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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2: 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이준아 가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충돌하고 갈등하며 융합의 길을 모색해 오던 20세기를 거치면서 나는 절실하게 터득한 진리 하나가 있다. 강남의 귤이 회수淮水를 지나면 탱자가 되듯 문화에도 예술에도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공리公理가 통한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다. 지구촌의 이웃들이 똑같은 조건과 유사한 생활양태로 살아가고 있지만, 각기 민족 간에는 서로 다른 DNA를 지니고 있듯이 각 민족이나 지역 간의 문화예술에도 각기 다른 고유성이 있다. 나는 그 같은 고유성을 일러 종종 ‘문화의 원형질이니’ 혹은 ‘문화적 DNA’니 하는 말로 불러보기도 한다. 한국 음악 속에는 한국적인 기후풍토나 한국인의 기질 등이 얼키고 설키며 배양시켜 온 한국 음악 고유의 유전질이 있다. 그 같은 한국 음악 특유의 유전질, 다시 말해서 한국 전통음악의 DNA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전통가곡, 즉 정가正歌를 내세우고 싶다. 그만큼 정가는 한국 음악의 특수성은 물론, 전통문화의 개성을 통합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장르다. 이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인 우리 정가임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는 극성하는 상업주의적 부박한 시류에 밀리면서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국악계로 보나, 정부 당국의 문화정책 차원에서 보나,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나 문화는 어쩌면 소수의 선각자적 소신에 의해 이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판소리도 그랬고, 산조 음악도 그랬으며, 여기 정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대중적 환호와는 거리가 먼 정가 분야는, 그야말로 고독한 예술적 소신이 남다르지 않고는 평생의 업으로 매진해 가기 힘든 장르다. 이 같은 조야한 여건 속에서도 정가의 맥을 오롯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 가객이나 단체가 있다면, 마땅히 우리는 그들에게 격려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중견 가객 이준아가 이끄는 한국정가단은 그 같은 칭송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여창 가곡으로 명성을 굳힌 이준아의 탄탄한 내공이나 음악성도 범상치 않으려니와, 본인이 주역이 되어 창단한 한국정가단의 공연 경력 또한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곡의 법통을 충실하게 재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가사에 가곡풍의 옷을 입혀서 참신한 경지를 펼쳐 내기도 하는 유연한 음악관은 가곡 음악의 맥을 통시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열린 예술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8회째 정기공연을 축하하며, 한국정가단의 활동에 박수를 보낸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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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1: 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이재숙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고색창연한 한국의 대표적인 현악기를 꼽는다면 어떤 악기가 될까? 두말할 나위 없이 거문고와 가야고일 것이다. 그만큼 이 두 악기는 역사도 깊으려니와 장구한 세월을 관통하며 늘 당시대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애환을 공유해 왔다. 기실 거문고와 가야고는 한국 전통음악을 살찌워 낸 두 개의 큰 물줄기며, 뭇사람들의 감성이 조탁해 낸 아름다운 문양의 쌍벽임에 분명하다. 그뿐이랴. 거문고나 가야고에는 악기라고 하는 한낱 소리를 내는 도구 이상의 설화가 있고 환상이 있고 아우라가 있다. 한마디로 청각에 울리는 ‘음악’이상의 ‘문화’가 있다. 우선 두 악기의 연륜을 떠올려 보자. 거문고는 멀리 씩씩한 기상의 고구려까지, 가야고는 황금의 나라로 알려졌던 신라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줄잡아도 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자. 파란만장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형형색색의 시대 감성이 명멸했다. 거문고와 가야고에는 바로 이 같은 천변만화의 감성과 사연과 희비가 켜켜이 이끼 되어 농축돼 있는 것이다. 거문고나 가야고 음악을 들을 때면 이내 우리 상념이 음악 자체의 미감을 벗어나 먼 역사의 뒤안길을 유영하며 깊은 정념情念에 잠기게 되는 소이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음악을 들으면 음악의 테두리 속에만 갇히지 않고 자유자재로 상념의 산책을 나설 수 있는 형이상의 역사공간이 있다는 사실, 어쩌면 그 점이 곧 전통이라는 개념 자체이자 전통음악의 특징이요 본령이며, 우리 미의식을 증폭시키는 기제機制라고 하겠다. 아무튼 전통악기의 연주를 들으면, 나는 그 음악과 더불어 악기의 발자취에 투영된 시대상과 시대 정서를 함께 그리며 듣는다. 말할 나위 없이 느낌이나 상상의 진폭이 무한대로 확충된다. 일반적인 통념처럼 가야고는 확실히 여성적인 악기다. 중후하고 둔탁한 거문고 소리가 남성적이라면, 청초하고도 낭창스런 소리의 가야고는 섬세하고도 온유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술대로 대모玳瑁 판을 내려치는 웅혼함이 강건한 양陽의 세계에 흡사하다면, 섬섬옥수로 열두 줄을 넘나드는 우아함은 만물을 포용하는 온후溫厚한 음陰의 속성임에 분명타고 하겠다. 조선시대만 해도 거문고는 주로 문방사우가 갖춰진 근엄한 선비방에서 탄주되었으며, 가야고는 이끼 낀 담장 너머 그윽한 고가의 경중미인鏡中美人의 규방에서 연주돼야 제격이었다. 가야고와 경중미인! 참으로 절묘한 궁합이 아닐 수 없다. 정갈한 가야고 음악의 진수를 한 폭의 영상으로 형상화해 낸다면 경중미인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 지금도 널리 불리는 여창 가곡 한 수를 떠올리며 음미해 보자. 춘매春梅의 암향을 타고 피어 오르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만나지 못하는 고적한 애상哀傷이 엎치락뒤치락 뒤섞이며 금상첨화의 기다림의 미학을 직조해 내는 계면조 이삭대엽의 그 아릿한 서정의 가사말이다. 언약言約이 늦어지니 정매화庭梅花도 다 지거다 아침에 우던 까치 유신有信타 하랴마는 그러나 경중아미鏡中蛾眉를 다스려 볼까 하노라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아채게 된다.‘가야고와 경중미인’이라는 가야고 음악의 상징 어휘를 클릭하자, 내 뇌리의 망막에는 반사적으로 매은梅隱 이재숙 교수의 가야고 연주 모습이 선명하게 투영된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다. 음악과 천성과 교단의 이력 등을 감안해 볼 때, 확실히 이재숙 교수와 가야고는 혈통이 유사한 천생연분일시 분명하다. 그만큼 양자간에는 정서가 같고 뉘앙스가 같고 정체성이 상사相似하다. 사근사근 자상한 속삭임이 닮았다. 투명한 창가에 놓인 난초처럼 정갈하고 단정함이 닮았다. 상대의 희로애락을 살뜰히도 보듬어 주는 따듯함과 자애로움이 닮았다. ‘당’줄을 뜯으면 당으로 울리고 ‘징’줄을 튕기면 징으로 울어 주듯, 우여곡절 인생살이 굽이마다 늘 밝은 웃음과 진정어린 배려로 이웃 주변을 챙겨 주는 살뜰한 고마움이 또한 빼닮았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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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0: 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鏡中藝人 이상규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다른 이는 몰라도 이상규 교수가 회갑이라는 사실은 얼른 실감이 가지 않는다. 흔히 선배들의 나이 드심은 쉽게 눈에 띄어도, 후학들의 깊어지는 연륜은 의외란 듯 좀해서 믿겨지지 않는 인지상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의 회갑에 대한 나의 의외성은 이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는 팔팔한 장년 시절부터 머리는 은발이었다. 따라서 ‘안면은 청년에 머리는 은발’이라는 이미지가 곧 이 교수의 초상화처럼 나의 뇌리에 늘 각인되어 있었으니, 머리가 여전히 은발인 한 내 머릿속의 이 교수는 아직도 싱싱한 불혹의 연재年載쯤으로 감쪽같이 속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하간 이 교수의 은발은 적어도 은발을 선호하는 내게는 여간 인상적이질 않았다. 그와 관련된 내 머릿속 사진 중에는 우선 은발의 장면이 전면에 떠오른다. 하얀 두루마기에 은발을 휘날리며 멋지게 지휘를 하는 장면이 곧 그것이다. 은발에 부서지는 은은한 조명과 학창의 같은 흰 두루마기 자락에 단아하게 흐르는 지휘의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관중은 어느새 무대 배경으로 드리워진 산수화 속의 신선이라도 된 양, 마냥 그윽한 상념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예사다. 그러고 보면 이 교수의 흰 두루마기 은발의 지휘 장면은 중생을 피안의 예술세계로 이끄는 통과의례적 마력魔力이자, 본인의 음악적 본령本領을 극명하게 압축하는 생생한 징표임에 분명타고 하겠다. 한편 이 교수의 창작곡 중에는 잘 알려진 ‘대바람 소리’가 있다. 이 작품은 ‘대바람 소리/들리더니/소소한 대바람 소리/창을 흔들더니…’로 시작되는 시구를 모체로 하고 있지만, 나는 이 곡의 표제가 이 교수의 타고난 심성을 음악적으로 구현시킨 좋은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상규 교수의 총체적 인상은 예부터 상찬돼 오는 대죽을 닮은 데가 있다. 우선 야무진 듯 단정한 풍모가 그렇고, 깔끔하고 사리가 분명한 천성이 그러하다. 일찍이 서울지방 사람들의 품성을 일러 경중미인鏡中美人이라고 했는데, 포천이 본관인 이 교수 역시 경중미인적 정갈함과 명료함이 유난히 드러난다. 여기에 더해 재치있는 익살이 일품이다. 대나무 절조節操에 은은한 인간미를 조화시킨 성품이다. 그러고 보면 이 교수의 이미지나 작품 세계를 시각적으로 환치하면, 그것은 영락없이 엄동설한을 버텨 서 있는 고죽苦竹이라기보다는 따뜻한 남녘땅 초가 지붕 마당가에 올곧게 둘러쳐진 청순한 청죽靑竹임에 분명타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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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9: 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이보형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이보형 선생은 남이 양지의 학문을 탐할 때 음지의 학문을 택했다. 남이 유행의 분야를 쫓을 때 그분은 소외된 분야에 애정을 쏟았다. 남이 책상머리에서 안일하게 글을 쓸 때 그분은 누항陋巷의 궂은 곳을 뒤지며 발품으로 글을 썼다. 남은 입신양명도 누려가며 학자연할 때 그분은 초야의 한사寒士에 자족하며 범재연凡才然했다. 남이 겉시늉으로 공부할 때 그분은 참다운 호학好學으로 한 우물에 매진했다. 한국민속음악의 학문적 바탕이 놓이고, 한국민속음악의 위상이 제고되고, 한국민속음악의 개화기가 앞당겨진 배면에는 바로 이 같은 이보형 선생의 소신과 내공이 반석처럼 자리하고 있다. 나는 한국의 정신문화 중에서 선비정신과 풍류사상을 높이 산다. 견리사의見利思義와 지절志節을 앞세우는 선비정신은 물질만능의 부박한 세태를 치유하는 특효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요, 풍류사상은 인정이 메마른 각박한 현대 사회에 넉넉한 여유와 따듯한 훈풍을 불어넣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이보형 선생은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 명예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남을 폄훼하지도 않았다. 늘 초심과 평상심을 유지하며 학구의 길에만 매진했다. 그렇다고 그분은 결코 메마른 선비가 아니다. 멋과 흥취를 아는 풍류객이기도 하다. 물론 전공 분야 자체가 신명기를 전제로 하는, 판소리 같은 민속악인 점도 작용했을 테다. 하지만 딱히 그 점만이 아니다. 속멋이 든 북장단과 오랜 취미의 사군자의 내면을 접하게 되면 그분이 풍류의 속멋을 타고난 균형 잡힌 선비임을 이내 알아채게 된다. 이보형 선생은 한국문화의 훌륭한 덕목이자 21세기 인류사회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정신유산인 선비정신과 풍류사상을 겸비한 학자다. 그러고 보면 그분은 비단 전통음악만으로 문화의 맥을 잇고 있는 게 아니라, 전통음악을 잉태시킨 배면의 세계, 즉 선조들의 정신문화의 체질과 시대사상까지 온전히 계승해 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금과옥조로 마음에 새겨둘 고전 글귀가 있다.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예는 해서 뭘하며 악은 해서 뭣하느냐[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라는 명구와, ‘시를 통해서 감성을 풍부히 하고, 예를 통해서 처신의 준거를 삼으며, 악을 통해서 인격을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는 선현의 말씀이 곧 그것이다. 곰곰 음미할수록 수천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진리요 금언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우리네 주변을 돌아보자. 돼먹지 않은 인품으로도 예술을 하고 학문을 하고 정치를 하는 소위 재승박덕형의 향원鄕愿, 군자연하는 사이비들이 얼마나 득실대는가를! 우리 사회에 너그러운 똑똑이들이 적고 피곤하기 짝이 없는 영악한 똑똑이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자초한 업보들이다. 압축성장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 물질만능주의에 순치됐기 때문이요, 주입식 암기교육을 통한 무한경쟁의 승자정의勝者正義식 풍조를 조장해 왔기 때문이다. 이래서 우리 주변에는 남을 이기는 데만 이골이 난 ‘헛똑똑이’들은 많은데,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는 진실로 존경할 만한 ‘속똑똑이’들은 의외로 적다. 이보형 선생은 주변 모두가 인정하듯 겸손한 선비요 학자다. 말하자면 학과 덕과 인품의 조화를 이룬 학인이다. 《논어》에서 이르는 ‘성어악成於樂’의 경지에 근접한 드문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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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8: 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원장현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의 대금! 참으로 신묘한 악기다. 사람이 만든 악기인데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순도 백프로의 자연의 소리요 천상의 소리다. 어디 이뿐이랴. 서너 뼘 남짓의 죽관에서 빚어지는 소리결은 또 얼마나 부드럽고 따듯한가. 파란 하늘 밑의 하얀 목화송이보다 부드럽고, 아지랑이 꽃피우는 봄날의 햇살보다 다스한 게 대금의 음색이요 천성이다. 대금은 결코 예사로운 악기가 아니다. 혈통부터가 남다르다. 속세의 인연만이 아닌 신의 계보와 핏줄이 닿아 있다. 신라시대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전설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신문왕神文王 때 동해바다에 섬이 하나 생겨나고 그 섬 위에 대나무가 하나 자라났는데, 낮에는 갈라져서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기이하게 생각한 왕이 그 대나무를 베어 오게 해서 악기를 만들었다. 그러자 소리가 어찌나 영험한지, 이 악기를 불면 질병이 퇴치되고 적병이 물러갔다. 모든 어려움과 근심걱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름을 거센 파도도 종식된다는 뜻의 만파식적이라 했다. 전후좌우의 맥락을 살피면, 이처럼 대금의 혈통은 신의 세계, 전설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천의무봉의 대금 소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속의 소리가 아닌 천상의 소리에 분명할 만큼 영묘하고 초월적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 같은 신비스런 사화史話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금 음악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 연주자가 섣불리 대금을 입에 대봤자 한낱 세속의 감칠맛에만 맴돌 뿐, 젓대 소리 본연의 속멋이나 비경秘境을 담아낼 도리가 없음에 분명타고 하겠다. 조선조 말 대금의 달인 정약대丁若大의 일화는 지금도 깊게 울리는 여운이 있다. 그는 일 년 열두 달 눈만 뜨면 인왕산에 올라가 대금을 불었다. 7분 정도의 ‘밑도드리’ 한 곡만을 되풀이해 불며, 한 번씩 불 때마다 왕모래 한 톨씩을 신고 간 나막신에 넣었다. 해가 서산을 넘고 하산할 때는 나막신에 모래가 가득 쌓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기량과 물리가 일시에 확 트이며 저절로 접신의 경계를 넘나들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그가 후세에 이름을 길게 남기게 된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여기 당대의 젓대 명인, 동려東呂 원장현元長賢의 경우는 어떨까. 우선 그의 음악을 접하면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기교며 악상이 익을 대로 익어서, 틀과 형식은 뒤로 숨고 미풍에 나부끼는 비단결처럼 악상의 시심詩心만이 심금을 퉁기며 물 흐르듯 흘러간다. 결코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뛰어난 재주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원장현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씨앗이 튼실하고 토양이 비옥하다. 선친은 젓대의 명인이었고, 숙부나 고모도 거문고와 가야고의 대가들이었다. 젓대를 잡기 전부터 이미 동려의 혈관 속에는 탁월한 음악적 소인素因이 싹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동려의 고향이 어데던가. 죽림문화의 산실 담양이 아니던가. 조석으로 밀려드는 삽상한 대바람 소리는 천계天界의 음향을 일깨우며 동려의 감성을 살찌웠을 것이고, 소쇄원瀟灑園 광풍각을 스쳐가는 일진청풍은 말 그대로 제월광풍霽月光風의 풍류 기질을 배태시켰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환경이 동려 원장현 음악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후천적으로 음악에 뜻을 두고 열심히 기교를 익혀 무대에 서는 여느 음악인들의 음악과는 어딘가 맛이 다르고 멋과 운치가 다름을 느끼게 된다. 원장현의 대금가락은 영락없이 고향마을 대바람 소리의 분신일시 분명타고 하겠다. 