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준비한 인터넷 국악신문 9월 7일자 첫 입력 기사로 사장님의 늦은 추모사와 재창간 축사를 올립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으로 새 활로를 찾았습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출범하는 ‘인터넷 국악신문’에서는 사장님을 ‘故 김호규 사장님’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비옵니다. 2020. 09. 07 삼가 양주 하늘문추모공원에서 직원일동 드립니다. 故 김호규(金浩奎/1959~2019) 사장 1970~1987년 김병섭(1921~1987)선생께 설장구 및 우도농악 사사 1978년 서울국악중고등학교 졸업 1994~2019년 25년간 국악신문 대표/발행인 1995년 국악예술단 창단 2000~2016년 어린이국악명인전 개최 2001년 서울실버국악제전 주최 2006년 (주)국악엔터테인먼트사 설립 2006~2012년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2008년 문화부장관상 수상 2010년 한국구악협회 공로상 수상 2010년 평화기원 전국국악경연대회 주최 2011~2016년 한국춤제전 차세대명무전 개최(5회 개최) 2016~2019년 국악로전통문화학교 설립 운영(교장 안숙선) 2017년 서울특별시장상 2018년 한국국악사 개업 2017~2018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수상 2019년 문화계 대표단 일원으로 청와대 간담회 참가 2019년 12월 11일 소천 [추도사] 속없고 철없는 사람 박종철(극작가, 연출가) 전문예술단체 한국창극원, 창덕궁소극장 대표, 문인협회(희곡) 연극협회(연출)회원 사람이 명을 달리하여 세상에서 헤어진다면 어떤 사람은 가슴에 묻고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 사람을 추억하고 기억한다. 그런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국악신문사를 운영하였고, 국악평론가로, 실연자로 살다 간 김호규 사장을 추억하고자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철없는 형과 철없는 동생이었다. 필자에게 형이라 부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국악계에서, 국악로와 행사장, 공연장에서 나에게 형- 부르며 나를 챙기고 찾던 정겨운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사람으로서 대화하지 못할 길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게 되었다. 올해 나이 70에도 속없고 철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더 철없이 살던 그 사람이 술잔을 건네며 다소 엉뚱한 제안과 또는 나의 작품 활동을 기사로 쓰겠다며 정답게 굴던 그의 생전모습이 문뜩 문뜩 또 보고 싶어진다. 전생과 사후세계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 것인가! 사람의 인연은 맺고 끊어짐이 계속되고 있기에 살아생전 그 이별을 수 없이 겪고 사는 것을 막을 수 없으련만, 왜 이리도 그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는지! 그는 뼈 속 깊이 국악인이었다. 국악예술계를 제일 깊이 알고 이해하며 그 분야의 발전에 책임을 지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철없어 보이겠지만 그가 떠난 국악로는 활기를 잃은 것이고, 어느 날 그가 툭 튀어나와 형 하고 부를 것 같은 그리움으로 남는 사람이다. 그립다 왜 떠나면 더 그리운 것인가! 그동안 그렇게 살다 간 기인으로 김호규 망인의 부인과 자제들의 마음고생 등을 위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 그의 활력과 추진력, 뿌리 깊은 국악인으로 평생 국악신문을 만들고 기획하고 그 지면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국악발전에 기여하였으니 오랜 동안 그의 생을 기억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자제가 국악신문의 역사를 이어간다니 각별한 관심과 지원, 국악가족으로 국악예술인 이 함께 기뻐할 일이다. 계승은 순수 전통음악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동생 하늘에는 코로나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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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초 김연수 선생님의 기념관 건립 취지문이 나라 판소리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국창 김연수 선생님은 전남 고흥군에서 태어나셨다. 선생님께서는 동리 신재효 선생님 이후 판소리 5가의 사설 재정립과 최초의 장단표기 등 근대 판소리의 신기원을 이룩하셨으며 초창기 창극단을 설립하시어 판소리가 무대 예술의 꽃으로 승화하게 되는 계기를 부여하셨다. 또한 초대 국립창극단장을 역임하시면서 국악인의 권익보 호에 힘쓰셨으며 아울러 침체된 우리 음악의 체계적인 예술활동 근간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선생님이 타계하신 지 30주년을 앞두고 선생님의 숭고하신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등 상징물 하나 없어 크게 부끄러웠다. 그러던 중 ‘(사)동초제 판소리 고흥군 지부’ 창립 등 지역 민들의 열화같은 성원에 힘입어 늦게나마 선생님의 향리인 전남 고흥군에 기념관설립을 계획 하고 있다. 