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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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아리랑학교, 헐버트아리랑악보비답사(주)국악신문사 주최주관으로 '국악진흥법 이해를 위한 2024아리랑학교'가 14일부터 15일까지 2일간 개최되었다. 5개 지역 전승단체 경산아리랑보존회(배경숙, 홍희연 이경숙 배혜숙 송경애),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임규익 배부근 임규익 홍순익 김영준 정종철), 안성아리랑보존회(조명숙,서명주, 양미자, 박경순, 박정미, 은희숙, 고경숙, 이정레, 이진영, 이미숙, 김순덕, 방미화, 김복식,),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 김화숙, 문강자, 정점순, 김용희), 동두천아리랑보존회(유은서, 김종철,원금순,노진옥,박경숙)와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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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 (161)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맹이로 다 나간다. 남산 우에 고목나무 나와 갓치만 속 썩는다. 아리령 아리령 아라리요 아리령 띄여라 노다 가세 감 상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구절은 진도나 밀양 등 여러 지역의 아리랑에 등장한다.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만큼이나 즐겨 인용 되었다. 민요의 경우 첫 구절은 노래의 형성배경과 그 노래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담고 있다. 이 노래도 문경의 박달나무가 경복궁 중수를 위해 무분별 공출된데 대한 상실감과 조정의 수탈에 대한 문경지방의 공동체적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저항의식은 이 시대의 부역과 공출에 대한 사회상을 나타내면서 전국에서 공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성들의 상실감은 남산의 고목나무처럼 속으로 썩어 들었으니, 이로 하여 문경아리랑은 당시 전 국민이 공감하여 부른 유행가였던 셈이다. 백성들의 뒤틀린 심사를 글씨에 담았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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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아리랑의 어원(2)아리랑 기원설은 ‘백설(百說)’로 표현된다. 많다는 뜻을 넘어 아예 너나 나나의 주장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주장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완성형인 ‘아리랑’으로 출현했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점진적으로 아리랑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유한다면 전자는 창조론이고, 후자는 진화론인 셈이다. 1960년대까지는 전자가, 이후 오늘날에는 후자가 다수설이다. 필자 역시 후자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완성형 아리랑’이 19세기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진화론에서처럼 현생인류와 똑같이 생긴 화석이 밑바닥층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다. 지난 3회에서 살핀 충북 중원 지역 농요 ‘아라성’이나 이승훈(李昇薰, 1756~1801)의 ‘농부사(農夫詞)’에 나오는 ‘아로롱(啞魯聾)’이 그렇다. 본 회에서는 ‘아리랑’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어원설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곡명으로서의 ‘아리랑’을 말하는 것이지, 곡조와 사설인 노래 자체를 말하는 ‘아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1912년 총독부는 식민정책 수립을 위해 조선 내 민정을 조사했다. ‘민요·속담·이야기 등에 대한 조사[俚謠·俚諺及 通俗的 讀物等 調査]’이다. 전통문화 전반에 관한 전국 대상 조사로 각 도 도지사를 통해 각 군수에게, 군수는 다시 관내 초등학교 교장을 동원하여, 간접 조사를 하였다. 당시 식민제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의 선행 사례를 답습한 것으로, 조선 내에서 식민지 경영 정책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궁극적인 정한론(征韓論)의 실천 방략으로 위장술인 문(文)을 가장하여 무(武)를 준비한다는 문장적 무비론(文裝的 武備論)에 입각한 것이다. 이 조사는 근대 사회과학 이론을 적용한 공식적인 민속조사 첫 사례이다. 이 중 민요 분야의 아리랑 조사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학계에 보고한 것은 1986년 김연갑의 ‘민족의 노래 아리랑’(현대문예사)에 수록함으로써인데, 전국 7개도(경상남도 제외) 조사 56편 아리랑 각편(各篇)이다. 이 조사에 수록된 곡명을 음가(音價) 표기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아리랑歌 ② 阿朗歌 ③ 아리랑打令 ④ 酒色界의 雜歌 ⑤ 어르렁타령 ⑥ 아르렁打令 ⑦ 어르렁타령 ⑧ 啞而聾打詠 ⑨ 아리랑타령 ⑩ 啞聾歌 ⑪ 阿朗歌 ⑫ 아르랑타령 ⑬ 아르릉타령 ⑭ 啞利聾打令 ⑮ 아리랑타령 ⑯ 어르렁打令 ⑰ 愁心歌 ⑱ 아르렁타령 ⑲ 아르랑打令 ⑳ 아르랑歌 이상과 같이 표음(表音) 상의 곡명이 총 20가지이다. ‘아리랑타령’과 ‘阿朗歌’, ‘어르렁타령’은 두 번 나오고, 나머지 14가지는 각기 다르다. 이 같은 현상은 1세대, 즉 30년 전후의 현상으로 보는데, 곡명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리랑’이란 음가로 이행 단계임을 보여 준다. 오늘의 음가 ‘아리랑’을 쓴 경우는 네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이 시기부터 점진적으로 ‘아리랑’이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결과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라리’에 ‘ㅇ’음이 첨가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는 농사법 중 이앙법(移秧法)의 일반화이다. 