바람결에 따라 대숲의 음향도 달라지듯, 취법과 감정에 따라서 동려의 가락도 천변만화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어떤 때는 옹달샘물처럼 해맑다가도, 어떤 때는 가을 하늘을 비상하는 외기러기처럼 애상적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소쇄원 제월당 풍류객들의 풍류판처럼 격조 있는 풍취를 뽐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의 음악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옷을 입고 무애無碍의 춤을 추며 풍진세상을 주유하는 풍월주風月主의 선풍仙風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리귀선 운외적萬里歸仙 雲外笛’이라, 구름 밖 신선이 젓대 불며 돌아오듯, 동려 원장현 명인이 도포자락 휘날리며 남산 자락에 현신하니, 뭇사람이 기대하는 음악계의 경사가 아닐런가!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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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1: 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박병천 명인·김영태 시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서재 창유리로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 화사한 햇살을 되받으며 나뭇잎들은 표정과 농암을 달리하며 형형색색으로 오색의 향연을 연출해 내고 있다. 여느 수목들보다 키가 월등한 은행나무는 간간이 스치는 소슬바람결로 파란 하늘폭에다 황금색 노란 붓질을 하고 있고, 늘 푸른 실향나무와 반송 사이로 진홍빛 얼굴을 내민 빨간 단풍가지는 왠지 오늘따라 먼 옛날 농본 시절의 ‘선녀와 나무꾼’ 같은 아련한 사랑 이야기라도 애써 발설해 내고 싶은 품새다. 대자연의 호흡 같은 바람이 또 지나는 모양이다. 울안의 활엽수 단풍잎들이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우수수 떨어진다. 그들 낙엽 중에서도 기품 있는 노란 은행잎의 낙하는 단연 압권으로 인상적이다. 필경 차생此生과의 인연을 하직하는 어느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만 같아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황홀한 전면의 풍광을 바라보는 눈길과는 달리, 고삐 풀린 나의 상념은 느닷없이 거꾸로 회전하며 엉뚱하게도 저만큼 어제의 어떤 죽음의 단상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망령스런 상념들의 변덕이 아닐 수 없다. 달짝지근한 추억과 서정적인 밀어들로, 아니면 부평초 같은 인생 행로에 묵직하게 철들어 가는 사색의 추錘를 달아주기 일쑤이던 단풍과 낙엽들이, 어느새 느닷없이 쇠락과 죽음을 첫 화면으로 떠올려 주고 있으니 정녕 희한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엉뚱하다 싶다가도 곰곰 되짚어 보니 이내 수긍이 가며 괜히 계면쩍어지기도 한다. 초속 230여 킬로미터로 내닫는 지구의 공전 속도를 까맣게 잊은 채,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장년쯤이려니 하고 어이없는 몽환 속에 지내온 게 민망해서인 것 같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나들이 때면 지하철 역무원들은 내가 창구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늘 한 박자 빨리 ‘공짜표’를 민첩하게 밀쳐 내주더라니! 적료한 침묵 속에서 나는 진양조 가락 같은 끈적한 곡선으로 낙하하는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어느새 어떤 죽음의 풍경을 아련히 떠올려 보고 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을 뒤적뒤적 음미해 본다. 그러고는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내일의 죽음에 대한 다짐도 슬며시 해 본다. 지난해 늦가을이었다. 나는 아산중앙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진도 씻김굿 하면 으레 대명사처럼 떠올리던 이름 박병천 예인의 타계였다. 당혹스러우리만큼 빈소의 분위기가 여느 상가와 달랐다. 상주들의 표정도 침울하기는커녕 화평하기만 했고, 조문객들의 분위기도 전혀 낌새가 달랐다. 웬걸, 낯익은 얼굴들과 자리를 함께한 후 들은 얘기는 내심 적잖은 충격이었다. 함께 자리한 당대 명인들인 김덕수나 장사익의 설명조에는 오히려 신명기까지 느껴졌다. "어제 저녁에도 노래로 한판 벌였는데, 내일 저녁에는 더 많은 끼쟁이들이 모여 정식으로 한판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야 고인도 흐뭇해하실 거고, 우리 또한 고인의 진의를 받드는 일이 될 거라는 것이다. 아, 가는 자와의 이별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나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한 기발한 대안이라도 찾은 양 괜스레 기분이 고양돼 그들과 또 한 번의 소주잔을 부딪쳤다. 귀갓길에 탄 버스가 잠실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서울 야경이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강심에 잠긴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그 불빛 사이로 훤칠한 키의 박병천 옹이 멋들어지게 북춤을 추는 환상이 실루엣처럼 어른거렸다. 정말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더니 당대 명인과 영별을 하고 나니 아까운 사연들이 한둘이 아니구나 싶었다. 연습으로 익힌 기예가 아니라 조상 대대로 세습돼 물려받은 멋의 원형질에서 우러나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예술판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정도 그렇거니와, 특히 열두 가지가 있다는 진도 씻김굿 중에서 그가 재현해 낼 수 있다고 하던 일곱 가지 유산마저 끝내 역사의 미궁 속으로 영영 사라졌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버스가 한강 다리의 야경을 뒤로 하고 강변길로 들어섰을 때, 내 생각의 끈은 또다시 죽음을 한판 놀이굿으로 받아들이는 낯설지만 매력적인 장면으로 이끌려 갔다. 아니 인생을 얼마나 달관하고 해탈했기에 만인이 칙칙하게 여기는 죽음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며 여유작작하게 한판 통과의례적인 놀이판까지 벌일 수가 있을까? 골똘한 생각 끝에 떠오른 답은 곧 진도 씻김굿이었다. 알려진 대로 진도 씻김굿은 죽은 자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시켜 극락세계로 천도薦度시키는 굿의식이다. 절망이나 비탄이 끼어들 계제가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리고 축원해야 할 상황이다. 진도 씻김굿판이 비감悲感의 페이소스를 넘어 일렁이는 신명기를 느끼게 되는 연유도 아마 이래서일 게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평생을 죽음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신바람의 굿판을 별여 온, 그래서 삶과 죽음이란 종이 한 장 차요, 유명幽明이라고 하는 밝고 어둠의 변환에 지나지 않음을 체관諦觀한 박 옹의 입장에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는 저만큼 하찮은 다반사茶飯事쯤으로 여겨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내가 기획했던 베트남이나 몽골 같은 해외 공연에서도, 무대에 오르기 전 거나하게 술 한잔 곁들이고는 무르익은 신명판을 풀어내더라니….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그는 가망 없이 남몰래 암 투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때 문상 중에서야 알았다. 진정 죽음을 초탈했다는 것은 이런 경지이지 싶었다. 7월 12일 저녁이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르코 예술극장에서는 고 김영태 시인 1주기 공연이 있었다. 잘 알고 있듯이 김영태 시인은, 시인이자 화가이자 클래식 음악 마니아이자 무용평론가로 활약한 19세기적 기인奇人 같은 멋쟁이 로맨티스트였다. 문화예술계에 스며든 그의 인간적 매력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바로 그 추모 공연이었다. 서울현대무용단 대표 박명숙 교수와 국립발레단 단장 박인자 교수가 주축이 된 그날 밤 범무용계의 헌정 공연은, 고인에 대한 사모의 정은 물론 죽음에 대한 또다른 의미망을 각자의 가슴속에 촉촉이 새겨 주는 기회가 됐다. 칠흑같은 공간에 침묵이 흐르고, 은빛 같은 한 줄기 조명 핀이 어느 좌석에 꽂힌다. 가열 123번 좌석이다. 특히 무용 공연 때면 늘 개근하던 고인의 붙박이 지정석이다. 핀이 밝힌 좌석에는 채 온기가 가시지 않았을 고인의 모자와 바바리코트와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순간 고인에 얽힌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뭉클한 회억懷憶에 젖게 했다. 무대는 고인의 면면을 떠올리는 편집 화면과 무언의 몸짓들로 차분하게 이어져 갔다. 야릇한 비감과 미감의 조화로운 교직交織은 가슴에 잔잔한 물무늬를 일으키며 현실을 예술의 진경眞境 속으로 환치해 가고 있었다. 아하, 죽음도 이렇게 삶처럼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그날 밤 추모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수목장을 예상해서 고인이 마지막 남긴 유작시 낭송이었다. 제목은 ‘전등사 나무’였다. 강화도 전등사를 내 한 손으로 들지 모르겠다 가볍다 그리고 어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내 몸인 나무가 정해졌다 나뭇가지에 손이 매달려 내 등을 두드린다 "자네 여기 올 줄 알았지” 잘 왔다고 전등사의 밤 추녀 진보라 곡선 아래 나를 맡겨 버린 나무 서 있다 서해 바다에 떠 있는 빈 배를 향해 늦가을 햇살은 여전히 눈부신데, 창밖에는 또 대지가 후~ 하고 입김을 내뿜는 모양이다. 노란 은행잎들이 우수수 지는 걸 보니.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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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7: 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김혜란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흔히 우리는 저만큼 어제의 삶을 한층 정겨웠다고 여긴다. 한층 미덥고 끈끈하고 신명났었다고 여긴다. 왜서일까. 단지 지난날에 대한 복고적 향수 때문일까? 분명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정서의 분신이랄 민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요가 그저 대수롭지 않은 노랫가락의 일부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가슴이었고,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뭉뚱그려 발효시킨 삶의 앙금이요 진액이었다. 민요가 있어 가난은 여유로 환치되고 고난은 달관으로 승화되었으며, 설움도 낙이 되고 비탄도 흥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민요야말로 어제의 우리네 감정생활의 축도요 정화요 온갖 사연이 숨어 있는 삶의 퇴적층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소중한 우리 민요가 근래로 오면서 삶의 현장에서 멀어지고 있다. 물론 세상이 다기화되고 생활 양상이 급변한 탓도 있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인류 역사 속에서도 민요는 늘 맥을 이어 애창돼 왔다. 그러고 보면 민요가 빛을 바래가는 이유는 딱히 시대의 변천 때문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민요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라고 하겠다. 직업적 전문가인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기 유난히 민요에 애정을 쏟고, 남달리 민요의 창달에 열과 성을 쏟고 있는 원로가 있다. 경기민요의 김혜란 명창이 곧 그분이다. 김 명창의 활동을 눈여겨보면, 그는 결코 노래하고 가르치고 공연하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뜻있는 동료나 후학들과 함께 늘 새로운 것을 모색해 간다. 어쩌면 민요의 현대적 위상과 기능을 십분 꿰뚫고 있음에 틀림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민요가 지닌 어제의 장점만을 고집하기에는 세상의 취향도 크게 변했다. 김 명창은 바로 그 점을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제의 감성, 어제의 관행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어제를 바탕으로 새로움을 지향하려는 지혜를 앞세운다. 그 좋은 예가 경기소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연 양식의 모색이다. 김 명창은 수년 전부터 경기소리의 토리를 활용한 새로운 형식의 소리극을 무대에 올려오고 있다. 경기소리의 시대적 변신과 중흥을 겨냥한 속깊은 시도다. 소리극 ‘배따라기’ 공연이 곧 그 예다. 이 작품은 주변의 관심도 컸고, 민요의 상투적인 공연에 참신한 맛을 던져 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분들의 새로운 시도와 열정이 아름답다. 역경 속에서도 우리 음악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매운 의지가 아름답다. 좋은 작품을 위해 고생하는 대본가, 연출가, 출연자 모든 분의 헌신이 고맙다. 나도 경기소리의 참신한 변화와 창달을 고대하기 때문에.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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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6: 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김청만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둥둥 북을 울리면 만인의 심장이 뛴다. 둥둥 북을 울리면 죽은 고목에도 물이 흐른다. 그래서 북소리는 생명의 근원이요 환희의 원천이다. 덩덩 북을 울리면 산하가 울린다. 덩덩 북을 울리면 동토凍土의 대지에도 새싹이 돋는다. 그래서 북소리는 생명의 씨앗이자 삶의 묘포다. 우레와 번개로 지축을 울린다는 고지이뇌정鼓之以雷霆이란 말이 예부터 쓰여 온 이유는 그래서였을 것이다. 해와 달이 대지를 분기시키고, 천둥과 번개로 둥둥 북을 울려 대지를 일깨우면, 모든 삼라만상이 고르게 화육化育 되어 화평한 천지를 이루어 낸다는 언설이 곧 그것이다. 아무튼 음악의 원천이기도 한 리듬의 향연을 맛보게 할 ‘새울전통타악진흥회’의 세 번째 공연무대는 미리부터 우리 심장을 고동케 한다. 이번 공연이 가뭄에 단비처럼 간절히 기다려지는 이유는 두 가지 사연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저간의 우리네 주변이 너무도 무기력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온통 심란하기 그지없다. 의욕보다는 체념이, 전향적인 비전보다는 퇴영적인 좌절이 팽배한 세태다. 시들어가는 공동체에 열심히 펌프질을 하고, 무기력한 풍조를 분연히 일깨우기 위해서 혼신의 기력으로 북을 울려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시의時宜에 발맞춘 북들의 큰 잔치이기에 그 의의가 한결 선명해진다. 둘째는 현역 전통 타악계의 큰 봉우리인 일통一通 김청만金淸滿 명고가 이끄는 연주 그룹의 음악적 기량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그것이다. 김청만 명인은 방송으로 무대로 가장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쳐가는 현역 원로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타악 음악의 매력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숙련된 기교와 농익은 정서가 용융되어 빚어내는 정교한 장단의 멋과 여운은 만인의 가슴에 진한 공명을 울리기에 족하다. 이 같은 뛰어난 명고의 예술적 감각으로 구성한 정기연주회이니 의당 큰 관심과 기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는 터다. 이번 무대에서는 창작곡 ‘점點’과 ‘진혼鎭魂’과 ‘운곡雲谷Ⅳ’와 같은 새로운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음악회의 품격을 한층 고양시켰는데, 늘 정진하고 모색하는 예술인들의 깨어 있는 의식을 보는 듯싶어 더욱 신뢰가 가는 음악회라고 하겠다. 이번 공연이 청중들에게는 삶의 활력을 충전하는 기회로, 주최 단체에게는 한층 음악적 내실을 다지는 전기가 되기를 고대하며 뜨거운 갈채를 보낸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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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5: 회심곡의 프리마돈나, 김영임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뿌리 없는 나무 없듯이 조상 없는 자손도 있을 수 없다. 오늘 우리의 존재는 조상 덕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상의 은덕을 까맣게 잊고 살기 일쑤다. 전통적인 효도사상이 희미해지고 물질만능의 탐욕 사회가 도래하면서 부모님의 망극한 은혜를 너나 없이 잊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만 있는 찰나의 인생들이 아니기에 가끔은 내일도 생각해 보고, 인연의 인과율도 음미해 가며 부모님이라는 뿌리에 대한 막중한 연분도 재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상적으로 느끼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에 틀림없다. 자식은 마음으로는 부모를 공경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삶의 일상 속에서는 본심과는 달리 적지 않은 괴리가 생긴다. 그러니 옛 선인들의 시조처럼 영별永別 후에 남는 후회만이 되풀이되기 십상이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전통음악 중에서 부모님의 은덕이나 효행에 관련한 악곡을 꼽으라면 단연 회심곡回心曲이 아닐 수 없다. 회심곡은 원래 불교 계통의 음악이었지만,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사를 윤색하고 여기에 서도소리조 가락을 입혀서 노래하는 곡이다. 한때 조선일보사에서는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어김없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어버이들을 위한 국악대공연을 치루어 왔다. 이때 단골 메뉴로 편성되던 곡이 바로 회심곡이었으며, 그 회심곡은 으레 김영임 명창이 불렀다. 그만큼 경기민요의 김영임 명창은 회심곡의 대명사랄 만큼 회심곡의 절창이었으며 프리 마돈나였다. 지금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의 뇌리 속에는 붉은 띠를 두른 하얀 가사袈裟에 고깔을 쓰고 꽹과리를 치며 낭랑한 성음으로 숙연하게 회심곡 한 자락을 불러제끼는 김 명창의 인상적인 모습이 한 폭의 정물화처럼 선명히 박혀 있을 것이다. 회심곡의 가사에 스스로 감화가 되어서인지, 김영임 명창은 잘 알려진 효부다. 