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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 광지원 농악단 “시민과 동행 했다”지난 4일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총감독 김홍수) 제6회 정기공연 희망과 행복의 판스테이지 ‘동행’ 공연이 곤지암도자공원 대공연장에서 펼쳐졌다. 광주시 주최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 주관으로 개최된 이 행사는 광주시무형문화제 제3호 '광지원농악'의 보존 계승 및 시민의 문화적 향유를 촉진하기 위한 정기공연이 주제 대로 시민과 동행했다. 악장 염두용 외 12인의 단원들이 농악의 신명을 펼첬다. 한편 이번 공연은 제27회 광주왕실도자컨퍼런스 축하공연과 제20회 세계관악컨퍼런스 광주시 개최 성공을 기원하는 공연으로 뜻 깊었다.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의 ‘남한산성의 울림’ 임웅수 명인의 ‘상공놀이’, 임성준 명인의 ‘고창고깔소고춤’. 이선영 외 4인의 '경기민요', 김경수 명인의 ‘채상설장고’, 박정철 명인의 ‘구미무을농악 쇠놀이’, 서한우 명인의 ‘버꾸춤’ 유희스가,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 12발 상모돌리기, 휘날레는 대동한마당 출연진 모두와 관객이 어우러져 난장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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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아미, 퓨전국악 디지털 싱글 ‘강강술래’ 발표판소리 소리꾼 ‘아미(AMI)’(소속사 스튜디오 아라리오)가 디지털 싱글 ‘강강술래’를 발표하고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잇는 퓨전국악 열풍 재현에 나선다. 지난 2020년 발표된 ‘범 내려온다’는 밴드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킨 신박한 곡에 현대무용팀의 안무 등이 더해지며 국민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각종 방송과 광고, 커버, 패러디까지 다양한 콘텐츠와 밈이 양산됐고 한동안 이날치의 인기는 이어졌다.‘아미’의 이번 디지털 싱글 ‘강강술래’는 EDM 장르로, ‘범 내려온다’보다 한발 더 앞선 트랜디한 감성을 담았다. 기존의 퓨전국악 곡들이 대부분 밴드 구성인데 반해 ‘강강술래’는 솔로곡인 점이 특징이다.원래 강강술래는 중요 무형문화제 8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추석날 보름달 아래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원을 그리면서 손을 잡고 돌며 노래하는 전통놀이다.소리꾼 ‘아미’의 신곡 ‘강강술래’는 이러한 전통 강강술래 노래를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켰다. ‘아미’ 특유의 전통 판소리 창법과 유니크한 보컬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장르를 넘나드는 신선함을 선사한다. 특히 반복적인 EDM 멜로디가 중독적인 곡이다.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OST, CF ‘LG grem’ CM송 등의 프로듀서인 Ra.L(라엘)이 작사, 작곡, 디렉팅을 맡았다.‘아미’의 신곡 ‘강강술래’의 국내 음원은 3월 18일, 해외 음원은 3월 20일 공개됐으며 현재 네이버뮤직, 멜론, 지니뮤직, 벅스, 유튜브뮤직 등에서 들을 수 있다.한편 ‘아미’는 본명이 왕해경으로, 인간문화재인 아버지(왕기창)와 삼촌(왕기철, 왕기석)을 배출한 판소리 명문가 출신의 퓨전국악 싱어송라이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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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 속 전국서 풍성한 정월대보름 행사(종합)색이 있는 오곡밥을 먹고 단단한 부럼을 깨며 한해 풍년과 건강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인 24일 전국에서는 흐린 날씨 속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제39회 해운대 달맞이 온천축제가 열렸다. 달집 앞에 제례 상을 차려놓고 새해 안녕을 기원하는 '월령 기원제'를 지내고, 달이 뜨는 오후 5시 58분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달집태우기를 진행했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에서는 이날 오전 김빈길 장군 추모제를 시작으로 장승·솟대 세우기, 당산제, 인절미·떡국 나눔, 큰 줄다리기, 전통 공연이 선보였다. 낙안읍성 놀이마당에서는 제기차기, 투호, 단체줄넘기, 윷놀이, 비석 치기, 팔씨름 등 전통 민속놀이도 펼쳐졌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에서는 새해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필봉정월대보름굿 축제가 열렸다. '기굿'을 시작으로 각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당밟이굿'을 진행한 뒤 저녁 무렵에는 '채굿', '호허굿', '풍류굿', '영산굿', '노래굿', '대동굿' 등이 이어졌다. 전주기접놀이보존회도 전주 삼천동 일원에서 정월 대보름굿 '망월이야'를 열었다. 오후 2시부터 열린 이날 행사는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 체험과 짚풀공예가 유춘수 옹의 공연과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 체험이 펼쳐지며 축제장으로 변했다. 행사는 시민들의 희망을 담은 2천여장의 소원지를 단 달집을 태우며 마무리됐다. 심영배 전주기접놀이대표는 "최근 연일 비가 내리자 달집이 물을 머금지 않도록 양수기를 동원해 물을 퍼냈다"며 "귀밝이술을 나눠 먹는 분들 모두 올 한해 좋은 소식만 듣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구에서는 금호강 둔치, 월광수변공원, 달성군민운동장 등 5곳에서 4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정월대보름 행사가 열렸다. 경북에서도 청도군 청도천, 경주시 서천 및 칠평천, 경산시 남천 둔치에서 정월대보름 행사가 열렸다. 이와 함께 울진군 후포항 왕돌초광장에서 열린 울진대게와 붉은대게축제에는 1만여명이 몰리는 성황을 이뤘다. 강원도 춘천시청 호반광장에서는 춘천문화원 주최로 '2024 정월대보름 달맞이 축제'가 열려 소원지 쓰기, 가훈 써주기, 부럼깨물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선보였다. 오후 5시 40분부터는 한 해 소망을 담은 소원지를 대형 달집에 매달아 태우는 '달집태우기'가 열렸다. 화재 예방과 관람객 안전을 위해 실제 불을 사용하지 않고 안전한 폭죽 퍼포먼스로 진행됐다. 속초시는 속초문화원과 함께 '2024 정월대보름 한마당-오오오! 청룡의 기운으로 소원UP!' 행사를 속초해수욕장에서 열었다. 달집태우기를 비롯해 연 만들기, 제기차기, 소원지 쓰기, 소망등 만들기, 떡메치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과 동별 민속경연대회, 속초돈돌라리와 지역 가수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에서는 이날 오전부터 동촌 냇가 일원에서 '갑진년 무사 안녕 기원제례'를 열고 풍물 공연과 시민노래자랑 등을 진행했다. 의령군에서는 '제23회 정월대보름 전통민속축제'가 열려 떡메치기와 농악공연 등 전통 민속놀이 체험으로 방문객을 맞았다. 양산시는 이날 오후 5시부터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를 열었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이날 관람객들에게 문화유산 사진카드 4개 중 하나를 골라 한 해 운수를 점쳐보는 행사를 마련했다. 소원 쓰기 코너도 마련해 추첨으로 선정된 100명에게 보름달처럼 둥근 도넛 모바일 교환권도 증정했다. 북한과 불과 1.4㎞ 떨어진 경기 김포 애기봉의 평화생태공원에서도 이날 정월대보름 맞이 행사가 열렸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생태공원 전시관 앞에서는 전통놀이 체험 행사가 운영되고 있고, 딱지 만들기와 캐리커처 등 체험행사와 밴드 마술 공연도 선보였다. 충북 옥천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강줄당기기가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주민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이 행사는 볏짚을 꽈 만든 용 모양 강줄로 윗말과 아랫말이 줄다리기하는 것이다. 윗말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같은 시간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주민 50여명도 마을 어귀 원추형 돌탑 앞에 모여 무병장수를 비는 '탑신제'(塔神祭)를 지냈다. 마한시대부터 유래된 이 행사는 1976년 충북도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됐다. 이날 오후 2∼7시 청주시 청원구 정북동토성에서는 이범석 시장과 시민 등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월 대보름 축제가 열렸다. 이들은 연 만들기, 연날리기, 소원지 쓰기, 달집태우기 등을 하며 시민 안녕 등을 기원했다. 증평군 증평읍 보강천변 미루나무숲에서도 이재영 군수와 군민 등 700여명이 모여 2시간여 동안 윷놀이와 투호놀이, 연날리기 등을 즐기며 군민 화합을 다졌다. 이날 전국 대부분 지역이 흐리거나 눈비가 내려 상당수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달을 보기 어려웠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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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가야진용신제' 국가무형유산 조사대상 지정경남도 무형문화재인 '양산 가야진용신제'가 2024년도 문화재청의 국가무형유산 신규 조사 대상 종목으로 지정됐다. '양산 가야진용신제'는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 있는 '가야진사'를 제장으로 삼아 통일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는 국가 제례 중사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 기록뿐만 아니라 2010년 '가야진사' 일원 발굴조사 결과 가야진사의 터와 분청제기 등이 출토돼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양산 가야진용신제'는 국행제인 가야진제와 기우제인 용신제, 매구가 결합된 복합성을 띄고 있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보전하고자 하는 원동면민의 강력한 의지와 사회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경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보유단체인 '가야진용신제보존회'는 국가 제례 중사의 가치를 널리 확산시키고 이를 전승하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신규 조사 대상 종목 지정은 '양산 가야진용신제'의 문화유산으로서 가치와 중요성을 전국적으로 널리 알릴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시는 '양산 가야진용신제'는 낙동강에서 이루어지는 유일한 국가 제례이자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유 일무이하게 체험할 수 있는 국가 제례인 만큼 국가무형유산으로 승격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가야진용신제는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국가제례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해오다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이 이어받아 진행하고 있는 1400년 이상 된 전통제례이다.유교식 관례에 따라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용신제를 봉행했으나 2016년부터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용신제를 지내고 있다.가야진용신제는 크게 다섯 마당으로 나뉜다.제를 올리기 전 부정을 쫓아내는 의식을 치르는 ‘부정가시기’를 시작으로, 칙사(국가제의를 지내기 위해 파견된 고위관리 - 초헌관)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는 ‘칙사영접굿’, 칙사가 제당에 당도하면 삼용신에게 제를 올리는 ‘용신제례’, 나룻배에 돼지를 실은 뒤 낙동강 용왕에게 제물로 바치는 ‘용소풀이’에 이어 제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제단으로 돌아오는 ‘사신풀이’를 마지막으로 제례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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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어요"…양산 통도사에 봄의 전령 '자장매' 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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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립독립기념관 개관 기념 전시도록 발간양산시립독립기념관(관장 신용철)은 개관 기념 상설전시 도록을 발간했다고 밝혔다.이번 도록은 지난 8월 개관 이후 일제강점기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상설전, 양산의 독립유공자를 주제로 한 개관기념 특별기획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도록은 ▲항일의병활동 ▲양산의 독립만세운동 ▲윤현진과 윤현진 일가의 독립운동 ▲양산농민조합의 시위운동과 통도사의 항일독립운동 등 4가지 주제로 구분했으며, 기획전시는 ▲양산 출신 독립유공자들의 활약상을 국내·외로 나누어 소개했다.이번 도록은 초중고등학교, 도서관 등에서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내 유관기관과 전국의 관련 박물관 및 기념관에 배포해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기념관 내 역사자료실 의춘당에서도 이번 도록을 볼 수 있고 곧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신용철 관장은 "이번 도록의 발간으로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수 있게 됐다”며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순국선열의 숭고한 나라사랑을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도록에 대한 문의사항은 양산시립박물관 독립기념관팀(055-392-4832)으로 연락하면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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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와 함께한 '향두계놀이', 그리고 유지숙과 박애리 명창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최하고 향두계놀이보존회(이사장 오현승)가 주관하는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가 2일 경기도 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향두계놀이’는 북한 평안도에서 전해지는 두레정신을 담긴 마을공동체 결속을 다지는 전통놀이 연희극으로 서도소리와 평안도 지역 고유한 대동놀이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다. 1966년 전국민속놀이대회에 나가면서 민속예술성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날은 향두계놀이보존회는 경기도 양주시와 파주시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 100여 명을 초대한 특별한 공연이었다. 갑자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주 율정마을 시민들이 1층 객석이 꽉 채웠다.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마을제 길놀이, 북청사자놀음, 고유제 무대가 오르기 전 농악대가 객석 뒤에서부터 좌우로 갈라져서 '지신밟기'를 펼치는 길놀이를 보여주었다. 이 나라 이 땅을 지키는 동서남북 신에게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안전과 태평을 기원드리는 마당굿을 올렸다. 꽹가리, 징, 장구, 북소리가 높이높이 메아리쳤다. 이어서 눈처럼 하연 사자탈을 쓴 연희자들이 나타나서 북청사자놀음이 시작되면서, 곧이어 꼭두쇠의 익살과 재담으로 '향두계놀이'의 시작을 알렸다. 400여 명의 청중은 꼭두쇠가 가르쳐 준 추임새 학습을 받고 '잘한다' 하며 맛깔스런 재담에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본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와 객석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잠시후 무대 왼쪽에 조명이 차차 밝아졌다. 유지숙 보유자가 나타나서 무릎을 꿇고 마을을 지키는 당목 아래에서 정화수를 바친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우고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고축(고유제)를 올렸다. 무녀로 분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강과 풍작 및 가정의 다복을 축원하는 신앙적 의례를 재현했다. "일년은 열두달 삼백은 예순날/ 황도 길일 좋은날 잡아서/ 오늘 열손 모아 비나이다" 서도소리의 백미, 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서도소리는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서도 지방)에서 전승되던 노래를 말한다. 민요·선소리·잡가 등을 포함한다. 널리 알려진 민요로는 평안도의 ‘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황해도의 ‘자진염불’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몽금포타령’ 등이 있다. 얇게 떠는 목을 구사하면서 콧소리가 특징이다. 긴아리는 빠른 한배의 '자진아리'와 짝으로 불린다. 현재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김광숙과 이춘목 명인, 전승교육사 유지숙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수심가'는 남도민요의 대표적 '육자배기' 와 쌍벽을 이루는 민요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아리랑만큼 사랑하고 애창하던 구전민요이다. 그래서 서도소리의 백미라고 불린다. 유지숙 명창의 수심가는 한번 들으면 다시 한번 더 듣고 싶어진다. 애절함이 극치에 달하면서 치유가 되는 '노래의 힘'이 느껴진다. 공연이 끝나고 나가면서 사할린 동포들이 이 곡의 제목을 물어보았다. 명곡은 시대를 넘나들고 공간을 초월한다. 일제감점기 음반과 방송을 통해 전국 랭킹 1위 유행가가 바로 수심가이다. 1926년 영화주제가 '아리랑'이 나오기 전까지 민중이 애창한 민요이었다. 인생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세상 공명(功名) 꿈밖이로구나 생각을 하니, 세월이 가는 것/동달아 나 어이 할거나(수심가) 향두계놀이보존회의 각 지역 지부장과 경·서도소리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서도소리극을 올렸다. 풍물 반주는 꽹과리(1)·징(1)·장구(2)·북(1)으로 구성된다. 향두계놀이 전 과장은 마당 준비과정, 입장, 도리깨질소리. 모심기 준비 과정, 모찌기 및 모심기, 논두렁 밟기, 초벌 논매기, 새참 가래질 소리 및 연기 피우기, 만벌(세벌) 논매기,풍년 기원 두레놀이 12과장이다. 제1장 '씨앗 뿌리기'과장에서 '긴아리'에 이어 '자진아리'가 불려진다. 야 조개는 잡아서 저절 절이구/ 가는 님 잡아서 정들이잔다(긴아리) 아이고 아이고 성화로구나(후렴) 요놈의 종자야 네 올 줄 알고 썩은/ 새끼로 문 걸고 잤구나 일하든 오금에 잠이나 자갔디 /재넘어 털털 뭘하래 왔음나 울넘어 밖에서 꼴베는 총각아/ 눈치나 있거든 이떡을 받아라(자진아리) 제4장 모내기하는 일꾼들이 새참과 막걸리로 지친 몸을 쉬면서 향두계놀이를 시작한다. 