주옥같은 동초제 판소리를 사사받고 있는 후학들은 물론이요, 보존회에 몸담고 선생님의 음악혼 전승보존에 열과 성을 다하는 회원 여러분과 판소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참여가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훌륭한 기념관을 건립하여 동초 선생님의 영전에 바치기를 원한다. 2003년 6월 사단법인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 이사장 오정숙 *구좌번호 : 외환은행 041-19-49981-5(예금주 :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 *홈페이지 : www.dongchosor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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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연, 김정수 - 청·명(靑·明 ) 10월 26일일 시 : 2006년 10월 26일 오후 7:30 ~ 9:00 주 최 : 국립국악원 우면당 -연주곡목- 대금독주곡 ‘대바람 소리’(1994년 作) 작곡 : 이상규 대금 : 김정수 가야금 : 최보라 작곡가 이상규는 아악적 전통을 견실하게 고수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신석정의 시 세계를 음악화 하는 데에도 애써왔는데, 그 주요 작품이 ‘대바람 소리’를 비롯하여 ‘사음음계에 의한 대금 독주곡’ ‘산방일기’ 등이다. 이중 ‘대바라소리’는 대한민국 작곡상 대총령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으로, 그의 스승이기도 한 김기수 선생에게 헌정하였다. 김기수와 이상규는 모두 대금을 전공해서 그들의 작품에서는 다른 악기에 비해 대금의 연주가 상대적으로 빛이 난다. 대바람소리는 작고가의 특성인 장중함과 예리함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표적인 악곡의 하나이며, 대금의 음역별 특성이 잘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은 관현악의 극히 섬세하고 정중한 대응으로 점차 빠른 속도변화에 가락적 리듬이 고조되며, 독주와 관현악의 어울림이 의지적이고 저력을 내포한 마지막 카덴자를 유도하는 3단락을 가진 단악장 협주곡을 1994년 임재원 대금 독주회에서 위촉되어 편곡 · 초연된 작품이다. 원장현류 대금산조 대금: 김정수 장구 : 권성택 원장현은 195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4세에 대금에 입문하여 김용기, 오진석, 김동진에게 배운 바 있고, 한일섭에게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가 오늘날 연주하는 대금산조는 한일섭에게 구음으로 전수받은 가락을 정리한 것이다. 오늘날의 원장현류 대금산조는 한일섭의 음악적 영향과 원장현의 풍부한 음악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평하여진다. 또한 원장현은 대금산조 뿐만 아니라 거문고(중요무형문화재 16호 이수자), 태평소등 여러 악기를 골고루 잘 연주하는 남다른 기량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 부족한 즉흥 연주의 기량이 뛰어나서 시나위 연주의 명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25현 가야금과 대금을 위한 메나리 작곡 : 박범훈 25현 가야금: 최보라 대금 :김정수 장구 : 권성택 25현 가야금과 대금 2중주곡인 메나리는 본래 일본 악기인 샤쿠하찌와 고토를 위해 작곡된 박범훈의 1993년 작품이다. 메나리란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 전승되어온 토속민요조를 가리키는 고유어인데, 작곡자는 이 작품에서 한오백년과 강원도 아리랑 등 메나리조로 된 민요를 곡의 주선율로 활용하면서 곡명을 그대로 메나리라고 하였다. 미라도 세음이 주로 쓰이고, 솔과 레가 부가적으로 사용되는 메나리조는 때묻지 않은 한국인들의 토박이 정서와 푸근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데, 작곡자는 이러한 느낌들을 대금과 25현 가야금 이중주에 담아냈다. 뿐만 아니라 작곡자는 다양한 변형박자를 활용하여 민요에 내재된 생활의 흥취를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춤 불러내기 [이해식 작곡] 정확한 빠르기를 요구하는 1악장에서는 (♪=ca. 154 tempo giusto) Jazz의 Blue note를 원용했다. Blue note는 미국의 흑인들이 그들의 고향인 서아프리카의 언어 감각과 정서를 유럽식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평균율 음계의 제3음인 mi와 mi♭을 충돌시키는 수법을 말한다. Blue note의 시김새는 미묘한 불안감 같은 것이다. 이것은 해금과 가야고 사이에서, 또는 가야고 혼자서도 구사하지만 그렇다고 다박자(multi meter0로 전개되는 1악장의 블루스는 아니다. 2악장은 탱고 풍으로 (♩=ca. 112 alla tango) 지시되었지만 오히려 차차차(cha cha cha) 리듬에 더 가깝다. 탱고 · 차차차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은 그 활기찬 리듬과 이국적인 느낌으로 하여 자주 나의 작품 소재로 사용된다. 그리하여 작품의 내용을 확대하고 생명력을 높인다. 2악장도 그렇게 쓰여진 작품이다. (이해식) 「冥」-2 [백병동 작곡] 2004 해금연주회 위촉작품으로 冥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두 번째 작품이다. 冥界로 향하는 환상과 동경, 그리고 두려움과 초조를 극복하면서 경건한 기도와 영혼의 승화에 이른다. 작품을 쓰는 동안 줄곧 국악작곡계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타계한 친구, 成千의 넋을 기리는 마음으로 작곡에 임하였다. 이 졸작을 그의 영전에 바친다. (2004.10 백병동) 달그림자(月影) [조원행 작곡](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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