이앙법은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直播法)과 달리 모판(못자리)에서 싹을 틔운 모(육묘)를 논에 옮겨 심는 농법으로, 모내기 철 가뭄에 주의하여 많은 품(노동력)을 들여 일시에 심는다. 이런 특성으로 모심는 이들 간의 동작을 통일하고, 허리를 굽혔다 펴는 고됨을 덜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다. 이 노래는 멕이고 받는 형식에서 후렴이 필수임으로 조흥(助興) 음소인 ‘ㅇ’음이 첨가되었다. 그 결과 ‘아라리’에서 아로롱·아라성·아르랑·아르렁·아르랑 등으로 음전(音轉),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종 시대 7년간의 경복궁 중수(1865~1872)라는 역사적 배경이다. 이때 ‘아라리’가 공사장 부역꾼들에게 주고받는 노래로 불리면서 조흥음 ‘ㅇ’이 첨가되어 ‘아리랑’으로 전음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두 가지 모두 개인적인 삶의 노래 ‘아라리’가 집단적인 노동요로 기능이 확대되면서 후렴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조흥 음소가 첨가되어 ‘아라리+ㅇ’이 되었다. 그리고 최종 완성형 아리랑으로 통일된 것은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개봉으로 그 주제가가 전국화되면서 곡명에서나 후렴에서 ‘아리랑’으로 고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함에서 ‘아리랑’ 자체는 의미적 독자성을 갖지 못한다. 다만 ‘아리’나 ‘아라리’의 의미인 소리·노래·말이란 뜻이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는 음소 ‘ㅏ’·‘ㅣ’·‘ㅇ’음의 결합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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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42<BR>아리랑의 어원기미양 / 아리랑학회 이사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신청서에 제시한 아리랑의 종류는 ‘50여 종’이다. 이 숫자는 김연갑이 1986년 발행한 ‘민족의 노래 아리랑’에서 제시한 이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어느 기록에서도 50여 종의 구체적인 곡명을 제시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숫자가 갖는 진의는 누구도 정확히 제시할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셀 수 없다(uncountable)’또는 ‘셀 필요가 없다’(Can not cell)는 말이 된다. 시간이 감에 따라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특이성에서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기원설(起源說)이나 어원설(語源說)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배경에는 아리랑만의 독특한 성격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문화재청 아리랑 해설 게시문에 따르면 "후렴에서 ‘아리랑’이나 ‘아리’ 또는 ‘아라리’를 고정적으로 사용하는 노래”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형식의 노래는 전통민요뿐만 아니라 통속민요, 더 나아가 대중가요와 가곡은 물론, 해외 교민들이 작창(作唱)하여 부르거나 외국인들이 창작한 외국어 버전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장르의 아리랑 후렴에는 아리랑, 아리, 아라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의 후렴에서 그 전형(典型)이 확인된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아라리가 났네(진도아리랑 노래비)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밀양아리랑 노래비) 이런 실상에서 ‘아리랑’은 후렴에서 ‘아리’와 ‘아라리’와 함께 나타난다. 이런 사실에서 역사나 어원에 접근할 때는 이들과의 관계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감이 비슷한 것에서 뉘앙스 정도만 다른 것일까? 아니면 속뜻이 같은 것일까? 전자라면 ‘아리랑’만이 대상이나 후자라면 각각의 의미와 변이 관계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랑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 시작된 것이 1930년대, 연구 성과가 있게 되는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아-리-랑’ 3음절의 음가(音價)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성과에 머물렀다. 국문학계 양주동이 그랬고, 역사학계 이병도가 그랬고, 민속학계 서정범과 임동권 역시 기존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지만, 오늘의 3음보 2행의 후렴 형성은 17세기 들어 이양법(移讓法)의 일반화로 논농사 작업환경의 형성에 따라 선후창(先後唱)의 필요성에서 조흥소(助興素) 강화로 ‘ㅇ’음이 첨가된 결과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고유한 술어나 곡명이 아니라 ‘아리’의 2음절에서 안정적인 3음절 ‘아라리’로의 변이, 다시 조흥 음소 ‘ㅇ’의 첨가로 형성된 것이란 말이다. 이의 증거 사료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전국 대상 민속조사보고서에서 확인이 된다. 한일합병 후 민정 파악을 위해 실시한 ‘통속적 독물 급 리언 리요 조사에 관한 건’(通俗的 讀物 及 俚諺 俚謠 調査 關件)의 아리랑 관련 자료를 정리하면, 이는 경복궁 중수 공사(1865~1872) 시기 유행한 노래 아리랑을 부역(賦役)꾼으로 참가한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확산시킨 현상이다. 이 자료에 조사된 아리랑 후렴에는 다음과 같이 20여 종이 도출된다. ①아리랑歌 ②阿朗歌 ③아리랑打令 ④酒色界의 雜歌 ⑤어르렁타령 ⑥아르렁打令 ⑦어르렁타령 ⑧啞而聾打詠 ⑨아리랑타령 ⑩啞聾歌 ⑪阿朗歌 ⑫아르랑타령 ⑬아르릉타령 ⑭啞利聾打令 ⑮아리랑타령 ⑯어르렁打令 ⑰愁心歌 ⑱아르렁타령 ⑲아르랑打令 ⑳아르랑歌 이상과 같이 표기(表記) 상의 곡명은 총 18가지이다. 