서도소리 ‘청춘가, 개성난봉가, 양산도, 개타령 등이 불린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 든다 에 에헤야 에헹에루화 좋구 좋다/ 어럼마 디여라 내 사랑아(후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산심/ 야심이 객수심이로다(개성난봉가) 전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서도소리가 담긴 '향두계놀이'를 신명과 흥으로 표출시켰다. 특히나 어린 학생들이 신명나는 춤사위와 함께 빠르게 내지르는 청아하고 맑은 서도소리는 잠시나마 궂은 세상살이를 잊게했다. 국악인 박애리의 빛나는 진행 국악인이면서 방송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박애리 명창의 맛깔스런 평안도 사투리로 진행하는 역활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아직 전 국민 대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국악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제한적 접근성이 문제인데, 박애리는 이러한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국악 장르는 갈래가 복잡하고 곡명이나 작품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는 쉽지않다. 해설하는 내용이 명확해야 전달력이 높아진다. 빛나는 진행 솜씨로 향두계놀이 공연을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청중을 집중시켜서 다음 나오는 작품의 진가를 높여주었다. 타고난 말솜씨가 재담가 수준이어서, 시원시원한 평안도 사투리 실력은 관중들의 집중력을 배로 증가시켰다. 즉흥적 대응과 교감이 느껴졌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해 온 성의가 빛을 발했다. 맨 뒷자석 관중들은 아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국악인이면서 문화매개자의 역활을 톡톡히 보여 주었다. 특히 무대에서 내려와서 한바퀴를 돌면서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로 "오늘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네다. 객석 불을 밝혀주시라우요. 안녕하십니가요. 사할린에서 오신 동포 어르신들 어디에 계시나요. 손을 들어보시라우요. 우리 어마니 아바지." 하고 사할린 동포들을 찾아가서 눈을 마추치고 악수를 하고, 머리를 맞대고 인사를 드려서 폭풍 박수를 받았다. 방송인 박애리 명창은 이미 사할린 동포들에게도 트롯트 가수들(?)의 인기를 넘나드는 스타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어느 무대에서도 소통이 가능한 전무후무한 국악전문 진행자이면서 차세대 국악을 보증하는 스타이다. 오늘 무대는 성공적이다. 이미 꽉찬 관중석의 뜨거운 박수와 무대에 꽂쳐버린 눈길이 말해준다. 오늘 박애리 명창이 역시 기대 이상으로 단단히 한 몫을 하고도 남았다. Q.유지숙 회장님 '향두계놀이' 전국 순회공연을 하시면서, 지금은 북한에서 잊혀진 북녁의 '서도소리'를 극으로 만들어서 알리고 계시는데, 많은 보람이 있으시죠. A.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무대라고 생각하고 우리 모두 열심히 불렀습니다. 특히 오늘은 더욱 뜻깊은 공연이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 70년 만에 귀국해서 한국에서 사신지가 15년이나 된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 본관을 두신 실향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순회공연 하는 지역과 연계해서 사할린 동포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다음 강화도 공연에는 인천에 사시는 동포들을 모시고 싶어요. 유지숙 명인은 2018년 광복절 사할린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을 위해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연희자와 함께 남한 국악인을 대표해서 사할린 무대에 섰다. 당시 필자도 사할린주한인협회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는데. 공연을 시작하기도 전, 무대 뒤에서 유지숙 명인을 만나서 "오늘 아리랑을 부르시나요" 하고 물으니, 첫 곡 선정 변경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아리랑메들리에서 북한지역 민요 '서도소리'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음악은 빠른데 서도소리 중 무슨 곡을 불러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당시 2시간 동안 진행된 공연을 통해 러시아 동포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노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오늘 공연의 진객, 사할린동포들은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성장해서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발레를 보고 자란 세대이다. 주말이 되어 공연을 보러가는 날에는 넥타이를 메고 붉은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가는 것이 일상이다. 주로 1941년에서 1945년 사이 출생한 사할린1세(법적)이다. 빠른 음악과 스텝에 익숙한 청중으로 살아오다가 15년 전에 한국에 귀국한 사람들이다. 전통국악보다는 트롯트에 익숙한 청중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Q.권경석 회장님, 오늘 북녁 사람들이 애창했던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A. 태어나서 서도소리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술성이 너무나 뛰어난 민족입니다. 이렇게 작은 땅에 살면서 북쪽과 남쪽의 소리가 이렇게 다르다니, 전 세계를 매혹시키는 한국 가수들의 뿌리는 바로 전통의 소리에서 나왔다는 게 실감납니다. 유지숙 명인이 부르는 서도소리는 북녁 사람들의 심장 소리라고 하면 표현이 될까요. 누가 들어도 유지숙 명창의 소리는 하늘이 낸 소리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전통민요라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잊혀져가는 전통의 소리를 남한에서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오늘 품격 높은 공연을 선사한 향두계놀이보존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박애리 명창이 사할린 동포들을 무대에서 소개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잊지못할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권회장은 사할린에 태어나서 북한에 유학을 가서 3년간 공부를 하고 모스크바에서 살다가 한국에 영주귀국했다. 대부분 사할린 동포들은 러시아에서 평생 유럽음악을 접하고 온 분들이다. 아마도 우리 전통민요는 다소 생소한 장르이지만 오늘 무대에서 'K-한류'의 원천을 맛보고 가셨으리라고 본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내내 오늘 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라고 한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오늘 공연이 사하린1세 가슴에 잠재되어있는 한민족 밑바닥에 깔린 심성을 건드렸나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예술성을 실감하고 가슴에 담아갔다고 본다. 전날 전 출연자가 하루종일 리허설을 하면서 이 무대 동선을 익히고 조명 및 음향이 맞아 떨어져서 공연의 완결성을 이끌었다고 본다. Q. 최나타샤(사할린아리랑합창단장) 회장님, 오늘 공연에서 어떤 노래가 가장 가슴에 남나요. A. 작곡가인 남편하고 같이 못와서 아깝네요. '수심가'라는 노래가 가슴을 울립니다. 슬프고도 아름답다고 할까요. 집에 돌아가서 유지숙 명창의 서도소리 공연 동영상을 찾아서 남편과 같이 보고 나니 "우리나라 젊은이들 노래 잘하는 세계적 스타가 앞으로 계속 나오고 있다. 재주있는 민족이다라"고 합디다. 그리고 아침방송에 나오는 박애리 명창이 평안도 사투리 말도 또박또박 잘하고 설명을 잘해주어서 우리가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노래도 잘하고, 역시 최고입니다. 박애리!! 만나고 싶은 스타이었는데, 다음에는 꼭 사진 한장 남기고 싶어요. 우리 부모님은 북한땅에서 살다가 사할린에 이주하여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북한 노래를 들으니 평생 고향에도 못가보고 사할린에 묻히신 부모님과의 추억도 떠오릅니다. 늘 흥얼흥얼거리며 부른 노래가 바로 북한 전통민요였다는 것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내년에도 우리는 이 공연을 기다리겠습니다. 유지숙 회장님. 귀한 공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나타샤 단장은 러시아 극동 최고 도시 하바롭스크한인협회에서 부회장을 30년 하다가 14년 전에 양주시에 영주귀국하여 부회장을 계속 맡고 있다. 남편은 사할린 동포 중 유일한 작곡가이다. 현재 사할린아리랑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하바롭스크와 한국과의 문화행사에서 동시통역을 맡고 있다. Q.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님, 오늘도 주말에 먼길 시간내서, 늘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해주시네요. A. 사할린 동포들 이제는 연로하시고 많이 힘드십니다. 어제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얼굴이나마 뵈려고요. 영주귀국하신지 15년이 넘네요. 재임기간 3년을 마치고 올해 초 귀국해서 경기도 지역 행사는 거의 다 좇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올해 에트노스학교가 국립남도국악원 재외동포 연수교육에서 '진도북춤'을 한달동안 수업을 받을 때 잠깐 만났습니다. 그렇게나마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조금씩 동포들의 삶과 애환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공연을 사할린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올해에도 연수교육을 받게되어 진도에 오게되면....... 저도 오늘 서도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감동입니다. 이 공연에 대해서 소개할 때, 사할린 동포들이 소리극이란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쉽게 설명하면 서양의 오페라 같은 거라고 답을 했다. 어떤 주인공이 나오고 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제대로 답을 못했다. 서도소리극 장르는 소리극으로써, 토속민요인 서도소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극이다. 오늘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극적인 요소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각 과정마다 극 중 인물이 구현하려는 곡명과 사설의 내용 전달과 함께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고 받는 대사(또는 노래)가 들어가야 한다. 특히 극의 주요 요소인 등장인물의 갈등구조 없이 대단원으로 막이 내려졌다. 즉 스토리텔링 작업이 잡히지 못해서 아쉬웠다. 일제강점기라는 모티브를 넣는다면 당시 최고 유행가 '수심가'도 강조할 수 있고, 당시 유성기 음반 출연과 방송을 통해 유행된 신민요나 유행가를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한 두곡 곁들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트롯트와 댄스곡만 보여주었지만, 극적 전환일때는 의상도 바꿔입어야 한다. 2부에서 극의 흐름을 이끄는 주인공 역활을 하는 향두어른이 나와서 트롯트를 부르는 대목에서는, 장날 마누라 몰래 넥타이를 메고 양복을 걸치고 읍에 나가서 유행가를 불렀으면 극의 흐름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2부 첫막에서 향두어른이 1부에서 입었던 의상과 상투를 틀고 나와서 독창으로 트롯트를 불러서 적지않게 당황했다. 이 노래를 왜 부르는지 주고 받는 대사 또는 해설자의 명확한 설명이 있었으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변사가 나와서 설명을 해주어도 극의 흐름이 생생하게 살았을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누구나 보는 내내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성공요인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일단 일반적인 다른 문화재 전승 구성원보다 인적 구성이 아주 젊은 국악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10살 전후부터 시작한 많은 제자들이 이제 40대 전후가 되어간다. 특히 본부가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에 있고 전국에 있는 각 지부에서 재능있는 인적 동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작품의 컬리티를 위한 공연연습 외 업무는 단단한 기획사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 더 부치면 무형문화유산의 학술적 국면과 공연 작품은 이원화 해야한다. 관객을 위해서 만든 작품은 진화해햐 한다. 시대의 코드에 맞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MZ시대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생산자가 있으면 수용자가 있어야 지속적 계승이 이루어진다. 행사를 마치고 로비에서 권경석 회장과 유지숙 회장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서 앞으로 전국 순회공연에 전국 사할린 동포 어른들을 초청해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권경석 회장은 이번 행사에 전석 초대와 함께 파주와 양주에 이동할 수 있는 버스도 보내주셔서 추운 날씨에 편하게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최나타샤 사할린아리랑합창단장은 유지숙 회장과 박애리 명창에게 러시아 초코렛을 선물로 전했다. 지난해부터 사할린 동포 위문공연에 앞장 서고 있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과 회원들도 사할린 동포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이어 유지숙 회장과 전 회원들이 동포들을 위해 준비한 따끈한 떡과 귤 상자 선물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실어 보냈다.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동포들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배웅을 했다. 오랜만에 양주와 파주에 사는 동포들이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쉬움을 남기고 버스는 파주를 향해 떠났다.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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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2)<br>분청양산명접시편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우리가 고미술을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데 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미술이라는 것이 재화와 관련이 있다 보니 생각보다 불미스러운 일이 흔치 않게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고미술 때문에 오히려 심성이 망가지고 생활이 어지러워 질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겠는가. 고미술을 좋아는 하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고미술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모았던 고미술품으로 인해 끝내는 송사까지 벌려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결론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크게 실망을 했는지 선배는 그 후 고미술계와는 완전히 발을 끊고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그마저 끝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선배에게서 오래 전 선물로 받았던 것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상리마을 뒤편 계곡과 호포부락 뒤편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가 바로 그 것이다. 두 곳 중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호포가마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분청사기는 물론이거니와 명문도 발견이 되는데 양산장흥고(梁山長興庫)와 장흥고 등이 그 것이다. 이로 보아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양산에서 중앙 관서에 상품을 납품하던 중요한 공납용 자기 제작소였음을 알 수 있다. 분청양산명접시편은 훼손이 심해 작은 조각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호포가마터를 찾아 직접 습득한 것인 듯 95.2.9라는 날자와 양산이라는 글자가 명기되어 있어 출토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접시편은 굽부터 몸체로 거칠게 인화분청이 시문되어 있다. 접시 내저에는 국화문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 또한 거칠어 문양은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접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내저 중앙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양산(梁山)명이다. 비록 삼수변은 훼손되고 없으나 선배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양산명을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선배와 소식이 끊긴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선배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산과 들을 누비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나 나보다 손 위인 선배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담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양산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선배보다도 내가 더 일찍 답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건네 준 것이 바로 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따라서 훼손이 심해 아주 작은 도편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가슴을 스쳐지나가고 또 지나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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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동두천 “각양각색” 국악한마당 펼쳐진다동두천시 주최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지부장:김경수) 주관으로 20일 오후 6시 30분 동두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매년 주최하는 2023 동두천 국악한마당이 '각양각색'주제로 펼쳐진다. 1부에서는 동두천국악협회 4개 분과 가야금병창분과, 민요분과 ,무용분과, 농악분과에서 국악의 향연을 선사한다. 2부에서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광명농악' 보유자 임웅수 등 명인들의 공연이 이루어진다. 