공연예술계에서 인기를 좀 얻으면 우쭐한 기분에 알게 모르게 자만심이 앞서며 주변을 얕보는 경향이 있는데, 김 명창은 그 같은 세태와는 아예 거리가 멀다. 그 바쁜 일정과 화려한 무대생활 속에서도 시부모님을 비롯한 친척분들과 주위 사람들을 정성껏 보살핀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나와의 인연도 얕지 않아서 내가 치러 오는 현충일 추모음악회에 헌신적으로 출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덕소 이미시문화서원에 내외분이 들러 담소를 나누며 그가 좋아하는 능이버섯탕을 함께 즐긴 적도 꽤 있다. 예부터 효도는 백행지본百行之本, 즉 모든 인간행위의 토대요 근본이라고 했다. 효심孝心 없이 성실한 사람 없고, 효도하는 데 남에게 지탄받는 사람 없다. 효도는 곧 일종의 수기修己다. 효를 통해서 사람 됨됨이를 닦았는데 지탄받을 일을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고 보면 효도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긴요하기 짝이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여기 김영임 명창의 회심곡 일부를 조용히 음미하며 생각의 기회를 가져 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일심一心으로 정념精念 아하아미로다 보호옹오… 억조창생億兆蒼生은 다 만민시주萬民施主님네 이내 말삼을 들어보소, 인간세상人間世上에 다 나온 은덕恩德을랑 남녀노소男女老少가 잊지를 마소, 건명전乾命前에 법화法華도 경經이로구나, 곤명전坤命前에도 은중경恩重經이로다. 우리 부모 날 비실 제 백일정성百日精誠이며 산천기도山川祈禱라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다니시며 온갖 정성精誠을 다 드리시니 힘든 남기 꺾어지며 공功든 탑塔이 무너지랴.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부모님전의 복福을 빌고 칠성七星님전 명命을 빌어 열달배설한 후 이 세상에 생겨나니 우리 부모 날 기를제 겨울이면 추울세라 여름이면 더울세라 천금千金 주어 만금萬金 주어 나를 곱게 길렀건만, 어려서는 철을 몰라 부모 은공을 갚을소냐, 다섯하니 열이로다. 열의 다섯 대장부라 인간칠십 고래희古來稀요 팔십 장년長年 구십 춘광春光 백살을 산다 해도 달로 더불어 논論하며는 일천一千하고 이백二百달에 날로 더불어 논論하며는 삼만육천일三萬六千日에 병든 날과 잠든 날이며 걱정근심 다 제除하면 단사십單四十을 못 사는 인생人生 어느 하가何暇 부모 은공 갚을소냐. 청춘靑春 가고 백발 오니 애닯고도 슬프도다, 인간공로人間空老 뉘가 능히 막아내며 춘초연년록春草年年綠이나 왕손王孫은 귀불귀歸不歸라 초로草露 같은 우리 인생 한번 아차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김영임은 아침 햇살처럼 밝고 가을하늘처럼 청아한 성색과, 춘설이 잦아진 냇가의 버들개지처럼 삽상颯爽하고 유연柔軟한 창법으로 만인의 심금을 공명시키는 대표적 스타 가객이다. 특히 그녀는 한국 전통문화의 좋은 덕목의 하나인 효도를 몸소 수범해 가는 자상하고 사려 깊은 여인으로 널리 칭송되기도 하는데, 효행을 주제로 한 ‘회심곡’이 바로 그녀의 대표적 인기곡이라는 사실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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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4: 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강정숙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강정숙의 음악은 흐르는 물과 같다. 그만큼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기교가 없는 바 아니나 드러나지 않고, 장인적 내공이 없을 리 없으나 나타나질 않는다. 음악이 완전히 체화되어 하나로 흐르니 마음과 음악 간에 경계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처럼 편안하게 다가오고 간이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현란한 재간을 앞세워 음악을 한다. 재간이 앞서가면 가슴속에 뿌리를 둔 감성의 끈이 끊어진다. 심금心琴이 끊어지니 드러나는 소리인들 오죽하겠는가. 우리가 통상 경험하듯 메마르기 짝이 없고, 공허하기 그지없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은 역시 고금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깨끗한 흰 바탕에 그림을 그려야 색깔이며 형상이 제대로 각인되지 않겠는가. 매사가 매한가지다. 음악 또한 바탕이 문제다. 바탕은 닦지 않고, 그 위에 재주로만 수繡를 놓으려 하는 세태다. 마음속 정서의 텃밭에 눈길 한 번 주어 보지도 않은 채, 의례적인 관행처럼 손가락 연습에 발성 훈련부터 서두른다. 강정숙 명인의 음악은 이 같은 세간의 풍조와는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신체 일부의 노련한 훈련으로 쌓아올린 음악이 아니다. 기교 훈련에 앞서 배양된 감성적 마음 바탕이 있다. 그 마음 바탕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질일 수도 있고, 어려서부터 갈고 닦은 공력의 덕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남도지방 특유의 지역적 서정이 배태시킨 필연적 인과因果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녀의 음악 속에는 여느 음악에서는 좀해서 감지되지 않는 세미한 악흥이 있다. 더없이 부드럽고 따듯하면서도, 그리움이 자욱한 보랏빛 연무煙霧 같은 미감이 있다. 그가 병창을 하건 가야고를 타건 판소리를 부르건 한결같이 저변에 맥맥이 흘러가는 그녀만의 예술적 태깔이다. 드디어 강정숙 명인이 자신의 음악적 색조 위에, ‘만경벌 두레살이 걸죽한 육담肉談 남도길 굽이굽이 서린 정한情恨들’까지 입혀서 서공철류 가야금 산조 음반을 발간했다. 크게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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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3: 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최경만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몇 해 전 프랑스 아비뇽 축제 총감독인 다르시에가 방한했었다. 축제 기간에 한국의 전통예술가를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비디오나 실연實演을 통해 정악합주며 무용이며 무속이며 여러 장르를 살펴봤다. 그때 그는 이매방의 승무를 보고, 저것이 어떻게 전통이냐고 했다. 미국의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을 능가하는 ‘현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진부하리만큼 늘 보는 승무가 아방 가르드적 현대성을 갖췄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다. 문화가 다르면 미적 안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는 사실을 그때처럼 깊이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제 나라에서 홀대받는 국악이 나라 밖에만 나가면 생각외로 상찬賞讚을 받는 이유도 퍼뜩 알만 했다. 그때 일을 계기로 나는 학생이나 후학들에게 소신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나라 밖의 광활한 세계를 활동무대로 설정하라는 당부가 그것이다. 답답한 동굴 속에만 갇혀서 자기를 알아 달라고 칭얼거릴 일이 아니다. 밖을 보면 쌍수로 환영할 드넓은 무대가 있다. 마침 시대의 조류도 다채로운 개성을 존중하며 다원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세상으로 진입했다. 한국 음악 특성이 세계 속의 개성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지평과 개연성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야망을 품고 정진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신나는 문화 환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인도 음악가들이 동양 음악의 대명사인 양 지구촌을 누비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익힌 공용어인 영어로 자신들의 음악을, 서서히 동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서구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다기화 되어 가는 국제 상황과 국악의 함수관계가 새삼 머리에 맴돈 것은, 마침 범상치 않은 공연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튼실하게 내실을 다진 인재들의 모임인 ‘한국전통음악연구회’가 세밑에 선보일 창단 음악회가 그것이다. 우선 많은 분야의 단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모임체를 구성했다는 점이 각별해 보인다. 중견 연주가들이 무언가 시대적 조류를 실감한 나머지 의기투합된 것만 같아 더욱 기대가 앞선다. 이들의 젊은 패기와 음악적 열정이 하나로 응집되면 국악계에 괄목할 만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이들의 예술적 의지가 세계로 분출되면 명실공히 한국 음악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다. 분명 이 단체는 그렇게 될 소지가 크다고 나는 믿는다. 연합체를 구성한 단체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렇고, 또한 그들이 지닌 음악적 기량이나 예술적 의지 또한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조직의 성패는 지도자의 역량이 관건인데, 이 연합체를 이끌 최경만 회장의 인생 경륜이나 음악적 성취는 세상이 다 인정하는 바이니 더욱 그러하다. 최경만 명인은 민속음악의 산실이라고 할 국악예술학교 출신이다. 한두 살 선후배 관계이긴 하지만 훗날 국악계 중진들로 활동하고 있는 박범훈 전 중앙대 총장과 최태현 교수, 김영재 전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 등이 모두 비슷한 세대의 재사들이다. 최 명인의 전공은 피리이고 경기토리의 대가였던 고 지영희 선생의 수제자인데, 민속악 계통의 피리 연주에는 군계일학으로 뛰어난 명불허전의 고수다. 내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재직 당시 중평衆評에 의해 특채를 한 단원은 마당놀이의 지운하와 피리의 최경만, 딱 두 사람 명인뿐이다. 한편 최경만 명인의 배필 역시 같은 국악원 연주단원인 서도소리의 대가 유지숙 명창이다. 그러고 보니 최 명인 부부는 경서도 소리의 합작품인 셈이다. 통일의 물꼬도 이곳에서 발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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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 (양장)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004서문인연 한 자락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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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2: 대금 산조의 달인 이생강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어느 특정 지역의 기후풍토는 그 지역 사람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단적인 예로 서양 음악의 경우 세기적 바리톤은 유럽의 북부지방에서 많이 나오고, 기라성 같은 테너는 남방지방에서 많이 배출되는 사실이 곧 그러하다. 기후가 음습하며 날씨가 흐리고 추운 북구지방에서는 평상시의 사고나 정서가 육중하게 침전되며 내향적이기 십상이다. 일상적 언어생활 역시 차분하게 피치音高가 낮다 보니 자연히 음역이 낮은 저음 가수가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기후가 따듯하고 햇살이 투명한 남방의 기질은 비교적 낙천적이고 외향적이며 언어 역시 맑은 성색에 음고가 높다. 당연히 음역이 높은 뛰어난 고음 가수가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이 같은 기후풍토와 예술과의 함수관계는 비단 성악에서만도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와 하이든,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연상해 보면 이내 수긍이 가게 된다. 남구의 기후풍토에서 우러난 전자의 음악이 밝고 명랑하고 낙천적인 데 비해, 북구의 환경에서 배태된 후자의 음악은 검푸른 수림처럼 짙고 육중하고 사색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결국 문화나 예술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그 양자를 모두 지배하는 것은 끝도 쉼도 없는 대자연의 운행 작용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볼 때, 한국 음악 안에도 남방적인 요인의 음악과 북방적인 풍토의 음악이 병존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순리라고 하겠다. 딱히 북부권의 고구려 왕산악이 만들었대서만이 아니라, 둔탁한 듯 중후한 음색의 거문고는 영락없는 북방적 여건의 악기이고, 남방 가야나라의 우륵이 만들었대서만이 아니라, 낭랑한 음색의 가야고는 분명 남방적 환경의 구현체가 아닐 수 없다. 정황이 이러하고 보면, 오늘의 화두인 대금 음악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온화한 기후의 남방계 음악임을 알 수 있다. 대금의 음색이 그토록 부드럽고 온화한 배면의 내력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화사한 햇살과 온유한 기후를 머금고 자란 죽관이, 역시 심성이 어질고 착한 민초들의 손길을 거치면서 명기로 탄생된 것이 바로 대금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한국의 기후풍토와 한국인의 어진 심성이 어우러져 빚어낸 두어 척 남짓의 죽관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젓대와 본인이 하나 되어 한 시대의 애락을 위무해 온 사람이 있다. 바로 대금의 이생강 명인이다. 무릇 세상사란 의지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예술의 경우는 의지와 노력만으로 대가의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남달리 타고난 바탕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생강 명인은 주위 평판대로 타고난 소질이 있는데다, 초지일관하는 끈기와 노력 또한 남다른 바가 있다. 그동안 그에게 붙여져 온 명성은 결코 우연이나 허명이 아니고 예술적 자질과 노력이 직조해 온 필연적 결실이라고 하겠다. 그의 젓대 음악은 그동안 암울한 시대의 아픔을 달래 오며 우리 생활 속에 포근한 서정의 앙금을 쌓아왔다. 특히 지난 세기 후반 내내 왕성한 활동을 통해 대중의 심금을 달래가며 한국 음악계, 특히 관악 음악에 기여한 몫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사회의 메마름도 그의 장인기匠人技적 젓대가 있어서 윤기가 흘렀고, 정치적·사회적 번뇌도 그의 자상한 가락이 있어서 한결 위안이 되었다. 그만큼 이생강 명인의 대금 음악이 음악계는 물론 우리 삶에 끼친 공헌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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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1: 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오정숙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을은 오곡의 결실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의 열매를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요즘 우리 주변에는 찬연한 문화예술 활동이 즐비하고,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이 물결을 이룬다. 양적인 수치로만 치면 우리 삶은 한층 가며롭고 윤택해야 마땅할 터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공허하기 일쑤다. 결실의 나락에도 쭉정이가 있듯이 문화예술계에도 아마 무지갯빛 거품이 충일해 있기 때문일 게다. 사람人이 재주를 앞세워 억지로 하는 행위爲는 필경 가짜[人+爲+僞]의 거품에 빠지기 십상이다. 발효되고 체화된 제 얘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언巧言이나 영색令色치고 진짜배기가 드물다는 말이 그래서 작금에도 유효한지 모를 일이다. 제14회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들은 우선 예술계에 가득한 거품을 걷어내고 튼실한 알곡을 찾아보려 애썼다. 특히 재승박덕형의 표피적인 화려함보다 진정한 장인 정신을 지향하는 예인藝人을 거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같은 안목의 조망경에 들어선 몇몇 후보들을 대상으로 설왕설래의 숙고 끝에 흔쾌히 결정된 수상자가 곧 오정숙吳貞淑 판소리 명창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명창의 반열에 설 수 없음은 많이 들어온 상식이다. 오 명창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열네 살 때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오직 한 우물을 파는 데만 정진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배어 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의 고집과 앙기로 남다른 장인 정신이 두드러졌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동초제 판소리의 맥을 이으며 이를 확실하게 정착시켰다는 판소리계의 공적이다. 여기 동초제 판소리란 김연수 명창이 정리한 판소리의 한 판형을 의미한다. 새로운 소리제의 계발이라기보다는 기존 여러 명창들의 좋은 더늠의 대목들을 취사선택하여 모범답안 같은 판소리 한바탕의 정형定型을 이뤄 놓은 것이 ‘동초제東超制’다. 굳이 비유하자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중구난방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해서 정리했다면, 동초 김연수는 명창들마다 형형색색이던 소리제를 일정한 틀 속으로 형식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초제 판소리는 판소리 특유의 즉흥성은 크게 제약되지만, 익히기나 전승하기에는 많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오정숙 명창은 이 같은 동초제 판소리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한층 갈고 닦으며 널리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오 명창은 1972년, 8시간에 걸친 동초제 춘향가의 완창을 시작으로 매년 한바탕씩, 현존 다섯 마당의 판소리를 모두 완창하여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50, 60년대만 해도 판소리 완창은 거의 들어보기 힘들었다. 모두 토막 소리공연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동진 명창에 이어서 여류로는 처음으로 오 명창이 판소리 완창의 관심과 진미를 선구적으로 일깨웠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도 우리는 오 명창의 소리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끈질긴 프로 기질을 읽을 수 있다. 