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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김황원의 미완성 시> 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8

특집부
기사입력 2013.04.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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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황원의 미완성 시 12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고려 예종 때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 한림학사(翰林學士)등을 지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청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 · 국자제주(國子祭酒) · 한림학사 ·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했다. 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남의 모함도 많이 받았다. 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일화 한 편이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경치가 좋은 누각에 가면 그곳 산천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이 누각 안쪽에 판각을 해서 많이 걸려 있다. 고려시대 평양 부벽루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랐다. 

     

    그런데 김황원이 보기에 그 시들은 하나같이 졸작이었다. 김황원은 그 시들을 모두 떼어 불태워 버렸다. 내심 그 시들보다 훨씬 뛰어난 후세에 길이 남을 시 한편을 써서 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김황원은 시상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경치를 보다가 드디어 시 두 구절을 얻었다.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들 동쪽에는 한점한점 산이로다(大野東頭點鮎山) 하지만 그 뒤를 지을 수가 없었다. 

     

    7언 절구란 뒤에 두 구가 있어야 완성되는데, 아무리해도 뒤의 두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황원이 해가 지고서야 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시재(詩才)의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부벽루를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은 통곡을 하고 내려왔지만, 이 시 두 구절로도 썩 훌륭하여 후대 사람들이 널리 기억하였다. 국악가사에도 이 시 구절이 가끔 등장한다. 다음의 ‘사설 지름’이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오 장송(長松)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에 석양(夕陽)은 비꼈는데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에 일엽어정(一葉漁艇) 흘리저어 대취(大醉)코 재기수파(載妓隨波)하야 금수능라(錦繡綾羅)로 임거래(任去來)를 "갈매기 훨훨 대동강 위를 날고, 낙낙장송은 청류벽 위에 푸르도다. 넓은 들판 점점 산은 석양에 비끼고, 긴 성벽 한편 흐르는 물에 배 한 척 띄워, 크게 취해 기생을 실은 채로 물결 따라 흘러가니 금수산 능라도로 흘러 들어가네”라는 의미다. 김황원의 시구를 인용했지만, 김황원의 시구에 비하면 훨씬 졸작이며 천박하기까지 하다.   

     

    놀량사거리의 ‘사거리’에도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백구(白鷗)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하고 장송(長松)은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아하아 *장성일면(長城一面)은 용용수(溶溶水)요 대야동두(大野東頭)는 점점산(點點山)이라 즉, 김황원이 처음 시를 지었고, 그 다음 누군가가 이를 인용하여 사설 시조를 지었고, 이 시조를 다시 ‘놀량사거리’가 차용한 것이다. 7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도 김황원의 시는 민중들의 노래 속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이는 훌륭한 예술의 이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완의 세계에 대한 후대인들의 아쉬움이기도 할 것이다.   -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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