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KBS우수 프로그램상, 3.1절 특집 다큐<br> '외면의 기록, 생존자'. 촬영상 수상한 강주진 감독KBS 3.1절 특집방송 '외면의 기록-생존자'가 3월 1일 방영되었다. 이 다큐를 제작한 KBS대전총국(국장 심각현) 제작팀이 KBS우수 프로그램상을 수상했다. 박지현 작가 강주진 촬영감독이 1년간 국내외 강제징용 피해자 중 생존하고 있는 14명을 찾아가는 과정과 진술을 다큐로 담아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136명이 사고로 수몰된 조세이 탄광 (해저탄광)을 비롯해 방직공장, 군부대, 비행장 등 곳곳으로 강제 동원된 피해 생존자 14명에게 듣는 역사의 기록이다. 제작팀은 코로나가 심했던 2022년 초부터 1년 동안 강제동원 현장 조세이탄광, 미이케탄광, 하시마탄광을 찾아서 피해자들의 고난과 상처를 다시금 새기고 기억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여전히 사과와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무거운 경종을 울렸다. 본지와 인터뷰 과정에서 강주진 촬영감독은 "지난 2019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다녀 온 후 강제징용에 대한 다큐를 접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서 만나본 생존자들의 증언은 말로 다 담아낼수 없었다. 그나마 이 다큐에서 징용된 피해자들 중 생존자 14명의 기억 속에 생생한 '그날의 기억들'을 기록한다. 부디 이 기록을 통해 피해자들이 '외면' 당한 아픈 과거의 '내면'을 공감하고, 역사 진실 규명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라고 전했다. 피해자들은 모집 공고에서 숙식 제공은 물론 학업을 이어가게 해주겠다던 약속과 달리 현지에도착해서 마주한 것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시간이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이 독립한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아픔과 여전히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도 짚어 본다. 또 일본 나가사키시에 있는 '일중우호 평화부전의 비'에 조선인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고 80년 넘게 외면하는 일본의 민낯을 고발한다. 지난 1년간 14분의 생존자들을 직접 만났고 그들의 생생한 기억들을 카메라에 기록했다. 106살의 류기동 할아버지부터 101살, 100살, 99살, 98살... 이제는 초고령의 나이로 한 걸음 내딛기도, 한 마디 꺼내기도 힘든 노인이 된 생존자들... 하지만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어쩌면 이 기록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한일 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해결을 위해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지금! 생존자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 진심을 다한 사죄와 배상이다. KBS대전 개국 80년 UHD특별기획 '외면의 기록 - 생존자'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ekaXhQtEjQc)은 KBS대전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사할린 한인 2세가 부르는 서러운 아리랑사할린한국교육원장 3년간 업무를 마치고 귀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사할린 동포들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불렀던 아리랑 선율에 따라서 부른 개사한 노래를 불러본다. 교육일지와 사진 속에 있는 사할린 동포 2세들의 얼굴들을 떠 올려본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간절한 소망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포들의 뼈져린 한은 영주귀국으로 조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가신지 30년이 지나고 이미 영주귀국 후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2세대 자녀 한명과 그 배우자를 영주귀국 대상으로 확대되었다.(2021년) 그 이전까지는 풀릴 기미가 없이 가슴 아프게 지속되었다. 1세대 부모가 사망한 2세대 자녀들에 대해서는 현재 법적으로 영주귀국이나 귀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적 취득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술김에 흥얼거리는 아리랑이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자랐고, 한국의 전통 풍습과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에서 가져 오거나 사할린에서 만들어 쓴 조선의 생활물품을 늘 보고 쓰며 아버지, 어머니 따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 냉전의 시기를 살아 왔다. 해방 후 냉전 시기에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되어 감시 당하며 사회주의 소련땅 사할린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신분이었다. 이동과 취업, 인간으로서의 권리적 측면에서 차별과 멸시는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보도되면서 급격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차별과 수모에 대해서는 늘 대화의 끝에 "정말 숱하게 멸시를 받았어." 하시며 푸념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오죽했으면 한인 2세대인 사할린태권도협회 안수학 회장은, 어린 시절 차별과 수모에 반대하여 싸움을 자주 했고, 김치 냄새난다고 놀리는 러시아 아이들 혼내주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으며, 한러수교 후 태권도를 다시 익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지 않고 평생 무국적으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2세대 자녀들은 귀환을 믿으며 굳건히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냉전과 사회주의 시절을 살다가, 한국의 발전상이 사할린에 알려지고 사할린 한인의 존재와 귀환의 문제가 공영방송을 타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사실 한-러 수교 이전에도 KBS사회교육방송(현재 한민족방송)에서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이 고국의 친지에 전하는 사연들이, 일본으로 이중징용 되어 재일동포가 된 지인을 통해 전달되어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냉전 시기에 관심도 지원도 교류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199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국방문이 이루어질 때 한국에 다녀오신 1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귀국 희망 신청이 이루지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기에 생존해 계신 1세대분들은 영주귀국을 희망하고 신청하여 고국에 오셨지만, 사망하신 1세대분들은 영영 통한의 그리움 안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그 섬에 묻히셨다. 사할린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이중 징용된 1세대 부모를 둔 2세대 자녀들은,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일본의 한 공동묘지에서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기도 하였다. 이 얽히고 설킨 일제 강제징용과 식민시대의 압제와 희생,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외면 당한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분들에겐 실로 삶 전체가 버겁고 서러운 현실이다.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주귀국 확정 전에 부모를 잃은 2세대 분들의 원한을 내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사망 등 다양한 사유로 영주귀국 신청을 하지 못한 1세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희망에 따라 영주귀국의 기회와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적 취득이나 경제적 지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 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범위의 2세대 분들 중에는 현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수령하는 분도 있고, 홀로 사업을 일으킨 분도 있으며, 이미 사할린 사회에 인정을 받은 문화 예술 공로자도 많다.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한다면 자녀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많다. 따라서 그런 범위의 모든 2세대 분들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국이 풀어주지 못한 부모의 원한을 보며 겪으며 성장하고 기억하는 자녀들의 소망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국에서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고통과 설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유치원에서 25년간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2021년 영주귀국 신청으로 한국에 오신 2세 전영희 선생님은, 어머니가 2004년 병환 중에 영주귀국을 하셨지만 대한민국 국적이 나오기 전에 병원에서 사망하셔서 한국 국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전영희 선생님은 영주귀국 대상이 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주귀국 하시는 1세분과 재혼을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2021년 11월에 영주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배우자께서 역시 국적 취득 전에 별세하셔서 국적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화가 난다. 영주귀국 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사후에라도 국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야 자녀에게도 법적으로 고국에서 살아 볼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이 국적을 받기 전에 별세하여 배우자의 국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내는 다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너무나 법 적용이 허술하고 냉혹하다. 유독 사할린 한인, 사할린 동포들에게 더 냉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주귀국 허용된 2세 분들 중에는 한국어에 서툰 분들이 많고 일상 생활, 행정적 처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고국 정착 과정에 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한국어 교재를 다시 가져와 드린 적이 있다. 정착 지원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KBS한민족방송이 주관하는 한민족체험수기대회에서, 2021년(사할린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 2022년(유즈노사할린스크 김경순) 성인 부문 대상을 모두 사할린 2세대 한인 어르신이 수상하셨다. 2021년 수상자 박영자님은,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중징용 되셨다가 끝내 일본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던 기막힌 디아스포라가 담긴 가족사를 글로 남겼다. 수상 인터뷰에서 "KBS가 주는 이 대상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사할린 한인 전체에 주는 상"이라며 "사할린에서 다시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으로 끌려가서 타국에 묻히신 외할아버지께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하셨다. 2022년 수상자인 김경순님은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90년대 중반 병든 노부모가 한달 간의 모국방문에서, 50년 만에 아들과 상봉 후 다시 이별하여 사할린에 돌아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영주귀국 신청을 해보지 못한 서러움에 관한 처절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쓰셨다. 특히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시간에 배운 가수 조용필의 노래(그 겨울의 찻집)와 주병선의 노래(칠갑산) 가사를 바꿔 부모에 대한 기억, 조국 귀환에 대한 부모의 열망, 부모님과 10살 아들(김경순님의 오빠)과의 이별 장면 등을 가사에 담아 내게 보내셨다. 그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불러 보았는데, 부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터져 한참 후에나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영상들을 김경순님께 내가 보냈고 김경순님은 한국의 조카들(큰 오빠의 자녀)에게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 조카들로부터 아버지 어린 시절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박영자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김경순님의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사연은, ㈜국악신문과 새고려신문과 ‘우리말방송’에도 게재되고 방영되었다. 김경순님 사연은 KBS한민족방송에서도 사할린과 전화로 연결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나도 방송에 출연하여 사연과 노래 가사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 1992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현재까지 4,700여 분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2021년부터는 '이미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의 2세대 자녀 1인과 배우자가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사신다.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들을 ‘사할린동포’라고 정의한다. 이분들이 영주귀국이 허용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이다. 따라서 사할린에서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자란 언니, 동생, 친구라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영주귀국 지원 혹은 희망과 신청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주귀국 사업 개시 당시 생존하는 1세대 한인에 한하여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신청 및 허용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영주귀국 사업과 신청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부모를 둔, 2세대 사할린 한인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2024년 현재 연령상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신 분들이다. 조국 귀환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불쌍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통절한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시다. 어떻게든, 그렇게도 부모가 돌아가고 싶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시다. 영주귀국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절차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20년에서 부터 3년간 한국문화교류가 단절되는 시기 필자는 임시 탈춤강습과 탈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국립사할린대학 한국어과 학생들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 단원들에게 탈춤 기본 춤사위를 지도했다.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노래방이 있듯이 러시아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사교댄스나 스포츠댄스 모임이 많다. 아마도 죽을 때가지 춤을 추다가 간다고나할까.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버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탈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렇게 동포들과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에 대해 4대 가족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댄스 클럽에서 만난 오석만씨가 KBS한민족방송에서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2023년 우수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한국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사는 바로 잊혀진 한국사이고 동아시아 전쟁사라는 나의 설득에 용기를 내서 슬픈 가족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책으로 묶여 나와서 보내드리게 되었다.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한국어 수업이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인들이 과제물로 내 놓은 체험수기 중 우수한 작품이 KBS한민족체험수기에서 매년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배우신 후 ‘눈물의 섬, 사할린’으로 가사를 정셨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가사 중에 특히 "사무친 한을 풀어 주세요."는 대한민국에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서러운 아리랑 사할린으로 끌려 왔어요. 조선 땅에서 그 옛날 일본 놈들의 시달림 받고, 늘 괴로움에 떨었죠 가고픈 고향 한국 땅으로, 부모형제 사는 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한숨만 저절로 나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워라 내 고향 사모친 한을 풀어 주세요, 하루 속히 날아 가고파 그늘진 세월, 고향 그리며, 철천지 한이 되었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꿈에서 본 내 고향 그리고 ‘칠갑산’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면서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 10살의 오빠의 심정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 가사는 이러하다. 이별의 부두 부모 잃은 어린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리요 외로웁고 서럽던 아픔, 누구에게 원망 주리요 어머니는 내게 같이 떠나자, 애닯게 속삭였지만 할아버지 무서워 끝내, 따라간다는 말을 못했소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난 날, 배 떠난 부두에 나가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오.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또 김경순님은 아리랑민족의 후예로서, 부모님과 큰오빠의 오십년 이별과 한번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 전체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고통의 역사를 담아 아리랑 가사로 쓰셔서 내게 보내셨다. 적절한 아리랑 곡을 찾아 보았는데, BTS의 아리랑이 긴 가사를 모두 담을 수 있었기에 노래로 불러서 보내 드렸다. 도중에 여러 번 목이 메었다. '한맺힌 사할린 아리랑'을 정리한 가사는 이러하다. 한맺힌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일제에 끌려 사할린 왔소. 모질던 징용살이 누가 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믿음에 살아 낸 세월 [랩 버젼] 한달만 있다가 돌아간단 그말, 어찌나 기다렸는지. 밤이면 라디오 틀어 놓고서 혹시나 우리를 찾을까 봐. 애타게 기다린 자식 형제들 오십년 넘어서 만나보네. 수십년 세월을 참아 왔는데 언제 또 고향 땅을 밟아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이 가사의 핵심은 부모와 어린 오빠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친 것, 그런 가엾은 부모를 보는 자식들 모두 차마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가엾다는 점이다. 영주귀국의 기회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불쌍한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부모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도무지 소식도 없고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 아리랑의 마지막 가사들은, 그렇게 부모를 잃고 조국과 단절된 채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 2세대 자녀들의 심정을 그대로 외치는 절규다. "(조국 귀환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2023년 9월에는 ㈜국악신문사(대표이사 기미양)를 통하여, 아리랑 무용단장 박영자님(갈리나 박)의 아리랑 가사를 받았다. 박 단장님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영주귀국의 희망이 사라진 심정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와 당신의 현실에 대하여 "사할린 2세 아리랑"라는 재목을 달고 가사를 지으셨다. 아리랑 반주를 확장하여 가사를 붙여 서울의 사무실에서 불러 보았다. 사할린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사할린 2세 한인 할머니, 하지만 부모 조국은 한국이라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 어릴 때 저 산 너머엔, 내 조국 있다고 믿었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 년 세월 부모 잃고 서럽구나, 나도 이제 주름진 할머니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말문 터진 손주들 자주 묻는 말, 할머니와 조국에서 살 수는 없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발전되어 잘 사는 우리 조국 한국, 우리에겐 자랑스런 마음만 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언젠가 이 생명 끝나기 전에, 조국 품이 우리 2세들 안아 줄까 한인 2세,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릴 적부터 조국의 존재를 믿고 한국어, 한국문화로 정체성을 지켜 왔지만, 영주귀국 신청 시기 이전에 부모를 빨리 여의신 사할린 한인 2세 어르신들의 심정은 한결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을 조국으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당신들께도 주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할린 사회에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녀들과의 이산, 다른 친지, 친구들과의 이산을 의미하며 기존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의 상실과 영주귀국 후 생활보호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생활 등 수많은 심적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국이 부모의 한을 풀어 준다는 기본적인 정책의 도리와 그로부터 받는 부수적 혜택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국적 취득이나 자녀의 유학이나 체류 등에 있어서 유연함 같은 혜택일 수 있다. 엄연히 식민지 시기 타국으로 강제동원된 국민들의 자손이 아닌가 말이다. 202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정권에 항복하여 붕괴되던 시기, 그간 한국 정부에 기여한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가족들을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데려온 미라클(기적)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한 쾌거는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한국 정부의 도덕성과 형제애 및 인류애를 상기시킨다. 그런 인류애와 형제애를 지닌, 정의로운 나라가, 강제로 희생된 일제침략기의 혈육과 자손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의 적용으로 인해, 명백한 국적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영주귀국 후 국적 취득 전 사망하신 경우)에서 비인륜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 자녀들의 기회가 방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법의 취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법의 사각지대는 극단적으로 냉혹하게 2세대분들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법이 어째 그리 촘촘하지 못하여 법 구실을 다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 정부나 러시아 정부와 얽힌 외교적, 법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런 문제 해결의 전제없이도 우리 정부의 결단이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인구도 수십년 간 하염없이 감소하고 있어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절체절명의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묻고 싶다. 나는 2세분들의 사무치고 뼈저린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다. "왜 한국은 그렇게 발전했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죠? 옛날엔 가난했다, 전쟁으로 힘들었다, 다 이해해요. 그런데 지금은요?" "부모들은 우리에게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쳤어요.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잊으면 안된다고. 저 산 넘어가면, 바다 건너가면 조국 조선땅이 있다고 했어요. 고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련 시절에, 영주귀국 전에, 병으로, 이중징용으로 다 돌아 가셔서 우리들은 갈 기회가 없어졌어요. 우린 뭐에요?" "부모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왜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못 살아 보는 거죠? 한국말도 말하고 생활방식도 한국식으로 잊지 않고 지켜왔는데?" 한국 교육부에서 파견 나온 교육공무원은 이에 대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제가 그런 것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의 애환을 담은 가사에 노래를 불렀고, 교실과 공원에서 한국의 인기 가요를 불렀으며 탈춤을 소개하고 민속춤을 같이 추었으며 한국문화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드리고 약간 교정하는 역할만을 했다. 나는 한국에 복귀 이후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행사에는 가능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23일 파주사할린동포회 영주귀국 15주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을 비롯한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아리랑이 대합창으로 불려졌다. 사할린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믈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분들이 흘리신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잊지 않아야 한다.
