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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소리란 무엇일까? '한국호남학진흥원' 주관으로 '남도학'이라는 교재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간 써두었던 기록들을 병합해 '남도소리' 항목을 집필하였다. 여기 그 일부를 소개하여 '남도소리'가 무엇인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무엇인지 밝혀두고자 한다. 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잡가'를 말한다. 1928년 평양 권번에서 예기(藝妓)들을 가르치기 위해 김구희가 엮었던 '가곡보감(歌曲寶鑑)'에 보면, 가곡, 가사, 시조,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성잡가 등이 실려 있다. 남도잡가라는 이름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잡가라 풀이해두었다. 전라도지역의 보렴, 새타령, 화초사거리와 경상도지역의 골패타령, 성주풀이 따위로 설명한다. 하지만 문화권역으로서의 남도는 호남의 이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잡가로 범주를 좁히는 것이 유용하다. 그런데 육자배기, 농부가, 진도아리랑, 흥타령 따위를 거론하게 되면 잡가의 범주를 넘어선다. 토속민요을 포함하는 호명방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남도지역의 '창(唱)'이라는 뜻으로 '남도창'이라 한다. 판소리를 포함하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광의의 남도소리에 대한 개념이 대두된다. 민요, 잡가를 포함해 판소리, 시조, 가곡, 무가, 나아가 남도에서 노래했거나 남도를 노래한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개념 말이다. 따라서 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의 모든 노래를 포섭하는 개념이다.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곡목이 육자배기다. 흥그레타령에 토대한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따지면 민요와 잡가를 거쳐 가요까지 연결된다. 한(恨)과 흥(興)의 정서가 어떤 장르들까지 파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연구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재창조 100여년을 앞두고 있는 트로트 또한 남도소리의 한 분파로 개념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남도학'이 씨줄 날줄의 시공을 교직하는 현재적 어떤 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마땅히 남도소리의 개념범주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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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소리란 무엇일까? '한국호남학진흥원' 주관으로 '남도학'이라는 교재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간 써두었던 기록들을 병합해 '남도소리' 항목을 집필하였다. 여기 그 일부를 소개하여 '남도소리'가 무엇인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무엇인지 밝혀두고자 한다. 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잡가'를 말한다. 1928년 평양 권번에서 예기(藝妓)들을 가르치기 위해 김구희가 엮었던 '가곡보감(歌曲寶鑑)'에 보면, 가곡, 가사, 시조,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성잡가 등이 실려 있다. 남도잡가라는 이름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잡가라 풀이해두었다. 전라도지역의 보렴, 새타령, 화초사거리와 경상도지역의 골패타령, 성주풀이 따위로 설명한다. 하지만 문화권역으로서의 남도는 호남의 이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잡가로 범주를 좁히는 것이 유용하다. 그런데 육자배기, 농부가, 진도아리랑, 흥타령 따위를 거론하게 되면 잡가의 범주를 넘어선다. 토속민요을 포함하는 호명방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남도지역의 '창(唱)'이라는 뜻으로 '남도창'이라 한다. 판소리를 포함하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광의의 남도소리에 대한 개념이 대두된다. 민요, 잡가를 포함해 판소리, 시조, 가곡, 무가, 나아가 남도에서 노래했거나 남도를 노래한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개념 말이다. 따라서 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의 모든 노래를 포섭하는 개념이다.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곡목이 육자배기다. 흥그레타령에 토대한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따지면 민요와 잡가를 거쳐 가요까지 연결된다. 한(恨)과 흥(興)의 정서가 어떤 장르들까지 파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연구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재창조 100여년을 앞두고 있는 트로트 또한 남도소리의 한 분파로 개념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남도학'이 씨줄 날줄의 시공을 교직하는 현재적 어떤 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마땅히 남도소리의 개념범주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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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나주신청문화관 복원은 전라도 천년정원 조성사업 중 하나다. 2018년 전라도 정도천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것으로 전남과 전북이 함께 하는 사업이다. 천년정원은 나주향교와 나주읍성 서성문을 중심으로 오향(五香)마당 즉 판소리 등 전통음악, 전통 차, 음식, 서책, 서예와 공예 마당으로 구성된다. 전남도에서 나주시에 제안을 하여 공동 예산으로 편성된다. 첫째 마당은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가 나주신청이라는 점, 사실은 나주시에서 이미 기획했던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둘째 마당은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나주사람 초의선사가 출가했던 사찰이 나주 운흥사라는 점 외에도 불갑사보다 14년이나 앞선 불교전래지 불회사나 차를 진상했던 다소면(지금의 다도면)이 아예 차를 표방하는 지명이라는 점 등을 주목할 수 있는 마당이다. 셋째 마당은 발효음식으로 이름난 전라도 음식 전반을, 넷째 마당은 유네스코 지정 서원 등 수많은 문학작품 등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다섯째 마당은 서화와 공예를 포괄하는 미술정원으로 계획된다. 나주신청문화관 개관으로 전라도 천년 소리정원의 첫 삽을 뜬 셈이니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조성될 천년마당에 거는 기대가 크다.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역대의 신청처럼 문화적 거점이자 미래지향적 모티프를 제공할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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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 나주에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 행사였다. 이경엽 교수와 윤종호 나주시립국악단 예술감독의 발표를 통해 그간 묻혀있던 보물 같은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토론을 통해 그 의미와 역사를 짚어봤다. 이경엽은 1937년 발간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공저 '조선무속연구'를 통해 나주신청에 보관되어 있던 여섯 종류의 문서를 설명해주었다. 선생안(1800년)과 절목(1882년), 대동보안(1899년) 등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박물관에서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선생안에 수록되어 있는 정원길(1834~1903)과 정원실(1838~?)이다. 정원길은 정재근의 아버지다. 