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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패랭이 쓰고 큰북 메고~얼쑤, 그리운 김법국 단장님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지난 3월 초 한 여성 국악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움과 애석함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우리 김뻑국 선생님 가신지 2주기가 이번달 18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네요. 국악신문이 기념식 같은 것 못 하나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아마도 2022년 3월 21일 자 국악신문 부고기사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세상을 멈추게 하는 코로나 중이어서 유일하게 국악신문만 부고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종로 3가 국악로 로터리 ‘김법국예술단’ 사무실은 최고 원로 송해 선생으로부터 10대 소리를 배우려는 아이까지 사랑방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이 가신지 2년을 맞는 시기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2주기가 되는 3월 18일 몇몇 지인들과 이 소식을 나눴다. 모두 공감을 표했다. 그래서 금년에 국악신문이 앞장서서 기념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지인들의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든 기념 시상제도든 결성하자고 합의하였다. 4월 중순경 ‘아리랑연합회’가 나섰고,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나섰다. 이렇게 하여 국악신문을 포함하여 3자가 만났다. 그 결과 첫 회는 조직과 기금 마련 등이 어려우니 국악신문 주최의 기념상을 제정하여 첫 회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년에 기념사업과 제2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상명은 ’김법국국악상‘으로, 수상은 5월 중 공고하고 심사하여 5월 중 시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난 5월 1~4일까지 공고를 하고, 응모자 4인을 대상으로 12일 심사를 하고, 26일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기념상 일정을 잡고 나니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선생과 필자는 20여 년 전 CD 10장짜리 음반 ‘3代 정선아리랑’(신나라 레코드)을 내고, 이를 기념하여 ‘SBS토요무대 김순녀 정선아리랑’이란 발표회 겸 특집방송을 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음반의 주인공 김순녀 선생이 ‘김법국예술단’ 주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스승 이창배 선생의 탑시(塔詩) 액자를 중앙으로 하고, 역대 국악 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속에서 국악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그 특유의 제스처를 써가며 배꼽잡게 하는 약장사 시절의 에피소드며, 가슴을 찡한 배고픈 시절 웃음 품앗이 ‘딴따라’ 시절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정확한 연대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선생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늘 만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오랜 교유 관계의 지인이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이사의 얘기 대로라면 대략 이렇다. 50년대 이전, 60, 70년대 인천 생활, 80년대 이후 김법국예술단 운영, 2000년대 말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생의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송해 선생의 증언으로는 1962년 KBS 성우로 잠시 일했는데, 효과음으로 뻐꾸기(암수 각각 우는 소리와 과부 뻐국이가 우는 소리)소리를 잘 내서 별명으로 부른 것이 ‘김뻑국’이라고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는 ‘김법국(金法國)’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은 일본이고 1937년생이다. 9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여 ‘왕따’를 당해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씨를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용인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말기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국악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여기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씨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장구와 피리를 어깨 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구루무’(크림) 등을 팔며 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 틈틈이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우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무대도 섰다. 이렇게 유년의 50년 대는 험란한 시기지만 국악을 배우고, 국악인들을 만나 활동을 하게 된 시기이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인천 내동과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 주소를 두고 주로 인천지역의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소리와 만담을 소시민들에게 전했다. 동행은 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재담가 김영운과 배뱅이굿의 이은관, 탈춤의 양소운, 소리는 이창배 문하의 김옥심, 이은주, 최창남 등이었다. 선생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쇼를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부치러 인천 시내는 물론 주안 일대까지 다녔다. 그리고 표를 팔고 무대청소를 하고 출연까지 했다. 이때부터 패랭이 쓰고 몸집만 한 큰북을 앞으로 매고 만담과 소리와 코로 대금을 부는 등 장기를 발휘했다. 이 것이 인천시대이다. 1980~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김뻑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김 선생은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요정으로 나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는데,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 선생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청춘가 한 대목을 불러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이 부장은 "바로 이거야, 이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김법국 선생을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 원 이하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돈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바로 이 돈으로 ‘김뻑국예술단’을 차렸다. 그리고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이름있는 국악인들을 출연시킬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방부대와 노인단체 위문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김뻑국예술단’의 활동은 90년 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 이때 노인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공연을 열면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부 활동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표창장(1998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4년), 국방부 장관상(1996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패(1998년) 등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공연보다는 후배들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데 힘썼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전수소’를 거의 무료로 운영하여 아리랑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기획사 업무도 하며 노년을 보냈다. 이 시기 특별히 주목되는 활동은 반재식 원장을 통해 ‘국악로’를 제정하게 한 일과 최창남 선생을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는데 역할을 해주셨고, 1996년 만담보존회를 꾸려 김용운 선생을 회장으로 모셔 전승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기 두 번이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완쾌후 건강을 되찾고 20여 년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22년 3월 코로나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마지막 제자로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순녀 여사가 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2주기를 보내며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아, 김법국 선생님. 내일 오후 쯤 종로3가 지나서 '국악의 거리'에 나가면, 그 텁텁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에 패랭이 쓴 모습으로 마주칠 것 같다. 국악로 거리를 지나면 생각이 나는 분이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하시는 분이다. 한 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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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조망한다…언론학회 학술대회600여명의 언론학 종사자가 언론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조망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경주에서 열린다. 한국언론학회는 오는 9~11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와 코모도호텔에서 '언론학 100년, 성찰과 전망의 경주제전(慶州祭典)'을 주제로 2024년 봄철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언론학회 창립 65주년을 맞이해 열리는 이번 대회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정기학술대회다.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이 모여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모색한다. 28대 회장인 김학수 서강대 명예교수, 41대 회장 심재철 고려대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고, 이상길(연세대), 이준웅(서울대), 나은영(서강대), 이은주(서울대) 교수가 각각 주제 발표자로 나선다. 