-
사할린동포연합, KBS한민족방송 김경희 PD 감사장 수여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는 KBS한민족방송 김경희 PD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지난 23일 경기도 파주시에 정주하고 있는 파주사할린동포연합회(회장:이화일)는 영주귀국15년을 기념하는 파주아리랑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식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는 KBS한민족방송 김경희 피디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사할린동포들과 KBS방송국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1970년대에에는 사할린에 있는 동포들이 KBS방송국으로 편지를 보내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찾아줬는데, 이 방송을 듣고 통해 수많은 사할린동포들이 가족을 찾았다. 또한 한국에 영주귀국한 후에도 가끔씩 공개방송을 통해 위문잔치를 해주기도 했다. 특히 2022년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주년 공개방송에 사할린동포들이 초대되어 특별코너 무대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에 대해 진술하기도 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서 사할린 동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기울여줬다.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의 사연을 편지로 보내서 사연이 방송되기도 했고, 'KBS 한민족 체험수기'에 사할린동포들의 이산과 고난이 담긴 살아온 이야기를 내놓은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우수상, 대상 등을 받기도 했다."며 "방송국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사할린동포의 강제징용, 이산의 이산, 이중징용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 귀를 기울여줘 큰 힘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또한 체험공모전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방송을 제작한 김경희 피디에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감사장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한편 KBS 한민족방송의 간판프로그램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사할린 동포들이 고국의 가족을 찾고 싶다는 요청에 의해 1972년 4월 3일 시작된 ‘사할린 동포에게’ 방송으로 출발했다. 특히 2000년부터 사할린동포들의 이산과 '이산의 이산'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가족을 찾는 사연이나 편지를 소개했고, 사할린 동포들이 잃어버린 수많은 가족을 찾아줬고, 또 책과 달력을 보내기도 했으며 노래자랑과 위문공연도 실시했다.
-
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만난 사할린아리랑사할린아리랑 따뜻한 조선땅을 놔 두고 가라후토엔 내 여기 왜 왔나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南樺太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의 초청을 받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 도착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30명의 작가가 내놓은 100점이나 되는 한국 전통문화 서예작품들을 감상했다. 이종선 회장님이 축사를 부탁하셔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바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해방이 되었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70년을 러시아 국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우리는 독자적인 한글이 있어서 당당하게 디아스포라와 고난을 넘길 수 있었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래서 러시아 전국에서 사할린에서만 한글판 새고려신문이 존재한다. 전국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서체로 표현 된 아름다운 서예작품이 되어 걸려 있다. 한국 전통문화 '서예'라는 예술분야인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한글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 전시회이다. 아름다운 서체로 쓰여진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서예로 탄생한 다양한 한글 서체는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즘협회 작가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계승이 안되는 분야이다. 북한에는 서예전시회 같은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들이 국악신문사에 기증이 되어 국내외에서 전시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얼 이종선 회장님이 직접 '사할린아리랑' 작품 앞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그동안 국악신문 수요 연재 한글서예로만 받아 보았던 예술작품을 직접 보니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이 작품은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뜨기 5일 전 (2022년 9월 25일자) 수요 연재로 나와서 더욱 스토리를 더하는 작품이다. 당시 9월 28일 양구 두타연에서 개최 되는 PLZ축제에 인천과 양주에 사는 사할린동포들이 초청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이종선 선생의 사할린아리랑 작품을 공노원 선생이 인쇄해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공선생은 한얼 선생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 수요 연재 내용을 자라나는 고려인 학생들에게 한글 수업에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부모들이 사할린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다. 당시 일하면서 힘들때, 고향이 그리울 때, 결혼식 같은 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 그래서 누구나 모이면 작대기로 장단을 두드리며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러시아나 유럽 어느 민족에게도 하나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곡은 없다. 우리 민족은 언제 어디서든 아리랑으로 하나가 된다. 올해는 파주에 정주한 150명 사할린 동포들이 귀국 15주년기념 행사로 오는 23일 '파주아리랑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날 휘날레에서 사할린 가수들과 이혜솔 명창이 관객들과 '사할린아리랑'을 함께 부르기로 했다. 2017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사할린에는 아리랑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 사할린 정부는 우리에게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에 아리랑공원과 아리랑누각을 선사해 주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 불리는 전국 지역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져있다. 정선, 진도, 밀양, 문경, 상주, 영천 등. 사할린 아리랑공원에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담긴 이 사할린아리랑이 새겨진 사할린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 이 아리랑 작품들이 사할린 전시장에서 걸리기만을 고대해 본다. 우리 동포들에게 큰 자긍심이 될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한류 열풍으로 한글학과도 생겨나고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할린 동포들을 대표해서 이 행사를 개최한 (사)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과 지원을 해주신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한다. 사할린아리랑 무정한세월 야속하다 청춘시절 날 데려와 팔십삼이 먹도록 여기서 다 늙어 영혼이 되네. 아이구 원통하고도 참말루 싫어 누구게다 한을 다 풀까요.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저 자탄 애탄하며 팔십 서이를 살어 나와 누구게다 이런 한을 풀겠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위원장, "실제적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인류무형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에서는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도시 문경'의 정체성과 위상 확립 및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2021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서는 방역상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 알리기와 아직 문경새재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부르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시행해 오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사실과 아리랑사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승, 보급하지 못하였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비교해 전 국민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20년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만들어(작사, 작곡) 발표한 ‘코로나아리랑’을 함께 교육하고 불러온 아리랑으로써 코로나19의 방역을 계도하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Q: 지난 해를 회고하신다면? A: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2017년 창립된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문경새재' 등 유명 관광지에서 개최하여 총 5회에 걸쳐 921명이 함께 전통 춤사위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아리랑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사할린동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사할린 귀국 동포 100여 명이 새 둥지를 틀어 살고 계시는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주)국악신문이 주관하여 추진한 ‘사할린 동포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에 우리가 작지만 100만 원을 후원하여 아도위 42명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눈 기억입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 68 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펐습니다. 처음 만나서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아리랑으로 70년 동안 겪으신 이산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날 함께한 행사가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기사가 2번이나 나간 것을 받아 보고 진정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Q: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A: 궁극적인 목적은 같지만. 기존하는 각 지역의 ‘아리랑보존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아리랑의 주인이며, 아리랑을 향유하는 주체(민초, 백성, 국민)인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 자발적 전승단체입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많은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여러 아리랑을 파생시켰으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12. 12. 0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2015. 09. 22.),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 도시 문경’을 선포함(2015. 12. 13.)에 이르러게 됨에 이에 호응하여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2017. 06. 29)를 창립하여 아리랑에 대한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에 역점을 두고 교육과 공연, 아리랑 관련 콘텐츠 개발, 학술발표회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모든 아리랑을 품으면서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모두 알고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며, 아리랑고개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인식하게 하여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가 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며 그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아리랑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Q: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 제정 이후의 변화와 기대는? A: 2022년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이 ‘문경시보호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환영합니다. 아직은 보호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의 변화는 희박합니다. 한가지 바램은 전수자, 이수자 등은 문경지역에 뿌리를 둔 문경지역 정서를 지닌 사람이 선정되어 토속민요의 전통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Q: 문경새재아리랑축제의 2년 연속 휴면 상태에 대해? 타개책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선결과제로 ‘대동, 상생, 저항’이라는 아리랑 3대정신을 망각하고 아리랑이란 이름 앞에 아리랑을 욕되게 하고 아리랑 관련인들의 상호 화합을 저해하고 분쟁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사람이 아리랑을 주무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내외부 인사들이 그런 류의 사람과 뇌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지역 내 아리랑 관련인 모두 하나 되길 기원해 봅니다. 문경시는 2015년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관에서는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도위는 문경시 일원 중 유명 관광지, 휴식처 등 시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문경새새아리랑 이론 교육과 노래 교습, 다듬이 체험 등으로 누구나 직접 참여하고 부를 수 있는 마당을 펼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하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축제’가 2년 연속 개최되지 못함의 원인과 대책은 이렇습니다. 첫째, 내분, 편 가르기,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 분쟁 조성자의 망동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리랑 관련인들의‘대동, 상생, 저항’이란 아리랑 정신의 회복과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관련 기관과 리더가 아리랑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부족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문화예술 분야의 장르 편향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축제의 공간에서 트롯트에 치중하고 아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이제 아리랑의 가치 회복과 리더와 관련자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예산의 편중 지양과 아리랑축제의 쥐꼬리 예산을 해소해야 합니다. 셋째, 아리랑축제 주관 단체를 한 곳에 고정하여 안일, 나태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 주관단체를 공모제로 전환하고 예산하마인 셀럽형 축제를 지양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내 공연 위주의 축제에서 야외 공연(실제적 아리랑고개=문경새재)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 내 모든 아리랑 단체 및 전문가가 모인 ‘아리랑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Q: 귀 단체의 새해 역점 사업은? A: 변화를 추구하면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다. ‘근대 아리랑 시원'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란 깃발 아래 '제3회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문경아리랑 알리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가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아리랑답사,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참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는 계속 이어지는 아도위의 여정입니다. 아도위 자체 사업의 일환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관광객과 함께하는 '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관광 시즌에 문경새재에서 열 계획입니다.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역량 강화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Q: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은? A: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란 이름이 빛나기를 바랄뿐입니다.