정재근은 박유전을 시조삼고 있는 서편제를 보급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 정응민 대에 이르러 판소리의 중흥기라고나 할까, 이른바 보성소리라는 유파로 불리는 서편제의 큰 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선생안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판소리 후기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종 40주년 칭경식의 대표를 맡아 행한 업적들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협률사가 설립되었는데 전국의 판소리 명창, 가기(歌妓), 무동(舞童) 등 170여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들고 공연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때 합류하거나 소속되었던 예인들의 창발이 오늘날 전통음악을 재구성하는 큰 흐름이었다는 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협률사와 이후 연계되는 원각사의 명암들이 짙은데, 무안사람 강용안과 더불어 만든 창극이며 삼현육각 등 관련한 자료와 인물연대기는 따로 후술하겠다. 어쨌든 정원길의 대를 이은 정재근이 정응민과 정권진으로 다시 안채봉,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으로 이어지고 또 한 사람의 획기적인 인물 정창업의 예술을 정학진과 김창환이 이어받아 김봉이, 김봉학으로 다시 오수암, 정광수, 임방울 등으로 이었다는 점 괄목할 만한 풍경이다. 가히 서편제의 맥을 나주신청에서 총괄하고 확산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뿐인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를 잇는 안기옥과 정남희 등은 월북하여 북한 전통음악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의 트로트나 가요로 확산된 맥락도 흥미롭다. 천년도읍지라는 점을 떠나서도 나주신청의 개관이 갖는 현대적 의미가 막중하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맥을 좇아 전남도립국안단은 물론, 진도, 여수, 무안 등지의 예술단과의 네트워크, 미래전략으로서의 연구와 공연 확장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을 누구보다 축하한다. 남도의 음악을 넘어 우리나라 나아가 아시아의 음악을 총괄하고 확산하는 센터로 기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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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신청은 전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昌才都廳案)'과 '경기재인청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건륭 사십구년에 작성되었으므로 1784년이다. 남도지역에서는 나주장악청, 장흥신청, 여수 악공청, 진도장악청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내가 참여해 이경엽 교수와 함께 연구 출판했던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민속원, 2007)을 참고해보면 여수악공청의 중건은 1939년이다. 신청의 선생들 내력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이 1928년에 작성되었으므로 여수 또한 역사를 조선시대로 올려 잡을 수 있다. '선생안'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이경엽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장흥신청은 1832년(순조 32)에 '신청완문(神廳完文)'이 작성되는 것으로 보아 그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해체되었다가 1919년 중건되었고 1921년에는 외청 세 칸을 더 지어 신청 기능을 복원하게 되었다.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갹출하여 음악전수를 할 수 있게 된 내력을 적은 장악청중건기가 전한다. 악공청, 장악청, 신청 등의 용어가 병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 기사는 진도 장악청 정보를 전해준다. 당시로부터 약 300여 년 전부터 진도읍 성내리 장악청(?樂廳) 속칭 신청(神廳)이 있어 일반 광대들에게 조선음악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한자표기는 달라도 속칭 신청이라 했다는 언술이나 기타 내용들은 모두 신청(神廳) 관련 정보들이다. 이 언급을 적용해보면 신청의 존재가 1630년대로 소급된다. 광해군 일기 10년(1618) 10월 16일 기사도 참고가 된다. 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산주재인(山主才人), 도산주(都山主)라는 호칭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호명은 재인 집단의 존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재인청, 신청, 광대청 등 전문음악인들의 집단과 생활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정보들을 보면 신청이 전국적으로 존재했으나 전라도지역이 가장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청의 역사를 고려말 진도 장악청으로 올려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추적이 필요해보이지만, 이른바 무계들의 집단이자 공사의 음악업무를 담당했던 신청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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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신청(神廳)을 알기 쉽게 말하면 전통시대 민간연예인협회 정도일 것이다. 무업을 하고 공연활동을 하거나 각종 음악을 연마하고 전수하는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예인협회보다는 훨씬 기능이 막중한 단체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적인 단체였으면서 공적인 기능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천민 집단에 속하는 무계였지만 중앙이나 지방 관아에 악공, 취고수, 세악수 등 공적인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고, 선생안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예술 선배이자 조상격인 선대들의 제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필영 교수가 집필한 위키실록에서는 신청(神廳)을 신당(神堂)과 동일한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대에 신청(神廳)이라는 이름이 3건 확인되는데, 무당이 여러 신령을 모시고 굿을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숙종대 장희빈의 인현황후 저주 사건에 등장하는 활과 화살 등을 신청 내부 물건들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신청은 이 굿당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주의 역사를 기록한 '금성읍지'(1897년)에 보면 통인청, 훈련청 등의 이름과 함께 교방청(敎坊廳)과 신청(新廳)의 이름이 나온다. 특이한 것은 귀신 신(神)자를 쓰지 않고 새로울 신(新)자를 썼다는 점이다. 교방청은 춤, 검무 따위를 가르치던 기녀양성 기관이고 신청은 악공소(樂工所)라는 설명이 따로 붙어 있는 것처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공적인 공연을 연행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무계 집단의 공간이자 협회적 성격이라는 점에서 통칭 신청(神廳)이라 호명하는 것을 두고 무굿을 하는 굿당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문세족들의 다양한 전통에 견주어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판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음악이 신청이라는 공간과 관련 선생들을 통해 보존되고 전승되었음을 이해한다면, 나아가 천한 것으로 이해되던 문화들이 오히려 장대한 전통으로 전승 보존되는 시대정신을 주목한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굿당도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존중받는 공간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인청, 장악청 등의 신청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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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도리 기둥을 한 여섯 간(약 20평)의 조선 기와집이었다. 방이 셋이고 봉당, 대청, 정지 등이 있었다. 주위에는 26~27호 정도의 당골 집안이 살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집지을 때의 각서가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 무신도나 초상들이 걸려있지는 않았다. 조선말엽에 이 건물을 중수하기 위해 헌금을 한 한참사, 임참사, 박참사 등의 이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지난 토요일 나주 신청문화관 개소식에서 발표한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왜 신청인가, 무엇을 어떻게 주목할까"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신청을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다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인용한 정보다. 