박종민 한국언론학회장의 진행으로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 한국광고홍보학회 등 12개 유관 학회장이 참여하는 '언론학의 정체성과 학회공동체의 역할' 세션도 눈길을 끈다. 언론학 분야 세계 최고 권위 학술지인 저널 오브 커뮤니케이션(Journal of Communication) 편집장(이철주 서울대), 저널&매스 커뮤니케이션 쿼털리(Journalism & Mass Communication Quarterly) 부편집장(김세일·사우스캐롤라이나대)이 참여하는 국제학술지 투고 팁(Tip) 세션도 주목할 만하다. 언론학을 이끌어갈 '미래의 대들보' 대학원생들도 대회에 참가한다. 이들이 참여하는 전국 대학원생 학술대회는 대회 하루 전 사전대회(Pre-conference) 형식으로 진행된다. 박종민 한국언론학회장은 "그간의 성취와 한계,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아우르는 논의가 필요한 때"라며 학술대회를 통해 나올 "활발과 진단과 모색이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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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절창 정선아리랑!’# ‘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공연이 지난 4월 26일 삼성동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렸다. 20대에서 60대까지의 제자들 20명과 5명의 반주자와 함께 경기잡가, 경기민요, 강원도민요, 아리랑모음, 이렇게 4개 종목 13곡을 선보였다. ‘2024 국가무형문화유산 전승지원 기획공연인 만큼 경기12잡가 중 선유가·제비가·영변가 3곡은 일종의 보유자가 계승해야 하는 의무 곡인 셈이고, 나머지 경기민요를 비롯한 강원도 민요와 아리랑 모음곡은 제자들의 전승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선곡인 듯하다. 이 중에 이호연 보유자와 전승자들이 함께 전해준 소리는 12잡가 중의 '선유가'와 '영변가', 그리고 경기민요 '노랫가락'이다. 그리고 보유자가 독창으로 부른 것은 12잡가의 하나인 제비가와 강원도민요 정선아리랑·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 이렇게 4곡이었다. 이 중에 관객의 반응이나 보유자의 목성대로 구사하여 자신도 만족스로운 표정을 보여준 것은 단연 '정선아리랑'이었다. 이 정선아리랑은 보유자의 10여 종에 이르는 음반 대부분에 수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공연에서도 빼놓지 않는 곡이기도 하다. # 정선아리랑은 대체로 경기민요 소리꾼들이 선호하는 곡이다.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도 명창부가 선택하는 대표적 소리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잘 부르는 소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시인 신경림 선생의 다음과 같은 감상평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내게는 노래이기 이전에 내 정서의 깊은 샘”이라고 했다. 곧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는 소리로서, 이 정서를 표현해 내지 못하면 ’정선아리랑‘이 아니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유튜브 매체를 통해 한 서양음악 전공가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독일과 유럽에서 30여 년 서양 고전음악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듣고 한참을 운 적이 있다.”라고 한 것이 그렇다. ‘김옥심의 정선아리랑’, 이 소리는 한국전쟁 말기 당시는 강원도였던 이천 지역에서 있었던 ‘육군예대’(성경린 단장) 공연에 갔다가 ‘정선 아라리’를 듣은 이창배 선생과 김옥심 선생이 돌아와 다시 짜 불러 알려진 소리이다. 이런 탄생 배경은 생전 이창배 선생의 후원자였던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 ‘종로 국악로 지킴이 김뻑국 선생’의 증언이 있고, 명고(名鼓) 장덕화 선생이 김옥심 선생과 친했던 명창 이은주 선생에게서 직접 들었다며 필자에게 전한 말로는 거의 일치한다. 이런 연유에서 음반을 통해 확인되는 정선아리랑은 네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전주(前奏)와 간주(間奏)의 유무, 대표사설을 "강원도 금강산~”으로 한 것과 "네 칠자나 내 팔자나~”로 한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다. ‘김옥심제 정선아리랑’이라고도 하고 ‘경기제(서울제) 정선아리랑’이라고도 명칭을 하는 이유인 것이다. 절창(絶唱), 이 말은 ‘다시 없는 명창’ 또는 ‘비할 데 없는 뛰어난 노래’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빼어난 노래이기도 하고, 빼어난 명창을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선아리랑은 절창이다”나 "김옥심은 절창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흔히 김옥심을 ‘하늘이 내린 소리’(La Voix Celeste) 또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명창’이라고 한다. 특히 그 목을 말하면서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같은 표현은 거의 ‘정선아리랑’을 말할 때 동반되는 수식어이다. 그래서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절창이라는데 이의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단견으로는 동시대 명창들 간의 경기민요 절창은 이렇게 본다. 묵계월은 ‘한오백년’(CD 경기민요의 향연), 안비취는 ‘이별가’, 이은주는 ‘긴아리랑’, 김옥심은 ‘정선아리랑’(오아시스 레코드 1476 경기민요 2집)이라고 본다. 이 네 분의 경기민요 4곡은 가히 다른 소리꾼들이 그 정서를 그만큼 표현해 내기는 쉽지 않을듯싶다.(그 원인의 하나로는 이들 소리가 성창(盛唱)된 시기로 보아 한국전쟁의 민족적 수난이란 정서가 반영된 것을 들기도 한다.) # ‘2024 이호연의 경기소리 숨’, 이호연도 정선아리랑도 절창이다. 이호연의 활동 이력이나 수상 경력은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다. 그러나 그가 해낸 공연과 음반 취입과 방송 출연 레파토리 이력을 꼽아보면 알 수 있다. 매우 실험적이었고, 파격적이기도 했다. 공연으로는 1999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통일의 소리 옥피리’ 초연을 들 수 있다. 이 공연 메세지는 야심찬 ‘밀레니엄 프로젝트-’한국의 소리가 바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공 종목으로 전체 국악판을 견인하겠다는 뱃심은 경기 소리꾼으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음반 발매로는 2015년 발매한 광복 70년 주년 기념 발매 ‘통일아리랑’이 있다. 리딩통월드 오케스트라와 어린이 합창단을 동원한 음반이다. 이는 ‘분단 70년 남북 이산가족 예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공연으로 전환해 4년간이나 지역 순회공연을 한 원천이었다. 국악인으로서 민족문제를 자신의 소리 주제로 반영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창작 작품을 취입, 발매하는 기획력이나 경제적 여유만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나름의 시대정신과 소명의식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어 2008년 취입, 발매에 이은 ‘이호연 唱 경기12잡가’ 음반과 악보집을 2021년에 내놓았다. 경기민요 전승 능력과 전수 활동의 최종 결정체를 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경기 12잡가 전승자로서의 의무감과 그간의 전수활동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있다. "우리 세대의 역할이 무형문화재 1세대 스승님들의 예능 원형을 보존, 계승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육 과정에서 갖춘 지식을 기반으로 앞 세대에서 보존, 계승한 원형을 연구해 경기소리의 유래와 유형을 밝혀 학문으로서 정립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음반과 악보집의 신뢰를 담보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화려한 이력의 종결판을 확보했다. 지난해 국가무형유산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사실을 말한다. "국가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종목의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의 탁월”함을 인정받은 결과이다. 1968년 이창배, 정득만 선생 사사와 1970년 안비취 선생 경기민요 전수, 1984년 제1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민요부문 장원으로 기량을 인정받고 활동. 다소 늦은 67세에 보유자 인정을 받았지만, 그래서 더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민속극장 ‘풍류’에서의 ‘이호연 경기소리 숨’ 공연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해설이 다소 밋밋했고, 음향이 너무 커서 앞자리에서 듣기에 불편한 정도 외에는 그렇다. 그러나 이 무대를 더욱 빛내준 것은 단연 보유자의 독창 ‘정선아리랑’이다. 이 소리는 1979년 한국음반의 ‘한국고전민요 제3집’(안비취 이은주 묵계월 3인 녹음)까지의 전주 형태 버젼이다. 1995년부터 연주되는 목탁소리와 합창의 인트로 버젼이 아니다. 이 버젼은 처음부터 감정을 고조시켜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은데, 원래의 버젼은 후렴을 먼저 부르고 "강원도 금강산~”으로 시작하여 온전히 정서를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버젼이다. 보유자의 이번 정선아리랑은 원래의 버젼 그대로이다. 보유자가 부른 정선아리랑은 두 번째의 독창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중반쯤의 무대로 관객들의 호응은 준비된 상태였다. 여유와 관록이 배인 자태였다. 첫 음도 그렇고 전체적 요성(搖聲)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고음이 보유자의 특징으로 매우 청아했다. 사설의 해석도 담담하여 오히려 전달이 쉬웠다. 보유자에게 따르는 목성 평가, '청아 담백'이 충분히 전달된 정선아리랑 무대였다. 절창, 이호연, 그리고 정선아리랑! 그 여음이 오래갈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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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0) <br> 박정욱 명인의 '황해도 철물이굿' 춤사위철물이굿 ‘철물이굿’은 황해도 지역에서 정월이나 시월에 행하던 ‘재수굿’으로 집안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조상님께 감사 드리며 신께 제의를 올려 복을 비는 집안 굿으로, 1년 또는 3년에 한번, 2-3일에 걸쳐 행해졌다. ‘철물이 굿’은 총 스물 네거리 또는 열둘거리로 논다. 신을 청하는 소리 청배 만수받이, 신을 즐겁게 놀리는 춤, 늦은 거상, 거상타령. 복을 기원하는 공수, 아흔 아홉 방울의 상쇠소리, 해학적인 면이 많은 말명 거리와 불교 의식이 강한 칠성거리, 잡귀를 몰아내는 장수거리. 돈을 벌어들이는 대감놀이. 조상님들을 대접하는 조상거리 등, 볼거리가 풍성한 ‘재수굿’이다. 이은관의 직계제자인 박정욱 명창(서도소리보존회 이사장)이 2021년 3월28일 서도소리의 본향인 평안남도 ‘평안도 배뱅이굿’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평안도배뱅이굿은 평안도 고유의 음악과 무가의 성격이 잘 드러나며 무형문화재로서의 예술성과 기술성, 대표성 및 사회문화적 가치 등이 높아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신규 종목으로 지정된다. 박정욱 보유자에 대해서는 전승 능력과 전승 환경, 전수 활동 기여도 등이 뛰어나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평안도배뱅이굿 보유자로 인정된다. 