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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설장고 명인 김병섭 선생 사진 및 기사자료김병섭 선생은 5, 60년대 설장고로 활동한 명인이다. 특히 70년대 초 까지 대학가와 외국인에게 풍물을 전수하고 풍물패를 육성한 인물이다. 국악신문 창간자 김호규 사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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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국악신문 편집위원 위촉장2000년 국악신문 사장 김호규 명의의 편집위원 위촉장. 2년에서 3년 단위로 위촉한 편집위원은 30년간 18명이 위촉되었다. 제1호로 당시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김연갑선생에게 발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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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가 김채원 단장, 연출력과 무대 장악력에 찬사한국무용(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전수자)가로 활동하고 월광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한양대, 중앙대학교 등에서 지도자로 활동해 온 김채원 <아리 앤 랑 무용단> 단장이 ‘2016 사할린아리랑제’ 총연출과 독무 출연으로 연출력과 무대장악력을 발휘하여 사할린교민과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 행사는 한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회장 정은하)가 사할린주한인협회, 사할린주이산가족협회, 사할린주노인회 3개 교민단체의 초청으로 지난 12월 1, 2일 <사할린한인문화회관>과 <홈스크시문화회관>에서 8도아리랑과 춤으로 두 차례 펼쳤다. 12개 지역 아리랑 단체 37명이 펼친 8도아리랑 무대는 고려인 2, 3세와 러시아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보였다. 1세대가 1930~40년대 고국에서 듣고 부른 곳곳의 아리랑으로 구성했다.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안상옥 함미경 위정순 김은자 이화정 강복순), 상주아리랑보존회(김동숙 박노경 김인순 김갑태), 대구아리랑보존회(김상준 이상헌 곽노린 김선오), 영남아리랑보존회(정은하 권숙조), 성주아리랑보존회(임옥자 이금향), 서울아리랑보존회(유명옥), 구미아리랑보존회(장선주), 부산아리랑보존회(김희은), 청주아리랑보존회(강옥선), 문경아리랑보존회(송옥자 장순덕 안원규 최옥자 장순자 임이순), 아리 앤 랑무용단(김채원), 김애경무용단(김애경)이 조국의 혼을 담은 무대로 박수를 받았다. 또한 한인 징용 유적지인 ‘이중징용위령비’와 ‘망향의 탑’ 추모제의 위령제 연출도 맡았다. 이번 두 무대의 총연출과 마지막 무대인 <북을 울려라>에 독무로 출연, 탁월한 연출력과 무대장악력을 발휘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특히 현지 언론 <새고려신문>과 <한국어TV방송>의 주목을 받았는데, 현지 공연 연출팀으로부터 내년 공연의 출연 의뢰를 받기도 했다. 김 단장은 이번 출연 단체들로부터 아리랑의 다양성과 각 아리랑의 속성들을 파악하는 기회였고, 이 경험을 발전시켜 해외 동포공연 맞춤형 ‘아리랑 얼쑤!’ 팀 운영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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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사 김호규 사장이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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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게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051026cholsun4.jpg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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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창간자 김호규일시 : 2020.12.21 장소 : 풍류극장 김호규선생의 부친은 김병섭 설장고 명인이다. 김호규선생은 국악신문 창시자로서 나름대로 비제도권에서 국악발전에 힘을 쓰신 분이다. (천승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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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희국악예술단, '2023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 개최한다지난 4일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에서 '세계 차 엑스포'가 개막했다.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한달동안 개최된다. 하동군과 '손양희국악예술단'은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한다. 명칭은 '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05.11-12.)과 '하동세계차엑스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05.27.)을 개최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맡고 창원 지역을 비롯해 경상남도와 타 시도의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9년부터 창원어린이국악단,'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단장과 지회장을 손양희 단장이 맡고 있다. 특히 25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25년 구독자인 손양희국악예술단의 활동과 전국국악경연대회 진행에 대해서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손양희국악예술단 손양희단장을 한달동안 전화와 방문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 주) 손양희 국악예술단 설립목적과 전승활동 Q. 손양희 국악 예술단 설립 목적은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민족예술의 정수 국악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나아가 우리 음악을 이끌어갈 전문 국악인의 밑거름인 차세대 명창과 명인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언제 조직되었나요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창원에서 1996년 제1회 창원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를 주관하면서부터 조직되었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 소개해주세요.. 설립 목적, 전승활동, 회원수.전승활동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1995년 손양희국악교습소로 시작하여, 2007년 손양희국악예술단으로 거듭났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자체 기획공연과 시, 도, 국가 공모사업을 기본으로 실행하면서, 각 시군의 축제나 국가 공식 기념일 행사에 초청을 받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 미국, 유럽 등 20여개국 해외 순회공연을 하며 폭넓게 공연 활동을 하는 전문 국악공연단체이다. 또한 후진양성과 계승발전을 위해 규칙적인 전승교육 활동에도 30여 년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해로 26회차가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인재 양성발굴에 핵심 사업 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예술단체이다. 회원은 100여 명과 예술단원은 25여 명이 활동한다 Q. 초대회장, 역대회장은? A. 초대 대회회장은 1996년 당시 창원국악협회장이셨던 故 박미숙선생을 필두로 노키아티엠씨 이재욱 회장, 공민배 전창원시장, 현, ㈜부경 김찬모회장으로 연결되어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고 계신다. 26년이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Q.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는 26회가 되는데, 언제부터 손양희 회장이 이어오고 계시나요 A.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창원 국악협회장의 별세로 존립의 기로에 선 국악경연대회를, 2년 지난 1998년 제2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25살밖에 안된 제가 맡아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작년 11월까지 제2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초반기 국악 불모지 창원에서 이 국악경연대회를 알리기 시작할 때,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Q.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 26년 돐을 맞이하는데, 자랑 좀 해주세요. A.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는 창원이 공업도시라, 예술 장르 특히 국악 분야는 아직도 열악한 편이다. 하여 고른 발전을 꾀하며 종합대회를 유치했다. 종합대상은 국회의장상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도지사상, 창원시장상, 도교육감상, 시교육장상 등 판소리, 기악, 민요.가야금병창, 무용, 풍물... 5개부문을 각파트에 5분의 권위있는 심사위원을 모시며 투명한 대회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문화관광부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평가에서 작년(2022년)은 B+ 등급과 그 3년 전에는 A등급을 받아 공명정대하고 내실있는 우수대회로 평가받았다. Q.최근 서울에서 하동차엑스포 알리기 행사를 했는데..오셨나요? 특별한 행사가 있었나요 A. 그날 행사가 이미 잡혀 있어서 참석못했다. 특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유명한 국민배우 ‘국민 아버지’ 최불암 씨를 행사 중 2023하동세계차엑스포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뜻깊은 위촉식도 가졌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 '2023하동차엑스포'와 '2023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명창대전' Q. '2023하동차엑스포' 소개해주세요. A.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 좋은 하동...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이지요.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2023하동세계차엑스포가 개최된다. Q. 전국에서 산수가 아름답가로 유명한 하동의 유래에 대해 자랑 좀 해주세요. A.