-
"731부대가 실제라니"…'경성크리처' 본 日 네티즌들 주목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OTT 드라마 '경성크리처'가 일본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드라마 파트1이 공개된 이후 일본 넷플릭스에서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일본 누리꾼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라며 일본 네티즌의 반응을 전했다.'경성크러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으로 '731부대'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다.서 교수에 따르면 일본 SNS 상에서 "731부대를 처음 알았다", "731부대를 알게된 계기", "731부대가 실제였다" 등 '731부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는 반응이 많았다." 며 " '경성크리처'로 인해, 일본 교육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731부대와 생체실험 등의 역사적 팩트가 일본 누리꾼에게 잘 전달된 점은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마루타' 등 일제에 탄압받던 조선인들의 모습과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에게 벌어진 관동대지진 학살 등의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로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재일 한국인 수난사를 다룬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도 예를 들며 "이처럼 글로벌 OTT를 통해 일본의 가해역사가 전 세계에 올바로 알려지는데 큰 일조를 한 건 역시 'K콘텐츠'의 힘"이라라고 장조했다.
-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2편)가라후토에 맺은 의형제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화태에 들어가셔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누님이 그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된다. 박득수는 누님 집에서 3년 있다가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 왔다. 일본사람의 꼬임에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된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숙소도 함께 하면서, 모두 정이 들어서 형님 아우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는 가장 막내였다. 5년후 가장 나이 어린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이어서 형님들에게 많은 사랑과 희망을 받게 된다. 장가를 갈 나이가 들자 가장 맏형 고 오지상이 당장 장가를 가야한다고 한다. ”수!,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만은, 너, 다까하라,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게 안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어라" 그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과 누이 내외가 조선행 배삯을 거둬주어서 박근수는 24살에 고향에 나가게 됐다. 8년 만에 나간 조선에서 집안 어른 중신으로 아내(강순예)와 결혼하게 됐다. 가라후토 강제모집과 이산 박득수는 결혼 후 조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박한 희망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안성면 사무소에서 모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6년, 1937년에 흉년이 들었지. 2년 동안에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바빴어. 마침 그럴 때 일본이 지나사변으로 중국과 싸우다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돼 노무자가 부족했어. 흉년이 든 상황에서 일본은 모집을 시작했단다. 어느 탄산이 모집한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었었지.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생활이 바쁘고 먹고 살기가 바쁜데 모집을 한다니께, "아! 일할 데 있으면 어디든지 가야지!” 라고 하니 일본 놈들이 그저 막 강제오 데려 간거야. 1938년에 네 둘째 박기남 삼춘이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모집가서 탄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귀가 됐어." 아버지가 나에게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처음에는 모집 광고로 해서 많은 조선인들을 데려갔는데 점점 모집을 광고 없이 하고 다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강제연행으로 바꿨다. 일본회사가 모집을 하면 조선총독부를 통했는데, 총독부에서 어느 면에서 몇 명을 보내야 한다면 조선 앞잡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영장을 전달했다. 박득수는 이미 가라후토에서 살다 왔으니까 모집영장이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토리우치보(헌팅캡)를 쓰고 당꼬바지를 착용한 형사가 새살림을 시작한 신접 살림집으로 들이닥쳤다. ”너, 다까하라, 이리 오라! 너 영장 받았니? 왜 면사무소에 안 왔니?" "나는 벌써 화태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영장을 내게 잘못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빠가야로! 너는 무조건 가야해! 빨리 준비해서 나와" 이렇게 새신랑 박득수는 강제모집으로 결혼 일년반 만에 가라후토로 끌려가게 됐다. 면사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여명의 모집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니무라와 마쪼까 두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동네 경찰서에서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앞잡이들이 와서 "우리는 내선일체다 천황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제 결승전이다 보니까 1년간 가라후토로 가서 일해라”고 윽박지르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노예 취급을 했다. 25살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운명과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가 나가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고 어머니는 굶어 죽는다”고 애원을 하니까 앞잡이들은 ”집에 여자들이 있으니 1년간 살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고 달랬다가 발로 차고 때렸다. 앞잡이는 총독부 명령에 따라서 국민들은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아니면 니네 가족은 배급을 못 탄다. 아니면 아직 어린 여동생이나 딸을 위안부(정신대)로 내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무주군 안성면에서는 가라후토에서 온 일본인 사무소장과 김수문이라는 함바(飯場, 현장 근처 노동자 숙박소)사장을 맞이했다. 가라후토에 가면 얼마의 돈을 번다든가 어떻게 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안성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열둘인가? 열넷인가? 그 정도 모였다. 함바 사장인 김수문은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모우러 나가고, 일본인 사무장은 남아서 징용을 가는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기차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인들은 그 당시 공습 때문에 무서우니 밤에 다녔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소독소로 보내서 모든 일행을 소독하고 목욕도 시켰다. 밤 아홉시 쯤 되어서 부두에서 연락선 공고마루에 승선했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서 출발하여 일본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으로 갔다. 아침 해 뜰 무렵에 도착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합쳐져서 열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함께 다다미(たたみ,타타미)를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등실 공간에서 모두 다 잠을 잤다. 그 때가 6월, 여름이니까 춥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관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동경에서 또 하루 자고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까지 가서 다시 하루 자고 거기서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배로 갔다. 북해도 북부에 위치한 와카나이에 가서 사할린 섬 오도마리항까지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득이한 여행은 8일 이상 걸렸다. 박득수는 가라후토에서 오치아이(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6개월 후 조선에서 아내 강순예가 화태로 왔다. 박득수가 배치된 산판은 오치아이에서 한 630리가 되는데 이미 30명의 모집으로 온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새집도 얻어 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도 한 여섯, 일곱집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큰 고생은 안했다. "개인집에서 그 때는 한달에 2원씩 집세 받고 세 놓고 그랬어요. 방 두 칸짜리 이런데서. 그때는 주로 화롯불, 난롯불 놓고 거기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살고 했어요.” 산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 분들이어서 강순예가 편지나 문서를 작성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한테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편 박득수도 지식인으로서 브리가지르(бригадир,조장, 팀장)로 일했다. 벌목공들은 2년 동안의 계약을 맺고 왔는데. 기한이 지나도 일본 당국은 조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월급은 다 주지 않고 조금씩 내주었다. 나머지는 조선에 갈 때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판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박득수도 역시 시리도리(현 마카로프) 제지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거기에서 일년 동안 일하고 조선사람들 한 30명을 모아서 니또이 산판에 가서 벌목일을 시작했다. 3년 후 1942년 조선에 살고 있는 친척들한테서 편지가 왔다. 조국에서는 너무나 살기 어려우니까 가라후토로 불러 달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보내 홀로 계신 어머니와 큰 형 식구 5명이 니또이 촌으로 오게 했다. 몇년 후 고모 가족도 우리가 사는 니또이에 이주하여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등 부비고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사람들은 기르던 앵무새와 개까지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인들은 영영 귀환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4만3천 여명의 이산가족이 해방된 사할린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가 조국과의 상봉을 꿈꾸며 이국 만리에서 낯선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야만 했다. 러시아 180여개 민족 중 식민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힌채.......소련은 일본이 버리고 간 탄광과 산판. 펄프공장에 투입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불안정한 조국은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남화태에 남겨진 30여 지역 탄광에서 돌아가는 기계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이 작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인의 몸 사이즈에 맞춘 탄광 지하 갱도는 서양인의 체구에 전혀 맞지 않았다. 남겨진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큰땅(대륙)에 사는 고려인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완장을 채우고 우리를 감시하고 체계적 시스템을 조직하여 노동력을 착취해 나갔다. 배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말과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소련 정부에 적응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말과 조선 이름 대신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야 불이익을 안 받게 된다. 사할린 한인 국적도 조선, 일본, 소련, 북한, 러시아 등으로 5번 변경되면서 국적에 따라서 이름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2세부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젖줄같은 고향땅 논밭전지와 집문서를 맡겨놓고 온 사람,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를 친척집에 맡겨놓은 사람, 어여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사람 등등 사연도 많고 많다. 조선인들은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미쳐서 죽고 얼어죽어 나갔다. 장가도 못간 청년들은 남편 잃고 여러 명의 아이가 딸린 여자와 살아야 하고,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가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간 사람, 산판과 탄부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병을 얻어 일찍 죽거나 나이를 먹어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못가고 가라후토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특히 정신대로 끌려와서 버려진 어린 여성들을 평생 껴안고 남편으로 아들 딸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노래 고향을 그리던 박득수는 1977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 공동묘지에 영원히 안치했다. 매년 8월 15일 추석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묘옆에 묵묵히 서 있다. 3명의 아들과 2명의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 본다. 오늘은 아버지를 위한 시를 준비했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살다가신 아버지의 이산과 억류, 미귀환에 대한 아픔을 시로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두 손으로 바쳤다. 나는 천천히 낭송을 해 드렸다. <아버지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추석밤 청명한 보름달 바라보며 철새따라 가고팠던 아버지의 노래! 일제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을 여의고 열여섯 젊은 시절 가장이 되어 일제시대 엄동설한 화태로 들어가서 산판에서 만고풍상 겪으셨고 스물다섯살 고향가서 아내를 얻었지만 꿈같은 신행도 얼마 못가고 강제모집 가라후토로 끌려갔네 산판에서 위험한 벌목장에 목숨을 바치시고 소련시대 위태로운 강에서 유송하시고 토끼같은 사남사녀 팔남매 밝게 키우시고 조선민족 풍습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시네 육년동안 험한 중풍에 시달리셨으나 자식 앞에서 흉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그리운 고향주소 소리없이 불러보시네 매년 팔월십오일 아버지 묘비명에 서있네 살아생전 아버지의 소원을 못 들어드려서 손자손녀들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양박씨 대대손손 영원하리라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집 주소였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는 아버지의 노래이고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으려고 늘 우리들에게 되새겨 주셨던 것이다. 너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밀양박씨 집안 어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나는 11년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았지만 우리 집안을 알던 이웃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빚이 되었는데. 2019년 어느 봄날 다시 무주땅을 찾아가서 안성면 이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이 총 14명이 강제징용으로 차출되었는데,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만 부상을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후에 그 자식들은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호적등본 사본을 안성면사무소에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 박득수와 주소가 찍힌 호적등본과 아버지가 살던 집터의 흙을 고이 담아서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를 뵐 낯이 있게 되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2달후 7월이 되어 사할린에 들어갔다. 사할린 땅에 묻히신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의 묘지를 찾았다. 아버지 혼령 앞에 호적등본을 보여 드리고 고향집 주소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이어서 고향집 흙을 뿌려 드리면서 술 한잔을 올리자 나는 아버지가 읊으시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들에게 손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집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 아버지! 이제나마 편안히 잠드소서.............