스승 동초 선생을 닮아서인지 오정숙 명창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교육시키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는 소리 한번 다잡아 해보겠다는 제자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든다. 제자를 일단 받으면 우선 사람이 되고 소리꾼이 될 수 있도록 인정사정없이 몰아간다. 그래서 일단 그의 엄격한 훈도를 거치고 나면, 적어도 될성부른 떡잎 정도는 되기 마련이다. 재주를 조금 인정받으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착각하는 위인들도 많다. 그 같은 경우는 재주가 아까울 정도로 진정한 경지에 들지도 못한 채 중도폐기되기 일쑤다. 그래서 참다운 예술의 밑바탕에는 수기修己와 인격人格이라는 사람의 문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아도 오늘의 수상자인 오정숙 명창은 바른 소리예술의 길과, 바른 사람의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동초 김연수 명창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스승을 그토록 극진히 모시고 흠모해 오던 제자가, 그분의 탄신 백 주년에 동초제 판소리 정립의 공로로 상을 받게 되니 분명 수상의 의미가 배가되는 느낌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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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0: 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오복녀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전통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오복녀吳福女 명창의 비중은 열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고 진귀하고 막중한 바가 있다. 우선 서도소리의 진수를 체득한 유일한 대가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오 명창은 서도지방에서 태어나 서도의 정서와 풍물을 온전히 체득한 가객이다. 그의 노래 속에는 자연히 서도 예술의 맛과 멋이 진솔하게 배어나기 마련이다. 수심가나 긴아리에 묻어나는 애잔한 정한이 그러하고, 난봉가나 산염물에 스며 있는 따듯한 삶의 체취가 그러하며, 초한가나 공명가 등을 통해서 펼쳐내는 담담한 인생 경륜이나 고담들이 그러하다. 한마디로 노래 속에 서도적인 삶이 있고 서도적인 인생살이가 내밀하게 농축돼 있다. 그래서 노老대가의 노래는 목청과 기량만을 앞세우려는 문하 세대와도 다르고, 서도 문물을 경험하지 못한 타지역 출신들의 서도 창과도 판연히 다른 것이다. 한편 오복녀 명창의 진가란 비단 음악적 범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적·역사적 관점에서 그의 존재 의미는 한층 돋보인다. 바로 민족 분단의 현실에서 이산의 아픔을 위무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오 명창의 서도소리였기 때문이다. 분명 오 명창의 서도소리는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에게는 더없는 위안이요 추억이었으며, 문화적인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는 고맙고도 절실한 존재였다. 그들은 서도 토박이 명창의 노래를 통해 망향의 그리움을 달랬고, 고향의 풍광을 그려봤으며, 외로운 처지들 간의 끈끈한 우애와 응집력을 키워 가기도 했다. 이 점에서 오 명창의 서도소리는 음악의 차원을 뛰어넘는 시대적 의미망을 지니는 것이다. 노래도 예술도 인간의 삶 속에서 싹터 나온다. 따라서 삶의 양상이 바뀌면 노래도 예술도 바뀌기 마련이다. 사는 모습만 아니라 이념이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뒤바뀐 북한지방에서는 그래서 어제의 전통음악의 모습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통일이 되어 고향을 가도 옛 듣던 가락, 옛 놀던 연희들을 만나기란 거의 난망하다. 얼마나 안타깝고 허망한 일이겠는가. 바로 이 같은 역사적 상황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재삼 오복녀 명창의 존재 의미와 그 음악의 존귀함을 깊이 통찰하고 소스라쳐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 명창이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서도소리의 명맥을 실낱같이 이어가며 힘겹게 달려가는 성화 봉송자와도 같은 소중한 예인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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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22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2> 시대의 부름이었다. 새 시대가 되었다. 왕이 새로 바뀌고 시대가 새로 바뀐 것이 아니라 새 왕이 들어서면서 새 시대를 연 것이다. 예는 나라의 근본이었고 땅에 떨어진 예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세종 즉위 4년에 군권 등 왕권을 다 내려놓지 않고 있던 상왕 태종이 명을 다하여 새 정책의 수립은 가속이 되었고 폭이 넓어졌다. 예는 시대정신이었고 이를 실천하는 활력이 악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비 학자 거유들이 요로에 포진하여 번득이는 새정책 문화의 기틀을 좌우하고 있는 가운데 하급 관리인 시골 출신 박연의 존재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보잘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새 시대 화두의 중심에서 그의 역할은 빛이 났다. 빛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그의 이념이 메아리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 왕의 뜻, 이상 실현의 때가 온 것이다. 천기天機, 신의 뜻이며 하늘이 준 기회였다. 아버지 어머니의 묘 앞에서 불던 피리소리를 산새들이 화답하고 토끼와 너구리 들이 춤을 추며 호랑이도 함께 하였고 향교에서도 감동을 주던 연주의 힘이라고 할까 천부의 능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런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장악원의 인연으로 피리 퉁소 대검 등의 조예 관심 연마 등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예의 범위를 넘어 예서 악서의 심도 있고 광범위한 탐구와 악기 전반에 걸쳐 전문적으로 파고들어 연구하고 조사 관찰 탐색하여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저 시골 강촌에서 피리를 잘 불던 소년의 후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탈바꿈을 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왕에게 글을 올려 예악 정책을 건의하였고 음률의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밝히고 고치고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의 상주는 올리는 대로 받아들여졌고 바로 현장에 반영되었다. 왕이 그에게 바로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조회아악朝會雅樂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대의 생각을 묻는 것이오.” 세종실록에는 박연에게 하명하는 글귀가 보인다. 고래로 어떤 제도를 창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반대를 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듣지를 않고, 설혹 상하 모두가 하고자 해도 시운이 불리할 때가 있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나는 먼저 확고히 뜻을 정했고 나라에는 일이 없으니 마땅히 진력해서 이루도록 하오.” "바로 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은 유사눌 정인지 박연 전양에게 구악舊樂을 바로잡도록 명하여 아악 정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새로 정비된 조회아악은 세종 13년 정월 하정례賀正禮 때 처음 연주된다. 1년 만에 왕명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왕의 뜻과 신하의 뜻이 일치하였고 박연은 지체 없이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추고 전력투구를 하였다. 예서 악서 무수한 전적을 탐독하고 미세한 소리값 음가音價까지 분석하는 작업을 하며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쳤다. 빛나는 혈투였다. 빛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그의 신념은 메아리처럼 왕명이 되어 되돌아왔다. 시대의 부름이고 시대의 정신이었다. 국악인 한명희는 난계기념사업회에서 낸 『악성 난계 박연』1집 「난계의 업적」에서 실록에 있는 세종 이야기는 박연의 음악적 업적을 시대사적인 시각에서 한층 객관적이고도 타당성 있게 조명해 볼 수 있는 좋은 단서이자 시사示唆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진단처럼 새로운 일을 도모하거나 기존의 제도를 혁파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의 뜻이 투합되고 시운이 뒤따라 주는 등 여러가지 여건이 부합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박연의 음악적 공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박연이 조선 초기의 음악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음악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도 일차적으로는 박연의 뛰어난 음악적 자질과 해박한 지식에 말미암은 바가 컸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세종의 공감이나 시대적 여건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으리라는 점 또한 엄연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러기까지 박연은 요로에 많은 의견을 제출하고 끊임없이 청원과 상주를 하였다. 그것은 그의 신념이었고 시대의 요청이었다. 박연은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조정에서 제향祭享할 때 음악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세종 8년 4월 25일 봉상판관 박연은 만지장서를 올리었다. "신이 생각하건대…” 고래로부터의 악서를 다 섭렵한 것을 들추고 음의 고저 강약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를 들어 낱낱이 고증을 하며 개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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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9: 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송방송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공적을 평가하기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당사자의 학문적 성취도는 물론 개인적 품성까지도 소상히 알고들 있기 때문이다. 제25회 방일영국악상의 심사도 마찬가지였다. 국악 전공자들이 모여 국악계의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이었으니 첨예한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거론되는 대상자들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이미 그들을 세세히 숙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가 평가까지 내리고 있는 처지들이니 어려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설왕설래 끝에 두 사람의 후보로 압축되었다. 한 분은 판소리 실기자였고, 한 분은 이론 분야의 학자였다. 두 분에 대한 토론 끝에, 이번에는 이론 분야에 비중을 두기로 했다. 이론이 받쳐 주지 못하는 실기는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인데, 그간 이론 분야 수상자는 고 이혜구 박사와 몇 해 전 이보형 선생 정도로 너무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론 분야의 수상자라면 당연히 송방송 교수일 것이라는 짐작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분의 공적은 탁월하다. 우선 방대한 저술량은 웬만한 학자들의 기를 꺾고 주눅들게 하기 십상이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출간이 됐다 하면 보통 700~800쪽이거나1천여 쪽 이상이다. 기실 오늘의 수상자가 학문계의 사표로 칭송받아 마땅한 더 깊은 속뜻은, 송 교수의 거창한 저술량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관지 오로지 한 우물만 파며 정진하는 학자적인 자세와 식지 않는 학구열에 있다고 하겠다. 형설지공螢雪之功으로 뜻을 이루던 농본사회도 아니고 얽히고설키며 복잡하게 살아가는 현대 생활 속에서, 이처럼 초지일관 학문에만 침잠하여 큰 성취를 이루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송방송 교수는 그 같은 길을 의연히 걸어온 보기 드문 호학好學이다. 바로 이 같은 그의 삶의 족적은 학계 동료나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크게 상찬賞讚받아 마땅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국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전통문화계의 튼실한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는 최고권위의 방일영국악상이 때마침 송 교수를 천거하여 자랑스런 영예의 월계관을 씌워 드리게 되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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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남북을 잇는 최신아예술단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두번째 인터뷰어는 함경북도 청진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예술단에서 활동한 최신아예술단 최신아 (1969년생)단장을 국악신문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기미양-안녕하세요, 먼저 통일부에서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신아 선생님, 북에서 대한민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나요? 최신아-네, 감사합니다. 아마도 북한에서 오신 분들 중 통일교육위원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이 안되었지만 제가 이룬 성과 중 가장 기쁜 일 중 하나입니다. 2012년 봄에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처음에 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Q.북한에서 한국에 온 이유는? A. 저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26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탈북을 했습니다. 우연히 중국에 나왔다가 인터넷에서 남한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한 땅에 평양예술단이 있다고 해 보니 진짜 순수한 북한예술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짦은 순간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남한에 가서 진짜 최승희 무용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둘째 북한에서 예술가는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의 이름을 걸고 나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셋째.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귀멀고 눈멀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과 함께 자유민주주의가 있는 남한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Q.중국에서 직접 한국에 왔나요? 오면서 힘든 고비를 어떻게 넘겼나요? A. 네, 저는 2009년 북한에서 여권을 떼고 중국에 와서, 태국으로 넘어가서 3개월 후 한국에 가기 위해 죽음의 사선을 넘고 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펼칠 수 없는 순수한 예술을 위해, 저희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났는데, 당시 검열이 너무 심할 때인지라 검열관이 내 앞에 서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벙어리 역활을 했는데 그게 통하더라고요. 하늘이 도우셨다고 기도를 하면서... 곤명으로 와서 산을 6시간 타고 죽기 살기로 태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거기서방콕을 거쳐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였습니다. 가파른 산 비탈길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만나서 같이 도망을 나온 어린 친구가 더는 못가겠다고 그냥 여기서 죽겠다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포기할 때, 같이 죽더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그 친구를 부추켜서 붙잡고 오느라 땀이 어찌나 비처럼 쏟아지는지....간신히 고개를 넘고 넘어 태국까지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거기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드디어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자유의 나라로 왔습니다. Q.나중에 큰 따님 강나라는 북한에서 어떻게 탈출했나요? 남겨진 북한의 딸은? 가슴 아픈 질문을 드리네요. A. 제가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맏딸을 데려왔는데요. 늘 가슴 한구석에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갈망하던 끝에 브로커를 통해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오지 못한 막내딸 때문에 밤에도 제대로 못자고 있지만 함께 살 그날만 그려봅니다. 맛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목구멍에 잘 안 넘억갑니다. 멋있는 옷도 사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에서는 가끔 만나서 붙잡고 울고...자식 그리운 것은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Q.