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은 하동의 아름다움을 ‘호중별천(壺中別天)’으로 표현하며 ‘동쪽 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신선이 옥베개를 밀치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라고 극찬했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바로 세계적 차(茶)의 주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Q. 이번 손양희국악예술단에서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하는 국악경창대회 취지는 A.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3 대한민국 명창대전'과 '2023 전국청소 년국악경연대회'을 개최한다. 이는 세계가 주목하는 엑스포장에는 신명나고도 우수한 우리 전통음악인 풍악이 빠질 수 없으므로, 단순한 경연대회가 아닌, 축하공연 같은 경연대회를 통해 우리음악의 신명, 전통성을 하동을 찾은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함으로 엑스포장을 더욱더 활기차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꾀한다. 손양희 명창 국악계 입문과 국악활동 Q.국악계 입문은 어떤 계기로 언제 들어오셨는지요. 스승은? A. 부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년에 한국무용에 입문하였고, 초등학생때부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인정 받아, 합창부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한국무용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열심히 하였으나, 고2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유한 가세가 기울자, 9년 동안 받아온 무용교습은 포기해야 해서 절망적이였다. 그런데 그즈음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에서 판소리 무료 강습회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판소리가 나를 다시 소생시켰다. 故 선동옥 선생님(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입문하여 지금껏 소릿꾼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故 선동옥(수궁가), 故 이명희(흥보가,춘향가), 故 한갑주(적벽가), 성준숙(심청가)선생님들께 이수를 받았다. 2008년 12월에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 9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조교로 지정되었다. Q.손양희 선생님 전국경연대회에서 상을 많이 타셨는데, 가장 큰 상을 받은 때는 언제인가요 A. 2017년 판소리 입문 32년만에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16회 대구 국악제에서 판소리 부문에 참가하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후 12년만에 받은 상이다. 이때 가장 공력을 많이 들였을 때, 받은 상이다. Q. 창원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악단체로 손꼽히는 손양희국악예술단 자랑 좀 해주세요. A. 국악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의 학부 출신 또는 재학생을 회원이 많다. 그만큼 젊고 활력 넘치는 전문 국악단체이다.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김선희, 타악과 풍물로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 종합 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송기혁, 가야금 전공의 김수아 등이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부터 겨울방학 여름방학 기간 ‘2008 국악학교’를 개설하여 창원과 주변 국악인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다. 그래서 창원은 물론 경남에서는 널리 알려진 국악단체이다. Q. 가장 뜻깊고 추억에 남는 공연은 A. 2003년 10월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자 여류 문인으로 꼽히는 황진이를 소재로 한 창극 '황진이'를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국립 창극단 수석 단원 등 주요 출연진과 연출, 시나리오, 음악 등 주요 제작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주인공은 창원 지역의 소리꾼을 대표하여 제가 황진이 역을 맡았죠.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가 제작한 최초의 경상남도 지역 창극이었다. 2006년에는 창원 성산 아트홀 소극장에서 '제2회 손양희 판소리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창극 '토끼야 수궁가자' 에서 창원에서 연출자를 구하지 못해서 연출과 주인공을 맡았다. '황진이' 역과 '별주부'역을 맡은 때가 저희 소리에 대한 정열을 태웠던 시절인가 보다. 수궁가 완창발표회가 큰 동력이 되었다. 이후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Q. 기억에 남는 해외공연은 A. 2011년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왓에서 한국의 아리랑 콘서트’를 공연하였다. 우리가 갔던 곳은 캄보디아의 우리나라의 불교인 조계종이 세운 고아원 겸 보육시설 '아름다운나라'이다. 그해 여름 창원어린이국악단 14명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 산공부(합숙) 대신, 봉사 차원으로 15일 일정으로 갔다. 원장님은 조계종의 스님이셨고, 직원들도 한국분들이 고생하고 계시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우리는 캄보디아 학생들과 교류 및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풍물과 민요를 가르키며 함께 공부하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우리 창원어린이국악단 학생들이 신명나는 공연도 선보여주는 등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신명을 잘 전달하고 왔다. 이는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마음과 우리 국악의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했던 큰 계기로 기억된다. 양명창은 어려운 청년기, 국악에 입문하면서 판소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일찌기 20대 중반에 제2회 창원전국악경창대회를 맡으면서 국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구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명실공히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가무악에 타고난 재능으로 판소리·풍물·전통무용 등을 섭렵하고 공연 연출까지 해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초창기 2003년 뮤직컬 형식 창극 작품을 맡았지만 창원에서 국악 분야 연출자를 찾지 못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 Q. 하동 출신으로 유명한 국악인 누구신가요 A. 여러분이 계셨지만, 손꼽히는 두분을 소개합니다. 하동 악양에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이 있는데, 유성준(1873~1949)명창은 판소리 근대 5대명창중의 ‘동편제의 제왕’으로 불리어졌으며, 하동 악양면 신대마을에서 활동하시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선유(1873~1949) 명창은 송우룡 명창과 김세종 명창에게 사사했고, 최초로 판소리 다섯마당 창본 '오가전집'을 펴냈으며 진주권번의 소리사범으로 활동하셨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두 분의 명창이 하동을 기점으로 폭넓게 활동을 하셨고, 이 두 분을 기리는 판소리 기념관이 하동 악약면 있으며, 판소리 전승발전을 위해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Q.그동안 창원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A. 첫째로는 판소리를 30여년간 후학을 가르키며 차세대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자체 기획공연 및 타 지역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이 공연과 시, 도, 국가의 다양한 공모사 업 지원 및 선정으로 경남을 비롯하여 국내외 등 수 많은 순회공연을 하였고, 26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며 인재 발굴과 대중화에 힘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Q. 가장 좋아하시는 민요는 A. 우리의 민요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육자백이', '흥타령'을 특히 좋아한다. 구성지면서 질펀한 우리네 삶이 녹아있어 절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Q.한국국악협회 창원시지부, 하동지부와 같이 국악활동을 하시나요 A. 초창기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 창단 맴버였으나, 현재는 협회 활동은 하지 않고,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일을 하며 활동하고 있다. 한국국악협회 하동지부는 풍물놀이, 판소리, 한국무용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저변을 확대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Q. 하동에는 어떤 축제가 있나요. 그 축제에서 판소리를 많이 알리고 계시죠 A. 하동 송림 백사장과 섬진교에서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및 다리밟기 행사,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에서 산골 매실 매화 축제, 제17회 화개장터 벚꽃 축제, 하동군민의 날 기념식, 새해맞이 공연,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등에 초청 받아서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Q.코로나 3년간 경창대회 치루시면서 힘드신 부분은 A.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법에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고 큰 어려움 없이 대회를 치뤘다.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참가해주었다. Q. 20대 중반부터 쉬지않고 30여 년이 넘게 공적 국악활동 단체를 이끄시면서 힘드셨던 점, 보람이 되신 점은 A. 국악단체를 이끌어 간다는게 다른 단체도 그렇겠지만, 경제적으로 녹녹치 않아 어려움도 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단원들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슬기롭게 해결하며 걸어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지역에서 후원자들도 차츰 생겨나면서 공고히 자리를 잡아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Q. 국악발전을 위해 한 말씀하신다면. A. 우리 경남에는 대학에 국악과도 없고, 시립.도립 국악예술단체도 없다 보니, 국악발전에 악순환이 되고 있다. 특히 영남민요는 동부민요로 몰아가서 딱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울까지 가서 경기민요를 배워서 이수증을 받고 학원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렇게 국악발전이 타 시.