정리하면 곡명과 후렴에서 오늘의 음가 ‘아리랑’을 쓴 경우는 네 가지(① ③ ⑨ ⑮)다. 이는 비로소 이 시기부터 ‘아리랑’이 중심 술어로 합의를 얻어가고 있는 단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자를 혼용한 것이 13가지, 곡명에 ‘가’(歌)를 쓴 것이 7가지이다. 이는 조사 당시 실제 제보자의 응답이 아니라 이를 기록한 문식 있는 조사자들의 개입 결과일 수가 있다. (실제 기록상의 조사자는 당시 전국 지역 교원들이었다.) 곧 수집과 보고 단계에서 조사자의 수정·가필(加筆)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아리랑의 곡명이 당시 지역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리(르)’+’렁’/‘롱’/‘랑)’ 등의 단일화 단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오늘의 음가 ‘아리랑’은 1910년부터 SP 음반으로 발매되어 대중적으로 보급된 1920년대 초에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어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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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 ‘2005’의 아리랑<7>19세기 아리랑의 문화적 의미지난 회에서는 토속 '아라리'인 정선아리랑이 산간의 노래에서 들노래로 진출한 결과를 논의하였다. 새로운 사설이 출현하게 되고, 그 변화의 폭은 일정하지 않고, 그 폭이 적은 경우는 기존의 장르성(산간노래인가 아니면 들노래인가)을 유지하기도하고, 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들노래로서의 토속 아리랑에는 들노래로서의 일반성을 지향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정도에 따라 사설의 양상과 장르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강원지역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 중 장르성의 완전한 변화와 그에 의해 문헌에 기록되는 19세기 경기지역 상황을 살피기로 한다. 산간노래 토속 아라리가 들노래로 진출하여 일노래로 장르를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일노래 아리랑은 19세기 들어 새로운 노래문화에 편입되는데, 경복궁 중수로 전국의 장정들이 일정기간 집단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경기지역에서 통속민요로 새롭게 전승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존재가 일부 양반과 외국 선교사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했다. 첫 기록으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중 아리랑 대목을 주목하였다.(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처음으로 실상과 의미를 학계에 보고했다.) 기록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1892년 2월에 고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동궁을 수선하는 토목공사를 하였다고 전하면서, 공사를 독려하기 위해 밤마다 불을 밝히고 광대들을 불러다가 신성염곡을 연주하게 했는데, 그것을 일러 아리랑타령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원님대신 민영주로 하여금 여러 광대들을 거느리고 아리랑을 전담하게 하여 잘하고 못하는 바에 따라 금과 은으로 상을 주게 했다고 한다.”(매천야록) 이에 대해 보고서는 다음 두 가지로 분석했다. 하나는 19세기말 아리랑이 전문음악인들에 의해 연주되는 통속민요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노무자들을 위한 노래로 연주됨과 동시에 경연대회 주제곡이라는 점에서 아리랑이 매우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아리랑이 경기지역 ‘잦은아리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분석을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확인되는 중요한 의미는 19세기말 서울지역에서 궁중과 민간에서 향유하는 노래가 아리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는 사실은 이후 양반층 일부에서 아리랑에 관심을 갖게 하는 기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 인용한 1894년 발간된 「신찬조선회화」의 아리랑 기록과 선교사 H.B. 헐버트가 기록한 <KOREAN VOCAL MUSIC ARARUNG>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기록에 대한 서지사항과 가치는 이미 김연갑 등에 의해 보고되어서 생락하지만, 다른 민요와 달리 양반층의 관여로 문화적 확산을 가속시킨 것은 눈여길 사항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대한 보고서에서 새로운 논점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잦은아리랑과 긴아리랑의 출현 시기 즉, 선후관계를 말한다. 보고서는 선행연구인 이보형의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를 인용하며 ‘긴아리랑’이 앞서 형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선후 문제는 김연갑의 반론으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반론의 요지는 경복궁 중수 공사 기간 경기지역 통속 아리랑을 형성시키는데 영향을 준 소리가 ‘문경새재소리(문경아라리)’으로, 이의 음악적 관계상으로 볼 때 ‘잦은아리랑’이 먼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문경새재소리’의 정체성 문제와 함께 아리랑 연구에서 논쟁적 대목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산간의 노래 토속 아라리가 들노래도 장르성을 달리하여 경기지역 통속민요 아리랑을 형성시켰다는 사실을 문화변동론의 입장에서 정리했다. 다음 회에서는 2005년 현재, 강원도아리랑의 전승실태를 검토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