설명은 이어진다. 장악청에 출입하던 사람들을 '고인, 공인, 재인'이라 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다.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십여 명이 모여 예능을 닦고 놀이를 하였다. 당골 무계이기 때문에 무업에 종사한 것도 주요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장악청의 대동계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석하여 음악기량을 익혔다. 신청에서 사용했던 악기는 북, 장구, 쇠,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젓대, 해금 등이었다. 향유한 노래는 판소리 단가를 비롯해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등이었다. 전북대 정회천 교수가 흥미로운 발상을 추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신청이라 부르던 공간을 왜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을까? 삼별초에 의해 또 하나의 정부가 세워졌던 곳이기에 고려 이래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장악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음악을 담당하던 국가기관 장악원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악원(掌樂院)은 고려시대에는 태악서(太樂署)라 하다가 전악서로 바꾸었고, 조선 초기 아악서, 전악서, 악학, 관습도감을 합쳐 세조 12년(1466)에 장악서로 통합하였다. 예종 원년에는 다시 장악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청을 재인청, 광대청, 공인청, 공인방, 악공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던 내력을 상기해보면 진도의 장악청을 고려 말까지 소급하는 상상이 그리 엉뚱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 현재 진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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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벌교와 목포 사람들은 은연중 ‘부용산’을 애창하곤 했다. ‘부용산’을 모르면 벌교나 목포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목포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벌교사람 박기동 때문일까,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나주사람 안성현 때문일까. 구례사람들 나아가 여순 사람들에게는 산동애가가 그러할까? 사실은 노래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애써 잊으려 노력해왔던 굴곡의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불온한 시대는 애창은커녕 발설 자체를 금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연구들에 의해 실상이 밝혀지고, 세상 또한 개명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목 놓아 불러도 좋을 시절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절명가인 ‘산동애가’의 가사는 어딘지 모르게 ‘부용산’을 빼닮았다. 스물 안팎의 누이들이 대상이라는 점이 그렇고 비운에 죽은 청춘들이라는 점이 그러하며 지리산의 흉중을 횡단한다는 점이 그렇다. 어찌 노고단의 계곡이며 벌교의 들판이며 목포의 부잔교들뿐이겠는가. 고깃배 가득하던 여수앞바다며 순천의 들녘이며 아니 남도 천지의 올망졸망한 터전들뿐이겠는가. 미처 못다 부른 절명의 풍경들이 ‘산동애가’의 행간에 가득 찬 것을 그 누구라고 보지 못하랴. 시대의 무엇이 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때때로 대신 죽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는가. 문제는 지금부터다. 다시 아린 눈으로 백부전의 가족사진을 본다. 무심한 듯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일지 모른다. 이름도 빛도 없이 집단 매장된 무덤가를 흐르는 노래일지 모른다.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피해자들에 비해 소수이지만 가해자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상생과 화합을 앞세우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이제는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대응을 해가는 일들이 남아있다. 지금 부용산 봉우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있고 산수유 진 지리산 산동에는 무심한 녹음만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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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를 펴낸 도올 김용옥의 고백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 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서북청년회)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있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반란-항명-항쟁으로 인식의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철희도 여순항쟁으로 호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옳게 정하는 것을 정명(正名)이라 한다. 명칭이 실재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당한 호명을 하려면 이런 주장들을 수용해야할까? 위키백과는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군경에 의해 2,50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왕의 '반란'이라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상들이 밝혀졌고 지금도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주철희는 여순항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948년 10윌 19일부터 지리산 빨치산 토벌이 완료된 1955년 4월 1일까지를 포함해야하고 특히 4천명에서 5천명까지 전국의 감옥에 흩어져 수감되었던 관련자들이 6.25가 발발하면서 처형당하였으므로 이 숫자를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2만에서 3만에 이른다는 제주 4.3 희생자 숫자에 육박하는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도올이 책 제목을 '우린 너무 몰랐다'라고 지은 까닭이기도 하다. 비로소 연구가 시작되었으니 실상들이 더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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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산동애가’는 누가 지었을까? 여수MBC 다큐에서는 구례산동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거나 회피하던 노래를 홍순례의 구연을 통해 녹음할 수 있었고 이후 작곡가 이호섭이 편곡하여 복원하게 되었다 한다. 열아홉 백부전이 끌려가면서 지어 불렀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주철희의 연구에 의하면 여순 당시 경찰신분이던 정성수가 퇴임 후 1961년에 백씨의 애달픈 사연을 담아 작사를 하고 김부해가 곡을 붙인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지화자가 부른 마디마디가 간장을 도려낸다. 이후 금지곡이 되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홍순례의 구연을 통해 다시 소환된 셈이다. 노래의 소재이자 배경이었던 백순례가 지어 불렀다고 와전된 것은 망각의 간극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전형적인 트로트 계열의 곡인 까닭에 <부용산>처럼 가곡(歌曲)의 풍류가 보이지도 않고 한자 조어를 남발하는 가사(歌詞)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가슴에 쌓인 울분이나 한을 어찌어찌 풀어내는 우리네 민중들의 정서를 올곧이 담아냈기 때문이리라. 트로트를 얕잡아보거나 애써 전통음악과 변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노래일수 있다. 