첫 무대는 가야금병창분과(정귀임,김학영,민순이,유정화,이경희,전연옥)에서 함양양장가, 내고향의 봄으로 막을 올린다. '함양양잠가'는 원래는 경상도 함양 지방의 민요로 부르는 곡이다. 이 곡을 박귀희가 편곡하여 하여 가야금병창으로 연주한다. '내고향의 봄」임일남 작사, 박귀희 작곡의 가야금병창 신민요이다. 두번째는 .민요분과(차경순,나영순,노진옥,심정옥,이지민)에서 양산도,오돌독,경복궁타령을 선사한다. 세번째 무대는 무용분과(장영애,김순숙,임은숙,김창숙,김선희,민경민,박예숙,전혜경,정금희,정장순,주숙경)에서 '연(緣)'를 주제로 한 군무를 펼친다. 여자역할의 교방무는 영남의 덧뵈기 허튼 춤을 재정립한 춤이다. 일자사위, 활개춤, 베기고, 어르는 섬세한 발 놀음, 손 놀음이 주축이며 장단에 따라 맺고 푸는데 박자마다 강약과 함께 엇 박의 리듬을 만들어 주는 독특함이 특징이다. 남자역할의 선비춤은 교방무의 남성적 춤사위로 선비들이 학문과 덕을 두루 겸비한 자로서 글공부만 하는 것이 아닌 예, 기능을 즐기며 놀을음 했던 그때의 춤이나 소리가 전통화되어 활달하고 남성적인 멋이 곁들여 표면 되었으며 두 춤의 절제 속 자유로운 춤사위를 보여드리며 여자와 남자의 연이란 하나에서 둘, 함께 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무용분과위원장 양채원 선생님이 두 작품을 하나의 무대로 만들었다. 네번째 농악분과에서 길놀이, 문굿으로 동두천 시민듫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예로부터 농악의 길놀이 및 지신밟기는 취타대와 같은 형태로 임금의 행차, 군대의 행진 등 나라의 큰 행사나 중요한 일에 연행 해왔다. 길놀이의 의미로 지신을 진압합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위에 의미를 담아 오늘 공연에 오신 관객들에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선보일 예정이다. 2부에서는 명인전에서는 최영호의 '웃다리 상쇠놀음'의 농악무와 소리와 이날의 의미를 더한다. '웃다리 상쇠놀음'이란 농악에서 상쇠가 부포상모를 쓰고 다양한 연희적 예술표현을 하며 연행하는 개인놀음이다. 이어서 지역의 소리꾼 유은서의 긴아리랑, 창부타령, 양채원의 살풀이춤, 박경남의 쑥대머리, 남도민요, 하창범 의 푸리북춤, 이수현의 '이수현류 우도설소고춤'이 펼쳐진다. 휘날레는 임웅수 명인의 '임웅수류 상공놀이'가 대미를 장식한다. '상공'이란 광명농악에서 상쇠를 높여 부르는 것으로 머리에 부포를 대신하여 상모고깔 또는 상투를 쓰고 놀이(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상쇠놀이란 부포놀이를 중심으로 쇠가락 위주로 판이 짜여 지지만 상공춤(놀이)은 굿거리 가락을 많이 쓰며 능계가락 중심으로 태평소 소리에 맞춰 판을 벌인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 보유자 임웅수의 놀이(춤) 으로 450여년 전 구름산 도당굿이 성행했었던 때 무녀였던 김선화, 원이쁜선생께서 추었던 춤 동작의 일부를 재현한 것이다.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는 김경수 지부장을 리더로 ▲무용분과(양채원)▲가야금병창분과(박경남)▲민요분과(유은서)▲ 농악분과(고양옥)등 4개분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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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양산전국국악경연대회 (12/24)■대회 목적 : 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하여 유능한 예술인들을 발굴하여 국악의 보존과 계승발전에 기여하고 문화예술의 질을 높이는데 있음. 일시: 2023년 12월 24일(일) 오전 9:30분 ~ 오후 5시 장소: 양산문화원 대공연장 주최: (사)한국전통민요협회 양산시지부 주관: 한국국악교육원 양산분원 후원: 경상남도, 양산시, 양산시의회, 양산문화원,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양산지회,한국 국악교육원 경연내용: 1) 민요부문: 민요(경기, 서도, 남도, 동부, 제주민요), 잡가(경기, 서도, 남도잡가 포함) 중 자유곡 1곡 2) 무용부문: 전통무용, 창작무용 중 자유 구 분 상 세 내 용 대회구분 신인부(초,중,고 학생 포함), 일반부,명창부 (대학생 포함) 참가대상 2023년 12월 기준으로 대한민국 주민등록 등재되어 있는 국민 또는 단체 경연시간 5분 이내 (단, 심사위원 합의로 조정할 수 있음) 경연순서 민요, 무용 순으로 하되 신인부, 일반부,명창부 순으로 경연(예선 없이 단심 경연) 09:00 신청서 접수확인, 번호표 수령, 경연순서 확인 09:30 개막식(참가자 전원 참석) 10:00 ~ 경연(신인부, 일반부 순) 12:00 ~ 13:00 점심시간 17:00 ~ 시상식 접수기간 2023년 11월 10일(월) ~ 12월 23일(토) 18:00까지(우편물 도착분) 신청서류 참가신청서, 신분증 사본 또는 주민등록등본 접수처 및 참가비 (사)한국전통민요협회 양산시지부 -접수방법: 직접방문, 등기우편, 팩스, 이메일 -주소: (우편번호 50618) 경상남도 양산시 북안남 7길 12 -이메일주소: pvc119@hanmail.net -전화: 010-7166-0457 -Fax.: 051-514-8686 -참가비: 신인부 3만원, 일반부 5만원 (고수비 신인부 3만원, 일반부 5만원 별도) -입금계좌: 농협 352-0230-4013-63 예금주: 김 옥이 심사방법 3~5인의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본 대회 심사규정에 의거 심사함. *동점자 발생 시 개인은 연장자순, 단체는 인원이 많은 순으로 함. 심사항목 및 기준 민요: 공력 30점 / 박자 30점 / 음정,감정 20점 / 의상 10점 / 자세 10점 무용: 안무 20점 / 기교 30점 / 예술성 40점 / 무대 매너 10점 시상 내역 구 분 부 문 훈 격 수상인원 상 금 종합대상 종합대상 경상남도 도지사상 1명 1,00,000원 민요 명창부 일반부 대상 양산시장상 2명(명창부 일반부 각 1명) 300,000원 최우수상 국회의원상 2명(명창부 일반부 각 1명) 100,000원 우수상 양산시의회의장상 2명(명창부 일반부 각 1명) 100,000원 장려상 양산문화원장상 2명(명창부 일반부 각 1명) 50,000원 무용 일반부 신인부 대상 양산시장상 2명(일반부 신인부 각 1명) 300,000원 최우수상 양산시의장상 2명(일반부 신인부 각 1명) 100,000원 우수상 국회의원상 2명(일반부 신인부 각 1명) 100,000원 장려상 양산문화원장상 2명(일반부 신인부 각 1명) 50,000원 *제세공과금 및 세금은 참가자가 부담합니다.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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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국내춤기행,동해안 별신굿 〈울산 신암편⓵〉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5년 주기의 어촌축제 - 신암별신굿 이번 국내 춤기행은 동해안별신굿을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 해안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의례춤의 현황을 파악하고 춤사위를 분석하여 한국 전통춤의 지역적 특성을 규명하는 일환으로 민속현장조사 기행을 떠났다. 동해안지역 별신굿은 남쪽 끝 부산지역에서 울산, 경북, 강원도에 이르는 동해안 어촌을 중심으로 풍어제와 마을굿이다. 어촌마을마다 제각기 열리는 별신굿은 격년, 3년, 5년 등 마을의 형편상 정기적(사정상 비정기도 있음)으로 풍어제 또는 별신굿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성한 마을 공동기금으로 운영한다. 이때 큰무당(*)들을 모셔 큰 굿판을 벌이고 마을 축제를 열어 풍어를 빌고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재제초복을 비는 정기적인 큰굿이다, 2015년 2월21일(음1월3일)부터 4일 동안 행하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면 부둣가에 5년마다 열리는 풍어를 기원하는 신암별신굿을 현장조사하려고 촬영장비와 며칠을 지내려는 생활용품까지 큰 배낭과 가방까지 들쳐 메고 설 다음날(2월20일)에 일찍 용인에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도착한 부산버스터미널(노포동)에 부산의 한국무용가 신은주선생(부산춤공간 Shin 대표)이 마중을 나왔다. 점심을 같이 들고 부산에 온 김에 김덕명선생님(양산학춤 전승자, 92세)을 뵙고 가려고 댁으로 찾아 갔다. 일전((2월9일)에 ‘부산춤공간 Shin 기획토론회’ 때는 신장 투석한 날이라서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시던 분이 이날은 줄곧 두 시간에 걸쳐 지성승무의 유래와 전승에 대해 증언해주셨다. 더 이상 면담하기가 미안해서 다음에 증언을 더 듣기로 하고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마을로 떠났다. 마침 서생면 신암마을 근처가 신은주선생의 고향이라 어린 시절 이야기와 지역생활사까지 들으며 바다 경치를 만끽하면서 신암부둣가 신암제당에 도착하였다. 내일 열릴 굿판 상황을 상황과 시작 시간과 일정을 물어보고 촬영 위치까지 점지한 다음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어둑어둑해진 바닷가에는 흔히 생각하는 어촌의 풍경이 아니었다. 현대화된 해안도시의 밤풍경과 네온사인 등이 현란하고 음식점들과 별장, 펜션 등이 즐비했다. 찾다보니 부산 기장까지 와서 바닷물 가에 바짝 붙여 지은 수십 개의 방갈로 별채로만 지어진 독특한 음식점(고스락)이 맘에 들어 울산밤바다를 만끽하며 식사를 하고 숙소를 잡아 여독을 풀었다. *큰무당- 큰무당, 선무당과 점쟁이, 비래쟁이(막음쟁이)의 명칭은 기예능의 한계, 조직규모, 단골판 등에 의해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큰무당’은 우선 대대로 가계 전승된 세습무로 기예능이 뛰어나며, 많은 인원(20~30명)의 집례자의 조직력을 갖춘 친척들로 3일에서 7일 내외로 20~30거리의 대규모의 별신굿이나 오구굿을 연행할 수 있는 무계집단을 일컫는다. 이에 비해 ‘선무당’은 ‘설익은 무당’이란 뜻으로 개인적인 강신무들로 기예능은 약하지만 신과의 소통력으로 공수내림을 잘 하여 12거리 이내로 하루나 이틀 정도의 굿을 집례자 2~5명이내로 소집단을 형성하여 앉은거리와 선거리를 연행하는 중규모의 무계집단이다. ‘비래쟁이’와 ‘막음쟁이’는 강신적 또는 학습적으로 터득한 능력으로 1~2명(무녀와 악사)의 집례자가 한나절 정도로 개인이나 가정의 우환을 퇴치하는 앉은거리, 비손, 막음질을 행하는 유형이다.*허개등- 굿청 밖에 높이 허공에 매단 허괘등(虛卦燈), 불교 지화장엄에 유래된 화개등(花蓋燈)으로 흑애등, 호개등, 허계등, 후개등으로 불리는 대내무살 뼈대로 엮어 오색화지를 붙여 만든 등이다. 동해안 별신굿과 오구굿에서 굿이 열리는 곳을 신과 인간에 알리는 기능, 풍농풍어를 기원할 때 신(망자)이 머물고 이동(저승)하는 수단의 무구이다. <당맞이굿>에서 마을 수호신을 굿당으로 모시는 ‘골매기 청신춤’ 신암별신굿이 열리는 첫날(음력 정월 초산날) 신암마을 바닷가 제당에 10시부터 한다기에 30분 미리 도착하여 촬영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굿의 첫거리인 <제주집 안굿>은 전날 저녁에 했다는 것이며, 오늘시작은 둘째거리인 <당맞이굿>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어서 아쉬웠다. 참관했던 굿연구학자(김신효, 이균옥)들에게 물어보니 제주(祭主, 김정례)집과 이장(이동우)집에서 두 번 집안굿으로 간단한 굿상차림에 부정거리와 청좌거리에 어어 소지(燒紙)올리는 등의 비손처럼 청신(請神)을 하였다고 한다. 별신굿 전체를 ‘청신(請神), 오신(娛神), 송신(送神)’과정으로 구분할 때, 청신 부분에 해당하는 굿거리는 <부정거리>, <청좌거리>, <당맞이굿>, <문굿(문당굿)>까지이다. 별신굿에서 마을 전체의 안녕을 위한 본격적인 시작은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신(*)을 모시는 <당맞이굿>이 청신(請神)과정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당맞이굿>은 골매기가 있는 당나무나 당집 등지로 가서 골매기신을 내림대에 내려서 굿당으로 모시고 오는 굿거리이다. 골매기를 굿당에 모셔 놓은 후부터 굿거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별신굿이 벌어지는 굿당에 모셔진 골매기는 별신굿이 끝나는 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신암별신굿이 열리는 첫날 바닷가 제당 앞에 천막으로 마련한 굿판에 들어가기 전에 10시 10분(80분간) <당맞이굿>을 하러 가기 위해 앞마당에서 무녀들과 양중(악사)들이 풍물을 한바탕 치며 춤을 추며 돌다가 마을 주민대표가 대잡이로 골매기대(*)를 앞세우고 골매기 서낭당으로 향하였다. 골매기대에 이어 양중(남무악사)들의 풍물가락에 맞추어 무녀들이 춤을 추며 따르고 주민들이 함께 뒤를 따랐다. 유씨 골매기 할배 서낭당에 도착하여 상당굿으로 간단한 굿상을 진설한다. ①김동연 무녀(동해안 별신굿 전수조교)가 부정바가지에 부정물과 신칼을 들고 온갖 부정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고 굿당주변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 장구장단에 부정무가를 한다. ②부정무가를 마치면 꽹과리가 합세하여 빠른 장단으로 바뀌며 신칼로 부정물을 찍어 뿌리며 부정을 물리친다. ③주민대표들이 굿상 앞에 절을 한다, ④부채와 수건을 들고 골매기 유씨할배신을 모시는 청보무가를 부르고 양중은 "모시자 에시자!”소리로 바라지를 한다. ⑤당을 향해 절을 하고, 이어서 신칼과 명태포를 들고 휘돌리며 빠른 거무장단에 다양한 손동작으로 손신무관을 잠깐 추다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 장단이 느려진다. ⑥모름채 장단에 양손을 모으고 앞으로 굿상을 향해 허리를 숙여 살짝 엎어지듯이 토구름을 하고 강신무들이 접신하듯이 몸을 잠시 떨듯이 토구름(*)을 한 다음 왼쪽으로 돌아 절을 한다. ⑦"의허여- 하염없어!”하면서 귀곡성(鬼哭聲)을 잠깐 소리 지르고 "신암대동 안에 우리별신 내별신...유씨 골매기 할배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축원사설을 한다. ⑧수부채장단에 술을 술잔에 부어 잡신들을 보내고 마을주민과 제관들에게도 음복주를 내리고 별비(*)를 받고 계속 굿상 밖으로 잡신과 사자(死者)들에게도 술을 뿌린다. ⑨ 굿상의 제물을 모아 한지를 받쳐 사자밥으로 당산나무 아래에 모아둔다. ⑩"에루 지신아! 지지신 지신을 울리자!” 지신밟기 무가를 양중들과 함께 소리쳐 부르고 길군악 풍물을 치며 다음 골매기당으로 길놀이를 하며 행진한다. 골목길 주택가에 납작 바위 앞에 가볍게 굿상을 진설하고 이번에는 김동언 무녀(부산시 기장 오구굿 보유자)가 주관하여 염씨 할매신을 모시는 중당굿을 연행하였다. ①부정물과 신칼을 들고 부정무가와 부정물림, ②부채와 신칼 들고 청배무가(양중들은 "아시자 모시자!”)와 주민들 굿상 청배, ③굿상에 절한 다음 명태와 부채를 들고 모름채장단에 토구름춤(굿상 보며 양손 앞으로 상하 흔들기, 오른쪽으로 방향 바꿔가며 사방에 양손 앞을 상하 흔들기, 왼쪽으로 돌며 양손 펴 어르며 돌기, 반대로 돌며 양손 펴 어르기, 굿상 앞을 향해 양손 앞으로 들고 잠시 멈추기, 몸을 잠시 떨며 앞으로 자빠지듯 토구름하기, 양손을 앞으로 펴 좌우 흔들기, 왼쪽돌기, 굿상에 절하기), ④명잔 복잔 돌리기(꽹과리를 접시삼아 술잔을 주민 대표에 주고 별비받기), ⑤소지종이를 태워 올리며 축원하기, ⑥사자밥주기(술을 뿌리고 과일과 떡을 한지로 싸 내려놓기), ⑦신명나게 "에루 지신아! 지신지신 울리자!”하며 지신밟기무가와 풍물을 치고 다시 길놀이로 용왕당으로 행진한다. 부두 가까이 바닷물 앞에 굿상을 차리고 양중들이 원으로 풍물을 치며 신명나게 치며 돈다. 김영숙 무녀(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와 김용택 양중(동해안 별신굿 보유자)이 장구를 치며 용왕님을 모시는 하당굿을 진행하였다. 먼저 무녀가 부정무가를 하면 양중은 "에헤 영정아!”하고 바라지소리를 한다. ①부정물 바가지를 들고 신칼을 좌우로 흔들며 사방을 돌며 부정을 물린다. ②무가를 마치면 멈췄던 꽹과리들이 빠른 장단을 치며 무녀는 신칼로 부정물을 찍어 사방에 뿌린다. ③신칼을 들고 한 바퀴를 돌아 굿상에 절을 하고 부정물을 밖에 버린다. ④부채와 수건을 들고 한 바퀴 돌고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 굿상에 절을 두 번 한다. ⑤청보무가를 하면 양중들은 "애시자 모시자!”로 받는다. ⑥무가를 마치면 양손을 들었다 내리며 절을 두 번한다. ⑦모름채장단에 굿상을 향해 명태 한 마리와 신칼을 들고 양손을 좌우 흔들며 춤춘다. ⑧전진후진에 이어 오른쪽으로 돈다. ⑨양중들을 향해 전진후진과 왼쪽으로 세 바퀴 돌며 점차 느려져 굿 앞에 향해 멈춘다. ⑩눈을 감고 있다가 앞으로 졸듯이 꾸벅 거리며 토구름을 한다. ⑪다시 흔들다 굿상 비껴 옆으로 오른발로 땅을 콱 밟으며 양손을 쫓는 시늉을 두 번 하고 토구름을 한다. ⑫돌아와 양중 앞으로 신칼을 휘돌리고 내리면서 제자리에 서면 장단이 멎는다. ⑬사설로 "오년마다 와서 용왕님네 오셔서... 선주들 여기서 절도 하고 하시지요” 하니 선주들이 와서 절을 한다. ⑭조무들에게 선주들 명잔 복잔을 주라고 하고 무녀는 소지를 한다. ⑮수부채장단에 수부무가를 하고 제물을 바다에 던져 뿌린다. ⑯양중들이"에루 지신아! 지신지신 울리자!” 하면 풍물을 치며 굿당으로 돌아와 신명나게 풍물을 치며 미지기, 오방진 등의 풍물진풀이를 하고 <당맞이거리>를 모두 마치고 골매기대를 앞세우고 제당으로 돌아와 마친다. <당맞이굿>에 나타난 춤은 내당굿에서 본격적으로 굿을 할 때와 달리 야외 마을굿터에서 연행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굿내용이 축약되어 연행하므로 춤 역시 맛보기식으로 추었다. 내용상으로 부정춤, 청보춤, 거무춤, 토구름춤 등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추었기 때문에 다음 연행되는 굿거리(*)에서 소상히 밝히기로 한다. *부정굿- 굿청의 잡귀잡신을 물리치고 부정한 것들을 정화시키는 굿거리이다. 앉은거리와 선거리가 있는 경북지역은 부정굿이 독립된 굿거리로 연행하나 경남지역은 독립적으로 굿거리로 하지 않고 <제주집안굿>이나 <당맞이굿>에서 선거리로 간단히 연행한다. *비손- 무당이나 개인이 혼자서 치성(致誠)을 드리는 행위로 '손을 모아 빈다'는 뜻에서 ‘손빔’이라고도 한다. 비손에서 비는 행위인 축원덕담(祝願德談)은 ' 비나리'라고 한다. 노래와 춤·공수, 여타 복잡한 형식이 뒤따르고 장구·북·징·피리 등의 잡이들이 수반되는 의례를 <굿>이라 한다면, <비손>은 가무없이 간단히 정성만을 올린다. 정초의 안택(安宅)과 10월 상달고사, 그리고 집안에 환자가 생겼을 때 등에서 비손을 많이 하며, 소박하게 청수를 떠놓고 빌거나 시루떡을 준비하기도 한다. *골매기(골맥이)- ‘골(谷)’과 ‘액운을 막다’, ‘마을을 수호하다’라는 뜻으로, ‘골맥이 서낭’, ‘골맥이 할배’라고도 하며, 주로 경상도의 마을굿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지만 동해안 지방에서는 각 마을의 신으로서 동제의 대상신이 되고 있다. 그래서 김씨 할배, 이씨 할매 등으로 성이 붙어 인격신의 형태를 띠며, 할배나 할매는 조부(祖父)나 조모(祖母)라는 뜻이 아니라 조상(祖上)이라는 의미로 나무, 바위, 당집 등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모시고 있으며 웃당(상당)과 아랫당(하당) 또는 중당이 있는 마을도 있다. 별신굿에서는 언제나 굿당을 깨끗하게 하는 ‘부정굿’을 한 다음에 ‘청좌굿’을 진행한다. 청좌굿을 무당들은 ‘골맥이 청좌굿’이라고도 부른다. 청좌굿은 마을 당신(堂神)인 골맥이를 굿당에 맞이하는 굿거리이다. *골매기대- 별신굿에 쓰이는 신대는 각종 신이 대를 타고 내린다는 내림대로, 굿청 문 앞에 댓잎이 달린 긴 장대에 희 지전을 매달은 것으로 신대(너름대는 작은 것), 골매기대, 천왕대(제관두루마기를 함께 매달음) 등으로 모양은 같으나 굿의 쓰임에 따라 기능과 명칭은 다르다. *토구름- 무속은어로는 ‘신이 노하다’라는 뜻이지만, 동해안별신굿에서는 세습무인 무녀가 거무춤을 춘 다음 굿당을 향해 어포와 수건을 들고 허리를 굽혀 움찔하거나 구르는 듯한 모습이나 발을 콱 밟아 구르는 시늉으로 강신무들이 접신하는 것처럼 몸짓을 하고 난 후 어포춤을 추고 축원하는 과정을 말한다. *별비– 제가집이나 주민들이 굿을 연행하는 무녀에게 복채로 직접 주는 돈(화폐)을 말한다. *굿거리-‘굿거리’라고 하면 흔히 ‘굿거리장단’을 생각하게 되지만 굿판에서는 굿의 진행과정에 신을 불러 축원하고 오고 오신하는 독립단위의 굿으로 ‘거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즉 신암별신굿에서의 ‘굿’은 ‘상위개념의 굿’이고 연행내용에서 말하는 ‘부정굿’, ‘청좌굿’, ‘문굿’, ‘세존굿’ 하는 것들은 ‘하위개념의 굿’으로 ‘부정거리’, ‘청좌거리’ 등으로 해석하면 된다. <문굿>으로 굿청을 열기 위해 서막을 알리는 ‘진풀이춤’, ‘밟이춤’, ‘놀이칼춤’, ‘짝춤’ <문굿(문당굿)>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문을 열어서 신을 맞이하는 것이다. 