도에 비해 열악한 현실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원들과 창원시립 또는 도립국악단 창단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걸어 간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을 통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 국악 발전의 현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 26회를 맞이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뒤에는 손양희국악예술단의 노력이 숨어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 받아서 이번 하동군과 함께 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국악명창대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가 된다. 손양희 2012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 200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한승호 '적벽가' 사사. 2005 대구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이명희 '흥보가' 사사 2020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성준숙 '심청가' 사사 경상남도판소리보존회장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총집행위원장(26회) 경상남도무형문화재 판소리전수관 외 다수 출강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 대표 (2016~2022) 동국대학교(한국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2005~2008) 마산창신대학교(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판소리 학사 및 석사 졸업 2017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2016 제24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16 제25회 땅끝해남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한국문화예술위원장상 2016 제19회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창부 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15 제3회 미주 한국국악경연대회 '지도자상' 2006 제16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 2005 제2회 DELPHIC GAMES(문화올림픽) 한국대표(판소리) '단체우수상' 수상(말레이시아 쿠첸) 2003 제2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최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00 제2회 여수 전남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우수상' 2000 제18회 광주특장부문 판소리전국대회 특장부 '우수상' 1995 제6회 대구 전국국악제 '금상' 1989 제8회 창원 고향의 봄 축제 전국민요경창대회 '장원' 1985 제30회 부산 영남무용제 '최우수상' 1979 제1회 영남지구 무용콩쿨 '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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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제3회 한국 농악명인전'농악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지역의 전승행사와 자연적 환경 여건에 따라 가락과 연주형태가 변형되어 왔다. 크게 경기·충청도의 웃다리농악, 경상도의 영남농악, 강원도의 영동농악, 전라도 서쪽 평야지대의 호남우도농악과 동쪽 산간지대의 호남좌도농악로 구분된다.지역마다 맛이 다른데 그 맛의 비결은 그 지역의 자연 경관을 닮았다. 호남우도는 평야지대이므로 굿거리 같은 맛에 다양한 가락이 있고, 좌도는 산간이므로 가락이 빠르고 힘이 있다. 경상도는 빠름과 동시에 북이 잘 발달했고 강원도는 경상도보다 더 산간이라 더 담백하고 빠르고 격렬한 맛이 있다. 그리고 경기·충청은 비산비야(非山非野)라 가락이 두마치가 많고 평탄한 맛을 준다. 웃다리농악이라 일컫는 경기·충청 일대의 농악은 상쇠의 기능이 우세하여 꽹과리가 중심이 되고, 호남 농악은 장고가, 영남농악은 북이 중심이 되어 연주된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풍물의 앉은 반이 특화된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공연 장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전통문화를 주목하게 됨으로써 희미해 졌던 전통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다시 농악이 꽃 피고 있다.특히 판놀음에서 펼쳐지는 구정놀이의 명인들을 초대하는 무대이다. 해설 : 김호규1부 명인전 웃다리 상쇠놀음 - 임광식 호남 상쇠놀음 - 이혜선 호남 꼬깔소고춤 - 김종수 영남 채상소고춤 - 김선옥 웃다리 열두발 - 지운하 호남 설장구 - 황해경2부 김병섭 류 우도농악 김병섭 류 우도농악보존회문의 : 국악신문사 011-271-1411 R석 : 30,000원A석 : 10,000원*단체할인 30%(10매 이상 구매 시)*할인문의 : 070-7733-7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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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국악공연 '씻김', 28일 온라인 중계…김호규 1주기 추모한국문화재재단이 오는 28일 오후 7시 기획공연 '씻김'을 온라인 중계한다.우리나라 최초 국악 전문 신문 '국악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국악인 고(故) 김호규의 1주기를 추모하며 그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전통예술 국악공연이다.'소상씻김굿'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인 '진도씻김굿'의 한 종류로 죽은 망자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1년 탈상(어버이의 상을 마침) 굿이다.망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준다는 의미로 씻김굿이라 부른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 요소가 뛰어나, 전통 사자의례를 넘어 예술 공연으로 변모해 왔다.이번 공연은 진도씻김굿 보존회가 진행하며, 추모의 주인공 고(故) 김호규 선생 아버지인 '명인 김병섭류 설장고 보존회'가 무대를 준비했다.더불어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과 그의 제자들이 펼치는 '수심가와 산염불, 자진염불', 진도씻김굿 이수자 및 승무 이수자 강은영이 펼치는 북춤 등 각종 국가무형문화재 진수들이 펼쳐진다.김호규는 1959년 전북 익산에서 우도 설장고 명인 고(故) 김병섭(1921~1987)의 3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1994년 9월 7일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해'를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 전문 신문 '놀이문화'를 창간했다.이후 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25년간 꾸준히 293호까지 발간하며 전통문화 홍보에 기여했다. 후학들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마련을 위해 2016년부터 3년간 국악로전통문화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이 외 농악명인전, 차세대 명인전, 전국 국악 경연대회 등을 개최하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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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회원님들께 드리는 호소!故 김호규 님의 헌신으로 28년 이어 오던 국악신문은 ‘인터넷 국악신문’으로 재창간하여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후원자님들과 애독자님들의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우리나라 유일의 정통 국악 정론지로 성실하게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불순한 인물에 의해 국악신문(사)의 성실한 활동을 왜곡하고, ‘국악신문(사)’를 참칭하여 국악경연대회 광고를 수주하는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후원자와 독자님들께서는 반드시 ‘kukak2020@naver.com'이 아니면 광고를 거부하시고 즉시 (02)745-1411 또는 (02)922-1411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례와 함께 법적 조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악신문사의 발전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2021. 09. 16. (주)국악신문사 직원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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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후원자/회원님들께 드리는 호소!故 김호규 님의 헌신으로 28년 이어 오던 국악신문은 ‘인터넷 국악신문’으로 재창간하여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후원자님들과 애독자님들의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우리나라 유일의 정통 국악 정론지로 성실하게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불순한 인물에 의해 국악신문(사)의 성실한 활동을 왜곡하고, ‘국악신문(사)’를 참칭하여 국악경연대회 광고를 수주하는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후원자와 독자님들께서는 반드시 ‘kukak2020@naver.com'이 아니면 광고를 거부하시고 즉시 (02)745-1411 또는 (02)922-1411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례와 함께 법적 조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악신문(사)의 발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2021. 09. 16. (주)국악신문사 직원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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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회원님들께 드리는 호소!故 김호규 님의 헌신으로 28년 이어 오던 국악신문은 ‘인터넷 국악신문’으로 재창간하여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후원자님들과 애독자님들의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우리나라 유일의 정통 국악 정론지로 성실하게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불순한 인물에 의해 국악신문(사)의 성실한 활동을 왜곡하고, ‘국악신문(사)’를 참칭하여 국악경연대회 광고를 수주하는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후원자와 독자님들께서는 반드시 ‘kukak2020@naver.com'이 아니면 광고를 거부하시고 즉시 (02)745-1411 또는 (02)922-1411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례와 함께 법적 조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악신문(사)의 발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2021. 