-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공노원 여사 1주기 추모제22일 인천 남동구 아소르트 레스토랑에서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공노원(전 사할린주 한글교사협회장, 전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여사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아들(신철재)과 딸(신금선)이 어머니가 살아 생전 가까이 지냈던 사할린 동포들을 초청했다. 사할린 동포들을 후원하고 있는 삼정제빵소에서 베이커리 2박스를 보냈다. 며느리 신에바씨가 참석자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추모제 기념으로 전달했다. 공선생에게 2년간 한국어를 배웠던 안드레이(15세)는 "한국에 오자마자 공노원 선생님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배웠습니다. 한국어말하기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서 선생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립습니다."라고 전했다. 손녀딸 신아리나(10세)와 신마이야(17세)는 "할머니에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한국 역사도....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요"라고 전했다. 한러 동시통역을 밭은 사할린 동포 이경순 여사는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분이다. 사할린 1세 나이드신 분들은 강제징용 위로금을 신청하려고 해도 한글을 제대로 쓸 줄을 모르니, 공선생을 찾아와서 작성을 하고 구청에도 같이 가주시고 했다. 음악회나 아리랑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을 100여 명 이상 모시고 다닌 분이다. 2022년 DMZ 양구패스티발에 인천에 사는 사할린 동포들을 모시고 행사에 참가하고 1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할일이 많으신 분인데 너무나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KBS한민족방송 이소연 방송인은 "공노원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스튜디오에 각종 사할린 한인 활동 관련 자료를 캐리어에 가득 담아오셨던 생각이 나네요. 방송에서 우리말과 한국문화 교육에 열정을 바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사할린 한국어 교육에 앞장 섰던 훌륭한 분이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지난 3월 가족들이 공노원 선생의 뜻을 받들어 서재에 있는 모든 책과 노트, 일기, 수첩, 가족사진 등을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에게 전달했다. (주)국악신문사는 공노원 선생이 살아생전 남겼던 인터뷰 내용과 남겨진 육필원도 등을 정리하여 사힐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회장과 함께 도서출판 국악신문에서 '사힐린한국어교육 80년사'에 관한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 이후에는 (사)아리랑연합회 국립아리랑박물관준비위에 전달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힐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회장은 "1996년 서울에서 창립한 본 협회는 사할린의 공노원 선생이 없으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사할린 한국 교육의 산증인이다."라고 전했다. 기미양 대표는 "공노원 선생의 남다른 가족애, 특히 뜨거운 제자 사랑, 사할린 사랑에 눈시울이 뜨겁다.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사할린 한인들을 만나고, 2018년 불교방송 아리랑 다큐멘타리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부각시켰다. 특히 공선생은 사할린 한글보급에 앞장 선 리더다. 3세 4세가 한국어를 알아야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렇게나 가슴이 뜨거운 교육자 공노원 선생이 그립다. 제가 그분을 만나서 러시아 각 지역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사할린 한인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다음 글은 작년 고인의 발인날 추도사 전문이다. 공노원 선생님을 보내며 제가 제 부모님을 선택하여 세상에 나오지 못하듯이 세상에 나와 만나는 사람 모두 내 뜻에 따라 인연을 맺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꼭, 반드시, 필요하고 이유가 있어서 내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세상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인연을 맺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공로원 선생님과의 인연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직업은 우리문화의 정수 '아리랑 연구'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중요한 관찰 대상입니다. 이러한 절실함 속에서 인천에 영주 귀국하여 사시던 공로원 선생님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연으로 사할린의 슬픔과 눈물겨운 겹겹의 아픈 디아스포라와 가족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리랑을 이해하고 아리랑 축제를 사할린에 가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사할린과 한국의 아리랑연합회와의 교류, 이 양국의 교류는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교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소중한 교류는 바로 공노원 선생님의 존재와 역할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물러가면, 다시 사할린에 가서 동포들을 부등켜 앉고 다시 사할린아리랑제를 하자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다 ‘사할린귀국동포후원회’를 결성하여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살고 계신 동포들과 사할린에 살고 있는 가족과의 법적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하자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가셨습니다. 선생님, 공노원 선생님 그러니 너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리랑 식구들 모두가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공로원 선생님 하늘에서, 선생님과 우리가 해오고, 또 해야 할 일이 앞으로 잘 되어가도록 도와 주십시요. 코로나로 인한 까다로운 입국심사로 사랑하는 아들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가셨지만, 사랑하는 남편, 아끼고 자랑하던 며느리와 두 손녀딸들을 두고 가시지만, 누구나 가는길을 서둘러 가셨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더 그리워 하고 더 필요함을 알게 서둘러 가신 것이 아닙니까? 산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고 가신 가족들 모두 아리랑 식구로 함께 살아갈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노원 선생님, 우리는 그동안 사할린 동포 교육자로서의 공로와 한국과의 교류에 대한 큰 공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사할린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교육자 이십니다. 선생님은 한국 영주귀국동포로서 훌륭하신 문화교류 공로자이십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인류문화유산 아리랑인(人)'이십니다. 이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고 새기겠습니다. 선생님 편히, 편히, 영- 면- 하- 십- 시- 오. 공로원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2022년 10월 2일 아리랑 後人, 기미양. 눈물을 삼키며 보내드립니다.
-
제17회 사할린 영주귀국동포 고향바라보기 개최5일 오전 오두산 통일전망대 망배단에서 대한적십자사 파주지구협의회 주최로 이루어진 2023 파주시자원봉사센터 우수프로그램 "제17회 사할린 영주귀국동포 고향 바라보기"행사 진행 중이다. 10여 년 전 사할린에서 이주하여 파주와 안산, 인천 등에서 영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 200여 명이 참석하여 북한 땅에 있는 고향을 향해 추석차례 겸 망향제를 올리고 있다. 제를 마치고 모처럼 나들이 나온 동포들이 다함께 모여 즐겁게 식사면서 정을 나누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우리 동포들을 고국의 품으로 모셔와 지원하고 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러시아 남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조선인 15만여 명. 이중 10만여 명은 1944년 일본 규슈 탄광으로 끌려가 다시 이중징용을 당했다. 사할린 강제이주자들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일본인들의 폭행에 시달리며 노동착취를 당했으며, 일본의 패망 후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후 한러수교후 1990년초부터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9년 대한적십자사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남한(한국)국적을 취득, 한국 동포들이 남은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속적인 방문 지원 사업을 실시, 가족들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오고싶은 조국땅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우리 동포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우리 동포들을 보호해주는 기관도 없었다. 이제 러시아 기밀문서 해제로 그런 자료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현재 사할린 동포들의 강제징용 된 숫자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는 사할린 한인들의 기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국가 차원의 추모비나 위령비 하나 없는 것이 서글프다." 이어서 "오늘 이곳은 사할린에서 강제 이주 되어 살다가 북한 선전정책에 속아서 북으로 넘어간 가족들을 그리우면 와서 바라만 보는, 이제는 북에서 돌아가신 부모형제들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멀리 북한땅을 바라보며 오늘 이렇게 모여서 우리가 제례를 올리고 있다" 며 "평생 러시아에서 국적없이 살다가 북한 땅에 가서 통일이 되면 남쪽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북한으로 가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제는 생사도 확인이 안되고 세월이 흘러 북한 땅에서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며 매년 추석을 맞이하여 제례를 올리고 있다. 어서 남북통일이 되어 상봉하는 날을 기다리며......"라고 밝혔다.
-
1일 '아리랑의 날' 다시 불러보는 '사할린아리랑'10월 1일 '아리랑의 날'이다. 아리랑학회는 지난달 새로 탄생한 사할린아리랑 가사를 사할린동포들과 전국아리랑전승단체에 전달했다. 지난달 9월 19일 정선아리랑보존회(이사장 김길자)가 주최 주관한 제8회 정선아리랑 가사짓기대회에서, 사할린에 살고 있는 사할린 2세 김경순.박영자씨가 특별상을 수상했다. (사)정선아리랑보존회(이사장 김길자)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매년 응모작 모두를 모음집으로 출판해 정선아리랑 가사의 현재화와 전국적 관심을 축적해 오고 있다. 김길자 이사장은 "특히 올해에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사할린 동포들, 국내 영주 사할린 동포, 탈북 새터민 등도 참여를 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이는 전체 아리랑의 현재화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번 응모작은 심사 도중에도 현장 접수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할 정도로 전국적 관심을 받고 있었다. 심사에 오른 작품 수는 응모자 일반부 132명 312수, 학생부 45명 53수이다. '정선아리랑 가사짓기’는 올해 8회 째로 전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전국 유일한 아리랑 가사짓기대회 행사이다. 사설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서 80 여년 동안 만나지 못한 육친의 뼈아픈 이별의 한과 '이산의 이산', '디아스포라(이산)'를 노래했다. 다음은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어반 김경순(77세)씨가 지은 정선아리랑 가사이다. 자신들의 부모가 일제에 속아서 왔고 나는 왜 사할린에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부모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나서 바닷가 언덕애 올라 하루종일 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하루가 가고 한달이 가고 한평생을 사할린 동토의 땅에서 묻혔다고 한다. 아리랑의 정서를 첫번째로 찾는다면 아마도 사할린아리랑을 들 수 있다. '시대의 노래' 아리랑의 존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후렴) 아우라지 물가에 봄꽃놀이 눈에 삼삼한데 왜놈에 속아 어린 아들 두고, 사할린에 징용 왔소 사시 삼철 탄가루 눈발에 꽃가루 날리는데 모질고 배고픈 눈물의 징용살이 그 누가 아나요 전쟁 끝나면 여량 땅에 돌아갈 걸 믿었지 한달만 있으면 아들한테 갈 것을 철썩같이 믿었지. 밤이면 라디오 켜 두고, 혹시나 우릴 찾을려나 숨죽여 듣던 세월은 꾸역꾸역 쉰 해가 넘었네. 고향의 큰배 기다리다 병들어 세상 뜬 부모들 가엾어라 부모등골 쓰라리고 쓰라리네, 애타던 자식들도 애닮퍼라 다음은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한국어교사 박영자(73세)씨가 지은 정선아리랑 사설이다. 사할린동포특별법이 발효되어서 누구든지 조선사람들은 1세가 사망해도 2세 3세는 조국에 귀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노래하고 있다. 무릉도원 정선을 놔두고 우리네 부모 사할린 징용왔네 말문이 터지고 귀가 열릴때 알았네요 우리네 조국땅 나는야 사할린2세 한국인 우리네 부모 조국은 남조선 어릴때 저산 너머 가면 우리네 남조선이라고 알았네 이제는 80년이 흐르고 흘러 나도 할머니 되었네요 말문이 열린 손자들이 우리는 조국에서 못사나요 가보지도 못한 조국이 잘사는 나라 되었네 이제는 자랑스런 조국 세계인이 가고싶은 조선땅 그리운 조국이 언젠가 우리를 품에 안아줄까나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사는 사할린2세 김경순(갈리나김)시와 박영자(갈리나박)씨는 지난 해 2021년 2022년 KBS 한민족체험수기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사설은 10월 1일 '아리랑의 날'에 경기도 양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살고 있는 율정마을 사할린아리랑보존회(최나타샤)에 전달되었다. 앞으로 무대에서 이 사설을 노래로 다듬어서 부를려고 한다고 전했다. 현재 알려는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1세 정성애 할머니가 지어서 부른 것과 새고려신문 공모전에 당선된 정태식씨가 지은 사할린아리랑이 음반과 무대화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할린아리랑제, 문경아리랑제, 청주아리랑제, 왕십리아리랑제, 공주아리랑제 등에서 정성애 할머니 장남 원명운(서천 영주귀국사할린동포회)씨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각 지역 아리랑단체에서 불려지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사할린한국교육협회 부회장인 공노원 여사 손녀 신마이야(당시 12세)와 신아리나(당시 5세)가 2018년 사할린아리랑제와 2019년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무반주로 불러서 첫 막을 열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검색하면 바로 그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지난 2021년 12월 23일 외교부에서 주관한 서울 정동1928 아트센터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참석 하에 개최된 '사할린동포법 제정 및 영주귀국 기념식'에서 신아리나가 아리랑으로 첫 무대를 열었다. 이 장면은 전세계 방송을 타고 동포사회에 방영되었다. 이날 70여 년만에 조국의 땅을 밟은 사할린 동포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린 소녀가 부른 아리랑이 어루만져 주었다. 이 날 손녀가 부른 아리랑을 보면서 공노원 여사가 흘린 눈물을 잊을 수 없다. 박영자씨는 "나의 4대 가족사의 디아스포라가 담긴 이 사할린아리랑이 책으로 묶어서 나온다고 하니 기쁘다. 기록으로 남겨진다고 하니"라고 당선소감을 전했다. 김경순씨는 "작년에 만든 사할린아리랑 가사가 비공식적이지만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직접 불러서 녹음을 해달라고, 그런데 음반에 담게 되어 가끔 행사 마당에서 확성기를 통해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올해 지은 이 사할린아리랑도 같이 불려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담긴 사할린아리랑을 역사에서 기억해달라"라고 전했다. 이번 공모전에도 매신저 역활을 해준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공모전이 알려져도 나이드신 세대들은 인터넷 사용을 몰라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응모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이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 한인의 존재를 알리는 노래이다. 더불어 사할린아리랑을 통해 국민들에게 사할린동포특별법이 널리 알려지기 바란다."라고 격려했다. 내년에도 사할린 동포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디아스포라 아리랑, 사할린아리랑이 새록새록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