하지만 노래 속에 담긴 내력을 훑어가다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斷腸)을 넘어 숨이 끊어지는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어찌 선율의 유장과 리듬의 견고만을 들어 노래의 경중을 토로하겠는가. 국민가수가 된 송가인의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포섭하는 실상을 보라.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하는 굴절된 역사가,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의 행간에 겹겹이 쌓여 있지 않은가. 산동애가는 바로 그런 노래다. 작사하고 작곡한 사람이 있지만 민중의 역사를 올곧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민요라 할 수 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시경 이래의 전통을 추적해 그 의미를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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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여수MBC 다큐를 리뷰해 본다. 2001년 당시 62세였던 홍순례의 구술이다. "시집와서 들으니까 아가씨(백순례)가 모략에 의해서 죽었는데, 이쁘고 똑똑해서 (군인들이) 죽이기가 아깝다고 했다더라. 끌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또 한 할머니가 덧붙인다. "잡혀갈 때 노래가 나왔을 거시. 죽은 무덤가서 노래가 나왔다고." 여순사건으로 오빠를 잃었다는 구연자 홍순례씨는 이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만다. 백순례의 조카 백정규의 구술은 노래보다 더 애절하다. "백부님이 끌려가서 죽게 되었는데, 고모님(백순례)이 말하기를, 그래도 집안을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나까지는 죽어도 좋으니까 막내오빠만은 살려달라 애원을 해가지고, 사실은 우리가(백정규 등) 여기 있습니다." 진압군에 의해 끌려가 죽을 막내오빠를 살려내고 대신 잡혀가 죽은 백순례에 대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카가 보관하고 있는 (백순례의) 큰오빠 결혼 기념사진에 찍힌 가족들의 시선이 아리다. 그저 무심히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시선들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가운데 어머니를 중심으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징용 나가 사망한 큰오빠,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 의해 처형당한 둘째 오빠, 6.25때 행방불명된 언니, 자기 대신 죽은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린 막내오빠 등이다. 사진의 맨 왼쪽이 백순례인데, 노리개처럼 이쁘다 하여 아예 백부전으로 불렸다. 부전은 색 헝겊을 둥근 모양이나 병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 쪽을 맞대고 수를 놓기도 하고 다른 헝겊으로 알록달록하게 대기도 하여 끈을 매 차고 다니던 여자 아이들의 노리개를 말한다. 조카며느리 박씨의 진술에 의하면 1987년 사망한 어머니 고씨가 치매를 앓을 때 증손녀를 '부전아, 부전아!'하고 부르시곤 했다더라. 치매에 들어서야 막내딸의 환영을 소환한 어머니의 무의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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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노랫말을 쓰고 안성현이 지었다. 안치환과 윤선애가 불러 세간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산동애가'를 다루면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부용산 가사를 빼닮은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카피를 붙였던 이유가 있다.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했던 굴절의 역사,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 행간에 겹겹이 쌓인 질곡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월북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안성현이 있고 좌익이라는 딱지를 달고 평생 감시 속에서 살았던 박기동이 있다. 박기동은 천재 문학소녀를 위해 초빙될 만큼 출중한 문학인이었다. 안성현은 가야금산조의 중흥조라고 하는 안기옥의 아들이기도 하다. 훗날 박기동은 '부용산'이라는 책을 냈다. 나주문화원에서는 '안성현 백서'를 출간했다. '백서'에 의하면, 김 종 시인 등 숱한 연구자들에 의해 광폭의 추적과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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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가 낳은 당대 최고의 명창 임방울의 생애를 '사단법인 임방울국악진흥회' 자료를 인용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1905년 4월 20일(호적 자료)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현 광주 광산구)에서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연구자에 따라 출생년도가 조금씩 다르거나 5남매, 8남매, 9남매 등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다. 어머니가 50이 넘어 낳았다고 해서 '쉰둥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방울방울 잘 논다 해서 '방울'이라 했다거나 임방울의 소리를 들은 어느 선생이 '너야말로 은방울이다'라고 해서 예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김종수와 혼인했다가 이혼했고 박오례와 혼인하여 임오희, 임순희, 임만택을 낳았으며 한애순과의 사이에 임달희, 전상순과의 사이에 임별희 등을 두었다. 협률사와 원각사의 감독이었던 김창환이 외삼촌이다. 1916년 박재실 창극단에 들어가 흥보가를, 1918년에는 공창식에게 소리를 배운다. 1921년 유성준에게 성원목, 조몽실, 오수암 등과 함께 적벽가와 수궁가를 배운다. 1922년에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고 1929년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일약 명창의 반열에 오른다. 1933년 콜롬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1941년 오케이까지 많은 음반을 낸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활동했다. 동일극단 참여, 수궁가 완창, 적벽가 완창 등을 했고 노래를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투병 중 1961년 8일 서울 자택에서 운명했다.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룬 장례 풍경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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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판소리 단가(短歌)가 중모리장단으로 구성된 것에 비하면 ‘추억’은 진양조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소절만 중모리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단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1929년 매일신보사 강당 내청각에서 열린 '조선명창대연주회'에 참석하여 ‘쑥대머리’를 부른 이후 임방울의 소리는 나라를 울리는 소리로 부상한다. 당시 120만 장의 음반이 팔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임방울의 목구성 자체가 남도의 계면조(서양음악으로 말하면 단조의 슬픈 소리)에 특화되어 있어서일까?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으로 해석되었던 이 정서는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정서라 말할 수 있다. 문학으로 말하면 고려가요 가시리에서 김소월의 시적 정조까지, 음악으로 말하면 남도의 대표곡 육자백이에서 연정을 노래한 각양의 트로트들까지 이어진다고나 할까. 비판받고 있기는 하지만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우리네 정서 자체를 '한(恨)'으로 표방했던 한 시기의 컨텍스트, 쑥대머리와 추억은 이러한 시대적 정서를 강하게 대변해주는 노래였다. 이보형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를 주목한 바 있다. 임방울의 ‘추억’은 사실 판소리 단가라기보다 어쩌면 육자백이에 가까운 노래일 수 있다. 망처의 정서가 그렇고 단조로우면서도 시김새를 강조하는 선율이 그러하며 진양조라는 장단이 또한 그러하다. 그렇기에 나는 임방울의 추억을 상실, 애환과 후회 혹은 기다림과 그리움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매우 오래된 서사라 해석하며 노래의 구성 또한 육자백이로부터 판소리로 이어지는 가장 오래된 장치라고 말해왔다.