09. 16. 국악신문(사) 직원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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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8‘풍류방’ 동참, 영상작가 천승요 「국악신문」이 국악전문 매체로서 정립되는 시점은 제30호를 전후하면서 부터이다. 창간으로부터 2년 후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근거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편집진용을 갖추었다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이는 고문과 편집국장과 편집위원이란 진용을 구성, 운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체성을 들어내는 편집 방향을 설정하여 사업화와 기사화 하였다는 점이다. 전자는 앞에서 고문 정범태, 편집국장 우실하, 그리고 편집위원 최치성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후자는 ‘국악인 자료의 수집, 정리와 이의 교육자료화’ 사업이다. 국악인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의 교육자료화 사업은 국악신문이 내세운 사업으로 이를 대외 서비스하는 부서, 기획 기사로 집중하였다. 그 일환이 ‘풍류방 운영’과 ‘명인명창 선생님들의 사진 구합니다’이다. 독자를 위한 서비스와 독자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는 양방향 사업이다. 이 두 가지 사업은 3년 정도 지속하였다. 이 사업은 민속음악 자료를 구축하여 국악 사료화 하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국악사의 중심이 바로 민속음악임을 정립하려 한 것이다. 이 점은 국악신문의 창간이념의 실천인 것이다. ‘풍류방’은 초기 고문 사진작가 정범태 선생의 자료를 활용하는 코너(사업)이다. 그러다 제48호에서 부터는 ‘비디오 천승요’가 참여하는 코너로 확대 되었다. 전자는 스틸 사진이고 후자는 동영상이다. 이는 ‘풍류방’의 활성화를 입증하는 것으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풍류방은 전통예술과 문화의 자료가 있는 곳 입니다>라는 ‘풍류방’ 코너는 이렇다. "음악 소리 춤 인물 등의 자료들은 우리 문화를 아끼는 슬기로운 이들에게 값있는 양식이 될 것입니다. 보고 싶은 자료나 찾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풍류방으로 연락 주십시오. 사진 정범태/비디오 천승요”(「국악신문」 제40호, 1996. 11. 27, 1면 하단 5단통 박스) 천승요 선생은 이 시기 프리랜서 비디오 작가로 시작하면서 국악신문에 동참한 것이다. 1976년 서울대 국악과 자료실에서 국악자료 수집을 시작한 선생은 1979년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시청각 자료실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국악인 기록작업에 들어갔다. 1996년 중반, 문예진흥원을 퇴직한 상태였다. 이때까지 선생이 기록한 공연은 모두 1만3000여 편, 테이프만 해도 4000여 개 분량이다. 여기에는 한영숙(무용) 김숙자(무용) 김월하(여창가곡) 씨 등 이미 작고한 명인들의 생애가 생생히 담겨 있다. 선생의 기록 방식은 일반 방송의 방식과는 다르게 객관적 시각에서 공연 현장을 기록하는 촬영 방식으로 민속학 자료와 예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 2014년에는 <무용 토크 콘서트 30년, 순간을 영원히, 천승요>라는 토크 공연이 있었다. 30년간의 기록 작업에 대한 회고와 후진들에 대한 가이드까지 실제 자료를 통해 소통하는 기회였다. 이후 2018년 무용 기록에 대한 학술대회(서울문화재단, 우봉이매방춤보존회 비대위 주관으로 열린 '춤문화 유산, 저작권 타당한가 토론회) 등을 주도하며 영상기록의 활용 가치를 강조했다. 이상에서 제시된 천승요 선생의 영상기록 관련 어록을 통해 입문 동기와 그 가치를 확인 할 수 있다. # "전생에 화가인 인연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는 전통예술의 기록 지식과 기록 영상자료의 현실을 그려가고 있다.” # "1980년대 1세대 명인들은 본인들의 춤을 긍지 있게 공연했지만, 무형문화재 정책 때문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춤이 통일되면서 많은 춤꾼들의 춤들이 사라져 갔다.” # "자료에서 그 예술인들의 예술혼이 보여야 진정한 자료다. 자료란 나무(매니아)를 키우는 거름이요 새(예술가)는 나무숲에서 살아야한다” # "모든 영상물 가운데 예술성과 운동성을 함께 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무용영상이다. 스포츠는 역동성과 속도감은 있지만 예술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음악이나 연극을 영상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역동성이 떨어진다.” # "통영에서 조각배를 타고 ‘통영 오구굿’을 찍다가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화면이 끊겨 버린 웃지 못할 장면도 담겨 있다. 몸은 빠졌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카메라는 배 위로 던져 필름을 구했다” # "지금 저는 30년 만에 외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료는 공개돼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동안 기록한 자료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천승요 선생은 공연자체는 물론, 무용인의 근접촬영과 공연 전후의 분위기 등도 수록하는 것이 특징으로 일반인뿐 아니라 전수받고 연구해야 하는 사람들도 참고할 수 있도록 한 기록이다. 이런 작가 정신을 인정 받아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수여하는 2003년 ‘춤비평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전통 예술 촬영에 반평생 천승요 씨’ 등의 활동상이 국내외 방송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는 인터넷 방송국(http://artskorea.tv)을 운영하고 있다. 선생은 「국악신문」 초기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분이다. 지난 2020년 김호규 대표 1주기 추모공연 ‘씻김’에 귀한 영상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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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7국악신문 편집위원 구성 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 기자들의 기본 업무는 기획, 취재, 편집, 고정 코너 집필 등이다. 그리고 이를 지원 또는 자문하는 팀이 고문이나 각종 위원회이다. 이는 상임이 대부분이나 비상임일 경우도 있다. 「국악신문」의 고문과 편집(자문)위원은 비상임으로 운영되었다. 이 기구의 존치는 「국악신문」의 운영상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즉, 광고 수주, 특집기획안(案) 제공, 취재 협조, 고정란(연재 코너) 집필진 확보, 교정 및 교열 지원 등에 직 간접적인 관여를 하기 때문이다. 이의 구성은 전문성을 전제로 하지만 대대는 사주의 인적 네트워크에 의지한 것이다. 「국악신문」의 고문과 편집자문위원단 구성은 창간부터 있었겠지만 명시적으로 지면에 표기한 것은 제37호(1996년 4월 2일자)부터이다. 이 때부터 제호 밑에 발행 일자와 호수를 기입하고 그 밑에 판권란을 두는 편집 형태가 이뤄졌다. 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發行編輯人 金浩奎 인쇄인 김영재 사진 정범태 고문 고정패널 편집위원 이명준 오형록 채치성 우실하 변영호 그림 삽화 남소유” 이상과 같이 고문과 편집위원과 삽화 담당을 표시하였다. 이 판권란은 다음 호인 38호에서는 우실하가 편집국장으로, 직위가 바뀌게 된다. 이로부터 운연과 편집 체제면에서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다. 창간 후 2년만이다. 고문 정범태에 대해서는 3회, 편집국장 우실하에 대해서는 1회에 걸쳐 이미 언급하였다. 이번호에는 가장 오래 동안 판권란에 표기 된 채치성 위원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이들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부는 전문성을 활용하기 위해 위촉한 이들이 있으나 대개는 발행인 김호규의 주변 인물들로 주요 취재 대상이거나 고정 필자들이다. 전문성 활용을 위해 위촉한 이는 사진가 정범태 고문과 삽화를 담당한 남소유 화백, 그리고 편집국장 우실하이다. 이 중 남소유 화백은 소위 ‘인사동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유명 화가 중 한 분이다. 특히 현장 누드 크로키로 명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명준 위원은 지난 해 김호규 사장의 1주기 추모행사 ‘씻김’에 참여하기도 한 오랜 지우이다. 변영호 역시 지우로 제42호부터 잠시 편집인 직위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형록은 이력이나 활동상이 미상이다. 채치성은 제98호(2000년 10월 25일자) 까지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채치성(蔡致誠, 1953년생)은 당시 KBS라디오 국악 담당 프로듀서로 국악계의 위치에서 「국악신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본보 제43호 제1라디오 ‘흥겨운 한마당 소개’에 따르면 1980년 서울대 음대 졸업 후 서울 미림중학교 음악교사로 활동하다. 1981년 KBS 공채 9기로 입사, 제1FM ‘흥겨운 한마당’ 담당 PD로 재직했다. 그리고 1997년 사직하고 프리랜서 PD와 MC로 활동했다. 비록 50분 정도의 주간 프로그램이지만 KBS의 전국 대상으로 권위와 인기를 갖고 있었다. 이후 국악FM 방송 개국으로 편성팀장, 본부장, 그리고 2013년 국악방송 사장 취임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악방송 사장 취임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국악의 대중화·세계화’라는 화두에 기여하는 계기였다. 단순히 ‘관 주도’로만 전통한류의 세계화를 밀고 가는 것에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자원, 새로운 생각들을 더해 전통문화 콘텐츠로 승부를 걸 수도 있는 계기였다. 취임을 즈음한 그의 발언에서 이에 대한 의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자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꽃분네야’ 등 국악가요 작곡과 음반 출시, 지휘자, 대한민국 작곡가상, 제15회 대한민국국악제 연출, 제37회 전국민속예술제 총연출 등의 활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본보는 ‘흥겨운 한마당’ 소개 기사, ‘채치성 편성팀장을 찾아서’ 같은 탐방 기사를 통해 권위를 확대시켰다. 현재는 유튜부 채널 ‘채치성의 국악가요TV’(GugakgayoTV)를 운영하고 있다. 채치성 편집위원은 국악신문 운영에 영향력을 준 대표적인 국악이론가이며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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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6국악신문 특집부 지난 회에서 살핀 정범태 선생의 사진과 해설로 연재된 <명인>은 이후 <정범태의 사진으로 보는 명인명창 이야기>로 100호에서 이어졌다. 