배뱅이굿은 이미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인 ‘서도소리’ 종목에 수심가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박정욱의 ‘철물이굿’은 황해도 출신 만신 이선비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무(武)의식과 놀이이며, 이선비 선생의 신 어머니이신 유씨 만신의 문서이고 ‘소놀음굿’은 장보배만신에게서 내려온 문서이다. '황해도 철물이굿'은 서해안 풍어제와 대비되는 굿으로 무형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한민족 문화유산이다. 박정욱 약력 평안남도무형문화재 제5호 평안도배뱅이굿 보유자 (사)한국서도소리연구보존회 이사장 제57회 서도소리 정기발표회 개최 황해도철물이굿보존회 회장 2000년 국가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김정연/이은관 사사) 2014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2호 재담소리 이수자(백영춘/이은주/안비취 사사) 1991년 제8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대통령상) 수상 명창 이은관선생기념관 '낭월국악당' 관장 한국전통문화관 가례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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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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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 ‘현대음악으로 그린 이중섭의 사랑, 그리움 그리고 희망’현대창작음악단체 뮤직 노마드가 주최하고 현대문화기획, 앙상블 루미나시아, 그루밍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주관하는 2023년 제16회 뮤직노마드 현대창작음악 연주회 ‘현대음악으로 그린 이중섭의 사랑, 그리움 그리고 희망’이 9월 26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공연된다. 뮤직노마드(MusicNomad, the Society of Contemporary Music in Gwangju)는 2009년 광주 호남권에서 현대 음악을 창작하고 가르치는 작곡가들의 일련의 활동을 지칭하면서 발족한 작곡 동인단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동시대 음악의 작곡과 연주를 통해 광주 호남권의 클래식 음악 발전과 우리나라 창작 음악 활성화에 이바지하며 나아가 한국 창작 음악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현대 음악계에 활력소가 될 다양한 형태의 공연 및 교육 행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제16회 뮤직노마드 정기연주회는 화가 이중섭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의 격동기를 지낸 화가 이중섭은 세태에의 절망, 빈곤의 고난과 가족에의 절절한 순애보를 그림에 담아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시켰다. 이중섭이 말한 ‘예술-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겨낸 기록’은 얼마 전까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 세계 어딘가에선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해체되는 우리 시대에도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는 예술을 꿈꾸라고 외치고 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일곱 개의 무대 영상으로 재탄생한 이중섭 작품들의 윤곽에 선율을 입히고 굵게 채색된 투박한 형상에 화성을 얹어낼 예정이다.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 작곡가 임재경(숙명여대 교수), 박은경(서울대 등 강사), 이은주(전남대 강사)와 중견 작곡가 정현수(전남대 교수), 오세일(인제대 교수), 신나라(경희대 등 강사), 정주희(제주대 교수)의 새롭게 창작된 작품을 전남대 나윤주 교수,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악장 이종만과 수석 정은지, 주민혁, 엄광용, 그리고 이후성, 이준, 송애리와 목포시립교향악단 수석 권새롬, 피아니스트 정민정, 지휘 이현민으로 구성된 앙상블 루미나시아가 초연한다. 정현수 뮤직노마드 회장은 "결실의 계절 한가위를 앞두고 알차고 정성껏 마련한 이 음악회가 평안한 일상으로 회복과 지치고 힘든 모두를 위로하는 예술적 경험이기를 소망한다”며 "우리 시대 모든 세대가 공감하고 누리는 현대 음악의 아카이브, 나아가 미래로 나아가는 컨템포러리 클래식의 이정표가 되는데 이바지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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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창립 초대회장에 이종선씨 취임한국서예술협회(회장 이종선)가 지난 3월 31일 창랍총회를 거쳐 7월10일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활동에 들어간다. 7월 28일 법원 등기를 마친 한국서예술협회는 우리 전통문화얘술인 서예의 진흥발전을 위해 첫째,서예창작활동을 위한 전시사업 둘째, 서예인 양성을 위한 공모전 사업, 셋째,서예교육을 위한 학술사업, 넷째. 서예저변확대를 위한 대중화 사업 등을 추진한다. 임원과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이종선, 부회장-이은설, 상임이사-임종현, 학술이사-김재봉, 이사-정혜영, 김현선, 이정철 감사-강승일, 선점숙 사무국장-김문희 회원- 강미정 강승일 강정이 고옥희 고유석 권선종 김경연 김문희 김상화 김석권 김순임 김순환 김윤숙 김율의 김은석 김은정 김재봉 김재용 김진용 김차연 나웅인 박광양 박연하 박영섭 박정완 박종식 박중근 박지애 박희철 배영희 백진빈 변관섭 서정선 선점숙 손창수 송순행 신석균 신선경 신영상 안미자 안태옥 오현옥 유영민 유창숙 윤문중 이강준 이세영 이순규 이순이 이양숙 이영선 이영자 이옥재 이은설 이은주 이재찬 이종선 이종세 이태길 이현배 이현주 이혜수 이화숙 임종현 장인오 장주희 전애선 정구삼 정미숙 정상진 정안심 정혜영 조미향 조순제 지달승 진용찬 진준호 채수철 채호순 최낙순 최세섭 최영무 최영애 최창은 하태모 한경희 한명희 한재근 한지연 한현자 허선례 허원선 허희정 현해용 황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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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피카, 인사동에서 ‘동물 없는 동물원’ 전시회 개최작가 성장 플랫폼 레피카(Leffica, 대표 김태원)가 9월 14일부터 10월 8일까지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코트(KOTE) 3층에서 전시회 ‘동물 없는 동물원’을 개최한다고 8일 밝혔다. 레피카가 주최/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후원하는 ‘동물 없는 동물원’ 전시회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하고 투썬캠퍼스가 운영하는 ‘2023 예술분야 초기창업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으며, 동물 착취의 상징적인 공간인 동물원을 예술로 재해석하고, 회화와 조각, 설치 미술,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을 통해 각양각색의 동물들을 소개하는 이색 전시회다. 해당 전시는 코트(KOTE) 내 총 7곳의 전시장에서 각각의 테마에 따라 진행되며, 1전시장에서는 서정연 작가, 라미 작가, 아이리 작가, 이선 작가 등 4명의 작가가 참여한 가운데 ‘최후의 초상(The elephant in the room)’이 전시된다. 2전시장과 3전시장에서는 ‘공원 산책(Memorial Park)’과 ‘발전 혹은 결말(Evolution or extinction)’을 주제로 권신애 작가와 이상섭 작사, 강신영 작가, 이재혁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며 4전시장에서는 ‘곧 다가올 바다(Oncoming sea)’라는 테마 아래 아미씨 작가와 이민정 작가의 작품이 공개된다. 5전시장에서는 ‘저무는 해(The end of the epic)’ 주제의 이유나 작가, 이한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며 ‘비교할 수 없을 만큼(Priceless things)’과 ‘미래의 동물(A future being)’ 주제 전시가 열리는 6, 7전시장에서는 김다민 작가와 백은하 작가, 손혜정 작가, 이은주 작가, 박준상 작가가 참여할 예정이다. 레피카는 이번 ‘동물 없는 동물원’ 전시회는 ‘모든 존재의 온전함을 위해, 우리는 살아있는 동물을 전시하지 않습니다’를 메인 테마로 삼고 있다며, 총 17인 작가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동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재창조된 동물들을 통해 어릴 적 동물원에서 느꼈던 호기심과 환상은 물론 그 이상의 경험과 생명체에 대한 존중, 그리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레피카는 경험이 필요한 신진 작가들을 위해 단체 전시와 네트워킹 기회, 온라인 교육 콘텐츠 등을 제공함으로써 작가 성장을 돕는 작가 성장 플랫폼이다. 보다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창작과 전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제공하고 있으며, 2023년 하반기부터 개성 있는 대중 전시 기획사로 탈바꿈해 수익성 있는 전시 IP를 확보하는 IP 비즈니스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편 ‘동물 없는 동물원’ 전시회의 티켓은 1인당 1만5000원(성인/청소년 공통)으로, 9월 13일까지 6000원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얼리버드 할인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 수익금의 일부는 동물원행동카라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육곰 생츄어리 프로젝트’에 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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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에 김혜란·이호연 명창 인정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김혜란(72) 명창과 이호연(67) 명창을 인정한다고 29일 고시했다. 경기민요 종목에서 새로운 보유자가 인정된 건 1997년 이춘희 보유자 이후 약 26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29일 관보를 통해 "김혜란, 이호연은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종목의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 등이 탁월하여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인정한다"고 밝혔다.'경기민요'는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주로 불리던 전문 예능인의 노래로 1975년 7월 12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경기민요 세부 기·예능인 '경기12잡가'는 사설이 긴 노래라고 해 '긴잡가', 혹은 앉아 부른다고 해 '좌창'이라고도 부른다. 대개 서경적 혹은 서정적인 이야기로 조용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내용이 많다. 경기12잡가로는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선유가, 출인가, 십장가, 방물가, 달거리 등이 있다. 김혜란 명창는 1980년 이수자를 거쳐 1991년 전승교육사로, 이호연 명창은 1986년 이수자를 거쳐 1996년 전승교육사로 활동해 왔다. 