문굿을 연행하며 문을 활짝 여는 것은 신들을 인간 세계로 영접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무당들의 예능실력 과시와 마을사람들이 무당들의 실력을 엿보는 거리라고도 할 정도로 무당들의 군무와 함께 모든 악기의 연주로 인해서 굿을 여는 신명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데도 의미가 있다. 진행상 <문굿>은 마을의 수호신(골매기)을 있는 서낭당, 용왕당 등을 길놀이를 하면서 찾아가 당맞이굿을 모두 마치고 풍물을 치면서 제당 앞에 당도하여 굿청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굿을 시작하는 의미의 굿거리이다.양중과 무당이 짝을 지어 짝춤을 추며 각각의 신들을 모시기 위해 문 앞에서 신명의 굿춤판을 벌이고 주민대표들이 문을 열어주면 굿청으로 들어가 내당굿(*)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문굿>은 내당굿을 하기 전에 모든 무당들이 함께 문밖에서 ‘밟이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양중들은 모두 농악기를 들고 풍물을 연주하고 무녀들은 놀이칼을 들고 춤을 춘다.11시 30분(85분간) 원양중(주바리지)(*)이 장삼(활옷과 유사한 색동옷)에 갓을 쓰고 장고를 메고 앞장서면 양중들이 쌍호적에 길굿장단을 치면서 원으로 돌 때 무녀들도 뒤를 따라 모두 흰 수술을 댄 놀이칼을 양손에 들고 좌우치기, 뿌리고 어깨얹기 등으로 ‘놀이칼춤’을 추며 돈다. 풍물의 ‘진풀이춤’으로 8자진, 오방진 등으로 돌면서 "얼씨구! 좋다!” 추임새를 하면서 신명나게 푸너리장단에 춤을 추다가 다시 원으로 서면 행진을 멈추고 ‘밟이춤’ 대무(對舞)가 시작된다. 원 안으로 들어간 원양중 김종희가 장구를 높이 쳐들고 김동연 무녀가 짝이 되어 조너리장단(*)에 짝춤을 춘다. 조너리장단은 장구보다 징이 잔가락을 많이 치며 박자를 주도하는 것으로 징가락에 춤은 춘다고 봐야한다. ①조너리장단에 원무녀는 놀이칼을 높이 들고 흔들면서 양중이 높이 처든 장고와 마주하면 서로 미지기(마주보고 전진후진)를 한다. ②장고를 얼굴 앞에 세워 들고 자리를 바꿔 각자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장고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미지기로 함께 제자리로 물러난다. 즉 회전할 때는 장고를 세위 들고 전진후진할 때는 장고를 눕혀 하늘 높이 들고 춘다. ③이어서 그동안 구음소리만 하던 김동언 무녀가 문굿 무가를 부르면 다른 무녀들이 제자리에서 손만 흔든 다음 모두 원을 따라 흔들며 걸어 돌아간다. ④김영숙 무녀가 무가를 받아 소리를 하면 다시 원양중은 원 안으로 들어가 장단을 치고 원무녀는 놀이칼로 흔들며 마주보고 대무한다. 이때 밖에 있던 무녀들이 짝을 지어 등지고 좌우치기로 대무를 한다. ⑤장단이 빨라지면 원 안의 원양중은 장고를 밖에 내려놓고 들어와 원무녀와 서로 양팔을 펴들고 등지고 돈 다음 등지고 서서 같은 방향의 팔을 함께 들어 꺾고 반대 팔을 꺾어 들고 천천히 반복하다가 점차 빠르게 들고 점차 좌우치기로 흔든 다음 마주보며 잔걸음으로 돌면서 흔든다. 이때 원밖의 무녀들도 빠른 손신무관으로 춘다. ⑥술래잡기처럼 양중이 쫒고 무녀는 피하면서 춘 다음 무녀의 놀이칼을 양손으로 붙잡고 서로 돌고 반대로 돌고나서 멈춰서 양손을 늘어뜨려 좌우로 흔들다가 잡은 채로 서로 뒤집어 돈다. ⑦한 번 더 뒤집어 돌고 반대로 흔든 다음 뒤집기를 두 번 세 번 돈 다음 수술을 놓으면 무녀들 모두가 원으로 들어가 아주 빠른 손신무관을 추고 나간다. ⑧양중도 놀이칼을 들고 무녀가 한조씩 들어가 추고 나오면 다음 짝이 들어가 신명의 밟이춤을 한 번씩 춘다. 이때 추는 무관(舞冠, 춤사위)은 갈매무관, 돌머리무관, 겨드랑무관, 자치무관, 양사위치기무관, 도리깨무관, 까불무관, 비빔무관, 나비무관, 혼합한 손신무관 등을 춘다. 모두 한 번씩 추고나면 제당 문 앞으로 몰려간다. 문 안에 있던 마을 제관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한다. 1분 더 신명의 춤을 추면 열어주겠다고 대답한다. 신명나게 추니 문을 열어주어 제당으로 들어간다. 제당 앞에 굿청에 서서 무가를 하고 절하기를 세 번 한 다음 부정물 가시기를 하고 버린다. 굿청 안 입구에 강신무인 손영만 남무가 신대를 잡고(원래는 마을의 강신무가 대받기를 하나 없어서) 김동언 무녀가 바라를 들고 작은 고사상을 차려놓고 대받이 고사를 지낸다. 마을의 제관들이 고사상에 절을 하고 무녀는 청보무가를 부른다. 점차 신이 오르면 대잡이가 신대를 바르르 떨면 신이 강림한 것이다. 신대를 들고 떨면서 마을 주민들을 머리 위를 스치고 양중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 제당 밖에서 안으로 신대를 넣고 흔들면서 몸을 부르르 떨고 절을 하면 마친다. 이렇게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 후에 굿을 이어간다고 알리며 마을에서 차린 식당으로 가서 납세미조림(가제미), 톳무침, 미역무침에 전분을 푼 시래기콩나물국 등 토속음식이 짜지 않고 맵지 않고 싱싱하여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내당굿과 외당굿: 동해안 남부지역에 주로 구성된 연행구조로 내당굿은 굿의 전반부에 해당하며, 굿당을 정화하고 신들을 좌정시키고 신과 인간과의 만남과정을 풀어낸다. 조상과 집안의 여러 신들에게 자신과 자손의 번창 풍요, 안녕을 기원하고 무당자신을 위한 굿도 연행된다. 외당굿은 굿의 후반부에 해당하며, 굿이 진행되는 마을 전체의 번창과 풍요, 안녕을 기원하는 성격 위주로 진행되며, 극적 성격도 강화되어. 바다, 산, 땅, 나라전체와 관련된 신위들을 중심으로 연행하여 굿 참석자들에게 흥미를 제공하기도 한다.*밟이춤- 문굿에서 무당과 양중이 짝을 지어 ‘진풀이춤’, ‘짝춤’, 또는 ‘집단춤’으로 마당밟이하는 춤.*양중(바라지)- 동해안별신굿의 악사를 말하며, 무녀의 굿을 반주하고 가의 선율을 받아서 응답하는 일(지역에 따라 만수받이, 살대답이라고도 함)를 ‘바라지’라고도 한다. 대개는 무녀와 양중이 부부로 같은 굿거리를 거행하고 반주한다. 이 때 중심 양중을 ‘원양중’, ‘주(원)바라지’라 하며 장구를 잡고 나머지는 ‘옆(약)바라지’로 징, 꽹과리, 바라를 잡는다.*조너리장단과 대너리장단- 문당굿과 장수굿에서만 사용되는 장단으로, 3소박 4장단인데 문굿의 밟이춤 대무에 연주하며 징의 뒤를 막지 않고 장고처럼 잔가락을 많이 처서 춤가락을 맞춘다. 대너리장단은 조너리장단과 박자는 같으나 큰 박만 징 뒤를 막아 치는 것이 특징이다. 신암별신굿의 굿거리 순서와 내용 별신굿 전야에 1.제주집 안굿, 첫날에 2.당맞이굿, 3.문굿, 4.가망굿, 5.세존굿, 6.도둑잡이, 7.제석굿, 둘째날 8.성주굿, 9.부인굿, 10.손님굿, 11.천왕굿, 12.대왕굿, 셋째날 13.대신굿, 14.심청굿, 15.황제굿, 16.군웅굿, 넷째날 17.걸립굿, 18.용왕굿, 19.장수굿, 20.월래굿, 21. 꽃・등・뱃노래, 22.거리굿으로 프로그램에는 기록되어 있었으나 실제 굿판에서는 무녀들의 사정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프로그램에는 각 굿거리를 ‘굿’으로 표기하였으나 청신(請神)과 송신(送神)과정은 주로 굿당 밖에서 별도로 연행함으로 ‘굿’으로 표기하며, 굿당 안에서 연행하는 오신(娛神)과정은 내당굿과 외당굿의 하위개념으로 보아 ‘거리’로 바꿔 표기하기로 한다)1. 제주집안굿: 굿의 집사를 맡은 제주집의 가신(家神) 성주, 군웅, 세존, 조상님을 위한 굿거리2. 당맞이굿: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제당을 돌며 신을 청해 오는 굿거리3. 문굿: 굿청 문을 열고 굿을 시작하는 굿거리4. 가망거리: 신령들의 근원(根源)을 관장하여 굿문을 열고 자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굿거리5. 세존거리: 아이의 출산, 명복, 재복을 관장하는 세존을 위한 굿거리,6. 도둑잡이: 마을의 재물을 보호하고 손재를 막기 위한 남무들의 놀음 굿거리7. 제석거리: 바람과 기후를 관장하는 제석을 위한 굿거리8. 성주거리: 집안의 수호신인 성주신을 모시고 가정의 평안을 비는 굿거리9. 부인거리: 각 가정에 효부와 열녀가 나오기를 기원하는 굿거리10. 손님거리: 천연두신인 마마신을 위한 굿으로 질병과 재액을 막기 위한 굿거리11. 천왕거리: 천왕신에게 마을 안가태평을 기원하는 굿거리12. 대왕거리: 각 대왕들을 위하고 청하는 굿거리13. 대신거리: 무당의 조상신인 대신을 위한 굿거리14. 심청거리: 심청설화를 서사무가로 구연하는 거리로 마을 주민들의 안질방지와 눈을 밝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거리15. 황제거리: 환훤 황제에게 가축의 무병과 집안의 재복을 기원하는 굿거리16. 군웅거리: 군웅신에게 농사발복을 기원하는 굿거리17. 걸립거리: 무당의 무조신인 제면할머니를 위한 굿거리18. 용왕거리: 용왕신에게 해상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거리19. 장수거리: 여러 장수들의 위엄과 힘을 빌려 마을 액과 살을 막는 굿거리(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신의 위엄을 보인다)20. 월래거리: 각 가정의 돌아가신 선대 조상을 위한 굿거리21. 꽃・등・뱃노래: 무구로 쓰인 꽃, 등, 배의 유래를 설명하고 송신의 의미를 담은 굿거리22. 거리굿: 남무의 일인극으로 잡귀 잡신들을 풀어먹여 보내는 굿거리 동해안 별신굿의 각 굿거리 연행의 기본구조와 변형구조 동해안별신굿의 각 굿거리는 대부분 연행의 6단계 기본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①푸너리장단의 푸너리춤으로 시작하여 부채와 수건춤을 추고 제당에 절을 하면 나면, ②청보장단에 청보무가를 부르면서 간간히 발림으로 청보춤을 춘다. ③무가를 마치면 무녀가 "우여차! 가망님네 놀고 씨고 가잔다!”라고 하면 양중들이 뒤를 받아서 괴성을 지르듯이 소리를 받으며 거무장단에 거무춤을 3장으로 ‘느진거무춤’(중모리형), ‘거무춤’(굿거리형), ‘당거무춤’(자진모리형)을 추고나면, ④어포(명태포)을 들고 모름채 장단에 토구름춤과 어포춤을 춘다. ⑤축원무가와 팔도민요, 가요 등을 부르고, ⑥사자풀이채(장단)에 술잔과 신칼을 들고 수부사자무가를 부르고 마친다. 그러나 변형구조는 첫째, 청보장단 대신 제마수장단으로 무가를 하는 <심청거리>, <세존거리>, <걸립거리>, <손님거리> 등 4가지는 긴 서사무가를 부르는 굿거리이다. 둘째, <조상월래거리>는 별신굿이 아니라 오구굿의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엇청보장단을 쓴다. 엇청보 1장은 푸너리를 친 다음에 시작하여 양중이 "이여어~얼씨구나!”라고 구음바라지를 하면, 이를 받아 무녀가 무가를 시작하며, 장구와 징 반주에서 징은 뒷면을 막고 나직이 친다. 셋째, 푸너리장단을 사용하지 않는 <도가집굿(제주집안굿)>,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대거리>가 있다. 넷째, 조너리장단과 대너리장단은 <문굿(문당굿)>, <장수거리>에서 쓰인다. <문굿>에서 무녀와 양중의 밟이춤의 반주장단이다. 오신(娛神)과정의 본격적인 굿거리의 시작 <가망거리>, <제석거리>, <세존거리> 청신과정을 마치면 이제 본격적인 오신과정의 굿거리가 연행된다. 오신의 첫 거리는 <가망거리>이다. 가망신은 무속에서 가장 근원이 되는 신령의 이름이다. <가망거리>는 신령들의 근원(根源)을 관장하여 굿문을 열고 신령과 인간이 만날 수 있게 하는 굿거리로 항상 큰 굿의 초반에 행하여진다. 굿당 밖에 가설한 식당에서 주민들(신암마을부녀회)이 마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13시 30분(90분간)에 <가망거리>가 시작되었다. 김동연 무녀(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와 김정희 양중(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이 굿을 연행하였다. 다음은 프로그램의 순서를 바꾸어 <제석거리>를 연행하게 되었는데 15시 7분(90분간)부터 홍효진 무녀(전수생)와 정연락 양중(전수조교)이 연행하였다. 제석신은 재복을 관장하는 신이며, 세존신은 아이의 잉태, 출산, 성장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시고 있다. 흔히 제석과 세존은 같은 신으로 혼용하기도 하지만 동해안별신굿에서는 굿거리가 나누어져 있다. <제석거리>는 앞서 밝힌 6단계의 기본구조로 푸너리춤, 청보무가와 춤, 거무춤, 토구름춤, 어포춤, 축원민요, 수부물림 등으로 연행하였다. 이어서 <세존거리>와 <도둑잡이거리>는 16시 37분(165분간)부터 김영숙무녀(전수조교)와 김용택 양중(보유자)과 모든 양중들이 연행하였다. 오신과정에 나타난 굿거리에서 축원하는 신과 무가와 사설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연행구조를 보면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기본구조와 변형구조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춤 관련에서는 굿거리마다의 유사성이 많아 각 굿거리마다의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기본구조의 공통성과 연행자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다음호에 종합적으로 정립하기로 한다. 또한 변형구조로 되어있는 <세존거리>는 그다음 호에 칠암별신굿에서 연행되는 내용과 통합 분석하여 춤의 형식을 제시하기로 한다. <성주거리>는 성주신을 모시고 해학적으로 풀어나간 다양한 ‘흉내춤’이 일품 <성주거리>는 집안의 수호신인 성주신을 모시고 가정의 평안을 비는 굿거리로, 성주는 집안의 대주를 지키는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19시 22분 김동언 무녀와 김동열 양중이 주도한 성주거리는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하거나 복을 빌 때 부르던 성주풀이 내력을 굿판에 해학적으로 전개하였다. 먼저 푸너리춤으로 굿을 시작하여 청보무가로 이어지는 기본구조로지만, 내용면에서는 독특한 연행으로 굿판의 첫날 일정의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성주내력의 무가내용은 "이 동네 자손들 명을 주고 복을 주고 안가태평 부귀공명 시화연풍 국태민안 시킬 때 어느 가정에 성주가 없을까요? 집에 계시는 성주님네 대들보 대성주 천년성주 만년성주요 일도본당에 당상에 자리 잡고 계시는 대들보 대성주. 오늘은 성주를 고치고 성주를 자리 좌정시켜 붙이고 모시고 성주님을 모실 때 본이 어디고?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레라. 제비원에서 솔씨를 받아 산천에 던졌더니 낮에는 볕은 받고 밤이면 이슬 받아 산신님네 북부도고 용왕님네 도움 받아 낙낙장송이 되었구나!...”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대목장의 톱질 흉내, 풀무질하는 소리와 동작, 입술을 데어 놀란 입과 눈 연기, 톱니벼르기와 물에 당금질 소리와 흉내, 톱질노래와 다양한 톱질소리 흉내 등으로 웃고 즐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가꾸어 큰 재목으로 키워서 통나무 잘라 대들보 만들고 집을 지은 뒤 세간을 들여놓은 뒤 성주님을 모시고 풍요롭고 다복한 살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우여차 성주님네 모시고 놀고 씨고 가자 으아!” 하며 거무춤을 추고 굿당 안으로 들어가 소지하고 합장 재배한 다음 명태포 뭉치를 들고 나와 모름채(휘모리형에서 단모리로 끝남)장단에 신칼과 어포춤을 춘다. 다시 굿당 안으로 들어가 어포를 내려놓고 한지로 된 성주신위를 막대 끝에 얹어 제관에게 대들보에 붙이게 하며 양손을 비비며 축원한다. 다시 시도하여 천장 벽에 붙자 성주님이 집안에 잘 붙었다고 양손을 흔들며 허튼춤을 춘다. 이어서 풍농을 기원하는 농부가를 부르면서 무녀들이 모두 나와 모내기 김매기 농사 흉내를 낸다. 또한 농악을 모방하는 춤으로 꽹과리로 버꾸춤 흉내(농악기를 굿판에 사용할 수 없어 반주악기인 쇠로 대신함), 신칼을 머리에 대고 신칼의 지전을 흔들면서 상쇠 부포춤 흉내, 부채에 수건을 매어 흔들면서 상모춤 흉내를 내며 농악의 흥겨움과 풍년을 기원한다. 주민들 앞으로 나와 이제 성주님의 덕으로 집안이 평안하니 다음은 풍년들기를 기원한다면서 농부가를 부르면 다른 조무들이 나와 함께 돌아가며 부른다. 꽹과리로 소고춤 군무로 흉내(농악기를 굿판에 사용할 수 없어 반주악기인 쇠로 대신함)로 소고 기본치기로 돌기, 소고 발찍고 제자리돌기, 안쪽보고 앉아 땅 찍고 치기, 원으로 돌며 앉자 땅 찍고 발차며 돌기 등으로 소고춤을 춘다. 다음에 독무로 홍효진 무녀가 부채 끝에 수건을 두 개를 이어 매달아 손으로 들고 채상 상모춤 흉내로 수평 휘돌리며 돌기, 제자리에서 좌우로 뛰며 좌우∞자 돌리기, 앞뒤로 뛰어나갔다 물러나며 휘돌리며 앞으로 꺾기, 앉았다 뛰며 휘돌리기, 제자리에 빠르게 앉았다 일어서며 휘돌리기로 마무리 한 다음 휘돌리며 원으로 돌다가 맴돌이춤을 뱅글뱅글 돈다. 이어서 다시 12발 상모 흉내춤으로 천천히 긴 12발 상모를 천천히 돌리며 원을 크게 돈 다음 제자리에서 크게 흔들다가 앉으며 돌린다. 앉아서 돌리기, 좌우로 ∞자 돌리기, 옆쪽으로 누어돌리기와 반대쪽으로 바꿔 돌리기, 박수치기 유도하기, 귀 뒤에 손을 대고 박수소리 크게 나는지 확인하기, 일어나서 좌우치기, 맴돌이로 빨리 돌리기, 다시 ∞자 돌리기, 인사하기로 마무리 짓는다. 김동언 무녀가 꽹과리를 들고 나와 다양한 상쇠가락을 친 다음 상쇠잡이들의 춤을 흉내 낸다. 이어서 축원민요로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로 창부타령 등 여러 민요를 부르고 가요도 부른다, 마지막 축원무가를 부르고 빠른 수부채가락으로 술잔을 들고 수부물림으로 마친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신암별신굿이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첫날 굿 7거리를 마쳤다. 인구 1000명이 산다는 아담한 어촌마을에 5년마다 열리는 풍어제에 온 마을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물론 굿판에 동참하는 이들이 마을의 할머니와 주부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찬조금을 내어 줄에 걸려있는 찬조자들은 거의 남자들이고 마을의 이장과 제관, 노인회장 등 직책으로 참여한 이들도 대부분 남자들이다. 부녀회에서 가설식당을 차려 온종일 무당들과 주민들과 각지에서 연구차 찾아온 학자와 연구자들이다. 겨울의 끝자락이지만 아직 추위와 바닷바람을 견디며 굿당 앞에서 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굿판과 구경판을 조립식으로 천막과 단열바닥판과 난방시설과 음향시설 등 닷새 동안의 축제를 불편 없이 연행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놀라운 것은 굿거리마다 주민들이 무녀의 가슴 띠에 꽂아주는 별비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만원권들로 띠가 미어질 정도였다. 할머니들, 주민대표, 주부들이 수시로 동참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축원해주는 감사의 뜻으로 별비를 내는 마음들이었다. 풍어제의 의미를 가진 별신굿이며 가정의 평안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음들이 모여서 신명의 굿판이었고 행복한 놀이판이었다. 다음 호에는 둘째날과 셋째날의 굿거리 내용을 살피고 기본구조의 ‘푸너리춤’과 ‘거무춤’에 대한 집중분석으로 춤의 연행구성을 최초로 정리하며, 변형구조의 굿거리의 특수한 춤들도 고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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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전승 실상 快晴, ‘청출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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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유지숙 전승교육사 제자발표회 '청출어람'(사)향두계놀이보존회(이사장:오현승) 는 오는 9일 (일) 오후 4시 강남구 테해란로 한국문화의 집( KOUS)에서 북녁의 소리 '서도소리' 향연을 펼친다. 전석 초대 무료공연이다. 북녘 땅, 이북의 소리로 불리는 '서도소리' 전승교육사이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인 유지숙 명창의 소리인생 60년을 되돌아 보며 제자들과 함께 '서도소리'의 예술성을 알리고자 한다. 점점 잊혀져가는 평안도·황해도 민요를 계승하여 실향민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대중에게 서도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알리고자 한다. 주최 측은 "이러한 의미를 널리 공유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유지숙 전승교육사 제자들이 '청출어람'에 담아 풀어보고자 한다"라고 전했다.