이를 전후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연재물이 기획,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 역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이란 취지에 맞는 기획물이다. 바로 기산 박헌봉(岐山 朴憲鳳/1906~1977)의 <國樂運動 半生記>이다.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분재(分載) 되었다. 이 글은 원래 신동아(新東亞) 1968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이다. 42년 전의 기록임으로 재수록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결과이나, 더 직접적인 이유는 국악신문의 국악관(國樂觀)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헌봉은 민속음악 학자이면서 교육자의 상징적인 인물로 1947년 국악원(國樂院)을 선립하여 그 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를 설립, 교장을 맡은 인물이다. 박헌봉과 국악예술학교에 대한 관심은 2000년 4월 5일자 장연희 기자의 탐방 기사 <21세기 전통문화예술을 주도할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찾아서>에서도 확인되나 김호규 대표의 시론(時論)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미래와 희망>(2005. 5. 10. 제150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해방 전부터 국악진흥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한 국악이론가 기산 박헌봉과 당대의 명창인 향사 박귀희, 만정 김소희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이 민속악을 중심으로 전문교육기관을 건립하고 체계적인 보존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악예술학교의 설립 배경과 함께 한 이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의 기본적인 국악 교육관을 기술했다. 이는 김호규 대표의 국악관이기도 하여 의미가 있다. "국립국악원이 1951년 개원하고 현재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가 1955년 설립되었으나 국립국악원이 구왕궁아악사들로 중심이 되어 있었고, 민속악을 함께 가르쳤다고는 하나 국악사양성소가 그들이 주축이 되어 아악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속음악인들은 그들이 민속악 보존과 계승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뜻있는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1960년 3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의 전신이자 한국 최초의 사학 국악전문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개교한 것이다.” 이 기술에서 두 가지가 확인된다. 하나는 정악 중심의 국립국악원 부설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민속악 중심의 국악원(국악협회) 관련 국악예술중고등학교의 뿌리 깊은 반목(反目)의 배경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국악신문의 재수록 배경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제1회 연재 리드기사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핀 의도가 재확인 된다. "국악신문은 우리 음악사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우리 국악사에 큰 줄기를 마련하신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을 입수하여 연재합니다. 평생을 우리 음악과 함께 살아오며 남기신 발자취를 요악, 정리하여 연재합니다.” ‘신동아’에 처음 연재할 당시 <國樂運動 半生記> 9회 분재 제하(題下)는 다음과 같다. 이토록 민속음악의 위상 정립을 위해 노력한 이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1) 樵童의 노래 듣고 樂에 눈떠 (2) 3.1운동 후에 書堂을 하직 (3) 族譜에서 除名당할 뻔 (4) 日帝時에 朝鮮樂部를 組織 (5) 해방된 조국에서도 냉대 받아 (6) 초대 內閣에서도 國樂을 外面 (7) 자유당 때 大統領에게도 呼訴 (8) 괴로워 心火로 病席에 누워 (9) 한국 初抄로 國樂학교 設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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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5국악신문 특집부 제13회에서 밝힌대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은 국악신문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1996년 신년호 1월 23일자 제33호에 발표한 ‘96국악신문 기회사업’에 의하면 제1사업이 ‘예능보유자 인물사진 및 전통문화사진 자료 학교 보급’이다. 사업 반향이 교육에 방점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식화 한 것은 96년 들어 시작된 사업이지만 사실은 국악신문의 기조이기도 했다. 이 사업의 기본은 역대 국악인들, 그 중에서도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正位)시키는 일과 그 위상을 현장의 교육과 공연을 통해 재정립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국악신문은 세 방향을 취했다. 하나는 민속놀이에 민속음악을 위치시키고 이를 ‘국악’으로 일반화 하는 논리이고, 둘은 기사를 통해 민속음악의 역사와 가치를 제고시키고, 셋은 민속음악 명인의 추모와 기념사업 추동(推動)이다. 이는 창간호로부터 유지시켜온 기본 방향이다. 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시키는 일을 주목하기로 한다.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은 역대 명인들의 존재를 사진과 해설을 통해 국악의 기둥임을 제시하였다. 지면 기사로는 <명인>을 게재하고, 명인들의 기록(사진)을 수집하고, 자료를 교육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중에 <명인>은 표3 전면을 통해 연재를 했다. 사진의 작품성(Quality)로나 해설의 내용면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사진과 해설을 정범태 선생이 맡았는데, 최고 명성의 기록 사진가로서 1세대 명인들을 직접 촬영한 원로라는 점에서 특징이며 강점이었다. <명인>은 씨리즈 넘버링(Numbering)이 되어있지 않고 결호(缺號)가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현재로서는 제40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40호를 전후하여 신문사는 종로구 와룡동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전하고, 편집은 당시 연세대학교 박사과장에 있던 우실하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시기이다. 신문사의 이런 변화 중에서도 단영 지면의 개선이고 그 중에서도 <명인> 면은 연재는 돋보인다. 소위 와이드 기사로 전면 통이다. 우선 사진이 내용의 보완재가 아니라 주제로 처리되어 시원하여 가독성을 높여 준다. 사진과 해설 집필은 편집고문 정범태이다. 제40호의 16면 <명인>은 "민초의 한 안고 유랑 예인 생활 60년 김재원”이다.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이다. 사진은 김재원 선생이 담배대를 물고 두 번째 과장인 버나 접시를 돌리는 장면을 게재했다. 제41호는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김병섭은 우도농악의 꽂깔설장고의 명인으로 김호규 대표의 부친이다. 9년 전의 생전활동 사진을 수록하고 정읍 고향에서 11살부터 농악의 길을 걷고 30여년을 우도농악 2세대 명인으로 산 역정을 기술했다. 제42호는 "진도씻김굿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김대례”이다. 제42호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다. 이후로 가야금 병창 박귀희, 호남농악 채상소고 백남윤, 진도북춤 박병천 명인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재확인이 되는 것은 <명인>의 대상은 정악 보다는 민속악에 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이고,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실질적인 세평(世評)의 명인까지 포괄 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제도권적 시각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을 알 수 있다. 해설 내용은 필자 자신이 직접 만난 명인들에 대해서는 이력보다는 종목의 고유 가치나 유사 종목과의 변별성을 중심으로 기술했고, 선대 명인의 경우는 기존 이력과 사승(師承)관계, 당대 평가 등을 저널리즘적인 토픽 위주로 기술했다. 1997년 3월 16일자 제50호에서 "판소리 흥보가 명창 장월중선”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명인> 코너는 장기 기획물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역대로부터 현역의 명인 명창을 주목한 기사는 이후 다양한 코너와 특집형식으로 계속 기사화 되었다. 주요 편집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명인> 기획 기사는 당시 다른 매체 기획 기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의미있는 기사이고, 오늘의 빅데이터 시대에도 주목되는 텍스트이다. 결국 이 <명인> 코너는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이면서 국악신문의 독보적인 기획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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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김호규 1주기 추모 공연 '씻김' 온라인 중계우리나라 최초 국악 전문 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국악인인 김호규 선생 1주기를 맞아 고인을 추모하고 생애를 재조명하는 국악공연이 마련된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오는 28일 오후 7시 기획공연 '씻김'을 재단 유튜브와 네이버TV를 통해 선보인다고 22일 밝혔다. 김호규 선생은 1959년 전북 익산에서 우도 설장고 명인 고 김병섭의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94년 9월 7일 우리나라 최초 국악 전문 신문 '놀이문화'를 창간하고, 이후 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해 25년간 293호까지 발행했다. 후학들을 위해 2016년부터 3년간 국악로전통문화학교를 운영했으며, 농악명인전, 차세대 명인전, 전국 국악 경연대회 등을 개최해 국악 대중화에 앞장섰다. 이번 공연에서는 진도씻김굿보존회가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의 한 종류인 '소상씻김굿'을 선보인다. 소상씻김굿은 망자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1년 탈상굿이다. 