이번 보유자 인정을 앞두고 묵계월·이은주 유파 후보 전승 교육자 등 1만여명은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최종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경기민요 유파와 전승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1975년 경기민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안비취(본명 안복식)·묵계월(본명 이경옥)·이은주(본명 이윤란) 명창이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021~2023년 인정조사에서 최종 후보에 오른 4명 가운데 안비취 유파의 김혜란·이호연씨만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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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호 경기민요’, 75년에 이어 총 3인 복수지정문화재청은 지난 5월 12일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2인에 대해 한 달간 예고 기간을 끝내고, 22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최종 심의에서 김혜란(金惠蘭)과 이호연(李鎬蓮)을 확정, 관보(官報)에 올리고 발표할 예정이다. 16년 전 이춘희 지정 이후, 2인을 더 지정하여 총 3인을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 보유자로 복수 지정하게 된다. 그동안 1차 서면 조사 및 비디오 심사, 2차 대상자 전승환경 방문 조사, 3차 실연 및 교수 능력과 면접 등을 거쳤다. 그 결과 문화재청은 전승 능력, 전승 환경, 전수 활동 기여도를 중심으로 채점하여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지난달 보유자 인정 예고 이후, 계보 통합(?) 반대와 인정 예고 결의 문화재위원회 원천 무효 주장을 문화재청이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는 2012년 이번 보유자가 된 2인이 제기하였던 ‘보유자 추가인정 거부처분 취소’ 소송의 재판이 될 듯하다. 당시 대법원은 "보유자 지정은 문화재청 재량…소송대상 아니다"(연합뉴스)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양상은 유사하나 그 결과가 실질적 이익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소송으로 확산될 리가 있겠느냐는 의견이 있어 주목이 된다. 김혜란 명창은 1991년, 이호연 명창은 1996년 각각 전승교육사(보유자 후보)로 인정을 받아 해당 종목의 전승 활동을 해 왔다. 이 두 사람이 "전승 능력과 전승활동 기여도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 성적순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3차 심사 당시 4인이 대상에 올랐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었다. 예비 심사 성적순이라는 것과 경기민요 전승교육사 4인을 대상으로 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안비취계의 김혜란 이호연, 묵계월계 김영임, 이은주계 김장순 중 보유자 사망으로 결위 계파인 묵계월과 이은주계의 지정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예고 결과는 두 계파는 제외되었다. 문화재청의 기존 해명으로 본다면, 계파별 지정이 아닌 전승교육사 중 점수 순으로 75년 당시의 3인을 고려하여, 2인을 충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종목 향유층이 전국적이며, 가장 많은 이수자를 배출한 제57호 '경기민요' 전승자들의 축하와 박수가 오갈 상황인데 그렇지 못하다. 이 우울한 상황은 경기민요계 원로들의 무관심과 주무 관청인 문화재청의 미온적 조치가 낳은 결과이다. 굳이 따진다면 2012년 송사 이후,시행령 등을 정비하여 대상자들에게 이해를 시키지 못한 후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유독 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 문제에서 우월적 지위를 고수하고 있는 문화재청의 변화를 요구한다. 확정 발표시 2인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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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자 지정 논란, “근본적 해결 요구한다”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예고 기간에 ‘이의 신청서’가 문화재청에 접수되었다. 발신자는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교육사 김영임과 김장순이다. 5월 12일 공고로부터 인정 예고 기간이 한달이다. 이 신청 내용이 22일 열리는 문화재위원회에 상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의 신청 내용은 "제척 사유가 있는 무형문화재위원들의 인정 예고 결의에 참여한 것은 잘못으로, 절차적 정의에 반하여 당연 무효”라는 주장이다. 문화재위원회 제척(除斥) 위원은 경기민요와 서도소리 유파의 통합 또는 부정 근거를 마련한 2009년 한국국악학회 '경기민요 편'과 '서도소리 편' 집필자들이다.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개인종목 전승활성화 학술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서 "경기민요는 유파별 전승계보가 뚜렷하지 않아 전승과 관련 없는 종목”이라고 하였다. 유파 통합 또는 부정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본 것이다. 이번 이의 신청을 문화재청이 어떻게 처리할지가 주목된다. 우선 유파 ‘통합 또는 부정’에 대한 문제로, 과연 문화재청이 용역 보고서에 의지하여 있던 유파를 철회를 한 것인가? 이에 대해 국악계에 그 여부를 이해시켜야 하는 숙제가 있다. 이 문제는 2012년 문화재위원회가 "경기민요에 유파가 존재하지 않아 보유자 추가지정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쟁송으로 이어진 바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는 세 유파 중 두 유파를 배제하고, 한 유파에만 2인을 지정 예고하였다는 주장이 나온 터에 이를 결의 한 문화재위원회 자체를 문제 삼은 것으로 다소 복잡하다. 48년 전 안비취(유산가·제비가·소춘향가·십장가), 묵계월(적벽가·선유가·출인가·방물가), 이은주(집장가·형장가·평양가·달거리) 보유자 지정 당시, "12잡가를 4곡씩 나누어 지정하여 유파를 인식한 것이다”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유파별이 아니라 단지 복수 지정일 뿐이며, 12곡 전체를 각기 전승하게 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대치한다. "말 붙임새, 장단, 출연음, 조성이 세 선생님 별로 다르다. 유파의 존재 근거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도 "유파는 전승계보가 다르고, 가사가 다르고, 노래별 장단이 달라야 하는데 12잡가에는 음악적 요소에 명백한 차이가 없다”로 갈린다. 또한 "12잡가의 시김새는 ‘농음(弄音)’으로, 현악기의 유파 구분 기준인 농현(弄絃)과 같다”에 대해 "소리하는 이들의 개성적 표현일 뿐이다”로 대치한다. 연장선상에서 "35년 넘게 저마다의 색깔로 전승한 계보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에 대해 "베토벤 작품을 저마다의 개성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음악적인 개성의 차이이다”라고 극단적으로 대치한다. 이러한 유파에 대한 대치는 2009년 용역보고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에 대해서도 "충분한 자료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아니라 집필자가 이미 발표한 논문의 자기 견해 복제일 뿐이다”라는 강한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원로 자문위원단의 지적 사항 없다는 검토를 거친 내용이다”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논란의 배후로 지목된 보고서의 집필자가 2인이 문화재위원으로 참여하여 결의를 한 5월 12일의 지정 예고는 "절차에 있어서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무효”라는 강력한 주장이다. 이것이 어떻게 처리되느냐가 문제될 수밖에 없다. 받아 들여진다면 유파를 인정하고 재심사를 하여 보유자 지정 예고를 다시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의 신청은 그것대로 두고, 2인을 보유자로 결정하여 관보에 게재하는 절차를 밟을 것이다. 관계법상 이의 신청 처리에 따른 결정 시한은 6개월이다. 이 기간에 유파 존재 여부와 이에 논리를 제공한 이들을 배척한 상태에서 재논의가 있을지, 아니면 기존의 기조대로 "유파는 없다. 이를 수용하고 심사에 응한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일”로 바로 결정을 내릴지 주목이 된다. 1975년부터 쌓여 온 ‘제57호 경기민요'에 대한 논란. 그 간의 우여곡절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번의 유파 인정 여부와 문화재위원 제척 이의신청 문제는 '판소리', '대금' 등 분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숙고가 필요한 이유다. 문화재청의 정합적인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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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명창으로 불리는 김옥심전설적인 비운의 명창으로 불리는 김옥심(1925~1988)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주수봉으로부터 잡가·시조·가사를 배웠으며, 조선권번 선배인 이진홍에게서 잡잡가를, 김영윤에게서 양금을 배웠다. 옥구슬 굴러가는 타고난 목소리로 민요계를 평정하며 ‘제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성악부 1위, ‘제1회 세종대왕 국악상’ 경서도창 1위 등을 차지했으며, 1968년 안비취·묵계월·이은주와 함께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후보로 올랐으나, 최종 선정 과정에서 돌연 탈락했다. 이후 후진 양성에 힘써 남혜숙·유명순을 비롯, 최영숙(현 서울시 인간문화재)·이금미·한진자·김광숙(현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등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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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 가인, 이은주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고 이은주 명창(2020년 11월 2일, 향년 98세 졸)은 안비취 묵계월 명창과 함께 ‘경기민요 여성 3인방’으로 불렸다. 14세에 원경태 명창으로부터 시조, 가사, 잡가를 배웠다. 1939년 인천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평안도 민요 ‘수심가’로 1등을 했다. 6·25전쟁 때 민요 ‘태평가’를 복원해 불러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5년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됐다. 유성기 음반 80여 장, LP 300여 장을 발표했다. 77세에 경기 12잡가 전곡을 녹음했고 팔순이 넘어서도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뒤를 김금숙, 김장순 제자 등이 전승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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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부터 국립정동극장 '세실풍류' 40인 명무전,국립정동극장 세실극장에서 전통춤의 향연이 손혜선 기획과 연출로 펼쳐진다. 음악감독은 유인상이 맡는다. 첫 주차인 7일과 9일에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8인의 완판 공연을 볼 수 있는 특별무대가 마련된다. 예맥(藝脈)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이번 공연은 예능 보유자들이 춤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특별한 무대로 이목을 집중시킨다. 7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 정명숙은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매방류 살풀이춤으로 정중동의 미학을 정석으로 풀어낸다. 부산시무형문화재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김진홍은 호방하고 선 굵은 춤사위로 깊은 정중동 가락을 선사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의 채상묵 보유자, 도살풀이춤의 양길순 보유자, 태평무의 양성옥 보유자 등이 출연해 한국 전통춤의 위용을 보여준다. 9일에는 동래학춤의 이성훈, 살풀이춤의 이은주, 호난산조춤의 이길주, 동래한량춤의 김진홍 명인들의 무대가 펼쳐진다. 