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했던 동초 김연수와 비교해보면 이 점이 더 명료해진다. 일제강점기 이후 가장 뚜렷한 판소리 창자로 존립한 두 거목의 소리세계가 이성과 감성, 이론과 예술 등 대칭구조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김혜정의 연구에 의하면 김연수는 분명한 악조의 선택과 성음의 표현, 분명한 가사전달과 너름새의 사용 등 판소리 이론에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반면 임방울은 당대의 대중들이 애호하는 계면조와 빠르고 흥겨운 속도감,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 구성 등 대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비교의 가부, 선악, 혹은 우위가 아니라 시대적 정서와 문화적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유성기 음반으로 대표되었던 오디오라는 기술이다. 1920년 7월 경성 라디오방송국의 개국과 1928년 이후 유성음반기의 발매가 판소리와 우리 노래역사에 끼쳤던 영향을 새삼 환기해본다. 사실 추억이나 쑥대머리는 이 기술에 기반한 대중음악의 큰 흐름이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했던 임방울의 추억으로부터 반세기를 훨씬 지난 오늘 유트브와 SNS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도도한 흐름들을 주목한다. 1세기 전의 오디오가 신기술이었듯 제4차산업혁명기의 흐름 또한 신기술에 기반해 있을 터인데, BTS(방탄소년단)의 부상이나 송가인의 트로트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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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사단법인 임방울국악진흥회에서는 산호주와의 러브스토리를 임방울의 생애사로 공식화하고 있다. 임방울이 일약 스타로 등장하자 고향인 광주의 송학원에서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었고 여기서 소년시절의 연인 김산호주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요릿집 송학원은 결혼생활을 청산한 산호주가 운영하고 있었다나.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연정이 불타올라 두문불출 2년여를 함께 지내게 된다. 전속계약을 한 레코드사에서 난리가 났겠다. 이내 선천적인 목조차 상하게 되자 낙심한 방울은 지리산 토굴로 독공에 들어간다. 그리움에 사무친 산호주가 수소문하여 찾아가지만 방울은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깊은 병에 든 산호주가 죽게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고, 애달픈 마음으로 '추억'을 지어 불렀다는 것 아닌가. 천이두의 주장대로라면 이 사건 이후부터 추억은 쑥대머리와 거의 유사한 빈도의 레퍼토리가 된다. 진흥회에서 공식화한 '추억'의 녹음은 1930년 콜롬비아 레코드이고, 1933년 오케 레코드에서는 추억(亡妻를 생각함)이라는 제목으로 김종기가 장고 반주를 한다. 최동현의 연구에 의하면 '추억'의 첫 음반은 단가 '편시춘'과 함께 1932년 10월 콜롬비아에서 발매된다(Columbia 40370). 1934년 1월 시에론(Chieron 151)에서는 '사망처(죽은 아내를 생각함)'로 발매되었고 1934년 2월 오케에서 발매한 '추억'에는 '작사 임방울'이라는 표기가 있다. 문제는 최동현의 지적처럼 '사망친난 단가'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죽음을 애달파한 이 노래가 추억과 유사하다는 것이 쟁점이다. 한편 문순태의 '팔도명인전'(전남매일신문, 1975. 12월)에 의하면 임방울이 유성준 문하에서 공부하던 시절 화순의 여섯 살 연상 월향이라는 기생과 사랑을 하게 된다. 눈치 챈 유성준에게 야단을 맞고 지리산 토굴로 들어가 독공을 하여 본인 스타일의 소리를 완성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임방울이 열네 살 무렵 스승으로 모시는 공창식의 스토리 또한 유사하다는 점이다. 박유전, 이날치, 김채만 등의 서편제 소리를 계승한 공창식이 인기를 독점할 무렵, 어느 재상의 첩이던 보영이라는 여자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랑의 농도가 너무 심하였던지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다. 이후 능주로 내려오게 되었고, 보영으로부터 맨발로 도망쳐 나왔다 해서 '맨발의 공선생'으로 불려졌다 한다. 모두 김산호주 스토리와 같은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송학원 주인이었다는 김산호주가 어린 시절 연인이었는지 장성하여 맺은 인연인지, 본명이 아닌 기명(妓名)인지, 월향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명한 소리꾼들은 모두 망처가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임방울의 여성편력을 일정한 서사에 얹어 스토리텔링한 것일까? 임방울이 유명해지자 후대의 누군가가 각색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서가 사실은 대표곡 쑥대머리와 상통한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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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천이두의 '명창 임방울'(위대한 한국인7, 한길사, 1998)에 나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광산 김씨네 농가로 거슬러 오른다. 임방울이 고용살이를 했던 것일까? 주인집 딸 산호가 등장한다. 방울과는 동갑내기, 소리꾼으로 성공하지 못한 채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 임경학이 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고용살이를 보낸 풍경이 묘사된다. 여차여차하여 방울은 산호네 집을 떠나게 되고 박재실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한다. 박재실은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등 당대의 최고 소리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선생이다. 시대의 요청이었을까. 임방울은 공창식 등 선생들에게 사사받으며, 타고난 천구성과 수리성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각종 레코드 취입은 물론 전국 순회공연을 도맡아 하던 때의 대표곡이 쑥대머리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웅얼거렸을 노래 쑥대머리의 유행을 일제강점기의 나라 잃은 풍경에 대입해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이몽룡을 기다리던 옥중 춘향이의 심정이, 광복을 기다리던 조선 사람들 마음의 투사라는 뜻이다. 이 상실감의 정서는 해방이 되고나서도 이어진다. 어쨌든 대성공을 거둔 방울이 고향으로 돌아와 연인 산호주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순애보의 레퍼토리가 작동된다. 각기 혼인한 사이지만 사랑했던 연인,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을 운영하던 산호는 이미 병들어 있다. 문순태 등이 채집한 정보를 보태면, 임방울은 산호주와의 사랑을 뿌리치고 동굴에서 소리를 연마해 성공한다. 판소리 예술을 위해 산호주를 거부한 셈이다.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들 속에 러브스토리의 결말이 애처롭다. 결국 산호가 임방울을 연모하며 죽었다는 것 아닌가. 천이두가 쓴 임방울 전기는 사실일까 소설일까. 내용 전반이 산호와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측면을 보면 소설에 더 가깝다. 김산호주와의 러브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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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임방울의 추억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데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데라고 그리 쉽게 가럇던가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나 말았거나 왔다 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들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은 하직코 가셨지만 이승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한들 보러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보리오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전생에 무슨 혐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 각읍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속에 들어도 나는 못잊겠네 원명이 그뿐이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아 어데로 가고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저 유명한 임방울의 단가 '추억'이다. 