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서도소리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즉 서도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 잡가로 민간에서 주로 불린 노래이지만, 지금은 직업적 소리꾼들 중심으로 불려지고 있다. 서도소리의 미묘한 장식음을 잘 옮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얕게 탈탈거리며 떠는 소리, 큰 소리로 길게 뽑다가 갑자기 속소리로 가만히 떠는 창법 등이 특징이다. 평안도의 민요는 '수심가'가 대표적이며 사설이 길고 합창으로 되받는 소리가 없어 집단적인 노작가요의 형식과 다르다. 또, 장단도 일정하지 않고 사설에 맞추어 적당히 친다. 황해도의 민요는 '산염불'과 '긴난봉가'가 대표적이며 장단은 각각 중모리나 굿거리 같은 일정한 장단이고,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긴아리'와 '자진아리'는 평안도 용강과 관서지방의 구전민요로서 토속적 소박한 맛이 간직된 소리이다. 그러나 내면에는 님을 그리워하는 처연함과 우아미가 공존한다. 북방 대륙과 인접한 서도 지역민들의 강건한 심성이 선율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짧은 장절형식(章節形式)으로 육성(肉聲) 창법으로 부르고 떠는 목, 꺾는 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학계에서는 긴아리와 자진아리를 서도아리랑으로 보기도 한다. 조개는 잡아 젓 절이고/ 가는 임 잡아 정情 들이자/ 쓰고 달고야 된장 먹디/ 갈거이 새낭은 뭘 하레 왔음나(긴아리) 연분홍 저고리 남길동 소매/ 너 입기 좋고 나 보기 좋구나/ 시집의 살이는 할지 말지 한데/호박의 박넝쿨 지붕을 넘누나(자진아리) '긴아리'는 평남 무형문화재 제2호인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에서 빠른 한배의 '자진아리'와 짝으로 불린다. 현재 서도 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김광숙과 전승교육사 유지숙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육자배기가 전라도 민요를 대표한다면 수심가는 서도민요를 대표하는 음악이다. 서도민요 창법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서도민요의 백미 '수심가'의 애절한 선율은 조선말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최고 인기를 누렸다. 당시 1926년 영화 아리랑 주제가 '아리랑'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유행가였다. 조선말 최고 유행가 '수심가'의 진수를 선사하는 첫 순서가 기대된다. 1. 수심가, 엮음수심가(소리_이나라 장효선) 2. 산염불, 자진염불 (소리_김유리 류지선 김무빈) 3. 긴아리, 자진아리 (소리_김초아 박지현 최민정) 4. 긴난봉가, 자진난봉가(소리_최정아 김세윤 김미림) 5. 뒷산타령, 경발림(소리_박세음 황승환 황다예 백서연 박세인 이시은 최유담 이인애) 6.향두계놀이(소리_이나라 장효선 김유리 류지선 김무빈 김지원 이재득 이서현 최윤영 윤종혜 강은숙 김정순 박영춘 김훈의 이근호) 7. 개성난봉가 양산도 사설난봉가(소리_유춘랑 이서현 윤종혜 최윤영 정인혜 강은숙 박영춘) 8. 야월선유가 간장타령 금드렁타령(소리_조윤희 염미향 주영민 조수자 정세련) 9. 영천아리랑, 온성아리랑, 해주아리랑(소리_전옥희 김진숙 송지우 박세희 이향숙 조이임 박양자 이예리 김명자 남상숙 김연수 김정희 이서령 김훈의 이근호) 10. 배치기(소리_오현승 강석 김지원 이재득) 11.술비타령, 자진술비타령(전 출연진 대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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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제주큰굿·금속활자·궁중채화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7월에도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를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종목으로 개최한다.해마다 개최되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는 무형유산의 대중화와 보전·전승 활성화를 위해 국가무형문화재의 원형을 실연하는 행사이다. 7월에는 총 10건의 공연과 전시가 준비되어 있다.서울의 민속극장 풍류(강남구)에서는 7월 7일 ‘경기민요’(보유자 이춘희) 공연을 시작으로 ‘가사’(보유자 이준아, 14일), ‘북청사자놀음’(22일) 공연이 개최된다. 특히 그동안 제주에서만 이뤄지던 ‘제주큰굿’을 28~29일 서울에서 만나 볼 수있다.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소공연장에서는 '가야금산조 및 병창'(보유자 강정열, 7.15.)이 우리 전통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로 장마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공연을 선사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서울, 충북, 경북, 전남 등지에서도 총 5건의 행사가 진행된다.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는 국민이 우리 무형유산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전승자가 자유롭게 기획한 공연과 전시로 진행된다. 7월에는 우리 민족 특유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공예종목 행사를 중심으로 서울, 충남, 대구, 경남, 제주 등지에서 총 12건의 공연과 전시가 펼쳐진다. 충남 문헌서원(서천군)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한산모시짜기’(보유자 방연옥, 7~9일)의 모시 짜기 과정을 관람할 수 있다. 또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충북 청주시)에서는 금속활자의 제작과 활용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금속활자장’(보유자 임인호) 행사가 23~25일 열린다. 이외에도 한국궁중꽃박물관(경남 양산시)에서는 ‘궁중채화’(보유자 황을순, 12~30일) 전시를 통해 조선시대 궁중행사에 쓰였던 장식 꽃의 화려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고,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서울시 강남구)에서는 ‘침선장’(보유자 구혜자)의 전시와 시연(24~26일) 관련 체험 꾸러미(키트)를 활용한 프로그램에도 직접 참여해볼 수 있다. 7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의 상세일정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집(www.nihc.go.kr)을 방문하거나, 한국문화재재단(공개행사: 02-3011-2153, 기획행사: 02-3011-2156)으로 문의하면 일정, 장소 등을 자세히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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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의 지역춤, 부산·경남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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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3김덕명의 전통춤은 양산지역의 사찰(寺刹)과 권번(券番)에서 전승하던 독특한 춤들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후학들에게 전수시켰다. 더구나 사찰과 권번은 수행도장과 세속이라는 서로 상반된 환경이기에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김덕명의 춤은 그런 상반된 춤 세계를 모두 포용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도 남성적이고 영남적이고 사찰적인 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 김덕명의 춤의 장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방의 민속을 발굴하고 복원하고 전수하는 탁월한 악가무의 재능까지 겸비한 예인이며 재인이며 기인이었다. 이제 그가 남긴 춤과 민속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사찰계춤(4종), 기방계춤(11종), 민간계춤(13종) 3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1. 사찰계춤김덕명의 사찰계춤을 전승한 통도사는 경남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자리한 사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지만 전승계보는 조선말기 철종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魚山僧)는 알 수 없으며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고종시대의 이월호(李月浩, 1880~ ?)로부터 김설암(金雪岩, 1885~ ?)→신경수(新京壽, 1893~ 1965)→양대응(梁大應, 1897~ 1972), 그리고 김덕명에게 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 양산사찰학춤양산학춤은 1880년대 통도사의 이월호스님으로부터 사찰계에서 민간재인계로 4갈래로 전승되었다. ①김설암-신경수-양대응으로 사찰계 전승에서 민간재인 김덕명으로, ②사찰관련 민간예인계의 김두식(金斗植)-안화주(安化周, 1894- 1965)-황종열(黃鐘烈, 1897-1957)에서 김덕명으로, ③이주서-서상근에게 전승은 단절되었고. ④이주서–김동원 전승은 동래학춤으로 전승되었다.이렇게 양산에서 유일하게 통합전승된 김덕명 양산학춤은 그 사찰계 원형성과 민간재인계의 독특한 덧배기 춤사위와 교방계의 섬세한 바디(성향)가 깃들여져 예술성이 높은 춤으로 전승되었다. 학춤의 유래는 신라 선덕여왕 15년(AD646) 통도사가 창건된 이래 수륙재, 영산재, 종무대재 때 의례행사무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왔다고 전한다.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은 24가지 춤사위를 4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단계별 의미로 학을 표현하면서 춤사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1단계> 자연의 새가 하늘을 날고 땅으로 내려앉는다. 먹이를 찾기 위해 동료를 위협하며 존재감을 알린다. <2단계>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을 살피며 걷는다. 날개 짓하며 돌고 먹이를 고르며 으쓱인다. <3단계> 학은 먹이를 집고 죽이고 먹는다. 배부른 학은 쉴 터를 찾아 걸으며 따뜻한 햇살에 몸을 맡기니 졸음이 온다. 주위 소음으로 깜짝 놀란 학은 일어서면서 기지개 편다. <4단계> 동료 학과 짝을 이루고 끌어 주며 동료에게 먹이를 찍어 먹여주고 노닐다 날아간다. 양산사찰학춤은 사대부차림의 모습에서 학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갓과 도포자락에서 나타나는 우아한 학의 날개 짓, 몸짓 등에서 학의 동태가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하체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도약과 집중, 배김새 등 굵직한 남성의 멋이 내재된 춤사위는 학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박계현의 박사학위 논문발췌) 2) 지성승무지성승무는 일반적으로 성행하는 승무와 다른 의미를 지닌 독특한 춤이다. 춤의 근원은 인간중심적 구도, 순도한 도승과 상좌간의 기구한 운명적 사연으로 소산한 전통 불교 춤이다. 검정 승복에 붉은 가사(袈裟)의 강렬한 구도(求道)의 여한(餘恨)으로 중생구제의 부처님이 수행한 수많은 선행과 공덕, 정진 수행을 찬미하는 불교의 정통춤 지성승무는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몸놀림으로 재현되고 있다. 수도승이 수행 길목에서 부모를 잃은 동자를 구해 등에 업고 토굴로 돌아와 불도성상 십여년에 열반하신 스님의 액운을 풀어 소생케 하고 상좌는 스님과의 운명적인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픈 숙명을 적(赤)과 흑(黑)의 대비로 보여주는 춤사위가 전율스럽기까지 하며, 절정에 다달아 검은 허울, 붉은 허울 벗어 던지고 미친듯이 북을 두드리며 흰 적삼이 꿈결처럼 너울거리는 정서가 강렬한 춤이다. 춤의 순서는 <염불장단춤>꿈에서 깨어나서 스님을 살리고 떠나야하는 슬픔으로 흐느끼며 슬픔을 억제하는 춤사위다. <도드리장단춤> 상좌가 스님의 움직임을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이다. 움직이는 스님에게 다가설 수 없는 괴로움이 묻어나온다. <타령장단춤>꿈속에 나타난 도승이 가르친 소생의 춤이다. 타령 춤을 출 때 스님이 좌정하기 시작하며 상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자진타령장단춤> 차츰 깨어나는 스님의 모습을 장삼자락 사이로 엿보며 눈물 닦는 춤사위다. <굿거리장단춤> 스님이 좌정하니 희비가 엇갈리며 떠날 준비를 하고 북을 울린다. 장삼–가사–홍띠–염주-고깔 등을 차례로 북에 걸은 후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울면서 떠난다. 이 춤에서 상좌가 떠나는 의미는 스님과 상좌가 서로 상극이라 소생하는 스님의 모습에게 다가설 수 없는 상좌의 아픔이 춤사위를 통해 나타난다. 이렇게 짜인 승무는 경기도 재인청승무와 강태홍류 승무 등 재인계통의 승무의 공통적인 성향이다. 지성승무의 복식은 스님의 평상복으로 우아한 자태를 나타내기 위해 고급소재에 의존하는 일반 승무와 상반되며, 승모와 소 가사, 염주, 홍 가사 등으로 구성된 소품에서 사찰의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가사에는 원과 학, 토끼를 수놓았는데, 원은 우주를 나타내며 학은 태양, 토끼는 달을 의미하며 지구의 음양조화를 일컫는 것이다. 홍띠는 안태(安胎)의 의미가 내재된 것으로 김덕명의 춤에서만이 볼 수 있다. 북은 죽음을 의미하며 스님을 살린 상좌가 남으로 떠나며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연등나례살풀이춤연등나례 살풀이춤은 고려대전 연등회 때 국태민안을 위한 고려 초부터 행해졌던 축귀의례(逐鬼儀禮)로서 잡귀잡신을 달래고 쫒아 단지 안에 가두어 땅에 묻는 신앙적 성격이 강한 춤이다. 중국에서 들어 온 나례는 고려 정종 6년(1040)에 나례의 기사가 보여 정종 대부터 계동대나례가 시행된 것으로 기술되었다.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잡귀와 사신(邪神)을 내쫒는 뜻으로 행해진 의식이었다. 연등나례살풀이는 푸닥거리를 시작으로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액을 풀고 자진모리를 통해 푸닥거리를 한다. 연등나례살풀이에서 액을 푸는 춤사위에서는 사신을 수건위에 올려서 어르고 달래는 춤사위와 거부하는 사신을 잡아서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단지에 가두어 땅에 묻으러 가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춤 순서는 <푸닥거리춤> 대나무와 살풀이 수건을 활용해서 축귀형식으로 뛰고 때리며 사신의 정신을 잃게 한다. <살풀이춤> 사신을 달랜다. 수건위에 사신을 올려놓고 어르고 달랜다. 고리 푸는 사위에서 사신과 무언의 대화로 달래지만 사신은 더욱 거센 반응을 보인다. 수건 하나에 사신을 달래며 위협하던 무당은 감춰둔 수건을 꺼낸다. <타령춤> 사신을 단지에 가두기 위해 두 개의 수건으로 사신을 유혹한다. 수건위에 앉은 사신을 진정시킨다. <자진모리춤> 두 개의 수건 위에 올려진 사신을 때리고 돌리며 푸닥거리로 정신을 잃게 한 후 수건을 던진다. 이때 무당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기절한 사신이 깨어나기 전 단지에 가두고 땅에 묻는다. 연등나례살풀이춤은 살풀이춤과 무속춤이 조화된 춤으로 춤사위의 전반적인 호흡은 푸닥거리에서 기를 돋우고 살풀이장단에서 깊은 호흡과 함께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무속의식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함이 내재되었다. 무당의 복식과 소품으로 흰 치마저고리에 홍띠를 두르며 얹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다. 한 개의 수건으로 춤을 추다 푸닥거리에서 두 개의 수건을 사용하는 것도 이 춤에서 만이 볼 수 있는 특이함이지만 경기지역 등 무속계 살풀이춤은 대체로 두 개를 사용한다. 대나무가지와 단지가 소품으로 활용된다. 4) 연등바라춤붉은 장삼을 휘날리며 원을 따라 도는 보살들의 양손에 갈라 쥔 동발을 부딪칠 때마다 장엄하면서도 저린 속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바라춤이 탑돌이의 의미를 더해 가면 태평성대를 희망하는 구국불교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김덕명선생이 생전에 들려주는 염불소리와 함께 탑을 돌아간다. 동발이 짝을 찾아 울어댄다. 노구에도 좌중을 휘어잡는 선생의 염불 소리, 목탁 소리에 맞춰 탑돌이로 추는 바라군무는 불교의례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2. 교방계춤 김덕명이 기녀 김농주에게 전승받은 춤은 그녀가 개성권번 제1기생으로 기예를 익히고 30세 되면서 평양권번을 그만두고 양산권번에 정착한 후 유일하게 남긴 작품들이다. 해방 후 사회분위기에서 기녀가 생활 일선에 나설 수 있는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되었고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연구소를 차려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김덕명과 함께 김농주의 춤을 배운 기녀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예술생활을 접으면서 김덕명만이 유일하게 김농주의 춤을 전승하게 되었다. 양산지역에서 권번의 춤은 세가지로 전승되는데, ①이주서-고수길의 계보로 이어지는 교방양반춤과 한량무가 전승되고 있었고, ②고수길이 김설암 스님에게 배운 신라장검무, ③고수길-김농주의 다양한 춤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가 보유한 전통춤은 교방타령무를 기본으로 하여 교방양반춤, 교방진연무, 교방살풀이, 소고춤, 한량무, 장기춤, 잉어춤, 신선무, 부마도의 등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 1) 교방타령(敎坊打令)춤교방타령은 교방의 전문 예기들의 기초 교양과목 증 하나로 양반들과 어울려 여흥으로 추던 춤이다. 춤사위는 남성적이며 부드러운 멋이 조화로우며 절도 있고 흥겨운 속멋이 내재된 품격 있는 춤이다. 타령이란 우리 고유 전통음악의 곡조로서 판소리, 민요, 잡가 등에 많이 쓰이는 순수 전통 고전의 음률이다. 이 타령장단에 맞춰 춤을 추며 춤 선은 전, 후를 오가고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춤은 한량과 기녀가 마주보고 추는 형식으로 한량과 기녀가 서로 추파를 던지고 공감형성 되는 춤사위가 조화롭게 나타난다. 교방타령에서 연결되는 굿거리 춤사위는 1983년 이후 제자들에게 전승되지 않았다. 교방타령은 양반과 기녀가 어울리며 추는 춤으로 무게감이 있다면 굿거리 춤은 기녀가 화답하는 춤이다. 여성의 춤이면서 남성적인 멋이 묻어 나오며 발 디딤새에서 사뿐거리는 멋이 이 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순서는 마주보고 서는 사위→팔 감는 사위→우, 좌 향 감는 사위→감아올리는 사위 →상 하 평행 반원사위→평 솟대사위→흥 돋우며 올리는 사위→상, 하 눌려서 젖히는 사위→손목 돌리며 활개 펴는 사위→양팔 상하 움직이는 사위→상하 팔 감는 사위→흥 올리며 전후 감는 사위→앞뒤 감고 교차하는 사위→평사위→사선 끌어올리는 사위→열림 사위→외발 서고 팔 감는 사위→사선 회전사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춤의 복식은, 남성은 흰 바지저고리, 검정조끼, 상투에 흰 수건을 묶고, 여성은 얹은 머리 또는 명주수건을 두루며, 자주색 호장저고리, 검정치마를 입고 소품으로 귀주머니를 단 자주색 허리끈을 맨다. 2)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교방양반춤은 양반이 관기들과 여흥(餘興)으로 즐겨 추던 춤으로 단아하며 사대부(士大夫) 양반들의 의젓한 귀품과 천하를 눈 아래로 보며 남성의 기백과 근엄함, 청초하고 담백함이 돋보이며 해학(諧謔)이 있는 양반의 기세와 품격(品格)을 느낄 수 있다. 