북한에서 무용가로만 활동하다가, 처음에 남한에 적응하기 얼마나 어려웠나요? A. 한국에 와서 3년 동안은 막막했습니다. 무용을 포기하고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루종일 창가에서 십자수를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한국에 왔지만 하나원을 나오니 직업이 없는 실업자가 되더라구요, 그래도 북한에서는 완벽한 무용가였지만 여기서는 그걸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무용을 포기하고 집에서 십자수를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식당에 나가서 알바로 생활비를 벌면서 살았습니다. 첫번째로 답답한 것은 이질화 된 남한의 문화극복이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언어 소통도 힘들고 무엇을 사려고 해도 말(표현)이 너무 달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없었습니다. 북에서 온 사람 중 주유소에서 전화 받는 일을 하다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1달도 못 버티고 식당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분도 많습니다. 돈을 북한에서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빈손으로 왔는데 저희한테 주어진 것은 오직 실업과 빈곤이었습니다. 좌절도 했고 다시 북에 가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열 번씩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남한에 와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거든요. 지금은 SNS를 통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Q.탈북후 다시 무용가로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언제인가요? 대한민국에 와서 꿈은? A. 제가 2015년도에 7월에 한통의 전화가 오면서 그때부터 무용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국악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국민대통합 아리랑'공연에서 전국 순회 공연에출연하면서 저라는 사람을 알리게 했고, 그로부터 최신아예술단 창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강남문화재단이 주최하는 759회 목요상설무대에서 ‘아리랑 아라리요 북에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게 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기획공연을 통하여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습니다. Q. ‘최신아예술단’을 창단하시게 되는 계기가 궁금합니다. 소개도 해주세요 A. 최신아예술단은 2015년 11월에 창립됐습니다. 2012년 4월에 하나원 나와서 3년후 국악방송국 모 간부가 방송출연에 나와달라고 해서 북한에서 경력을 밝히고 난후 국민대통합 아리랑에서 장구춤을 선보인 후 격려와 용기를 받고 결심을 했습니다. 저의 이름 세 글자를 걸고 최신아예술단으로 만들어 현재까지 공연하며 오고 있습니다.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한 대학 졸업생들로 오디션을 통해 5명의 인원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웠던 분들도 계시고 또 대한민국의 살풀이 이수자분들도 계시고 초등부 학생들도 계시고 취미반도 있고 성인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용을 정말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체격이 안되거나 여러 가지 조건으로서 못했던 분들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 저에게 배우러 오기 때문에 "최신아 무용연구소”라 하면 정말 대한민국에 없는, 한 동작 한 동작 체형에 맞게 연구하면서 배워주는 연구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문하생들은 글로벌하게도 중국 유학생부터 조선족, 일본, 캐나다, 그리고 한국분들. 탈북인들을 대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도 많이 오고 계십니다. 이제는 최신아무용연구소로 발전시켜서 현재는 예술단과 무용연구소를 겸하고 있습니다. 우선 남한에 오신 북한 출신 예술가들과 소통을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이나 최승희무용에 대한 연구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Q.처음 남한에서 섰던 첫 무대는 언제 어떤 무대인가요? 이후 특별한 무대는 A. 영광스럽게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아리랑 명인 이춘희 명창과 남도잡가 신영희 명창과 함께 하는 '2015국민대통합 아리랑 순회공연'을 성료하고, 2016년에는 괌에 초청돼서 북한무용을 보여주는 특별한 공연을 했고, 2018년에는 인도에 가서 ‘남북의 아리랑’ 주제로 투어공연을 하면서 북한무용의 진수를 알려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최근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하는 2019년 제3회사할린아리랑제입니다. Q.기사를 검색하니 최근 해외공연으로 사할린에 갔는데? 어떻게 해서 사할린아리랑제에 가게 됐나요? 북한 출신은 안보상 북한과 가까운 사할린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A. 그해 4월 이미시문화서원(좌장:한명희) 주최로 열린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추념 음악회'에 최신아가 이끄는 최신아예술단이 출연해서, 선보인 최승희의 '장고춤'을 사할린 동포들이 본 것이 이번 초청의 기회가 됐습니다. 그 중 한 가족이 고향이 북한이라고 합니다. 이후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꾸준히 아리랑을 알려 온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장)에게 사할린 동포들이 부탁해서, "사할린 동포들이 최신아 씨를 무조건 초대해달라고 했다"고 전해 듣고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 적지않게 계시더군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시는 고난을 위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Q.2019사할린아리랑제 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선보이었나요? A.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 기획 측에서 북한의 대표적 무용 '쟁강춤' 선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북한 고유의 민족성이 담긴 쟁강춤은 북한 무용의 꽃입니다. 귀신을 쫓고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손에 부채를 들고, 손목에는 방울을 달아 '쟁강쟁강' 소리가 나는 '쟁강춤'은 최승희의 '무희춤'으로부터 이어져 온 대표적인 북한무용입니다. 남한 전통무용에 비해, 러시아 예술만 접해 온 동포들에게 우선 북한무용은 박자나 호흡 속도가 러시아 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한국 전통무용과 북한무용이 한 무대에서 이루어져서 감동이었습니다. 한국무용가 영덕에서 오신 김옥순 무용가의 전통무용의 정적인 살풀이춤과는 대조적이어서 조화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음에도 또 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 자신도 관객의 호응과 열기가 전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Q.70년 동안 우리는 남과 북이 갈라져 있다. 북한 무용가로서 사할린아리랑축제에 다녀왔는데, 예술가로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A. 북한무용가로서 최승희 선생님이 최초로 사할린에 공연 갔는데, 제가 또 두 번째로 최승희 선생님의 뒤를 이어서 사할린에 가서 공연하고 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에는 동포사회의 역활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 가족은 북과 남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북에 공부하러 간 자식들을 마음대로 오고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만나는 길은 남북통일 밖에 없다. 우리는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하시면서, 저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남북을 잇는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제가 북한무용을 알리는 길도 통일에 기여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무용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꿈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북한에서 무용가 입문경위 Q.언제부터 무용을 시작했나요? 계기는? A. 저는 평양에서 알아주는 예술가의 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배구를 좋아해서 초등학교에서는 스포츠 소조 활동을 하였습니다. 저희 학급이 2중 영예 붉은기 학급이 되어 배려로 평양학생소녀궁전 가야금 소조에 다니게 되었는데 제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복도에 나왔다가 신명나는 장단소리가 나서 호기심으로 찾아 간 곳이 무용소조였습니다. 그러다 그 다음 해 우리 가족은 청진으로 추방을 당해서 지방으로 내려와 예술대학에 월반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무용가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3살입니다. Q.해방후 남과 북은 민속예술도 이질감이 생겨났습니다. 북한 민속무용은 전통적 민족무용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시대의 목적에 따라서 재창조 되어 민족적 색채를 지닌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무용은 빠르기나 호흡이 전통무용보다 훨씬 빠릅니다. 재창조 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 나라 중 영향을 받았나요. A. 북한은 1950년 이후 가장 영향을 받은 무용은 우쿠라이나 발레입니다. 남한은 현대무용 하는 분들이 따로 있고 발레 하는 분들이 따로 전통 무용하는 분들이 따로 있어요. 남한은 더운 지역이다 보니까 빨리 추면 덥지 않아요. 그러니까 온유하게 천천히 부드럽게 그냥 우아하게 부드럽게 춤을 추지만, 북한은 아주 추운 지역이어서 가만히 있으면 춥기 때문에 항상 뛰어야 되요. 러시아처럼 발 동동 구르며.... 그런 식으로.... 춤이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경쾌한 춤이 나왔기 때문에..... 전래되는 놀이문화를 봐도 남과 북의 차이점이라 하면 남쪽은 따뜻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춤사위가 살아있고, 북한은 추위가 강하니 강렬함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다른 것 같습니다. 북청사자놀음이나 밀양백중놀이를 비교해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Q.(남한과 비교해서) 북한무용의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북한무용은 당의 문예정책에 의해 '민족적 형식과 사회주의 내용'을 주입시킨 시대적 변용에 의해 새로이 창출되었다고 하는데, 예를 든다면? A. 그래서 전 인민에게 노동을 장려하는 천리마 운동을 하는데 신나는 박진감 있는 박자가 어울리지요. 남측이 계승하고 있는 전통무용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북한은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풍습과 정서가 짙게 반영되어 있는 예술형식의 하나”로 무용예술을 정의하기 때문에 민족무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남한무용이 자신의 의도와 감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면, 북한무용은 당에서 내려온 문예정책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적 사고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주제나 느낌을 표현하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진 예술무용에 대한 심미안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북한무용이 탄생한지 올해로 70년이 됩니다. 북한학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문화변용(Acculturation)에 의한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북한무용을 한마디로 한다면? A. 북한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최승희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남북이 갈라지고 나서 북한은 사회주의로 길을 가면서 예술도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러시아 예술을 수용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우리 전통무용을 근간으로 한 우크라이나 무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빠른 반주에 맞추어서 동작을 크게 하면서 우화함과 세련된 춤동작을 창작하여 왔습니다. 추운 지방의 특성을 살려 경쾌함과 역동적이며 빠른 톤으로 춤동작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 무용수들은 발레에서부터 모던댄스는 기본동작으로 배우고, 한국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1960년대는 발레 기본과 최승희 선생이 정리한 '조선무용기본'을 통해 무용수들을 훈련해 왔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변화가 일어나서 '민속무용기본'을 만들어 무용수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춤 연구가 정병호 교수는 북한무용에 대해서 "대체로 움직임이 기계적이고 절도가 있으며 동작이 크고 빠른 동작이 많으며, 목이나 손목 동작은 유난히 각을 많이 만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무용가로서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누구인가요? A. 제가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예전에도 현재도 '최승희'선생님이십니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전세계에 알린 세계적 예술가이십니다. K-한류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양인으로서 일단 쭉 뻗은 큰 키와 섬세한 맵시, 서구적 마스크와 유연한 품세를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된 보살춤 같은 창작작품은 환타지를 넘어 신비주의를 보여줍니다. 북한 무용의 발달 과정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일제시대부터 이어 온 신무용으로서 조선민족무용과 서양식 무용을 근간으로 당의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 재창조 되고 있다. 1960년대 와서는"민족적인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으라”는 당의 문예정책에 부합하는 민속무용으로 개발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혁명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북한무용을 이끌어온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공연되면서 지금의 북한민속무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Q.북한에서 무용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저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모시고 무대를 한 적도 있습니다. 북한 전국무용대회 솔로(독무) 무대에서 15년 동안 1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입니다. 다행히 달리기 수영 등산 등 대회에서 늘 상위권을 할 수 있는 체력을 타고 났습니다. 부모님께 감사하죠. Q.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을 사제자로 전수받은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이 붙고, 이병옥교수가 최단장을 최승희 무용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해주셨는데, 무용가로서 자신의 소개 부탁드려요? A.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은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북한무용 자체가 최승희 선생님의 무용정신을 이어 받았기에 거기에 저도 포함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저는 북한에서 예술대학을 졸업하였고, 그후 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한 26년간 활동하다가 남한에 온 지 11년이 됐어요. 최승희 춤 중 가장 자신있게 출 수 있는 춤은 사당춤, 장구춤, 쟁강춤입니다. Q.북한에서 최승희 무용은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스승이 ‘최승희 무용’을 가르칠 때 최승희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셨나요? 북한에서의 최승희 무용가에 대한 평가는? A. 저희 담임 선생님이 최승희 선생님의 제자다 보니까, 최승희 선생의 사당춤을 배워줄 때 한마디 한마디 하실 때마다 최승희 선생님이 이런 표정을 짓고 이렇게 춤을 이런 형식으로 쳤다는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북한에선 최승희 선생님에 대해 세 글자만 불러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세 글자 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쉽지 않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희 때는 최승희 선생님이 활발하게 활약을 했다는 내용도 잘 몰랐어요. 남한에 와서 많이 알게 되었고 북한에서는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Q.남과 북의 춤을 비교하신다면 어떻게 다른가요? 