이어지는 주에는 전통춤의 맥을 이어 온 명무 32인의 무대가 차례로 올려진다. 14일에는 후학 양성에 힘쓴 명무들의 포진이 눈에 띈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채향순의 이매방류 승무를 시작으로 김경란의 교방굿거리춤, 김은희의 살풀이춤, 이경화의 진도북춤, 임현선의 태평무, 한혜경의 십이체장고춤이 무대에 오른다. 16일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무용과 교수 박은영의 궁중 무용 춘앵전부터 서울시무용단 정혜진 단장의 고풍, 황순임의 승무, 김효분의 살풀이춤, 서영님의 장고춤이 펼쳐진다. 21일에는 차지언의 화관무, 차명희의 구음검무, 김혜란의 교방굿거리춤, 경임순의 교방장고춤, 원미자의 산조춤이, 23일에는 이승주의 춘앵전, 이언경의 살풀이춤, 손미정의 교방장고춤, 김연선의 도살풀이춤, 황규선의 태평무, 윤혜정의 진쇠춤이 이어진다. 6월 마지막 주는 전통춤을 대표하는 남무(男舞)들의 무대로 꾸며진다. 28일 정용진의 승무, 김진원의 한량무, 서한우의 버꾸춤, 박종필의 살풀이춤, 김정학의 진쇠춤이 선사된다. 30일에는 박성호의 태평무, 최태선의 한량무, 김충한의 훈령무, 백경우의 살풀이춤, 최병재의 승무가 관객들과 만난다. 유인상 음악감독의 라이브 연주로 신명을 더할 것이다. 서울특별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유형의 역사 공간 세실극장에서, 인고의 시간이 짙게 배어있는 무형의 유산, 전통춤을 선보이는 <세실풍류>는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담아내는 2023년 우리춤 프로젝트가 될 예정이다. 또한 이번 무대는 아카이빙북을 제작하여 오늘의 전통 춤사위를 기록하는 작업이 함께 진행된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부터 젊은 춤꾼까지 세대를 이어온 전통춤을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시대가 흘러도 지켜나가야 할 우리 춤의 진가(眞假)와 고유의 아름다움을 세계 속의 K-전통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란다”라며 기획 의도를 전했다. 긴 세월, 단단하게 쌓아온 전통춤의 정신을 기리는 <세실풍류>는 6월 7일부터 공연된다. 국립정동극장 홈페이지 및 인터파크를 통해 예매 가능하다. (티켓 가격 전석 2만원. 예매 및 문의: 국립정동극장 02-75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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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 “유파별 보유자 인정해야 합니다!”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자 대표단 공동대표/김영임ㆍ김장순(경기민요 전승교육사) 저희는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자들입니다. 근 한 세기동안 대한민국의 대를 이어 전승되던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의 맥이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되어 민요를 사랑하는 많은 전승자들과 국민들의 많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한숨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은 1975년 경기민요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소리속이 다르다는 점을 중시해 계보를 인정하였으며, 초대 경기민요 보유자로 묵계월(이경옥), 이은주(이윤란), 안비취(안복식) 세 분이 12잡가 4곡씩을 나누어 각각 보유자로 인정하였습니다.(묵계월: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방물가), (이은주: 집장가 평양가 형장가 달거리), (안비취: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문화재청은 2021~2023년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조사를 실시하여 최종 후보 김혜란(안비취 유파) 이호연(안비취 유파) 김장순(이은주 유파) 김영임(묵계월 유파)의 4명중 김장순(이은주 유파)와 김영임(묵계월 유파)을 제외시키고 2023년 5월 1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김혜란(안비취 유파)과 이호연(안비취 유파), 안비취 유파만 인정 예고하였습니다. 인정예고 기간에 아무런 문제나 이의 제기 없이 경과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심의가 의결된다면 경기민요는 이춘희(안비취 유파), 김혜란(안비취 유파), 이호연(안비취 유파) 3명의 국가문화재 보유자가 안비취 유파로 천하통일 되고 묵계월 유파와 이은주 유파는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 사안은 수천여 명의 경기민요 전승자와 수만 여명의 일반 전승자의 운명이 달리기도 한 사안입니다. 경기민요 전승자들은 몇 십년만에 찾아온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가 보유자 탄생을 자축하고 기뻐해야 할 터인데 잘못된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정책과 무형문화재 위원회의 결정에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합니다. 두 후보가 인정 예고 된 안비취 유파 또한 자축은 고사하고 함께 동고동락해 온 경기민요 식구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에 안절부절 하고, 탈락한 묵계월/이은주 유파의 전승교육사들은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죄책감으로 침통하고, 전승교육을 받던 이수자, 전수생들은 졸지에 가문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고 대성통곡하는 소리로 초상집이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께서 2023년 5월 27일 부처님 오신날 조계사 축사에서 '정부도 전통 문화유산 보존 전승에 최선을 다할 것' 이라고 발언하셨습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유, 무형 문화재의 중요성을 깊이 인지하고 있다는 증명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귀중한 무형문화재인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중 묵계월류, 이은주류의 두 전형이 보존, 전승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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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월 명창에 방일영국악상경기명창 묵계월(墨桂月·83) 선생이 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윤주영)이 주관하는 제11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1921년 서울 출생인 묵 명창은 1975년 안비취, 이은주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이 분야 일인자로 활약해왔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4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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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종목 보유자 후보 4인 2차 심사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던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1975년 지정) 종목의 예능보유자 후보 심사가 오늘 6일 진행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후보자는 4인으로 10시에 시작하여 6시 반경에 종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심사 대상 후보 4인은 김영임(70), 김장순(67), 이호연(67), 김혜란(74)으로, 2021년 1차 심사 대상 24명 중 4인으로 압축된 것이다. 문화재청이 이번 심사 대상자를 위의 4인으로 압축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한 국악계 원로는 "1차 심사의 득점 순이기 보다는 모두 전승교육사들로 보유자 후보 자격을 갖춘 이들만을 선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실제 김영임은 묵계월 선생, 김혜란과 이호연은 안비취 선생, 김장순은 이은주 선생 계보로 전승교육사 자격을 취득한 이들이다. 그런데 심사에 대한 취재를 종합하면 심사과정이 매우 특별했다고 한다. 강남 대치동 ‘한국문화의집(KOUS)'에서 진행되었는데, 후보자는 1층 무대, 심사위원들은 2층에 자리를 하여 조명으로 분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심사 후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전 과정에 대해 모두 녹화를 했다고 한다. 심사 종목은 '경기 12잡가'와 '경기민요'가 대상이었는데, 실연과 지도 시연으로 이원화 했다고 한다. 잡가 4종은 완창을 해야 했고, 8종은 일부 대목을 나누어서 시행되었다. 이어서 15분 정도 제자들을 지도하는 시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질과 전승 종목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교육 지도력 테스트도 문답형식으로 치룬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심사로 관심은 누가 보유자가 되는냐만큼 몇 명이 보유자가 되느냐이다. 기존대로 계보에 따라 1인의 보유자를 두는 전례에 따른다면 2인으로 확정되지만, 현재는 이 방식이 폐지된 상태라서 더욱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한편 심사위원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보안에 철저를 기한 것으로 보인다. 보유자 확정 예고도 아직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2022년 1차 영상심사 후 1년 만에 2차 심사가 있게 된 것으로 보아서는 이 역시 후반기에나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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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경서남잡가보존회, 안성 동리권번 제례 및 추모음악회안성경서남잡가보존회가 매년 안성 동리권번 제례 및 추모음악회를 열어오고 있다. 지난 12일 안성문화원 앞에 있는 안성객사에서 작은 추모제가 열렸다. 안성경서남잡가보존회 조명숙 회장은 1945년 안성에서 태어난 안성토박이 출신으로 안성권번 손음전 여사의 고명딸이고 '안성경서남잡가'(안성향토무형문화재 제4호) 예능보유자이다. 안성의 대표적인 권번은 '동리권번'과 '장기리권번'을 들 수 있다. 장기리 권번은 변매화·이봉선, 동리권번은 손음전·송계화·고비연·강연화 등이 안성기예조합원에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조명숙 회장은 "안성의 가무악 기생들은 궁중 행사에 동원되어 한양까지 높은 기예를 펼쳤고, 30-40년대 경성방송국에 출연도 했다. 당시 안성권번들은 안성바우덕이 남사당만큼 유명세를 탔다. 우리 어머니(손음전)도 가무악에 능한 명기로 안성은 물론 평택에서 공주.천안.이천 용인 여주까지 이름을 떨쳤다. 당시 경남철도 안성선 기차를 타고 다니셨다. 나도 손을 잡고 따라가서 무대에 서곤 했다." 며 "특히 경기민요 경서도잡가, 시조창에 능하셔서 인근 지역에서 어머니에게 배우러 안성까지 왔다"라고 밝혔다. 이어 '당시 우리 어머니에게 너무나 밀려오는 수강생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평택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안성 봉남동에 간판도 없는 소리학원을 열었다"고 전했다. 안성경서남잡가보존회에 의하면 "안성경서남잡가 계보는 1대 송계화·고비연·강연화, 2대 손음전, 3대 손음전의 고명딸 조명숙 순으로 이어져 왔고 현재는 4대 서명주가 사사받고 있다"고 전한다. 이날 공주 마곡사에서 온 범진스님이 특별 공연으로 범패소리를 헌정했다. 절에서 주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이며, 가곡·판소리와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서양의 성가곡과 대비된다. 