춤사위에서 표출되는 무언의 속삭임은 사실적으로 전달되며 이춤은 교방의 전문예인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장죽과 부채를 활용한 춤사위에는 추파 던지는 사위, 햇볕가리는 사위, 공감형성사위, 위엄사위, 엿보는 사위 등 표현이 다양하다. 춤의 특징은 남성의 모습이 강하며 다양한 춤사위에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팔의 움직임은 자유로우나 절제된 멋이 나타난다. 좁은 보폭과 굴신걸음으로 연결되며 기를 모우고 풀면서 안정된 걸음걸이로 중심을 잡는다. 부채와 장죽을 활용하고 도포자락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나타나는 춤사위는 동적이며 우아한 선학을 연상하게 한다. 도약과 디딤의 폭이 넓고 깊으며 하체의 강한 힘을 필요로 한다. 춤사위 순서는 장죽물고 바라보는 사위→양팔 펴서 감아올리는 사위→추파 던지는 사위→상 하 반원 평행사위→양 팔 들고 걷는 사위→햇볕가리며 엿보는 사위→활개 펴는 사위→으쓱이는 사위→상하 휘젓는 사위→위엄 주는 사위→부채 펴서 엿보는 사위→뒤축 굴림 사위→팔 돌림사위→선별하는 사위→옆걸음 사위로 이어진다. 춤의 복식과 소품은 흰 바지저고리에 대님, 행전, 속 두루마기, 황금색 또는 옥색도포를 입고, 소품으로 상투, 검정 갓, 장죽, 부채 등으로 구성된다. 3) 한량무(閑良舞)한량무에서는 한량과 색시, 승려의 만남은 삼각구도의 갈등으로 희비가 엇갈린다. 이는 알력이 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해학적이며 흥미진진함과 문란한 단면을 도출한 풍자예술로 인식된다. 한량무는 조선후기 관기에 의해 창안되고 기방춤으로 성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한량무에서 비중이 큰 인물은 승려의 출현이다. 승려는 한량과 색시와 함께 삼각관계의 중심에 선 인물이며 탈춤의 노장과장에서도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승려는 등장 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파계하는 과정에서 종교인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잃게 된다. 이 춤에서 승려는 수도승의 참모습이 아닌 파계승(破戒僧)으로서의 모습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배불(排佛)정책 내지 억불(抑佛)정책의 일환에서 승려의 인격을 실추(失墜)시키며. 탈춤이 나 각종 민속춤에서 파계승(破戒僧)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승려들은 환속하여 민간의 재인이나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승광대(僧廣大)가 되어 사당패(祠堂牌)가 성립되었다. 불교에서 형성된 춤의 대부분은 승광대에 의해 창안된 것이며, 19세기 말에는 사찰에서 춤을 금지하였으며 오늘날 전승되는 각종 민속춤이나 탈춤, 광대놀음에서 승려는 파계승으로 등장시키며 삼각관계로 인해 타락하며 품위를 잃게 된다. 한량무의 배역은 한량, 승려, 색시, 별감, 주모, 마당쇠, 상좌 등 7인이 등장하여 각 배역의 춤에서는 욕망-허망함-깨달음-화합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김덕명은 1924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양산 통도사에 입사하면서 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1934년 평양기생 김농주와의 만남으로부터 권번춤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김덕명춤의 세계는 사찰춤과 권번춤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일반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그의 사찰춤은 ‘양산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나례살풀이춤’, ‘신라장검무’, ‘연등바라춤’ 등이 있으며, 그의 권번춤으로는 ‘교방타령’, ‘교방양반춤’, ‘한량무’, ‘교방진연무’ 등 다양한 춤을 보유하고 있다.그리고 김덕명의 춤인생 경로는 출생지인 양산 동면에서 시작되어 장년기의 진주, 노년기의 김해를 거쳐 다시 양산으로 이어진다. 그의 독특한 춤사위는 춤 인생이 시작된 통도사에서 스님에게 남성의 활기찬 춤사위를 익힌 후 평양명기 김농주로부터 부드럽고 우아한 춤사위를 학습하면서 그에게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춤사위가 생성된 것이다. 대처승인 양대응·신경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춤을 지도하며 각종 재를 도맡아서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러나 활성화 되어야 할 사찰예술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재의식을 통제하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년)과 그 이듬해 제정된 본말사법(本末寺法)에 따라 범패가 금지되었고, 해방 후 6.25전란 등 시대 변화와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대처승을 정리함으로서 양대응과 신경수 스님도 통도사를 떠나게 되면서 차츰 사찰예술은 종적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통도사의 춤을 보유한 김덕명은 불교중앙문화원 예술원장의 신분에서 사찰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고 그와 함께하는 행각스님(魚山僧)의 범패와 바라춤, 승무, 학춤, 연등나례살풀이춤 등은 신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은 통상적 사찰의 춤으로 알려진 작법이나 나비춤과 달리 독창적인 춤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며, 전승자 신분이 승려에서 민간예인으로 전이됨으로서 전승단절을 막고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이 변환기인 근대무용사에서 중요한 점이며, 그 전환점에 김덕명이 서있다는 것이 무용사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어야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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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221세기 밀레니엄시대(2000년)를 맞이한 김덕명(1924~2015)옹은 어느덧 고희(古稀)도 훨씬 지난 76세였지만 노년기의 공연활동과 지역민속발굴과 지도에는 장년 못지않게 원숙함과 열정이 넘쳐있었다. 2000년 4월19일 <국립극장 50주년 국립무용단 제79회 정기공연> 양산학춤 특별초청공연으로 영남춤 명인 ‘서울 나들이’에 초청되어 갈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4.12) 예고기사와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4.19)에 네 사람이 펼치는 네 가지 색깔의 춤판에 대한 소개에서 "소리는 호남, 춤은 영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풍류의 정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남춤이 한국춤의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다. 춤이 중앙집중 되었고, 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호남쪽 춤이 주요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4人4色 나흘간의 춤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영남춤이 처음으로 서울의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 이번 공연의 4색이 영남춤판의 주인공은 영남춤의 명인들인 김덕명, 김온경, 이윤석, 하용부이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씨는 양산 사찰학춤을 들고 나온다. 외로이 양산학춤을 지켜온 김씨는 이번 무대에서 이 춤의 원형을 선보였다”라고 알렸다. 이어서 5월 16·17일 호암아트홀무대에 오르게 되자 각종 매스콤에 대서특필하였다. 서울신문(5.2)기사 ‘인간문화재 3人의 전통춤 진수’와 조선일보(5.11) ‘인간문화재 한 무대에’ 기사에는 ‘사상 유례 없을 대원로들의 합동공연이 마련된 무대는 오는 16·17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제18회 명무명인전>, 세 노옹은 첫날 잇따라 무대에 선다’라고 하였고,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인 김덕명옹은 ‘양산사찰학춤’을 춘다.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된 통도사에서 대대로 계승되었다는 이 춤은 지난 87년 일본 NHK의 세계춤 종합평가에서 ‘춤의 황제’라는 극찬을 들었다"라고 알렸다. 2002년 9월 6~7일, 공연기획사 이일공과 호암아트홀이 주최하고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세계민족무용연구소가 후원하는 행사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공연이 있었는데, 각종 매스콤에 예고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덩실 덩실 얼쑤! 8인 男舞 한마당,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남자들이 추는 정통 민속춤이 한자리에 모인다. 남무(男舞)부재 현상 속에 민속무용은 그나마 궁중무용에 비하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다. 특히 문장원·황재기·김덕명은 80대로 민속춤의 산증인이다’ ,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 아비들>에서 멋과 흥으로 대변되던 우리 춤의 진수를 선보인다.’라고 했으며, ‘양산사찰학춤의 김덕명(80)은 일본 기생의 잉어춤 등에 능하고 학춤은 국내 최고라는 평이다. 학이 땅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고 암놈을 희롱하는 행동을 표현한 춤으로 도포와 갓을 쓰고 춘다.’(서울신문, 8. 29) 그밖에도 연합뉴스(8.29), 한국경제(8,29), 현대불교(8.20), 조선일보(9.5) 등에 예고기사로 크게 보도되었다. 춤판에서 남자춤꾼들의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전통무용은 현대무용이나 발레에 비해 '남무부재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춤에 한 평생을 걸어온 8명의 남성춤꾼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오는 9월6일, 7일 이틀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지는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화제의 공연이다. 무대에 오르는 8명의 춤꾼중 셋은 이미 80대의 고령으로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리만 만들어지면 어디에서든 어깨를 들썩이며 일품 춤사위를 뽑아내는 '끼'와 '열정'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옹(80)은 고고한 학의 자태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양산학춤을 선사한다. 훨훨 날다가 내려앉아 두루두루 살피고 먹이를 휙 낚아채는 학의 모습을 선비의 차림으로 유장하게 표현해 낸다.’(한국경제, 8.29) ‘제도권 무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한국 전통춤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농악판, 탈춤판, 사랑방 등 선조들의 삶 주변에서 흥겨운 '놀이'로 추었던 춤의 원형질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아울러 호방한 남성춤을 만나기 어려운 무용계 현실에 비춰볼 때도 분명 이색적인 무대다.(현대불교, 8.29) ‘공연 제목은 설화 속 춤꾼 '처용'에서 따왔다. 출연자들은 공연장이나 학교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전통춤을 지켜온 명인들이다. '무용가'로 불린 적이 없지만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남다른 사람들로, 생활터전의 주변에서 명맥을 이어온 춤의 자유로운 멋과 흥을 느낄 수 있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80)씨가 선보이는 양산사찰학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돼 왔다는 학춤이다. 선비의 평상복인 도포에 갓을 쓴 채로 먹이를 살피다 휙 낚아채는 학을 재현한다. 김씨는 한량을 넘어선 직업 춤꾼으로 양반춤. 지성승무. 한량무. 나례무 등 다양한 춤사위를 보유하고 있다.(연합뉴스, 5.29) ‘무대에 오르는 춤을 보자.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에 비해서는 대접이 형편없는 춤들이다. 그러나 명인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한 세상을 보내고 있다. 당대 최고 즉흥춤이라는 문장원의 동래입춤, 맵시있는 자태가 빛나는 황재기의 고깔 소고춤,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시키는 김덕명의 양산 사찰학춤, 다양한 디딤의 묘미가 살아있는 정인삼의 진쇠춤, 굵고 시원한 마당춤…. 김덕명(78)옹은 어릴 적 부모가 보낸 절에서 도망쳐 나와 농악패를 따라 나섰다가 춤과 인연을 맺었다.’(조선일보, 9. 5) 2003년 11월 22일에는 <팔십인생의 춤> 학산 김덕명 80인생 정통고전춤 발표회(양산)가 양산문예회관에서 있었다.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습득하여 올바르게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한 무대로 그 문화생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순수 정통 학산 김덕명류의 팔십 인생의 춤이 선보이는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도 직접 무대에 선다. 학산 김덕명은 양산시 동면출신으로 양산학춤을 오늘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장본인이며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 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춤사위를 선보여 왔는가 하면 후진양성에도 평생을 몸 바쳐 온 예인이다.(경남일보, 11.21) '지난 94년부터 양산학춤과 연등바라춤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양산시와 경남도에 여러번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며 '내가 죽기 전에 학춤과 연등바라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꼭 보고싶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내가(김옹) 가진 28가지의 춤을 표현하는 제자는 아직 없어 죽기 전에 다 전수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하다'고 걱정한다.‘ (부산일보, 11.28)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한 이번 공연은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마련했다.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 선생도 직접 무대에 올랐다.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한 학산 김덕명 선생은 양산사찰학춤, 연등바라춤, 지성승무 등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현대불교, 12.1) 2005년 제8회 세계무용축제에서 다시 <전무후무(全舞珝舞)> 국보급 춤의 명인 6명이 무대에 올렸을 때에도 김덕명은 빠지지 않고 양산학춤을 추었다. ‘<전무후무(全舞珝舞, 珝는 옥이름 후)>. 춤의 명인 6명이 한 무대에 오른다. 강선영의 태평무, 김덕명의 양산학춤,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문장원의 입춤, 이매방의 승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가장 젊은 장금도(77)부터 최고령 문장원(88)까지, 이들의 평균 연령은 82세다. 김덕명 양산학춤은 너울너울 학을 닮아가는 한량을 그린다.’(조선일보, 9.22) ‘김덕명의 인터뷰 중 "학춤 출 땐 정신부터 학이 돼요. 요즘 춤추는 사람들은 장식에 치중하느라 뿌리를 놓치는 것 같아. 우리끼리야 누가 잘 하나 따져 뭘 해.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서야 80 넘어 90이 다 될 때까지 고생고생 하며 춤출 수 있나. 앞으로 열흘 몸 건사 잘 해서 무대에서 구부러지지만 마시소들!(웃음)”(조선일보, 9.28) ‘걷는 것은 두려우나 춤은 두렵지 않다…. 지난 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 하루를 위해서 일생을 장만해온 것처럼, 몸이 아니라 춤만 남았다….” 어느 이의 말처럼 전무후무한 공연이었다. 젊은날의 그것만 했으련만, 80년 묵은 육신에서 곰삭은 춤 맛은 감히 평할 것이 아니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 내외 관람하면서 "아주 신명이 났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다.’(경향신문, 10.10)(양산신문, 10, 5) 2008년 12월 5일 영남명무전 <무림평전(舞林平定)>이 통영시민회관 대극장에 있었다. 경남도의 전통 춤판을 지켜가는 남성 5인방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덕명, 이윤석, 하용부, 김선옥, 김홍종 선생이 영남명무전 ‘무림평정’(舞林評定)으로 다음달 5일 통영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경남도 전통춤계의 큰 어른들인 다섯 선생은 전국전통예술계에서도 반열에 올라있는 춤꾼들이자 광대들이다. 이들 다섯 춤꾼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지난달 람사르 총회 기념 인간문화재 명무전에서 한 무대 오른 후 이번에 통영을 찾게 됐다. 우리나라 대표 춤꾼이자 큰 선생인 김덕명 선생은 이번 공연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곧음과 부드러움, 세심함과 단아함을 표현하는 호걸 양반춤으로 통영시민들과 만난다.<경남매일, 11월 24일> 호걸양반춤의 김덕명, 채상소고춤의 김선옥, 통영문둥북춤의 김홍종, 덧뵈기춤의 이윤석, 밀양북춤의 하용부. 경남 전통 춤판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는 명인들의 춤사위가 통영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이번 공연제목 ‘무림평정(舞林評定)’에는 다른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연출을 맡은 김홍종 선생은 "춤판을 평정한다는 제 잘난 멋의 과시가 아니라, 한 가지 분야에서 올곧게 정도를 지키며 살다보면 누구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세상의 이치를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김덕명 선생과 같은 선배를 아울러 모시고 싶은 후배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양산신문, 12. 21> 구순의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와 자태는 제자들을 사로잡았다. 학산 선생은 공연이 아닌 발표회라는 것도 강조했다. "공연은 돈 받고 보여주는 거야. 발표회는 연습 결과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춤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양산학춤보존회는 구시대, 장악원 등 전문 예술인에 의해 생성돼, 1930년대에 평양 명기 김농주에 의해 양산권번에 정착됐다. 학산 선생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호걸양반춤의 호탕하고 의기 넘치는 춤도 선보였다. 구운몽을 바탕으로 만든 무언 무용극인 한량무의 해학은 웃음 을 연발하게 했다.<양산신문, 12.4> 2014년 3월20일 진주전통예술회관에서 학산 김덕명선생의 제2회 한량무발표회를 가졌다.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량무’ 공연은 학산 김덕명선생의 가르침으로 우리나라에 하니밖에 없는 일곱배역이 있는 극으로 된 무용이다. 