김병섭류설장고보존회는 설장고 공연을,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과 제자들은 '수심가와 산염불, 자진염불'을, 진도씻김굿 및 승무 이수자 강은영은 북춤을 선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www.chf.or.kr)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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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웅수, "그 분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김호규 1주기 추모사지난 21일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린 국악인 故김호규 1주기 추모 「씻김」에서 (사)한국국악협회 임웅수 이사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분들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적게나마 김호규 선생을 기억하는 분들이 모였는데, 정작 김호규 선생은 이 자리에 안 계시다는 게 참 서글픕니다. 선생과 알고 지낸지도 어느새 40년 가까이 됐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형동생처럼, 친구처럼 함께했던 분인데 그 분의 추모사를 제가 하게 될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 분과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86년 저는 ‘마당 풍물놀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지도하고 활동했는데 어느날 낯선 젊은 분이 분장실로 들어오더니 농악을 배우겠다고 했습니다. 김호규 선생이었습니다.당시 선생은 인천의 어느 쇠 가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 차가운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한 번도 수업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손가락 마디가 절단됐지만, 반쪽 밖에 안남은 손가락으로 열채를 잡고 힘겹게 당신의 아버지가 치셨던 가락을 하나씩 기억해가며 따라했던 그 분의 열정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언젠가 김호규 선생이 제게 말했습니다. 국악신문을 만들겠다고…. 그때만 해도 국악인들에게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신문이란 굉장히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국악인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쓴 소리 하고, ‘국악인들이 다 굶어죽겠다. 나라도 나서서 지지하고 위로해서 국악인들의 치어리더가 돼야겠다.’ 했던 그 뜨거운 열정에 저는 응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국악인들에게 신문을 제대로 돈 주고 팔 수나 있었겠습니까. 추운 겨울,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국악인들에게 건네러 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종로에서 김호규는 불나방 같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국악사, 의상실, 연구소 등등 이곳저곳 다니면서 소식을 전하는 그는 뜨거운 불나방이면서 국악인들을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가 없는 종로는 이제 텅 빈 듯합니다. 저는 이분이 이렇게 허탈하게 갈 줄은 몰랐습니다. 항상 소탈하게 웃는 분이었고, 얼렁뚱땅해보여도 가슴이 뜨겁고 따뜻했던 분이었습니다. 지금 국악협회가 많이 어렵습니다. 만약 김호규 선생이 지금 계셨더라면 국악협회의 난관도 함께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빈자리가 몹시 크게 느껴집니다. 제가 27대 이사장 선거에 나왔을 때, 뇌경색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서 응원의 말을 건네줬던 호규 형…. 그가 보고 싶습니다. 제가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국악인들이 주변부에 머물 게 아니라 종로, 명동, 강남 등 사대문 안으로 들어와 중심에 서야 한다셨습니다. 그 분의 의지를 저와 국악협회와 국악인들이 함께 이어가겠습니다. 차가운 공장에서 쇠를 깎다가 국악계로 와서 국악인들을 단합시키고 융합시키고 긍지를 갖게 했던 그 분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제는 그분이 좋은 곳에서 부디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대면으로 진행된 공연은 오는 12월 28일 오후7시, 한국문화재재단 유튜브와 네이버tv 채널에서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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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5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의 사시와 창간이념을 바탕으로 한 언론사로서의 지향성은 기사와 사업과 발행인의 발언 등을 통해 실현된다. 지난 회에서는 사시를 확인한 바 있는데, 이번 회에는 3년간의 신년사를 통해 국악신문의 지향정신을 살피기로 한다. 모든 기관 단체나 기업은 구성원을 대상으로 새해의 설계를 제시한다. 신문은 지면을 통해 축시나 저명인사를 통해 구성원과 독자들에게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국악신문 역시 매년 1, 2면을 통해 유관 단체장과 발행인의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 중에 창간 3년까지의 신년사를 대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년 총 48호는 주간신문 언론사로서의 체재는 정립된 시점이다. 1995년 1월 17일자 제10호, 1996년 1월 23일자 제33호, 그리고 1997년 1월 28일자 제48호 신년사를 살핀다. 제10호는 1995년으로 창간 후 맞는 첫 신년으로 광복50주년이란 뜻깊은 해이다. 1면과 2면을 할애하여 5인의 신년사를 게재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1면은 당시 이성림 18대 국악협회 회장의 신년사를 수록했다. 2면에는 김호규 발행인, 허규 창우극장 대표, 김선봉 봉산탈춤 예능보유자, 황재기 국악협회 농악분과위원장의 신년사를 수록했다. 이성림 이사장의 신년사는 당시로서는 협회 기관지로서의 기능을 겸했기 때문에 유일한 발표 지면이었다. 1면이 할애가 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는데, "우리의 문화유산인 국악의 메신저 국악신문을 통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전 분야의 화두였던 ‘세계화’에 대해 주체의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전제로 "찬연하게 계승되어 온 문화유산의 역사적 의미를 주체화 할 때 국악은 그 중심에 있고 문화의 집결체임으로 국악을 통한 전통문화 진흥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말미에서는 "국악계는 물론 문화계 전체의 소중한 자산으로 국악예술의 대변자”라고 국악신문의 위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국악신문 발행인으로서의 신년사는 처음이다. 김호규 발행인은 <국악인 모두가 보급과 교육에 힘을 다하는 해가 됩시다>라는 제하의 신년사이다. 먼저 지난해 ‘국악의 해’가 국악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였다고 긍적적인 평가를 했다. 그리고 그런 국악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부응하여 국악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먼저 밝혔다. 이어 국악교육의 문제점으로 "어렸을 적부터 서양식 음악교육을 받아 온 사람이 국악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편향성은 방송현상도 마찬가지라고 하며 "현재 각 방송국의 국악 편성을 보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형식적인 구색만 갖추고 있어 국악 발전을 위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악인과 국악단체가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국악신문의 1995년의 신년사는 국악교육과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향으로 내세운 것이다. 1996년 신년호는 1월 23일자 제33호이다. ‘96년 국악신문 사업계획’ 8개항을 발표한 해이다. 신년사는 국악협회장과 발행인 두 편이 수록되었다. 역시 1면에 국악협회 이사장 이성림의 신년사를 게재했다. 발행인의 신년사는 제2면에 수록하였다. 이성림 이사장은 "전통이 확립되는 해, 민족예술이 꽃피우는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이어 지난 신년사에 제기했던 세계화의 전제는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인식의 주체화라고 하였다. 그리고 국악신문을 ‘국내 유일의 국악전문지’라는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발행인의 신년사는 우선 ‘국악의 해’ 열기가 국악 보급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였다. 그리고 ‘세계화’보다 현실적인 용어인 ‘국제경쟁력’을 위해 민족문화의 주체화가 우선한다고 전제했다. 이를 위해 방송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악을 발전시키려면 문화대국을 자부하는 프랑스와 일본을 배워야겠다.”라며 ‘문화예외론’과 ‘샹송 쿼터(quarter)제’를 제시했다. 전자는 문화는 일반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프랑스가 실시하는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40%는 반드시 프랑스 샹송을 송출해야 한다는 문화정책이다. 그리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국악진흥법’ 제정을 주장하며 "국악진흥법을 제정하여 교육법을 보완하고 언론 매체의 전통문화 프로그램의 대대적인 개편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 가지 제안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대안인 것이다. 1997년은 ‘문화유산의 해’로 신년호는 1월 28일 제48호로 발행했다. 신년사는 제2면에 두 편이 수록되었다. 국립국악원 이성찬 원장과 발행인의 신년사다. 이성천 원장은 <전통문화 계승보존 활성화 해>라는 제하로 정부가 선정한 ‘전통문화의 해’에 대한 의의를 전제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전통문화와 예술을 향수해야 한다.”고 했다. 발행인의 신년사는 <우리의 문화 그 멋을 찾아서>라는 제하이다. 전통문화 전승 보존을 국악신문 창간 이념이라며 "우리의 전통적이고 자랑스러운 문화예술을 발굴하고 보존하며 후손에게 전승시키기 위해 전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전국에서 활동하는 국악 전승 단체에 대해 "국악신문사는 전통문화예술의 홍보지로서 전국 방방곡곡, 음지와 양지에서 가꾸고 애호하는 국악인과의 대화의 광장으로서 등불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겠다.”고 했다. 이상에서 창간 이후 3년에 이르는 신년사를 살폈다. 이를 통해 확인 되는 것은 발행인의 직접적인 발언을 통해 신문사의 경향성을 파악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첫 신년사는 국악 교육 개선을 지적하며 국악신문 자체가 교육자료 발굴에 노력할 것임을 제시했다. 