임방울의 평생 히트곡을 두 곡만 들라면 첫째가 '쑥대머리'요. 둘째가 '추억'일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노래다. 세월이 무심해서일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애창되었던 이 노래는 오랫동안 잊혀진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근자에 이런 저런 판소리꾼들이 다시 부르는 풍경들을 접하게 되어 고무적이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중 옥중 장면을 노래한 것이니 누구나 아는 이야기인데 '추억'은 어떤 노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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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진도지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오쟁이쌈'을 했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 2018. 03)에 소개했던 풍장(風葬)의 한 내용이다. 2017년 본지를 통해서도 언급하였으나 보완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초분(草墳, 二次葬制의 하나)과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섬'을 말한다. 아이의 주검을 오쟁이 안에 담아 해안의 장송가지에 매달아두는 장례법이다. 일종의 풍장(風葬)이다. 이를 진도지역에서는 '오쟁이쌈'이라고 했다. 왜 오쟁이에 담아서 육중한 해송의 가지에 걸어두었던 것일까? 이것은 왜 초분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태껏 사람들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답변을 해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망자가 초분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뿐일까? 그렇다면 망자는 왜 초분해주기를 원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주검 처리하는 예법과 방식들에 대해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해왔다. 아이들의 경우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형태가 보편적이다. 남도말로 '독장' 혹은 '독담'이라 한다. 이 논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마한지역의 옹관(甕棺)으로도 이어진다. 한자문화권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널리 연행되었던 방식, 큰 항아리에 시신을 안장하는 고대로부터의 장례법들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장례법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죽은 아이들에게 지상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매미가 탈바꿈을 하고 죽는 찰나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다시 부화한 알들은 애벌레가 되어 지하로 들고, 어떤 이들은 천사의 날개옷을 빌려 하늘에 오른다. 어쩌면 백년일지도 아니 천년일지도 모른 길고 긴 잠을 청한다. 하지만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을 깨고 오르는 아프락사스의 새처럼 한 생애의 풍경을 깨트리기만 하면 된다. 이전의 자신을 온전하게 벗어버리는 매미처럼 말이다. 지상의 날들이 닷새면 어떻고 하루면 어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오쟁이에 매단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본다. 단 하루가 아니라 단 한순간만이라도 죽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거나 거듭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들이 해송 숲의 오쟁이 장례 풍경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와 문화와 문명 아니 시공을 넘고 상상을 넘어 그 어떤 수식으로 설명한다 해도 상통할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류의 소망이지 않겠는가. 여름이 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지하의 매미들이 지상으로 올라올지, 그래서 내 귀청을 뜯으며 울어댈지 이제 그 많은 탈바꿈과 거듭남과 재생과 부활의 사건들을 묵상할 시간이다. 이제 장마 끝나 여름 깊을 것이니 오랜 세월 기다렸던 매미들 지상으로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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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매미의 우화(羽化)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되는 것을 우화라 한다.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는 일을 우화등선이라 한다. 진서(晉書)의 ‘허매전(許邁傳’에 나오는 말이다. 벌레에 날개가 돋으니 날개돋이요 껍질을 온전히 벗어놓으니 탈바꿈이다. 허물을 벗고 나오는 것이 갱생이고 거듭남이며 재생이고 부활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비유해 말하면 번데기의 성충은 물론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신선이 다르지 않다. 본디 먼지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날개를 가졌으니 창공을 나는 새요, 하늘로 날아오르니 솟대 위의 인신가교(人神架橋) 곧 신조(神鳥)다.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달기 위해서 많게는 17년을 기다려야하지만 온전히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자신을 죽여야 한다. 매미가 벗어던진 옷, 매미의 허물이 온전한 그의 형상 그대로임을 주목하는 이유다. 수년 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문구가 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전해준 쪽지 말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헤르만헤세의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신의 이름, 아프락사스의 새를 진도 관매도 해송숲의 오쟁이에 덧입혀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껍데기, 그 병을 깨고 날아오르는 선의(蟬衣), 선녀의 날개옷을 주목했을 사람들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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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오래된 기다림의 끝, 찰나 같은 지상의 삶 매미의 일생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보들이 넘친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간추리기 힘들만큼 다양한 정보들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개 3년에서 17년까지 땅 속에서 준비를 했다가 땅위로 올라와 고작 보름에서 한 달을 살고 죽는다는 설명이 주류다. 정보의 출처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지구에는 대략 3,000여 종에서 4만 여종이 넘는 매미가 산다. 우리나라에는 940여 종의 매미가 알려져 있다. 참매미와 유자매미는 약 5년을 주기로 땅에서 나온다. 미국의 남부 매미는 7년에서 13년, 미국 중서부의 매미는 17년을 주기로 땅에서 나온다. 땅으로 나온 수컷 매미는 암컷과 짝짓기를 하고나서 죽고 암컷은 알을 낳고 죽는다. 그 기간이 열흘 혹은 보름에서 한 달이다. 우리나라 말매미의 경우 6년여를 땅속에서 기다리다 지상에 오르면 고작 10여일을 살다가 죽는다는 보고가 있다. 적게는 3년, 많게는 17년을 캄캄한 땅 속에서 이른바 다시 태어날 날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종족 보존을 위한 전술이 이들의 진화를 결정하였을 것으로 설명한다. 천적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패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3대에 걸쳐 대륙과 바다를 여행하는 나비는 물론 7년여를 인내하고 준비했다가 비로소 지상에 오르는 죽순과도 다를 바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 그리 울고 여름 내내 천둥장마의 비바람을 견뎌야 하는 문학적 수사가 달리 회자되었겠나. 매미의 일생, 탈바꿈이라는 낱말의 시작 어미 매미가 나뭇가지 구멍에 알을 낳는다. 알들은 몇 주 후 애벌레로 부화하여 땅으로 내려간다. 땅 속 40㎝ 정도에 구멍을 파고 자리를 잡으면 나무뿌리의 액을 빨아먹으며 길고 긴 기다림의 잠을 잔다. 