해방된 날,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을 보다광복절날 오후 4시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을 당하여 사할린 섬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이 열리는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를 찾아갔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1938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약 6만 명의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으로 보내 탄광촌과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시켰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러시아의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고향이 그리워, 두고 온 자식이 보고 싶어 밤마다 저 언덕에 올라 바다를 향해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온 동네에 퍼져 이불 안에서 다들 울었다우.” 라고 증언한 코르사코프 바자르 할머니의 증언이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이젠 대부분 강제동원을 당한 사할린 동포 1세가 세상을 떠나, 많은 역사적 사실이 묻혀가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뒤늦게 알려진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도 역시 그 실체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전시를 보기 위해 힘겹게 전시장을 올라가니, 이미 ‘작가와의 만남’은 진행되고 있었다. 막 들어서니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가 축사를 하고, 경상도에서 온 지역 소리꾼이 부를 사할린아리랑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구미와 대구에서 참석했다는 것이다.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이었다.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내가 여기 왜 왔나.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 일본놈들 무서워 따라왔지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 왔던가 우리집 영감님은 왜 가셨나 나만 혼자두고 어데를 가셨나” 전시장에는 소련 시절부터 한민족 풍습을 지켜 온 사할린 동포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예식 기자를 비롯하여 전시를 준비한 ‘Kin지구촌동포연대’ 최상구 대표와 사진가 김지연씨,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기미양 (주) 국악신문 대표이사,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 새롬출판 송남숙 대표가 자리를 채워주었다. 특히나 인천, 서천, 안산, 파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이 함께 해주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대표,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정영신, 곽명우씨 등 70여 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시작가 이예식씨는 1949년 사할린 마카롭시에서 출생하여, 1998년부터 지금까지 ‘새고려신문’ 사진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할린1세였던 부친의 애환을 바라보며 성장한 2세로서 꾸준히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예식 작가는 인사말에서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먼 길로 우회하여 왔다”는 말로 한국과 러시아 교류의 어려운 현실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진작가 김지연씨는 "시대를 증언하는 이미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며 "광복절을 맞았지반 사할린 동포는 진정 해방이 되었는지 묻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사할린의 그 날을 기억하는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
13회 왕십리아리랑제, 제주아리랑부터 사할린아리랑까지지난 3일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주최주관하는 제13회 왕십리아리랑제가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6월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보훈 가족 50여 명과 성동구민 등 300여 명이 객석을 채워 성황리에 성료되었다. 45명이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1부 이산의 노래, 2부 해원의 노래, 3부 상생의 노래로 구성되어 7개 지역 아리랑과 경기민요, 전통춤으로 구성되었다. 특별출연으로 김명남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선사했다. '왕십리아리랑'은 순수 창작곡이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 이혜솔 명창이 작사하고, 양금 연주자 윤은화가 작곡했다.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한양도성 동쪽 십리 응봉산 정기. 세세년년 우리 삶터 희망의 샘터. 살곶이벌 응봉기슭 응방의 옛터. 역사문화 오래오랜 우리의 터전. 인류유산 아리랑은 우리의 자랑. 슬기로운 매사냥도 인류유산이래요." 첫 막은 '왕십리아리랑으로 열었다. 1부에서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은 소극으로 엮어내어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당하는 고난과 슬픔을 아리랑에 담아낸 이산의 아픔을 형상화 하였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 그 땅에 못가고 내 여기 사나 우리 영감님은 어데로 갔나 나만 혼자 두고 자기만 갔네 강제징용의 땅 사할린에서 한인 1세대들이 고국을 그리며 부르는 망향의 노래 ‘사할린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3연은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땅으로 이중징용 가는 대목이다. 우리님 따라서 사할린에 왔는데, 다시 나만 혼자 두고 일본 해저 탄광으로 끌려가는 이산의 고난을 고하고 있다. 2부 '해원의 노래'에서는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박옥희가 제주아리랑을 선보였다. 이때 제주해녀의 복장을 한 장경숙(제주아리랑연구회장)의 제주 해녀의 고난과 역경을 몸짓으로 표현하며 제주아리랑을 함께 불러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내었다. 이어 김용자, 최순이, 박연춘이 상주아리랑, 진도아리랑. 강원도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서 신명과 흥을 돋구웠다. 관객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면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면서 추림새를 던져주었다. 얼쑤, 좋다! 3부 '상생의 노래'에서는 대일항쟁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호국선열을 추모하는 의미로 만든 '아무르아리랑'이 소극으로 펼쳐져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무르아리랑 넘어간다.(후렴) 원수하고는 같은 하늘아래 살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지니동양평화 대역사 시작되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아무르아리랑) 이 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2018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열리는 안둥근의사추모제에 한국대표로 초청되어 헌정한 의병아리랑이다. 국내 거주하고 있는 광주 고려인문화원 및 고려인합창단,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이 사는 인천, 김포, 양주 등에서 사할린아리랑과 함께 알려오고 있는 의병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오고 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소극으로 만들어서 무대화 하여 레파토리화 하고 있다. 성동구 거주하는 한 보훈가족(75세)은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주는 '아무르아리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주말이라서 마침 손자들과 같이 와서 더욱 의미가 깊다. 감사하다"라고 이회장의 손을 두손으로 잡아주었다. 휘날레가 끝났는데도 관객들이 계속해서 '앵콜'을 외쳐 주었다. 주말이라서 가족과 함께 온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전국아리랑공연연합회에서 축시를 보냈다. "우리 왕십리아리랑은 아리랑은 역사와 민족을 노래한다. 아리랑은 우리가 사는 땅을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역사를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이 탄생한지 5년 이제 ‘아리랑의 아리랑’으로 자리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오늘의 우리 아리랑이다 구아리랑 긴아리랑 본조아리랑 정선아리랑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아리랑이다 이혜솔과 그들은 왕십리아리랑 전승자들이다 발표회를 하고 축제를 펼친다 제주도에서 정선까지 또 사할린까지 동포들과 외국 손님들과 우리들과 함께한다 아리랑의 역사를 아리랑의 위상을 아리랑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막내 아리랑이다"
-
알마티에서 개최되는 KBS한민족체험수기 시상식에 부쳐...오늘 'KBS한민족체험수기' 담당 프로그램 팀 10여 명이 시상식을 위해 카자흐스탄 알마티시로 출발했다. 시상식과 축하공연이 알마티한국교육원에서 10일 개최된다. 올해 영예의 대상은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수년간 계속 한글을 공부하고 있는 사할린 2세 김경순(71세)씨가 수상된다. 일제강점기 1940년 전후부터 8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이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이 되어 끌려왔다. 1945년 외세가 일으킨 전쟁은 끝났지만 동서양 냉전으로 국교가 닫혀 있어서 뱃길과 하늘길이 막혀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남사할린 전 지역에 탄광지역이나 임업지역으로 배정을 받고 100여 가구에서 150여 가구가 이주하여 남사할린 전역에서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생존했다. 잔치날에는 절구방아를 찧어서 떡을 빚고, 부침개를 부치고, 국수를 뽑아서 상을 차리고 한복을 입고 소리패들이 나가서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쳤다. 이렇게 사할린 1세들은 자신들은 언젠가 돌아갈 조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국적도 없이 살다가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다가 일부는 2000년부터 국내 영주귀국이 이루어져서 국내 인천, 안산, 부산, 김포, 파주, 양주 등 25개 지역에서 현재 2500여 명이 살고 있다. 이병일 원장이 2021년 7월 한국에서 비자연장을 마치고 사할린으로 떠나기 전날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한국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과 사할린 현지 한인들의 소식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주고 받았다. 비자연장을 위해 3개월마다 입국시 국내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사회 답사를 함께 동행했다. 김포, 인천에 영주귀국한 최정순 회장과 공노원 선생을 만나서 사할린 소식을 주고 받았다. 이원장은 사할린 한인사회에서 필요한 한복을 기증 받아서 가지고 가고, 2021년 제2차 영주귀국한 동포들이 요청한 한글학습 교재(러시아어 판)를 전달하기 위해 국내 영주 사할린 동포사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3월 KBS한민족방송 주최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공개방송에도 전 김주한 사할린교육원장님도 함께 참가해 주셨다. 2022년 9월까지 한국에 입국할 때마다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메신저를 통해 현지에서의 영상통화를 요청하여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 10월 KBS한민족체험수기 수상자 발표 소식을 듣고 바로 사할린으로 전화를 드렸다. Q. 원장님, 여기 한국입니다. 방금 이번 KBS한민족체험수기 대상 작품과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대상을 수상한 분이 바로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생 김경순님입니다. 이산의 가족사가 담긴 '눈물의 섬,사할린' 수기가 대상을 타게 되셨습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자에게 수상소감 준비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A. 정말인가요. 꿈인가요. 믿기지 않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의 경사입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밖에 생각안나네요. 이원장이 지난달 비자 연장으로 잠시 한국에 들어 왔는데, 몇달 전 미리 보낸 사할린 동포들의 '한글ㆍ한복ㆍ태권도ㆍ국악ㆍ아리랑 향유에 대한 인터뷰를 해주셨다. 이번에 대상을 수상한 김경순씨 체험수기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1993년부터 20년간 한글 교육을 맡아 온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역할과 이병일 원장의 교육활동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한다. 아울러 이원장의 교육이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Q. 원장님, 안녕하세요. 3개월 전 뵙고 오늘 뵙네요. 사할린 동포들은 잘 지내시는지요. 코로나가 심한데......먼저 사할린한국교육원에 대해 소개 해주세요. A. 내년이면 사할린한국교육원 개관이 30년이 되네요. 1993년 12월 10일에 러시아내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한국어 및 한국문화 교육기관입니다. 2016년에 러시아 사할린 교육부에 추가(보충)교육기관으로 등록되었고, 법률적인 조건을 유지하며 운영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내에서도 재외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있으며, 기관의 설립 또한 한-러 수교 이후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육원은 전 세계적으로 43개 원이 있으며 러시아와 CIS지역(3개)을 포함하면, 우리나라 교육원 설립은 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국교육원이 개원되어 있는 국가입니다. 한국어입문, 초급, 중급, 한국어 회화반을 운영하고 있고, 한국문화 초급, 고급반 및 민속춤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 특별수업으로 한지공예, 전통매듭 등을 운영합니다. 전체적으로 학기당 200명이 입학을 합니다. 연 400여 명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한인동포 및 자녀, 현지인 절반 정도씩이고, 한글학교 등록 및 운영비 전달, 수업장학, 한국어 채택학교 지원사업, 한국어 능력시험 운영 등을 담당합니다. 다음해에는 30주년이 되는데...... 예산 확보와 30주년 행사 등의 대략적인 구상을 해놓고 이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극동 러시아에서 사할린 다음으로 개원한 교육원은 어디인가요? 조선인이 많이 사는 곳인가요. 하바, 블라디 중? A. 교육원은 한국정부나 교육부가 원해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해외 동포들의 수차례의 요청에 의해서 그 국가 혹은 지역에 설립을 검토하여 개원합니다. 사할린과 연해주는 한인, 고려인 동포들이 많기 때문에, 또는 현지인들과도 사이가 좋기 때문에 국가, 지역 정부의 인정을 받아 설립, 개원하였습니다. 한러수교 후 가장 요구가 많았던 곳이 사할린이었습니다. 그래서 수교 후에 가장 먼저 1993년 12월 사할린에 개원하였고, 하바로브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로스토프나도누 순으로 교육원이 설립되었습니다. Q. 러시아에서 가장 한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곳이 사할린인데. 그만큼 한국어 습득 능력과 교육 실적이 높은가요? A. 교육실적은 교육원 건물 규모와 K-POP 열기와 관계가 많습니다. 법률적으로 많이 수용 가능한 면적이라면 실적이 많겠지요. 그런데 사할린은 작은 교실 3개와 공동사용 1개 교실이 있습니다. 물론 500명 수용 가능한 대강당은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사할린에는 한국어를 배우신 분, 한국말 잘하시는 분, 이미 한국에 영주귀국하신 친척들이 많은 동포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K-POP 열기는 매우 조용합니다. 마치 한국 국내에서 K-POP을 잘 모르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한국어 학습 열기로 보자면 현지인(러시아 민족)이 더하고 동포들은 적당히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참여률은 비교적 낮은 편입니다. 한국어 능력시험 수요는 사할린이 가장 낮습니다. 사할린교육원은 1년에 1번만 시험을 치루는데,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 로스토프나도누 교육원에서는 매년 2번씩 시험을 보며, 참가자들이 많아서 넓은 학교 강당을 빌려서 시험을 치룹니다. 물론 사할린에서 'K-POP경연대회' 등에서 한류 열기는 모두 대단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한국문화 교육 실적에서는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높지 않습니다. 이미 한국과의 연대감이 높고 주위에 한국말 잘하는 한인들이 많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배울 수 있다는 여유가 있어서...그런가 봅니다. Q. 한국어 교육은 교육원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선생님들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요. 누구나 입학이 가능한가요. 입학시험이 있나요? 전에 가보니 엄마와 10대 후반 아들이 함께 배우더라고요. A. 한국어 교육은 입문반 3개반, 초급반 2개반, 중급 1개반, 회화 1개반으로 구성되고, 선생님들은 경력 1,2년차부터 정규 교육을 받으신 한국어학과 교수님까지 다양합니다. 현직 한국어 채택학교에서 재직하셨던 선생님들이시며, 실력은 정상급입니다. 다만 경력이 낮은 선생님들은 원어민과의 교류가 적어서인지 한국에서 파견된 저(원어민 사용자)와의 대화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웠습니다.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해당 언어를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하고 접해야 하는데.... 