둘 째, 1996년 신년사는 문화대국의 ‘문화예외론’과 ‘샹송 쿼터제’, 그리고 국악진흥법 제정을 통해 음악교육 개선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셋 째, 전통문화 전승 보존을 위해 국악신문이 전국의 국악인들과 대화의 광장으로서 등불을 밝히는 길잡이 역할론 자임이다. 이 같이 신년사에서 발행인이 밝힌 것은 국악신문사의 사시와 창간이념의 실천을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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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故 김호규 1주기 추모 '씻김' 온라인 상영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이 오는 12월 28일(월) 저녁 7시 기획공연 '씻김'공연을 온라인 중계한다. 우리나라 최초 국악 전문 신문 ‘국악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국악인 故김호규의 1주기를 추모하며 그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전통예술 국악공연이다. 전통 장단과 우아한 춤사위가 한 데 어우러진 종합 예술로서의 ‘굿’ 소상씻김굿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인 진도씻김굿의 한 종류로 죽은 망자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1년 탈상 굿이다. 망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준다는 의미로 씻김굿이라 부른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 요소가 뛰어나, 전통 사자의례를 넘어 예술 공연으로 변모하고 있다. 진도씻김굿 보존회가 19개 거리로 진행하며, 이번 공연 추모의 주인공 故김호규 선생 아버지인 명인 김병섭류 설장고 보존회가 무대를 준비했다. 더불어,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과 그의 제자들이 펼치는 ‘수심가와 산염불, 자진염불’, 진도씻김굿 이수자 및 승무 이수자 강은영이 펼치는 북춤 등 각종 국가무형문화재 진수들이 펼쳐진다. 진도씻김굿으로 추모되는 국악인 김호규의 생애 또한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임웅수의 추모사를 통해 김호규의 인생을 재조명한다. 김호규는 1959년 전북 익산에서 우도 설장고 명인 故 김병섭(1921~1987)의 3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1994년 9월 7일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해’를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 전문 신문 ‘놀이문화’를 창간했다. 이후 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25년간 꾸준히 293호까지 발간하며 전통문화 국내외 홍보에 기여했다. 후학들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마련을 위해 2016년부터 3년간 국악로전통문화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농악명인전, 차세대 명인전, 전국 국악 경연대회 등을 개최하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12월 11일 운명한 고인의 서거 1주년을 기념하여 씻김굿 공연으로 추모한다. 온라인으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재재단 유튜브와 네이버tv 채널을 통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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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송별회, 그러나 따뜻한 안녕!종로3가 국악로, 거기서 ‘~형’이나 ‘형수’ 소리가 들리면 그건 열에 아홉은 그의 목소리다. 김호규, 국악신문 사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1년이 지났다.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누구나 기억되지 않는다. 누구나 기록되지도 않는다. 김호규는 기억되고, 기록으로 남는다. 국악인으로, 언론인으로, 문화운동가로. 풍류의 태토 정읍에서 태어났다. 설장고 명인 김병섭의 아들로 자랐다. 국악예술고등학교를 나와 장고를 멨다. 그러다 돌연 독보적인 길을 걸었다. 국악신문 편집 겸 발행인 ‘김호규의 길’이다. 오늘 그를 회고하고, 추모하는 모임이 있었다. ‘국악신문 창간자 故 김호규 1주기 추모 소상씻김’이다. 진행자 진옥섭이 눈물지어 회상했다. 장남 김하늘이 꿋꿋하게 해적이를 풀었다. 마지막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발행한 293호 1면 기사 주인공 임웅수가 후배로서 추모했다. 여건상 모임은 조촐했다. 참석한 지인들은 잔 올려 재배하며 영 이별을 고했다. 가까운 예인들은 악가무로 위로했다. 씻김 과장은 넘치도록 충분했다. 쑥물 향물 청계수로 씻겨서 넋풀어 넋올리고 길닦음으로 배송했다. 여보게 호규, 지난 해 황망히 보낸 서운함을 오늘에서야 풀게 되었네. 우리의 따뜻한 마음 잘 받았겠지. 그랬다면 마음 놓고 가게나. 자네가 남긴 ‘국악신문’, ‘국악 사랑’ 잊지 않고 기리겠네. 내내 내일은 국악로에 가서 내가 먼저 "김호규 사장~”하고 불러 보겠네.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그대 어디 있는지 아니까! "김호규 사장~”(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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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국악신문 故김호규 1주기 추모제 <씻김>한국문화재재단은 국악신문 창간자 故김호규 선생의 1주기 추모굿 <씻김>을 12월 21일 오후 3시 민속극장 풍류에서 거행한다. 행사에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외부인사 초청 없이 출연자와 관계자, 유족만 참석하며 28일 오후 7시에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으로 공개된다. 김호규 선생은 1959년 전북 익산에서 우도 설장고의 명인 故김병섭(1921~1987)의 3남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림자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프레스 공장을 다니며 국악을 외면한 채로 자랐다. 1987년 아버지를 여의고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풍물동아리 활동으로 국악에 대한 운명과 이끌림을 느낀 김호규 선생은 1994년 국악의 해를 맞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악전문 신문인 ‘놀이문화’를 창간하였다. 제8호부터는 ‘국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국악을 위시한 전통문화 소식을 전하며 2019년 9월 25일 제293호까지 25년 동안 꾸준히 발간하였다. 행사는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 진옥섭 사회, 공연기획팀 감독 박경진 연출로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보존회(예능보유자 박병원)의 소상씻김이 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추모사와 추모공연이 이뤄진다. 추모사는 (사)한국국악협회 임웅수 이사장이 맡았으며 공연으로는 △김병섭류 설장고 보존회(황해경, 이두성, 이순조, 최수옥, 전은수)의 설장고, △유지숙, 김유리, 류지선의 서도소리 ‘산염불, 자진염불’, 강은영 진도씻김굿 이수자의 북춤 등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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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3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의 사시는 창간이념이다. 신문사 사주의 경영철학이나 경영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신문사의 경영방침이나 사원들의 행동지침으로 구체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언론사임으로 대개는 진실, 공정, 정의 등 언론의 역할과 관련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일반 회사 사훈(社訓)과는 다르다. 예컨대 인화(人和)라든지 단결, 사랑 등의 키워드로 이익창출을 독려한다. 신문사 사시는 대개 단문형(슬로건형)과 문장형으로 이뤄진다. 전자는 1면 제호 위나 밑에 매일 싣고 있으나 설명체 사시는 특별히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시는 대부분 창간 때 제정된다. 창간사와 함께 창간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창간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통일이라는 단어는 옛 신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88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창간된 일부 신문은 사시로 채택한 예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종교재단과 관련된 신문의 경우에는 당연히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들이 내세운 사시가 실제 보도에 있어 얼마나 충실히 지켜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사시가 종사자들의 개인적 가치관과 합치되고 신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때 의미를 갖는다. 사시를 통해 그 신문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위 10대 일간지(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한겨레신문·문화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서울신문·국민일보·세계일보)라고 하는 메이져(major)급 신문사의 사시는 독자에게 신뢰를 얻고, 소속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도 하기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단문형과 문장형 사시를 갖고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살펴본다. 조선일보는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과 방응모(方應謨/1883~1950) 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사시는 지난 세월 동안 조선일보의 흔들림 없는 이념과 지향점이 되었습니다.” 제정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정의옹호(正義擁護) 문화건설(文化建設) 산업발전(産業發展) 불편부당(不偏不黨) 자신들을 ‘민족지’로 내세우고 정의를 통해 문화를 새롭게 세우겠다는 의지와 산업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어디에 치우침이 없겠다는 네 가지 슬로건을 사시로 하였다. 이는 1920년 창간 단시 제정한 사시를 100년간 유지하고 있다. 다음 중앙일보 사시다. 사주 이병철(1910~1987)에 의해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자는 뜻으로 제정했다고 한다. 1. 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을 환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 2. 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를 구축한다. 3.