범패소리로 유명한 범진스님은 "삼일운동 당시 맨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저항하다가 아름없이 산화하신 권번출신 기생들이 한 둘이 아니다. 독립운동자금도 보내고,..... 우리가 이제는 인식을 새로이 해야한다. 당시 기생은 전문예인 집단으로 시서화에도 능한 예술가이었다. 특히 권번출신 가수들은 지금으로 치면 트롯트 퀸이다. K-한류의 뿌리이다. 항일운동사에서 당시 기생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의 기억이다. 내년에도 함께할 예정이다."이라고 전했다. 조명숙 회장은 학교 공부보다는 소리가 좋아서 어머니한테 소리 배우는 데 열중했다. 학교에서도 어린 소리꾼으로 유명했다. 조회장은 "17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서 명창의 길을 걸어라고 하셔서 현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 예능보유자인 최창남선생한테 3년 정도 배웠다. 그런데 경기민요는 귀에 익은 소리가 아니어서 망서리는데, 안비취 언니가 너는 어머니 소리를 이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권유를 받고 안성으로 내려왔다. 그 길로 어머니의 소리와 춤, 가무악을 배웠다." 이어 "당시 국보급 이창배,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명인 등 선배들의 국악활동을 가까이서 지켜 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조회장은 3년간 서울생활을 접고 내려와서 안성 고향땅에서 어머니에 이어 안성경서남잡가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매년 이 행사에 참가하는 안성시 전 이영찬 시의원은 "앞으로 우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안성시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지원을 해야한다. 지역 문화가 살아야지방 소멸을 막는다."고 전했다. 내년 제례식에서는 다른 지역과 연계해서 안성권번의 존재와 안성경서남잡가를 널리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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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춤협회, 제1회 전통춤협회 춤 대경연 개최전통의 계승과 전승을 위해 활발한 연구와 보존 활동을 하는 전통춤 관련 보존회가 모여서 2012년 결성된 '한국전통춤협회'는 이론과 시연을 통해 세미나와 연수회를 통해 전통춤 발전과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다. 기미양 객원기자가 양종승 수석 부이사장을 만나서 협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Q. 한국전통춤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한국전통춤창립추진위원회가 2012년 발족되고 위원장으로 채상묵 교수를 모셨다. 한민족예술의 정수, '한국전통춤'을 널리 알리고자 각 장르별 전통춤보존회로 구성되어 창립된 국내 유일한 협회이다. Q. 한국전통춤협회 창립 취지는? A. 전통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취지를 펼치고자 전국 전통춤을 전승하고 있는 보존단체가 협력 관계로 뭉쳤다 Q. 한국전통춤창립추진위원회 설립목적은? A. 2012년 초부터 민족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를 위해 회합을 갖고 범 전통춤 관련자 모임을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결실을 맺고자 우리는 한국전통춤협회 창립과 더불어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더욱 분발하고자 한다. Q. 초대 위원에는 어떤 분이 동참하셨는지요? A. 채상묵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김정녀(예능), 한혜경(예능), 양종승(연구), 김은희(예능), 진유림(예능)으로 출범했다. Q. 올해 총회에서 제4대 총회에서 임원진은 어떻게 개편되었나요? A. 지난 1월 2023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제4대 임원진을 확정 지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한국전통춤협회 제4대 임원진 *가나다순 ▶이사장 : 한혜경 ▶상임고문 : 이길주, 채상묵 ▶고문 : 김매자, 김백봉, 김숙자, 김온경, 김정녀, 김진홍, 은방초, 이명자, 정명숙, 정승희, 조흥동, 최선 ▶상임위원 : 강신구, 고선아, 김광숙, 김근희, 김연자, 안춘자, 이춘자, 홍진희 ▶자문위원 : 김태원, 박재희, 이병옥, 임학선 ▶수석부이사장 : 양종승 ▶차석부이사장 : 김은희, 임현선 ▶부이사장 : 김경란, 서한우, 윤미라, 이미숙, 정성숙, 진유림, 채향순 ▶감사, 상임이사, 이사, 공연기획위원장, 학술연구위원장, 홍보진흥위원장, ▶김나영 안동시 지부장 등, 총 17개 지부장 Q. 제4대 총회에서 올해 전승활동 계획은? A. 춤 유산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세상을 바꾸어 가는 금세기에 전통춤 전승자, 연구자,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가 창립한 지 어언 만 10년을 맞이하였다. 협회는 더불어 예인들의 노력과 공력으로 이어져 온 아름다운 한국 전통춤 큰 잔치 '2023년 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를 3월 17-18일 이틀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Q. 최근 제5회 한국전통춤협회 학술세미나에서 발표주제는? A. 지난해 11월 25일 한국전통춤협회(이사장: 이길주)는 '제5회 학술세미나'를 서울 종로구 전통공연창작마루 광무대에서 개최했다. 주제는 '한국 근대 전통춤 4대 명무'–한영숙, 강선영, 김숙자, 이매방의 전통춤 3대 명작 '승무', '살풀이춤 및 도살풀이춤', '태평무' 춤사위다. 각 종목의 시연 및 발표 이후엔 열띤 종합토론이 이루어졌다. 사회는 한국전통춤협회 학술연구위원회 양종승 위원장, 목진호 부위원장이 번갈아 맡았다. Q. 세미나는 학술발표와 시연으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전통무용이 선보였나요? A. 학술 의미를 살펴보는 기조 발표 이후, 종목 보유자나 이수자가 서로 다른 갈래로 전승된 4대 명인의 춤을 시연했다. 한영숙류 춤사위는 ‘태평무’ 보유자 박재희, ‘승무’ 이수자 차수정, 김연정, ‘살풀이춤’ 보유자 이은주씨가 선보였다. 강선영류 ‘태평무’는 보유자 양성옥씨, 김숙자류 ‘도살풀이춤’은 ‘경기시나위춤’을 이수한 이정희씨가 발표하고, 이매방류 춤사위는 ‘승무’ 보유자 채상묵씨, ‘살풀이춤’ 보유자 정명숙씨가 시연했다. Q. 한국전통춤협회 주요 활동이나 정기적 행사는 어떤 것이 있나요? A. 한국전통춤협회는 전통춤 보급 및 계승을 목적으로 매년 '전국 전통춤 연수회’ 참가자 신청을 받아서 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대상은 한국무용 전공자(초·중·고, 대학생, 일반부), 종목은 12월3~4일 ‘송범류 산조’와 17~18일 ‘강선영류 즉흥무’다. 강사로는 각각 손병우, 임현선 부이사장이 나선다. 참가 접수는 접수 방법은 이메일로 연수회 참여 의사를 밝힌 뒤 수강료를 입금하면 된다. 현장 접수도 가능하다. 준비물은 연습복과 버선 또는 슈즈다. 즉흥무는 추가로 수건을 지참해야 한다. Q. 한국전통춤협회가 국외 공연이나 동포사회 대상 공연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A. 한국전통춤협회는 해외 지부를 거점으로 미국 및 유럽과도 연결하여 한국의 전통춤 보급과 전수 활동을 펼치려는 계획하고 있다. 미국의 텍사스 댈러스와 유럽 프랑스 파리 지부가 개최하는 '한국 전통춤 보물전' 공연을 기획하여 추진하는 도중에 코로나 범유행으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올해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에 임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도 재정적 후원을 해줘서 멸실공이 국가 차원의 공연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협회는 앞으로도 지구촌 곳곳에 한국 전통춤 유산을 널리 알리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 한다. Q. 올해부터 전국을 대상으로 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하신다고 하는데 소개해 주세요. A. 참가 부분은 학생부, 일반부, 명인부, 신인부로 나누었고. 김숙자 명인상, 이매방 명인상, 한영숙 명인상을 제정했다. 장르는 전통춤에서 타악춤, 창작무용까지 확장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심사규정을 엄수하고 진행은 투명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제1회 전통춤대경연대회인만큼 모든 회원들이 관심과 기대가 크다. 협회는 많은 참가가 이루어져서 전통춤의 문화유산 가치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전국경연대회에서 전통춤을 종목으로 한 대회는 타 종목보다 희박한 편이다. 2023년 총회에서 결성된 '한국전통춤협회 전통춤 대경연추진위원회'의 활동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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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계 10대 뉴스 1차 선정, 29題2022년 국악계의 이슈, 성과, 변화상을 볼 수 있는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 뉴스’ 1차 26제가 선정되었다. 2차 선정위와 원로자문단의 최종 심의를 거쳐 ‘10대 뉴스’ 선정, 29일 발표한다. 21일까지 각 기관 단체 홍보팀을 통해 40여제를 응모 받아 22일 1차 선정에서 24제를 아래와 같이 선정했다. 제1차 28제 선정 뉴스(응모 順) 1 조선일보, 조순자 가곡 가사 보유자 방일영국악상 수상 2 국공립 국악단체 수장 임명(선정) 난맥상ㅡ국립극장장(미정), 국립국악원장(낭설), 국악 방송(비전공자 임명 논란), (사)국악협회장(교체 미완) 3 국립국악원, 송년 공연 성공 이룬 ‘임인진연’ 4 안숙선 가야금병창에서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재지정 5 2013년 시작된 아리랑 주제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행사 폐기 및 총감독 별세 6 문화계 별 이어령, 김지하 선생 별세 7 정선군과 40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 참여,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 건립 8 문화재청, 국가 종목지정 전승공동체 맞춤형 지원 제도화 발표(아리랑, 제다, 씨름, 해녀, 김치담그기, 제염, 온돌문화, 장 담그기, 전통어로방식-어살, 활쏘기, 인삼재배와 약용문 화, 막걸리 빚기, 떡 만들기, 갯벌어로) 9 국립극장, 해외 초청 공연 호평 받은 ‘트로이의 연인’ 10 유튜브 아리랑 3600곡 탑재 ‘정창관의 아리랑’ 기념공연 1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1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 원칙’ 선포 13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송해, 재담꾼 김법국(김뻑국)(1937년생/김진환)선생,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1935년생), 황용주(1937년생) 예능보유자 별세 14 문화재청, 2022년 대한민국 탈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15 국립무형유산원, ‘명인 오마주-이은주, 김석출, 박봉술 편’ 공연, 16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궁중 음악과 춤, ‘창덕궁 풍류’ 공연 17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서울을 제외한 광역시권(인천, 대전, 부산, 대구, 광주), 경기권, 충청권, 강원권, 경상권, 전라권, 제주권 등 7개권역으로 구분-문화를 통한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 문화를 통한 지역사회 문제 해결, 지역주민 문화 향유 확대, 지역 문화 기반 조성 및 역량 강화 등을 달성 목표) 18 국립무형유산원, 인간문화재 10인‘, 전통예능의 품격’ 공연 19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 건립 확정 20 문화재청, 60년 만에 정책방향 대전환, ‘문화재’에서 ‘유산(Heritage)’ 개념 사용 21 문화재청, 600년전 세종대왕 ‘관현맹인(管絃盲人)’제도 재현 공연(관현맹인전통예술단), 경복궁 집경당 2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원칙’ 선포(국제 사례 호주 ‘버라 헌장(Burra Charter)’, 영국 ‘역사적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한 보존 원칙, 정책과 지침’, 캐나다‘캐나다의 역사적 장소 보존을 위한 표준과 지침’, 중국 ‘중국 문물고적 보호준칙’) 23 공연문화예술 6개 관계기관(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국립국악원, 국립극단, 국립아시 아문화전당, 국립중앙극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공연문화예술자료 수집․보존과 공동서 비스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24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분야 경연대회 장관상장 지원기준 발표’(예비평가 최소 3년 이상 지속한 전국 규모 대회로, 상장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선정함) 25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60년 ‘한국민속예술제’ 기록의 산물, 민속예술 디지털 아카이브 ‘민속곳간’ 공개 26 국립무형유산원, ‘2022 대한민국 무형유산대전’-자연과 사람을 잇는 무형유산 13개 공연. 27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뎐’-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예랑, 박천경, 백진희, 공민선, 원진주 정수인, 김재민, 방지원, 성슬기 28 국악방송, 송년특집-22년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 29 문체부, 예산이 2022년도 7조3968억에서 2023년 6조7408억원으로 9% 가까이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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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의 춤 그리고 춤론에 담긴 생명철학Ⅰ. 들어가며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1)이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개전되었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민족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이다. 본 글은 학술적 이론을 내 세우거나 특정 논지를 쟁점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2022년 5월 세 번에 걸쳐 개최된 춤꾼 이애주 추모행사2)에 참여하며, 상기한 그의 전통춤 계승 가치, 그가 시대적으로 창안한 창작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춤의 생명철학을 사회적 시각과 사상적 관점에서 살핀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면에는 오늘날 한계에 도달한 한국춤의 기능적, 형태적, 예술미학적 접근을 뛰어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되고 응용되는 우리 춤의 본질 및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술 현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의 목표가 삶의 생명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이애주 전통춤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을 예증 삼아 그의 춤 생애 그리고 그의 전통춤 세계관을 살펴 볼 것이다. 이애주 1주기 추모행사는 2022년 5월 10일 (화) 오전 11시 그가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 1주기 추모 나눔굿>으로 개막되었다. 다음 날 5월 11일 (수) 오후 8시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던 경기아트센터의 소극장에서 '우리 춤의 혼과 맥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추모공연이 있었고, 5월 27일 (목) 오후 2시부터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 한성준 바탕 한영숙 류 이애주 맥: 승무의 미학'(2022), '고구려 춤 연구'(2022),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2022)의 출판기념회 및 '이애주 춤: 학예굿'이 개최되었다. 추모행사에는 이애주와 함께 민족춤 문화 회복을 위해 사지 동거했던 동지 및 춤계 선후배, 동료 그리고 제자가 함께하였다. 춤 '땅끝', '나눔굿 밥', '도라지꽃' 등 세 개 작품에서 드러난 기획 의도, 춤판 현장, 이면에 담긴 이애주 춤의 생명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세 개의 작품에는 겉 치장을 요하는 미학적 춤이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 공동체 정신을 살리는 춤, 민중의 아픔을 품어 내는 치유의 춤 사상과 사회적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춤과 창작춤을 넘나들며 표명하고자 했던 이애주 춤의 본성과 의미를 탐색하고 그 속에 담긴 생명철학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시작하며 1. 이애주의 전통춤 및 계승 여기서는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가 전수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그리고 이애주 춤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계승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중,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만을 다루는 까닭은 첫째, 한성준-한영숙-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기본적인 춤이라는 점, 둘째, 경기제 대풍류 및 경기 무속음악을 춤 장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살풀이춤을 통해 보건대, 단아하고 우아한 독창적 춤 새로 추어진다는 점(이은주, 1998), 넷째, 전승 계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태평춤」은 이애주 자신이 늘 주장한 바와 같이 태평무의 원 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연에서도 원 춤에는 원 장단을 써야 한다며 경기도당굿 악사를 대동하여 「태평춤」 공연에 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애주 전통춤은 춤계에 익히 알려진 충남 홍성출신 한성준(남, 1874-1941) 그리고 그의 손녀 한영숙(여, 1920-1990)으로 이어져 온 족보 있는 전승계보를 갖고 있다. 한성준은 일찍이 전통연희 무대화와 예술화에 주목하여 이를 성취적으로 이룩해 낸 한국 근대 연희사의 거목이다. 그의 민족춤 예술화에는 신앙, 놀이, 의례로써 사유된 민중사상과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어서 민족주의적 사고와 미래를 향한 예술 창달의 미래관을 일깨웠다. 그동안 버림받고 묻혀 있던 옛 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춤 예술 발전을 도모하였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춤 문화운동가라고도 한다. 한성준의 춤 무대화 업적 뒷면에는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바탕삼아 이루어진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서려 있다. 한편, 한성준의 「승무」 및 여타 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용인 출신의 명인 김인호(남, 1858-1932)와 연결된다(이병옥, 2022, pp. 1-21). 그 까닭은 명고수 한성준이 광무대(光武臺, 1898에서 1930년까지 서울에 존속했던 전통연희전문극장)에서 김인호 춤을 전문적으로 반주했고, 김인호가 권번에 나가 춤을 가르칠 때도 동참하여 장단을 잡아 주었다(이병옥, 2018). 명인으로 이름 석 자를 떨친 김인호는 전남 담양 출신 이날치(남, 1820-1892)의 제자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성준은 김인호에게서 많은 춤을 익혔고, 1930년대에 이르러 김인호가 사망한 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김인호가 남긴 춤을 정립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이병옥, 2022, 15). 이와는 또 달리, 한성준의 「승무」 등 전통춤은 또한 전북 정읍 세습무 출신의 전계문으로부터 전수되기도 하였다. 전북지역 단골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전계문(남, 1865-?)은 명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해적, 대금 등의 기악과 성악 그리고 춤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김익두, 2022, 48; 김익두, 전종구, 최동현, 최상화, 1992, 245-247). 이처럼 한성준 춤은 윗대로 올라가면 그 전승 계보가 김인호 그리고 전계문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음악에 능통한 고수였다는 것이며 그 출신 지역을 호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한 계보를 잇는 이애주는 1947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고,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의를 놀라게 하였다. 필자: 양종승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하여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National Treasures (민속과 문화정책: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 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민속기록학회 회장,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연구 관심사는 샤머니즘, 무형유산, 전통춤 등이며, 주요 연구로 "한국의 굿" (공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God Pictures in Korean Contexts (한국 샤머니즘 神圖) (공저), '우리춤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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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협회, 매거진 토크 개최한국잡지협회(회장 백종운)가 11월 5일(토) 오후 3시 송파책박물관 어울림홀에서 ‘매거진 토크’ 행사를 개최했다고 7일 밝혔다.‘매거진 토크’는 MZ세대와 미래의 독자층을 위해 잡지를 주제로 한 대담과 소통 행사로, 잡지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와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하도록 마련했다.잡지주간2022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매거진 토크는 국가애도기간임을 고려해 기존 ‘매거진 콘서트’란 행사 명칭에서 ‘매거진 토크’로 변경했으며, 공연 취소 등 프로그램을 간소화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문학평론가인 허희가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아 약 120분 진행됐다. △박혜진 릿터(Littor) 총괄 디렉터 △이은주 기자 △박준 시인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패널들이 잡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관객들과 소통했다.매거진 토크는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했다. △1부는 MZ세대와 취향저격 잡지 △2부는 잡지가 있는 삶을 주제로 잡지 매체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나눴다.