그러나 학생들은 매우 만족해 하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육 관련 대학에서도 교육과정에서 실제 1대 1로 대화하는 '회화'나 '듣기', '말하기'의 비중을 늘려야 하는 것이 우선적 학습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장수 수강생인 김경순님이 대상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체험수기를 쓰시게 되었는지요? A. 사할린한국교육원이 주최하는 '2022년 제24회 한민족 수기대회'에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장수 수강생인 김경순님이 지난 4월에 자작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가수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곡의 가사에 맞추어 지으신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 가사인데, 일반적인 고국의 외면 속에 사시는 사할린동포 2세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가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 담긴 가족사를 자세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을 하신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서 글로 써보시라고 권했습니다. Q. 가사 내용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가요? A. 가사에는 사할린 1세와 2세들의 디아스포라가 서린 가족사에는 뼈아픈 그리움이 절절했습니다. 그리고 7월 경에 또 한 편의 가사를 보내셨습니다. ‘칠갑산’ 노래에 맞춘 가사였는데, 한맺힌 눈물이 총총히 박힌 이별의 가족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노래를 불러서 녹음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이 가사에 부쳐서 노래를 부르려고 연습하려고 했다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경순님의 큰오빠는 1940년 10살 때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떠나신 부모님과 헤어져서 배 떠난 부두에서 당시 어린 큰오빠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50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려서, 어머니는 병드신 채, 아버지는 연로하신 채... 휠체어를 타고 한국을 방문해서 꿈에도 그리던 장남을 상봉하시고 나서 사할린으로 돌아오셔서 몇달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기막힌 이별과 짧은 재회, 그리고 생이별한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12살에 부모곁을 떠나 서울 숙부댁으로 유학을 가던 장면이 겹쳐지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녹화를 하는 내내 목메임을 추스릴 수 없었습니다. 한국어 자막이 달린 10분 정도의 다큐 영상을 열어보고 나서 가슴이 한참 동안 울컥했다.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사할린에 끌려와서 반세기 동안 겪어야 하는 한 가족사의 디아스포라는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그래서 제목이 '눈물의 섬, 사할린, 이별의 항구'이었다.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담긴 이 가족의 사연은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누구나 겪어야 하는 가족사이다.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에게 이러한 뼈아픈 사연이 없는 가족은 없다는 것이다. Q. 이번에 교육원생이 수상한 대상,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큰 성과를 얻으셨습니다. 개인적 소감은? A. 사할린에서 태어난 김경순님이 겪었던..... 부모님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던 기억, 한국에 남겨진 큰오빠에게서 들은 이산에 대한 고통,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고향에 묻히지 못하고 타국에 묻히신 분들을 위로하고, 다시 내세에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글짓기를 해보시라고 했는데, 이 글이 조국에서 대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수상 소식은 사할린 동포들을 위로하는 치유가 되어서, 제 마음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해서, 이 상은 2022년 들어서 사할린 동포들이 맞이하는 조국과의 첫 교류이기도 합니다. 내년에도 사할린 동포들과 교육원생들이 많이 참가하기를 바랍니다. 2020년부터 대상을 수상하신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고 봅니다. 전 한국어 교사로서 한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소임을 공감하셨다고 봅니다. 많은 사할린 동포들도 기뻐하였습니다. 교육원의 한글 수업에도 큰 힘이 됩니다. Q. 2년 동안 교육원에서 한글교육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학생은 ? A. 수많은 학생이 기억나지만, '안냐 나른스카야' 학생이 생각납니다. 교육원에서 5년간 한국어 공부를 했고, 한국에 나가서 장학생으로 유학하고 싶었지만 한국어 능력시험 3급으로는 자격이 안된다고 하여 탈락되었어요. 이후 사할린국립대 한국어학과 들어가고, 계속 교육원에 나오고 하다가 부산외대 교환학생이 되어 6개월 동안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의지의 사할린 여성이랄까요? Q.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펼친 원장님의 교육이념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사할린 동포들에게 있어서 한글과 한국어는 정체성의 구현입니다. 한국어를 모르면 한국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는 한민족의 얼이고 혼입니다. 다음 사할린 한인 4세 세대와 한국인 세대가 만나서 김치, 김치찌게, 삼겹살을 먹으며 먹으며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국문화에 친해지도록 탈춤도 보여 드리고 달고나(오징어게임)도 만들어 보여 드리고 제기차기, 팽이돌리기 등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Q. 원장님, 사할린 동포들의 한글교육과 사랑에 대한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다시 사할린교육원장직을 연장하시고 싶으시나요? 공식적 연장은 가능한가요. A. 네, 6개월 단위로 연장 가능합니다. 저는 코로나 시기와 함께 교육원 임기가 시작되어...처음 몇 개월동안 문을 닫고 해서 아쉬움이 커서. 6개월 연장 신청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떠날 때는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쩌면 다시 오기 위하여 지금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장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첫 개원이나 교육원 이전 등 정말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연장이 안됩니다. Q. 현재 한글교육을 하는 사할린 세종학교(교장:임종환) 역활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유즈노사할린스크 세종학교는 재외동포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의 이름입니다. 세종학당재단에서 운영하는 세종학당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교육원에서는 매년 재외동포재단의 한글학교 운영비를 지원하고 정산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교육원에서 보유한 교과서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세종학교의 문화행사에 가끔 참여하기도 하고, 민속춤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글학교 수업 장학은 우리 교육원의 업무입니다. Q.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에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팬데믹 기간 동안 교육원과 사할린한인협회는 연례 행사를 어떻게 치루셨는지요. A. 교육원은 문화행사로 주최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으로부터 교류가 없으니까요. 2021년 한국어말하기 K-POP 경연대회는 국립대학이 주최, 사할린한국교육원이 주관하였습니다. 김치축제에는 우리가 강사님만 초청했고, 막걸리와 전통놀이 도구만 지원했습니다. 사할린한인협회(회장:박순옥)가 주관했습니다. 2021년의 말하기 대회와 K-POP경연대회는 사할린국립대학에서 예산을 세워서 개최했으며, 설날 행사 등에는 사할린한국교육원 민속춤 클래스에서 ‘밀양아리랑 댄스’을 더했지만, 실제적 주최는 사할린한인협회입니다. 이제는 사할린에서 문화행사는 대부분 사할린한인협회가 주관하게 되었고, 저는 사할린동포 단체가 주체가 되어 주최되는 문화행사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13일 인터뷰를 마치고 2일후 이원장은 탈춤을 가르치기 위한 한삼 20벌과 한복 10벌, 무용 슈즈 10컬레를 트렁크에 추려 넣고 뱃길로 가는 사할린 길을 나섰다. 이원장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동해안 뱃길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당도한 후 다음날 오전 사할린 가는 비행기를 타고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사할린에 가는 직항로가 폐쇄 되어서 2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돌고 돌아서 2박 3일을 걸려서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은 3년째 가족이 기다리는 사할린 땅을 밞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 봄에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모스크바에서 사할린 행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했다. 올 가을부터 연해주로 가는 뱃길이라도 열려서 다행이다. 그러나 극동 러시아 바이칼 부근 지역에 사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몽골을 경유해서 2일간 육로로 가야하는 형편이다. 우리 모두는 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는 사할린 한인들의 정체성을 살피기 위해 이병일 원장에게서 사할린 동포들의 '김치'와 '국악'의 향유에 대한 인터뷰를 싣기로 한다.
-
사할린동포 김경순님 소식을 접하며(이병일)러시아 사할린한국교육원장 이병일 사할린 동포가 2020년에 이어서 3년째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주)국악신문 10월 16일자 기사를 받고서 너무나 기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사할린한국교육원생인 김경순 여사가 수상을 했다는 것은 사할린 동포들의 큰 경사이기 때문입니다. 사할린한국교육원이 주최하는 "2022년 제24회 한민족 수기대회”에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장수 수강생인 김경순님(71세)이 지난 4월에 자작시 가사를 보여 주셨습니다. 가수 조용필님의 ‘그 겨울의 찻집’ 곡의 가사에 맞추어 쓰신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 가사인데, 일반적인 고국의 외면 속에 사시는 사할린동포 2세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가사였습니다. 가사에는 사할린 1세와 2세들의 디아스포라가 서린 가족사에는 뼈아픈 그리움이 절절했습니다. 그리고 7월 경에 또 한 편의 가사를 보내셨습니다. ‘칠갑산’ 노래에 맞춘 가사였는데, 한맺힌 눈물이 총총히 박힌 이별의 가족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노래를 불러서 녹음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가사에 부쳐서 노래를 부르려고 연습하려고 했다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경순님의 큰오빠는 1940년 10살 때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떠나신 부모님과 헤어져서 배 떠난 부두에서 망연자실한 큰오빠의 심정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12살에 부모를 떠나 서울 숙부댁으로 유학을 가던 장면이 겹쳐지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녹화를 하는 내내 목메임을 추스릴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려 50년 후 어머니는 병드신 채, 아버지는 연로하신 채 휠체어를 타고 한국을 방문해서 꿈에도 그리던 장남을 상봉하시고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몇달 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서 가셔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도 또 이산과 이별을 겪고, 다시는 못 만나 보시고 세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런 기막힌 이별과 짧은 재회, 그리고 생이별한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김경순님이 겪었던 부모님의 기억, 큰오빠에게서 들은 그 수많은 하소연들이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가신 분들을 위로하고 다시 내세에서 만나길 기원하면서 글짓기를 해보시라고 했는데, 이 글이 조국에서 대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할린 동포들를 위로하는 치유가 되어 제 마음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해 2022년 들어서 사할린 동포들이 맞이하는 조국과의 첫 교류이기도 합니다. 내년에도 사할린 동포들과 교육원생들이 많이 참가하기를 바랍니다. 귀중한 많은 체험수기와 이야기들이 있지만, KBS한민족방송사와 수상의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사할린 동포 2세분들의 애환이 더욱 많은 글로 표현되어 기록으로, 역사로 남기를 기원합니다. 이 참담한 민족의 비극을 만든 세계전쟁, 그리고 책임을 져야하는 주체들이 더욱 더 이 문제를 따뜻한 가슴으로 다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강제징용·위안부 문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일본에 답하다’ 출간일본은 강제징용·위안부 피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여전히 펼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는 당시 우리가 일본에 동조해 자발적으로 몸 바쳐 일한 내선일체 일본인들이었는지, 아니면 노예, 인도에 반하는 죄의 피해자들이었는지에 관한 문제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일본은 현재, 모든 청구권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재판상 주장할 수 없게 됐고,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위안부합의를 통해 다시 한번 일괄타결로 해결됐으며, 위안부 소송에서는 일본 정부가 피고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본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개인을 국가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현 국제법의 흐름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강제징용·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현 입장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대응 논리를 담은 ‘일본에 답하다(신우정 지음)’가 출간됐다. 이 책의 골자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 논리 제시이다. 외교적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강제집행 절차가 종결을 향해 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외교적 해결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의 대비도 필요하다는 판단이 이 책의 주요 집필 배경이다. ‘일본에 답하다’는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양국 대립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대중의 올바른 시각을 형성하기 위해 먼저 1965년 청구권협정, 2015년 위안부합의, 강제징용·위안부 소송의 골자와 그와 관련한 우리나라 대법원, 헌법재판소의 입장 및 일본의 입장을 요약해 설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강행규범 등 관련 국제법 개념을 책의 목적과 방향 범위 내에서 소개하고, 그 토대 위에 일본의 현재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를 저자 고유의 시각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강제징용·위안부의 본질이 노예 노동·성 노예의 불법행위 피해이고, 그러한 피해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그 피해가 국제법상 최상위 규범인 강행규범 위반의 피해에 해당함을 핵심 전제로 한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재판상 청구를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대응 논리가 적절히 갖춰진다면 우리는 자존심과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일본에 이성적으로 답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강제집행 등 강제징용·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앞으로의 상황에 다각도로 대비할 수 있다. 이 책의 의미와 가치를 그곳에 두고 싶다”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이 책의 저자이자 국제법 박사로서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를 다년간 연구해 온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장 신우정 판사는 강제징용·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내용인 1965년 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위안부합의 등의 국제법 개념들을 학술 서적의 형식에서 벗어나 저널 또는 에세이 형태로 접근해 법률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설명했다.
