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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그림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내 고등학교 시절은 꿈도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였다. 가정 형편을 고려해 일찍 진학을 포기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포기한 학생이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암울한 시절에 그래도 내게 위안을 주었던 것이 있었다면 다방면에 걸친 책 읽는 습관뿐이었다. 하지만 책 사볼 돈 또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신간서점 주인의 양해를 구한 후 책을 빌려다 보았다. 빌려 온 책은 표지를 싸서 곱게 본 후 돌려주어야 했다. 이 때의 습관으로 인해 나는 지금도 내 책에 낙서나 메모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때 익힌 속독의 기술 덕분에 지금도 남보다 조금은 책을 빨리 볼 수 있는 편이다. 고3 때 KBS 라디오 게임에 문학 부문 학교 대표로 나가 볼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당시의 독서 덕분이었다.
하지만 새 책을 취급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읍내의 작은 책방에 입수되는 책들은 한계가 있어서 내 독서욕을 채우기에는 미흡했다. 따라서 오죽하면 당시 유일한 여성지였던 '여원'잡지까지 매월 구독을 하고는 했었다. 여성지라고는 하지만 교과서 크기의 여원은 당시만 해도 꽤 괜찮은 인문학적 내용들이 실리고는 했었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이 매월 화보에 그림 한 점 씩을 소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본 것도 이 책에서였다. 잎 떨군 앙상한 고목나무 밑에 아이를 등에 업은 아주머니가 서 있고 그 앞을 지나가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 등 전형적인 박수근 스타일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일반적인 그림들에서 볼 수 없었던 마티엘 때문이었다. 물감을 여러 번 덧발라 화강암 같은 마티엘을 나타내는 것이 박수근 그림의 장점인데 이 그림에서도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목과 애기를 업은 아주머니와 광주리를 이고 지나가는 여인을 그린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내게는 흡사 점을 찍어 만든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박수근이 점묘법 화가는 아니다. 그러나 덧칠을 하고 덧칠을 하는 그 기법은 점묘법과 상통하는 점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수근의 그림은 그린다는 느낌보다는 덧칠을 하다 보니 찍는다는 느낌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이대원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서양화에서는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점묘법이라는 것이 있다. 10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신인상파 화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조루주 쇠라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박수근이나 이대원이 이 점묘법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물감을 덧칠하는 그 기법은 점묘법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되지 않는다.
'청자흑백상감주병편'은 기록을 보니 1919년에 답십리에서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입술 일부가 달아나고 밑부분이 뭉텅 잘려나가 상반신만 남은 불구의 병편이다. 주구는 약간 밖으로 말린 듯 마무리를 하고 있으며 목은 상당히 긴 편이다. 유약은 담녹색에 작은 빙렬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 병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감의 문양이다. 그린 듯 문양을 파내고 상감을 한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 무언가 뾰죽한 것으로 점을 찍듯 파낸 후 흑백으로 상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양은 확실치 않지만 고려청자에서 많이 보이는 국화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문양만을 놓고 보면 퇴화기법 같기도 하지만 깨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감을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분해하고 분해하면 결국은 원자로 귀결된다. 그처럼 그림의 3대기본인 점선면 또한 따지고 보면 결국은 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이 청자흑백상감병편을 만든 도공은 그런 사물의 원리를 체득하고 실험적으로 상감에 적용해 본 것일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도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내게 신기하게 느껴졌던 박수근의 그림처럼 특이한 문양의 청자흑백상감병편 또한 오늘의 내게는 어쩔 수 없이 너무도 흥미롭게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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