이날 열린 매거진 토크에는 잡지를 사랑하는 독자들을 비롯해 △MZ세대 층과 잡지 발행인 및 잡지계 담당자 △제15회 잡지 미디어 콘텐츠 공모전 수상자 △한국잡지교육원 취재기자 연수생 △송파책박물관을 찾은 송파구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잡지협회 담당자는 "잡지는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다른 매체와 차별화된 매력을 갖고 있다. 이번 매거진 토크에서 잡지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느끼는 시간이었길 바란다”며 "잡지가 MZ세대와 젊은 독자층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협회 측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겠다”고 밝혔다.한편 잡지협회는 잡지주간2022의 마지막 날인 11월 10일(목)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코리아 매거진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아시아 잡지계 산학연과 국내·외 잡지계, 언론 및 출판계 종사자들이 참석해 4차 산업 시대 매거진 미디어의 미래를 주제로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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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파움’과 ‘공청(公廳)’국악과는 전혀 무관한 듯한 두 용어가 공연 기사에 나왔다.(국악신문, 10월 7일자, 소리꾼 강효주 ‘서울, 장안의 소리’ 13~14일) 경기민요 중진 강효주가 ‘서울, 장안의 소리’라는 타이틀을 달고 발표회(남산국악당)를 갖는다는 소식에서다. 기사에는 "예전 서울 사대문 안에서 활동하던 전문 소리꾼을 비롯해, 경기소리 애호가, 귀명창 등이 한데 모여서 소리를 주고받으며 즐기던 ‘파움’과 같은 이 시대의 공청(公廳)을 열어보고자~” 준비한 공연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용어를 설명하기 전에 발표자 강효주의 가보(歌譜)를 따라가서 일러야 쉬울 듯하다. 발표에서는 조선 말기 서울 장안의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종목인 ‘잡가’와 1910년대 서울 지역에서 많이 부르던 경기민요를 발표한다고 했다. 경기잡가와 경기민요의 판이다. 강효주의 스승은 이춘희이다. 1947년 생으로 한국전통민요협회를 이끌고 있다. 이 단체는 안비취(1926~1997)가 설립한 단체이다. 이를 물려받았으니 이춘희의 스승임을 알 수 있다. 안비취는 묵계월, 이은주와 함께 경기12잡가 인간문화재이다. 안비취는 조선권번 출신이다. 당시 경성의 4대 권번 중 조선권번이 가장 유명하고, 교육과정 역시 잘 마련된 곳이다. 시, 서, 화를 포함하여 예인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덕목을 갖춰 교육한 곳이다. 그런데 조선권번에서 가곡, 가사, 민요를 지도한 선생이 하규일(河圭一1867∼1937)이 었다. 이 분은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학감(學監)과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 상다동(上茶洞) 여악분교실장(女樂分敎室長)을 겸하였다. 그리고 1912년에는 대정권번(大正券番)을 창립하고, 1924년에는 조선권번을 창립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황에서 하규일은 안비취의 스승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규일은 문식이 높은 관리 출신이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가인필휴(歌人必携)’를 지어 발간한 사실이다. 이 책은 193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발행하였는데, 조선권번(朝鮮券番)에서 기녀들에게 가곡·가사·시조를 가르치기 위하여 발간한 가집이다. 여기에는 가곡의 노랫말과 8곡의 가사·시조가 수록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음악사에서는 이런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사 가운데 처사가(處士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와 같은 가사는 하규일(河圭一)과 같은 풍류방의 가객이 부르기 꺼리던 것이라 한 것으로 봐서, 임기준(林基俊(1868∼1940)과 같은 공청의 가객들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임기준은 동시대 음악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구사한 음악은 결이 달랐다. 바로 ‘풍류방’과 ‘공청’이란 말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곧 풍류방과 공창은 동 시대 결이 다른 음악이 향유되고 소통되던 공연장이며 음악인 공동체 상징임을 알 수 있다. 풍류방(風流房)은 조선조 말기 민간 상류 계층에서 줄풍류나 대풍류를 연주하던 방을 이르던 말이다. 율방(律房)과도 통하는 말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사로이 연주 활동을 하던 곳이다. 그런데 이 시기 ‘파움’과 ‘공청’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사로이 연주 활동을 하던 곳”이기는 한데 조금은 결이 다른 곳이다. 전자는 겨울 땅을 파서 만든 토굴로 파를 보관하거나 키우는 움인데, 여기에 일부 공연자와 관객이 모여 소리를 즐기는 곳이었다. 이를 스스로 높여 부른 것이 후자이다. ‘廳’은 공적인 업무를 보는 관청 같은 곳을 이르는 말이지만, 민간에서는 자신들의 업무를 보는 처소나 기구를 높여 부른 것이다. 이런 용어가 통하던 시기, 이런 곳에서 잡가, 가사, 각곡이 소통하던 시기, 함께 거론되는 이들이 장계춘(張桂春, 1868∼1946)·이경준(李慶俊, 1860∼)·한인호(韓仁浩, 1860?∼?)·박춘경(朴春景, 1850?∼1920?)·박춘재(朴春載, 1877 또는 1881∼1948)·최경식(崔景植, 1874∼1949 또는 1876∼1948)·주수봉(朱壽奉, 1870?∼?)·최경식·김홍패(金紅濬, 1877∼1950)·보패(寶貝, 1860∼1945)·박천복(朴天福)·오영근(吳英根)·김경호(金慶浩) 같은 이들이 있다. 이어서 1900년 전후 출생자들인 최정식(崔貞植)·유개동(柳開東, 1898∼1975)·정득만(鄭得晩, 1907∼)·이명길(李命吉, 1885∼1960)·탁복만(卓福萬)·박인섭(朴仁燮)·원경태(元慶兌)·이창배(李昌培, 1913∼1984)·김수현(金洙鉉, 1898∼1970)·김순태(金順泰, 1913∼1978)·엄태영(嚴泰泳, 1883∼1951)·김태운(金泰運, 1895∼1951) 같은 이들이 거명 된다. 이들이 즐긴 소리 중에 대표적인 종목이 경기12잡가가 있다.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가 전승한 소리다.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방물가 평양가 집장가 형장가 달거리 등이다. 이들과 이들이 부른 오늘날의 12잡가가 탄생하고 향유된 곳이 발로 파움과 공청인 것이다. 정리하면 ‘파움’과 ‘공청’은 강효주의 계보상 3대 윗대 스승들이 소리를 즐기고, 연구하던 시기의 음악공동체를 이르는 말로, 그 시대의 소리를 재현, 오늘의 상황에서 판을 벌인다는 뜻이 된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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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 26명 위촉…위원장에 김영운 원장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이 무형문화재위원장에 선정됐다.문화재청은 제4대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 26명과 전문위원 38명을 1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위촉했다. 이들의 임기는 2년이다. 무형문화재위원 중 여성위원과 비수도권 활동 인물은 각각 13명이고 총 26명이다. 문화재청은 양성평등과 지역 안배 등을 고려해 위원을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김 신임 위원장은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한양대 교수와 국악방송 사장을 지냈다. 부위원장은 김삼기 전 문화재청 과장과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장이 맡는다. 무형문화재위원회는 2016년 3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에 따라 만들어졌다. 무형문화재 정책, 국가무형문화재 종목 지정과 해제, 보유단체·보유자·전승교육사 인정과 해제 등을 심의하는 자문기구다.다음은 분과별 무형문화재위원 명단이다.△전통예능 분과 : 김영운, 성기숙, 성애순, 원명, 전경욱, 정성숙, 정해임, 조남규, 최헌 △전통기술 분과 : 김삼기, 김정희, 서도식, 신탁근, 심연옥, 이은주, 임승택, 장남원, 진명△전통지식 분과 : 김종대, 박상미, 배영동, 석대권, 이순녀, 천혜숙, 혜일, 황경숙, 전경욱(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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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보훈댄스페스티벌’ ..한국의 집'보훈무용예술협회'(이사장 유영수)가 주최하는 6월 호국·보훈의 달 기념 '2022 보훈댄스페스티벌'이 6월 15일부터 26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과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에서 열린다. 사단법인 보훈무용예술협회는 보훈과 관련된 무용예술단체로는 유일무이한 단체로 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에 맞추어 본 행사를 진행해 왔다. 2013년부터 진행해 온 '무담(舞談)-춤 이야기'가 2019년 보훈댄스페스티벌로 개편되어 주 행사 프로그램인 경연무대의 형식과 틀을 재 정비하고 부대행사와 사전축제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 축제 첫 번째 부대행사인 ‘2022 젊은 예인전(15일~17일)’은 30대 전통춤꾼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구성한 젊은 춤판이다. 15일에는 권미선, 권영성, 김민성, 문지원, 박채원, 임새솔, 조수빈, 조하늘, 황은진이 출연하고 16일은 고인지, 김문채, 김솔지, 김지은, 문경민, 박주현, 변창준, 안나영, 여주연 출연하며, 마지막날인 17일에는 김영신, 남솔, 이우영, 장소영, 장영, 정유지, 최예지, 최희아, 홍자연 등이 출연하여 전통춤의 맥을 이어가는 젊은 춤꾼들의 다양한 류파별 전통춤 무대를 한곳에서 볼 수 있다. 경연부문은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제17회 보훈전국무용경연대회 본선 무대는 우수한 성적으로 예선을 통과한 수상자들은 본 경연을 통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대통령)상을 비롯해 국회의장상, 통일부장관상 등이 시상된다. 또한 23일 열리는 제12회 전국신인작가전은 1차 서류 및 영상심사를 통해 6명 안무가를 선정하여, 2차 공연을 통해 경연으로 진행한다. '보훈댄스페스티벌' 사전축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무용가들이 펼치는 '무색(舞色)-춤의 빛깔'(22일)에서는 전통춤의 아름다운 향연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박윤미의 신관철류 수건춤, 홍연지의 고풍, 장인숙의 교방굿거리춤, 임은주의 승무, 이수진의 이은주류 살풀이춤, 신화원의 김백봉 부채춤, 김지윤의 부채입춤, 김윤미의 버꾸춤 등이 출연한다. 개막공연 ‘세월을 가진 춤을 추다(24일)’은 전통예술 최고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 장원 수상자들이 펼치는 공연으로 제10회 수상자 이정희의 도살풀이춤, 제12회 수상자 채향순의 승무, 제16회 수상자 진유림의 살풀이춤, 제21회 수상자 박경량의 영남교방청춤, 제24회 수상자 이미숙의 경기수건춤, 제28회 수상자 김진원의 춘설지몽, 제33회 수상자 유영수의 선입무 등이 출연하며, 초청공연인 ‘2022 우리 춤 전시회(25일)’는 우리춤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공연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 서경대학교, 단국대학교, 용인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시지정 전문예술단체 류무용단 등 여러 무용단이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