-
사할린한국교육원, 사할린한글교실 교재 증정김포 통진읍 사할린한글교실 개설 24일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올해 경기도 김포 통진읍에 영주귀국한 전영희(사할린한국교육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교사) 교사를 찾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어 배우기 기초 교재를 20권 증정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으로 김포 통진읍에 영주귀국한 3세 4세 사할린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사할린한글교실이 신설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한 교재를 구하지 못한 전영희 교사가 사할린한글교육원에 요청을 해서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비자 연장을 위해 입국한 이병일 원장은 "한국에서는 러시아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배우기 교재를 구하기 쉽지가 않아서, 전영희 선생님이 부탁을 해서 급한대로 들고 나왔지만, 올해부터 영주귀국하는 동포들의 눈높이에 제작된 한국어 교육 교재 개발이 시급하다고 본다. 가르치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익숙한 교육 프로그램이 도입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한글교육이 시작되어야 한국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새로이 신설되는 김포 사할린한글교실은 15년 전 통집읍에 영주 귀국한 최정순(73세, 전 사할린주 여성단체협회장) 사할린동포회 회장의 발의에 의해 개설이 되었다. "이번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의해 지난 1월에 1세, 2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3세 4세들이 함께 들어왔다. 그런데 낯설은 한국에서 한국어를 한 줄도 알지 못하고 말을 못해서 슈퍼마켓도 가지 못하고 집안에서 러시아 방송만 청취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적십자나 지자체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한국어를 알아야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서 일을 해야한다. 대학 이상 공부를 한 사람들이 놀고 먹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대학원 진학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며. "새로 취득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한글학교를 개설했다. 다행히 교육 장소도 구했다. 4월 초 사할린한글학교는 개강할 예정이다." 최정순 회장이 시작하는 한글학교 소식을 들은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제작팀에서 개강을 축하하고, 지난해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을 모은 출판물과 한글학습 교재를 보내 준다는 전언을 보냈다. 이날 사할린한글교실 개설 소식을 듣고 아리랑학회 기미양 이사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참석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의 30년 한글교육 활동 전영희 선생은 사할린한국교육협회(회장:임태식)의 30년간 한글교육 활동에 대한 어려움과 열정에 대해 토로했다. 그는 퇴직후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사할린한국교육협회에서 10년간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한국에 영주귀국 했다. 오자마자 최정순 회장의 권유로 사할린한글교실을 준비하게 되어서 기쁜 마음 감출 수가 없다고 전했다. 이에 모두 박수를 보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정기 후원을 하고 있는 이혜솔 회장은 "최정순 회장이 증언하는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우리도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자 모집에 앞장 서겠다"라고 전했다. 함께 자리 한 김화숙, 한정숙, 김정숙은 그 자리에서 정기후원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축제 이후부터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30여 개 지역 아리랑보존회에서 매월 정기후원을 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 전영희 선생이 고마움을 표명했다. "오늘 우리는 사할린 동포들이 2차 영주귀국 소식을 듣고 왔다. 사할린 동포가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할린 이라는 곳이 어딘줄도 몰랐다.(김화숙) 우리 동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해 80년이 넘도록 마음대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김정숙) 다큐에서 알게 된 사할린 한인의 역사보다도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들은 생생한 증언을 들으니 이해가 되고 나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 사할린 동포들이 그렇게 타국에서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 몰랐다. 매년 아리랑축제 무대에서 불렀던 '사할린아리랑' 가사 한줄 한줄의 의미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한정숙)"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울먹였다. 이어서 이혜솔 회장의 선창으로 '사할린아리랑'을 모두 함께 따라서 불렀다. 최정순 회장이 조선인 강제동원을 은폐하고 유네스코 등재를 서두르는 사도광산을 반대하는 시위 릴레이를 해야한다는 발의를 하자, 모두 달력을 찢어서 티켓을 만들어서 들고 외쳤다. '사도광산 NO',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은 다음달 개설하는 사할린한글교실 첫 수업에 와서 아리랑과 전통민요를 불러주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최회장의 배웅을 받으면서 통진읍을 떠났다. 전국 25개 지역에 사할린 동포들이 영주귀국해서 정주하고 있다. 이번에 352명이 영주귀국해서 부모님과 같이 새터를 만들고 있다. 우선 지난 1월과 2월 인천, 김포 지역을 찾아가 보니 가장 시급한 것이 사할린 3세, 4세 대상으로 한 한국어와 한글 교육이라고 한다. 우선 저학년이 읽는 동화책이라도 보내달라고 하는 부탁에 대답을 하고 나오면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들에 대한 정착 메뉴얼과 교육 프로그램이 시급하다. 사할린주한인협회에 따르면 3만여 명의 한인이 사할린에 살고 있다. 동포 1세는 500여 명, 2세는 5천여 명, 부모가 생존한 2세는 1천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
[1인시위] <12>정용범. 이중징용 숨기는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반대한다전 사할린 씨름협회 정용범 회장님이 일본에 보내는 메세지이다. "일본은 지옥섬이라고 불리는 군함도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더니. 다시 사도섬에 있는 사도탄광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다. 2년 동안 사할린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조국에 가는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 강제동원 강제노역도 모자라서 19450년 나가시키 히로시마에 핵폭탄 떨어졌을때.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된 조선인을 히로시마 나가사키로 다시 강제징용 시켜서 보호복도 없이 맨몸으로 핵으로 폭파된 도시 재건을 위해 노역을 시켰다. 돌아온 사람은 10명도 안되고, 그 사람들은 핵 방사능에 노출되어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아편을 맞다가 몇년도 못 살고 죽었다. 이런 사실 숨기고 근대유산으로 둔갑시켜서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신청을 했다. 약속한 조선인 강제노역 기록을 숨기고......천인공노할 일이다.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한다.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한다. 절대 반대한다." 현재 남과 북의 '아리랑'과 '씨름' 종목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2012년과 2018년에 등재가 되었다. 특히 씨름은 남북 공동등재가 되어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현재 전국 60여 개 지역 아리랑전승단체와 사할린 동포들 중심으로 사도광산 등재반대운동이 릴레이로 번지고 있다.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사실을 감춘 채 에도시대로 제한하여 등재 신청한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꼼수 시도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전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오늘 21일 프랑스 파리로 출국하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유네스코 수장을 만나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국들과도 별도 회담을 가질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정부는 강제노역 등 전체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면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는 적절하지 않다는 우리 입장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신청에 따라 사도광산은 올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조사를 거쳐 내년 6월쯤 21개 위원국으로 구성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최종 결정까지 1년 여를 앞둔 시점에서 우리 정부와 우리는 동포사회와 연계한 SNS활동에 사명감을 가지고 외교전에 돌입해야 한다. 사도광산 등재반대운동은 앞으로 계속되어질 것이다. 이에 대한 도덕적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유네스코는 군함도 등재부터 취소시켜야 한다.
-
[을지로 아니리] (28) “축! 유네스코 국내 추천 결정!” 대 "절대 NO!"일본 정부는 지난 1일 니가타현 사도 섬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추천했다. 이 때문에 오지에 있는 사도광산이 유명해졌다. 일본인 중에도 이곳에 가 본 사람은 많지 않을 정도로 잊혀진 곳이다. 일본 혼슈(本州)는 전국 어디서도 이동하기 쉽지 않은 거리 탓이다. 도쿄(東京)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2시간, 니가타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70분을 가면 사도 섬 료쓰(兩津)항.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20여분을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야 사도광산에 이른다. 이 광산은 사도섬의 40여개 광산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이번에 유네스코에 추천된 곳은 섬의 서북쪽에 있는 아이카와·쓰루시(相川·鶴子) 금은(金銀)광산과 니시미가와(西三川) 사금(砂金)광산이다. 이 중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로 유명한 아이카와 금은산에는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조선인 노동자가 대거 동원돼 구리와 철, 아연 등의 전쟁 물자를 채굴했다. 이 광산의 관람 가능한 곳은 에도시대 금광 일부를 재현한 소다유(宗太夫) 갱도와 메이지(明治)시대(1868년~1912년) 이후 사용된 도유(道遊) 갱도이다. 이 갱도가 활발하게 개척되었던 에도시대는 전국에서 10만 명이 몰려들었고,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도쿠가와 막부의 지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광산 태평양전쟁 후반기에는 1200~2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일했다. 시기상으로 이중징용으로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인간성이 말살된 희생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광산 입구에는 이런 게시물이 세워져 있다. "축! 유네스코 국내 추천 결정! 쇼와(昭和)14년(1939년) 노동동원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동원이 시작, 쇼와20년(1945년) 9월 패전에 의해 조선인 노동자가 귀조(帰朝, 조선으로 돌아감)” 이 때문에 한국은 이 광산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1인 릴레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유네스코 사도광산, 아리랑과 함께할 수 없다”
-
정의용, 日 하야시에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추진 항의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상과 한 첫 통화에서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과 관련해 항의의 뜻을 전했다.3일 외교부에 따르면 정 장관은 이날 오후 하야시 외무상과 통화를 갖고 한일관계 및 한반도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정 장관은 올바른 역사인식이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한 근간이라고 지적했다.아울러 이번에 일본 정부가 한국인 강제노역의 아픈 역사를 외면한 채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추진키로 한 데 대해 깊은 실망과 함께 항의의 뜻을 표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정 장관은 2015년 하시마섬(端島·군함도)을 포함한 일본 근대산업시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부터 충실이 이행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군함도 등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를 제대로 알리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채택한 바 있다.정 장관은 이 같은 후속조치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일본 정·관계에서 일본 정부가 스스로 표명해온 과거사 관련 사죄와 반성의 정신에 역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일본 정부가 이에 동조한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또 강제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과거사 문제 관련,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일본 측의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일본 수출규제·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 등 양국 여타 현안과 관련한 우리 정부 입장도 재차 전달했다.한편 한일 외교장관은 북한이 지난달 30일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을 발사한 데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했다.이들은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 및 조속한 대화 재개를 위해 한일, 한미일 간 협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정 장관은 지난해 11월 취임한 하야시 외무상과 대면한 적은 있지만 통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외교·개발장관 회의를 계기로 만찬장에서 자연스럽게 조우해 잠시 대화했다.
-
러시아 '언론의 날', 새고려신문 이예식 사진기자 공로상 수상사할린 사진작가 이예식 선생(새고려신문 사진기자)이 러시아 언론의 날에 사할린 발레리 리마렌코 주지사에게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사할린 새고려신문 배윅토리아 사장에 따르면 "이예식 기자는 1989년부터 새고려신문사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예식 기자는 1949년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부친은 1943년에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다. 사할린에서 대학까지 마친 후 1973년부터 프리랜서로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2002년부터 서울과 일본 삿포로 등에서 사진전을 5회 열었으며 사할린에서도 개인전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의 삶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알려오고 있다. 5년전 전시회와 더불어 이예식 사진집 ‘귀환’(눈빛출판사)이 나왔다. 이예식 기자는 "수년 전부터 사진집을 낼 생각을 해왔는데 이번에 전시와 더불어 첫 사진집을 갖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김지연 작가의 사진집 ‘사할린의 한인들’(눈빛출판사)도 같이 출판되었다. 사할린에서 태어났고 프리랜서 시절부터 따진다면 50년 넘게 사할린 동포들의 삶과 현장을 담고 있는 이예식은 사할린 한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이다. 이예식 선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예식 Lee E-Sik 1949년 사할린 마카롭 시에서 출생사할린 와후루쉐보 고등학교를 졸업노보시비르스끄 건축통신대학에서 공부했으며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기술학교에서 제도를 가르쳤다. 1973년부터 사할린 주 언론계 프리랜서 사진기자 1989년-현재 새고려신문 사진기자로 활동 중1997년 체호프 상 수상. 국제 인터넷사이트 포토콩클 수상2002년 대한민국 서울, 일본 삿포로에서 개인전2003년 일본 오사카에서 "사할린 한인의 삶” 테마의 개인전 2003-2009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인전 2017년 이예식 사진전 '귀환' (부산 40계단 문화관 전시실) 2018년 이예식 사진전 (사할린 역사박물관)
-
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3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씨는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쌓인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히신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3부를 연재한다. 일본 땅에 묻히신 외할아버지를 찾다 (3부 편) 언제나 일본 외할아버지 사시던 곳에 가보나라는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제주 진외가집에서 외할아버지는 종전 이후 재혼도 하지도 않고 혼자 아들을 키우시다가 오사카에서 돌아가셨다고 알려 주었다. 1990년 한러수교 이후 한국의 친척들과 연락도 계속해 왔는데 세월이 바쁘다 보니 일본에 묻힌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을 생각만 가슴에 담고 가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2019년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낯선 외국 남자가 친구하자는 신청이 들어와서 페친이 되었다. 한국말로 답변을 했더니 그분이 사할린 한인 역사와 나의 가족사에 관심을 보였다.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난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 2세로 살고 있다고 하며, 나의 제주도 출신 부모님이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다가 이중징용된 가족사에 대해 가슴 아퍼했다. 일본 친구는 30여 년 간직하고 있던 외삼촌의 연락처를 달라 하시고 오사카에 계신 외삼촌 댁에 전화해 보겠다고 하셨다. 기적처럼 외삼촌 댁 전화번호와 주소는 바로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외삼촌은 12년 전에 별세하셨고, 외숙모는 살아 계시다고 전해 주었다. 이 소식을 받고 나는 이틀 동안 설움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 오사카에 사시는 얼굴도 모르는 외숙모 집 전화번호를 떨리는 손으로 두드렸다. 제주도가 고향인 재일교포 외숙모는 한국말을 잘 못하셔서 일본말을 섞어가며 오랫동안 가족 얘기를 해주셨다. "언제가 올 너의 소식을 기다렸다. 내일 당장 오라. 보고 싶다"라고 울먹이셨다. "외숙모님! 외삼촌을 못 만난 것이 마음이 아퍼요. 더 일찍 연락을 하는 건데 사는 것이 힘든 시기라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가는 것이 러시아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내일이라도 가고 싶지만 준비를 해서 연락을 드리고 가겠습니다.”라고 전하고, 석달 후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로 찾아갔다. 드디어 낯선 땅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묘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할아버지, 엄마 대신 제가 70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오늘에서야 엄마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외할머니가 평생 그리워 하시던 아버지를 손녀인 제가 찾았어요. 마지막 유언을 엄마 대신 제가 지켜 드렸어요. 이제 슬퍼하지 마세요. 편히 쉬세요” 먼저 생전에 만나지 못하고 헤어진 부녀간의 영혼을 위로해 드렸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 하던 오라버니(나의 외삼촌)의 묘앞에서 모자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 순간부터 나는 눈만 감아도 우리 외가 가족이 얼마나 슬프게 살아오셨는지 이제는 뼈저리게 알 것 같다. 아버지를 그리워 하던 딸(어머니), 아들을 그리워 하던 어머니(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제주도에 남겨두고 온 딸을 만나셨으리라. 외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만나셨으리라. 나는 이제서야 돌아가신 엄마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나) 엄마! 이제 편안히 잠드소서..... 나는 이 글을 남기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 4대에 걸친 가족사는 사할린에 사는 손자에서 손자로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