한량, 색시, 상좌, 주모, 승려, 별감, 마당쇠로 총 9마당으로 구성돼 있다.<진주인터넷신문, 2014. 3.20> 이상에 소개한 신문기사 외에도 많은 공연활동과 전수활동이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구십대에 이르기까지 중앙무대와 향토무대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무대를 장식하며 남성다운 춤, 영남덧뵈기춤, 사찰계춤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덕명은 양산 통도사와 양산 권번에서 전승된 독특한 춤사위를 지닌 독보적인 춤꾼이다. 그런데 양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보류된 안타까움 속에 있을 때 진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진주와 연을 맺게 된 것은 마지막 기녀출신들의 노력으로부터였다. 당시 김덕명은 그가 소원하던 학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보류된 후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었을 때 연로한 진주의 보유자들이 김덕명을 찾아 지속적인 부탁을 했고 또한 진주는 전국 제일의 종합예술행사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는 예향이라는 것과 그의 학춤발굴자였던 서국영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진주의 예술이 기녀들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교방이 해체된 후 1913년 기녀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진주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진주권번이 운영되었으나 부실하였다가 1938년‘최치환’에 의해 진주예기권번이 창립되었다. 진주권번의 춤 선생인 최완자(崔完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로 감영에 선발되어 궁중연희에 참가했다. 그녀의 제자 김수악(金壽岳), 강귀례(姜貴禮), 강순금(姜順今)등이 1967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김덕명을 모셔와 1976년부터 예향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79년 5월2일자로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한량무가 지정되면서 보유자 김덕명 외 7명으로 등재되었다. 김덕명의 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 깊고 빛나는 업적은 진주와 양산(梁山)지역에서 무형문화재를 전승시켰으며, 민속놀이 발굴과 전승에도 큰 공로를 김해지역에서 문화예술의 밑거름으로 남긴 가락오광대와 석전놀이, 김해농요 등을 발굴 전수시킨 흔적을 볼 때 그를 다재다능한 예술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1990년 후반, 양산시 덕계리에서 망시곱배기놀이 발굴하여 경남무형문화재 제23호 웅상장원놀이로 지정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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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 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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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싸름타령’ 등 이시은 발표회지난 해 22년 동아주니어국악콩쿠르 중등부 성악부문 금상을 비롯해서 제40회 국악대전 중등부 1위상을 받아 주목을 받은 이시은(국립국악고) 학생이 지난 30일 정효아트홀에서 첫 발표회를 마쳤다. 장단 이민형, 대금 강병하, 피리 이찬우, 해금 문새한별 등과 ‘관상융마’로부터 ‘양산도’ 등 6곡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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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9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유네스코 지정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것은 2003년 11월 7일이다. 2001년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 맞이한 경사였다. 이에 앞서 1964년 다섯 번째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그만큼 판소리가 갖는 국내외적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판소리의 영문명은 'Pansori epic chant'이다. 에픽은 장편서사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챈트는 구송(口誦)이라는 점을 강조한 번역이다. 춘향전 심청전 등 예로부터 전해져 온 장편 이야기를 노래로 꾸민 장르임을 분명하게 해두었다. 또 챈트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비롯해 불교의 독경이나 범패 등 성가 혹은 송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반복적인 곡조로 부르는 노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말한다. 처지, 판국, 형편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마당'이라고도 하고 '장(場)'이라고도 한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비롯된 예술양식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판소리는 어떤 마당에서 옛이야기를 지어 부르는 노래 양식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러 과정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날 독립된 음악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바닷길 따라 걷는 판소리 마실, 고창 후포에서 보성 율포까지 판소리의 음악적 기원을 전라도 무가로 여기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무가 기원설'이다. 하지만 고전소설이라고 하는 거대 서사가 있고, 판소리꾼으로 불리는 광대들의 활동내력이 있다. 문학적 지형과 음악적 재구성을 두루 살펴야 실체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두부 자르듯 이것이다 저것이다 일방적인 규정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의 억양과 말하기 방식, 노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등이 주요하게 채택된 장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판소리 미학까지 따질 필요도 없이 소리 자체가 그렇다. 예컨대 '니 광한루 댕개왔노!'라고 아니리를 하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창의 바닷가에서 나들이를 시작한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후포는 지금도 줄포, 우포, 사포 등 포구 혹은 옛 포구들에 쌓여 줄포만을 형성하는 지류 중 하나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로부터 포구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은 바닷물길이 끊겨버렸지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서남해 물길과 맞닿는 공간이다. 후포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전봉준이 나고 자랐던 고을에 이르고 판소리를 정리하고 가르쳤던 신재효의 고을 고창읍에 이른다. 법성포와 변산반도를 눈앞에 두고 줄포만을 나온 배들은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거쳐 영산강에 닿고 나주에 닿는다. 김소희는 나중에 박석기가 마련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연마하게 되지만 광주가 영산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맥락은 서남해 바닷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편제와 여성 판소리꾼의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흥선 대원군과 신재효의 드라마틱한 삶도 어쩌면 이 물길들을 통해서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재효의 아버지가 수도한양에 건정(말린 물고기)물류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점, 신재효 땅을 밟지 않고는 고창 땅을 지날 수 없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조선후기 판소리 후원자들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풍경들이다. 고창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이른다. 서편제의 확산이 사실상 나주사람 정재근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 인정한다면 이 물길을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편의 판소리는 광주를 비롯해 여러 바닷길들을 돌며 한 지형을 형성했던 것이다. 근대기 진도와 목포에서 형성한 판소리의 맥락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목포의 장월중선과 안향련, 진도의 신치선과 이병기를 기억해둘 일이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 완도, 강진, 장흥, 고흥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대 지류와 형성사를 만나게 된다. 우리 판소리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그 하위분류로 보성소리와 동초소리로 나눈다. 동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동초제는 고흥 거금도 사람 김연수가 재구성한 양식이다.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한다. 동초제를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았던 오정숙은 그녀의 소원대로 일면식도 없는 땅 거금도 스승의 곁에 묻혔다. 서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보성소리는 나주사람 정재근의 법통을 이은 정응민이 지금의 보성에서 재구성한 양식이다. 순창사람 박유전을 서편제의 시조로 삼긴 하지만 나주와 보성을 빼면 그 맥락을 제대로 좇기 어렵다.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면 구례의 송흥록으로부터 남원, 전주의 소릿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길만 통해서도 우리 판소리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을 나들이하며 철썩이는 파도와 탁한 뻘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들을 마주한다. 판소리를 품은 움직이는 그림, 아니 이 풍경은 어쩌면 판소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도의 판소리 마실을 가려면 바닷길을 따라 둘러보기를 권한다. 판소리의 탄생과 형성 판소리의 시작은 통상 숙종 연간으로 본다.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가 1754년(영조 30년)이라는 점에서 그 앞 시기인 1674년에서 1720년 사이(숙종 재위기)에 발생한 장르로 보는 것이다. 이에 앞서 광대들이 지어 부르던 노래나 연극 연행을 토대로 보는 견해에 의하면 조선 전기로 소급해 올라갈 수도 있다. 광대들의 연행 '광대소학지희'를 근거 삼은 해석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판소리로 정착된 것은 19세기 말경으로 본다. 문학적 내용이 풍부해져 형식이 완성되었고 양반층을 포함한 여러 지층의 동호인들을 양산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후원자(패트런)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양반층의 이념과 기호가 반영된 시기를 전기판소리라 하고 중상인 계층의 부상과 후원을 받게 되는 시기를 후기판소리라 한다. 판소리 연행 시기를 굳이 나누자면 형성기, 전기 판소리, 후기 판소리, 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 지정기 등이 되겠다. 판소리를 고려시대로 소급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노래 양식이나 이야기의 편성 혹은 연행 문법들이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명의 고수와 한명의 소리꾼이 짝을 이루는 양식이 언제부터 고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판소리의 고유한 법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고 소리꾼, 고수, 관객을 3요소로 보는 관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장단과 선율에 싣는 소리, 말로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아니리, 몸짓으로 표현하는 발림(너름새라고도 한다) 등이 판소리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정착되었다. 판소리 창법은 아정한 음악이라고 하는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탁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수리성이니 천구성이니 하는 발성 관련 용어들이 그래서 나왔다. 수리성은 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를 말하고 천구성은 타고난 명창의 틔어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판소리를 경상도 방언이나 평양 방언으로 노래하면 그 맛이 살지 않는 이유와 견주어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판소리 문법이나 발성의 토대는 전라도 방언 혹은 전라도 말하기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또랑광대 판소리, 영어로 부르는 판소리, 현대음악들과의 콜라보레이션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예술장르로 발전할지, 판소리의 무한한 확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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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77)<br> 어본현열다완편발굴조사를 통해 더 자세한 것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 창기가마터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곳에서 고려다완이 주문 생산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여기서는 오기다완과 이라보다완 등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구기보리이라보(釘彫伊羅保)라고 하는 도편이다. 이 것을 보면 굽 안 바닥을 나선형으로 굵고 깊게 돌려 파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창기가마터에서 보이는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이 일본에 현존하는 실물 다완과는 굽 안의 회도리 양식이 내가 보기에는 전혀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이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마터 답사 이전이니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한 번은 선배가 창기가마터에서 나온 도편이라며 구기보리이라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보자마자 매혹을 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도대체가 한국 도자기 역사상 굽 안 쪽을 그처럼 굵고 깊게 돌려 파낸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다른 곳에서도 언급을 한 바 있는 것처럼 이것이 마음에 들어 물물교환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창기가마터 답사에 나섰던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은 기존에 알려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갖고 있는 것도 굽과 저부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굽은 모래받침을 하고 있으며 초벌구이편처럼 유약은 입혀져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굽 안 쪽에 굵고 깊게 나선형의 회도리 모양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손가락 같은 것으로 헤집어 돌린 것과 같은 모양은 흡사 팔랑개비라도 돌리고 있는 듯한 자극적인 느낌이다. 그런데 이 나선형의 회도리 모습을 자세히 보면 굽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굽 안에서 시작된 회도리가 굽의 접지면을 가르고 나와 몸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것을 구기보리이라보라고 인정치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다완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조선의 그릇이 일본으로 건너가 다완으로 채택된 것과 아예 주문을 해간 것이 그 것이다. 주문을 해간 다완에는 주로 앞에 어본(御本)이 붙는다. 이런 다완 중에 어본현열다완(御本玄悅茶碗)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다완을 보면 굽에서 시작된 나선형 회도리가 선명하게 굽의 접지면을 가르고 나와 몸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것만을 놓고 보면 창기가마터의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의 굽 형태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완형의 구기보리이라보다완의 몸체에서는 이와 같은 회도리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도 주목된다. 그렇다고 하면 창기가마터에서 보이는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은 잘못된 명칭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맹점은 있다. 창기가마터에서 보이는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은 알려진 것 모두가 굽과 저부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몸체에 회도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굽을 가르고 나온 회도리로 보아 나는 창기가마터에서 출토되는 구기보리이라보라고 하는 도편들은 어본현열다완편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확실한 것이야 발굴조사를 통해 더 자세한 것이 밝혀져야 하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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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정기공연 '고양상여 회다지소리' 알고 보기21일 열다섯번째 '고양 상여·회다지소리' 정기공연이 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에서 오후 5시 열린다. Q. '고양 상여·회다지소리'는 어떤 민속문화인가? A. '고양 상여·회다지소리'(보존회장 김우규)는 2017년 6월 16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된 김녕김씨의 24세손 차하수 정삼품외 중추원 의관과 선공감 감역을 역임하셨던 김성권 선조의 장례의식을 재현한 민속문화이다. 