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실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한다. 이 중앙일보 사시는 설명형 사시의 전형이다. 1965년 창간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유지되는 사시다. 진실을 통해 밝은 미래를 이끌고, 경제후생으로 복지사회를 견인하며,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살핀 두 신문의 창간이념대로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는 독자의 평가일 뿐이다. 국악신문의 사시는 창간호에서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단문형이 제시되었고, 산발적으로 유사한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창간사와 발행인의 발언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시는 창간 당시의 시대상에 그 배경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의 흥행 여파, 1994년 ‘국악의 해’와 ‘국악의 거리’로 제정, 첫 ‘한국방문의 해’ 제정이 그것이다. 국악의 재발견, 국악의 가치 발현, 그리고 국악의 세계화를 이슈화 한 시대였다. 이런 배경에서 창간함으로서 사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 2. 놀이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악을 중흥시킨다. 3. 민속음악의 생활화에 기여한다. 4. 국악인 공동체를 지원한다. 이 사시는 제호와 창간사 내용과 발행인의 발언, 그리고 산발적으로 제시한 캐치프래이즈를 통해 정리한 것이다.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에서도 언급했듯이 ‘전통놀이=민속음악=국악’이란 개념과 국악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를 국악 전승 공동체로 이해한 기조에 기인 한다. 결국 국악신문 사시는 민속음악을 국악의 중심에 두고, 교육과 생활화에 기여하며, 국악 공동체 지원 실천을 표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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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놀이문화》 시대(2)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창간 이념 1984년 09월 07일 창간, 제호(題號) 《놀이문화》, 캐치프래이즈(Catchphrase)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 창간사(創刊辭) 발행인 김호규 명의 6개 문단 17개 문장, 총 지면 16면, 이에 의한 창간이념(創刊理念)을 다음과 같이 표방했다.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을 구현하는 신문’ 새마을운동 성취에 의한 ‘한강의 기적’,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성공적 개최에 의한 국제적 위상 제고, 이의 자부심으로 선포한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 해’에 대한 희망이 표방된 창간이념이다. 그래서 ‘삶’, ‘정보’, ‘공동체’가 키워드로 제시된 것이다. 창간사는 17개 문장 6개 단락으로 구성되었다. 첫 문장은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생활해 온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흥겹고 신명나는 각종 놀이문화를 생활 속에서 구현해 왔습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만 요란하고 겉모습만 화려한 빈 수레이기를 거부하고, 비록 규모는 작지만 풍성한 수확물로 그득찬 소쿠리 역할을 당당히 해 나가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끝맺는다. 삶의 풍요는 농경문화의 신명을 현재화 하는 것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풍성한 정보를 담는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각오의 피력이다. 첫 문단은 우리의 마을 공동체 결속은 농악·탈춤·마당놀이·백중놀이 등의 춤과 소리에 의한 신명에서 비롯됨을 강조하고 이의 구현을 ‘삶의 풍요’로 규정했다. 두 번째 문단은 ‘우리의 춤과 소리에 의한 전통문화가 서양문화 선호 인식에 점령당한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과 함께 이의 ‘보존과 전승을 재주꾼들의 기교에 맡겨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 단락은 《놀이문화》는 이 지적을 해결하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창간한다고 밝혔다. 네 번째 단락은 ‘전통과 현대의 이상적 조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섯 번째 단락에서는 대안 제시와 실천을 촉구하는 매체로서 ‘변변한 국악 관련 잡지나 신문이 없다’고 하며 국악계의 관심으로 신문을 창간하다고 부연했다. 여섯 번째 문단에서는 문화예술 ‘균형 발전을 위해 정서함양 및 가치관 확립을 위한 전문지를 꾸려간다’고 했다. 최종 단락에서는 ‘규모는 작지만 풍성한 정보를 담는 소박한 신문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이상의 창간사를 요약하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중반 전통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수용하여 창간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전통문화의 핵심인 공동체 결속 요소를 춤과 소리에 의한 신명으로 보고, 그 중심을 농악·탈춤·마당놀이·백중놀이 같은 놀이문화로 보았다는 점이다. 셋은 다소 편중된 시각에서, 88올림픽경기 개회식 공연 고싸움놀이와 1993년의 영화<서편제> 흥행 성공에 의한 민속놀이나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정중한 정재(呈才)나 장중한 정악(正樂)보다 신명나는 민속놀이와 음악을 더 선호한 배경을 반영한 것이란 점이다. 마지막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신명(神明)을 오늘의 풍요로운 삶에 불어넣는 도구가 바로 전문지(專門紙)임을 확신하고, 그 소임을 사명(社命)으로 한 사실이다. 이상의 네 가지 사실은 《놀이문화》 창간사가 담은 시대정신인 것이다. 창간호의 백호(白蒿)는 창간사이다. 창간사는 수정(修訂)과 수정(修整)에 의한 수정(水晶)이다. 창간사의 생명은 시대정신에 있다. 《놀이문화》는 나름의 시대정신을 사시(社是)에 반영한 언론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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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5《놀이문화》 시대(1)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창간호 2020년 9월 7일, 《국악신문》은 지령 26년을 맞았다. 1994년 09년 07일 창간으로부터 기산한 나이다. 그런데 창간 당시의 제호는 《국악신문》이 아닌 《놀이문화》이다. 이 제호는 제7호까지 유지되다가 제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변경하였다. 지령을 승계한 것이다. 제호가 변경되면 성격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지령을 승계하면 동일체로 인정한다.* 창간호는 첫 번째 발간호로 초호(初號) 또는 수호(首號)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가 포함된 것은 그만큼 창간호에는 간행물의 정체성과 미래상을 제시하며 정성과 노력과 실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창간시기와 창간사가 가장 중요하다. 우선 1994년 9월을 창간 시기로 잡은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신문의 성격이 좁혀진다. 네 가지가 중첩된다. 하나는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임권택 감독)의 흥행 여파이다. 단성사에서 4월에 개봉하여 196일 동안 1백만 관객을 동원시키는 저력을 일으켰다. 이에 의해 판소리 같은 민속음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였다. 둘은 1994년 10월부터 2달간 ‘국악의 해’ 로 제정되어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전국적인 국악공연과 경창대회가 붐을 이루었다. 셋은 이 ‘국악의 해’와 연계한 첫 ‘한국방문의 해’(위원장 황병기)가 제정되어 모든 해외공관이 동원된 해이다. 국악이 우리 민족의 정서를 진솔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개방화의 물결을 타고 들이닥친 서양음악에 밀려 오랫동안 방치된 채 홀대를 받아왔다는 점에서 국악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 이를 관광객 유치의 계기로 삼자는 취지에서다. 넷은 종로3가 단성사와 창덕궁 중간의 4거리 일대를 ‘국악의 거리’로 제정, 선포하는 해이다. 이미 1992년부터 준비되어 온 것을 공식화 한 것으로, ‘국악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10월에 선포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국악 부흥의 계기를 맞은 1994년은 국악계로서는 한국의 정체성에 전통음악은 있는가라는 자성과 함께 대대적인 잔치를 준비하게 되었다. 국악이 전통문화 분야에서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는 계기였으니 활성화를 위한 여러 방안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 창의적 발상을 한 것이 전통음악 전문 대변지의 창간이었다. 이 시기 유형문화재 중심의 전통문화 관련 잡지와 팝송과 서양 클래식 전문지는 있었어도 전통음악 전문지는 없던 상황이다. 《놀이문화》의 창간은 이런 정황에서 탄생한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사시(社是)를 표방한 《놀이문화》 창간호는 타브로이드판 흑백 총 16면, ‘발행인 김호규’ 명의의 창간사가 제1면을 장식했다. 발간 배경과 취지는 물론 발행인으로서의 경영방침도 담겼다. 제1면은 창간사와 목차 그리고 3개의 광고를 배치했다. 제2면은 <풍물기행>이란 제하에 ‘농악’에 대해 해설했다. 3면은 <여행 스케치>로 경기도 가평의 관광지 명지계곡을 안내했다. 4면은 <동호인 동정>난으로 탈춤 단체 ‘탈벗’을 소개했다. 5면은 공연소개 난으로 동학 100주년 기념작 뮤지컬 <꿈꾸는 기차>를 소개했다. 6면은 영화와 비디오를 소개하는 난으로 영화<태백산맥>을 소개했다. 7면은 <문화가 산책>으로 미술분야 행사 등을 소개했다. 8~10면은 레져 분야 전면 광고와 관련 기업체를 소개했다. 11~12면은 학술면 성격으로 민요와 굿 음악을 소개했다. 13면은 본지 《놀이문화》를 소개하고 지사 모집을 안내했다. 14~15면은 오락과 스포츠난으로 배정했다. 16면은 광고성 기사로 ‘한국국악사’를 소개했다. 모든 기사는 무기명이다. 전 16면 모두 하단은 5단 통광고로 배치했다. 이렇게 《국악신문》 창간호는 우리 국악사 초유의 국민적 관심 속에서 옥동자의 하나로 탄생하였다. 국악인 35세 청년 김호규라는 한 선각자의 발상으로부터다. 이후 제호를 변경하여 정체성을 다지며 4반세기를 넘겨왔다. * 예를 들면 1945년 11월 23일 창간한 《서울신문》이 1998년 11월 11일 《대한매일》(大韓每日)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2004년 1월 1일 《서울신문》으로 환원했다. 이 같은 변경과 환원에 있었어도 그 지령을 승계하여 동일체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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