-
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2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씨는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쌓인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히신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2부를 연재한다. 무국적으로 살다가신 아버지와 어머니(2부) 부친 박정환(1919년생)은 전라남도 목포 근처 작은 하의도라는 섬이다. 1944년 부친은 하의도의 한 사람과 함께 강제동원을 당했다. 사할린에서 부친은 산판(벌목장)에서 일했다. 우리 부모는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코르사코브 항구 근처에서 만나서 살림을 차렸다.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동포들은 그 당시 코르사코브에 도착하자마자 공동묘지부터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갈 때 부모님의 유해를 가지고 가기 위해서다. 이후 사할린에 와서 산판과 탄판에서 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일본 탄광으로 다시 징용을 받아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을 맞고 죽어간 사람들. 사할린에 돌아왔으나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 이렇게 잃어버린 가족들 사진을 가슴에 품고 몇 년간이나 모여서 살았다. 모여서 살다가 러시아 국적을 받든지 북한 국적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 다 무국적이셨다. 러시아 국적을 받으면 조금은 자유롭고 경제적 혜택도 많아서 동서들이 같이 받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을 하셨다. 혹시라도 국적 문제로 고향에 돌아갈 길이 막힐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셨다. 집에서는 조선말만 사용하게 했다.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우리말을 잊으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셨다. 그 덕에 우리 형제는 조선말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나는 1951년 코르사코브에서 맏딸로 태어난지 한 달이 되어 사할린 북부 스미르늬흐구역 오노르마을 근처 동포들만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유는 고향땅에서 함께 끌려 온 부친의 동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산판(벌목장)에서 함께 작업을 했다. 오노르 마을에서 마침내 내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나 연이어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 밑으로 남동생을 세 명이나 봤다고 나를 추켜 세워 주셨다. 이후 나는 8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북적북적한 스미르늬흐 마을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란 눈을 가진 백인 러시아 사람을 봤는데, 언어도 다르고 외모도 낯설어서 놀라웠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 이곳 사람들이 왜 우리랑 달라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선사람들이 어떻게 사할린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강제징용을 당했는지,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던 당시 얘기를 그때 처음 설명해 주셨다.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우리 가족은 돌아갈 조국이 있고, 밀양 박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뿌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나’라는 존재를 당당하게 했다. 아버지 나이와 비슷한 1세 분들은 만나면 똑같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다. 당시 사할린은 고향이 같으면 서로 서로 의형제를 맺고 기념 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그 사진을 앞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셨다. 나 죽으면 이 사진을 누군가는 고향집에 언젠가는 가져가게 될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죽는날까지 간직하다가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간다. 그리고 누구나 항상 밤에 라디오 수신기를 켜고 한국 방송을 기다리셨다. 혹시나 고향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면서,...우리 아버지도 한국 노래를 들으시면서 자주 우시기도 하셨다. 당시 어린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노래가 즐거운데 왜 우시지?”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안하시고. 먼 하늘만 쳐다보시디가 독한 보드카를 한잔 드시고 주무셨다. 어느덧 나는 결혼을 하게 되어 집을 떠나게 된다. 88서울올림픽 때, 어느날 부모님 댁을 찾았다. 엄마와 아버지 두 분 다 눈이 퉁퉁 부어 계셨다. 밤새도록 우셨다고... 어제 늘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바로 아버지 ‘박정환’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셨다. 사방팔방으로 연락을 취해 사할린 동포들을 돕고 있는 일본의 변호사 타카기 켄이찌를 통해 편지로 연락을 하게 된다. 다음 해 아버지 친척의 초청을 받아서 나는 난생 처음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을 통해 한국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이시고, 아버지의 형과 남동생은 6.25전쟁 때 실종되셨다고 했다. 한 집안 삼형제가 뿔뿔히 헤어지게 된 것이다. 남의 나라들이 일으킨 전쟁이 만든 상처는 너무 컸다. 한국 방송에서 우리 아버지를 찾은 분은 한국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다. 소식이 주고 받다가 한국 적십자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리운 조국 땅에 발을 내렸다. 어머니는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외할아버지의 소식부터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고향인 하의도, 친척들이 사는 목포,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를 다 찾아가서 친척들과 눈물 젖은 상봉을 했다. 물론 서울도 가보았다. 제주도에는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업어 주며 키웠다던 조카들을 만나서 가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보자 마자 피를 나눈 형제라는 피붙이들이 나누는 뜨거운 정은 사할린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오라버니 연락처를 받게 되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겠다고....엄마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약속을 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에 친척이 있는 경우 외국방문 허가가 떨어졌지만 일본에서 친척을 찾고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면서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으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1995년에 돌아가셨다. 다음 해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엄마도 없으니 고국으로 가고 싶다.'라는 의사를 나타내셔서 우리는 가족 모임에서 '그렇게 해드리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영주귀국을 하셔서 처음에 아버지는 춘천 '사랑의집' 양로원에서 계시다가 나중에는 노환으로 재활기관인 인천 '사할린한인복지회관'으로 옮기셨다. 1년 후 나는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되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사할린에서 일을 그만 두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여러 가지 힘든 일과 통역을 하면서 휴일마다 인천 양로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찾아서 위로해 드렸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나서 출가를 한 맏딸이 출산을 하게 돼서 손녀를 돌봐주기 위해 완전히 사할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다. 그리고 나서 2008년에 아버지께서는 조국에서 10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사할린으로 가져와 어머니의 묘 곁에 나란히 안치해 드렸다.(계속)
-
'KBS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 대상에 박영자 씨와 주 코스타 학생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공모전은 북방지역 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해온 것을 격려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한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사할린 한인의 살아온 가족사는 바로 70년간 잊혀진 역사입니다. 코로나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이 글을 정리했습니다. 죽기 전에 남겨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이 상은 사할린에 남겨진 사람들을 대신해서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박영자) 영상 부문 대상을 수상한 러시아 사할린 주 코스타 학생(16세)의 영상은 '우리 가족의 삶 이야기'가 차지했다. 4대에 걸친 사할린 한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었다는 평을 받았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가 한인들인데 러시아에서 왜 사는가? 사할린에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너무 궁금했다. 학교수업에서는 알 수 없는 우리 가족의 역사를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들었다. 우리 할머니의 아버지께서는 경상남도에서 1943년에 카라후토로(사할린) 강제 징용으로 끌려오셨다. 고르노자보츠크라는 마을 산판에서 아주 힘든 벌목일을 하게 되었다. 전쟁 후에도 우리 가족은 고향에도 못 가고 남겨졌다. 홈스크 항구에서 조국에서 오는 배만 기다리다가 70여년이 흘러서 4대가 이어지는 가족이 태어났다. "(주 코스타) 한민족방송은 올해 코로나19로 별도 시상식을 거행하지 않고 수상자에게 전달되었다. 수상자 박영자씨와 주 코스타군은 KBS 한민족방송방송사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수상소감을 본지에 전했다. 올해로 23회 째를 맞는 이번 공모전은 생활 속에서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체험담, 한류와 한글에 대한 생각과 감상을 담은 글과 영상을 대상으로 하였다. 매년 9월에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 지역과 러시아 사할린 등에 사는 북방 동포를 대상으로 한민족 체험수기를 공모, 10월 중순에 발표한다. 수상 소식이 나가고 나서 사할린과 러시아 고려인사회에서 많은 격려와 감사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수상작과 수상소감은 본지에서 연재되고 있다.
-
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1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공모전은 북방지역 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해온 것을 격려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 씨는 수기에서 70여년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오사카에 묻히신 외할아버지 묘를 찾게 돼 70년만에 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박 씨는 "사할린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린 밀양 박씨 가문의 영광이지만, 동시에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힌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민족방송은 올해 코로나19로 별도 시상식을 거행하지 않고 수상자에게 바로 전달하기로 했다. 수상작은 KBS라디오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연재한다. 이산(Diaspora)과 나의 외할머니(1부) 나는 작년에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에 걸려서 죽음의 고개에서 헤매다가 살아났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이셨다. 꿈에서 만난 어머니에게 "지금 너무 아퍼요.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매일 기도를 했다. 20여일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다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나는 살아 생전에 못 다한 고조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이어지는 긴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다. 4대에 걸쳐서 가라후또(사할린)에 살게 된 조선인의 이야기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에 인한 이산과 다시 일본 땅으로 끌려가는 이중징용을 당하게 되는 슬픈 가족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어머니 현민제(현남열,1928년생)는 제주도가 고향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1944년 우리 어머니는 16세가 될 무렵에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 오신 아버지를 찾기 위해 홀로 제주 본가 할머니 곁을 떠나 사할린으로 건너오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은 어린 아들과 남편은 강제징병으로 끌려가고 어린 딸들과 주부들까지 정신대로 일본이나 남영군도나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이 되어 가는 시대라서 할머니는 어린 손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있는 사할린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외조부님이 되시는 우리 어머니의 부모님은 두 딸을 본가에 맡기시고. 두 분은 1940년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아들 하나만 데리고 계약기간 2년만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기다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할린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우리 외조모는 일제에 의해 가족이 헤어지는 첫 번째 이별을 당한 것이다. 제주도 친할머니 집에 남겨져 함께 살던 언니가 시집가서 어린 두 아들들을 돌보고 있게 되자, 할머니는 손녀에게 "얘야, 가라후토 아버지를 찾아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몰린 일제가 조선 어린 여자들을 정신대로 끌고 가는지라 할머니가 겁이 나서 손녀딸을 부모가 있는 사할린에 보내려고 한 것이다. 꽃같은 16세를 맞이한 소녀는 늘씬하고 고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 볼 때마다 더욱 불안해진 할머니는 너 혼자라도 가야 한다고 떠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미수가루를 뱃속에 차고 홀로 배를 타야만 했다. 아니면 정신대로 끌려갈 판이다. 배 밑바닥에서 간신히 20여 일 지내고 나서야 일본땅을 통해 사할린에 도착을 해서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에수토루) 구역의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바로 며칠전 일본으로 이중징용을 당해 17살 어린 아들까지 데리고 가라는 일제에 의해 이미 일본 고베의 한 탄광으로 강제동원 되어 떠나버린 뒤였다. 그리운 아버지는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낯설은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을 뒤로 하고 2년만 있다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난 후였다. 당시 일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 탄광으로 강제로 끌려가야만 하는 세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이 되셨다. 남겨진 두 딸과 함께 평생 동안 힘들고 외로운 여생을 사셨다. 고향에서 끌려갈 때는 2년만 일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다가 이중징용으로 다시 일본으로 내몰린 것이다. 1년 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부자는 일본으로, 모녀는 사할린으로....... 갈라지고 찢어져야만 했다.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서 한 개인이 당해야만 하는 ‘이산의 이산’을 겪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두 번째로 당하는 가족의 이별인 것이다. 사할린에 도착한 어머니는 가족을 만난 기쁨보다는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날 수 없다는 슬픔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까지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다고 외할머니가 통곡하시는 모습이 늘 생생하다고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땅에서 돌아온 사람들만 만나면 "하늘 같은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샛별같은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 이런 사람을 아십니까"라고 찾고 찾으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더 슬펐다고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젊은 나이에 평생 수절하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그리워 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딸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민제야 너는 반드시 나 대신에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손을 꽉 잡으셨다. 죽는 순간까지도 너무나 억울해서 눈도 못 감고 떠나가신 어머니의 두 눈을 감겨드리며 "네”하고 굳게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마지막 그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조국은 우리를 외면하고 결국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식들과 함께 이국땅에 묻히게 된다. 이별과 고향, 이 두 가지가 외할머니에게 뼈아픈 한이 되어 살아오셨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반드시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려야 한다고 내 귀에 못이 박히게 중얼거리셨다. 돌아가시는 날 하얀 눈이 많이 내렸다. 나를 불러서 바라 보시면서 "영자야. 내가 지켜드리지 못한 나의 어머니와의 약속을 너는 지켜야 한다. 반드시 외할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라고 유언을 남기시고 눈을 감으셨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산의 고통은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나에게 대물림이 되었다.(계속)
-
군함도.강제징용 설명 없는 안내판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2제6회 시흥갯골국악대제전(06/22)
- 3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
- 4유튜브 아리랑 채널 운영자 정창관 선생 따님 시집 보내는 날
- 5남원 춘향제 , 15일 글로벌 춘향선발대회
- 6유인촌 장관 ‘연극배우 고 김동원 흉상 제막식’ 참석
- 7고성농요 기획공연, 제39회 대한민국 민속음악대축제 개최
- 87만7000개 사연 중 선정된 K-찐팬 32개 팀, 한국 온다
- 9제4회 전국청소년공연예술제 대회(08/01)
- 10"경복궁 근처 '국적 불명 한복' 개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