무대에서 북한과 남한의 관객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남쪽은 무용은 워낙 더운 지방의 특색을 살려 우와하고 부드러운 춤을 추지만 북쪽의 춤은 강한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는 고구려 정신으로 경쾌함과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북한은 형식적 박수를 치고, 남한은 자연스럼 감성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공연후에 꽃다발도 안겨주고 사인도 해달라고 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남한 춤사위는 화려하고 우와함이 있다면 북한은 화려하고 우와미가 있고, 거기에 다이나믹(역동성)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있는 퍼포먼스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남한 무용가의 시선은 무대에서 자기도취형이랄 수 있고, 북한 무용가의 시선은 반드시 시선을 관객과 눈이 맞추어야만 합니다.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이 첫째입니다. 북한 무용은 첫째가 관객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소통이 안되면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한은 얼굴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관객의 호응을 못 받으면 무대에 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전 선동의 기본이라고 하죠. Q.북한에서 전통무용 살풀이. 태평무를 배웠다는데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 어떻게 반영되나요? A.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는 살풀이 태평무를 위한 동작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앉기동작과 수건춤 동작, 뿌리치기 동작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문예정책에 의하면 북한의 무용은 이러한 민족무용을 근간으로 발전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용 의상도 전통한복을 기초로 창작됩니다. Q.최신아씨가 북한 대집단체조 공연에서 맡은 역할은? A. 저는 1993년 전승 40돐기념공연 대집단체조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원조)에서 '기러기떼 날으네' 출연과 동시에 예술감독 역활을 맡았습니다. 작품은 '빈터에서 우리는 자랐다'와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에서 무용수로 참여하였습니다. Q.북한에서 30여년 무용을 하면서 무용가로서 북한 무용가의 자질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A. 무용가라 하면 ‘종합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용가라고 하면 첫째 선율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음악을 받아들이는 음악적 청음(귀명창)이 발달해야 하고, 기본적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단(박자)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전통무용에서부터 발레, 현대무용을 배워야만이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이론적 단계까지 공부를 해서 무용론, 초리론, 무용표기법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해서 소화를 해야만 아래 후배를 이끌 수 있습니다. 육제적으로는 체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매일 하루도 안 쉬고 혹독한 연습을 해야만이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그 어떤 장르의 예술인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단련해야만 무대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북한 무용가는 가무악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장구 같은 악기 연주는 필수입니다. Q.주목되는 아리랑 작품이 있는데(아리랑환타지.서울아리랑)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요? A. ‘아리랑환타지’작품은 제이케이앤컴퍼니에서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앙상블과 함께 아리랑환타지 작품을 콜라보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보내준 음악을 듣고 결정을 했습니다. 20일 만에 창작하여 여수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선율에 세계인이 인정하는 신명나는 장구를 메고 장구춤을 형상화 했습니다. 남북의 통일된 모습을 상상하며 기쁨과 상생을 상상하며 화려한 부채와 신명나는 장구춤으로 창작하였습니다. 서울아리랑 작품은 국악방송 15주기기념 ‘기적의 아리랑’ 공연에서 소리아밴드와 함께 콜라보로 창작하여 만든 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이 담긴 긴부채를 꽃처럼 묘사해 행복한 모습을 서울아리랑 음악에 맞추어 춤을 창작하였습니다. Q.'서울아리랑' 작품을 하시면서 직접 부른 가사를 알려주세요 A. ‘그리운 강남’이라고 1930년대 나온 음악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으로 갈 그날을 그리며 창작하였습니다. 가사는 ‘정이월 다가고 사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입니다. 여기서는 장사익 선생이 잘 부르는 곡이더군요. 이미 널리 알려져서 강남아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아리랑 창작무의 주제곡으로 선정했습니다. Q.한국에 나와서 창작하신 무용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A. 무용작품도 시, 소설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 주제와 내용을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을 합니다. 대충이라는 단어는 안 통하는거죠. 그래서 그 어떤 동작을 넣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처럼...시놉시스를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주인공(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이 내용을 숙지하고 무용으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창작작품이 탄생을 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며칠동안 잠도 안자고 안무를 구상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구상과 몸짓이 떠오르죠. 한국에 와서는 창작작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남한의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한 살풀이, 부드러운 선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역동적이면서 격동적인 무용을 배합하여서 5개의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습니다. Q.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당신의 레파토리(대표) 작품은? 지금 제자들과 무대에 오른다면 보여주실 수 있는 총 작품은 얼마나 되는가요. A. 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작품은 장구춤, 쟁강춤, 사당춤, 나의초소, 도라지춤, 물동이춤 등등입니다. 제가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북한에서 배운 장고5인무. 쟁강춤, 사당춤, 장고춤과 제가 남한에서 발표한 창작무 서울아리랑, 아리랑환타지, 그리운강남, 임진강, 삼색부채춤, 매직춤입니다. 어림 잡아 10여 작품입니다. TV조선 '모란봉 클럽'에 출연했던 본인 작품 아리랑환타지가 유튜브에서 인기입니다. 이후 인기있는 작품은 역시 ‘서울아리랑’과 ‘아리랑환타지’ 작품입니다. 무용곡은 남북이 애창하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입니다. Q.현재 인기가 좋은 매직춤(사계절춤) 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만든 것인가요? 남한에 와서 처음 안무를 맡은 작품이 있나요? 창작작품에 따라서 의상 디자인도 직접 구상했다는데 자세한 설명 듣고 싶어요. A. 제가 대한민국에 처음 도착하여 국정원에서 이 음악을 듣고 가사도 좋고 곡도 좋아서 제가 한국에서 무용을 한다면 꼭 이 음악 한국의 사계절을 담고 싶었서 창작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남한에 와서 남원한복패션쇼에서 안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창작작품은 제가 디자인을 하고 의상사에게 맡겨 완성합니다. Q.최근 북한 예술가 중 가장 인기있는 모녀라고 하는데, KBS와 MBC, 전주 얼쑤 우리 가락과 부산 KBS 가요 1번지토크쇼, 남도 국립국악원공연. 최근 강나라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실제 자문위원이었고, 어머니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맡은 모녀가 MBN ‘대한민국 팔도명물인증쇼&에 나왔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방송을 통해 북한문화예술을 어떻게 전달해 주고 싶으신지요? A. 제가 방송을 통해 알려줄 것은 우리의 문화예술의 뿌리는 하나다라는 것과 북한의 전통을 알아야 통일을 대비해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무대에서 다이나믹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속도감이 빨라서 한국무용과는 차이가 나죠. 무대에서 정적인 한국무용과는 대비가 되어서 관객들의 호응이 높습니다. 일단 신선하고 새로운 장르이니만큼.......... Q.'이북5도무형문화재'는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 북한 지역에 있는 5개 지역을 기반으로 한 19개의 종목문화재를 가리키는데, 현재 이북5도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에서부터 만구대탁굿, 돈돌날이, 두만강뗏목놀이소리, 제2호 평양검무 제3호 부채춤, 평안도 다리굿, 제4호 화관무. 제4호 평북 농요평안도 등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신청한 종목은 무엇인가요? A. 제가 3년전에 북한의 전통무용으로 "최승희 류 평양 장구춤” 종목을 신청했습니다. 평양장구춤은 최승희선생님의 장구무용을 북한의 최고 춤꾼인 홍정화 선생님이 승화 발전시켜 오늘날에는 공훈배우, 인민배우 급수시험작품으로 진행되고 있는 난이도가 높은 무용작품입니다. 앞으로 쟁강춤도 북한의 무형문화재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 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 2020 정기공연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지난 1월 20일 비대면 동영상 공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Q.개인적으로 첫째. 앞으로의 계획은? 둘째, 통일부 통일자문위원으로서 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실건지요? A. 아마도 무용가로서 무용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몸이 허락할 때까지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도 살아봤고, 남한에서도 살아 봤잖아요. 아마 저는 통일되면 남과 북에 예술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남과 북의 무용을 승화 발전시켜 우리의 문화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과 현재 운영하고 있는 최신아무용연구소가 발전되어 특수한 문화적 요건에 의해 탄생한 북한무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글로벌 차원의 북한무용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한반도 민족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서 통일후 남북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한걸음 뚜벅 나아갈 것입니다. Q.마지막으로 통일부 통일자문위원 최신아 선생에게 한가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사할린은 북한지역과 지정학적으로 오고 가기 쉬운 북러관계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50년 이후 북한 노동자들이 나와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 있는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사할린 동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합동공연을 한다면 가장 1순위가 사할린입니다. 지정학적 특수한 여건에서 남북이 제3지역에서 합동공연을 할 수 있는 1순위 지역입니다. 그런 성격의 남북공연이 60년만에 사할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광복절 기념 남북한합동공연이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어 다녀왔습니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입니다. 사할린 동포 강제동원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입니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3000명의 노동자 중 많은 북한 사람들도 함께 한 광장은 인산인해로 열기와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니, 남측의 경고가 반복되어도 김일성 3부자를 우상화 및 찬양하는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북측의 예측불허 공연으로 행사진행이 불발되어 남한 측 공연단은 무대에서 모두 철수하는 급작스런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북한 선전선동가 일색으로 끝났습니다. 무대 앞에서는 현란한 북한 공연이 이어져서 북한공연팀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고 흥이 오른 관객들은 무대 잎에 나와서 부르스를 추고, 무대 뒤에서는 남과 북 공연 대표팀이 고함을 지르고 큰 싸움까지 붙었습니다. 모든 일을 추진한 사할린한인협회는 북측 공연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싸우고 나서는 북한 공연팀을 이동시키는 리무진 버스도 철수시켰습니다.,,,,그날 대한민국 신문방송은 모두 '사할린 남북합동공연 불발'이라고 전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남북공동 행사가 제3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A. 네, 방송과 신문지면을 통해 사할린에서 몇십년만에 모란봉악단이 와서 국립남도국악원과 함께 콜라보 공연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합동공연이 불발이 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남북이 함께 하는 공연에서 감자기 북측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는 무대에서 남측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공연팀이 무대에 같이 설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사전에 국가 체제에 관한 선전가는 안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북측이 그 합의를 준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측의 민간단체가 함께 했다면 그 공연은 함께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국립기관과 민간단체가 함께 공연을 했다면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했을 겁니다. 1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사할린까지 날아가서 국민혈세를 쓰고서 그냥 오다니 말도 안되는 남북 국제행사입니다. 민간단체 공연팀이 같이 갔다면 예정대로 무대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으로 휘날레는 했을 겁니다. 즉 국민들 앞에서 대의명분은 서는 거지요. 북한에서 나온 노동자들과 사할린 동포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우리는 하나인데... 당시 기사를 보니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라고 했는데. 예를 들어 제가 참가한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이 정례화 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와 같은 민간단체가 매년 사할린에서 열리는 아리랑축제와 함께 했다면..남북러가 참가하는 공연 타이틀은 이름값을 했을겁니다. 그리고 후일담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오프닝 무대의에서 유지숙 명창이 부른 '애원성' 같은 북한지역 서도민요는 현지 관객의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나 북한 노동자들은 전통민요의 멋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트롯트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북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2호 아리랑은 다 좋아합니다. 영천아리랑은 북한 민요음반에 첫 번째 인기곡목입니다. 밀양아리랑도 좋아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북한과 러시아는 박자 빠르기가 남한과 확연하게 다릅니다. 처음 들어보느 낯설고 느린 전통민요 코드는 맞지 않습니다. 남북합동공연에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사전조사를 철저히 해야합니다. 차라리 남측에서 처음에 유지숙 명창이 아리랑 메들리를 부르거나, 북한이 좋아하는 영천아리랑이나 북한 최고 유행가 '휘파람'을 불렀다면 중간에 타협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관객은 대한민국이 아닌 러시아 동포들과 북한 노동자입니다. 그들의 취향에 대한 배려가 먼저입니다. 2018년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이 한국에서 사할린한인협회와 MOU를 맺고(<사할린아리랑제, 北 예술단 참가 추진···현지 한인협회 MOU> 뉴시스, 2018-06-19)두 단체는 "한민족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아리랑의 기능을 활용, 올해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사할린을 거점으로 삼는 아리랑로드를 확장하기로 했다. 급변하는 국제관계에서 북한 동포들과 아리랑공동체를 공유한다는 취지다. 금년 사할린아리랑제는 러시아는 물론, 남북 합동공연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은 2018년 사할린을 세번 오가며 남과 북이 유네스코에 공동등재 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주제로 하여 남북합동 공연을 같이 하자고 사할린한인협회에 제안을 했죠.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 결국 성사가 안 되었죠. 