매미들은 인고의 시간 동안 지상의 날들에 대해 어떤 꿈들을 꾸는 것일까? 어미와 아비 매미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흙 속에서 애벌레가 되어 지상의 나무로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지상의 시간이 길지 않음을 수억 년의 기억 속에 상속해왔을 것이니 한순간이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이다. 말매미의 경우 나무로 기어 올라가면 3시간 만에 탈바꿈을 한다. 먼저 머리와 가슴이 빠져나오고 다리를 빼낸다. 이어 굳은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날개가 커지고 몸에서 검은 빛이 나타난다. 벗어놓은 허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알맹이 벌레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옛 사람들이 매미의 탈바꿈한 허물을 보고 무엇을 상상하였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거의 온전하고 완벽하게 자신을 벗어던지는 형국이랄까. 그래서다. 나는 매미의 탈바꿈을 비로소 죽어 다시 태어나는 의례라고 풀이해왔다. 초분과 진도지역의 '오쟁이쌈'에 매미를 비유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온전히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완벽하게 자신의 형상을 벗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매미 허물을 뜻하는 다양한 이름들, 선태, 조갑, 선각, 고선, 조료퇴피, 선퇴각, 금우아, 즐즐피, 최미충각, 즐즐후피, 즐즐피, 지료피, 열피, 마아조피 등을 주목한다. 성질이 차서 두드러기, 경풍 따위의 한약재로 쓴다. 일반적으로는 매미허물, 매미껍질 등으로 부른다. 이 중 선퇴(蟬退)나 선의(蟬衣)라는 이름이 흥미롭다. 모두 우화(羽化)한 껍질을 설명하는 방식인데, 매미가 탈바꿈할 때 벗은 허물, 매미가 벗어놓은 옷이라는 뜻이니 우화(寓話)이고 은유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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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진도지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오쟁이쌈'을 했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 2018. 3)에 소개했던 풍장(風葬)의 한 내용이다. 2017년 본지를 통해서도 언급하였으나 보완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초분(草墳, 二次葬制의 하나)과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섬'을 말한다. 아이의 주검을 오쟁이 안에 담아 해안의 장송가지에 매달아두는 장례법이다. 일종의 풍장(風葬)이다. 이를 진도지역에서는 '오쟁이쌈'이라고 했다. 왜 오쟁이에 담아서 육중한 해송의 가지에 걸어두었던 것일까? 이것은 왜 초분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여태껏 사람들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답변을 해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망자가 초분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뿐일까? 그렇다면 망자는 왜 초분해주기를 원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주검 처리하는 예법과 방식들에 대해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해왔다. 아이들의 경우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형태가 보편적이다. 남도말로 '독장' 혹은 '독담'이라 한다. 이 논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마한지역의 옹관(甕棺)으로도 이어진다. 한자문화권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널리 연행되었던 방식, 큰 항아리에 시신을 안장하는 고대로부터의 장례법들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장례법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죽은 아이들에게 지상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매미가 탈바꿈을 하고 죽는 찰나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다시 부화한 알들은 애벌레가 되어 지하로 들고, 어떤 이들은 천사의 날개옷을 빌려 하늘에 오른다. 어쩌면 백년일지도 아니 천년일지도 모른 길고 긴 잠을 청한다. 하지만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을 깨고 오르는 아프락사스의 새처럼 한 생애의 풍경을 깨트리기만 하면 된다. 이전의 자신을 온전하게 벗어버리는 매미처럼 말이다. 지상의 날들이 닷새면 어떻고 하루면 어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오쟁이에 매단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본다. 단 하루가 아니라 단 한순간만이라도 죽은 아이가 다시 태어나거나 거듭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들이 해송숲의 오쟁이 장례 풍경을 만들어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와 문화와 문명 아니 시공을 넘고 상상을 넘어 그 어떤 수식으로 설명한다 해도 상통할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류의 소망이지 않겠는가. 여름이 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지하의 매미들이 지상으로 올라올지, 그래서 내 귀청을 뜯으며 울어댈지 이제 그 많은 탈바꿈과 거듭남과 재생과 부활의 사건들을 묵상할 시간이다. 이제 장마 끝나 여름 깊을 것이니 오랜 세월 기다렸던 매미들 지상으로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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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밭 한가운데 농막이 있고 밭두둑에는 오이가 열렸네 껍질 벗기고 절여서 조상님께 바치네 자손들이 오래오래 살았으니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음이라" 오이를 거론할 때마다 인용하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구절이다. 시경이 기원전 600년경에 쓰여 졌으니 이미 3천여 년 전에도 오이를 재배했다는 얘기 아닌가? 더군다나 껍질 벗긴 오이를 절여서 제사 음식으로 사용했으니 그 기원을 아무리 올려 잡아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음식연구가들은 여기서의 오이절임을 김치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삼아왔다. 제나라 위왕의 고사로부터 파생된 '오이 밭에서는 신발끈을 매지 말며 오얏밭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는 속담을 통해서도 오이의 광범위한 재배 혹은 역사를 알 수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의 옛 기록에도 호과(胡瓜)에 대한 정보들이 많다. 김치 전문가인 박채린의 연구에는, 서민음식으로 '오잇국'이, 궁중음식으로 '과제탕'이 등장한다. 과제탕은 각 재료를 길게 썰어 기름에 지지다가 장국을 붓고 양념을 첨가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600년대까지는 절인 오이김치를 이용하다가 1700년대 이후에는 생오이를 활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도 시큼한 식초를 넣은 오이냉국이 여름철 음식으로 대세인 것을 보면 오이야말로 고대로부터 이어온 원형질의 채소 아닐까싶다. 더군다나 설화 등 광범위한 장르에서 남근의 은유 혹은 잉태와 다산의 상징으로 기능해왔으니 그 맥락을 허투루 살필 수 있겠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탓인지 소금에 절인 오이에 식초 듬뿍 넣고, 파, 설탕, 고춧가루 가미한 오이냉국을 마시고 싶은 마음, 어쩌면 가난한 내 뜨락을 오이정자(瓜亭) 삼아 상고하는 오래된 기다림의 정조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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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내 님 그리워 울고 있으니 산접동새와 내신세가 비슷하외다 아니며 거짓인줄 잔월효성만이 아시리다 넋이라도 임과 함께 하고 싶어요 아~ 우기는 이 누구입니까 과실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모함에 지나지 않는 것을 서럽구나 아~ 임께서 저를 벌써 잊으셨나요 아소 임아, 다시 들으시어 사랑해주소서" 저 유명한 '정과정곡'이다.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가장 확실한 노래, '고려사'와 '악학궤범'에 전하는 노래로 고려 후기 정서(鄭敍)가 지은 가요다. 참소를 받고 고향 동래로 유배되었는데, 오이정자를 짓고 오이를 재배하면서 부른 노래라 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오이정자(瓜亭)다. 