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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를 백자로 상상해 보면
이규진(편고재 주인)
송원이라는 사람이 어드메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몇 장의 소품들을 바라보노라면 맑고 조촐한 필의 속에 속기랄 것이 사뭇 스며있지 않은 것이 좋다. 흔히 세상에 이름 높은 화가의 속기 넘치는 그림에서 받는 역겨움에 비하면 욕심도 거드름도 정말 없는 간결하고 담담한 맛이 소리도 없이 화폭 속에 넘치는구나. 임자 우수절 오수당 주인.
오수당은 전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관장의 당호다. 송원이라는 사람의 그림 소품 몇 장을 보고 느낌을 붓글씨로 남긴 것이다. 그런데 그림은 몇 장이고 최관장의 글씨는 한 장뿐이니 이를 어쩌랴. 그래 소장가는 최관장의 글씨를 복사해 여러 장을 만든 후 그림 한 장씩에 곁들여 표구를 했다. 근래 이 것 중 한 점을 구했다. 고미술품에 대한 최관장의 글을 몹시 좋아하는 나는 평소 이 분의 글씨를 한 점 갖고 싶었는데 복사이기는 하지만 소원을 이룬 것이다.
'죽편'으로 널리 알려진 서정춘 시인은 젊은 후배 시인들이 기념시집을 낼 정도로 시단에서는 듬직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다. 이 서시인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저녁을 먹고는 한다. 지난 번 뵈었을 때 분청인화문접시편 한 점을 드렸더니 그 위에 찻잔을 올려놓고 그림을 그려 보내왔다. 서시인은 물론 화가도 아니고 그림 공부를 해본 적도 없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은 그림 냄새가 나지 않는다. 최순우 관장의 표현대로라면 속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담담함이 묻어나는 소박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관장의 글과 서시인의 그림을 보며 도자기에 표현된 문양 중 속기가 없다고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백자에 청화로 그려진 추초문이다. 18세기 전반 금사리 시기 하얀 바탕에 푸른색의 청화를 아껴 쓴 듯 간결하게 그려진 추초문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적인 조선의 도자기인 동시에 이름 또한 그들이 붙인 것이다. 여하튼 추초문, 즉 가을풀이라고 하면 그 것이 연상되는 의미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감미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추초문은 통칭이지 개별적인 명칭이 아니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서는 한국 도자기들을 품목별로 기획전시를 하고 도록을 펴낸 것이 20여 권이 넘는다. 그 중 13권째로 나온 것이 <이조의 추초>다. 추초문을 모아놓은 도록이다. 하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추초문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백자초화문 호나 병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이로 보아도 추초문은 18세기 전반 금사리 시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에 초화문이 들어간 것을 통칭하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추초문은 조선조 청화백자에서 보이는 초화문이다. 그런데 이런 추초문, 아니 초화문이 고려청자에서 보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러나 청자흑상감초화문병편을 보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푸른색 청자 바탕에 흑상감으로 상감 자체를 아낀 듯 갈대 같기도 한 몇 줄의 가는 선이 조촐하게 새겨져 있다. 푸른 바탕을 흰색으로 바꾸고 흑상감을 청화로 바꾸어 청자를 백자로 상상해 보면 영낙 없는 추초문이자 초화문인 것이다.
최순우 관장과 서정춘 시인의 속기와 관련된 글과 그림, 그리고 청자흑상감초화문병편 속 문양의 속기 없는 무심함을 보고 있노라면 가을 들꽃을 흔들고 가는 가녀린 바람이 내 마음마저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이제 그만 욕심도 탐욕도 내려놓고 무심하게 살라고 가만 가만이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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