공동주최가 안되어도 한꼭지 무대를 주었다면, 국립기관 단체 공연팀이 공연 도중 철수를 해도 민간단체는 탄력성을 가지고 남북합동 공연은 마무리 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불발이라는 기사는 안나가겠죠.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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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를 읽다’(1)‘이춘희를 읽다’는 인간문화재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자전적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를 요약, 소개하는 글이다. 경기민요 명창의 고난과 영예의 역정을 통해 동시대 국악인들에게 참 명인의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함께하기 위해서다. 3회에 걸쳐 전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이춘희를 읽다’(1) 1. 소리에 눈뜨고, 소리 길에 들다 경기소리 명창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발간되었다. 영어로는 "The Life and Art of Lee Chun Hee, Master of Gyeonggi Folk Songs”이라고 하여 ’경기민요 명인 이춘희의 삶과 예술’이라고 풀어 표현했다. 기존의 서사체 전기(傳記)의 틀을 벗어나 현재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오늘에 이른 지난 길을 정리하고, 다시 가야할 길을 열어 보이는 생생한 보고서이다. 이런 성격은 서명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전해 준다. 선생의 호(號) ‘旦聲’(아침의 소리)의 의미를 문장화 한 것인데, 아직도 새날의 아침을 기다려 맞으며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책머리 발간사는 단 1쪽으로 간명하다. 네 토막의 글 중 세 번째 토막이 직접적인 발행 목적으로 읽힌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에게 소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목숨과도 같은 여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승으로서 경기민요인으로서 잘 살아야하겠다는 책임감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제자, 둘째는 여식(서정화)에게, 그리고 관객(펜)들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이렇게 책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은 어느 정도는 할만큼 했음을 드러낸 자신감이며 권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춘희’를 읽는 무게감을 갖게 해 준다. 곧 "나처럼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노력해라. 그러면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라는 단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분의 평가를 발간사에서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 생전에 자전적 구술서를 낸 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 아닌가.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명인의 자부심이다. 우선 서연호(고려대)교수가 성음에 대해 "어떤 고음에도 잡티가 전혀 없는 잘 훈련된 목과 탁월한 성량, 음처리에 빈틈이 없는 완결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고음과 성량은 천성이지만 ‘완결성’과 ‘잘 훈련된’ 것에 방점을 두었다. 소리하는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은 김해숙(前 국립국악원) 원장의 진술이다. "경기민요에 어눌하던 나의 귀를 확 트이게 한 경험을 하게 하였는데, 경기민요를 그토록 고졸하고 품격있게 느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찬사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와 찬사는 결코 과장되거나 이 분들만의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오래전에 한 축사에서 규정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대가의 이만한 평가와 찬사는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해 준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어린 시절 소리 인연과 입문 과정을 담았다. 출생지가 서울 본토박이 한남동 부군당(府君堂) 근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매년 정월 초하루 날의 마을굿을 보며 자랐다. 무당집에서 당집까지의 행렬에 끼어 악기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한살 한살 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사발가’를 가슴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은 ‘사발가’의 굿거리장단이 ‘소리병’의 씨앗이 되어 각인되었다. "어린 춘희가 만난 것은 노래였다. 노래에 대한 끼를 발견하고 난 이후에 노래와 함께 찾아오는 밝은 기운과 생동감은 어린 춘희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건의 시작은 한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음악시간에 부른 ‘봄 아가씨’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라디오를 소리선생으로 삼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요와 민요와 대중가요는 청각이 예민한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특히 장안의 화제였던 일일연속극 ‘장희빈’의 주제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민요조 구성진 창법의 황금심을 동경했다. 대중적인 노래의 매력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18세가 되던 1968년, 김부해(金富海,1918~1988)가 운영하는 가요학원을 찾았다.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악보를 받아 피아노 반주에 의한 반복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희망을 갖고 2년을 다녔다. 선생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해 작곡의 ‘백령도 처녀’라는 곡을 가수 최숙자가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 코러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갑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감 같은 것이 없었다. 가요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마음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문득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민요라는 것을 깨닫고 민요학원을 찾게” 된 것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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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8: 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김월하 가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월하月荷 선생이 타계하신 지 벌써 20년이 흘렀단다.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누구나 입버릇처럼 흘리지만, 월하 선생을 영별한 지도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었다니, 정말 세월의 무상함을 지울 수가 없다. 월하의 음악 세계를 떠올리자니 문득 교목지가喬木之家의 고색창연한 고택의 잔상殘像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야산 밑에 중후하게 자리 잡은 선비댁의 와가瓦家. 넓은 대청이 있고 주렴이 처져 있고, 뜨락엔 봉선화며 백일홍 꽃밭이 있고, 마당가 한 자락엔 아담한 연지蓮池가 푸른 창공을 품고 있는 전형적인 대갓집 고택. 틀림없는 말이다. 월하 음악의 진수는 바로 지난날 선비댁의 고택 문화에서 발효되고 빚어진 음악임이 분명하다. 그렇듯 월하의 음악 속엔 지난 세월 우리네 선비문화의 원형질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학처럼 고고하고 수정처럼 해맑고 백합처럼 단아하고 청초했다. 그런가 하면 그 속엔 좀해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격조가 있었으며, 예술의 진경을 흠뻑 느끼게 하는 풍격風格이 있었다. 오호라, 월하 선생 가신 지 20개 성상을 맞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함은 어인 일인가? 짐작하듯 이제는 또다시 천년고택의 정취가 배어나는 고아高雅한 월하의 정가를 만나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가면 인걸도 가고 문명도 바뀌는 것이 우리네 삶의 실상이지만, 그래도 월하 없는 오늘의 정가계正歌界는 연지에 연꽃도 없고 기왓장도 낡아 버린 퇴락한 대갓집의 고가古家를 접하듯 소슬한 마음 떨칠 수 없음이 사실임을 어찌하랴! 월하 선생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분이 부른 ‘황학루’ 시 한 수 들으며, 그분만이 고고하게 걸어간 참다운 예인의 길을 재삼 반추하고 존경하며 추모의 옷깃을 여민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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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한악계의 별들 (저자:한명희)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 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 차례 004서문 인연 한 자락 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 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 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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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7: 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이춘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전통민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노래는 아마 경기민요일 게다. 많이 회자되다 보니 우선 부르기가 쉽고, 가락이나 곡상이 살갑고 경쾌하며 청아하다. 경기민요의 늴리리야나 창부타령을 서도민요의 수심가나 남도민요의 육자배기 등과 비교해 보면 이내 그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만인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민요는 경기민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대중적인 노래는 쉽게 공명되는 정서적 감응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칫 진중한 감성의 여운을 잃기 십상이다. 경기민요가 갖는 태생적 한계랄까 속성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이춘희 명창을 훌륭한 가객이라고 치부置簿하고 있는 까닭도 다른 게 아니다. 자칫 경박해지기 쉬운 경기민요의 취약점을 그만의 속깊은 내공으로 말끔하게 균형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요즘의 세태는 지나치게 경망하고 부박하다. 대부분의 예인들이 심금은 울리지 못하면서 표피적인 재주만을 팔기 일쑤다. ‘사람 됨됨이’라는 바탕은 닦지 않은 채 기예만을 익혀서 남에게 과시하려 든다. 수기修己를 해야 입신立身도 되고 이인利人도 할 수 있는데, 수신의 토대 없이 성급하게 과실만을 탐내는 세상이고 보니, 예술이건 학문이건 사상누각이요 일회성 거품에 불과할 때가 많다. 마음에 와 닿는 노래나 음악회가 드문 것도 이 같은 풍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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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6: 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김천흥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지난 한 세기 우리 현대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굵직한 사건만 돌아봐도, 한일합병과 3·1독립운동, 해방과 정부수립, 6·25전란과 남북분단, 4·19혁명과 5·16군사정권, 광주민주화운동과 88서울올림픽 등 그야말로 숨가쁘게 휘몰아쳐 간 격랑의 시대였다. 사회 풍조나 가치관 역시 상전벽해로 환골탈태돼 갔다. 전통적인 농본사회가 급격한 산업사회로 바뀌어 가고, 서정적인 농촌문화는 삭막한 도회적 일상성으로 환치됐으며, 인륜에 바탕을 둔 유교적 가치관은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풍토로 뒤바뀌어 갔다. 이 같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시대인들은 합당한 대안 없이 표류하며 삶에 대한 힘겨운 갈등과 회의에 빠지기 일쑤였으며, 물질적 풍요와 반비례하는 행복지수를 힘겹게 떠메고 살아야 했다. 바로 이 같은 시대 배경이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선생 무악예술舞樂藝術과 인생 역정의 무대이자 토양이다. 결코 태평연월의 호시절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뇌하고 체념하는 시절이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심소 선생은 소극적으로 ‘사의 찬미’ 같은 엘레지나 부르고 있지 않았다. 해금으로 무용으로, 아니 생불生佛 같은 자애로운 미소로 시대의 병통을 위무하며 구원해 왔다. 같은 시대를 동행한 많은 민초들이 심소의 청아한 가락에 시름을 잊었고, 단아하고 정갈한 심소의 춤사위에 너나없이 동고동락의 희열을 나눴으며, 세사의 달관으로 빚어진 심소의 온유한 미소에는 강퍅剛愎한 세상도 금세 생기를 띠며 봄볕처럼 화사하게 밝아지곤 했다. 시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詩言志], 노래는 말로 표현한 생각을 길게 읊는 것[歌永言]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를 언어나 노래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수지무지 족지도지手之舞之 足之蹈之의 몸짓이다. 어설픈 췌언贅言을 버리고 무궁한 침묵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무용의 세계, 곧 침묵의 세계는 상호 소통의 궁극적 묘책이자 대도大道이며 지고한 예술의 경지다.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우처럼, 백 마디 설명이 필요 없다. 눈빛 하나 몸짓 한 동작으로도 만물을 수렴하며 천하를 설파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니, 심소 선생의 해금은 음악이 아니었고 심소 선생의 춘앵전은 무용이 아니었다. 음악이되 음악이 아니고 무용이되 무용이 아닌 그 너머의 세계, 곧 심소의 인생이며 우주관이자 철학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달관의 체로 걸러지고 정제되어 순수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응축된 화룡점정의 원형질이 곧 심소 선생의 미소 세계다. 분명 심소의 미소는 심소 예술의 이데아이자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가섭迦葉 같은 지혜로운 후학들이 있어, 정재무악의 진수인 심소 미소의 정체와 미학 세계를 온전히 풀어내고 널리 펼쳐갈 수 있으면 우리네 삶은 한층 풍성한 살맛으로 싱그러워질 것이다. ‘손만 들어도 흥이다. 발만 옮겨도 멋이다.’ 심소 선생은 그렇게 무애無碍의 춤으로 풍진세상을 어루만져 주셨다. ‘눈빛만 닿아도 자애롭다. 표정만 보아도 화평하다.’ 심소 선생은 그렇게 천진무구한 자비심으로 곤고한 중생을 보듬어 주셨다. 이제 심소 선생은 이승의 소풍을 마치고 아득한 피안으로 떠나셨다. 하지만 심소의 사뿐한 춤사위와 동심의 미소는 파란 창공의 흰구름밭에 보허步虛의 춤으로 새겨져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은진 미륵불 같은 자애로운 소안笑顔 세월의 속도는 사람 따라 상대적인 게 맞는 것 같다. 인생 고래희라던 기로耆老의 구간을 넘어서니 젊은 날의 속도감보다도 더 빨리 황혼녘으로 가속이 붙는 걸 봐도 그렇고, 더구나 심소 김천흥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신 지가 벌써 5년이 흘렀다는 사실 앞에 서고 보니 정녕 늙은 세대가 감응하는 세월은 백마과극白馬過隙처럼 훨씬 더 빠른 것만 같다. 심소 선생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으레 연상하는 선명한 심상心象이 있다. 바로 절대 자유인으로 서라벌 거리를 기인처럼 누비며 살다간 신라의 고승 원효와 그의 무애무無碍舞가 곧 그것이다. 신라의 원효가 종교적 해탈로 무애무를 추었다면, 20세기 한국의 심소는 영락없이 예술적 달관으로 절대 자유의 경지인 무애의 정재무를 추었다고 하겠다. 그만큼 그의 춤은 물 흐르듯, 춤이되 춤사위를 뛰어넘는 무위자연의 예술적 진경眞景이 펼쳐지고 있었다. 심소의 춤에 인위人爲가 없듯이 심소의 언행이나 섭세涉世 역시 상선약수上善若水같은 순리와 지혜와 노숙老熟이 자연스레 배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예술의 궁극적 이상이랄 지예至藝의 경지에서 노니는 유어예遊於藝의 세계가 곧 심소의 생애요 삶이며, ‘심소무心韶舞’의 본질이자 미학이라고 하겠다. 내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원로 사범으로 계시던 심소 선생이 원장방을 찾아오셨다. 아마도 국악원 뜰에 있는 국악계 명인들의 동상을 옥내로 옮겨서 안치하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신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당시 상황으로는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그때 심소 선생은 섭섭한 표정은 커녕 오히려 활달하게 웃으시며 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선선하고도 자상한 어투로 위무의 여운을 남기며 방을 나가셨다. 짧은 독대에서 스친 소회이지만, 기실 아무나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천부적인 낙천성에 호쾌한 호연지기와 세상살이의 속 깊은 달통을 거치지 않고는 흉내 낼 수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화통한 경지임을 그때 강렬하게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심소 선생은 평생 어린이셨다. 품성도 용모도 마치 동화 속의 선동仙童처럼 천진무구한 동심의 어린이셨다. 