가요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오이는 임금의 부름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대변한다. 왜 기다림이 오이일까? 벼슬아치의 임기로 상징되었던 중국의 고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궁금증이 풀린다.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 양공이 관리를 임지로 보내면서 다음해 오이가 익을 무렵에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여자가 혼인할 나이가 되는 열대여섯 살 혹은 기한이 다 된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오이 과(瓜)자를 쓴 과기(瓜期), 과한(瓜限) 혹은 과만(瓜滿) 등이 벼슬아치의 임기를 나타내는 말이 된 이유다. 수묵화나 민화의 초충도(草蟲圖)에도 여타의 소재들과 함께 오이가 즐겨 다루어진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자수병풍 중 오이와 개구리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길쭉하고도 탐스럽게 수직으로 그려진 오이를 남성성과 아들로 해석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길게 뻗은 오이덩굴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번창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해석한다. 개구리는 올챙이에서 변태하는 상징동물로 다산을 의미하며 고개 숙인 조(粟)는 겸손과 겸양을 나타낸다. 함의들이 이러해서인지 가지와 오이, 수박 등이 초충도의 배경으로 즐겨 다루어진다. 각각의 민화 상징과 함의들에 대해서는 면을 달리하여 다루어나가겠다. 의문이 든다. 초충도의 오이를 남근의 은유로만 해석해야 할까? 보다 근원적인 투사, 시경 이래 담론화된 오이의 궁극적인 함의는 어쩌면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다산과 다복을 기원했던 길상화(吉祥畵)의 원초적 욕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후대로 올수록 초충도의 의미는 강하고 부귀한 것들에 대응하는 저항기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풀과 벌레들의 그림을 비단 여자들만 그렸던 것은 아니지만 이름도 빛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여겨졌던 풀벌레들을 주목했던 여성들의 심성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심상 얘기다. 현대민화에서도 여러 가지 풀벌레 그림들이 즐겨 창작되곤 한다. 현상에는 뜻이 숨어있다. 고려가요 정과정에서 강강술래의 외쌈놀이 등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향방이라고나 할까. 차첨지라는 캐릭터를 읽어내는 시대정신이라고나 할까. 남근의 은유를 다산이나 길상으로만 해독해서는 안 될 이유들을 상고해본다. 기울어진 남근 혹은 당치않은 남성 우위의 성희롱을 비판하는 것, 부귀공명의 화훼가 아닌 하찮은 풀벌레들 속에 자신들을 투사해내는 민화의 심상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남성들의 지배에 억눌려 온 여성들, 가진자들에 억눌려 온 못가진자들의 매우 오래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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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대표적인 것이 영암 도갑사의 도선국사 설화다. 최씨 처녀가 오이를 먹고 잉태를 한다. 아이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내다버린다. 하지만 비둘기 등 동물들이 보호하여 양육한다. 다시 집으로 데려다 키웠더니 승려가 된다. 중국에 들어가 풍수를 배워온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보사탑을 세운다. 고려건국을 예언하고 조력한다. 천년 후에 내려온다고 예언한 후 입적한다. 이 설화는 고구려 주몽탄생과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부여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햇빛에 의해 임신이 된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을 버린다. 하지만 개, 돼지, 새 등 동물들이 보호한다. 다시 거두어 기른다. 활을 잘 쏴서 주몽이라 한다. 이후 고구려를 건국한다. 두 개의 이야기 중, 도선국사는 최씨 처녀는 오이(구슬을 먹는 버전도 있다)를 먹어서 잉태를 하고 주몽은 유화부인이 방안에 들어온 햇살을 받아 임신하는 풍경이 다를 뿐 거의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의 오이와 한 줄기 햇살이 남성성이다. 고려 전기 최응(898~932)의 탄생도 유사하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그 집 오이 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혔다. 이웃 사람이 궁예에게 고했다. 궁예가 점을 쳤다. 아들을 낳으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했다. 부모가 숨겨서 길렀다. 장성하여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와 각종 벼슬을 역임했다. 참외가 열리지 않고 본래대로 오이가 열렸으면 고려건국이 되지 않았을까? 여기서의 오이와 참외도 남성성 혹은 잉태를 함의한다. '외쪼기'라는 동화도 있다. 본래 반쪽 사람이라는 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다. 할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빨래터에서 오이 세 개를 건져먹다가 쥐가 반쪽을 먹어버린다. 할머니는 아들 둘을 낳고 이듬해에 눈, 코, 귀, 다리, 손이 하나인 반쪽 아들을 낳게 된다. 쥐가 먹어버린 반쪽 오이와 반쪽 아이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후 스토리를 다 다룰 필요는 없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할머니의 태몽과 오이다. 이외에도 오이와 관련된 출생설화는 전국에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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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5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 진도문화원장 박병훈이 1991년 '예향진도 22호'에 소개하여 남도문화제 등에 출연했던 놀이 이름은 '차첨지놀이'다. 무정이 은파유필에서 기록한 차첨지라는 캐릭터와 '외쌈놀이'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각색하거나 새로 연출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을 여기 다 소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오이에 대한 상징, 풍자와 해학 등으로 코믹하게 꾸민 놀이라는 점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오이밭의 주인공은 차첨지다. 차첨지 마누라가 소매(소변)동이를 이고 나와 강강술래 하는 사람들 머리위에 붓는 장면이 연출된다. 차첨지의 대사는 노골적이다. 몸집 큰 여인네 엉덩이를 감싸보며 '할멈, 이 수박 좀 보게, 꼭 윤부자집 며느리 소쿠리만 하네, 또가리(또아리) 좀 받치세'한다. 차첨지 마누라는 여인들 젖가슴을 주무르는 시늉을 하면서 '그놈만 크요? 이 수박 좀 보시오, 주렁주렁 셀 수도 없이 열렸소'라고 응수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여인들의 어깨를 들어 보이며 '워매 이 물외는 꼭 영감 그것만치나 하요, 안 그라요 영감'하며 희롱한다. 이후 심술보 영감과의 놀이, 구렁이나 뱀을 상징하는 밧줄 토막을 던지며 놀이를 끝낸다. 무정이 기록했던 시기만으로도 지금으로부터 120년 이전의 장면들이다. 내가 이 놀이에서 주목했던 것은 오이에 대한 상징이다. 성희롱 혹은 성폭력적 풍경들은 탈춤이나 다시래기 등 민속놀이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되었던 방식들이다. 여기서의 오이는 남근(男根)이다. 순화하면 남성성(男性性)이다. 은파유필을 역해한 박명희는 이 시의 파과(破瓜)를 '나이 64세'로 풀이했다. 백낙천의 시 '나이 예순넷이니 어찌 노쇠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는 대목과 조선후기 윤기의 문집 ]무명자집]을 인용해두었다. 외따기놀이를 노쇠한 차첨지의 남성성에 대한 희화화로 풀이했다. 남도지역 대개의 마을 앞에 서있는 입석(立石)으로부터 종교적, 문화적 혹은 예술적으로 포장된 남근의 은유들은 거론하기 힘들만큼 광범위하다. 기자(祈子,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원), 기풍(祈豊, 풍요에 대한 기원)의례의 원초적인 형국으로 해석한다. 물론 오이가 모두 남근 메타포에 포획된 것만은 아니다. 문화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포장되고 각색되며 변화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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