고양 상여·회다지소리는 고양시 송포면 대화리 김녕김씨(金寧金氏) 집성촌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장례의식요(葬禮儀式謠)를 말한다. Q. 어느 시대에서 시작되었나, 기원은? A. 김녕김씨의 김유봉(1725년생)이 부모님의 장례 시 행했던 상례문화가 그 기원으로, 토목 및 궁궐의 보수 공사를 담당했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의 감역을 맡았던 김성권(1867년생)이 그 맥을 복원하였다. Q. 일반 상여와 대비하면 실제 당시 규모는 어떠한가? A. 당시 상여의 규모가 일반 상여의 3배에 달했으며, 만장기가 무려 250여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문행렬은 5리(2km)에 달하였으며, 당시 조문객에게 대접한 양식이 쌀 열두 가마를 하고도 모자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상례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우규 회장은 밥 지을 때가 되면 하인들을 데리고 선산인 도당산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하인들을 시켜서 곡식 몇 되박을 갖다 주며 선행을 쌓은 덕에 선조께서 돌아가시자 마을 사람들과 아웃마을 사람들까지 참여했다고 전한다. Q. 마을에서 어떻게 보존되어 오고 있나? A. 현재 보존회장 김우규를 주축으로 고양상여회다지소리보존회를 통해 이 종목의 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Q. 국내외에서 주목되는 전승활동은? A. 2010년에는 독일 비스바덴 카니발에 초청되어 공연을 진행했으며, 2012년 이후 일본 위안부 피해자 진혼제를 매년 치루고 있다. Q. 타 지역과 비교할 때 어느 토리로 불려지나? A. 경기제 토리가 주를 이룬다. Q. 고양 상여·회다지의 소리에는 어떤 소리가 불려지나? A. 이런 고양 상여·회다지의 소리는 옛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에서 초상과 장지에서 불렸던 것으로, 고양 송포 대화리에서 초상이 나면 상제들이 장지를 향하여 떠나려는 상여 속의 망자에게 절을 올리는데 그 동안에 상여꾼들은 염불소리와 하직소리를 부른다. 상여를 메고 집을 나서면 오호소리를 부르고 걸음을 빨리 해야 할 때나 언덕길에 다르면 잦은 상여소리로 재촉을 하고, 노제시와 장지에 거의 다 이르면 넘차소리와 염불소리를 부르며 노잣돈을 띁어낸다. 장지에 다다르면 긴염불 소리를 부르고 상주와 세 번 맞조와 절을 한 후에 상여를 내려놓는다. 이후 광중이 조성되면 하관을 하고 이어 달구질을 하면서 회다지소리를 부르는데 먼저 군말과 함께 긴소리를 부르고 이어서 달구소리, 양산도, 방아타령, 놀놀이, 떳다소리, 상사소리, 훨훨이로 끝을 맺는다. Q. 고양 상여·회다지소리 연희의 특징은? A. 고양 상여·회다지소리의 특징은 2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첫째 고양시 상례의 특징은 사자밥의 차림이다. 절구통을 얺어 놓고 그 위에 채반이나 도래방석, 키를 올려놓고 메와 나물을 올려 놓는것은 경기북부 지역이 유사하나 하지만 고양지역의 경우 메와 나물이 세 그릇이 아니라 일곱그릇을 놓는다. 그리고 사자 밥은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타성 받이가 와서 지어 주는 것이 다르다. 참고로 사자밥은 상여에 싣고가다 다리를 건널 때 버린다. 둘째로, 고양지역은 흙과 회를 섞을때 달구대로 섞으며, 달구질을 할때 경기북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광중에 들어가 밟는데 비하여 이곳은 광 밖에서 밟는것이 특징이다.이것은 조선시대 왕릉 조영의 영향으로써, 광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나라님을 차마 밟을 수가 없기 때문에 광 밖에서 밟는 것이라 한다. 고양시 일대는 왕릉이 많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릉작업을 할때 밟지 않는 풍속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Q. 민속학적 민요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의의는? A. 고양지역은 논김 소리를 회방아 다질때도 부르기 때문에 소리종류가 다양하다. 상여소리와 회방아 소리는 애절함보다는 웅장함이 있고 어둡기 보다는 밝은, 경토리제의 소리이다. 호상에 있어 호적, 장고, 제금, 북을 앞 세우는 것과, 상여놀리기의 오호넘차소리, 염불소리, 회방아 긴소리, 달고소리, 회방아타령, 홀오리소리, 상사도야, 새쫒는소리 등 순수한 지역소리가 온전히 보존되어서 큰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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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의 춤 그리고 춤론에 담긴 생명철학Ⅰ. 들어가며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1)이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개전되었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민족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이다. 본 글은 학술적 이론을 내 세우거나 특정 논지를 쟁점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2022년 5월 세 번에 걸쳐 개최된 춤꾼 이애주 추모행사2)에 참여하며, 상기한 그의 전통춤 계승 가치, 그가 시대적으로 창안한 창작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춤의 생명철학을 사회적 시각과 사상적 관점에서 살핀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면에는 오늘날 한계에 도달한 한국춤의 기능적, 형태적, 예술미학적 접근을 뛰어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되고 응용되는 우리 춤의 본질 및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술 현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의 목표가 삶의 생명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이애주 전통춤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을 예증 삼아 그의 춤 생애 그리고 그의 전통춤 세계관을 살펴 볼 것이다. 이애주 1주기 추모행사는 2022년 5월 10일 (화) 오전 11시 그가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 1주기 추모 나눔굿>으로 개막되었다. 다음 날 5월 11일 (수) 오후 8시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던 경기아트센터의 소극장에서 '우리 춤의 혼과 맥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추모공연이 있었고, 5월 27일 (목) 오후 2시부터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 한성준 바탕 한영숙 류 이애주 맥: 승무의 미학'(2022), '고구려 춤 연구'(2022),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2022)의 출판기념회 및 '이애주 춤: 학예굿'이 개최되었다. 추모행사에는 이애주와 함께 민족춤 문화 회복을 위해 사지 동거했던 동지 및 춤계 선후배, 동료 그리고 제자가 함께하였다. 춤 '땅끝', '나눔굿 밥', '도라지꽃' 등 세 개 작품에서 드러난 기획 의도, 춤판 현장, 이면에 담긴 이애주 춤의 생명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세 개의 작품에는 겉 치장을 요하는 미학적 춤이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 공동체 정신을 살리는 춤, 민중의 아픔을 품어 내는 치유의 춤 사상과 사회적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춤과 창작춤을 넘나들며 표명하고자 했던 이애주 춤의 본성과 의미를 탐색하고 그 속에 담긴 생명철학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시작하며 1. 이애주의 전통춤 및 계승 여기서는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가 전수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그리고 이애주 춤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계승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중,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만을 다루는 까닭은 첫째, 한성준-한영숙-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기본적인 춤이라는 점, 둘째, 경기제 대풍류 및 경기 무속음악을 춤 장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살풀이춤을 통해 보건대, 단아하고 우아한 독창적 춤 새로 추어진다는 점(이은주, 1998), 넷째, 전승 계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태평춤」은 이애주 자신이 늘 주장한 바와 같이 태평무의 원 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연에서도 원 춤에는 원 장단을 써야 한다며 경기도당굿 악사를 대동하여 「태평춤」 공연에 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애주 전통춤은 춤계에 익히 알려진 충남 홍성출신 한성준(남, 1874-1941) 그리고 그의 손녀 한영숙(여, 1920-1990)으로 이어져 온 족보 있는 전승계보를 갖고 있다. 한성준은 일찍이 전통연희 무대화와 예술화에 주목하여 이를 성취적으로 이룩해 낸 한국 근대 연희사의 거목이다. 그의 민족춤 예술화에는 신앙, 놀이, 의례로써 사유된 민중사상과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어서 민족주의적 사고와 미래를 향한 예술 창달의 미래관을 일깨웠다. 그동안 버림받고 묻혀 있던 옛 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춤 예술 발전을 도모하였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춤 문화운동가라고도 한다. 한성준의 춤 무대화 업적 뒷면에는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바탕삼아 이루어진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서려 있다. 한편, 한성준의 「승무」 및 여타 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용인 출신의 명인 김인호(남, 1858-1932)와 연결된다(이병옥, 2022, pp. 1-21). 그 까닭은 명고수 한성준이 광무대(光武臺, 1898에서 1930년까지 서울에 존속했던 전통연희전문극장)에서 김인호 춤을 전문적으로 반주했고, 김인호가 권번에 나가 춤을 가르칠 때도 동참하여 장단을 잡아 주었다(이병옥, 2018). 명인으로 이름 석 자를 떨친 김인호는 전남 담양 출신 이날치(남, 1820-1892)의 제자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성준은 김인호에게서 많은 춤을 익혔고, 1930년대에 이르러 김인호가 사망한 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김인호가 남긴 춤을 정립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이병옥, 2022, 15). 이와는 또 달리, 한성준의 「승무」 등 전통춤은 또한 전북 정읍 세습무 출신의 전계문으로부터 전수되기도 하였다. 전북지역 단골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전계문(남, 1865-?)은 명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해적, 대금 등의 기악과 성악 그리고 춤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김익두, 2022, 48; 김익두, 전종구, 최동현, 최상화, 1992, 245-247). 이처럼 한성준 춤은 윗대로 올라가면 그 전승 계보가 김인호 그리고 전계문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음악에 능통한 고수였다는 것이며 그 출신 지역을 호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한 계보를 잇는 이애주는 1947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고,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의를 놀라게 하였다. 필자: 양종승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하여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National Treasures (민속과 문화정책: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 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민속기록학회 회장,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연구 관심사는 샤머니즘, 무형유산, 전통춤 등이며, 주요 연구로 "한국의 굿" (공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God Pictures in Korean Contexts (한국 샤머니즘 神圖) (공저), '우리춤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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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한복 캐릭터 일러스트 출간한복은 더 이상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의복이 아니다. 황금시간 출판사가 생활한복 캐릭터 일러스트북 ‘vnvnii의 생활한복 캐릭터 일러스트’를 출간했다. 우리 한복을 활용해 패션 피플들이 ‘힙’한 생활한복을 입기 시작했다. 여기에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케이팝 세계화의 주역들이 한복 무대 의상을 입고, 오징어게임의 배우 정호연이 댕기와 첩지를 코디한 드레스 차림을 해 화제를 모으는 등 세계인들의 시야에 한복이 노출되고 또 환호를 받는 일도 빈번해지고 있다.일러스트레이터 작가(vnvnii)는 이런 ‘새로운 한복’ 디자인 아이디어와 빠져들 만큼 예쁜 그림체로 마니아층을 늘려나가고 있는 SNS의 핫한 작가다. 인스타그램과 여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복 일러스트 덕후’를 양산하는 데 일조해온 그의 그림은 예스러우면서도 모던하고, ‘힙’하면서 전통의 멋이 진한 것이 특징이다.생활한복 캐릭터 일러스트 작가는 독창적이고 세련된 한복 디자인 중 60여 점의 일러스트 작품을 싣고 그림에 응용한 한복 및 전통 요소의 비밀을 풀어준다. 또한 ‘생활한복 캐릭터 따라 그리기’ 챕터에서는 그림 도구 준비부터 모델 그려 보기, 그리기 팁을 다루고 저자의 작품 그리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 누구나 겁먹지 않고 생활한복 캐릭터 일러스트에 도전해볼 수 있도록 했다.이 밖에 별책 부록으로 ‘vnvnii의 생활한복 캐릭터 컬러링북’도 마련돼 있다. 컬러링북에는 본책의 일러스트 중 33가지의 밑그림을 넣어 독자들이 직접 채색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한복 디자이너 ‘단하’는 이 책을 추천하며 "무겁지 않게 전통을 믹스매치하고 또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안하고 있으며, 단순 일러스트뿐만이 아닌 유래한 전통 복식의 모티브 또한 소개하고 있어 전통에 관심 있는 많은 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 가벼운 듯 결코 가볍지 않은 유쾌한 전통 일러스트 책”이라고 밝혔다.온라인 및 가까운 서점에서 만날 수 있으며, 초판 한정으로 ‘단청 드레스’ 일러스트 브로마이드도 증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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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양산전국국악경연대회(12/11)■대회 목적 : 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하여 유능한 예술인들을 발굴하여 국악의 보존과 계승발전에 기여하고 문화예술의 질을 높이는데 있음. ■일시: 2022년 12월 11일(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장소: 양산문화원 대공연장 ■주최: (사)한국전통민요협회 양산시지부 ■주관: 한국국악교육원 양산분원 ■후원: 경상남도, 양산시, 양산시의회, 양산문화원, (주)국악신문, 한국국악교육원, (사)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양산지회, (사)양산학춤보존회 ■경연종목 민요부문: 민요(경기, 서도, 남도, 동부, 제주민요), 잡가(경기, 서도, 남도잡가 포함) 중 자유곡 1곡 선택 무용부문: 전통무용, 창작무용 중 선택 타악부문; 사물놀이, 풍물, 난타, 모듬북, 고고장구 중 선택 ■대 회 요 강 구 분 상 세 내 용 대회구분 신인부(초,중,고 학생 포함), 일반부(대학생 포함) 참가대상 2022년 12월 기준으로 대한민국 주민등록 등재되어 있는 국민 또는 단체 경연시간 5분 이내 (단, 심사위원 합의로 조정할 수 있음) 경연순서 민요, 무용, 타악 순으로 하되 신인부, 일반부 순으로 경연(예선 없이 단심 경연) 09:00 신청서 접수확인, 번호표 수령, 경연순서 확인 09:30 개막식(참가자 전원 참석) 10:00 ~ 경연(신인부, 일반부 순) 12:00 ~ 13:00 점심시간 17:00 ~ 시상식 접수기간 2022년 11월 11일(금) ~ 12월 9일(금) 18:00까지(우편물 도착분) 신청서류 참가신청서, 신분증 사본 또는 주민등록등본 접수처 및 참가비 (사)한국전통민요협회 양산시지부 -접수방법: 직접방문, 등기우편, 팩스, 이메일 -주소: (우편번호 50554)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로49, 2층 202호 -이메일주소: pvc119@hanmail.net -전화: 010-7166-0457 -모바일 팩스: 0504-095-0457, Fax.: 051-514-8686 -참가비: 3만원 (고수비 2만원 별도) -입금계좌: 농협 352-0230-4013-63 (예금주: 김옥이) 심사방법 3~5인의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본 대회 심사규정에 의거 심사함. *동점자 발생 시 개인은 연장자순, 단체는 인원이 많은 순으로 함. 심사항목 및 기준 민요: 공력 30점 / 박자 30점 / 음정,감정 20점 / 의상 10점 / 자세 10점 무용: 안무 20점 / 기교 30점 / 예술성 40점 / 무대 매너 10점 타악: 기교 30점 / 박자 30점 / 예술성 20점 / 의상 10점 / 자세 10점 ■ 시 상 내 역 구 분 부 문 훈 격 수상인원 상 금 종합대상 종합대상 경상남도 도지사상 1명 300,000원 일반부 최우수상 양산시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200,000원 우수상 국회의원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100,000원 준우수상 양산시의회의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장려상 양산문화원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특별상 한국국악교육원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신인부 최우수상 양산시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200,000원 우수상 양산시의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100,000원 준우수상 국회의원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장려상 양산문화원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특별상 한국국악교육원장상 3명(민요, 무용, 타악 각 부문 1명) *제세공과금 및 세금은 참가자가 부담합니다.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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