기예와 명성이 한 시대를 풍미했어도, 여느 소인들처럼 쓸데없는 허세나 거드름은 아예 발붙일 틈새가 없었다. 천성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세속의 속박을 초탈했으니 세상 공명인들 연연할 리 만무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행적은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을 수밖에 없었고, 말년의 주름진 노안에서처럼 항상 자애로운 미소와 화평한 용색이 평생 떠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한때 우리는 심소 선생이 계셔서 따뜻했었다. 행복했었다. 5주기를 맞아 후학들이 선생을 더욱 그리워하는 속정도 이와 멀지 않은 연유에서일게다. 세상살이 살맛나게 해 주시던 심소 선생의 인자한 용안을 떠올리며, 선생의 방일영국악상 수상을 축하했던 졸작 시구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음미하며 추모의 절절함을 공유해 본다. 늦가을 황톳빛 낙엽따라 툇마루 봉당에 내린 햇살보다 따스하다 그 표정 향교 마을 기와지붕 끝 창공에 헤엄치는 물고기 풍경보다 청징淸澄하다 그 심성 은진미륵불의 귓밥보다도 석굴암 보살님의 눈빛보다도 인자하구나 다정하구나, 그 웃음이 (중략) 방일영국악대상 동짓달 열여드레 심소心韶 선생 다시 한번 눈들어 웃으신다, 가락을 고르신다 춤을 추신다 구름 휘장 사이로 햇님 방실 웃으시듯 ‘내가 무슨 상을 받아, 더더구나 큰 상을’ 티없는 파안대소 함박 같은 너털웃음에 너와 내가 행복하구나 세상 살맛 솟는구나 인생살이 더도 덜도 말고 심소 선생 웃음만 같아여라 웃음만 닮아지여라.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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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5: 끈기와 집념의 화신, 박동진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네 사는 일상이 그러하듯 함께 지낼 때는 무덤덤하다가도 떠나고 나면 새삼 빈자리가 커보이고 생전의 소임이 막중했음을 절감하게 된다. 박동진 명창의 2주기를 맞는 자리가 꼭 이와 같다. 평범했던 자리도 비고 나면 허전커늘, 하물며 한 시대의 대중적 우상이었던 박 명창의 위치였고 보면, 오늘 고인의 빈자리를 두고 느끼는 남은 자들의 정회는 만감이 교차하며 통절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가눌 길이 없을 것이다. 박동진 명창은 소리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인을 소리 외의 측면에서 더 높이 평가한다. 바로 그의 정신세계다. 소성에 도취되어 부화뇌동하는 얼빠진 대가들이 득실대는 세태 속에서, 그는 올곧고 강인한 예인 정신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군계일학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한결같이, 그처럼 집요하게, 그처럼 근면하게 평생을 소리 공부에 독공을 쏟은 명창은 아마도 판소리사에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년의 국립국악원 시절, 팔십 대 고령에도 고인은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골방에서 소리 연습에 골몰했다. 늦은 출근에도 지각을 하는 단원이 있는 풍토 속에서도 고인은 아침 7시면 출두하여 연습하고 다시 귀가했다가 출근하곤 했다. 어느 핸가 고인은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다. 예정된 지방공연을 극구 만류했지만, 박 명창은 굳이 링거를 맞아가며 합류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명인 명창들, 과연 이 같은 투철한 예인정신과 책임의식을 갖춘 이들이 많을까? 아니 있을까 없을까? 아무튼 고인은 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우리를 감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익살과 풍류적 여유로움으로 각박한 세상살이에 살맛을 불어넣었다. 어디 그뿐이랴. 더 크게는 투철한 예인정신은 후학의 사표가 되었고, 근검한 생활신조는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속물들에게 따끔한 죽비가 되었다. 음악으로, 예술가 정신으로, 검박儉朴한 삶으로 한 시대의 귀감이 되었던 박동진 명창의 오늘의 빈자리에는 그래서 큰 별을 잃은 상실감과 함께, 그분에 대한 사모와 존경의 정념情念들이 밀물처럼 고여들고 있는 것이리라. 한 시대를 풍미한 구수하고 소탈한 예인 짧은 지면으로 박동진의 음악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의 음악 세계는 넓고 깊다. 특히 그의 판소리 음악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수음악적인 측면 말고도 그의 입지전적인 인생 역정을 이해해야 하고, 철두철미한 삶의 소신과 의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처했던 20세기 후반의 한국적 시대상을 감안해야겠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명창이기에 그에 관해서는 할 얘기도 많고, 각자 기준에 따라서 강조되는 내용도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창 박동진 하면 우선 이런 이미지가 머리를 스쳐간다. 그는 누가 뭐래도 판소리계의 스타라는 점이다. 여기 스타라는 말은 소리 기량도 군계일학으로 뛰어남을 뜻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타적인 끼가 있음도 함축된 말이다. 박동진은 소리도 잘한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그는 청중을 매료시키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스타적인 기지와 해학과 완숙미 없이는 불가능한 그만의 장기다. 사실 박동진의 판소리음악에서 스타적인 매력이 배제되었다면 모르긴 해도 한국의 판소리음악은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판소리는 구성진 소리 위주의 고답적인 무대로 치달으며, 판소리 본연의 종합적인 예술성은 상당히 퇴색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판소리의 구수한 재미는 되살릴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삼스레 그의 판소리 무대가 고맙게만 여겨진다. 지리멸렬하던 판소리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생기를 되찾게 해 준 이가 곧 그이기 때문이다. 기실 박동진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판소리가 이처럼 괄목할 만큼 대중들의 아낌을 받을 수가 없었음에 분명하다. 전통예술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교양인인 양 처세하던 시절에 전통예술의 진미를 번뜻번뜻 일깨워 주던 이가 곧 박동진 명창이다. 소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입담과 재담으로 끌어들이고, 공연을 접해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불원천리 마다않고 찾아다니며 소리로 익살로 뚝심으로 판소리의 진수를 터득시켜 왔다. 이처럼 쇠잔해 가는 판소리를 회생시킨 주역이 곧 박동진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20세기 후반의 우뚝 솟은 스타요, 명창이요, 한국 음악사의 공훈자다. 한편 그에게는 명창 이전의 인간 박동진으로서의 숙연함을 느낀다. 예술을 향한 그의 불굴의 집념과 초인적 정진 때문이다. 그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뛰어난 노력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성에 자족하며 대성에 이르지 못하는 철부지들이 많은 세상에 그의 진지한 삶의 자세는 많은 예술인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도 박동진 명창은 국악계의 훌륭한 사표요 선구자다. 박 명창은 마음씨 착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체취를 풍긴다. 흔히 인기와 명성을 누리는 인물들이 지니기 일쑤인 자만이나 오만 같은 흔적은 티끌만큼도 없다. 언제나 편안하고 온화하고 겸손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시대가 그토록 갈구하는 따듯한 인간미가 물씬 느껴진다. 얼마나 우리 이웃과 사회가 그로 하여금 포근해지고 정스러워지는가. 지극히 인간적인 한 예인의 정서적 감화에 우리는 고마울 뿐이다. 음악가적 예도와 인간적 감동을 겸비한 박동진 명창과 함께한 오늘의 동시대인들은 그래서 행복하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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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4: 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김소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명창 김소희가 순옥順玉이라는 아명의 길이 아니고 그의 이모가 지어 주었다는 소희素姬라는 명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숙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혜성과 같이 군림하던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에 매료될 기회가 있었다든가, 광주로 취학을 한 덕분에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쉽게 들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었다든가 하는, 긴 인생 여로에서 만남의 우연성도 손꼽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도 김소희는 날 때부터 명창으로 대성할 남다른 소질을 타고난 게 사실인 것 같으니, 이는 곧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정 김소희는 1917년 12월 1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풍류스런 분위기를 흠뻑 마시며 자라난 셈이다. 전라도 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예향인데다 고창 지방은 특히 명창의 고을이랄 만큼 수다한 소리꾼을 배출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라도 우선 이 나라 여류 명창 중에서 내로라하던 인물인 채선彩仙, 허금파許錦波, 김여란金如蘭 등이 모두 이 고을의 정기를 타고난 낯익은 이름들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학에 조예가 깊어 판소리 음악의 사설을 정립하고 스스로 많은 단가를 지어낸 판소리계의 은인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 역시 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낸 분이 아니던가. 게다가 만정 김소희의 부친은 단소였든가 피리였든가를 잘 불며 꽤나 풍류를 즐기던 분이었다고 한다. 김소희의 어린 감정은 자연히 이 같은 풍류스런 색깔로 물들어가게 마련이었고, 바로 이 같은 감성의 색깔은 그녀의 타고난 재분才分을 한결 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 타고난 재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김소희는 확실히 남다른 예술적 재질을 타고났음이 분명한데, 이 같은 심증은 그녀의 몇몇 삽화적인 이력을 일별해 보더라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거문고에 달통한 사람은 세사世事에도 달통할 수 있다는 말처럼, 하나의 예능에 능통하면 자연히 그 방계의 예능에 수완을 보이는 수가 많다. 김소희의 경우에도 그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국악을 아는 사람은 이해하는 얘기지만, 판소리를 익히면서 정악 거문고를 배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형세가 아니었는데도 김소희는 소리 외에 거문고도 익혔다. 그의 판소리 음악에 깊이 있는 품도를 싣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에게는 고전무용을 전수받아 수준급의 정통성을 보여 주고도 있다. 특히 그가 서화에도 능해서 붓글씨로는 국전에 세 번이나 입선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일이다. 또한 이와 같은 예능적 특기 외에도 김소희는 문학에 꽤나 미련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언젠가 만정과의 대담에서도 미당未堂 서정주 씨의 시를 즐겨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는 아주 광이었고, 어떤 때는 앉은 자리에서 세 번까지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소리로 입신해서 이것저것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도 늘 공부 타령을 하니까, 한번은 어떤 선배 어른이 통신 강의록을 보라고 해서 그 강의록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글공부에 대한 김소희의 집념도 대단한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소리보다는 뭣 좀 써 보는 글공부를 택하겠다고도 했다. 이 같은 만정 김소희고 보면 확실히 그에게는 음악적 재분 외에 문학적 기질도 많았던 것 같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만정은 타고난 재질에다 열성과 집념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흥덕리 구석의 단발머리 순옥이가 당대의 여류 명창 김소희로 대성할 수 있었던 숨은 내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흔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예인의 길이란 노력에 앞서 천부적 재능도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양자를 겸비한 김소희도 이 사실은 강조한다. 숱한 제자들을 가르쳐 봤지만 소질이 없으면 영 늘지를 않고 또 소질 있는 아이치고 열심히 하는 놈 드물다고 한다. 이래저래 특출난 예술가란 백에 하나 나기도 어렵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김소희 예술의 비결은 노력과 소질이 함께 조화를 이룬 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영롱한 불빛 속에도 슬픈 전설이 서려 있듯이 뭇사람이 환호하는 예인의 길이라고 해서 한결같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더욱이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와야 했던 명창의 길에 있어서랴. 만정 김소희는 그 숱한 공연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장면들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64년 동경 올림픽 때였는데 나는 그곳 교포들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잖겠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폐부를 찌르는 소리를 듣는다며 이화중선 이후 처음으로 긴소리다운 긴소리를 들어본다고 그럽디다. 그때 그 일이 감명 깊었던 것은 뭐 우쭐한 칭찬을 들어서가 아니라, 과연 한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속속들이 감격시킬 수 있을까 하는 노래의 고마움에서였지요. 소리하는 보람을 새삼 느낄 것 같더군요. 물론 무대 공연을 치르다 보면 별의별 감격도 많았습니다. 창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누비던 때의 일, 62년 파리 공연 이래 구주와 미주 순회 공연 등. 그런데 참 이상합디다. 우리나라에선 괄시받던 판소리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니까 그렇게 인기가 있습디다. 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할 때 도중에 기립박수까지 받고는 얼마나 어리둥절했는지 몰라요.” 이런 얘기들만 듣다 보면 명창의 길이란 화려한 동경의 대상일 것만 같으나 역시 영고榮枯가 반반임은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에 만정은 10여 년 넘게 전국을 누비며 창극을 하다 보니 어찌나 소리하기가 지겹던지 북만 봐도 소름이 끼치더라고 했고, 그밖의 갖가지 설움과 역겨운 사연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책이 돼도 몇 권은 된다고 했다. 한편 김소희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듬어 보면 한마디로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의 예인藝人이다. 그녀 스스로 "성격이 차지요. 내성적이구.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성격이 변하데요”라고 실토할 만큼 그녀의 성격은 깔끔한 데가 있다. 그녀의 외모 역시 본인의 평대로 차분하고 단정하며 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상이다. 본인은 극구 못생겼다고 하지만 결코 미운 얼굴은 아니다. 곱다는 말보다는 인상적이라는 말이 걸맞으며, 무언가 이성 간에 느낌직한 매력이 연상되기도 하는 독특한 분위기도 풍긴다. 바로 이와 같은 김소희의 인상이 그대로 소리로 연결되어, 그토록 우리를 사로잡고 마는 그의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 속에는 그녀의 개성과 숱한 감성의 경륜이 배어난다. 옹골차고도 세련된 그의 성음 하나하나에는 눈꼴신 것을 못 참는 만정의 꼿꼿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고 찰떡같이 끈끈한 서정으로 청중의 혼을 사로잡고 마는 그녀의 윤기 있는 소리결 속에는 굴곡 있는 인생 역정과 기구한 역사적 시대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이 분명타고 하겠다. 옥색 모시 치마저고리와 옥비녀에 붉은 댕기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단장으로 차분히 무대에 나와 그가 좋아하는 ‘범파중류’나 ‘옥중가’를 부를 때의 그 기막힌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라. 그러면 이내 우리는 그 이지적이면서도 촉촉한 감성이 봇물처럼 흐르는 그의 예술세계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확실히 김소희는 뛰어난 명창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개성이 그렇고 그녀의 음색이 그러하며 호소력 있는 악상의 표출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그녀의 소리 앞에서는 누구나 단번에 하나가 된다. 시름을 잊고 걱정을 잊고 현실을 잊으며, 망아忘我의 세계, 피안彼岸의 세계, 몽환夢幻의 세계로 몰입되어 너와 내가 금세 하나가 된다. 모두가 하나 되어 마음껏 예술의 법열경法悅境을 유영遊泳하다가 문득 우리는 현실로 되돌아와서, 다시금 김소희 소리의 위대함을 확신하게 된다. 풍부한 감성과 음악성이 본질적으로 우수적인 성색과 어우러지며, 천변만화의 예술미는 물론 우리 시대의 서민적 애환을 대변해 온 만정 김소희는 분명 ‘일세기에 한 번쯤 나옴직한 명창’이자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가슴속에 심어 둘 동시대의 보배이자 판소리 음악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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